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탑 3
“…….”
데이빗은 자신이 흘린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침대 안에서 깨어났다. 그는 주변의 낯선 풍경에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이곳이 미셸을 납치해 감금하기 위해 찾아낸 버려진 별장 건물이란 게 천천히 기억났다. 그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나마 땀을 진탕 흘린 덕분인지 열이 꽤 떨어져 다행이다.
그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가 나무 벽에 귀를 대고 저 너머 미셸이 갇혀 있는 방 안의 동정을 살폈다.
잠에서 깨어난 미셸이 투덜거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쇠사슬이 절렁거리는 소리가 얇은 벽 너머로 들렸다.
“시팔!”
미셸이 예고 없이 욕을 내뱉었다. 데이빗은 움찔 놀랐다. 쾅, 이어 그가 무언가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데이빗은 벽에서 떨어져 숨을 죽였다. 용변 문제 때문에 미셸의 사지를 풀어준 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미셸은 영화 속 위축된 모습으로 덜덜 떨기만 하는 피해자들과는 달랐다. 미셸은 태연자약하게 데이빗을 떠보며 이쪽 상황을 점치려고까지 했다. 설마 이런 상황에 많이 처해보기라도 한 건지 의심스럽다.
‘신은 한 번도 내게 원하는 걸 준 적 없으니 죄를 지어서라도 원하는 걸 얻자.’ 그게 미셸을 납치할 때 가졌던 생각이었다. 데이빗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나간 합리화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그는 이런 엉망진창의 상황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자신은 나름 계획을 세우고 일을 벌였지만 그는 아마추어였다. 매시간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일단 당장 데이빗은 회벽처럼 보이는 벽이 실은 나무 위에 종이를 발라 칠한 속이 텅 빈 벽에 지나지 않으며, 미셸의 방 바로 옆에 자신이 숨어서 동태를 살피고 있단 사실을 미셸이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빌었다. 그가 만일 눈치챈다면……. 데이빗은 그 자태에 반해 데려온 코끼리가 알고 보니 조련사를 죽이는 게 취미인 킬러 코끼리란 걸 뒤늦게 알아차린 조련사의 기분을 느꼈다.
두 번째 한숨을 소리 없이 내뱉은 뒤 데이빗은 비밀 상자를 열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했다. 어제 용접을 하다 만 쇠사슬과 자물쇠, SM 샵에서 산 가죽 구속구를 연결하는 일을 해야 했다. 상자 안에는 구속구 외에도 파티 드럭 성분의 이상야릇한 약제도 한 병 들어 있었다. 예상보다 돈이 남아 구입한 거였는데, 자신이 진짜 생각이 있었다면 정체 모를 최음제가 아니라 윤활유를 샀어야 했다. 그랬다면 첫 게이 섹스 후 날카로운 후폭풍에 끙끙 앓아눕진 않았을 것이다.
구속구를 손보는 일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일단은 무서운 속도로 식량을 먹어치우는 피해자의 아침부터 챙겨야 한다. 그는 샌드위치와 우유 한 잔을 준비해 미셸에게 갔다.
“정체가 뭐야?”
식사만 문 앞에 두고 사라지려는데 미셸이 대뜸 데이빗에게 말을 걸었다. 미셸의 여러 물음을 그냥 무시하고 갔던 데이빗이었지만 그 물음에는 발길이 멎었다.
자신이 누군가 하면 뒷골목에 버려진 미셸을 집까지 데려다 줬던 택시 기사이고, 길을 헤매던 미셸에게 고서점을 알려준 얼간이이며, 매일 혹여 그를 볼 수 있을까 전혀 연고 없는 주택가를 헤맨 미친놈이기도 했다.
미셸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에게 좀 더 멀끔한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 수염을 깎고 자신이 가진 가장 깨끗한 옷을 입은 게 문제였을까. 아니, 원래의 모습이었다 한들 저 잘난 사내가 자신을 알아봤을 리 없다.
데이빗은 원래도 구부정한 상반신을 더 동그랗게 구부리고 뒤돌아섰다. 미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계속 물어댔다.
“이따위 짓거린 누가 시킨 거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했다. 데이빗은 인생 처음으로 핵폭탄급 대형사고를 친 자신이 대견하고 우스웠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 두려운 게 없어지면 어떤 짓도 할 수 있단 걸 알게 되었다.
“당신 벙어리야? 말 못하는 병신 새끼라 당신 보스가 이런 일을 시킨 거야?”
데이빗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굳어 미셸을 노려보고 말았다.
혀 짧은 병신이란 놀림, 데데거리는 말더듬이 흉내. 그것들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껌처럼 붙어 다닌 것들이다. 오래된 상처가 진득하니 벌어졌다. 분노로 가슴이 얼어붙었다. 무슨 말이든 쏘아붙이고 싶은데 혀가 말라붙는 느낌이 왔다. 이대로 입을 열었다간 어처구니없이 더듬을 게 뻔했다. 데이빗은 심호흡을 했다. 최대한 짧고 느리게, 3음절 이하의 말로. 그는 주문을 외웠다. 남자의 앞에서 더듬지 않기 위해 거울을 보며 수없이 연습하지 않았던가.
“……입 다물어.”
성공이었다. 그는 “……이, 이, 입” 하고 얼간이처럼 중얼거리지 않은 데 신께 감사드렸다.
“아, 병신은 아니었군.”
미셸은 다행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데이빗은 부글거리는 화에 자신의 뺨이 경련하는 걸 느꼈다.
“누구야. 이딴 짓을 시킨 게. 조건이 뭐였어? 당신한테 얼마를 준다고 했든 내가 그 배를 주지.”
“……난 몰라.”
데이빗은 뚝뚝 끊어 대답했다. 자신이 병신이냐고 물은 사내 앞에서 이번에도 더듬지 않는 데 성공했다.
“내가 그 시간에 라이브 플라자에 갈 거란 걸 누가 알려줬지? 기절한 날 옮기려면 당신 혼자서는 안 됐을 텐데, 누구지? 당신 뒤에 있는 작자는?”
“난 몰라.”
‘난 몰라’라는 말은 발음이 꽤 쉬웠다. 앞으로도 애용해야겠다 여기며 데이빗은 재빨리 돌아섰다.
데이빗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
미셸은 놀라운 남자였다. 납치를 당했음에도 밤에만 잠을 잤고 낮에는 팔굽혀펴기 같은 간단한 운동을 하거나 골똘히 생각을 정리하거나 했다. 인질이 가만있질 않으니 납치범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데이빗은 미셸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그를 납치했다.
갖고 싶었던, 손 한 번 대어보고 싶었던 남자를 겨우 곁에 두게 되었는데 현실은 그가 잠들기를 기다리며 벽의 낡은 틈으로 그를 관찰하는 게 다였다. 데이빗은 귀를 기울였다. 미셸이 작게 코를 골고 있었다.
데이빗은 헝겊에 약제를 묻히고 조심스레 미셸에게 다가가 그의 코 아래에 천을 들이댔다. 몇 번의 숨 끝에 미셸이 약제를 깊게 호흡해 들이마셨다. 얼마쯤 있으려니 사내의 잘 발달한 근육이 나른하게 풀렸다. 데이빗은 꿀꺽 침을 삼켰다. 떨리는 손으로 미셸의 단단한 가슴과 부드러운 유두, 매끄러운 복부를 어루만졌다.
