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윗의 탑-10화 (10/18)

끌림 5

미셸은 그 뒤로 매주 데이빗을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미셸은 끈질겼고, 데이빗은 어느덧 남자를 밀어내는 걸 포기했다.

데이빗의 치료 날짜가 토요일로 바뀌자 미셸은 매우 좋아했다. 알고 보니 그는 토요일마다 미식축구 모임이 있었다. 축구장은 병원에서 가까웠고 데이빗이 치료를 받을 동안 미셸은 경기를 마치고 데이빗을 데리러 오곤 했다.

치료가 빨리 끝난 날, 데이빗은 미셸을 기다리지 않고 경기장에 직접 찾아갔다. 미셸은 뒤끝이 깊어서 데이빗이 말없이 돌아가버리면 입이 댓 발이나 나와 데이빗의 집에서 계속 궁시렁대곤 했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얼마간 들어가자 푸른 잔디 구장 위 뛰어다니고 있는 짧은 금발 남자가 보였다. 미셸이었다. 행여 엇갈릴까 싶어 걸음을 빨리했던 데이빗은 안도감에 숨을 내쉬었다.

미셸이 이리저리 뛰고 있는 구장은 일반적인 미식 축구장과 모양은 같았지만, 그 구성원은 조금 달랐다. 골대가 있어야 할 자리엔 대신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앉아 있었다. 군에 있을 때 친해진 같은 사단 동료끼리 미식축구를 한다고 했던 미셸의 말이 기억났다. 부상을 당해 다리가 불편해진 전우가 휠체어를 탄 채로 경기하는데, 제법 잘한다고 했다. 그 남자가 저 사람인가 보다.

데이빗은 경기를 방해하지 않고 구석으로 가 몸을 숨겼다. 시간이 꽤 남은 듯해 스케치북을 꺼내 미셸과 다른 사람들을 그렸다. 오랜만에 움직이는 대상을 그리는 건 퍽 즐거웠다.

경기장 안의 미셸은 평소보다 훨씬 불량해 보였다. 왁자하게 웃고, 침을 뱉고 건들거렸다. 상스러운 욕을 하며 어깨에 힘을 줬다가 별것 아닌 말에 낄낄거리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왔어?”

뒤늦게 데이빗을 발견한 미셸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해 오히려 데이빗이 낯 뜨거워졌다.

“어이 상병, 그 남자냐?”

휠체어를 탄 중년 남자가 데이빗을 바라보며 묻는다.

“이름이 뭐였더라? 성서에 나오는 왕 이름이었는데.”

“데이빗이요. 노먼, 아는 척 말고 꺼져요.”

미셸의 경고에 중년 남자의 얼굴이 심술궂게 일그러진다. 그는 이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애들아, 미셸의 그이가 왔다-!”

노먼의 외침에 잔디밭에 흩어져 있던 시커먼 사내들이 설탕을 본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이 남자가 미셸이 말한 데이빗이란다.”

“우와!”

“당신, 진짜 미셸이랑 사귀어요?”

“저 자식이 먼저 꼬셨죠?”

“맞네, 맞네, 저 자식 얼굴에 속은 피해자가 여기 또 있네.”

“ 저 자식 얼굴만 곱상하지 성질은 더러운 거 알아요? 화나면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난리가 아닌데, 왜 꼭 부대에 하나 있는 가라오케 기계를 부수냐고.”

“맞아, 소대장이 막 부르려던 참에 부숴서 그날 밤 계속 훈련이었잖아.”

“소대장이 마돈나 노래를 부를 수도 있는 거지. 그걸 못 참고 기계를 던져?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새끼.”

“그래도 라이크 어 버진은 좀 심했어.”

“하긴.”

“야, 미셸이 사고 친 게 그것뿐이냐. 우리가 잘 가던 클럽 아가씨보다 미셸이 더 예쁘다고 놀렸더니 노먼이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커피 머신을 부쉈잖아.”

“잠깐만, 이 썩을 새끼의 죄악을 우리가 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거지.”

“그러네, 우리가 그동안 너무 관대했어.”

남자들의 왁자한 수다에 데이빗은 질린 얼굴로 얼어붙었다.

2미터가 다 될 것 같은 흑인 남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항의했다.

“미셸, 이제 와서 커밍아웃하면 어떡해! 내가 샤워할 때 다 훔쳐봐놓고!”

“말 잘했다. 네 엉덩이 볼 때마다 시력이 일 디옵터씩 떨어졌었어. 이 짝궁둥이 새끼야.”

흑인 남자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비통해 하려다 다들 도망치는 바람에 씩씩거리며 홀로 분을 삭였다.

“데이빗, 이번 대회 상품이 뭔 줄 알아요? 알래스카행 기차 여행이래요.”

“네?”

데이빗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한 번도 여행다운 여행을 가 본 적이 없고, 갈 수 있다면 여름에도 선선하단 얼음 대륙에 꼭 한 번 가고 싶어 했다. 그 바람을 이 사람들이 어찌 알고 있는지 신기했다.

“그것도 부부 동반 여행이라면서?”

“파트너를 한 명씩 데리고 오는 거래요.”

“한적한 곳에서 묵을 수 있는 방갈로도 끼어 있는 상품이래.”

“미셸이 누구 때문에 그런 상품을 걸었을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미셸이 벌컥 고함을 질렀다.

“너넨 산업스파이보다 더 악질적인 놈들이야!!”

데이빗을 결승전에 초대해 감동적인 선물을 안기려던 미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남자는 억울해 이를 갈았다.

“그러게 평소에 맘을 잘 썼어야지.”

“너 때문에 깨진 커플이 몇인 줄 알아?”

“업보다 업보.”

동료들은 그 모습을 비웃으며 고소해했다.

미셸은 왕년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며 동료들을 몰아냈다. 부산스러움에 멍해져 있던 데이빗은 그제야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데이빗은 자신이 미셸과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반박할 기회를 놓쳤다. 미셸이 저 소란스러운 남자들에게 대체 어디까지 말했을까. 데이빗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아, 알래스카는 어, 어떻게 알았어? 카일이 마, 말해주던가.”

“당신 동화를 읽어봤지. 연필 기차가 나오는.”

미셸은 데이빗이 들고 있는 스태들러 연필을 가리켰다. 데이빗의 동화 속에서 ‘소년’은 노란색에 검은 테두리가 진 연필을 기차 삼아 타고 다녔다. 미셸은 그와 똑같은 모양의 열차를 알고 있었다. 앵커리지에서 출발해 페어뱅크스를 종착역으로 하는 Princess Tour 기차. 미셸은 데이빗이 알래스카를 갈 거라던 카일의 말이 무슨 뜻인가 그제야 알았다.

리플리가 도움을 줬다. ‘데이빗 베커, 알래스카’를 검색어로 사용하는 리플리를 보며 미셸은 설마 유용한 정보가 나올까 비웃었다. 가장 첫 페이지에 데이빗이 첫 동화책을 내며 했던 인터뷰가 검색되자 미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이빗은 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무얼 할 거냐는 질문에 오래전부터 알래스카를 꼭 가 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카일을 아무리 닦달해도, 데이빗을 아무리 을러대도 얻을 수 없는 정보였다. 구글 검색 엔진은 위대했다.

“아, 알래스카 여, 여행 같은 걸 상품으로 걸면 사, 사람들이 시, 싫어할 텐데.”

데이빗은 자기 때문에 경기 성격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물음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상품 고르는 기, 기준이 너무 머, 멋대로인 거 아냐?”

