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4
수술 날 리플리가 찾아와 카일과 데이빗을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병원에 가면 늘 지칠 정도로 기다렸던 것과 달리 오늘은 바로 준비를 하고 수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데이빗은 살짝 겁에 질려 침대에 누웠다. 한 달 전의 수술이 생각나 데이빗은 카일에게 당부를 했다.
“카일, 난 마취가 자, 잘 안 깨. 회, 횡설수설할 수도 있고.”
“재밌겠군.”
놀리지 말란 소리였는데, 카일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데이빗은 괜한 걸 알려줬단 생각이 들었다.
“열부터 거꾸로 세세요.”
마취제가 들어오자 혈관이 찌르르 아팠다. 마취의가 시키는 대로 데이빗은 십부터 거꾸로 셌다. 8은 어렴풋하고 7부터 기억이 안 났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수술이 끝나 있었다.
“데이브?”
카일이 옅게 웃으며 데이빗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중심으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데이빗은 상반신을 일으키려다 휘청거리고 쓰러져 다시 침대 위에 엎드렸다.
“너 진짜 마취가 잘 안 깨는구나. 더 자.”
데이빗은 어지러움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데이빗은 혼란한 꿈에 시달렸다.
사위가 칠흑처럼 검었다. 침대에 등을 대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서걱’ 냉동한 고기를 자르는 소리가 났다. 데이빗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팔목이 깔끔하게 잘려 팔 끝이 원기둥 같은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서걱’ 얼굴 앞쪽이 따끔했다. 데이빗은 잘리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융기된 부분 없이 얼굴이 편평한 접시처럼 매끈했다. 누군가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로 올라섰다. 그가 들고 있는 칼날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데이빗은 도망치려다 발목을 묶고 있는 쇠사슬에 걸려 나뒹굴었다. 살려주세요. 자신의 멀쩡한 손까지 잡히고 데이빗은 몸부림쳤다.
“데이빗-.”
누군가 그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데이빗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의 여운으로 기분이 끔찍했다.
“울면 안 돼. 눈물이 코로 흘러 들어가면 안 좋아.”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미셸이 언제 여길 왔을까. 좀 전 일이 꿈이었단 데 안도하며 데이빗은 코를 살폈다. 눈 아래쪽이 붕대로 하얗게 흐려지는 걸 보면 수술을 하긴 한 것 같은데 마취가 덜 풀려 감각이 없다. 데이빗은 역시나 붕대를 감은 손으로 더듬거리며 얼굴을 만졌다.
“코, 코…… 이, 있어……?”
미셸이 눈썹을 비틀며 피식거렸다.
“있어. 걱정하지 마.”
미셸은 땀에 젖은 남자의 검은 고수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데이빗은 안심했다. 다시 잠이 몰려왔다. 팔자 좋게 미셸의 옆에서 잠들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수마가 덮쳐 생각이 중도에서 끊어졌다. 깨어났을 땐 미셸의 차 뒷좌석에 있었다. 조수석의 카일이 뒤를 돌아보며 놀렸다.
“데이빗, 넌 천재야. 우리가 낸 퀴즈를 다 맞혔어. 알래스카 기차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까지 아는 덴 놀랐다.”
카일은 마취가 덜 깬 환자가 잠꼬대로 멀쩡한 사람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다기에 장난으로 시작해 이것저것을 물어봤던 건데 데이빗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처럼 흥얼거리면서 꼬박꼬박 잘도 답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였다. 재미난 놀림거리에 카일과 미셸은 죽이 맞아 그 모습을 푹 즐겼다.
“네가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메간 폭스를 지지할 줄은 몰랐다. 여잔 얼굴보다 가슴이라니, 너도 남자였구나.”
“누, 누가 그런 말을 해, 했다고……. 지, 지어내지 마.”
“그래? 네가 한 가장 충격적인 말은 안 알려줘야겠네.”
카일이 휘파람을 불며 흥겨워했다. 백미러 안에 미셸의 눈이 비쳐 보인다. 히죽거리는 푸른 눈은 웃음으로 가늘어져 있었다. 데이빗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유달리 멀다고 느꼈다.
* * *
미셸은 오늘 회의 때도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리플리는 그나마 지난번보다는 훨씬 나아졌다며 칭찬했다. 비행기가 뜨는 원리도 모르던 무식쟁이가 그래도 역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건 고무적인 일이란 뜻이었는데 미셸은 대번에 우쭐해했다.
“내가 매일 세 시간씩 공부하잖나. 좀 있어봐. 페렐만이 풀었단 수학 문제도 풀어낼 테니.”
리플리는 체셔 고양이처럼 웃었다. 아마겟돈 전에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자신하는 표정이었다.
“연애는 잘되세요?”
리플리가 웬일로 데이빗과의 일을 먼저 입에 담았다. 미셸이 데이빗의 ‘ㄷ’ 자만 떠올려도 지긋지긋해하던 리플리가 저리 나오는 걸 보면 자신이 회의에서 나름 선방을 했나 보다.
“연애는 뭐…… 나쁘진 않아.”
“지지부진하단 소리군요.”
역시 리플리였다. 입에 발린 소리 따윈 할 줄 몰랐다. 미셸은 반박하려다 그냥 속 시원히 인정하고 조언을 얻기로 했다.
“처음엔 성질난 고양이 같았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털을 세웠고.”
“잘못한 게 있으시니까 그렇죠. 당신이었으면 털만 세우고 말았으려고요. 여기가 백악관 안 비밀 회동 장소라고 상상해보세요. 트럼프 대통령과 프랑스 총리가 마주보고 웃으며 테이블 아래에서 구둣발로 서로 장딴지를 까대고 있는 상황이에요. 당신은 우연히 옆을 지나다가 서빙하고 있는 남자가 십 년 전에 당신 뺨을 때린 사람이란 걸 발견했어요.”
“아름다운 재회의 현장이네.”
미셸은 코웃음을 쳤다.
“어쩌실 거죠?”
“당장 달려가서 주먹으로 기절할 때까지 팰 거야.”
“그럴 줄 알았죠. 전 간혹 사장님의 폭력성에 소름이 끼친다니까요.”
거짓말도 잘한다. 미셸은 아마추어 복서로 날렸다는 리플리에게 호기 어리게 도전했다가 링에 오른 지 1분 30초 만에 저세상에 갈 뻔했다.
“리플리, 죽기 전에 자네가 나를 북돋는 말을 해주는 날이 오긴 할까. 자넨 너무 잔인해.”
“전 아이와 여자, 새끼 고양이에겐 친절한 남자예요. 좋은 남자죠.”
자기 입으로 자신이 훌륭한 남자라며 의기양양해하던 리플리는 초췌해 보이는 보스의 얼굴을 보고 놀리는 걸 멈췄다.
“요샌 어때요? 여전히 사장님을 보면 으르렁댑니까?”
“그렇진 않아. 한 번 히스테릭하게 폭발한 뒤, 오히려 화는 잘 안내.”
“잘된 건가요.”
“글쎄.”
미셸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수학자들은 유선형을 그리는 성장 곡선만 그릴 줄 알았지, 사람들 사이 관계 진전도를 표시하는 공식은 만들지 못했다. 미셸은 자신과 데이빗의 관계가 어느 지점까지 왔는지 감이 안 잡혔다.
“나아지긴 한 것 같아. 하지만 ‘좋다’라고 말할 지점은 아니지. 그는 여전히 날 두려워하고, 나와 단둘이 있는 걸 어색해해.”
미셸은 차창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내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사랑에 빠진 행복한 얼간이가 거기 있었다. 데이빗은 달랐다. 미셸이 곁에 있을 때도 그의 옆얼굴은 고독하고 스산했다. 미셸의 호의가 데이빗 앞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굴절되어 해석되곤 했다. 난 당신을 좋아해. 미셸의 고백 뒤 데이빗은 놀란 표정을 지었었다. 데이빗은 물었다. ‘내 뼈를 부쉈던 사람과 날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어떻게 동일인일 수 있지?’ 미셸은 자신의 감정을 믿지 않는 상대에게 한 번 더 고백했다. 정말이야. 난 당신을 좋아해. 그 순간 데이빗이 지었던 쓸쓸한 표정을 미셸은 잊을 수 없다.
“예전에 윈프리 쇼에서 사장님이랑 비슷한 내용을 봤어요. 실직한 후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남자가 겨우 중독에서 빠져나오긴 했는데, 그동안 엉망이 된 가족 관계를 회복하느라 애먹었단 사연이었죠. 손찌검했던 아들이 절대 아버지 곁에 다가오지 않으려고 했대요.”
삽시간에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가 된 미셸이 미간을 모으고 리플리를 노려봤다.
“……화해는 했대?”
“아, 지금은 아들이 매일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달려와서 뽀뽀를 하고, 세상에서 아버지를 가장 사랑한다며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는군요.”
“어떻게?!”
“중간에 채널을 돌려서 못 봤네요.”
미셸은 자신의 손에 통나무라도 들려주면 당장 맨손으로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추어 복서만 아니었으면 리플리는 이미 몇 번 회사의 지하 주차장, CCTV가 설치되지 않은 사각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당장 그 영상 구해놔.”
“저같이 유능한 비서한테 그런 허접스러운 일을 시키시려고요?”
리플리는 유능했지만, 무능한 보스 아래의 유능한 비서들이 그러하듯 주체성이 너무 강했다.
“뭘 원해?”
