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윗의 탑-4화 (4/18)

다윗의 탑 4

데이빗이 납치하고 싶었던 것은 고서점 앞에서 연인과 키스를 나누던 그 남자였다.

값비싼 양복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자라난 자만 두를 수 있는 본연의 후광이 눈부신 사람이었다. 데이빗은 자신과 전혀 다른 동년배의 남자를 훔쳐보며 삶이란 참으로 불공평하다 여겼다.

자신의 삶과 너무도 달랐기에 더욱 남자의 삶 근처에 가 그 후광을 맛보고 싶었다. 남자의 그림자를 밟고 남자의 피부를 만지고, 몸을 나누다 보면 자신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여자친구를 퉁명스레 바라보면서도 자연스레 그녀에게 차 문을 열어주던 남자는 어디 갔을까. 데이빗은 자신이 상대의 본성을 멋대로 착각하고 엉뚱한 남자를 납치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통감했다. 그는 완전히 망했다.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으려니 미셸이 한심하단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미셸은 심기가 좋지 않았다. TV 속에서는 항공기 회사의 유산 상속 문제가 본격화되었단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셸은 거칠게 리모컨을 눌러 TV를 껐다. 데이빗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미셸의 성난 기색에서 조금 전 뉴스가 미셸과 관련된 일임을 알아차렸다.

데이빗은 성질 급한 남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중지된 자백을 다시 시작했다. 미셸은 볼펜을 잉크 심만 빼내 데이빗에게 주었다. 데이빗은 가느다란 심을 쥐고 삐뚜름하게 글을 썼다.

「머피가 내게 당신을 납치하자고 했어. 자세한 건 그가 알지 난 아무것도 몰라. 정말이야.」

데이빗은 자신이 사실대로 말해봐야 미셸이 만족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또 실제 그랬다.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자 그제야 미셸은 납득했다.

“머피는 언제 이곳에 오지? 그와 연락은 어떻게 하는 거야?”

펜이 멈췄다. 데이빗은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는 데 재능이 부족했다.

“공범이면 서로 연락을 했을 거 아냐. 전화기는 어디에 숨겨놨지? 가져와.”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정말로 없어.」

미셸이 날카로운 눈으로 데이빗을 쳐다봤다. 데이빗은 땅속으로 숨고 싶은 걸 참고 그 눈빛을 견뎠다.

“그럼 뭐야. 차는 바깥에 있고, 연락할 수단은 없고. 그럼 이건 무슨 수로 풀어줄 건데?!”

미셸이 자신의 손목에 달린 쇠사슬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침대 철제 다리에 용접해놓은 사슬의 자물쇠를 풀거나, 침대를 조각내지 않고서는 미셸은 방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데이빗은 자신이 왜 그런 것에만 애를 썼나 후회했다. 차라리 미셸을 기절시킬 수 있는 약물을 더 마련해놨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데이빗은 아직 비밀 방에서 상자 몇 개를 다 옮기지 않았단 걸 기억해냈다. 상자 안엔 여전히 전기 충격기가 남아 있었다.

「날 풀어줘.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자물쇠 열쇠를 갖고 올게.」

미셸은 기도 안 차는 소리라며 비웃었다.

「정말이야. 난 당신을 죽여선 안 된다고 머피에게 부탁했어. 당신은 날 믿어야 해.」

“잠든 인질을 뒤에서 덮치는 놈을?”

“…….”

데이빗은 태연한 척하려 애썼으나 긴장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꿀꺽 침을 삼켰다. 미셸의 허리를 잡고 등줄기가 흔들리던 모습을 구경할 때 느꼈던 도착감과 흥분의 대가가 눈앞에 있었다. 수치심에 볼이 달아올랐다.

「머피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어. 난 달라.」

“어떤 면에서? 당신은 아직 나랑 몇 판 더 하고 싶어 하니까 당장은 날 안 죽일 거란 소리야?”

데이빗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선 미셸의 말이 옳았다.

“그래. 당신이 머피인가 뭔가 하는 남자보다 나은 상대란 건 인정하지. 당신 내연남한테 당신이 나랑 하고 싶어서 껄떡댔단 말은 안 할 테니까 그리 떨지 마. 이제 시트도 없어. 매트리스까지 버리진 말자고.”

미셸은 실컷 비아냥거린 뒤 데이빗의 젖은 바지 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 골똘히 바라보았다. 그는 데이빗의 제안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데이빗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자동차에 가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시동을 걸고 도망치기 전에 창문 안으로 미셸에게 자물쇠 열쇠 꾸러미를 넘기고 그대로 도망치면 된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하는 게 좋겠다.

남자를 납치하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생각을 반복하게 될지 두렵다. 데이빗은 그를 심문하고, 옷을 벗기고, 개처럼 이리저리 기게 했던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은 미셸을 멀리서 보는 걸로 족했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걸 무를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총을 가져와.”

“?”

미셸은 시트를 길게 찢어 붕대를 만들어 데이빗의 양팔을 팔뚝부터 손가락까지 꽁꽁 묶었다. 익숙한 솜씨였다. 데이빗은 당황했다.

“차, 차로 보, 보내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총, 입으로 물어와.”

미셸은 총알로 자물쇠를 부술 셈이었다. 그는 납치범을 총 가까이 가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 데이빗은 그 방법의 치명적인 문제를 알고 있었다.

“소, 소용, 없어. 그, 그건 가, 가짜야.”

“무슨 소리야?”

“자, 장난감 초, 총이야.”

“그건 당신이 갖고 오면 확인할 수 있겠지.”

미셸은 데이빗의 말을 믿지 않았다. 데이빗은 이번에도 기어서 총이 있는 곳까지 갔다. 발목과 손목이 모두 묶여 한참 꿈틀거린 뒤에야 모델건을 입에 물 수 있었다.

“문턱까지 와서 안쪽으로 밀어.”

목을 흔들어 데이빗은 방 안으로 총을 밀어 넣었다. 미셸은 데이빗이 물어온 총을 들어보고 납치범의 말이 진짜란 걸 알게 되었다.

“당신에 대한 판단을 정정해야겠어. 난 당신이 내 백부가 고용한 청부업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군. 백부가 사람을 잘못 썼네. 어디서 개그맨을 데려왔어.”

미셸은 툭툭 총을 손바닥에 치며 말없이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창문을 등지고 침대에 앉아 있는 청년의 금발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데이빗은 얼굴이 붉어지는 걸 애써 숨기며 최대한 선량한 눈빛을 청년에게 돌려주었다. 날 믿어. 난 당신을 구한 적도 있는 걸. 택시 운전사로서 만났던 얘기는 비장의 카드였기에 데이빗은 쉽사리 그 얘길 꺼내기가 어려웠다.

“훌륭하군.”

미셸은 방아쇠를 당겼나 놨다 했다. 모델건이니 총알이 발사될 리 만무했고, 화약 냄새나 기름의 촉감도 없었다. 이딴 걸 믿고 탈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얼굴을 문질렀다. 이런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사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별다른 수가 보이지 않았다. 미셸의 시선은 제자리로 돌아와 자신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의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가장된 선량함과 무지를 두르고 있는 납치범 사내의 얼굴은 드라마 속에서 봤던 사이코패스의 표정과 흡사했다. 가장한 무지이든, 진짜 무지이든 그건 다 죄였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한 줌씩 떨어질 때마다 미셸의 입지는 점점 좁아들었다. 자신의 적들은 자신이 없는 틈을 타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에게서 빼앗을 것인가.

미셸은 모든 일의 원흉인 남자를 사납게 노려봤다. 납치범 사내가 입고 있었을 셔츠는 원래 검은빛이었을 테지만,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검은 고수머리는 진땀으로 엉망으로 엉겨 있고, 자세는 구부정했으며 안색은 형편없었다. 골격만 보면 그럭저럭 봐줄 만한 이목구비였지만, 남자의 흐린 눈빛과 갈라 터져 허옇게 일어난 채 힘없이 벌어진 입술이 그 빛을 바래게 했다. 인중에 말라붙은 코피까지 더해져 남자는 지극히 추레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평소라면 미셸은 눈길도 주지 않을 인종이다. 백인 쓰레기인 게 한눈에 보이는 남자와 단둘이 좁은 방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이딴 짓을 할 만큼 돈이 궁했어? 당신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그래 보이긴 하네. 날 감시하는 대가로 시급 십 달러는 받나?”

데이빗은 사내의 비난에 이를 악물었다. 수치심과 분노가 일었다. 데이빗을 일부러 도발하던 미셸은 데이빗의 붉어진 얼굴에 자신도 점차 감정이 격해졌다.

“왜 화가 나? 설마 나만큼 화가 나려고. 이딴 짓을 해서 나한테 얻으려던 게 뭐야? 내 괴로움, 당신의 즐거움? 당신이 내게 빼앗고 있는 게 뭔 줄 알려줄까. 내 할아버지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어. 그가 피워댔던 쿠바 시가 때문이지. 내 백부는 그가 죽기 전에 유언장을 손보려고 해.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면 난 당장 내 지분보다 적은 지분을 갖고도 회사를 쪼개서 사회에 기부하네 마네 달려드는 하이에나들과 싸워야 해. 번지르르한 구실로 으스대면서 실은 자기 재단을 설립하고 단물을 빼먹을 백부가 그들을 지휘하겠지. 젠장! 말해봐. 대체 뭐 때문에 날 납치한 거야?”

“…….”

“입 구멍이 막혔어? 겁먹은 표정으로 쳐다만 보면 되는 거야?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 납치했는지 모르겠군. 난 쓰레기를 알아보는 데 일가견이 있어. 불쌍한 척, 세상의 불행은 다 짊어진 척, 자신은 불행하니까 범죄든 뭐든 저질러도 된다고 합리화하는 새끼들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당신이 알아?!”

말을 하다 보니 미셸은 점점 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미셸은 검지로 납치범의 가슴을 사납게 눌러댔다.

“시팔, 당신 엿 같은 인생에 왜 날 끌어들였는데?!”

미셸은 분노를 쏟아냈다. 데이빗은 점점 얼굴이 멍해질 뿐 시원스레 변명 하나 늘어놓질 못했다. 그게 더 미셸의 부아를 끓어오르게 했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 당장 이 더러운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피넛 버터 샌드위치와 계란, 햄으로 근 며칠을 버텼다. 납치범 사내가 짠 식단은 엿 같았다. 칼로리는 높고 비타민은 적었으며, 단백질 함량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미셸은 자신이 썩어가는 것 같다 여겼다.

며칠째 계속 써온 시트가 눅눅했다. 그나마 오늘부터는 깔고 잘 시트마저 없었다. 오늘 밤은 끔찍한 밤이 될 터였다. 곰팡이 낀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눈 좀 붙이고 있노라면 납치범 사내가 헐떡이며 사타구니를 허벅지에 비비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억눌려왔던 짜증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감금당하고 사육당하는 동안, 소중한 것들을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었다. 최악인 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단 점이다. 미셸은 사람을 휘두르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데 익숙했지, 오물에 빠져 견디는 것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미셸의 눈에 남자는 이미 오래전에 부패해버린 쓰레기처럼 보였다. 그는 납치범 사내에게 총을 겨눴다.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 그래야 협상을 하지. 돈이든, 내 몸이든. 뭘 원하는지 똑똑히 말해.”

총을 든 손이 점점 다가왔다. 데이빗은 묶인 두 손으로 코를 가렸다. 미셸의 손에 들린 것은 비록 가짜 총이었으나 그것으로 후려치면 자신의 부러진 코뼈는 그대로 무너져 내릴 터였다. 총구가 코 바로 앞에서 멈췄다.

“당신, 목적이 뭐야?”

데이빗의 익숙한 침묵에 미셸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미셸의 손이 데이빗의 턱을 쥐었다. 청년의 손가락이 납치범의 입가에 스쳤다. 데이빗은 미셸이 자신의 약점을 알아차린 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가 다시 자신의 혀를 쥔다면 이번에도 기겁해 쓰러질 것만 같다.

“말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납치의 목적.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데이빗은 둔중하게 굳어버린 뇌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반사적으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생각지도 못하게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키, 키스.”

“뭐?”

미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데이빗은 자신이 키스를 졸랐단 데 놀랐다. 그 뜻이 아니었다. 원래 그가 말하려던 것은-

“그 여, 여자와 다, 당신이 키, 키스하지 아, 않는 거야.”

미셸이 눈매를 좁혔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만 더듬었으면 좋겠는데,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줄도 몰랐다. 불만스레 투덜거리던 미셸은 몇 초 뒤에야 남자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게 되었다. ‘키스’와 ‘여자’. 떠오르는 건 딱 한 사람뿐이었다. 섬뜩 소름이 돋았다.

“당신이 줄리아를 어떻게 알지?”

데이빗은 자신이 실수했단 걸 깨달았다. 미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데이빗은 어깨를 움츠렸다. 미셸이 달려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미셸이 천천히 다가왔다. 데이빗은 그가 자신의 목을 재차 졸라 숨을 완전히 끊어놓을 거라고 느꼈다. 두려움에 심장이 아플 정도로 크게 뛰었다.

미셸이 기가 차 웃었다. 그는 유통기간이 지나 부패해버린 햄버거 패티를 보듯 데이빗을 응시했다.

“언제부터 내 곁을 맴돌았어? 너 진짜 변태 새끼였어?”

“그, 그게 아니라…….”

“줄리아한테는 왜 신경 쓰는 거야. 그녀도 쫓아갔던 거야?”

미셸의 눈빛은 혐오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엉망진창이었다. 데이빗은 자신이 완전히 망했단 걸 알았다.

남자를 납치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냐, 난 그 여자가 아니라……. 미처 변명하기 전에 미셸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그 여자한테 손끝 하나만 대봐!”

“?!”

미셸은 데이빗을 거칠게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미셸은 데이빗을 엎드리게 하고 억지로 셔츠를 끌어내리다 묶인 손목 때문에 옷을 완전히 벗길 수 없단 걸 깨달았다. 등에 가득한 흉터가 얼핏 눈에 들어왔지만, 끊어진 이성을 돌아오게 하기엔 부족했다. 미셸은 끌어내리던 셔츠를 도로 밀어 올려 납치범 사내의 머리와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더럽고 추한 남자의 얼굴은 꼴도 보기 싫었다.

미셸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는 동성의 사내를 ‘거세’하는 법을 알았다. 군대에서는 게이가 아니라도 동성을 강간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 중엔 단순히 욕망 때문이 아니라 가장 질 낮은 폭력으로써 상대를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짓밟기 위해 강간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을 강간하려 했고, 자신의 여자를 넘본 가당찮은 쓰레기를 힘으로 내리눌러 그가 감히 자신에게 덤비지 못하게끔 해야 했다. 미셸은 사내보다 우월했다. 멍청한 사내가 그걸 모른다면 공포를 아로새겨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해두는 게 좋았다. 뼈 몇 개 부순 것만으론 부족했나 보다. 아둔하게 말을 더듬는 척하며 아직도 재빨리 그에게 엎드리지 않는 고집 센 놈에게 몸 깊숙이 폭력과 고통을 부어 넣을 필요가 있다.

