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윗의 탑-11화 (11/18)

솔로 - 오로지 당신만 1

쿵쿵, 고개를 든 것은 소리 때문이 아니라 진동 때문이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지하철 밖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는 얼굴이다. 놀라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Norman Greenbaum의 노래 ‘Spirit In The Sky’ 속 기타 소리가 충분히 멀어지고 무언가 소리라고 할 만한 걸 들을 수 있게 됐을 땐 이미 지하철 문밖의 안전문이 닫히고 있었다.

‘그’가 허망한 얼굴로 지하철 안전선 너머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체념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낯선 표정에 나는 다소 놀랐다.

“혹시 금방 그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요?”

문가에 앉아 있는 승객에게 물었다. 책을 보고 있던 이는 귀찮단 얼굴로 한 번 쳐다보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벤자민,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 같던데요.”

그가 나를 벤자민이라고 부르는 소린 나도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한 번도 내게 ‘벤’이란 애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늘 정중하게 격식을 차린 호칭으로 날 불렀다. 하지만 지금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다.

“그리고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분명 뭐라고 입술을 들썩였는데요.”

“아뇨, 당신을 부른 것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승객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열차는 순식간에 역을 지나쳐 두 번째 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돌아가서 남자를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망설임이 일었다.

눈이 많이 내렸고 지하철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시의 늑장 대응으로 제설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도로는 온통 꽉 막힌 채였다. 기습적인 폭설에 차들은 눈 더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헛바퀴질만을 했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승용차들에 비해 내 SUV는 사정이 더 나빠 옆으로 줄줄 미끄러졌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차를 버리고 어렵사리 지하철을 탔다. 마크를 만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역으로 다시 돌아가느라 마지막 지하철을 놓친다면 길바닥이나 술집에서 밤을 새워야했다.

집에는 얼마 남지 않은 시험 출제 작업에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물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개가 있다. 만일 여기서 내려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지난 3년간 나를 지원해준 유복한 교수이자 나에게 잔뜩 사심을 품고 있는 62세의 노신사였다. 고개를 저었다. 돌아갈 수 없었다. 빼놓았던 이어폰을 도로 끼었다. 현란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흥겨운 반주와 죽음을 노래하는 가사가 기묘하게 어울렸다.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 Prepare yourself. 」

나는 가던 방향대로 계속 갔다. 그리고 지하철역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마크의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금방 잊었다.

일 년 정도 뒤에 그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느라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언뜻 전해 들었다.

내게 선물로 남긴다며 그가 유언장에 언급했던 드로잉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 * *

공판 전 상대측 로펌과의 공방이 모교 근처에서 있었다. 지적 장애를 지닌 청년의 약물 투여 중 의료 과실 여부를 따지는 문제로 관련 분야의 전문적 자문이 필요했다. 로스쿨 커리큘럼을 담당했던 교수 중 조언을 구할 만한 인물을 가늠하다 말도 안 되는 인물을 떠올리고 말았다.

마크 레이트너.

그 이름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길을 걷던 이들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린 나를 이상한 눈으로 돌아봤다.

그가 생물학, 건축학 박사이자 프리츠커 수상자로 거론됐던 건축학계의 거물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전공은 재판과는 아무 상관 없는 ‘초개체 생태학’이었다. 꿀벌을 연구하던 학자에게 조언을 구하고 증인으로 채택해봐야 재판에 도움이 안 될 건 불 보듯 뻔했다.

-꿀벌 군락은 하나의 생물이야. 그것들은 한 마리의 척추동물처럼 움직이지. 일벌은 생명유지와 소화를 담당하는 몸이고, 여왕벌과 수벌은 생식기야.

레이트너 박사가 맨 첫 강의 때 요하네스 메링의 비유로 시작해 사이비 과학에 가까운 낭설을 역설했던 일이 떠올랐다. 끝까지 남은 몇 명의 학부생들을 치워버린 뒤 자신의 강의를 폐강시켰다며 자랑하던 모습이 생생했다.

그는 교사보단 학자였고, 행정가였으며, 괴짜였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무척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마크, 학생들이 순순히 나가던가요?

-한 마디면 끝나. 꿀벌이 포유류라고 얘기하면 다들 도망치지.

잇몸을 드러내고 의기양양하게 웃던 노신사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명멸한다.

공간이 인간의 기억을 조각한다. 그가 했던 말 중 그런 비슷한 말이 있었다. 모교에 가까워진 탓인지 망자에 대한 기억이 수월히 머릿속을 점령했다.

“어머니가 기뻐하시겠군. 자네가 집안의 자랑이라고 하지 않으시던가.”

로스쿨의 지도 교수 중 한 명이었던 제임스가 내 손을 잡았다. 면접 시 내가 했던 말을 잊지 않고 돌려주는 상대에게 나도 농으로 답했다.

“요샌 발에 차이는 게 변호사래요. 좀 더 노력하라고 하시던 걸요.”

“톱클래스 성적으로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고, 곧바로 탑 로펌에 들어간 자네에게? 자네 어머닌 너무 박하시군. 요새 시세는 어때. 듣자하니 요즘 뉴욕에선 자네 정도면 연봉 백육십만 불은 우습다던데.”

“대외기밀이에요. 그 부분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제임스도 어깨를 툭 치며 웃는다.

제임스는 교수보단 사업가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답게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매기는 데 별 거리낌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게 대뜸 연봉부터 물어오는 게 그다웠다. 나 역시 그의 태도가 별로 거슬리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그와 비교됐던 한 인물을 떠올리고 만다.

“마크 역시 자네를 자랑스러워했을 거야.”

“레이트너 씨가요? 그분은 제가 로펌에 들어가는 걸 탐탁지 않아 하셨는데요.”

“맞아, 얼토당토않은 포스트 닥터 자리까지 제공하면서 자넬 곁에 두려고 했었지. 이해하게. 원래 자기 맘에 드는 게 나타나면 마구 들이미는 게 그 사람 방식이라서 그래.”

마크가 제안한 자리는 가난한 로스쿨 학생을 혹하게 만들 만큼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난 곤충이 싫었고 곤충들에게 인간의 지위를 부여해주는 학문엔 관심이 없었다.

“레이트너 씨는 제가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서 꼭 필요한 도움을 주셨죠. 전 처음에 그게 다 우연히 이루어진 일인 줄 알고 고마워했어요. 하지만 실은 아니더군요. 마크는…… 글쎄요. 전 귀여운 고아 소녀와는 거리가 멀어요. 대체 제 어디를 봐서 키다리 아저씨 역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와 만났던 많은 만남 중에는 그가 남자에, 나이 육십 대의 노신사만 아니었다면 정말 아름다웠을 추억도 많았다. 하지만 육십 대 남자의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그의 침실로 가기엔 내 덩치가 너무 컸다. 마지막에는 살짝 비아냥거리고 말았다.

“다 지난 일이잖나. 죽은 사람한테는 조금 너그러워져도 나쁠 건 없지.”

3년간의 법 공부가 무색하게, 제임스의 마지막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마크의 드로잉은 끝내 못 찾았나?”

“네,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마크가 유언장에 실수했거나, 어딘가에서 건축 드로잉이 새버렸거나 했을 것이다. 단 한 장의 그림이었고, 행방을 아는 이가 사망한 마당에 특별한 수는 없었다. 나는 물건에 대한 생각은 오래전에 포기했다. 제임스가 말하고서야 드로잉에 관한 게 기억났다.

필요한 자료를 모두 건네받았다.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제임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늘 사람 좋게 허허 웃는 교수는 웃음을 지우면 배로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인형 눈알처럼 옅은 회색 눈동자가 정면으로 응시해온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자네를 보니까 생각난 게 있군.”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는 순간 상대방이 ‘저기 할 말이 있는데.’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이었다. 정색하고 물었다.

“뭐죠?”

“아닐세, 아무것도.”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빙긋 웃어버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으나 쉽게 말해줄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의례적인 인사만을 마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마크는 로스쿨 입학 때 내 심사를 맡았던 교수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제출한 ‘나의 인생에서 역경을 이겨낸 경험에 대해 기술하시오.’란 아주 흔한 주제의 에세이를 그는 매우 집중해 읽어 내렸다.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군요.”

나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에세이에는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온 어려운 내 삶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그건 진실 그대로의 내용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백이면 백, 로스쿨 지원용으로 제출한 판에 박힌 에세이라 판단할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고생이 많았겠어요.”

“네, 하지만 그분의 사랑이 있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내 대답마저도 참으로 진부하게 들렸다. 모든 교수가 별반 반응이 없는데, 유독 그 교수만은 얼굴을 빛내며 내 얘기에 집중했다.

“벤자민, 인상적인 에세이였습니다.”

푸른 눈의 사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와 인간됨에 금방 매료되었다.

“벤자민.”

지금 내 눈앞에 푸른 눈의 사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믿기지 않은 광경에 순간 들고 있던 짐을 몽땅 떨어뜨릴 뻔했다. 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내 행동에 의아해하며 눈을 깜빡인다.

남자의 푸른 눈이 익숙했다. 바깥으로 도톰하게 불거져 나오기보단 안쪽으로 함몰된 것 같은 연한 윤곽의 입술도.

그는 마크 레이트너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젊었다. 내 눈앞에 서 있는 안색 나쁜 환자복 차림의 남자는 잘 봐도 이십 대 후반의 젊은이로 보였다. 그가 늘 입고 있던 블레이저도, 안경도, 그리고 육십 대의 나이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에 앞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라고 하지만 죽은 이가 대학 건물의 복도에 서 있는 건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벤자민-.”

하지만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상황에도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을 때,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답하고 말았다.

“마크?”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이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볼살이 모두 빠져 비인간적으로 커 보이는 푸른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보여?”

맙소사.

푸른 눈동자와 낮은 목소리가 내가 기억하는 누군가와 똑같았다.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두려움에 뒷걸음질치다 어느 순간 달음박질을 치고 말았다. 두려움에 진땀이 흘렀다.

* * *

“라이언, 웃을 일이 아냐.”

전화기 안에서 상황을 전해 들은 형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이해는 갔다. 나도 누군가에게 대낮에 유령을 보고 꽁지 빠져라 도망쳤다는 얘길 들으면 저리 비웃고도 남았다.

하지만 라이언만큼은 나를 비웃을 자격이 없다.

내 친형인 그는 12세의 여름,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X-FILE이란 드라마와 운명적으로 조우했다. 그 후 그의 머릿속은 외계인 사체와 사후 세계, 블랙홀과 버뮤다 삼각 지대 같은 것들로 채워졌다. 나는 라이언에게 ‘유령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13가지 이유’ 등을 억지로 들으며 자랐다. 나를 그리도 괴롭혔던 주제에, 내가 유령과 조우한 얘기를 신랄하게 비웃다니, 너무하다.

