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윗의 탑-8화 (8/18)

끌림 3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 한참 뛰다 데이빗은 뒤를 돌아보았다. 미셸은 아직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키를 챙겨왔으면 좋았겠지만, 열쇠는커녕 운동화도 못 신었다. 발바닥이 뜨겁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돌조각이 박혀 있었다.

자신은 너무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다. 카일의 말과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미셸과의 일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깨닫자마자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뇌 어딘가에 각인이라도 된 걸까. 미셸을 보면 그의 몸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도망치느라 바쁘다. 오로지 미셸이 없는 곳으로 몸을 숨겨 다치지 않게 하는 것 외엔 관심이 없었다.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비로소 이성을 찾고 보니 이 모양이다.

지금 카일의 집으로 돌아갔다간 다시 미셸과 맞닥뜨리게 될 터였다. 데이빗은 발이 상할까 바닥을 살피고, 때로는 종종 뒤를 돌아보며 보도블록 위를 걸었다.

도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파인 부분을 아스팔트로 채운 뒤 기계들은 열과 압력으로 석유 덩어리를 도로에 편평하게 눌러 깔고 있었다. 밀도 높은 열기에 공기 중으로 흰 수증기가 안개처럼 자욱이 퍼졌다. 데이빗은 더운 김을 뿜어내는 거대한 중장비를 피해 길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고약한 냄새만 제외한다면, 뿌연 풍광이 계곡의 안개가 산줄기를 타고 흐르던 그날과 같지 않은가. 둥그런 자갈이 반짝이던 개천에 들어갔던 일을 데이빗은 생각해냈다. 등줄기는 뜨겁고, 무릎 아래는 깊은 산 속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물로 뼈가 시렸다. 수심이 급격히 깊어졌다면 그는 그대로 목숨을 버릴 수 있었다. 경사가 완만해 깊은 곳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겁을 집어먹었고, 도로 물에서 빠져나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 그때 눈앞의 깊은 산에서 자신을 쳐다보았던 들짐승이 사슴이었는지, 순록이었는지 그는 모른다. 사람이 없어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긴 생채기를 들여다보며 데이빗은 자신을 찢어놓은 사람을 생각했었다.

명치끝이 답답해졌다. 안개가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과거에 끌려 들어갈까 두려워 데이빗은 공사 중인 도로를 빨리 벗어났다.

그러다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

「아프게 안 할게」

어떤 기억은 아무 경고도 없이 떠올라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데이빗은 이마를 문질렀다. 미셸은 제정신이었던 걸까.

잠에 취해 의식도 없는 이를 안고 키스할 맘이 들었을까. 데이빗은 느낌 때문인지 어째 부어오른 것 같은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기억은 토막토막으로 떠올랐고, 선명하지도 않았다. 나머지 빈틈은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했다. 자신이 어떤 꼴이었을까 추측하다 보니 좀 우스운 기분이 든다. 대체 정신이 어떻게 되면 시체처럼 반응도 못했을 사람을 겁탈하는 괴상한 짓을 하는 걸까. ‘겁탈’이란 단어를 스스로 머릿속에 떠올린 뒤 데이빗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단어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하기엔 지나치게 고상한 느낌이었다. 어떤 단어를 대신 써야 할까. 별장에서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납치, 폭행, 강간, 실금, 구토, 실신……. 죽어가는 짐승처럼, 오물이 묻어 썩어가는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던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단어를 찾다 그는 포기했다.

별장에서야 미셸이 데이빗을 무력화시키려고 그런 짓을 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아스팔트 타는 연기가 자욱한 도시에 있었다. 몇 주째 내리지 않는 비에 애써 심어놓은 화단의 꽃이 시들어버리는 곳 말이다. 도시에 돌아온 미셸이 왜 산에서와 똑같은 짓을 한단 말인가. 데이빗은 이런저런 가능성을 타진해본다. 땀범벅으로 늘어져 있던 스스로의 모습 중 어떤 면이 그 잘난 남자의 바지를 벗게 했을까. 자신에게 미셸과 같은 남자의 이성을 훅 잃게 할 만한 매력이 있던가. 이곳은 별장도, 무인도도 아니고, 그가 눈짓 한 번만 한다면 어떤 이든 그에게 홀린 얼굴로 걸어올 곳인데?

좀 전 스치듯 바라본 엘리베이터의 거울 안엔 수염이 거슬거슬하게 자라난 헝클어진 머리칼의 혈색 나빠 보이는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근 스무 시간 잠만 잔 추레한 사내를 물고 빠느라 욕 봤을 정신 나간 남자를 데이빗은 비웃었다. 통쾌함도 개운함도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비틀리게 웃다 보니 가슴이 아리고 위만 아팠다. 미셸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생각을 하면 고된 치료를 하며 겨우 운신할 만큼 되돌려놓은 몸 상태가 당장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별장에서 미셸에게 시달린 며칠 만에 데이빗은 피를 토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남자는 데이빗의 정신 건강에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끼이이이-

“거기 비켜요!”

레미콘이 돌아가는 소음에 놀라 데이빗은 움칠거리며 거리에서 벗어났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걸음이 느려졌는데, 그 틈에 느릿하게 그를 뒤따르던 장비들이 어느새 근처까지 그를 따라잡은 것이다. 진땀이 바짝 났다. 성인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심장을 쿵쾅거리며 뛰게 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공원의 저쪽 농구 코트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이 느린 화면처럼 뿌옇고 희미하게 보였다. 각막에 맺히는 상 틈틈이 기억의 편린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아프게 안 할게. 아프게 안 할게. 아프게 안 할게. 아프게…….」

데이빗의 가슴과 목덜미에 달라붙었던 입술은 붉고 도톰했다. 어지간한 여자의 것보다 아름다웠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낡은 옷차림의 백인 남자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데이빗이 다가오자 내려놓은 검정 비닐 꾸러미를 꼭 끌어안았다. 어린아이나 입어야 할 화려하고 촌스러운 옷, 시대에 뒤떨어진 머리 모양, 무표정한 얼굴과 깜빡임 없는 눈. 침이 입가에 허옇게 말라붙은 정신 나간 남자는 공원 내 조각상인 양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데이빗은 카일의 집을 찾아갔을 당시 자신의 눈빛도 남자와 다를 바 없이 저렇게 공허했을 것임을 안다.

그는 별장을 벗어난 뒤의 기억이 분명치 않았다. 어떻게 살았던 걸까. 드문드문한 기억 속 자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트럭의 뒷좌석에서 웅크려 자고 있었다. 그러다 몸이 쑤셔 견디기 힘들면 자신의 예전 아파트에 숨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못 견딜 정도로 배가 고플 때면 수중에 남은 돈으로 가장 싼 가격의 질 나쁜 식사를 하고, 지하철역의 화장실에서 누군가 올까 봐 전전긍긍하며 뻣뻣해진 비누와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고 물에 적신 화장지로 몸을 닦았다. 병 때문인지 불결함 때문인지, 악취에 코가 먹먹해질 때면 정신도 덩달아 몽롱해졌다. 그는 자신의 바지가 벌어진 상처로 피에 젖어 있는 것도 몰랐다. 카일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시끄럽게 물어댈 때야 비로소 자신이 피 얼룩이 진 바지를 입고 다녔단 걸 깨달았으나 별다른 수치심은 없었다. 어느 한계선을 넘자 감정은 더는 중요한 문제가 못됐다. 몸을 뉘일 침대 하나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는 것도, 노숙자로 전락해 온몸에서 구린내가 난다는 것도 실상 별것이 아니었다.

도롱이 속 벌레처럼 몸을 말고 잠자고 깨어나 카일이 내미는 식사를 받아먹었다. 질 좋은 식사는 구수하고 달콤했다. 그날은 마침 긴 비가 그친 뒤 하늘이 맑게 갠 날이었다. 바람은 시원하고, 하늘은 푸르렀다. 자신이 미약하게 떠는 통에 의자가 끼익거리고 있단 걸 뒤늦게 알았다. 배가 부른 뒤에야 비로소 속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잘한 것 하나 없이 그저 자신이 가엾어 우는 못난 울음을 과연 닦아야 하는지, 참아야 하는지, 참는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참아야 하는지,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우는 데이빗 옆에서 카일은 기타를 연주했다. 그렇게 데이빗은 인간의 세계로 돌아왔다. 카일의 음식이 아니었다면 그는 무기질로 전락해 저곳의 남자처럼 거리 구석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셸의 머리칼이 허벅지 사이를 간질이던 감각도 기억났다. 데이빗은 자신의 하반신을 품고 놔주지 않는 남자를 떨어뜨리기 위해 머리칼에 손가락을 말았다. 남자의 입안은 뜨겁고 축축했다. 데이빗은 일평생 누구의 입안도 그런 용도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 자신이 해본 적은 있다. 목구멍을 억지로 열고 얼간이처럼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자신을 증오하는 이의 욕망을 받아냈다. 서투른 애무에 벌로 사타구니를 발로 짓눌렸다. 그 순간의 감촉과 굴욕감이 신기할 정도로 생생해 데이빗은 잠시 멈춰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숨이 이상스레 무겁다.

「아프게 안 할게. 아프게 안 할게. 아프게 안 할게. 아프게…….」

아버지의 옷이 분명해 보이는 낡은 웃옷을 걸치고, 갑작스레 키가 큰 탓에 짧아진 바지로 발목을 훌렁 드러낸 흑인 아이가 멍청히 서 있는 데이빗을 힐끔거리며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이의 왼쪽 눈가는 멍으로 새카맣다.

멍과 흉터……. 데이빗은 신음했다. 미셸은 흉터 가득한 데이빗의 등줄기와 허리의 오목한 부분에 소리가 날 만큼 진한 키스를 남겼다. 데이빗은 티셔츠로 자신의 몸을 문질렀다. 미셸은 데이빗의 앙상한 갈비뼈와 마른 복부를 문지르기도 했다. 우둘투둘한 피부를 혐오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백인 쓰레기라고 중얼거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제 와 무슨 심경의 변화로 담뱃재 냄새 밴 그 몸에 입술을 댈 용기를 냈을까.

미셸의 두 손이 데이빗의 허리를 쥐었다가, 밑으로 내려와 둔부를 쥐었던 감촉까지 기억해내고 데이빗은 눈을 감았다. 안 된다고, 싫다고 신음했던 스스로의 모습까지 이어 떠올리자 답답함으로 가슴이 죄어들었다.

왜 그랬을까. 왜 벌떡 일어나 미셸을 밀쳐내지 못했을까.

데이빗은 침대 위에 멍청히 누워 눈만 깜빡였을 뿐 상대를 막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약에 취해 이성이 흐려진 상태로 제 몸을 누르고 있는 미셸의 모습이 여느 날과 다름없는 악몽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일의 침실 안에 들어온 미셸은 평소와 어딘가 달랐다. 유채색의 꿈속엔 미셸의 체취가 있었다. 저건 진짜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몸이 벌벌 떨렸다. 타인의 몸이 깊은 곳을 가르고 파고들고, 근육이 찢길까 겁났다. 싫어. 아, 아파. 제발…… 하, 하지 마……제, 제발…… 싫어. 싫어…….

다리 사이에 닿은 미셸의 살덩이는 단단했다. 그가 거칠게 움직이는 동안 데이빗은 끅끅거리며 바짝 굳어 있었다. 상대의 숨이 쏟아져 자신의 숨과 섞였다. 불쾌함과 고통이 한계 수치 근처에서 오르락내리락한 속에서 데이빗은 시트를 긁으며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달라 빌었다. 산에서 토해냈던 애걸이 그대로 반복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제발요. 싫어. 아, 아파. 제발…….

……놔, 놔주면 뭐, 뭐든 하, 할게. 이……이러지 마. 하기 시, 싫어. 시, 싫어. 아, 안 돼. 아……안 돼! ……사, 살려주세요. 아, 안 할게……요. 사, 살려주세요.」

데이빗은 대로에 멍하니 섰다.

별장에 두고 온 자신의 일부가 때는 이때다 싶어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 데이빗의 귀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이, 입 다물어, 시…… 시끄러워……!”

데이빗은 머릿속 시끄러운 잡음을 지우기 위해 귀를 막았다. 소용없었다. 누군가 그를 비웃고 또 비웃었다. 각막 안에 상(象)이 가득 찼다. 산속에서의 기억이다. 땀에 전 몸, 얼굴을 문지를 때마다 묻어나는 마른 핏덩어리. 정액이 말라붙은 더러운 음모. 힘이 빠져 기괴하게 부들거리는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희고 붉은 타액. 데이빗은 공포와 치욕스러움에 짓눌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건 다 끝난 일이야. 데이빗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물로 얼굴을 적시고 어떻게든 고통을 줄여볼까 싶어 다리는 넓게 벌린 채 성기에 꿰뚫릴 때마다 허리를 비틀며 비굴하게 빌고 빌었던…….

“데이빗?”

미셸은 대로에 선 채로 굳은 데이빗에게 다가와 그를 불렀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을 하고 데이빗이 미셸을 돌아봤다.

미셸은 멈칫거렸다.

자신을 돌아보는 데이빗의 얼굴이 유령을 본 것처럼 일그러져 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미셸은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공포로 그늘졌던 푸른 눈이 바닥을 향했다. 말라붙은 옆얼굴이 드러나며 콧마루 중앙에 살짝 융기된 부분이 미셸의 시선에 닿았다. 부러져 금이 갔던 부분엔 손가락 반 마디 정도의 크기로, 흡사 선탠이 잘못된 것처럼 옅은 갈색 물이 들어 있었다.

“데이빗-?”

사람을 보면 아는 척을 해야지, 그저 놀란 표정만 짓고 고개를 숙여버리는 법이 어디 있나. 미셸은 눈썹을 치켜뜨며 재차 그를 불렀다. 데이빗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봤다. 한참 뒤 데이빗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번엔 미셸이 도리어 머쓱해졌다.

“조금 전 일은…….”

미셸은 자신이 따라온 이유를 밝히다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데이빗이 맨발인 것을 발견했다.

“맙소사, 구두는 어디다 두고 이 꼴이야.”

미셸은 탄식했다. 데이빗이 신발도 못 신고 도망친 이유는 물을 것도 없이 잘 안다. 카일이 나빴다. 미셸이 데이빗을 덮친 일이야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데이빗의 앞에서 폭로할 건 뭔가. 먼지투성이의 맨발에 미셸은 혀를 찼다. 악몽 때문인지, 아니면 미셸과의 섹스 때문인지 데이빗의 머리칼은 평소보다 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거기다 신발까지 벗고 있으니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정신 나간 사람이다. 안색이 나쁘고, 두려움에 눈빛이 흔들려 더 그래 보였다. 미셸은 데이빗 베커란 남자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자신 때문인 것을 안다.

“내 구두라도 일단 신어.”

“……뭐?”