엉덩이를 잡아 벌리자 벌겋게 부어오른 주름이 보였다. 다짜고짜 성기를 밀어 넣자 상대가 말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맨 처음 납치범이 미셸의 성기를 자극해 억지로 그 위에 올라탔던 날, 빡빡함에 고통을 느꼈던 기억 때문에 미셸은 일단 도로 끝을 빼냈다. 등줄기가 크게 휘청거리고 잔근육들이 눈에 띄게 경련했다. 담배 탓인 게 분명한 돌출된 흉터들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다. 사내의 삶이 전형적인 불행한 인간의 루트를 밟았단 걸 여실히 보여주는 흉터를 미셸은 아무 감흥 없이 바라봤다.

손가락을 쑤셔 넣고 돌려 얼마간 풀어낸 뒤 두 번째로 파고들자 이번엔 그래도 어느 정도 진입할 만했다. 미셸이 누르고 있는 셔츠 밑에서 남자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꿈틀거렸다. 미셸은 더 깊게 파고들어 거세게 쳐댔다. 흐윽, 흐윽, 징벌에 가까운 섹스가 끝날 때쯤에는 납치범 사내가 뱉어낸 숨과 그가 흘린 땀 때문에 셔츠가 축축해졌다.

미셸이 흘린 땀방울이 데이빗의 등에 뚝뚝 떨어졌다. 데이빗은 미셸을 받아내며 어떤 때는 꿈틀거리며 미친 듯 버둥거리다 어떤 때는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미셸의 살덩이가 몸에 쐐기처럼 박힌 채 고문보다 더한 고통을 주었다. 몸이 넝마처럼 늘어졌다가 약간의 고통에도 기겁해 팽팽한 고무줄처럼 당겨지길 반복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었다. 제발, 그만! 닫힌 입 대신 납치범 사내의 몸이 비명을 지르며 애원해댔다.

빡빡하게 부어오른 내벽과 근육이 미셸을 꽉꽉 조여오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엿 같은 일이지만, 납치범 사내를 강간하는 혐오스러운 일 속엔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끝내주는 쾌감이 섞여 있었다. 놀랍도록 빨리 절정으로 밀려 올라가며 미셸은 자신이 뱉어낸 정액으로 좁은 안이 뜨겁게 차오르는 감각에 취해 이를 악물고 으르렁댔다. 흥분과 혐오가 반반 뒤섞여 들끓는 열로 변화했다.

성기를 빼어내려던 순간 몸 아래 눌린 사내가 치를 떨며 몸을 떨었다. 그 작은 움직임과 죽어가는 짐승처럼 낮은 신음에 물러나던 성기가 도로 단단해졌다. 미셸은 몸의 반응에 스스로 놀라 거칠게 욕을 뱉었다. ‘더러운 새끼.’ 눈먼 욕이었다.

오랜 시간 갇혀 있던 몸은 동성인 사내의 딱딱한 몸에도 미쳐 날뛰고 발정했다. 해가 완전히 기울어 사위가 시커멓게 변했을 무렵이 되어서야 미셸은 데이빗을 놔주었다.

미셸이 빠져나간 뒤 한참 동안 시체처럼 축 늘어져 꿈쩍도 않던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셔츠를 쥐었다. 남자는 격렬한 피스톤 운동에 미끄러진 셔츠를 끌어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사내가 기절했는지 살펴보려던 미셸은 사내의 의식이 남아 있단 데 적이 놀라며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미셸이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에도 사내는 셔츠로 얼굴을 가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셸은 혀를 차며 셔츠를 치웠다.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사내는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리 사이로 선혈이 비쳤다.

미셸은 데이빗의 얼굴 앞에서 손을 왔다 갔다 했다. 반응이 없었다.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걸까. 미셸은 시험 삼아 잔뜩 움츠려 있는 다리를 잡아 벌렸다. 그 순간 데이빗의 눈이 크게 벌어지며 엄청난 크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망가진 줄 알았던 장난감 앰뷸런스에 새 건전지를 꼈더니 우렁찬 사이렌이 터져 나온 꼴이다. 납치범 사내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격한 동작으로 허우적댔다.

“하……하지 마요! 하, 하지 마요. 제발요. 제발요.”

미셸은 그의 몸을 힘으로 누르려다 이어진 말에 멈췄다.

“대, 대디…… 자, 잘못했어요. 안 할게요. 안 할게요.”

어눌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술에 취한 사람의 것처럼 불안정했다. 미셸은 뒤늦게 데이빗의 눈이 풀렸단 걸 알아차렸다. 의식은 있되 정신은 없는 상태였다. 무얼 물어보고 윽박지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미셸은 물러났다.

중얼거리며 몸을 떨었다 말았다를 반복하다가 데이빗은 어느 순간 갑작스레 정신을 차렸다.

흠칫, 경련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사위가 밝아지고 의식이 명료해지기 바쁘게 그는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통증에 압도당했다. 부러진 코 부위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징징거리는 동통이 느껴졌다. 온몸의 피부가 불에 타는 것처럼 쓰라리다. 수많은 통증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이 고통이 연유하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폭행을 당하자 뇌가 잠시 착란을 일으켰던 걸까. 데이빗은 좀 전 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는 헛소리를 뱉었단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으며 잠깐 실수를 한 것일 뿐, 이젠 정신이 되돌아왔다고 남자에게 알려야 할까.

그렇게 해봐야 남자와 부딪칠 기회만 만들게 될 것이다. 데이빗은 눈알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미셸은 뒤돌아 앉아 TV를 바라보고 있다. 잘 발달한 상반신과 강인해 보이는 목, 깎아놓은 것 같은 이목구비와 짧은 금발머리가 눈에 띄었다. 확실한 미셸 클뤼젤의 모습인데 어째서인지 데이빗은 잘생긴 청년의 모습 위로 형편없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치는 걸 느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데이빗이 절대 사랑할 수 없는 인종이 있다면 그건 그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데이빗은 너무 자주 아버지를 미워했다가 용서하고, 또다시 미워했다가 사랑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흠씬 두들겨 팼다가 자신의 기분이 나아지면 아들과의 관계를 도로 회복하려 애쓰는 남자였다. 그는 담뱃불로 어린 아들의 몸을 태워놓고, 열이 오른 아들에게 울면서 초콜릿을 쥐여 주었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왜 쓰라린 경험을 하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데이빗은 남자의 폭력적인 본성은 전혀 고려치 않고 덜컥 한눈에 반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혀를 찼다.

데이빗은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미셸을 바라봤다. 남자는 오른 손목에 묶인 사슬의 이음새를 살피며 어떻게든 사슬을 풀어낼 방법을 궁리 중이었다. 금발인 사내는 눈썹마저 금빛이다. 길게 이어진 부챗살 모양의 속눈썹이 높은 콧날로부터도 한참 멀어진 허공까지 뻗어 있었다. 손을 대보면 비싼 붓을 만질 때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날까.

미셸이 예고도 없이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뭘 봐?”

데이빗은 놀라 눈을 감았다. 남자가 불쾌한 얼굴로 혀를 찼다. 계속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다시 싸움이 붙을까 두려워 데이빗은 몸을 돌렸다가 허리 아래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아 어깨와 고개만 반대쪽으로 눕혔다.

몇 시간 동안 데이빗을 강간한 남자는 데이빗에게 미안하단 말도 하지 않는다. 미셸의 눈엔 혐오의 빛만 여전했다. 데이빗은 어깨가 늘어지고 입술이 힘없이 벌어지는 걸 느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나지 않았다.

미셸은 사슬의 이음새를 살피다 한 군데도 풀어볼 만한 부분이 없단 걸 발견했다. 신경질적으로 사슬을 내던진 후 그는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그는 총을 쥐었다. 데이빗은 미셸이 자신 쪽으로 올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셸이 그의 허리를 올라타 심문을 계속하거나 섹스를 반복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을 꾹 감고 마른침만 꿀떡였다.

미셸은 총을 쥐고 창가로 갔다.

그는 데이빗의 손을 묶고 남은 시트로 총과 손을 둘둘 말아 주먹과 개머리판의 단단한 부분으로 창을 내리쳤다. 데이빗은 부서지는 유리 조각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유리창은 한 번에 완전히 부서지지 않아 미셸은 두어 번 커다란 조각을 부순 뒤 시트를 털어냈다.

“일어나.”

데이빗은 자기 딴에는 최대한 빨리 침대에서 물러났지만, 성마른 미셸의 성품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속도였다.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바닥에 발을 딛고 서자 허리와 등, 다리와 온몸이 후들거렸다. 미처 굳지 않은 타액이 허벅지를 타고 피와 함께 흘러내렸다. 직립이 불가능했다. 주저앉으려는데 미셸이 턱짓으로 도로 일어나라 시켰다.

“침대, 들어봐.”

“…….”

데이빗은 무릎을 굽혔다.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을 뻔하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침대의 다리 부분을 잡아 들어올릴 수 있었다.

방 중앙에 자리했던 침대를 미셸은 창문에 붙였다. 그는 기어이 침대 다리를 거꾸로 들어 사슬이 용접된 부위를 창 가장 가까이 붙이는 데 성공했다. 미셸은 훌쩍 창문 위로 몸을 띄우더니 그대로 문밖으로 사라졌다.

데이빗은 전율했다.

미셸이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안 돼!’

뭐가 안 되는 줄도 모르면서 데이빗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창문에 바짝 붙어 미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산은 검고 커다랬다.

시커먼 산 위로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질 것 같다. 미셸은 데이빗이 세워놓은 낡은 트럭으로 향했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외진 곳이었기에 데이빗은 남자가 어디까지 갈지, 과연 트럭에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 짐작이 어려웠다.

창틀을 쥐고 있는 데이빗의 손등이 밤바람에 차갑게 식었다.

미셸이 사라진다면 지난 며칠간의 일은 모두 의미 없는 것이 될 터였다. 데이빗은 무섭고 잔인한 사내와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길 원했던 마음과 달리, 이젠 그가 떠날까 좌절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빗은 그가 두려웠다. 하지만 미셸이 자신만 놔두고 사라져버린다면 자신은 홀로 죽게 될 것이다.

사슬은 길지 않았다. 미셸은 길 중간에서 돌아와야 했다. 성질을 부리며 사슬을 당겼지만 땅땅거리는 불쾌한 소리만 났다. 벽을 부수지 않는 한 도리가 없었다.

돌아오다가 미셸은 창가에 서 있는 데이빗을 발견했다. 데이빗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산의 밤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별장의 조명 빛에 날벌레들이 날아들었다. 미셸은 시트로 깨진 창을 가리려다 접착제가 마땅치 않아 포기했다. 불을 끄는 게 빨랐다. 데이빗이 가져온 빵을 입안에 욱여넣고 불을 끄자 방 안은 무서울 정도로 깜깜해졌다.

데이빗은 침대 밑에 조금 전과 동일한 포즈로 웅크리고 있었다. 미셸은 침대 위로 올라와 잠을 청했다. 납치범이 잠든 그를 강간하려 하면 어떡하나. 쓸데없는 걱정이 언뜻 떠올랐다 사라졌다. 데이빗의 양손은 여전히 묶인 채다. 자신은 그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미셸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미셸이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데이빗은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에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시계가 보였다. 손목을 묶으며 미셸이 벗겨 바닥으로 던진 시계는 대형 마트에서 푼돈을 주고 산 싸구려였다. 당시엔 시곗바늘에 발린 야광안료를 쓸모없이 여겼다. 그러나 푸르게 반짝이는 시곗바늘은 어두운 방 안 유일한 빛이었다. 데이빗은 바늘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노려봐도 분침은 여간해선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고장 난 게 아닐까 의문을 품을 즈음에야 비로소 한 칸이 이동했다.

미셸이 뒤척일 때마다 데이빗은 몸을 웅크렸다. 끼익 끼익, 조그만 움직임에도 낡은 매트리스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데이빗은 미셸이 부디 깨지 않기를 바랐다.

“이봐.”

미셸이 침대 위에서 데이빗을 불렀다. 어둠 속에선 인간의 눈도 고양이처럼 인광을 뿜는다. 데이빗은 미셸의 눈을 끔찍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올라와.”

미셸의 목소리는 잠에 취해 거칠었다. 침대로 올라갔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데이빗은 주저했다.

“……왜?”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미셸의 눈빛이 흉흉해졌다는 것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추워.”

창문이 뚫린 방 안은 바깥 기온과 별 차이가 없었다. 산의 찬 공기에 몸이 식기는 데이빗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아직 오한보다 부서진 몸이 내뿜는 열이 더 괴로웠다.

정상 체온의 미셸은 몸을 웅크리며 추위를 견디다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그는 말 안 듣는 납치범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데이빗의 두피는 따끈따끈했다. 미셸이 머리칼을 살짝 당기자 그것만으로도 상대는 몸을 떨며 침대로 기어올랐다.

데이빗의 몸은 뜨거웠다. 끌어안으면 미셸도 그 열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잘빠진 글래머 모델도, 미셸이 십 대 때부터 키운 말 잘 듣는 애완견도 아니었다. 미셸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 탈출해야 했다. 그 앞에 체온을 얻을 방법이 있었다.

미셸은 뒤에서 데이빗을 끌어안았다. 납치범 사내가 몸을 떨며 헐떡였다. 달뜬 숨결이 미셸의 팔뚝에 쏟아졌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란 걸 알기에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다. 다리 쪽은 데이빗도 차갑기 매한가지였다. 벌거벗은 허벅지 쪽은 얼음장처럼 냉랭해서 미셸은 겨드랑이와 복부에 손을 밀어 넣었다. 미셸의 손이 파고들자 데이빗이 격하게 떨었다. 그가 공포에 질릴수록 많은 열이 뿜어져 나왔다. 기이할 정도로 높은 열에 미셸은 데이빗의 상태가 꽤 좋지 않단 걸 그제야 알았다. 날이 밝으면 남자를 한 번 살피긴 해야겠다고 맘먹었으나 지금은 자는 게 급했다. 뜨끈한 체온에 추위가 물러나자 졸음이 몰려들었다.

사정 후 노곤함이 뒤늦게 덮쳐왔다. 미셸은 데이빗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이마를 남자의 등, 축축한 셔츠 위에 붙이고 눈을 감았다. 그는 얼마 뒤 곧바로 잠에 빠졌다.

데이빗은 미셸의 몸이 편안하게 늘어지는 걸 느꼈다. 고른 숨이 등줄기에 흩어졌다. 미셸이 잠든 게 확실했지만 데이빗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는 몇 시간 전 아무렇지 않게 그를 짓뭉갠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가만있으려고 해도 자꾸 몸이 떨리고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셸이 그를 더 바짝 당겨 안았다. “!” 데이빗은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가슴부터 허리까지 밀착되어 꼬리뼈에 미셸의 성기가 닿을락 말락 했다. 데이빗은 최대한 멀리 다리를 뻗어 하반신 쪽을 떨어뜨려놓았다.

성기가 신경이 빡빡하게 몰린 내벽 안을 쑤시고 들어올 때의 날카로운 통증이 아직도 생생하다. 미셸의 몸은 살덩이가 아니라 차라리 잘 벼린 칼에 가까웠다. 데이빗은 지독한 아픔에 시달렸던 충격에 도통 잠을 이룰 수 없다. 참혹함에 몸이 덜덜 떨렸다.

