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탑 2
‘남자’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차에 전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과 차가운 바람이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 그는 자신이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 안에는 빵과 햄 등의 샌드위치 재료들과 채소와 가공식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가 2주에 한 번, 업체에서 떼어온 채색 작업을 완료한 뒤 봉급을 받을 때면 늘 사곤 하는 물건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이 물건들을 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정신으로 이것들을 사 담은 걸까. 그는 씁쓸한 마음으로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불현듯 그 안에 든 식품들이 아무 가치 없는 듯 느껴졌다. 그는 마치 그것들을 다 버리기라도 할 양 선로 가까이 다가섰다.
크흠, 기침 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한 노숙자가 뚫어져라 자신이 들고 있는 봉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고파 보이는 사람이다. 남자는 고민하다 주머니 안에서 수첩을 꺼냈다.
「드실래요?」
내민 봉투를 보고 노숙자 사내가 기쁘게 웃었다.
곧이어 다른 노숙자들이 몰려들어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햄과 치즈, 빵과 마요네즈 소스만으로 제법 그럴듯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이도 있었다. 햄은 날것이니 주의하란 말을 하려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주변을 어정거리다 몰래 사라지려는데 처음 그를 쳐다봤던 노숙자 사내가 남자에게 손짓했다. 남의 음식을 메뚜기처럼 먹어치우다 정신이 들었는지 사내는 멋쩍게 웃으며 우유를 내밀었다.
“형씨, 원래 당신 건데 실례했수다. 이거라도 드쇼.”
남자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습관적으로 사긴 했지만, 우유는 그에겐 별로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빵 껍질만 남기고 다 먹어치운 노숙자들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어슬렁거리며 사라져 가는 이들의 얼굴이 의외로 밝아서 남자는 얼토당토않게도 그들이 부러워졌다.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고맙수. 덕분에 한 끼 잘 먹었소. 내 보답하지. 이따가 무료 배식이 오면 내가 당신을 맨 앞줄에 서게 해줄 테니 기다려요.”
남자는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왜요. 거지들하고는 같이 먹기 싫소?”
노숙자 사내는 비아냥거리는 기색 없이 농을 걸듯 물었다. 남자는 쭈뼛거리며 다시 수첩을 품에서 꺼냈다. 노숙자 사내는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쓰지 마요. 어차피 못 읽으니까. 귀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을 전혀 못하우?”
글자를 읽지 못한다면 필담은 소용없었다. 남자는 입을 달싹거리고 닫길 반복하다 끝내 목소리를 냈다.
“……거……거지……라, 라고는.”
“아, 말을 심하게 더듬는구나. 그렇지. 난 거지라오.”
노숙자 사내가 껄껄 웃었다. 남자는 당혹스러워 뺨을 문질렀다.
“저, 저녁은…… 저……저…….”
의사가 권한 대로 저염식 식사를 해야 해서 그만 집으로 가겠다는 거절의 말이 입안에서 맴돌아 나와주질 않았다. ‘저염식’이란 단어는 지랄맞게 발음이 어려웠다. 남자는 굳어버린 혀 때문에 끙끙거렸다.
“아파서 못 먹는 거요?”
노숙자 사내는 어찌 된 영문인지 남자의 형편없는 말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아픈 거요?”
“난…….”
노숙자에게 설명하려면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남자는 됐다며 손을 저었다. 남자가 살고 있는 도시는 낯선 타인에게 속 편히 신세타령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친절한 사람도 많이 만나보았지만, 그의 물렁한 내면을 한눈에 알아보는 악마 같은 이들에게 몇 번 되게 당해본 경험도 있었다.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노숙자 사내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그가 자신 옆에 앉기를 손짓으로 청했다. 노숙자 사내의 눈에 떠오른 따스한 동정의 빛이 남자를 주춤거리게 했다. 남자는 정말로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의 더듬거리는 말을 참고 들어줄 사람이. 남자는 노숙자 사내가 앉은 간이 의자 옆에 앉았다.