데이빗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빨갛게 핏줄이 선 눈동자가 불안스레 흔들린다. 미셸은 잔뜩 겁먹어 뻣뻣이 굳은 상태인 상대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가볍게 말을 뱉었다.

“난 강도를 당한 걸로 보이기라도 하지. 당신은 그 차림에 맨발이니까 딱 정신병자야.”

미셸은 데이빗에게 억지로 구두를 신겼다. 평소라면 즉시 밀쳐낼 남자가 미셸이 다가가는데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종아리를 잡고 들어 올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데이빗이 퍼뜩 놀라 미셸을 밀어냈다. 예상 못한 발길질에 미셸은 벌렁 뒤로 넘어졌다. 미셸은 자신이 매우 잘생겼단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잘생긴 사람일수록 망가질 때 더 웃기게 마련이란 것도 안다. 동성의 남자에게 집적대다 대로에서 넘어져 뒹구는 일이란 건 상황만으로도 웃기는 일이었다. 이건 군에 있을 때 민가에서 탈출한 발정 난 소에 받쳤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횡액이다. 쪽팔려 얼굴을 들 수가 없지만, 이럴 때일수록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 미셸은 미간을 찌푸리곤, 먼지에 엉킨 금발을 최대한 우아하게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좋은 말로 할 때 신으라면 신어.”

“……내, 내가 왜…….”

미셸은 일부러 먼지를 툭툭, 세게 털며 일어섰다. 데이빗이 약간 주눅이 든 목소리로 물었다. 다크 서클이 지독한 남자가 커다란 푸른 눈을 치뜨고,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취했다. 남자의 상처를 알기에 미셸은 더는 그에게 다가가지 말아야 옳았다. 그러나 화를 내고 뻗대는 데이빗의 표정과 몸짓이 애니메이션 속 심통 난 고양이 캐릭터처럼 귀여워서 미셸은 도통 심각해지기 어려웠다.

“구두 사이즈가 같잖아.”

“내, 내 사, 사이즈……가 다, 당신이랑 어, 어떻게 같아.”

“신고 확인해봐.”

데이빗의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퍼졌다. 왜 자신이 남자의 신발을 신어야 하나. 미셸과 자신의 발 사이즈가 같을 리 없다. 아까 카일의 집에서 그토록 무례한 짓을 저질러놓고 미셸이 왜 갑자기 신발 타령이나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혼란에 빠진 그에게 미셸은 일단 신발부터 신으라며 마구 들이밀었다. 데이빗은 엉겁결에 신발을 신었다. 날렵한 곡선을 그리는 부드러운 가죽 안으로 발이 쑥 들어갔다. 미셸은 데이빗에게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존재이건만, 그의 신발은 놀랍게도 매우 편안했다.

데이빗은 신발의 매끈한 촉감에 자신이 그렸던 동화 하나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미셸에게 반했던 시기에 그렸던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은 금빛 머리칼과 황금빛 도는 녹색 눈동자를 지닌 소년과 그의 구두였다. 동화 속 구두는 소년을 싣고 다니는 작은 배로, 비행기로 변해 그를 싣고 다녔다. 그때는 참 많이도 그리고 싶고, 또 쓰고 싶었다. 모든 동화와 이야기 속 주인공은 미셸이었고, 가끔은 그를 지켜보는 검은 머리칼의 존재가 등장하기도 했다. 토해내고 토해내도 꺼지지 않는 불덩어리가 백지를 사르는 힘을 내어주며 끝없이 넘실거렸다. 그 불로 많은 걸 그렸다.

지금은 머릿속을 벽돌로 빈틈 하나 없이 가득 쌓아놓은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별장에서 있었던 일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애쓰고 애써 그나마 무언가를 그리려고 하면 굳어버린 검지가 그를 방해했다.

데이빗은 구두를 신고 한 발을 들어보았다. 뒤꿈치와 발가락 쪽이 헐렁했다. 미셸이 거짓말을 했다.

“……아, 안 마, 맞아.”

“응, 클 줄 알았지.”

미셸이 수상한 웃음을 지었다.

“키야 비슷하지만, 거긴 좀 더 작았으니까 구두도…….”

말꼬리를 흐려 데이빗은 기분이 더 나빠졌다. 데이빗은 구두를 벗어버리려 했다. 흘낏 뒤를 돌아보곤 미셸은 데이빗이 구두를 벗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미셸, 어디 가는 거야? 데이빗은 미셸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았다. 줄리아란 이름과 마찬가지로 미셸이란 이름은 그에게 금기에 가깝다.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너무도 이질적으로 여겨졌다.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도,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이대로 뒤돌아서 다시 도망치려다 데이빗은 눈앞 광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앞서 걷던 미셸이 구두에 이어 양말까지 벗어버린다. 그나마 덜 꼴사나우라고 한 건데 전혀 도움이 안 됐다. 값비싼 슈트를 입은 맨발의 남자는 어떻게 해도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이거, 엄청 웃기는 짓이군.”

미셸이 인상 쓴 채 손으로 먼지 묻은 발을 탁탁 털었다. 대로에서 발을 터는 모양새 빠지는 짓도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하니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데이빗은 신기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다 이내 걸음을 빨리했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자신이 신고 있는 구두는 미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벗어두고 가버리고 싶지만, 이 흉흉한 동네에 고급 구두를 덩그러니 놓고 갔다간 미셸은 영영 그의 신발을 잃을 터였다. 납치로 족하다. 더는 미셸에겐 어떤 폐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치미는 화를 누르며 데이빗은 그를 따라갔다.

미셸은 번개처럼 빨랐다. 금방 코너를 돌아 사라지더니 가까운 상점에 들어가 스니커즈를 사고 있었다. ‘스니커즈라니…….’ 데이빗은 신음했다. 정장에 스니커즈란 참혹한 조합이 두려웠다. 제발 구두를 신으라며 말리기도 전에 미셸은 이미 회색과 초록색이 섞인 매우 명랑해 보이는 스니커즈를 신었다. 데이빗은 가게 입구에 선 채 이도 저도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나쁘지 않군.”

미셸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싱긋 웃다가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데이빗은 거울에 미셸을 쳐다보는 자신이 비치는 걸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방금 나쁘지 않다고 여겼는데, 상대에게 그 속을 들킨 느낌이다.

“이걸로, 한 사이즈 작게.”

미셸이 산 운동화를 데이빗에게 내밀었다.

데이빗은 눈앞에 들이밀어진 운동화에 당황했다. 엉겁결에 받을 뻔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스니커즈를 밀어냈다. 미셸이 확 인상을 썼다.

“얼른 신어. 당신, 그 꼴로 돌아가면 행려병자나 정신병자로 오해받기 딱 좋아.”

“……그, 그게 다, 다 당신과 무, 무슨 상관인데.”

“난 당신 옆에 붙어 있을 거란 말이야. 빨리 신어.”

미셸은 강압적으로 굴었다. 데이빗은 상점에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신발을 신었다. 남 말 안 드는 남자와 티격태격해대느니 나중에 미셸에게 돌려보내는 게 낫겠다고 판단 내렸다.

상점의 계단을 뛰듯 내려간 미셸이 계단 위 데이빗을 올려다보았다. 웃음기 지운 미셸의 얼굴은 필요 없는 선이라곤 일절 없이 지독히도 단정했다. 데이빗은 상대의 흔하지 않은 올리브 그린의 눈동자에 난처한 기색이 어리는 걸 보았다. ‘올 것이 왔구나.’ 데이빗은 꿀꺽 침을 삼켰다. 미셸은 데이빗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겨우 더께가 덮일락 말락 한 데이빗의 상처를 들쑤셔놓을 것이다.

한참 뜸을 들이던 미셸이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배고프지 않아? 난 점심도 못 먹었는데, 당신도 계속 굶었지? 난 저혈당이라서 식사를 제때 안 하면 눈앞이 까매지고, 쓰러진단 말이야. 거기다 낯은 또 지독히도 가려서 혼자 식사를 할 줄 몰라. 식당에 같이 좀 가줄 수 있어?”

데이빗은 눈을 깜빡였다. 미셸이 저혈당일리 없다. 그러기에 남자는 혈색이 너무 좋다. 진짜라 해도 자신이 같이 갈 이유는 없다. 남자 앞에서 그가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 미셸은 생각하는 걸까. 내가 왜, 라고 답할 찰나 거의 만 하루를 굶은 데이빗의 위가 고통스럽게 꾸르륵거렸다. 듣지 못했길 바라는 게 염치없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미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데이빗을 쳐다봤다.

“당신도 규칙적으로 식사해야 하잖아.”

미셸은 머쓱해하며 자신의 코를 두들겼다. 무슨 소린가 못 알아들어 데이빗은 멍하니 상대를 쳐다보았다.

“관 말이야. 코로 넣어서 위까지 찔러 넣었잖아. 아직도 완치된 건 아닐 것 아냐.”

그 이야기였구나. 데이빗은 무안함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쓸어내리는 척 코를 가렸다.

위에 생겼던 병이었지만, 후유증은 식도와 위 전체에 남아서 종양을 제거한 뒤에도 데이빗은 식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관을 꼽아 위액이 역류하는 걸 조절해야 했다. 그 기괴한 꼴을 미셸에게 들켰다. 미셸이 억지 쓰듯 마스크를 벗기지만 않았어도 들키지 않았을 것을. 갈비뼈 사이, 내장 안으로 관을 넣기 위해 뚫었다 박음쇠로 박아놓은 구멍이 욱신거렸다. 살과 살이 달라붙어 틈은 닫힌 지 오래인데, 바람이 여전히 그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기분이다. 눈앞이 아득하고 온몸이 나른하게 힘이 빠졌다. 바닥을 딛고 선 두 다리가 낡아 들뜬 복도를 밟고 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데이빗은 애써 허리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몸은 언제쯤 더는 아프지 않게 될까. 자신은 언제쯤 미셸 클뤼젤이란 사람에게도 가시를 세우지 않고,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당신과 식사하면서 나누고 싶은 얘기도 있고.”

미셸이 나직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거절하는 것도 피곤해 데이빗은 말없이 그를 뒤따라갔다.

* * *

미셸은 제멋대로 메뉴를 골랐다.

“환자가 먹을 만한 영양가 높고, 소화 잘되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이 뭐죠?”

미셸은 웨이터가 골라주는 메뉴를 고민 없이 모두 시켰다. 토마토 쌀 수프와 샐러드, 생선찜 요리 외에도 두어 가지 요리가 더 나왔다.

미셸이 어깨를 으쓱했다.

“골라 먹고 남기면 되잖아.”

데이빗은 미셸을 말릴 만큼 의지가 강하지 못했다. 덕분에 매끼 배 터지게 먹는 죄 많은 북반구 주민 일인이 되었다. 데이빗은 아득한 기분으로 눈앞 식사를 바라보다 잠자코 식사했다. 미셸에 대한 감정만으로 귀한 식사를 버릴 만큼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데이빗은 수술 후 체질이 많이 변했다. 식은땀에 뒤덮여 운신도 못하고 쓰러질 정도의 격한 빈혈과 저혈당 쇼크를 생전 처음 겪었다. 수술 후 일부분을 잃은 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서였다. 입안과 목구멍이 헐어 식사 자체가 괴로웠지만, 철분 부족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선 자주자주 꼬박꼬박 먹어줘야 했다. 의사가 얘기했던 고단백 음식을 찾다 데이빗은 생선찜 요리를 발견했다.

“생선을 잘 먹는군.”

“좋…….”

데이빗은 생선을 좋아한다는 말을 삼켰다.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남자에게 알려서 무엇하겠나 싶었다.

“생선을 좋아하는군. 구두는 나보다 한 치수 작은 걸 신고.”

미셸이 알아낸 사실에 기분 좋아하며 흥얼거렸다. 데이빗은 태평한 남자의 태도에 불현듯 벌컥 신경질이 났다.

“그렇게 화를 내니까 좀 산 사람 같네.”

푸른 기가 짙어진 눈빛을 가리키며 미셸이 웃었다. 미소는 잘생긴 남자에게 퍽 어울렸다. 미셸이 자기 몫으로 나온 식사에 웃는지, 자신을 보며 웃는지 데이빗은 영 헛갈렸다.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내가 무례하고 막무가내라 화났어?”

미셸은 히죽거리며 물었다. 데이빗은 입매를 굳히고 묵묵히 식사만 했다. 먹으려는 의지는 돋보이는데 영 속도가 안 났다. 미셸은 측은한 마음 반, 재미난 마음 반으로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식사가 다 끝나기 전에 카일의 집에서 데이빗을 덮쳤던 일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셸은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욕정에 눈이 멀었다고 잠든 사람을 덮친 건 너무했다. 쪽팔리고 미안해서 얼굴이 빨개지고 목이 메었다. 미셸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끌고 있었을까. 데이빗이 툭 말을 던졌다.

“내, 내가 자, 잠꼬대 해, 해서 다, 당신이 그, 그렇게 군 것 아, 알아.”

“?”

“기, 기억났어. 아, 아깐 자, 잠이 덜 깨서 모, 몰랐지만.”

데이빗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미셸은 눈알을 굴렸다. 데이빗은 마리화나에 취해 부렸던 추태를 기억해냈다고 말한다. 미셸은 이마를 문질렀다. 자신의 잠꼬대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인정해준 고마운 남자에게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이라고 말하고 뒤돌아서야 하나. 격분해 승냥이처럼 달려들 줄 알았던 상대가 온화하게 나오는데 어째 상대하기가 더 힘들다.

미셸은 상대를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이빗의 티셔츠 사이로 불거진 쇄골이 보였다. 미셸의 허리를 타고 올랐던 몸은 비슷한 키의 남자의 무게라고 보기엔 너무 가벼웠다. 미셸은 호리호리한 상대의 몸을 힐끔거렸다.

당신, 몸무게가 많이 줄었지?

상황과 상관없이 대뜸 몸무게를 묻고 싶어 입이 달싹거렸다. 미셸은 상대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그는 데이빗에게 끌렸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다.

“어디까지 기억났는지 모르겠는데, 그건 다 내가 잘못한 거야. 당신은 제정신도 아니었는데, 그러는 게 아니었어.”

“……나, 난 괘, 괜찮아. 그, 그러니까 벼, 변명할 필요도 없고, 나, 나한테 자, 잘해줄 필요도 없어. 다, 당신은 시, 신경 쓰지 아, 않아도 돼. 그, 그건 그냥 사, 사고였어.”

웨이터가 접시 하나를 더 날라 왔다. 데이빗은 입을 다물었다가 웨이터가 멀어진 뒤에야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셸이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게 아무렇지 않아? 당신은 나랑 있었던 일이 단순한 사고라고 넘어가 져?”

데이빗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골랐지만, 그는 결국 더 형편없이 더듬었다.

“우, 우리가, 하, 한두 번 자, 잔……. 하, 한 것도 아니고, 하, 한 번 더, 더, 했다고 문, 문제 될 게 뭐, 뭐가 이, 이, 있겠어.”

