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윗의 탑-12화 (12/18)

솔로 - 오로지 당신만 2

바람이 찼다. 리스본의 겨울은 비와 돌풍이 잦았다. 도시가 위치한 위도와 경도를 의심하게 만들 만큼 추웠다. 안구 안 깊숙한 곳까지 와 박히던 날카로운 여름 햇빛을 믿고 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청년은 입고 있던 코트의 깃을 여미고 몸을 웅크렸다. 날씨를 핑계로 데생이고 뭐고 공치는 날이 이어졌지만, 이상하게도 조건이 좋지 못하면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반비례하게 커지곤 했다. 하지만 청년은 더는 무엇도 그릴 수 없었다.

청년이 그리지 못하고 있는 데는 날씨보다 다른 요인이 더 컸다. 그는 호텔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그의 연인을 떠올리고는, 그의 연인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 안의 약병을 꾹 쥐었다. 주머니를 처지게 하는 유리의 무게감과 함께 조잡한 병 안에서 알약들이 그가 걷는 걸음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치즈와 와인 따윌 팔고 있는 잡화점의 유리에 그런 그의 모습이 슬쩍 비쳤다. 고장 난 안경을 고치지 않고 맨눈으로 다니는 터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치기 어린 이십 대의 청년이 장식 없는 검은 코트를 갑옷처럼 두르고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과의 동반 자살을 위해 밀회 장소로 간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장의 잘 찍힌 흑백 사진과 같다.

그는 전형적인 스스로의 모습에 비죽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솔직히 인정했다. 자신은 그의 연인을 위해 진실로 ‘자살’을 감행할 수 있을까 아직 확신이 없었다. 그는 그 정도로 비장한 인간은 되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변덕스럽고 위악이 넘쳤다.

하지만 그 정도 비장한 인간이 되고픈 ‘욕망’은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 그의 ‘알바 공작부인(<알바 공작부인의 초상>, 1797년, 고야(Francisco De Goya). 히스패닉 소사이어티 오브 아메리카 뉴욕.)’, 독재로 신음하는 변방 국가의 수도에서 권력욕에 찌든 남편을 속이며 이십 대의 자신과 밀회를 즐기는 태양 같은 여자가 불안해한다면 그녀의 히스테리를 잠재우기 위해 그녀의 앞에 약병을 내어놓고 그녀에게 죽음을 담보로 한 영원한 사랑을 속삭여줄 용의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다 분위기에 휩쓸려 정말로 죽게 된다면 또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알바’는 자신의 행동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겁하고 싫어할까, 아니면 감동할까. 그녀가 동조해주기나 할까.

그는 유리창에서 물러나 돌바닥 위를 걸었다. 걸음걸이는 금세 그의 상념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딱딱한 타일 위로 구둣발 소리가 그를 뒤따라왔다.

약병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시선을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상상했다. 자신과 함께 죽어주겠다고 말하는 그녀를, 자신을 ‘안쓰러운 어린 짐승’이 아닌 ‘진짜’로 봐주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면. 그녀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확언해준다면.

머릿속으로 그 모든 모습을 세세히 그려나갔다. 기묘한 만족감이 배 아래쪽을 뜨끈하게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진실이 된다면 약병 안 알약들을 입안으로 털어 넣는 일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젊은 날의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섬뜩하게 느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자살자들이 끔찍한 신의 형벌을 받게 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신학도였다. 검은 스웨터와 낡은 바지를 입었으며 여생을 신에게 바칠 거란 열정을 간직했다. 자신의 은밀한 기쁨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수줍음과 자신이 사제의 길을 택했다는 걸 자랑하는 허세에 찬 인간은 되지 않을 거라 경멸하는 결벽증을 함께 갖고 있었다.

찬란한 어린 날은 67년의 가을, 10월의 반전 시위에서 끝났다.

젊었던 그는, 아니 어렸던 그는 아무 가치도 없는 전쟁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은 명예롭지도 않았고 하등 쓸모도 없었으며 전혀 선하지 않았다.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야 한다는 전쟁광들의 발언이 소름 끼쳤다. 폭격기가 죄 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몸을 태우는 광경은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시절엔 그도 비장했다. 청년이 되기 전, 아직 소년의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던 그는 정의로웠고 섬세했다. ‘예수께서 악과 싸웠듯’ 그도 전쟁을 부르짖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 거대한 인파와 함께 포토맥 강 동쪽에서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모든 걸 각오하고 몇 번의 각오를 다진 뒤 신학교를 빠져나온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가 각오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채 다가왔다.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펜타곤 내, 성난 시위대와 대치한 채 있던 일련의 고위 장성 중엔 하필 그의 백부도 있었다. 펜타곤의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히피의 무리 속에서 백부는 검은 옷을 입고 흥분으로 볼을 붉히고 있는 앳된 그를 대번에 알아봤다.

상원의원이던 그의 아버지는 군인인 그의 형보다 더 군인다운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그의 뺨을 세차게 때려 붙였다. 그는 탈영한 졸병처럼 얻어맞고 피를 흘렸다. 그해 가을이 끝나기 전에 그는 그가 불온한 악을 접하게 내버려 둔 신학 대학을 강제로 그만둬야 했다.

그는 펜실베니아 애비뉴에서 1년을 버텼다. 분노를 삭인 뒤 아버지가 기껏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하나뿐인 친아들을 검은 양 취급해 쫓아버리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아버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용서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가해자가 사과를 해오지 않는데 먼저 용서를 해줄 재주 따윈 그에겐 없었다.

정신을 달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했다. 성경을 베껴 쓰고 오래된 건물의 설계도를 투사해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아버지가 언젠가 다시 자신을 부르리라 믿었다. 그의 정신적 성숙은 그의 나이와 불일치했다. 여전히 유아기에 머물러 있었고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갈구했다. ‘아버지는 나를 진정 미워하는 게 아냐.’ 끝없이 바람을 되뇌었다. 시간은 그의 순진함을 비웃었다.

케네디를 죽인 조국은 4월의 어느 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마저 손쉽게 내주었다. 거리는 광기에 휩싸였고 전화기는 여전히 울리지 않았으며 세 번째 손가락에 자리 잡은 굳은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저렸다. 그가 묵고 있는 곳 주변엔 그가 그리지 않은 건물이 이제는 없었다.

그는 조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숙모에게 미국을 떠날 것임을 알리기 위해 시작된 대화가 숙모의 따뜻한 눈빛 아래 교묘히 변했다. 그는 대화 종반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나이가 들어가며 보통의 아버지들은 ‘네가 아니었으면 네 어머니는 죽지 않았을 텐데.’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부짖는 그에게 숙모는 나일 강 하구를 도는 크루즈 여행을 권했다. 햇볕 가득한 곳에서 유유자적하다 보면 슬픔이 달아날 것이라 말했다. 그 말은 전혀 옳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그는 어디서든 자고, 뭐든 먹었으며, 닥치는 대로 사랑하고 섹스했다. 1967년 10월 시위대에서 미처 토해내지 못해 남은 에너지가 그의 몸 안에서 꿈틀댔다. 그는 자신이 정욕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그곳에 가서야 알았다.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는 걸 병적으로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괴벽이 있단 것도 싫지만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랑을 갈구했고 갈구하는 만큼 서투른 짓들을 종종 했다. 몇 번의 관계가 좋지 않게 끝났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인간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의 로만 칼라를 찢어버린 뒤 그 안에서 두 번째 자아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자아가 선하고 정의로운 성정을 다 가져가 버린 터라 두 번째 자아는 더럽고 비틀렸으며 음탕한 게 당연하다 스스로를 비웃었다.

