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09. 이름 없는 자
데스퍼라도(Desperado)
이름 없는 자
바위산 정상에 앉아서 저 아래 펼쳐진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는 자 . 과연 그는 이름이 없는 자인가? 그는 가끔 식 고개를 발 밑으로 떨어트리고 무언가 생각해내려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푸른 창공에 구름이 딱 두 점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그 흘러가는 구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배가 고프군.."
잠시 후 그는 다시 마을의 파슬렌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그가 이 집에 발을 들여놓은 지 지난 7개월과 마찬가지로 언제나처럼 침묵이 흘렀고 파슬렌과 소피아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긴장하고 있었다. 잠시 후 놀랍게도 그가 침묵을 먼저 깨트리는 사건이 터졌다.
"내가 누구지?"
순간. 파슬렌과 소피아나가 깜짝 놀랐다. 7 개월이 지나고 오늘에서야 이 이름 없는 성자(聖者)의 말문이 처음 열렸던 것이다.
"말..말을 하네요?"
"너희들은 누구지?"
"저는 파슬렌이고요 여기 얘는 제 여동생 소피아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전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던 성자(聖者)였습니다."
"성자라니..성자가 뭐 하는 거지?"
"음..기. 기억을 못하시나요? 그러니까.."
그때 소피아나가 재빨리 말했다.
"오빠 이 분 말이야..아무래도 머리가 어떻게.."
[탁!]
그때 그가 식사하다 말고 스픈을 탁자에 탁 놓고는 2층으로 올라 가버렸다. 둘만 남은 파슬렌과 소피아나는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며 머쓱해하였다.
"오빠..말은 하기 시작했는데. 과거를 모르는 것 같아.."
"과거를 모른다..? 흠..그때 그 충격으로 그럴 수도 있겠군.."
"그나저나 저분 이름 없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냐. 이쯤에서 호칭이 하나 정 했으면 해!"
"호칭이라..자신의 이름을 기억 못하니..그렇다고 성자라 부를 수도 없고. 좋아 임시로 하나 만들자.."
"그럴 줄 알고 이미 생각한 이름이 있는데..호호."
"뭔 데?"
그로부터 7일이 흘렀다. 파슬렌 집에 머무르는 그 이름 없는 성자는 소피아나의 제안으로 임시나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소피아나가 2층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세도스 아저씨 일어나세요. 오늘 카른 마을에 가기로 한 날이잖아요."
[쾅! 쾅!]
"........."
소피아나는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다시 문을 두드렸다.
"쾅! 쾅!"
그 순간 문이 획 열리더니 세도스가 싸늘한 표정으로 소피아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너와 약속한 적 없으니까. 당장 조용히 안 해!"
[쾅!]
소피아나는 자신이 붙여준 이름의 세도스 아저씨가 성질 팍 내고는 문을 닫아버리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오빠 파슬렌이 올라오더니 여동생을 데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소피아나..사실 일방적으로 네가 약속한 거잖니.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지마.."
"흑. 난 그래도 아저씨를 위해서.."
"후. 네 마음 알겠지만 뭐 카른 마을에 산다는 점성가 할머니도 별수는 없을 거야.."
"아냐. 오빠 그 할머니의 신비한 능력은 외부 도시에도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단 말이야. 그러니까 세도니스 아저씨의 기억도.."
"하하. 정말 아저씨의 기억을 찾을 수 있다고 보니?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일단 만나보면 혹시 모르잖아.."
"그래. 아무튼 아저씨가 스스로 가고 싶어 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
그때 2층에서 세도스가 내려왔다. 그리고는 아직도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소피아나에게 말했다.
"식사는?"
"지금 준비할 건데요?"
"오늘은 좀 늦는군. 어제 창고 지붕 수리하다 만 거 마저 끝내고 와야겠다."
[쾅!]
소피아나는 닫혀진 문을 바라보며 이젠 원망보다는 푸념 섞인 소리를 늘어놓았다.
"정말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오빠가 다 죽어 가는 생명을 구해주고 재워주고 그것도 모자라 내가 매일 먹여주고 했는데..단 한마디라도 친절하면 어디가 이상하데? 진짜 냉혈한이네.."
그때 파슬렌이 소피아나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를 위로했다.
"후. 그래도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는데 뭐."
"진짜 저 아저씨 성자(聖者) 출신 맞아? 적어도 성자가 기억을 잃었다면 그 착한 본성은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마는..뭔가 사정이 있겠지.."
"쳇. 사정은 뭔 사정..원래 숨겨진 본성이 기억을 잃음으로서 쫙 드러난 건 지도 모르지."
