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00. 프리즘의 전사들
데스퍼라도(Desperado)
나는 나다.
케시어스의 별장은 해안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요즘 들어 리크가 부쩍 신경 써서 가꾸던 과수원과 채소밭은 해안과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다. 케시어스는 언덕 위에서 리크가 그 동안 정성 들여 보살핀 과수원과 채소밭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와우!"
"어때?"
"이럴 수가!"
"후후."
케시어스는 언덕 아래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크. 분명 네가 저 아래 텅 빈 들판을 가꾸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향기가 코끝을 진동시킬 정도로 과일과 채소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이..이건 말도 안돼."
"말이 안되기는..후후."
"아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 여기는 지리적으로도 북쪽 끝에 위치해있어 여름일지라도 서늘한 기후와 일년 내내 서려있는 안개와 구름 때문에 일조량도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야. 그런데 저렇게 알록달록한 과일들과 채소들이 줄기가 끊어질 정도로 매달려 있다니. 리크 너 혹시 나 몰래 다른 지역에서 과일나무와 채소 텃밭을 통 채로 옮긴 것은 아니겠지?"
"통 채로 옮기다니..하하."
"리크 도대체 여기 황량한 들판에다 무슨 조화라도 부린 거야? 도저히 이런 환경에서 그 토록 짧은 시간내에 이런 결실을 거둔다는 것은 불가능해!"
"과연 식물이 자라는데 외부적인 환경만이 중요한 걸까? 그러니까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관은 애초부터 잘못 된 거지."
"무슨 뜻이야?"
"잠시 따라와 봐!"
잠시후 언덕 아래로 내려간 리크가 큼직한 과일하나를 따서 케시어스에게 다가오더니 그에게 냉큼 주었다.
"살펴 봐!"
"살펴보라니?"
"느껴 보라고.."
"뭘 느끼란 말이야. 그냥 향기 좋고 잘 익은 과일인데."
"단지 그 뿐이야?"
"과일이 과일이지 그 이상이 뭐가 있어?"
"그 과일 역시 살아 있다는 것을 느껴 보라는 얘기야. 좀 이해가 안가겠지만 그 과일 역시 분명 창조주의 관념과 의식이 깃들여진 신성한 창조물이란 말이지. 그렇게 놓고 보면 그 과일이나 우리 인간들이나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같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아. 꼭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 쉬는 동물들만이 생명은 아니지."
"후.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쉽게 얘기해서 창조주 안의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심지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까지 서로 교감이 가능하단 얘기야. 단지 그 파장 형태가 좀 다를 뿐 조율만 조정한다면 서로 얼마든지 영적 교감을 통할 수 있어."
"후. 점점 더 어렵다."
"쉽게 얘기해서. 여기 눈앞에 보이는 과일들과 채소들은 나와의 약속으로 저렇게 결실을 맺은 거야."
"호호. 정말. 황당해서. 설마 리크 네가 식물을 잘 자라도록 협박을 했다는 말은 아니겠지."
"하하. 반은 맞았군. 협박 대신에 슬슬 달랬더니 알아서 잘 크더라고."
"쳇. 농담이라면 썰렁하다. 아무튼 너무 놀라워!"
요즘 들어 케시어스는 리크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그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특히 보이는 사물마다 대화를 나누는 건지 도백을 하는 건지 혼자서 중얼거리는 리크의 모습에 걱정마저 생겼다. 오늘도 리크는 거실 창가에 한참 서서 석양으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케시어스 역시 여느 때처럼 그의 몰래 혼잣말을 들었다.
"의식이 빛을 만들고 빛은 물질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세상은 어느 절대적인 관념(觀念)의 존재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에 불과하다. 창조주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라. 후. 그리고 나 같은 한낮 미물인 인간이 어떻게 생각과 의지로도 빛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정말 신기하군 내가 빛의 조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들이..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때였다. 케시어스는 리크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껴 그를 불렀다.
"리크..뭐해?"
"케시어스.."
"뭐야. 갑자기 철학자라도 된 거야. 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려?"
"하하. 다 들었니?"
"중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떠드는데 안들 릴 리가 있겠어?"
"그 정도로 목소리가 컸니? 후. 미안.."
"미안하기는..그나저나 너 괜찮은 거니? 지난번 기아몬 시전에서 아무르 위성의 백색 빛을 받은 이후에 네 행동이 이상해졌다는 것 너도 느끼니?"
"이상해졌다라...후. 하긴 그 누구라도 지금의 내 행동을 보면 미친놈이라 생각이 들 거야. 하지만 난 지극히 정상이야. 물론 기아몬 신전 사건 이후로 내 자신에게서 많은 변화를 느낀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모든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는 기분이야."
"비밀이라니?"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얘기인데.."
"말해봐! 너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도 이젠 궁금하다 도대체 뭘 그렇게 하루종일 떠드는지.. 아예 내게 모든 걸 다 말해 봐. 기아몬 기 신전 사건 이후로 네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말이야."
"그날 기아몬 신전에서 난 아무르 위성의 백색 빛과 내 몸이 상충 작용을 일으킬 때 난 죽음보다 더 괴로운 고통을 느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아."
"기묘한 체험?"
