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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미의 활약기 #1 (26/28)

절미의 활약기 #1

슬그머니 눈을 뜨자, 어두운 방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서련은 흐릿한 시야를 깜빡이며 몸을 움직였다. 순간, 아릿한 격통이 발끝에서부터 허리를 타고 지끈 올라왔다.

“아야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숨을 삼키던 사이, 서련은 제 허리를 바짝 끌어안는 팔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왜…. 많이 아파?”

인상을 잔뜩 찡그린 하진이 잠꼬대하듯 묻고 있었다. 비몽사몽한 눈이 잠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낮은 목소리는 몇 번이나 물었다.

“…조금.”

“어디.”

서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하진이 느릿하게 물었다. 하진의 긴 숨이 드러난 등 뒤로 떨어졌다. 밤새 시달리고 눈을 붙인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덜덜 떠는 감각마저 선명해서, 그때의 장면이 눈에 그려질 정도였다. 서련은 결국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떨구었다. 서련의 귀 끝이 평소와 달리 달아올라 있었다.

“별로… 안 아파.”

무언가 물으려던 하진은 달아오른 서련의 귀 끝을 보고는 움츠러든 어깨 위로 도로 얼굴을 묻었다. 허리를 꽉 당겨 안는 팔 힘이 밤새 느낀 집착을 다시 상기시켰다.

몰랐다. 그렇게나 집착을 부릴 줄은. 벌써 몇 번이나 잠자리를 함께 했는데도, 하진의 집착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시작하기도 전에 진이 빠질 정도였다.

봐주는 법도 없어서, 매번 삼켜지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소중히 해준다는 걸 알았다.

내려뜬 시야 안에는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아침 햇살이 있었다. 눈만 감았다 뜬 느낌인데 벌써 아침이었다.

몇 시지.

서련은 고개를 들어 핸드폰을 찾았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어째 항상 두던 곳에 있던 핸드폰이 오늘은 보이지가 않았다. 손을 뻗어 더듬거려 봤지만,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뭐 찾는데.”

“하진아, 핸드폰 못 봤어?”

“…어.”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게 무언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허공으로 뻗었던 서련의 팔은 다시 냉큼 잡혀 이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하진아, 좀 비켜봐.”

“몇 시간이나 잤다고 벌써 일어나. 더 자.”

“알았으니까, 비켜봐. 밥 좀 먹게.”

그 말에 서련의 팔을 끌어당기던 하진이 움칫 굳어졌다. 그러나 곧 한숨과 함께 하진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불만 가득한 얼굴은 성질에 못 이겨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기어 나오기만 해.”

침대를 벗어나며 하진은 낮게 경고했다. 턱에 힘을 가득 주고 말하는 본새가 기어 나오면 가만 안 둘 태세였다. 서련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하진이 뒷목을 쓸며 방을 나서기 무섭게 손을 뻗어 침대 옆을 뒤졌다.

“핸드폰이….”

열심히 찾아봤지만, 아주 작정하고 감췄는지 서련의 것은 물론 하진의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침대 밑까지 더듬거리던 서련은 포기하고 하진이 올 동안 침대 위에 늘어진 채 누워있어야 했다.

달칵-

“일으켜 줘?”

“됐어.”

방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풍겨 들어왔다. 서련은 다가와 부축하는 하진의 손을 만류하고 직접 몸을 일으켰다. 드러난 몸이 얼마나 엉망인지, 하진이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진은 곧 옷을 찾아 서련의 팔에 끼워 주었다.

“성하진, 너는. 너도 입어.”

“어.”

대답만 잘했다, 대답만. 결국 옷을 제대로 입고 식탁에 앉은 건 서련뿐이었다. 식탁 위에는 계란죽이 차려져 있었다. 며칠 전인가, 죽이 먹고 싶어 끓인 게 의외로 맛있어 깔끔히 비운 걸 하진이 기억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날 이후 이틀에 한 번꼴로 식탁에는 계란죽이 올라왔다.

핸드폰 얘기를 꺼낼까 하다가, 서련은 일단 밥부터 먹자는 심정으로 수저를 들었다. 오늘로써 이주. 벌써 현모를 한 지 이주가 지났다.

그사이 있던 일만 해도 입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분명한 건, 이전보다 길드원들과의 관계가 더 끈끈해졌다는 점이었다.

많이 어색할 줄 알았던 현모는 우려했던 것과 달리 껄끄럽지도, 낯설지도 않았다. 오히려 친숙함이 느껴지던 자리였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생겨났다.

서련이 아닌 하진에게.

“하진아, 너 핸드폰….”

“푸딩 줘?”

“응.”

서련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서야 아차 했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하진은 자리를 뜬 후였다. 냉장고로 향하는 하진의 뒷모습이 감추고 싶은 무언가를 짐작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감추고 싶으면 저럴까도 싶었다. 문제는 그게 얼마 안가 들통났다는 것이다.

지이잉-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음에 서련의 시선이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다가가자 소리는 점차 커졌다. 위치는 욕실 쪽이었다.

서련이 문고리로 손을 뻗은 것과 하진이 그 앞을 막아선 건 거의 동시였다.

“성하진, 너 안 비키지.”

“뭐 하는데.”

“너 핸드폰 욕실에다 놨어?”

“내가 왜?”

“소리 들리잖아.”