데이빗의 시선은 탁자에 달라붙었다. 귀가 붉다. 미셸은 혀를 찼다.

“말 더듬어서 거짓말이 티가 안 난다는 말은 취소할게. 당신은 거짓말할 때 더 더듬는군.”

데이빗은 꾹 입을 다물었다. 얇은 입술이 희게 질렸다. 미셸은 그 입술을 바라보다 기분이 야릇해져 애써 시선을 멀리 물렸다.

“내가 데이빗 당신 때문에 흥분해서 정신 나간 짓을 했어. 미안해. 내가 백 번 미안해. 하지만 이건 알아줘. 내가 아까 그런 실수를 한 건 마음이 끌려서, 당신이 눈앞에 그런 모습으로 있으니까 잠깐 이성을 잃어서 그랬던 거지. 당신을 놀리거나 수치심을 주려고 한 짓은 아냐.”

데이빗은 몸을 움츠렸다. 미셸의 말은 진심 같았다. 미셸이 수치심을 주려고 맘먹었다면 그 정도 선에서 일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별장에서는 달랐다. 미셸은 데이빗에게 양질의 수치심과 굴욕감을 주었다. 데이빗이 미셸이 타고난 사디스트일 거라 여길 정도로 미셸은 효율적으로 움직여 만 하루 만에 데이빗을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반 벌거벗은 채로 엉덩이를 들고 개처럼 기어 먹을 걸 구하러 가게 하고, 한때 좋아했던 남자 앞에서 스스로 직장 안을 쑤셔 안이 비었단 걸 증명하게 했다.

가장 수치스러웠던 일은 바지를 적셨던 경험이다. 옷을 버린 뒤 여분의 바지가 없어 데이빗은 젖은 셔츠를 끌어내려 사타구니를 감추는 식으로 자신의 몸을 가려야 했다. 인질인 미셸은 납치범인 데이빗의 하반신을 발가벗겼다. 속옷과 바지를 입지 않았을 뿐인데, 데이빗은 그것만으로도 전의를 잃었다. 나이가 든 만큼 든 성인 남자가 오줌 싼 어린애처럼 벌거벗고, 성기를 가리기 위해 다리를 오므린 채 미셸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손바닥을 다리 사이 깊숙이 집어넣어 마주 비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참혹하고 부끄럽다.

마음이 끌렸다고? 데이빗은 자신이 뭘 잘못들은 줄 알았다. 미셸은 데이빗의 밑바닥을 봤다. 그토록 우스꽝스럽고 추한 꼬락서니를 봤으면 역겨움을 느끼는 게 정상이다. 자신을 좀 더 짓뭉개고 싶은 걸까. 데이빗은 허벅지를 쥐고, 구겨진 파자마에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을 닦았다.

자신에게 뭘 더 바라는 걸까. 욕을 퍼붓고, 팔을 비틀어 누르며 무릎으로 다리를 갈라 쇠꼬챙이처럼 날카로운 살덩어리로 몸을 갈라놓고 싶은 걸까. 데이빗은 더는 식욕이 일지 않아 포크를 내려놓았다.

미셸의 사과 후, 데이빗은 한참 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다 미셸은 데이빗이 옆자리 사람을 잊어버린 채 자기 생각에 빠졌단 걸 눈치챘다. 음식이 식고 있었다. 데이빗은 미동도 않고, 의자 옆에 누가 버리고 간 신문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는 미셸을 포함한 주변을 전혀 보고 있지 않았다.

“뭐 재미난 기사 있어?”

미셸은 신문을 줍는 척 몸을 숙이며 주의를 끌었다. 미셸의 몸이 가까워지자 데이빗은 크게 몸을 움츠렸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동작에 데이빗과 미셸 둘 다 놀랐다. 미셸은 남몰래 한숨 쉬었다. 데이빗은 창백해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고, 미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신문을 탁자 위에 펼쳤다.

“노년의 성(性), 재미난 기사네.”

하필 기사도 이따위 거냐. 미셸은 이를 갈았다. 데이빗은 멀리 빵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비둘기만 노려본다. 미셸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기사를 읽었다.

“노인들이 겪는 성 문제 중 동성애 문제도 있다는데? 나이가 든 후에야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곤 외로워서 그런 건지 원래 성향이 그런 건지 고민하는 사람이 꽤 많대.”

하필 동성애 이야기를 꺼내서 어쩌자는 건가. 미셸은 멍청한 자신을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게이인 데이빗을 심리적으로 압박해서 뭘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미셸은 이야기를 수습하려고 대충 아무 말이나 뱉어댔다.

“원래 성향이 그랬던 거겠지? 성향이란 게 외롭다고 그렇게 휙휙 바뀌나.”

“……그럴…….”

“응?”

“외, 외로우면 그, 그럴 수도 있지.”

데이빗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평균 성인 남자의 목소리보다 낮고 작았지만, 이 순간에는 어째서인지 똑똑히 잘 들렸다.

“당신도…….”

미셸은 뚫어져라 데이빗을 응시했다. 데이빗은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아냐, 못 들은 걸로 해.”

데이빗의 얼굴에 날이 서는 걸 보고 미셸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데이빗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은 왜 미셸을 납치했던가.

처음엔 돈 때문이었다고 거짓말했고, 그다음에는 죽기 전 한 번이라도 온기다운 온기를 맛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외로워서.’ 그것도 답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서, 미쳐서 그런 짓을 했다고 말하면 미셸은 납득할까.

“별장에서 그렇게 헤어진 뒤에 어떻게 지냈어?”

“나, 나?”

“그래, 당신.”

데이빗은 눈을 깜빡였다. 미셸은 자신에게 관심이 생겼다던 말을 증명하려 이런저런 쓸데없는 걸 물을 모양인가 보다.

“그냥, 사, 살았어.”

“무슨 대답이 그래.”

“…….”

“아프다고 했잖아. 택시 회사에 알아보니 그만뒀다고 하고, 연락 두절에, 꼼짝없이 당신이 죽어버린 건 아닌가 싶었어.”

“…….”

“수술은 했나?”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는 받고?”

“그래. 나, 낫고 이, 있어.”

“잘됐군. 많이 말라서 혹 병이 위중한 건 아닌가 싶었지.”

“…….”

미셸이 잠시 말을 멈췄다. 머뭇거리다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데이빗은 목이 죄어드는 감촉에 침을 삼켰다. 미셸이 구겨진 수첩 종이를 펼친다. 데이빗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 종이와 그와 관련된 것들을 향해서는 시선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땐 우리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지. 특히 난 너무 심했어. 화를 그렇게 풀어서는 안 됐는데.”

종이가 완전히 펼쳐졌다. 「납치 - 강간 = 0」 데이빗은 아연한 기분으로 자신이 쓴 글씨를 쳐다보았다. 그때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강간이란 단어를 쉽사리 휘갈겨 썼다. 지금은 어렵다. 입에 담으라고 해도 못한다.

미셸은 데이빗이 남긴 낙서를 손봤다. 그는 펜으로 점을 두 개 찍고 숫자를 고쳤다.

「납치 ÷ 강간 = 1」

“새롭게 시작할 가능성은 없을까.”

데이빗은 해쓱해진 얼굴로 미셸을 바라봤다. 그게 데이빗의 답이었다. 미셸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말을 이었다.

“물론 어려울 건 알아. 당신은 날 못 믿지. 강간 플레이를 하려거든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말한 건 내가 여전히 당신을 그런 대상으로만 보고 있을까 봐 한 소리지? 아냐. 그렇지 않아.”

“무, 무슨 말을 하, 하는 거야?”

“난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어. 진심이야. 당신이 더는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해. 당신이 날 보면서 겁먹는 거 싫어.”

“…….”

“날 좋아했잖아. 제발 딱 한 번만 더 날 좋아해주면 안 돼?”

미셸은 미간을 좁히고 데이빗에게 애원했다. 녹색 눈동자가 열망으로 일렁였다. 그는 입을 슬쩍 벌리고 초조함에 입술을 핥았다. 데이빗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목울대가 울렁이고, 불안전한 호흡이 흘러나왔다. 촉촉한 눈매가 열로 붉다. 거친 심장 박동 소리가 데이빗에게까지 들려왔다.

데이빗은 당황했다. 저건 마치 누군가에게 반한 사람의 얼굴 같다. 매번 거울을 바라보며 마주했던 스스로의 얼굴과 닮았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다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제로로 끝난 관계가 다시 일이 될 수 있단 건 동화 속에나 가능한 일이다. 미셸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별장에선 둘 다 미쳐 있었고 둘 다 잘못을 했다. 데이빗이 먼저 잘못을 했고, 그것을 미셸이 앙갚음했다고 해서 제로가 되는 게 아님은 실은 데이빗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1’이 될 수는 없었다.

그를 쓰레기로 취급했던 남자가 이제 와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그가 속없이 기쁘게 웃으며 다리를 벌릴 수는 없었다. 그는 한 푼 가진 것 없었고, 몸은 병들었고, 갈 곳 없는 신세이지만 감정에 있어서만큼은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그 정도로 넋 빠진 인간으로 보이나. 미셸에게 묻고 싶었다.

“왜, 왜, 아닌데, 다, 당신이, 나, 나한테 과, 관심이 생, 생길 이유가, 그, 그, 그 짓이, 마, 맘에 드, 들어서, 쉬, 쉽게 무, 뭉갤 수 이, 있는 사, 사람이 나, 나라서 그, 그런 게 아님 뭐, 뭔데. 번지수 잘못 찾았어. 봐, 봤다시피, 나, 난 잘, 잘 못해. 다, 당신이 추, 충분히 즐기고 시, 싶으면, 좀 더 느, 능숙한 사람을 찾아. 시, 시간 낭비 말고.”

미셸이 얼굴을 굳혔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 정도의 사람에게 거절당한 분풀이로 미셸이 컵의 물을 얼굴에 붓고 빈 잔을 던지고 떠난다고 해도 괜찮다. 어깨에 힘을 단단히 줬다.

“그래, 내가 시간 낭비를 할 각오가 되어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것이 내게 충분히 즐겁고, 당신 옆에서 계속 시간 낭비를 하는 게 내게 가장 행복한 일이어서, 그래서 계속 그렇게 하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당신을 계속 만나러 와도 된단 말이야?”

“…….”

싫다. 미셸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데이빗은 부담스러웠다. 그와 몸이 닿을 때면 두려움에 오금이 저렸다. 데이빗은 심장이 귀가 아플 정도로 크게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 안 바빠? 벼, 별장에, 에선 나, 나 때무, 문에 시, 시간 낭비를 한다고 화, 화를 내, 냈잖아. 회사는, 상속은?”

“그건 당신보다 순위가 낮아.”

“왜, 왜 이, 이래. 정신 나, 나갔어? 다, 당신 여자치, 친구도 있잖아. 주, 줄리아. 주, 줄리아. 그, 그 여잔?”

“헤어졌어. 당신은 이상하게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 같아.”

뚝, 투덜거리는 미셸의 태도에 무언가 데이빗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목소리가 꺾어져 나왔다.

“내, 내가 그, 그 여, 여자 이, 이름을 왜, 왜 기, 기억하는데. 내, 내가…… 그, 그 지, 짓을 다, 당, 다, 당한 게, 그, 그……그 여자를 마, 말해서 그, 그런 건데……!”

눈앞이 새빨개졌다.

저리 쉽게 헤어질 거면서 자신을 쓰레기 구기듯 짓눌러 부쉈던가. 미셸은 줄리아를 더는 사랑하지 않았다. 허나 데이빗은 여전히 줄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세상의 모든 이를 증오했다. 자신이 왜 미셸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불현듯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데이빗은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나뒹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도로 들어 집어넣으려는데 몸이 흔들려 도통 제대로 되지 않았다. 미셸이 다가와 쓰러지려고 하는 데이빗의 몸을 잡고 부축했다. 데이빗은 그를 온몸의 힘을 다해 밀쳐냈다. 힘을 준 검지가 부러질 듯 아팠다.

그 서슬에 옆자리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이가 빽 하고 비명과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아이를 달래자 아이는 안도하며 작게 칭얼거렸다. 울음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정신이 없다. 데이빗은 천식환자처럼 헐떡이며 입안에 고인 말을 마구 뱉었다.

“저, 저걸 봐, 저, 저 아이는 우, 울잖아. 바, 조금 전 우……울음과 지금 우, 울음이 다, 다르잖아! 다, 당신은 모, 모르지. 내, 내, 내가, 우, 우는 걸, 아, 알아듣지 못, 못해. 당신은 내, 내가 두, 두려워서…… 벼, 변명도 못, 못한 것도, 모, 몰라서, 내, 내가 왜, 왜 우, 우는 지 모, 몰라서 내, 소, 손…….”

데이빗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미셸에게 보이다 불구인 자신의 모습에 본인이 더 신기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이 꺾였던 기억이 온몸에 쏟아졌다. 누를 틈도 없이 눈물이 솟았다. 사람들이 그런 그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자신은 참 우습기도 하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 일행을 밀치고, 거친 목소리로 항의하다 이내 운다. 히스테릭한 여자도 이러진 않겠다. 무엇하러 자신의 상처를 미셸에게 광고하며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고 있을까. 그는 몸을 물려 식당의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잘 보지도 않고 앞만 향하다 데이빗은 차에 치일 뻔했다.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에 잠시 몸이 굳었다가 도로 앞을 향했다. 자신을 잡는 누군가의 손을 밀치고 밀치다 여의치 않아 뛰었다. 예전 생각만 하고 속도를 냈다. 허약해진 몸은 생각만큼 잘 움직이지 않아 무릎이 꺾였다. 정신이 몸을 웃도는 불협화음 탓에 데이빗은 도로의 움푹 팬 작은 구멍에 균형을 잃고 미끄러졌다. 미셸이 다가와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쥐어오는 손안의 열기가 뜨거웠다.

“이, 이거 놔!! 내 모, 몸에 소, 손대지 마!”

데이빗은 주먹을 움켜쥐고 자신의 몸에 닿은 남자의 팔을 세차게 쳐냈다가 도로 잡혔다. 왜 이다지도 떨쳐내기 쉽지 않을까. 자신은 왜 이리 약할까. 진저리가 났다. 미셸과 그와 관련된 기억이 지지리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미셸을 떨쳐내려 버둥댔다.

“잠깐만! 진정 좀 해!”

미셸은 사납게 구는 상대의 두 팔을 어렵사리 잡아냈다. 키와 체격이 엇비슷한 남자가 심하게 저항하니 붙들기가 쉽지 않다.

미셸은 진땀을 뺀 뒤에야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푹 수그린 채 몸을 뒤로만 빼려는 고집쟁이 남자를 근처 벤치로 데려가 앉힐 수 있었다.

“당신, 무슨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네…….”