미국엔 아버지가 있었고, 파리는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광기와 피가 넘쳐났다. 공산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 속에서 과학자들이 핵무기가 세상을 끝장낼 거라 말했다. 사람들은 잘도 죽어가는데 아버지만 죽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길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 자신도 섬뜩해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갉아먹던 나날 중 ‘알바’를 만났다.

-당신은 건물만 그리나요?

숙모가 보내주는 돈을 다 써버린 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거리에 나왔지만, 그는 돈을 받고 사람을 그리는 일마저 소질이 없었다. 얼굴을 수그리고 얼치기 장사꾼티를 내며 건물의 외곽선을 일그러뜨려 자신의 정신 상태만큼 왜곡된 상을 그리고 있었다. 한 중년 여인이 다가와 그림을 흥미롭게 바라보다 물었다.

-사람은 못 그려요?

-당신이 건물이라고 생각하면 그릴 수 있어요.

신경질을 담아 답했건만 여자는 그 말에 깔깔거리고 웃었다. 망사 베일 아래 아름다운 갈색 눈이 그녀가 웃을 때마다 반짝였다.

여자는 그의 스케치를 사주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는 바짝 마른 그를 도저히 그냥 두고 보지 못하고 그녀의 단골 식당으로 데려갔다. 딱딱한 빵이 아닌 오랜만에 접한 따뜻한 식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숙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한 식당 안 온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비틀렸던 육신과 정신은 그 온기 덕에 노곤해졌고 그는 퍽 온화한 마음으로 자신의 여정을 거리낌 없이 여자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고 그녀와 잘 수 있기를 내심 바랐다. 어머니 없이 권위적인 아버지 아래서 자란 어린 시절과 그 이후 겪은 고뇌와 방황을 잘 버무리면 그것이 비록 하룻밤의 섹스가 가능한 만큼만 한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어렵지 않게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알바는 달랐다. 그녀의 몸을 얻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그 뒤로도 굶주린 그에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했고 그의 이야기를 동정심 어린 눈으로 들어주었다. 그녀는 그의 스케치를 사주었지만 그를 남창 취급하진 않았다. 왜 그녀가 자신에게 잘해주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답은 꽤 만족스러웠다.

-나는 재능 있는 청년들을 좋아해요. 당신의 건물은 아름답네요. 난삽하지 않고 유려해요.

그는 물 먹인 종이에 물감이 번지듯 자연스레 그녀에게 반했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말에 반했다가 점점 그녀의 살결과 그녀의 체취마저 좋아졌고, 결국 그녀라는 존재 전부를 사랑하게 됐다.

-당신을 알바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 넌 고야고? 틀렸어. 마크, 늙은 고야는 젊은 알바를 홀로 짝사랑했어. 넌 젊고 아름다워. 차라리 네가 알바야.

그녀 역시 자신에게 열정을 바쳐오는 젊은 그를 내심 싫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바’라는 별명을 받아들였으나 자신의 본명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라는 건 암시했지만, 자신의 남편이 누구인지, 그녀가 어디 사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인생 전부를 털어놓았다. 그가 본명 대신 할아버지에게 받은 이름인 ‘마크’를 쓴 건 그녀를 만나고 난 뒤부터였다. 마크라고 자신을 불러 달라 청하며 그는 그녀를 위한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게 됐는지를 매시간 고백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정성스레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정사 뒤 그녀의 몸을 그리고 있는 스스로가 전혀 낯 뜨겁지 않은 게 신기했다.

시간이 흐르고, 추억이 쌓이고, 몸을 겹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청년은 그녀가 점점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여겼다.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라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았다. 최근 그녀의 삶이 위태로워진 것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국가는 오랜 독재로 흔들리고 있으며 쿠데타의 기운은 일상적으로 꿈틀거렸다. 사람들의 표정은 냉정하고 걸음걸이는 지쳐 보였다. 공기는 질식할 것처럼 무겁고, 가판대에 놓인 신문의 헤드라인은 입안을 깔깔하게 할 만큼 텁텁한 것들뿐이었다. 그 역시 암울한 리스본이란 도시 속 한 조각의 퍼즐에 지나지 않았다. 밝은 미래와 안정된 생활과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린 채 따뜻한 난롯가에서 저녁을 맞이하게 될 거란 희망 따윈 그에게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십 대가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녀와 좀 더 비슷한 나이를 갖게 되길. 그녀와 추억을 공유할 수 있게끔 어서 빨리 늙기를.

그녀에 대한 사랑만이, 그녀를 안고 있을 때만 느껴지는 안정감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

그녀가 자신이 쥔 부유하고 명예로운 삶이 흔들리게 될 거란 예감을 내비칠 때면,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속내를 털어내고 약한 면모를 보이는 데 기뻐했다.

약병을 다시 한 번 쥐었다.

죽음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녀에 대한 욕망만큼은 흰 캔버스 위 그어 내린 푸른 선처럼 선명했다.

“알바?”

침대 시트가 어지럽혀져 있었다. 욕실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데 연인은 욕조 안에서 잠들기라도 한 건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별명을 불렀다. 알바, 알바?

문이 열렸다.

욕실의 물이 새빨갰다.

* * *

“……흐.”

마크는 신음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쓸데없이 길었던 수면이 악몽을 불러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안이 깔깔하다. 물 한잔을 마른 입안에 털어 넣으면서 그는 아직까지 생생한 꿈을 반추했다.

악몽 속에서 자신은 그의 젊은 시절 한때를 차지했던 리스본의 음울한 호텔방 안에 있었다. 얇은 시트와 모포 한 장, 있으나 마나 했던 노란 불빛의 전등과 나체를 방만하게 드러낸 채 자신을 바라보던 검은 머리의 여인을 생각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것이 추위 때문인지 추억 때문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잠을 잘 자지 못한 탓에 잔뜩 부은 얼굴이 세면대 위 거울에 비쳤다. 나이 들고 병든 초췌한 얼굴 아래로 벌거벗은 상반신이 보였다. 그의 몸 역시 얼굴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깡마른 뼈 위 얇은 거죽 한 장이 덮인 게 다인 비틀린 몸이다.

젊은 날에는 자신의 몸이 아름답단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바가 그가 지닌 젊은 몸의 유려한 선을 홀린 듯 바라볼 때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윤기를 띤 피부와 긴장을 품은 힘줄과 건강한 뼈대, 강건한 힘과 날렵함을 과시하던 근육들의 배치로 이루어진 조화를, 젊음이 부여하는 그 사치를, 정작 젊은 나날에는 너무도 평범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는 샤워 후 자신의 서랍에서 자신이 젊은 날 그렸던 그림 중 하나를 꺼내 보았다. 전시실의 복도에서 자신의 눈을 사로잡았던 쥬세페 드 리베라(Jusepe de Ribera)의 그림을 모사한 것이었다. 늙은이의 몸을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젊은 자신은 늙은 몸의 추함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데서 오는 운명의 진실성에 감탄했었다. 지금은 그저 싫기만 하다.