미셸이 맞다며 웃었다. 미셸은 매년 회사의 자금으로 퇴역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미식축구 리그를 열었다. 그 덕에 그의 회사는 퇴역 군인들을 돕는단 홍보 효과를 얻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올해는 그 좋은 일에 사심이 섞였다.

“근사한 방갈로를 하나 얻어서 거기서 여름을 지내는 것도 좋겠더라. 나이 든 사람들은 퍽 좋아하던걸.”

진실을 밝히자면 좋아한 건 기혼자들뿐이다. 미혼자들, 노먼과 같은 싱글들은 격렬히 반대하며 대놓고 밀월여행을 계획하는 미셸에게 야유를 퍼부었지만, 주최자는 미셸이었다.

“퇴역 군인들만으로 이뤄진 리그야. 팀이 7개밖에 안 되니까 세 번만 이기면 우승인 거지.”

그러니까 내가 우승하면 당신, 나랑 같이 여행을 가지 않을래?

이어 말하려다 미셸은 입을 다물었다. 조수석에 앉은 데이빗이 긴장한 얼굴로 미셸을 쳐다보고 있어서였다. 볼이 발갛다.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그 모습에 미셸은 마음이 설렜다.

미셸이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자연히 둘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미셸은 데이빗을 곁눈질하며 차를 몰았다. 데이빗은 샤워를 막 마친 미셸의 몸에서 풍겨오는 비누 향기를 맡으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아, 아버지는…….”

“응?”

“우리 아버지는, 나, 날 때린 다음날엔 초, 초콜릿을 줬지.”

“…….”

“다, 당신도 내, 내게 사, 사과하려고 잘, 잘해주는 거라면…….”

미셸은 차를 정차하고 거칠게 벨트를 풀었다. ‘이런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힌 남자를 봤나.’ 그는 데이빗에게 바짝 다가가 상대를 유리창과 자신의 몸 사이 가뒀다.

“초콜릿 따위가 아냐.”

데이빗이 겁먹은 눈으로 미셸을 올려다봤다. 미셸은 숨을 들이켰다. 경기로 땀을 흘린 육체는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에 반응해 금세 흥분했다. 심장에 열이 올랐다.

“눈알 두 쪽 다 멀쩡하잖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안 보여?”

미셸은 자신을 너무 악랄한 놈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속삭였다. 귀에 닿은 낮은 탁성이 간지러워 데이빗은 눈을 깜빡였다.

“젠장, 안 보이면 눈 감고 그냥 느껴.”

미셸은 멈칫 물러나는 머리를 끌어안아 제 곁으로 당겼다. 미셸의 단단한 손이 야윈 턱과 뺨을 어루만지자 데이빗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입을 열었다. 물러서는 어깨를 쥐고 미셸은 데이빗의 눈꺼풀과 광대뼈에 쪼듯이 입 맞추었다. 당황함에 눈을 깜빡이다 데이빗은 어느새 감각에 휩쓸려갔다. 상대의 혀가 입안과 치열을 훑었다. 뜨겁고 뭉근한 살덩어리가 입안으로 들어와 여린 살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한다.

“흐…….”

데이빗은 호흡이 가쁜 와중에도 야릇한 기분에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혀와 혀가 맞닿았다 떨어졌다. 젖은 입술을 슬쩍 누르고 간 상대의 뭉클한 입술 감촉에 데이빗은 뒷덜미가 오싹했다.

“이제 내 말 믿지?”

“…….”

미셸이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남자는 겉보기와 달리 퍽 유치한 구석이 있었다. 굳이 확답을 얻어내려 하는 남자에게서 최대한 멀어져 데이빗은 창문을 열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집에 들어가기 전 데이빗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데이빗의 시선을 느낀 미셸이 눈썹을 휘며 시선을 마주 대했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 놀 속에서도 제 색을 잃지 않고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대하며 데이빗은 잠시 세상이 흔들린 것 같은 어지러움을 맛봤다.

예전 산장에서 지진파가 흘러갈 때 땅이 흔들렸던 바로 그 느낌처럼 세상이 출렁거렸다. 죽은 줄 알았던 심장 안 깊숙한 일부분이 다시금 세차게 뛰었다.

“뭐 잊고 간 것 있어?”

“아, 아니 그게…….”

데이빗이 한참 머뭇거렸다. 미셸은 남자가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저리 굼지럭거리나 싶었다. 실제로 데이빗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미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미셸, 날 저, 정말로…… 좋아하나?”

“……”

녹색 불이 켜졌다.

미셸은 차 문을 열어둔 채 쏜살같이 데이빗에게 다가갔다. 좋아해. 얼른 답해야 하는데 마음이 애달아 말이 목에 걸렸다. 미셸은 데이빗을 꽉 끌어안고 그에게 입 맞췄다. 상반신이 마주 닿았다. 심장과 심장의 고동 소리가 박자를 맞추어 뛰었다. 긴 키스였지만, 잠시 정신이 나가 있던 이들은 그들이 얼마나 오랜 입맞춤을 나눴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 의심은 이걸로 끝이야.”

밝게 웃는 미셸의 미소가 어색해 데이빗은 시선을 피했다. 아까의 키스 땐 너무 놀라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타액을 삼키며 입안의 훑는 혀끝에서 구토방지제의 맛이 연하게 났다.

“야……약 맛 나는 키스가 뭐가 좋다고…….”

“맛있어.”

미셸이 입술을 닦으며 킬킬댔다.

* * *

엘리는 카일의 집에서 잘 적응했다. 카일은 엘리의 먹이에 몇 번 마리화나를 섞여 먹였지만, 영특한 고양이는 카일이 만든 음식은 콧방귀를 뀌며 건드리지 않았다.

“진짜 영리한 고양이야. 잘하면 유전자 조작 콩도 구별해내겠다.”

카일은 엘리를 매우 맘에 들어 했다. 험악한 마스크와 걸걸한 울음소리가 자신의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킨다며 엘리를 옆에 두고 작업을 하곤 했다. 안방에서 카일의 기타 소리와 엘리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고문당하며 데이빗은 방음 작업을 더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미셸네 팀은 기적적으로 2차전에 진출했다. 최약체라고 평가받던 지라 기대도 안 했는데 어렵사리 한 경기를 주웠다. 미셸은 준결승전은 꼭 보러 오라며 데이빗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경기가 있는 날, 데이빗은 약속대로 미셸을 찾아갔다. 마지막 항암치료는 지난주에 마쳤고 오늘 병원에선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몸이 가벼워지자 마음도 쉽게 들떴다. 경기장의 관중석에 앉은 데이빗은 몇 달 사이 가장 평온한 마음 상태를 즐겼다. 스케치북 위에서 움직이는 손놀림도 가뿐해서 데이빗은 어긋난 선 없이 그럭저럭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초록색 구장 위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쿼터백을 그림 위에 담았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팀의 주장인 미셸이 팀원들을 모아놓고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어깨를 단단히 채운 보호 장비 덕에 허리가 상대적으로 가늘어 보인다. 늘씬한 남자는 헤비급 라인맨들 옆에 서 마치 근육이 덜 붙은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노먼, 내가 시합 전날만큼은 술 좀 작작 퍼마시라고 했죠!”

“어젠 안 마셨어!”

“어제라는 게 정확히 몇 시부터 몇 시를 말하는 건데요. 그제 마신 술이 아직도 안 깨서 그 모양이라면 당신 간은 완전히 썩었어요.”

“내 간은 멀쩡해. 너야말로 눈이 썩었냐? 왜 자꾸 브레드 맥키벤한테 공을 던지는 건데. 그놈한텐 추파나 던져. 공은 나한테 던지고!”

