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격전(激戰).
라프시오스의 은빛 날개가 활짝 펼쳐지고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살기를 느낀 라프시오스는
본능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야말로 라프시오스는 신(神)들의 영역이라 불리는 칠계로부터 이곳 사계에 첫발
을 디딘 멸성인이었다. 비록 이 사계에는 오래 전부터 상의 멸성인들이 자신들의 분리체를 형성시켜 천상인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현신화 시켜왔었다. 즉 천상인의 의미란 바로 멸성인들의 또 다른 개념의 하위 분리체였던 것이다.
케시어스 혹은 천상 숙주인 하몰트 종족 같은 천상인이 바로 상위 멸성인이 사계에 심어놓은 씨앗과도 같은 존재들
이었다. 사실 3군단 시절 케시어스가 리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천상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나
중에 자신의 가문 반데라스 성 지하실에서 아버지와 또 다른 가족에 의해서 치러진 천상제단 의식을 거친 후 그때
서야 멸성인의 분신체라는 것을 인식했다. 또한 자신의 임무가 바로 아직 각성 단계에 들어서지 못한 창성인인 리
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케시어스는 며칠 밤을 꼬박 세우며 괴로워하였지만
자신의 운명은 오래 전 이미 칠계 상위 멸성인에 의해 내정되어졌다는 것 또한 인식했다. 하지만 케시어스가 멸성
인들의 심부름꾼에 해당하는 천상인의 기억을 완전히 찾았다고 하나 그녀는 진정 리크를 사랑했었다. 칠계에서 창
성인을 제거할 베른의 단도가 천상제단석에 나타나던 날 그녀는 그 단도로 자신의 목을 끊어 자살까지 시도하려 했
다. 하지만 자신의 한목숨 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임무를 포기할 경우 칠계 멸성인에 의해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마저 소멸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녀 대신에 또 다른 암살자가 리크를 제거할 것임이
분명했기에 그녀는 결국 자신이 나서기로 하였던 것이다.
후에 케시어스는 칠계로부터 내려온 베른의 단도로 리크의 가슴을 찔렀을 때 세상이 꺼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케시어스는 진정 리크를 사랑했다. 결국 그날 케시어스는 참으로 묘한 상항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케시어스
는 애초부터 리크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리크가 목숨만은 부지한 체 어디론가 세상에 잊혀진 곳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리크 가슴에 박힌 베른의 단도가 그를 소멸 단계에 이르기 전 뽑아 버렸고 리크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실 오늘날 리크가 소멸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케시어스에 의해서이다. 케시어스는 또 다
른 천상인 암살자들로부터 리크를 소멸시킨 척 함으로서 그들을 따돌리고 리크를 완전한 보호를 한 셈이었기 때문
이다. 저 멀리 타르탄 마을에서 온 젊은 의사 파슬렌이 쓰러진 리크에 응급처치를 시키고 자신의 마을로 데려갈 때
갑자기 누군가가 마차를 끌고 와서 파슬렌과 리크를 태우고 안전하게 타르탄 마을까지 호위한 마부가 있었다. 밀짚
모자를 푹 눌러쓴 체 다 한마디로 하지 않았던 그 마부는 케시어스의 변장한 모습이기도 하였다. 비록 몸도 움직일
수 없었고 말조차 못 한 체 마차 위에서 파슬렌의 간호를 받던 리크는 분명 그 마부가 케시어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만의 짙은 향취와 밀짚 모자사이로 보이는 초록의 머리카락..케시어스의 철저하게 계획된 연극이 결국
리크를 멸성인과 천상인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성인의 각성을 취한 리크 역시 그와 같은 사실을 모
를 리 없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의 당장 해결할 문제는 바로 베른의 단도를 내려보낸 칠계 멸성인들 중 한사람인 라프시오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리크는 라프시오스와 케시어스가 이곳 카젠모르의 숲 상공을 선회할 때 이미 그 들
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지금으로서 라프시오스는 케시어스가 창성인을 제거하지 않
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결국 케시어스 마저 위험한 처지를 맞게 되었으니 리크는 라프시오스를 제거해야만 하
였다.
허공에 뜬 체로 리크를 노려보는 라프시오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제서야 네놈이 살아있는 이유를 알 것만 같군. 결국 케시어스는 우리들의 감시로부터 너를 따돌렸다는 사실을
말이야..후후. 이거 보기 좋게 한방 먹었군. 정말 대단해 사랑의 힘이 그토록 무섭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야.."
그 순간 라프시오스의 손에서 푸른빛이 형성되더니 케시어스를 향해 발사되었다.
[파팟]
"배신자의 말로는 항상 그렇듯이 죽음으로서 대신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지.."
[콰광]
"훗!"
케시어스의 몸 주위에는 어느새 횐 빛의 방어 막이 형성되어있었고 라프시오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갑자기
생겨난 방어막에 케시어스조차 놀라서 어리둥절할 때 리크가 큰소리로 외쳤다.
"케시어스가 나를 보호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그녀를 보호할 차례이군."
이번엔 라프시오스가 리크를 노려보았다.