「왜 안 웃고 배기겠어? 네 후원자였던 교수가 유령으로 대학가를 떠돌고 있다며. 것도 네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후원자’란 말에 눈썹이 찌푸려졌다. 참 싫은 단어였다. 내가 자그맣고 귀여운 여자애였다면 상황은 간단했을 것이다. 마크 레이트너의 호의는 단순한 호의로 해석되고 우리의 얘기는 미담으로 대학가에 전해졌을 것이다. 설령 내가 여자였고 우리가 불꽃 같은 연애 뒤 결혼으로 골인했더라도 그건 그대로 핑크빛 로맨스 스토리 정도는 됐지 추문은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육 피트 반이 넘는 키에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육체적인 매력이 충만한 한창때의 청년이다. 마크 레이트너는 중후한 매력을 지닌 부유한 이혼남이었다. 후원자란 말은 우리 둘 사이에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곤 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맙소사, 베니, 대체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기에 교수까지 꼬신 거야? 그것도 돈 많고 매력적인 사람이라며? 지적이고 깐깐하지만, 침대에선 화끈한 상대가 최고지. 부럽다. 형님은 기껏해야 오컬트 너드(nerd)란 소리만 들어봤는데. 네가 진짜 남자야. 얼마나 잘해줬기에 네 이름을 가슴에 품고 죽을 지경이 되는 거냐?」

수화기를 든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지적이고 깐깐하지만, 침대에선 화끈해지는 마크 레이트너. 상상하자 구역질이 치받았다. 그가 생전 내게 연정을 품었으며, 못다 한 마음 때문에 죽은 뒤에도 나를 기억하며 배회한다고? 잇몸을 드러내고 괴짜처럼 웃고 있는 마크의 모습과는 백만 광년 먼 모습이다.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한 형을 향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남자야. 남자라고 몇 번 더 말해줄까.”

「누가 뭐래? 그러니까 더 대단하다는 거지. 네 매력은 정말이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구나. 인기 폭발이야. 형은 네가 자랑스러워.」

“닥쳐.”

「그나저나 정말로 유령을 본 거야?」

“내가 형처럼 사기꾼인 줄 알아? 유령을 보지도 않고 봤다고 헛소리를 하겠어?

「남들은 돈 주고도 못하는 구경을 공짜로 했네. 좋겠다.」

“형이 내 대신 좀 하지 그래?”

「뭐가 문제야? 널 못 알아봤다면 이미 이성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일 거고, 좀 있으면 악령이 될 텐데. 정 안 되겠으면 엑소시즘이라도 해버려.」

“엑소시즘??”

머리가 어지럽다. 라이언의 말에 키아누 리브스가 퇴마사로 나오는 영화가 생각났다. 키아누 리브스와 싸우고 있는 마크를 상상하자 헛웃음이 샜다. 허허허……. 실실 웃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유령을 봤다. 의심하는 라이언에게 화까지 냈다. 그러나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라이언, 설마 진짜로 유령을 믿어?”

「그럼 넌 천국과 지옥을 안 믿어?」

“…….”

당연히 안 믿는다.

라이언은 오컬트 너드였다. 어릴 적엔 제법 신동 소리를 들었지만, 그 천재적인 머리를 올바른 데 쓰긴커녕 오컬트란 쓸데없는 분야에 소모해버렸다. 오맨과 엑소시스트를 영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영화로 꼽는 형은 열두 살 때부터 산스크리트어를 독파해 부적을 쓰고, 주문을 외우는 등 어지간한 무당 흉내는 어렵잖게 해냈다. 그는 내가 기가 막혀 입을 다물고 있자 신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주워담았다.

「바티칸에서 쉬쉬해서 그렇지 실상 유령 퇴치는 그리 어려운 게 아냐. 내가 아는 친구한테 성수를 구해서 부적이랑 같이 보내줄게. 눈만 제대로 박히고, 글만 대충 읽을 줄 알면 누구나 할 수 있어. 베니 너라면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을 거다.」

내 상식으론 감당할 수 없는 차원으로 얘기가 흘러간다. 라이언의 친구라면 대체 어떤 놈일까. 가짜 신부복을 입고 성수를 팔고 있는 사기꾼이 눈에 그려졌다.

「베니, 네가 하기 싫다면 내가 할 수도 있어. 수소문해서 유령의 묘지 위치만 보내줘. 유령을 퇴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알아? 그건 뼈를 태우는 거야. 모든 영화, 모든 드라마, 모든 기록에 그게 옳은 방법이라고 돼 있어. 혹 좀비가 됐을 위험이 있다면 왕소금으로 관을 채우고 보름달이 뜬 밤에 말뚝으로 심장을 박아서…….」

라이언의 목소리에 ‘유령을 잡아서 경험치를 쌓고 싶어요.’란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한탄했다.

“형에겐 정말 섬세함이라곤 없구나. 사랑과 영혼도 안 봤어? 유령이라도 인격을 존중해야 하는 법이야.”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제니퍼 러브 휴이트(미국 드라마 <고스트 위스퍼러>의 여주인공. 죽은 자를 보고 듣는 영매이다.)라도 돼? 유령에게 인격이 어디 있어? 넌 테네시 주의 유령 저택에서 있었던 사건을 모르니까 그딴 소릴 하는 거다. 그딴 말랑한 태도로 유령한테 동정심을 보였다간 그가 네 육신과 영혼을 홀랑 훔쳐갈걸.」

라이언은 듣도 보도 못한 출판사에서 나온 괴담 시리즈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테네시 주 유령 저택 사건, 그런 제목의 문고판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하다.

「벤, 네가 정 상황을 알고 싶거든 말리진 않을게. 그 망할 영감 유령이 무슨 사연을 품고 죽었는지 알아내서 성불시킬 수 있음 해봐. 하지만 악령으로 변할 것 같으면 당장 처치해. 빈틈을 보이지 말고. 그것들은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본능적으로 증오를 느끼고 어떻게든 우릴 이용하려고 한단 거 알고 있지?」

이 담부턴 라이언이 빤한 잔소리를 늘어놓을 타이밍이었다. 나는 주의 깊게 듣는 척 대충 주억거렸다.

「일단 네가 벤자민 기옌이란 건 속여. 원한을 품은 유령에게 네 정체를 들켜서 좋을 게 없잖아. 너한테 흑심도 있었다며. 최악의 경우, 네 엉덩이의 순결은 없는 거다?」

유령과의 하룻밤이라, 놓치기 아쉬운 소재긴 하지만 엉덩이의 순결이 더 중요한 거 아니겠니. 덧붙이며 라이언이 낄낄거렸다.

* * *

제임스에게서 예상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얘기를 들었다.

마크가 죽은 뒤 대학 건물 곳곳, 특히 그가 자주 머물렀던 곳을 중심으로 젊은 시절 마크를 닮은 유령이 이곳저곳에서 출몰한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이란 여기저기 윤색되고 부풀려지기 마련이었고,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그럴듯한 줄거리를 달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답답한 맘에 도서관에서 몇몇 학생을 붙들고 물었다가 괴상한 이야기를 줄줄 들어야 했다. 실험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남자가 그의 게이 연인을 찾아 헤매고 다닌다는 슬픈 괴담을 들었을 땐 표정을 관리하는데 퍽 힘들었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봤을 때 마크를 닮은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제임스, 대낮에 유령이 출몰한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던데요.”

“그러기야 하지. 하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순가. 괴담은 어느 시대든 있어왔어. 하지만 정작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얼마 없지. 봤다고 해도 그냥 실없는 소리라고 넘겨 버리는 거지. 게다가 봤다는 사람이 실은 그리 자주 나타나는 것도 아니거든. 작년에도 진짜로 봤단 건 한두 명 정도였네.”

지난번 봤을 때와 말이 달랐다. 그때 제임스는 분명 ‘마크’에 관한 얘길 하려고 했었다. 그가 만일 마크의 유령을 실제로 목격했다면, 유령이 뱉었던 ‘벤자민’이란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유령에 대한 소문이 그냥 그렇고 그런 괴담이라고 생각하세요?”

제임스는 알듯 모를 듯한 미소로 애매하게 답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령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나?”

라이언은 유령이 실제로 있다고 믿었다. 나는 아니다. 오컬트 계의 폭스 멀더를 친형으로 둔 탓에 어린 시절부터 줄곧 세뇌를 당해왔지만, 굴하지 않고 버텨 지금 멀쩡하고 정상적인 성인이 될 수 있었다.

“아뇨,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죠.”

제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제스처였다.

“그럼 묻지. 자네가 알고 있는 마크가 삶에 미련을 갖고 유령이 될 만한 사람으로 보이나?”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렇담 다행이군.”

“뭐가 말이죠?”

제임스가 내게 열쇠를 내밀었다.

“마크의 사택 열쇠야. 마크는 대학 내 관사를 사서 사택으로 썼지. 유산 정리가 덜 됐던지, 유가족이 정리할 생각이 없는 건지 아직 그가 살았던 생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네. 유령을 믿지 않는다면 맘 먹고 거길 뒤져봐. 혹시 아나. 마크의 드로잉이 그곳에 숨겨져 있을지. 건물이 너무 낡아 새 학기가 되면 다 부수고 새로 지을 거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테니 꼭 가보게.”

“제임스, 당신은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설마, 낮에는 정리도 할 겸 몇 번 가봤지. 밤에는 안 가. 무섭잖나.”

제임스의 솔직한 말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라이언이 보낸 성수가 페덱스 우편으로 도착했다. 배달부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물건이 들었단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상자를 뜯고 내용물을 본 나는 기가 막혀 한참 말문을 잃었다. 실행력 넘치는 오덕후를 친형으로 둔 덕에 별 희한한 걸 다 본다.

책 한 권과 악마를 쫓는 주술을 적은 수첩, 성수가 들어 있었다. 정체 모를 낡아빠진 책에 히에로니무스 보쉬와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린 지옥도 삽화가 빼곡했다. 악마의 이름마다 붉은 밑줄을 그어둔 라이언의 열정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요 며칠, 내가 본 것이 정말 마크가 맞는지, 혹 너무 피곤해 헛것을 본 건 아닌지 헷갈려 일이 잡히지 않았다. 무언가 해야 했다. 제임스가 준 열쇠는 재킷 주머니 안에 얌전히 들어 있다. 게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어쨌건 성수도 생겼다. 유령이 나타난다 해도 한 번 해볼 만하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교수 기숙사로 발길을 옮겼다.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공간은 쉽사리 무너진다. 마크가 사택으로 썼다는 곳의 문을 열자 폐가와 유사한 쾌쾌한 먼지 냄새가 끼쳐왔다. 창문을 열고 환기부터 시켰다.