드라큘라 백작의 고문에 당했던 이들도 자신처럼 미친 듯 허우적댔을까. 자신은 눈앞이 시뻘게져 전기 충격을 가한 개구리처럼 펄쩍거렸다. 꿈틀거리고 비명을 질렀지만 상대는 데이빗의 몸 깊은 곳을 찢고 가르며 그의 정신과 몸을 천천히 부숴놨다. 줄줄 흘러내리던 눈물이 부어터진 입술을 흥건히 적실 지경이 되어서야 미셸은 만족했다. 갈가리 찢긴 안을 거칠게 박아대고 쳐대던 이는 마지막 여운을 즐기며 한 방울 정액 까지 털어놓고 가려고 허리를 흔들었다. 그 작은 동작에도 데이빗은 기겁해 흐느꼈다.

온몸을 가득 채웠던 성기가 빠져나갔을 땐 아마도 산도에서 막 빠져나온 갓난아이보다도 안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셸의 성기는 도로 부풀어 단단해졌다. 끔찍함에 허리를 비틀며 도망치다 오히려 허리를 잡혔다. 하반신이 거의 들려 거세게 밀어 올려졌다. 정수리를 침대 머리 부분에 부딪히며 데이빗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지옥에서 해방되길 소리 없이 애원했다. 제발, 그만! 제발…….

그때를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이가 딱딱 부딪혔다. 미셸은 잠들어 있는 게 확실했지만, 데이빗은 그가 금방이라도 다시 깨어나 움직일까 두려웠다.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방, 잔인한 남자의 품에 안겨 데이빗은 공포에 질려 진땀을 흘렸다.

데이빗은 단단히 잡힌 상반신을 빼내기 위해 버둥거리다 포기했다. 환장하게도 배가 다시 꾸륵거렸다. 그 소리에 남자가 깰까 겁났다. 끙끙거리며 참던 데이빗은 얼마 뒤 미셸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다.

“이, 일어나 봐.”

“잠이나 자.”

“……배, 배가 아, 아파서 화, 화장실에 가야 되, 될 것 같은데.”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미셸이 데이빗을 밀치며 일어났다.

“먹은 것도 없는데, 그놈의 배는 왜 그래?”

원인 제공자인 미셸을 데이빗은 힐끔거렸다가 시선을 내렸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데이빗은 묶인 손목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미셸은 물도 안 마신 데이빗이 화장실 핑계로 도망치려 한다고 의심했다. 직장 안 정액 탓에 배앓이를 한단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어 데이빗은 밀려드는 변의를 참아내며 하반신에 힘을 주었다. 초조함이 파도처럼 몇 차례 그를 덮쳐 한계의 영역으로 밀어올렸다 내려놓았다 했다. 데이빗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배, 배는 네, 네가 아, 안에다 해, 해서 그래.”

데이빗은 자신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떨리는 걸 들었다. 어두워서 모든 소리가 너무 뚜렷했다. 간이 발전기의 웅웅거림도, 풀벌레의 지지거리는 소리도, 자신의 목소리에 가득한 비굴한 기색도. 미셸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못 알아듣는다. 데이빗은 덧붙였다.

“자, 장 안에 애, 액체가…… 그, 그게 과, 관장처럼, 비, 비슷해서 배, 배가 아파져.”

미셸은 더는 묻지 않고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데이빗은 다리를 꼬고 변의를 참아내던 꼴이 훤히 불에 드러나자 수치심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셸이 침대에 묶인 사슬의 매듭을 풀어내자마자 데이빗은 허둥지둥 화장실로 갔다. 미셸은 이번엔 문 곁에 서서 그를 감시하지 않았고, 볼일을 다 보고 데이빗이 안까지 다 씻을 때까지 재촉하지 않았다. 데이빗은 미셸의 태도에 괴이함을 느꼈다. 미셸은 자신과의 하루를 통해 그가 감시할 필요가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알아차리고, 감시 대신 도로 잠들기를 택한 것은 아닐까. 살금살금 바깥을 살피려던 찰나 문 너머로 들린 인기척에 데이빗은 바짝 긴장했다.

방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데이빗은 슬며시 욕실 문을 잡아당겨보았다. 욕실 문은 바깥에서 안으로 밀게끔 되어 있었다. 무거운 것으로 문을 받친다면 욕실 안에 숨을 수 있을 것이다.

‘숨어서 무얼 어쩌려고?’

아사할 셈인가. 게다가 문을 받칠 만한 것도 없다. 데이빗은 자신의 생각을 비웃었다.

“뭐해?”

기다리다 지친 미셸이 확 문을 밀었다. 데이빗은 깜짝 놀라 문고리를 쥐고 상반신 전체로 막았다.

“안 비켜?!”

실랑이는 1분도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데이빗이 힘에 밀려 뒤로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둔부와 허리의 충격에 그는 한참 일어나지 못했다.

“나와.”

데이빗은 구부정하게 몸을 움츠리고 다리를 절룩이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미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미셸은 욕실에서의 일을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피곤한 눈을 몇 번 비빈 뒤 자리에 드러누웠다.

“불 꺼.”

데이빗은 황급히 말을 따랐다. 사방이 도로 깜깜해졌다. 데이빗은 벽을 더듬어 침대 쪽으로 갔다.

둘은 조금 전과 반대 방향으로 누웠다. 침대 안쪽을 미셸이, 바깥쪽을 데이빗이 차지했다. 데이빗이 미셸을 향해 등을 보이고 눕자 미셸이 몸을 돌렸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굳히는 데이빗을 미셸은 아까처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미셸의 커다란 손이 납치범의 겨드랑이와 복부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자신의 손이 있을 자리라고 자신하는 동작이었다. 데이빗은 이 밤 내내 자신이 한잠도 못 잘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미셸의 곰 인형은 씻고 나와서도 여전히 열이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입술과 눈가는 열로 붉고 겨드랑이 안쪽은 따끈따끈했다. 찬물이 닿았던 하반신은 사정이 달랐다. 젖은 셔츠가 선뜩해 미셸은 자신의 바지에 닿지 않게끔 셔츠를 허리 위로 말아 올리려 했다.

단순히 그런 의도로 허리를 스친 것뿐이다.

미셸의 손이 닿자 데이빗의 허리가 바짝 긴장하며 휘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둔부가 옴팡지게 조여드는 게 보였다. 미셸은 꿀꺽 침을 삼켰다. 손바닥을 허리에 갖다 대고 꽉 틀어쥐어봤다. “!”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반응이 돌아왔다. 데이빗의 몸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두려움에 차 어떻게든 닿은 면적을 줄이려 등줄기를 비튼다. 그 뒷모습에서 난잡한 성교를 연상하고 미셸은 입술을 핥았다. 남자가 미셸의 성기를 틀어 문 채 스스로 허리를 흔든다면 음란한 여자의 요분질 못지않을 것 같다.

미셸은 자신의 손바닥이 열로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상대의 차가운 허벅지 사이에 파고들어 천천히 문지르자 상대가 가느다랗게 앓는 소리를 낸다. 미셸은 또 다른 손으로 상대의 뜨거운 등줄기를 문질렀다. 푸드득 경련하는 경추를 손으로 누르며 미셸은 자신이 새나 노루 따위의 작은 짐승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을 포획했으며, 그의 몸을 전적으로 누릴 권리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옆으로 누운 상대의 몸 위를 타고 올랐다. 무방비하게 짓눌린 상대가 두려움과 끔찍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셸은 그 펄떡이는 반응에 감탄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상대의 몸을 쓸어내렸다.

“하, 하지 마……. 제, 제발…… 싫어. 싫어…….”

코뼈에 금이 가도 애원하지 않던 상대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처럼 굴었다.

“차……차에 가, 가, 가서 여, 여, 열쇠를 갖고 올게. 도, 도망치지 아, 않을게. 내가 자, 잘못했어. 용서해줘. 제발 이, 이건 싫어.”

미셸은 두려움으로 바짝 곤두선 데이빗의 유두를 쥐었다. 부풀어 오른 지방의 풍만함을 제외하면 사내나 여자나 유두와 유륜의 연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거의 흡사했다. 미셸은 상대의 좁쌀만 한 살점을 엄지와 검지로 쥔 채 당기고 문질렀다. 다른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틀어쥐었다. 데이빗의 목구멍 안쪽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놔, 놔주면 뭐, 뭐든 하, 할게. 이……이러지 마. 하기 시, 싫어. 시, 싫어. 아, 안 돼. 아……안 돼!”

데이빗의 말이 점점 빨라지다가 마지막은 날카로운 비명으로 끝났다. 미셸은 아까처럼 한 번에 틀어박진 않았다. 손가락 두 개를 넣어 벌린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데이빗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가 치명상을 입은 짐승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미셸은 손을 도로 빼내 침을 뱉었다. 젖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연동 운동을 하는 분홍빛 근육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젖고 부어올라 감촉이 묘했다. 처음처럼 빡빡하진 않았다. 데이빗이 방금까지 손을 넣어 씻었고, 그전에 이미 미셸이 요령 없이 마구 해댄 터라 입구는 적당히 이완되어 있었다. 미셸은 손가락으로 자신이 들어갈 곳을 두들기고 문질러, 열고 풀며 길들였다. 미셸은 거추장스러운 청바지를 벗어 멀리 던져버렸다. 양손으로 둔부를 벌리고 성기를 밀어 넣었다. 데이빗의 흐느낌이 더욱 커졌다. 남자는 이마를 문지르며 울부짖었다.

“……그, 그만!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미셸은 손을 뻗어 데이빗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물이 흥건하니 묻어났는데, 미셸은 그 감촉이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미셸의 주변에는 누구도 이런 식으로 무방비하게 울지 않았다. 남자는 완전히 절망해 부모에게 버려진 어린애처럼 통곡했다.

“!!”

잔뜩 흥분한 미셸이 거칠게 안을 파고들자 남자는 이제 아예 애원의 말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미셸은 데이빗에게 울음을 그치는 게 좋겠다고 충고해주고 싶었다. 남자의 울음은 미셸에게 승전곡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고통과 두려움이 잔뜩 스며든 흐느낌은 가엾을 정도로 미셸의 취향에 들어맞았고, 신기할 정도로 그의 가학적인 면을 할퀴었다. 자신의 적이었던 사내가 울면서 비굴하게 잘못을 빌수록 미셸은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한계까지 부푼 성기의 울퉁불퉁한 부분이 지금껏 시달려 붉게 변한 내벽을 긁고 지나가는 감각과, 직장 안 깊숙한 곳까지 치고 올라가 상대의 몸을 울리게 하는 느낌이 좋았다.

“아으으…… 아으…… 아, 아……아으으…….”

미셸의 흥분과 반비례하게 데이빗은 거의 죽어나갔다. 미셸은 사내의 턱을 쥐었다. 까슬까슬한 수염 역시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꿈틀거리고 꽉꽉 조이며 열을 뿜는 내벽에 취해 미셸은 토정했다. 뜨거운 체온에 반사적으로 내벽이 조여들었다. 미셸은 바깥으로 성기를 잡아당기며 내벽이 따라붙는 감촉을 느꼈다. 바깥으로 흘러나온 타액에 데이빗의 직장과 항문, 미셸의 음모가 젖어들었다. 아까의 섹스가 아니었더라면 분명히 더 빨리 절정에 달했을 것이다. 미셸은 인정했다. 납치범 사내의 몸은 나쁘지 않았다.

미셸은 엎드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내의 몸을 돌려 얼굴이 드러나게 했다.

“히……흐아!”

성기가 들어찬 채로 몸이 돌려지자 데이빗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신음했다. 미셸의 몸 아래에서 충분히 발버둥치고 흐느꼈던 이의 몸은 쾌감과는 관련 없는 열기로 후끈했다. 미셸은 훅 끼쳐오는 데이빗의 체온과 땀 냄새, 눈물로 흥건한 얼굴과 다 부어터진 입술에 재차 흥분했다.

내벽 안에서 도로 단단해지는 미셸의 성기를 느끼고 데이빗은 허리를 떨었다. 그는 넋 나간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사, 살려주세요. 아, 안 할게……요. 사, 살려주세요.”

납치범 사내는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한 얼간이임이 틀림없다. 자신이라면 가학적인 본능으로 똘똘 뭉친 상대에게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텐데. 미셸은 혀를 찼다.

“안 죽여.”

자신이 왜 남자를 죽이겠나. 미셸은 스스로 답했다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어쩌면 죽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낡은 침대가 요란하게 끼익거렸다.

하느님.

데이빗은 허공을 향해 물었다.

하느님.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신을 불공평한 존재라고 욕한 걸 듣고 신이 단단히 삐졌나 싶었다. 그래도 불렀다. 대화를 나눌 자가 그밖에 없었다.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전능하신 하느님, 제가 이런 일을 당할 만큼 그렇게 큰 죄를 지었습니까. 신은 침묵했다. 데이빗은 스스로 답했다. ‘그렇다.’

미셸이 몸 안에서 빠져나갔다. 미셸의 아래도 데이빗의 하반신도 온통 젖어 질척거렸다. 데이빗은 욕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하반신이 잘린 도마뱀의 꼬리처럼 잘게 경련을 멈추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다. 기괴한 움직임에 흐느끼다가 그는 미셸이 그 소릴 듣고 나올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의식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진 순간, 미셸은 데이빗의 옆에 있었다. 데이빗은 펄쩍 뛰어 몸을 침대 가장자리로 물렸다. 밑으로 떨어질 뻔한 걸 미셸이 잡아당겨 제자리로 끌어다 놓았다. 데이빗은 두려움과 의아함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셸의 손이 점점 자신의 몸으로 다가왔다. 또 뭘 하려고 하는 걸까. 숨도 못 쉬고 그리 바라보고 있는 동안 손은 기어이 데이빗의 맨몸에 와 닿았다. 차갑다. 미셸의 손에는 젖은 시트 자락이 들려 있었다.

데이빗은 서늘함에 놀라 와들와들 떨었다. 그러고 보니 온몸이 곱아들 정도로 춥다. 미셸은 놀랍게도 데이빗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는데, 고마움을 느끼기엔 데이빗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차가운 몸에 차가운 물수건이 얹히는 건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데이빗은 아침이 되어서야 풀려난 손으로 힘없이 미셸의 손을 밀어냈다.

“추……추워…….”

“춥다니, 온몸이 펄펄 끓는데?”

미셸은 자신이 체온을 잘못 짚었나 싶어 이마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열이 훅훅 쏟아져 나오는데 납치범 사내는 어디가 잘못된 건지 춥다고 하소연했다. 미셸은 투덜거렸다.

“덮을 이불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군. 먹을 것도 다 떨어져가고.”

“……나, 날 푸, 풀어주, 주면…….”

“도망가버리겠지. 그러니 얼른 일어나서 기어갔다 와. 이불이랑 먹을 걸 갖고 올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니까. 난 굶어 죽고 싶지 않아. 벌거벗은 남자랑 단둘이 시체로 발견되고 싶지도 않고.”

미셸이 일말의 동정심을 베풀까 기대했던 데이빗은 얄미울 정도로 솔직한 미셸의 말에 숨이 틀어막히는 걸 느꼈다. 미셸은 데이빗이 치욕스러운 자세로 기어가 갖고 온 빵과 잼을 혼자 먹어치웠다. 하루가 지났고 미셸은 배고픔을 느꼈다. 입맛은 없었지만, 데이빗에게도 먹을 음식은 필요했다. 미셸은 그가 강제로 취한 남자에게 다시 식량을 구해오라고 말했다.

“뭐야, 왜 우는 거야?”

