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윗의 탑-7화 (7/18)

끌림 2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일이 쏟아졌다. 며칠 동안 점심도 생략하고 일만 했던 미셸은 보던 서류들을 비서 몰래 서랍 맨 아래 칸에 쏟아버리곤 탈출을 감행했다.

마트는 너무 넓어 데이빗이 숨기로 맘먹으면 찾을 수가 없었다. 미셸은 데이빗이 퇴근해 마트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데이빗은 회색과 빨강이 섞인 헐렁한 체크 셔츠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데이빗이 별장에서 입었던 검은 셔츠 외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데이빗은 허리와 목, 손목과 발목이 꽤 가늘었다. 덕분에 거의 옷을 벗고 있었던 별장에선 데이빗이 꽤 키가 큰 편임을 몰랐다. 미셸과 거의 눈높이가 비슷할 것 같다. 밝은색 옷이 어울리며, 체구가 생각보다 작지 않다.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별것 아닌 일에 미셸은 마음이 들썩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데이빗은 꽤 여러 번 멈춰 섰다. 보기보다 산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미셸은 데이빗이 다른 때는 쭉 앞만 보고 걷다 일정한 장소에서만 멈춰 서는 걸 발견했다.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는 화구전문점에서 데이빗은 오랜 시간 머물렀다. 가게 바로 앞에선 서지도 못하고, 한 발치 떨어진 곳에서 가게에 들어갈까 말까 퍽 오랫동안 고민하던 남자는 결국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다. 미셸은 가게를 눈여겨본 뒤 뒤를 따랐다. 남자는 형형색색 작은 화분을 내놓은 꽃집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가 앙증맞은 다육 식물 앞에선 시선이 팔려 발걸음을 헛디디기도 했다. 그리 위태롭게 걸어가던 데이빗은 전혀 엉뚱한 숙녀화 전문점에서 꽤 오래도록 서 있었다. 미셸을 납치해 버려진 별장에 가두려 했던 남자가 미셸의 눈앞에서 쇼윈도 안 아찔한 힐과 번쩍거리는 에나멜, 윤기가 흐르는 가죽이 만들어낸 휘황찬란한 조형물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동성의 남자를 납치했던 간 큰 사내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을 좋아했다. 그 기괴한 간극이 섬뜩해야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셸은 데이빗이란 남자가 꽤 귀엽게 느껴졌다.

데이빗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주택가 근처의 부식 가게였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검은 반지갑을 꺼내 현금을 확인하고 데이빗은 안으로 들어섰다. 양상추와 샐러드 소스, 계란과 우유, 통조림 등을 샀다. 장을 보던 중 데이빗이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래, 뭐 더 사, 살 것 없어?”

데이빗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용으로 보아 분명히 동거인과의 통화다. 미셸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는 데이빗이 예전 아파트와 비슷한 곳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예상을 벗어난 전개다.

데이빗이 저녁 식사를 함께할 사람은 여자일까 남자일까. 미셸은 저녁 식사를 마친 데이빗이 누군가에게 이끌려 침대에 눕혀지는 장면을 떠올렸다. 흉터투성이인 몸을 드러내고, 다리를 넓게 벌리고, 등 아래 깔린 시트에 자신의 움직임으로 주름을 잡으며 잘록한 허리를 휘며 울부짖고, 쾌감을 견디다 못해 애원한다. 가쁜 숨으로 벌어진 입술에 키스한다면 데이빗은 보통의 연인들이 그러하듯 기쁜 미소로 화답할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미셸의 머릿속에서 데이빗은 늘 넋 나간 사람처럼 망연히 자신의 묶인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셸은 인상을 썼다. 자신이 과거의 실수를 곱씹고 있단 자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데이빗이 살고 있는 곳은 치안이 좋지 않은 지역인 게 확실했다. 가로등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벽들이 그라피티로 지저분했다. 미셸은 불안함에 주변을 살피는데 데이빗은 별 두려움 없이 길을 걸었다. 거주민과 이방인의 차이였다.

데이빗을 먼저 보내고, 금방 추락할 것 같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미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전쟁터에서 무사 귀환한 남자를 긴장시킬 만큼 낡은 엘리베이터는 광고지 스티커로 벽면이 너덜너덜하고, 스위치의 숫자는 다 지워져 불이 들어오지 않는 층이 많았다. 타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자신은 악운 하나만큼은 억세게 좋지 않던가. 미셸은 데이빗이 내렸던 꼭대기 층에서 내렸다.

다닥다닥 붙은 방 중 데이빗의 방이 있었다. 미셸은 첫 번째 집부터 시작했다. 비어 있는 집이 두 집, 세 번째 집의 초인종은 망가져 있었다. 네 번째 집을 두드리려다 이번엔 맨 끝 집으로 가보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누군지 묻지도 않고 집주인이 문을 열었다. 데이빗이 아니다. 머리 일부분을 빨간색으로 염색한 장발 남자가 튀어나왔다.

“뉘쇼?”

“죄송합니다. 집을 잘못 찾은 것 같네요.”

“카일 클라크, 데이빗 베커. 찾는 게 누구요?”

미셸은 눈을 크게 떴다.

“후자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쳇, 데이브 녀석이 나보다 먼저 뜰 줄이야. 들어오슈.”

들어오고 말 것도 없었다. 문 안이 바로 거실이었다. 팔을 뻗으면 양쪽 벽이 다 닿을 것처럼 옹색한 거실 두어 걸음 앞에 안방이 있었다. 사각에서 데이빗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구야?”

거실과 안방 사이, 사람 한 명이 들어가 겨우 운신할 만한 좁은 부엌에서 데이빗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일이 미셸을 아래위로 훑으며 답했다.

“널 찾아오셨대. 나 참, 난 내 판을 계약하러 온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 차,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손을 닦으며 나오던 데이빗이 미셸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미셸은 후회했다. 집까지 찾아오는 건 지나쳤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네 책 때문에 온 사람 아냐?”

둘 사이 흐르는 이상한 기류에 카일이 엉뚱한 사람을 집에 들인 거냐며 당황했다. 미셸은 전혀 모를 소리에 한쪽 눈썹을 치떴다.

“책이요?”

“그래요, 이 녀석 동화 작가거든요. 자기 이름으로 책까지 냈죠.”

카일이 대단하지 않느냐며 비죽 웃었다. 미셸은 데이빗과 막역해 보이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불쾌함을 느꼈다. 스티븐 머피는 데이빗과 자신이 고등학교 동창으로 꽤 친한 사이였다고 말했지만, 얘기를 듣다 보니 미셸은 스티븐이 일방적으로 데이빗을 괴롭힌 관계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카일이란 눈앞의 불량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 위로 스티븐 머피의 얄미운 얼굴이 겹쳐 보였다.

스티븐 머피란 남자는 미셸이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질이 나쁜 부류의 인간이었다. 납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기 위해 스티븐을 닦달했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미셸은 아직도 기분이 나빴다.

“스티븐, 데이빗이 당신을 왜 끌어들였지?”

“데이빗이 당신에게 아무 말도 안 했어? 놀랍군. 녀석이 당신에게 진즉 멍청할 정도로 로맨틱한 고백을 한 줄 알았는데. 그 녀석 호모야. 것도 얼굴 밝히는 스토커 호모지. 몇 번 보지도 못한 남자에게 반했대. 난 녀석에게 증거가 전혀 안 남는 방법도 있다고 귀띔해준 것뿐이야.”

“날 노리고, 내 배경을 노리고 처음부터 계획한 게 아니었나?”

“우발적인 일이었다고 몇 번 말했잖아. 그러니 데이빗 그 녀석이 신기한 놈인 거지. 똥구멍 찢어지는 가난뱅이 주제에 비싼 품종은 귀신같이 알고 환장해서 덤볐잖아. 뻔뻔한 건지 무식한 건지. 어쨌거나 성공 했네. 당신이랑 실컷 한 것 같던데. 기분이 어떻던가. 딱딱한 뼈다귀 같은 몸이지만, 안은 꽉꽉 조이는 게 처녀 같아서 죽여주던데.”

스티븐의 말 하나하나가 미셸의 신경을 긁었다. 미셸은 이를 악물고 남자를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게 실수였다. 닳디닳은 사립탑정은 미셸의 표정에서 꽤 많은 걸 읽어냈다. 그는 깔깔거리며 미셸을 비웃었다.

“시팔, 좆같이 좋았지? 나도 그랬다니까. 박는 순간에 천국이 따로 없었어. 몇 번 쑤셔 넣고 빼고 흔들 것도 없이 바로 쌌지. 당신 맘을 내가 알아. 그 자식을 찾아서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거지? 그게 그때라 그렇게 죽여주게 좋았는지 아님 원래 그 새끼 몸이 좋은 건지 확인해보고 싶어 미치겠지?”

미셸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지는 걸 보고 스티븐은 미셸이 데이빗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기 시작했단 걸 확인했다. 그는 사냥감을 빼앗아 배를 채우는 영악한 짐승처럼 웃었다.

“날 감옥에 처넣겠다고 했지? 증거는 있나.”

“충분히.”

“그래? 당신이 제시할 증거에 나만 나올 리는 없을 텐데. 난 감옥에 혼자 들어가진 않을 거야. 데이빗이 내 절친인데, 나만 쓸쓸히 갈 수 있나. 녀석 성격에 감옥에 가면 인기가 참 많을 거야. 말더듬이 병신 같은 놈이지만 생긴 건 그럭저럭 반반하잖아. 내가 녀석의 특이사항을 다 말하고 다닐게. 호모 짓 하다 부잣집 애송이를 납치해서 감옥에 온 놈이라고. 당신, 걸레가 된 성병 걸린 전과자 놈이랑 할 맘은 있어?”

미셸은 스티븐의 말 중 대부분이 허풍에 불과할 거라 믿고 싶었다. 경찰차가 보일 때마다 떨며 긴장하던 납치범 사내의 모습이 생각났다. 미셸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데이빗이 감옥 안에서 자살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스티븐이 염탐하는 눈으로 미셸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녀석을 강간했잖아.”

“뭐?”

“코뼈를 부러뜨렸더군. 눈빛이 시체 같던데. 사랑 넘치는 행복한 섹스였으면 얼굴이 그 꼴이려고? 녀석을 강간했으면서 당신은 데이빗과 날 감옥에 보낼 참이군.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런지 정당방위 수위를 너무 유연하게 적용하는 거 아닌가?”