그다지 세간이 많이 들어차 있진 않았다. 그러나 간소하고 단정한 고급 가구들이 난잡하지 않고 조화롭게 배치된 풍경에 나도 모르게 그 공간에 있었을 나이 든 사내를 상상하고 만다.

책장을 뒤지고, 그가 스크랩해둔 메모 중 눈에 띄는 몇 개를 몰래 챙겼다. 벽장을 열자 그가 즐겨 입던 감색의 블레이저가 보였다. 남자는 생전 비현실적으로 푸른 눈을 가진 덕에 푸른색 옷들이 참으로 잘 어울렸었다. 깨끗하게 다림질된 셔츠는 그가 지금 입어도 될 정도로 보관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블레이저를 꺼내 속주머니를 뒤질 생각이었다. 옷이 치워지면서 벽장 안에 오도카니 숨어 있던 유령과 눈이 마주쳤을 땐 손끝이 차가워질 정도로 놀랐다. 기묘한 건 유령도 나를 보고 놀랐단 점이다. 흠칫 겁먹은 얼굴로 쳐다보던 유령이 두어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긴장을 풀고 본격적으로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벤자민?”

“…….”

“너 내가 보이는 거 맞지?”

안 보이는 척 짐짓 태연하게 옷을 내려놓고 벽장문을 닫았다. 돌아서자 이미 유령은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깜짝 놀랐다. 아무리 유령이라 해도 순간 이동을 하기 전 미리 예고 좀 하면 어디 덧나나. 하마터면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목을 축이는 척했다. 내 몸 주변을 빙빙 돌며 기웃거리던 유령이 불현듯 배시시 웃었다. 나른하게 처진 눈이 미소로 가늘어지며 묘한 기운을 풍겼다. 마크에게 저런 얼굴이 있었던가. 가슴이 철렁했다.

“너한테서 벤자민의 냄새가 나.”

내 체취가 약한 편은 아니나, 그건 아침 샤워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범위였다.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될 만큼 심하진 않다고 자신할 수 있다. 까치발을 들고 내 머리칼을, 내 가슴을 킁킁거리던 유령이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더니 체취가 가장 강한 부위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벤자민, 벤자민 기옌, 날 찾으러 온 거야?”

그가 환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에 잠시 긴장을 늦춘 게 잘못이었다.

가랑이 사이로 금빛 머리통이 밀고 들어왔다. 축축하고 말캉한 게 허벅지 사이를 짓눌렀다. 그건 분명 입술과 혀의 감촉이었다.

“무슨 짓이야!!”

나는 대책 없는 유령에게 벌컥 성수를 뿌리고 말았다.

“으아악-!”

유령이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냈다. 귀가 터질 것 같다. 유령의 비명에 가구와 창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물리력을 행사하는 유령의 모습은 라이언이 잘 보는 B급 공포 영화의 단골 장면이었다. 실제 겪으니 귀가 먹먹하고, 혼이 날아가는 것 같다.

“아, 아파!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성수로 지글거리는 팔을 들이밀며 유령이 벌컥 화를 냈다. 남의 사타구니를 핥던 주제에 뻔뻔하기도 하다.

지금도 갈퀴처럼 남의 다리를 붙잡고 떨어지질 않는다. 무시무시한 힘이다. 힘에 밀려 요란한 소릴 내며 넘어지자 냉큼 허리를 타고 올라 지퍼를 내린다. 오싹했다. 화들짝 놀라 퍽 소리가 나게 유령을 밀쳐냈다.

“너, 내가 보이는 거 맞지?!”

한 방 되게 맞고 물러난 유령이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봤다. 보이니까 때렸지 안 보이면 어떻게 때리겠나.

산발한 머리와 창백한 안색, 핏발 선 눈에 광기 어린 태도까지, 악령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꼴로 마구 달라붙던 유령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푸른 눈이 좀 전과 달리 고요하다.

“어떻게 날 보지……. 너 설마 진짜 벤자민이야?”

유령이 나를 보고 물었다. 그는 ‘묻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엔 초점이 없었고, 그의 목소리엔 확신도 없다. 유령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벤자민이라고 인정한 순간, 발정 난 유령이 무슨 짓을 할까. 분명 좋은 꼴을 당하진 않을 거다.

엉덩이를 사수하라던 라이언의 충고가 떠올랐다.

“아뇨. 난 그런 사람 몰라요!”

“?”

유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냐, 자넨 벤자민이 맞는데……. 그렇게 훌륭한 물건을 가진 사람이 벤자민 말고 또 있으려고?”

유령이 내 다리 사이를 핥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노골적으로 침을 삼켰다. 맙소사, 얼굴이 빨개졌다. 야한 표정의 남자가 잔뜩 풀린 눈으로 바라보니 헤테로인 나조차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크,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어라,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식은땀이 비죽 흘렀다.

“거기, 손목 팔찌에 쓰여 있잖아요. 마크 레이트너, 62세. 혈액형까지 있네요.”

“아아, 정말 그러네. 자넨 관찰력이 뛰어난 젊은이군.”

그의 깡마른 손목에 걸린 환자용 팔찌에 그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 있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내 관찰력 따윌 칭찬하는 엉뚱함은 죽어서도 여전했다. 마구 달라붙던 유령이 자신의 환자복과 팔찌에 잠시 신경이 팔려 있는 틈에 나는 멀찍이 안전거리 너머로 물러섰다. 유령이 이대로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마크, 당신은 62세 치곤 꽤 젊어 보이네요.”

“고맙군. 그래 봐야 몸은 완전히 곪았다네. 거기 책장 맨 위 칸 리처드 도킨스의 책 안에 경구용 발기부전 치료제가 들어 있는데 좀 주겠나.”

“네?”

유령의 황당한 요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잠깐 한눈을 팔았다.

유령은 유령답게 빨랐다. 쾅! 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마크가 내 상반신을 어깨와 머리로 냅다 들이받았다. 책장 쪽으로 몸이 밀렸다. 서가가 무너지며 책과 함께 내 몸도 무너졌다. 우당탕, 상반신이 완전히 깔렸다. 이런 빌어먹을!

유령이 책장 위에 몸을 싣고 인정사정없이 나를 눌렀다. “으윽!” 날카로운 모서리에 팔뚝이 눌리자 격한 통증이 밀려왔다. 저건 악령이다. 악령이 분명해.

달각, 달각. 유령이 책에 홈을 파 만든 비밀 공간에서 오렌지색 약병을 꺼내 의기양양하게 흔들었다. 플라스틱병 안에서 알약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딱 두 알 남았군. 자네와 난 운명인가 봐.”

“마크……? 자, 장난치지 마요.”

유령이 긴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기대하게나, 내가 자네 엉덩이 안에 있는 진주를 빨아줄게.”

길고 마른 손가락이 엉덩이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이성이 끊겼다.

인간은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내곤 한다. 기합소리와 함께 책장 하나와 성인 남자 하나의 무게를 순식간에 밀어내는 날 보고 마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정말이지, 멋지게 기능하는 근육이군.”

황홀경에 빠진 채 불끈거리는 근육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는 유령의 모습에 전신에 오한이 달렸다. 라이언의 말이 옳았다. 이대로 있다간 내가 위험했다.

형의 충고를 따랐다. 손속에 일말의 자비도 두지 않고 인중을 겨냥해 깨끗하게 한 방을 날렸다.

유령도 기절을 한다. 형에게 알려주면 라이언이 매우 흥미로워할 거란 생각을 하며 나는 축 늘어진 마크의 사지를 꽁꽁 묶었다.

“벤자민?”

“아니라니까요.”

꽁꽁 묶인 채 애벌레처럼 꿈틀대며 마크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골치가 아파왔다. 라이언의 말대로 악령이 되어 가고 있는 유령의 무덤을 파내고 그의 유골을 불태우면 될 일이지만-물론 이건 라이언이 주장하는 엑소시즘이 효과가 있아야 할 일이긴 하다.- 좀 전 봤던 그의 상태가 성급한 결정에 제동을 걸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요사스럽게 웃던 모습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령이 된 뒤 죽기 전과 전혀 다른 인격이 형성되는 경우는 꽤 있지.」

황당해 다급히 라이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가 반색하며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전문가처럼 굴 수 있는 걸 기뻐하는 티가 확 났다.

“그래도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나는 음란하게 헐떡이는 유령을 바라봤다. 정상적인 사내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야릇한 눈빛에 치가 떨렸다.

「죽음이란 건 충격적인 경험이야. 인간의 이성과 기억을 쉽사리 깨어 놓지. 인간의 영혼은 죽음 뒤 본래 천국이나 지옥 중 어딘가로 가야 해. 그러지 못한 자의 영혼은 그의 몸과 마찬가지로 썩고 변질되어 이승을 떠돌게 되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본능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게 돼.」

“그 말 진짜 일리 있는 소리야?”

라이언의 헛소리엔 꽤 내성이 생겼다고 여겼는데, 것도 아닌가 보다. 천국이 어쩌고 지옥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손가락이 곱아 들었다.

“부패된 영혼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네가 운이 좋아서 바티칸의 엑소시즘 본부에 연락이 닿는다면 일 년 후엔 답이 올 거고, 넌 평생 그 치들의 조사를 받으면서 살게 될 거야. 그런 방법보다는 내가 적은 내용, 우편물에 들어 있는 메모대로 하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야. 성수를 뿌리고, 기도문을 외운 뒤, 묘지에서 시신을 파내 깨끗하게 태우는 거지. 얼마나 쉬워. 어린애도 하겠다.」

듣고 있으려니 퍽도 쉽게 들린다.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끙끙대던 유령이 꿈틀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벤자민이 아니라면 자넨 누군가. 벤자민과 똑같은 냄새를 풍기고 그처럼 멋진 물건과 괴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건 벤자민인 거지. 아니라면 증거를 대게.”

“제 존재 자체가 증거죠. 전 베네딕트예요. 베네딕트 쉘턴. 벤자민이란 남자는 몰라요.”

“베네딕트, 줄이면 벤이 되나?”

“그런데요?”

“그럼 벤이라고 불러도 되겠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 난 마크 레이트너야. 이 대학에서 생태학 교양 강의를 했는데, 자네 혹시 꿀벌에게 관심 있나? 꿀벌이 포유동물과 유사점을 갖고 있단 위르겐 타우츠의 학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전 곤충이 싫어요.”

마크가 킬킬댔다. 외형상 이십 대의 몸을 갖추고 있음에도 표정이나 웃음은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 놀랍다.

