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 오로지 당신만 3
벤은 택시기사에게 유령이 알려준 주소를 불러주었다. 삼십여 분이 못 돼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크의 집은 잘 정돈된 정원들과 아기자기한 주택이 늘어서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생전 마크의 모습과 달리 아기자기하고, 평범했다. 벤은 예상과 다른 풍경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벤의 생각에 마크는 중세시대 성을 개조해 살거나, 외딴 섬의 별장에서 빈둥거리는 게 더 어울리는 남자였다.
구엘 공원의 계단처럼 우아한 곡선을 지닌 돌층계를 올랐다. 현관 앞에는 오래전에 죽어버린 꽃 화분 몇 개가 방치되어 있었다. 벤은 화분 사이 놓인 벽돌 아래서 열쇠를 발견했다. 마크가 알려준 대로였다. 빈집 문을 열며 벤은 누가 자신을 볼까 봐 주변을 살폈다. 빈집에 침입하기엔 확실히 평범한 주택가보단 섬 쪽이 더 낫겠다.
마크는 생전 문명의 이기가 전혀 없는 천혜의 섬에 들어가기만 하면 자신이 열심히 원고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벤은 마크가 정말로 ‘섬’을 샀던 일을 기억해냈다. 마크는 괜찮은 곳을 물색하던 중 육지에서 배로 삼십 분만 들어가면 되는 작은 섬을 발견했다. 마크의 말에 따르자면 가격도 나쁘지 않았단다. 그러나 게으름뱅이는 환경이 바뀌어도 게으름뱅이였다. 결국, 마크는 애초에 목적과 달리 섬을 그가 기고했던 건축 잡지의 기사 마감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로 사용하곤 했다.
벤은 원고를 쓰기 위해 섬을 사는 부유한 남자의 정신세계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낭비적인 일을 하느냐는 물음에 마크는 섬을 사는 일이 절대 낭비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건 낭비가 아냐. 벤자민, 섬을 사는 건 다이아몬드나, 자동차를 사는 것보다 훨씬 멋진 일이야.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살아 있는 아름다움이 훨씬 값어치 있는 것 아닌가.
마크의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했다.
벤은 잿빛 머리칼을 단정하게 손본 중년 남자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쳐다보던 어느 날의 저녁 식사가 생각났다.
-인간이 비싼 값을 매기는 것 중 정말 가치 있는 건 실은 없어. 진실로 중하고 귀한 건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돈으로 살 필요도 없게끔 만들어졌어. 물도, 햇빛도. 그건 그냥 귀한 거야. 돈으로 살 필요가 없지. 젊음, 사랑, 목숨. 그런 게 다 그렇지.
-그래서 섬을 샀군요. 돈 주고도 못 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편집자들의 증오도 덤으로 얻을 수 있거든.
마크가 마지막 말은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였다. 못 말릴 게으름뱅이의 넉살에 벤은 크게 웃었다.
-날 돕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건가요. 가난한 고학생에게 식사를 사주는 게 다이아몬드를 사는 것보다 나은 투자라고 생각해서요?
-설마, 난 내 덩치 큰 친구가 너무 굶주리면 날 잡아먹을까 봐 그전에 뭘 먹여놓는 것뿐일세. 연구동에서 우리가 처음 마주쳤던 일 기억나나? 이제 와 말하지만 그때 자네 몰골은 정말 끔찍했어. 쥐라도 발견하면 그대로 뜯어먹겠단 의지가 엿보였지. 도저히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어.
마크는 로스쿨 면접 후 처음으로 벤과 재회했을 때를 상기하며 웃었다. 벤도 인정했다. 당시 벤의 상황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어렵사리 구한 낡은 아파트의 보일러가 몇 년 만의 강추위에 동파되고 말았다. 자연재해였기에 참사를 겪은 건 벤뿐만이 아니었다. 보일러 수리공은 자신도 때아닌 호황에 몸을 뺄 수 없다며 1주일 뒤에나 수리가 가능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거의 냉장고 수준인 집에서 탈출해 대학 친구가 내어준 연구실 간이침대에서 며칠간 생활을 했다. 한밤중 위가 녹아나는 것 같은 배고픔에 깨어났다가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사무실에 붙어 있던 마크와 화장실에서 만났다. 깊은 밤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연구동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에 마크는 거의 기절할 듯 놀랐다. 마크는 겉보기와 달리 겁이 꽤 많았다.
벤은 여전히 그때 경험했던 ‘마크의 비명 + 경악한 표정’을 떠올릴 때면 늘 발작적으로 웃고 말았다. 평소에는 지적이기 이를 데 없는 교수님의 진면목을 본 순간이었다.
-그 아르바이트란 게 몇 년간 사무실 정리를 한 번도 안 한 모 교수의 사무실 정리였죠?
-힘이 좋은 친구가 필요했지.
-제가 그때 마신 먼지가 0.1톤은 됐을 거예요.
끊임없이 재채기를 해대던 벤의 모습이 생각났는지 마크가 즐겁게 웃었다.
-자넬 보면 내 예전 생각이 나. 맙소사, 이런 늙은이 같은 소릴 내가 하게 되다니.
-나랑 당신은 젊은 시절에 별로 닮은 점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맞아, 닮은 점이 별로 없지. 그래도 비슷한 게 있긴 해. 내가 자네보다 젊었을 때 나 역시 나름의 방황을 했어.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지. 나보다 갑절은 나이 먹었을 사람이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나를 도와주었지.
-당신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게 상상이 안 가네요. 그는 당신의 멘토 같은 사람이었나요?
-그가 아니라 그녀야. 특별한 여자였지. 멘토라기보단 연인 같은 사람이었어. 나이가 들수록 그녀가 종종 생각나는군.