미셸의 숨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데이빗은 좀 더 용기를 냈다. 티셔츠를 밀어 올리고 잠에 취한 남자의 등줄기를 입술로 애무했다. 남자의 골격은 데이빗의 상상보다도 완벽했다. 구부정하고 비쩍 마른 자신과 달리 굽어진 어깨도, 그늘지고 비틀린 흉터도 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혀로 핥자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졌다. 데이빗은 미셸의 단단한 근육과 부드러운 촉감에 홀렸다. 손에는 진땀이 배고 동작은 거칠고 빨라졌다. 그는 미셸의 몸을 바로 했다.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거기 있었다. 금빛 속눈썹이 단정한 뺨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데이빗은 남자의 도톰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잠든 이의 입은 몇 번 두들기는 것만으로 수월히 벌어졌다. 벌어진 입과 살짝 엿보이는 혀가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안 돼.’ 고개를 저어도 그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데이빗은 납치한 인질의 입술을 도둑질하고, 그의 혀와 입안을 모두 맛봤다.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하지만 죄책감이 오히려 흥분을 고조시켰다. 허벅지가 당기고 입고 있는 바지가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미셸의 가슴을 침 범벅으로 만들며 데이빗은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손이 떨렸다. 꿈속에서 이미 몇 번이나 데이빗은 그를 가졌고, 그를 범했으며, 실제로 그것을 너무도 절망적으로 원했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는 미셸의 안으로 허리를 거의 밀어 넣었다가 포기했다. 데이빗은 피와 고통에 취약했다. 데이빗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백인 쓰레기에, 못 말릴 알코올 중독자였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경험을 통해 데이빗은 몸에 가해지는 폭력이 마음 안에도 회복 못할 상흔을 남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자를 납치해선 안 됐다.
그걸 그리 잘 알면서 왜 이런 짓을 한 거냐고 양심이 물어왔다. 데이빗은 그를 무시했다.
미셸을 다시 엎드리게 하고 바지를 벗겼다. 치골 아래쪽에서 시작해 허벅지 근육을 쓰다듬었다. 여자의 넓은 골반과 달리 하트 모양에 가까울 정도로 좁고 급격해지는 둔부의 모습이 그의 아래에서 숨 쉬고 있는 이가 멀쩡한 사내라는 걸 알려주었다. 정신 나간 짓이다. 데이빗은 이 미친 짓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허벅지 안, 단단한 사내의 대퇴근 속에 숨어 있는 여린 부위를 찾아내 문질렀다. 흥분에 숨이 달떴다. 아랫배에 요의와 비슷한 뿌듯함이 가득 찼다. 약이 부족해 중간에 미셸이 깨어난 것이 문제였다. 데이빗은 일생 그토록 당황한 적이 없었다.
“이 개새끼!”
미셸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가 데이빗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알려주었다. 데이빗은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납치범은 그 밤 내내 인질의 저주와 욕설을 들어야 했다.
자신의 손목에나 겨우 맞는-아마도 여성용을 잘못 산 듯싶었다.- 구속구에 송곳으로 구멍을 하나 더 뚫는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낑낑거리고 있던 참에 데이빗은 미셸이 별장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는 걸 들었다.
“이봐! 내 말 들려?! 날 미치게 할 참이야?”
데이빗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숨어 있던 미셸이 그를 와락 덮치거나 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데이빗은 근래 미셸의 방문을 열 때마다 긴장했다. 미셸은 수염이 덮여도 전혀 빛을 잃지 않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금 며칠째 잡혀 있는지 알기나 해?”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실은 알고 있었다. 수첩에 붙은 간이 달력에 하루하루를 지우며 세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며칠이 지났다는 문장은 발음하기 너무 어려웠다. 미셸이 모르는 건 당연했다. 별장엔 전화기 선도, TV도 없었다. 데이빗 역시 미셸을 납치하던 날 자신의 휴대폰을 강바닥에 버렸다.
“젠장,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좀 알아야 할 것 아냐.”
“……왜?”
데이빗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물음이었다. 미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끔찍한 걸 보는 혐오감이 어렸다. 미셸의 입장에선 ‘넌 영영 여기 갇혀 있다 죽을 텐데, 왜 그런 데 관심을 두지?’란 의미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미셸은 꿀꺽 침을 삼킨 뒤 침착함을 되찾았다.
“TV라도 좀 갖다 줘. 내가 던져서 당신을 죽일까 봐 걱정이야? 사슬이 안 닿는 저 문 앞에 올려놓으면 되잖아. 날 풀어주지 않을 거면 뭐든 소일거리라도 달란 말이야.”
데이빗은 완전히 당황했다. 미셸은 여가를 선용하기 위해 책과 TV를 달라고 요구하는 죄수처럼 당당했다. 자신은 남자를 납치했고 강간했다. 그런데 미셸은 너무 여유가 넘쳤다. 자신이 수세에 몰린 기분에 데이빗은 날카롭게 대응했다.
“그만. 입 닥쳐.”
데이빗은 자신이 흉악한 납치범처럼 보이길 원했다. 그래야 남자가 좀 조심할 거고, 적어도 자신이 초조해하고 겁먹고 있단 걸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강한 경고를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데이빗은 턱은 당기고 눈엔 힘을 잔뜩 준 채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말…….”
데이빗은 얼굴을 찡그리고 말 대신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검지를 들어 올려 입가에 대고 쉿,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나직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한 글자씩 끊어 발음했다.
“죽기 싫으면.”
덧붙인 말에 미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가 사납게 데이빗을 노려봤다. 사슬만 없었다면 당장 자신을 죽여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녹색 눈동자에 데이빗은 진땀이 솟는 걸 느꼈다. 남자는 진짜였다. 어설프게 흉내 내는 자신과 달리 그에게선 잘 단련된 살기가 엿보였다. 데이빗은 자신의 코끼리가 자신을 밟아 죽이기 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자신이 겁을 집어먹었단 걸 알아차리자마자 코끼리는 자신을 들이받을 게 분명했다.
미셸 앞에서 험한 말을 뱉었던 것과 달리, 데이빗은 자신의 덜덜거리는 일제 트럭을 몰고 한참을 달려 읍내에서 낡은 TV 한 대를 샀다. 최대한 가볍고 작은 리모컨을 구입해서 허공으로 던졌다가 받아보았다. 손바닥에 떨어지는 감촉으로 보아하니 미셸이 최대한 강하게 던진다고 해서 무기가 될 것 같진 않았다. 데이빗은 미셸이 TV라도 보며 공격성을 줄여주길 막연히 희망했다.
그래서 무얼 바라는가.
답은 간단했다. 데이빗은 어떤 형태로든 이 기괴한 동거가 이어지기를 원했다. 피해자를 피해 옆방에 숨은 채 그를 관찰하며 즐거워하는 납치범으로서의 일상이 좀 더 길어지길 바라는 자신의 모습에 데이빗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이 주. 데이빗은 자신이 정한 기한을 떠올려보았다.
끔찍하게 긴 시간일지, 아니면 허무하게 짧은 찰나가 될지 아직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요타 트럭의 낡은 에어컨에서 나는 곰팡내에 시달리며 데이빗은 별장까지 차를 몰았다. 그는 사슬이 닿는 범위에서 두 발치는 떨어진 곳에 TV를 가져다 놓고, 문에 구멍을 뚫어 전선을 밖으로 빼냈다. 그 작업만으로도 하루가 다 가버렸다. 초조한 납치범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셸은 느긋하게 누운 채 채널을 돌렸다.