“그것도 내 벤자민과 비슷하군.”

누구더러 ‘나의 벤자민’이란 건가. 미간을 좁히고 상대방을 노려보자 유령이 묶인 채 어깨를 으쓱였다.

“베네딕트 쉘턴 군. 자네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은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겠군. 자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그렇지 않나?”

“전 군대에 간 적도 없는데요.”

“그렇지 않다면야 왜 내 바지를 홀딱 벗겨서 엉덩이를 드러내는 수치를 주는 건가. 난 자네가 코란을 변기에 집어넣길 좋아하고 성고문이 취미인 새디스트 고문관이라고 추측했는데, 아닌가?”

나는 반사적으로 훤히 드러난 그의 엉덩이를 바라봤다 힐끗 시선을 돌렸다. 광기에 찬 마크는 힘이 셌다. 낑낑거리며 힘을 써서 겨우 사지를 구속할 수 있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묶어야 했지만 적당한 천이 없어서 그가 입고 있는 바지를 끌어내려 발목을 묶고 윗옷으로 팔목을 묶어야 했다.

“인간적으로 바지는 좀 입게 해주게.”

나는 처연히 애원하는 마크를 흘겨봤다. 유령은 아까도 같은 말을 했다. 살아생전과 마찬가지로 말만 청산유수였다. ‘자넨 스팅의 노래도 못 들어봤나? 인간은 프레자일한 존재라네. 내 엉덩이에 <취급주의, 깨지기 쉬워요.>란 말을 써 붙여야 날 좀 섬세하게 대해줄 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가서 바지를 입혀주려다 손등을 잔뜩 깨물렸다. 체취를 맡자마자 눈이 확 풀려서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는 유령의 작태에 완전히 질렸다. ‘하악하악’ 그가 내 귀에 대고 뱉어대던 신음은 어지간한 변태 못지않았다.

“인간이란 걸 증명해 보이면 입게 해 드릴게요.”

“난 당연히 인간이지. 두 눈 멀쩡히 뜨고도 모르나?”

“당신은 죽었어요. 난 이곳에 유령이 출몰한단 소문을 듣고 구경하러 온 걸요.”

마크는 자신이 죽었단 사실을 도통 믿으려 하지 않았다.

“거 참 답답한 친구네. 내가 인간이란 사실을 증명해 보일 테니까 잠깐 팔목을 풀어줘.”

“또 깨물 거잖아요.”

그가 부인하지 못한 채 미간을 좁혔다.

한참 침묵하고 있던 유령이 좋은 생각이 났는지 몸을 굴려 똑바로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난 정상적인 인간이야.”

단호하게 선언하곤 팔목과 발목이 묶인 채로 상반신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의 다리 사이 얌전하게 달라붙은 물건이 상의가 펄럭일 때마다 살짝살짝 보였다. 눈이 썩을 것 같다. 그냥 바지를 입힐 것을. 나는 뒤늦게 후회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윗몸일으키기. 이런 걸 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지.”

“침팬지들도 하던데요.”

마크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수를 내놓았다.

“내 혀를 잘 보게.”

……설마.

마크의 장기 중 하나를 몇 년 만에 다시 보게 되는 걸까.

마크가 그의 길고 유연한 혀를 좁혔다. 그리고는 우성 유전자만 할 수 있다는 혀 말기, 그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유전자만 할 수 있다는-이건 마크의 주장이다.- 혀로 네 잎 클로버 모양 만들기를 해 보였다. 그가 자랑스레 웃었다.

“이런 게 가능한 고등생물은 인간뿐이라네. 이제 내 말을 믿겠나? 난 인간일세.”

솔직히 말하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상식인인 내가 참을 수밖에. 나는 대뜸 거울을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던 마크가 떨떠름한 얼굴로 내게 반문했다.

“거울에…… 왜 내가 비치지 않는 거지?”

“그런 통설이 있죠. 죽은 자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는. 맞는 얘기예요.”

마크가 유쾌하게 웃었다.

“이보게, 몰카 찍나? 특수 거울을 갖고 장난을 치는 건 너무 구려.”

혈압이 올랐다. 서류 가방에서 어렵게 구한 사망 증명서를 내보였다. 마크가 또 웃었다.

“타이핑 하느라 힘들었겠어. 자넨 워드 실력이 훌륭하군. 누군가, 나에게 이런 장난을 치라고 보낸 사람이?”

“없죠. 뜬금없이 ‘당신이 죽었습니다.’라고 장난을 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려고요.”

맞는 말이었다. 깔깔 웃기만 하던 마크가 천천히 미간을 찌푸리다 결국 한풀 죽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죽었어?”

“네, 물에 빠져서 사망했다고 정식 자격증이 있는 의사가 증명서에 확실하게 써놨네요.”

“하지만 난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자신이 죽은 기억이 없으니 자신은 죽었다고 볼 수 없다 주장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자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무구해서 나를 거의 화병 직전까지 몰아갔다.

“당신이 기억하는 건 뭔데요. 곰곰이 생각해봐요. 기억에 빈틈이 있을 테니까.”

“기억나는 일이야 많지. 난 기억력이 좋아. 세 살 때 일도 기억하는걸. 내가 스무 살 때 킹 목사가 멤피스의 로레인 호텔에서 암살당했지. 마침내 자유, 자유다.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하신 신을 찬미하라. 그가 자주 인용하던 찬송가를 누군가 부르고 있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한걸. 내 스물일곱 생일에 토인비가 죽었어. 그게 1975년 일인가 될 거야. 죠스가 개봉한 해니까 확실해.”

“……반세기가 넘게 살았다니.”

“뭐?”

“아녜요. 잠깐 말이 헛나왔어요. 그런 일 말고 최근의 기억 없나요.”

이십 대의 잘생긴 남자가 대뜸 마틴 루터 킹 목사 얘길 하다니. 놀라웠다. 이러고도 유령이 아니라고?

“아들 부시 이후 흑인이 대통령이 된 것도 기억해. 그러고 보니 그다음 기억이 희미하긴 하군. 내가 강의를 그만둔 게 그맘때였지. 왜였지? 그러고 보니 난 딱히 대학을 떠날 이유가 없었는데. 난 명예 교수직을 받은 상태였거든. 안식년이었나.”

그가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눈이 풀리는 게 불길했다.

“잠시만요. 마크. 당신 지금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자넨 사람을 사귈 때 먼저 엉덩이를 까고 그다음 통성명을 하고, 마지막으로 나이를 묻는군. 어느 나라 식이지?”

팔목과 발목을 묶을 때 저 잘난 입에도 무언가 쑤셔 넣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유령의 팔목을 풀어주었다.

“바지를 먼저.”

“잠자코 만져 봐요.”

나는 그의 뒤통수에 그의 손을 가져다 댔다. 결 좋은 금발이 나와 그의 손에 동시에 잡혔다. 보기 좋게 구부러지는 머리칼은 건강하고 풍성했다.

“머리숱이…….”

“감동적일 정도로 많죠? 제가 보기에 당신은 딱 봐도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인데요. 어딜 봐서 육십 이세 노인이란 거죠?”

마크가 이토록 놀라는 건 처음 봤다. 귀여울 정도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는 한참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고, 자신의 손등과 몸을 살폈다.

“내가 죽은 게 맞나 보군.”

한참 후 침통한 탄식과 함께 유령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유령은 긴 시간 동안 말이 없었다. 그 특이한 마크 레이트너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에는 보통 사람처럼 충격을 받는다. 이 사실을 다행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불행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삼십여 분의 침묵 뒤 충격에서 회복한 마크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날 못 본 척했던 거군.”

“사람들이 못 본 척한 게 아니라 못 봤던 거죠. 당신은 죽은 사람이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던가요? 보통은 모든 사람이 자길 무시하고 지나치면 금방 눈치를 채던데요.”

“사람들이 날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거? 그건 워낙 익숙해서 이상한 걸 못 느꼈어. 날씨 때문에 사람들의 까칠함이 좀 심해졌나 보다 했지. 지구 온난화로 요 몇 년 겨울에 폭설이 잦았잖아.”

무슨 뜻인가. 마크가 황당한 소리로 대충 넘어가려 했지만, 그 속엔 꽤 거슬리는 내용이 있었다. 기억 속 마크는 독특한 인물이긴 했지만, 배척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죽은 사람 취급했다니요?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데요?”

마크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짐짓 딴청을 피웠다. 집요하게 쳐다보자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털어놨다.

“사람들이 날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네 명의 여자에 관한 얘길 해야 하는데, 괜찮겠나?”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이나 되는 여자 이야기를 하겠다고? 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저리 거창한 체하는 걸까. 마크의 비틀린 입술 끝에 걸린 웃음이 맘에 걸렸다. 내키지는 않지만 궁금함이 컸다.

“해보세요.”

“좋아.”

마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제자 중 참으로 매력적인 친구가 한 명 있지. 임의대로 ‘B’라고 지칭하세나.”

‘B’라는 이니셜에 절로 뺨이 굳었다.

그 이니셜을 입에 담는 마크의 잘 발달한 광대뼈 주변으로 딸기 셰이크 빛, 여린 장미꽃 빛 홍조가 번져나가는 모습엔 뇌가 굳으려 한다. ‘마크가 젊어져서 그런지 혈색이 좋아졌구나.’라고 넘겨버리기엔 푸른 눈 속 반짝거림이 지나치다.

“‘B’는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얘기를 방해받은 그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돌아봤다.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중요해요.”

“남자일세. 됐나?”

“……네, 계속하세요.”

“성급하긴, 진득하게 듣게나. B는 요즘 사람답지 않게 건전하고, 건강하고, 매우 매력적인 남자였어. 대학원엔 그처럼 매력적인 인물이 실은 별로 없다네. 찌들고 오만하고, 멍청하고 상스럽고,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고, 유약하고, 뭐 그런 단점들이 한둘씩, 혹은 수십여 개씩 가진 인물들만 모여 있는 곳이 소위 명문대학의 대학원이란 곳이지. 하지만 그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어. 그에게선 깊은 숲 속에서 나는 청량함과 짐승의 가죽 냄새와도 같은 진하고 강인한 체취가 함께 느껴졌다네.”

나는 쿨럭, 마시고 있던 생수를 뿜어낼 뻔했다. 마시던 물을 침과 함께 흘리는 나를 유령이 끌끌 혀를 차며 바라보았다. 그는 도로 B를 찬양하는 모드로 돌아섰다.