마크가 화려하게 불을 뿜는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덤덤하게 과거를 반추했다.
-과거에는 단순한 추억이었을 뿐이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실은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뒤늦게 깨닫는 순간들이 있지. 그 순간 좀 더 노력했다면, 한 발만 더 용감하게 움직였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 쉽게 잃지 않았을 거라 후회하게 되는 순간들이.
마크는 턱을 괸 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어떤 과거의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는지 벤은 짐작할 수 없었다. 실은 벤은 그 순간 자신과 정말 다른 섬세한 성정을 지닌 노교수를 바라보며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 사람처럼 센티멘털해질까.’하는 생각 정도. 그뿐이었다.
자신 안의 생각에 빠져 있다 벤은 고개를 들었다. 노교수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푸른 눈에 차오른 이름 모를 감정들에 놀라 벤은 얼굴을 굳혔다. 표정을 들킨 걸 깨달은 상대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 후 마크는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둘은 도로 친구로 돌아가 즐거이 저녁을 나눴다.
과거의 연인을 생각하며 추억에 젖던 레이트너 교수와 자신의 ‘보물’을 찾아오라고 지령을 내리던 유령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벤은 고개를 저었다.
벤은 유령이 알려준 위치를 금세 찾았다. 비밀 벽장을 여는 키패드는 마크가 알려준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벽장을 열자 세상에서 제일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 앞에는 얽히고설킨 전선과 먼지를 뒤집어쓴 프로젝션 TV, 돈깨나 들였을 입체 서라운드 돌비 시스템이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영상 시설로 마크는 대체 뭘 보았을까. 벤은 수상쩍은 상자들을 노려보았다. 봉인된 입구를 칼로 찢고 열어보자 몇 권의 시사 잡지 아래 수북하게 쌓인 DVD와 원색적인 잡지가 나왔다. 잡지엔 털북숭이 남자들이 엉겨 있는 적나라한 사진들이 가득했다. 벤은 자신의 조심성 없는 손을 저주했다.
붙박이 책꽂이로 눈을 돌려 보니 <퀴어 애즈 포크>와 <토치우드> DVD 사이 안 어울리게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꽂혀있었다. 벤은 그쪽 방면엔 날카로운 더듬이를 갖고 있었다. 책 표지를 벗기고 보니 양장본 책의 실체가 실은 위장된 게이 포르노 DVD란 걸 알아냈다. 마크가 가장 애용했을 DVD에 쓰인 개략적인 줄거리 설명을 통해 벤은 영화가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버스 뒤 칸, 교도소, 경찰 유치장, 대학교 농구 코트 등에서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대신 성경험 장소의 다양성을 찾아내는 로드 무비란 걸 알아냈다. 평소엔 별로 관심도 없던 칼 세이건 박사에게 불현듯 미안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마크, 이 망할 인간…….’
마크는 유령이 되어 노골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이런 끼가 있었던 인간이었다. 지나가 버린 사랑을 아쉬워하던 로맨틱한 노교수가 벤에게 손을 흔들며 안드로메다 성운을 향해 멀어져갔다. 그 자리를 차지한 금발의 정신 나간 남색 유령이 손을 흔들며 벤에게 다가왔다. ‘안녕 벤~, 내 비록 하반신 사정은 참혹하지만, 혀는 잘 움직여. 누구보다 잘 빨아줄 수 있어.’ 벤은 고개를 저으며 환상을 떨쳐버렸다.
벤은 바삐 마크의 소장품을 정리했다. 마크 레이트너란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단 데 실망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일단은 유령에게 보고 싶은 만큼 실컷 보여주고 시원히 욕망을 해결해 미련 없이 저승으로 가게 하는 게 중요했다.
상당한 양이었다. 후손들이 자신의 소장품을 발견해 자신을 음란물 중독자라고 욕할 걸 생각하면 죽어서도 눈이 안 감긴다던 마크의 반응이 이해가 됐다. 책상에 나뒹구는 물건들을 담을만한 적당한 상자를 찾다가 벤은 매우 가벼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부피에 비해 무게가 가벼웠다. 책은 아니란 소리였다.
“뭐가 들었지?”
벤은 박스를 뜯었다. 그는 자신이 조금 전 저질렀던 과오를 잊고 부주의하게 손을 놀리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단 걸 몰랐다.
벤의 갈색 눈동자에 금속성의 차갑고 긴 물체가 비쳤다. 미지와의 조우에 벤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벤은 자신도 모르게 상자를 떨어뜨렸다. 슬로우 모션으로 떨어진 상자에서 긴 막대 하나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우연찮게 그대로 수직으로 섰다. 충격에 기계가 작동했다. 주기적으로 진동하고, 규칙적으로 좌우 15도씩 꺾이는 움직임이 코믹했다.
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마크는 눈이 나빴다.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어린 시절부터 안경과 렌즈를 꼈다. 그는 죽었고 유령이 됐다. 스파이더맨이 되는 거미에게 물리는 행운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눈이 도로 좋아지지도, 손목에서 거미줄이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마크 유령은 여전히 눈이 나빴다.
근시와 난시를 모두 가진 유령의 눈에 벤이 스타워즈 시리즈에나 나올 광선 검을 들고 오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유령은 혀를 찼다. 연녹색과 분홍빛 형광색의 검은 유치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걸 갖고 노나.”
마크의 비아냥거림에 벤이 들고 있던 형광 검을 집어 던졌다.
“당신한테는 이딴 게 보물이에요?”
마크는 벤이 던진 검을 용케 떨어뜨리지 않고 받았다. 위이잉, 단검이 손안에서 진동했다. 마크는 가까이 보고서야 끝이 둥글고 뭉툭한 검이 복부가 아닌 다른 곳을 찌르기 위한 물건임을 파악했다. 우웅- 절묘한 진동과 그립감에 그는 감탄했다.
