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미의 활약기 #3
“필살, 등받이 공격!”
난데없이 하진의 의자 등받이가 뒤로 확 넘어갔다. 이에 따라 등을 기대고 있던 하진의 몸도 순식간에 뒤로 홱 젖혀졌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방아쇠를 당기던 킬레아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야, 야! 물 폭탄 준비해.”
“기달!”
서련의 놀란 시선이 즉각 하진에게 향했다. 비단 서련 뿐만이 아니라 로운과 원호 역시 황당해진 낯빛으로 등받이 위로 드러누워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두 눈을 감은 채 턱을 악다물고 있었다. 무릎이 책상 아래 닿은 채라, 뒤로 아예 나자빠지진 않았지만, 일단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젖혀진 건 맞았다.
곧이어 하진의 콧등이 무섭도록 찡그려졌다. 그 상황에서도 절미들은 나름 바쁘게 움직였다. 컵을 들고 어딘가로 뛰어가는 순한양부터 하진이 못 일어나게 의자 등받이를 잡고 버티는 베르르까지, 서련은 그 모습을 아연하게 지켜봐야 했다.
“하… 이, 좆같은 새끼들이….”
하진이 느릿하게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웅크려 있던 짐승이 몸을 펴고 일어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를 본 베르르는 재빨리 의자 등받이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하진이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난 건 순식간이었다.
“뒤지려고 환장했나, 씨발!”
“야, 야! 빠져! 도망가!”
복도 끝에서는 순한양이 양손에 물이 가득 든 컵을 들고 빠른 걸음을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곧 살기를 달고 노려보는 하진을 보고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베르르와 함께 반대로 뛰기 시작했다.
가져온 물을 하진에게 뿌릴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담함이었다. 아니, 그냥 겁이 없었다.
“새끼들이 도망가긴 어딜 도망가.”
하진은 겉옷을 벗어 뿌리치듯 의자에 던져놓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절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꿀밤 십만 대로도 안 끝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서련과 로운, 원호는 같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진과 절미들의 모습이 피시방에서 사라졌을 때에야 시선을 옮겨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이어지고, 한참 뒤에야 로운과 원호가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하. 애들 참 대, 대단하네요.”
“설마 죽이겠어요. 하하, 괜찮을 거예요. 개하진 저놈이 저래 보여도 애들하고 화이팅하게 잘 놀아주거든요. 하하, 죽이진 않습니다.”
“와, 근데 요즘 애들이 참 겁대가… 대담하구나. 하필 해도 개하진한테 저러냐. 고맙게시리.”
“…….”
괜찮다는 건지, 안 괜찮다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서련은 변명처럼 제게 말하는 로운과 원호를 보다가 시선을 힐끗 돌려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갑자기 멈춘 대결에 길드원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서로를 본 채 가만히 서 있는 방치된 캐릭터들이 있었다. 킬레아와 순한양, 베르르가.
[길드/건블리아: ?]
[길드/휴리사: 니들 뭐하니?ㅋㅋㅋㅋㅋㅋ 왜 안싸웤ㅋㅋㅋㅋㅋ]
[길드/야생닭: ?]
[길드/건블리아: 왜또;; 니들 뭔일 있냐?;;;;]
[길드/건블리아: 키키야?]
[길드/건블리아: 메기야?]
[길드/야생닭: 형; 하지마요; 키키운다니까]
[길드/휴리사: 그럼 우리 키키 송사리 어떠니ㅋㅋㅋㅋㅋㅋ 욤뇸뇸 송사리ㅋ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아니 그래서 지금 왜 다 멈춘거냐고; 뭐 셋다 튕겼냐?]
그 말을 쭉 훑던 서련은 한숨을 내쉬며 자박자박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삼인방을 기다리느니 어디 던전이나 돌고 오는 게 낫겠다 싶었다.
[길드/키키아: 죄송해요 형, 누나. 셋다 일이 생겨서 지금은 좀.... 그냥 저희끼리 어디 던전이나 돌고 있을까요?]
[길드/묵요: 하하 아님 누님 저랑 피빕 한판 어떠세요?ㅋ]
[길드/휴리사: 콜! 콜! 나야 좋지ㅋㅋㅋㅋㅋㅋ]
[길드/휴리사: 봐주기 없기ㅋㅋㅋㅋㅋ]
[길드/호백조: 야생형도 한판 가시죠? 아님 저희 지원계의 전설인 길마형님이라도ㅎㅎ]
[길드/야생닭: 나는 좀ㅠㅠ]
[길드/건블리아: 내가 좀 전설이지ㅋㅋㅋㅋㅋㅋ 크으... 백조가 뭘 아넼ㅋㅋㅋㅋㅋ 간만에 상대좀 해준다 내갘ㅋㅋㅋ온나]
서련은 하진이 갖다 놓은 우유를 마시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옆을 힐끗 보자 던져놓은 옷 사이로 모서리만 얼핏 드러난 핸드폰이 보였다. 연락도 안 되는 상황이라, 뭘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설마 때리겠어.