미셸에게 있어선 황당한 납치였고, 데이빗의 입장에선 기묘한 동거였던 일이 지옥의 형벌처럼 끔찍하게 변한 건 한 남자의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감금한 이를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하고 있던 데이빗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등줄기를 굳혔다. 별장 근처엔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큰 도로도, 집도 한 채 없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차가 정말로 자신들을 향해 오는지 살폈다.
트럭에서 키 큰 남자가 내렸다. 데이빗은 두려움 섞인 짜증을 느꼈다.
“안녕, 오랜만이네.”
스티븐 머피. 미셸을 납치하는 걸 도와준 사설탐정이 뻔뻔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머피는 생긴 건 멀끔했지만, 가끔 지극히 잔인한 눈빛을 보이는 남자였다. 데이빗은 그가 어렵고 싫었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얽히지 않았을 것이다. 여긴 왜 온 걸까. 데이빗은 머피가 소란을 피워 미셸을 자극할까봐 두려웠다.
“사후 처리상 왔어. 좀 반가워해주지 그래.”
“벼, 별로.”
“어때, 납치 후 충분히 즐겼나?”
머피가 징그러운 눈으로 데이빗을 훑어보았다. 데이빗은 세상 모든 이가 노숙자 사내와 같지 않단 사실을 간과한 걸 후회했다. 머피 같은 사내에게 본심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한 건 경솔한 짓이었다. 머피는 고등학교 시절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데이빗의 얘기를 들은 뒤 대뜸 한다는 소리가 ‘너 호모였어? 그래, 얼마나 줄 수 있는데.’ 정도였다. 데이빗이 겸사겸사 집을 정리한 돈은 대부분 머피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는 대가로 데이빗에게 전기 충격기와 모델건, 허물어져가는 낡은 별장을 주었다. 그가 미셸을 기절시키기 위해 포르말린 성분이 들어간 싸구려 약품을 썼을 때부터 데이빗은 그를 불신하게 되었다.
“여, 여긴 왜, 왜 왔어.”
“좋은 제안이 있어서. 네가 손해 볼 일은 아닐 거야. 너 저 남자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납치한 거야?”
“…….”
데이빗에겐 미셸이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머피가 비웃음 역력한 표정으로 코웃음 쳤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냐. 아니면 정말 멍청한 거냐. 여하튼 모르고 그랬으면 넌 엉겁결에 로또 맞은 거야. 저 녀석을 나한테 넘겨. 네 몫은 심심치 않게 챙겨줄게.”
데이빗은 머피의 말에 깜짝 놀랐다. 사설탐정의 얼굴에선 피 냄새가 풍겼다.
“너, 넘기면 어쩌려고?”
“그것까진 네가 알 필요 없어. 너도 어차피 녀석을 저대로 그냥 돌려보낼 것 아니잖아?”
“……푸, 풀어줘야 해.”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저 녀석이 멀쩡하게 돌아가면 넌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해.”
머피는 말을 하다 말고 데이빗의 매끈하게 면도한 얼굴과 깔끔하게 정리된 고수머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리 있으니 제법 나쁘지 않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뭐, 거기에 가면 네가 원하는 호모 섹스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죄수들이 너한테 박으려고 줄을 서겠네.”
데이빗은 물러섰다. 머피가 풍겨대는 기운이 끔찍했다. 어기적거리며 물러나는 걸음걸이에 사설탐정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는 데이빗이 물러난 만큼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그나저나 왜 아까 질문에 대답 안 해? 그 녀석이 잘해줬느냐고 물었는데.”
“꺼져. 내, 내가 왜 그, 그딴 마, 말…….”
데이빗은 긴장해 더욱 심하게 더듬었다. 머피는 짜증이 치민단 얼굴로 데이빗의 얼굴을 쥐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근접해 온 뒤였다. “?!” 그가 예고도 없이 데이빗의 바지 안, 성기를 움켜쥐었다.
“!!”
데이빗은 패닉에 빠졌다. 진땀이 잔뜩 나고 허리가 굽어졌다. 머피는 재빨리 데이빗의 바지를 끌어 내리곤 엉덩이골 안으로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아직 낫지 않은 곳에 단단한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손가락이 파고들자 살점이 타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들끓었다. 데이빗은 손가락을 피해 몸을 구부리며 꿈틀댔다. 머피가 기다렸단 듯이 그의 배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흐으!”
힘이 빠지기 바쁘게 바닥에 고꾸라졌다. 머피가 다가와 다급히 데이빗의 등을 누르고 바지를 완전히 벗겨냈다.
머피는 감옥에서 약한 죄수를 겁간하듯 데이빗을 다뤘다. 변변한 저항도 못 했다. 데이빗은 머피가 누르는 대로 눌리고, 그가 미는 대로 밀렸다. 팔꿈치가 까지고, 배에는 멍이 들었다. 얼굴이 붉게 변한 채 얼마나 끙끙거렸을까. 몇 차례 자지러지길 반복했다. 의식을 잃기 바로 직전 비릿한 밤꽃 냄새가 피비린내에 섞여 훅 끼쳐왔다. 데이빗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순간 자신이 저지른 짐승 같은 짓에 멋쩍음을 느꼈는지, 머피는 행위가 끝난 뒤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
“저쪽에서 얼마나 줄 수 있는지 자세한 사항을 알아올 테니 그때 또 얘기하자.”
머피는 데이빗이 자신의 뜻을 거부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도 머피는 항상 데이빗을 말 잘 듣는 부하처럼 부렸다. 그때로부터 십오 년도 더 지난 지금에서야 데이빗은 머피가 자신을 친구로 대해줬다 믿었던 환상이 한꺼풀 벗겨지는 걸 느꼈다.
죽은 사람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던 데이빗은 머피가 떠난 한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씻지도 않은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몸을 누였다. 구겨진 셔츠처럼 엉망으로 찢어진 몸이 달달 떨려 몇 걸음을 걷기도 어려웠다. 그는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납치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도 데이빗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미셸에게 자신의 위치를 들켰다. 데이빗은 비밀 방에서 잠을 청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욕했다.
삐이삐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탁자 위 물건들이 바닥으로 쓰러져 뒹굴고 있다. 바깥에선 트럭의 경고음이 요란하다. 지진이라도 난 걸까. 생각을 깊게 할 새가 없었다. 미셸이 계속 데이빗을 불렀다. ‘쾅!’ 대답이 없자 화가 난 사내가 미친 듯이 벽을 두들겨댔다. 지독한 소리였다.
“그…… 그만…….”
데이빗은 형편없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셸은 벽을 두들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벽이 무너질지 모른단 두려움에 데이빗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원인을 제공한 머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라면 미셸을 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주? 불가능했다. 미셸을 당장 돌려보내야 했다.
어떻게? 데이빗은 벽을 두들겨대는 소음 속에 갇힌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단은 그를 묶어야 해. 기절시키고, 읍내 근처에 버려야겠지.’ 세비 밴에서 어떤 작자들이 미셸을 버렸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해야 했다. 거부감에 데이빗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엄지가 피범벅이 되어서야 그는 살점을 무는 걸 멈췄다. 그는 세비 밴의 악당들과는 달랐다. 그는 미셸을 구했던 적이 있다. ‘다를 바가 뭐 있지?’ 마음속 울림이 그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관두자.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냐.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미셸 주변에 자물쇠를 풀 열쇠도 함께 둬야겠어.’
