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윗의 탑-6화 (6/18)

끌림 1

공항 안의 북적거림에서 벗어나자 이제 좀 살 것 같아 미셸은 숨을 내쉬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비행기 안의 건조한 공기에 충분히 단련되었음직도 한데, 홍콩의 습한 기후 속에 일주일 넘게 체류했다 돌아온 자신의 피부가 고향의 날카로운 햇볕 속에 쩍쩍 갈라질 듯 비명을 지른다. 미셸은 택시를 잡아탄 뒤 가방 안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택시 기사가 자신도 생각난 양 글러브 박스 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손님, 어디로 가실 겁니까?”

미셸은 행선지를 말하기 전 먼저 휴대폰을 확인했다. 한 건의 전화 메시지가 그의 방향을 결정했다. 문자 메시지 안에는 미셸이 돈을 주고 알아낸 주소가 들어 있었다. 미셸은 집과 동떨어진 방향인 저가 아파트촌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도로 맞은편 시커멓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연립주택들을 바라보았다. 데이빗이 살았다던 동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과밀하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들은 그 탓에 채광과 통풍이 나빴다. 약속이라도 한 양 낡고 녹슨 건물 벽에는 누렇거나 잿빛인 찌든 때가 비슷한 문양을 그리며 더덕더덕 묻어 있었다. 음습한 건물과 거기 깃들어 살아가는 이들의 찌든 모습이 CNN 뉴스에서 보았던 홍콩의 새장 아파트를 연상케 했다. 미셸은 망연히 빗물받이 홈통 사이로 보이는 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데이빗은 이런 곳에 살았다. 새장과 같은 1평 남짓의 철창 속에서 살아가는 홍콩 빈민의 모습에 데이빗의 얼굴이 겹쳤다.

‘멍청하긴.’

미셸은 데이빗의 창백한 얼굴과 체념한 표정을 떠올리곤 혀를 찼다. 답답하고 바보 같은 남자였다. 인간은 언어 외엔 타인에게 생각을 표현할 수단을 갖지 못했다. 무슨 욕망을 품고 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데이빗과 미셸의 관계가 그토록 파국으로 치달은 데는 데이빗의 탓도 컸다.

비서인 리플리가 왜 회사에 들어오지 않느냐고 전화를 했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당에 비서가 닦달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기분 상태가 되었다. 미셸은 휘파람을 불었다.

“볼일이 있어.”

거짓말이다. 볼일 따윈 없다. 리플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기분이 좀 나아진다. 얄미운 비서에게 무어라 한마디 더 하려다 미셸은 사이렌 불빛과 함께 들이닥친 앰뷸런스에 시선을 빼앗겼다. 앰뷸런스에서 와르르 구급대원들이 쏟아져 나와 낡은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독거노인이 시신으로 발견되기라도 한 걸까. 미셸은 거기서 얼마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올라갔던 구급대원들이 들것에 누군가를 싣고 내려왔다. 누워 있는 창백한 남자의 헝클어진 검은 고수머리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데이빗, 그가 거기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미셸은 사람들을 밀치고 들것이 실리는 앰뷸런스로 뛰어갔다. 잔인하게도 데이빗의 말처럼 남자가 정말로 죽어버리고 말았는지 궁금했다. 닫히는 앰뷸런스 문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은 남자가 확실했다. 드러난 손등과 팔목이 노인처럼 가늘고 푸석하다.

“아는 사람이에요. 어느 병원으로 갑니까?”

구급대원 하나가 병원을 가르쳐주었다. 미셸은 택시를 잡아 그 뒤를 따라갔다.

* * *

미셸은 데이빗의 인상착의를 쏘아붙이듯 내뱉었다. 간호사가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응급실로 가보란 말만 툭 내뱉었다. 여러 개가 늘어선 침상을 살피다 미셸은 중간 지점에 가서야 데이빗을 발견했다.

죽지 않고 살았군.

미셸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빗의 개라도 한 마리 침상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면 그야말로 기가 막힐 풍경일 게다. 남자가 눈앞에 있단 게 실감 나지 않아 미셸은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누구시죠?”

들려온 목소리에 미셸은 뒤를 돌아보았다.