"난 칠계의 멸성인이자 제 3영역의 천상 단장이다. 네가 아무리 창성인의 각성을 하였다 한들 수십 만년 동안 칠계
에서 살성인들을 상대로 처절한 전투를 해왔던 내게 상대가 되리라 보는가?"
순간 라프시오스의 은빛 날개에서 붉은 빛이 발하더니 각각의 깃털이 수백 수천 조각으로 분리가 되더니 리크에게
파공을 가르며 향했다.
[파파파파파파파]
[팟]
리크가 손가락 하나를 펴서 허공에 내밀자 날카로운 메스로 변한 라프시오스의 수많은 깃털이 한순간 허공에 멈추
었다. 리크는 이번엔 다른 손가락을 내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진동수조합!"
[슈슈슈슈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허공에 떠있던 날카로운 깃털이 방향을 바꾸어 라프시오스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라프시오스는 빛의 검을 형성하더니 푸른 구체의 막을 자신의 몸 주위에 형성 시켰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
다. 자신이 발사했던 깃털 무기가 이번엔 자기를 향해서 공격하고 있으니 말이다.
[푹푹푹]
라프시오스가 만든 방어 구체에 깃털들이 뚫지 못하고 푹푹 박혀버렸다. 그 순간 리크가 다시 외쳤다.
"진동수조합 폭사(暴死)의 힘이여!"
[펑펑펑]
구체에 박힌 수천개의 깃털들이 펑펑하며 폭팔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후 그 폭팔의 힘에 라프시오스가 만든 방어구
체의 막이 소멸되어 버렸다. 라프시오스의 신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니 그는 극도로 긴장된 표정으로 변했다.
"젠..젠장...좋아. 그렇다면.."
라프시오스는 빛으로 발광하는 자신의 검을 수직으로 세우더니 허공에서 뜬 체로 리크에게 정면으로 공격했다. 예
리한 검(劍) 끝이 순식간에 리크의 가슴 부위까지 도달했다. 이번에도 리크는 손가락 하나를 펴서 가슴까지 파고든
라프시오스의 검 끝에다 살짝 갖다되었다. 가슴을 두 쪽을 낼 것처럼 파고 들어왔던 라프시오스의 검(劍)이 리크의
손가락과 닿자마자 가루로 변하더니 주변 허공으로 풀풀 날렸다. 라프시오스 역시 검이 없어지자 바닥으로 쿵하고
떨어졌다.
"헉!"
바닥에 떨어진 라프시오스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리크를 바라보았다.
"도..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수작이라니? 표현이 좀 그렇군. 진동수조합 그 근원마저 파괴하는 기술이 있지."
"진동수조합이라니.."
"칠계의 창성인들은 진동수조합으로 많은 창조행위를 한다는 것은 자네도 알 거야. 단지 나는 그 힘으로 창조대신
에 파괴 혹은 소멸하는 법을 배웠지만..바로 부정의 극 과정은 내게 파괴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지."
그때 라프시오스의 몸에서 빛이 발하더니 서서히 그 형체가 희미해져 갔다. 그때까지 뒷짐을 지고 있던 리크가 재
빨리 손을 들어 허공에다 내 저었다.
"흠. 도망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겠네."
리크의 손이 빛을 발하던 라프시오스의 형체 닿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신체 다시 뚜렷해지더니 점차적으
로 돌처럼 굳어져버렸다. 잠시후 라프시오스의 온몸이 쩍쩍 소리를 내며 하나의 조각상처럼 변해버렸다. 리크는 하
얀 돌 조각상으로 변한 라프시오스를 살펴보더니 한마디했다.
"이번엔 파괴가 아닌 새로운 창조체 하나를 만들었군."
제법 시간이 흘렀다.
서서히 카젠모르의 숲을 비추어 주는 새벽 여명은 너무나 신선한 광경이었다. 테라스에 선 두 남녀는 한동안 침묵
을 지켰다. 리크와 케시어스는 수많은 회한과 감정이 교차되었는지 서로 말이 없었다. 그저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에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릴 뿐이었다. 붉으스름한 빛이 동쪽 산머리위로 고개를 내밀 때쯤 리크가
케시어스에게 다가왔다. 케시어스 역시 리크에게 몸을 돌리더니 그의 품에 안겼다. 케시어스는 자신의 얼굴을 리크
에게 향하더니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리..리크."
리크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져 주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후후. 정말 보고 싶었어."
"나도.."
"설마 이번에도 나를 제거할 단도를 숨긴 건 아니겠지..후후"
"농담이라도 그런 말하지마! 흑."
그 순간 케시어스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리크..미안해.."
"미안하다니 뭘?"
"그때 아팠지.."
"후. 무척 아프더라고.."
"흑.."
"그때의 네 선택이 날 살리려 했다는 것을 잘 알아.. 그 덕분에 오늘날 내가 너와 다시 만날 수 있었고."
둘은 다시 뜨겁게 포옹을 하였다. 찬란한 아침 태양이 리크와 케시어스를 따뜻하게 비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