“지금 누굴 웃기려고 그딴 개소리를 하는 거예요?!”

미셸의 팀은 대분열,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작전 회의 시간에 상대 팀을 이길 묘안을 짜내기는커녕 서로 인신공격을 하느라 바빴다. 쿼터백인 미셸과 인간 골대 노먼이 으르렁대고, 라인맨인 톰은 옆에서 미셸을 거들었다. 미들맨인 댄이 노먼의 곁에 서서 사람 좋게 웃었다.

데이빗은 댄이란 남자가 가끔 미셸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도둑놈이 도둑놈을 알아본다고 데이빗은 댄의 눈빛에서 사내의 속내를 읽었다. 그는 미셸에게 관심이 있었다. 댄쪽을 정신 놓고 바라보느라 스케치북 위를 움직이던 손놀림이 둔중해졌다.

미셸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잔소리를 해댄 효과는 미미했다. 호각 소리와 함께 재개된 경기에서도 미셸네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상대편 쿼터백이 워낙 실력이 좋아서였다. 브레드 맥키벤, 긴 팔을 이용해 구장을 가르며 적재적소에 공을 던졌는데 어찌나 패스가 정확한지 가로채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거기다 이 잘생긴 남자는 누구와 다르게 성격도 매우 좋았다. 실수를 한 동료를 데려와 윽박지르는 대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모습은 미식축구 드라마 속 훌륭한 캡틴의 전형으로 보였다.

“해리, 밀릴 거라고 미리 겁먹고 자릴 내주지 마. 넌 할 수 있어. 넌 내가 봐온 라인맨 중 최고의 자질을 갖고 있어. 연습 게임 땐 이것보다 배는 훌륭했어. 네가 네 자신을 믿지 않아서 이런 거잖아. 힘을 내!”

브레드의 응원을 받고 돌아간 라인맨이 힘을 내는 걸 보고 미셸의 팀에서 솔직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미셸에겐 미안하나 데이빗도 몇 번 브레드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장신의 사내가 간결한 동작으로 패스를 성공시키는 모습이 우아했다. 데이빗은 미셸을 그리던 화폭에 브레드의 모습도 함께 담았다.

노먼이 기어이 쓰러졌다. 그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화장실로 절룩거리며 뛰어가다 풀에 걸려 중도에 넘어졌다.

“장염이 도진 모양이야……. 설사가…….”

노먼은 엉덩이를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노먼의 창백한 얼굴에 톰이 이마를 짚으며 절망했다.

“노먼이 빠지면 누굴 넣어. 우린 후보 선수도 없는데.”

“매니저는 있잖아.”

“누구?”

데이빗은 선수들이 우르르 자신에게 다가오는 데 놀랐다. 그들은 데이빗에게 대뜸 노먼의 선수복부터 내밀었다. 옷에는 노먼이 흘린 맥주 자국이 뚜렷했다.

“데이빗, 우리를 위해서 좀 뛰어줘요.”

“아냐, 정확히 말하면 뛸 필요도 없지. 당신은 그냥 앉아서 공만 잡아주면 돼요. 골대 대신 사람이 공을 받으면 터치다운인 경기 방식은 알죠?”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였다. 퇴역 군인들은 휠체어를 탄 동료를 그런 방식으로 경기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자신은 엄밀히 말해 경기에 참가할 자격이 못됐다. 톰이 문제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뭐 어때요. 당신은 어차피 미셸을 따라 여행을 갈 건데.”

“맞아, 부부 동반 여행에 따라 갈 사람이면, 경기에 참가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심판을 속여 외부인을 끌어들이겠단 뻔뻔한 소릴 잘도 했다.

“미셸이 거기 기막힌 방갈로를 이미 잡아뒀다던데?”

“뻔한 계획이지. 눈이 많이 오면 거기 갇혀서 며칠 동안 허리가 빠져라…….”

“그만-!!”

미셸은 노성을 질러 캡틴의 소박한 로망을 일러바치는 반역자들을 입 닥치게 했다. 미셸은 동료의 손에서 노먼의 옷을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 불필요한 동작에 화장실에서 돌아온 노먼이 눈을 흘겼다. 미셸은 팀원들 앞에서 단호히 선언했다.

“절대 안 돼. 데이빗은 환자야. 코뼈랑 손가락을 수술한 사람한테 너희들 똥 볼을 잡으라고?”

노먼이 끼어들었다.

“환자긴, 나보다 건강해 보이는데.”

우왕좌왕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심판이 매정하게 재촉했다.

“경기 재개하세요. 선수 없으면 여기서 게임 접습니다!”

팀 내 가장 행동력이 뛰어난 남자가 움직일 때였다. 라인맨 패트릭이 데이빗을 번쩍 들어 노먼의 휠체어에 앉혔다.

“데이빗, 이게 규칙이야. 휠체어에서 엉덩이만 안 들면 돼.”

미셸이 패트릭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 몸에 손대지 마!”

패트릭은 껄껄 웃으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다른 사내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너무 애지중지한다.”

“줄리아 땐 이러지 않았잖아.”

“하긴 그 여자보다 이 친구가 더 사랑스럽긴 하지. 그 여잔 햇볕에 탄다고 온몸을 칭칭 감고 왔잖아?”

“맞아, 난 첨에 아랍여잔 줄 알았어.”

미셸이 음산하게 이죽거렸다.

“지금에서야 말하는데 내가 조기 제대 신청한 이유, 그거 니들 수다 때문이었어.”

“좋아, 모두 해결됐군. 미친 망아지들, 페어뱅크스를 향해 돌진하자!”

노먼이 하이파이브를 제안했으나 화장실에서 막 나온 중년 남자와 손을 마주치고 싶어 하는 이는 팀 내엔 없었다. 선수들은 우르르 각자의 포지션으로 흩어졌다.

휠체어에 앉아 보니 데이빗은 브레드가 더욱더 크게 보였다. 쾅! 데이빗은 들려온 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브레드와 부딪혀 떨어진 나간 미셸이 뒤로 밀려 나간 것도 모자라 두어 바퀴를 더 나뒹굴었다.

“미셸?”

데이빗이 놀라 남자의 이름을 불렀으나 거리가 멀어 미셸에겐 닿지 못했다.

“이런, 썅!”

일방적으로 힘에 밀린 미셸은 일어서자마자 거칠게 헬멧을 던져 심판의 주의를 받았다. 미셸은 그 뒤로도 몇 번 플레이라기보단 격투에 가까운 짓들로 브레드를 저지했으나, 근본적인 수는 못 됐다. 브레드의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없어 그의 팔을 잡고 엉겨 붙었다가 힘에 부쳐 질질 끌려다니는 미셸의 모습에 데이빗은 자신도 모르게 풋, 웃어버렸다.

필사적인 모습이 귀엽다. 승부욕 강한 남자의 어설픈 모습에 데이빗은 미셸이 자신보다 어리다는 걸 뒤늦게 상기한다. 자신의 몸 위를 타고 올라 벌건 눈을 빛내던 악귀 같은 남자의 모습 안엔 저런 어린애 같은 면도 함께 공존했다. 깨달음에 데이빗은 묘한 기분을 맛봤다.

침을 뱉고 툭툭 땅을 파며 성질을 부리는 먼지투성이의 남자가 데이빗은 더는 싫지 않다 여겼다. 불쑥 품게 된 감정에 놀라워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만다.

이놈의 심장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사랑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살만해지니 바로 감정이 솟아났다.