-알바,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워요.

-마크, 내가 네 어머니뻘 나이란 건 알고 있니? 네 말이 거짓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어. 넌 어떻게 하면 여자를 기쁘게 하는지 알고 있는 거니까. 네 말이 진심이라면 그야말로 큰일이야. 여자의 외모도, 나이도 가리지 않는 바람둥이란 최악이야.

-알바,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신 나이는 내겐 아무 문제도 안 돼요.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난 당신 같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햇빛 아래서도?

알바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 역시 빙긋 웃음 어린 얼굴로 답했다. 그는 고야의 그림, ‘옷을 벗은 마야’의 포즈로 과감하게 누워 있는 그녀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호텔 방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커튼을 걷어냈다. 햇빛이 그녀의 몸을 가감 없이 비쳤다. 세월의 흔적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흐트러진 선과 탄력 없이 늘어진 몸매. 그녀는 분명 나이만큼 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젊지도 않았다.

한순간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스친 당혹감을 분명 보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워요.’

그런 몇 가지 말로써 그 어색했던 상황을 무마했던 기억이 떠올라 늙은 그를 부끄럽게 했다. 40여 년 전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는 이제 그때와 달랐다. 그때처럼 유치하고 격정적으로 굴 수는 없었다.

초인종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짐을 실으러 인부들이 도착했다. 간밤 정리한 짐을 옮겨 싣고 그는 짐들이 자신이 입원할 치료소로 잘 가게 될지 주소를 재차 확인했다. 마지막 짐, 자신의 육신만 실으면 됐을 때 그는 차마 차에 올라타지 못하고 멈춰 섰다.

클리닉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에게 잠시 늦어진다는 연락을 했다.

“친한 제자가 약혼해. 참석은 못 해도 미리 축하한단 말을 하고 와야 할 것 같아.”

변명이었다.

* * *

그는 벤자민의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차를 대놓고 일부러 길을 돌아갔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껄끄러워 한 행동이었다. 몇몇 의심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책감을 느낄 어떤 짓도 벤자민과 하지 않았다. 맹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졌다. 그가 품고 있는 욕망을 누군가 엿보기라도 한다면 그는 간통한 여인들과 함께 투석형에 처해질 것이다.

“어라?”

그는 조금 전 봤던 휴지통과 가로등이 또 나타난 데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단 한 블록에 지나지 않는 거리를 그는 삼십 여분 째 헤매고 있었다. ‘내가 늙긴 늙었군.’ 씁쓸히 웃으며 도로 걸었다. 삼십 분을 더 헤맸다. 또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귀신에 홀린 것 같네.’ 웃어넘기기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필 진통제는 짐에 싣고 온 뒤였다. 야금야금 올라오기 시작하는 통증에 식은땀을 흘리며 재차 걸었다. 벤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 했다. 모든 게 별것 아니었다고, 그저 장난이었다고, 그러니 자네는 젊은 날을 아름답게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라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청년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벤의 마음에 한 점의 어둠도 깃들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얼마나 헤맸는지 시간을 확인하려 손목을 내렸다. 시계가 없었다. 분명 시계를 찬 것 같았는데 영문을 알 수 없다. 늑골 아래로 욱신거리는 통증이 더 심해졌다. 헤매는 건 점점 힘들어졌다. 구역질이 치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벤자민-.

벤자민?

해가 지고 있었다. 겁이 더럭 났다. 그가 얼마나 헤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영 이곳에서 헤매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두려움이 전신에 밀어닥쳤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자신은 단지 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의 집 근처를 헤맸을 뿐이다. 자신이 그 한 블록밖에 안 되는 거리를 몇 시간 동안 헤매고 있단 게 이해되지 않는다. 불가지한 일에 그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공포를 느꼈다.

“벤자민, 벤자민, 벤!”

가까운 곳에, 울타리 몇 개만 넘어가면 되는 곳에 청년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어떻게도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통증과 두려움, 애절함과 절망감이 그를 휘청거리게 했다. 마크는 목청을 다 해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청년은 답하지 않았다.

“-!!”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 그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자신도 모르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 어떻게 된 건 아닐까. 마크는 우스워져 머리를 뒤흔들었다. 겨울바람이 찼다.

주머니에 푹 쑤셔 넣은 손끝에서 알바를 위해 어렵게 구한 알약이 약병 안에서 찰락거렸다.

“알바?”

빨개진 귀를 문지르며 욕조 안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연인을 불렀다. 목도리를 내려놓고 코트를 벗어 걸었을 때도 연인은 욕실 안에서 기척 없이 누워만 있었다.

“알바, 거기서 자요? 감기 걸려요.”

연인에게 훈계하며 문을 열었다.

욕조 안이 시뻘겠다.

“!”

욕조 안에 새하얀 나신은 나이 든 여자의 것이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욕조 바깥으로 넘실대는 핏물과 욕조에 걸쳐진 손끝에 어린 푸르스름한 빛이 알바의 죽음을 알렸다.

그는 벽에 등이 닿기 무섭게 주저앉았다.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맹수 앞에 선 가젤처럼 몸이 굳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놀라 웅크려 든 채 덜덜 떨고 있는 그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마크?”

청년 한 명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년의 거대한 몸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더욱더 크게 보였다. 마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청년이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제가 죽이지 않았어요.”

“무슨 헛소리예요?”

“제가 죽인 게…….”

겁먹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다 마크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전혀 책임이 없다 변명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죽음의 냄새를 가득 품은 여인의 널브러진 몸이 두려웠다. 시체로 변한 연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조차 없다.

알바는 그를 남기고 죽었다. 그의 옷에 잔뜩 묻은 그녀의 피를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동공이 확장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마크는 몸을 떨었다. 청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또 퇴행했어요?”

“……뭐?”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던 청년이 마크의 팔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우악스런 힘이다.

“궁상떨지 말고 빨리 거기서 나와요. 하필이면 벽장이 뭡니까. 벽장 여는 사람 간 떨어지게 할 일 있어요?”

“벽장이라니……무슨…….”

청년은 더는 듣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달라붙으려 버티는 몸을 냅다 끌어당겨 어깨에 메었다. 마크는 자신의 몸을 종잇장처럼 다루는 청년의 괴력에 놀라 신음을 흘렸다. 물론 그건 약과였다. 이어진 청년의 기행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청년이 그의 바지를 벗기고 맨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뇌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무, 무슨 짓이야!!”

“몇 번의 아픈 경험으로 당신이 성적 수치심을 느껴야만 정신을 차린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경험으로 체득한 진리라고 해두죠. 내 자의와는 상관없어요. 맹세코 당신 엉덩이를 때리고픈 욕망은 한 톨도 없어요.”