서련은 일말의 희망을 갖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로운과 원호는 뒤늦게야 웃음이 밀려드는지, 게임을 하는 내내 서로 키득거리기 바빴다. 나중에 가서는 아예 책상을 내리치며 동영상을 찍어놓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듯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확실히 다시 못 볼 광경이긴 했다. 어느 누가 하진에게 저런 짓을 해보겠나 싶기도 하고. 특히나 도망가던 그 순간까지 겁은커녕 재미에 젖어있던 절미들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뒤쫓는 하진의 모습도.
서련의 예상대로 하진과 절미들이 돌아온 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것도 하진이 절미들의 뒷덜미를 잡고 겨우 끌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까지 갔다 왔는지, 다들 한기를 가득 묻히고 있었다.
“아, 킬레견 형 진짜 잘 달려….”
“와, 와… 진짜 개 같았음.”
덜렁덜렁 잡힌 모습에도 절미들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결국 피시방을 나갈 때까지 두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했지만, 본인들은 그마저도 재밌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하진의 게임을 보며 훈수까지 두었다.
“아, 진짜 이 킬레견 형! 거기서 점프를 하면 어쩔?!”
“아, 우리 키키 형 좀 본받으라고요! 그리고 도핑 하나 풀렸거든요?”
“닥치고 손 제대로 들어라.”
“옙.”
“넵.”
팔을 슬슬 내리며 참견하고 훈수를 두다가도 절미들은 하진의 말 한마디면 두 손을 곧장 번쩍 들었다. 그 행동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나중에는 하진이 미간을 짚고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결국 그날, 베르르와 순한양이 돌아간 건 로망처럼 말하던 떡볶이를 먹고 소화하겠답시고 집 주변을 몇 바퀴나 돌고 난 후였다. 그들이 말했던 일정은 다 이룬 셈이었다.
겉으로는 싫은 티를 팍팍 내긴 했어도, 하진도 그리 싫지는 않은지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절미들과 끝까지 어울려 주었다. 매번 선뜻 지갑을 열기까지 했다.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니, 절미들 자체가 스스럼이 없었다. 로운과 원호에게도 세상 친근하게 구는데,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서련은 헤어질 때 울망울망하던 베르르와 순한양의 모습을 기억했다. 하진은 제법 후련하다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여운이 남는지 평소보다 말이 없는 밤을 지냈다.
그리고 맞이한 다음날 아침, 비몽사몽 일어나기 무섭게 서련과 하진은 어제와 같은 장면을 마주했다. 그 기시감은 띵동, 울리는 초인종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띵동-
“…설마.”
지잉- 지잉-
뒤이어 울리는 핸드폰 소리가 침묵을 만들어냈다. 서련이 핸드폰을 집어 들기 무섭게 초인종 소리는 쾅쾅 두드리는 소음으로 바뀌었다.
익숙한 말소리와 함께.
쾅쾅쾅-!
<킬레견 형, 문 열어요! 개바쁜 우리 고3이 놀아주러 왔다니까!>
<아, 형! 왜 또 연락 안 받아요! 오늘은 키키 형이랑 놀러 왔거든?!>
<우리 키키 형이랑 놀러 왔다고요!>
“하….”
하진이 이마를 짚고 깊은 탄식을 토해냈다. 낮게 떠진 눈이 분노를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서련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진의 불만 많은 눈초리가 왜 웃냐고 묻고 있었다.
“왜 다 여기 와서 지랄이야.”
“절미들이 어제 재밌었나 보네.”
“지들만 재밌었겠지. 무시해.”
쾅쾅!
<무시하기 있기 없기?!>
<앞집에 민폐인 거 모르나! 아 우리 배고프다고! 오늘은 진짜 우리가 산다!>
<그러니까 빨리 문 열어요!>
“좆까, 새끼들아! 안 가냐? 한가해? 고3이라는 새끼들이 여기 와서 지랄들이야!”
하진은 이를 으득으득 갈다 말고 일어나 현관문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발로 쾅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련은 그 모습을 턱을 괸 채 웃는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어차피 곧 열어 줄 것 같은데, 그냥 느긋이 지켜보기로 했다.
역시나 몇 번 실랑이를 벌이던 하진은 욕을 짓씹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문 너머에는 추위에 얼굴이 발갛게 얼은 절미들이 서 있었다.
어쩐지 이 생활이 한동안 계속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의외로 서로들 잘 맞는 것 같아 큰 걱정은 안 들었다.
“키키 형! 오늘은 진짜 형 보러 왔어요!”
“꺼져라.”
“묵요 형이랑 백조 형도 이미 불렀는데요?”
“그러니까, 씨발 꺼지라고.”
“에이, 여기서 인천이 얼마나 먼데 가요.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건데? 잠옷도 가져왔음.”
메기 그림이 프린팅된 잠옷을 확 펼치며 말하는 절미들의 모습에 결국 서련은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진은 분노의 마른세수를 하다가 결국 절미들을 집안으로 들여보내줬다.
슬금슬금 들어오는 절미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서련은 그 모습을 한참이나 턱을 괸 채 지켜보았다.
역시, 현모를 하길 잘한 것 같았다. 씩 웃는 절미들의 미소가 활력을 불어넣는 느낌이었다. 문득, 이대로 지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물론, 하진은 그렇지 않겠지만.
절미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서련은 따뜻함을 느꼈다. 미소가 떨리던, 그리고 하진마저 귀엽게 느껴지던 아침이었다.
<딜러의 활약기> 외전 <절미의 활약기>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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