고교 미식축구 스타였던 성격 좋은 쿼터백에게 오합지졸 아저씨 무리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미셸과 동료들은 팀 컬러답게 지고 난 뒤에도 결코 승패에 깨끗하게 승복하지 않았다. “에이 시팔, 준프로인 놈을 데려다 뛰게 하고 있어. 매너 없이!” 경기 중 화장실로 달려가느라 경기를 중단시켰던 노먼이 매너를 운운했다.

“그러게, 저 브레드인가 뭔가 하는 놈은 약물 검사를 해봐야 해.”

톰이 대놓고 험담을 했다.

“미셸, 기분도 거지 같은데 상금이고 뭐고 다 없었던 일로 해버려.”

“뭐?”

“앞으로 경기는 다 비오는 날 잡는 거야. 좋네, 우천으로 모든 경기 중단, 리그 자체가 없어지는 거지.”

“그 좋은 머리를 아까 경기 때 쓰지 그랬어. 연습했던 작전은 너희 집 개한테 갖다 먹였냐?”

미셸은 바닥에 쓸려 까진 팔뚝을 털며 비아냥거렸다.

“너야말로, 왜 쿼터백이 터치다운 지점에서만 빙빙 도는데? 애인 보느라 집중 못 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내가 언제? 증인 있어?!”

“이 경기장 모든 사람이 다 증인이야, 멍충아!”

미셸이 노먼의 이마를 들이받으려 했다. 노먼은 피하지 않고 이마를 마주 댔다. 투석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다른 이들은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고, 둘이 힘 겨루는 꼴을 구경했다.

“얘들은 미식축구보다 인간 투우에 재능이 있네.”

“팝콘 필요하신 분?”

술 마신 건 노먼 하난데, 다들 꼬락서니는 노먼 못지않다. 강제로 경기에 끌려오다시피 한 데이빗은 눈앞의 아수라장을 구경하다 기가 막혀 풋 웃고 말았다.

웃음소리에 사람들이 데이빗을 돌아봤다.

“데이빗은 잘했어.”

노먼은 엄지를 들어보였다.

“응, 잘 잡더라. 데이빗, 제대로 된 공은 한 번도 안 놓쳤잖아.”

“휠체어에서 몇 번 엉덩일 들썩인 건 좀 웃겼지만.”

톰이 데이빗을 흉내 냈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데이빗도 귓불을 붉히고 따라 웃었다.

옆 팀은 이미 우승한 기분을 냈다. 브레드를 헹가래 치는 걸 본 노먼이 자신들도 헹가래를 하자고 제안했다.

“진 팀이 뭐 하게요?”

“이긴 팀 분위기 초치게.”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이럴 때는 단합이 잘 됐다. 미셸의 팀은 데이빗을 들어 올려 허공으로 던졌다. 기막혀하던 데이빗은 붕 뜨는 자신의 몸이 우스워 결국 크게 웃어버렸다.

“데이빗, 달리기 잘하지? 다음번엔 같이 뛰게 경기복 갖고 와!”

노먼이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앙증맞은 동작으로 손을 흔들었다. 어디서 미식축구복과 장비를 불쑥 구한단 말인가. 데이빗은 대충 웃으며 인사했다. 노먼이 어찌 알았을까. 데이빗은 준족이긴 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미셸과 함께 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미식축구를 해본 적도 없고, 규칙도 모르지만 상상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타.”

차를 빼온 미셸이 문을 열고 기다렸다. 2미터가 다 되는 거한 속에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던 남자가 잔디 구장을 벗어나 평지 위에 서자 본래의 키로 보였다. 헬스장에서 키운 게 아닌, 뛰고 부딪히며 자연스레 조각한 강인하고 늠름한 상반신에 데이빗은 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데이빗은 구장을 뛰어다니던 미셸의 모습을 회상한다. 가슴이 설렜다. 풀냄새와 금빛 태양이 미셸과 어울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데이빗은 자신이 미셸에게 반했던 이유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는 미셸이란 사내가 무척 부러웠다. 구김 없는 검정 슈트를 갑옷처럼 두르고 눈부신 태양 아래서도 시선을 내리는 법 없던 당당한 태도에 반했다. 일렁이는 정오의 빛으로 인해 갈색 반점마저 다 일어선 초록 눈동자의 현기증 나는 아름다움에 혹했다. 심장이 서걱거리는 설렘에 마주 선 그날, 고서점의 위치를 알려줘 놓고도 데이빗은 한참이나 미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동경이 사랑으로 변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데이빗은 옛 기억을 더듬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소란스럽던 분위기 속에서 웃고 떠들던 미셸은 정작 차에 타자 말이 없어졌다. 잘생긴 남자는 그 조각 같은 외모 덕에 웃음이 사라지면 인상이 차가워졌다. 딱딱한 미셸의 옆얼굴에 데이빗도 입을 다물었다. 미셸의 기분이 왜 상한 걸까. 자신이 너무 설친 걸까. 말 더듬는 꼴을 너무 많이 보였을까.

“페어뱅크스는……. 방갈로는 이미 예약을 마쳤거든.”

미셸에게서 차가운 말이 튀어나올 거라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데이빗은 엉뚱한 말에 헛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못 물러. 당신은 어찌 됐든 나랑 여행을 가야돼.”

설마 못 무를 리가 있을까. 데이빗은 지적하려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쑥스러운 말을 마친 미셸이 이번엔 험악한 기색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브레드는 원래 난 놈이야. 당신, 앞으로 딴 팀이랑 경기 있을 땐 오지 마. 맙소사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미셸은 자기 말이 자신도 기가 막혀 그대로 자폭해버렸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괴로워했다.

“솔직히 말해봐. 당신, 오늘 그 녀석 그렸지?”

데이빗은 머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드는 매혹적인 피사체였다.

“내가 미쳐. 뭐야, 그 자식한테 관심이라도 생겼어? 끌려?”

“끄, 끌린다는 게 뭐, 뭔데?”

“그 녀석이 좋아질 것 같으냐고.”

“아니.”

데이빗은 단호히 부정했다. 눈앞의 남자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끌릴 일은 어지간해선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미셸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데이빗의 마음을 너무 쉽게 끌어갔다. 그 사실이 가슴 설레고,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슬펐다.

데이빗의 깔끔한 부정에 미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어린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툴툴거렸다.

“시팔, 당신이 또 그놈 얼굴을 넋 놓고 보고 있는 꼴을 보면 내가 경기장 풀을 다 밀어버릴 거야. 그 잘난 새끼 면상이 다 까지게.”

“그, 그럴 필요 어, 없어.”

“왜?”

미셸이 정말로 궁금하다며 반문해왔다. 그렇다면 그런 거지, 거기 적당한 이유가 뭐가 있겠나. 질문을 예상 못 했던 데이빗은 쩔쩔매다 엉겁결에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친구는 멋지지만…… 내겐, 아무 사, 상관도 없는 사람이야.”

“그건…….”

미셸은 미간을 좁히고 데이빗의 말을 한참 음미했다. 청년은 더듬거리는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읽어내고 눈을 빛냈다.

“그래, 브레드와 난 다르지.”

미셸이 자신감에 충만한 얼굴로 웃는다. 데이빗은 부정할 말을 고심했으나 끝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 * *

여름이 끝날 무렵 데이빗의 코와 손가락은 완전히 나았다. 카일은 올해가 몇 달 남지 않았다며 문을 잠그고 면벽 수련에 들어갔고, 매튜는 가을 학기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아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괴력의 911대원이 개인사로 바쁜 틈에 미셸은 맘 놓고 데이빗을 만나러 카일의 집에 찾아들었다.