리플리는 다 알면서 뭘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중역 회의 땐 욕을 안 할게.”
“회사 내 어떤 장소에서도 안 한다고 맹세하세요.”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검색하면 그딴 걸 못 찾아낼까 봐!”
“전 사장님 과거를 잘 알아요. 인터넷으로 포르노 사이트는 기가 막히게 찾아내면서 레포트 자료는 절대 못 찾아서 학점이 그따위였잖아요.”
“데이빗한테 그딴 소릴 한마디라도 뱉어봐. 자넨 자기 무덤을 직접 파게 될 거야. 고양이 배변 삽으로 육 피트를 파헤치게 해주지.”
“아아, 조건을 몇 개 수정하죠. 욕은 물론 거친 행동도 안 돼요. 테이블을 뒤집거나 팔을 휘두른다거나, 세 번째 손가락을 사용하는 천박한 행동은 이제 오늘로 종지부를 찍으시죠.”
“중역 회의실 테이블은 내 힘으로 들지도 못해!”
“쇼 영상은 물론, 사장님이 잘 보이려 애쓰는 그분께 당신이 보기보다 꽤 괜찮은 남자라고 알려드릴게요. 저만 아는 사장님의 몇 가지 장점이 있잖아요.”
리플리의 구슬림은 강력했다. 미셸은 5분여간 고민했다. 사악하게 웃는 리플리의 모습과 여전히 자신이 찾아가면 얼굴을 굳히는 데이빗의 모습이 번갈아 교차했다. 어린아이를 때린 아버지도 나쁜 놈이지만, 성인 남자에게 코가 없어지는 악몽을 꾸게 만든 자신도 잘한 것 없었다. 미셸은 화해가 절실히 필요했다.
“착한 보스가 될게.”
결국 미셸에게 사내 모든 지역이 절대 금연구역이자 절대 금욕구역이 됐다. 리플리는 만족감에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리플리는 인터넷을 켠 지 십 분도 안 돼 문제의 프로그램을 찾아냈다.
「매일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면서 사랑한다, 미안했다고 속삭였습니다. 제가 입 맞출 때마다 아이는 싫다고 반항했지만, 그래도 전 포기하지 않았어요. 전 정말 그 아이를 사랑했거든요.」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남자의 고백에 방청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저 뻔한 게 답이라고?!”
저런 싱거운 내용을 보려고 개과천선하겠단 다짐을 했단 말인가. 미셸은 리플리에게 벌컥 성을 냈다.
브라운관 안에서 울먹이는 남자와 그의 아이가 함께 비쳤다. 쇼의 진행자인 흑인 여성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리플리도 짐짓 감동한 척 눈가를 닦았다.
“매일 사랑한다고 고백하라. 하실 수 있겠어요?”
미셸은 눈을 깜빡였다. 사랑하는 이에게 믿음을 잃었다면 그걸 되찾는 방법은 하나다. 끊임없이 일관되게 사랑을 표현해라. 진부하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키 내놔.”
미셸은 이론을 가다듬기보단 직접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 * *
미셸은 이제는 익숙해진 카일의 집으로 갔다. 데이빗은 수술 후 정기 검진을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데이브, 올 시간이 됐는데 안 오는군.”
뜨개질하고 있던 카일이 시계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록커의 손에 들린 직물을 미셸은 끔찍한 기분으로 쳐다봤다.
“그거 입을 수나 있나?”
“내 옷 중 니트로 된 건 다 내가 짠 건데? 데이빗한테는 모자랑 목도리를 짜주기로 약속했어. 귀여울걸.”
삼십 대 중반의 남자에게 손으로 직접 짠 털목도리와 모자를 짜주며 즐거워하는 동성 친구란 미셸의 사고로는 도통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절로 한 발짝 물러서게 된다. 미셸은 데이빗이 커다란 목도리와 복실거리는 털모자를 쓰고 눈을 맞고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가 파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본다면……. 귀엽긴 하겠군. 입안에 침이 고였다.
“무슨 색으로?”
“파랑과 핑크, 회색과 보라를 섞어서. 근사하겠지.”
상상 속 데이빗의 머리 위 얹힌 모자가 좀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수염이 숭숭 난 남자가 털모자를 써봤자…….’ 미셸의 상상 속에서 데이빗은 이제 눈을 뭉쳐 미셸에게 던지고 환하게 웃었다. 미셸은 그를 따라가 복수로 나무를 때려 눈을 쏟아지게 했다. 데이빗이 추위로 벌겋게 달아오른 콧잔등을 찡그리고 미셸을 노려봤다. 미셸은 그 찡그린 얼굴이 귀엽다고 느끼곤 한걸음에 다가가 남자의 입술에 키스했다. 얼어붙은 입술이 닿자 오히려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는 데이빗을 눈길에 눕히고 미셸은 그 옆에 함께 누웠다.
‘젠장, 70년대 러브 스토리도 아니고…….’
미셸은 손가락이 오그라들 것 같아 상상을 멈췄다. 그는 십대 때부터 스포츠카 뒷좌석에 학교 퀸을 태우고 다녔던 남자다. 눈밭에서 붙잡으러 뛰어다니다 미끄럽지도 않은데 넘어져 나뒹군다고? 머리에 총 맞기 전에는 절대 못할 짓인데, 어째서인지 절로 입매가 느슨해지며 히죽 웃게 된다.
미셸은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 날씨에 썼다간 더워 죽겠어.”
“알래스카 갈 때 쓰면 되지.”
“알래스카?”
미셸은 반문했다. 카일이 미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당신은 정말 데이빗에 대해 아는 게 없네.”
우월한 자의 눈빛이 미셸을 열받게 했다. 미셸은 당장 알래스카에 대해 말하라며 카일에게 달려들 참이었다. 전화벨이 울려 카일을 살렸다.
“역무원인데, 데이빗이 역에 있다는군.”
카일의 얼굴을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확실했다. 미셸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데이빗은 창백한 얼굴로 역 안 휴게실 간이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카일이 역 화장실에 기진해 쓰러져 있는 걸 역무원이 발견해 옮겼다는 역무원의 설명을 듣는 동안 미셸은 침대 옆 좁은 공간을 옹색하게 비집고 들어가 데이빗의 곁을 차지했다.
“괜찮아?”
데이빗이 눈을 뜨고 미셸을 바라봤다가 입구 쪽에 있는 카일을 보고 안심해 다시 눈을 감았다. 미셸은 데이빗의 보호자가 자신이 아니라 카일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조금 씁쓸했다.
카일이 다가와 미셸 옆에 섰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데이빗의 상태를 물었다.
“토했어?”
데이빗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바꾼 뒤로는 이렇게 심한 적 없었잖아. 구토 방지제를 먹었는데도 이래?”
카일은 왜 갑자기 데이빗의 몸 상태가 이리 나빠졌는지 추측하다 이유를 찾아냈다.
“코랑 손 수술한 게 생각보다 힘에 부쳤나 보다. 처음에 구토가 심했던 것도 수술 후에 체력이 완전히 바닥을 쳤을 때잖아.”
마리화나를 담배처럼 피워대는 카일이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한다며 데이빗을 타박한다. 미셸은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데이빗의 말을 듣다 보니 참견을 안 할 수가 없다.
“항암 치료가 덜 끝났으면 수술을 나중으로 미루지 그랬나.”
미셸은 멍청하게 군 데이빗을 탓했다. 데이빗의 청바지 밑단과 겨드랑이 가 젖어 있었다. 꽤 오랫동안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제대로 운신도 못했을 남자를 생각하자 마음이 안 좋았다. 데이빗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셸을 바라봤다.
“난 당신을 마, 만나기 전엔 워, 원래 이렇게 대책 없이, 무, 무작정 살았어. 내가 미, 미루면…… 당신이 한 달 뒤에도 내게 도, 동정을 베푼다는 보장 있나.”
“…….”
미셸은 카일이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꼈다. 바늘방석에 앉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는데 오늘 제대로 그 의미를 실감한다.
미셸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고 데이빗 역시 얼굴을 찡그렸다. 툭 뱉어버린 말을 데이빗은 후회했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했다. 코와 손가락뼈가 영영 불구가 됐을 거라고 포기하고 살다가 기회가 생기자 좀 덜 아프고 싶단 욕심이 생겼다. 앞뒤 안 재고 수술 날짜를 잡은 건 자신이면서 괜히 미셸에게 화풀이를 한다. 과거야 어찌 됐든 미셸은 선의에서 친절을 베푼 게 분명했다. 그마저도 삐딱하게 응하는 스스로가 옹졸하다. 부끄러운 마음에 변명하려다 습관적으로 자기 비하가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난, 다, 당신이 관심 갖고 잘 대해줄 사, 사람이 못 돼.”
엉뚱한 말에 미셸이 데이빗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미셸이 꿀꺽 침을 삼킨 뒤 단호하게 내뱉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보려는데 카일이 헛기침을 하며 말렸다. 역무원 둘이 갑작스레 펼쳐지는 두 남자의 야릇한 신경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셸은 정신을 차렸다.
“다음 주부터는 나랑 병원에 같이 가. 꼭이야.”
미셸은 집으로 들어가는 데이빗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데이빗은 대꾸 없이 걸음만 옮겼다. 미셸은 자기 멋대로 약속을 잡고는 가버렸다.