전혀 모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복장을 보고야 구급대원임을 알았다. 미셸은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친굽니다.”

“친구요?”

구급대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이빗의 친구면, 어디서 만난 분인데요?”

병원 직원인 줄 알았던 구급대원은 알고 보니 데이빗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미셸은 잠시 말을 골랐다.

“일을 하다 만났습니다. 연락이 도통 안 되다 우연히 아까 들것에 실려 나오는 걸 보고 놀라 따라왔죠.”

구급대원이 그제야 미간에서 힘을 뺐다.

“저랑 같으시군요. 신고를 받고 나갔다가 쓰러진 게 데이빗인 걸 알고 혼비백산했죠.”

“상태가 많이 나쁜가요?”

“모르겠어요. 단순한 탈진은 아닌 것 같고.”

“지난번에 만났을 때 지병이 있다고 하던데요. 꽤 심각해 보였습니다.”

미셸은 정보를 흘리며 사내를 떠봤다. 구급대원은 전혀 모르는 양 놀란 얼굴을 했다.

무언가 더 정보를 캐내고 싶은데 얄미운 비서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미셸의 비행시간에 맞춰 회의 일정을 짰는데, 그걸 엎어버리면 어떡하느냐며 화를 냈다. 미셸은 어쩔 수 없이 구급대원과의 대화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당장 퇴원하는 건 아니죠? 저 남……. 데이빗이 깨어나면 제게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미셸은 구급대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 * *

물론 그 뒤 연락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퇴근 후 찾아가니 병상은 비어 있고, 아까 만났던 구급대원은 병원에 근무하는 이가 아니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미셸은 병원에 문의해 출동한 구급대원들 중 나이대가 맞는 사람 두어 명을 추려낼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을 찾아간다고 해서 그들이 데이빗의 행방을 알려준단 보장은 없다. 어제 연락을 주지 않은 걸 보면 구급대원은 데이빗을 통해 미셸이 그다지 반가운 상대가 아니란 걸 알았을 것이다.

데이빗이 죽지 않았단 건 확인했다. 혹 데이빗이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빌미 삼아 자신을 귀찮게 하진 않을까. 미셸은 산만하게 볼펜을 돌리며 자신이 남자에 대해 관심을 끊어야 하는지, 아니면 데이빗을 찾아가 뒷수습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산에서 내려온 다음 날, 데이빗은 자신이 저지른 일과 그에 수반된 모든 것들이 온통 지긋지긋하단 표정으로 도망쳤다. 얼마 남지 않은 삶마저 포기해버리려 했던 남자가 굳이 산에서 있었던 일을 빌미로 미셸을 귀찮게 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 있었기에 다음 날 미셸은 데이빗의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앰뷸런스에 실려 간 남자가 묵었던 방을 찾아 노크를 했다. 웃기게도 가슴이 쿵쾅댔다. 그는 실소했다. 데이빗을 만나 무엇 하나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자신이 왜 귀중한 시간을 이런 데 낭비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처음에는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궁금했는데, 이제는 다른 것들이 궁금해졌다. 곧 죽을 거라던 장담과 달리 어떻게 여태껏 살아 있는지, 자신과 헤어진 뒤 어떻게 살았는지, 자신과의 일이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토록 빠져 탐했던 남자의 육신이, 그 감촉이, 자신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이 아닌 진짜인 것인지.

‘맙소사.’

미셸은 혀를 찼다. 자신의 성 정체성은 크게 뒤흔들린 뒤 제자리로 돌아올 낌새가 안 보였다.

노크를 하고 한참을 기다렸다. 문 안에선 오래도록 기척이 없었다. 밀어보니 그대로 열렸다. 미셸은 빈방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의자와 어디서 주워 온 게 분명한 매트리스, 버너와 나뒹굴고 있는 작은 냄비가 살림살이의 다였다. 미셸은 칠이 드문드문 벗겨져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공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데이빗의 거친 손바닥과 낡은 옷차림에서 그의 삶이 풍요롭지 못하단 건 짐작했지만, 이다지도 살풍경한 공간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천장 벽을 얼마나 얇게 발랐는지 옥상 위 바람 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시멘트를 할퀴고 지나가는 소리는 눈썹을 찌푸리게 할 만큼 황량했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닥쳐 덜컹덜컹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미셸은 문을 닫으러 창가로 다가갔다. 낡은 아파트가 세워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비에 젖고 썩어 나무가 아닌 고무처럼 물렁해진 창틀 틈에는 새카만 먼지 덩어리가 가득했다. 반사적으로 창틀을 짚었다 그 너절한 감촉에 손을 뗀 미셸은 5층 높이 아래로 보이는 풍광에 눈을 깜빡였다. 거리의 풍경이 익숙했다.