청년의 말대로 마크의 정신은 대번에 돌아왔다. 핏물 범벅인 욕실이 아닌, 먼지가 날리는 어두침침한 방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방 특유의 쾌쾌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딘지 모르지만 익숙한 방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메고 있는 청년 역시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성적 수치심이니 뭐니 하는 청년의 말은 단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야?”

마크의 창백한 얼굴과 불안함에 떨리는 푸른 눈을 보고 청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재판이 생각보다 복잡해서 며칠간 도저히 들러 볼 틈이 없었어요. 당신이 이렇게 쉽게 그 세계로 끌려가 버릴 줄 예상했어야 했어요. 그나저나 당신 내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청년은 마크를 의자에 앉히고 유령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유령은 여전히 잔뜩 경계한 채 불안감에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벤이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신은 죽었어요. 말도 안 된다고 유령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그런 반응은 익숙해진 벤은 별로 열 받지도 않고 차분차분 말을 이었다. 당신은 62세가 되던 해에 물에 빠져 죽었어요. 당신의 유령이 학교 주변을 배회한다는 소문에……. 벤의 말에 몇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마크는 고개를 젖히고 한쪽 미간만 찌푸린 채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청년을 바라보고 있자 어째서인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체취에 몽롱한 기분이 든다. 마크는 스멀스멀 그에게 접근했다. 청년을 보자 익숙한 누군가가 떠올랐다.

“벤자민?”

“베네딕트요.”

벤은 마크의 익숙한 물음을 아무렇지 않게 부정했다.

벤의 대답에 마크의 마음속에서 실망감이 차올라 작게 찰랑거렸다. 62세의 자아를 되찾은 유령이 작게 투덜거렸다.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변호사 녀석이 아닌, 벤자민을 보고팠다. 벤이 딴청부리는 유령의 뺨을 꽉 쥐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설명을 해보시죠.”

“내가 뭘?”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좀 말해 봐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게 좀 설명해주겠나?”

벤이 으득, 이를 악물었다. 기가 차단 얼굴로 마크를 노려보다 벤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마크, 잘 들어요. 난 분명 퇴근 후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택시 뒷좌석에 앉은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 기억이 없어요. 내가 왜 한밤중에 이 음침한 방에 유령과 단둘이 있는지 설명을 해봐요. 내가 아까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당신은 압니까?”

“……나더러 뭘 어쩌라고.”

마크는 입맛을 쩝 다셨다. 벤이 노기등등한 눈으로 마크를 노려봤으나, 그는 할 말 따윈 없다. 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령의 집이었다더라.’ 라는 소름 끼치는 경험에 패닉에 빠지건 말건, 그건 벤의 사정이다. 유령은 무시하고 코를 킁킁댔다.

“저녁으로 스파이시 포크를 산 거야?”

벤이 치 떨린단 얼굴로 유령을 노려봤다.

“당신은 유령이에요. 유령이 음식을 먹겠다고요?”

벤의 지적에 마크 유령이 히죽 웃었다.

“벤, 이미 냄새나거든. 사와 놓고선 안 주려고?”

유령의 후각은 사냥개 못지않았다. 놀란 벤이 한마디 할 찰나, 잽싸게 달려가 벤이 먼발치에 놓아둔 봉투를 잡아챘다.

“오렌지 치킨도 있어!”

“마크!”

유령의 환호성에 벤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과연 마크 레이트너 유령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실황 중계하지 마세요. 관심 없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했길래 내가 여기 있는지 실토나 해요!”

마크는 콧노래를 부르며 치킨을 와구와구 입에 처넣었다.

“야, 달콤해. 정말 좋아.”

‘냠냠’ ‘으적으적’ 만화 속에서나 나올 의성어와 함께 유령은 게걸스럽게 중국 요리를 먹어 치웠다. 죽은 자가 따뜻한 음식에 행복해하며 볼을 붉히고 있다. 공통과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눈앞에 두고 벤은 한참 말문을 잃었다.

“벤, 왜 그리 표정이 안 좋아?”

“영화 <고스트>에서 유령인 패트릭 스웨이지는 동전을 움직이기 위해 엄청난 훈련을 해야 했어요. 필사적인 노력 끝에 그는 물리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됐고 악의 세력에 맞서 약혼녀를 구할 수 있었죠. 당시엔 퍽 신선한 설정이었어요. 인간이 육체가 아닌 정신과 영혼만으로도 에너지를 구현할 수 있다는 설정이 그 영화 이후부터 자연스러운 게 됐으니까요.”

“헤에, 그랬어?”

“당신은 그저 젓가락 하나 쥐여준 것만으로 중국요리를 먹어치울 수 있군요. 당신이 내일 화장실을 가겠다고 할까 봐 두려워요. 사망 신고서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유령이란 걸 안 믿었을 겁니다.”

“유령이 음식을 먹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자넨 유령도 음식을 먹는 게 가능하단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됐잖아. 달에 인류가 첫걸음을 디딘 데 버금가는 큰 발견이지.”

“논문은 당신이나 쓰세요. 양보할게요. 그나저나 어떻게 가능한 거지.”

“맛있군. 역시 살아 있길 잘했어.”

“당신은 죽었다니까요!”

“하지만 이리 먹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걸. 내가 죽었다고 단정할 수 있나? 내 몸은 죽었다지만 내 영혼은 살아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당신이 산 사람처럼 행동하고 그게 가능하다고 해서 당신이 산 건 아니에요. 죽은 존재인 당신이 이승의 음식을 먹는군요. 이건 일종의 오류예요. 당신의 영혼이 지닌 에너지에 의해 공간과 시간이 일그러지고 물질과 에너지의 순환이 어긋난 채 흐르는 기괴하고 특별한 ‘장’ 안에서 당신이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에요. 알겠어요. 난 당신 때문에 여기 끌려온 거예요. 당신이 내게 세뇌를 걸었는지, 아니면 당신의 힘으로 날 이동시킨 건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당신이 문제인 건 확실해요.”

“너드 같은 소리 집어치워. 난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벤은 유령의 절규를 못 들은 척했다.

“머리가 아프군요. 당신이 탕추를 먹고 있다고 해서 정말로 당신이 탕추를 먹고 있는 건지 자신할 수 없어요. 나도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당신의 영혼이 만들어낸 허상인지 구별이 안 가요. 당신이 들고 있는 탕추는 일그러진 공간 어딘가로 사라져 먼지가 되어버린 건지도 몰라요. 확실한 건 당신은 죽은 사람이고 이러한 일들이 자연스럽지도, 선하지도 않은 일이란 겁니다.”

정작 본인이 설명하면서도 벤은 ‘내가 들고 있는 껍질 깐 오렌지는 과연 아까 들고 있던 껍질 안 깐 오렌지와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는, 궤변으로 가득한 철학적 논제와 씨름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벤의 긴 설명을 듣고 있던 마크가 흐음, 콧소리와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내 존재 자체가 오류이기 때문에,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이 정상적 사고로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단 말이군. 그렇다면 묻지. 자넨 대체 뭔가?”

“베네딕트 쉘턴, 당신과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이죠.”