데이빗은 몸을 씻은 뒤 자리에 누웠다. 카일은 오늘도 자신이 소파로 갔다. 카일은 굳이 침대를 양보하며 “너랑 그 치랑…….”라고 중얼거리다 말을 흐렸다. 데이빗 역시 그 이상 묻지 않았다.
항암 치료로 지친 몸이 솜처럼 무거운데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난 당신이 좋아.」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에서 미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했다.
미셸은 자신의 감정을 밝혔다. 미셸은 다혈질이긴 하나 악질적인 거짓말로 사람을 갖고 노는 사내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그게 진심이란 말인데……. 데이빗은 훅,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인지, 감정적으로 너무 놀라서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타인의 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눈에 보인다. 미셸의 감정은 알기가 오히려 쉬웠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감정이 알기 더 어렵다.
미셸이 좋은가, 싫은가.
어떤 때는 끔찍하게 싫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기묘하게 두근거리기도 했다. 더는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는 건 확실했다. 미셸이 가까이 다가오면 불편함을 느꼈고, 신체가 맞닿을 때는 소스라치게 두려워 몸이 굳었다. 그러나 미셸이 데이빗을 똑바로 바라보며 달콤한 말을 속삭일 때면 데이빗도 사람인지라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
미셸을 미워하기가 어려웠다. 어둠을 응시하기보단 밝은 빛 속에 있는 것이 데이빗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둠이 더 익숙했다.
데이빗은 불을 켰다. 육신이 너무 피로하면 정신이 오히려 말똥말똥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될 거란 예감에 그는 한숨 쉬고 스탠드에 불을 켰다.
가방을 뒤져 그리다 만 스케치를 꺼냈다. 출판사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찾으러 여행을 떠난 소년의 이야기 후편을 부탁받았는데, 진행이 지지부진했다. 데이빗은 한쪽 무릎을 세워 이마를 받치고 침대에 내려놓은 스케치북을 내려다보며 이야기가 떠오르길 기다렸다. 몇 개의 조각난 내용이 생각났다. 본격적으로 스케치북에 밑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노트에 줄거리를 휘갈겼다.
「소년은 절벽 아래서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왜 여기 누워 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뒷머리에서 젖은 풀 냄새와 히아신스 꽃향기가 났다. 코를 찌르는 향기에 소년은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를 기억해냈다. 그는 빙산 위 꽃밭에서 요정을 만났다. 요정의 눈빛은 여름의 바닷물처럼 파랬다. 소년은 그 눈빛이 익숙하다 여겼다. 그것은 자신이 한 번 보았다 놓쳐버린 자신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소년은 요정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발밑에서 결정이 깨어져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음은 산산이 깨어졌다. 마치 심장이 깨어지듯.」
데이빗은 손을 멈췄다.
그는 마지막 문장을 지웠다. 그건 이 동화와 어울리는 내용이 아니었다. 빙산에 날카롭게 금이 가는 걸 표현하기 위해선 어떤 비유를 써야 할까. 다이아몬드처럼? 아니, 다이아몬드는 그렇게 쩍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연약하다면 금강석이란 이름이 아깝다.
다이아몬드가 흑연과 같은 성분이어서 빛을 과하게 비추면 불타버린다는 얘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데이빗은 스케치북을 연필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연필심이 바스러지며 검은 흔적을 남겼다.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성분이 같다는 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얘기다.
「당신을 좋아해.」
생각이 멈추자 그 틈을 비집고 상념이 새어 들어왔다. 스케치북을 두들기는 손놀림이 날카로워졌다.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에게 데이빗은 정말 하고 팠던 말이 있다. 자신이 아무리 쓰레기이고 하찮은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자신도 미셸과 같은 사람이고, 얻어맞고 뭉개지면 아프고 슬픈 감정을 느낀다는 하소연을 울컥 뱉고팠다. 그러나 몇 번의 기회가 왔음에도 당신과 나는 같은 인간이기에 존중받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흑연과 다이아몬드가 동일한 물질이라 쉬이 말할 수 없듯, 미셸과 데이빗이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웠다.
월요일의 항암치료와 화요일의 휴식과 수목금의 쉬운 일과, 토일의 힘든 파트타임 일을 끝내고 다시 월요일로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데이빗은 자신이 미셸과는 다른 인종의 존재라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할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살아갈 사치는 미셸 같은 사람에게나 어울렸다. 기계처럼, 육신의 말단을 움직이며 아무 감정 없이 그냥 이냥 저냥 연명해가는 걸 삶의 목표로 삼는 게 자신과 같은 사람에겐 맞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지?’ 그런 물음을 머릿속에 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턴 감당이 안 됐다.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날’의 기억에 사로잡히면 그대로 끝이라는 걸 잘 알았다.
마음이 약해지면 어디선가 5층 연립주택의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별장 안의 어둠 속에 데이빗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스스로의 모습을 놓고 왔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남들은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생사의 고비를 데이빗은 지난 몇 달간 숱하게 겪었다. 죽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여겼고, 모든 걸 체념하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그는 진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실은 살고 싶었다.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았다.
사랑보다 삶이 더 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싸고, 어지러우면 눕고 토기가 일면 토하면 됐다. 그렇게 신이 자신에게 목숨을 연명하게 내버려두는 데 감사하며 묵묵히 견디다 보면 상황은 점점 나아졌다. 백혈구 수치는 약간씩 오르고 해골처럼 빠졌던 살도 천천히 올랐다. 통증은 줄어들며 데이빗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는 일이 잦아졌다. 플러스(+)가 느는 것보다 마이너스(-)가 주는 것이 인간을 지극히 행복하게 만든다는 걸 배웠다.
미셸이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 데이빗은 행복했다.
남자는 태풍처럼 나타나 데이빗의 평온함을 흔들어놓았다. 미셸과 만난 날 데이빗은 악몽으로 카일을 깨워놓곤, 새벽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카일을 괴롭혔다. 몸이 이상했다. 목마름과 요의를 참기 어려웠다. 데이빗은 누군가에게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빌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렸다. 카일이 준 마리화나가 없었다면 수면부족으로 병원에 실려 갔을 것이다.
지금도 바깥에서 마른 풀 타는 냄새가 흘러들었다. 계속 뒤척거리고 있으면 카일이 쳐들어와 그의 특제 수면제를 강권할 것이다. 데이빗은 스케치북을 치우고 불을 껐다.
잠이 살짝 들려고 할 무렵 빗방울 몇 개가 툭툭 창문을 두들겼다. 누군가의 노크 소리 같다. 데이빗은 뒤척거리며 자세를 바꾸었다.
눈을 감자 미셸의 고백이 한 번 더 귀를 간질였다. 난 당신이 좋아. 이상스레 눈시울이 뜨거웠다.
* * *
항암 치료가 있는 날, 미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일찍 카일의 집에 도착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서둘렀던 건데 아니나 다를까 데이빗은 이미 집을 나가고 없었다.
“데이빗!”
미셸은 데이빗의 옛집인 낡은 연립주택가에서 그를 발견했다. 구부정한 등이 미셸의 부름에 움찔 떨렸다. 데이빗의 푸른 눈이 휘둥그레져 뒤를 돌아봤다. 미셸은 혀를 찼다. 화가 나야 하는데, 어린애 같은 그 얼굴이 지극히 사랑스러워 화가 쑥 들어가버렸다.
“일부러 날 물 먹이려고 일찍 빠져나온 거지?”
미셸은 차에서 내리며 짐짓 거친 목소리로 힐난했다. 데이빗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물 먹이려던 건 아니지만 미셸을 보기 멋쩍어 일찍 빠져나온 건 맞다. 그는 서투르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아, 아냐. 전 집에 드, 들러야 할 일이 있어서 그, 그랬어. 주소를 미처 못 옮겨서 우편이 이리 온 게 이, 있단 말이야.”
“그럼 나랑 병원으로 가기로 한 약속은 안 잊었단 말이지?”
“…….”
데이빗은 입을 다물었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남자는 적당한 말을 지어내지 못했다.
“어쨌거나 난 떨쳐놓고 갈 생각이었잖아.”
“그, 그래. 지, 지하철을 타, 타는 게 더 빨라.”
“당신이 쓰러져도 누구 하나 안 도와주던 그 지하철?”
미셸은 위협하듯 데이빗에게 다가섰다. 무례할 정도로 지나치게 다가오는 미셸의 행동에 데이빗의 귀가 빨개졌다.
“당신 귀, 정말 순식간에 붉어지네.”
놀림 반 감탄 반으로 뱉은 말에 붉은 기운이 맹렬히 힘을 얻어 더 왕성하게 퍼져 나갔다. 미셸은 데이빗의 창백한 피부 위로 붉은 기운이 퍼져 나가는 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광대뼈와 뺨을 물들인 것도 모자라 붉은 기는 목덜미 안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꼭꼭 잠근 회색 데님 셔츠 때문에 그 이상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날씨도 더운데 단추는 왜 끝까지 잠근 거야.”
미셸은 칙칙한 회색 셔츠를 찢어발기고, 데이빗의 눈에 어울릴 하늘색 티셔츠를 입히고 싶었다.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흉터에 미셸의 시선이 닿자 데이빗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셸은 데이빗의 상반신을 덮고 있던 흉터를 기억해냈다. 남자가 더위에도 몸을 꼭꼭 가리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괜한 말을 지껄였다.
“……난 더, 더위를 자, 잘 안 타.”
“생일이 언제야? 여름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위를 잘 견딘다던데. 당신도 그래?”
