소설리스트

다윗의 탑-15화 (15/18)

솔로 - 오로지 당신만 5

벤은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조금 전 꾼 악몽이 생생하다. 그는 뼛속까지 시린 얼음물 속에 빠져 허우적댔다. 강 건너 저편에서 누군가 조각난 얼음 위로 기고, 차가운 얼음물 속을 헤엄치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지 마! 안 돼! 당신도 위험해져! 벤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입이 얼어붙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벤, 벤! 조금만 힘내! 상대는 벤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벤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결국 상대는 벤에게 다가오지 못한 채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벤은 자신을 구하러 오던 이가 얼음조각을 잡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손끝이 필사적으로 얼음을 쥐고 있다가, 얼음물 속으로 영영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마크였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벤은 한참 동안 한기를 느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추웠다. 벤은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돌렸다. 벤의 바로 옆에 마크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의 평온한 얼굴에 벤은 좀 전 불쾌했던 감정을 잊어버렸다. 마크의 몸은 좀 전의 정사로 따뜻했다. 마크의 몸과 닿은 순간 거짓말처럼 한기가 물러났다.

벤은 자신이 악몽을 꾼 이유를 짐작했다. 마크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불현듯 그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벤이 마크의 곁에 계속 있었더라면, 적어도 그리 쉽게 그가 저세상으로 가버리진 않았을 거란 후회가 밀려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벤은 턱을 괴고 누워 잠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마크이면서 마크와 달랐다. 예측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사랑스럽고 벤에게 기쁨과 애처로움, 책임감과 죄책감을 함께 느끼게 했다. 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잠든 이의 뺨과 콧날, 입술을 마음껏 만질 수 있는 건 가장 깊은 속까지 나눈 친밀감 덕분이다. 자신에게 매달려왔던 마크의 모습을 생각하자 벤은 가슴이 뿌듯했다.

마크의 몸을 닦고 시트를 정리한 뒤 벤은 푸르스름하게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봤다. 둥근 달은 만월을 넘긴 뒤 살짝 짜부라져 있었다. 언제 보름이 지났던 걸까. 벤은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느꼈다. 기이한 시간의 흐름에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벤은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벤은 호숫가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전화벨 소리는 벤의 재킷 안에서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다. 벤은 재킷 안을 봤다. 제 휴대폰이 거기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벤?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라이언이 대뜸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벤, 벤?!」

“듣고 있어. 잠깐, 놀라서 말을 멈췄던 것뿐이야.”

「대체 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설마 아직도 그 유령과 같이 있는 건 아니지?」

“…….”

「미쳤구나. 출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벤, 너 그곳에 있는 동안 어머니께 안부 전화는 제대로 했어?」

라이언의 말에 벤은 할 말을 잃었다. 일은 그렇다 치고라도 그동안 어머니께 연락 한 번 안 한 건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자신은 그동안 무슨 정신으로 여기 멍하니 있었던 걸까. 벤은 죄책감에 이마를 문질렀다.

“……까맣게 잊고 있었어.”

「미친놈. 세상과 연을 끊기라도 할 셈이야? 벤, 정신 차려. 넌 뭐에 단단히 홀렸어! 당장 그곳에서 나와!」

라이언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벤은 혀를 찼다. 자신이 정신이 나간 건 분명했다. 자석에 쇳가루가 속절없이 끌려가듯 마크의 주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벤은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라이언의 말이 벤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라이언의 말대로 이대로 이곳에 있다간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의자에 걸린 셔츠를 집어들다 벤은 침대에 미동 없이 잠들어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 아래 평화롭게 잠든 얼굴이 소년의 것처럼 보였다.

「벤?」

“……안 돼. 아직은 돌아갈 수 없어.”

「무슨 헛소리야?」

“라이언, 지금은 이곳에 있어야 해. 내가 꼭 풀어야 할 문제가 있어.”

벤은 부정을 허용하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전화기 저편에서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라이언이 화난 기색을 지우고, 다소 불안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벤, 너…… 괜찮은 거지?」

“난 멀쩡해.”

「못 믿겠다. 혹시 주변에 ‘그게’ 있거든, 일단 그 방만이라도 나와.」

라이언은 유령과 초능력의 존재를 맹신하는 사람이었다. 벤은 라이언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벤은 아직 그가 벤자민이란 사실을 마크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라이언의 커다란 목소리를 혹여 마크가 들을까 걱정됐다. 통화를 위해 벤은 옷을 챙겨 입고 방 밖으로 나왔다. 밤이 깊어 내리기 시작한 눈이 소리 없이 검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날아온 눈발 한 점이 눈썹에 붙었다.

“라이언, 난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멀쩡해. 누군가에서 홀려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러고 있는 건데.」

“그동안 내가 무책임하게 잊고 있었던 일이 있어. 매우 심각한 일, 내가 도저히 넘겨버려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런 일에 넋 빠져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넌 왜 내가 하란 대로 안 하는 거야? 그 심각한 일이란 게 대체 뭔데?」

“…….”

벤은 헛숨을 들이쉬었다. 원래부터 모호한 관계였던 마크와 이젠 빼도 박도 못할 만큼 끈적끈적한 관계가 되었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벤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찬바람을 맞으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보니, 자신도 참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 싶었다. 생전 벤을 좋아하는 티를 그토록 냈던 마크의 감정에는 일절 관심도 주지 않았다가, 이제 와 뒷북이라도 치듯 감정에 흔들려 휩쓸리고 있었다. 좀 더 일찍 벤의 등 뒤에 박혀 있던 마크의 시선을 알아차렸더라면 뒤늦게 촌극을 연출하고 있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터닝 포인트를 지났다. 벤은 마크에게 감정이 생겼고, 그 감정을 무시하고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설령 마크가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말하기 곤란해.”

「해결은 되는 거냐?」

“글쎄, 안 될 가능성이 크지.”

「멍청아, 무슨 말이 그래? 일단은 어머니께 연락부터 해. 거길 나와서, 네 할 일을 먼저 하고 그 심각한 일을 해결하든 말든 해.」

“그게 좀 어려워.”

마크는 벤을 맨발로 쫓아왔었다. 만일 그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였다면 마크는 벤을 말리지 않고, 함께 지하철을 탔을 것이다. 마크는 ‘이곳’에 속한 존재였다. 게다가 벤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마크 외에 하나가 더 있다.

“라이언, 웃지 말고 들어. 대학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후문 담엔 안 보이는 힘이 작용해서 마크의 허락 없인 못 넘어. 게다가 정문엔 괴물이 있어.”

웃지 말라고 미리 얘기한 게 다행이다. 라이언은 낄낄거림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형에게 벤은 한 번 더 분명히 말했다.

“진짜야.”

「좋아, 괴물이 있다고 쳐. 벤, 너야 모르겠지만, 이 세상엔 그런 일들이 의의로 숱하게 일어나곤 하니까.」

무슨 영문인지 라이언은 벤의 말을 쉽게 받아들여 주었다.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라이언은 별다른 반박 없이 화제를 이어나갔다.

「그렇다고 해도 거기 처박혀 있는 건 말이 안 돼. 그 대학을 일이 년 다녔냐? 너만 알고 있는 입구가 있을 것 아니야.」

“?”

듣고 보니 그 말이 옳다. 대학부지는 구석에 헬리콥터 비상 착륙장까지 있을 만큼 넓었다. 이런 곳에 간이 출입구가 없을 리가 없었다. 벤은 인문학 특강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몰래 숨어들었던 개구멍을 생각해냈다.

벤은 기억을 더듬어 그곳으로 가보았다. 관목 숲 옆,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작은 출입구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라이언, 십 년 전 썼던 개구멍이 그대로 있는데.”

「다행이군. 대학 바깥으로 나와 다시 연락해. 일단 내가 근처로 널 데리러 갈게. 어머니가 얼마나 네 걱정을…….」

라이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누군가 벤의 전화기를 빼앗아 탁 소리가 나게끔 플립을 닫았다.

“제임스?”

“밤일세. 통화가 너무 시끄럽군.”

벤은 얼굴을 찡그렸다. 백색 노이즈,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온 세상의 잡음을 다 먹어치웠다. 고요한 밤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시끄러울 법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의 급한 통화를 끊어버릴 것까진 없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제임스를 벤은 불편한 심사로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텀블러와 개 줄을 든 채다. 개도 없이 개 줄만 갖고 한밤중 산책을 하는 남자의 모습이 묘했다.