하지만 몇 초 뒤 돌려보내는 일이 오히려 납치하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단 걸 데이빗은 깨달았다. 머피의 말대로 미셸은 데이빗의 얼굴을 본 뒤였다. 데이빗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풀어주려는 생각을 바꿨다. 일단 그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나았다. ‘모텔, 버려진 집, 폐공장……’ 몇 가지 대안이 떠올랐지만, 썩 맘에 드는 건 없었다. 데이빗은 그나마 가장 나은 첫 안을 택했다.
데이빗은 최대한 빨리 준비했다. 신속히 움직여 생필품을 트럭 안에 넣고 열쇠 꾸러미는 특별히 트렁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방 안에 둔 상자 안에서 사슬과 구속구, 자물쇠와 모델건을 챙겨 양손 가득 들었다. 미셸을 옮겨야 했다.
데이빗은 바짝 긴장한 채 미셸의 방에 들어섰다.
미셸은 방 안으로 들어서는 데이빗을 똑바로 노려봤다. 데이빗은 긴장이 지나쳐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버렸다. 「동북부를 강타한 지진에 피해가 속출하는 가운데…….」 미셸이 틀어놓은 TV 속 뉴스 속보가 다른 세상일처럼 들려왔다. 데이빗은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를 상대하기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사지는 후들후들 떨리고 열상으로 말미암은 열로 시야가 몽롱했다. 직장 안이 질척하게 젖고 다리 사이로 타액이 흘러내리는 감촉은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맹수 앞에서 부상당한 모습을 노출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데이빗은 자신의 몸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걸 막지 못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 그는 거친 동작으로 총구를 겨누며 미셸에게 명령했다.
“허, 허튼짓 마.”
이번엔 좀 더듬었지만 놀란 미셸은 그런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셸이 이를 꽉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제정신이야?”
잔말 말고 일어서. 데이빗은 손짓했다. 미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오만한 눈으로 데이빗을 내려다보았다.
“실수하는 거야. 당신은 내가 얼마나 운 좋은 사람인 줄 몰라.”
미셸이 상위 일 퍼센트의 선택받은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미소를 내비치며 웃는다. ‘그러는 당신은 내가 얼마나 운 나쁜 사람인 줄 모르지.’데이빗은 그렇게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미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으로 구속구와 사슬을 미셸에게 던졌다.
“감아.”
스스로 감으라는 말에 미셸이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데이빗은 이를 갈았다. 손톱을 물어뜯고 싶어 엄지가 근질거렸다. ‘미셸이 사슬을 다 감은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그의 얼굴에 복면이라도 씌워야겠지만, 이 집 안엔 그럴만한 게 없었다. ‘그를 뒷좌석에 앉힌다면 위험해지지 않을까? 트렁크에 넣어야 할 텐데 그가 순순히 들어갈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총구가 스르르 바닥을 향한 것과 여진에 바닥이 출렁거린 일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어?”
겨우 서 있던 데이빗은 미약한 흔들림에 균형을 잃었다. 시야가 반전되었다. 데이빗은 버둥거리며 재빨리 일어서려 했다. 한발 늦었다. 미셸이 데이빗의 몸을 밀어뜨렸다. 총은 데이빗의 손에서 벗어나 TV 위에 떨어졌다 튕겨져 나가 방 밖의 복도 한구석으로 떨어졌다. 몸이 묵직했다. 미셸이 데이빗의 몸 위에 있었다. 꿀꺽, 데이빗은 두려움에 침을 삼켰다.
“것 봐. 내가 운이 억세게 좋다고 하지 않았어.”
미셸은 데이빗이 준 사슬로 그의 목을 조른 채 웃었다. 코끼리가 조련사를 구석으로 몰아넣은 순간이었다.
쇠사슬이 목을 조였다. 데이빗은 반사적으로 팔꿈치로 미셸의 얼굴을 밀어내며, 자신의 몸을 누르는 미셸의 배 쪽을 무릎으로 걷어찼다. 미셸은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는 데이빗의 버둥거림을 효율적으로 봉쇄했다. 그는 데이빗의 팔과 다리를 잡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고, 더 쉽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곳에 집중했다. 몇 번의 세찬 주먹질 끝에 데이빗의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와 얼굴에 번졌다. 침대 머리 부분까지 밀려 올라간 납치범은 사납게 쏟아지는 타격을 막아내기 위해 어깨를 뒤틀었다가 쇠사슬이 당겨지는 힘에 도로 침대 중앙 쪽으로 끌려 나왔다. 비강을 타고 내린 피가 입과 목으로 흘러내려 데이빗은 호흡이 어려웠다. 머리가 어지럽다. 공포로 시야가 얼룩졌다.
미셸은 걷어차이고 긁히면서도 사슬을 당기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사냥감의 멱을 쥐어뜯는 맹수처럼 온몸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킨 그의 눈동자에서 쇳빛 파란 살기가 흘렀다.
쇠사슬이 팽팽해지자 납치범의 푸른 눈이 경악에 차 크게 뜨였다. 핏발 선 눈이 기괴할 정도로 커졌다. 힘을 더하자 데이빗의 몸이 비틀리며 경련했다. 가까스로 목과 사슬 사이 낀 납치범의 검지 끝이 목과 함께 조여지며 으깨져 보랏빛으로 변했다. 데이빗은 짐승처럼 신음을 뱉으며 울부짖었고, 미셸은 미셸대로 온 힘을 다해 납치범을 제압했다.
“으……·우……웁!!”
살려줘. 그만! 데이빗은 절박하게 신음했다. 말이 터져 나오지 못했다.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뚝뚝 흘리는 땀이 데이빗의 뺨에 떨어졌다. 그늘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미셸의 입매가 굳게 다물려 있는 것과 그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가라앉아 있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사냥꾼은 침착하게 사냥감의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빗은 전율에 가까운 공포를 느꼈다.
으득, 데이빗은 자신의 뼈가 부러지는 환청을 들었다.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바위처럼 무거워지며 온몸이 축 늘어졌다. 종이가 타들어가듯 의식의 가장자리가 까맣게 그을려가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 순간 데이빗은 이대로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찰랑,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끼익, 낡은 침대가 흔들리며 오래된 스프링이 마찰음을 냈다. 데이빗은 턱을 위로 젖힌 채 뒤로 넘어가 있던 자신의 머리가 흔들림에 미끄러져 어깨 가까이 툭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만 일어나.”