데이빗은 원래 이렇게 잘 우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셸 앞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기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하반신은 장갑차에 깔린 것처럼 전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였다. 미셸은 타인의 몸에 대해 무감했다. 그가 화내며 기어가라고 한다면 기어가야 한다. 타액으로 얼룩진 나신을 고스란히 까발리고 개처럼 기어야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어찌 됐든 미셸은 데이빗이 가슴앓이를 하며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상황이 허락했더라면 데이빗은 미셸 앞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꾸민 채 그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것이 절대 불가능했기에 납치라는 추한 수단을 썼다. 자신을 미셸만큼 끌어올릴 수 없으니, 미셸을 자신의 상태로 끌어내렸다. 결과는 오묘했다. 상황은 데이빗의 예상을 전혀 벗어나 흘러가고 있었다. 미셸은 데이빗을 가장 밑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더는 못 내려가겠다. 데이빗은 열로 하얗게 변한 입술을 달싹였다.

“모……못……해…….”

“못하면, 나더러 굶어 죽으란 소리야?”

미셸의 목소리에 날이 서기 시작한다. 데이빗은 미셸이 도로 자신의 얼굴에 주먹질할 거란 강한 확신을 느꼈다. 코뼈가 주저앉고, 비강으로 피가 고여 흐르고, 그리고 그의 성기가 몸 안 가장 깊은 곳을 갈기갈기 찢을 몇 분 뒤의 상황을 예상하자 몸이 달달 떨려왔다. 끔찍한 재앙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한계 이상의 공포가 폭발해 뇌 안을 잠식했다. 뇌리가 하얗다. 데이빗은 어느 순간 둑을 넘친 두려움이 이성을 뚝, 끊어놓는 걸 느꼈다. 데이빗은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그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미셸은 기가 차 웃었다.

“지금. 날. 굶겨 죽이겠다고 말한 것 맞지. 당신, 죽고 싶어?”

가벼운 협박인데도 데이빗의 몸은 비굴하게 떨렸다. 데이빗은 자신의 몸이 형편없이 떨리는 감각에 절망했다. 그의 나약한 몸은 어떤 고통도 감내하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미셸은 어제오늘 충분히 비웃었다.

“……난 안…… 가…….”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겠다고 데이빗은 답했다. 왜냐면-

“……다, 당신은 트, 특별……하, 한 사, 사람이야.”

“그래.”

미셸은 당연한 사실을 아주 쉽게 인정했다.

“……나, 난 쓰, 쓰레기야.”

미셸은 그 사실을 데이빗에게 인정하게 했다. 그게 그가 휘두른 폭력의 가장 쓰라린 면이었다.

“내, 내가 가, 가지 아, 않으면 다, 당신은, 구, 굶는 거지? 다, 당신 모, 목숨은 나, 나한테 달려 있어. 시, 신기하네. 나 같은 쓰레기가 당신같이 대, 대단한 사람 모, 목숨을 쥐고 흐, 흔든다는 게.”

데이빗은 미셸을 납치했지만, 그를 죽일 맘은 전혀 없었다. 비겁하게 변명하자면, 그에게 살기를 품게 한 건 미셸이었다.

“그전에 나한테 죽을걸.”

“나, 난 버, 범죄자가 되, 될 수 있지만, 당신은 못해. 날 죽일 수 없어.”

데이빗은 마지막엔 거의 더듬지 않았다. 의식에서가 아닌 무의식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미셸은 그를 때리고 강간할 수 있을지언정, 죽이지는 못했다. 살인은 정상참작의 범위를 벗어났다.

“사, 사람들한테, 경찰한테, 기, 기자에게, 다, 당신이 나, 날 강, 강간했다고 말할 거야. 다, 당신은 쓰, 쓰레기가 아, 아니니까 그, 그런 취, 취급이 시, 싫을 거야.”

미셸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납치범 사내의 예기치 못한 반격에 놀랐다. 자신이 좀 지나치긴 했다. 심문을 받던 피의자가 돌아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한발 물러서야 할 때다.

“그래, 내가 당신을 강간했지. 인정할게. 내가 좀 지나쳤어. 그런데 잊은 거 없어? 날 먼저 강간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

납치범 사내는 시선을 돌려 까맣게 죽은 눈으로 멍하니 딴 곳을 바라보았다. 전혀 엉뚱한 상황에서 딴청을 피운다. 불안정한 시선에 미셸은 그가 제정신을 잃기 직전이란 걸 깨달았다. 그가 정신을 놔버리면 곤란해지는 건 미셸이다.

“좋아. 내가 화가 나서 당신을 지나치게 대한 면은 있어. 사과하지. 당신이 순순히 내 말을 듣는다면 나도 당신을 거칠게 대하지 않을게. 그리고…… 고발도 안 할게.”

미셸은 엄청난 선심을 베푼단 식이었다. 데이빗은 제삼자가 된 기분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깎아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으나 그의 말투와 눈빛에는 진실함도,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얼음 인형처럼 반짝거리기만 했다.

자신은 왜 저런 사람에게 반했던 걸까. 데이빗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격렬히 뛰었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몸은 열이 들끓는데 몸 안은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내, 내가 어떻게 다, 당신을 도와야 하는데. 여, 열쇠를 가, 갖고 오는 일이면, 내가 계, 계속 하, 하겠다고 했을 텐데.”

그러니 제발 강간은 말아달라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절규하지 않았던가. 데이빗은 미셸이 이제 와 그걸 요구한다면 배로 맞을 걸 각오하고라도 남자를 들이받을 셈이었다.

“난 스티븐 머피가 필요해.”

“왜?”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보다 그가 내게 더 유용할 거야. 그가 찾아올 때까지 당신은 내 심부름꾼 역을 해.”

“스, 스티븐은 다,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해.”

“그는 내게 개인적인 앙심은 없다며? 돈 앞에서 고객을 바꾸지 않을 리 없어.”

스티븐은 탐욕스러웠다.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이에게 붙을 가능성이 컸기에 미셸의 예측은 꽤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셸은 모르는 바가 있었다. 스티븐은 게으르고 아둔했으며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 그가 아직도 별장에 돌아오지 못하는 걸 보면 터무니없이 높은 조건을 제시해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거나, 지나친 욕심으로 화를 입고 몸을 빼기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 스티븐이 온다면 데이빗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다. 미셸은 자신의 입으로 데이빗보다 스티븐이 더 유용한 사람이라고 알려주었다. 마음이 쓰라렸다.

“그, 그가 오, 오는 게 빠를지, 다, 당신이, 구, 굶어 죽는 게 빠, 빠를지 모르겠군.”

“내가 굶어 죽기 전에 당신도 죽을걸. 댁 쪽이 훨씬 빠를 거야.”

그건 맞는 말이다. 데이빗은 씁쓸히 웃었다.

“다, 당신이 간과한 게 있어.”

“뭔데?”

비장의 카드를 내밀기 전에 데이빗은 잠시 숨을 골랐다.

“다, 당신 말대로, 나, 난 쓰레기고, 호모야. 그리고 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이기도 해.”

자신은 어차피 죽을 것이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 미셸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데이빗은 잘난 남자를 엿 먹였단 승리감을 맛봤다.

욕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소변을 보러 들어간 미셸이 이내 세면대의 물을 마셨다. 데이빗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래 봐야 말라 터진 부위만 아플 뿐 배고픔과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데이빗은 몇 시간째 진통제 생각만 하고 있었다. 빈속에 먹는다면 위가 탈 듯 아프기만 할 테지만, 가루로 만들어 물에 녹여 걸쭉하게 만들어 먹는다면 위 점막을 그리 심하게 자극하진 않을 것이다. 진통제, 부드러운 빵, 따뜻한 이불. 너절한 생각들이 끊이질 않았다.

순간적 독기로 되지도 않는 말을 너무 많이 뱉었다. 데이빗은 깨질 듯 아픈 관자놀이를 차가운 무릎에 얹었다. 미셸이 물기 묻은 손을 털며 나왔다. 그가 마지막 남은 빵을 씹는다. 데이빗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데이빗은 볼이 달아오르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며 이죽거렸다.

“배, 배가 고파? 어, 얼른 타, 탈출해서, 배불리 머, 먹어. 파, 팔을 끄, 끊고 나가지 그래.”

뒷수습 못할 말을 마구 뱉어놓고, 데이빗은 미셸이 어찌 반격할까 바짝 긴장했다.

“내 팔을 끊는 것보다 네 오른 다리를 부러뜨리는 게 낫지. 액셀을 밟지 못하게. 왼 다리로 깡충깡충 뛰어갈 각오가 생기면 언제든 말해.”

미셸의 말에선 한기가 뚝뚝 풍겼다. 그는 스티브가 올 때까지 무턱대고 기다려야 하는 답답한 상황에 슬슬 화가 치밀던 참이었다. 데이빗은 자신을 증오하는 상대의 눈빛에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은 데이빗의 인생 최악의 밤이었다. 오늘 밤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데이빗은 대충 마른 바지를 꿰어 입고 자리에 누웠다. 둘 중 누구도 서로 마주 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미셸과 데이빗은 등을 맞붙였다.

“먹을 게 다 떨어졌어. 내일은 냉장고에서 갖고 와.”

“……나, 난 아, 안 해.”

“아, 당신이 단식 투쟁을 하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었지.”

미셸은 대놓고 데이빗을 비웃었다. 말뿐이었으면 괜찮겠는데, 그는 몇 차례의 말이 오고 간 뒤 억지로 데이빗의 바지를 벗겨내기까지 했다.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지려 한다. 데이빗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고, 그 끝엔 데이빗에게 최악의 굴욕감을 주는 벌이 뒤따를 터였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기대하는 거라곤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 빼앗길 게 남아 있었다. 미셸은 데이빗을 괴롭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 하지 마.”

씨근덕거리며 발버둥쳤지만, 미셸은 결국 데이빗의 바지를 벗겨내 멀리 던져버렸다. 데이빗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헐떡이는 숨과 진득하게 배어 나오는 땀, 분기에 찬 눈빛이 미셸을 자극했다. 저리 매섭게 노려봐야 곧 그는 얼굴 가득 흥건하게 눈물을 흘릴 것이다. 실은 침대에 오른 순간부터 미셸은 이곳에서 안았던 남자의 몸을 떠올리며 천천히 흥분하던 참이다.

“죽을 거라며. 나도 굶어 죽게 만들 거고.”

“…….”

“그때까진 할 일도 없어. 이것 빼곤.”

다리를 벌리는 기척에 데이빗은 뻣뻣이 굳었다. 어째서인지 오늘은 어제와 달리 몸을 버둥거리기도 힘들었다. 마취 총을 맞은 짐승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미셸은 데이빗에게 섹스를 원했다. 그리고 그걸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몸은 정신보다 영리해서 미리 저항을 포기했다.

미셸은 이제 제법 능숙하게 데이빗을 안았다. 빡빡한 입구에 당황하지 않았고, 무턱대고 밀어 넣어 유혈 사태를 만드는 일도 없었다. 데이빗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느리게 깜빡였다. 타이밍 좋게 기절했다가 도로 깨어나 보니 모든 게 끝난 뒤였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셸이 엎드린 데이빗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하반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엉덩이에 미셸의 성기가 닿았다가 안으로 쑥 깊게 들어왔다. 미셸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까실까실한 음모와 단단해진 고환이 입구 근처에서 들썩였다. 살과 살이 부딪히며 철썩거리는 소리를 냈다. 데이빗은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내놓은 채 얼굴을 깊게 묻고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그저 시간이 흐르길, 내일이 밝길 기도하며 몸 깊숙이 부어지는 굴욕과 고통을 견뎠다.

미셸의 말이 빙빙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이것 외엔 없다.’ 정말로 죽을 때까지 이 짓거리를 하게 되는 걸까. 끔찍함이 등골을 치받았다. 데이빗은 이제 미셸이 미워졌다.

그는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후드득 쏟아지는 땀에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몇 미터 앞에 있는 나무 벽을 응시했다. 그 벽 너머엔 데이빗이 숨어 미셸을 지켜봤던 비밀 방이 있었다. 거기 남아 있을 전기 충격기로 미셸을 기절시키고 도망치는 상상을 했다.

벽은 얇았다. 그랬기에 미셸의 기척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낡은 나무 벽이니 조금만 애를 쓰면 부술 수 있을 거란 사실이 문뜩 떠올랐다. 그 안엔 해머도 있다. 데이빗은 입을 열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미셸과 자신은 다르다. 미셸은 갇혔지만, 데이빗은 스스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탈출의 열쇠를 쥐고 있었고, 남자의 목숨은 자신의 손에 달렸다. 자신은 원하면 미셸을 죽게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자위하지 않고서는 몸을 가르는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아침이 왔다. 날이 밝은 뒤에도 데이빗은 멍하니 벽만 바라보았다. 너무 지쳐 몸을 닦을 힘도 없다. 미셸이 빵 비닐을 구겨 데이빗이 있는 곳으로 던졌을 때도 그는 침묵을 고수하며 자신의 비밀을 음미했다.

“스티븐은 왜 이리 안 오는 거지?”

스티븐은 얼간이니까. 데이빗은 빈정거리려다 입을 다물었다. 미셸이 데이빗 앞에 서서 그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데이빗은 자신의 ‘벽’이 보이지 않는 데 당혹해 얼굴을 찌푸렸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피해버리려는데 미셸이 가슴 철렁한 말을 했다.

“이 침대는 왜 이리 중앙에 있는 거야.”

데이빗은 자신의 몸이 움찔 튀지 않은 데 감사했다. 좁은 방에서 벽에 붙어 있거나, 창가에 붙어 있어야 정상일 침대가 중앙에 있는 것은 비밀 벽 때문이었다.

“저기 뭐 꿀이라도 발라져 있어?”

“어, 없어. 거, 거긴 보, 복도야.”

괜한 소릴 했다. 미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미셸이 비밀 벽으로 다가가자 데이빗은 더는 침착함을 가장하기 어려웠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초조한 눈으로 미셸을 바라봤다. 미셸이 손등으로 벽을 두들겼다. 속이 빈 공간은 울림이 달랐다. 벽 너머는 단순한 복도가 아니었으며 벽 역시 그가 생각했던 굳건한 돌의 느낌이 아니었다. 미셸은 비죽 웃었다.

그는 TV를 던졌다. 낡은 벽이 종이처럼 우걱 접히며 구멍을 드러냈다.

미셸은 찢긴 벽의 틈새에 손을 밀어 넣어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구멍을 뚫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걸 데이빗은 겁에 질려 바라보았다.

“이거, 이거.”

미셸은 건빵과 마른 과일이 든 비상식량을 발견해냈다. 가만히 숨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던 스토커 납치범이 긴 밤 동안 지루함과 굶주림을 이기며 먹었던 음식이었다.

후드득, 다른 상자 안에서 한 박스 분량의 콘돔이 쏟아졌다. 미셸은 차가운 눈으로 데이빗을 응시했다.

납치범은 말문을 잃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미셸의 말끝에 걸린 실소에 데이빗은 몸을 떨었다. 그 역시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데 타인인 미셸이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미셸은 상자를 탈탈 털어냈다. 남은 구속구와 전기 충격기, 콘돔과 수상쩍은 액체가 든 병이 바닥에 뒹굴었다. 미셸은 그걸 쓸어 담기 전에 더 중요한 일을 먼저 했다. 벽에 기대져 있는 해머를 갖고 온 뒤 미셸은 데이빗에게 사슬 끝을 붙잡고 있으라고 시켰다.

쾅!

쾅!