“돌려주세요. 중요한 통화 중이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오래 못 쓸 것 같군. 이거 배터리가 다 된 것 같은데.”

벤은 빼앗다시피 전화기를 돌려받았다. 제임스는 전자파를 감지하는 초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그의 말대로 전화기는 배터리가 다 돼 이미 끊겨 있었다. 벤은 왼쪽 눈썹을 꺾고 제임스를 쳐다봤다. 기분이 나빴다. 제임스가 무슨 짓을 한 것 같이 느껴졌다. 벤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교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교수는 비밀스러운 웃음만을 지을 뿐이다.

“어딜 가나?”

“집이요. 시간이 늦었어요.”

“그렇군. 지난번 옥상에서의 일은 어찌 됐나. 마크가 정말로 거기 있던가?”

“아뇨, 그건 그냥 흰 종이더군요.”

“그랬나? 난 자네가 내게 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줄 알았네. 자넨 늙은이의 호기심을 풀어줄 주변머리는 없나 보군.”

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크의 사택을 찾아갔던 건 제임스가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벤이 그 뒤의 상황을 제임스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었다.

“편리한 성격이야. 하기야 자네는 원래 그랬지. 늙은이의 호의를 이용할 줄만 알았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호의를 베푸는지 가늠할 줄은 모르더군. 그리 살면 편하긴 할 테지. 자네가 드로잉을 못 찾은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

가시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제임스가 들고 있던 텀블러를 기울여 따뜻한 차를 마셨다. 모락모락, 찬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김을 바라보다 벤은 헛웃음을 지었다. 늘 흐리멍덩하던 은사가 갑자기 적의를 드러내는 게 당혹스러웠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던 걸까.

“마크가 생전에 무슨 말을 하던가요?”

“전혀. 그는 의외로 입이 무거운 남자라네.”

“그럼 지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말을 던져보는 건가요? 내가 어떻게 반응하나 보려고?”

“그럴지도 모르지. 난 궁금하다네. 벤, 노인의 호기심에 참을성을 접목하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우린 금방 사라져버릴 존재들이야. 살아생전에 얻지 못했던 답을 찾으려고 다소 거친 물음을 던진다면, 그걸 그렇게 정색하고 비판할 건가?”

“뭐가 궁금한데요.”

벤은 되물었다. 제임스가 사람 좋은 아저씨처럼 해맑게 웃었다. 연극배우처럼 표정이 격변했다. 날 선 잿빛 눈동자의 냉정한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벤의 눈앞에는 이마가 벗어진 순한 인상의 교수가 한 사람 서 있었다.

“자네가 자각이 있는지 궁금하네. 자넨 친절을 도둑질했어. 알고 있나?”

“제임스,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자넨 틈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전적으로 반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마크가 자네의 등록금을 꽤 대줬다고 하더군.”

“전부 갚았어요.”

“그가 자넬 위해 옷을 샀다고도 하던걸.”

“동생의 옷인 줄 알고 빌린 겁니다.”

“그 옷은 지금 어디에 있나?”

벤은 마땅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벤이 호의를 부담스러워할 때면 마크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넨 특별한 제자야.’ 과연 마크가 방점을 ‘제자’란 단어에 찍었는지, 다른 쪽에 찍었는지 벤은 알 수 없다.

“알다시피, 마크는 가르치는 일을 원래 썩 좋아하지 않았지. 그가 말하더군. 교사란 얼치기 배우와 같다고.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형편없는 극본을 틀어쥔 채, 가장 수동적인 관객을 두고 모노드라마를 찍어야 하는 신세라고. 침묵하던 관중이 어느 날부터 그를 비웃기 시작했다더군. 마크는 상황 장악력이 꽤 뛰어난 편이고, 누군가의 말에 쉽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지. 하지만 화장실에서 함께 소변을 보던 학생의 비아냥거림에는 어지간한 그도 말 한마디 받아치지 못했다더군. 바짓단에 소변을 묻힐 나이에 용케 자네랑 그 짓을 한다고 했다던가.”

푸드덕,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박차고 올랐다. 벤은 꿀꺽 침을 삼켰다. 얼굴이 뜨거웠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민망하고 난처하다. 입안에 꿀을 한 단지 부은 것처럼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제임스는 너무 많이 알았다. 마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데, 어떻게 세세한 사연들을 알고 있을까. 말 속에 모순이 있었다. 벤은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걸까. 음식을 먹던 유령의 모습부터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힐난하는 제임스까지……. 벤의 머릿속에 꽤 그럴듯한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마크는 살아 있는 겁니까. 마크가 당신에게 부탁한 건가요? 일부러 날 불러와 한 판 쇼를 해달라고요.”

“벤, 잊었나? 날 먼저 찾은 건 자네야.”

그 말이 옳다. 자료를 찾으러 대학을 찾아온 건 벤이었다. 제임스가 아무리 재주가 좋기로서니 마크를 꼭 빼닮은 청년을 찾아 벤을 유혹하게 할 리 없다. 벤은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크는 이미 오래전 죽었고, 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한 적이 없었다. 한 사람의 호의를 매정하게 끊어냈던 그가 감정을 이용해 친절을 도둑질했단 비난을 받아도 별반 변명할 수 없다.

제임스가 벤의 눈앞에서 사진 한 장을 얄밉게 흔들어댔다.

“마크는 자신이 깔끔하게 뒷정리를 했다고 믿지만, 알다시피 그가 손속이 야무진 남자는 아니지. 감추고 본인도 잊어버린 사진을 내가 챙겨뒀지.”

풍경 사진도, 그렇다고 인물 사진도 아닌 애매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 마크는 잇몸을 드러내고 웃으며 자가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우디가 지은 맨션인 카사밀라를 배경으로 찍으려다 길 가장자리에 물러나 있던 벤자민까지도 함께 찍었다. 벤자민은 자신이 찍히는 것도 모르고 물끄러미 마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은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 시절, 그는 마크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 제임스의 눈빛은 과연 그것을 확신하는지 묻고 있었다. 한참 철 지나버린 과거의 감정을, 그것도 모호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분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벤은 빨개진 얼굴로 제임스에게서 사진을 빼앗았다.

“지갑에 끼워 넣기라도 할 셈인가?”

마크와 벤은 연인 사이가 아니다. 벤은 제임스를 노려보았다. 제임스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설마 자신이 방금까지 마크와 뒹굴다 온 것도 알고 있는 걸까. 벤은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죽은 사람 사진을 왜요.”

제임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벤을 쳐다봤다.

“꽤 많은 사람이 죽은 사람의 사진을 지갑에 넣어 다닌다네. 물론 자넨 아니지. 그래, 자네가 옳을지도 몰라. 죽은 이는 가급적 빨리 잊어주는 게 좋지. 그들을 추억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깡그리 잊고 나만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거야.”

“…….”

“하지만 말이야.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일 년에 단 한 번, 누군가를 기억하는 게 그토록 번거롭고 힘에 벅찬 일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추억은 공짜야. 고인을 회상하며 잠시 눈시울을 적시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 죽은 이가 누구냐가 중요했다. 벤은 혀를 찼다. 제임스는 벤이 모호한 태도로 마크의 감정을 이용했단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앞으로는 마크를 기억할 테고, 그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겠단 말을 뱉어봐야 오해만 커질 뿐이다.

벤은 어린 시절, 죽음에 관한 충고를 들어본 적이 있다. 죽은 이만 불쌍할 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망각은 축복이며, 산 사람은 죽음이 남긴 상처에 파묻혀서는 안 됐다. 슬픔을 누르고, 잊고, 살아야 한다. 누구에게 들었을까.

“더 할 말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죠. 말씀대로, 밤이 늦었어요.”

“어차피 모든 건 잊힐 거라네. 그의 목소리도, 그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 올 테지. 그러나 너무 빨리 잊지는 말게나. 단 한 장의 사진이라도 죽은 이를 위해 간직해 주게.”