남자는 자신이 금방 병원에서 나왔단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화가 잘 안 되는 증상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최근에는 상반신을 수그리면 음식물을 금방이라도 게워낼 것 같은 느낌이 생겼다. 기껏해야 평범한 역류성 식도염 정도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의사는 그가 꽤 큰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로……로봇…… 수, 수술을 하면…… 가, 가망성이 이, 있다고는 하지만…….”
의사의 말은 복잡했다. 앞뒤 어려운 말은 모두 잘라먹고 ‘부위가 좋지 않지만, 다행히 최근의 기술력을 이용하면 생존율이 꽤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에 와서야 좀 알아먹을 수 있었다. 남자는 다급히 비용을 물었다. 병도 병이었지만 돈도 중요한 문제였다. 의사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을 말했다. 그는 염치나 체면은 잠시 젖혀둔 채 그가 가진 비용만큼만 치료받을 수 있겠느냐 물었다. 돌아온 것은 의사의 난처한 얼굴이었다.
“조……종양을…… 바, 반만…… 자, 자, 자를 수 어, 없는 거니까요.”
“거 참 안됐소.”
노숙자 사내는 덤덤히 말했다. 그의 눈빛에 어린 걱정의 빛이 아니었다면 남자는 노숙자 사내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데 억지로 얘길 듣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숙자 사내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얘길 들어주었다. 남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만난 드물게 좋은 사람 옆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쩌다 보니 자신이 살아온 얘기까지 하게 됐다. 꽤 긴 시간이 흘렀는지 이른 퇴근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감정이 점점 고조된 탓에 남자는 그 많은 사람 중 노숙자 사내 외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단 사실이 꽤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는 쏟아질 것 같은 울음을 애써 참았다.
“시……신은 부, 불공평해요.”
“그 양반이야 원래 그렇지요.”
“나, 난…… 부, 불행했어요……. 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갑자기 행복해지니까 이, 이런 일이 생겼어요.”
남자는, 데이빗은, 매우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도, 애완동물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아주 불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박봉이긴 했지만, 직업이 있었다. 야간에는 택시 운전을 하고 주간에는 애니메이션 회사의 허드렛일과 잡지사에서 가끔 오는 일러스트 일로 근근이 먹고살았다.
그는 자신만의 집도 갖고 있었다. 곧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5층 연립주택의 꼭대기 층에서 그는 비가 오기 전 욕실에 누워 옥상에 놓인 풍향계가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와 바람과 벽 사이를 지나가며 나는 음산한 웅웅거림을 듣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늘 품고 살았다. 많은 이들이 삼십 대 초반에 접는 꿈을 그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포기했었다. 대학이나 좋은 직장, 정원이 딸린 집과 가족은 그와는 먼 얘기였다. 그는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날 먹은 햄버거 패티가 잘 구워진 것이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일이 되는 이였다. 불행과 행복의 중간 선상에서 그의 인생은 포장을 풀어놓고 잊어버린 샌드위치 빵처럼 메말랐다.
하지만 그날, 모든 게 달라졌다.
“사랑에 빠졌구려. 살고 싶어졌는데, 신이 당신한테 시련을 주셨구랴.”
데이빗은 축 늘어뜨린 머리를 바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전 새벽에 데이빗은 한 남자를 만났다.
데이빗은 야간에 택시를 몰다가 치안이 나쁜 거리에서 검은 셰비 벤 한 대에서 남자 한 명이 굴러 떨어지는 걸 목격했다. 털썩, 의식이 없는 남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푸줏간에서 내던지는 고깃덩어리와 같은 소리를 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납치해 고문하고 죽인 뒤 시신을 버리는 이탈리아 마피아가 생각나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쓰러진 남자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쓰러진 남자를 뒤집어 보니 안색이나 호흡이 나쁘지 않았다. 데이빗은 남자를 병원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뒷좌석에 그를 앉혔다. 병원으로 달리는 와중 데이빗은 호기심에 계속해 남자를 힐끔거렸다. 값비싸 보이는 셔츠의 목깃엔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 있고, 손목에는 장시간 묶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울혈이 엿보였다. ‘납치’, ‘감금’ 같은 살벌한 단어들이 데이빗의 머릿속에서 좌르르 펼쳐졌다.