“건전지가 정말 오래가네. 겉보기엔 딱 싸구려 중국제던데.”
“그런 물건이 박스 안에 한가득이더군요. 당신이 생전에 못해본 게 미련이 남아서 유령이 됐을 거란 말 취소예요. 그 정도 기구면 미련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을 거예요!”
벤은 상자 안 물건들을 옮기던 일을 떠올리고 치를 떨었다.
문제의 상자는 옮기던 중 밑이 뚫려 찢어지기까지 했다. 벤은 택시 바닥에 흩어지는 로터와, 충격에 갑자기 작동을 시작한 바이브레이터의 소음 속에서 절규했다. 택시 기사가 갖고 있던 상자를 주지 않았다면 손도 대기 싫은 물건들을 주머니에 넣어 와야 했을 것이다. 그 물건들이 과연 어디를 들락거렸을지 생각하면 벤은 치가 떨었다. 위생 장갑의 소중함을 새록새록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내가 왜 남성용 바이브레이터를, 것도 신상도 아닌 중고를 만져야 하는 건지 얘기 좀 해봐요.”
“중고 아냐, 한 번도 안 써봤어. 못 써봤지. 그래서 내가 원통해서 미련을 못 버린 거 아니겠나.”
자위 기구를 사지 않았다면 모를까 종류별로 사두고 한 번도 안 써봤단 얘길 벤은 믿기 어려웠다.
“정말요? 왜요.”
“거기에 대한 사연도 또 얘기가 길지. 그걸 말하려면 네 여자와 얽힌 나의 비틀린 로맨스를 들어야 하는데.”
“됐어요.”
벤은 거절했다. 들어봐야 영양가 없을 얘기였다. 마크가 벤을 흘겨봤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 벤은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품위 있고 우아한 노교수에 대한 추억을-바이브레이터의 소음이 자꾸 효과음으로 끼어들어 감상에 젖는 걸 방해했다.- 한 방울 눈물과 함께 오늘 새벽 막 정리한 뒤이다. 그는 유령을 철저하게 유령 그 자체로 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벤은 마크에게 문제의 바이브레이터와 티슈 한 상자를 내밀었다. 쌓인 만큼 실컷 하라지. 그리고 유령이 사라져주면 작별 인사를 하고 모든 걸 끝내면 되는 거다.
“뭔가?”
“마음껏 보고, 성불하세요.”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던 유령이 비죽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
유령이 덥석 티슈를 받았다. 으르렁대리란 예상과 달리 마크는 벤의 제안을 진심으로 고맙게 받아들였다.
“저세상으로 떠나는 데 반대하지 않았어요?”
“내 시신을 불로 태우는 걸 반대했을 뿐이야. 자넨 영화도 안 봤나. 시신을 불태우면 유령도 함께 타오르는 거 몰라?”
“…….”
마크가 라이언과 동류였을 줄이야. 벤은 놀라 눈을 치떴다. 퇴마사들이 비장한 얼굴로 관 속 시신에 불을 붙이면, 악령들이 초음파와 같은 비명을 지르며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은 B급 영화 속에서 그리 드문 장면이 아니다.
“벤, 내가 이걸 다 보고 나서 천국에 갈지 못 갈지는 나도 몰라. 지금은 보고 싶었던 걸 맘껏 볼 수 있어서 그저 좋군. 난 정말 운이 좋아. 죽은 뒤에도 포르노를 볼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나.”
마크가 껄껄 웃는다.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 가는데도 벤은 이상하게 작금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벤은 레이트너 교수가 슬픈 퀴어 무비의 주인공으로 죽었기를 원한 건 아니었다. ‘잘생긴 어린 제자를 보고, 인생의 황혼에서 성 정체성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노교수. 그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해 밤마다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며 주님께 기도하는데…….’ 그런 플롯의 영화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해야지 마크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게이 포르노와 바이브레이터, 티슈 한 상자만으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레이트너 교수의 꼴을 보아하니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좋지 않다. 과거 동경했던 남자의 진면목을 목격한 벤은 헤죽헤죽 웃으면서 마냥 기뻐하는 마크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볼 거예요?”
“자네의 성의를 생각해서 혼자 열심히 볼게. 자네도 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네만 다 큰 남자 둘이 게이 포르노를 보다가 사달이 나도 난 책임지지 않을 걸세.”
마크의 말은 절대 허풍이 아니었다. 진실함이 느껴지는 경고에 벤은 뒤로 물러났다. 유령이 체셔 고양이처럼 웃으며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마크가 우울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고소한 마음에 실룩거리며 웃는 벤에게 유령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보여. 내 안경은 챙겨오지 않은 건가?”
“안경이요?”
벤은 마크가 생전 꽤 눈이 나빴단 사실을 기억해냈다.
“안경은 당신 비밀 벽장에 없던데요. 안경이 없어도 어느 정도는 보이지 않아요?”
“난 고도 근시야. 내 안경이 정말 없던가? 내 비밀 벽장을 뒤져보라니까 멍청하게 정말 거기만 뒤져본 것 아니야?”
벤은 이를 악물었다. 게이 포르노 디브이디를 박스로 쌓아두고 볼 욕심에 이승을 헤매던 유령에게만큼은 멍청하단 소릴 듣고 싶지 않다.
“당신 방은 붙박이장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 방에서 내가 안경 하나도 못 찾았을 것 같아요?”
벤이 다녀온 마크의 집은 방금 이사를 마친 것처럼 살풍경했다. 마크가 깨달은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클리닉으로 가면서 내 짐은 다 거기로 옮겼지.”