벤은 못 들은 척했다. 휴대전화기를 다시 켜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벤은 미리 봐둔 출입구를 확인했다. 개구멍 앞은 나뭇가지가 막고 있지만. 양손으로 치우면 충분히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벤은 가지를 밀치고 그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바깥 저 너머 노랗고 빨간 불빛들이 보였다. 담 하나를 경계로 세계가 갈라졌다. 학생들이 모두 나가버린 뒤의 대학 안은 음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제임스가 타고 온 자동차 실내등의 불빛이 이 세상 속 유일한 빛처럼 느껴졌다.

“정문으로 가게나. 그쪽이 훨씬 빨라.”

“정문 호수에 괴물이 있어요. 익사해 얼굴이 새카매진 여자요.”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피식 웃었다. 그도 뭔가를 아는 눈치였다. 벤은 제임스가 무슨 말이든 하길 기다렸지만,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했다.

“물에 빠져 죽은 여자가 어쨌다는 건가.”

“그 여자에 관해 뭔가 아나요?”

“나보다는 마크가 더 잘 알지.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곳을 못 나가고 있다는 건가? 하긴, 자넨 물을 무서워했지. 그나저나 자넨 익사한 이의 얼굴이 새카맣다는 걸 어찌 아나. 전에 직접 본 적이 있나?”

벤은 얼굴을 굳혔다. 제임스의 말에 신경이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벤은 어렵사리 기억했다. 자신은 물속에 빠져 영영 빠져나오지 못했던 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언제였지? 무엇을 봤던가.

벤은 자신이 그에 관한 일들을 까맣게 잊은 데 놀랐다. 누군가 지워버린 것처럼 기억이 하얗다. 가슴이 요동쳤다. 벤은 자신이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너무나 고통스러워 기억을 묻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호흡을 가다듬자 단편적인 기억이 몇 장면 떠올랐다. 물, 죽음. 벤은 그에 관한 기억으로 울고 있었다. 마크가 그런 그를 발견하고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벤자민, 괜찮나?

들킨 이가 친구였다면 벤은 쓱쓱 눈물을 닦고 화를 내며 도망쳤을 것이다. 마크라서,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들어 보일 수 있었다. 노교수가 다가와 서툴게 말을 걸었다. 벤은 그에게 자신이 우는 이유를 꽤 길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마음이 진정됐을 땐 마크에게서 꽤 많은 시간을 빼앗은 뒤였다. 마크는 불편한 내색 없이 딱 한마디만을 했다.

-벤자민, 자넨 겉보기보다 눈물이 많군.

마크는 벤의 스승이자, 둥지 같은 사람이었다. 필요한 보살핌을 받고 때가 되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자신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마크에게 빚졌고, 잊어버렸다. 벤은 출입문 문턱 위에서 한참을 그저 서 있었다.

“자넨 너무 세상을 편하게 살아왔어. 그것도 일종의 죄란 것 알고 있나?”

제임스가 툭, 벤의 주머니를 두들겼다. 사진이 그 안에 있었다.

* * *

“?”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마크는 잠에서 깨어났다. 사위가 어두웠다. 달빛과 건물 밖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비쳤다. 온몸이 무거웠다. 벤과 키스하다 까무룩 잠들어버린 게 한참 만에 기억났다.

“벤?”

마크는 벤이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을 거라 여기고 기다렸다. 그러나 욕실에서는 물소리도,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마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를 살폈다. 주변이 고요했다. 아무도 없다. 침대는 깨끗했다. 온갖 타액으로 젖고, 엉망으로 구겨졌던 시트는 새것으로 갈아져 있었다. 그 위에 유령은 오도카니 앉았다.

벤이 잠깐 어디로 간 걸까. 삼십여 분 뒤 물음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벤이 이곳으로 돌아올까.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 마크는 자신이 왜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지 우스워졌다. 자신은 혼자다. 오한이 일었다. 그는 벽장 안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벤?”

혹시나 싶어 벽장 안에 대고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그 안에 있을 리가 없었다. 마크는 인상을 찌푸리고 벽장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

그는 벽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역시 이 안이 좀 더 따뜻했다.

벽장 아래쪽의 격자무늬는 통풍은 가능하나 밖에서는 안의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덕분에 안에서만 밖이 보였다. 마크는 주저앉은 채 상반신을 수그려 바깥의 풍경을 살폈다. 벤은 잠시 일이 생긴 것일까. 어쨌든 청년이 돌아온다면 마크는 벽장 안에 숨어 있으면서 청년의 모습을 잠시 훔쳐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청년을 영영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산 사람이 유령을 찾아 돌아올 이유가 뭐가 있을까.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치근덕거린 게 잘못이었나. 벤은 자신을 피해 탈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가 돌아올 확률은 낮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외롭다. 청년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원의 시간 속에서 벽장 안에 갇힌 유령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유령은 눈을 깜빡였다. 벽장 아래쪽에 세워진 테니스 라켓이 보였다. 두 개 중 한 개는 거의 쓰지 않은 새것이다. 벤자민과 함께 치려고 라켓을 샀지만 정작 게임은 몇 번 해보지도 못했다. 라켓을 보고 싶지 않아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잃어버렸던 기억 상자 중 하나를 발견해 포장을 푼다. 상자 속에서 벤자민이 튀어나와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며 환하게 웃었다.

겨울이었지만 그래도 날씨가 퍽 괜찮은 날이었다. 아직 그는 건강했고 테니스 정도는 수월히 칠 수 있었다. 저쪽 네트에선 테니스를 해본 적 없다는 벤자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팔과 다리를 이용해 마크와 거의 대등하게 경기를 해내고 있었다.

그래도 게임은 마크가 이겼다. 웃으면서 경기를 끝내고 벤자민과 함께 샤워를 했다. 칸막이가 있어 하반신 대부분이 가려졌지만 벤자민의 키가 워낙 커서 그의 각도에선 조금만 기울이면 마크의 몸을 원하는 만큼 볼 수 있었다.

건강하지도 않은 하반신이 하필 그때 움직였는지 그 이유는 분명히 꼬집을 수 없다. 격렬히 몸을 움직인 뒤 흥분이 남아 있던 몸이 벤자민의 벗은 몸에 반응했다. 열로 붉게 달아오른 청년의 앳된 얼굴 아래 단단한 어깨와 가슴이 보였다. 보려던 맘은 없었는데 절로 눈이 갔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배 쪽으로 열기가 몰리는 데 놀라 마크는 자신도 모르게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마크는 렌즈를 낀 채였다. 더운 김에 사위가 흐렸으나 벤의 표정이 차갑게 굳는 것은 놓치지 않았다. 벤자민은 감이 좋은 사내였다. 마크가 흥분한 걸 바로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운동 때문이야.’ 변명하면 그만이었다. 평소엔 잘도 움직이던 혀가 그 순간만은 굳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크는 벌게진 얼굴로 청년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눈치를 살폈다.

벤자민이 먼저 샤워장을 나갔다.

마크는 시간을 끌며 그곳에 남았다. 사정통에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그는 자위하고 물줄기 아래서 손을 씻어 버렸다. 시들어버린 성기와 이젠 희게 변한 음모를 보며 그는 자신의 마음과 욕망이 청년에게 추하고 더러운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샤워실에서의 가벼운 해프닝은 벤자민이 마크와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마크는 그 일로 현실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벤자민과 마크, 둘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다. 춥다. 마크는 벽장에서 비척거리며 걸어 나와 욕실로 갔다. 따뜻한 물을 받으면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좀 가실 것 같았다.

따뜻한 물이 벗은 몸 위로 떨어졌다. 너무 뜨거워서 피부가 따가울 정도인데도 정수리로 찬물을 들이받은 것처럼 온몸이 서늘했다. 욕실의 환기구 위로 옥상 위를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리스본의 겨울, 낡은 호텔의 창밖으로 바람이 이렇게 불었더랬다.

“마크.”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진짜 들은 건지 아닌 건지 모호했다. 마크는 수챗구멍으로 물이 빨려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서 있었다.

“마크-!”

아득, 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마크는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한 번 더 깨물렸다. “……벤!” 마크는 청년의 이름을 부르며 몽롱한 반수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침대 위에 마크를 눕힌 채 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지가 벗겨져 있었고 벤의 커다란 손은 마크의 하반신에 얽혀 있었다. 청년의 손가락이 다리 사이 젖고 뜨거운 곳에 파고든 상태를 알아채고 마크는 인상을 썼다. 꿈에 끌려가 버린 마크를 깨우는 요령을 청년은 너무 잘 알았다.