“그래, 자넨 산 사람이야. 이상하군. 산 사람이 어떻게 죽은 나와 공존할 수 있는 거지? 자넨 나와 특별한 관계라도 되는 건가? 자네 영혼은 죽은 자의 영혼과 얽힐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주파수를 띠기라도 한 건가 보군.”

마크의 이죽거림에 벤은 움찔 놀랐다. 하필 ‘벤’만이 마크의 유령과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마크는 자신이 ‘B’라는 남자를 잊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벤자민이란 사실을 마크가 알아차린 걸까.

“벤, 자넨 내가 죽었고 내가 지옥이든 천국이든 가야 한다고 말했지? 그 말은 틀렸어.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지 않아.”

“무슨 근거로요?”

“나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어. 원시 기독교에 지옥의 개념 따윈 없었어. 지옥의 개념이 생긴 건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받아들인 그다음부터이지. 애초 지옥이 없었다면 천국은? 역시 천국도 만들어진 개념일 가능성이 크지. 그럼 우리 친구 사탄은 어떨까. 일곱 살만 되어도 뿔 달리고 꼬리 달린 헐벗은 노출광이 실재하리라고 믿지 않을걸. 악마는 인간의 형상이 아냐. 신도 그렇지. 그건 그냥 인간의 마음속 존재하는 성정에 대한 비유일 뿐이야. 인격체로서의 신과 악마는 없어.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지.”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도 없죠.”

“그것참 멋진 논리군.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할 수 없으니 신은 존재한다.’ 그건 중세시대부터 너무 많이 써서 닳디 닳은 존재증명법 아닌가? 천사와 악마는 또 어때. 루시퍼와 미카엘? 자넨 그 얘길 믿나. 천사 군단과 악마 군단의 싸움 얘긴 밀턴이 지어낸 판타지야. 해리 포터에 질린 애들이나 신경 쓸 동화지.”

마크는 신이나 지껄여댔다.

“그래서 결론은요?”

“자넨 실재하지 않는 존재야.”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죠?”

“난 자네 말처럼 죽었어.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죽은 자와 산 사람이 지금 우리처럼 자연스레 얘기하고 식사를 나누는 건 불가능해. 이 모든 게 내 영혼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자네도 역시 그렇겠지. 자넨 내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야.”

기가 막혔다. 벤은 인상을 썼다.

“그래서요. 계속 그렇게 기억 속에서 계속 헤매고 있으려고요. 내 말 따윈 귀 막고서요?”

“아냐, 난 자네와 얘기하는 게 퍽 흥미로워. 자네 말을 무시하고 벽장 속으로 돌아갈 맘은 없어. 솔직히 자아를 잃고 과거의 가장 최악의 기억들을 헤매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이 아냐. 물론 나는 자네가 죽어가는 내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리 나쁘진 않아.”

꿀꺽, 마크는 침을 삼켰다. 벤은 혀를 찼다.

“원하는 게 있어서요?”

“딱히 원하는 건 없어. 그저 자네와 대화를 나누면…… 적어도 심심하지 않으니까.”

유려하던 말투가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말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하는 게 전조가 보였다. 벤은 유령의 손목과 발목을 묶을 만한 적당한 천을 천연덕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가방엔 성수도, 가죽끈도 충분했고 만일에 대비한 수갑도 있었다.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마크가 희게 일어난 입술을 혀로 핥았다. 벤이 여자였다면 어느 정도 반응을 보였을 테지만 그는 동성의 남자에겐 관심이 없었다. 마크가 노골적인 유혹의 제스처를 취해 오는 걸 시큰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남자가 벤에게 슬그머니 다가가려다 탁자 위 놓인 천과 자신만만하게 앉은 벤-정확히 말하면 벤이 힘을 줄 때마다 혈관이 불끈거리는 그의 팔뚝-을 번갈아 바라보곤 도로 자리에 앉았다.

“벤, 내 머릿속에서 이 기묘한 영상들이 빙빙 도는 것도 내가 다 죽어서 그런 건가. 자네 말처럼 죽은 뒤에서야 이성으로 잠재우고 있던 내 리비도가 깨어나서 그런 거라고? 내가 생전에 다 못해 애통해했던 욕망들이 내 육신이 죽어 사라진 뒤에도 에너지의 형태로 남아 날 조종하고 있는 거야?”

“당신 스스로도 당신이 이상하단 자각은 있죠?”

“물론이야. 난 생전에 젊은 사내의 체취를 맡는 것만으로도 발정할 만큼 건강한 사람은 못됐어.”

“원래 말투가 그렇게 노골적이세요?”

“타고난 거야.”

마크의 몽롱한 푸른 눈이 부담스러워 벤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레이트너 교수는 생전엔 이렇지 않았다. 괴짜이긴 했어도 적나라하고 천박하진 않았다. 그건 다 내숭이었던 걸까.

“내게 문제가 생긴 건 확실해. 머릿속이 종종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해지고, 핑크빛 욕정으로 가득해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워. 벤자민과 내가 킹사이즈 침대에서 카마수트라를 읽으며 기괴하고 격렬한 체위를 시연하는 동영상이 3D 입체영상으로 좌르륵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자네의 허벅지 사이에 머리를 박고 말지. 미안, 고의는 아냐.”

“미필적 고의이긴 해요.”

“3할 정도는 내 자의가 들어간다고 해두지.”

자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인간이 그토록 집요하게 자신의 속옷을 핥아댔나. 벤은 마뜩잖은 얼굴로 마크를 쳐다보았다.

“마크, 나랑 자고 싶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벤의 물음에 마크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기찻길 중앙에 선 톰슨가젤 모드로 진입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유령이 30초 후 꿀꺽, 크게 침을 삼키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누구와도 자고 싶지 않아. 특히 베네딕트 자네랑은 얽히고 싶지 않네. 자넨 너무 무식하게 생겼어.”

지나친 부정은 의심을 불러오는 법이다. 목소리에 어색한 티가 뚝뚝 흘렀다. 거짓말. 벤은 유령의 눈이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더듬고 있는 걸 느꼈다.

“영 믿음이 안 가네요. 당신이 심란할 정도로 날 유혹해댄 건 알고 있죠?”

“내가, 자넬?”

“몸으로 육탄공격을 몇 번 했죠. 기억 안 나요?”

“기억이 안……나진 않는군.”

마크의 얼굴이 얻어맞은 사람처럼 빨개졌다. 벤은 채도, 명도 면에서 모두 선명하기 이를 데 없는 붉은 남자의 얼굴에 잠깐 동정심을 느꼈다. 선량한 벤은 마크가 저지른 추한 짓 1번부터 10번까지 미주알고주알 꺼내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 주었다.

흠, 마크가 헛기침하며 빨개진 얼굴을 수습했다. 뻔뻔한 남자는 금세 평정을 되찾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유혹은 아니었어. 그건 그냥 발정이었지. 고양이가 개다래나무 아래서 뒹구는 거랑 똑같은 수준인 거야.”

“입술로 지퍼를 내리고 엉덩이를 조몰락거리면 보통은 같이 자자는 의미로 받아들이죠.”