데이빗은 미간을 찌푸렸다. 미셸이 늘 하던 대로 마구 밀어붙이기 시작하는 게 영 맘에 안 들었다.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입술을 비죽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8월이야.”
미셸은 싱긋 웃었다. 월을 알아냈으니 일만 알아내면 된다. 이런저런 수다로 이야기를 끌어내려던 차에 데이빗이 성큼 골목길로 들어가 대화가 끊어졌다.
“데이빗?”
“쉿-.”
데이빗은 미셸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했다.
“엘리, 이리 온.”
데이빗은 자리에 주저앉아 어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거기 뭐 있어?”
미셸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툴툴거렸다. 뭔가 있긴 했다.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는 험상궂은 인상의 고양이를 보자마자 데이빗의 입술이 헤, 벌어졌다.
“엘리, 너 어, 어디 안 가고 여, 여기 있었구나.”
데이빗은 익숙하게 고양이의 턱을 쓰다듬었다. 미셸을 째려보던 고양이가 그 손길에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양이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는 경계심 가득한 동물로만 여겨왔던 미셸로선 놀라운 광경이었다.
“당신 고양이야?”
“아, 아니, 길고양이야. 우, 우리 집에 와서 머, 먹이를 먹곤 했어. 저, 저기 그, 그 물 좀 주면 안 될까.”
데이빗은 미셸이 들고 있는 생수병을 가리켰다. 미셸은 데이빗이 마시려는 줄 알고 기꺼이 물을 내밀었다. 데이빗은 미셸이 꽉 닫아놓은 물병을 열고는 그 물을 자신의 손바닥에 부었다. 집중하자 데이빗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 입술과 혀가 자신을 삼켰던 기억이 떠올라 미셸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상태라면 얼마 못 가 사달이 나지 싶다.
실망스럽게도 데이빗은 그 물을 고양이에게 주었다. ‘고양이 말고 날 귀여워하라고!’ 미셸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손바닥에 물을 부어 고양이를 먹이는 남자를 낯설게 들여다보았다. 미셸이 이날까지 겪은 사내들은 날카로운 이와 발톱으로 무장한 치들이 대부분이다. 미셸의 비서 리플리는 어린아이와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광고 멘트와 달리 자신의 슈트에 털과 머리칼이 붙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호텔에서 묵을 때마다 시트에 진드기 퇴치용 약을 뿌리는 신경질적인 남자가 골목길에서 정체 모를 고양이에게 물을 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할 일은 지구 멸망 전엔 없을 것이다.
“도, 도시에선 먹이보다 깨끗한 무, 물이 더 귀하거든.”
신기함에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을까. 데이빗이 쑥스러워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또다. 미셸은 광대뼈를 은은하게 물들인 분홍빛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 참 잘 빨개져.”
미셸은 데이빗의 붉어진 목덜미에 손길을 가져갔다. 손길이 닿자마자 데이빗은 목덜미를 가리고 물러섰다. 커다랗게 뜨인 푸른 눈을 바라보며 미셸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미셸은 조금 전 닿았던 흉터의 감촉을 되새기며 손끝을 문질렀다.
“그 흉터, 어떻게 생긴 거야?”
데이빗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릴 적에 생긴 것 같던데. 아버지였어?”
“…….”
데이빗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시계를 봤다. 병원에 지하철로 가려면 지금쯤 일어나야 했지만, 미셸의 차로 간다면 좀 더 시간을 끌어도 괜찮았다. 미셸은 후자를 노렸다.
“데이빗, 당신은 나랑 참 달라.”
“당연히…….”
“내가 당신이었으면 아버질 가만 안 놔뒀어. 총으로 쏴 죽였겠지. 나란 놈은 아버지가 미워서 자원입대를 했던 자식이야. 가만있으면 사람 하나 죽일까 싶어 전쟁터에 간 건데, 아버지가 나한테 뭐 별다른 짓을 한 것도 아냐. 어머니를 쫓아내고, 말 안 듣는 날 기숙사로 쫓아내서 골빈 새엄마랑 시시덕대느라 내 생일엔 카드 한 장 안 보낸 것뿐이었어. 내 증오란 게 당신에 비하면 참으로 웃기는 수준이지.”
미셸은 이마를 문질렀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더 별게 아닌데?”
자신의 청춘을 갉아먹었던 증오가 세월이 지나고 보니 또 이렇게 하찮은 것으로 바뀌는 것이 신기했다. 데이빗을 만나고 미셸은 변했다. 어찌 됐든 그는 예전보다 덜 화내고 분노를 잘 삭일 수 있게 됐다. 경솔한 행동으로 타인을 상처 입힌 뒤 그 대가를 치르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시간이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기억은…… 제, 제한적이니까. 과거는 색이 바래고, 주, 중요한 것만 남지.”
미셸의 물음에 답이나 해주는 게 고작이던 데이빗이 오늘은 웬일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아아, 당신도 그래?”
“도, 동화에선 그래서 과, 과거를 나타낼 때 흐, 흑백으로 나타내잖아.”
“맞아, 영화에서도 그렇지.”
미셸은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영화 이야기, 기억에 대한 인상, 인연을 맺은 길고양이. 데이빗과 그런 소소한 얘기들을 할 수 있는 게 좋았다.
“그런 식이면, 내 기억 속 아버지와 어머니는 흑백으로 채색된 거네. 아버지와 나 사이 있었던 수많은 기억은 정리되고 정리되어 몇 가지만이 남는 거고.”
미셸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데이빗과 자신의 관계까지 이어가려다 말았다. 아직 둘 사이 기억은 유채색이었고, 지나치게 선명해 데이빗을 괴롭혔다. 수많은 과거 중 어떤 것이 정리되고, 또 어떤 것이 선명하게 기억으로 남을 것인가. 희망은 있었다. 과거의 기억은 윤색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은 좋은 기억이 선택되곤 하니까. 미셸은 아까의 화제로 돌아갔다.
“아버진 어떻게 됐어. 복수는 했어?”
미셸이 복수란 단어를 힘주어 뱉는다. 데이빗은 눈을 껌뻑이며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미셸은 데이빗의 일에 자신의 일처럼 열을 내고 있었다.
“……도, 돌아가셨어.”
“당신이 한 방 먹이기도 전에? 아버지 때문에 빚도 졌다며?”
할 말이 없어 데이빗은 눈만 껌뻑였다. 미셸은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남자의 모습에 헛숨을 들이켰다. 이런 외계인 같은 놈한테 반하다니……. 미셸은 얼굴을 찡그렸다.
동화를 그리고, 생활력은 떨어지고, 병을 앓고 있으며, 지독히도 염세적이고, 어린 시절엔 학대를 당했을 게 분명한, 그런데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길고양이한테 물을 주며 행복해하는 신기한 남자에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신 진짜 신기한 사람이야. 내 생전에 당신같이 특이한 사람은 처음 봐.”
“다, 당신도 만만치 않아.”
나름 받아친다고 한 말에 미셸은 히죽 웃어버렸다.
좋아한다고 고백은 했는데,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는 투덜거림에 리플리는 지극히 적확한 조언을 해주었다.
「왜 좋아하는지 이유는 말했어요?」
리플리의 지적에 미셸은 무릎을 쳤다.
“알면 알수록 더 좋아져.”
신기해서 좋아한다는 말은 데이빗을 납득시키기 부족했을까. 미셸은 데이빗의 떨떠름해하는 얼굴을 보며 또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엘리를 집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데이빗은 미셸의 차를 얻어 탔다. 데이빗의 무릎을 베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가르릉거리던 고양이는 백미러를 통해 미셸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바로 험악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엘리라는 예쁜 이름치곤 눈빛이 너무 더러웠다.
“이름이 왜 엘리야?”
“……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 만난 고, 고양이라.”
“…….”
“근데 수, 수컷이야.”
미셸은 폭소했다. 뻔뻔하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인상 더러운 길고양이와 멍한 남자의 첫 만남을 상상하자 웃음이 비죽 비어져 나왔다.
* * *
미셸은 도중 일이 생겨 데이빗을 병원에 내려놓고 먼저 돌아갔다. 데이빗은 이마를 긁적였다. 돌아가는 길엔 미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데 어째서인지 시원한 마음과 섭섭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의사가 표적 항암제가 잘 듣고 있다는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도 정신이 딴 데 있어 설명이 잘 들리지 않았다. 데이빗은 내시경 검사를 위해 점액 성분 제재를 입에 머금은 채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호한 마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미셸, 미셸. 주로 남자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데이빗은 눈을 감았다.
바뀐 구토억제제가 꽤 잘 든 덕에 데이빗은 이번 항암치료는 생각보다 쉽게 넘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그동안 작업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오랜만에 찾았다. 지난주부터 그는 다시 작업에 손을 댔다. 어제는 꽤 늦은 시각까지 그림을 그리고, 플롯을 짰다. 은연중 압박해오던 담당자에게 내놓을 것이 생긴 것이다.
“데이빗, 당신이 언제 찾아올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빈말이라도 반가워해 주니 머쓱함이 덜했다. 편집자는 자기 얼굴만 한 텀블러를 옆에 두고 원고를 검토했다. 커피향이 좋았다. 데이빗이 쳐다보자 그녀가 한잔 마시겠느냐며 물었다. 데이빗은 거절했다. 한때 그는 커피 중독자였다. 하지만 아직은 몸이 커피를 마실 만한 상태가 아니다.
“몸이 건강해지면 그때 한잔 해요.”