“……어, 어디 갔던 거야?”

“잠깐 이 아래 갔다 왔어요.”

이토록 짧은 시간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느냐며 벤이 타박했다. 마크는 입을 다물었다. 청년이 사라진 찰나의 시간에 자신은 쉽사리 이지를 잃었고, 과거의 기억에 갇힌 진짜 유령이 되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일이었다.

벤이 자신의 옷을 벗었다. 마크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벤은 그의 몸 안에 들어와 있었다. 벤이 결합한 부위, 벤의 거대한 몸을 받아내느라 한계까지 펼쳐진 주름 주변을 문질렀다. 마크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떨었다. 그는 수챗구멍과 떨어져 내리던 물줄기와 앙상한 손가락에 붙어 흘러내리던 정액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봐도 이상할 정도로 희네요.”

벤이 웃었다. 그의 시선은 마크의 성기와 주변의 숲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말은 음모가 희단 소리였다. 마크는 몸을 굳혔다. 테니스장의 샤워기 아래서 내려다보았던 하반신의 모습은 어땠던가. 젊음을 잃고 늘어져 버린 몸의 중심부에, 색을 다 잃어버린 거친 터럭은 백색에 가깝게 바래 있었다. 심장이 뛴다. 자신이 설마 도로 늙어버린 게 아닐까. 불안감에 심장이 죄어든다. 확인을 위해 상반신을 일으킬 찰나 벤이 그의 손목을 바로 잡아 바닥에 눌렀다.

벤의 몸무게에 앙상한 몸이 그대로 짜부라질 것 같다. 마크는 비명을 질렀다. 나이 든 사람의 쉰 목소리가 났다. 놀라 그는 손등을 살폈다. 검버섯이 핀 탄력 없이 늘어진 피부가 거기 있었다. 들뜬 손톱과 자글거리며 주름진 손은 노인의 것이 확연했다.

“!!”

자신의 몸이 변했다. 공포에 사지가 오므라들었다.

마크는 창백해진 낯으로 벤 쪽을 바라봤다. 눈물이 고이지도 않았는데, 청년의 얼굴이 뚜렷하게 잘 보였다. 청년의 날렵한 입술과 콧날, 익숙한 하관이 눈앞에 있었다. 벤은 무서울 정도로 벤자민을 닮았다. 마크는 자신의 하반신이 마치 샤워실의 그때처럼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발기는 통증을 불러왔다. 마크는 왈칵 서러움을 느꼈다. 그는 도로 젊음을 빼앗겼다.

“벤…… 내 몸이……내 몸이…….”

울먹임에 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마크의 넓게 벌린 다리 사이를 한참 응시했다. 청년의 시선이 마크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수치심에 온몸이 쓰라렸다. 벤이 웃었다.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는 미소는 결코 밝지도 상냥하지도 않았다. 마크는 희게 변한 자신의 머리칼이 청년의 손끝에서 흩어지는 걸 보았다. 꾹 눈을 감았다. 계속 눈을 뜨고 있다간 벤의 입술뿐만 아니라 청년의 눈까지 보게 될 것 같았다. 만일 그 눈이 다갈색 빛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벤이, 벤자민이 자신의 늙어버린 맨몸을 응시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탄력 없는 피부를 무성의하게 문지르는 손길에 참혹한 기분이 들었다.

마크는 얼굴을 가렸다.

* * *

“마크!”

차에 들렀다 올라온 벤은 방안이 빈 걸 보고 바로 벽장문을 열었다.

벤의 기색에 유령이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멍한 얼굴을 보고 벤은 혀를 찼다. 유령은 아니나 다를까 그새 꿈에 잡아먹혀 버렸다.

“정신 차리고 일어서요.”

마크는 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벤은 힘으로 유령을 끌어내 침대 위에 눕혔다. 마크는 얼빠진 얼굴이었다. 벤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크, 왜 그래요?”

멍한 눈으로 허공의 어딘가를 쳐다보며 마크는 좀체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벤은 꿈속 세계에 빠져든 이를 깨우기 위해 고전적인 방법을 썼다. 그는 마크에게 키스했다. 마크가 얼굴을 피했다. 몸을 물리고 침대 가장자리로 피하는 게 이상하다. 유령의 중얼거림에 벤은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내 몸이 변했어. 내가…… 늙어버렸어.”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예요? 마크, 정신 차려요. 내 눈에 당신은 아까 내가 안았던 끝내주게 섹시한 남자랑 똑같아 보여요.”

벤은 남자의 금빛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뒤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곤 가방을 꺼내 짐을 챙겼다. 마음이 급했다. 31일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와이오밍 셰리든에 가야 했다. 벤은 제임스에게 물어 날짜를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놀랍게도 1월의 태반이 지나가 있었다. 라이언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했다. 1월의 마지막 날, 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외로운 어머니를 찾아가 그 곁을 지켜왔다. 하마터면 그 일을 잊을 뻔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마크, 내가 숨겨진 출입구를 하나 찾아냈어요. 거기로 한번 빠져나가는 걸 시도해보죠.”

마크는 지박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을 준 상대를 다시 한 번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벤은 마크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는 방법을 떠올렸다.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시도는 해봐야 했다.

“당신을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이름이 제임스라던데, 호수 괴물에 대해 아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혹시 당신은 그 여자에 대해 말할 것 없어요?”

“……누구?”

“알바요.”

“……아아.”

마크가 굳은 자세 그대로 입술만 벌려 대답했다. 그러나 유령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평소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유쾌하게 살아나 나불거리던 유령답지 않다.

벤은 짐을 싸면서 그 모습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멋진 섹스를 나눴다. 그런데도 마크는 성불은커녕 마크 스스로 ‘지옥’이라 말했던 꿈속으로 너무 쉽게 빨려 들어가 버렸다. 해결하는 방법은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벤은 생각했다. 벽장이 없고, 알바라는 괴물이 없는 곳에 가야 했다.

“……알바, 그녀를 알 리가……. 나는…….”

마크가 미약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벤은 상황이 평소보다 더 나쁘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크-.”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어두운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유령이 입을 열었다.

“……이건 가짜야.”

“마크? 우리 그 얘긴 이미 충분히 한 것 같은데요.”

“벤, 난 노인이야.”

“내 눈엔-.”

“네가 보는 내 모습은 가짜야. 노인인 모습이 진짜지. 자네도 내 실체를 알면 내게 매력을 느끼지 못할걸. 내가 나이치고 멋지다고 말했던 제자도 내 벗은 몸을 보자마자 표정이 변하더군.”

멍하던 마크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즐거운 기색이라고는 없는 미소였다.

“난 햇빛 아래서 알바의 몸을 본 적이 있어. 나이 든 몸이었지. 나도 모르게 그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과했지만, 그녀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을 거야. 난 그녀가 상처받은 게 이해되지 않았네. 나이 든 이를 나이 든 사람 취급하는 게 그리 큰 잘못은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그땐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를 몰랐지. 그래서 그리도 오만했을 거야. 세월이 흘러 내가 했던 실수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더군. 벤자민이, 그가 내 몸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더군.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니 무어라 탓할 수도 없지.”

젊음은 권력이었고 마크는 잔혹할 정도로 푸르고 아름다운 청년에게 질투와 사랑을 느꼈다. 자신은 햇볕 아래 드러난 알바를 일순간 추하다 느꼈지만, 그 사랑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그녀를 계속해 사랑했다. 벤자민도 그래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자신은 바보 같은 늙은이였다.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지었던 미소가 꽃이 시든 뒤까지 유효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0.1%의 기대를 품고 너무도 늦게 사랑을 포기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마크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유령으로 남은 건 미련 때문이 아닌, 너무도 늦게 사랑을 포기했다는 자학과 후회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네도 그럴 거야. 왜 내가 저런 사람과 관계했나 기겁할 테지. 미안해. 고의는 아니지만 난 널 속인 거나 마찬가지야.”

마크는 자신의 손등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을 통해 자신이 여전히 젊은 모습이란 걸 확인했다. 기쁨은 없었다. 이것들은 모두 가짜다. 인간은 매일 새롭게 떠오르는 해처럼 특별하지 못했다. 늙고, 그대로 끝이었다.