몇 번 내리치자 사슬의 연결고리가 깨어졌다. 미셸은 얼얼해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아직 손목엔 덜 끊어진 사슬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이제 방 안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데이빗은 달랐다. 그는 사슬에 묶인 채 미셸을 올려다보았다. 그 처량한 눈빛을 보고 미셸이 피식 웃었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여.’란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데이빗은 시선을 내렸다. 모든 게 이리도 쉽게 끝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데이빗은 멀리서 자신의 낡은 도요타 트럭이 웅웅거리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는 걸 들었다. 엔진 앞의 진동을 막아주는 벨트가 고장 난 트럭은 여느 차와는 다른 소음을 냈다. 미셸은 데이빗의 낡은 트럭마저 빼앗을 모양이다.

데이빗은 침대에 묶인 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 단두대에 올라 칼날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소리가 완전히 멀어져 사라진 뒤, 밤이 찾아온다면 그 어둠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까. 만일 스티븐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홀로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웅크리고 있는데 미셸이 돌아와 침대 매트리스 위에 열쇠 꾸러미를 던졌다. 털썩 주저앉아 한참 여러 열쇠를 끼웠다 뺐다 하던 미셸은 기어이 손목에 걸린 구속구의 열쇠를 푸는 데 성공했다.

촤르르- 지긋지긋했던 사슬을 완전히 풀어내고 미셸이 그동안 혹사당한 손목을 주물렀다. 남자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며 데이빗은 저 잘생긴 손목이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무 느낌도 없었을 주상골 위 결박의 흔적도 남자에게 있으니 성적인 의미가 되어 데이빗을 자극했다. 그런 얘길 시시콜콜 털어놓으면 남자는 자신을 좀 이해해주고 용서해줄까.

아니. 그동안 겪은 미셸은 그런 것에 마음이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일어나.”

미셸은 데이빗을 데리고 가겠다고 알렸다. 납치범은 순순히 일어섰다. 데이빗은 자신의 얼마 되지도 않는 여생이 감옥에서 이어질 거란 사실이 허망했다.

* * *

데이빗은 사지가 묶인 채 자동차 뒷좌석에 실렸다. 트렁크에 처박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자동차가 울퉁불퉁한 산길을 벗어나 매끈한 포장도로에 진입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대로 경찰서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미셸이 자신을 묶어둔 채 별장에 버리고 가버리는 편이 나았을지, 굶어 죽는 것보단 그래도 이렇게 잡혀 온 게 나은 건지 알 수 없다.

미셸은 지갑 안의 돈이 그대로인 걸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데이빗을 바라봤다. 강간범에 좀도둑으로 찍힌 데이빗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셸은 읍내로 내려오자마자 일회용 휴대폰을 샀다. 그에게는 납치범을 당장 경찰에 넘기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나야. 할아버지는?”

데이빗은 번제(燔祭)를 위해 묶어놓은 짐승 꼴인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 볼까 싶어 최대한 몸을 구부린 채 미셸의 통화를 엿들었다.

“상태가 갑자기 좋아졌다고 안심할 게 아냐. 죽기 전에 잠시 상태가 좋아진 걸 수도 있잖아. 뭐, 검사 결과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그래. 나한테 좋은 수가 있어. 할아버진 그 치들이 대단하고 고상하다고 생각하지? 그 착각을 한 방에 보내버릴 증거가 나한테 있어.”

한쪽만의 대화를 엿들었기에 완벽하진 않았으나 데이빗은 대략 미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순 있었다.

“스티븐 머피란 남자를 조사해줘. 사설탐정이고, 호모야. 그럼 이 번호로 연락해.”

미셸은 자신이 납치된 사건을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다. 데이빗은 미셸이 일을 크게 만들어 납치범인 자신의 죄를 낱낱이 까발릴까 두려웠다.

미셸은 그가 속한 마천루 빌딩 숲으로 돌아가는 대신 낡은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별장 안에선 한시라도 빨리 그를 필요로 하는 전장으로 돌아가야 한단 생각에 초조해했는데, 탈출하고 보니 일부러 빨리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미셸은 조부 쪽에서 최근에서야 자신이 사라졌음을 알아채고 수사를 의뢰했단 걸 알게 되었다. 미셸의 실종이 길어질수록 조부의 의심은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셸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놓을 물증과 심증을 갖고 돌아갈 참이었다. 그를 위해선 스티븐 머피와 그를 고용한 사람들의 이름이 필요했다.

미셸은 새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뒤 상쾌한 기분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그에게 스티븐 머피를 물어다 줄 남자는 모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멍한 눈으로 미셸을 힐끔거리다 경찰서가 보일 때마다 흠칫거리는 모습은, 이런 말은 참 어울리지 않지만 꽤 귀여웠다. 미셸은 긴장이 풀렸는지 침대에 올려놓자마자 기절하듯 잠든 납치범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미열을 품은 살갗 위, 느슨하게 묶은 가죽 구속구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남자는 묶였고, 정신을 제압당했으며, 미셸의 감시 아래 있었다. 하프 타임 후 공격과 수비가 바뀐 모양새다. 이젠 미셸이 오히려 납치범에 가까웠다. 미셸은 남자처럼 어설프고 신사적인 납치범이 아니었다. 폭력을 쓰는 건 이미 했고, 원하는 만큼 멋대로 욕망도 풀었다. 미셸은 남자와 달리 콘돔을 준비하지도 못했다. 우수수 쏟아지던 콘돔을 보고 황망히 일그러지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자 미셸은 웃음이 터졌다. 남자가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면 미셸은 그를 더욱 더 외진 구석으로 몰고 가고 싶어졌다.

대체 뭐 때문에 남자는 비밀 방까지 만들어놓고 미셸을 지켜봤던 걸까. 그가 자신에게 품은 감정의 정체가 궁금하다.

이 기괴한 관계의 첫 물꼬를 튼 건 데이빗이다. 그는 미셸을 묶어놓고 애절할 정도로 힘겹게 스스로 허리를 내려 미셸에게 안겼다. 미셸에게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던 납치범은 그러나 미셸에게 강간당하며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울어댔다. 제가 먼저 미셸의 몸을 탐해놓고, 상황이 역전되자 미셸을 보면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이해는 한다. 미셸이 한 행위는 섹스보단 마운팅에 가까웠으니까. 벌이 너무 과했던 걸까. 남자는 미셸을 홀린 듯 바라보던 시선을 싹 지우고 그에게 협조하느니 굶어 죽겠다고 독기를 품고 노려보았다. 죽은 생선처럼 뿌옇던 푸른 눈이 이름 모를 감정으로 넘실거려 반짝이는 걸 이번엔 반대로 미셸이 홀린 기분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열에 들뜬 그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흥분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남자에게 그 눈빛 속 실려 있던 감정의 정체를 물어야 한다. 그 감정이 무언지 알아야 자신의 심장이 그 눈빛에 왜 그리 격렬히 뛰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호모들이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다소 비아냥거림을 섞어 뱉은 말에 납치범이 깨어났다. 데이빗이 놀란 얼굴로 미셸을 바라봤다. 방금 말을 고스란히 들은 눈치다. 그는 입매를 굳히고 잠에 취해 느슨하게 풀어졌던 몸에 힘을 주었다.

“……다, 당신은, 그, 그 호모를, 가, 가, 강간했잖아.”

뭘 잘했느냐고 따져 묻는다. 제법이다. 미셸은 상자째로 가져온 납치범의 사물에서 콘돔 상자를 꺼내 흔들었다. 치부에 안 그래도 창백한 데이빗의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

“스티븐의 연락처 알지?”

데이빗은 모른다고 답하지 않았다. 미셸은 그가 알고 있단 사실을 낚아챘다. 검게 멍든 데이빗의 콧날을 바라보며 미셸은 사건이 일단락되면 그를 정형외과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면도라도 좀 시키고 싶었다.

이런저런 사소한 욕망이 머리를 치든다. 미셸은 별장을 탈출한 뒤에야 시야가 트이는 걸 느꼈다. 숨이 턱턱 막히던 폐쇄적 공간에서 벗어나자 미셸은 그제야 흉측한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납치범 사내가 평범하고-솔직히 말하면 평범한 수준도 못 되는- 약간 덜떨어진 어눌한 남자로 보였다. 잘 씻기고 잘 먹이고, 머리칼과 수염을 정리하면 혐오감을 줄 만한 외모도 아니었다. 혈색이 나쁘긴 했지만 피부는 깨끗했고, 푸른 눈은 인상적일 만큼 커다랬다. 게다가 이미 미셸은 남자의 눈물과 울음이 얼마나 달콤한가를 알아버렸다.

“전화 통화를 들어서 알 거야. 난 당신한테 꼭 스티븐의 연락처를 알아내지 않아도 돼. 하지만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시, 싫어.”

단호한 거절에 미셸은 눈썹을 휘었다.

“왜, 남자친구한테 의리라도 지키려고? 이 콘돔도 당신이랑 그랑 쓰려고 놔둔 거였나.”

그렇다면 매우 불쾌한 일이다. 미셸은 이로 콘돔 봉지를 찢었다. 데이빗이 바싹 긴장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다. 겁먹은 눈으로 점점 얼굴이 멍해지는 상대를 깔아 눕히기엔 아직 바깥이 너무 밝았다. 미셸은 콘돔을 버리고 읍내에서 사 온 스프와 샐러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옆 탁자 위에 연필과 메모지를 함께 남겼다.

“마음이 변하면 말해.”

미셸은 바닥에 던진 콘돔을 휴지통에 버리려다 말고 메모지 옆에 올려놓았다.

납치범 사내를 방에서 쉬게 하고 미셸은 거실에서 전화로 급한 일들을 처리했다. 상황은 미셸에게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겪고 있는 유산 분쟁과 비슷한 사례로 힐튼 기업의 유산 상속 분쟁이란 전례도 있었고, 결국 그때도 기업이 원래 유산 상속자에게 돌아갔으니 별문제 없을 거란 변호사의 확언을 듣고서야 미셸은 전화를 끊었다.

문을 열어 보니 남자는 여전히 깊게 잠든 채였다. 불을 켜도 감긴 눈은 뜨이지 않았다. 미셸과 별장에 묶여 있을 때는 거의 잠을 못 잤으니 폭면을 취하는 게 무리도 아니었다. 메모지는 텅 비어 있었다. 펜을 쥔 흔적도 없다. 떠보는 말로 물어봤던 건데, 정말로 남자에겐 스티븐 머피를 지켜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미셸은 스티븐이 며칠 전 홀연히 찾아와 납치범 사내와 복도 바닥에서 요란하게 한 판 해댔던 걸 떠올렸다.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자신이 사다 준 스프와 샐러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걸 봤을 땐 불쾌감이 치솟는 화로 변했다.

“일어나.”

미셸은 거칠게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데이빗이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그는 기절하고 의식을 잃은 걸 제외하면, 이틀 만에 겨우 잠다운 잠을 잔 것이었다. 요란한 미셸의 목소리는 데이빗에겐 횡액에 가까웠다.

“아, 아파……. 흐, 흔들지 마.”

“2분 줄게. 스티븐 머피의 연락처를 말해.”

데이빗은 잠이 흔적도 없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분노가 차지하는 걸 느꼈다. 미셸은 데이빗을 노예 대하듯 했다. 그에게 데이빗은 아랫도리를 내어주고, 묻는 말에 고분고분 답해주는 대상일 뿐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 것 같았다.

“마, 말 안 하겠다고, 해, 했어.”

“당신은 그 남자랑 무슨 관계야? 그가 당신한테 얼마나 환상적인 조건을 제시……. 아니, 잠깐만, 당신 왜 날 납치한 거야?”

데이빗은 황당함을 느꼈다. 돈 때문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왜 미셸은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걸까.

미셸의 눈이 반짝였다.

“곧 죽을 사람이 돈을 목적으로 날 납치하진 않았을 테지.”

데이빗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셸은 상대가 동요하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앞의 상황은 어딘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데이빗은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가 정말 돈을 원했다면 미셸에게 먼저 돈 얘기를 꺼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데이빗은 스티븐과도 별 깊은 관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스티븐은 딱 한 번 별장을 찾았고 그 뒤로 그곳에 오지 않았다. 데이빗은 스티븐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것 같았다. 구속구와 콘돔은 스티븐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건 스티븐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그건 애초에 미셸을 위한 준비물이었다.

미셸은 결론을 내렸다.

“당신, 나랑 예전에 만난 적 있지.”

데이빗은 가슴이 철렁했다. 미셸이 이제 와 뒤늦게 선택지의 2번 항목이 답이 될 가능성이 높단 걸 알아차린 게 두려웠다. 데이빗 베커는 왜 미셸 클뤼젤을 납치했는가. 1번 돈 때문에, 2번 발정 난 호모 새끼라 잘생기고 부유한 젊은 청년과 죽기 전에 한 번 해보고 싶어서.

눈앞이 까맣게 질리고 손끝이 덜덜 떨렸다. 답은 2번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까지 오길 원한 건 아니었다.

“……어, 없어. 마, 만난 적 없어.”

“아니, 있어.”

“없어. 나, 난 그런 적 없어.”

“당신은 나를 만난 적이 있어.”

미셸은 번개처럼 데이빗의 몸 위에 올라탔다. 가슴과 허리를 눌린 순간 데이빗은 떨리는 몸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말해봐. 날 납치한 진짜 이유가 뭐야?”

“어, 없어.”

“그건 대답이 안 돼. 말해. 언제 날 처음 봤어? 젠장, 당신은 할 말이 없으면 입만 다물지. 입에 접착제라도 발랐어?!”

미셸은 화낼 생각까진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미셸의 기호에 맞는 울음과 함께 미셸을 말려 죽일 만큼 답답한 침묵도 구사할 줄 알았다. 결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미셸은 파랗게 질려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내 짐작이 틀리면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당신은 스티븐과 전혀 연관 없이 나한테 먼저 관심을 가졌어. 돈과는 전혀 관련 없이 나한테 박히고 싶어 환장해서 날 납치한 거야. 그렇지? 스티븐은 그냥 단순히 당신이 고용한 남자일 뿐이고.”

데이빗은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미셸이 잘생긴 이마를 찌푸리고 욕을 뱉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변태도 아니고, 강간하고 싶어서 사람을 납치해? 스티븐 머피란 놈은 대체 뭐야. 그놈이랑은 또 왜 그리 얽혔던 건데.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데이빗은 할 말이 없었다. 데이빗이 보기에 미셸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단순한 화풀이를 위해 자신을 심문하는 것 같았다. 2번이라고 답을 뻔히 알면서도 그 답을 데이빗 스스로 뱉길 원했으나 데이빗은 그럴 맘이 없었다.

자신의 몸을 부수고 자신을 걸레처럼 구겨놓은 사람에게 한때 그를 사랑해서 이 난장판을 벌였다 고백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마, 마음대로, 새, 생각해. 다, 당신 머, 멋대로.”

데이빗의 마지막 말은 미셸을 완전히 화나게 했다.

미셸은 오만한 표정으로 한참 데이빗을 내려다보다 탁자 위에서 콘돔을 끌어다 봉지를 이로 완전히 찢었다.

“좋아. 그러지.”

미셸은 데이빗의 허락 없이도 제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움직일 남자였다. 데이빗의 동의까지 얻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그는 침대 바깥에 서서 침대 위에 주저앉은 데이빗의 입안에 자신의 성기를 처박았다. 데이빗이 밀어내기 전에 미셸은 그의 뒤통수를 당겨 깊숙한 곳에 찔러 넣었다. 데이빗은 짙은 체향에 현기증을 느꼈다. 금빛 음모가 턱과 뺨을 아프게 했다. 목구멍이 억지로 열려 젖히며 구역질이 났다.