자신이 줄리아와 와봤던 곳이다. 한 블록 옆엔 그녀와 함께 갔던 고서점이 있었다.

“……여기서.”

미셸은 데이빗이 내려다봤던 식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낡고 꾀죄죄한 건물로 빼곡한 사거리 위로 붉은 저녁놀과 밤이 몰고 온 코발트빛 어둠이 함께 어우러져 덮였다. 마법과 같은 시간이었다. 지저분한 전선 아래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엽서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미셸은 비로소 데이빗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데이빗이 미셸에게 반해 그를 납치할 맘을 먹었던 건 다 이런 풍광 때문이었을 것이다. 낡은 도시와 아름다운 하늘이 공존해 쓸쓸함과 아름다움이 뒤섞이고 있었다.

미셸은 주인 없는 빈방을 뒤지고 있는 자신보다도 더 한심한 방식으로 시간을 낭비한 남자를 생각했다. 데이빗은 자신보다 훨씬 집요했고, 훨씬 어리석었다. 백치처럼 아둔하고 꼽추처럼 음울했던 남자가 오랜 시간 곱씹었을 감정이 옮아오는 것 같아 미셸은 오래된 탑처럼 음습한 아파트를 걸어 내려오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꽤 오랜 시간을 소모한 끝에 미셸은 데이빗의 존재가 영 마음에 걸린단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데이빗이 그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정체 모를 흥분에 미셸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초조함이 몸속에서 요동쳤다. 결국 데이빗 베커라는 남자를 만날 수밖에 없단 결론을 얻었다. 미셸은 남자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수소문 끝에 미셸은 데이빗이 일하는 대형 마트를 알아냈다. 운전석의 비서를 쫓아내듯 밀어내고 직원이 알려준 곳으로 향하며 미셸은 이름을 붙이기 힘든 설렘에 사로잡혔다.

* * *

놀라움에 크게 벌어졌던 데이빗의 푸른 눈동자가 도로 오므라들었다. 꽃잎이 다물려 속을 숨기는 듯했다. 그 반응에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두근거리던 미셸의 심장이 빠르게 굳었다.

“……왜?”

질주해 온 미셸을 데이빗은 짧은 단음절의 물음으로 멈춰 세웠다. 마트 홍보 담당에게 닦달하듯 물어 창고로 한달음에 달려온 미셸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미셸은 데이빗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등과 겨드랑이가 땀으로 젖은 유니폼을 입고 서 있는 남자는 신발 속에 든 작은 돌덩이처럼 미셸의 마음을 귀찮게 했던 그 남자 본인이 맞았다. 짙게 그림자가 드리운 푸른 눈동자가 미셸을 응시했다. 눈동자 아래 드리워진 피로감과 푸석한 머리칼, 구부정한 자세와 장애가 엿보이는 오른손까지 모든 게 자신이 상상해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병원에서 데이빗이 귀신같이 사라졌던 첫 만남 후, 미셸은 이번에도 행여 데이빗이 숨어버릴까 싶어 그가 파트타임으로 일한다는 대형 마트로 곧장 찾아왔다. 다짜고짜 급습한 것까진 좋은데 왜 왔느냐는 말에는 쉬이 말문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지난번에 병원에서 우연히 만났었는데, 구급대원이 말해주지 않았어?”

“……아아.”

알고 있다며 데이빗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게 어쨌느냐며, 더 할 말이 있는지를 묻는다. 미셸은 마른침을 삼켰다. 벌써 여름이 가까운 걸까. 기이하게 덥다. 미셸은 납치에는 내성이 있었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며 핑곗거리를 찾는 일엔 적응력이 없었다.