마크는 눈앞의 청년을 응시했다. 벤은 너무도 벤자민을 닮았다. 그는 낯선 청년에게서 필사적으로 벤자민을 찾아낸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그는 벤자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벤자민을 약간이나마 닮은 벤에게마저 사랑을 느꼈다. 그와 어울렸던 지난 시간은 마크를 무척 행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벤은 자신을 스쳐 지나갈 것이며, 추억은 머지않아 모래알처럼 손안에서 흩어질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마크는 체념했다. 마음이 가라앉자 마음 안에서 울컥거리던 슬픔이 가라앉았다. 그는 잇몸을 드러내고 심술궂게 웃었다.

“자넨 내 억척스러운 욕심에 끌려든 거야. 어쩜 좋나. 똥 밟았군. 그래도 내가 유령이라 다행일세. 무르기 쉽잖아.”

“무를 생각 없어요.”

“?”

“무를 생각 전혀 없어요. 당신은 나이가 들어도 멋지고 사랑스러울 거예요.”

“……자네, 정신이 나갔나?”

마크가 과장되게 웃었다.

“나이 들어도 멋지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흔한 줄 아나? 자네가 내 나이 든 모습을 안 봐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벤이 다가와 마크의 입술을 문질렀다. 부어오르고 피까지 맺힌 입술이 손길에 살짝 벌어졌다.

“안 봐도 알아요. 이 입술의 붉은 기운은 사라질 테고, 혈색은 창백할 테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할 거고.”

“잘 아네. 머리칼은 듬성듬성 빠지고, 몸에 미끈한 선이라고는 남지 않겠지.”

“그래도 사랑스러울 거예요.”

“…….”

“목소리는 거의 변하지 않을 거고, 이 푸른 눈동자도 여전하겠죠. 웃음소리와 이죽거리는 유머감각은 그대로일 테고, 그리고 여전히, 여전히 당신의 모든 게 달콤할 겁니다.”

마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듣고 있었지만, 그 목덜미와 귀는 난처함으로 새빨갰다. 어처구니없는 말에 완전히 당황한 얼굴이 붉은 홍조로 달아올랐다. 벤은 유령과의 정사를 떠올렸다. 그때도 낯빛이 꼭 저랬다. 창백한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평소 연한 입술에는 붉은 핏기가 돌았다. 땀으로 젖은 머리칼이 이지적으로 솟은 이마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고집 세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던 얼굴이 자신의 품 안에서 유순하게 풀어졌다. 솔직하지 못한 남자가 쾌감에 함몰되어 가는 순간 이마를 벤의 가슴에 비비며 속내를 내비쳤다.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숨기려 하고, 그런데도 꿈꾸고 희망했다.

이 남자는 누굴 보고 있는 걸까. 누구를 향해 이토록 아름다운 푸른 눈을 빛내고 있는 걸까. 마크는 벤을 좋아했다. 교수는 벤자민을 사랑했다. 벤과 벤자민, 그 간극에 벤은 마음이 엉클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은 눈앞의 이 남자를 좋아했다. 자신은 과거에 사랑하지 않았던 이를, 왜, 무슨 이유로 다시 좋아하게 된 걸까. 제임스의 말 때문일까. 벤은 불현듯 불안해졌다.

“저기…… 당신은 마크가 확실한가요?”

“무슨 홍두깨 같은 소린가.”

“제임스란 사람과 얘길 하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은 나이가 꽤 들어 죽었다는데, 내 눈앞에 당신은 풋풋할 정도로 젊어요, 노교수와 당신이 동일 인물인지 불안해졌어요.”

“내 누누이 말했잖아. 껍데기만 젊을 뿐이라니까.”

“당신은 대체 왜 젊어진 걸까요. 그것도 벤자민 때문일까요? 그와 당신은……좋아하는 사이 맞죠?”

당혹스러운 질문에 마크가 눈썹을 찡그렸다.

“벤, 자네 오늘따라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하는군.”

손사래를 치는 유령에게 벤은 바짝 달라붙었다.

“마크, 중요한 얘기예요.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어째서, 건물 공사 때문에 내가 살집을 뺏길 걸 걱정하나?”

“벤자민은 여기 없어요. 당신이 그를 찾고 싶다면 여길 나가야 해요.”

“……이봐.”

마크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벤을 바라봤다.

“당신은 내내 그를 찾아 헤맸잖아요. 왜 찾을 가망성도 없는 곳에서 그를 찾죠? 당신은 젊어요. 비록 여자는 아니지만…… 벤자민이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이번엔 사랑에 빠질지도 몰라요.”

“자네 말처럼 그건 모르는 일이지. 모호한 가정처럼 낭비적인 일이 또 있을까. 내가 명확하고 분명한 진실을 하나 알려주지. 벤은 나이 든 나를 사랑하지 않았네. 그러니 나는 죽어도 내 마음을…….”

마크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마음이 왜요?”

“……아닐세, 아무것도.”

마크가 목덜미를 긁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나 같은 유령한테 사랑스럽단 말이 나와? 내 펠라 기술이 생각보다 괜찮았나 보군.”

유령이 당치 않은 소리를 지껄이며 은근슬쩍 벽장 쪽으로 도망간다. 벤은 그의 팔을 잡아챘다.

“죽어도 마음을 고백하지 않겠다고요? 어리석어요.”

마크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마크, 당신은 충분히 멋진 사람이에요. 당신은 벤자민에게 당신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어요. 그는 당신이 죽은 줄도, 당신이 그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도 정확히 모를 거예요. 벤자민이 당신에게 냉담하게 군 건 물론 그의 잘못이지만, 당신도 그에게 잘못했어요.”

마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는 한참을 뚫어져라 벤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새된 목소리로 마크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에게 고백했더라면, 나는 그에게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게 돼. 벤자민은 내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분명히 알았을 거야. 왜냐면 벤자민은 보기보다 영특한 친구거든. 그러나 내 마음에 반응하지 않았고, 나를 밀어냈지. 그러니까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고…….”

마크가 자신의 목을 쥐었다. 목소리가 예기치 않게 떨려나오는데 교수는 당황했다. 벤은 얼굴을 찡그렸다. 마크의 말이 옳았기에 어떤 말로든 상대를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당신 말이 옳아요. 벤자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요. 당신의 모습이 변했고, 어쩌면 지금의 모습이라면 좋아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반복하지. 벤자민은 내 원래 모습은 사랑하지 않았네.”

“그게 어때서요. 벤자민이 지금의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는 예전의 당신도 사랑할 거예요. 왜냐면…… 분명 사람은 겉모습에 반해 사랑을 시작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도 사랑으로 남는 건 얼굴이 아니라, ‘사람’인 거니까……. 당신의 지금 모습에 반했다 할지라도 어찌 됐든 어느 순간, 그는 당신의 전부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벤은 자신이 횡설수설하고 있단 걸 알았다. 하지만 한편 벤은 자신의 말이 그다지 그르지 않다고도 여겼다. 마크가 마뜩잖단 표정으로 벤을 바라본다. 에세이를 수백 편 써내면 뭐하나. 젊어진 유령을 설득하기엔 말주변이 이리도 부족한 것을. 벤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벤자민의 마음을 전하기 어렵다면 벤 자신의 마음이라도 전해야 했다.

“그나저나, 내가 당신에게 반했다고 말했던가요?”

마크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유령은 한참 동안 벤을 멍청히 쳐다봤다.

벤은 벽장 안에서 교수의 블레이저를 꺼내와 그대로 굳어버린 마크에게 입혔다. 맘 같아서는 마크를 끌어안고 자신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1월의 마지막 날이 코앞이다. 방을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다 벤은 문뜩 생각난 것을 물었다.

“마크, 그런데 당신은 벤자민의 어디에 반했던 겁니까?”

“……비밀이야. 내가 자네에게 그런 걸 알려줄 턱이 있나.”

충격을 받아 실성한 것처럼 있을 땐 언제고, 마크는 정신을 차리자 바로 뾰족한 목소리로 반격해온다. 벤은 싱글거리며 받아쳤다.

“흐음, 그럼 그건 됐고, 나랑 벤자민이랑 누가 더 맘에 드는데요?”