미셸이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대답 없이 데이빗은 눈을 감고 숨만 골랐다. 전속력으로 뛰고, 그 뒤에 온몸으로 버둥거렸던 터라 숨이 딸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밀려드는 어지러움에 눈을 오래 감지 못하고 도로 떴다. 미셸이 바로 옆에 앉아 데이빗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줄은 몰랐어. 당신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야.”

“…….”

데이빗은 미셸이 더 신기했다. 자신을 신기해하고, 그걸 재밌어하는 투로 말하며 웃는 남자가. 자신은 좀 전 자신의 손가락이 부러졌던 일에 대한 울분을 쏟아냈다. 하지만 미셸에겐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나 보다. 그 일을 잊고 딴 얘길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나 그래도 어쨌건 그 화제에 대해 더 얘기하진 않아도 됐다.

그렇다면 다른 화제는 어떤가. 이 역시 이어갈 맘이 없다. 보기보다 빨리 달린다고? 데이빗은 학창 시절, 구기 운동은 죽어라 못해도 달리기 하나만은 잘했던 괴상한 아이였다. 그런 얘길 해주면 남자는 만족할까. 운동치였던 자신이 기가 막힌 기록을 냈을 때 아이들과 체육 교사 모두가 놀랐던 일화를 알려주면 웃으며 좋아할까? 그런 얘기들로 미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접근한 상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상대가 자신에게 맞는 상대란 느낌이 오면 그와 관계를 갖고, 마음을 교류한다. 그런 평범하고 긍정적인 사귐이란 것이 그들에게 가능한가? 가당찮다. 웃으면서 화기애애하게 농담 따먹기 식의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애정을 쌓아가는 둘의 모습이 데이빗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데이빗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셸은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마른 남자가 힘없이 걸어가는 폼이 종이 인형이 걸어가는 것 같아 위태롭다.

“어디 가?”

“…….”

“이봐, 어디 가냐니까?”

“……집.”

“어디?”

당신은 집이 없잖아. 미셸이 묻는다. 데이빗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이 옳다. 데이빗은 집이 없다.

자신이 어렵사리 모은 계약금을 머피에게 주고 집을 정리한 건 미셸의 탓이 아니다. 그냥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미셸의 일이 함께 있었을 뿐인데, 시간의 인접성 때문에 뭉뚱그려져 마냥 모든 일이 미셸 때문인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카일네로 돌아가는 거야? 꼭 거기밖에 갈 데가 없나. 당신한테 마리화나를 먹이는 룸메이트잖아.”

미셸은 불만스레 툴툴거렸다. 약에 취해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던 데이빗 덕에 득을 본 건 미셸이었다. 그래놓고 미셸은 카일이라는 뽕쟁이 기타리스트가 데이빗을 노릴까봐 의심했다. 카일은 데이빗이 매일 악몽을 꾼다는 걸 알았다. 그가 잠든 데이빗을 매일 침대 맡에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찝찝했다. 그러다 미셸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집엔 침대가 하나밖에 없잖아!”

매일 카일이란 놈과 같이 잤단 말인가. 미셸은 경악했다. 데이빗이 미셸을 어이없단 얼굴로 노려봤다.

“키, 킹 사이즈야. 나, 남자 두, 둘이 치, 침대를 나눠 쓰, 쓰는 게 어디가, 어, 어때서.”

“당신이랑 나도 그 사달이 난 게 침대를 나눠 써서 그런 거 아냐.”

“부처 눈엔 부처만 보, 보인다는데, 다, 당신은 늘, 그, 그딴 식으로 사, 사람을 보, 보나. 카, 카일은, 좋은 치, 친구야. 다, 당신보다 배, 백배는 나아.”

“그 훌륭한 친구 분께서 당신 트럭이 곧 자기 게 된다고 좋아하더군. 트럭은 왜 줬어? 나한텐 기어코 받아갔잖아.”

듣자 듣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다. 데이빗은 발끈했다.

“치, 친한 친구한테 서, 선물하는 게 뭐, 뭐가 나빠. 것도 내, 시, 시신을 치웠을지, 지도 모, 모를 치, 친군데.”

미셸은 카일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미셸이 보기에는 카일 역시 데이빗과 다를 바 없는 하찮은 사람처럼 보일 테지만, 데이빗에게 카일은 매우 소중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데이빗은 카일이 편했다. 카일 자신이 어지간한 경험은 다 해봐서 그런지 그는 데이빗의 몸에 남은 학대의 흔적과 데이빗이 지닌 정서적 불안정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매튜는 가정이 있었기에 데이빗을 그의 집으로 데려가지 못했다. 대신 그는 카일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데이빗은 용기를 내 그를 찾아가 잠시만 머무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데이빗의 몸 상태가 가장 좋지 못했던 때라 송장을 치울지도 모를 상황인데, 카일은 ‘그럼 무슨 일이 있음 네 트럭은 내 거다.’란 한마디만 하고 그에게 선선히 방을 빌려주었다.

미셸이 물끄러미 데이빗을 응시했다.

“당신은 자기가 정말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 그래서 날 납치할 수 있었던 건가. 어차피 죽을 거니까?”

미셸이 과오를 언급한다. 데이빗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우린 살아남았어.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엔 아직 풀어야 할 일이 남아있지. 당신은 내게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어.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어.”

“……사, 사과하면 돼?!”

미셸은 데이빗이 썼던 낙서에 반박할 참이었다. 모든 게 영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데이빗은 이미 미셸의 마음속에 들어와버렸다. 그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을 할 참이었다. 데이빗이 엉뚱하게 반응했다.

“사과?”

“그, 그땐 내가…… 내가 너무 지, 지쳐서 사, 사과를 추, 충분히 모, 못했어. 내……내, 내가, 미, 미안하다고 하, 하면 되는 문제였다면, 지, 지금이라도 사, 사과할게. 시, 실은 난 이, 이미 벼, 별장에서도 며, 몇 번이나 다, 당신한테, 사, 사과하려 했는데, 트, 틈이 없어서……. 지금에서라도 내가 사과할게. 내가 다 잘못했어. 애초에, 내, 내가 그, 그런 짓을 마, 말아야 했어.”

“당신은 이미…… 그때도 많이 사과했잖아.”

“…….”

데이빗은 이미 과할 정도로 미셸에게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그건 애걸이었을 뿐 사과는 아니었다. 둘은 데이빗이 미셸에게 빌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미셸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손사래를 쳤다.

“나도 잘한 거 하나 없어. 당신에게 사과받을 자격이 내겐 없어.”

미셸은 씁쓸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놀랍게도 미셸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스쳤다. 데이빗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눈을 깜빡였다.

“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결국 모, 모든 게, 나, 나 때문에 시, 시작된 건데?”

“당신은 빌미를 제공했을 뿐이야. 만일 당신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당신이 이리 괴로워할 일은 없었겠지. 내가 문제야.”

망설이던 미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이십 대 초반을 군에서 허비했지. 남들과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했어. 인생을 망쳤는데, 누굴 탓할 수도 없었어. 결국 그건 다 내가 자원입대를 했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거든. 그래서 더 화가 났지. 치료 전에는 도저히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노 조절이 안 됐어. 의사가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은 피하라고 했는데…….”

“내, 내가 다, 당신을 자, 자극했지.”

“뭐, 피차간에 운이 없었던 거지.”

“…….”

후, 미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외모 하나는 반반하잖아. 내 거죽에 속아서 짐승 같은 놈을 못 알아보고 납치한 건 당신 탓이 아냐. 나도 미련했지. 치료를 완벽히 받았으면 그렇게까지 시야가 좁아지진 않았을 거야. 당신이 겁에 질려 혀가 굳어버린 걸 알아봤을 테지.”

미셸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데이빗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의 마음을 엉망으로 찢어놨다면 날 용서해줘. 그리고 부디 당신 자신의 실수도 눈감아줘.”

죄는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어느 정도는 용서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데이빗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데이빗의 꿈속에서 미셸은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건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미셸의 비난에 데이빗은 저항을 포기했다. 그 말이 옳았다.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던 건 누구의 탓도 아닌 오롯이 자신의 탓이었다. 팔과 다리를 늘어뜨리고 상대가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는 걸 견뎌냈다.

잠에서 깨면 카일이 무슨 꿈을 꿨기에 그리 잘못했다고 사과하느냐 궁금해했다. 그럴 때면 데이빗은 아침 식사에 열중하는 척 말문을 닫았다. 비강에서 시작해 위까지 들어가는 관을 시리얼이 긁고 지나가며 목구멍이 답답해지면 더는 음식을 집어넣지 않은 채,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것인가, 그가 잘못한 것인가. 남자를 먼저 덮쳤던 것도 자신이고, 몸만이라도 원했던 것도 사실인데 결국 자신이 원하던 대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미셸이 그의 가슴 쪽에 손을 얹고 말했다.

“우리 둘 사이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한 건 당신을 비난하려고 한 말이 아냐. 난 당신이 내 마음 속에 뭔가를 만들어놨단 얘기를 하려던 거였어. 난 당신에게 끌려. 정말로 많이.”

“…….”

“당신이 실수했다고 하지만, 난 그보다 더 큰 실수를 했어. 그리고 그건 지난 일이야. 당신이 살아 있잖아. 그리고 내가 당신을 이렇게 가까이서 쳐다볼 수 있잖아. 지금은 그게 중요해. 우린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수 있어.”

미셸은 녹색 눈을 빛내며 말했다. 데이빗은 당황했다. 이건 그가 예상했던 어떤 시나리오 속에도 없는 반응이었다. 그의 기억과 꿈속에서 미셸은 늘 이죽거리거나 비웃거나 하며 그를 부술 줄만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인물은 예전에 데이빗이 반했던 그 남자와 닮았다. 뒷골목에서 미셸을 구해냈던 밤, 미셸이 그의 이름을 알려주었던 그때 그 얼굴과 흡사했다. 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때의 감정이, 그 흔적이 풀썩, 먼지가 일듯 들썩였다.

데이빗은 뒤로 물러났다.

“……그, 그런 얘긴 나, 나중에 하, 하지. 나, 난 그만 가야 해.”

나중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데이빗은 일단 도망치고 봐야 한단 생각에 말을 뱉었다.

“왜?”

“저, 저녁 일, 일이 있어. 주, 준비하고 나, 나가야 해.”

“그 몸으로 무슨 일을 해.”

“지, 짐을 오, 옮기는 이, 일은 나, 나도 할 수 있어.”

“그래서 그렇게 창백해져서 비틀거렸어?”

“그, 그땐 시, 식사를 제, 제대로 못해서 그랬던 것뿐이야.”

“지금도 잘하는 것 같진 않던데.”

미셸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마치 데이빗과 별 뜻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즐거운 양 말이다. 데이빗은 신경이 바짝바짝 탔다. 남자가 너무 다가왔다. 살갑게 굴었다가 살살 긁었다, 상처를 쿡쿡 쑤셨다 했다. 이해가 안 갔다.

“나랑 좀 더 있어주면 안 되나.”

저런 식으로 마치 연인에게나 할 소리를 자신에게 해대는 뻔뻔함도 데이빗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 소리 하려는데, 미셸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왕 갈 거면 내 차를 타고 가. 내 비서가 금방 올 거야.”

미셸의 말대로 고급 승용차가 금방 도착해 그들 앞에 섰다. 미셸은 차 문을 열어주고 반대편으로 가서 탔다. 에티켓이 몸에 밴 걸까, 아니면 일부러 줄리아에게 해줬던 식으로 그대로 해준 걸까. 데이빗은 고까운 마음에 얼굴을 굳혔다.

“거, 걸어가면 돼.”

“땀이나 닦고 말해. 곧 쓰러질 것 같은데 고집은.”

차에 먼저 탄 미셸이 걱정스럽단 얼굴로 데이빗을 돌아본다. 진짜 걱정인지 연기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데이빗-!”

차에 탈까 말까 망설이는데, 저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빗의 낡은 트럭에서 내린 매튜가 이쪽을 향해 무어라 크게 소리쳤다.

매튜를 알아본 미셸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얼른 타.”

“매튜가 와, 왔으니까 그, 그와 도, 돌아갈래.”

매튜, 데이빗이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마저 맘에 안 든다. 미셸은 한쪽 눈썹을 들고 불량하게 물었다.

“저 남자도 게이야?”

“뭐?”

“저 친구도 당신을 좋아해?”

“무, 무슨 헛소리야.”

“리플리, 데이빗을 차에 태워.”

“?”

운전석에 있던 비서는 미셸의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순순히 따랐다. 리플리는 당황해하는 데이빗의 허리를 붙잡아 밀었고, 미셸은 안에서 데이빗의 상반신을 끌어당겼다.

“뭐, 뭐하는 거야?”

“납치.”

미셸은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다. 데이빗이 눈을 크게 뜨고 미셸을 응시했다. 창백해진 낯빛에 미셸은 자신이 말실수했단 걸 깨달았다. 차 문을 열고 데이빗이 나가려는 걸 미셸은 그의 팔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미셸은 우물가에서 물을 떠준 처녀의 팔목을 쥔 불한당처럼 굴었다. 백미러로 뒷좌석의 두 장정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리플리가 즐거이 구경했다.

“사장님은 아직도 가끔 군대에 있는 것처럼 구세요. 것도 항상 이상야릇한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이시네요.”

“헛소리 말고 출발해.”

미셸은 리플리를 윽박질렀다. 미셸의 눈에 화가 난 매튜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게 보였다.

미셸의 닦달에 리플리는 차를 출발시켰다. 미셸은 총알처럼 달려오던 매튜가 허탈한 얼굴로 거리에 선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911, 자네가 아무리 빨라봐야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는 시속 50km가 한계다. 멍충아.”

미셸은 자신의 승리를 멀리 떨어진 매튜에게 알렸다. 어차피 멀리 떨어진 적은 듣지 못할 테지만, 승리한 악당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해주는 게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유치했다.

그러나 현직 911대원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매튜는 데이빗의 낡은 트럭을 타고 그들을 따라왔다. 그는 차가 빡빡한 도심의 도로에서 신기에 가까운 속도로 질주해 미셸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리플리!”

미셸의 비서는 눈치 빠르게 속도를 올렸다. 그들의 차는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더 밟아!”

“지금도 규정 속도 이상이에요.”

“일제 트럭 따위에 추월당할 셈이야?”

“뒤차 운전자, 운전 정말 잘하네요. 존경스러워요.”

“쓸데없이 감탄하지 마. 저자는 우리 적이야.”

미셸은 데이빗을 매튜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애초의 목적을 잊었다. 이젠 이 자동차 추격씬의 승자가 되어 매튜가 이를 가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중요했다. 매튜 웨인 클라크란 사내는 미셸의 자존심을 여러모로 자극했다. 데이빗은 미셸이 손만 잡아도 경기를 일으키면서 매튜 앞에선 천진하게 웃으며 경계심을 풀었다. ‘저 자식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어.’

“딱지가 오면 두 배 가격으로 내가 살게.”