못 일어나겠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데이빗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다. 남자가 무어라 욕을 했지만, 납치범은 뼈를 마디마디 바수는 것 같은 둔중한 아픔에 짓눌린 채 몽롱한 상태로 허우적댔다. 그대로 올려붙여진 따귀 한 대에 데이빗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날카로운 충격이 귀와 뺨에 와 닿았다가 그대로 불붙는 아픔이 되어 전신을 덮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찢긴 입안의 점막이 타는 듯하다. 역한 피비린내가 의식을 두들겨 깨웠다. 데이빗은 눈을 떴다. 미셸이 데이빗의 몸 위에 올라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데이빗은 자신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 정신없이 손을 끌어오다 자신의 팔이 무언가에 걸린 듯 꿈쩍도 않는 걸 발견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가 용접해 만든 가죽 구속구는 미셸이 아닌 데이빗의 양 팔목과 발목에 채워져 있었고, 구속구에 달린 고리엔 사슬이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어 사지를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데이빗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찡그리는 것만으로도 부어오른 얼굴과 목 근육 전체가 비명을 질러댔다. 고통이 너무 심했다. 온몸이 깨진 채 날카로운 조각들이 여기저기서 연한 살점을 찔러대는 것 같았다. 몸을 구부리고 끙끙거리는 걸 미셸이 데이빗의 뺨을 쥐고 잡아당겨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목까지 흘러내려 말라붙은 코피가 미셸의 손길에 부스스 부서졌다. 발갛게 부어오른 목이 비틀리자 눈앞이 번쩍였다. 격통에 데이빗은 온몸을 떨었다. 납치범의 머리칼은 금세 진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까 찾아왔던 남자는 누구야? 당신이랑 그 짓거릴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던데. 고든, 해럴드, 오노 중 누구 쪽 사람이야?”
“?”
데이빗에겐 모두 낯선 이름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는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 데이빗은 미셸이 머피와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단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아니, 자신이 내지른 신음과 비명을 못 듣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몰라.”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차갑게 굳는 미셸의 얼굴에 데이빗의 온몸에도 긴장이 달렸다.
미셸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근육량이 많아서인지 호리호리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누르는 무게가 상당했다. 멍든 배와 혹사당한 등허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데이빗은 미셸에게 제발 비켜달라고 호소하고 싶은 맘이 절실했다. 공포로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이대로 까무룩 잠들고 싶지만 미셸이 그리 편하게 의식을 잃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것 같았다.
“날 납치한 이유가 뭐지.”
“…….”
“뭐 물어볼 필요도 없이 돈 때문이겠지. 당신이 주도했나, 아니면 누군가 시켜서 한 건가.”
“…….”
“날 어떻게 할 속셈이야. 왜 아무 말도 않고 내버려두는 거지?”
데이빗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첫 번째 물음보단 두 번째 물음 때, 두 번째보단 세 번째 물음 때 미셸의 표정이 더욱 날카롭고 어두워졌다. 청년의 몸에 눌린 채 데이빗은 청년의 분노가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기색을 셔츠 한 장 너머로 느꼈다.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미셸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 이상한 짓은 왜 한 거야.”
데이빗은 말문이 막혔다.
미셸의 허리를 타고 올라 억지로 그의 성기를 품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설명하긴 어렵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감촉에 입술을 핥고 침을 삼켰다.
당신이 좋아서. 가까이서 당신의 피부를 만져보고 싶어서. 당신이 나와 같이 살아 있는 사람이란 걸 알고 싶어서. 당신을 사랑해서. 너무 원해서. 한 번이라도 당신과 몸을 섞고 싶어서. 내 혀는 굳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런 식으로나마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모든 답이 역겹고 우스꽝스러웠다. 데이빗은 침대에 박제당한 나비처럼 붙잡히고 나서야 미몽에서 깨어났다. 비로소 자신이 아닌, 미셸의 처지에서 상황이 보였다.
자신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납치해 구금했다. 비틀린 욕망이었고 인정받을 수 없는 욕구였다. 그리고 미셸은 데이빗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이해해줄 만큼 헐렁한 남자가 결코 아니었다. 데이빗은 미셸이 만만찮은 남자란 걸 몸으로 깨닫는 중이다. 기절하기 전, 미셸에게 주먹질을 당하며 데이빗은 자신의 코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얼굴 가운데 어느 한 군데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상대가 치명상을 입은 걸 알면 어느 정도 물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손등이 터져나가든 말든 계속해 주먹을 휘둘렀었다. 무섭다. 데이빗은 자신이 납치한 게 모델처럼 매끈해 보이는 겉모습 속에 광기를 숨긴 맹수란 걸 깨달았다.
자신을 다짜고짜 납치한 사람의 입에서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납치했단 말이 나온다면 저 잔인한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상상하기 끔찍했다. 하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자신을 청부 살인업자 정도로 오해하게끔 놔둔다면 남자가 데이빗을 정말 죽일 것 같았다. 납치범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두려움에 혀가 오래 말린 청어처럼 딱딱해져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미셸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
“당신을 고용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라고 했어?”
“…….”
“그들이 언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아까 그 남자는 괜찮은 조건을 찾아오겠다고 하던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미셸의 물음은 데이빗이 대답하기도 전에 너무 빨리 휙휙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 버리곤 했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고집쟁이 납치범을 미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신기한 것을 보듯 바라보았다. 그의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숨이 새어나오는 모습에 데이빗은 잠시 넋을 놓았다. 미셸이 입술을 비틀고 미소를 짓는 게 의아했다. 남자는 전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데이빗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들썩이며 남자를 떨어내려 노력했다.
미셸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내뱉었다.
“당신,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있군.”
“……아, 아ㄴ……!!!”
데이빗은 아니라는 대답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미셸이 데이빗의 코에 손을 가져왔다. 남자는 푸르게 멍이 들기 시작한 부러진 콧날을 쥐었다. “!” 부러진 뼈가 뒤틀리는 감각에 납치범의 눈이 뒤집혔다.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 당신 코뼈를 L자 모양으로 꺾어놓기 전에.”
“……ㅏ……아!!”
안 돼, 안 돼! 데이빗은 비명을 질렀다. 팔이 묶여 있단 걸 잊고 미친 듯이 손목을 흔들었다. 안 돼. 용서해줘. 안 돼! 말 대신 꺽꺽거리는 기괴한 비명만 새어나왔다. 눈물이 흘러내려 말라붙어 있던 피와 섞였다.
미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납치범의 온몸이 진땀으로 질척이는 모습을 고스란히 구경했다.
“코뼈는 빨리 붙어. 수술하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부서뜨려볼까? 평생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워지게.”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부러진 뼈가 어긋나 움직일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데이빗은 남자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서 떼어낼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1밀리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휘젓는 듯한 충격이 뒤따랐다. 크게 버둥거리지도 못한 채 데이빗은 박제된 짐승처럼 바들거렸다.
미셸은 자신 아래서 펄떡거리며 경련하는 몸에 흥분해 자신의 근육이 열을 뿜는 걸 느꼈다. 그는 백 퍼센트 사디스트는 아니었으나, 보통 사람들을 능가하는 비율의 가학성을 갖고 있었다. 적을 짓누르는 희열과 사냥감을 포획해 마지막 숨을 끊는 기쁨을 즐길 줄 알았다.
다짜고짜 자유를 빼앗고, 조부의 명이 얼마 남지 않은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묶어놓은 납치범의 기세를 꺾는 데 약간의 폭력을 사용하는 일이 나쁠 리 없었다. 미셸은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았다. 은행털이범을 쓰러뜨린 사설 경호원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작자들이 제정신이 아닌 거였다. 자신은 납치범에게서 열쇠를 받아내 한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했다.
그는 이곳에 박혀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납치범이 가져다준 TV 속 뉴스에서 그는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먼 친척들이 자신의 조부가 재산을 사회에 환원토록 바람을 넣고 있단 걸 알게 되었다.