“……뭐?”

“난 꽤 잘하잖아요. 내 쪽이 훨씬 더 낫지 않나요.”

마크가 똥 씹은 표정으로 벤을 쳐다봤다. 벤은 굴하지 않았다. 휑하니 드러난 유령의 목덜미가 너무 추워 보여 벤은 마크의 블레이저 위에 스웨터를 목도리처럼 둘러주었다. 은근슬쩍 손목을 쥐고 나오려는데 정신을 차린 마크가 방문을 붙잡고 버텼다.

“뭐하자는 건가? 난 자넬 따라가겠다고 한 적 없어. 벤자민을 찾으러 갈 맘도 없고.”

“벤자민 때문만은 아녜요. 마크, 고집부리지 말고 따라와요. 이대로 가면 난 백 퍼센트 직장에서 잘려요. 당신을 놔두고 출근할 수 없으니, 당신을 데리고 떠날래요.”

벤은 아까 봐뒀던 개구멍으로 마크를 데려갔다. 해뜨기 직전이라 오히려 더욱 추웠다. 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개구멍 앞 나뭇가지를 젖혔다.

“……어.”

벤은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분명 여기 있어야 할 출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서 잘못 찾은 것 아닌가?”

“아녜요. 분명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벤은 주변을 살피며 재차 확인했지만, 여기가 맞았다. 영문을 모를 일이다.

“어떻게 할 건가.”

“모르겠어요.”

벤은 얼굴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여기 있어야 할 출입구가 사라졌다. 무언가 그들을 방해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벤은 고개를 저었다. 이토록 분명한 방해라면, 더욱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어쩔 수 없어요. 알바에게 가요.”

“어떻게 탈출할 건데. 알바는 날 잡아갈 거야.”

“할리우드 스타일로 할 거예요. 제대로 육탄전을 할래요. 괴물을 차로 들이받고, 철책을 부수고 여길 나갈 겁니다.”

농담 섞인 말에 마크가 피식 웃었다.

“악령을 상대로 완력을 쓰겠다고?”

“신부님이라도 부를까요?”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해. 그녀를 죽일 수는 없어.”

“무슨 소리예요. 악령을 놔둬요?”

“그녀는 악령이 아니야. 그녀는…… 날 사랑해줬어. 나도 그녀를 사랑했고. 알바는 좋은 여자였어. 아무리 그런 모습으로 변했다 한들 그녀를 해칠 수는 없어.”

“무슨 헛소리예요?”

벤은 마크를 돌아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벤자민을 그리워하다 죽었고, 죽은 뒤에도 벤자민의 이름을 부르며 헤매던 유령이 다른 여자의 얘기를 하는 데 벤은 배신감을 느꼈다. 질투가 치밀었다. 설마 그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는 걸까.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마크는 벤자민을 좋아했다.

“알바는 당신을 잡아가려고 했어요. 악령으로 변한 여자를 내버려두겠다고요? 혹시 그 괴물이 다른 여자였어도 그렇게 물렁한 태도로 나왔을 겁니까? 만약 그게 벨라였으면 달랐을 걸요. 벨라의 검은 머리칼이 몸에 스치기만 했어도 당신은 마녀라면서 화형 시키려 했을 걸요.”

“벨라는…….”

마크가 눈을 깜빡이며 다른 말을 하려고 했다. 벤은 손을 들고 그의 말을 막았다. 그는 급했다. 중요한 얘길 먼저 정리해야 했다.

“마크, 정신 차려요. 우린 여길 나갈 겁니다.”

“난 여길 나갈 이유가 없어. 여긴 너무 춥군. 난 돌아갈 거야.”

유령이 나는 듯이 도망쳐버렸다. 벤은 이미 저 멀리 건물까지 가버린 마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벽장 안에 숨으면 다인가. 벤은 그를 들쳐 엎고라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갈 마음을 품었다. 그는 난간을 몇 개씩 뛰어 올라가 마크를 뒤쫓았다. 유령은 이미 방 안으로 되돌아가 벽장 앞에 서 있었다.

“난 나갈 이유가 있어요. 1월 31일은 형의 생일이에요.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의 생일엔 고향에 돌아가야 해요.”

“자네 형제는 참 지나치게 살가운 관계군.”

“그날은 우리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에요.”

“1월 31일-.”

“뭐라고 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생각에 잠겼던 유령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릴 했다.

“날 버릴 건가?”

벤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죠?”

“내가 못 간다면 날 버리고 갈 거냐고 묻는 거네. 뭐 그게 당연한 거겠지만.”

“당신도 같이 가야 하니까 탈출하잔 말을 했던 겁니다. 우린 쇼핑이 필요해요. 콘돔도, 안경도 사야 해요.”

“……그래, 안전한 섹스는 중요하지.”

“?”

마크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힘없이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오늘 유령은 어딘가 이상했다.

“난 못 가.”

“마크?”

“난 작년 일월에도 여기 있었어. 그러나 겨울이 지나서는 기억이 없어. 난 아마도 1월, 그 즘에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 같아. 그러니 자네가 그리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난 곧 사라질 거거든. 그리고 내년 1월에 다시 나타나겠지. 걱정 마. 벽장에만 조용히 있을게. 날 놔두고 그냥 가.”

“여긴 곧 없어질 거예요. 재건축을 위해 건물을 모두 부숴버릴 건데, 당신은 어디 있을 건가요.”

마크가 팔짱을 끼고 짐짓 분개한 표정을 지었다.

“재건축이라니, 난 보상금을 한 푼도 못 받았어.”

“유령에겐 재산권을 행사할 권리가 없어요.”

“하긴 것도 그렇군.”

마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벤은 유령이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1월에만 존재했다 사라질 거라고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라지거나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당신 이성이 완전히 사라져서 당신이 1월 외, 다른 기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면 어떡할래요. 내가 없어지면 당신은 당장 넋 빠진 유령이 되어서 자기가 누구인지도 기억 못 할 지경이 될 텐데, 그럼 어쩌려고요.”

“그렇게 걱정이 되면 자네가 여기 있게나. 자네 말처럼 자네가 없으면 난 다시 아프고, 정신을 놓을 테고, 비참해질 테지. 자네가 내 곁에 있어준다면…….”

“안 돼요.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내게도 내 삶이 있는 걸요. 우린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잠시 침묵이 돌았다. 마크가 눈을 깜빡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으나 실은 크게 당황했단 표시였다. 교수가 난처한 기색을 지우고 능글거리며 비아냥거렸다.

“그래, 자네에겐 자네 삶이 있지. 자네 형이 있고, 자네 여자친구가 있고. 벤, 날 천국에 보내려는 헛된 시도는 그만하고 가족에게 돌아가는 편이 좋겠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돌리지 말고 분명히 말해요. 마크.”

빈정거리는 기색에 벤은 가볍게 언성을 높였다. 그뿐인데, 유령이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얼굴은 무표정한데 귀가 새빨갰다. 벤은 자신이 지나쳤음을 자각했다.

마크가 망연히 벤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찬찬히 훑는 시선에 벤은 괜스레 불안해졌다. 벤은 마음속 불안감을 몰아냈다. 마크는 눈이 나빴다. 아무리 빤히 쳐다봐야 자신이 벤자민인 걸 알 리 없었다.

“그는 울고 있었지.”

“네?”

엉뚱한 말에 벤은 고개를 들고 마크를 바라보았다.

“벤자민의 어디에 반했는지 물었잖나.”

“아, 그랬죠. 그가 어떻게 울었는데요?”

“고향에 돌아가는지 커다란 짐 가방을 든 채로 뚝뚝 눈물을 흘려대더군.”

벤은 마크가 언제를 얘기하는지 짐작했다. 유령은 벤이 마크 앞에서 속절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 날, 마크가 그를 위로해주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벤자민은 늘 밝고 씩씩해서 우는 것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남자였지. 내가 그동안 잘못 본 거냐고 물었더니, 밝아 보이려고 노력해오던 게 굳어져 그리 보일 뿐이라고 하더군. 벤은 자신이 울고 슬퍼하면 어머니가 더 힘들어할까 봐 어린 시절 제대로 울어본 적이 없었대.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눈물을 닦고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싱긋 웃더군. 그 모습이 애틋했네. 아직은 덜 여문 게 마땅한 나이에 슬픔을 억누르는 게 가엾었지.”