“사장님 덕에 봉급 외 수당이 쏠쏠해지겠네요.”

리플리는 확 속도를 높였다. 낡은 데이빗의 트럭을 갖곤 작정하고 달리는 밴틀리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매튜는 점점 뒤처져 은하계 저 너머로 사라졌다. 미셸은 트럭의 심각한 엔진 상태에 이번만은 감사했다.

찰칵하는 소리에 미셸은 데이빗 쪽을 바라봤다. 데이빗이 신경질적으로 잠긴 문의 안전장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관둬, 어차피 안 열려.”

“무, 문을 왜 잠가?”

“안전장치. 왜? 내가 당신을 끌고 가서 인적 드문 야산에라도 묻을까 봐?”

데이빗이 더는 안전장치를 못 만지게 하려고 미셸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데이빗이 미셸을 피해 몸을 물렸다. 창에 달라붙은 남자를 바라보며 미셸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나만 싫어, 아니면 다른 사람이 닿는 게 다 싫어?”

“…….”

“무인도에서 살 것도 아니잖아. 사람과 닿고 살아야 하는데, 앞으로는 어쩌려고?”

데이빗은 혀를 찼다. 미셸은 뻔뻔하게,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왔다. 데이빗은 이놈의 차가 대체 어디를 향하는지, 미셸이 무슨 꿍꿍인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내, 내릴래.”

“내리긴 뭘 내려. 얘기 좀 해.”

“아, 아까 했잖아.”

“난 다 못했어.”

“대화 중 죄송한데요.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말씀해주실 분?”

리플리가 운전석에서 말을 받았다.

“카, 카일의 집으로 가, 가는 거였잖아.”

그러기로 했지만 이미 차는 너무 멀리 왔다.

“그랬지. 그런데 방금 우리가 매튜를 그렇게 기를 쓰고 떨어뜨렸는데, 카일네 아파트로 가서 만나면 정말 웃기지 않을까.”

“나, 난 당신한테 자, 자동차 추격전 하라고 한 적 없어.”

“어쩌겠어. 밴틀리를 만들어주신 장인들을 노고를 생각해봐. 폐차 직전인 일제 트럭 따위에게 질 수는 없잖아. 이건 자존심 문제야.”

매튜가 분해하던 얼굴을 떠올리자 미셸은 입매가 느슨해지며 사악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그래서 지,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저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에요.”

미셸은 잘생긴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디로 갈까. 차 안에서 계속 얘기하긴 싫었다. 앞좌석에 앉은 속 시커먼 비서와 사연을 공유하고 싶지 않다. 일반 가게도 위험했다. 911대원이 쳐들어와도 안전한 곳이 필요했다.

“리플리, 알아보라던 의사는 알아봤나.”

“아, 연락은 됐어요.”

“그럼, 우리 집으로 가서 그를 부르지.”

리플리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데이빗 본인은 남자 둘이 자길 빼놓고 무슨 얘길 나누는지 알 수 없어 화가 났다.

“내가 다, 당신 집에 왜 가?!”

“거기가 안락할 거야.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고.”

“그, 그거야 다, 당신 생각이지.”

데이빗이 화를 내자 푸른 눈이 생기로 반짝거렸다. 미셸은 체념한 얼굴로 땅만 바라보던 남자가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걸 바라보았다. 화난 얼굴이 우울함에 찌들어 무표정해진 얼굴보단 백 배 낫다.

리플리가 앞좌석에서 탄성을 냈다.

“911대원이 다시 나타났군요.”

과연 낡은 트럭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쩌시렵니까.”

미셸은 자신을 집어던졌던 매튜의 괴력을 기억했다. 높은 담장과 겹겹의 자물쇠가 필요했다.

“집으로.”

리플리는 방향을 틀었다. 데이빗이 불만에 가득 차 미셸을 노려봤다. 미셸은 어깨를 으쓱였다.

* * *

리플리는 몇 마일 차이로 매튜를 떨쳐놓고 미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철제문이 닫히고, 트럭은 그 앞에서 멈췄다. 사유지에 들어온 미셸은 안심했다.

“잠깐만 자리 좀 비켜주겠나.”

미셸은 데이빗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리플리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하자 거실 한가운데 뻣뻣하게 서 있던 데이빗이 눈에 띄게 얼굴을 굳혔다.

“바로 요 앞에서 차를 준비할 거예요.”

멀리 가진 않겠다는 리플리의 말에 데이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부엌으로 사라지는 리플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그가 다 사라지고 나서야 미셸을 돌아봤다.

“의사가 와서 당신 손을 봐줄 거야.”

데이빗은 긍정도 부정도 않았다. 상대가 반응이 없으니 미셸도 말을 잇기 어렵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찡긋거렸다. 미셸의 쏟아지는 시선을 꾹꾹 참으며 데이빗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용건이 끝나기만 하면 바로 뛰쳐나갈 기세다. 경계심이 선인장 가시처럼 삐죽삐죽했다. 그렇다고 미셸이 물러날까 하면, 그건 아니었다.

미셸은 섬세한 겉모습과 달리 뻔뻔하고 거친 남자였다. 데이빗의 냉대에 의기소침해지고 물러날 만큼 곱게 자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데이빗이 자신의 말에 불편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별장의 일로 타격을 입은 건 데이빗뿐만이 아니었다. 미셸도 심장과 뇌 일부분이 고장 났다. 남자에 대해 자신이 관심을 끊을 수 없단 걸 인정하고 그는 데이빗을 찾아 움직였다.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고 너무 늦게 움직인 게 문제였다. 집은 비었고, 일감을 받았던 회사는 그만둔 지 오래였으며, 어렵게 알아낸 휴대폰은 착신이 금지되어 있었다. 친지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는 뿌리 없는 유령 같은 존재가 덜렁 걸려 나왔다. 데이빗이 정말 어디서 죽은 건 아닐까 섬뜩해하던 때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즐겁기만 했다.

“여기 와본 적이 있지. 당신이 날 구해준 날 여기 앞까지 데려다줬잖아.”

“…….”

“택시 운전사, 그거 당신이었지.”

데이빗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이마에 주름이 갔다. 미셸이 슬쩍슬쩍 움직일 때마다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셸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올지 불안스레 쳐다본다. 웃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미셸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눈매가 가늘어지며 금빛 속눈썹 사이로 올리브 그린의 눈동자가 빛났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럼 당신은 그때부터 날 좋아했던 거야? 처음 봤을 때부터?”

데이빗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미셸은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마음이 아예 없다면 지적한다 하더라도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시약에 반응하듯 붉게 물든 얼굴이 데이빗이 여전히 그를 의식하고 있단 사실을 말해주었다. 미셸은 확신했다. 데이빗은 자신을 특별히 여긴다. 미셸은 빨간머리 앤을 놀렸던 길버트의 심정으로 데이빗에게 다가갔다.

“정확히 언제부터 날 좋아했나? 이유가 뭐야. 돈 때문은 아니잖아. 내가 잘생겨서 그랬나. 나에 대해 전혀 몰랐단 건 거짓말이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지?”

미셸은 이때다 싶어 궁금했던 걸 모두 물었다. 데이빗은 꿀 먹은 벙어리 상태를 이어갔다.

“당신은 나에 대해 조사해봤을 거야. 어느 정도는 알았겠지. 당신은 줄리아에 대해서도 알았잖아.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 그건 달라. 다, 당신이 먼저 그녀의 이, 이름을 말해서 아, 안 거잖아.”

“그랬던가.”

미셸은 콧날을 긁적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기억은 섞여 분명치 못하게 흐려졌다.

“그랬어.”

데이빗은 다부지게 확언했다. 자신은 그때 미셸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그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도 다 기억하는데 상대는 별것 아닌 기억인 양 흐리멍덩하게 군다.

“내, 내가 다, 당신이 그, 그 여자 키, 키스하지 않,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다, 당신이 바로…….”

데이빗은 꿀꺽 말을 삼켰다. 미셸이 기어이 그 끔찍했던 일을 실토하게 만든 게 화가 났다.

“내가 그때 당신 말을 괜히 오해해서 그런 짓을 했었지.”

그렇다고 긍정해주기도 싫어 데이빗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미셸이 마지막 한 걸음 남은 공간을 좁히며 성큼 다가왔다.

“당신은 내가 그녀와 키스하는 걸 봤어. 그리고 그걸 질투했군.”

데이빗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다. 수치심과 후회의 감정이 데이빗의 얼굴을 온통 어둡게 물들였다. 미셸은 그 얼굴을 만지고 싶어 애가 탔다.

“키스해도 되나.”

갑자기 거리가 좁혀졌다. 데이빗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미셸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녹색 눈이 뿜어내는 열기가 지독했다. 데이빗은 미셸을 밀어냈다. 미셸은 밀려났다가 도로 다가와 데이빗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뭐, 뭐…….”

“키스해도 돼?”

미셸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의 금빛 속눈썹이 데이빗의 바로 앞에서 흔들렸다. 숨이 막혔다. 박제된 동물처럼 그렇게 몇 초를 얼어붙어 있었다.

“차 드세요.”

리플리가 둘 사이 흐르던 긴장감을 부숴놓고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가버린 탓에 미셸은 화낼 타이밍을 놓쳤다.

데이빗은 퇴로가 막힌 서가에서 물러나 반대쪽으로 몸을 물렸다. 미셸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려는 의도가 역력히 읽혔다. 미셸은 미간을 찌푸렸다. 미셸은 데이빗이 도망간 만큼 다가가 붙으려다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 오른손으로 왼팔을 꾹 쥐고 겨우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아슬아슬 위태로워 더는 건드리기 어려웠다. 미셸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서가로 다가가 데이빗의 동화를 꽂아 넣었다.

“당신의 첫 작품. 기념으로 여기 둘게.”

“……내 책을…… 왜.”

“당신 책이니까. 난 잘 모르지만, 언뜻 보기에도 좋은 작품 같더라.”

“다, 당신, 그 책과 아, 안 어울려.”

“그렇지. 사실 여기 있는 책 중 나와 어울리는 건 없어.”

미셸은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서가를 훑었다. 서재의 책 외에도 넓은 거실의 책장엔 책이 가득했다. 대부분은 조부의 취향에 맞춘 것들이었다.

“하, 항공기에 관한 채, 책이 많네.”

“응, 우리 아버진 조종사셨고, 할아버진 항공기 만드는 일을 하셨으니까. 할아버진 말년엔 공항마다 호텔 체인을 내느라 혈안이 되셨지만, 원래 당신 본업은 항공기 제작이야. 음속 여객기를 만들던 일이 난항에 부딪히면서 주춤하셨지만. 가업이다 보니 나도 그 일을 이어받았지. 나랑은 한참 거리가 먼 일이지만 어쩌겠어. 노력해서 잘해봐야지.”

데이빗은 눈을 깜빡였다. 항공기를 디자인하는 미셸의 모습은 잘 상상이 안 갔다. 미셸이 피식 웃었다.

“난 당신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 거라 생각했는데, 것도 아닌가 보네.”

“……스토커라고 다, 다 아는 건 아, 아냐.”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냐. 당신은 너무 삐딱해. 삐죽삐죽 가시를 세우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공격부터 하려고 들어.”

미셸의 말이 데이빗을 할퀴었다. 말더듬이 남자의 뺨이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새빨개졌다. 미셸은 그 급격한 변화에 감탄했다.

자신을 납치해 깔아뭉개고 헐떡이던 남자와 어둡고 슬픈 동화를 그리는 사람이 겨우 하나로 겹쳐졌다. 둘은 동일 선상의 인물이었다. 데이빗은 불량품 유리조각 같은 존재였다. 지극히 섬세하고 몽상가적인 면이 있으며 현실감각은 떨어지는데, 자존심은 세고 욕심은 넘쳤다. 감정을 죽이고 욕망을 참는 데 익숙하지만, 한 번 폭발하면 잘 제어할 줄 몰랐다. 비행기 프로펠러의 회전에 홀려 돌진하는 나비 같다.

미셸의 눈앞에서 상대가 하늘거리고 비틀거린다. 그 여리디여린 면에 짜증이 나기는커녕 손을 쥐면 바스락 부서져버릴 것 같아 숨을 죽이고 쳐다보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미셸은 강하고 밝고 당당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위축되어 있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은 속내를 알 수 없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연애에서도 비슷했다. 자신을 좋아한다 먼저 말해온 사람이 좋았지, 자신을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숨기고 끈덕지게 시선만 보내오는 이들은 불편했다. 후자의 인간형을 대표하는 인물이 눈앞에 있다. 모른 척 한 번 싱긋 웃어주고 무시하면 되는데 그게 될 리가 없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미셸은 데이빗이 생선을 좋아하고, 구두 사이즈가 자신보다 한 치수 적다는 사실 정도밖에 모른다. 그런데도 그가 절정의 순간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체취를 풍기는지, 공포에 질렸을 때 그의 눈빛이 어떤 빛깔로 변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형편없는 연애다.

“비난하는 거 아냐. 그렇게 입 꾹 다물고 고개 숙이지 말아줘. 고개 좀 들어봐. 당신 눈을 보면서 얘기하고 싶어.”

미셸은 횡설수설했다. 그가 당황하자 데이빗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빌어먹을, 미셸은 이를 갈며 이마를 문질렀다.

“젠장, 뭐가 이렇게 어려워. 내가 한심해도 좀 이해해줘. 내가 누구한테 일방적으로 매달려본 건 내 인생에서 이번이 처음이니까.”

푸념처럼 미셸은 진심을 내뱉었다. 쑥 내놓아진 감정에 데이빗은 뻣뻣하게 긴장했다. 머릿속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이 이상 미셸과 엮이면 안 된다. 결심에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셸은 혀를 찼다. 그는 데이빗이 불편해하지 않을 화제로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데이빗의 푸른 눈동자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 그림으로 측면이 장식된 비행기가 있다면 굉장히 아름다울 것 같은데.”

“뭐?”

“그렇잖아. 당신은 특이하게 하늘을 그리던걸. 면이 아닌 선으로, 넝쿨처럼 구름 뜬 하늘의 결을 표현하잖아. 여객기에 금빛 하늘을 그려 넣으면 굉장히 멋질 것 같지 않아?”

“해, 햇빛이 바, 반사되면 위, 위험할걸.”

“것도 그렇군.”

데이빗의 말에 미셸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하지만 꽤 괜찮을 것 같아. 빛 반사가 심하지 않은 금빛 색을 쓰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미셸은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상념에 빠진 남자의 옆얼굴에 늦은 오후의 붉은빛 태양이 비쳤다. 데이빗은 미셸의 긴 속눈썹이 높은 콧날 옆, 건강하게 그을린 뺨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흘낏 바라보다 상대가 시선을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미셸은 오래도록 말이 없다. 더는 좋아하느니 어쩌느니 불편한 말을 않는 데 데이빗은 안도했다. 긴장을 풀자 주변 상황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넓은 객실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었다. 데이빗은 계속 어색하게 서 있는 것도 맞지 않다 싶어 미셸의 맞은편에 있는 1인용 카우치에 앉았다. 소파는 편안했다. 아픈 허리를 펴며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데이빗이 낸 작은 앓는 소리에 미셸이 고개를 들고 상대를 응시했다.