“클리닉이요? 당신은 물에 빠져 죽은 것 아니었나요?”
“내 사망신고서는 내가 아니라 자네가 갖고 있잖나. 내가 물에 빠져 죽었단 사실을 난 자네한테 들어서야 알았네만.”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봐요. 어디가 문제가 생겨서 클리닉에 갔던 건데요?”
“노코멘트.”
“게이 포르노랑 섹스 토이를 한 아름 가져다준 사람한테 참 매정하게도 구네요.”
“자네야말로 매정하게 굴고 있잖아. 게이 포르노를 눈앞에 두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 유령에게 동정심을 좀 보여 봐.”
마크는 진실로 간절해 보였다. 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포르노가 고프면 그냥 맨눈으로 봐요.”
“잘 안 보여. 난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눈이 나빠.”
“가까이서 보면 되잖아요.”
“전자파 때문에 눈이 시려. 머리도 아프고.”
마크 유령이 창백한 얼굴로 이마에 손을 얹고 두통을 호소했다. 공익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전 유령입니다. 하지만 섬세하죠. 전자파는 유령의 눈과 머리에도 부정적 영향을 줍니다. 자녀분들에게 적정 거리 너머에서 TV를 시청하게 하세요.’
“안경이 없으면 렌즈를 써요.”
“자네가 마리 앙투아네트야? 빵이 없으면 비스킷으로 대충 뭉개라고? 내 렌즈도 집에 없었다며.”
“새로 맞추면 되잖아요.”
“내 렌즈는 800불짜리 맞춤 렌즈야. 내 안경은 일본의 장인이 만든 거지. 새로 맞춘다고 해도 제작에 이주일, 홍콩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일주일이 걸리지. 하아……. 내 운명은 너무 비참해. 벨아미의 신작은 포장을 뜯지도 못하고 치료소로 끌려갔었지. 내내 그 사실이 맘에 걸려서 죽지도 못했는데…….”
당신 죽었어요. 벤은 진실을 지적했지만, 유령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데 정신이 팔려 벤의 말을 못 들었다. 산처럼 쌓인 게이 포르노를 눈앞에 두고 못 보는 게 그렇게 통탄한 일인가.
“확실해요?”
“뭐가.”
“당신이 저걸 다 보면 이승에 대한 미련이 없어질 게 분명하냐고요.”
“당연하지. 내가 그럼 또 무슨 미련이 있겠나. 난 가족도 없고, 애완동물도 없고, 심지어 빚도 없어. 완결을 못 본 DVD 외에는 아무 데도 미련이 없어.”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고백 한 번 못하고 마음에 묻은 사람은요?
벤은 차마 묻지 못했다. 유령 본인이 이승을 못 떠난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는데 더 물을 수가 없다.
유령이 벤을 흘겨봤다.
“자네 눈은 좋지?”
“물론이죠.”
“그럼 자네가 내 눈을 대신해 보는 건 어때.”
“뭐요?”
벤은 유령의 해괴한 제안에 인상을 찡그렸다.
“난 벨아미의 신작이 어떤 내용인지 꼭 알아야 해. 프리즌 브레이크가 어떻게 완결 났는지도 궁금하고. 걔네 친형제 아니지? 내가 보기엔 둘은 게이가 분명하던데 친형제가 그리 끈적끈적할 리가 없지. 자네가 보고 내용이 어쩐지 설명 좀 해봐.”
마크의 푸른 눈이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벤 기옌 하나 정도는 기꺼이 살신성(性)인의 늪으로 자빠뜨릴 눈빛이었다.
벤은 5분 뒤 유령과 함께 게이 포르노를 보는 운명에 처해졌다.
“머리 짧은 백인 남자가 어린 백인 남자의 엉덩이를 잡아 쥐고 열심히 피스톤 운동을 하고 있어요.”
“여전히? 아까랑 똑같아? 자세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아깐 어린 쪽이 위로 올라가서 허리를 흔들었어요. 지금은 큰 남자가 어린 남자를 눕히고 뒤쪽에서 박고 있네요.”
“그런 걸 말해줘야지. 자세가 어떻고, 받아들이는 쪽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낱낱이, 상세하게 말해줘야 알지!”
마크 유령이 버럭 화를 냈다. 벤은 유령을 째려봤다. 벤은 출중한 어휘력을 갖고 있었다. 학창 시절 내내 작문 과목 최고점을 받았지만, 게이 포르노를 생중계하는 데는 그의 훌륭한 표현력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위에 있는 남자의 얼굴이 빨갛군요. 밑에서 쑤셔 넣고 있는 남자도 얼굴이 빨갛고요. 방금 작은 남자가 큰 남자더러 얼굴을 보면서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큰 남자가 작은 남자의 몸을 돌렸어요.”
“어떻게?”
“큰 자루를 돌리듯이 허리를 잡고 그대로 돌렸네요. 성기를 빼지 않은 채로 저리 돌리면 아프지 않을까요?”
벤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지만, 유령은 똥 씹은 얼굴을 할 뿐이다. 진중하게 화면을 보고 있던 벤이 낮은 탄성을 뱉었다.
“와!”
“뭔가?”
“침대에 있던 남자 한 명이 같이 달라붙었어요. 둘이 동시에 작은 남자를 안고 있네요. 저런 걸 뭐라고 하죠?”
“……원홀 투스틱.”
“저게 진짜 가능한 거였어요?”
벤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이 보기에 저건 진기명기지 포르노가 아니었다. 지극히 심드렁한 벤의 말투에 유령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졌지만 벤은 화면에 집중하느라 유령이 그를 노려보고 있단 걸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저 작은 남자는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네요. 저거 아무리 봐도 CG를 쓴 것 같은데요. 인간의 항문에 저렇게 큰 게 두 개나 들어갈까요.”