“그를 묘사할 만한 적절한 말을 고르기가 참 어렵군. 여하튼 그에게선 간혹 도시가 아닌 깊은 숲 속에서 산 사람이 갖고 있을 만한 예기와 강인함이 엿보였지. 그는 도시적 이성과 고대의 야성을 함께 갖추고 있는 수컷이었지. 그렇다고 그가 거칠기만 한 애송이였냐 하면 절대 아니지. 그의 특별함은 오히려 그의 온화함과 침착함에서 더욱 빛났어. 고작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었음에도 그에겐 경험 많은 장수와 같은 침착함과 대범함이 있었어. 그는 입버릇처럼 항상 인간의 일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얘기했어. 아마 그건 그의 어려웠던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듯했어. 그는 요즘 젊은이답지 않았네. 모든 일을 즐겼고, 항상 밝게 웃었지.”

나이 든 학자가 마음에 든 훌륭한 젊은 제자를 칭찬할 때면 하는 진부한 말들이 다 튀어나오고 있었다. 대체 B란 녀석은 누구냐. 난 모른다. 저런 훌륭한 남자.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빼빼 마른 대학원생들을 보며 오랫동안 눈만 버려왔던 마크는 각종 노동으로 다져진 잘 빠진 근육질의 남자에게 반했다. 미사여구를 생략하면 결국 그런 내용이다.

“……짧게 좀 하세요. 여자 얘기는 언제 나오나요?”

아무리 겉모습은 이십 대 후반이라 하더라도 알맹이는 육십이 넘은 노인다웠다. 말이 끝날 줄 몰랐다. 마크가 재차 나를 흘겨봤다.

“그럼 자네 수준에 맞게 상스럽고 짧게 말해주지. 그는 등급으로 따지자면 A++급의 남자였어. 그런 보기 드문 매력남이 말린 새우처럼 꼬부라진 샌님들 사이에 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나.”

“전투가 벌어지죠.”

“그렇지. 교묘한 위장술과 소개 작전이 나른하고 은밀하게 펼쳐지는 와중에 블리츠, 신속한 기동전이 예상 못 한 순간에 빵빵 터지는 거야. 매력적인 수컷에게 접근하는 내비게이션 기능과 주변의 감시망을 피하는 스텔스 기능이 탁월하게 발달한 여자들이 몇 있지. 그런 여자들에겐 첩보 위성 정찰기도 무용지물이라네.”

마크가 여자들이 나를 두고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히죽댔다.

나는 하마터면 고개를 갸웃거릴 뻔했다.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내 주변에서 그렇게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적은 없다. 내게 먼저 고백해왔던, 전 여자친구인 벨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마크는 쓰지도 않은 안경을 추어올리는 동작을 하다가 자신의 안경이 없다는 걸 깨닫곤 머쓱해했다. 얄밉게 비죽 웃곤 강의하듯 손동작을 써가며 얘기를 이어갔다.

“자잘한 여자들까지 세면 더 많겠지만, 일단 위협적인 존재는 거칠게 추려 네 명 정도였지. 베네수엘라 출신의 갈색 머리 조교, ‘B’와 함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금발 글래머, ‘B’를 따라다니면서 수업을 청강했던 아역 배우 출신의 빨강 머리. 그리고 사악한 여자. 뭐더라, 흡혈귀 영화 속 주인공과 이름이 같았는데…….”

마크가 잔뜩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벨라’.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알려줄 뻔했다.

“벨라.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벨라의 이름을 발음하는 허스키한 목소리 끝에 ‘으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설마 착각이겠지. 흐음, 헛기침 후 마크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들의 관심은 좀 지나친 면이 있었지. 난 결국 네 명의 여자를 차례대로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네.”

“뭐요?!”

“자네가 왜 화를 내나. 매력적인 젊은 남자에게 접근하는 네 명의 여자를 제거하는 게 그렇게 격노할 일인가?”

“여자들을 제거했다니 그거 무슨 뜻이에요. 설마…… 죽인 건 아니죠?”

나는 마크가 언급하는 네 여자를 모두 잘 알았다. 다들 미인이었고, 그들 중엔 내가 꽤 마음에 들어서 먼저 접근해보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벨라를 제외한 세 명은 이러저러한 일로 갑작스레 내 곁을 떠났다. 그때도 무언가 이상하다 했더니 결국 마크의 짓이었던 건가.

나를 음습한 골목 안 어둠 속에서 스토킹하고 있던 트렌치코트 차림의 노신사가 나와 얘기하고 있는 미인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핏빛 잉크로 ‘두 번째 제물’이라고 적으며 광기에 차 웃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좌르륵 펼쳐졌다. 오싹하다.

고요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마크가 퉁명스레 물었다.

“자네 돌았나?”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돌았나 보군. 나와 이해가 상충하는 사람은 나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 밀어내면 되는 거야. 무얼 굳이 범법까지 해가면서 제거해야 하나.”

“어떻게 했는데요?”

“흐음-.”

마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였다. 내가 노려보아도 꿈쩍 않더니, 이두박근에 힘을 줘서 팔뚝에 혈관을 돌출시킨 뒤에야 툭 털어놓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베네수엘라 미인. 그녀가 실은 가장 강적이었지. 그녀는 마음도 예뻤거든. 자신의 성공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왔지만 늘 고국으로 돌아가 조국의 빈민을 돕겠다는 양심의 책무를 지니고 있었어. 20세기 초반 여자였지 21세기 사람은 아니었어. 그녀는 벤자…… 흠……. B와 어울리는 한 쌍이 되었을지도 몰라. 물론 과거를 가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그녀에게 이 나라의 겨울은 상당히 추웠을 거야. 신년 휴가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그녀를 데리고 LA 필의 신년 공연을 보러 디즈니 홀로 갔다네. 베네수엘라 출신의 천재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말러를 연주했지. 그녀와 두다멜이 베네수엘라 빈민가 출신 아이들을 구제하는 위대한 프로젝트인 ‘엘 시스테마’ 출신인 것에 대해 즐거이 얘기를 나누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군.”

“……그녀는 결국 향수에 차서 베네수엘라로 돌아갔군요.”

“단순히 향수라고 치부하지 말게. 그 여자는 신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에 더는 귀 닫을 수 없었던 거지. 늦든 빠르든 그 길로 갈 여자였어. 원래 그럴 사람이었지. 위대한 사업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으면 못 견딜. 그녀는 아마도 지금쯤 베네수엘라의 사회 운동가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한 위대한 사업으로 분주할 걸세. 그리고 난 지금 자네에게 한 여자가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 아름다운 얘기를 해주고 있는 거야.”

남의 인생을 쉽게도 얘기한다.

만일 그녀가 베네수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녀와 나는 다른 방식으로 겨울을 견뎠을 것이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저녁을 먹고, 그녀의 침대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뒤 다음날 아침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근처 공원을 거닐었을 것이다.

그녀가 없었기에 나는 그해 겨우내 낡고 누추한 기숙사에서 과제로 만들어진 작은 산맥만 오르락내리락했다. 오른손을 벗 삼아 보냈던 춥고 외로웠던 시절이 떠올라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이 빨갛군. 피곤한가?”

“전혀요.”

불현듯 건축가 마크 레이트너의 천재성에 관한 기사가 떠올랐다.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 빛의 전략적 사용, 지적이고 감상적이면서도 탁월한 명료함과 기교를 지닌 건축물을 탄생시키는 장인 정신.’ 등등. 그토록 훌륭한 인물과 내 눈이 분노로 충혈된 것도 눈치 못 채는 얼간이가 한몸에 공존할 수 있다는 게 신비롭다.

“두 번째 여자는요?”

음산하게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금발 머리의 글래머, 그녀는 실은…… 레즈비언이었지.”

“뭐요?!!”

“자네도 레즈비언 여자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나?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그녀는 정확히 말하면 바이섹슈얼이라네. 그녀도 괜찮은 여자긴 했어. 딱 보면 금발 백치 미인처럼 생겨 가지곤 실은 꽤 똑똑한 여자였단 말이야. 게다가 그녀는 눈이 매우 좋았지. 옷 위로도 B의 팔과 복근, 그의 허벅지가 얼마나 훌륭한지 바로 알더군. 그녀는 눈어림만으로 그의 옷 사이즈를 알았는데 나중에 그에게 옷을 선물했을 때 확인한 바로는 거의 정확하더군. 존경스러운 여자였어.”

아련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원고를 정리하는 단순한 작업을 도운 답례로 마크는 내게 근사한 저녁을 대접했다. 우리가 갔던 식당은 정장이 필요한 곳이었고 마크는 동생의 옷을 빌려주곤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절대 돌려받지 않았다. 그 옷은 지금도 내 옷장 안에 있다. 누가 입었던 낡은 옷이라고는 절대 여겨지지 않는 감촉과 재질을 간직한 채 말이다.

마크는 자신보다 커다란 남동생과 내 신체 사이즈가 기막힐 정도로 비슷한 데 기뻐했었다. 세상일 중엔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좋은 일들도 많다.

마크가 얼굴을 찡그리고 날카로운-실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녀는 그녀의 몸을 모두 가리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남자의 ‘몸’을 원했네.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응석 부리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게 있어. 여자보다 몸이 크다고 해서 남자들이 정신마저 용량이 큰 건 아니거든.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던 때에 아주 시기적절하게 옛 연인이 오하이오에서 여기까지 그녀를 찾아왔다네. 아름다운 해우였지. 흙은 흙으로, 레즈비언은 레즈비언에게로. 순리대로 돌아간 거야.”

그녀의 옛 연인이 시기적절하게 움직인 데에는 운명의 힘 외에도, 인위적인 힘도 충분히 작용했을 것이다. 내 눈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푸른 눈의 큐피드는 나를 제외한 연인들에게만 관대했다. 그 음흉하기 짝이 없는 표정에 슬슬 부아가 치민다.

“세 번째 여자는-.”

“그만 됐어요. 난 배가 고파서 저녁을 먹으러 갈 겁니다. 네 번째 여자로 바로 넘어가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내 거친 목소리에 놀라 마크가 그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내심 화가 난 게 티가 났을까. 그럴 수밖에. 솔직히 말해 마크의 말은 듣지 아니하느니만 못했다. 그 시절 마크가 나에게 유별날 정도의 호감을 갖고 있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억측을 불러일으켰단 건 나도 안다. 그랬기에 우리는 서로 선을 그었고 나는 그와 일정 이상은 가까워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불유쾌한 상황에도 마크는 내게 잘해줬다. 그는 재미난 인간이었으며, 부드럽고 다정다감했다.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성인 남자의 친근한 호의를 겪어본 일이 드물었다. 나는 어느덧 그에게 끌렸고 그를 퍽 좋아했다. 우리 둘 사이 나름의 추억이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나의 추억이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 나는 마크가 악동 제제를 이해해주었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속 뽀르뚜가 아저씨와 같은 사람으로 내 기억 속에 남길 원했다. 남들이 그가 나에 대해 품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럴 수 있단 걸 알면서도 부디 그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길 바랐었다.