마크의 추한 짓 2번을 슬쩍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유령의 얼굴은 참혹해졌다. 뻔뻔하게 달라붙었던 평소답지 않다. 오늘은 반응이 색다르다.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싶었다.

벤은 시험 삼아 자신의 다리를 확 벌렸다.

집요하게 벤의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유령이 놀라 홱 고개를 돌렸다. 벤은 유령의 얼굴 위 어린 갈등과 균열을 엿보았다. 어린 시절 읽었던 만화의 한 토막이 생각났다. 천사와 악마가 인간 옆에서 서로 싸워대던……. 마크의 싸움도 양상이 그와 유사했다. 욕망과 이성이 싸우고 있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보였던 지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벤은 상대의 반응을 한 번 더 떠봤다.

“그럼 이건 어때요. 당신이 자기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 사이를 핥아달라고 빌었잖아요. 그런 게 유혹이 아니면 대체 뭐가-.”

듣고 있던 마크가 말을 끊었다.

“엉덩이 얘길 한 번만 더 하면 자네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겠네!”

마크의 뜬금없는 반응에 놀라 입을 벌렸던 벤은 마크의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는 걸 보았다.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당신 설마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겠죠.”

“내가 입에 담았던 건 다 내 상상이었어! 난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단 말이야. 난 생전에 혹시나 누가 내 속내를 훔쳐볼까 봐 전전긍긍했었어! 맙소사, 내 변태적인 욕망을 내가 다 불고, 거기다 직접 시현까지 해 보였다니! 죽음 뒤 욕망에 솔직해지는 건 좋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난 속은 다 곪은 발정 난 노인네였어도 겉만은 품위 있고 멋진 미중년이었단 말이야. 강철의 의지로 쌓아온 내 이미지가……. 내 페르소나가 이토록 허무하게 벗겨지면 안 되는 거야. 아무리 이게 내 머릿속 상황이라고 해도 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내 고고한 이미지가, 내 품위가 뭐가 되냐고!”

마크는 의자에 얼굴을 묻고 과장되게 비통해했다. 벤은 대체 이 남자가 뭐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크, 패닉을 일으키기엔 너무 먼 곳까지 와 버린 것 같은데요. 당신은 이미 쪽팔릴 만한 짓은 다 했어요. 그만 괴로워하고 좀 더 생산적인 고민을 해보죠. 난 일단 이 사무실을 벗어나야겠어요. 난 절대 유령과 단둘이 밤을 함께 지새우지 않을 겁니다. 무섭단 말입니다. 날 어서 집으로 돌려보내 줘요!”

벤이 단호히 외쳤다. 마크는 부아가 치밀었다. 만남이 계속되면서 느낀 바이지만, 베네딕트란 이 녀석은 벤자민과 전혀 달랐다. 그는 유령에게 호기심을 품고 이런저런 참견은 해댔으나 결국 결론에 이르러서는 늘 자기 안위만 걱정하는 이기적인 소시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유령을 보고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욕정을 돋우긴 했다. 덩치는 산만한 남자가 안색이 새파래져 도망치면 불능인 유령의 하반신에도 전류가 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벤은 딱 그때까지만 귀여웠다. 벤은 마크가 자기 힘으로 충분히 제압된단 걸 깨달은 다음부터는 막말과 폭행을 아무렇지 않게 해댔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무표정하게 자기 할 말만 줄줄 늘어놓는 무심한 꼴이 밉살스럽다. 마크는 놈을 한순간 벤자민으로 착각한 자신을 바보라고 욕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정말로요?”

“…….”

유령이 순간 헛숨을 들이쉬는 걸 벤은 놓치지 않았다.

“뭔가 했죠?”

“난 그저 자네가 다시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했을 뿐이야.”

“뭐요?”

“난 외로움 많이 타는 가엾은 노인이야. 살아 있는 사람 누구와도 몇 년간 대화 한 번 못 해본 가엾은 유령이기도 하지. 자네가 빨리 나타나 주길 바란 게 뭐가 나빠?”

“난 슬슬 진심으로 당신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팔뚝 위 오싹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벤은 푸르르 몸을 떨었다.

“유령을 만나 엮인 것만도 충분히 무서운데 저주까지 옮게 됐으니, 원.”

“날 지금 병균 취급하는 건가?”

벤은 아니란 답을 내놓지 않은 채 문을 열고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벤?”

“잘 있으세요. 당신과 얘기하다 보면 점점 더 무서워지기만 하네요.”

벤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도망쳤다. 마크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벤은 혹 대학 내에 들어온 택시가 있을까 싶어 주변을 돌아봤다. 삭막한 풍경만 눈에 들어왔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늦은 시각, 인적이 끊긴 거리 위로 파란 달빛이 쏟아졌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는 거리는 어두침침하고 음산했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그림자가 교수동 건물 벽에 드리워졌다. 벤은 옷깃을 여미며 대학의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수 기숙사에선 후문이 정문보다 가까웠다.

“벤, 어딜 가는 건가?”

유령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벤은 코트 깃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음산한 겨울 길을 홀로 걷는 자신과 그런 그를 목 놓아 부르는 유령이라니…….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벤은 마크와 우연히 대면한 이후 일어난 모든 일이 한 편의 촌극 같다 여겼다. 마크는 가엾은 남자이고, 동정심이 일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를 위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라이언이 벤의 마음속에서 외쳤다. ‘뼈를 불에 태워!’ 성불? 웃기는 소리다.

“꺼져요. 난 집에 가서 잘 거예요.”

“무슨 그런 심한 말을…….”

“심하긴요. 당신 옷차림이나 보고 말해요.”

마크가 자신의 차림새를 살폈다. 파자마 차림의 환자복이 어디가 어떻단 말인가. 허연 옷을 펄럭거리는 유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벤은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유령이라니……. 몇 년간 법전만 뒤지며 살아온 현실적인 청년은 아직까지도 이 비논리적인 상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벤은 지금도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자고 일어나 보면 마크란 존재는 사라지고 없고, 자신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간밤 심란한 꿈을 한바탕 꾸었다고 중얼거리게 될 것 같다.

후문은 닫혀 있었다. 벤은 혀를 찼다. 늦은 시각이라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벤은 담을 넘는 게 낫겠단 결론을 내렸다.

“자넨 그 담을 못 넘을 거야.”

유령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건 희망 사항이겠죠.”

이런 낮은 담 따위 못 넘을 리가 없었다. 벤은 훌쩍 몸을 띄웠다.

털썩-. 벤의 발이 도로 땅에 닿았다. 벤은 담이 생각보다 높은 데 놀랐다. 분명 눈으로 보기엔 낮은 담이건만 몇 번을 몸을 띄워도 끝에 손이 닿질 않았다. 벤은 평범한 장정보단 머리 하나가 큰 장신이었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마크, 나한테 장난치지 마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마크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벤은 다시 한 번 시도했다. 결과는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당신…….”

벤은 마크를 노려보았다. 유령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벤을 바라봤다.

“벤, 자네야말로 장난치지 말고 빨리 넘어. 진짜로 그 낮은 담을 못 넘는 건 아니지?”

“이봐요.”

“비켜봐. 내가 한 번 넘어 볼 테니.”