사내의 잘생긴 입술은 옆이 터져 피가 맺혀 있었다. 그 입술을 바라보다 데이빗은 잠시 적신호를 놓치고 그대로 횡단보도를 통과하고 말았다. 새벽녘 인적이 드물었기에 망정이지 사람 하나를 죽일 뻔했단 생각에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과연 사고를 나게 할 만큼 매혹적인 입술이긴 했다. 도톰한 윤곽이 여자보다 더 달콤해 보였다. 버스 정류장에 종종 보이는 립스틱 광고 속 여자들이나 갖고 있을 도톰한 입술이 사내에게 달려 있는 게 신기했다. 혹시 남자는 연예인이나 모델일까. 데이빗은 세계 최대의 대도시에 살면서도 그 흔한 연예인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남자가 깨어난다면 혹시 연예인이 아닌지 글로 써서 물어볼 맘에 수첩이 들어 있는 자동차 글러브 박스를 열었다. 딸칵, 입구가 열리는 소리에 기절해 있던 남자가 퍼뜩 깨어났다.
“……괘.”
괜찮으냐는 물음은 목구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신을 노려보는 사나운 녹색 눈에 데이빗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는데, 겁을 집어먹으면 상태가 더 나빠졌다. 빳빳하게 혀가 굳는 느낌이 왔으니 이제 말은 다 한 거였다. 그는 황급히 안을 뒤졌다. “!” 데이빗의 행동을 오해한 사내가 황급히 상반신을 수그렸다. 데이빗은 더 당황했다. 펜을 잡은 손에 진땀이 맺혔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어요. 병원으로 가는 중입니다.」
수첩에 글씨를 써서 기사석과 뒷좌석을 구분하는 플라스틱 칸막이에 붙였다. 몸을 피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바로 했다.
“당신, 정말로 단순한 택시 기삽니까?”
데이빗은 그렇다며 수신호로 오케이 표시를 했다. 데이빗은 자신이 어떻게 남자를 발견했는지, 길거리에 그를 버리고 간 사람들을 멀리서 봤다든지 하는 얘길 쓰려고 수첩을 한 장 넘겼다.
남자는 무엇도 묻지 않았다.
“휴대폰 좀 쓸 수 있을까요.”
부드러운 목소리엔 거절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데이빗은 자신의 고물 전화기를 남자에게 건넸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병원이요.」
“방향 돌려줘요.”
데이빗은 사내가 지시하는 대로 방향을 바꿨다. 그 뒤로 대화는 끊어졌다. 남자가 데이빗의 전화기로 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납치됐었어. 웃지 마, 진짜니까. 누군지 짐작은 가. 가만 놔둘 수는 없지.” 낮고 침착한 목소리에 담긴 냉랭함에 소름이 돋았다. 데이빗은 계속해 백미러로 남자를 훔쳐보았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잘생긴 남자의 깨끗한 손목에 남은 결박의 흔적을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숨이 떨렸다.
납치. 저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당한 걸까.
“…….”
데이빗은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가 손목이 묶인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납치를 당했다가 풀려난 피해자 남자에게 성적인 상상을 하는 자신이 당혹스러웠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자신이 갑자기 광증이 도질 일은 없으니, 남자가 문제였다. 그의 이목구비가 워낙 화사하고 색스럽기 때문이라 자위하며 데이빗은 자신의 덥수룩한 수염 덕에 자신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남자가 눈치채지 못했길 바랐다.
남자가 얘기한 곳까지 어떤 정신으로 운전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가 플라스틱 보호 창을 두들기며 이상하게 여기는 눈으로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데이빗은 허겁지겁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 서툰 기색에 남자가 웃었다. 피식, 대리석처럼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던 남자가 작게 웃자 거기만 세상이 밝아졌다. 데이빗은 본능적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인 사내가 매우 변덕스러운 존재일 거라 느꼈다. 자신이 그렸던 동화 삽화 속 공주님처럼.
“내 이름은 미셸 클뤼젤입니다.”
사내는 택시비치고는 꽤 괜찮은 액수를 주고 사라졌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원래 나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아요. 내 이름을 알려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로 생각하세요.’ 남자는 그딴 말을 입도 뻥끗 하지 않았건만 데이빗은 향수처럼 남은 사내의 체취가 그런 말을 대신하는 것 같다 여겼다.