"하하. 그렇게 근거도 없는 추측은 사양한다. 내 생각으로는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은 충격이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데. 여하튼 모든 것은 시간만이 해결 해줄 뿐. 더 이상 아저씨에 대해서 왈가불가 하지 말자."
잠시후 식탁이 차려지고 창고에서 돌아온 세도스가 스픈을 들어 식사를 하려 했다. 세도스는 입으로 음식을 갖다 넣으려는 순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소피아나를 보고 말문을 열었다.
"소피아나.."
"쳇. 웬일이세요, 아저씨가 제게 말을 다 걸고."
"세도스란 내 이름 네가 지은 거니?"
"예..근 데요? 그건 왜 묻죠? 아저씨도 궁금한 게 있나요?"
"흠 아니란다.."
"또 뭐가 아니에요. 얘기를 했으면 끝까지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세도스란 뜻이 뭐냐?"
"남부 지방의 토박이말로서 [냉혈한]이란 뜻이에요."
"............"
잠시후 그들은 식사에만 전념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세도스가 가장 빨리 식사를 마친 뒤에 뒤도 안 돌아보지 않고 2층 계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 중간쯤 올라갔을 때 세도스가 소피아나를 보더니 대뜸 말했다.
"오늘 음식은 좀 짠 것 같은데.."
"뭐..뭐라고요? 얻어먹는 주제에..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내일 가자.."
"갑자기 말을 돌리기는. 그나저나 내일은 뭔 내일이에요?"
[쾅!]
이미 세도스의 모습은 사라졌고 잠시후 2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잔뜩 열 뻗친 소피아나는 식사하다 말고 아직까지 음식이 남아있던 그릇들을 모아서 주방으로 가져갔다.
"야. 뭐야. 오빤 아직 식사도 끝나지 않았어."
"......"
[덜거럭 덜거럭]
[빡! 빡!]
오빠 파슬렌은 더 이상 동생의 신경을 건드리지 안으려고 슬며시 박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방에서 신경질 적으로 설거지를 벅벅 해대는 소피아나의 표정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후후. 아까 분명 세도스 아저씨가 내일 간다고 했지. 쳇. 웬일이야. 아무튼 내일은 세상없어도 아저씨를 카른 마을의 점성가 할머니에게 데려 가야지."
카른 마을은 그저 일개 마을이라기 보다도 소도시를 연상케 할만큼 넓었고 인구도 제법 많았다. 남쪽 지방의 프로니아 평원과 해변가를 있는 내륙가 연안가의 중계지역으로서 물물교환으로 인한 상권이 잘 이루어진 곳이었다. 거리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 되었고 자치 행정기관도 그런 데로 구색을 맞추어 있어 사소한 분쟁들은 이 마을 자체 내에서 해결되었다. 더구나 요즘 들어서 인간 제국의 명분 성이 다른 마족들과 어둠의 종족들과 희석됨으로서 각 도시와 소도시들은 주로 지방자치제를 확립함으로 나름대로 독자적인 형태의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어째든 카른 마을이 이 지역에서만큼은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장통을 벗어나 마을 외곽지역에는 딱 한군데 할머니가 운영하는 점성술집이 있었다. 비교적 큰 신전 양식의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목조형태의 단층 짜리 아담한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노동자들이 숙식을 해결해주는 여관정도 볼품이었지만 바로 이곳이 할머니 점성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파슬렌과 소피아나 그리고 세도스는 이곳을 오전에 도착해서 겨우 차례를 기다린 끝에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질 때에 이르러 할머니를 만나볼 수 있었다.
"점 한번 봐주는데. 1000 리아(사계(四界)의 화폐 단위로서 일반 노동자의 하루 벌이가 20에서30리아 정도 된다.)라니요? 할머니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소피아나가 항의하자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버럭 소리 질렀다."
"시끄럿! 난 사람에 따라 돈을 받아. 아무튼 싫으면 당장 가던지."
오빠 파슬렌 역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그런 거액을 들여 점을 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백발이 성성하고 이빨이 다 빠진 쭈글쭈글 할머니가 그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도스의 얼굴과 다른 신체 부분을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잠시후 나지막이 말했다.
"흠. 내가 잘못 봤나? 단돈 1 리아만 내!"
"뭐에요? 1000 리아에서 갑자기 1 리아라니. 지금 장난하시는 거 아니죠?"
할머니 연신 세도스의 눈을 보면서 얼굴이 빨개져갔고 호흡마저 거칠어져 갔다.
"아냐. 10000리아 내..아..아냐.."