‘그 망할 새끼들이 중환자실에서 인셉션이라도 한 모양이지.’
자신이 돌아가 엉망이 된 조부의 머리통을 제대로 돌려놔야 하는데, 훈련을 제대로 받았는지 납치범은 어떤 말에도 꿈쩍도 않고 시간을 벌려 했다. 묵언 서약을 한 수행자처럼 구는 데 미셸은 머리가 확 도는 걸 느꼈다.
납치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프로 같기도 하고 아마추어 같기도 했다.
얼토당토않은 비교지만, 남자는 미셸이 치기에 육군에 자원입대 했던 시절, 예루살렘 외곽에서 스쳐 지났던 모사드 요원들과 닮았다. 납치범은 그들처럼 침착하고 과묵했으며, 고양이처럼 고요하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미셸은 평정을 잃는 쪽이 진다는 걸 알았기에 어떻게든 태평하게 보이려 노력했으나 사내의 일렁이는 푸른 눈과 고요하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을 대할 때면 절로 소름이 끼치곤 했다. 사내의 푸른 눈에선 코란을 쥐었단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핍박당한 이들과 닮은 결핍과 체념, 끈적끈적한 욕망과 광기가 묻어났다.
그 욕망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납치범이 단순히 돈 때문에 자신을 납치한 게 아니라면 사태는 심각했다. 그는 미셸을 돌려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영영 곁에 둔 채 끝내는 죽일지도 모른단 예감은 미셸을 바짝 긴장하게 했다.
하지만 납치범은 또한 아마추어처럼 전혀 엉뚱한 짓도 했다. 그가 자신의 몸에 올라타 서툴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강간했을 때의 일은 아직도 저의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가 자신을 짝사랑한 스토커이고, 자신을 미행하다 납치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그 추측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납치범이 다른 공범과의 실시간 정사를 생중계하면서 깨졌다. 미셸은 사내가 혐오스러워졌다. 자신이 납치한 인질에게마저 손을 댄 걸레 같은 호모 새끼에게 강간당한 걸 깨닫자 참을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미셸은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 남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 이 상황을 빨리 종료하고 싶었다.
사내는 부러진 코뼈로 고문하는데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납치범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부분은 코 말고도 많았다. 미셸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데이빗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보랏빛으로 변색한 검지를 쥐자 납치범이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눈과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공포에 절어 억눌린 소리만을 뱉는다. 사내를 미셸은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제대로 말해. 누가 시켰는지.”
“…….”
침묵. 고집 세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미셸은 미간을 좁히고 기다렸지만, 납치범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개새끼.”
미셸은 사내의 검지를 손등을 향해 꺾었다.
“!”
비명이 터졌다. 납치범의 입에서 드디어 소리라고 할 만한 걸 얻어냈다. 미셸은 중지로 손을 옮겼다. 진땀으로 진득거리는 납치범의 다른 손이 허겁지겁 미셸의 손에 엉겨 붙으며 그를 말렸다. 눈물범벅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늘 무표정했던 납치범의 얼굴에 최초로 생생한 표정이 나타났다.
그건 고통에 익숙지 않은 얼굴이었다.
미셸은 자신이 잘못 판단했나 순간 당혹했다. 남자는 범죄라곤 모르는, 폭력에 무방비한 일반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미셸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닐 거라고 단정 지었다. 남자는 단독범이 아니었다. 납치범의 뒤엔 누군가 있었다. 납치범은 미셸에게 아무렇지 않게 권총을 겨눴다. 그런 이가 일반인일 리 없었다. 프로면서 아마추어처럼 구는 게 가증스럽다. 자꾸 시간을 끄는 능숙한 남자 때문에 짜증이 들끓었다.
“그러니까 말을 하라니까!”
미셸은 납치범의 목을 조르다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자 볼을 쥐고 사내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주먹을 한계까지 들이밀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고 말캉거리는 혀를 힘주어 쥐었다. 뜨겁고 습한 혀가 도망치기 위해 세차게 꿈틀거리는 걸 확 잡아당겼다.
“야, 이 개새끼야. 말을 해!! 죽고 싶어?!! 계속 병신같이 굴어봐. 혀를 확 뽑아버릴 테니까!!”
미셸은 전쟁터라기보다 수라 지옥에 가까웠던 예루살렘의 기지에서 필요한 만큼의 상스러움과 폭력성을 숨겼다 드러냈다 하는 법을 익혔다. 정신을 못 차리게 겁을 줘야 했다. 칼이라도 있었으면……. 미셸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위를 돌아봤다. 무기로 쓸 만한 것은 없었으나 미셸의 행동은 그 자체로 데이빗을 겁먹게 했다. 부러진 손가락을 포함한 양손이 침대의 머리 부분을 세차게 두들겼다. 납치범은 무도병 환자처럼 떨고 있었다.
“말해. 어서.”
미셸은 천천히 부러진 손가락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납치범을 한 번 더 절벽 쪽으로 밀었다.
“우-! 으욱-!!”
납치범이 뒤늦게 말을 뱉으려 애쓰며 발버둥쳤다. 다 끝났군. 미셸은 시체처럼 창백해진 남자가 온몸을 벌벌 떠는 모습을 보며 입안에서 손을 빼낼 때가 되었단 걸 알았다. 이제 납치범은 술술 모든 정보를 말해줄 것이다. 미셸은 자신을 휘둘렀던 남자와 자신의 관계가 완벽히 전복되는 데 도취해 자신이 남자를 지나치게 몰아가고 있음을 몰랐다.
“?” 단단히 긴장되어 있던 혀가 어느 순간 힘없이 늘어졌다. 납치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이 미셸의 손을 적셨다. 미셸은 남자의 푸른 눈이 유달리 까매 보이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동공이 열린 것이다.
“젠장!”
남자를 깔고 앉은 허벅지 쪽이 축축해졌다. 미셸은 후다닥 남자에게서 나가떨어졌다. 남자를 발로 밀어뜨렸다. 늦었다. 시트가 남자가 흘린 소변으로 축축했다.
“염병할!”
미셸은 크게 욕을 뱉었다. 그는 실패한 심문관이었다. 납치범을 실컷 고문해놓고도 남자에게서 어떤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다.
데이빗은 무릎을 세운 채 얼굴을 묻었다. 눈알이 눌리며 파랗고 빨간 점들이 눈꺼풀 안에서 반짝였다.
그는 무의식과 의식 중간에 있었다. 싱크대 아래에 주저앉은 채로 술을 마시고 있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눈높이가 낮은 걸 보면 6, 7살쯤의 일이 아닐까 싶었다. 무료함에 장난감 차를 앞으로 뒤로 움직이자 무의식 속 아버지가 조용히 하라며 고함을 질렀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참지 못하고 또 입을 열었다. ‘대디, 엄마는 어디 갔어요?’ 늘 화가 나 있던 데이빗의 아버지가 그 말에 악귀처럼 얼굴을 굳히고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버지의 몸에서 진동하던 술 냄새가 어린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엄마 어디 갔어요? 배가 고파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버지는 데이빗이 입을 다물게끔 특별한 방법을 썼다. 그가 태우고 있던 마리화나의 재가 아이의 혀에 떨어졌다. 데이빗은 몸을 뒤로 물리려고 애썼지만, 아버지는 그의 턱을 쥐고 놔주지 않았다. 뜨거운 부분이 혀에 닿았다.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은 다음의 기억은 없다. 남은 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만큼 심한 말더듬 증세였다. 그것은 그 뒤로 평생 나아지지 않았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데이빗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음모에 소변이 말라붙어 따끔거렸다. 악취는 지독했으나,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누군가 그의 턱을 쥐고 억지로 입을 벌려 자신의 혀에 뜨거운 것을 떨어뜨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상대가 어깨를 흔들었다. 데이빗은 자신이 숨을 곳 없는 민달팽이 신세란 걸 알았다. 그는 몸을 동그랗게 마는 것 외에 상대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열쇠 어디 있어?”