데이빗은 그날부터 평소 자신이 돌던 구역을 벗어나 미셸을 내려준 고급 주택가 근처를 배회했다. 그곳의 주민은 설령 꼭지가 돌게 취했어도 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낼지언정 낡은 택시를 타진 않았다. 현금을 거의 못 가지고 돌아가는 날이 많아졌음에도 데이빗은 며칠에 한 번씩 꼭 그 근처를 들렀다.
데이빗이 생각하기에 인간의 역사 중 수입과 노동시간이 비례했던 시기는 에덴동산 때뿐이었다. 그는 남보다 많이 일했지만 남보다 수입이 적었다. TV 시청이나 잠을 자는 시간 외 모든 시간을 일하면 빠듯하게 먹고살 만큼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미셸과의 만남 후 이런저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다 보니 수입이 위험할 만큼 줄어들었다. 그래서 잠을 줄이고 일하는 시간을 늘렸다. 오전 늦은 시각까지 몇 시간 더 운전하고 돌아와 잠을 자면 해가 중천에 떠서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고 잠에서 깨어나도 몸이 무거웠다. 일이 고되어서인지 살도 빠졌다.
그렇지만 어딘가 이유 모르게 가슴 벅차고 행복한 감정에 그는 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고 더 깨어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차를 몰 때면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손님 하나 없는 한적한 거리에서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로 아침을 대신하며 데이빗은 자신이 태워다 준 남자를 생각했다. 그토록 잘생긴 남자가 슬럼가의 뒷골목에서 쓰러져 있었다면 무슨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비록 거창한 일은 아니지만,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게 기뻤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간다면 친구들에게 꽤 신기한 일을 겪었다며 늘어놓을 얘깃거리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뿌듯한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데이빗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지나쳐 간 자동차 안에 미셸이 앉아 있었다.
이곳은 데이빗의 동네였다. 미셸이 이곳에 나타난 게 믿기지 않았다. 데이빗은 시동을 켜고 미셸을 뒤따랐다.
3분 정도 무턱대고 따라가다 보니 가출했던 정신이 어렴풋이 돌아왔다. 뭐하려고 스토커처럼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나 싶었지만, 우연히 만난 거니 아는 척을 해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할까.
안녕, 미셸. 내가 기억나요? 그때 새벽에는 집에 잘 들어갔나요.
“아, 아……안녕…….”
‘젠장!’ 한 어절 시작도 전에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게 뻔했다.
미셸이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데이빗은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남자의 조각상 같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이토록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던가. 그림을 그리는 직업 특성상 예쁘고 아름다운 작품을 보는 건 좋아했지만, 대놓고 얼굴을 밝히진 않는데 왜 이러는지 자신도 의아했다.
미셸은 혼자가 아니었다. 미셸이 내린 반대쪽에서 한 여자가 따라 내렸다. 호리호리한 허리는 데이빗이 한쪽 팔로 둘러도 될 만큼 가냘파 보였다. 미셸은 그녀에게 다가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팔짱을 끼었다. 여자는 애교스럽게 미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가 깔깔 웃으며 떨어졌다. 데이빗은 홀린 사람처럼 그들에게 접근했다. 미셸이 여자에게 투덜거렸다.
“네 아버지한테는 질렸어. 날 꼭 이 끔찍한 동네에 딸려 보내야 속 시원하시다니?”
“네 눈이 정확하니까. 아버지는 내 말은 전혀 안 들어. 네 감만 믿거든. 어때? 아버지가 돈을 풀 만큼 괜찮은 곳으로 보여?”
“끔찍하네. 이런 동네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게.”
미셸은 칠이 벗겨지고 벽에 금이 간 영세민 아파트들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여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혈관이 비치는 투명한 피부 위에 분홍빛 입술이 꽃잎처럼 움직였다.
“차 안에서와 말이 다르네. 이 동네에 꽤 괜찮은 고서점이 있다며 좋아했잖아.”
“거기가 안 보이니까 문제지.”
미셸이 휴대폰을 꺼내 주소를 검색하곤 여기가 맞는데 이상하다며 중얼거렸다.