미셸은 눈앞 남자에게 진한 살의를 느꼈다. 스티븐은 데이빗을 강간했고, 또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그를 범하리라 장담한 이였다. 자신과 스티븐이 결국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분했다. 속내와 치부를 들킨 부끄러움과 살의가 엉켜 미셸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갈무리하기 어려웠다.

“쓰레기 같은 새끼.”

스티븐은 어깨를 으쓱였다. 미셸은 눈앞의 인간이 싸울 가치도 없는 부류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꺼져.”

탐정은 원하던 결과를 얻고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미셸은 상념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데이빗이 이번에도 역시 쓰레기 같은 친구에게 붙잡혀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미셸은 카일이란 남자에게 신경을 끄고 데이빗만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동화를 쓰는 줄은 전혀 몰랐어. 놀랍군.”

데이빗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상대의 얼굴에 미셸은 꿀꺽 침을 삼켰다.

“지난번 대화 중 느낀 건데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그걸 풀려고 왔어. 난 당신에게 부정적인 앙금이 있어서 당신을 찾은 게 아니야. 데이빗, 오히려 난 당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어.”

듣고 있던 카일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이 소프 드라마 같은 대사는? 데이브, 이 사람 너랑 무슨 관계야. 헤어진 연인은 아니지?”

듣고 있던 데이빗이 뒤돌아서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비좁은 공간에서 격하게 움직이느라 뼈가 탁자에 부딪히며 큰 소릴 냈지만 연연하지 않고 쏜살같이 들어가는 모양새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미셸은 데이빗이 몸을 돌린 순간 그가 안방으로 숨어버릴 것을 알았다. 굼뜬 카일을 밀쳐내고 달려가 미셸은 문틈에 발을 들이밀었다. 데이빗이 당황해 문고리를 놓쳤다. 미셸은 몸이 굳어버린 데이빗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도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 진짜야?”

남자 단둘이 좁은 방으로 쪼르르 들어가버린 풍경에 카일이 쩝 입맛을 다셨다. 미셸은 문을 막고 섰다. 데이빗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어두운 방 안에서 데이빗의 푸른 눈동자가 까맣게 빛났다. 풀벌레 자욱한 밤, 불 꺼진 별장의 방에서도 남자의 눈은 저리 검푸르게 빛났었다. 문틈 아래로 들어오는 빛에 창백하게 뜬 데이빗의 얼굴이 비쳤다. 별장에서 있던 내내 수염으로 가칠하던 얼굴이 매끈한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얼굴이 하얘. 딴 사람 같네.”

대꾸 않고 데이빗은 문 옆의 벽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려 했다. 문을 열고 나가버리려는 걸로 오해한 미셸이 그의 팔목을 쥐고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데이빗이 격렬히 꿈틀댔다. 미셸은 얼굴과 가슴을 밀어내는 만만치 않은 힘에 당황해 팔목과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이, 이거 놔!”

목소리가 다급했다. 미셸은 놀라 그를 완전히 놔주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어.”

멀리 떨어져 나간 데이빗이 잠자코 손목만 문질렀다. 머쓱한 기분에 입술이 마른다. 미셸은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침대에 바로 눈이 갔다. 정사의 흔적은 다행히 없다. 안도하자 작은 책상 위에 널린 화구가 그제야 눈에 띄었다. 색연필이라곤 12색 이상의 것을 사용해본 적 없는 미셸은 난생처음 수십 자루가 넘는 형형색색 다채로운 색연필을 보았다. 화구 아래 그리다 만 그림이 눈에 띄었다. 미셸은 화구를 치우고 데이빗이 그린 그림을 들어 올렸다.

“보, 보지 마.”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어지는 법이다. 아름다운 색채다. 컴퓨터 그래픽으로나 나올 것 같은 색이 색연필로도 나온다는 게 미셸은 신기했다. 왜 반만 색칠하다 말았는지, 왜 각도는 이토록 비틀렸는지, 궁금해 물음을 던졌다.

“왜 그림을 그리다 말았어?

“시, 실패한 그림이라 그래.”

데이빗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받았다.

“실패라니, 내가 보기엔 꽤 멋진데.”

미셸은 원체 그림 쪽엔 보는 눈이 없었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그림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책상 아래 구겨져 나뒹구는 종이를 꺼내 미셸은 그것을 펴보았다. 종이 안 스케치를 바라보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그림, 날 꽤 닮은 것 같은데.”

데이빗이 달려들어 종이를 찢었다.

“이, 이딴 거 보, 보지 마. 어, 엉망이야.”

“그렇지 않아.”

“시, 실패한 그, 그림이야.”

데이빗은 이어 책상 위 채색된 그림마저 찢어버렸다. 히스테릭한 반응에 미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래? 잘 그렸는데.”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데이빗의 그림은 미셸을 놀라게 할 만큼 훌륭했다. 데이빗은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다, 당신한테 보, 보여주고 싶지 않아.”

“이러지 마. 당신 그림은 내 눈에 정말로 아름답게 보여. 진짜야. 난 이렇게 예쁜 색은 본 적이 없어.”

“예, 예뻐?”

쓰레기통에 그림을 구겨 넣던 남자가 미셸의 말에 기가 차 웃었다.

“다, 당신 눈에나 그, 그리 보이지.”

데이빗은 술 취한 사람처럼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림이 그려지지 아, 않아. 아, 아무것도 그, 그리고 싶지 않아. 그려지지도 아, 않아. 다 끄, 끝이야. ……아, 아냐. 내, 내가 이, 이런 말을 하, 할 피, 필요가 없지.”

말투가 점점 어눌해지고 낮아졌다. 고개를 수그린 채 얼굴을 세차게 문지르던 남자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빗이 피곤기 묻어나는 얼굴로 미셸을 바라보았다.

“도, 돌아가. 다, 당신 집으로. 이, 이젠 무, 묶이지도 않았잖아.”

“…….”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러나 미셸은 자신의 마음속 둑 한가운데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데이빗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미셸은 쇠사슬에서 풀려나 다른 무형의 족쇄에 묶였다.

“아니, 여전히 묶여 있어.”

“?”

“별장에서 내 머릿속 어딘가가 망가졌나 봐. 당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

데이빗이 미셸을 밀어내고 방을 나가려 한다. 놓칠 수 없다. 미셸은 한걸음에 다가가 데이빗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놀란 데이빗이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안으로 보인 혀에 정신이 날아갔다. 미셸은 데이빗의 뺨을 붙들고 입술과 혀를 빨았다.

매끈히 면도한 턱과 뺨이 부드러웠다. 별장 안에서는 둘 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로 엉겨붙었었다. 열이 올라 늘 땀에 절어 있던 데이빗의 몸에서 지금은 부드러운 비누 향이 풍겼다. 막 샤워를 마치고 느슨해진 근육과 물기 어린 머리칼에서 풍겨오는 체취가 지독히도 달콤했다. 데이빗이 용을 써 미셸을 떨쳐내려 했다. 꿈틀거림에 정신이 훅 날아갔다. 미셸의 몸속 모든 신경이 일어나 눈앞 상대의 저항을 꺾고, 그 몸을 열어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쾌감이란 쾌감은 모두 뽑아내 빼앗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미셸은 돌처럼 딱딱해진 상대의 등줄기를 연거푸 세차게 쓸어내렸다. 겁에 질린 데이빗이 벽까지 뒷걸음쳐 도망치자 미셸은 상대를 벽에 누르며 자신의 하반신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몸이 닿는 곳마다 열이 올랐다. ‘발정’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였다. 데이빗이 짐승처럼 신음하며 거칠게 숨을 쏟아냈다. 미셸은 괴로워하는 상대에게서 잠시 떨어져 나와 데이빗의 뺨을 쥐고 홀린 사람처럼 그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고양이처럼 할짝거리며 젖은 입술을 핥다 미셸은 두 번째 키스를 시도했다. 혀를 데이빗의 입안에 넣자마자 끝에 따끔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미셸이 몸을 물린 순간 정신을 차린 데이빗이 팔꿈치로 미셸의 머리를 가격해 밀쳐냈다. 예상 못한 공격에 놀라 입을 꽉 다물다 미셸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빗맞은 것인데도 골이 흔들린다. 데이빗에게서 떨어져 나와 미셸은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침을 삼켰다. 물린 혀끝에서 나온 피 탓에 목구멍 안까지 짭조름한 맛이 밀려들었다.

“아……!”

격분한 데이빗이 덜덜 떨며 새빨개진 얼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젖은 입술을 북북 닦으며 무어라 끊어진 음절을 뱉어내긴 하지만, 소리가 앞니에서 딱 막혀 나오질 않았다.

“댁들, 뭐해?”

카일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데이빗은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말하기를 포기하고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었다.

“데이빗, 어디 가?”

“……사, 살 게 이, 있어서.”

저녁을 하다 말고?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데이빗과 그를 뒤따라가는 미셸을 쳐다봤다.

미셸은 금방 데이빗을 뒤따라 잡았다. 한 층 아래로 데이빗의 정수리가 보였다. 말로는 안 되니 발로 도망치려는 모양인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미셸은 말도, 발도 빨랐다. 퇴근한 사람들이 몇 층에선가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있는지 엘리베이터는 저층에서 여간해 올라오질 않았다. 데이빗은 계단을 통해 타박타박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라 쳐도 걸음걸이가 너무 느렸다. 뛰다시피 그를 쫓아 내려왔던 미셸도 데이빗의 박자에 맞춰 느리게 걸어 내려왔다. 아무도 없는 기다란 통로에 그와 데이빗이 걷는 소리만이 유달리 크게 울렸다.

“따, 따라오지…… 마.”

“금방 따라잡아 앞설 테니 걱정하지 마.”

난간을 쥐고 꾸준히 내려가던 데이빗이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쿨럭거렸다. 기침을 눌러 참으며 데이빗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나, 나한테 원하는 게 뭐, 뭐야. 나, 나한테 화, 화풀이할 게 더 나, 남았나.”

숨이 그렁그렁 불안하게 이어졌다.

“화풀이?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난 당신한테 악감정이 남아 이러는 게 아냐.”

“아, 악감정이 아니면 조, 좋은 감정으로 이, 이런다고? 마, 말도 안 되는 소, 소리야. 나, 난 다, 당신이랑 아, 안 자.”