유령이 다가와 풀쩍 몸을 띄웠다. 벤과 달리 마크는 손쉽게 담 끝에 손을 짚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땅이 그를 쭉 잡아당기기라도 한 양 마크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벤이 재빨리 그를 받쳐주었기에 나뒹구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벤은 심통 난 얼굴로 되받아쳤다.

“당신이 하는 일이 그렇죠.”

“뭐가 어쩌고 어째?”

심술궂게 이죽거려줬더니 마크가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벤은 손을 문질렀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그가 아니었다. 벤자민을 어지간히 아는 이들은 그가 난 놈이고, 독한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피웠던 담배를 전혀 힘들지 않고 끊었으며, 남들은 토할 정도로 괴로워한 로스쿨 공부를 아르바이트를 하며 끝마쳤다. 고작 담장 따위야……. 벤은 먼 곳에서 달음질해 와 도약했다. 상반신이 반대쪽으로 넘어간다 느낀 찰나 뭉쳐진 공기 덩어리가 그를 덮쳤다.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은 양, 벤은 돌풍에 눌려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쿵-

충격에 벤은 눈앞이 하얘지는 걸 느꼈다.

“벤?”

유령이 놀라 다가왔다. 벤은 유령이 팔을 들어 부축하는 걸 밀어냈다.

“젠장, 방금 뭐예요?!”

“뭐가 말인가?”

“그 공기, 맙소사. 당신은 못 봤어요?!”

유령은 전혀 모르겠단 얼굴로 벤을 쳐다봤다. 마크의 멍청한 얼굴에 힘이 더 빠졌다. 벤은 시큰거리는 온몸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끝내 실패한 둘은 다시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벤은 마크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퍼렇게 얼어붙은 두 뺨을 문질렀다. 말도 안 되는 악몽에 휩쓸린 기분이다. 그는 지금쯤 따뜻한 거실에 앉아 탕추를 먹으며 철 지난 영화를 봐야 옳았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네요.”

“나야말로. 유령이 귀신에게 홀리는 게 가능해?”

“말장난 말고, 심각하게 상황을 받아들여요. 당신이 뭔가 한 게 분명해요.”

“내가 마법사라도 되나? 난 평범한 유령일 뿐이야.”

유령이 평범할 수도 있나. 벤은 뻔뻔한 유령을 흘겨봤다.

“당신은 탕추를 먹는 유령이고, 취향인 근육질의 남자가 곁을 못 떠나게 저주를 걸 수 있는 존재죠. 원하는 게 뭐예요? 무슨 이유로 날 잡아두는 거죠?”

“난 자넬 잡아둔 적 없네.”

“열망한 적도 없어요?”

마크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크에게 다가섰다. 겁먹은 토끼처럼 눈치를 살피던 마크가 짙어진 벤의 체취에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사달이 나기 싫으면…… 이 이상 다가오지 말았으면 좋겠군.”

뻔뻔하게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유령이 답지 않게 점잔을 떤다. 벤은 아니꼬운 얼굴로 마크를 내려다보다 이내 뒤돌아섰다. 마크와의 몸 씨름보다 더 건설적인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벤은 휴대폰을 꺼내 배터리를 살폈다. 아까 퇴근하면서 봤던 그대로 절반이 얼마 안 되는 양이 남아 있었다.

“라이언? 나야. 늦은 시각에 미안해. 이상한 일이 생겨서 말이지.”

벤은 라이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낄낄대며 웃던 라이언은 이야기 중반쯤 웃음을 멈췄다. 자못 심각해진 라이언의 목소리에 벤의 불안감이 오히려 더 커졌다.

「벤, 솔직히 말하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네가 거기 오래 있어서 좋을 일은 없다는 거야.」

“나도 알아. 나라고 여기 있고 싶겠어?”

「그러기에 처음부터 내게 맡기라고 했잖아. 왜 자꾸 마크란 그 사람과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건데? 베니, 정신 차려. 네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네 넓은 오지랖이 도움된 적이 있었어?」

“라이언, 그런 게 아냐. 알다시피…….”

마크와 자신이 평범한 인연은 아니었다고 말하려다 벤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유령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오랫동안 안경을 써서인지, 원래 생김새가 그런 건지 마크의 안구는 살짝 돌출되어 있어 커다란 눈이 더 커 보였다. 깜빡임이 적은 푸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실은 너 벤자민 맞지? 왜 내가 죽은 뒤 한 번도 내 무덤에 찾아오지 않은 거니? 넌 한 번도 날 그리워하지 않았어. 내가 네겐 그런 존재밖에 안 됐나?’ 마크가 원망에 찬 목소리로 물어온다면 실은 변명할 말이 없다.

벤은 별 성과 없이 전화통화를 끝냈다.

유령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어째서인지 벤은 마크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크 레이트너란 남자는 누군가의 눈치를 살필 사람이 아니었다. 마크는 대학 창립자의 외손자요, 본인도 학계에서 이름난 학자인데다가 꼭 직업이 없어도 충분히 먹고 살만큼의 재력도 갖춘 남자였다. 벤은 마크와 함께 다니던 시절, 마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자신과 다른 유복함을 엿보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눈치를 살핀다고? 벤은 일부러 문 가까이 걸어가 봤다. 문고리를 잡자 유령이 얼굴을 찡그렸다. 벤은 깨달았다. 마크는 벤이 이대로 떠나가 버릴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마크, 아까 나더러 뭐랬죠? 당신은 외로움에 찌든 가엾은 할배라 내가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했던가요.”

“할배란 말은 안 했네.”

“노인이나 할배나 그게 그거죠. 어쨌든, 그 말 진심이었어요?”

“당연히……진심이지.”

마크가 눈알을 굴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벤은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육십 대 유령의 고백이기에 ‘난 외로워. 네가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란 달콤한 말이 마냥 기분 좋지만은 않다.

벤은 훅 한숨을 내쉬었다. 마크는 벤이 그의 곁을 떠나길 원하지 않았다. 결국, 벤은 유령의 뜻대로 그의 곁에 남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매우 분명했다. ‘마크, 내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요. 제발 날 돌려보내 줘요. 어쩌고저쩌고…….’ 딱 3분 정도 유령을 말로 설득해 유령의 마음을 돌려놓으면 끝이었다.

현실의 유령은 아까 먹다 남은 탕추를 먹으며 혹여나 벤이 떠날까 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다. 벤은 미천한 지식을 업그레이드할 필요성을 느꼈다. 라이언 때문에 오컬트의 세계에는 발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벤은 벽을 더듬어 정리된 선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다. 전선을 보기 싫지 않게 숨겨놓은 판을 뜯어내 그 안에서 모뎀 선을 찾아냈다. 다행히 인터넷이 연결됐다. 벤은 구글 검색 창에 ‘유령’이라고 쳤다. 눈알이 빠질 정도가 되어야 끝날 검색이 시작되었다.

“……인터넷은 정보의 쓰레기장이에요.”

벤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문지르며 신음했다.

“쓸 만한 정보가 하나도 없군요.”

“그런가.”

마크가 짐짓 안타까워하며 다가왔다.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벤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유령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한 청년은 심사가 좋지 않았다.