데이빗은 입은 남들보다 둔했지만, 시력만큼은 탁월했다. 햇빛 아래 거멓게 얼룩진 액정에 슬쩍 비친 글자를 알아보았다. 그 서점은 그가 아는 곳이었다.
“……저, 저, 저 골목…… 지, 지나면 있어요.”
이번엔 정말 심했다. 급한 맘에 첫 번째 음절을 엄청난 횟수로 더듬거리고 나서야 말을 마칠 수 있었다. 거기다 미셸과 여자는 데이빗에게 길을 묻지도 않았다. 데이빗은 당혹감에 입을 벌린 채 제자리에 섰다. 미셸의 여자친구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데이빗을 돌아보았다. 데이빗은 자신의 낡은 옷차림과 덥수룩한 수염, 헝클어진 곱슬머리가 여자에게 어떤 느낌을 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데이빗은 뒤로 물러서 도망쳐야 할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시야에서 벗어나야 할지 고민했다. 탐색하듯 데이빗을 훑어보던 미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가볍게 웃었다.
“고마워요.”
목숨을 구해줬을 땐 인사도 하지 않았던 남자가 이번엔 선선히 감사를 표시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고급주택가를 헤매는 일 외에 데이빗에겐 한 가지 더 취미가 생겼다. 그는 5층 연립주택의 꼭대기 층에서 종종 아래를 내려다보며 혹 미셸이 나타나지 않는가를 살폈다.
그가 나타나지 않으리란 걸 데이빗 자신도 잘 알았다. 낡은 거리와 미셸은 어울리지 않았다. 어지러이 교차해 있는 전선 사이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과 그들이 일하고 있는 상점이 보였다. 그건 데이빗에게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미셸은 그 후로 꼭 한 번 더 나타났다.
시의 잘못된 지하철 사업으로 몰락해버린 구시가지의 풍경 속에 나타난 반짝거리는 존재를 발견했을 때 데이빗은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걸 느꼈다.
이번에도 예전의 그 예쁜 아가씨가 미셸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서점에서 책을 샀고, 차에 타기 전에 친숙한 입맞춤을 나눴다. 친밀하고 애정 어린 모습에 데이빗은 조금 전까지 머금었던 미소를 잃어버렸다. 행복감은 온데간데없고 명치끝만 먹먹하고 답답했다.
그 밤, 데이빗은 십대 시절 이후 아주 오랜만에 몽정했다.
침대 위에서 미셸은 손목이 묶인 채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남자의 다리를 넓게 가르고 그 사이로 허리를 들이밀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비가 오려는지 거센 바람이 풍향계를 요란스레 흔들고, 옥상의 콘크리트 단면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가고 있었다. 5층의 낡은 연립주택이 비바람에 불만스레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데이빗은 샤워를 하고 속옷을 갈아입었다. 온몸의 물방울이 다 마를 때쯤 그는 자신이 이름밖에 모르는 낯선 남자에게 반하고 말았다는 끔찍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보, 보기만 해도 해, 행복해지는 사람이 이, 있더라고요.”
데이빗은 노숙자 사내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미셸 곁을 아무 목적도 없이 맴돌았던 시간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행복은 중병에 걸렸단 판정을 받게 되면서 깨졌다. 사정을 다 듣고 난 노숙자 사내가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좋은 수는 아니지만, 정 안 된다면 죄를 짓는 것도 방법이오.”
일단 감옥에 들어가면 중죄인이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교도소에서 그를 치료해줄 거란 말이었다.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가, 감옥에 드, 들어가느니 주, 죽는 게 나아요.”
데이빗은 자신의 과실로 일어난 교통사고의 합의금을 제때 내지 못해 보상금을 내기 전까지 단시간 구금당했던 적이 있다. 자신은 경범죄자들이 모이는 곳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중죄인들이 모이는 교도소에 가게 된다면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노숙자가 알겠다며 혀를 찼다.
“하긴, 형씨는 꽤 예쁘장하니까 거기 생활이 쉽진 않겠수다.”
데이빗은 노숙자 사내의 말에 멋쩍어하며 전혀 관리하지 않은 채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자신이 곱상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 들여다본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평범하다 못해 추레했다.