데이빗은 자신의 이름을 달고 나온 두 번째 동화책을 갖게 되었다.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작은 방을 얻었다. 새로 얻은 집은 역과 가까워서 자동차가 거의 필요 없었다. 낡은 트럭은 약속대로 카일에게 주었다. 미셸은 불쾌한 약속을 굳이 지킨다며 투덜거렸다. 침대와 책상, 제도판을 들여놓고 엘리에겐 벽까지 닿을 캣 타워를 선물했다.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는 동안 몇 번의 키스와 은밀한 눈빛 교환이 이루어졌다. 새집을 얻은 건 좋지만 카일과 매튜 없이 미셸과 단둘이 있다 보면 종종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미셸은 자신이 선물한 새 침대 위에 앉아 데이빗을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데이빗은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숨기며 미셸을 쫓아냈다. 그는 아직 침대 위에 미셸과 자신이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계절이 지나가며 바람의 질감이 달라졌다. 인쇄 전 편집자와의 미팅을 위해 출판사로 가던 데이빗은 뺨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에 놀랐다. 강변에 늘어선 단풍나무의 손바닥 모양 잎사귀 중엔 벌써 손끝이 불그스레해진 것도 있었다. 가을이 불쑥 다가온 풍경에 데이빗은 미셸과 재회 후 알게 모르게 시간이 꽤 흘렀음을 자각했다.

이 주. 데이빗이 처음 미셸을 납치했을 때 그는 그 정도면 미셸에 대한 감정이 정리될 거로 생각했다. 그 이상은 바라선 안 된다고 스스로 정한 기준선이었다. 이미 그보다 오랜 시간을 데이빗은 미셸과 함께했다. 솔직히 인정하자. 미셸이 데이빗에게 마음을 고백한 뒤의 시간은 데이빗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달콤한 시기였다. 라비앙 로즈, 때로는 인생이 장밋빛으로 은은히 빛을 낼 수도 있음을 데이빗은 인정했다.

오늘이 미셸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날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정작 말을 뱉은 미셸은 모를 테지만. 데이빗은 삼십 일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미셸의 마음이 얼마나 여물고, 얼마나 변했을까 내심 두려웠다. 좋은 일들은 대개 빨리 끝나는 법이니까.

최종 인쇄물을 점검하고, 두 개의 표지 시안 중 하나를 정했다. 한 번 입을 맞춰본 적 있는 디자이너는 데이빗이 첫 어절을 더듬거리면 바로 그다음 말을 알아채 작업을 도왔다.

“마침 미셸도 출판사에 일이 있어 왔대요.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걸요. 만나고 갈 거죠?”

미셸과 한 쌍으로 취급받는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당혹해야 할지 몰라 데이빗은 한참 표정을 고르며 머뭇거렸다.

디자이너가 전화기를 들고 주소록을 뒤지는 걸 데이빗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데이빗과 미셸은 여전히 미묘한 관계였다. 연인도 아니고, 막역한 친구 사이도 아닌데 굳이 미셸을 찾아가 일하고 있을 남자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부담 갖지 마요. 당신을 그냥 가버리게 하면 미셸이 화낼걸요.”

그녀는 숫기 없는 동화 작가와 출판사를 쥐었다 놨다 하는 젊은 사장 사이 관계도가 어떤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먹이 사슬 최상단에 위치해 있을 것 같은 미셸이 가장 하층에 있을 것 같은 데이빗에게만 약하게 굴었다. 수틀리면 흰자위를 드러내놓고 중역들과 싸운다는 젊은 사장이 말더듬이 작가 옆에서 괜히 착한 척, 멋진 척은 다 하며 내숭을 떠는 모습은 돈 주고도 못 볼 구경거리였다.

그녀가 웃으며 전화를 거는 걸 데이빗은 진땀 흘리며 바라봤다. 그는 오전 근무를 마치고 부랴부랴 바로 출판사로 온 터라 작업복에 점퍼를 하나 걸쳤을 뿐이다. 대학 로고가 크게 박힌 점퍼는 새벽바람을 막을 만큼 따뜻했지만, 너무 낡아 소매의 흰색이 온통 회색으로 죽어 있었다.

“어머, 전화를 안 받네요. 줄리아랑 바깥으로 나갔나?”

여자의 이름에 데이빗은 가슴이 철렁했다. 데이빗의 놀란 기색을 본 디자이너가 몰랐느냐며 수다를 덧붙였다.

“줄리아요. 데이빗 당신도 알죠? 둘이 약혼까지 갔다가 깨졌는데 요새도 계속 만나는 걸 보면 다시 합칠 가능성이 있는 거겠죠?”

미셸의 연애사를 물어봐야 데이빗은 해줄 말이 없었다.

“데이빗, 미셸에겐 문자를 보내놨어요. 이 건물 안에 있으면 그가 당신을 곧 찾아갈 거예요.”

“아뇨 괘, 괜찮아요. 바쁜가 본데 그냥 갈게요. 그럼 또 뵈, 뵙죠.”

데이빗은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 넓은 건물에서 미셸이 어떻게 데이빗을 찾아온단 말인가. 데이빗은 혹여나 싶어 뒤를 돌아보다 말도 안 된다며 도로 걸음을 옮겼다.

역과 연결된 통로로 들어서다 데이빗은 로비 안으로 들어오는 낯익은 인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리플리였다. 미셸의 비서가 있는 걸 보니 디자이너의 말마따나 미셸이 어딜 가지 않고 건물 안에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건물 안엔 미셸의 예전 약혼녀의 사무실도 있다던 말이 데이빗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데이빗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리플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엘리베이터는 고층의 한 층에서 멈췄다. 기계는 거기서 내려오지 않았다.

데이빗은 이상한 면에서 감이 좋았다. 그는 보진 않았으나 미셸과 줄리아가 그곳에 있으리란 걸 알았다. 데이빗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굳이 둘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 행복한 시간을 미리 단축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홀린 사람처럼 버튼을 눌러 미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구석으로 몸을 숨겼던 데이빗은 호리호리한 여인이 미셸과 마주 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데이빗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별로 무서운 장면도 아니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던 모습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인데 가슴이 호러 무비 속 끔찍한 괴물을 본 것처럼 떨렸다.

줄리아는 기억 속 모습보다 아름다웠다. 그녀가 미셸에게 슬쩍 몸을 기대고 남자의 뺨에,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운 바로 그 아래 지점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 뒷벽에는 금발 모델이 꽃밭 속에 파묻혀 있는 광고 사진이 걸려 있었다. 줄리아는 사진 속 요정을 닮았다. 미셸은 다가온 그녀의 몸에서 분명히 꽃향기를 맡았을 것이다.

데이빗은 미몽에서 깨어났다.

미셸은 데이빗에게 왜 멀쩡한 눈알 두 쪽을 두고 자신의 마음을 못 보냐며 닦달한 적이 있다. 데이빗은 반대로 미셸에게 묻고 싶었다. 멀쩡히 두 눈 뜨고선,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두고 잠깐이나마 자신을 바라볼 생각을 어떻게 했느냐고. 매운 감기에 걸린 것처럼 코끝이 시큰했다.

“데이빗?”

리플리가 툭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안구를 번들거리게 하는 물기를 수습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몰래 도망치던 데이빗을 발견하곤 리플리는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어라, 데이빗 울어요?”

