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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탑-5화 (5/18)

다윗의 탑 5

미셸과 헤어진 뒤 데이빗은 별장으로 가다 자신의 아파트로 방향을 바꿨다. 산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별장 안에 남은 거라곤 고작 약간의 비상식량이 다였다. 낡은 냉장고는 힘겹게 웅웅거리다 발전기가 멎으면 따라 멎을 테고, 음식물은 자연스레 썩어 사라질 터였다. 자동차 조수석을 흘낏 바라보았을 때 그곳은 비어 있었다. 사위가 검었다. 마치 별장에서의 그 밤처럼.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 탓에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 점만 달랐다.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며 느끼는 차 안의 어둠은 검고 맑았다. 자동차 계기판의 불빛에 비친 손등 외엔 자신의 몸도 잘 보이지 않았다. 손을 대면 물컹하고 만져질 것 같다. 검은 푸딩 속에 잠긴 것 같지 않은가. 톰과 제리 만화 속 거대한 젤리 푸딩을 생각하고 데이빗은 피식 웃었다. 제리를 쫓다 수영장 안을 가득 채운 푸딩에 빠져 허우적대던 톰의 모습에 자신이 겹쳐 보였다.

반대편 차선에서 밤 운전 중 최대한으로 켠 화물차의 라이트 불빛이 고속도로의 중앙 분리대를 넘어왔다. 눈이 부셨다. 그걸 핑계로 잠깐 핸들을 잘못 튼다면 그의 자동차와 몸은 순식간에 뭉개질 것이고, 깨어나 보면 자신은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데이빗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옛집은 아직 새 주인이 입주하지 않은 채였다. 다행이다. 데이빗은 만능키로 문을 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을 열자 오래된 우편물들이 주르륵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데이빗은 1층 우편함에서 찾아온 것들과 함께 그것들을 품에 안고 햇빛이 드는 안쪽으로 갔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짐을 다 뺀 집은 황량했다. 데이빗은 자신의 소파와 살림살이들이 어디로 흘러들어 갔을까 궁금해졌다. 그가 밥을 굶으며 사 모은 책들이 동네 아이들의 몫이 된 건 확실했다. 이 아파트엔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도 영양 부족으로 맑은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이 살았다. 눈만 큰 아이들이 데이빗이 내어놓은 동화책들을 한 움큼씩 주워가는 걸 그는 직접 봤다. 대다수는 다시 버려질 테지만, 몇 권은 소중하게 읽힐 것이다.

데이빗은 자신이 찾으러 온 우편물을 발견했다.

거기엔 데이빗이 보낸 원고와 편집장의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데이빗은 한 줄 한 줄 타이핑된 편지를 읽었다. 그가 예상했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말들이 거기 있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극단적입니다. 너무 밝거나, 너무 어두워요.……」

데이빗은 다 읽은 편지를 접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믿고, 행복을 갈구하며 살아온 사람의 동화는 어딘가 모르게 비틀려 있는 게 당연했다. 자신의 이야기는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불행한 일반인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일임에도, 편집자의 친절한 거절의 문구에 데이빗은 힘이 빠졌다.

원고를 포장한 한 달 전 신문 속, 어느 나라의 왕자가 평범한 여자와 키스하고 있는 사진이 얼핏 보였다. 누군가가 죽어갈 동안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누군가 사랑하는 이를 납치할 동안 또 누군가는 축복을 받으며 사랑을 확인받기도 한다.

데이빗은 편집장이 남긴 전화번호로 감사하단 짧은 메시지를 남기려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을 뒤졌다. 안은 비어 있었다. 자신이 달리는 차창 밖으로 휴대폰을 던져버린 일이 기억났다. 휴대폰의 GPS로 위치 추적을 당할 수 있다는 항간의 말이 불안해서 했던 일이다. 그는 뒷좌석에 잠든 인질의 모습을 백미러로 힐끔거리다 충동적으로 기계를 밖으로 던졌다.

그때 그는 정신이 나갔어도 한참은 나갔던 게 분명하다.

자신의 소파, 짐, 책은 태반은 버려지고, 또 몇몇은 동네 사람들에게 흡수되었다. 휴대폰은 어디쯤 있을까. 계곡물을 타고 흘러가다, 둥글둥글하게 각이 모두 깎인 자갈이 깔린 하류의 어딘가 돌 틈에 박혀 있을까.

기계는 자신보다 오래 살 것이다. 썩어 없어지지 않고 어딘가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데이빗은 별장이 있는 산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트럭이 신기하게도 잘 달렸다. 그는 자신이 인질을 태우고 산길을 달리며 보았던 그 평화로운 풍경 속에 와 있었다. 차창을 내리자 아카시아 꽃 냄새가 훅 끼쳤다. 오랜만의 맑은 날씨에 꿀벌들이 왕왕거리며 날아다녔다. 굴러 떨어지면 낡은 일제 트럭이 아니라 군용 험비를 탄 채여도 흔적도 남지 않을 것 같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들 근처에서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햇빛이 가득한 계곡 근처에서 데이빗은 차에서 내렸다. 도로에서 내려와 발밑에서 부서지는 흙을 딛고 바싹 마른 지난겨울의 갈대를 젖히며 물가로 다가간 뒤, 편평한 바위 옆에서 반짝이는 알루미늄 덩어리를 발견했다.