현실은 달랐다. 내 연인이 될 뻔한 좋은 여자들을 족족 남자가 제거했단 불편한 진실 앞에서 절로 이가 갈렸다.

“왜 하필 네 번째 여자인가. 두 번째까지 들었으면 세 번째도 듣거나, 아니면 아예 듣지 말거나 하지.”

“당신이 세상을 등지게 만든 사연을 얘기하려면 네 명의 여자 얘기가 필요하다면서요. 지금까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세 여자 얘기는 당신이 사악한 술수를 써서 당신의 ‘B’에게서 떨쳐낸 얘기 일 거고, 마지막 그 여자가 중요하겠네요. 그 여자는 당신 맘대로 안 됐던 거죠?”

마크가 입을 앙다물었다. 심기가 극히 불편한 모습이지만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달랠 마음이 전혀 없다.

“자네 말이 맞아. 고비네르인지, 고비알루(인도식 감자요리)인지 성도 괴상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 그를 채가 버렸지.”

마크가 한껏 입술을 비틀고 비죽거렸다. 트집 잡을 게 없어서 벨라의 성을 가지고 비아냥거리다니 유치하기 짝이 없다.

“벨라라면서요. 이름을 훤히 기억하면서 일부러 그러기예요?”

“맘에 안 드니까 그렇지. 하필이면 감자 성을 지닌! 못생긴 감자 같은 땅꼬마 여자애를 고르다니, ‘B’도 눈이 썩었어!”

벨라는 날씬하고 아름다웠으며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키가 좀 작긴 하지만 ‘못생긴 감자’ 소릴 들은 만큼은 아니다. 물론 그 사악한 성격과 ‘벨라’란 이름 탓에 남자를 빨아먹는 흡혈귀란 악명을 갖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외모만은 그럴듯했다.

“그 여자에겐 당신의 간계가 먹히지 않던가요.”

“간계? 나 같은 순진한 노인이 무슨. 간계란 말은 그녀에게 써야 할 말이야. 그 여자가 얼마나 굉장한 여자였는지 아나. 그녀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사귀었던 남자들 숫자가 진시황릉 속 토우 숫자와 맞먹는단 소문이 있더군. ‘남자는 가도 선물은 남는다.’가 그녀의 인생 모토라는 걸 알아내고 나는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만한 남자를 물색했지. 마침 우연히도 고등학교 시절 그녀랑 사귀었던 쿼터백이 근처에서 일하고 있었어.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사내 녀석은 확실히 동작이 빠르더군. 벨라가 그보다 더 멋진 근육을 가진 남자에게 홀딱 빠져서 그녀의 진심을 내주고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학교까지 찾아왔더라고. 그녀 때문에 직장을 옮겼던 교수가 마침 신학기부터 수업을 얻게 됐지. B를 포함해 식당에서 넷이 만났으니 꽤 멋진 아수라장이 연출됐겠지?”

“……·이 악마.”

“뭐라고 그랬나.”

“미얀마라고 했어요.”

“그래?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군.”

“당신의 멋들어진 연출이 생각보다 잘 먹히지 않던가요?”

마크가 혀를 찼다. 떨떠름한 표정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가 워낙 멋진 여자라서 그랬지. 어느 날 내 사무실에 와서 그러더군. 벤자민 주변의 여자들을 다 치워 줘서 고맙다고. 그 여자, 아주 멋진 표현을 썼지. ‘교수님 덕분에 맛있는 과일을 힘들이지 않고 딸 수 있었네요.’ 듣고 있는데 귀가 썩을 것 같았어. 그리고 자기에게 과거 남자 두 명 정도 달래는 건 일도 아니라고도 했지. 놀랍지 않나?”

마크가 대뜸 물었다.

“뭐가요?”

“벨라는 그 모든 일에 내가 연관되어 있단 걸 알았어. 혈기 왕성한 이십 대 청년의 연애사에 남자 노교수가 개입했다고 누가 의심이나 하겠나. 그녀는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었지.”

“그러고 보니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그 여자, 설마 별명대로 진짜 흡혈귀였던 건 아니겠지.”

마크는 진지하게 ‘벨라=흡혈귀’ 설을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에게 그저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나를 제외한 인물들은 대부분 벨라와 한 판씩 해본 경험이 있었다. 내겐 그녀의 후안무치, 무한 이기주의, 무례함을 매력이라 착각했던 시절이 있다.

“그 여자와 그렇게 마찰이 있은 뒤, 바로 소문이 났지. 이런저런 추문이. 벨라의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시기가 좀 좋지 않았어.”

마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얘기했지만 듣고 있는 나는 절로 긴장해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 얘기는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었다. 가장 궁금한 부분인데, 정작 정보 제공자는 매우 불성실하게 윤곽을 문질러 이야기를 뭉뚱그리려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여자를 얘기할 때와 달리 벨라를 얘기할 때 마크는 지나치게 빨리 말을 마무리 지으려 하는 티가 역력했다. 나는 그가 행간 속에 숨긴 정보를 짐작하느라 머리를 굴렸다.

“얼굴을 못 들고 다닐 만한 소문이었나요?”

“내가 왜 얼굴을 못 들고 다니나! 사람들이 내 얼굴을 못 쳐다봤을 뿐이지.”

“그게 그거죠.”

“흥.”

잘 넘어오지 않는 남자에게 미끼를 들이 밀어봤다.

“B와 당신에 관한 소문이었나요. 혹시 그 B라는 친구, 이름이 벤자민 아니에요?”

마크의 발달한 미간에 얹힌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가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노려봤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나?”

“당신이 날 처음 봤을 때 벤자민이냐고 물어봤잖아요.”

“아, 그랬지.”

내 말이 맞다며 마크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광대처럼 잘도 움직이는 얼굴 근육이 순식간에 눈썹의 떨림을 치워버렸다.

“자네 물음에 충분히 대답이 된 것 같은데. 이제 이 얘긴 그만하지. 자네 배 안 고픈가. 자네처럼 커다란 몸을 움직이려면 꽤 많은 양의 스테이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스테이크’는 분명 끌리는 소리긴 했다. 하지만 나는 좀 전 얘길 더 듣고 팠다. 능글맞게 화제를 돌리려는 남자를 막았다.

“그래서 당신이 죽은 뒤에도 배회하고 있는 건가요. 벨라에 대한 원한 때문에?”

마크가 고개를 기울이며 픽 웃었다.

“벨라에 대한 원한이라면 그 여자 집 다락방에 있겠지. 여기가 아니라.”

“그럼 뭐 때문에 당신은 여기에 있는 건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난 아마추어야. 죽어본 것도, 유령이 된 것도 이게 첫 경험일세. 자네가 좀 알려주지 그러나. 유령을 구경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며. 남다른 취미를 갖고 있으니 뭔가 좀 아는 게 있지 않아?”

얇은 입술이 재잘재잘 잘도 움직인다. 이런 심각한 얘길 나누면서도 아래위, 좌우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저 입. 언젠간 꼭 저기에 무언가를 물려주고 말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마크, 당신은 어쨌든 죽은 사람이고, 유령이에요. 유령이란 건 존재 자체가 의심받을 정도로 개체 수가 희박한 존재잖아요. 죽은 사람들은 다들 저승으로 떠나는데 유독 당신만 이승에 남아 있는 건 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유령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경험은 두 번으로 족하다. 나는 나와 관련된 유령이 하루빨리 사라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불에 태우는 거친 방법인 것도 싫다. 내게 호의를 베풀었던 유령이 가능하면 좋은 방식으로 사라졌으면 했다. 죽은 걸 깨달았으면 어서 저승으로 떠나라고 넌지시 설득해본다.

“그래서? 자네가 날 저쪽 세상으로 인도하는 영도자 역할을 하려고? 그러기엔 영 부실해 보이는데.”

“꽤 믿을만한 정보통에 따르면, 이럴 경우 주로 성수와 기도를 통해 영을 천국으로 보낸다고 하더군요. 당신도 엑소시즘이 뭔지 들어는 봤죠? 경험 많은 내 형 말로는 무덤을 파내서 성수로 축복한 뒤 시신을 불태우면 백 퍼센트 성불이 가능하대요. 그리 나쁘진 않은 방법인 것 같은데요.”

“나빠. 매우 나빠.”

마크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유령들은 결국 악령이 된대요. 그전에 무슨 수를 쓰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내가 악령이란 증거를 대봐.”

“당신의 존재 자체가 증거죠.”

내 말에 마크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곤 한층 선량한 표정을 지었다.

“난 나쁜 영혼이 아냐. 벤, 다들 저승에 가는데, 나만 이곳에 남은 이유가 뭐겠나? 난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죽었기 때문에 여기 남아 있는 거잖아. 그렇다면 자네가 날 도와줘야지. 영화 ‘고스트’에 나오는 우피 골드버그처럼 내 사연을 알아내고 내 슬픔을 풀어줘서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줘. 우리 둘이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일 거야. 운명의 힘이 느껴지지 않나?”

전혀. 운명 따위 느껴질 리가 없다.

“그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지름길로 가는 게 어떤가요.”

“거칠고 빠른 건 싫어. 천천히 부드럽게 해줘.”

마크가 빙긋 웃으며 느리게 속삭였다. 촉촉이 젖은 눈빛이 미끈하게 빛났다. 일부러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만 골라 쓰는 의도가 궁금하다.

“벨라가 당신에 대해 어떤 소문을 냈는지 궁금해요. 말해줘요.”

마크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졸린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거렸다.

“그 여자 얘긴 이제 더 안 할래. 벨라는 못됐어.”

말투가 이상했다. 발음은 어눌하고 단어는 유치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 마크는 발목이 묶인 채로 꽤 많이 전진했다. 그가 어느새 발밑에 와 있었다. 정강이에 그의 금빛 머리칼이 와 닿았다.

뒤통수가 융기한 두상 덕분에 뒷모습만 보면 성인 남자라기보다 차라리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보였다. 정수리를 뚜렷하게 장식한 가마는 그답지 않게 귀여웠다. 시선을 빼앗겨 정신을 놓고 있다 꽤 시간이 지난 뒤 그를 말리려고 보니 한쪽 바짓단이 이미 마크의 입안에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었다.

“마크,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데님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예요. 자주 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죠. 제 청바지가 맛있나요. 왜 핥고 있는 거죠?”

“……더러워서 좋아.”

마크의 목소리는 좋지 않다. 낮게 가라앉은 데다 잠겨 있었다.

“더럽게 섹시한 게 좋은 거죠. 더러운 청바지는 그냥 더러운 청바지일 뿐이에요.”