“그저 그런 소리들뿐이에요. 유령의 한을 풀어주면 된다. 뻔한 소리죠. 당신의 한을 내가 무슨 수로 풀어 주겠어요?”

“내 한?”

“당신의 욕망이요. 난 내 엉덩이를 깔 마음이 전혀 없어요.”

“…….”

벤이 보고 있던 웹사이트 화면을 검지로 가리켰다. 마크는 화면이 잘 보이질 않아 눈을 깜빡였다. 벤은 그것이 고스트- 어쩌고, 하는 드라마 팬 게시판이라고 알려주었다. 마크는 불신에 찬 눈으로 벤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요. 죽은 이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 남는 경우는 몇 가지가 있대요. 비명횡사했거나, 미련이 남았거나, 자신보다 더 강한 악령의 저주에 잡혀 있거나. 당신의 경우는 아무리 봐도 두 번째 경우예요. 대게 소원을 들어주면 죽은 사람은 행복해하며 천국으로 떠나간다는군요. 대체 당신 소원은 뭐예요?”

“내 소원?”

“하반신에 관련된 것 말고요. 당신이 왜 이승에 남았는지 그 이유를 좀 생각해봐요.”

벤이 유령에게서 중국요리 포장지를 빼앗아버렸다. 그렇게 먹고도 배가 고픈지 마크는 연신 종이 상자를 만져댔다. 그 산만한 태도가 벤은 영 신경이 거슬렸다. 마크가 볼멘 얼굴로 벤을 바라보았다. 벤은 어깨를 으쓱였다.

“날 여기 가둬놓으면 이런 것도 더는 못 사와요.”

마크의 얼굴이 자못 심각하게 변했다.

자신의 성불에는 별 관심이 없던 유령은 탕추를 활용한 벤의 구슬림에 넘어갔다. 그는 안절부절 방 안을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멈칫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그게 뭐죠?”

“……자네 말처럼 죽어서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긴 한데.”

“그게 해답일지도 몰라요.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요.”

“내 컬렉션.”

벤은 눈썹을 치떴다. 벤자민에 대한 애절하고도 슬픈 얘기를 털어놓을 줄 알았건만, 교수는 전혀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죽는 순간 내가 떠올린 생각은 딱 하나야. ‘누가 내 컬렉션을 발견하면 어떡하지?’였지. 내가 손수 모은 소장품이 내 후손 중 누군가에 의해 발굴될 생각을 하면 난 심장이 떨려서 잠도 안 와.”

“…….”

벤은 어깨에서 쭉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성인용품을 몰래 사 집에 가던 남자가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남자는 코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주섬주섬 흩어진 성인용품을 줍다 쓰러졌다지.

“당신 컬렉션이란 게 설마…….”

“다 알면서 뭘 묻나. 벤, 내 생각에 난 그 물건들 때문에 저승에 못 간 게 확실해. 부탁이 있네. 내 집에 가서 벽장 안에 숨겨둔 내 보물들을 찾아내 소각해주게!”

“마크, 조금 전 내가 담을 못 넘었던 것 기억 안 나요?”

“그, 그랬지.”

“그래요. 한 번 더 시도해보죠. 이번에 성공한다면 당신은 구제불능의 얼간이에 욕망만 남은 음흉한 노인네란 딱지를 뗄 수 없을 겁니다.”

벤은 음험하게 씹어뱉곤 달음박질하다시피 해 후문으로 돌아갔다. 뒤따라온 마크가 벤을 불렀다.

“벤, 벤, 이번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게 꼭 내 잘못이란 보장은 없는 거야? 그렇지?”

겨울밤, 맑은 공기 덕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생생하게 잘 들렸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땅굴을 파서라도 탈출할 거니까 걱정 마요!”

벤은 이를 갈며 뛰었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도약해 담벼락 턱을 손으로 짚었다. 된다. 한 번 더 벽을 박차 그는 그대로 담을 넘었다.

“벤! 벤, 꼭 돌아와야 해!!”

담을 넘는 순간까지 들리던 유령의 목소리가 담을 넘고 나자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벤은 어리둥절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달빛에 비친 죽은 핏빛색 담벼락만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매정한 녀석, 꽁지에 불이라도 붙었나…….”

벤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담을 넘었다. 마크는 투덜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손끝에 아까 벤을 부축하며 느꼈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청년의 몸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건강한 인간의 살갗이 품은 놀라운 촉감에, 담벼락 아래서 마크는 잠시 넋을 잃고 감탄하고 말았다. 그 커다랗고 강인한 몸이 자신의 몸을 으스러질 정도로 뜨겁게 끌어안는 환상이 머릿속을 점령한다. 마크는 비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벤자민이 아니다.

-마크.

유령은 고개를 돌렸다. 환청이었다. 검은 머리칼을 지닌 잘생긴 청년은 그곳에 없었다.

‘마크’, 기억이 다시금 벤자민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유령은 눈을 깜박였다. 190센티를 훌쩍 넘는 몸, 꼿꼿했던 뒷모습, 표정이 풍부했던 갈색 눈동자, 어린아이처럼 잘 웃던 커다란 입과 섬세한 콧날, 혈색 좋은 뺨과 기분 좋은 목소리. 모든 것을 아직도 기억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마크는 심지어 벤자민이 매고 다녔던 목도리의 짜임새마저 기억했다. 그것들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언젠가는 기억도 마모되어 흩어질 것이다.

벤이 사라지자 방안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불현듯 두려움이 밀려왔다. 마크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다. 벤이 무어라 지껄여댄 통에 기분이 묘했다. 마크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두렵지 않아.” 고요는 그가 입을 닫기 무섭게 다가와 온몸을 짓눌렀다. 시끄럽고 덩치 큰 청년의 존재가 아쉬웠다.

벤이 돌아오기 전까지 버텨야 했다. 청년이 있을 때만큼은 그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성을 잃는 게 두렵다. 모든 걸 잊어버린 채 백치처럼 구천을 떠도는 건 끔찍했다. 마크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벽장 안에서 자극적인 냄새가 느껴졌다. 벤에게 고백하지 않은 사실 중 하나가 바로 그 벽장에 관한 것이다. ‘벽장’은 마크에게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자 그의 이성을 탈색시키는 공간이기도 했다. 마크는 이성을 잃었다가 종종 벽장 안에서 정신을 되찾았지만 정작 자신이 왜 벽장 안으로 들어갔는가는 기억하지 못했다. 마크는 솔직히 그 공간이 두려웠다.

벽장 안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유령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곁을 주춤주춤 맴돌다 마크는 결국 벽장 안을 열었다. 흰색의 포장 용기가 보였다. 강렬한 허기와 익숙한 통증이 몸 깊숙한 곳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설마…….”

유령은 기가 차서 웃었다. 그는 벽장 안에서 중국 요리를 꺼내 비닐 봉투에 담아 버렸다. 냄새가 가셨지만, 통증과 허기는 여전했다.

“나는 이미 죽었어. 이건 다 가짜야. 내가 배고픔과 통증을 느낄 리가 없어.”

유령은 재차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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