이리 직설적인 말이 튀어나올 줄 몰랐다. 미셸은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발끈했다. 미셸은 데이빗을 신고할 마음도, 해코지할 생각도 없었다. 스티븐이나 데이빗이나 미셸을 보는 눈은 똑같았다. 데이빗과 어떻게든 한번 해보려고 환장한 놈 취급을 했다. 미셸은 좀 전 카일의 집에서 데이빗을 억누르며 강제적으로 입술을 빼앗았다. 혐의를 부인할 수 없어 더 부아가 치밀었다. 미셸은 화난 목소리로 데이빗의 말을 반박했다.

“내가 당신이랑 자는 게 목적이었으면 이런 식으로 안 해. 쉬운 방법이 널렸는데 뭐하러.”

“……그렇겠지.”

데이빗이 실낱같은 목소리로 동의를 표했다. 젠장, 미셸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돈을 쓰든, 지은 죄를 빌미로 협박하든 미셸은 맘만 먹으면 데이빗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다. 그걸 데이빗이 순순히 인정해버리자 기분이 엿 같아졌다.

“이봐, 내 말은-.”

어깨를 잡았다. 데이빗이 그대로 쓰러졌다.

“데이빗?!”

데이빗은 몸을 웅크린 채로 쌕쌕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헐떡였다. 위경련이라도 일어난 걸까.

“왜 그래? 위가 아픈 거야?!”

“수……숨을…….”

데이빗이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남자는 바닥에 드러누워 몸을 점점 웅크리기만 할 뿐 전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빌어먹을, 미셸은 데이빗의 구부러지는 몸을 억지로 바르게 누이고 그 위로 올라탔다. 인공호흡을 위해 목을 젖히고 코를 막자 데이빗이 호흡곤란 중인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게끔 난폭하게 저항했다.

“코를 부러뜨리려는 게 아니야! 당신 위험하단 말이야!”

“당신이 훨씬 위험해. 저리 비켜.”

기척도 없이 그들을 뒤따라온 카일이 미셸을 밀어냈다. 카일은 능숙하게 데이빗의 셔츠 단추를 풀고, 비닐봉지로 입과 코를 가렸다.

“데이빗, 괜찮아. 넌 이미 충분히 숨 쉬고 있어. 천천히, 천천히.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뱉어.”

데이빗은 눈을 감고 카일의 말에 따라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붉게 물든 얼굴이 식은땀으로 번들거렸다. 어깨가 들썩일 만큼 격했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카일은 봉지를 치우고 데이빗의 팔과 다리를 문질렀다. 데이빗은 눈 뜰 기력도 없는지 실신한 사람처럼 누워 있기만 했다. 카일은 데이빗의 늘어진 몸을 일으켜 겨드랑이 쪽으로 팔을 넣어 그를 부축했다. 미셸도 반대쪽을 지탱해 카일을 도왔다.

“앰뷸런스를 부르는 게 낫지 않겠나?”

미셸의 말에 카일이 피식 웃었다.

“보험도 없는 사람을 병원에 데려가서 뭐하게?”

철없는 도련님을 무시하는 티가 역력했다. 미셸은 불만스레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주치의라도 부를게.”

“그러시든지.”

카일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미셸의 연락에 주치의와 비서인 리플리가 함께 왔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며 일단 안정을 취한 뒤 기저 원인을 밝히기 위해 꼭 병원에 방문하라고 충고했다.

“입원은요?”

“환자가 병원을 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정신적 요인이 큰 병이니까 편안한 곳에서 쉬게 하고 통원치료를 받게 하는 게 낫지요.”

맘씨 좋은 의사는 입원을 시키라는 미셸의 암묵적인 요구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카일이 건들거리며 미셸의 어깨를 두들겼다.

“의사를 불러줘서 고마운데, 볼일 다 끝난 것 같으니까 돌아가쇼.”

“영양제를 다 맞는 것 봐서. 당신, 링거액 조절할 줄은 아나?”

미셸은 미덥지 않단 표정으로 카일을 흘겨봤다. 카일이 빙긋 웃었다.

“난 혼자 주사도 놓는 사람인데, 그 정도를 못하려고.”

“…….”

뭔가 무서운 말을 들은 기분이다. 카일은 아쉽게도 긴 소매를 입고 있어 미셸은 바늘 자국을 확인할 수 없었다.

* * *

퇴근했다가 도로 끌려온 비서 리플리는 돌아가는 길 내내 빈정대는 말로 미셸을 찔러댔다.

“무슨 일이기에 멀쩡한 남자가 코르셋에 고문당한 여자처럼 쓰러진답니까. 사장님의 진짜 성격을 목격했나보죠?”

“겉보기에만 멀쩡하지 데이빗은 골병이 잔뜩 든 사람이야.”

“속에 골병든 걸 어찌 그리 잘 아는데요. 역시 제 짐작대로 두 분은 각별한 사이셨군요. 밀린 일감을 몰래 버리고 보러 갈 만큼 다정한 관계이신가요?”

“……각별하기야 하지.”

“신기하네요. 제가 알기론 사장님은 친구가 없는 걸로 아는데. 저 모르는 새 언제 그리 친한 친구를 사귀셨나요. 말씀해보세요. 무슨 일로 사람을 쓰러뜨리고, 그 사람을 위해 의사까지 불러준 건지.”

리플리는 속도를 낮추지 않은 채 급커브를 돌렸다. 별일 아니라면 용서치 않겠단 의지가 엿보이는 코너링에 미셸은 내장이 이리저리 쏠려 갈비뼈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버텼다. 리플리가 짐짓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시죠? 제 동생이 사장님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것. 사장님 비서직을 맡기 전에 제가 동생에게 전화로 사장님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을 날리셨다면서요.”

“뒷조사를 했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쨌거나 전 사장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비서직을 맡았어요. 뭘 쪽팔려 하십니까. 전 이미 매일매일 각오를 다지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어지간한 일엔 눈도 깜빡 안 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알아서 뭐하게.”

“알아야 돕죠. 사정을 알아야 별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 부림을 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후자가 본심이렷다. 미셸은 눈을 부라렸다. 그래도 어쨌거나 리플리는 미셸의 수족이었고, 미셸은 자신을 도와줄 능력이 있는 유능한 비서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리플리는 병든 고양이를 고아 먹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찬바람 쌩쌩 날리는 길가에 미셸을 버려두고 갈 게 뻔했다. ‘별일은 아냐. 내가 날 납치한 남자를 두들겨 패고, 그 뒤 강제적인 관계를 꽤 여러 번 가졌는데 말이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셸은 리플리의 유도신문을 끝까지 버텨냈다.

* * *

기획안을 낸 작자 중 기본에 기본도 모르는 멍청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미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류 뒷장을 넘기려다 종이를 쭉 찢고 말았다. 그는 오른쪽 상단에 찍힌 박음쇠를 뽑아내며 짜증을 부렸다. 평소엔 펄펄 날아다니다 이상하게 책상에만 앉으면 굼떠져 비서들의 눈총을 사는 마당에 하찮은 박음쇠마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리플리가 신경증 환자처럼 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미셸을 옆에서 슬쩍 곁눈질했다.

“약혼녀분은 요새 연락이 뜸하시네요.”

만약 리플리가 미셸의 상사였다면 그는 완곡 화법 따윈 집어던지고 까놓고 물었을 것이다. ‘너 혹시 욕구불만이냐?’ 미셸이 살벌한 눈으로 리플리를 노려봤다.

“이미 헤어진 여자 얘길 굳이 하는 이유는?”

“정말 헤어졌어요? 혹시 사장님의 성질머리를 더는 감당 못하겠다고 하던가요.”

“시팔, 내가 찼어!”

리플리는 전직 모델을 차버린 사장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미셸은 빠드득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똑똑히 들어. 내 쪽에서 먼저 찬 거야!”

“네, 네.”

리플리는 성질난 사장을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미셸은 멀리서 지켜보는 비서의 눈빛에서 사념을 느꼈다. ‘그래서 저리 왕창 쌓인 거군.’

“어라?”

리플리가 잠자코 내미는 서류를 기계적으로 살피다 미셸은 전혀 예상 못한 그림을 발견하고 탄성을 냈다. 데이빗의 동화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왜요. 문학은 아예 보기도 싫으신가요. 그건 입선작입니다. 작년에도 공모전 최종 작품으로 뽑힌 건 일부분을 인쇄해 드렸잖습니까. 쓸모없는 짓인 건 알지만, 회사 이름으로 상금이 나가는 거라 규칙이 그렇다고 하더군요.”

“누가 쓸모없대?”

미셸은 정색하고 원고를 살폈다.

“이게 최고네. 딱 봐도 이게 제일 좋아. 그렇지?”

미셸은 데이빗의 동화를 짚었다.

“줄리아와 얘기를 하세요. 그녀가 최고 책임자잖아요.”

“…….”

미셸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솔직히 줄리아가 무서웠다. 능력 좋고 미모 출중한 전 약혼녀는 그와 사귈 때만 해도 부드러운 여자였다. 별장에서 돌아온 뒤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미셸은 그녀와의 약속을 자꾸 잊어버렸고, 결국 그녀와 대판 싸우고 헤어진 뒤 이별의 절차를 밟고 있었다. 미셸과 사귈 때면 클래식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세련되게 소화하던 여자는 미셸과 헤어진 뒤 줄곧 돌체 앤 가바나만을 입고 다녔다. 옷을 입는 게 아닌, 사람을 옷에 끼워 넣는 게 맞을 전위적인 드레스로 무장하고는 줄리아는 냉기 뚝뚝 흐르는 눈으로 미셸을 대하곤 했다. 그 야차 같은 얼굴을 마주할 생각에 간담이 서늘하다.

“그녀도 바쁠 거야. 전화로 얘기하든가 하지.”

리플리는 급히 소심해진 미셸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미셸은 서류 더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데이빗의 얼굴이 눈앞에 오락가락해 집중하기 어려웠다. 펜 끝으로 애꿎은 종이만 꾹꾹 찔러대다 미셸은 눈앞에서 왔다갔다 바삐 일하는 리플리를 발견했다.

“리플리, 아주 희한한 얘기가 하나 있는데 듣고 의견을 좀 말해봐. 이건 납……. 아니, 강도와 집주인 얘기야. 강도는 그냥 강도가 아니라 집주인을 내심 좋아하던 사람인데 차마 말을 못하고 강도인 척 집에 들어왔고, 집주인은 그걸 모르고 강도를 쫓다 둘이 지하 창고에 갇히고 말아. 날이 추워서 끌어안고 자다 보니 어떻게 되어서 둘이 섹스까지 하게 됐는데…….”