"글세..기묘한 체험이라기 보다..저 가슴속 아련히 묻어 두었던 망각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랄까. 바로 백색의 빛이 내 의식과 한 점이 되는 순간 난 고통 이전에 상상할 수 없는 쾌감도 동시에 느꼈어. 비록 단전에 녹아 있었던 프아라와 내공의 융합에너지가 강력하게 백색의 빛을 거부했지만 내 의식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백색의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지. 마치 내 의식의 고향 근원(根源)의 빛에 너무도 반가워 나도 모르게 희열감 마저 느꼈던 거야."
"희열감이라니? 넌 그때 거의 죽다 살아났잖아."
"후후. 거 친 진동수의 조합으로 생겨난 육체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난 분명 모든 근원(根源)의 빛을 담아두었지. 바로 내 영혼과 의식 속에 말이야. 그 빛은 바로 저 칠계(七界)의 대운성의 빛이 하위 차원으로 다시 현현하여 비추게 되었고 그 빛이 너무나도 영묘하여 아무르 위성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반사하는 형식으로 이곳 사계(四界)에 나타난 거지. 그런 영묘한 빛이 마치 그 근원(根源)의 기억마저 내게 알려준 기분이 들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리크는 케시어스가 혼란스러워하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 봐!"
"쳐다보다니 왜?"
"네 앞에 서있는 리크 가벤더라는 사람의 실체를 말이야. 정확하게 얘기 할 수 있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사실 내 모습은 몇 차원의 영역을 거쳐서 현상한 빛의 조합에 지나지 않아. 관념의 빛은 조합이 되면 물질로 현현하게 되고 그 조합이 풀리면 그 빛은 태양 빛처럼 발하여 만물을 비쳐주는 에너지 같은 역할을 하지."
"후. 정말 머리 아프다."
"잘 봐!"
리크가 갑자기 손바닥을 허공에 펼친 체 그곳을 집중적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바로 의식이 만들어낸 빛의 비밀은 바로 각 영역에 알 맞는 진동수조합에 있어. 즉 진동수 조합을 어떻게 조율하는냐에 따라서 지금의 물질들을 분해하고 다시 재구성할 수 있는 거지."
그때 리크의 손바닥이 흐릿흐릿 해지더니 순간 빛으로 '파' 하고 없어졌다. 케시어스는 너무 놀라 탄성을 지르고는 리크에게 다가갔다.
"리크. 손이.."
"하하. 걱정하지마."
"모든 물질은 태초에 이런 빛에 지나지 않았어. 그 이 전에는 파장과 의식의 거품이었고 그 또 한 더 이전엔 그저 어느 절대자의 관념의 초기일 뿐이었지. 하지만 난 분명 느꼈어 지난번 백색의 빛이 나와 상충하였을 때 비록 고통에 몸부림 칠정도로 괴로웠지만 한편으론 그 빛이 날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지. 즉 그때의 고통은 깨어나는 의식의 행위라 보면 되겠지."
[파!]
리크는 얘기를 끝내자마자 허공에서 빛으로 화에 버린 손을 다시 빛으로 재구성했다. 케시어스는 마치 리크가 무슨 신비한 마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고 눈이 휘둥그래져있었고 아직도 멍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후에야 케시어스는 정신을 차렸다.
"호호. 제법인데. 네가 마법도 정통했다는 사실이 놀랍군. 더구나 지금 모든 힘을 잃은 것으로 아는데 다시 힘을 찾은 거야?"
이 사계(四界)에서도 웬만한 마법사라면 조금 전 리크가 했던 신비한 마법정도는 구사하리라 생각한 케시어스는 제법 담담하게 말했다. 리크는 케시어스를 보며 다시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마법이라..그렇게 이해하기 편하다면 그렇게 받아들여."
"뭐야? 그럼 마법이 아니고 다른 개념이라도 있단 말이야?"
리크는 갑자기 얘기하다 창문을 열고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장렬하게 지는 석양 노을이 리크를 비쳐주었다.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든 하늘과 구름 떼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후 케시어스가 옆으로 다가오자 리크는 그때서야 조금 전 케시어스의 질문에 대답을 하였다.
"개념이라..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굳이 말하자면 아까도 언급했듯이 [진동수조합/조율]의 개념이라 할수 있지. 물론 마법도 근원적으로는 그러한 개념에 파생되어 나온 일종의 소극적 의식의 작용이지."
"리크 뭐야. 한순간에 신(神)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체하기는.."
"모든 것을 알기보다는 원래 있었던 근원(根源)을 인식할 뿐이지. 그러니까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망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저마다 기억의 편린을 맞추어 가는 것. 바로 그게 우주가 운행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어. 난 단지 그들보다 인식의 기회가 앞섰을 뿐이지.."
"후. 리크! 차라리 혼자 중얼거려라. 난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젠 참견 안 할게."
케시어스가 거실 안으로 들어가자 리크 역시 그녀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왔다.
"케시어스. 배고프다."
"호호. 그렇게 떠들더니만. 허기가 지는 것도 당연하겠지."
"오늘 메뉴는?"
"진동수조합 요리!"
"헉!"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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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00회 연재가 되는군요. 짝짝짝. (혼자 자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