“포르노에 CG를 쓰는 감독도 있나.”
유령의 노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벤은 유령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낄낄댔다.
“제임스 카메론이 게이 포르노를 찍으면 CG를 빵빵하게 써서 3D로 찍겠죠. 맙소사, 저 상태에서 피스톤 운동을 하는데요? 대단하군요. 저건 섹스가 아니라 학대예요. 포르노를 그만 보게 하려는 건전한 목적에서 찍은 거라면 성공했어요. 야하긴커녕 무시무시해요.”
“정말이지…… 자넨 천재적이군. 야한 장면을 야하지 않게 말하는 것도 재줄세. R등급 포르노도 자네 입을 거치고 나면 전체 관람가로 전락하는군.”
유령은 좌절했다. 벤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자넨 너무 무미건조한 남자야. 내겐 게이 포르노를 질척하게 구술해줄 천재가 필요해.”
짐짓 우는 척을 하는 유령을 흘겨보다 벤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요.”
“어딜?”
“도서관이요. 거길 가면 노인들을 위한 돋보기가 있을 거예요. 당신 눈이 정말 당신 시력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유령이 되어서 실제 세계의 현상과 분리되어 그런 건지 확인을 해봐야겠어요.”
“자넨 지금 나한테 돋보기를 씌우겠단 얘기야? 그 웃긴 걸?”
“당신이 싫다면 안경점이라도 가죠, 뭐.”
마크는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입안이 마르는지 입술을 핥던 그가 바깥을 가리키며 물었다.
“밖이 한낮인데, 괜찮겠어?”
* * *
마크는 괴상한 유령이었다.
기절할 줄 알았고, 중국요리를 소화시켰으며, 한낮에도 멀쩡했다.
햇빛이 쏟아지는 순간 자신이 활활 타버릴 거라고 잔뜩 긴장했던 유령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간만에 포근한 겨울 햇살에 넋을 잃었다.
“괜찮아요?”
벤은 자신의 물음이 바보 같다 여겼다. 혹여 햇볕에 타버릴까 봐 입혔던 벤의 커다란 후드를 젖히고 유령은 고요한 캠퍼스와 청명한 푸른 하늘을 홀린 눈으로 바라봤다.
“멋진 날씨군.”
벤은 질린 얼굴로 유령을 흘겨봤다. 이 유령에겐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살짝 춥긴 해.”
유령이 부르르 떨었다.
“추위도 느껴요?”
“그러게.”
마크 역시 자신이 추위를 느끼는 걸 신기해했다. 별난 유령의 모습에 한숨을 쉬면서도 벤은 그에게 옷을 벗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벤은 자신의 겉옷을 깡마른 사내의 어깨에 얹어주면서 마크가 무채색 계통의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사망원인이 익사였기에 그가 병사했을 가능성은 접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클리닉으로 갔었단 마크의 말로 볼 때 그는 당시 매우 큰 병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걸음걸이가 왜 그래요?”
벤은 뒤에서 잘 따라오지 못하는 유령에게 물었다. 유령은 구부정한 자세로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슬리퍼가 질질 끌렸다. 묘한 걸음걸이에 벤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설마 엉덩이 안에 그새 뭘 집어넣은 겁니까?”
“아냐.”
“솔직히 말해요. 엉덩이 깝니다.”
무례한 청년의 말에 유령의 눈썹이 바짝 치켜 올라갔다.
“절대 아냐. 내 걸음걸이는 원래 이랬어.”
벤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유령을 바라봤다. 그의 기억 속 레이트너 교수는 절대 저리 걷지 않았다. 벤은 바이브레이터의 그립감에 황홀함을 느끼던 유령이 그대로 그걸 바지 안으로 밀어 넣었으리라 확신했다.
“자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보이는군.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내 엉덩이는 순결해.”
“그런데 걸음걸이는 왜 그래요.”
집요한 벤의 물음에 마크가 눈알을 굴렸다.
“병 때문이야.”
“?”
마크가 다시 한 번 벤의 시선을 피했다. 벤은 겉옷 사이로 비죽 나온 흰옷을 잡아당겼다.
“이거 환자복이죠? 당신은 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니었나요?”
“몰라. 아까도 말했지만 난 내가 죽었을 때 당시의 기억이 없네. 하지만 죽기 직전까지 아팠던 건 사실이야.”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아팠던 겁니까?”
마크가 입매를 굳혔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티가 역력했지만 벤은 물러나지 않았다. 유령이 투덜거리며 실토했다.
“병이 재발했는데, 손을 너무 늦게 썼어. 알아차렸을 땐 골전이가 된 상태라 통증이 상당했지. 쿵쾅거리면서 걸었다간 골절이 있었을 거야. 몸 상태 덕에 자연스레 조신하게 걷게 된 거지.”
“하지만 그건 당신이 죽기 전 이에요. 지금 당신은 건강해 보여요.”
“내가?”
유령은 놀라는 눈치였다. 벤은 눈매를 좁혔다.
“당신은 당신이 몇 살이라고 생각하죠?”
“난 육십 대의 노인이야.”
“내 눈에는 이십 대의 청년으로 보이는데요.”
“겉으로 보기엔 그렇겠지. 하지만 알맹이는 그렇지 않다네. 난 내가 젊어졌단 사실을 믿기 어렵군.”
“당신은 당신 머리숱이 많아진 걸 확인했잖아요.”