축축한 눈동자에 놀란 리플리가 원인을 찾아 반사적으로 미셸을 돌아본다. 그 틈에 데이빗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슬라이딩해 들어갔다. 줄리아에게 시선을 맞추고 도란도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미셸이 그제야 데이빗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데…….”

두 번째 음절이 시작되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십여 층을 내려갔다. 데이빗은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러나 좀 전 자신이 봤던 두 남녀의 모습을 회상하자 가슴이 미어지고 명치끝이 먹먹하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었다. 미셸과 줄리아의 입맞춤 모습은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아했다.

좋은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 데이빗은 되뇌었다. 원래 이렇게 될 일이었다고, 언제 끝이 날지 몰라 초조하게 힐끔거렸던 모래시계 속 모래알이 마지막 순간에 와르르 쏟아진 것뿐이라고. 그러나 감정이 뭉클뭉클 쏟아져 냉정을 찾기 어려웠다.

「-난 당신이 좋아.」

그렇게 고백하던 미셸의 뺨은 붉고, 녹색 눈동자는 열망과 초조함을 담아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일어났던 일이고, 사실이며, 어찌 됐든 데이빗 베커란 남자의 삶 속 한 장을 장식한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그것이 수 초 만에 모두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단 사실이 야속했다.

꿀꺽, 침을 삼키자 눈동자 바로 밑까지 차올랐다가 억지로 끌어내려진 눈물이 목구멍 안에서 질척이며 짠 내를 풍겼다.

마음이 변하는 것은 왜 이토록 쉬운가. 그 마음이 원래 거짓이었거나, 혹은 자신이 착각하였던 것인가. 아니다.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착각도, 거짓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모습은 과연 무얼까. 답을 구하긴 쉬웠다. 데이빗의 마음 한쪽에서 늘 불안하게 일렁이던 추측이 현실이 된 것이다. 어쩌다 마음이 동해 자신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미셸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슬퍼할 이유는 없다.

그는 줄리아처럼 아름답지 못했고, 미셸처럼 부유하지도 않았다. 남자이면서 같은 동성인 남자를 좋아해 그를 납치했으며, 그로 인해 불거진 여러 일들로 미셸과 얽혔다.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로 지내며 그가 미셸에게 끼친 피해나, 미셸에게 진 빚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데이빗은 미셸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곁가지를 치우면 얘기는 달라졌다. 가장 중요한 것만을 따져 본다면……. 데이빗은 여전히 미셸을 좋아했다. 데이빗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그 마음이 무겁고 진해졌다가, 연해지고 가벼워지길 반복했으나 그 마음속 색채는 항상 붉었다.

사람을 사랑했다. 가당찮은 마음이기에 없애야 함에도 감정을 지우지 못하고 간직했다. 가장 중요한 그 하나의 진실만 따지고 본다면 자신은 눈물 흘리고 가슴 미어지게 슬퍼할 만큼의 잘못은 지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사랑한 것이 죄는 아닐 테니까.

데이빗은 중간층을 눌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옆 통로에 있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 도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대로 가기는 마음속 앙금이 많다. 데이빗은 미셸에게 할 말이 있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보여 놓고, 너무 쉽게 변해 버린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미셸을 너무 오랫동안 밀쳐냈던 게 문제였느냐고. 그렇다면 너무하다고. 자신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마음을 열어줄 가능성 따위도 없는 사람을 절망적으로 사랑하고, 그 감정이 죽지 않아 울어본 적 있노라고.

만남도 중요했지만, 정리도 중요했다. 도망치듯 가버리는 대신 돌아가 남자에게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땡, 목표 층에 닿았다. 엘리베이터가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몸을 마구 밀고 들어온 남자의 온몸은 땀으로 온통 젖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열기와 습기가 훅 끼쳤다. 새빨개진 얼굴로 노려보는 남자를 보고 데이빗은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미셸?”

“사람을…….”

미셸은 말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 너무 빨리 뛴 바람에 구역질이 치민 것이다. 그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을 골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못해 전력으로 1층으로 질주했던 미셸은 중간에 멈추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이번엔 전력으로 도로 올라와야 했다. 미셸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당신 진짜 특이해. 보통은 1층에서 내가 짠- 하고 나타나면 되는 건데, 사람을 고생시키려고 작정을 했어.”

“내가 어, 언제 쫓아오라고 한 적…….”

미셸이 미간을 찡그렸다. 남자는 데이빗의 몸을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밀어붙였다.

“미……셸?”

데이빗의 떨리는 목소리에 미셸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데이빗은 그에게 한 대 얻어맞을 줄 알았다. 미셸이 그 험악한 기세와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뜸 사과를 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 당신이 줄리아를 얼마나 싫어하는 줄 알면서 그 여자랑 잠깐 만나서 얘기했어. 그렇다고 그렇게 귀신 본 것 같은 얼굴로 울면서 사라지면 대체 나더러 가만있으란 소리야 말란 소리야?! 기껏 날 좀 좋아하게 됐다 싶었더니 다짜고짜 이러기야. 당신은 여전히 내겐 믿음이 안 가?”

한 방울 쥐 오줌만큼 흘린 것뿐인데 우는 건 언제 또 봤단 말인가. 데이빗은 미셸이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말은 아주 느리게 한 구절 한 구절씩 뇌 속에 흡수되었다. 데이빗은 일단 이해되는 것부터 대답했다.

“나, 난 주, 줄리아를 싫어하진 않아.”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줄리아를 어, 언급하는 당신이 싫은 거지.”

“…….”

“우, 운 것도 아, 아냐. 잠깐 감정이 욱해서…….”

미셸이 번개처럼 다가왔다. 너무 빠르고, 너무 가까웠다. 콧날이 뺨에 닿아 데이빗은 뻣뻣하게 굳었다. 몸을 빼려 했지만 미셸이 온몸으로 부딪혀 오는 힘에 데이빗은 오히려 벽까지 밀려 등을 기댔다. 두 남자의 무게가 급작스레 이동해 엘리베이터가 크게 덜컹거렸다.

미셸은 데이빗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동그랗게 융기한 이지적인 골격 위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어깨와 가슴을 자신의 몸으로 비비며 그는 오랫동안 데이빗의 이마와 뺨, 주름진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이젠 좀 알겠어?”

“……뭐, 뭘?”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잖아. 몇 번을 말해야 믿을래.”

데이빗은 멍청히 눈만 껌뻑였다.

옛날 영화에는 그런 장면들이 꽤 많았다. 오해한 연인을 붙잡으러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타고 내려와 사라지려는 연인을 붙잡는 남자라든가, 혹은 스케일 크게 공항까지 쫓아가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연인을 말려 자신의 곁에 두는 걸 성공하는 여인이라든가. 그게 자기 얘기가 될 줄은 몰랐다.

“……어, 어떻게 미, 믿겠어……. 당신은 그 사람과 정말로 잘 어울리는데.”

미셸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럼 정말로 내가 줄리아랑 다시 사귀는 줄 알고 도망간 거야?”

“도망치진 아, 않았어.”

“그래, 도로 올라온 걸 보면. 뭐야, 다시 와서 나한테 무슨 소릴 할 셈이었어.”

미셸이 어서 말하라며 데이빗의 귓바퀴를 물고 씹었다. 데이빗은 엘리베이터에 붙은 CCTV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귀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데이빗은 어깨를 움츠렸다. 미셸은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를 난감하게 했다. 울컥한 마음에 속내가 튀어나왔다.