분명히 처음 앉을 때만 해도 충분히 거리가 있었는데, 미셸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깊게 파고들었던 의자에서 빠져나오자 무릎과 무릎이 살짝 닿았다. 가벼운 맞닿음에 데이빗은 어깨를 굳혔다. 미셸이 악동처럼 싱긋 웃는다. 미셸처럼 잘생긴 남자가 장난 같은 스킨십을 해오며 저리 웃어온다면 어떤 여자라도 넘어가지 않고 배길 수 없을 것이다. 데이빗은 자신이 여자가 아닌 것이, 그를 납치했던 게이 스토커였단 사실이 아쉬웠다. 자신이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었더라면, 조금만 더 현명했었다면, 조금만 더 아름다웠다면, 조금만 더 부유했다면, 미셸의 반만큼이라도 매력적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음이 아리다. 데이빗은 씁쓸히 웃었다.

미셸이 놀란 눈으로 데이빗을 쳐다보다 이내 아까의 환한 미소를 이어갔다. 미셸은 데이빗의 미소를 오해하고 있었다. 데이빗이 자신의 장난기 어린 미소에 전염돼 웃는 걸로 착각하고 기뻐한다.

최고의 화장은 미소라 했던가. 그건 여자에게만 통하는 말이 아니었다. 미소 지은 남자의 얼굴은 화사해서 데이빗은 자신이 이 잘생긴 남자에게 반해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꾸몄던 게 새삼 부끄러워졌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미셸이 검은 쉐보레 밴에서 버려졌던 그 거리, 그 자리에 서 있던 게 누구였든 그들 대부분은 미셸에게 반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미셸을 구해 택시로 집까지 데려다준 뒤 데이빗이 남자에게 반하게 되었던 일련의 모든 일이 운명이라든가, 인연이라든가, 그런 특별한 말로 치장될 필요는 없었다. 그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 데이빗은 자신을 친근히 바라보며 마주 웃어주는 남자의 모습에 가슴이 저렸다. 저건 가짜다. 진짜 모습을 알기에 남자의 페르소나를 편안히 대할 수 없었다.

“이, 이런 게 재, 재밌나.”

“응?”

“다, 당신은 게, 게이도 아니잖아. 여, 여자한테 수, 수작을 걸듯이-.”

데이빗은 말을 멈췄다. 데이빗은 실은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부질없는 짓이기에 참고 참지만, 잠시만 긴장을 풀면 속내를 너무 많이 털어놓게 된다.

미셸은 데이빗의 단정한 눈썹이 활처럼 휘어지고, 그의 뺨이 화로 얼룩지는 것을 보았다. 미셸에겐 익숙한 얼굴이었다. 화가 난 표정이기도 하고, 또한 무언가를 꾹꾹 누르고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데이빗은 화가 났지만, 아직 미셸 앞에 있었다. 히스테리를 일으키곤 정신없이 도망쳤던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다. 데이빗은 왜 가지 않고 여기 머물러 있는 걸까. 단지 의사를 만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미셸은 자세를 바꾸었다.

“장난치는 거 아냐. 당신을 놀리는 것도 절대 아니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겠지. 내가 왜 이러는지 당신도 실은 알 거야.”

미셸의 목소리가 끝에 가선 갈증에 갈라진 양 거칠어졌다. 데이빗은 그를 바라보는 초록빛 눈동자에 마음이 묘해졌다.

미셸의 시선이 데이빗의 얼굴과 목덜미를, 가슴과 손을 타고 내려가 다리 사이까지 도달한다. 데이빗은 미셸이 머릿속으로 이미 자신의 옷을 벗겨냈다는 걸 느꼈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눈을 보고 알았다. 미셸은 그를 진심으로 원했다.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악동처럼 천진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 위로,손가락 한 개를 부러뜨리고 만족하지 못해 중지를 쥐었던 악마 같은 남자의 얼굴이 겹쳤다. 데이빗이 실금 하지 않았다면 미셸은 더 많은 손가락을 불구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어떻게 가, 같은 사람일 수 이, 있지.”

“뭐?”

구토가 치민다. 데이빗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미셸이 데이빗을 거칠게 침대에 처박았던 때가 생각난다. 납치범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미셸은 흰 천으로 사형수의 얼굴을 가리듯 셔츠로 데이빗의 얼굴을 가렸다. 자신을 무참히 강간했던 사람과 눈앞에 있는 남자가 동일인이란 사실이 데이빗은 믿기지 않았다.

데이빗은 미셸이 씌운 셔츠를 이를 악물고 고통을 버티는 데 사용했다. 눈물과 콧물로 푹 젖은 섬유에선 질긴 종이 맛이 났다. 데이빗은 아직도 꿈을 꾸고 나면 혀끝에 그 맛이 맴돌아 헛구역질을 하곤 했다.

세상엔 다양한 취향이 존재했다. 못생긴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추하고 약한 인간을 괴롭히는 데 성적 즐거움을 느끼는 치들도 있었다. 미셸이 그런 부류 중 하나라 과거의 일을 빌미 삼아 데이빗을 얽어맸다면 데이빗은 관계를 받아들였거나 결국 목을 맸거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셸은 데이빗의 곁을 맴도는 것이 그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다, 당신이, 나, 날 어, 어떻게 조, 좋아할 수 있지.”

미셸이 몇 번을 고백한다고 해도 데이빗은 그 말을 영영 믿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이 있는데, 어떻게 지금의 모습만으로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믿을 수 있을까. 어려웠다.

미셸이 미간을 좁히고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어.”

데이빗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셸은 일어서서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데이빗의 푸른 눈을 내려다보며 미셸은 꿀꺽 침을 삼켰다. 꼬이고 꼬인 관계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것인가. 막막하지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첫째, 난 납치 유경험자야. 돈 때문에 날 감금하고 자유를 빼앗으려 하는 사람들을 증오해. 어릴 적엔 날 납치한 이들을 어떻게 혼내줄까, 그들에게 어떻게 복수할까 이런 걸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지.”

데이빗이 바닥을 노려봤다. 미셸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둘째, 난 삼 년간 이스라엘 쪽에서 군 복무를 했어. 난 원래 분노를 잘 못 다루는 편이야. 화가 나면 감정을 누르지 못해. 최근엔 제법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군.”

“…….”

“내 말이 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그래도 말할게. 당신은 운이 없었어. 내가 정말로 당신이 미워서, 당신을 죽이려고 그렇게 굴었던 건 아냐. 그냥 난 나를 납치한 사람이 미웠던 것뿐이야. 날 납치한 사람이, 돈에 환장한 인간이고, 이런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날 방어한다 생각하고 폭력을 휘둘렀지.”

데이빗의 입술과 뺨이 떨렸다. 미셸은 과거를 반추동물처럼 곱씹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품 안에 품고 간직해봐야 몸 안에 박혀 회전하는 총알처럼 상흔만 더 크게 남길 뿐이다.

“왜 그렇게 환장한 것처럼 당신한테 욕망을 풀었던 걸까. 난 게이도 아닌걸. 처음에야 당신을 괴롭게 만들려고 폭력을 쓴 거지만, 그다음 또 그다음은 뭐였을까. 정확히 언제부터 내가 당신에게 감정을 갖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 그저 열기가 아직 내 안에 있단 것만 알아. 이건 영영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아.”

주변은 지나다니는 차 한 대 없이 고요했다. 데이빗의 심장 박동 소리와 미셸의 발자국 소리가 한데 겹쳤다.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둘을 감쌌다. 미셸이 막 데이빗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이으려 했을 때 의사가 도착했다. 미셸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데이빗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뼈와 뼈 사이를 꽤 오랫동안 만져본 의사는 친절하게 진찰 결과를 설명해주었다.

“다친 이후로 몸이 많이 축났나 봐요?”

“……네.”

“원래 발가락이나 손가락은 뼈가 잘 굳지 않아서 완전히 굳는 데 시일이 걸리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성인 남자의 치유 속도라고 보기엔 많이 늦어요. 정확한 진단은 정밀 검진을 해봐야 알겠지만, 손가락 같은 경우 간단한 수술로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코 쪽은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요. 접합 상태도 좋지 않고, 이쪽은 좀 더 치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일을 잡아서 병원에 오시도록 하시죠.”

내심 치료가 불가능할 거란 생각을 하고 있던 데이빗은 기대보다 나은 결과에 안도했다.

미셸은 그 자리에서 수술 날짜를 잡았다.

‘당신이 왜 내 일에 참견하는 거지?’ 데이빗은 미셸에게 따지고 싶었다. 허나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손가락이 나으면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미셸이 제 돈을 써서 데이빗을 치료해주겠다 한다. 남자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기대 이익을 취하는 편이 좋겠다. 자존심이나 자신의 감정 따위는 부차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자. 그리 결론을 내린 뒤 데이빗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진찰이 끝나자 출근 시간이 빠듯하게 다가왔다. 데이빗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이젠 그만 가, 가봐야 해. 오, 오후 근무가 있어.”

미셸은 데이빗을 말리는 대신 차 키를 잡아채는 쪽을 택했다.

“리플리, 자넨 쉬어. 데이빗은 내가 데려다줄게.”

단둘이 오붓하게 돌아가는 길은 리플리가 사사건건 끼어들었던 오는 길보다 더 달콤할 것이다. 만면에 미소를 띤 미셸을 리플리는 대놓고 비웃었다.

“사장님은 내일 간부회의 자료를 보셔야 하잖아요. 이번엔 망신 안 당하게 공부를 단단히 해놓겠다고 저한테 호언장담하지 않으셨나요. 힘드실 텐데 집에 계세요. 손님은 제가 모셔다 드리죠.”

리플리는 역시 만만치 않은 비서였다.

“데이빗을 데려다줄 시간 정도는 있어.”

“괘, 괜찮아. 지, 지하철을 타, 타면 돼.”

미셸이 데이빗의 파자마를 흘겨봤다.

“그 옷엔 주머니도 없잖아. 돈도 없는데 무슨 지하철을 타.”

“사장님이 자꾸 무리하시니까, 저분도 곤란해서 저러시는 거죠. 저 분의 배려를 생각해서라도 앉아서 일이나 하십시오. 제가 봤을 땐 사장님 코가 석자인 상황인데요.”

‘왜 그렇게 눈치가 없으십니까.’ 리플리가 넌지시 충고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준비할 거니까 참견하지 마!”

미셸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차 키를 빼앗아 냅다 줄행랑을 쳤다. 리플리가 황당하단 얼굴로 둘을 쳐다봤다.

* * *

미셸은 데이빗을 마트에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도 좀체 돌아간단 말을 하지 않고 그 자리만 지키고 서 있다. 데이빗은 그런 미셸을 마뜩잖은 눈으로 돌아봤다. 교대로 일하는 코비가 데이빗에게 일을 물려주고 돌아가며 미셸을 흥미롭단 듯 바라봤다. 데이빗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온 뒤에도 미셸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아, 안 돌아가나? 바, 바쁘다면서.”

“시간이 많이 남았어.”

“…….”

입씨름하기도 지쳐 데이빗은 신경을 끄고 일을 시작했다. 창고에서 가공식품이 가득 든 상자를 옮기는 일부터 했다. 오후 일은 오전 일보다 간단했다. 짐수레에 짐을 차곡차곡 싣고, 실은 물건을 지상의 상점들로 나른다. 미셸은 잠자코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루해할 게 분명한 미셸의 시선을 느끼며 데이빗은 그가 어서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이런 일을 반복하나?”

바라보던 미셸이 질문을 내뱉었다. 이런 단순한 일만 하느냐, 이런 의미 없는 일만 하느냐, 등 여러 비슷한 물음이 축약된 것이었다.

“오, 오전 근무일 땐 다, 달라.”

“무슨 일을 하는데?”

“마, 마트 저, 정문에 트, 트럭으로 배, 배달된 물건들이 와. 그걸 싣고 오지.”

말하다 보니 데이빗은 어째 부끄러워진다. 장소만 바뀔 뿐 결국 오전에도, 오후에도 짐을 옮긴다는 소리다. 일용직 잡부 일을 매일 반복하고 있단 데이빗의 말을 들으며 미셸이 짐짓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이 꼭 <언더커버 보스>(Undercover Boss: 대기업 최고 경영자(CEO)들이 자신의 회사 일용직 사원으로 취업하여 진행되는 몰래 카메라 형식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출처: 위키백과)의 한 장면 같다. 프로그램 속 회장의 파트너들은 대부분 고되고 힘든 삶 속에서 찌들어 살다가 회장의 선의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데, 미셸이 5천 달러 정도를 내놓으면 자신도 그동안의 반목은 다 잊고 감사하면 되는 걸까. 비틀린 생각들이 끊이지 않았다.

짐수레를 끌고 다니며 층층별로 매장에 짐을 내려놓았다. 짐수레 속 상자의 높이가 점점 낮아졌다. 마지막 몇 개는 무게가 가벼워 수레 없이 품에 끌어안고 옮겼다. 매장 진입문을 열기 위해 상자를 내려놓으려는데, 미셸이 먼저 문을 열고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괘, 괜찮아. 가, 가벼워.”

“부피가 커서 앞을 못 보잖아.”

“그건…….”

“어서 해. 일 많잖아. 같이 하면 좀 낫겠지?”

미셸은 옷을 걷어붙이고 데이빗을 도왔다. 데이빗은 미셸의 값비싼 셔츠가 구겨지고 바지에 먼지가 묻는 게 신경 쓰여 영 맘이 불편했다.

매장에 들어서자 매장 직원이 눈을 끔뻑이며 미셸이 누군지 물었다.

“데이빗, 저 남자 누구예요? 저렇게 잘난 남자는 내 생전 처음 보는데.”

미셸은 잘생긴 남자였다. 남자는 한눈에도 건강하고 생기 넘쳤으며, 강인하고 부유해 보인다. 눈앞 매장 직원이나, 데이빗은 가질 수 없는 얼굴이다. 지나치게 밝은 인위적인 불빛 아래서 피곤한 얼굴을 화장으로 가린 매장 직원이 너스레를 떤다. 일반 사람도 저러는데 유명 스타들을 실제로 보면 얼마나 잘생겼겠어요. 그 눈빛이 계속 물어왔다. ‘저 잘생긴 남자와 데이빗 당신은 무슨 관계죠? 아무 관련 없을, 딴 세계 사람인 게 분명한데.’ 데이빗은 미묘한 미소로 일관했다.

창고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셸 주변으로 시선이 모였다. 이 도시 사람들은 타인에게는 완벽히 무심한 걸 미덕으로 삼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데이빗은 아까부터 들려오는 벨소리의 출처를 찾다 그것이 미셸의 호주머니에서 나는 소리임을 알아차렸다.