벤자민의 울음은 특별했다. 마크는 눈물 흘리는 벤자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잘생긴 청년의 얼굴 속에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뒤섞여 있었다. 풍성한 갈색 속눈썹에 달라붙은 눈물이 마크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마크는 벤자민의 다갈색 머리칼에 손을 얹고 헝클어뜨려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과 함께 그를 꼭 끌어안아 주고 싶단 충동을 함께 느꼈다. 마지막으로 젖은 입술에 키스하고 싶단 욕망까지 자각하고 마크는 놀라 몸을 움츠렸다. 욕망이 정상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는 꿈틀대는 감정을 모른 척 무시했다.

마크는 벤자민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당시 벤자민은 사정이 좋지 않았다. 공부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연구실의 낡은 침대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마크는 벤자민을 끌고 다니며 밥을 먹이고, 지인을 통해 싸고 괜찮은 방을 구해주었다. 벤자민은 생전 처음 겪는 타인의 무조건적인 호의를 불편해했다.

-마크, 이럴 필요 없어요.

-자넨 타인의 호의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해.

-부담스러운 걸요. 난 당신의 호의를 갚을 가망성이 없는 놈이에요.

-갚을 생각을 왜 하나.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야.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벤자민도 점차 그의 호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벤자민이 마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크, 고마워요. 당신은 내게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에요.

어째서일까. 그 말에, 마크는 가슴이 뭉클했다. 청년의 미소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벤자민이 내게 고맙다고 말하며 밝게 웃더군. 그리고 내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지. 단순히 고마운 스승이란 뜻이었겠지만, 그 말에…… 마음이 일렁였지.”

벤자민의 미소는 따뜻했고,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크는 눈을 감아도 자꾸만 청년의 말과 청년의 목소리와 그 미소가 생각났다. 집으로 돌아와 마크는 한참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몽글거리며 뭉쳤다. 감정이 싹트는 징후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 마크는 거울 속 자신의 초췌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알바, 사람의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나 봐요.

낡은 몸과 젊은 마음의 간극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내 가슴이 그토록 두근대는 게 신기했어. 내 마음을 그리 만든 이를 오래도록 좋아했지. 그가 내게 조금의 마음이나마 품기를 바라고, 바랐어.”

……죽음 뒤에야 소원이 이루어졌군. 마크는 씁쓸한 마음으로 뒷말을 삼켰다.

“벨라는…….”

“벨라 얘기는 또 왜요.”

“그녀는 검은 머리칼을 지녔지.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군.”

놀라움에 벤은 순간 굳어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다.

그 틈에 마크가 벽장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재빠른 동작이었다. “!” 벤은 있는 힘껏 문을 당겼다. 얇은 문짝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벽장 안에서 유령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월 31일은 자네 형의 생일이고, 자네 여자친구와 자네의 기념일이며…… 내 생일이기도 해. 대단한 우연이지? 그런 우연이 연달아 일어날 수는 없어.”

벤자민이 마크 앞에 나타나는 우연까지 겹치면 실현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졌다. 마크는 나직이 탄식했다.

“……이 세계는 가짜야.”

진짜 벤자민은 자신 따위가 아니라 약혼녀인 벨라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 결혼했을 것이고 둘 사이엔 아이도 있을 것이다. 마크는 지금쯤 둘이 라이언의 생일 선물을 고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이치에 맞았다.

마크는 지난 며칠이 진짜일 가능성은 아예 계산하지 않았다. 샤워장 안에서 자신을 혐오하는 눈으로 바라봤던 청년이 이제 와 그를 사랑스럽다 말하고 그를 거부감 없이 안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마크?”

마크의 기색에 당황한 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마크를 불렀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히 눈치를 살피는 태도가 마크를 빙긋 웃게 했다. 그는 여전히 귀여웠다. 저 모습 전부가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을 거란 사실이 마크는 씁쓸했다.

“벤, 난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거야. 저세상으로 가지도 않을 거고. 날 구하려 하지 말게. 왜냐면 그건 정말 의미 없는 짓이거든. 미안하군. 나는 어차피 지옥에 떨어지게 될 거란 말을 좀 더 빨리해줬어야 했는데. 말했다시피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어.”

“당신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잠깐만, 이 문 열고 말해요. 내가 당신을 속인 건-!”

“난 자살했어. 벤자민.”

그 목소리가 끝이었다. 벽장 안이 고요해졌다.

자신을 벤자민이라고 불렀던 마크의 마지막 말이 벤의 귓전에 맴돌았다. 벤은 힘없이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문이 가볍게 열렸다.

벽장 안은 비어 있었다.

* * *

“마크?”

벤은 벽장 밖에서 한참을 외쳤다. 마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령이 어디로 갔을지 초조해하며 옥상과 있을 법한 곳을 샅샅이 뒤졌다. 소득은 없었다.

벤은 마크의 방으로 돌아왔다. 유령마저 사라진 곳은 더할 나위 없이 황량했다. 벤은 자신의 품 안에서 사진을 꺼냈다. 제임스가 준 것이었다. 그는 사진을 벽장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마크, 당신을 속이려던 게 아니에요. 해명할 기회를 줘요.”

벤은 사진 속 웃고 있는 마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진 귀퉁이에 작게 위치한 벤의 모습이 보였다. 벤과 마크가 단둘이 찍힌 드문 사진을 바라보며 벤은 한 번 더 용서를 빌었다.

“날 좋아했잖아요. 돌아와요. 제발.”

벽장 안은 고요했다. 벤자민을 찾아 헤맸던 유령은 그러나, 자신은 죽어도 그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벤이 벤자민이란 사실을 모른 채, 마크는 은연중 자신이 얼마나 벤자민을 좋아했는지를 다 드러내고 말았다.

-날 버릴 건가? 내가 못 간다면 날 버리고 갈 거냐고 묻는 거네. 뭐 그게 당연한 거겠지만.

마크는 벤이 결국은 그를 버리고 갈 것임을 확인한 뒤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영악한 노인네였다. 그렇다고 마냥 욕할 수 없는 건 벤이 마크의 허망한 얼굴을 보아서였다. 늘 빙글빙글 사람 약 올리는 미소를 짓던 유령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벤을 바라보았다. 그가 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벤의 마음을 한 땀 한 땀 뜨는 날카로운 바늘이 되었다.

-내 가슴이 그토록 일렁이는 게 신기했어. 내 마음을 그리 만든 이를 오래도록 좋아했지. 그가 내게 조금의 마음이나마 품기를 바라고, 바랐어.

“젠장…….”

벤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신이 영영 그를 잃었을지도 모른단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똑똑,

얼마간 그리 넋 놓고 있었을까. 들려온 문소리에 벤은 뒤를 돌아보았다. 제임스가 문 옆에 서 있었다.

“뭔가, 그 꼴로 밤이라도 샜나?”

벤은 한숨도 자지 못해 핏발 선 눈으로 제임스를 바라봤다.

“마크가 사라져버렸어요.”

제임스가 비죽 웃었다.

“그는 진즉 이 땅에서 사라졌어. 잠이 덜 깼으면 커피라도 마셔.”

“날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도 그에게 반했단 말을 이제 막 한 참인데, 사라져버렸어요.”

“드로잉은 찾았나? 꼴을 보니 밤새 찾은 모양인데.”

“그딴 건 관심도 없어요! 당신이나 찾아요. 마크가 사라졌어요.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예요?!”

“자네가 간수를 못 해 잃어버려놓고, 왜 내게 화를 내나.”

적반하장이라며 제임스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물건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마크가…….”

“알아, 잃어버린 걸 찾으려거든 가망성 없는 곳에 멍하니 있지 말고, 찾을 만한 곳을 뒤지게.”

“?”

“짐작 가는 곳이 있어. 가볼 텐가?”

* * *

제임스는 벤을 태우고 어딘가로 차를 몰았다. 정문을 나올 때 호수의 흙과 수초로 범벅된 괴물이 튀어나올 줄 알고 벤은 바짝 긴장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괴물은 사람을 차별했다. 제임스는 유유히 차를 몰았다. 벤은 꽤 오래 머물렀던 모교를 의외로 쉽게 벗어났다.