듣고 있던 리플리가 유치하다며 푸하하 웃었다.

“뭡니까. 저체온인 연인을 나체로 녹여주는 얘긴 요샌 포르노에서도 안 나오는데.”

“닥치고 들어봐. 창고에서 나온 뒤 집주인은 내심 강도가 보고 싶어져서 강도를 찾았는데, 강도가 진저리를 치면서 집주인에게서 도망을 치는 거야. 집주인이 근처에만 와도 싫어하고 놀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 집주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리플리가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싫어한답니까? 원래 좋아했다면서요.”

“아, 그게 집주인이 처음에 그가 단순한 강도인 줄 알고, 상대를 꽤 많이 때렸거든.”

“얼마나요.”

“뼈가 부러지고, 그 자리에서 실신할 정도?”

“그 상태로 섹스를 했답니까?”

“그게…… 거의 강간에 가까운 관계였다고 하더군.”

“강도를 때리고, 거기다 강간까지요? 주인도 참 대단한 여자네요.”

“남자야.”

“그럼 아무리 강도라도 그렇지, 여자를 그렇게 때렸대요?”

“강도도 남자야……. 게이지.”

“……그렇군요. 참 흥미로운 얘기네요.”

미소 띤 리플리의 입매가 힘겹게 실룩였다. 리플리는 신성한 근무 시간에 별 시답잖은 얘기를 늘어놓는 사장을 바라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강도가 도망치는 이유요? 몰라서 물으세요? 마조히스트가 아니면 어떤 제정신 박힌 사람이 자길 똥 취급한 사람을 계속 좋아한답니까. 당연히 진저리치고 싫겠죠. 사장님이라면 누가 사장님을 죽도록 패고 강간하면 좋겠어요? 아무리 좋아하던 사람이라도 오만 정이 다 떨어질걸요. 게이끼리 강간이면 직장 파열로 평생 기저귀를 차게 될 수도 있다는데,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놓고 뻔뻔히 다시 찾아가요? 내가 그 강도면 집주인 놈 불알을 따버리겠어요.”

리플리는 어지간한 여자도 울고 갈 곱상한 얼굴에,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엘리트였단 느낌으로 도배를 한 남자였다. 그러나 실상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어릴 적부터 새끼 돼지를 수도 없이 거세하며 대학 등록금을 번 억척스러운 과거를 지녔다. 그런 그가 ‘불알불알’ 노래를 부른다. 미셸은 꼭 자기를 겨냥한 것 같아 소름이 쫙 끼쳤다.

“그 집주인은 대체 무슨 마음으로 강도를 다시 찾아갔답니까? 혹 강도가 강간죄로 자길 잡아넣을까 봐 입막음을 하러 갔대요?”

“그런 마음도 없잖아 있었을 거야.”

“그런 마음이면 강도가 자길 무서워하는 게 나쁜 상황이 아니죠. 돈을 쥐여 주고, 강도짓은 네가 먼저 했다는 식으로 협박해 아예 입을 못 열게 하면 되니까.”

마키아벨리형 비서인 리플리가 끔찍한 소릴 아무렇지 않게 했다. 미셸은 데이빗이 숨을 몰아쉬며 허수아비처럼 쓰러지던 일을 떠올렸다. 데이빗은 미셸의 말에 너무 쉽게 겁에 질렸다. 객관적인 피해는 미셸이 훨씬 많이 입혔는데, 과거의 죄로 두려움에 떠는 건 데이빗 쪽이었다. 그에게 여태 진지하게 사과 한 번 안 했단 걸 미셸은 뒤늦게 깨달았다.

“집주인은 그가 보고 싶었대. 딱히 이유는 댈 수 없지만, 여하튼 강도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고, 그를 한 번 만나고 싶었대.”

“강도가 언제 죄를 물어올까 불안했던 게 아니라, 강도를 만나고 싶었다고요? 그 집주인 제정신이 아니네요. 그런 상황에서 강도한테 반한답니까.”

“반하다니?”

“반한 게 아니면 그런 끔찍한 인연인 사람을 왜 다시 만나려 한답니까. 딱 보이네요. 섹스가 무척 좋았거나, 아니면 집주인은 상대를 때리면서 흥분하는 놈일 거예요.”

“반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관심이 좀 생겼을 뿐이지. 게다가 둘은 남자라고 했잖아.”

“아하, 그래요? 집주인한테 물어보세요. 강도가 만일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으면 어떻게 했을지.”

미셸은 눈을 깜빡였다. 자신과 비슷한 체구의 남자를 여자로 바꿔보는 건 영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 해보았다.

새벽 거리에서 미셸을 구해낸 일을 계기로 연심을 품고, 시한부 선고를 받자 정신이 나가 미셸을 납치했다던 사람이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대던 모습과 멍든 얼굴의 피딱지를 무심히 긁어내리며 체념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죄책감과 이상한 흥분이 가슴을 들쑤셨다. 데이빗에게 품은 자신의 감정은 싸구려 동정이고, 거슬리는 불안감이며, 덜 채워진 저열한 육욕이었다. 그런데도 섞이고 섞여 나온 결과물은 원재료와 기괴할 정도로 달랐다.

그것은 사랑에 가까웠다.

“당장 집에 데려와 가뒀을 테지.”

잠긴 목소리에 리플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셸을 쳐다보았다. 헛숨을 들이켠 순간 눈치 빠른 비서는 그게 미셸 본인의 이야기란 걸 알아차렸다.

* * *

햇볕이 따갑다.

미셸은 멍청히 정신을 놓고 있다가 뺨이 따가워지는 걸 느끼곤 차창을 올렸다. 그 모습에 앞좌석 운전석의 비서가 혀를 찬다. 미셸은 험악한 모양새로 미간을 좁혀 비서의 시선을 떼어놓았다. 지난번 수석 비서인 리플리에게 차를 강탈해 희희낙락해하며 마트로 질주해 갔다가 코가 쭉 빠져 돌아온 일 이후 리플리는 이미 무언가 감을 잡고 있었다. 미셸의 이야기가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잘난 맛에 살던 미셸이 간만에 수세에 몰린 상황을 놓치지 않고 리플리는 이런저런 과장된 동작들로 미셸을 자극해 그 반응을 즐겼다. ‘리플리, 내 꼬락서니가 그렇게 웃긴가?’ 미셸이 차마 묻지 못하는 건 비비 꼬인 비서가 가차 없이 ‘네.’라고 답할 걸 알아서이다.

마트에서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카일의 아파트에서의 만남도 형편없었다. 부정과 냉대만이 미셸이 데이빗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반응의 다였다. 자신을 바라보던 데이빗의 눈빛을 되새길 때마다 머리가 묵직해졌다. ‘강간 플레이 파트너는 딴 데 가서나 알아보라니…….’ 데이빗에게 한 방 크게 맞은 후, 미셸은 좀체 그를 만나러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에겐 데이빗을 만날 적당한 구실이 없었다.

그럴듯한 구실이 있어야만 관심 가는 상대를 만나러 갈 수 있다니. 뭐가 이따윈가. 미셸은 뒷좌석에서 서류를 뒤적이며 투덜거렸다.

“이딴 걸 기획안이라고 내고 있나? 이 너드(nerd)들은 자기들도 이해 못하는 상황에 대해 숫자 나열만 해대면 납득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들 하나 본데, 내가 원하는 건 불친절한 통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象)이야.”

미셸은 서류를 집어 던지며 간부들이 어리고 경험 적은 자신을 물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쓰레기 같은 계획서만 제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씩씩거렸다. 운전석에서 리플리가 의아한 눈으로 미셸을 바라보았다.

“거기 모아둔 건 어제까지 사장님이 괜찮다고 직접 분류한 안들인데요.”

“…….”

“쑥스러운 자랑이지만, 제가 사람 심리를 보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특히 성격이 나쁘고 인성이 부족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의 심리는 더 잘 봐요. 연애사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도 팔잡니다. 뭐가 문제랍니까. 설마 사장님의 매력에 안 넘어오는 사람이 있으려고요?”

비서는 나붓한 말투로 물었으나 매사가 고까운 미셸은 비서의 말이 이죽거리는 비아냥거림으로 들렸다. 미셸은 애써 의연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랄 게 뭐가 있겠어. 자네 말처럼 내가 작정하고 덤비면 나한테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려고.”

“물론이죠. 미셸, 당신처럼 쉽게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죠. 사장님께서 맘먹고 매력을 뽐내면 누가 그걸 거부하겠어요. 그대로 게임 종료죠.”

게임 종료? 미셸은 9회 말 투아웃, 마지막 스트라이크를 노리며 던졌던 공이 타자의 얼굴을 직통으로 맞힌 기분을 느끼는 중이다. 카일이 한시라도 빨리 쫓아내려는 걸 버티고 버텨 미셸은 결국 데이빗이 깨어나는 걸 볼 수 있었다. 미셸은 과호흡 증세에서 벗어나 겨우 호흡이 안정된 데이빗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번 만남을 약속받으려는 이유에서였다.

「난 당신을 신고하고, 잡아넣으려고 온 게 아냐. 당신과 화해하고 싶었어. 언제 어디서 차나 한잔 마시며 차분히 얘기할 수 있을까.」

미셸은 최선을 다해 수작을 걸었다. 데이빗의 반응은 참으로 냉정했다.

‘커피 한잔 하자는 게 그리 나쁜가.’

요새 날씨도 더운데 어디 전망 좋은 곳에서 차나 한잔 하며 잠깐 얘기하지 않겠느냐는, 고등학생 시절에도 안 썼던 수법을 썼다. 결과는 참혹했다. 데이빗은 미친 사람 보듯 미셸을 쳐다보고는 이내 이불을 덮어써버렸다. 그 일을 생각하니 미셸은 슬슬 열이 받는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고전적인 방법을 쓰세요. 관심을 보이고, 사소하지만 진심 어린 선물도 사주고, 친절하게 대해요. 사랑한다는 고백을 반복하고, 그렇게 마음을 열다 보면 얻지 못할 사랑이 없지요.”

미셸은 이번에도 리플리의 말을 고깝게 들었다.

잘해주고, 잘해주고……. 마음을 얻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섹스도 한다. 아주 쉬운 일이었다.

“……시팔, 그게 그리 쉬우면.”

“네?”

“아냐, 잠깐 말이 헛나왔어.”

자기도 모르게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험악한 말을 뱉었다. 미셸은 손사래를 쳤다.