미셸은 사슬에 걸린 자물쇠를 가리키며 물었다. 데이빗은 반응하지 않았다. 미셸은 손이 더럽게 많이 가는 납치범을 욕하며 그의 머리를 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 그리 아프게 한 것도 아닌데 납치범이 소스라치게 기겁했다.
“열쇠. 말해.”
납치범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복도도 아닌, 창문 너머다.
“설마 자동차 안에 있단 소린 아니지?”
미셸이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서자 두려움이 담긴 납치범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따라왔다. 그는 얼굴을 수그려 부러진 코를 숨긴 채 눈만 내밀어 미셸을 쳐다봤다. 젖은 바지와 속옷에서 냄새가 날 텐데 용케도 저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싶었다.
자동차에서 열쇠를 갖고 오려면 데이빗을 풀어줘야 했다. 그러나 납치범이 순순히 열쇠를 갖고 돌아올 리 없다.
“장난해?”
미셸의 낮은 목소리에 납치범 사내가 대번에 긴장해 몸을 물렸다. 서슬에 데이빗이 두른 벨트의 딱딱한 부분이 매트리스에 부딪혀 소릴 냈다. 미셸은 벨트의 쇠 이음새 부분과 가죽이 얼마든지 무기가 될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렸다.
미셸은 데이빗의 어깨를 발로 밀어 그를 넘어뜨렸다. 배와 허벅지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종료됐다. 납치범이 다시 떨기 시작했다. 그가 침대에 묶여 잘 움직이지 않는 왼손으로 자신의 부러진 코를 가리고 있는 동안 미셸은 사내의 벨트를 풀었다. 하반신에 손을 대자 납치범 사내가 과민하게 움찔거렸다. 미셸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납치범 사내는 왜 자신에게 안겼던 걸까.
“당신, 감염자야?”
“?”
“에이즈.”
“……아냐……!”
남자가 비명을 지르듯이 크게 외쳤다. 남자의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미셸은 남자가 만들어낸 예기치 않은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가볍게 사내의 뺨을 때렸다. 그것만으로도 사내는 충분히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내가 말을 하라고 할 때 말하고, 입을 다물라고 할 때 다무는 게 좋아. 알겠지?”
데이빗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신은 나를 납치하라고 시킨 게 누군지, 당신이 누군지 다 말해야 해.”
납치범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윤곽이 흐린 입술이 희게 질린다. 미셸은 남자의 입술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입술을 벌리고 자신의 귀에 대고 숨을 할딱여댔던 촉감이 떠올라 미셸은 역한 기분을 느꼈다. 본격적으로 심문을 시작하기 전에 데이빗이 다급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 잠시만…… 아, 아파…….”
“당신이 잘만 한다면 더는 아프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그 뜻이 아니었다.
“배, 배, 배가 아파.”
미셸은 상황에 맞지 않는 사내의 배앓이에 실소할 뻔했다. 상한 음식을 먹은 게 아니라면 도망칠 기회를 엿보기 위해 쇼를 하는 게 분명했다. 고개를 젓자 납치범 사내가 퍼렇게 질린 안색으로 허리를 비틀며 하소연했다.
“제, 제발.”
미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소변을 지린 남자가 이 이상 터무니없는 짓을 하게끔 둘 수는 없었다. 미셸은 데이빗의 구속구를 손목만 제외한 채 모두 풀어주고 바지의 버클까지 풀어주었지만, 문은 잠그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간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한참을 서 있었다. 미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변태는 아니었지만 더러운 꼴을 보기 싫어 납치범에게서 시선을 뗄 만큼 바보도 아니었다.
“……무, 문 닫아줘…….”
사내가 억눌린 목소리로 호소했다. 미셸은 코웃음으로 응대했다.
“빨리 볼일 보고 나와. 똥 누는 사람을 상대로 심문하긴 싫으니까.”
미셸의 처분을 기다리던 사내는 결국 포기한 채 비척거리며 뒤돌아섰다. 손목이 묶이고 손가락 하나가 부러졌기에, 남자는 한심할 정도로 느리게 옷을 벗었다. 헐렁한 바지는 데이빗이 손을 뻗기 전에 주르륵 미끄러져 예고도 없이 엉덩이가 드러났다. 당황한 납치범 사내의 귀와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사내는 어설프게 셔츠를 끌어내려 둔부를 가렸다. 미셸은 우스꽝스럽고 기가 막힌 눈앞의 상황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건 다음 일에 비하면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미셸은 납치범 사내가 멍한 얼굴로 변기에 앉는 걸 바라보다 그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미셸은 자신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하는 걸 막지 못했다. 넓게 벌어진 허벅지와 셔츠로 가려진 사타구니가 보였다.
쾅! 미셸은 사슬 때문에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힘껏 문을 닫았다.
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미셸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목이 묶인 남자가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하면 자신이 들어가 밑까지 닦아줘야 하나. 이가 절로 갈렸다. 페르시안 고양이도 아닌데 설마 저대로 더러운 엉덩이를 침대에 붙이진 않을 거라 믿고 싶었다.
쏴-. 물소리가 났다. ‘그래, 열심히 씻어.’ 미셸은 납치범을 응원했다. 죄수들의 땀내와 오물 냄새로 코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던 비밀 감옥에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고 팠다. 젖은 시트는 구석에 처박혀 저 멀리 있었다. 남자만 깨끗해지면 방 안은 훨씬 쾌적해질 것이다.
물소리가 지나치게 길게 들렸다. 미셸은 납치범이 물을 틀어놓은 채 도망쳤다고 여기고 문을 열었다.
데이빗은 양손으로 불안하게 샤워기를 들고 있었다. 두 다리 사이는 흠뻑 젖었고, 셔츠 역시 마른 부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세면대에 바지를 넣고 빨고 있던 남자가 미셸의 등장에 등줄기를 굳혔다. 미셸은 그를 재촉했다.
“나와.”
“……조……좀 더…….”
납치범이 또 시간을 끄는 게 불만스러워 미셸은 드라마틱하게 눈썹을 휘었다. 납치범은 이를 악문 채 하소연했다.
“더, 더, 덜 씻었어. 오, 오 분만.”
“어딜 덜 씻었다는 거야?”
남자는 이미 충분히 씻은 걸로 보였다. 거짓말 말란 날카로운 힐난에 남자가 푸른 눈을 깜빡였다.
“나와.”
데이빗은 미셸의 말을 따랐다. 그는 샤워기를 잠그고 세면대에 넣어둔 바지를 꺼내 물기를 짰다. 미셸은 잠자코 팔짱을 낀 채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데이빗은 미셸에게서 등을 돌리고 젖은 바지를 걸쳤다. 미셸은 기가 차 웃었다.
“그냥 벗어. 시트를 다 버려놓으려고?”