“나, 난 잘못한 거 어, 없어. 다, 당신이 날, 가, 갖고 논 거라고 해도…… 다, 당신이 변덕이 죽 끓듯 해서 좋아할 땐 어, 언제고 이제 와 싫어졌다고 하더라도 나, 난……. 미셸 당신한테 바, 반한 걸 후회하지 않아. ……그, 그 말을 다, 당신한테 하, 하고 싶었어.”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한 번쯤은 남자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당신이란 말 대신 ‘미셸’이라고 더듬거리며 부른 순간 귓전에 닿은 미셸의 숨이 한층 뜨거워졌다. 데이빗은 오싹한 기분에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미셸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 나더러 잘살고 행복하란 작별 인사라도 할 참이었어?”

정확히 맞췄다. 진부한 작별 인사지만, 데이빗은 자신이 이대로 도망치듯 빌딩을 나가버리면 미셸을 대면할 일이 영영 없으리란 걸 알았다.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이라도 보려고 작별 인사를 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십여 분 전의 일을 생각하자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일그러져 붉게 달아오르는 데이빗의 얼굴과 젖어드는 눈매에 미셸의 눈빛이 달라졌다.

미셸이 데이빗의 옷깃을 멱살 쥐듯 당겼다. 자신의 몸으로 상대를 가두고 미셸은 데이빗과 키스했다. 하반신을 밀어붙여 미셸은 데이빗이 한 치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그렇게 밀착된 채 행해지는 입맞춤은 뜨겁고 거칠며 인정사정이란 없었다. 입안이 다 빨리는 아픔에 데이빗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혀가 입안의 점막과 부딪히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 지독한 키스에 괴롭힘 당한지 얼마나 됐을까. 데이빗은 슬쩍 눈을 떴다. 엘리베이터가 최고층에 거의 다 와 있었다.

“……!”

데이빗은 미셸의 등을 긁어내리며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 ‘안 돼.’ 문이 열리는 순간 데이빗은 막힌 입으로 비명을 질렀다. 재기 발랄한 비서 리플리는 솜씨 좋게 줄리아를 가리고 서서 등 뒤로 수신호를 보냈다. ‘어서 닫아요.’

미셸은 키스에 집중하느라 버튼은 잘 누르지도 못했다. 대충 맨 끝을 누르자 겨우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매층 엘리베이터를 열리길 기다리던 사람들이 안의 풍경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미셸!’ 데이빗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남자의 혀를 밀어내며 그에게 뒤를 보게 하려고 마구 신호를 보냈다. 소용없었다. 미셸은 데이빗이 몸을 붙여오는 게 기뻤는지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아래로는 무릎 사이를 다리로 가르고 들어오며, 위로는 더 깊고 농밀하게 입안을 헤집었다. 온몸으로 달라붙어 입안 깊은 곳과 옅은 곳 모두를 핥아 벌리는 감각에 데이빗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허리가 떨렸다. ‘데이빗-.’ 미셸이 콧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데이빗을 쏘아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해 멈춰 있었다. 몇 분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데이빗은 젖은 입술을 자신도 모르게 혀로 핥았다. 잔뜩 깨물려 부푼 입술은 남의 살처럼 감각이 둔해져 혀끝에 묘한 감촉을 선사했다. 녹색 눈동자에 가득한 열기가 데이빗의 머릿속을 진홍빛 열기로 들뜨게 했다.

그대로 휩쓸려 버리려는 찰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 아냐?’

‘뽀뽀하는 사람, 남잔데?’

다 들렸다. 데이빗은 얼굴을 숨기려고 바르작거렸다. 미셸이 등 뒤의 남녀를 바라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타려면 어서 타요! 우린 꼭대기 층까지 다시 갈 거니까.”

“괜찮아요. 거, 걸어갈게요.”

남녀는 해쓱해진 얼굴로 도망쳤다. 미셸은 무어라 작게 욕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놓고 온 게 있어. 찾으러 가야 해.”

문밖으로 나가려는 데이빗을 미셸이 도로 잡았다. 미셸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고생했던 앙갚음을 했다.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네 번 더 멈췄고, 그때마다 미셸은 좀 전과 같은 짓을 해서 빌딩 사람 전체에게 자신과 데이빗이 사귄다는 사실을 공포했다.

“줄리아, 오늘 저녁 모임엔 못 가. 내 연인이 당신과 날 오해할 것 같아.”

미셸은 부어오른 입술을 닦으며 뻔뻔하게 옛 연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데이빗은 줄리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등을 돌리고 섰다.

미셸이 놓고 안 가져온 건 비서 리플리였다. 미셸 없이도 아무 문제 없이 집에 돌아갈 남자를 주워 일 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미셸은 데이빗의 손을 꼭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집으로.”

리플리는 미셸의 자택으로 방향을 틀려 했다.

“아니, 거기 말고.”

“어디요?”

자택 말고 또 다른 어디에 집을 뒀단 말인가. 리플리는 미셸이 새집을 구했던가 의아해했다가 이내 그의 또 다른 집이 어딘가 알아챘다.

* * *

리플리는 데이빗의 집 앞에서 미셸과 데이빗을 내려주고 떠났다.

「내일 출근은 대중교통을 이용할게.」

미셸은 리플리에게 당분간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며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데이빗은 미셸을 쫓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이끌지도 못했다. 입매를 굳히고 쭈뼛거리며 먼저 걸어 올라가는 데이빗의 등줄기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미셸은 그를 뒤따라가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을 붙들고 대뜸 고백을 던졌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

“대답할 때까지 계속 고백할거야.”

고백을 듣고도 데이빗은 쉽게 기쁨을 표현하지 못했다. 마른 뺨을 붉게 물들이고, 전혀 예상치 못한 좋은 점수를 받은 초등학생처럼 눈알을 굴리며 미셸의 눈빛을 살폈다. 이것이 과연 진심일지 장난은 아닐지 불안해하는 얼굴에 한숨이 날만도 하건만, 그 움츠러든 눈빛과 조심스러운 태도가 지독히도 사랑스러운 것은 아마도 미셸에게 문제가 있어서일 것이다. 미셸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반복해 속삭였다. 정말로, 정말로 좋아한다니까.

데이빗은 고백에 대한 답을 제대로 못 했다. 휘청거리며 낡은 복도를 걸어가 한참을 달각거려 겨우 문을 열었다. 그 과정이 지나치게 더뎠다. 보다 못한 미셸이 딱딱하게 굳어 뚝뚝 끊어져 움직이는 남자를 안다시피 해 침실로 이끌었다.

침대 위에 눕혀지고 나서야 데이빗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데이빗이 간곡히 미셸을 말렸다.

“주, 중간에 기, 기절…… 하, 할지도 몰라.”

“그딴 걸 걱정했던 거야?”

“저, 정말로…… 기, 기절할 수 있어. 체, 체력도 없어서 제, 제대로 반응도 못 할 거고……. 다, 당신 생애 최악의 섹스일 거야.”

데이빗이 심각하게 경고했다. 미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데이빗의 셔츠를 벗기고 바지까지 끌어내렸다. 데이빗은 트렁크를 끌어내리는 미셸의 손을 잡았다. 미셸같이 잘난 남자 앞에 적나라하게 하반신을 드러내는 건 심장에 무리를 주는 일이었다. 줄리아가 데이빗의 추억보다 아름다웠듯, 흉터투성이의 상반신과 남성임에 분명한 하반신은 미셸의 기억보다 끔찍할지도 모른다.

“다, 당신은, 어, 어찌 됐든 시, 실망할 거야.”