미셸은 이제껏 한 번도 자신이 좋아한 상대에게 거절받은 경험이 없다. 부담스러워 미셸을 미리 쳐낸 적은 있을지언정, 미셸에게 매력을 못 느껴 그를 무시한 상대는 없었다.

이번 상대는 여러모로 기존의 상대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일단 남자였고, 나이가 많았다. 가난했고, 몸은 얼룩덜룩한 흉터로 가득했다. 첫 만남에서 반하기는커녕,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첫날 미셸은 원하지 않는데도 그를 억지로 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얼마간 남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다.

미워하기만 하고 끝났다면 그건 나름 괜찮은 결말이었을 것이다. 미셸은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기회를 얻었다. 그의 몸 아래 사내가 깔린 날, 미셸은 상대에게 자신의 분을 실컷 풀었다.

상대방에게 반했다는 걸 은연중 드러내며, 잘해주고, 잘해주고, 고백, 사랑의 확인, 그리고 섹스. 이쪽은 그 방식이 안 통했다. 통할 수가 없었다. 별장 안에선 전혀 다른 수순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감금, 폭력, 강간……. 그 수순 뒤에 고백과 사랑을 붙이는 게 가당키나 한가. 미셸은 서류를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리플리, 잘 아는 정형외과 의사 있어? 아는 사람 중에 부러진 뒤 치료를 못해서, 이미 붙은 코뼈랑 손가락을 치료하고 싶단 사람이 있는데.”

“그 정도면 수술까지 해야 할 것 같은데, 실력 있는 의사를 한 명 알죠. 지금 연락할까요.”

“아아, 나중에 알려줘. 환자가 당장은 못 갈 것 같으니까.”

커피 한잔 하자는 말에도 미친놈 보듯 봤던 사람이니, 데이빗이 미셸의 말을 순순히 따라 병원에 갈 확률은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잠깐 세워줘.”

미셸은 차에서 내려 서점으로 갔다. 흘낏 보았을 땐 설마 했는데, 데이빗의 책이 거기 있었다. 며칠 전 만났을 때 편집장이 곧 책이 풀릴 거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이걸로 찾아갈 아주 좋은 구실이 하나 생겼다. 미셸은 책을 사서 차로 돌아왔다. ‘데이빗, 이거 설마 당신 책이야?’ 미셸은 입안으로 웅얼거리며 할 말을 연습했다.

포장을 뜯고 안을 펼치자마자 카일의 집에서 본 것과 비슷한 그림체의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둡고 아름다웠다. 책장을 넘기며 미셸은 작게 중얼거렸다.

“붓과 물감을 선물하면 좋아할까. 아주 비싼 걸로 말이지.”

미셸은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 카일의 집, 억지로 밀고 들어간 방 안에서 미셸은 데이빗의 그림을 칭찬했다. 데이빗은 미셸의 면전에서 그림을 구겨버렸다. 미셸이 선물을 사들고 간다면 데이빗은 그걸 창밖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게 그림 그리는 사람 손가락은 왜 부러뜨렸어요.”

리플리가 미셸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고 피식거렸다. 이번엔 미셸이 일부러 고깝게 들은 게 아닌, 확연한 비아냥거림이 맞다.

* * *

점심을 포기하면 몇 시간 내어줄 수 있느냐는 말에 리플리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미셸은 세 개를 들어 보이고, 리플리가 협상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려버렸다.

“뭐 때문에 세 시간이나 필요한데요?!”

등 뒤에서 리플리가 한심하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자체 필터링을 가동하니 이런 소리였다. ‘그 사람이 봐주지도 않잖아요. 대낮부터 침대에서 뒹굴 것도 아니면서 뭐하러 세 시간이나 필요해요?’ 미셸은 리플리의 환영을 향해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 쳐주면서도 내심 어쩌면 오늘은 다르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그는 간밤 침대 위 사슬에 묶여 셔츠 한 장 차림으로 누워 있던 데이빗의 모습을 꿈꿨다. 욕망이 그를 충동질해 발걸음을 바삐 놀리게 만든다.

카일의 집은 여전히 거지 소굴 같았다.

“슬럼이 따로 없네. 이런 거지 같은 데서…….”

미셸이 말 끝내기 무섭게 공동 샤워장에서 카일이 튀어나왔다.

“버젓이 사람 사는 곳을 슬럼 취급하는 싸가지는 타고난 거야?”

시작부터 이죽거림이다. 미셸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빗은 당신을 만날 맘이 전혀 없다던데, 당신 여긴 왜 또 왔어?”

“그쪽이 데이빗의 트럭을 벌써 팔아치웠는지 감시하러 왔지.”

지난번, 미셸은 카일의 집을 떠나다 주차장에서 데이빗의 트럭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더니 카일이 달려와 자신의 차에 손대지 말란 소릴 해댔다. 못 만난 사이 데이빗의 트럭은 카일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미셸은 데이빗이 자신의 유일한 재산을 카일에게 줬단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여러 가지 정황 상 미셸은 ‘카일=제2의 스티븐 머피’란 의혹을 버릴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관심 갖는 사람은 많아. 좋은 가격으로 팔 수 있으니까 굳이 바쁜 당신이 안 와도 되는데.”

카일이 코를 쥐고 훌쩍거리며 말했다. 미셸은 미간을 찌푸렸다. 카일이 하는 폼이 꼭 마약쟁이들이 코로 흰 가루를 들이마시고 더 깊이 흡수하기 위해 킁킁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더러운 엔진 소리를 듣고도 산다는 사람이 있어? 사고가 열댓 번은 난 차처럼 보이던데.”

“스포츠카 엔진을 떼어다 붙여 튜닝한 걸로 사기 치면 되지. 장사 하루 이틀 하나.”

느물거리며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미셸은 발끈했다. ‘데이빗은 아직 안 죽었어. 이 멍청한 놈아. 유산 상속 절차도 없이 벌써 트럭을 팔겠다는 거야?’ 미셸은 화를 내려다 참았다. 농담이라 하더라도 수술 후 아직 시름시름 앓는 데이빗을 가리켜 아직 안 죽었네, 어쨌네 하는 소릴 하기 싫었다.

데이빗의 트럭은 자기 거나 다름없다고 카일은 미셸에게 공언했다. 데이빗이 미셸에게 제발 돌려달라고 말했던 그 트럭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었다. 공동 샤워실과 화장실-미셸은 개인 화장실이 없는 공동 주택은 생전 처음 봤다.-을 써야 하는 게딱지만 한 집에서 방 한 칸 빌려주는 대가로 카일은 데이빗이 죽을 경우 그 트럭을 물려받기로 약속했단다.

「친구라면서?

죽을 게 거의 확실해 보였는데, 그럼 그걸 안 받겠다고 해?」

카일과 나눴던 대화가 기억났다. 염병할 자식, 네가 하우스(House M. D: 미국 FOX사의 의학드라마, 뉴저지 주의 가상의 병원인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 대학 부속 병원 진단의학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우스는 진단의학과의 과장이다.)야? 진단의학과 과장이냐고? 십년지기 친우가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면 위로를 했어야지, 냉정하게 안색을 살피고 명줄이 얼마 남았는지 가늠해? 미셸은 욕을 삼켰다.

“당신이 봤을 때, 데이빗이 그리 상태가 안 좋아 보였어?”

“글쎄, 기억이 잘 안 나.”

카일은 관심 없는 얼굴로 집 문을 열었다. 미셸은 따라 들어가다가 카일에게 제지를 당했다.

“그나저나 당신은 사람 말을 참 잘도 씹네. 당신 여기 왜 또 왔느냐고 내가 물었잖아?”

“줄 게 있어서, 책이 나왔더군.”

“아, 데이브 책이 벌써 나왔어?”

카일이 책을 받아들고 반색했다. 미셸은 그 틈에 집 안으로 들어왔다. 좁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방 안에서 카일은 개수대와 거의 맞닿아 있는 탁자에 앉아 조심성 없이 책을 넘겼다. 빳빳했던 새 책이 몇 군데 허술하게 구겨졌다. 미셸은 책을 덮어버렸다.

“너 줄 거 아니거든?”

“이 집은 내 거야. 트럭도 내 거고, 당신이 만나려는 데이빗은 내 침대 위에서 자고 있지. 내 침실 문을 열고 싶으면 이 책 정도는 나한테 바쳐야 하지 않을까?”

“…….”

졌다. 미셸은 깨끗이 승복했다.

책 한 권은 얌전히 카일에게 내주고, 나머지 한 권을 들고 빠끔히 안방을 엿봤다. 과연 데이빗이 모로 누워 있었다. 정오가 넘어선 이 시각까지 자는 걸 보면 어젠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던 모양이다.

카일이 그 끔찍한 기타를 꺼내며 물었다.

“책을 왜 두 권이나 사왔어. 한 권은 선물하고, 한 권은 싸인 받게?”

“그게 왜. 이상해?”

미셸은 속내를 들킨 게 영 부끄러워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겉보기와 달리 꽤 낭만적인 놈이네.”

전혀 낭만적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말은 태연하게 잘한다. 미셸은 9·11 이후 험악해진 국제 정세 속에서 치명적 정서적 결함을 지닌 사람들이 한 군을 이루게 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카일이나 리플리나 원래 성정이 까칠하다 보니 뱉는 말들이 비아냥거림인지 진심이지 알 수가 없었다.

카일이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는 우렁차기도 했다.

“옆집에서 뭐라 안 하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지. 내가 여기 터줏대감이야. 그리고…….”

카일은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데이빗이 방음벽을 만들어줘서 괜찮아.”

미셸은 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지난번엔 경황이 없어 못 봤는데, 어딘가 화려하다 싶은 벽지를 가까이서 보니 그건 골판지로 만든 간이 소음 흡수 판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판지 구조물 사이사이마다 흰색의 종이 인형이 붙어 있어서 나름 한 편의 설치 미술처럼 보였다.

“이 인형은 뭐야?”

“부처야. 좌불. 데이빗이 내 기타 소리에 영감을 얻어 만든 벽이지.”

영감이란 거창한 말까지 들먹일 필요가 있나. 미셸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작품 제목이 뭔데?”

“니르바나(NIRVANA).”

카일이 드디어 심취해 연주를 시작했다. 미셸은 귀를 막았다.

“데이빗이 자잖아!”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락 버전으로 바꿔 연주하던 카일은 자신의 연주에 취해 눈을 뜨지도 않고 답했다.

“안 깰 거야. 내가 약을 잔뜩 먹였거든.”