미래를 이야기하는 여자의 말에 데이빗은 빙긋 웃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라던 잠언은 진실이다. 시간은 흘렀고, 과거는 멀리 흩어졌으며 그는 자신이 그린 동화를 앞에 두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내일부터 그는 동화를 그릴 것이고, 엘리는 자신의 집에 있을 것이다.
단 한 가지 정리되지 않은 사실이 여전히 그를 불편하게 했다. 미셸, 데이빗은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상상 속에 미셸을 들여놔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실례되는 질문 하나 해도 돼요?”
원고를 다 점검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다 끝낸 편집자가 눈을 빛내며 말을 걸어왔다. 데이빗은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할까 내심 긴장한 채 그러라고 답했다.
“미셸과는 무슨 관계예요?”
“…….”
데이빗은 들고 있던 허브차를 떨어뜨릴 뻔했다.
“미, 미셸이요?”
가슴이 쿵쾅거렸다. 데이빗은 눈앞 담당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녀 역시 데이빗의 아킬레스건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찌 된 일일까. 혹 자신의 삶이 트루먼 쇼에 나오는 트루먼처럼 생중계되고 있었던 거고, 그녀가 프로그램의 룰을 어기고 데이빗에게 비밀을 누설하고 있는 걸까. 그런 황당한 생각이 들 정도로 놀랐다.
“미, 미셸을 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데이빗의 어수룩한 반응에 담당자의 눈매가 휘어졌다.
“어머, 이 건물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사람 회사가 이 건물 1/4을 사용하고 있는데, 게다가 얼굴은 또 얼마나 끝내줘요. 성격은……. 음, 여하튼 이 건물 유명 인사잖아요.”
“그가 여, 여기서 일하나요?”
“데이빗, 미셸이 어디서 일하는지도 몰랐어요?”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자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실망이네요. 우린 미셸이 당신 동화를 직접 추천했다기에 당신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셸을 살려준 전직 특수부대 요원인가 싶었는데. 미셸은 입만 다물고 있으면 꽤 멋있는 남자이지만…… 음, 동화를 읽을 사람은 절대 아니잖아요.”
그건 데이빗도 동감이었다. 미셸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멋진 남자였다. 깎아놓은 외모에서 시정잡배 뺨치는 쌍욕이 튀어나오면 그 간극에 환상이 확 깼다.
“미셸이 출판국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동화를 읽고 있다니까 다들 거짓말 말라더군요. 증거 사진까지 보여줘도 안 믿던걸요.”
담당자는 합성한 게 아니라며 휴대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통유리 안에서 미셸은 학자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단정한 표정으로 원고에 집중하고 있었다. 책상에 다리를 얹고 이를 득득 갈며 읽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데이빗은 출판사를 나오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주소록에 미셸의 연락처가 있지만, 그는 한 번도 먼저 연락해본 적이 없다. 데이빗은 전화기를 들고 망설였다. 혹시 미셸이 동정심 때문에 자신의 동화를 추천한 건 아닌지 물어볼 참이었다. 그렇다고 답하면 심사를 무르라고 해야 하나. 명치끝이 턱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한참 만에 데이빗은 전화를 걸었다.
「데이빗? 어, 무슨 일이야. 괜찮나?」
미셸이 반색하며 전화를 받았다. 데이빗의 전화가 워낙 의외였는지 그는 데이빗이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했다.
“괜찮아. 벼, 별일은 없어. 내가 추, 출판사에 왔는데, 온 김에 잠깐 다, 당신을 좀 만나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쿠당,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내려갈게.」
“아니, 그, 그러지……?”
뚜- 전화가 끊어진 소리다. 잠시 후 미셸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비서가 내 전화를 멋대로 끊어버렸어. 그대로 돌아가지 마. 난 꼭대기 층에 갇혀 있어. 난 이 메시지도 몰래 겨우 보내고 있단 말이야. 꼭 구출하러 와줘.」
구구절절 안타까운 사연이다. 미셸이란 이름만 봐서야 탑에 갇힌 공주가 연상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남자의 성격을 비추어봤을 때 아마 구출이 필요한 건 미셸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일 가능성이 컸다. 평소 어떻게 굴었기에 비서가 전화기를 빼앗아 꺼버렸을까. 혹 지금 회의 중에 전화를 받았던 건 아닐까. 데이빗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리베이터를 타 최고층을 눌렀다. 데이빗과 미셸이나 최고층에 사는 건 똑같은데, 그 높이가 사뭇 달랐다. 마천루라고 평해도 좋을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의 빠른 속도에 데이빗은 압력을 거스르는 어지러움을 맛봤다. 최고층에 다다르자 통유리로 전체가 환한 대리석 로비가 눈앞에 나타났다. 탑처럼 높은 건물 꼭대기에선 맨해튼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지나치게 높다. 데이빗은 속이 울렁거렸다. 마천루 위에 있음에도 그는 바닥에서 수백 미터 건물을 올려다보는 기분을 느꼈다. 데이빗은 수직의 위압감에 면역력이 없었다.
데이빗의 유전자에 박힌 높이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마천루의 거주자인 미셸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방음이 잘되는지 이 높은 곳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과거 데이빗이 살았던 5층 연립 주택의 옥상의 바람 소리는 참으로 스산했다. 골재를 줄이기 위해 철재 대신 통유리로 전면을 장식한 현대적 빌딩 숲 위로 구름 그림자가 지나갔다. 거대한 유리들은 가볍고 아름다웠으나, 대신 잘 깨어졌다. 지구 반대편의 대도시에선 이십여 년 지난 건물의 대형 유리가 흉기로 변해 길을 가던 여성의 다리를 잘라놓았단 흉문도 들렸다. 거대하고, 차갑고, 위험했다. 이 도시는 데이빗에게 늘 그런 느낌이었다.
데이빗은 이 화려한 도시가 날카로운 유리 이빨을 가진 맹수란 걸 알았다. 때문에 도시가 내밀하게 품은 다정한 공간을 데이빗에게 내보인다 한들 그는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었다.
「어디야?」
미셸이 한 차례 더 메시지를 보내왔다.
「탑 꼭대기」
그렇게 답문을 보내고 얼마 뒤 미셸이 나타났다.
“진짜로 와줬군.”
“바, 바쁜데 부, 불러낸 거 아닌가.”
“걱정하지 마, 회의가 금방 끝났어.”
당신이 무슨 바람으로 날 찾아온 건가? 미셸이 싱글싱글 웃으며 눈짓으로 묻는다. 기대감 섞인 얼굴을 올려다보며 데이빗은 더듬더듬 용건을 꺼냈다.
“추, 출판사에 들렀다가 당신이 여기 있단 걸 들었어.”
“워낙 큰 건물이잖아. 은행, 부동산, 별별 직종들이 다 있지. 나도 여기 세입자 중 한 명이고.”
“다, 당신이 꽤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담당자가 나, 나랑 당신이 무, 무슨 관계냐고도 묻더군.”
미셸이 눈을 깜빡거렸다.
“나랑 당신 관계를 사람들이 벌써 알아? 맞네, 우리가 거리에서 키스한 걸 매튜가 봤지. 그 남자가 SNS에 우리 사진을 올린 거 아냐?”
모델처럼 반질반질하던 얼굴이 삽시간에 삶은 문어 형상으로 변했다. 미셸은 자신이 감정 조절이 남들에 비해 약간 뒤떨어진다고 말했다. 데이빗이 봤을 땐 약간의 수준이 아니다.
“……그,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 그녀는 다, 당신이 왜 공모 때 내, 내 작품을 뽑았나 구, 궁금해했어.”
“아아, 그거 그냥 눈에 띄어서 뽑았던 거지. 당신 그림은 아름다워.”
“다, 당신은 동화 같은 건 안 보는 사, 사람이라고 하던데. 혹 내, 내 동화라 뽑은 건 아, 아닌가?”
“전혀, 난 외압 같은 건 안 썼어. 당신 작품이 좋다고 뽑은 건 줄리아야. 난 추천만 했을 뿐이지.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셸이 웃음기를 지우고 팔짱을 꼈다. 데이빗은 불현듯 민망함을 느꼈다.
“다, 당신이 혹 도, 동정으로 내 동화를 뽑았다면 다, 다른 사람이 피해를 이, 입은 거니까. 그, 그런 건 불편해.”
“안심해. 사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았으니까.”
“다, 다행이군.”
“내가 만일 외압을 행사했으면 어쨌을 건데. 상을 물리기라도 하려고?”
“…….”
“당신은 내게 믿음이 없지. 알아. 하지만 이렇게 확인하니까 또 서운함이 남다르군.”
미셸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는 창밖을 노려보며 감정을 식혔다. 달아오른 귀가 빨갛다. 자신의 말 중 어떤 게 저 대단한 남자를 흔들었나. 데이빗은 주저하다 물었다.
“나, 나한테 화, 화났나?”
“뭐?”
“내, 내가 다, 당신 기분을 사, 상하게 한 건가. 그럴 의도는 없었어. 그저…… 우, 우리가 자, 잘 안 될 거란 말을 하려던 거였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화, 화내지 말고 들어. 다, 당신은 내게 미, 믿음이 없다지만 우, 우리가 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관계는 아니잖아.”
한참 물끄러미 데이빗을 바라보던 미셸이 팔짱을 풀었다. 그는 좀 전보다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좋지 못하게 만나긴 했어. 믿음이 부족할 수 없단 것도 알아. 하지만 잘 안 될 거라고는 믿지 않아.”