벤은 가까이 다가와 마크의 금발 고수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사내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건 참 쉬웠다. 마크가 청년을 노려봤다. 벤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크도 똑같이 복수하고 싶었지만, 그의 키와 팔로는 도망치는 벤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젊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난 얼마 전까지도 병원 침대에 앉아 소일거리 없이 빈둥거리던 환자였어. 그리고 그전엔 강의를 힘에 부쳐 하던 늙은 학자였고.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내가 젊어졌다고 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군. 거기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도 안 돼. 아무리 유령이 됐다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없잖나.”
벤은 자신이 몰랐던 마크의 숨겨진 모습 중 하나를 엿보았다. 남자는 지나치게 회의적이었다. 벤의 존재를 두고 ‘허상’이라고 말했고, 자신이 젊어졌단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신이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겠죠.”
“젊어지길 원하긴 했지. 하지만 실감은 안 나.”
“그렇다고 굳이 그렇게 병색이 완연한 노인처럼 걸을 필요는 없잖아요.”
“습관이야.”
“고쳐요.”
“쉽게도 말하는군.”
마크는 코웃음을 치곤 벤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가 신경에 거슬렸다. 질질 끌며 걷더니 결국 턱 하나 제대로 못 넘고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벤은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놀란 마크가 몸을 뒤척였지만 벤은 그를 세게 끌어안는 것만으로 상대의 몸부림을 쉽게 누를 수 있었다. 유령의 배를 손으로 눌러 고정한 뒤 구부러지고 앙상한 어깨를 쭉 펴게 만들었다.
“나랑 격투할 때 당신은 괴력을 발휘했어요. 당신 뼈는 멀쩡해요. 제대로 걸어요.”
“그냥 말로 하지 남의 배는 왜 쓰다듬나?”
마크가 기가 막혀 하며 소리쳤다. 벤은 황급히 손을 뗐다. 며칠 굶은 개처럼 납작하던 유령의 배와 날씬한 허리의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청년의 체취에 자극받은 유령이 굶주린 눈으로 벤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낯빛에도 불구하고 유령의 눈 점막은 분홍빛으로 달떠 있었다. 벤은 상대가 발정하기 전에 멀찍이 떨어졌다.
마크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사람들과 달리 산책 나온 개들은 유령을 알아보고 컹컹 짖어댔다. 마크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는 낄낄대며 개들에게 접근했다. 유령을 보고 짖던 개들이 마크의 광기 어린 미소에 꼬리를 말고 뒷걸음질 쳤다.
“마크!”
유령은 죄 없는 세인트버나드 종을 위협하며 슬금슬금 강아지의 근처로 다가가고 있었다. 벤은 유령의 옷깃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들의 목표는 캠퍼스 바깥에 있는 상점가였다. 유령이 자꾸 딴 길로 빠지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다. 제대로 산책을 즐기고 있는 유령에게 벤은 핀잔을 줬다.
“그렇게 좋아요?”
“그걸 말이라고 묻나. 물론 좋지. 통증도 없고, 나를 보고 쑥덕이는 사람도 없어.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멸시하지 않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고, 혹여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미련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난 죽었어. 모든 인간관계는 깨끗이 끝났는데 자연만은 변함없이 아름답군. 여기가 낙원이야.”
과연 그럴까. 유령은 죽은 뒤에도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게 마냥 기쁜 모양이지만, 벤은 이런 상황이 결코 좋게 끝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쪽으로 와보게.”
신이 난 유령이 벤을 이끌었다.
유령이 데려간 곳은 낙엽송이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 길이었다.
“대학 내에서 내가 좋아하는 곳 중 한 곳이지. 저 잎들을 봐. 둥근 잎이 아니라 바늘처럼 뾰족한 침엽수지? 하지만 상록수는 아니라네. 가을이 되면 붉게 물든 바늘 모양 잎들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우수수 떨어지고, 겨울엔 앙상한 가지 위로 눈이 덮이지.”
마크가 흐뭇하게 웃는다. 벤은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마크가 이 길을 좋아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유령은 벤에게 대학 내 가장 멋진 카페와 연인들이 남몰래 찾아드는 외진 동산과 도서관 내 무선 인터넷을 사용하기 좋은 지점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세상이 그대로라는 게 신기하군.”
유령은 자신이 자주 거닐었던 산책길 중간에 선 채 중얼거렸다.
“이끼와 담쟁이덩굴까지 그대로야. 이봐 벤, 봄이 오면 이곳에 나 대신 여길 한 번 와볼 생각 없나. 여긴 봄에 더 아름답거든. 크로커스와 붓꽃이 가득할 거야.”
벤은 봄의 풍경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하고 사과나무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날의 정경을 그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당신은 봄에 안 올 건가요?”
유령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내겐 늘 겨울뿐이라.”
벤은 유령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으로 추억에 빠진 유령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마크가 자신에게 알려준 장소들은 벤이 모두 알고 있는 곳이었다. 유령의 얼굴이 퍽 행복해 보여서 벤은 기분이 묘해졌다. 유령은 고요한 눈으로 수챗구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벤이 가까이 다가가자 마크가 피식 웃었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는 생전의 그것과 똑같아서 벤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러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웃는 두 남자가 얼마나 게이처럼 보일까 뒤늦게 자각하고 얼굴을 바로 했다.
“뭐 재미난 일 있어요?”
“예전에 수챗구멍에 지갑을 떨어뜨린 일이 기억나서.”
“아아-.”
“응?”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요.”
“자네도 지갑을 가방 안에 넣으려다 수챗구멍 안에 처넣은 적이 있어?”
“아뇨, 전 그렇게 덜떨어진 행동은 안 해요.”
덜떨어진 유령이 푸른 눈을 세모꼴로 만들어 벤을 째려봤다. 그래 봐야 귀엽기만 했다.