“걱정이 되어서, 한번 만나보면 좋겠다 싶었지.”

“당신이?”

데이빗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 ‘우리가 그토록 살가운 사이였나?’ 그런 물음이 담긴 목소리였다.

“당신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미셸 스스로 듣기에도 자신의 목소리는 꽤 궁색하게 들렸다. 미셸은 데이빗이 무어라 한마디 하길 바랐지만, 상대는 아무 말도 받아치지 않은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미셸은 진땀을 흘렸다. 이토록 어색한 침묵은 학교 퀸인 비앙카 레이놀린의 집에서 한판 거하게 하다 탈출했던 사건 이후 오랜만이었다. 2층 비앙카의 방에서 뛰어내려 잡목 숲 밑을 포복으로 전진하고, 덤불 사이를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자신의 흔적을 지워 도망쳤던 미셸은 정원 끝 현관 앞에서 비앙카의 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무표정한 데이빗 앞에서 미셸은 그때보다 더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데이빗이 입술을 달싹였다.

“궁금한…….”

“?”

“아, 아냐. 아, 아무것도.”

데이빗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러진 검지가 구부러지지 않아 불안하게 짐을 드는 모습에 미셸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둘 사이 있었던 난장판은 다 잊은 양 데이빗은 퍽 침착하게 굴었다. 처음 미셸을 보고 놀라 크게 눈을 떴던 건 잠시였고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자기 일을 한다. 몸도 성하지 않은 사람이 지나치게 성실했다.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다 이내 창고 깊숙이 들어가버리려는 걸 미셸은 뒤쫓아 따라잡고,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지난번 경찰서에서 말한 이름과 주소는 당신 게 아니더군. 엉뚱한 이름으로 찾느라 꽤 애를 먹었지.”

데이빗은 미셸의 잡다한 말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미셸은 머쓱함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볼일이 있잖아. 머피에 관한 일도 있고 해서 연락을 했더니 전혀 딴 사람이 나오더군. 약도 오르고, 당신이 어떻게 됐나 궁금한 마음도 있고 해서 본격적으로 당신을 찾기 시작했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어. 그동안 아예 집안에서 나오질 않은 건가? 그 아파트는 당신 소유도 아니던데, 빈집에 잠깐씩 숨어 있었던 거야? 당신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서 혹시 당신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 불안했어.”

미셸은 반응이 더딘 상대를 앞에 두고 잘도 떠들었다. 데이빗이 한숨을 쉬며 가져온 상자를 구석에 쌓았다. 상자의 무게에 여윈 몸이 위태로이 휘청거린다. 미셸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극단적 선택을 했다던 데이빗의 고백을 떠올렸다.

「-……왜 내, 내가 시, 시한부 화, 환자라는 마, 말도 거, 거짓말인 주, 줄 알았나.」

피를 토한 채 창백한 얼굴로 찡그리며 웃던 데이빗의 얼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몸은 괜찮나?”

데이빗이 뒤를 돌아보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미셸을 쳐다보던 남자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푸른 눈 속 그림자가 순간 진해지는 걸 보고 데이빗이 벌컥 화라도 내지 않을까 기대했던 미셸은 심드렁히 무반응을 고수하는 상대의 반응에 내심 실망했다.

데이빗은 얌전했다. 미셸 앞에서 옷을 벗고 뛰쳐나가거나 하지 않은 채-미셸이 데이빗이었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얼굴 전체를 가릴 정도로 커다란 마스크를 쓰고 무뚝뚝하게나마 자리를 지키며 일을 했다.

“마스크는 먼지 때문에 쓴 건가. 안 덥나?”

“…….”

“당신이 뭐라고 말하는지 잘 안 들려. 잠깐만 좀 벗지 그래. 땀이 흘러서 경계가 젖었어. 혹시 나한테는 얼굴도 보여주기 싫어서 그렇게 가리고 있는 건가?”