“예, 예쁘단 말은 그, 그 사람이 나, 나보다…….”
미셸에게 어울린다는 말을 이어 하려다 데이빗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반한 상대의 얼굴 생김새까지 타인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 사람한테 좋아한단 말은 하긴 했수?”
“……그 사람은 나, 나를 알지도 못해요.”
말하다 보니 마음이 울적해져 데이빗은 저 멀리 선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데이빗의 뇌는 택시에서 내리며 싱긋 웃던 미셸에 대한 기억을 반사적으로 의식 전면에 내놓았다. 단단한 몸에 입혀진 값비싼 양복과 그 양복을 맵시 있게 소화해내는 아름다운 몸, 조각처럼 오밀조밀하던 얼굴은 실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태양에게 사랑받은 증거로 장난스레 주근깨가 흩뿌려진 콧날 위, 가늘어진 채 미소 짓던 올리브 그린의 눈만이 선연히 떠올라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런 낭만적인 마음과 적나라한 욕망이 함께 작동한다는 게 문제다. 데이빗은 남자의 반짝이던 녹색 눈동자를 회상할 때면 항상 도톰하고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던 입술을 함께 생각했다. 남자의 손목 위 튀어나온 주상골 주변에 감겨 있던 붉은 흔적을 떠올릴 때면 입안이 바짝 말랐다. 데이빗은 남자를 욕망했다. 그러나 바람과 현실은 달랐다. 자신은 그의 손목을 잡아볼 수 없거니와, 그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댈 수조차 없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아침을 질척거리는 꿈의 여운으로 허우적댄다 한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신이 고, 공평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 내가 워낙 우, 운이 없는 건가 봐요.”
데이빗은 씁쓰레 웃었다. 노숙자 사내가 안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지 노숙자 사내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감옥 생활이 쉽진 않겠지만 잘 생각해보구려. 어찌 됐든 일단 살고 봐야 하는 거 아니겠소.”
데이빗은 맞는 말이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빗은 노숙자 사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데이빗은 충동적으로 죄를 지을 생각이 없었다.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누였으나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자신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을 테고, 미셸은 결코 그의 것이 될 수 없을 거란 사실이 그를 슬프게 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정말 원했던 걸 가져본 적 없단 깨달음에 기어이 눈물이 났다. 단 한 번이라도 행복이란 게 뭔지 절절히 느껴본 뒤 죽고 싶었다.
죽기 전 ‘사랑’이란 걸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죄를 지었다. 그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 * *
데이빗은 자신 아래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시팔, 안 내려와?! 죽여버리겠어. 이 개새끼!”
미셸이 쏘아대는 눈빛이 너무 두려워 데이빗은 남자의 눈을 가렸다. 한 손은 남자의 얼굴 위에, 다른 한 손은 낡은 침대의 헤드 보드에 얹은 채 데이빗은 힘겹게 허리를 움직였다. 미셸이 역겨워하며 고개를 돌리려 애를 썼다. 이를 악무는 가운데 치아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섬뜩했다. 감정은 선연했다. 미셸의 선명한 증오가 손바닥 아래로부터 역력히 전해져왔다. 데이빗은 눈을 감았다. 끼익, 끼익, 데이빗이 움칠움칠 어설프게 움직이고, 밑에 깔린 미셸이 허리를 비틀어댈 때마다 침대의 낡은 스프링이 처량한 비명을 질렀다. 지나친 흥분과 통증 때문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억지로 남자를 받아들인 대가는 고스란히 데이빗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않는다. 그는 미셸을, 고급 초콜릿처럼 달콤한 남자를 가졌다. 접점 없이, 그냥 사라져버릴 남자를 데이빗은 자신의 삶 속 영역으로 끌어왔다. 비록 미셸은 진창으로 끌려왔다 여길 테지만 말이다.
데이빗은 태어나 한 번만이라도 보석을 손에 쥐고 싶다는 욕망을 누르지 못했다. 죄를 짓는 건 참으로 쉬웠다. 납치한 인질을 겁간하며 인질범은 기대했던 기쁨과는 다른 잿빛 공허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