국도의 이정표에 와이오밍으로 향하는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벤은 제임스에게 다시 한 번 날짜를 물었다. 31일이 가까웠다. 시간은 누가 재촉하지도 않는데 재깍재깍 잘도 흘렀다.

라이언과 교수의 생일이 같다는 걸 벤은 마크의 고백을 듣고 알았다. 벤은 생전에 마크가 그날 즈음에 항상 자신과 약속을 만들려고 했던 걸 기억해 냈다. 그날은 벤에게 특별한 날이었기에 벤은 한 번도 그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벤은 누군가 자신의 뒷덜미에 고무줄을 매달아 놓은 기분을 느꼈다. 교수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질 않았다.

-난 자살했네.

틀렸다. 사망 신고서의 기록은 그와 달랐다.

하지만 마크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지옥에 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벽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고집부렸던 데는,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자네 말처럼 자네가 없으면 난 다시 아프고, 정신을 놓을 테고, 비참해질 테지. 자네가 내 곁에 있어준다면…….

벤은 혀를 찼다. 멀쩡한 얼굴로 말하던 유령의 맞잡은 두 손이 표정과 달리 잔뜩 긴장해 희게 변했던 걸 보지 말았어야 했다.

브레이크를 밟자 속도계의 바늘이 쭉 내려갔다. 제임스가 차를 멈춰 세웠다.

“여길세.”

벤은 고개를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새하얀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그곳은 마크가 죽기 직전까지 있었던 치료소였다. 환자들 몇을 보고, 벤은 치료소가 실상 호스피스와 같은 곳임을 알아차렸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여성 환자 옆에서 간병인이 그녀의 부탁에 따라 침대 주변을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유백색의 작은 조각들이 쓸려 담겼다. 벤은 동행한 간호부장에게 그 광경에 대해 물었다.

“뭐하는 거죠?”

“항암 치료 후엔 피부가 벗겨져서 저렇게 허물이 떨어지곤 해요. 깔끔한 환자들은 그걸 못 견뎌서 저렇게들 치워대죠.”

벤은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는 환자를 한참 힐끔거렸다. 간호부장이 야간 근무로 인해 핏발 선 눈으로 벤을 바라보았다.

“마크 레이트너 씨의 친구시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제자예요. 이쪽이 친구세요.”

벤은 제임스를 가리켰다. 별반 관심 없단 얼굴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제임스가 벤의 말에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 친구는 마크의 임종 때 외국에 나가 있었습니다. 마크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는지 꼭 알고 싶어 해서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벤은 그런 말을 입 밖에도 낸 적 없다. 제임스는 예의 알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안타깝지만, 같은 병실을 썼던 환자 중에 생존해 계신 분이 별로 안 계세요. 당시 일했던 직원들도 대부분 여길 떠났죠. 우리 일이 그다지 쾌적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라서, 이직률이 높은 편이거든요.”

“그와 가장 친했던 사람은 없습니까? 자주 찾아온 사람이라든지.”

“딱히 면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기가 어려워요. 그와 가장 친했던 환자들도 다들 병원을 떠났으니까요. 마크와 가장 친했던 환자는 커디스 르메이란 여자인데, 안타깝지만 그분과도 만나보실 수 없어요.”

“어째서죠? 병으로 사망하셨나요?”

“아뇨, 그 환자는 마크와 같은 날 사고사 했어요. 마크는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하려고 그 추운 1월 바다에 뛰어들었죠. 그가 살았다면 난 카네기재단의 영웅기금 후원회에 그를 추천했을 걸요.”

벤은 간호사의 뒷말은 거의 듣지 않았다. 커디스 르메이가 어떤 여자였기에 마크는 그녀를 위해 죽음을 무릅썼던 걸까.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요.”

간호사는 벤의 호기심을 의아해했다. 벤은 얼굴을 붉혔다. 연적에 대한 질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크와 그녀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벤의 반응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간호부장은 의외로 선선히 벤에게 그날의 기록을 보여주었다. 그 중엔 커디스 르메이와 마크가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여자의 모습에 벤은 숨을 들이쉬었다.

* * *

제임스의 말과 달리 마크의 흔적은 치료소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짐작이 가는 곳이라고 했지, 언제 거기 있을 거라고 했나?”

제임스는 뻔뻔하게 변명했다. 벤은 그에게서 차 키를 빼앗아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사진 속 여자에 관해 마크에게 알려야 했다. 벤은 자신이 발견한 서류를 한시라도 빨리 유령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마크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따라 들어오려는 제임스를 몰아내고 벤은 현관문을 잠갔다. 그는 자신의 유령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크, 마크?!”

벤의 목소리만 빈방에 울려 퍼졌다. 오늘이 벌써 1월 30일이다. 벤이 들고 온 기록에는 마크가 31일 자정에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늘 겨울만을 기억하고,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던 유령의 말이 이걸 의미한 거였을까. 지난 몇 년간 유령은 자신이 죽기 직전의 상황을 되풀이하다 기억에 사로잡혀 사라져 버리길 반복했던 걸까. 벤은 초조한 마음에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마크-.”

벽장을 열어 안에 대고 유령의 이름을 불렀다. 벽장 안은 무거운 고요만 가득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당신이 못 나간다고 고집을 피우더라도 당신을 데리고 나갔어야 했는데. 내가 사과할 테니 어서 나와요. 여길 나가서 함께 생일 파티를 해요.”

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한 번도 당신의 생일에 함께 있어본 적이 없어요. 내게 기회를 줘요. 당신은 내게 언제, 어떻게 반했는지 말해줬잖아요. 이번엔 내가 당신에게 반한 순간을 말해줄게요. 당신의 어떤 점이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는지 고백할 테니, 제발…….”

벤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고요가 온몸을 짓눌렀다.

“그 안에 있긴 있는 거죠?”

벤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울림이 괴이하게 컸다. 벤은 오래도록 그 안을 노려보았다. 마크에게 있어 벽장은 마술사의 상자와 같았다. 유령이 고치를 틀면 벽장은 그를 무의식의 세계 어디론가 끌어갔다.

자신은 어떨까?

마크가 있는 우주의 그 어떤 지점으로 자신 역시 빨려 들어가게 되는 걸까.

“거기 있어요? 당신, 그 안에 있는 거죠.”

대답은 없었다. 벽장 안, 열린 문 뒤로 나무로 이루어진 삼면이 벤을 마주하고 있었다. 고요 속 작은 일렁거림을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저 안에 마크가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방 안을 빙빙 돌며 고민하다 그는 도로 벽장 앞으로 돌아왔다. 말이 안 되는 일에는 말이 안 되는 방법을 쓰는 게 맞다. 그는 나무문을 열었다.

벤은 벽장 안으로 들어갔다. 마크를 찾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어떤 방법이든 써야 했다. 어딘가에서 얇은 환자복을 입고 파르스름하게 얼어붙은 발을 끌며 걷고 있을 남자를 찾아내야 했다. 그 마른 어깨를 쥐고 이 세계로 끌고 나올 것이다.

벤에게 벽장은 퍽 좁았다. 유령의 옷과 소지품에서 좀이 슬어가는 냄새와 오래 방치된 물건 특유의 먼지내가 났다. 잘 재단된 셔츠와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블레이저는 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고, 벽에 기대어 놓은 테니스 라켓 중 하나는 벤이 빌려 쓴 적도 있는 물건이었다.

벤은 상반신을 수그리고 격자무늬 너머로 보이는 방의 풍경을 살폈다. 깡마른 유령이 벽장 바깥에서 오락가락 걷는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탐탁지 않았다. 바깥엔 공허한 빈방의 풍경만이 있었다. 벤은 한참 그리 있었으나 어떤 괴상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벽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어려웠다. 유령과 더욱 비슷한 상태가 되면 가능할까.

벤은 마크를 처음 벽장 안에서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마크는 반수면 상태의 멍한 얼굴로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멍한 상태, 멍한 상태.’ 벤은 최대한 마음을 느슨하게 풀었다. 몸에서 힘을 빼고 잠을 청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느 순간 고요해졌다.

젖빛 꿈이 그를 덮쳤다.

잠시 후, 옅은 푸른빛이 감도는 꿈속에서 벤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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