데이빗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는 미셸의 말에 따라 바지를 벗었다.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 보면 미셸이 그를 납치해 강간한 줄 알겠다.
데이빗은 물을 뚝뚝 흘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미셸은 납치범 사내가 구석에 웅크린 채 얼굴을 묻고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턱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올라와.”
쉬이 움직이는 않는 상대 때문에 미셸은 사슬을 당겨야 했다. 주박에 걸린 것처럼 꿈쩍 않던 사내가 주춤주춤 침대 위에 올라왔다.
“누워.”
“……나, 난…….”
“그래, 우린 대화가 필요하지? 당신은 자동차로 가서 열쇠를 갖고 와야 해. 하지만 사슬 길이가 충분치 않군. 당신을 풀어줄 수는 없으니 난 당신이 쉽게 도망칠 수 없게끔 어느 정도 당신을 망가뜨려서 내보내야 할 거야. 그 정도는 당신이 결정해.”
“나…… 다, 당신을 푸, 풀어줘야 한다고 했어.”
“엉뚱한 소리 말고, 묻는 말에 정확히 대답해.”
심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소름 끼치는 깨달음에 데이빗은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누구한테 날 풀어준다는 말을 한 거야? 아까 그 남자는 이름이 뭐야.”
“스, 스티븐.”
“더듬지 좀 말고. 어떻게 안 돼?”
“…….”
“스티븐, 단순히 스티븐이 끝이 아니지? 성은 뭔데.”
데이빗은 망설였다. 자신이야 끝이 정해진 사람이라고 하지만 스티븐은 살날이 많이 남은 친구였다. 그러나 미셸은 데이빗보다 한 수 위였다. 납치범이 머리를 굴릴 틈을 주지 않고 그의 콧날을 두들겼다. 데이빗은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피.”
“스티븐 머피. 그 사람이랑 같이 날 납치했나?”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여 그와 자신이 공범이란 사실을 인정했다.
“어째서?”
같은 질문이 반복되었다. 데이빗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까 미셸이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대답이 어렵나? 질문을 선택형으로 바꿀까. 1번 돈 때문에, 2번 당신이 발정 난 호모 새끼라 나와 한 번 해보고 싶어서.”
데이빗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진실을 간파당했다. 데이빗은 미셸을 좋아해서 납치했고, 미셸은 발정 난 호모에게 납치당했다. 입장만 달랐지 의미는 같았다.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좀 전까지 미셸에게 자신이 왜 그를 납치했는지 고백하려던 용기가 쑥 숨어들었다. 체기가 들린 것처럼 더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와는 어떤 관계인데. 그는 당신이 나한테 손댄 걸 알고 있어? 날 넘기면 얼마나 줄 거라고 했나.”
「펜이 필요해.」
데이빗은 자신의 혀가 완전히 굳어버린 걸 느꼈다. 자신의 왼손 가까이 있는 미셸의 허벅지에 헬렌 켈러처럼 글을 썼다. 미셸은 설리번 선생이 아니었다. 그는 납치범 사내가 자신을 만지는 데 질색하며 손을 털어냈다.
“말로 해.”
“……혀, 혀……가…….”
지독히도 답답했다. 데이빗은 절망감에 눈을 감아버렸다. 미셸이 데이빗의 바로 옆을 걷어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이빗은 눈을 감은 채 푸드득 떨었다. 미셸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당장 자신을 쏴 죽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씩씩거리던 미셸은 결국 결론을 내리고 침착해졌다. 그는 데이빗을 풀어주고 그의 사슬을 최대한 길게 늘어뜨려주었다.
“펜이랑 먹을 걸 갖고 와. 허튼짓 하면 이번엔 손목을 부러뜨려놓을 거야.”
데이빗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는 오른손과 발목이 묶인 채로 기어갔다. 뒤에선 미셸이 그를 묶은 사슬을 쥔 채 허튼짓을 하면 당장 사슬을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묶인 짐승처럼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몸을 붉혔다. 미셸을 납치할 때만 해도 그는 상황이 이렇게 웃기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총 쪽은 쳐다보지 마.”
미셸이 사슬을 왼쪽으로 당겼다. 데이빗은 풀썩 쓰러져 총이 떨어져 있는 방향에서 멀어졌다. 그건 어차피 모델건이었으나 미셸에게 말해 화를 돋울 마음은 없었다.
“냉장고를 열고 음식을 모두 꺼내. 일 분. 나이프를 숨겼다간 그걸로 당신 발가락을 자를 거야.”
데이빗은 꺼내던 우유를 떨어뜨릴 뻔했다. 발가락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시간 다 됐어. 당장 나와.”
데이빗은 우유를 들고, 빵 봉지를 입으로 문 채로 부엌 밖으로 나왔다. 사슬이 탁자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될까 봐 주의하며 기느라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현기증이 날 만큼 지쳤다.
“내려놔. 다시 가서 음식을 더 갖고 와.”
미셸이 도로 가라고 할 줄 몰랐던 데이빗은 잠시 불만 어린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당신이 굶을 거라면 말리진 않지.”
데이빗은 다시 기었다. 세 번을 더 왔다 갔다 하며 잼과 피넛 버터, 햄과 치즈, 여분의 빵, 그리고 펜을 갖고 올 수 있었다. 데이빗은 마지막 왕복 후 거의 나가떨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미셸의 발치에 들고 온 물건을 떨어뜨렸다. 코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렸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침대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거기 그대로 멈춰서 이마를 바닥에 기댔다. 택배 업체의 광고 속 편지를 배달하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개보다 못했다. 적어도 그 개는 사지 멀쩡하게 뛰어다니기나 했다. 미셸은 지쳐 나가떨어진 남자의 셔츠 단추를 풀어 그가 혹시 옷의 솔기 안에 무기를 숨겼나 살폈다. 데이빗은 미셸이 자신의 옷을 어깨 아래로 끌어내리는데도 잠자코 숨만 헐떡였다.
“항문 안.”
“?”
데이빗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뭘 쑤셔 넣은 것 아냐? 열어봐.”
미셸은 직장 안에 물건을 숨기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았다. 납치범 사내는 직장을 쓰는 데 거부감도 없을 테니 무기를 숨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손가락 콘돔도 없는데 직접 안을 검사하고 싶진 않았다.
“직접 해. 내 손 더럽히기 싫어.”
“…….”
데이빗은 석상처럼 굳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셸은 혀를 차며 그에게 다가갔다. 데이빗이 가져온 펜으로 바닥에 글자를 썼다.
「없어. 아무것도. 정말이야.」
“내가 직접 해줬으면 해서 버티는 거야?”
미셸은 글씨를 밟고 섰다. 데이빗의 푸른 눈동자가 겁에 질려 검게 그늘지는 모습에 미셸은 바람이 세게 불던 밤, 그를 뒤에서 덮친 채 헐떡이던 사내의 불쾌한 숨결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데이빗은 직장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부어오른 입구를 벌리고 안을 열었다. 관장제가 없어 안까지 미처 닦아내지 못한 터에 말라붙은 정액 찌꺼기가 흘러나왔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미셸은 얼굴을 찡그렸다.
고개를 돌리고 침대 쪽으로 돌아가던 미셸은 데이빗의 얼굴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발견했다. 뚝뚝, 눈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얼룩을 남겼다. 납치범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