“뭐?”

미셸은 경악해 소리쳤다. 카일은 머리를 흔들었다. 땀방울이 튀겨 미셸을 격렬히 화나게 했다. 카일은 속도를 높이며 리듬에 맞춰 노래했다.

“마리화나! 음식에 갈아 넣었어! 마리화나-!”

미셸은 삼류 아티스트 마약쟁이를 교살하는 정당한 행위마저 벌을 받게 만드는 현대 형법을 저주했다.

“언제부터 저렇게 잔 건데?!”

“어젯밤부터 한시도 안 깨고 잤지. 한 번 깨서 토하긴 했는데, 괜찮을 거야.”

“토해?”

“약을 하다 보면 질식 직전까지 토하기도 하고, 자다가 똥도 싸기도 하는 거지 뭐. 내가 평소 쓰는 것보다 순한 걸 썼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푹 자고 나서 개운하게 깰 거야.”

카일은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미쳤군.”

“미치겠는 건 내 쪽이야. 데이빗의 비명에 퍼뜩거리면서 깨는 입장도 좀 생각해줘.”

미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데이빗이 악몽을 꾼다는 사실에 놀랐다. 미셸은 카일에게서 신경을 껐다. 그에게 중요한 건 침실 안에서 잠든 남자의 상태였다.

연주에 빠진 기타리스트가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오버 더 레인보우’를 섞어, 결국 ‘지미 핸드릭스’로 넘어갔다. 요란한 소리가 새어 들어오지 않게 미셸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꾹 눌러 닫았다.

데이빗은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잠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인다. 미셸은 의사를 부르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어찌 됐든 카일이 자신한 대로 데이빗은 오랜만에 평온해 보였다. 자면서 부대꼈는지 살짝 부어오른 얼굴엔 홍조가 어려 있었다. 미셸은 땀이 밴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려다 손을 멈췄다. 열이 올라 잠든 초췌한 얼굴이 익숙했다. 별장에서 많이 보았던 낯빛이다.

두 달이 다 된 일인데도 미셸은 그 밤의 흔적을 쉬이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잔상은 끈질긴 생명체처럼 달라붙었다. 불을 끄고 혼자 잠든 밤, 달빛이 구름에 가려 평소보다 더 어두운 밤이면 미셸은 잠깐씩 자신이 산속 깊은 별장에 있는 건 아닌지 헷갈렸다. 그는 불빛이 휘황찬란한 대도시에 있었고, 간이 발전기의 탁한 소음이 더는 들려오지 않는 데 미셸은 안도했다.

상대에게 손을 대긴 어렵고, 그렇다고 잠든 데이빗의 곁을 떠나기도 싫다. 미셸은 데이빗 곁에 앉아 남자가 그린 동화책을 뒤적였다. 그것은 모양 없이 태어난 한 소년에 관한 얘기였다.

소년은 자신의 모습을 갖고 싶어 마녀에게 빌고 빌어 그의 모습을 한 치 틈 없이 완벽히 알아낸다면 그 모습을 갖게 해주겠단 허락을 얻어냈다. 동화 속에서 소년이 자기 겉모습을 알아내기 위해 한 행동들이 미셸의 눈길을 끌었다. 가장 먼저 소년은 난쟁이들을 도와주고 그들로부터 금을 얻어 그것을 얇게 폈다. 소년은 금박을 손가락 한 치 정도로 균일하게 잘라 자신의 몸에 섬세하게 붙였다. 자신의 몸이 어떤 모양인지 도금해 알아내려는 시도였다. 그 일에 성공할 찰나 마녀가 불러온 바람이 금박을 날려버렸다. 소년은 울면서 금박 종이를 붙잡으러 뛰어갔다.

소년의 모습은 아예 나타나 있지 않거나, 혹은 가느다란 실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미셸은 소년이 푸른 눈에 검은 고수머리를 가졌을 거라 자연스레 상상했다.

집중해 읽다 미셸은 집요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데이빗이 잠에서 깨어나 미셸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 보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데이빗이 미셸의 손목을 쥐었다. 데이빗의 손바닥은 메마르고 거칠며 뜨거웠다. 미셸은 꿀꺽 침을 삼켰다. 데이빗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 줄은 몰랐다. 그는 데이빗이 끌어당기는 대로 순순히 끌려가 침대에 앉았다.

데이빗은 느리게 미셸의 곁에 다가와 그의 가슴을 눌렀다. 별로 힘을 주었다 할 것도 없는 미약한 동작이라 미셸은 마음만 먹으면 데이빗을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속 양심의 소리에도 귀를 닫았다. ‘뭐하자는 거야? 데이빗이 약 먹고 맛이 간 거 몰라? 당장 밀어내!’ 미셸은 양심에게 변명했다. 자신 역시 데이빗에게 닿고 싶어 정신이 나간 상태다. 그는 데이빗이 자의로 자신에게 몸을 밀착해오는 상황을 거부할 수 없었다.

미셸이 ‘설마’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데이빗이 힘겨운 동작으로 미셸을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허리에 올라타는 것까진 좋았으나 약기운에 힘이 하나도 없는 남자는 곧바로 머리를 미셸의 가슴에 뚝 떨어뜨리고 기절하듯 쓰러졌다.

“데이빗?”

한참 뒤 데이빗이 도로 비슬거리며 허리를 세웠다. 미셸은 상대의 살짝 벌어진 입과 잠에 취해 감긴 눈, 휘청거리는 상반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데이빗이 손가락 하나가 뻣뻣하게 굳어 구부러지지 않는 오른손으로 어설프게 바지를 벗는 장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몸이 천근처럼 무거운지 데이빗은 한쪽 다리를 빼내며 거의 넘어질 뻔했다. 휘청거리는 허리를 잡자 마른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데이빗을 도와 상대의 바지를 완전히 벗겨냈다. 미셸은 너무 긴장해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그날처럼. 데이빗이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데이빗이 잔뜩 긴장해 땀을 흘렸다. 남자는 미셸의 허벅지 위에 겨우 앉더니 움찔거리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데이빗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미셸은 아직 바지를 벗지 않은 채였다. 섹스도 뭣도 아니었다. 예민한 부분이 마찰하는 것만으로 미셸의 입에선 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데이빗이 미셸의 험악한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제기랄, 겁먹게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미셸은 자신을 욕했다. 얼마나 그리 있었을까. 얼굴을 가리고 그대로 굳어 있던 데이빗이 천천히 자신의 손을 미셸의 가슴 위에 얹었다. 미셸은 낮게 신음했다. 심장 위,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자리 잡은 데이빗의 손바닥이 뜨겁다. 데이빗이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허리를 흔들었다. 기괴한 풍경 앞에서 미셸은 꼼짝 않고 남자를 내버려두었다. 야릇한 감각이, 스멀스멀한 흥분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약에 취한 남자가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이, 이 주만……그 후, 후에 도, 돌려 보……보내줄……게. 푸, 풀어줄게. 이, 이 주만…….”

데이빗은 한 주도 채 못 채우고 끝났던 해프닝을 얘기하고 있었다. 애초 계획은 이 주간이었던가. 만약 계획대로 미셸이 이 주 동안 별장에 갇혀 있었다면 관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더욱 나빠졌을까. 아니면 오히려 나아졌을까. 미셸은 움찔거리며 힘겹게 허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뚝, 땀방울이 떨어졌다. 데이빗은 눈을 감고 있었다. 미셸의 몸을 짚고 위아래로 움직이며 휘청거린다. 비틀거리며 잠에 취해 허우적대는 거지, 섹스라고 보기엔 어려운 동작이었다. 그렇게 위태롭게 움직이다 데이빗은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이마와 고수머리가 미셸의 가슴에 닿았다. 간지럽고, 뜨거웠다. 남자로부터 나는 살내음은 짙지도 옅지도, 불쾌하지도 향긋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냄새인데 이상스레 머릿속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기억을 떠올리는 효과 면에서는 시각이 후각을 이기지 못한다던 누군가의 말을 인정하게 된다. 미셸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그는 데이빗의 어깨를 잡아 쓰러진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남자가 헝겊 인형처럼 힘없이 휘청거리며 멍하게 풀린 눈으로 미셸을 응시했다. 미셸은 상대의 턱을 쥐었다. 짧은 수염이 따끔하게 손끝에 문질러졌다. 엄지로 이미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을 꾹 눌렀다. 덜 핀 장미가 햇빛에 속을 벌이듯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져 그 안의 혀를 내비쳤다. 미셸은 달려들었다. 경험한 적 있는 축축한 혀와 입술의 감촉이, 그 기억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그때의 흥분을 떠올리게 했다.

젖은 살점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미셸은 남자의 몸을 끌어당겨 좀 더 달라붙었다. 타액을 삼키느라 턱과 목 근육이 긴장하고, 힘줄이 당겨졌다. 혀와 혀가 부딪혔다 떨어졌으며 입술과 입술이 달라붙었다 미끄러졌다. 쓰러지고 피하려는 몸을 끌어당겨 키스를 받아들이게 했다. 살과 살이 맞닿아 움직이며 생겨난 질척한 소음이 카일이 연주하는 기타 소리와 섞였다.

미셸은 목 안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을 그르렁댔다. 거칠고 뜨거운 키스가 끝났다. 그는 데이빗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남자의 입술이 타액으로 흥건히 젖고, 마찰로 붉게 변한 것을 보았다. 자신이 쥐고 있던 턱에는 붉게 눌린 자국이 남았는데도 남자의 푸른 눈은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로 흐렸다. 미셸은 정신 나간 남자를 상대로 너무 짐승처럼 달라붙었다는 부끄러움에 잠시 귀를 붉혔다.

정지 사진처럼 가만있던 남자가 입술을 달싹이다 나른히 눈을 감았다.

“……뭐…….”

“응?”

“……뭐하, 한 거야?”

뭘 한 거냐고? 답은 뻔하지 않은가. 미셸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키스.”

“아닌데…….”

미셸은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깜빡였다. 키스가 아니면 자신이 뭘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키스가 아니면 뭔데?”

미셸의 물음에 데이빗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미셸은 남자의 닫힌 눈꺼풀의 떨림까지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몸을 붙였다. 남자는 잠꼬대처럼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다, 당신이랑 나, 나는 그, 그런 거 아, 안 해. 키, 키스 아, 아냐.”