미셸은 유치찬란한 말까지 해대며 귀찮게 굴었다. 결국 못 견딘 데이빗이 주섬주섬 마스크를 벗었다. 드러난 맨얼굴에 미셸은 입매를 굳혔다. 콧구멍 안에서부터 시작해 목을 감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관이 보였다. 위액을 조절하기 위해 비강을 통해 관을 넣어 위를 통과해 몸 밖으로 빼낸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왜 이 순간 가슴이 뭉클한지, 병색이 완연한 모습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 더 다가가고 싶은지, 미셸은 스스로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손을 뻗었다. 그저 가져다 댔을 뿐인데 데이빗은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는 사람처럼 펄쩍 놀라 몸을 물렸다. 안색 나쁜 얼굴이 아예 파랗게 질리다시피 했다. 뭘 상상했는지 데이빗이 몸을 숙이며 코를 손으로 가렸다.

미셸은 혀를 찼다. 데이빗에게 혹 자신이 관을 빼내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할 것 같으냐고 묻고 싶지만 경솔히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데이빗이 미셸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했다. 미셸은 데이빗의 손가락과 코뼈를 즐거워하며 부러뜨렸던 전적이 있다. 그는 뒤로 물러섰다.

“왜 이래?”

미셸은 말을 뱉고선 후회했다. 아프지 않으냐고 좀 더 친절히 물어야 했는데, 습관처럼 시비조의 말이 나왔다. 미셸은 데이빗이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 감추는 걸 봤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파 보인단 얘기였어.”

“나, 나는 아, 아무렇지 아, 않아. 치, 치료용 과, 관이야. 나, 난 머, 멀쩡해.”

데이빗이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말을 아까보다 많이 더듬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 괘, 괜찮아. 이, 이상 없어. 요, 용건은 그게 다, 다인가? 하, 할 말이 끝났으면 도, 돌아가. 이, 일이 많아.”

데이빗은 얼굴을 수그린 채 더듬더듬 어눌하게 말을 이었다. 힘겹게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며 미셸은 이름 모를 초조함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답답함과는 조금 다른 간질거림에 몸이 뜨거워졌다. 데이빗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미셸은 데이빗을 붙잡아둘 화제를 꺼냈다.

“스티븐 머피와 지금도 연락을 하나?”

데이빗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해졌다. 미셸은 아차 싶었다. 스티븐이 데이빗을 충동질해 미셸을 고발할지도 모른단 불안감은 데이빗의 차가운 얼굴 앞에서 사라졌다.

“내, 내가 다, 당신을 혀, 협박해 도, 돈이라도 뜯어낼까 봐?”

“내가…… 당신에게 심한 짓을 하긴 했잖아.”

“저, 정당, 방위라고 하면 돼. 스티븐이 무, 무슨 말을 다, 당신에게 해, 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착각했군. 당신과 싸워봐야 우, 우린 아무것도 못 얻어. 애초에 다, 당신 같은 사, 사람은 감옥에 가, 가는 일이 없지.”

데이빗은 두 손을 들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난 당신에게 어떤 짓도 안 해. 걱정 마.’ 말더듬이 사내는 몸으로 의사를 표현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미셸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다가가 남자의 팔목을 쥐었다. 이대로 또 헤어지고 나면 또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미열이 있는 피부는 뜨거웠다. 미셸은 살짝 건조하다 싶은 피부의 감촉에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구속구로 묶어 침대 헤드에 묶어 올렸던 그때의 감촉 그대로였다. 무의식적으로 애무하듯 뼈와 살점을 쥐었던 걸까. 데이빗이 질린 안색으로 미셸의 손을 쳐냈다.

“……미, 미쳤어?”

미친 것도 같아. 미셸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엉켰다. 자신은 어딘가 망가진 게 분명했다. 방금 밀쳐져 놓고선 미셸은 다시 데이빗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쥐려 엉거주춤 손을 내밀고 있었다. 데이빗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가지 마. 잠시만 여기 있어. 할 말이 있어.”

“뭐…….”

“당신과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가 당신한테 찾아온 이유는…….”

데이빗이 말을 잘랐다.

“날 시, 신고하러 오, 온 거겠지.”

의외의 말에 미셸은 잠시 반응을 못했다. 미셸의 눈치를 살피던 데이빗의 푸른 눈 속에서 그나마 희미하게 빛나던 빛이 푹, 어둡게 꺼졌다.