과거의 추억을 만끽할 권리가 유령에게만 있으란 법은 없다. 유령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벤은 자신 나름의 추억을 떠올렸다.
추억 속에서 그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와 있었다. 자신과 엇나가기만 하는 자유분방한 여자친구에게 질려 막 이별을 고하고 온 참이었다. 그 해는 몇 년 만에 바르셀로나에 눈이 온 기록적인 해였다. 유럽에 몰아친 폭설에 비행기 결항이 잇달았고 길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벤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자친구를 다른 남자의 집에서 묵도록 내버려둘 남자는 아니었다. 그 긴 거리를 차 없이 걸어갔던 벤은 벨라가 다른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광경을 목도했다. 그 순간 자신은 이 세상 제일가는 멍청이였다.
발은 얼어붙었고 돌아갈 길은 멀었다. 여자 하나만 믿고 귀중한 여비를 모두 털어 스페인까지 온 스스로의 멍청함을 탓하고 있을 때 그의 눈앞에 그에 맞먹는 우둔할 남자가 등장했다.
거리 한복판에서 노신사가 큰소리로 경찰에게 항의를 하고 있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벤은 그가 레이트너 교수라는 걸 알아차렸다. 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워하던 교수는 이내 진심으로 기뻐하며 반갑게 미소 지었다.
가방 안에 지갑을 넣는다는 게 손이 미끄러져 결국 수챗구멍으로 지갑을 다이빙시켰단 사정을 듣고 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똑똑한 척 다 하는 교수는 은근히 야무지지 못한 데가 많았다. 그의 지저분한 사무실을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벤은 세상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교수가 일상생활에는 영 소질이 없단 걸 알아냈다.
-경찰은 수챗구멍까진 자기 관할이 아니라는군. 스페인 경찰들은 관광객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나 봐.
벤은 교수가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자란 도련님 출신이란 걸 재차 확인했다. 벤은 근처 공사장에서 가느다란 쇠막대를 훔쳐왔다. 쇠막대를 지렛대 삼아 수챗구멍 위 철제 뚜껑을 들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교수가 어안 벙벙한 얼굴로 벤을 바라봤다. 감동한 얼굴에 벤은 절로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지갑을 돌려받은 뒤 교수는 기쁨에 눈을 빛냈다.
-몬주익 분수쇼를 보러 갈 텐가?
-네?
지갑을 찾아준 대가가 좀 묘했다.
-바르셀로나의 명물이라는데, 기왕 학회 때문에 왔는데 그냥 가기 아깝군. 자네도 계획이 없으면 함께 가볼 텐가?
벤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교수의 제안이 동성인 남자에게 건넬만한 게 아님을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휴가 내내 벨라와 싸우기만 했던 벤은 혼자였고, 교수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셜록 홈즈와 그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의사 양반처럼-벤이 생각하기에 그 의사는 자각하지 못했을 뿐 게이가 맞았다.- 둘은 달라붙어 바르셀로나 주변을 쏘다니며 겨울 휴가를 제대로 즐겼다. 화려한 몬주익 분수쇼를 구경하던 중 벤의 덩치에도 굴하지 않는 겁 없는 소매치기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마크가 소리 질러 쫓아내기도 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타파스 가게에서 하몬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프랑코 독재와 피카소,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도 했다. 둘은 가족과 연인이 가득한 타블라오에서 함께 플라멩코 공연을 봤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건 빼도 박도 못할 데이트였다. 바르셀로나 사람들 전부가 마크와 자신을 게이 커플로 봤을 것이다. 흐뭇한 얼굴로 추억에 젖어 있는 유령을 벤은 남다른 기분으로 쳐다봤다.
자신 옆에 있던 여자 넷을-벨라는 제외하고- 제거했으며 세련되게 자신에게 작업을 걸었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아둔하단 말은 취소다. 마크는 고단수 게이였다.
“추억은 아름다워.”
마크가 감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벤은 교수가 바르셀로나에서의 낯 뜨거운 추억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원했다.
“스페인 몬주익에 분수쇼가 유명하지. 자넨 가봤나?”
마크는 벤의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었다.
마크와 벤은 동산을 벗어나 잔디밭 샛길을 걸었다. 마크가 길이 끝나는 지점, 교정의 정문을 가리켰다.
“조금만 더 가면 대학을 벗어나겠군. 저쪽 길과 지하철역 사이에 대학생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있는데, 거기 내가 가장 아꼈던 제자가 살았던 집이 있어.”
“벤자민이요?”
“자넨 머리가 좋군. 짐작한 건가, 아니면 그냥 되는 대로 뱉는 건가.”
핀잔을 주긴 했지만 마크의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벤자민의 집에도 가보죠. 당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을 모조리 해보는 거예요.”
“나쁠 것 없지.”
햇빛이 유령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킨 걸까. 유령은 벤의 제안을 고분고분 따랐다. 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령은 바깥세상을 좋아했다. 왜 유령은 그동안 벤을 찾으러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을까.
-벤자민.
벤은 유령을 처음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어두운 복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헤매던 유령. 그는 벤자민이 대학을 떠난 걸 몰랐나? 마크가 대학을 떠날 수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지박령이라면 설명이 됐지만, 유령은 아무렇지 않게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대학의 정문 옆에 위치한 호수는 간만의 쾌청한 날씨에 가장자리를 제외하곤 얼음이 모두 녹아 있었다. 얼어붙은 호수 바닥으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물고기치고는 꽤 컸다. 벤은 불길함을 느끼고 마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마크.”
“왜 그런가? 뭐 겁나는 거라도 있나?”