미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일곱의 청춘도 아닌데, 키스를 했네 안 했네 따지고 있는 상황이 기이했다. 마리화나를 갈아 마신 사람을 상대로 진지하게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이 잘 이해되지 않지만, 미셸은 남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데이빗, 당신이랑 난 전에도 입술이 부을 정도로 키스해댄 적 있잖아.”

“그, 그것도 키, 키스 아, 아냐.”

그건 키스가 아니었다? 성감을 높이기 위해 입술과 입술이 나누는 게 키스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럼 그건 뭐였는데.”

데이빗은 계속해 침묵했다. 미셸은 약에 취한 남자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가 싶어 다시 말하려다 멈췄다. 데이빗이 느리게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가 타들어가는 종이 끝처럼 까맣게 그늘져 있었다.

“……그건 아, 아무것, 것도 아, 아니었어.”

그 말이 불씨를 당겼다. 미셸은 가슴속에 훅 불이 이는 걸 느꼈다.

몸이 절로 움직였다. 그는 데이빗을 침대에 눕혔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남자가 미셸의 무게에 놀라 신음하며 빠져나가려 했다. 미셸은 데이빗의 볼을 쥐고 다시 키스했다. 그의 입안을 샅샅이 훑고 호흡을 빼앗았으며 젖은 입술을 이로 잘근거렸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상대의 입술을 빼앗으며 미셸은 옷을 벗었다.

키스가 키스가 아니었던 이유를 짐작해본다. 미셸은 이를 악물었다.

별장 밖, 산중에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 대신 카일의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외에는 모든 게 비슷했다. 데이빗의 당혹해하는 목소리와 입술, 땀 냄새가 옅게 밴 피부의 체취는 그날과 다를 바 없었다. 산에서 내려온 다음 날, 미셸은 낡은 모텔의 침대 위에서 자신도 모르게 데이빗과 꽤 길게 키스를 했다. 연인과도 잘 하지 않을 짙고 뜨거운 키스를 납치범 사내와 나눴다. 데이빗은 키스에 순응했고, 몸을 열었다. 미셸은 내심 사내의 속내를 알면서도 뜨겁게 달아오른 몸과 유순한 입술을 취한 뒤 납치범 사내의 손을 도로 묶고, 셔츠를 달라 하는 흉터투성이 남자의 몸 위에 낡은 셔츠를 둘러주었다. 그래서 키스는 키스가 아닌 게 되었다. 동화를 그리는, 사춘기 소년보다 못한 발달 단계의 정서 상태를 지닌 남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미셸은 바지를 모두 벗었다. 금속 부분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밑에 눌린 남자가 미셸의 팔목을 쥐어왔다. 말라빠진 팔뚝에서 무슨 힘이 그리 솟았을까. 미셸은 허우적거리는 두 팔을 쥐었다. 데이빗이 일그러진 얼굴로 허리를 비틀며 버둥댔다. 그 꿈틀대는 저항이 미셸의 숨을 더욱 거칠게 했다. 미셸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프게 안 할게.”

미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은 자신이 듣기에도 지나치게 뻔뻔하게 들렸다. 미셸은 두려움으로 헐떡이는 상대의 목덜미를 강하게 빨았다.

아프게 하지 않겠다니. 어떻게 할 참인데. 미셸은 좀 전 스스로의 말에 코웃음 쳤다. 그와 데이빗과의 섹스에선 늘 정액과 피 냄새가 공존했다. 일방적인 강간을 경험한 이에게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안심시키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허나 자신의 욕망은 달군 쇠처럼 뜨겁고 매서웠다. 양심의 거리낌을 무시하고 미셸은 애써 형편 좋게 생각했다. 자신을 납치해 방에 가두었던 남자는 원래 게이였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밤, 그는 미셸을 묶고 그 위에 스스로 올라탔고, 마지막 관계에선 뒤만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때처럼 안이 녹는 쾌감을 한 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 남자가 스스로 허리를 흔들며 달뜬 숨을 내쉬는 걸 보고팠다. 그러기 위해선 그가 아프지 않게끔, 기분 좋게끔 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울지라도 않았으면 좋겠다.

미셸은 목덜미에서 내려와 가슴과 복부로 방향을 바꿨다. 남자와 여자나 느끼는 지점은 비슷하다 들었다. 샅을 쓰다듬자 놀라 웅크리고 도망치는 상대의 허벅지를 넓게 벌리고 말랑하게 늘어진 살덩어리를 훑고 문질렀다. “!” 데이빗은 팔로 미셸을 밀어내다 포기한 뒤 얼굴을 가리고 허리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그 모습이 작살에 꽂혀 퍼덕대는 물고기와 유사했다. 당장에라도 안을 파고들고 싶지만, 미셸은 그를 아프지 않게 하겠다 약속했다. 쉽진 않았다. 흥분을 끌어내기 위해 요도를 문지르고, 고환을 굴리며 상반신 전체에 붉은 흔적을 남겨도 상대의 몸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풀어질 줄 몰랐다. 진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을 아무리 어루만져도 상대는 반응하지 않았다. 미셸은 좁혀진 데이빗의 허벅지를 벌리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사내의 성기를 빠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단 덜 역했다. 허벅지를 잡고 중심과 그 주변을 흠뻑 젖을 때까지 핥고 빨았다. 미셸의 머리 위에서 흐느낌이 쏟아졌다. 머리칼을 움켜쥔 손가락 중 하나는 구부러지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었다. 미셸은 턱이 얼얼해질 때까지 상대의 성기를 자극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약 때문일까. 실망스러웠지만 미셸은 뒤쪽은 좀 더 나으리라 여겼다. 임포텐츠 환자들도 직장 안을 직접 자극하면 발기한다고 하니까. 미셸은 데이빗이 반응했던 지점을 얼추 기억했다. 뿌리 아래쪽, 회음의 거죽 한 장 아래 가장 예민한 곳이 숨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민감한 살갗을 찌르고 문지를 때마다 눌려 있는 허리가 경련했다.

미셸은 상대의 둔부를 벌려 오밀조밀한 주름을 만들며 닫혀 있는 좁은 곳을 드러나게 했다. 표피의 주름을 하나씩 쓰다듬으며 입구를 벌리는 건 겹겹이 눌러 접은 층층의 종이를 눌러 펴는 행위를 연상하게 만든다. 희한한 촉감이었다.

좁은 곳의 피부는 인간의 몸 중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여리고 얇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찢겨 피를 내보일 것만 같다. 밑을 내보인 남자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거리는 이유를 미셸은 이해했다. 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급소를 내준 사내의 공포를 덜어주기엔 부족했다. 데이빗은 약에 취해 잘 움직이지 않는 사지로 저항하다 포기하곤 이제 말없이 끙끙거리기만 했다. 두려움에 찬 물기 어린 신음이 미셸을 미치게 했다.

벌어진 안을 누르고, 주변을 입술로 빨았다. 자극이 강해질수록 데이빗의 신음은 더 짧아지고 헐떡임은 격렬해졌다. 간헐적이던 경련은 반동 큰 움찔거림으로 변해 미셸은 처음의 약속과 달리 힘으로 데이빗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엎드리게 해 등을 누르고 넓게 벌린 허벅지와 무릎 위에 자신의 체중을 실었다. 데이빗이 꿈틀거리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릴 때마다 그의 둔부가 미셸의 복부와 성기를 자극했다. 미셸은 초조해졌다. 열기가 뭉쳐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만 같다. 참고 참았다. 그는 홀로 배출하고 끝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데이빗의 허리를 들고 사타구니 사이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힘없이 늘어진 살덩이에 다급히 손가락을 말았다. 흥분의 징후가 없는 중심을 빠르게 훑어대며 미셸은 미셸대로 데이빗의 몸에 자신의 몸을 문질러대며 욕망을 좇았다. 미셸의 움직임을 버티다 못해 데이빗이 상반신을 무너뜨렸다. 미셸은 늘어지는 상대의 허리를 붙잡았다. 엉덩이만 들린 채 미셸이 앞으로 뒤로 움직일 때마다 데이빗의 상반신이 힘없이 휘청거렸다. 시트를 부여잡고 있는 손가락을 끌고 와 미셸은 손가락 가락마다 살며시 끝을 깨물었다.

직장 입구가 벌어져 손가락을 빼내어도 뻐끔거리며 완전히 닫히지 않게 되었다. 끔찍할 정도로 요사스러웠다. 미셸은 지체 없이 상대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싶었다. 젖은 안은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기분 좋을 것이다.

데이빗이 얼굴을 가린 채 웅얼거리며 무어라 애걸했다.

“아……안 돼……. 하, 하지 마, 마요. 아, 안…… 돼…….”

미셸은 당황했다. 별장에서의 기억이 그의 정신을 점령해 이성을 차갑게 일깨웠다. 흥분으로 나가버렸던 정신이 되돌아왔다. 망했다. 하마터면 그대로 휩쓸려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 뻔했다.

“시팔……”

미셸은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데이빗의 얼굴은 표정 없이 창백했다. 멍한 얼굴이 눈물로 축축하다. 동공이 확장된 눈으로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데이빗의 정신은 이미 이곳이 아닌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걸로 보였다. 미셸은 데이빗의 뺨 위 축축한 물기를 걷어냈다. 미셸은 여자든 남자든, 상대가 우는 걸 늘 마뜩잖게 여겨왔다. 그런데도 물기에 번들거리는 데이빗의 푸른 눈을 마주 대하자 열기는 하반신에 뭉치고 성기는 부풀어 꿈틀대 자제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그를 안고 싶다. 미셸이 뒤에서 쳐댈 때마다 시트에 눈물이 여기저기 흩뿌려졌던 때의 감각을 느껴보고 싶다. 미셸은 상대를 짓뭉개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스스로에게 일갈했다. 개새끼. 한심한 새끼. 흥분으로 끓어오른 몸을 수음으로 황급히 달랬다.

시야가 좁아질 만큼 강렬한 감각의 파도가 지나갔다. 미셸은 방 안 천장의 무늬와 보드라운 시트에 그려진 유치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몸 아래 눌려 오랜 고문을 견뎌낸 사람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꾹 감고 뜨지 않는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암담하고 참혹하며 황홀하고 충만했다. 제기랄…….