“미, 미안하지만 오, 오늘 이, 일은 다 하, 하고 가야 해. 제, 제발 기, 기다려줘.”

데이빗이 얼굴을 붉히고 하소연을 했다. 미셸은 그가 일감으로 다가가 바삐 손을 놀리는 걸 막지 못했다. 뒤돌아선 데이빗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미셸은 입을 벌렸다. 그는 그제야 데이빗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단 걸 깨달았다. 그때, 인질범을 놔주는 순간까지도 미셸은 그를 닦달하고 협박했다. 죄를 지은 건 데이빗이니 그 대가를 치르라고, 미셸이 원하면 언제든 나타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데이빗의 반응은 온당했다. 미셸은 얼굴을 문질렀다.

“신고하려고 조사해서 찾아내고, 그런 건 아냐.”

“그, 그럼 왜?”

푸른 눈이 미셸에게 고정되었다. 가슴이 콱 틀어막혔다. 데이빗의, 저 남자의 눈동자가 저리 오묘했던가. 흰자위는 왜 저리 투명하고, 속눈썹 아래 눈동자의 모양은 원래 저리 섬세했나. 미셸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여기 온 건 당신 때문이야.”

“그, 그러니까 왜.”

당신이 계속 생각나서.

미셸은 얼굴이 달아올라 목덜미가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오해할 가능성이 농후한 말을 버리고 그는 다른 적당한 말을 골랐다. 어떤 말이든 부끄럽고 민망했다. 어쩔 수 없다. 결국, 미셸은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그 별장에서…… 당신을 안았던 일이 계속 생각나서.”

데이빗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크게 두어 걸음 뒷걸음치다 모종삽과 물뿌리개 따위를 무너뜨렸다.

“데이빗?”

미셸이 최초로 부른 자신의 이름에 데이빗이 흠칫 시선을 들었다. 데이빗의 딱딱한 뺨과 긴장한 눈동자에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죄책감이 일었다. 미셸은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덧붙였다.

“그게…… 나도 왜 이런지 모르겠는데, 뭔가 미련이 남았나 봐.”

내가 당신에게 다른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게끔 기회를 줘. 당신을 다시금 안아보고 싶어. 미셸은 뒷말은 삼킨 채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데이빗은 석상처럼 굳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데이빗?”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비대한 몸집의 남자가 뭐하느냐며 크게 데이빗을 불렀다. 그 소리에 데이빗이 숨을 크게 내쉬며 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응?”

“난 다, 당신과 다, 달라.”

미셸은 잔뜩 긴장한 채 데이빗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뭐가 다르단 소린데? 자신의 말에 대한 답이 아닌 엉뚱한 말에 미셸은 눈썹을 휘었다.

“난 그 일을…….”

데이빗이 말을 하다 말고 멈춰 한참을 침묵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남자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 그게…… 좋았나?”

“뭐?”

데이빗의 땀에 젖은 얼굴 위로 지싯지싯한 미소가 번졌다. 병세가 완연한 남자의 깡마른 얼굴, 푸른 눈에 감도는 잿빛 감정에 미셸은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그게 즈, 즐거웠나. 추, 추억이 되, 될 만큼?”

좋았고 즐거웠다. 부정할 수 없어 미셸은 말문이 막혔다.

“가, 강간 플레이를 하, 하고 싶으면 따, 딴 데 가서 도, 돈을 써. 버, 번지수를 자, 잘못 찾았어.”

데이빗의 낮은 목소리가 선뜩했다.

신고를 안 해줘서 고맙단 말은 거의 농담으로 들렸다. 데이빗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 매장으로 올라가버렸다. 남자가 하루 대부분을 일하는 지하 창고에 남아 미셸은 한참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남자는 오지 않았고, 미셸은 그를 쫓아 지상으로 갔다. 미셸을 만나는 게 얼마나 불편한 일이었던지 데이빗은 대형 마트의 미로 속 어디엔가 숨어 나타나질 않았다. 돌아오는 길 내내 지하 창고에서 맡은 퀴퀴한 공기 탓에 미셸은 머리가 아팠다.

잠자리에 들어서 잠들기 전까지, 미셸은 지하 창고에서 하루를 보낼 남자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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