“더러운 게 좋아.”

평소 사용하는 어휘가 나보다 세 배는 더 될 양반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이상했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순간이다. 억지로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자 눈이 풀린 채 코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게 보였다.

입안에서 바지를 빼내려니 이를 악물고 버틴다. 코를 콱 쥐었다. 필요 없는 일임에도 유령도 숨은 쉰다. 습관이란 그런 거니까. 합, 마크가 입을 벌리는 순간을 노려 바지를 뜯어내곤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까만 해도 창백하고 차갑던 뺨이 분홍빛으로 뜨끈했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열기를 품고 나른하게 풀린 게 누가 보면 약이라도 한 줄 알겠다.

“싫어. 놔.”

만연체를 사랑하는 노신사가 말이 매우 짧아졌다. 정신이 훅 날아갔으니 이제 좀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으려나.

“마크, 당신이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아서 유령이 됐다고 생각해요? 춥고, 배고프고, 모양새 빠지고, 유령이란 건 당신이랑 진짜 안 어울려요. 그렇잖아요.”

“핥을래. 놔 줘.”

어린애처럼 칭얼대지만, 내용은 전혀 순수하지 않다.

“뭘 그렇게 핥으려고 해요. 개 같이 굴지 마요.”

“개는 한번 하면 세 번씩 한대. 한번 넣으면 세 번 싸고 빼는 거야. 멋지지?”

의자에 앉은 내 정강이 사이로 그가 허리를 들이밀고 멋들어지게 크게 돌리지 않았다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었을 것이다. 멋지긴. 토할 것 같다.

“짐승처럼 한번 해보고 싶어서 이승에 남은 거예요?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어요?”

내 비난에도 정신이 나간 남자는 술 취한 사람처럼 히죽거릴 뿐이다.

“짐승은 좋아. 가식 따윈 없지. 동물처럼 욕망에 솔직할 수 있다면 난 행복할 거야.”

“마크-.”

화난 목소리로 부르자 움찔 말을 멈췄던 남자가 이내 줄줄 되지도 않는 말을 변명처럼 쏟아냈다.

“여왕벌들은 몇 분, 혹은 한 시간가량 혼인 비행을 하는데 여왕벌 한 마리는 혼인 비행에서 매번 저정낭이 정자로 가득 찰 때까지 짝짓기를 해. 정자들은 저정낭 안에서 여왕벌이 살아 있는 동안 신선하게 유지된대. 내게도 날개가 있다면 좋겠어. 내가 벌이 되면 공중에서 해볼 수 있겠지? 봄바람은 살랑거리고, 솜사탕 같은 구름 아래로 후두둑, 하얀 비가 내리는 거야.”

혈압이 솟구친다.

“이봐요, 좀 작작해요.”

끙, 신음이 절로 나왔다.

“네 목소리 좋아.”

마크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뚝한 콧날을 중심으로 눈 주변과 뺨을 붉은 기가 온통 점령했다. 색(色)에 미친 유령답지 않게 어떻게 보면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눈빛으로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남자가 불쑥 상반신을 들어 올렸다. 한 번 눈을 마주치기가 어렵지 그다음부턴 쉬운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홀린 듯 나를 바라봤다.

“찡그리고 ‘끙’ 하고 싸는 거야? 허리도 덜덜 떨면서.”

색에 굶주린 유령이 지금 내게 갈 때의 표정을 묻고 있는 것 맞나. 못 들은 척 다른 싸는 얘기로 말을 돌렸다.

“제가 당신한테 아침 화장실 풍경까지 말해줘야 하나요.”

“아침부터 싸? 욕실 벽에 튀겨 가면서?”

“이봐요!”

섹스가 뭔지만 알고 있는 7살짜리랑 얘기하고 있는 기분이다. 마크가 딱 7살짜리나 어울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자네한테 맥을 못 추는 줄 알았어. 자넨 여왕벌 같아. 향기 물질로 유혹하면 성적으로 성숙한 수벌들은 그 냄새의 유혹을 못 참아. 난 잘못 없어. 네가 날 미치게 만드는 거야.”

끈적이는 목소리로 포르노에 나올법한 대사를 뱉으며 마크는 문질문질, 자신의 하반신을 내 다리에 비벼댔다. 소름이 쫙 끼쳤다. 확 밀쳐냈더니 도로 와 붙기를 반복한다. 사지가 구속된 채로 그의 허리와 대퇴부만 참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과도한 움직임에 상의가 펄럭이며 창백한 허벅지 속살과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부위가 훤히 드러났다.

나는 다 봤다.

보고야 말았다.

그가 의욕에 충만한 건 확실히 알았다. 그가 수벌이든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의지 충만한 그의 정신과 달리, 그의 몸이 영 따로 논다는 점이니까. 가엾긴 했지만 진실은 밝혀야겠다. 혹여 말을 못 알아들을까 싶어 검지로 확실하게 국소 부위를 찍어 가리켰다.

“성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않았어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부위는 여전히 시들하고, 얌전하기 그지없었다. 마크식대로 말한다면 ‘음경이 모세혈관으로부터 아예 피가 빨아들이지 못해 음경해면체가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적받은 상대가 잠시 주춤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거기에 대해선 말 안 할래.”

귀와 목덜미, 가슴까지 빨개졌다.

그 모습은 조금 귀여워서 나는 ‘빌어먹을’로 시작해 ‘젠장, 망할’로 끝나는 욕을 한바탕 속으로 퍼부었다.

셔츠 아래의 사정에 나는 마크가 들고 흔들어 댔던 약병 안 알약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설마 고……ㅈ.”

거기까지 입 밖에 냈다가 이를 악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정하자. 하마터면 진중하고 멋진 내 본연의 캐릭터를 잃고 덜떨어진 유령과 같은 수준으로 추락할 뻔했다.

“마크, 마크?”

손을 내밀자 마크가 혀로 내 손가락을 핥았다. 분홍빛 혀를 콱 집으려다가 참았다. 완전히 맛이 간 상대를 똑같은 수준으로 응대하지 말자. 헐거워진 팔목과 발목 끈을 도로 조이고, 둘을 연결 지었다. 공처럼 동그래진 채로도 마크는 웃으며 즐거워했다. 거칠게 묶이는 걸 좋아하다니, 이쯤 되면 호러다.

“당신 환자 같아요.”

“병명이 뭔데, 섹스 중독?”

“뇌에 이상이 생겨서 리비도만 남은 변태 성욕자같이 굴지 마요.”

“그거 좋다-.”

변태 성욕자란 말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얼굴을 한 대 후려쳐주고 싶었다. 주먹에서 힘겹게 힘을 뺐다.

“마크, 좋은 말로 할 때 정신 차려요. 안 그러면 정말 성수를 뿌릴 거예요. 당신이 뭐 때문에 이 세상에 남아 있는지 그 이유를 떠올려 봐요. 당신의 영혼은 물 흐르듯이 빛을 따라갔어야 했어요. 당신을 막고 있는 게 뭔지, 혈관을 막은 혈전처럼 저세상으로 가는 길을 콱 틀어막은 응어리가 뭔지 생각해내요. 그걸 풀어내면 저절로 당신의 영혼은 아름답고 빛나는 세계로…….”

“이거 막혀 있어. 답답해 보여.”

언제 잽싸게 몸을 일으켰는지 마크가 내 청바지의 지퍼를 입에 물고 웅얼거렸다. 지직, 지퍼가 내려간 틈으로 나타난 속옷에 잽싸게 혀가 달라붙는다. 얇은 천 하나 사이로 물컹하고 뜨끈한 게 와 닿는 감촉이 짜릿하다. 뒤통수의 머리털들이 비죽 섰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치고 말았다.

‘헉!’

마크의 얼굴만 한 내 주먹이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하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성이 안 된다고 외쳤으나 주먹에서 힘을 빼는 게 너무 늦었다.

마크는 쿵 소리를 내면서 나가떨어졌다.

“아, 아파! 무슨 짓이야?!”

마크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고함을 쳤다. 눈 딱 감고 못 본 척했다. 마크의 몸을 굴려 멀리 밀어낸 뒤 한 발로 그를 밟아 눌렀다. 그리고 재빨리 휴대폰을 빼 라이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라이언? 나야.”

“날 두고 왜 다른 남자랑 전화하는 거야? 날 방치하지 마.”

마크가 특공대원도 울고 갈 날렵함으로 몸을 굴려 내 발 아래에서 도망쳤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동시에 들면서, 내 휴대폰을 잡아채려 했지만 높이 상 불가능했다. 들은 척도 않고 라이언과의 통화에만 열중했다.

“라이언, 지난번에 한 말 책임질 수 있어?!”

남자의 혀가 소중한 곳에 닿은 경험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젖은 속옷의 감촉이 말 못하게 찝찝하다. 엑소시즘이든 뭐든 못할 게 뭐냐. 은사의 영혼을 엑소시즘 시켰단 죄책감은 얼마 안 가면 잊힐 테지만, 색에 찌든 유령에게 당한 경험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거다. 라이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상관 있는 사이라고 해도, 유령과 말을 튼 것부터가 잘못이다. 여기서 어서 도망쳐야 한다.

나는 라이언에게 주소를 알려주었다. 제임스에게 들어 알게 된 곳이다. 듣고 있던 유령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내가 묻힌 데가 거긴가?”

“이미 알면서 왜 물어요.”

“정말로 엑소시즘을 하려고?”

“당연히 그래야죠. 뭔가 사연이 있어 보여서 좀 들어보려 했는데 안 되겠어요. 말이 통해야 뭘 하죠. 도와주는 사람을 대책 없이 덮치려고나 하고, 당신은 구제불능에 엉망진창이에요. 변태 유령은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에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없애버릴 거예요!”

“잘못했어.”

마크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그가 초조한 양 혀로 입술을 축였다.

“사과의 의미로 잘 빨아줄게.”

“!”

마크의 턱이 회전하는 방향을 가늠해 재빨리 허리를 뒤로 물렸다. 툭, 마크의 턱은 의자 위로 떨어졌다. 좀 전 내 다리가 갈라지는, 내 소중한 부위가 있던 곳에 정확하게 착지했다.

나는 두 번째로 그의 얼굴을 가차 없이 밀어버리곤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발바닥에 등을 눌린 채 마크가 입술을 핥으며 굶주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목울대가 울렁거리는 모습이 흉흉하다. 마크 덕에 사냥감이 된 더러운 기분을 맛봤다. ‘베니, 엉덩이를 조심해!’ 머릿속에서 라이언이 고함을 질렀다.