데이빗 곁에서 미셸은 한참을 우물쭈물거렸다. 물러나야 하는데 데이빗의 피부가 미셸을 놔주지 않는다. 미셸은 데이빗을 곰 인형처럼 뒤에서 끌어안았다. 사정의 여운에 온몸이 나른한 와중에 맞닿은 육체를 통해 데이빗의 심장 박동 소리가 전해져왔다. 미셸은 상대의 흉터투성이 등에 입술을 묻었다. 등줄기를 따라 쪼듯 입 맞추고, 흉터를 혀로 핥거나 했다. 그렇게 집요히 몸을 건드려대는데도 데이빗은 꿈틀거림 하나 없이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미셸은 느슨하게 풀어진 근육에 상대의 상태를 짐작했다. 역시나 데이빗은 의식을 잃은 채 늘어져 있었다.

기절한 남자의 왼손과 오른손 모습이 달랐다. 왼손은 꽉 주먹을 쥐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한데, 오른손은 펼쳐진 채 중지가 검지 대신 구부러져 시트 위에 얹혔다. 미셸은 비틀린 몸을 똑바로 눕혔다. 손바닥과 허리, 미셸이 손대는 모든 곳에서 진땀이 묻어났다. 남자의 온몸을 적신 땀방울 중 어디에도 쾌감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

몸의 열기가 가라앉자 자기혐오가 고개를 쳐든다. 미셸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욕을 해대봐야 자신이 친 사고는 수습할 수 없었다. 저지른 짓이야 그렇다 치고, 일단 데이빗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몸이라도 닦아줘야 하는데 주변엔 마땅한 수건 하나 보이지 않는다. 뭐 이런 허술한 침실이 다 있나. 혀를 차다 미셸은 사방이 이상하게 고요한 걸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똑똑, 카일이 노크했다.

“어이, 다 끝났어?”

미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카일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친 정사의 흔적에 휘휘 손을 저었다.

“난-.”

당황한 미셸은 무어라 변명의 말을 뱉으려 했다. 카일은 말없이 물수건만을 던진 채 나가버렸다.

미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카일은 미셸의 구겨진 셔츠를 대놓고 한심하단 얼굴로 쳐다봤다. 미셸은 얼굴이 구겨지는 걸 힘주어 막았다. 카일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 둘 사귀어?”

“……사귄다고 말하기엔 좀 애매하지.”

“사귀지도 않는데 다짜고짜 남의 집에서 한 판 벌이는 것도 신기하네. 당신은 데이빗이랑 무슨 관계야?”

때마침 들려온 초인종 소리가 미셸을 살렸다. 카일은 문으로 가면서도 계속 미셸을 힐끔거렸다.

“카일, 나야.”

문밖에서 미셸이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튜 웨인 클라크, 데이빗을 실어갔던 911대원이었다. 덩치 좋은 잘생긴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미셸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당신…….”

“안녕하세요. 병원에서 뵀었죠.”

“아아, 그때 봤던 분이군요. 얼굴이 익다 했어요. 데이빗이랑 아는 사이라고 했었죠.”

매튜가 그제야 경계를 풀고 빙긋 웃었다.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던 얼굴이 느슨해지며 선량하고 친절한 본연의 인상이 드러났다. 매력적인 남자였다. 카일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경계해야 할 상대다. 미셸은 고까운 기분을 숨기며 웃었다.

“데이빗의 동화가 서점에 풀렸기에, 얼굴도 볼 겸 만나러 왔습니다.”

“어라, 둘이 이미 아는 사이야?”

장정 셋이 있기엔 너무 좁아 기타를 안방으로 넣어놓고 온 카일이 미셸과 매튜에게 물었다.

“카일, 너도 이 사람을 알아?”

매튜가 미셸을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알고말고.”

카일이 고양이처럼 웃었다. 미셸은 불길함을 느꼈다.

“내가 말했던 그 친구 있잖아. 남자도 멘스하게 만드는 매력남.”

“뭐?”

매튜는 처음에는 카일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카일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데이빗의 그 남자 말이야.”

눈을 깜빡이던 매튜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잘생긴 눈썹이 불교도들의 인왕상처럼 위로 치솟았다. 당황한 미셸에게 카일이 슬쩍 귀띔해주었다.

“데이빗 녀석, 매튜가 응급실에서 퇴원시킨 뒤에 이곳에 머물라고 보냈는데, 우리 집에 왔을 때 꼴이 말이 아니었어. 몸을 안 씻은 거야 그렇다 치고, 세탁물도 한가득인데, 바지마다 엉덩이에 피가 묻어 있어서 다 버렸어.”

매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빌어먹을.’ 미셸은 날아올 한 방에 대비하며 자리에서 따라 일어섰다. 911대원의 팔뚝은 허약한 약쟁이 기타리스트의 팔뚝보다 두 배는 두터워 보였다.

“매튜, 기억나? 어떤 면상의 자식인지 한 번 만나면 그놈 몽타주를 바꿔놓겠다고 했던 거?”

“물론이지.”

카일은 능숙히 싸움을 붙였다. 험악한 분위기에 식욕이 돋았다. 그는 콘플레이크 그릇을 들고 의자에 앉아 곧 벌어질 싸움 구경 준비를 했다. 타이밍 좋게 데이빗이 비척거리며 방 안에서 나왔다. 미셸이 덩치 좋은 911대원에게 완벽히 가려진 탓에 데이빗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데이빗, 깼어?”

“……카일, 나, 나한테 뭘 머, 먹인 거야?”

“질 좋은 수면제.”

“내, 내가 한 번만 더, 야, 약 서, 섞어 먹이면 죽인다고 해, 했지.”

카일은 데이빗의 위협에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작게 킥킥거렸다. 두통에 머리를 흔들던 데이빗은 시선을 들고 대치하고 서 있는 두 남자 중 매튜를 먼저 발견했다.

“매, 매튜 와, 왔어? 넌 어째 보, 볼 때마다 덩치가 더 자란다.”

데이빗이 911대원을 툭 치며 비죽 웃는다. 눈매가 가느다래지며 얇은 눈가 피부에 주름이 잡혔다. 유순한 미소다. 미셸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데이빗의 얼굴에 충격을 받았다. 늘 음습하게 찌들어 있던 남자에게 강아지처럼 천진하고 부드러운 표정이 존재했다.

데이빗이 한 박자 늦게 미셸을 발견했다. 웃음기 어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부의 기색이 완연한 얼굴에 미셸은 구실을 만들어 찾아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당신 책이 나왔기에 들렀어.”

데이빗에게 다가서려는 미셸을 매튜가 손으로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데이빗,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매튜?”

매튜는 데이빗을 잡아끌다가 상대가 허리를 붙잡고 끙끙대는 데 동작을 멈췄다.

“어디 아파?”

“아, 어제 지, 짐을 많이 드, 들었어. 허리가 뻐, 뻐근하긴 한데, 괘, 괜찮아.”

데이빗은 파리한 얼굴로 허리를 부여잡았다. 미셸은 식은땀을 흘렸다. 3시 방향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뜨겁다. 카일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주지 않았다.

“엉덩이는 괜찮아?”

“응?”

영문 모를 소리에 매튜와 데이빗이 카일을 동시에 쳐다봤다. 카일은 그 시선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검지로 정확히 미셸을 가리켰다.

“저 모델 같은 남자랑 너랑 조금 전에 뒹군 거 기억 안 나?”

“……뭐?”

데이빗은 눈을 깜빡이며 미셸을 쳐다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변명할 말이 없다. 미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매튜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쾅-! 매튜는 미셸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내던지고 떨어지는 몸을 도로 받아 눌렀다.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빌어먹을 뽕쟁이!’ 미셸은 매튜의 힘에 짜부라지며 등이 갈라지는 통증에 이를 갈았다.

“어이 911, 말로 하자고!”

매튜는 전혀 그럴 맘이 없는지, 미셸의 몸을 잡아당겨 탁자 위에 떨어뜨렸다.

“워어, 조심해!”

뒤집힌 탁자를 피하며 카일이 고함을 쳤다. 그는 천만다행으로 뒤집히지 않은 콘플레이크 접시를 꾹 쥐곤 그 틈에 한술 떠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허약한 말라깽이 기타리스트와 911대원은 한패가 분명했다. 평소에도 카일이 폭로하면 매튜가 손을 보는 식으로 여럿을 골로 보냈을 거다. 바닥에 뒹굴며 미셸은 퇴역 군인인 자신이 현역 대원-그것도 속도와 힘 면에서 분명히 한가락 하는 게 확실한-과 붙어서 이길 확률을 계산해봤다. 승률은 절반도 안 됐다. 미셸은 계산을 끝냈다. 유일한 무기인 컵만 갖고 데이빗의 친구와 좁아터진 거실에서 치고박고 싸우느니 차라리 잠자코 얻어맞아 동정표를 얻는 게 나았다.

물론 그건 매튜의 흉흉한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탁자 위에 미셸의 몸을 누르고 다른 팔을 쳐드는 폼이 남자는 전문 격투기 선수 못지않다. 미셸은 무릎으로 상대의 복부를 겨냥했다가 매튜의 화만 돋웠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 불붙은 석탄처럼 빛났다. ‘이제 난 죽었군.’ 미셸은 필사적으로 매튜의 공격을 쳐냈다. 팔목과 정강이가 시큰거렸다.

“읏!”

채 덜 막은 주먹이 흐르며 관자놀이를 스쳤다. 살점이 칼로 베어낸 듯 뜨겁다. 닦아낸 손에 묻어난 피에 열이 치받았다. 입술에 묻은 짭조름한 맛과 비린내 덕에 미셸은 자신의 군홧발 아래서 박살 난 보도블록의 타일이 바스러지고, 그의 손짓에 겁에 질린 사람들이 먼지 자욱한 길바닥에 얼굴을 박던 경험을 떠올렸다. 관절을 뽑고, 뼈를 부수고……. 살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온 힘을 다해 911대원의 어깨를 들이받고, 온몸의 무게로 그를 벽으로 밀어붙인 뒤……. 데이빗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셸은 전신을 달구는 열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씹, 당신은 뭔데 참견하지? 친구가 이 정도까지 개입하나?”

매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신은 친구가 나쁜 일을 겪었는데도 어떤 개입도 안 하나 보지?”

“…….”

말문이 막혔다. 미셸은 혀를 찼다.

“데이브, 또 도망가는데?”

카일이 밖을 가리켰다. 데이빗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격투 중이던 두 남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매튜가 한눈을 판 틈에 미셸은 탁자 밑에서 빠져나와 바깥으로 나왔다. 복도 끝에서 낡은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달려가 보니 닫히는 문틈으로 데이빗이 입은 흰 티셔츠가 보였다. 미셸은 계단으로 그를 뒤쫓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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