“어, 어째서. 우, 우린 잘 안 될 거야.”
“우리가 잘 안 될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당신은 내 감정을 직시하려고도 않는데? 자격지심은 당신 정체성의 핵심 부분이라 어떻게 조절이 안 된단 말은 하지 마. 당신을 깎아내리지도, 도망치지도 말고.”
“답을 모, 모르기 때문이야.”
“?”
무슨 문제의 답을 말하는가. 미셸이 궁금하단 얼굴로 데이빗을 쳐다봤다. 데이빗은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계속 궁금했어. 무, 묻지 못했지. 지, 지금 물을게. 그때 당신은 어, 어떤 기분이었어?”
“……언제를 말하는 거야?”
그때. 그때 말이다. 데이빗은 입매를 굳혔다.
-당신은 그때 어떤 마음이었어?
너무 늦은 물음이다.
왜 그동안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 이제 와 이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는다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냥 지금 하고 싶었다.
“내, 내 몸을 올라타고, 나, 날 두, 두들겨 패, 팰 때 기, 기분이 어땠어?”
“이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비, 비난하려는 게 아냐. 구, 궁금해서 무, 묻는 거야. 그, 그렇잖아. 게, 게임을 할 때 괴, 괴물을 죽, 죽이면서 무슨 생각을 하, 하지는 않잖아. 내 착각이 아니라면 다, 당신은 그때 퍽 즐거워 보였어. 당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소, 솔직히 말해줘. 내, 내가 같은 인간으로 보, 보이기는 했나.”
“……그건 내 잘못이야. 인정해.”
“지, 지금도 혹 그래 보이진 않나? 내, 내가 쓰레기 같은 이, 인간이라고 우, 우린 동의했지.”
“절대 그렇지 않아.”
“그때와 지금의 나, 나는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내가 달라졌어!”
미셸이 언성을 높였다. 사무실 안에서 남자 한 명이 나와 바깥을 살피다 도로 들어갔다. 데이빗은 목소리를 낮췄다. 얼굴이 홧홧해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했다. 더는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돌고 싶지 않았다.
“나, 나도 다, 당신과 화, 화해할 수 있으면 좋겠어. 다, 당신이란 존재는 내게 가장 큰 불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글쎄, 당신은 어, 어쩌면 내 인생 더 없을 행운일지도 몰라. 당신이 주, 주는 돈을 받고, 당신의 호, 호의를 받아들이고, 당신의 감정이…… 그게 얼마나 갈 줄은 모, 모르지만, 그, 그래도 그걸 받아들이고 자, 잠시나마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 그건 안 되는 일이야. 나는 그럴 자,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어째서?”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인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부한 물음이고 진부한 답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답을 애용하던가. 코웃음 치던 장면이 자신의 일이 되고서야 데이빗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생각했던 답이 실은 꽤 그럴듯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당신과 나, 나는 달라.”
“헛소리 마.”
미셸이 미간을 찌푸리고 성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가, 같지도 않지. 당신은 나,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다, 당신은 나에 대해 잘 몰라. 당신은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가난한 적은 없지. 내게 사과를 했지만, 다, 당신은 가졌기에 쉽게 사과할 수 있는 건지도 몰라. 당신은 귀, 귀찮은 일을 돈으로 문지르는 데 익숙할 거야. 그게 쉽다는 것도 자, 잘 알고. 우리 둘이 다르기에 잘 안 될 거라는 건, 다, 당신도 알 거야.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 언제 화를 내는지, 어떤 말에 사, 상처 입는지 잘 몰라.
“나도 알 만큼은 알아. 군에서 월급을 차압당해서 한 달을 쫄쫄 굶은 적도 있어.”
데이빗은 비죽 웃었다.
“그, 그게 당신의 유, 유, 유일한 가난 체험이겠지. 다, 당신은 가난이 고통스럽다는 게 뭔지 몰라. 내 아버지는 집, 집안에 숨겨둔 돈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작자였어. 어, 어머니는 비상금을 차, 찬장 안 유리병 안에 숨겨뒀는데, 발견한 아버지가 성질을 내며 그, 그걸 집 옆 우물에 더, 던져 버렸어. 하필 굉장히 추, 추운 날이었지. 어머니는 우, 우물물을 다 퍼내고 하, 하루를 끙끙 앓았어. 난 다, 당시 어머니가 이해가 안 갔어. 그 안의 도, 돈은 고작해야 30달러가 미, 미처 못 됐을 거야. 푸, 푼돈이잖나. 어, 어머니가 우는 소릴 들으며 난 돈이 없다는 게 퍽 서, 서러운 일인가 보다 하고 막연히 생각했어. 왜, 왜 내가 지, 지어낸 얘기 같나? 아니, 지, 진짜 있었던 일이야. 이 얘긴 내, 내가 아는 누구한테도 안 한 얘기지. 카일이나, 매튜도 모, 몰라.”
“어머니는 살아계신가.”
“잘 계셔. 이, 일리노이의 작은 마을에 저, 정착하셨어. 연락도 가끔 하는데, 마, 만나진 않아.”
“아팠을 때 왜 어머니껜 안 갔나.”
“이, 이젠 그쪽 가정에서 추, 충실하셔야 하니까. 어머니는 재혼해서 아, 아이도 있어. 난 그 아이가 아팠을 때 도, 도움을 못 줬어. 그러니까 내, 내가 아프다고 손 내밀 염치는 어, 없었어.”
“…….”
“질, 질렸나. 나와 어느 정도 치, 친해지면 이런 넋두리를 계, 계속 듣게 될 거야. 내 사, 삶엔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가 차, 참 많거든. 다, 당신은 불편해질걸.”
데이빗은 미셸이 자신의 더듬거리는 말을 꽤 잘 참아내는 게 신기했다. 성격 급한 남자가 언제까지 견디나 보자, 실험하는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괘, 괜한 소릴 하고 괜히 비, 비참해하고, 비굴하게 구, 구는 내가 당신은 잘 이해되지 않을 거야. 나는 내가 사, 상처 입기 싫어서 당신을 상처 입힐 거야. 구질구질한 삶을 보여주기 싫어서 안, 안간힘을 쓸 거고, 당신이 베푸는 호의마다 나, 날카롭게 반응할지도 몰라. 그런 힘든 길을 뭐, 뭐하러 걸어가지? 나보다 나, 나은 사람이 다, 당신 주변엔 얼마든지 있잖아.”
미셸이 짧게 답했다.
“내 취향이 유별나서.”
“눈이 어, 어떻게 된 모양이군.”
미셸이 동의한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당신이랑 나랑 다르고, 잘 될 가능성이 없단 걸 그렇게 잘 알면서 당신은 왜 나를 납치했나?”
“…….”
“반해서라고 답했지? 당신 말대로 당신과 나는 다른 세상 사람이야. 납치해 감금하면 그게 해결되리라 믿었나? 전혀 아니잖아. 다르다는 게 뭐가 문제지. 대통령과 십 분 이상 말해본 적 있나? 난 있어. 말하고 나면 딱 느끼지. 이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군. 비욘셰랑 하루만 살아봐. 똑같아. 그냥 좀 특이할 뿐이야. 내 눈엔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특별하고 사랑스러워.”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데이빗은 누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기를 바랐다.
“누누이 마, 말하지만 당, 당신은 가, 가난해본 적이 없으니까 쉬, 쉽게 말하는 거야.”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냐. 그런다고 뭘 어쩌겠어. 난 어차피 당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데이빗, 난 당신이 가난해서 당신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게 아냐. 난 당신이 나와 달라도 아무렇지도 않아. 감당할 수 있어. 당신만 날 감당해주면 돼. 나와 당신은 달라. 그렇다고 거리낄 것 없어. 동등하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부분이 약간 다를 뿐이지. 나머지는 다 똑같아.”
미셸이 자신만만하게 군다. 자기 자신을 믿는 구김살 없는 남자 앞에서 데이빗은 마냥 어둠을 드러내며 뻗댈 수 없었다.
“지, 지진이라도 다시 난다면…….”
“응?”
“당신 말처럼 내, 내가 거리낄 것 없이, 다, 당신과 동동해지려면 지진이라도 한 번 나야 하는 것 아닐까.”
미셸이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별장에서, 여진이 있어서 내가 당신 목에 사슬을 걸 수 있었지. 그전엔 당신이 나보다 힘이 셌어. 그때 우위를 뒤집을 수 있었던 건 천재지변 때문이었지. 이봐, 그렇지만 지금 지진이 무슨 필요가 있어. 당신은 이미 나보다 훨씬 힘이 세. 눈을 크게 뜨고 봐. 난 당신 때문에 쩔쩔매고 있잖아.”
“…….”
“당신 마음만 바꾸면 되는 일인걸. 난 당신이 좋아. 제발 당신이 내 마음을 얼른 받아주면 좋겠어. 하늘과 땅이 뒤집히길 기다리다간 말라죽겠어.”
그러니 그전에 답해줘. 데이빗, 날 싫어하지 않는다고 어서 말해봐.
데이빗과 미셸은 대치했다. 데이빗은 버텼다. 지진이 나야 한단 말은 그냥 던져본 말이 아니었다. 미셸은 자신이 쩔쩔매고 있다고 말하지만, 데이빗이 봤을 때 둘의 관계가 도로 어긋난다면 이번에도 역시 상처 입는 건 데이빗 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다시 할 수 있다면…….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실외기가 꺼졌다.