그는 바지를 걷고, 물이끼에 미끈거리는 돌을 디디면서 뒤뚱거리며 수심 깊은 곳으로 들어가 기계를 집어 들었다.

데이빗의 동화 속에서, 물에 잠긴 휴대폰은 여전히 살아 기능했다. 그는 아무 번호나 눌렀지만, 영리한 전화기는 알아서 데이빗이 가장 원하는 사람에게 전파를 보내어주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에 데이빗은 웃으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더듬지도 않았다.

미셸, 미셸. 난 당신을 사랑해.

전화기 저편에서 상대가 기뻐하며 웃었다.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나, 나는 그, 그를 사, 사랑하지 않아.

차가운 맨바닥에 주저앉은 말더듬이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현실을 얘기했다. 그는 이제 마음속에 미셸을 품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 그런가.

가슴속에서 수많은 마음들이 저항했다.

미셸을 납치해 별장의 침대 위에 그를 묶고, 쿵쿵거리던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숲을 헤매던 날이 기억나지 않느냐고, 마음속에서 심장이 물어왔다.

덤불을 젖히고 삐뚜름하게 제멋대로 자라난 나뭇가지를 밟아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답이 나오지 않을 물음을 낙타처럼 곱씹고 있을 때 숲 속에선 안개비가 내렸다. 퍼렇게 짙어진 풀들은 물먹은 헝겊처럼 질겼고, 부주의하게 풀을 젖혀냈다 베인 손끝은 풀물이 들어 쓰라렸다. 비에 바지와 신발이 모두 젖고, 질척해진 양말이 신발 안에서 찔꺽거리며 미끄러졌다. 그렇게 사랑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침대에 묶어두고 그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그 주변을 빙빙 미친 사람처럼, 술에 취한 것처럼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몸을 떨었다.

손과 뺨, 온몸의 표피는 파랗게 식어 소름이 인 마당에 철없는 심장만 벌겋게 뛰던 감촉을 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데이빗은 말문을 닫았다. 그 자신도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5층 연립주택의 꼭대기 층에서 창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머리칼을 날려놓았다.

* * *

미셸은 조부가 아흔 살이 넘도록 살 거라고 친척들 앞에서 투덜거렸다. 한 달 뒤 조부가 미셸에게 한 방 먹이기라도 하듯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때, 미셸은 민망한 얼굴로 조부의 관을 지키고 서 있어야 했다.

그 뒤로는 심호흡 한 번 제대로 못할 정도로 바빴다. 조부가 유언장을 손보지 않겠다고 이미 공언한 마당에 스티븐 머피의 일 따윈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이 되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파티에서 겨우 빠져나와 택시를 탔던 미셸은 동양인 택시 기사가 메모지에 인사와 금액을 적는 걸 보고 잊어버린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손님?”

“잠깐만요.”

낡은 트럭의 글러브 박스에서 수첩을 꺼내던 말더듬이 남자의 모습이 왜 그렇게 익숙한가 했더니, 미셸은 그 수첩을 트럭 안에서 처음 본 게 아니었다. 택시 회사 로고가 찍힌 공짜 수첩을 사용하는 남자. 지독히도 궁상스러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미셸은 그 가난하고 추레한 남자가 미셸이 유산을 상속받았단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던 미셸의 과거 친구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처럼 여겨졌다.

미셸은 근래 이어진 파티에 질려버렸다. 누군가 파티 주제를 뒷담화로 정해주기라도 한 걸까. 그가 마지막이라고 선언한 파티에서마저 친구들은 술과 약에 취해 미셸을 부러워하는 척 헐뜯었다. 그들은 부유하고 매력적인 인간들이었지만, 미셸은 더는 그들이 가난한 택시 기사보다 특별한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미셸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의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누구 하나 그의 행운을 진심으로 기꺼워하지 않았다.

클럽의 인위적인 사이키 불빛 아래에서 미셸은 단 한 사람, 가엾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남자의 눈에 어른거리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깊은 호수의 물처럼 푸르던 그 눈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개를 구해다 키우는지 자기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했다. 감히 자신을 고작 개 한 마리보다 못하다고 말하다니. 미셸은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는 뒤끝이 깊은 남자였다.

“혹시 말 더듬는 택시 기사 알아요?”

미셸은 창문을 두들기며 물었다.

동양인 택시 기사가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것에 미셸은 기시감을 느꼈다. 푸른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던 택시 기사의 얼굴과 납치범 사내의 얼굴이 하나로 겹쳐지는 게 신기해 미셸은 빙긋 웃었다.

자신이 특별하다 믿는 청년은 몇 분 뒤 그가 실망하게 될 것을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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