“저, 전화 계, 계속 오는데.”

“리플리가 똥줄이 타나 보지.”

“어, 어서 가보지 그래.”

“괜찮아. 난 속독을 배워서 밤새면 자료를 두 번도 더 읽을 수 있어.”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데이빗은 먼지로 간지러운 눈을 비비며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당신 쉬는 날은 있나? 아픈 사람이 무슨 일을 이렇게 많이 해.”

미셸은 데이빗이 동화책을 출판하며 인세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수술비를 충당할 수 없었던 걸까. 돈 때문에 아픈 몸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데이빗을 돕고 싶었다. 허나 데이빗은 미셸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사, 사람이 이, 일을 해야지.”

“아픈 사람들은 예외 아닌가?”

“아파도 도, 돈은 있어야 해.”

“다른 방법으로 벌어. 동화를 그리지 그래. 당신은 재능이 있어. 아, 이건 물론 내 평은 아냐. 줄리아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야.”

“……도, 동화를 어, 언제 다, 다시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워, 원고료를 돌려줘야 하, 할 수도 이, 있어. 사, 사람 일은 모, 모르는 거니까. 아예 우, 운신도 못하기 전에 이, 일을 할 수 이, 있을 때 해놓는 게 낫지.”

“돈이 많이 필요해? 원고료만으로는 치료비가 부족한가. 빚이라도 졌어?”

빚. 미셸이 넘겨짚은 게 운 좋게 맞았다. 데이빗은 미간을 찌푸리곤 물류 창고 깊은 곳에서 짐을 내오는 일에 집중했다. 미셸은 그를 쫓아갔다.

“어쩌다가.”

여자와 도박, 마약, 사기. 미셸은 빚을 질 만한 이유를 떠올려봤다. 데이빗이 미셸을 귀찮단 표정으로 흘낏 봤다.

“……아버지가…… 아냐, 들어봐야 시, 시답잖은 얘, 얘기야.”

데이빗은 말 도중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는 다람쥐처럼 캐비닛 사이를 여기저기 오가며 미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미셸은 재빨리 그를 좇으려다 서랍장에 그대로 몸이 끼었다. 안이 어둑어둑해서 철제 서랍장과 서랍장 사이가 좁은 걸 못 봤다. 한 발치 떨어진 곳에서 데이빗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미셸의 꼴사나운 꼴을 구경했다. 미셸은 빨개진 얼굴로 낑낑거리며 빠져나왔다. 바지와 셔츠가 먼지로 엉망이 됐다.

“시팔.”

미셸은 거친 동작으로 먼지를 털다가 데이빗이 딱딱하게 굳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의아해 다가가자 데이빗이 불안한 눈으로 미셸을 올려다봤다. 푸른 눈이 흔들린다. 미셸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당신한테 화난 거 아냐. 겁먹지 마.”

“……거, 겁먹지 아, 않았어.”

얼굴엔 겁먹었다고 확연히 쓰여 있는데 아무리 아니라고 해봐야 소용없다. 미셸은 눈살을 찌푸리고 마음속으로 신음했다.

데이빗이 수건을 꺼내 왔다.

“머, 먼지 털어.”

미셸보다 미셸이 입은 바지를 더 걱정하는 투다. 미셸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수건을 건네받았다.

더럽혀진 바지가 뭐 그리 대순가. 미셸은 그보단 작업복 옷깃을 적시고 있는 데이빗의 땀이 더 신경 쓰였다. 잡일을 하는 일용직 남자는 환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 후텁지근한 창고와 과도한 에어컨 바람에 피부가 갈라지는 매장을 번갈아 누볐다. 땀이 마를 만하면 다시 흐르고, 흘렀다 하면 다시 말랐다. 데이빗의 푸른 작업복의 등과 배 쪽은 본래보다 더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 힘에 부쳐하는 게 눈에 보였다.

미셸은 새 수건을 땀으로 미끈거리는 데이빗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데이빗이 퍼뜩 놀라 몸을 움츠린다는 게 몸으로 철제 서랍을 미는 게 됐다. 미셸은 재빨리 흔들리는 서랍을 잡고 고정했다. 비누가 와르르 쏟아졌다. 데이빗을 가리고 미셸은 제 머리로 비누를 받아냈다.

“……미, 미안.”

데이빗이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 별것 아닌 일이라며 미셸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작은 일에 데이빗이 저리 당황할 줄 몰랐다. 엄살을 떨었다가 과한 관심을 받게 된 게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눈알을 굴리며 미셸을 쳐다보는 얼굴은 평소보다 더 어리고 순박해 보였다. 저 얼굴이 데이빗의 진짜 얼굴인 걸까. 뚫어지게 쳐다보자 데이빗이 목덜미를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봐야 이미 볼 것 다 봐버렸다. 미셸은 입술을 누르며 웃었다. 그는 아직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 더 알고 싶었다. 그 과정은 민망하고 쑥스럽되 꽤 많은 즐거움이 있을 거라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알려주었다.

* * *

밤이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데이빗은 끊임없이 미셸을 돌려보내려 했지만, 고집 센 남자는 말을 듣지 않아 둘은 결국 함께 퇴근하게 됐다.

“다, 당신 회사가 마, 망해도 내 책임은 아냐.”

데이빗의 음산한 목소리에 미셸은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데이빗의 눈 밑이 일터로 오기 전보다 까맸다. 굽은 등은 더 처졌고 갈라진 입술은 희게 메말라 보였다.

“내 차를 타고 돌아가.”

“지, 지하철역이 근처에 이, 있어.”

아까와 같은 패턴이다. 미셸은 느긋하게 반격했다.

“이미 운행이 끝나지 않았어?”

“뛰, 뛰어가면 추, 충분해. 내가 다, 당신보다 자, 잘 알잖아.”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이 잘못 알 리 없다. 미셸은 데이빗을 집에 태우고 갈 적당할 건수를 고민하다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냥 타.”

미셸은 혹이 났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네가 이렇게 만들어놓고 그대로 돌아가려고? 협박성 동작이었다. 데이빗은 눈알을 굴렸다. 여기저기 쑤시는 지친 몸을 끌고 지하철의 딱딱한 의자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마지막 차는 항상 붐비니 오늘은 서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얼른.”

미셸이 재촉한다. 데이빗은 체념했다. 쭈뼛거리며 미셸을 뒤따라갔다.

조수석에 앉은 데이빗에게선 옅은 땀내가 풍겨왔다.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과 성치 않은 손으로 엉거주춤 벨트를 매는 모습을 쳐다보다 미셸은 데이빗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미셸을 바라보았다.

“응?”

“너, 너무 그, 그렇게…….”

사람 몸을 싹싹 훑어보지 말라고 하소연하려다 데이빗은 입을 다물었다. 쳐다보지 말라니, 자의식 과잉인 사람으로 오해 사기 딱 좋은 말이다. 미셸이 말하다 말아버리는 데이빗을 다시 쳐다봤다. 데이빗의 몸만 아니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싹싹 훑고 싶어 하는 눈빛에 데이빗의 얼굴이 빨개졌다.

부르릉, 차창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기분 좋은 엔진 소리에 데이빗은 감탄했다. 좋은 차였다. 데이빗은 운전석을 힐끔 바라봤다. 갖고 싶진 않았으나 한 번 몰아는 보고 싶었다. 운전석에 앉은 팔자 좋은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데이빗을 바라봤다.

“괜찮아? 엔진 출력이 커서 승차감은 좀 떨어지는 차라.”

데이빗은 무어라 답할 말을 못 참고 눈을 껌뻑였다. 돈이 썩어나는 남자는 정신이 나간 걸까. 신형 벤츠를 깎아내리는 남자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싶어진다.

“떨림이 커서…… 허, 허리가 불편할 수도 있어. 힘들면 차창에 기대.”

미셸이 허리를 말하기 전에 한 템포 호흡을 골랐다. 데이빗은 불길함을 느꼈다.

“허리도 못 펴면서 무슨 일을 그리 정직하게 해. 누가 보면 당신이 사장인 줄 알겠던데. 요령도 좀 피워가면서 해.”

미셸은 저 때문에 무리한 자세를 취했던 데이빗을 걱정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당장에라도 차 문을 열고 나가고 싶어졌다. 일하는 내내 장딴지가 땅기고 허리 아래가 후들거렸다. 데이빗은 최대한 자세를 바르게 한다고 했지만, 그의 몸이 엉망인 걸 결국 미셸에게 다 들킨 모양이다.

“다, 당신은 신, 신사로군.”

비아냥거림 다분한 말을 미셸은 웃으며 받아쳤다.

“내가 젠틀한 남자란 소리지.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난 원래 배려 따윈 모르는 사람인데, 이상한 일이지.”

거짓말. 데이빗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자친구에게 차 문을 열어주던 미셸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 데이빗은 그리 멋대로 오해하고 반했었다.

“카일의 집으로 가는 거 맞지? 당신 원래 있던 집은 어떻게 하고 거기 묵는 거야?”

“지, 집은 저, 정리했어.”

“빚 때문에?”

미셸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 음색이 묘해졌다. 집이 날아갈 만한 빚이 뭘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게 훤했다. 부유한 남자는 빚을 지고 사는 한심한 인간을 잘 이해 못할 것이다. 벤츠를 혹평했던 남자니 자신 정도는 얼마나 하찮게 보일까.

“빚 때문은 아, 아녔어.”

“그럼 뭔데. 집을 팔아서 뭐 특별한 거라도 샀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데이빗은 허탈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데이빗은 분에 넘치는 사치스러운 존재를 가지려고 집을 팔았다.

“그래.”

“정말? 뭘 샀는데?”

호기심에 미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뭘 샀는지 말해보라며 연신 묻는 미셸의 목소리가 삼십 센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왔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묘한 부유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데이빗은 한때 미셸이 자신이란 존재를 알아만 준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원은 이루어졌는데 자신의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묘한 기분이다. 데이빗은 미셸이 옆자리에 앉아 운전을 하고 있는 장면이 과연 진짜인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자의 단정한 짧은 머리칼을 만져보면 실감이 날까. 데이빗은 손끝에 슬쩍 힘을 주었다가 도로 풀었다.

미셸은 데이빗의 일생 소유하고 팠던 것 중 가장 값진 것이었다. 소유의 가망성이 가장 희박했던 것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가졌으니, 인생이란 희한하기도 하다. 웬일로 미셸을 똑바로 바라보는 데이빗이 신기했는지 미셸이 운전 중 상대를 곁눈질한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피하려다 데이빗은 자신의 이런 태도가 옳지는 않단 생각을 했다.

아무 말 않고 화만 내는 상대가 얼마나 답답한지 데이빗은 잘 안다. 데이빗의 아버지가 그랬다. 알코올 중독에 이런저런 소소한 사고를 끊임없이 쳐대다 결국 아들의 명의까지 끌어다 썼던 그의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아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데이빗이 아버지의 잘못을 소리 높여 비난한 데 대한 시위였다.

아직까지 미셸은 잘 참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답답하리라. 데이빗은 미셸에게 시위할 마음도, 미셸이 참다못해 분노하고 절망해 떠나버릴 순간을 기대하며 기쁨을 찾을 생각도 없다. 그가 원하는 게 앙금을 푸는 거라면 어서 풀고 말끔히 헤어지는 게 낫다.

몸이 피곤한데 마음에 빗장까지 달고 하나하나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도 힘들다. 입을 꾹 다물고 상대의 말을 무시하며 힘을 빼는 것도 지쳤다. 이미 끝난 일인데 고백을 못할 것도 없다. 데이빗은 진실을 입에 담았다.

“……당신.”

“?”

“세상에 공짜는 어, 없어. 내, 내가 프로란 건 다, 당신이 멋대로 오해한 거고 나, 난 어, 얼뜨기라서. 도, 도와준 사람한테 도, 돈을 줘, 줬어. 나, 납치 전문가라니, 내, 어, 어딜 보고 오해했는지 모르겠군.”

“……스티븐에게 얼마를 줬나.”

“당신한테는 푼돈일 거야.”

“그럼 집이 없어서 바로 카일네로 간 건가. 그랑은 그렇게 친한 사이야?”

미셸의 심문이 재차 시작된 모양이다. 데이빗은 얼굴을 찡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이 속도를 내주지 않을 걸 알아서이다. 입을 열고, 말을 하고, 그런 자연스러운 것들이 다른 사람들만큼만, 보통의 평범한 사람만큼만 됐으면 좋겠다. 미셸이 시선을 데이빗에게 고정했다.

“난 당신한테 비밀 얘길 털어놨잖아. 내가 군에 가서 폭발 장애가 악화된 건 이 세상 누구한테도 말 안 한 얘기야. 당신도 당신 얘길 털어놔줘.”

“앞 보고 운, 운전해.”

“당신이 날 안 보면 나라도 당신을 봐야지.”

“억지 좀 그만……!”

데이빗은 씩씩거리다 포기했다. 땅을 향해 숙인 얼굴이 흥분으로 뜨겁다. 미셸은 한쪽 눈썹을 올리고 능글맞은 얼굴로 데이빗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싸움을 오래 끌면 누가 이길지가 훤했다.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따위가 뭐 그리 궁금하다고 저리 집요히 물어댈까. 데이빗은 미셸이 더 묻지 못하게끔 깡그리 내뱉어내기로 맘먹었다.

“카, 카일이랑은 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단짝이었어. 매튜랑도 그때 친해졌고. 둘은 쌍둥이 형제거든.”

“쌍둥이?”

“자, 잘 보면 코랑 입이 똑같아.”

얼마나 뚫어지게 잘 쳐다봐야 똑같은 걸 알게 될까. 미셸은 도통 닮지 않은 쌍둥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 처음부터 카일한테 차, 찾아간 건 아니고, 트, 트럭 뒷칸에서 웅크려 자다 보니까 위경련이 왔어. 야, 약국 앞에서 쓰, 쓰러진 걸 사람들이 구급차를 불렀는데 그때 어떻게 매, 매튜를 만났고, 그가 카, 카일한테 날 보낸 거야.”

“카일이랑은 얼마나 지냈어?”

“하, 한 달하고 이, 이 주 정도? 그 집에 있으면서 수술도 해, 했고 책 계, 계약도 했어. 고, 고마운 일이야.”

카일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 편집자가 보낸 편지를 꼼꼼하게 읽던 카일은 그 편지가 거절의 편지가 아니라 실은 제안의 내용이란 걸 읽어냈다.

「넌 항상 부정적인 것만 읽지. 비평만 읽지 말고 전체적으로 다시 읽어봐. 다른 작품을 더 보내달란 소리잖아.」

카일 덕에 데이빗은 출판사에서 데이빗의 연락을 기다리던 편집자와 연이 닿았다.

“그럼 나랑 헤어지고 일이 주는 바깥에서 생활했단 소리군. 노숙자처럼.”