“?”
미셸은 소리에 놀라 주변을 바라보았다. 탁, 탁, 탁-. 사거리의 신호등이 차례로 꺼져가고 있었다. 컴퓨터가 꺼진 사무실마다 무슨 일이냐며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몇몇은 밖으로 뛰쳐나와 상황을 살폈다. 빵빵! 사거리에서 뒤엉킨 차들이 경적소리를 높였다.
“정전이군.”
미셸이 어딘지 모르게 기쁜 얼굴로 말했다.
정전은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과는 다르다고 말하려다 데이빗은 길게 늘어서서 건물을 내려가는 사람들의 줄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멈춰 선 엘리베이터 때문에 미셸과 데이빗은 최고층에서 지상까지 걸어서 내려가야 했다. 경비담당자가 각층의 책임자에게 무전기로 연락을 해왔는데, 최고층의 책임자는 미셸이었다. 군 경험이 있는 건강한 남자 중 한 명인 그는 그 층의 노약자를 책임지고 보호해 내려가야 했다. 조깅을 하다 발목에 금이 간 임직원 한 명이 미셸에게 배당되었다. 미셸과 리플리, 그 외 젊은이 몇이 임원을 교대로 부축하며 긴긴 계단을 내려왔다. 에어컨이 모두 꺼져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오하이오에서 가지치기를 제때 안 한 거겠지.”
2003년 때의 대정전을 들먹이며 미셸이 리플리의 고향 사람들을 비난했다. 리플리가 끼어들었다.
“그땐 경고 시스템이 해킹당한 거 아니었어요?”
“버그를 먹은 거였어. 과부하로 늘어진 전선이 가지에 걸린 게 시발점이었고. 오하이오 사람들이 문제였지. 자넨 뉴스도 안 보고 사나?”
평소 무식하단 구박을 받고 사는 미셸이 이때다 싶어 무안을 있는 대로 주었다.
“오늘따라 사장님이 유별나게 지적으로 보이시네요. 제가 아는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다른걸요. 데이빗, 제가 사장님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 몇 개를 알고 있는데 들어볼래요.”
“……잡담할 시간 없어. 어서 내려가지.”
한참을 걸어서야 겨우 중간까지 내려왔다. 데이빗은 미셸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를 도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함께 부축했다. 통유리로 된 고층 건물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웠다. 데이빗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곧 해가 질 터였다. 사방이 식별이 가능할 때 건물을 빠져나가야 한단 생각에 발걸음이 초조해졌다.
“멀군.”
“걱정하지 마. 거의 왔어. 쌍둥이 빌딩 때도 1시간 만에 3만여 명이 다 내려왔다잖아.”
미셸은 데이빗을 안심시키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건물의 예를 들었다. 리플리가 작게 투덜거렸다.
“하필 세계무역센터를…….”
미셸이 뒤를 돌아보며 비서를 째려봤다. 리플리가 짐짓 비장한 말문을 열었다.
“사장님, 여기가 테러 때의 쌍둥이 빌딩 안이고 제가 다친 사람이었다면 절 어쩌셨을 겁니까?”
“당장 버리고 갔겠지.”
그럴 줄 알았다며 리플리와 미셸은 와하하 웃었다. 미셸은 웃음 뒤 자신이 부축하고 있는 남자를 안심시켰다.
“스팀슨, 당신은 안 버려요. 당신은 내 비서보다 훨씬 사랑스럽거든요.”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리플리와 미셸은 상대방을 조롱하는 농담을 계속하며 기다란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미셸이 게으르고 무식하다며 오하이오 사람들을 근거 없이 비난하자, 리플리는 돼지 잡기 대회 때 미셸을 초대하지 않겠다고 받아쳤다.
건물에서 내려왔을 땐 장딴지가 뻣뻣했다. 미셸은 전기회사를 욕하며 선언했다.
“난 할 만큼 했어.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다시는 안 할 거야!”
“별수 있나요. 내일도 전기가 안 들어오면 걸어서 꼭대기 층까지 출근해야 하는 거죠.”
리플리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푸념했다. 미셸은 리플리와 함께 퇴근했다간 로맨틱이고 뭐고 자신의 인생도 리플리처럼 어두침침해질 거라고 확신했다.
“리플리, 우린 첼시 쪽으로 걸어갈게.”
“차는요?”
“신호등이 엉망인데다가 퇴근 시간이잖아. 차를 도중에 버리고 갈 것 아니면 자네도 걸어가.”
곧 어둠이 오면 차들이 엉망으로 엉킬 터였다. 이 도시엔 정전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들 암흑의 빌딩 숲 속, 헤드라이트 불빛을 등대 삼아 이동해본 경험이 있다. 기름은 떨어져가고, 끔찍한 체증에 오도 가도 못했던 아찔한 상황을 다시 겪고 싶진 않다. 리플리는 미셸의 말에 동의하고 방향을 바꿔 사라졌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집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하이라인(뉴욕 하이라인 파크. 1930년대 이후 뉴욕의 대중교통 수단을 담당하던 고가철도가 1980년 이후 사용 않는 폐선으로 계속 뉴욕의 서쪽에 방치된 채 흉물스러워지자 시 당국이 디자인 공모를 통해 철거 계획을 공모함. 구조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철거를 하지 않고 철로를 그대로 보존한 채 공원을 조성해 지금에 이름.)으로 가지. 정전이면 지하철은 안 다닐 거야.”
미셸은 한때 버려진 고가 철도였던 공원 쪽으로 데이빗을 이끌었다. 길이가 총 2.3km에 달하는 공중 정원은 과거 선로를 그대로 보존해 만들어진 만큼 도시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곳으로 이동하는 게 도로로 이용하는 것보다 빠를 것이다. 미셸은 공원을 따라 걷다가 16스트릿에서 첼시 마켓으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공원엔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가게에서 사람들이 깡통 요리와 초 등을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몇몇 건물들은 비상 발전기로 불을 켜고 다가올 정전의 밤을 대비했다. 미셸은 불현듯 배가 고파졌다.
“뭐 좀 먹지 않을래? 일단 에너지를 비축하고 집에 돌아가는 편이 나을 거야.”
“집에 머, 먹을 게 없나?”
“커피가 있지만, 커피포트가 작동하지 않을 거고 시리얼은 있지만, 우유가 다 상했을 거야. 전자레인지를 쓸 수 없으니 냉동식품도 무용지물이고…… 아, 냉동해둔 음식이 다 썩겠군. 빌어먹을.”
미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다, 당신 집엔 태양열 발전기 같은 거 어, 없나?”
“그런 게 집에 왜 있어?”
“부, 부자들은 지하실마다 벙커를 지어놓지 않나? 과, 광고에서 봤어. 도, 돈 있는 사람들은 지구 멸망의 순간에도 안전한 고, 고가 대피소 입주권을 사, 사는 게 유행이라던데.”
미셸이 황당하단 얼굴로 데이빗을 바라봤다.
“그게 가능해? 혜성과 충돌하는 순간에 용케 고가 대피소로 숨겠군. 난 날 알아. 난 5만 불짜리 두더지 생활을 견뎌낼 사람이 아냐. 당신이랑 똑같이 지상에서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겠지.”
“……다, 당신 비서가 헤, 헬기로 구출하러 오지 않을까.”
미셸이 푸하하 웃었다. 그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며 데이빗을 놀렸다.
“리플리는 그렇게 충성스러운 부하가 아냐. 당신이 뭘 상상하고 있는 줄 알아. 헬기 조수석엔 나 대신 리플리네 농장 돼지가 앉아 있을걸.”
데이빗은 웃음을 참기 위해 볼 안쪽을 세게 짓씹었다. 자꾸만 리플리와 그의 농장 돼지가 연상돼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미셸이 공원 근처의 간이식당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데이빗을 끌고 갔다. 정전 때문에 오븐을 사용하는 요리는 아예 불가능했다. 데이빗은 스프를, 미셸은 스파게티를 후다닥 먹어치웠다. 음료 기계가 멈춰서 물과 함께 식사를 들었다.
“최후의 만찬 같군.”
“지, 지구 멸망의 날 예, 예행연습 같지?”
“내가 말하려던 게 바로 그거야.”
미셸이 스파게티를 거의 흡입하며 답했다. 어두워져 가는 바깥을 곁눈질하며 식사를 마치고 데이빗과 미셸은 식당 직원들보다 조금 일찍 그곳을 나왔다.
공원으로 이동한 건 잘한 짓이었다. 고가 철로를 재활용한 공원은 지상 십여 미터 위에 위치해 있어서 비상등을 켠 건물의 불빛을 좀 더 받았다.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귀가하는 거리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데이빗과 미셸은 집을 향해 걸었다. 멀리 허드슨 강 위로 석양이 지는 모습이 보였다. 살굿빛 벽돌 건물들이 붉은빛으로 그늘졌다. 아름다운 노을과 공원을 채우고 있는 수북한 들꽃 덕에 곧 어둠이 도시를 집어삼키리란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앵초와 쑥부쟁이 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붓꽃의 줄기 끝에는 갈색으로 변한 열매가 매달렸다. 정전으로 어두워진 도시 속에서도 여름은 그렇게 여실히 존재했다. 마천루에선 보이지 않던 도시의 풍경이, 지상에 내려서자 보였다. 사람들이 살았고, 꽃이 피어 있었다. 화려함만이 아름다움의 전부는 아니라고 낡아빠진 선로를 품 안에 담은 공원이 잔잔하게 속삭였다.