“더 부지런히 핥아. 어떻게 하는지 잘 알 거 아냐.”

모른다. 데이빗은 이런 짓을 잘 하는 요령 따윈 몰랐다. 잠자코 있다가 벌로 목 안쪽을 꾹 눌렸다. 역겨움이 치받아 눈물이 고였다. 비틀거리는 어깨와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하고 미셸은 허리를 움직이려다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상대의 이에 긁히곤 동작을 멈췄다. 납치범 사내는 전혀 협조할 맘이 없어 보였다.

미셸은 벌거벗은 사내의 사타구니 사이를 발로 눌렀다. 그는 기겁해 꿈틀거리며 도망치는 사내의 검은 고수머리를 아프게 쥐었다.

“더 크게 벌려. 이 세우지 마.”

데이빗은 최대한 크게 턱을 벌리고 입술로 이를 감쌌다. 자신의 꼴이 우습다는 걸 알기에 눈을 감았다. 데이빗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미셸은 앞뒤로 움직였다. 데이빗은 묶인 손으로 시트를 부여잡고 격렬한 동작에 몸이 쓰러지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아까 미셸에게 샅을 눌리며 두려움에 허리를 물리고 다리를 넓게 벌렸던 자세 그대로, 묶인 양손만 그 앞의 시트를 쥔 채 오뚝이처럼 앞으로 뒤로 흔들렸다. 미셸은 이미 눈물로 흥건한 상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빨개진 얼굴로 눈물 콧물 다 흘리는 꼴이 웃겨야 하는데, 어떤 포르노 배우보다 야해 보이는 게 신기했다. 미셸은 울보 남자가 그 푸른 눈을 열어 자신을 쳐다봐줬으면 했다.

데이빗의 입과 목구멍 안에 미셸은 사정했다. 데이빗은 미셸이 입에서 빠져나가자마자 시트 위에 입안에 든 걸 모두 토해냈다. 한참 구역질하는 남자를 도로 잡아다 미셸은 그의 입에 도로 자신을 물렸다. 데이빗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핥아.”

“……그, 하…….”

데이빗이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 포기하고 엉성하게 혀를 움직였다. 미셸은 굴욕감을 주기 위해 정액을 핥으란 얘길 한 건데, 데이빗은 그 뜻을 못 읽고 엉뚱하게 미셸을 도로 흥분시키기 위해 성기를 자극했다. 사정 후 예민해진 요도구를 핥자 오싹한 쾌감이 일었다. 미셸은 만족스레 신음했다. 데이빗이 혀를 멈추고 놀라 미셸을 바라봤다. 미셸은 자신의 쾌감을 관찰하는 시선에 괜히 머쓱해졌다. 하던 걸 멈추고 데이빗의 가슴을 밀어 그를 침대에 눕게 했다.

상자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을 기호화한 문양이 붙은 플라스틱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출렁이는 액체에서 인위적인 장미향이 풍겨왔다. 미셸은 윤활유의 일종일 것으로 생각했다. 침이나 물보단 나아 보였다. 손가락 두 개로 입구를 벌린 뒤 병 안의 액체를 흘려 넣자 액체의 찬 기운에 둔부가 긴장했다. 데이빗이 묶인 손으로 밀어내려는 걸 미셸은 한 손으로 밀쳐낸 뒤 한 병을 다 쏟아부었다. 나머지 액체는 배와 허벅지 사이에 탈탈 털어 뿌렸다. 데이빗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 거, 왜, 왜 ……쓴 거야?”

“?”

미셸은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빡빡한 채로 하면 아파했던 사람이 윤활유를 쓰는 걸 왜 저어하는지 이상했다. 데이빗은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가렸다. 대화는 끊어졌다. 미셸은 콘돔을 씌운 뒤 젖어 미끈거리는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릿한 고통에 상대가 끊어지는 신음을 뱉긴 했지만, 그건 며칠 전의 찢어지는 비명에 비해 매우 가벼운 소음이었다. 미셸이 느끼기에도 젖고 이완된 곳을 파고들기는 매우 수월했다.

데이빗이 왜 그토록 당황했는지 미셸은 몇 분 뒤 알게 되었다. 데이빗이 꾹 눈을 감고 자꾸만 입을 가렸다. 미셸이 데이빗의 묶인 손목을 그러쥐어 올리자 데이빗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당황해 허리를 비트는 남자의 이마엔 이를 악무는 통에 혈관이 솟았다. 뺨은 홍조로 붉고, 숨은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증기처럼 뜨겁다. 미셸은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변했다는 걸 감지했다. 상대의 몸 안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열이 나는 이의 장 안은 끔찍할 정도로 기분 좋다던 말은 꽤 믿을 만한 소리였다. 원래도 기분 좋을 정도로 뜨거웠던 상대의 몸이 지금은 아예 들끓어 미셸의 하반신을 녹아나게 했다.

미셸이 움직일 때마다 상대의 몸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달라붙는 느낌이 왔다. 이건 분명히 예전과 다른 감각이었다. 시험 삼아 허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다리를 벌리고 위에서 찍어 누르자 데이빗의 입에서 달뜬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분명한 교성이었다.

상대는 예기치 못한 쾌감에 당황하고 있었다. 푸른 눈이 당혹감으로 일렁이는 모습이 미셸의 심장을 선뜩선뜩 흥분시켰다. 미셸은 군에서 기본적인 의학 공부를 했고, 직장 앞에 위치한 밤알 크기의 작은 기관이 사정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단 걸 배웠다. 해부학 시간보다 그 후 사병들끼리 공유한 정보가 훨씬 더 흥미로웠는데, 미셸은 그 밤알만 한 기관이 비역질에 있어 얼마나 커다란 역할을 하는지를 들으며 코웃음 친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이 만들고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좀 전 남자가 반응하던 곳을 집요히 파고들자 이를 악물고 버티던 데이빗이 어느 순간 둑이 터지듯 젖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미셸은 그 목소리에 쉽게 이성을 잃었다.

“하……아, 아……. 하지 마……아……! 안 돼. 아, 아……. 시, 싫어. 아, 제발…….”

데이빗은 진저리쳤다.

미셸이 사용한 액체가 문제였다. 물론 애초에 잘못은 알지도 못하면서 파티 드럭 같은 걸 산 자신에게 있었다. 시작한 건 데이빗이었고, 그 상황을 더욱 꼬아놓은 건 미셸이었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져보던 데이빗은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생전 처음 겪는 낯선 감각에 휘말렸다.

직장에 액체가 흡수되면서 상황이 나빠졌다. 알코올이 휘발되는 시원함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 따끔거리는 자극이 찾아들었다. 그 며칠 새 익숙해진 것인지 오늘은 어째서인지 삽입의 고통도 거의 없었다. 입구를 열고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타인의 몸이 너무도 쉽사리 안까지 파고드는 데 의아해하다 데이빗은 상대의 체온이 안 그래도 뜨거운 안을 헤집고 짓찧자 이를 악물었다. 예민한 속살이 약물과 마찰로 뜨겁게 달아오르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뒤쪽에 불이 일어 안이 녹는 것 같다. 두려움에 머리를 흔들며 도망쳤지만, 미셸은 데이빗이 몸을 물린 만큼 더 다가와 이제 막 쾌감에 무너지기 시작하는 몸을 완전히 점령하려 애썼다.

안이 문질러지고, 강하게 박히길 반복하다 데이빗은 자신의 허벅지가 단단히 당기는 감각에 놀랐다. 설마 하고 내려다보자 흥분해 반쯤 선 성기가 보였다. 데이빗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이런 상황에 자신의 몸이 쾌감을 느끼고 있단 게 믿기지 않았다. 그가 느끼고 있는 건 기분 나쁜 뜨거움과 간지러움,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미묘한 불쾌함이 다였다. 그런데도 미셸이 강하게 안을 쳐대자 그의 남성은 한층 흥분해 꿈틀거렸다. 약이 문제일까, 아니면 학대당한 몸이 죽지 않기 위해 호르몬을 뿜어내다 못해 맛이 가버린 걸까. 내장에 가득 찬 상대의 살덩어리가 꼬챙이처럼 박혀 꿈틀대고 깊숙한 곳을 연신 꿰뚫을 때마다 끔찍한 아찔함에 발끝이 빳빳해졌다.

감각이 가라앉았다 솟아오르는 게 반복되자 온몸이 진땀으로 축축해지며 머리가 멍해졌다. 데이빗은 자신도 모르게 되지도 않는 말을 마구 웅얼거리고 뱉었다.

“시, 싫어……. 그, 그만……. 아, 아, 저, 정말 아, 안 돼. 부, 부탁하……. 그, 그만……! 나 모, 못겨, 겨, 견뎌, 아, 아!”

미셸이 데이빗의 허벅지를 잡아 넓게 벌린 뒤 거칠게 움직였다. 너무 빨라 데이빗은 그의 몸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데이빗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감각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흐느꼈다. 뒤는 불을 품은 것처럼 뜨겁고, 앞은 절정 직전에 아슬아슬 머무른 채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데이빗은 미약하게 허리를 흔들며 금방이라도 정액을 울컥 쏟아낼 것 같은 성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데이빗의 상황을 눈치챈 미셸이 명백히 흥분한 아랫도리를 응시했다. 수치심에 데이빗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등을 돌리고 있을 때보다 얼굴을 마주 대했을 때가 더 나빴다. 정신 나간 몸뚱이의 반응을 숨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숲의 찬 공기에 떨었던 새카만 밤이 나았다.

데이빗은 자신의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내려 시트를 적시는 걸 느꼈다. 강간당하면서도 쾌감에 허우적대고, 신음하는 사내의 꼬락서니가 얼마나 추할까. 머릿속은 차갑고 눈가는 뜨겁다. 턱을 젖혀 신음하며 데이빗은 눈을 감았다. 속눈썹을 축축이 적시며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려 귓구멍 안에 모였다.

놀랍게도 미셸은 그 눈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볼을 적신 눈물을 손으로 씻어내며 작게 속삭였다.

“아파? 힘들어?”

의아함에 찬 목소리는 분명히 따뜻함을 품고 있었다.

심장이 크게 펄떡였다. 데이빗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미셸이 몸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는 멍이 든 데이빗의 콧날을 조심스레 만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친절함에 기이하게도 데이빗의 눈물이 더욱 흥건해졌다. 정신없이 흐느끼는 상대의 눈가에 미셸은 입술을 댔다. 추릅, 귓가에 들려온 작은 소리에 데이빗은 미셸이 자신의 눈물을 마셨단 걸 알았다. 대체 왜……? 정신은 혼란스럽고 심장은 곤죽이 되어 아픈 와중에 몽롱하게 그리 생각했던 것 같다.

데이빗의 모든 정신은 이어 일어난 일에 하얗게 날아가버렸다.

미셸의 입술이 데이빗의 부어터진 입술에 닿았다. 데이빗은 무의식중에 입을 벌려 상대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였다. 처음은 느리게 시작되었던 입맞춤은 점점 격렬해져 아랫도리를 범하는 상대의 동작을 잊을 만큼 강렬하고 거친 것으로 변했다. 데이빗은 끙끙거렸으나 그의 온 정신은 황홀함에 젖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히고, 혀와 혀가 나고 들었으며 타액이 이곳으로, 또한 저곳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깨닫자마자 데이빗에겐 공황이 찾아왔다. 그는 가슴을 젖히며 크게 도리질 쳤다. 이건 마치 섹스와 같지 않은가. 틀렸다. 그리 판단하는 건 제정신인 상태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데이빗과 미셸은 적이었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미셸이 그를 강간함으로써 시작된 관계가 횟수를 거듭했다고 해서 섹스로 변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미셸의 키스는 데이빗을 완벽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연인끼리의 키스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입을 굳게 다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데이빗은 키스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그 감촉과 뜨거움을, 상대의 살과 체취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눈빛을 놓지 못했다.

그는 그 키스가 자신이 죽는 그날까지 심장에 낙인처럼 남으리라 예감했다.

길었던 키스로 부푼 입술을 미셸은 데이빗의 가슴으로 옮겼다. 이미 한 번의 경험으로 그는 납치범 사내의 그곳이 얼마나 여리고 보드라운 감촉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았다. 미셸은 이번엔 입술로 상대의 가슴을 핥고 빨았다. 데이빗이 등줄기를 떨며 허리를 움찔거리고, 이어 스스로 허리를 흔들자 그것은 미셸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만족감을 선사했다.

미셸은 데이빗의 손을 풀어주었다. 입을 가리고 끙끙거리던 손이 자유로워졌는데, 납치범 사내는 오히려 그 손을 어찌할 줄 몰랐다. 미셸은 오른손, 두 번째 위치한 검지가 퉁퉁 부어오른 걸 발견했다. 미셸은 차마 그곳에는 입 맞출 수 없어 눈길을 돌렸다. 한두 방울 끝에 애액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성기를 쥐자 상대가 허리를 젖히며 펄쩍 뛰었다. 미셸 역시 놀랐다. 그는 상대의 몸을 이토록 직접적으로 애무하려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실은 헛손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 작은 애무에도 지독히 느끼고 기갈 들린 사람처럼 크게 반응했다. 데이빗의 푸른 눈이 당혹감에 크게 뜨이고 미셸을 품고 있는 안이 강하게 조여들었다. 미셸은 데이빗에게 폭력을 주는 대신 쾌감을 주는 게 낫다는 걸 확인했다. 미셸은 헐떡이며 데이빗의 입술에 재차 키스하고, 성기를 애무했으며, 상대가 쾌감을 느끼는 부분을 쳐댔다. 데이빗의 성기가 그에 반응해 꿈틀거리고, 사정 직전의 근육들이 안을 좁히며 미셸의 성기를 아플 정도로 죄어왔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몇 없을 완벽한 섹스가 되지 않을까, 미셸은 그리 느꼈다.

미셸은 데이빗의 가슴을 짚은 채 움직이며 상대의 푸른 눈에 깃든 두려움과 눈매를 적시는 눈물을 봤다. 그 푸른 눈에 숨겨지지 않는 감정이 미셸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그는 납치범 사내가 더는 혐오스럽지 않았다.

더는 견디지 못한 데이빗이 미셸의 등을 긁어댔다. 미셸은 모텔 매트리스를 망치지 않기 위해 상대의 성기에도 콘돔을 씌우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그의 절정이 너무 가까웠다. 미셸은 시트를 끌어다 데이빗의 성기 위를 덮고, 거기에 자기 상반신의 무게를 더했다. 미셸은 위로 앞으로 상대를 밀어댔다. 데이빗의 허벅지가 경련해대며 회음의 근육 전체가 강한 힘으로 미셸을 압박해왔다.

끝은 희고, 날카롭고, 강렬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미셸은 데이빗의 젖은 몸을 끌어안은 채 뜨겁고 부드럽게 녹아내린 안에 갇혀 있었다.