노숙자처럼 산 게 아니라, 데이빗은 정말 노숙자로 살았다. 원해서 그런 건 아니다.

“별장에 돌아갈 생각은 안 해서 다행이네.”

데이빗은 대답을 못했다. 미셸은 인상을 찡그렸다.

“갔었어?”

“…….”

미셸은 데이빗이 설마 정말로 별장으로 돌아갔다 온 줄은 몰랐다. 자기 입으로 시한부 인생이라고 말한 남자가 버려진 폐가에 돌아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미셸은 데이빗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당신 대체 왜 그렇게 산 거야?”

미셸이 비틀린 목소리로 말했다. 비난인지 야유인지 모를 말에 데이빗은 고개를 돌리고 까맣게 얼룩진 창문만 바라보며 시선을 피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의 삶을 비판받는데 마음 편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더욱이 그 삶이 변명의 여지없는 삶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난 워, 원래 그런 사, 사람이야.”

가로등 불빛 사이로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입구가 늘 그렇듯 개장 시간이 이르고, 폐점 시간은 늦은 가게들이 밤늦은 시각까지 장사하고 있었다. 삼 분 정도만 있으면 목적지다. 미셸과 단둘인 답답한 차 안에서 탈출할 수 있다.

데이빗은 급한 마음에 먼저 벨트를 풀었다.

“벌써 내릴 준비를 하나?”

딸각, 그 소리가 신호가 된 것처럼 미셸이 차를 거칠게 길가에 댔다.

차 문을 열고 나가버렸던 미셸은 저 멀리서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데이빗은 당혹해하다 이내 따라 내렸다. 미셸이 기분이 나빠져 더는 그와 차를 타고 싶어지지 않은 거라면 데이빗은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됐다. 남자와 이별하게 된 순간이 예상보다 빨리 왔다. 내일부터는 다시 미셸 없는 일상이 시작되리란 사실이 기쁘지도, 섭섭하지도 않게 다가왔다.

“나, 난 그만 가볼게.”

미셸이 사나운 눈으로 데이빗을 돌아봤다.

“가긴 어딜 가?”

“여기서 가, 가까워.”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당최 왜 그딴 짓을 했어? 당신, 그때 완전히 돌았던 거지. 죽기 전에 온기가 필요해서 그랬던 거야? 개를 사면 된다면서.”

그딴 짓이란 말에 데이빗은 자신이 작아지는 걸 느꼈다. 그 일에 한해서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미, 미안. 정말로.”

미셸이 데이빗의 팔을 꽉 쥐었다. 몸이 끌려갔다.

미셸이 예고도 없이 키스했다.

꽉 끌어안겼다. 커다란 손이 데이빗의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반죽을 이기는 도공처럼, 몸을 문지르는 손길에 놀라 입술이 터졌다. 혀가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데이빗의 허리가 움찔 떨리며 반응했다. 온몸의 신경이 바짝 죄어들었다. 피곤해 말할 기운도 없는 몸의 반응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데이빗은 완전히 당황했다.

눈은 언제부터 감고 있었던 걸까. 잔상이 남은 감각 속에서 데이빗은 후들거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미셸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어진 뺨이 보였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희미한 가로등과 밤의 어둠조차도 전혀 그 빛을 훼손시키지 못했다. 주황빛 불빛 아래서 초여름의 보리 줄기처럼 시원한 연녹색의 눈동자가 보일 리 없음에도 그리 볼 수 있는 건 시력이 아닌, 기억에 빚져서이다.

새벽, 떠오던 해에 비치던 연녹색 눈동자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데이빗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수많은 기억이 다 저장되는 것은 아니건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기억은 남달랐다. 잿빛으로 바래고 대다수는 소각되는 기억의 메커니즘에 매몰되지 않은 채 영영 그리 영롱히 빛을 발했다. 데이빗은 일그러진 얼굴로 미셸을 바라봤다.

미셸이 데이빗의 두 뺨을 끌어안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 당신은 날 여전히…….”

빠앙! 경적 소리에 둘은 뒤를 돌아봤다. 앰뷸런스 한 대가 바짝 붙어 헤드라이트 불빛을 쏟아냈다.

미셸은 데이빗의 두 친구를 품평했다.

“카일은 좋은 친구야. 매튜는 사악하군. 쌍둥이라며 왜 저리 달라?”

미셸은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매튜는 양손 모두를 사용해 똑같은 제스처를 돌려주었다.

기세로만 보면 매튜는 당장에라도 앰뷸런스를 트렌스폼시켜 미셸의 벤츠를 디셉티콘의 졸개들 대하듯 박살낼 것 같았다. 미셸은 매튜의 흉흉한 얼굴에 이를 악물었다. 낫살도 먹을 만큼 먹은 남자가 경적 소리로 남의 연애를 방해할 건 뭐냐. 앰뷸런스를 탄 구급대원이 설마 차에서 내리진 않을 것이다. 미셸은 괴력의 사내를 겁내지 않고 째려봤다. 판단착오였다. 매튜가 동료에게 양해를 구하고 미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앰뷸런스는 매튜를 내려놓고 가버렸다.

“911, 사고 현장에 안 가도 되나?”

“걱정하지 마. 병원에 환자를 내려다주고 오는 길이야.”

“그런가. 우린 의사를 만나서 데이빗의 손과 코를 진찰받았어. 수술 날짜도 잡았지.”

“어, 그건 잘된 일이군.”

매튜는 의외로 미셸의 말을 경청하고 좋아해주었다. 미셸이 안도한 순간 매튜는 미셸의 팔을 뒤로 꺾어 그의 상반신을 자동차 보닛에 눌렀다.

“911, 무슨 짓이야?”

“당신이 데이빗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자세한 변명은 경찰서에 가서 해. 데이빗의 피 묻은 바지를 증거품으로 갖고 있으니 거짓말할 생각은 버려.”

매튜는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바로 신고 전화를 하는 걸 미셸은 기막힌 기분으로 바라봤다.

“매, 매튜, 그, 그건 피를 토, 토한 거라고 했잖아. 이 나, 남자랑은 아무 과, 관계도 없어.”

“넌 엉덩이에 대고 토하는 재주도 있냐?”

“고, 고발할 필요 없어. 이, 일을 크게 마, 만들지 마.”

“피해자가 원하지 않아 기소되지 않은 성범죄자가 많긴 하지. 이놈 경우는 아닐 거야.”

“그런 게 아, 아니라잖아! 겨, 경찰까지 가면 내, 내가 잡혀갈 거야.”

“무슨 소리야?”

매튜가 눈매를 찌푸리며 데이빗을 돌아봤다. 데이빗은 창백해진 얼굴로 초조하게 손톱 끝을 만지작거렸다.

“데이브?”

좀체 진정하지 못하는 그를 보고 매튜가 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데이빗, 진정해. 네가 도리어 누명을 쓸 확률은 극히 낮아.”

“……그, 그런 게 아냐.”

데이빗은 흉터가 있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매, 매튜 넌 몰라. 다 내, 내가 자, 잘못한 거야.”

“……데이빗, 네가 혼란스럽다는 건 알아. 너무 충격적이라 착란을 일으킨 거겠지.”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내, 내가 저, 저 사람을 머, 먼저 납치하고…….”

말끝이 벌벌 떨렸다.

“……가, 강간했어.”

매튜의 얼굴이 굳는다. 데이빗은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카일과 매튜, 둘을 잃고 자신은 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그는 힘없이 미셸을 가리켰다.

“내, 내가 머, 먼저 했어. 저 사람이 나, 날 신고해야 돼.”

“데이빗, 난 신고하지 않을 거야.”

미셸이 끼어들었다. 매튜는 미셸의 어깨를 힘주어 내리눌렀다.

“당신은 입 다물고 있어. 데이빗,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오늘 저 질문을 꽤 여러 번 듣는다. 데이빗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쉽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었다.

“왜 그런 건데?”

매튜가 얼굴을 찡그렸다. 높은 목소리에 데이빗은 당황했다. 매튜는 데이빗이 게이란 사실도 몰랐다. 카일과 달리 학창 시절부터 한 번도 일탈해보지 않은 반듯한 남자에게 데이빗은 사실을 털어놓기 어려웠다. 자신이 미셸을 마취약으로 재우고 그 몸을 취한 걸 알면 매튜는 역겨워 데이빗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데이빗!”

“……바, 반해서.”

“뭐?”

“저, 저 남자를 조, 좋아해서 그, 그래서…….”

입술 끝이 와들와들 떨렸다.

“웃기지 마. 네가 원한 관계였는데, 네가 그렇게 엉망이 돼? 저 치가 널 납치한 거겠지.”

“……그, 그렇지 않아.”

매튜를 납득시키려면 데이빗은 더 자세한 얘길 해야 했다. 자신이 원해서 시작했던 관계가 어떻게 해서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는지. 한눈에 반해 가슴 떨려 했던 남자가 뒤늦게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해오는 아름다운 고백에, 왜 온몸을 떨고 두려움에 질리게 되었는지.

“매튜, 넌 가해자와, 피, 피해자를 오, 오해한 거야. 내가…… 시, 시작을 잘못했고, 내, 내가 대, 대가를 치른 거야. 내가 바, 반해서 그 괴, 괴상한 짓을 시작한 거야. 나, 나도 내가 왜 그,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어.”

“…….”

“저, 정말이야. 내가 왜…… 그, 그런 짓을 했을까.”

얼마나 아둔하고, 얼마나 비틀렸으면 반한 상대를 수갑으로 묶어 납치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던 걸까. 어느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데이빗?”

“비켜봐.”

미셸이 매튜를 밀어냈다.

“울지 마.”

“…….”

“울지 마, 데이빗.”

데이빗은 일그러뜨린 얼굴을 바로 할 수 없었다. 미셸과 매튜 앞에서 벌거벗은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온몸이 덜덜 경련을 일으켰다. 눈물이 흘러내려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마른 몸에서 억지로 물기를 짜내듯해 온몸이 아팠다.

* * *

좀체 진정되지 않던 감정이 썰물이 빠지듯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감정노동으로 온몸이 물먹은 듯 무겁다. 미셸과 매튜, 둘을 밀치듯 돌려보낸 뒤 데이빗은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헤드셋을 끼고 몸을 앞뒤로 까딱이고 있던 카일이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일 없었지?”

“……으, 응.”

데이빗은 대충 그렇다고 답했다. 빨갛고 충혈된 눈을 보고도 카일은 그럼 됐다며 다시 헤드셋을 꼈다.

긴 하루였다. 하지만 카일의 말을 듣고 나니 데이빗은 별일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나쁜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미셸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었고, 데이빗은 움찔거리며 경계하다 결국 바보처럼 울었지만, 그러나 별일은 아니었다.

「난 당신이 좋아, 데이빗.」

영문 모를 울음에 당황하고 있는 데이빗을 미셸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자신의 심정을 툭 털어놓았다. 매튜가 놀란 얼굴로 미셸을 바라보던 좀 전 상황이 아직도 눈앞에 있는 일처럼 생생하다.

별일이 있긴 했구나. 데이빗은 머쓱한 기분에 목덜미를 긁었다.

안방에서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나오는데 카일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친구, 그 잘생긴 부잣집 도련님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도련님보단 사장님이지만, 카일이 누굴 말하는지 데이빗은 바로 알아먹었다.

“미셸?”

“그래. 그 친구 널 좋아해.”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할 뻔했다.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카일이 싱긋 웃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네 수술비를 얼마 대준 걸 알고 자기가 그걸 갚겠다고 전화했더라. 너무 귀여워서 사랑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거냐고 쏘아붙였더니, 그 남자가 뭐랬는줄 알아?”

“너, 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거야?”

“돈으로 사랑은 못 사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어깨 위의 짐은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대. 내 마음이 다 선덕거리더라니까.”

카일은 감동을 곡으로 표현하기 위해 신중히 기타 줄을 튕기다 인상을 썼다. 머릿속으로 상상할 땐 분명 세기에 하나 나올 만큼의 명곡이었는데,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건 쓰레기였다. 안타깝게도 카일은 예술을 보는 눈은 가졌으되 그걸 표현할 재능은 갖지 못했다. 그래도 식견을 가진 덕에 데이빗의 그림이 특별하단 걸 알아봤고, 그를 도울 수 있었다.

왜 데이빗에게 그렇게까지 해줬던 거냐며, 혹시 데이빗에게 딴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니냐며 의심하는 미셸에게 카일은 답했다. 데이빗의 동화를 보고 차마 그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고.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을 죽게 놔뒀다간 파트라슈의 저주를 입을 거라고.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를 모르는 미셸은 카일이 늘어놓는 말을 전혀 이해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그 친구 너한테 홀딱 반했어. 내가 원하는 대로 휘두르고 뻥 차버려. 네가 맘만 먹으면 네 눈에서 눈물 뽑게 했던 남자 눈에서 피눈물 뽑을 수 있을 거야.”

“나, 나는 그러려는 게…….”

“아니면 그 남자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도 있겠지. 당한 만큼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카일은 인생에 필요한 대부분의 지식을 노래 가사와 소프 드라마에서 얻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사람들의 다툼이나 감정 문제에서 가장 현명하게 굴었던 건 매튜나 미셸이 아닌 카일이었다. 데이빗은 주저하다 속내를 털어놨다.

“솔직히 내가 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 모르겠어.”

“그 사람이 너랑 화해하려고 충분히 노력해?”

“아아, 그래. 노, 노력하더라.”

“어떻게?”

“그, 그가 날 수술시켜 주, 주겠대. 잘하면 코, 코랑 손가락을 고, 고칠 수 있을 거야.”

데이빗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가 미셸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단 걸 고백했다. 카일이 물끄러미 그런 그를 바라봤다. ‘넌 자존심도 없냐?’ 카일이 그리 물어도 할 말은 없었다.

“보기보다 그렇게 몹쓸 잡놈은 아니었나 보네. 얼핏 봐선 침대 위에서 막무가내로 구는 부류 같던데.”

“…….”

“데이빗, 중요한 걸 물어볼게. 그 사람, 널 얼마나 좋아하는 것 같아?”

‘그 잘생긴 남자, 너한테 반했더라. 널 얼마나 좋아하는 것 같니?’ 제인 오스틴 소설에나 나올 법한 대사다.

“카일…….”

“어서 말해봐.”

카일이 눈을 빛내며 흥미로워했다. 데이빗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턱을 괴고 데이빗의 답을 기다리던 카일이 숫기 없는 친구를 바라보며 킬킬댔다.

“데이브,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 참고로 난 후자에 한 표. 싸우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게 훨씬 아름다운 일이잖아.”

카일이 비틀즈의 노래를 부를까 봐 데이빗은 두려워졌다. ‘All we need is love~’ 미셸과 매튜가 어깨동무를 하고 살갑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떠올라 솜털이 곤두선다.

카일이 익숙한 전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공동샤워실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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