이번엔 할머니의 눈이 벌렁 뒤로 까지면서 횐 자위만 보였고 잠시후에는 거품까지 물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당장 나가! 빨리 나가란 말이야!"
파스렌과 소피아나가 무척 당황하는 것과는 달리 세도스는 무심(無心)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행동을 침착하게 지켜 볼 뿐이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버럭 버럭 소리지르는 통에 이들 세 사람은 쫓겨나듯이 그 점 집에서 나왔다. 잠시후 길바닥으로 나온 이들 중 소피아나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투덜거렸다.
"쳇. 노망 들려면 곱게 들어야지.."
"소피아나 아무리 그래도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분명 미쳤어.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하루종일 잘 봐주면서 우리 차례가 되니까 그렇게 한순간에 돌아버릴 수 있는 거야. 진짜 재수 없을 라니까?"
"그나저나 차례 기다리느냐 점심도 건너뛰었는데 저녁은 좀 푸짐하게 먹자."
"쳇 밥 맛 떨어졌는데 푸짐하게 먹기는."
"임마 넌 너만 생각하냐? 세도스 아저씨가 배고프실 것 같아서 그렇지. 그나저나 어디가지?"
이들은 이 마을에서 제일 큰 식당을 찾아서 무조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입이 턱 벌어질 정도로 컸다. 사람들 역시 빽빽하게 들어 낮아서 저마다 왁자지껄 떠들며 먹으며 마시며 하였다.
"오빠 여..여기 술도 팔아.."
"응. 그러게..그렇다면 다른데 가볼까."
"응. 사람들도 험상궂게 생겼어. 군인들도 있고..훗 칼까지 찼어."
테라탄의 산골 마을 출신인 파슬렌과 소피아나의 눈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거칠고 무섭게 보였는지 한 것 위축이 되어있었다. 그때 세도스가 말했다.
"난 여기가 좋아."
그는 한마디하고 다짜고짜 바로 앞에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러자 한 식당 웨이터가 급하게 나오더니 말했다.
"에고 손님. 저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여..여기는 이미 예약이.."
순간 세도스가 싸늘한 눈빛으로 종업원을 노려보았다. 종업원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자기도 모르게 얼른 대답을 해 버렸다.
"그..그냥 앉으세요.."
잠시후 파슬렌과 소피아나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고 주문까지 했다. 종업원은 가기 전에 갑자기 소피아나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에고 저 앞에 계신 분이 너무 무서워서 대신 당신에게 귀뜸을 해드리는 것인데. 얼른 드시고 나가세요. 이 자리는 이미 예약 되어있고 잠시 후에 그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그들이라니요?"
"아주 잔인하고 못된 놈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마을의 상권지역 뒤를 봐주는 놈들인데..아가씨 같은 미인이 그런 놈들 눈에 띠면 큰 봉변 당합니다."
[덜덜덜]
겁이 무척이나 많은 소피아나가 갑자기 입술을 벌벌 떨었다.
"오빠..우..우리 나가자.."
"왜. 그냥 있자. 세도스 아저씨는 여기가 좋은가봐. 나도 사실 겁이 나! 그러니까 얼른 먹고 나가자."
그때였다. 식당 입구에 있던 문짝 두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벌컹!]
"훗!"
"헉!"
심장이 약한 파슬렌과 소피아나가 화들짝 놀라면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10명 정도의 험상궂게 생긴 청년들이 각자 등에 검을 매고는 이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오..오빠..아무래도 이 자리를 예약한 사람들이 저 들인가 봐! 어떡하지.."
"당장 나가자..아저씨 어서 나가요. 저들에게 봉변 당하기 전에.."
"난 싫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니 문을 박 차고 들어온 사람들이 어느새 이들 코앞까지 온 것이다.
"뭐야! 이 년 놈들이 왜 우리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엥. 씨 팔, 오늘 가뜩이나 일진 안 좋은데. 이것들이 뒈지려고 환장했나."
그중 한사람이 바로 앞에 앉아있던 소피아나의 길다란 머리카락을 꽉 움켜잡았다.
"어디 보자.."
"악! 사..살려주세요.."
"엥. 이게 웬 떡이냐? 이년 쌍판대기 좀 봐. 후. 이 마을에도 이런 년이 있었나."
"큭큭. 완전 월척 낚았군."
"좋아 좋아! 이년을 봐서라도 우리가 참자고. 그리고 너희들 두 새끼 당장 꺼져."
오빠 파슬렌이 이 되어 그들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
"제발..제 여동생을 놔주세요..제발.."
"병신 같은 새끼 육갑하고 자빠졌네. 셋 쉴 동안 안 꺼지면 팔뚝을 절단 내겠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