몸의 감각이 천천히 깨어나며 미셸은 써버린 콘돔이 답답하다 느꼈다. 상대의 몸 안에서 빠져나오자 데이빗이 자신도 모르게 흐느끼는 것같이 신음했다. 미셸은 어린 짐승을 달래듯 땀으로 흠뻑 젖은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데이빗이 멍한 얼굴을 한 채 눈알만 굴려 미셸을 바라보았다. 사정 후 지독히도 피로해 보이는 얼굴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미셸은 콘돔을 대충 던진 후 도로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놀란 데이빗이 흠칫 몸을 떨었지만, 미셸은 지금 당장 그를 다시 안을 생각은 아니었다. 후희를 즐길 참이었다. 달뜬 몸을 끌어안고 안을 부드럽게 휘저으며 땀으로 젖은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키스를 위해 입술을 두드리자 데이빗은 이번에도 군말 없이 입을 열어주었다. 둘은 그 상태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꽤 오래도록 부드러운 키스를 나눴다.

“안이 뜨거워.”

미셸은 행위 중 알아차린 사실을 확인하려 입을 열었다.

“단순한 윤활유가 아니었던 거지.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사 모은 거야?”

잠자코 안겨 있던 상대가 몸을 굳혔다. 미셸은 비난할 맘이 없단 걸 표현하려 쪼는 듯한 입맞춤을 상대에게 건넸다. 데이빗의 몸이 도로 부드러워졌다. 즉각적으로 반응을 돌려주는 솔직한 몸이 미셸은 퍽 맘에 들었다. 남자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미셸은 그걸 알게 되었다.

“당신이 날 납치한 건-.”

“…….”

데이빗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떨어질 선고를 기다리며 이를 악물었다. 미셸은 뒷말을 도로 입안에 담았다. 자신이 알게 된 걸 내뱉었다간 뒤이어 이어질 상황을 도무지 수습할 수 없으리란 예감 때문이었다.

데이빗의 몸에서 미셸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데이빗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내벽이 성기의 움직임에 쓸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달뜬 몸이 작게 웅성거렸다. 열려 있던 곳이 한참 만에 수축하고 들려 있던 하반신이 천천히 내리 놓였다. 질주 후 풀려난 몸은 긴장이 풀리고 느슨하게 이완되었다. 데이빗은 지친 기색이 묻어나는 한숨을 나직이 흘렸다. 따뜻한 물에 몸이 감기는 것과 닮은 나른함이 퍼져 미약한 어지러움이 일었다.

무슨 일을 겪은 걸까.

그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좀 전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정리하려 했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달콤했던 키스와 뜨거웠던 애무, 격렬했던 섹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섹스와 너무 흡사했다.

지금도 그랬다. 행위가 끝난 뒤 미셸은 데이빗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며칠 전처럼 데이빗을 굴리듯 욕실로 처박지 않았고, 그가 흥분했었단 사실을 비웃지도 않았다. 데이빗은 사정의 순간 쾌감의 흔적을 미셸에게 고스란히 들켰단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미셸은 그 무엇도 비난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최음제도 그는 넘어가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데이빗은 미셸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부드러운 마음은 미셸이 데이빗의 팔목에 도로 가죽 구속구를 채우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데이빗은 손목을 조이는 감촉에 놀라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미셸은 왜 도로 그를 묶는 걸까. 그는 좀 전 미셸과 섹스를 했고, 키스를 나눴다. 좀 전 충분히 다정하게 대해놓고 미셸이 왜 이제 와 이러는 건지 데이빗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 묶지 아, 않아도 돼.”

미셸이 기이한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뭘 믿고?”

그 말에 데이빗은 정신이 바짝 조여드는 걸 느꼈다. 무방비하게 열어놓은 마음의 생살에 서슬 퍼런 메스를 들이댄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

난 도망치지 않아.

뭘 믿고?

데이빗은 미셸이 그를 믿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미셸을 납치한 납치범이었다. 데이빗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몸을 섞었던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데이빗의 다른 팔을 끌어다 두 팔을 고정시켜놓았다.

데이빗은 성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는 판단할 수 있었다. 미셸은 섹스에 능숙했다. 그가 안고 있는 상대를 원하고 있다 믿게 만들 만큼 능숙했다. 미셸이 그를 부드럽게 대했던가에 대해서도 데이빗은 의심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미셸은 입 맞추고, 몸을 좀 문질렀던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별로 다를 바 없이 움직였던 것도 같다. 자신은 약기운과 기분 좋아진 몸 때문에 착각했던 게 아닐까. 절정의 정점에서 하마터면 미셸의 이름을 부를 뻔했단 사실이 데이빗을 오싹하게 했다. 미셸은 아무런 의도가 없었는데도 홀로 쾌감에 취해 혼자 착각하고, 속내를 드러냈단 사실이 부끄러웠다.

데이빗은 미셸을 납치한 범죄자였으며, 미셸은 그를 혐오했다. 미셸이 맨 처음 폭발했던 건 데이빗이 줄리아라는 여자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서였다. 미셸은 그 후 데이빗을 내내 변기로 취급해왔다. 미셸은 여전히 그 여자를 사랑할 것이다.

수많은 사실 중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데이빗은 모든 걸 잊고 단 한 번의 키스만으로 상대를 용서하고, 강간을 정상적인 관계인 양 오해했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건 얼마나 쉬운가.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을 부여잡느라 얼굴이 붉어진 여자와 눈길이 마주친 남자가, 여자가 자신을 보고 반했다 믿는 것과 같은 착각을 자신이 했다. 데이빗은 풀어달라 내밀었던 팔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과 팔, 그의 볼품없는 몸은 그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의 소유물이었다. 그것을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쓸 일도, 누군가 그의 몸을 제 것처럼 사랑할 일도 없을 것이다.

“오, 옷을, 조, 좀 이, 입었으, 으면, 조, 좋겠어. 셔, 셔츠를 이, 입고 무, 묶는 게 나, 낫지 않을까.”

데이빗은 원래 그 말을 하려던 거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미셸은 고개 숙인 납치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낮의 태양 아래서 데이빗이 등과 가슴에 간직한 흉터가 도드라졌다.

미셸은 데이빗을 풀어주는 대신 그의 헌 셔츠를 데이빗이 걸치게 했다.

“스티븐이 전화를 받으면 당신이 얘길 해.”

미셸이 휴대폰에 데이빗이 알려준 번호를 찍으며 말했다. 데이빗은 많이 지쳤고, 미셸의 심문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는 스티븐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스티븐의 번호를 알려줬으니 모든 상황은 끝났다고 데이빗은 생각했다. 미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그 번호가 진짜일지, 데이빗이 자신과 헤어진 뒤 스티븐과 함께 자신의 뒤통수를 치지 않을지 의심했다.

스티븐은 한참 뒤에야 거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스티븐? 나, 나야. 응, 벼, 별장에선 내려왔어. 그래, 사정이 이, 있었어. 내, 내일 직접 마, 만나 얘기하는 게 어떨까. 네 도, 도움이 필요해. 내 위치를 알려줄게.”

데이빗은 미셸이 미리 알려준 내용을 기계적으로 말했다. 스티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자가 그를 별장의 복도에 강압적으로 눌렀던 기억에 몸이 휘청거리고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대화를 끝맺는 데 성공했다. 전화를 끊자 미셸이 데이빗을 놀렸다.

“말더듬이가 좋은 점도 있네. 거짓말을 해도 티가 덜 나잖아.”

미셸은 데이빗의 창백한 얼굴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자세를 지적했다. 데이빗은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렸다.

스티븐은 그날 밤 그들을 찾아왔다.

데이빗은 묶여 있었고, 초저녁부터 시작된 기분 나쁜 통증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병이 그의 몸을 꾸준히 갉아먹고 있단 증후에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중 데이빗은 문을 누군가 억지로 열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스티븐일 것이다.

데이빗은 황급히 침대로 다가가 미셸을 깨웠다. 마음은 급한데 말을 빠르게 할 자신이 없어 데이빗은 자유로운 발로 침대 옆에 놓인 상자를 찼다.

“사, 상자 안에 저, 전기 충격기가 이, 있어.”

“응?”

스티븐이 왔어. 데이빗은 어눌하나마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선의 속도로 말을 이었다. 문장의 중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스티븐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불을 켰다.

“손들어.”

데이빗은 미셸을 가리며 일어섰다. 미셸이 상자 안에 손을 넣을 시간을 벌어준 뒤 그는 천천히 스티븐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묶인 손을 스티븐에게 들어 보였다.

“다, 다행이다. 네, 네가 와줘, 줘서.”

“헤이, 데비, 멍청한 새끼. 저런 좆밥도 안 되는 도련님한테 당했어?”

스티븐이 셔츠 아래 드러난 데이빗의 벗은 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핥는 듯한 시선에 데이빗은 오한을 느꼈다.

“내, 내일 마, 만나기로 해, 했잖아.”

“내일 여길 왔으면 좋은 꼴 봤겠다.”

“여, 여긴 어, 어떻게 알고 왔지?”

스티븐과 약속한 장소는 여기서 한 블록 떨어진 식당이었다.

“네 고물 트럭이 주차장에 있는 것 봤지.”

트럭을 숨겼어야 했다. 데이빗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티븐은 총구를 흔들며 미셸에게 빨리 침대에서 일어서라고 말했다.

“미셸, 어이, 도련님 자길 미셸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엉덩이 떼고 찍소리 말고 내 차로 옮겨 타. 우린 좀 더 멋진 곳으로 가야 해.”

데이빗은 스티븐이 미셸을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그를 주, 죽일 셈이야?”

“넌 좀 빠져 있어.”

“스티븐-.”

미셸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봐, 당신을 고용한 사람이 얼마를 제시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배를 줄게. 내게 협조하는 게 당신한텐 훨씬 이익일 거야.”

데이빗은 당황한 얼굴로 미셸과 스티븐을 번갈아 쳐다봤다. 미셸과 스티븐이 손을 잡는다면 미셸은 무사히 살아남을 테니, 그게 좋았다. 하지만 그 경우 자신은…….

“거절하지.”

스티븐은 총신을 잡고 있는 손아귀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미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벽히 걷혔다.

“어째서?”

“살인만큼 돈 되는 일은 없어.”

미셸은 스티븐이 자신을 살려주고 적당한 대가를 얻는 안전한 선택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사설탐정은 그와 가치관이 달랐다. 스티븐은 가장 더러운 일이 가장 비싼 수임료를 뜯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미셸은 데이빗과는 전혀 다른 남자를 혐오감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데이빗이 떨리는 눈으로 미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무어라고 계속 미셸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

미셸은 의아함에 눈을 찌푸리다 데이빗의 입술을 읽었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덮쳐.’

데이빗이 먼저 스티븐을 들이받았다. 스티븐은 총신으로 데이빗의 얼굴을 갈기려 했지만, 데이빗이 먼저 묶인 손으로 스티븐을 막았다. 둘은 엉켜 순전한 힘만으로 서로를 밀고 당겼다. 스티븐이 데이빗의 목과 턱 아래 사이에 총을 박고 밀어붙였다. 손등으로 그를 막아내던 데이빗이 부러진 검지가 총과 자신의 몸 사이 끼어 뭉개지는 감각에 비명을 질렀다.

“!”

미셸은 스티븐의 갈비뼈 사이에 전기 충격기를 밀어 넣었다. 살이 타는 냄새와 끊어지는 비명에 미셸은 자신이 제대로 해냈다는 걸 알았다.

축 늘어진 스티븐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미셸은 데이빗 쪽으로 다가갔다. 데이빗은 부러진 손가락을 부둥켜 쥔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통으로 구부러진 몸과 새빨개진 얼굴에 미셸은 그들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병원에 가야겠어.”

데이빗이 눈을 뜨고 미셸을 올려다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빤히 미셸을 바라보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셸은 데이빗이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손가락, 아파 보여.”

“다, 당신이 사, 상관할 바는 아니야.”

미셸은 데이빗의 대꾸가 엉뚱하다 느꼈다. 그게 왜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닌가. 미셸은 반박하려다 데이빗이 화를 내고 있단 걸 깨달았다. 등 돌린 남자의 귀가 새빨갰다. 데이빗이 부러진 손가락 때문에 고통받은 건 이미 며칠 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등 돌린 남자가 미셸의 예상대로 ‘왜 이제 와 내게 신경을 쓰는 건데?’의 의미로 화를 내는 거라면 그는 줄리아보다 새침함의 면에선 한 수 더 뜨는 상대임이 분명했다. 미셸은 이마를 긁적였다. 그는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변명하고 싶었지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당신이-.”

미셸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모텔 창밖으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바깥 거리가 이내 웅성거림으로 시끄러워졌다. 모텔 주인이 경찰과 함께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미셸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전기 충격으로 쓰러진 남자 한 명,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묶여 있는 남자가 또 한 명이다. 좀 전의 비명과 싸우는 소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미셸은 난감함을 느꼈다.

미셸의 시선이 닿자 데이빗이 고개를 숙였다. 미셸은 그의 푸른 눈이 체념으로 까맣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납치범 사내는 자신의 손목 주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미셸은 그가 보고 있는 것이 구속구가 아닌, 곧 자신의 손목에 채워질 수갑이란 걸 눈치챘다.

미셸은 침을 삼켰다. 남자를 감옥 안에 처박아두고 싶지 않단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점령했다.

* * *

둘은 오전 늦게야 경찰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셸 쪽은 신원이 확실했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납치범 사내 쪽이 문제였다. 그는 전과가 있었고 주소가 확실치 않았으며 연락처도, 동거인도 없었다. 거기다 팔목에는 가죽 구속구를 단 채 헐벗은 차림새로 모텔에서 발견되었다. 변호사의 전화 한 통으로 아주 쉽게 자유를 확보한 미셸은 책상 두 개 너머에서 말더듬이 사내가 아주 쉬운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점점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미셸 클뤼젤 씨와는 왜 함께 모텔에 있었던 겁니까?’ 그 별것 아닌 질문에 남자는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좀 있으면 재벌가의 망나니와 실업자가 합심해 미국 전역에 시체를 묻고 다닌 사건에 관한 얘기가 하나 나올 판이었다. 미셸은 결국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우 설득력 있는 스토리로 납치범 사내를 풀어주었다.

“마조히스트로 취급한 건 사과할게.”

스크램블만 노려보고 있던 데이빗이 미셸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미셸은 형사에게 데이빗을 게이 파트너라고 소개했고, 가죽 구속구는 플레이 도구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형사는 핀업 보이처럼 생긴 미셸의 잘생긴 얼굴을 말없이 노려보다 결국 납득했다.

데이빗의 정색에 미셸은 자기 몫으로 나온 스테이크를 잘라내며 피식 웃었다. 근 일주일간 빵만 먹다 평소처럼 아침을 푸짐하게 먹게 되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사건이 일단락된 아침은 상쾌했다. 골치 아픈 상대는 감옥 안에 있었고, 변호사와 비서는 그를 데리러 마을로 오는 중이었다.

납치범 사내는 얌전히 그의 앞에서 아침을 함께하고 있었다. 마지막 상황은 미셸이 느끼기에도 매우 기괴했다. 미셸을 납치했고 미셸을 구해낸 사내는, 이제 낡은 플라스틱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미셸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묶이지도 않았다. 미셸은 사람들 눈에 둘이 친구, 혹은 연인으로 보일 거란 걸 알았다. 뭐 어떤가. 미셸은 그 정도 오해에 기분 상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제 납치범 사내에게 가벼운 농을 던질 만큼 여유를 되찾았다.

“나도 쪽팔린 건 마찬가지야. 인터넷으로 파트너를 구해서 아는 사람 없는 시골까지 온 얼간이 사디스트가 됐잖아. 가십지에 내 기사가 뜨면 전적으로 당신 책임이야.”