“이, 이렇게 보면 이 도시도 그,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아.”
“그렇지.”
“대, 저, 정전이 있었을 때, 당신은 뭐, 뭘 하고 있었나.”
“노리고 묻는 건가. 난 물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을 것 같지? 난 그때 구치소에 들어가 있었어. 마리화나 좀 하고, 클럽 어깨랑 주먹다짐을 살짝 한 것뿐인데 인정사정없이 잡아넣더군.”
미셸다운 사연이었다. 남자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정전 후 10개월 뒤에 수많은 아이가 태어났다며? 어둡고 할 일은 없으면 섹스가 정답이지.”
“꼭 대, 대정전 때만 그, 그런 건 아냐. 전쟁 때도 오히려 아,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 대정전이나 지진, 허리케인이 쓸, 쓸고 간 뒤 많은 사람이 결혼을 서두른다더군.”
“죽음이 눈앞에 떨어지면 사람이 그리워지니까. 당신은 어땠나.”
“초, 촛불을 켜고 버티다 자, 잤지.”
“아니, 내 말은…… 당신도 죽음이 눈앞에 떨어졌을 때, 사람이 그리워 내게 그런 짓을 했느냔 뜻이었어.”
데이빗은 고개를 들어 미셸을 올려다보았다. 그럴 필요가 없단 걸 알면서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미셸은 데이빗의 주눅 든 눈빛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별장에선 내내 당신에게 무척 화가 났는데, 지금은 당신이 그럴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어.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르잖아. 죽음이 갑자기 남의 일이 아니게 되면, 내일 내가 죽게 될 수도 있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섹스를 하고, 진탕 술을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서 울잖아.”
“……나는 다, 당신을 납치하는 넋 나간 지, 짓을 했고.”
“그렇지. 난…… 이제 괜찮아. 염치없는 소리지만, 당신도 괜찮았으면 좋겠어. 그건 나쁜 경험이었지만, 아주 그렇게 최악인 건 아니었어. 정전에 늘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 식료품 가게에서 할인된 물건을 사고, 이렇게 멋진 공원을 구경할 수 있지.”
나무 계단을 내려서던 미셸이 한 무더기의 앵초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나쁜 일에도 좋은 면은 있어. 별장에서 난 당신을 만났어.”
“당신은 기, 기억을 정리하는 게 나, 나보다 빨라서 그래. 과, 과거는 좋았다고 막연히 기억하고 있는 거지.”
“그럴지도 몰라. 당신도 언젠가 이 순간을 과거로 기억할 거야. 기왕 그럴 거라면 좋은 기억을 더 많이 남겨.”
데이빗은 말문을 멈추고 미셸을 바라봤다. 미셸에 관한 데이빗의 과거 기억은 정리되어 이젠 몇 가지만이 두드러지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몇 장의 스냅사진 같았다. 줄리아와 데이트를 하며 웃던 미셸의 미소, 별장 속 악귀 같던 눈빛, 가로등 아래서 데이빗을 바라보며 그를 좋아한다 고백했던 남자의 붉어진 귀. 그 세 장의 사진이 남았다.
그 중 단 한 장을 골라야 한다면 데이빗은 마지막 장을 고르고 싶었다.
미셸은 그동안 데이빗에게 계속해 물어왔다. ‘데이빗, 당신은 사진을 고를 수 있어. 그런데 왜 굳이 가장 끔찍한 사진만 간직하려고 하지?’
데이빗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항암치료는 잘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의사가 어느 날 병이 재발했다고 말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다시금 죽음이 눈앞에 떨어진다면 데이빗은 무엇을 가장 후회할지 잘 알고 있었다. 미셸. 그였다.
출입구가 나왔다. 공원에서 거리로 다시 내려서기 전에 미셸이 나직한 목소리로 데이빗을 불렀다. 석양에 미셸의 눈썹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데이빗.”
“응?”
“내가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었지. 답할게.”
“…….”
“분명히 난 당신을 혐오했어. 당신을 완전히 짓눌렀을 땐 흥분과 기쁨도 느꼈지. 부정하지 않겠어.”
데이빗은 심장이 힘겨울 정도로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세찬 박동을 견디며 그는 잠자코 미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야.”
미셸이 손을 내밀어 데이빗의 손등을 슬쩍 어루만졌다. 미약하고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데이빗은 그 손을 차마 쳐내지 못했다.
“데이빗, 난 내가 별다른 문제 없이 돌아왔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상하더군. 별장에서의 일이 계속해 기억났어. 당신이 내 아래에서 신음하던 모습이 강렬해서 그런가보다 넘기려고 했는데, 언제부터 그곳 자체가, 불빛 하나 없던 그 밤의 차가운 공기마저도 생생하게 떠오르더군.”
데이빗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 밤, 빛 하나 없던 산속의 한기를 그 역시 생생히 기억했다. 미셸이 손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천천히 올렸다. 데이빗이 놀라지 않게끔 부드럽게 팔뚝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데이빗의 허리춤을 조심스레 쥐었다. 미셸은 데이빗을 느슨하게 끌어안은 자세로 나직이 고백을 이었다.
“이상한 일이지? 그건 단 일주일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는데 말이야. 내 방 침대에 누워 내가 덮고 있는 시트가 잘 마르고 깨끗한 것임을 확인할 때가 있어. 침대가 삐걱대진 않는지, 혹 이곳이 그곳이 아닌지. 내가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미쳐 돌아왔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곤 했지.”
“당신은 구, 군대에 있지 않았나? 그 덕에 나, 난 당신이 어지간한 이, 일에는 꾸, 꿈쩍도 않는 줄 아, 알았어.”
“당신 말대로 그건 전쟁터에서 빠져나와 오랜만에 휴가를 맞은 기분과 비슷했어. 집에 돌아왔는데도, 여기가 내 집이 아닌 것처럼 영 이상하게 느껴져 견디기 힘들었지. 당신이 내 곁에 없는 게 불현듯 낯설더군. 매 순간 당신의 체온과 질감을 느꼈던 건 단 며칠이었을 뿐인데, 그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게 견딜 수가 없더군.”
“난 이, 이해가 가지 않아.”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
미셸이 눈썹을 비틀며 웃었다.
“데이빗, 당신만 그곳에 묶인 게 아냐. 그곳에서 나도 나의 일부를 잃었지. 즐거움과 흥분 외에 다른 감정이 섞이는 걸 미처 몰랐어. 사람하나를 곤죽으로 만든 게 당혹스러웠고 돌아온 뒤에는 내 일부분이 영영 바뀌었을지도 모른단 사실이 불안했어. 내게 남은 그날의 흔적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실은 잘 모르겠어. 그저 난 당신이 필요해. 내 불안감과 상실감이 어째서 당신으로 채워지는지는 묻지 마. 당신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미셸이 데이빗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얼굴이 가까워 데이빗은 미셸의 녹색 눈동자를 장식한 갈색의 반점들까지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처음 그를 만났던 새벽이 떠오른다. 자신은 택시 운전수였으며 미셸은 방금 납치에서 벗어난 남자였다. 워낙 잘난 남자였다. 데이빗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미셸의 피딱지 얹힌 입술과 잘 세공된 보석 같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말았었다. 택시의 뒷좌석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미셸과 눈이 마주친 순간 데이빗의 심장에선 ‘쿵’ 하는 소리가 났을 것이다.
아찔한 기시감에 데이빗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눈치 빠른 남자는 자신의 외모가 데이빗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눈매를 접으며 미셸이 화사하게 웃었다. 데이빗은 현기증이 치받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미셸이 따라와 시선을 붙잡았다.
“데이빗, 부탁이 있어.”
“뭐, 뭐지?”
“꼭 들어줘야 해.”
데이빗은 눈을 깜빡였다. 부족할 것 없는 남자가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과연 뭘까.
“좀 있으면 완전히 깜깜해져서 아무것도 안 보일 거야. 암흑 속에서 키스하다가 입술을 다칠지도 몰라. 그전에 이번엔 나한테 당신이 입 맞춰보지 않을래?”
“……뭐?”
데이빗은 공원을 걷던 사람들이 쳐다볼 만큼 커다란 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미셸은 자신했다. 데이빗은 피식 웃었다.
“지진도, 저, 정전도 이미 일어났으니까.”
“그래. 이제 겁낼 거 하나 없지.”
데이빗은 고개를 기울였다. 겁낼 것 없다고? 자신은 오랫동안 미셸을 두려워했다. 억울할 만큼 길게.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두렵지 않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미셸의 말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데이빗은 충동적으로 미셸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열려 있었다. 자신의 입맞춤 하나가 남자를 이리도 동요시킬 수 있단 게 데이빗은 신기했다.
도취감에 정신이 따뜻한 물속에 잠긴 것처럼 멍해졌다. 이 남자와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거였구나…….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이 달콤쌉싸름한 향내를 풍겼다. 잡다한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미셸이 홀린 사람처럼 데이빗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데이빗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미셸의 옷깃을 놔주었다.
“안녕.”
“데이빗!”
데이빗은 놀란 얼굴의 미셸을 선로 위에 남겨두고 계단을 내려왔다.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켜두고 수많은 연인이 몸을 나눌 터였다. 데이빗은 그 무리 중 하나가 될 생각이 아직은, 없었다.
정전은 다음날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