미셸이 눈썹을 휘었다. 남자가 찬찬히 데이빗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잘 읽을 수 없었다. 일견 무표정해 보이지만 궁금함과 신기함, 열망과 같은 감정들이 순간순간 눈동자에 번뜩거렸다 사라졌다. 미셸은 자신의 셔츠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데이빗이 걸치고 있던 마지막 옷가지도 다 벗겨 버렸다.

“내 생애 최고의 섹스 상대가 누군지 내가 얘기했던가.”

“……나, 난 아니지?”

멍청한 반문에 미셸이 입을 벌리고 크게 웃었다.

“당연히 당신이지. 당신과 섹스가 얼마나 끝내줬던지, 별장에서 돌아온 뒤 내가 꿈속에서 몇 번이나-.”

데이빗은 듣다못해 미셸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미셸은 좋아하며 손바닥을 입술로 애무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빨고 무는 감촉이 간지러워 데이빗은 헐떡임에 가까운 신음을 뱉었다. 미셸은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데이빗의 허리 위에 올라탔다. 데이빗과 미셸은 비록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못 했으나, 그동안 퍽 많은 키스를 나눠왔다. 허나 온몸이 밀착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키스는 그동안의 입맞춤과는 많이 달랐다. 온몸으로 부딪혀오는 애무는 절박하고 열정적이었으며 머리가 멍해질 만큼 달콤했다. 맞닿은 미셸의 하반신이 단단하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감촉이 맨살과 맨살로 맞붙어 노골적으로 전해졌다. 데이빗은 감당하기 힘든 열기에 끙끙거리며 반사적으로 무릎을 좁혔다. 데이빗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미셸이 기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건강해지면 매일 키스하자.”

“지금도 이미…….”

키스는 매일 하고 있지 않으냐고 반문하려다 데이빗은 미셸이 말하는 키스가 지금처럼 혼이 나갈 것 같은 키스를 말하는 걸 깨달았다. 이런 걸 매일 하려면 아마도 퍽 건강해지지 않고는 어려울 것이다. 데이빗은 빙긋 웃어버렸다.

바닷속을 헤엄치는 듯 부드러운 부유감에 느슨하게 몸이 풀렸다. 느릿하게 한숨을 쉬자 데이빗의 몸을 연거푸 쓸어내리던 손길이 잠시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 단단한 손이 머리칼을 간질이다 목덜미로 내려가 뭉친 어깨와 팔뚝, 허벅지와 허리를 주물렀다. 나른하게 몸이 풀리는 감각에 데이빗은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잠들었을 때 더 잘 웃네.”

“?”

신기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기분 좋다 여기면서도 데이빗은 눈꺼풀이 무거워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츕,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는 젖은 소리와 입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물에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깼어?”

“!”

데이빗은 눈을 뜨자마자 크게 쿨럭였다. 늦었다. 이미 물은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고, 미셸은 물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개구지게 웃었다.

데이빗이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미셸은 벌거벗은 채 시원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다. 완벽한 미셸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건 예의였다. 무결점의 존재라고 여겼던 남자도 겪고 보니 실은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이거 그 모양 없는 꼬맹이 얘기지?”

미셸은 제도판 위에 있는 그림을 가리키며 아는 체를 했다. 아침에 없는 시간을 쪼개 삼십 여분밖에 못 그리고 나간 그림 속에는 얼굴 이목구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실체를 얻은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녀석이 어떤 얼굴인지 난 이미 알아. 검은 고수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꼬맹이일 거야.”

데이빗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수, 숲이 비쳐 보이는 호수 색깔 누, 눈동자라고 이미 썼는걸. 노, 녹색 눈, 눈동자에 그, 금발 머리야.”

그거 꼭 날 모델로 한 것 같은데? 미셸은 지적하려다 말았다. 난 당신을 좋아해. 당신은? 그 답을 말로 듣는 것도 좋았지만, 그림으로 받는 것도 가슴 벅찬 일이다.

“그려봐. 보고 싶다.”

미셸이 기대를 잔뜩 담아 데이빗을 바라봤다. 소년처럼 천진하고 활달한 얼굴이 귀여워서 데이빗은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했다. 목 아래 펼쳐진 군신처럼 단단한 나신만 아니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데이빗은 미셸의 단단한 복근과 허벅지에서 힘겹게 시선을 뗐다.

“오, 옷 입으면.”

미셸은 히죽 웃으며 대충 바지만 걸쳤다. 너저분한 꼴인데도 미셸이 하니 그럭저럭 모양새가 괜찮다. 데이빗은 불현듯 불안해졌다. 미셸이 데이빗의 형편없는 몰골을 사랑스럽다 말하듯, 미셸이 무슨 짓을 해도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혹 자신만이 아닐까. 창조에 대한 재능은 없어도 감상에 대한 심미안만큼은 일류급이라 여기던 자긍심에 금이 가려 한다.

“콩깍지가…….”

“응?”

“아냐, 자, 잠시 딴생각을 했어.”

미셸이 대충이나마 옷을 입었다. 데이빗은 약속대로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렸다. 데이빗의 손끝에서 소년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자신의 추측을 벗어나지 않은 모습에 미셸은 환하게 웃으며 데이빗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이 녀석한테 친구를 하나 붙여주지 그래. 고집쟁이 곱슬머리 녀석으로.”

“너무 뻐, 뻔하지 않을까.”

“둘이 자는 것만 안 넣으면 괜찮아.”

미셸은 덧붙였다. ‘물론 나한테는 둘이 사귀는 버전으로 그려줘야 해. R등급으로.’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데이빗은 얼굴을 찡그리고 웃어버렸다.

밥때가 되자 먼지가 두껍게 깔린 낡은 목재 지붕을 건너 엘리가 찾아왔다. 피곤함에 잠든 연인 대신 미셸이 고양이를 맞이했다. 먹이를 후다닥 부어주고 미셸은 자석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악몽 없이 잠든 데이빗의 볼이 기분 좋은 잠이 선사한 분홍빛 핏기로 은은히 빛났다. 미셸은 방금 쥐어본 고양이 발바닥-엘리는 극렬히 저항했다.-보다 부드러운 연인의 입술을 슬쩍 쓸어본다.

N극과 N극이 만났을 때처럼 격렬히 튕겨내며 서로를 할퀴어댔던 관계가 N극과 S극의 관계로 역전되던 때를 더듬어 봤다. 언제였을까. 어두운 산 아래서 창백한 얼굴로 처연히 자신을 바라보던 데이빗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아니면 쾌감에 져버린 데이빗이 묶인 손을 풀어 달라 빌었을 때? 기억들이 차곡차곡 흘러갔다.

데이빗이 과거는 제한적으로 기억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데이빗은 덧붙였다. 사랑은 커피와 같아서 첫 잔이 가장 맛이 좋고, 나중에는 텁텁함만 남게 된다고. 강렬했던 반함의 순간도 어느덧 무뎌지고, 새로운 사랑에 세차게 뛰던 심장도 시간이 지나면 도로 느슨하게 뛰게 된다고. 작가가 직업인지라 데이빗은 말을 참 잘했다. 느리고 답답할지는 몰라도 그 향기만큼은 진했다. 여전히 소극적인 상대에게 미셸은 답을 돌려주었다. 카푸치노라면, 그랑데 사이즈를 연거푸 마셔도 난 좋기만 하던데?

데이빗이 뒤척이다 옆으로 돌아누워 미셸에게 달라붙었다. 그의 입술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미셸은 감탄했다. 사랑하는 이의 숨은 말할 수 없이 보드랍고 따스했다.

끌림의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문제 될 것은 없다. 침대 옆,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그가 있으므로.

잘 내려진 커피처럼 멋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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