“이봐요,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요. 당신이 머릿속에서 못 떨치는 생각. 죽기 전까지 못 푼 미련 같은 게 있을 거예요. 그걸 좀 말해보란 말입니다.”

“……내가 못 떨치는 생각?”

“그래요. 생각 좀 해봐요.”

“내가 못 떨치는…….”

마크가 느리게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날렵하게 움직이던 분홍빛 입술이 뻐끔거리는 붕어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다 이내 살짝 열린 상태에서 그대로 멈췄다. 남자의 커다란 눈이 절반쯤 감겼다. 긴 속눈썹이 부챗살처럼 내리 덮인 그늘 아래 그의 푸른 눈이 검게 가라앉았다.

마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욕정에 달뜬 얼굴로 나와 엎치락뒤치락하던 게 거짓말 같다.

저런 걸 보면 그는 유령이 맞다. 살아 있는 사람은 저처럼 빨리, 아무 도움도 없이 저런 상태에 빠지지 못했다. 눈을 뜬 채로 가수면 상태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은 그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이쪽과 저쪽 세상에 걸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모습에 오한이 일었다. 손을 들어 앞에서 흔들어도 마크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이성 하에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역린’ 혹은 ‘스위치’를 건드리면 곧바로 의식의 맨 끝 심층부로 끌려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해체된 기억 속에 갇혀 석상처럼 굳어버린 유령을 앞에 두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그를 두고 사라지면 그만이다. 산 사람이 유령과 대화하고, 그의 소망을 들어준다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선 다르다. 눈앞의 상대가 이미 죽은 사람이란 게 영 실감 나지 않지만, 그래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전신이 오싹했다. 많은 이야기 속, 유령과 마주친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그를 놔두고 사라지는 게 옳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두운 벽장 안에서 마크가 영영 넋 빠진 사람처럼 저리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올라 나를 말렸다.

-벤자민.

왜 하필 그토록 애절한 목소리로 날 불렀단 말인가.

결국, 호기심에 졌다.

“마크?”

뺨을 두들겨봤으나 반응이 없다. 성적으로 성숙하기를 희망하는 유령이니 깨우는 방법은 따로 있을 것이다. 혹시나 싶어 벌어진 입술 안에 엄지를 넣고 두 번째 마디로 아랫입술을 문질러 봤다. 그가 작게 숨을 토해내는 기색을 느꼈다. 금빛 눈썹이 살짝 떨렸다.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식물처럼 굳어버린 남자의 귀에 대고 속삭여봤다.

“……벤자민.”

그 순간 마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홱, 고개를 돌렸다.

“마크?”

그가 입을 닫고, 눈을 감아버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외면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다소 놀랐다.

그는 생전 많이 말하고, 많이 웃는 사람이었다. 활달한 남자는 또한 항상 나를 좋아하는 티를 냈다. 내가 그를 만나러 갈 때면 늘 웃으며 나를 반겨주던 남자가 비록 이성을 잃은 상태라고는 해도 나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당혹스럽다. 그가 반응하는 마법의 단어를 다시금 입에 담아본다.

“마크, 벤자민 얘기를 더 해줘요.”

그의 뺨이 실룩거렸다. 잔뜩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삐죽거렸다. 꼬맹이라면 사탕이라도 물려서 말을 듣게 할 텐데, 육십 대 노인에겐 대체 무슨 사탕을 물려야 하나.

“……벤자민이 보이는 게 아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보이다니, 뭐가 말인가? 유령이 알듯 모를 듯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럼 뭐가 보이는데요.”

마크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어 답을 들어낼 수 있었다.

“……여자야.”

마크가 툭 내뱉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느냐는 투다. 여자라니? 알 리가 있나. 점점 아리송해지기만 한다.

“누구요?”

“검은 여자.”

“이름이 뭔데요?”

“개가 있어. 검정 개.”

남자가 횡설수설한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 이름이 뭔데요? 그것부터 말해볼래요?”

닦달하자 어깨가 움찔 굳었다. 그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래요, 좋아요. 개부터 말해 봐요. 개가 어떤가요, 무섭나요?”

“……버려야 해. 내 물건들. 벽장.”

이런, 완벽히 헤매는구나. 마크는 무의식 속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죽은 자의 의식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승용차 바닥에서 한바탕 구른 케이크처럼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기능하는 걸 비난할 수는 없다.

“왜요. 벽장에 뭐가 있는데요?”

“…….”

벽장을 버리란 얘긴가? 아니면 벽장 안에 무언가 있단 말일까. 나는 벽을 눈으로 훑었다. 마크의 성격상 비밀 벽장이 있고도 남았다. 거기 뭐가 있기에.

“……벤자민.”

마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아찔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내 머릿속에 있어. 계속 빙빙. 자꾸 떠올라.”

가슴이 철렁했다. 많은 얘기 속 유령들이 그러하듯, 그가 진실로 ‘나’ 때문에 이승에 남았을지도 모른단 사실에 호흡이 가빠졌다.

“계속 말해 봐요.”

“벤자민.”

그는 마냥 웃기만 했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묘했다. 그답지 않은 애절한 목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일이란 게 뭘까. 불안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은 자가 떨치지 못하고 내내 기억하고, 기억해내는 내 모습이란 대체 어떤 걸까.

“내가 다리를 벌리고 있어. 그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나는 그가 찔러줄 때마다 뒤통수가 저릿거릴 정도로 기분 좋아서 마구 소리를 질러. 벤자민과 내가 침대 위에서 하루 종일 뒹군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마크-!”

이 변태 유령이 그러면 그렇지. 귀를 틀어막고 싶어진다.

어눌하던 말투가 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크가 마하의 속도로 음담패설을 뱉어댔다.

“그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잔인한 사내지. 인정사정 봐 주지 않아. 그에게 얻어맞은 엉덩이가 시트에 쓸리는 게 너무 아파서 더는 못 하겠다고 울면 친절하게 몸을 뒤집어주고 잠시 쉬게 해 줘.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음란하게 달아오른 뒤라서 그의 친절함이 오히려 독이 되지. 안타까움에 몸을 비틀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엉덩이를 벌리고 천박하게 꿈틀거리는 그곳을 그에게 보여주고 말아. 잔뜩 젖어서 느른하게 체액을 뱉어내는 붉은 밀지를 본 그가 뒤에서 단번에 꿰뚫는 거야. 눈앞에서 번쩍 번갯불이 튀기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해버려. 그럼 그는 흐뭇해하면서 움직이는 거야. 난 이미 사정한 뒤라 반응도 못 하는데 내 예민한 부분을 계속 문지르면서 쑤셔대는 게 너무 괴로워서 난 마구 울고 말아. 번쩍번쩍 불꽃이 튀고 말도 안 되는 교성이 튀어나오고, 온몸의 땀이란 땀은 다 빼게 돼. 정액은 마지막까지 다 토해낸 터라 힘없이 흐물거리는데 그는 잔인하게도 요도 끝을 긁으며 나를 몰아가지. 난 분명 더 반응하고 싶지 않은데, 내 거기는 어느새 그의 집요하고 잔인한 동작에 응해 딱딱하게 곧추서는 거야. 미칠 것 같지. 지옥 같은 희열과 쾌감에 흐느끼고 마는 거야.”

마크는 분명 흐뭇해하고 있었다.

피안(彼岸). 언덕 저 너머의 유토피아를 접하는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헤벌쭉한 남자의 표정에 말릴 타이밍을 놓쳤다.

내가 멍하니 입을 버리고 넋을 잃고 있건 말건 마크는 흥에 겨워 계속 주절거렸다.

“힘들어 신음을 뱉는 내 입술에 벤자민의 입술이 와 닿아. 엉덩이만 높게 든 채 상반신이 깔린 나와 키스하다 보니, 몸이 잔뜩 밀착되고 말지. 그의 단단하고 큰 몸이 내 몸 전부를 감싸듯 눌러서 내 몸은 보이지도 않아. 뒤에서 짐승처럼 범해지는 건 맘에 들지 않아서 칭얼거리면 그는 내 변덕에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해 줘. 나나 그나 대단하지. 그의 거기는 훌륭하고, 그를 받아내고 있는 내 거긴 인체의 신비 그 자체지. 발갛게 부어오른 주름이 모두 펼쳐져서 고단하기 짝이 없는데, 그는 끝만 아슬아슬하게 걸릴 정도로 한껏 빼냈다가 다시 퍽 소리가 나게끔 처넣어. 나는 자지러지면서도 그의 동작을 따라가려고 허리를 비틀다 보면 다음 날은 허리 아래가 완전히 나간 것처럼 감각이 없지.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런 것 따윈 생각 않고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고 말아. 내가 두 번째 절정에 도달할 때쯤 그는 내 안에 잔뜩 내보내는데, 크기가 큰 만큼 양도 많아서 뒤가 온통 묵직해지는 거야. 그가 내 몸에서 빠져나올 때면 미끈한 액체가 허벅지 사이로…….”

“난 당신이랑 안 잤어!!”

순간적으로 절규하고 말았다.

억울하다. 많은 이들의 억측과 달리, 마크는 나를 가둔 적도 없고 내 음료에 수면제를 탄 적도 없다. 우린 한 번도 자지 않았다. 손도 잡아 본 적 없단 말이다. 거기다 나는 상대를 배려해 꼭 콘돔을 사용하는 매너 있는 남자다. 정신 나간 유령에게 진실을 매도하지 말라고 외치고 말았다.

“맞아. 난 너랑 잔 적 없어. 누가 뭐래? 베네딕트, 나는 벤자민과 내 얘길 하고 있는 거야.”

벤자민도 당신과 안 잤어. 이 양반아.

“왜. 벤, 나랑 하고 싶어서?”

마크의 음흉한 미소에 눈앞이 노래졌다.

“그럼 날 유혹해보든지. 참고로 내가 벤자민을 유혹하는 방법을 알려줄까? 그는 어머니를 매우 사랑하는 착한 아들이야. 그래서인지 내 가슴을 빠는 걸 좋아해. 간단해. 셔츠 하나만 걸치고, 단추는 다 풀고, 가슴을 움켜쥐곤 ‘엄마한테 와보렴.’하고 말하면…….”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옷장 안에서 고급 셔츠를 가져와 박박 찢은 뒤 그 천으로 유령의 입을 막았다.

“우으우으으으으우으-!”

수다쟁이 유령이 입을 틀어 막힌 채로 끙끙댔다. 머리가 아파 왔다. 마크가 했던 말들을 정리해봤다. 그는 비음과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로 범벅된 게이 포르노 영상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다고 고백했다.

<벤자민과 함께 하는 뼈와 살이 타는 밤>에 대한 바람 때문에 그가 유령이 됐다면?

눈앞에 깎아지른 절벽이 솟아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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