벤은 어릴 적 호수에 빠졌던 라이언을 구하려다 함께 빠진 경험 이후 물 공포증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두려움은 막연한 물 공포증과는 달랐다. 얼어붙은 벤을 보고 마크가 재미나다는 듯 웃는다. 그는 벤의 별스러운 짓을 그저 웃어넘기곤 자신의 옷깃을 쥐고 있는 벤의 손길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유령은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바깥세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구부정했던 유령의 허리는 곧게 펴졌고 어기적거리던 걸음걸이는 분명해졌다. 벤은 그가 이대로 사라져버릴 거란 예감을 느꼈다. 너무 빨랐다. 벤은 아직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지도 못했다.
“마크, 잠시만요. 벤자민에 대해…….”
“응?”
마크가 무슨 소리냐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호수의 물줄기가 솟구쳤다.
벤은 검게 덩어리진 물체가 마크에게 손을 뻗는 걸 보았다. 호수 밑바닥으로 끌어당길 참이다. 진흙과 물풀에 얽힌 검은 물체가 마크를 잡아채기 직전, 벤은 유령이 입고 있던 후드를 쥐었다.
“벤?!”
마크의 발을 옭아맨 채 수면 안으로 잠겨가던 검은 덩어리가 몇 번 힘주어 마크를 당겼다. 벤은 손에 쥔 후드에서 실과 천이 뜯기는 소릴 들었다. 손바닥이 탈 것 같다. 벤은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다가가 마크의 상반신 전체를 잡고 매달렸다. 흙덩어리의 검은 괴물이 상황이 여의치 않자 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가운 금속이 벤의 뺨을 날카롭게 때렸다. 금으로 된 줄과 펜던트. 목걸이였다. 그제야 벤은 그 검은 덩어리가 인간의 머리와 그 위를 장식한 끔찍하게 긴 검은 머리칼이란 걸 알았다. 벤은 괴물의 얼굴이 왜 그토록 까만지 알고 있었다. ……물에 빠져 죽은 이의 얼굴. 새파랗기보다 까맣게 질린 그 얼굴이 기억에 있다. 오한이 손끝에서부터 밀려들었다. 벤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다가온 검은 괴물의 얼굴은 긴 머리칼이 엉망으로 달라붙어 있어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자신을 방해하는 인간을 향해 검은 덩어리가 이를 드러냈다. 눈도 코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입만이 기괴할 정도로 커다랬다. 소름이 전신에 달렸다. 공포로 얼어붙은 벤의 손아귀에서 후드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검은 덩어리는 마크를 끌고 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크!!”
정신을 차린 벤은 호수의 수면에 대고 유령을 불렀다. 차마 호수 안으로 헤엄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호수는 전체가 다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벤은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라이언……라이언…….”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한 형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정신없이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벤은 덜덜 떨다 그만 휴대전화기를 호수 안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젠장!!”
벤은 큰소리로 욕을 뱉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두려움에 오금이 저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성수가 남았단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성수는 마크에게 효과가 있었다. 호수의 괴물에게도 제발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벤은 물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쓰며 물병을 열었다. 그는 결국 성수를 호수에 붓는 데 성공했다.
작은 비명 끝에 검은 물이 출렁였다. 호숫가에 새하얀 남자의 몸이 떠밀려와 있었다. 벤은 마크를 향해 달려가 동그랗게 말린 몸을 젖혔다. 창백하게 얼어붙은 얼굴이 보였다. 물에 빠져 죽었다던 유령의 과거가 떠올라 벤은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마크, 정신 차려요. 제발요.”
벤이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유령은 의식을 잃은 채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비바람이 몰아쳤다.
벤은 놀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금 전 이른 봄처럼 따사로웠던 햇빛은 온데간데없고 하늘은 걸레 빤 물을 엎지른 것처럼 짙은 빛깔로 물들어 으르렁대고 있었다. 거친 비바람에 눈발이 한두 발씩 섞였다. 재난에 가까운 날씨였다.
마크를 옮기려던 벤은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유령이 사라진 데 놀랐다.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뛰어 교수 숙소로 가보니 다행히 유령은 벽장 안에 몸을 만 채 잠들어 있었다. 그를 침대로 옮겨 최대한 편안하게 눕히고 성수가 든 병을 꺼내 두 손에 꾹 쥐었다. 한참을 그리 경계했지만, 별달리 수상한 기척은 없었다.
벤은 창가로 다가가 혹여 아까의 그 검은 괴물이 얼씬거리지 않나 살폈다. 진정하기 위해 턱을 쓸어내리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이 차갑게 얼어붙었단 걸 깨달았다. 호숫물에 손을 담갔던 탓이다. 호수에 완전히 빠졌던 유령의 몸에서는 선뜩선뜩 한기가 느껴졌다. 유령에게 보온이 필요할까. 벤은 고개를 저었다. 마크가 유령이란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벤은 모포를 모두 꺼내 마크의 몸을 덮고 턱밑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괴물이 마크를 공격했다. 벤이 고집부리고 버텼다면 괴물은 벤마저도 공격했을 것이다. 그토록 괴상하고 오싹한 존재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벤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그들이 대학을 빠져나가는 게 가능하기나 한지 고민에 빠졌다.
‘차에 마크를 싣고 정문을 돌파하면 되지 않을까. 검은 머리칼 괴물은 얼마나 강할까. 그것의 정체는 대체 뭘까.’
머릿속 이러저러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찰나 의식을 잃은 채인 유령이 대뜸 벤의 옷깃을 꽉 잡았다.
“열, 아홉, 여덟…….”
잠에 취한 불분명한 목소리로 유령이 카운트다운을 했다.
“마크?”
보랏빛 입술이 벌어진 채로 굳었다. 여덟 후의 숫자는 세지 못한 채 깊게 잠들어버린 유령은 벤이 어깨를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얼 위한 카운트다운이었을까. 벤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