농담을 던져도 반응이 없다. 미셸은 표정을 풀지 않는 상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봐서인지 단 며칠 만에 살이 꽤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

“아침, 안 먹나?”

“트럭은…….”

“응?”

“그, 그건 도, 돌려줬으면 조, 좋겠어.”

미셸은 눈을 깜빡였다. 설마 자신이 그 고물 트럭을 탐낼 사람으로 보였나. 기가 막혔다. 키를 확 던지려다 미셸은 납치범 사내가 트럭을 타고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자신의 곁을 떠나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읽었다. 미셸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역시 데이빗과 헤어지는 게 편했다. 스티븐은 그의 수중에 있었고, 납치범 사내의 인적 사항은 경찰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납치범 사내를 아직 여기 남겨둔 이유는 뭘까. 자신이 신중해서, 혹은 아침을 홀로 먹고 싶지 않아서라고 미셸은 스스로 애매모호한 이유를 제시했다.

“내가 그걸 왜 줘야 하지?”

“나, 난 가, 가봐야 하, 할 곳이 이, 있어.”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놔줘야 하는 이유는 뭔데. 내가 왜 당신 편의를 봐줘야 하지?”

납치범 사내는 잠시 침묵했다. 미셸은 말이 느린 사내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한발 앞서 뱉어낼 참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입은 피해가 얼마인지 알고는 있어? 당신은 내가 보스턴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 곁에 있다가 내 조부 앞이나, 혹 내가 필요로 할 때마다 재깍재깍 달려와 날 도와야 해.’ 등등. 그러다 미셸은 불현듯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목이 멘 납치범 사내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다 불쑥 튀어나왔다. 데이빗의 부어오른 입술은 갈라 터져 중앙에 피가 맺혀 있었다. 물이 상처에 닿자 쓰라림을 느낀 데이빗이 미간을 찡그리곤 혀와 손가락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미셸은 납치범 사내의 입안에 억지로 손을 밀어 넣고 혀를 눌렀던 감촉을 기억해냈다. 남자의 말랑거리던 혀와 열로 뜨거웠던 입안, 쏟아지던 눈물과 부어오른 뺨이 생각났다. 자신과 남자가 한 침대 위에서 엉겨 붙었던 기억이 그 뒤를 이었다. 자신은 그를 등 뒤에서 끌어안아 도망치는 허리를 부여잡고, 꾹 다문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그의 입안에서 신음이 새어 흐르도록 만들었었다.

별장 안에 갇혀 있었던 동안 미셸의 몸과 마음 어딘가에 고장이 난 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앞에 평범한 사내를 놓고, 사내가 정신을 잃고 울어대던 순간을 떠올리며 흥분할 수 있는 걸까. 미셸은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은 결국 할아버지가 남긴 기업을 가질 테고, 그 안에서만큼은 비유적으로 표현해, 제국의 황제가 될 터였다. 황제들이 침대 시중을 드는 미동을 갖듯 자신이 그와 비슷한 존재를 갖는 게 큰 흠이 될까? 눈앞의 사내가 미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살짝 거슬릴 뿐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 그럼 다, 당신이 나, 날 잡고 있어야 할 이유는 있어?”

데이빗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상념에 빠져 있던 미셸은 뒤늦게 납치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 눈은 커다랗고, 놀랍게도 어린아이의 것처럼 맑았다. 어떤 비아냥거림도 어울리지 않는 눈이다. 미셸은 잠시 홀린 듯 바라봤다가 이내 발끈했다. 남자의 눈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이 꼭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없어. 하지만 내가 뭘 믿고 당신을 보내줘야 하는데. 당신이 또 이런 짓을 안 할 거란 보장 있어? 난 당신을 곁에 둬야 안심이 돼. 알겠어?”

“……그래.”

미셸은 더는 적당히 할 말이 없어서 데이빗이 아침을 거의 먹지 못하는 것만 한 차례 더 지적했다. 납치범 사내가 기운 없어 보이는 손짓으로 스크램블을 휘적거린다. 포크를 든 손은 왼손이었다. 오른손잡이인 사내의 바른 손은 테이블 아래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데이빗은 미셸의 접시가 빠른 속도로 비워지는 걸 쳐다봤다.

미셸은 데이빗을 더 데리고 있으며 좀 더 괴롭힐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였다. 스테이크 조각이 사라지면 다 끝나는 일이었다. 데이빗은 데이빗의 길대로, 미셸은 그가 속한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데이빗은 미셸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런 사진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자친구를 안고 격정적인 포옹을 하는 연인의 사진이. 미셸에게도 그런 상대가 있을 것이다.

“줄리아…….”

“왜?”

미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데이빗을 쳐다봤다. 뜬금없이 여자의 이름을 불렀으니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 그게 다, 당신 여자친구의 이, 이름이었지.”

데이빗은 일부러 이름이란 단어에 힘을 넣어 발음했다. 미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데이빗의 등줄기가 긴장으로 굳는다. 그의 몸은 미셸의 몸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움직이는지 기억했다. 늘씬한 남자의 몸은 잘 단련된 근육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그의 성격은 잘 벼려진 군용 나이프처럼 날카로웠다. 데이빗은 미셸의 예리한 눈빛을 느끼며 자신이 한 번 더 줄리아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면 남자가 자신을 바로 눈앞에 있는 플라스틱 식탁 위에 올려놓고 매질할지도 모른다 느꼈다. 그는 미셸이 여전히 두려웠다. 그래도 줄리아를 입에 담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줄리아, 그게 그 여자의 이름이었고, ‘데이빗 베커’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미셸은 한 번도 납치범의 이름을 물은 적이 없다.

“왜 내 여자친구 주변을 도는 건 아직 포기 못했어?”

미셸의 비아냥거림에 데이빗은 명치가 죄어들고 손바닥 중앙이 욱신거렸다.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전속력으로 도망쳐 으슥한 골목으로 숨고 싶었다. 그러나 그냥 가버리기엔 콧날과 손가락의 아픔이 너무 컸다. 데이빗은 심장의 아픔을 억누르며 자리를 지켰다.

“아, 안심해도 돼.”

“무얼?”

“나, 나는 내, 내가 왜 다, 당신한테…….”

데이빗은 말을 멈췄다. 뒤를 발음하는 건 간단했다. ‘난 내가 왜 당신에게 반했었는지 이젠 기억도 안 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데이빗은 아직 자신이 남자에게 반했던 때를 기억했다. 그것이 모두 끝나버린, 의미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남자를 사랑했었다는 걸 고백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데이빗은 그 말 대신 미셸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다, 당신과 당신 여, 여자친구 그, 근처에는 가지도 아, 않을 테니 거,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걸 어떻게 믿지?”

어떻게 믿느냐는 말은 미셸의 입버릇인 모양이었다. 데이빗은 몇 번째 반복해 듣는 말에 씁쓸해졌다. 미셸이 자신을 믿지 않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각인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가 이어 할 말도 남자는 믿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데이빗은 그에게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를 납치했는가는 알려주고 싶었다.

“다, 당신이 날 아, 안 믿는 거, 건 다, 당연해. 나, 난 당신을 나, 납치해, 했고, 당신 말처럼 쓰, 쓰레기 같은 인간이니까. 하, 하지만 내, 내가 다, 당신을 나, 납치한 건 도, 돈 때문은 아, 아냐.”

“돈 때문이 아니면, 당신이 날 좋아해서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열이 치솟았다. 미셸은 전혀 자신의 말에 공감할 기미가 없었다. 그가 제시했던 두 번째 선택지가 정답이었느냐며 이죽거리는 얼굴에 데이빗은 부아가 치밀었다.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내 말을 좀 들어-!”

식당 안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데이빗은 손목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내, 내가 벼, 병신 가, 같은 거, 건 나, 나도 아, 알아……. 내, 내 말이, 드, 듣기 힘, 힘든 건, 아, 알지만, 드, 듣는 시, 시늉이라도 해.”

데이빗은 한평생 단 한 명의 사람을 제외하곤 자신의 말을 꾹 참고 들어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 느려 터진 자신의 말을 참고 들으란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저 듣는 척이라도 해달라고 데이빗은 부탁했다.

“알았어.”

미셸은 그러겠노라고 생각보다 선선히 답했다. 데이빗은 잠시 숨을 골랐다. 자신이 왜 미셸을 납치했던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던 노숙자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 당신은 부, 부유해 보였어.”

“맞아.”

미셸은 결국 이유가 돈이었다고 생각했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데이빗은 듣는 시늉도 잘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리고 시, 실제로 다, 당신은 부유했지. 다, 당신은 유산을 상, 상속받을 거, 거라고 했지? 나, 나도 그래. 나, 나도 마, 많이 받았어. 내 아, 아버지가 남긴 비, 빚 때문에 난 해보지 않은 이, 일이 없어.”

데이빗은 정규 교육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남들보다 일찍 사회에 나와 돈을 벌었다. 자신이 발 뻗을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그는 해보지 않은 것 없이 많은 일을 했다.

“시, 시에서 요, 용역을 바, 받아 개, 객사한 노, 노숙자를 무, 무연고자 공동묘지로 아, 안장하, 하는 이, 일은 꽤 버, 벌이가 괜찮아. 하, 하루는 노, 노숙자 하, 한 명을 화, 화장하고 무, 묻었는데…….”

데이빗은 노숙자의 유류품을 정리하다 사진 속 노숙자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거리에서 데이빗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바로 그 남자였다. 데이빗의 어설픈 말을 듣고 데이빗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던 노숙자 사내는 데이빗에게 죽기 전 가장 원하는 일을 하라고 충고했었다.

데이빗의 죽음을 동정했던 남자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데이빗은 한참 사진을 들여다봤었다.

“화, 화장터에서 나왔을 때, 개 하, 한 마리가 바깥을 계속 어정거, 거리고 있었어. 그 개는 그 노숙자가 키, 키우던 개였지.”

“그래서?”

미셸이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해는 이제 정오에 가까워져서 식당 안까지 해가 잔뜩 들어왔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해에 미셸의 녹색 눈이 연하게 빛났다. 반짝이는 금빛 속눈썹이 바로 눈앞에 있단 사실이 데이빗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소원을 이루긴 했다. 그는 저 금빛 속눈썹을 쓸어보았고, 도톰하게 융기한 입술의 감촉이 어떤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술에 취한 노숙자 사내가 동사하는 순간 개를 끌어안고 느꼈을 안온한 온기 대신 데이빗은 자신을 혐오하는 이에게 몸과 정신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지점까지 내주고, 가장 밑바닥까지 억지로 까발려지며, 그 지독한 체온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다, 당신을 납치할 게 아니라 개 한 마리를 사, 샀어야 했어.”

“…….”

죽음의 순간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의 곁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데이빗은 철없이 그리 소원했다. 그것은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미셸은 그에게 너무 완벽했다. 데이빗에겐 개 한 마리가 어울렸다.

“나보다 개가 더 낫다고?”

데이빗은 침묵했다. 미셸이 혀를 찼다. 미셸의 날카로운 눈빛에 데이빗의 온몸이 후들거렸다. 진실을 이야기했다. 자신은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진이 빠졌는데, 사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노려보기만 한다. 데이빗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지기가 치밀어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다. 그는 미셸의 시선을 피해 화장실로 도망쳤다.

화장실로 간 납치범 사내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미셸은 그가 그대로 도망쳤으리라 생각했다. 영화 속 화장실 창문은 늘 최고의 탈출구로 쓰이지 않던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버린 거라면 어떻게든 찾아내 쏘아붙이고 싶었다. 개가 자신보다 낫다고? 무슨 비교를 그따위로 하나. 태어나 한 번도 미셸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꽤 화가 난 상태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하반신이 보였다.

미셸은 달려가 화장실 칸막이벽에 기댄 채 쓰러져 있는 데이빗을 발견했다. 변기 안이 빨갛다.

“왜 이래? 이봐, 정신 좀 차려.”

미셸은 정신을 잃은 남자의 창백한 뺨을 두들겼다. 데이빗이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저거 뭐야. 설마 피야?”

데이빗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휘청 고개를 저었다. 상태를 살피러 미셸이 가까이 몸을 붙이자 데이빗은 저절로 긴장해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 미셸은 데이빗의 경계 가득한 태도와 겁먹은 게 역력한 눈빛에 퍼뜩 놀랐다. 남자는 온몸을 벽에 바짝 붙인 채 떨고 있었다. 미셸은 그게 당연한 반응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남자의 얼굴은 얼핏 침착해 보였지만, 실은 그건 미셸에게 살려달라고 빌던 때의 멍한 얼굴과 비슷했다.

“피 토한 거 맞지?”

데이빗이 미셸의 놀란 얼굴에 씁쓸히 내뱉었다.

“……왜 내, 내가 시, 시한부 화, 환자라는 마, 말도 거, 거짓말인 주, 줄 알았나.”

미셸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 * *

미셸은 비서와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차를 몰았다. 약속 장소에 미셸의 경호원들이 득실거릴 거란 생각에 데이빗은 몇 번 핸들을 빼앗아 틀고 싶은 걸 참았다. 감옥에서 죄수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나, 날 놔 줘. 당신 주, 주변엔 이젠 아, 안 가.”

“…….”

“다, 당신과 내, 내 일은 어, 없었던 일로 하, 하는 편이 나, 나아.”

미셸이 깜빡이는 신호를 보고 거칠게 속도를 높였다. 데이빗의 몸이 흔들렸다. 몸 안 깊은 곳이 충격에 심하게 아팠다. 미셸은 냉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신이 먼저 납치해놓고 없던 일로 하자고?”

“…….”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데이빗 쪽이었다. 다음번 신호 때는 결국 빨간불에 걸렸다. 차가 멈춘 틈에 데이빗은 글러브 박스를 열어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썼다.

“뭐야?”

미셸은 데이빗이 내미는 종이를 받았다. 거기엔 수학 공식을 닮은 문장 한 줄이 쓰여 있다.

「납치 - 강간 = 0」

“……미안해. 저, 정말로 미안해. 다, 당신을 나, 납치해서. 주, 죽을 때까지, 후, 후회할 테니까, 지, 지옥에 갈 테니까, 용서……. 아니, 이, 잊어줘. 제발.”

미셸은 데이빗을 돌아보았다. 조수석엔 한없이 지쳐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푸른 눈엔 혐오와 체념만 가득했다.

정신이 확 들었다.

납치범 사내는 둘의 관계가 제로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미셸은 부정하지 못했다.

수염 자국이 푸르스름한 게이, 병을 앓고 있는 남자의 밑을 핥고 박는 일이 뭐 그리 아름다운 일이라고 자신은 상대를 붙잡아놓으려 하는 걸까. 좁은 곳에서 몸이 부대끼다 보니 마음이 동했다고 하나 데이빗은 결국 그를 납치한 사람이었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미셸은 길가에 차를 댄 뒤 내렸다. 데이빗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말이 옳아. 당신은 날 납치했지.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단 말이야.”

미셸에겐 스티븐이 있었다. 이번 일로 할아버지의 태도도 분명해졌다. 굳이 데이빗까진 필요치 않다.

“원하는 대로. 가.”

데이빗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좌석에서 일어서서 운전석 쪽으로 바꿔 앉았다. 미셸은 퍼뜩 생각난 사실에 차창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당신, 가기 전에 이름이 뭔지는 알려주지 그래?”

데이빗은 대답 없이 엑셀을 밟았다. 트럭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