지잉, 지잉 울리는 소리에 하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세상 온갖 불만을 다 표현하던 하진은 서련이 팔을 잡아 밀자 욕을 짓씹으며 몸을 비켜섰다.

소리는 욕실의 선반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뒤꿈치를 떼고 손을 뻗어야 겨우 닿을 만큼 높은 곳이었다. 서련은 선반으로 다가가 아슬아슬하게 까치발을 들고 지잉지잉 울리는 무언가를 꺼내 내렸다.

역시나, 핸드폰이었다. 그것도 두 개. 서련의 핸드폰은 아예 꺼진 채였고, 진동은 하진의 핸드폰에서 울리고 있었다.

표시된 번호는 익히 보던 것이었다. 요새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놀고 싶다고 연락하는 절미들.

서련은 고민할 것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받자마자 들린 건 귀를 강타하는 고함소리였다.

<아, 이 광견형 진짜!! 우리 절미들 미치게 하려고 환장하셨음?! 진짜 미치셨나, 아오! 그래놓고 왜 우리 키키 형 전화는 꺼 놓으심? 절미들 하극상 보고 싶어서 그러나! 아, 됐고 우리도 킬레견 형 필요 없거든요? 원호 형도 있고, 로운이 형도 있고, 키키 형도 있거든!>

<쩔미들 불쌍하지도 않나!>

확실히 현모 때 들었던 베르르와 순한양의 목소리가 맞았다. 둘 다 핸드폰에 대고 으르렁 컹컹 짖어대고 있었다. 분노의 외침은 씩씩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때야 서련은 살짝 떼고 있던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입을 열었다.

“절미들, 많이 속상했어? 키키 형이야. 둘 다 잘 지냈지?”

<형…?>

<키키…형?>

“그래. 자고 있느라 몰랐는데, 전화했었네.”

<형!! 키키 형! 킬레견이 핸드폰 뺏었죠?! 내 그럴 줄 알았어!>

<키키 형, 그런 놈하고 왜 같이 사는데요! 아, 빨리 나와요!>

“하, 개같이 지랄해대네.”

무언가 대답하려던 서련은 핸드폰을 빼앗아 드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진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절미들의 왕왕거리는 말을 무감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시선은 서련에게 무섭도록 고정된 채였다. 그것도 제법 삐뚜름한 시선으로.

<그러니까 키키 형 오늘 우리랑 놀아요!>

<우리 절미들이 전부 쏜다!>

“지랄도 적당히 하라고 했다, 분명.”

<…뭐야. 이 돼지 멱따는 목소리는.>

<됐고요, 광견님? 우리 키키 형 좀 다시 바꿔주시죠?>

“좆까, 새끼….”

“하진아, 하지 마.”

하진의 턱이 꽉 다물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절미들의 키득키득 거리는 목소리가 물 흐르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노로 새카매진 하진의 눈동자가 핸드폰으로 옮겨졌다. 이걸 죽여, 말아, 하는 눈빛이었다.

[우리가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해놨지!]

[키키형, 오늘 우리 쩔미들이 시간 좀 냈습니다. 나와요, 꼭!]

“아니, 이 새끼들이…!”

띵동-

난데없이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하진과 서련의 시선이 동시에 문밖으로 옮겨졌다. 한 번 울린 초인종 소리는 그 직후, 간격 없이 연속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가 불길함을 전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리는 초인종이 아닌 타격음으로 바뀌었다. 손인지 발인지 하여간 쾅쾅 두드리는 소리였다.

먼저 움직인 건 하진이었다.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살벌한 모습으로 하진은 욕실을 나섰다. 성큼성큼 움직이는 하진을 따라 서련도 재빨리 뒤따랐다.

쾅쾅-

[문 좀 열지, 개새끼야?]

[개하진씨, 얼어 뒈지겠습니다. 문 좀 엽시다. 서련 형, 저희 왔습니다.]

거실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번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현관문 밖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서련은 현관문으로 향하는 하진을 보다가 손에 쥔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전원이 켜지고 제일 먼저 보인 건,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수십 개의 메시지 알림이었다. 발신자는 대개 절미들이었지만, 간혹 로운과 원호의 이름도 섞여 있었다.

핸드폰을 왜 감췄는지 대번에 알 만한 대목이었다.

메신저에 들어가 메시지를 살펴보자, 내용 자체는 단순했다. 물론 서련에게만. 상대적으로 봤을 때 하진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형형거리는 말부터 함께 놀자며 칭얼거리는 말까지. 주말이라 올라왔다며, 형들하고 같이 놀자는데 그 테두리 안에는 서련은 물론 원호와 로운도 속해 있었다.

게다가 쭉 살펴보자 메시지는 아침 7시부터 시작해 현재 오전 11시인 지금까지 계속 이어진 채였다.

콰앙-

“씨발, 뒈지고 싶냐? 아침부터 남의 집 앞에 찾아와서 지랄들이야. 안 꺼져?”

하진은 절대 문을 열지 않았다. 그저 현관문을 마주 차 주었을 뿐이었다. 잠시 잠잠하던 상황은 곧 현관문을 사이에 둔 난투극으로 바뀌었다.

쾅쾅쾅쾅-!

[하하, 개하진이 또 개하진 노릇을 하시네? 어디 사람한테 지랄이세요, 이 개새끼야.]

[와, 저 짐승만도 못한 새끼 봐라. 야, 야! 문 안 여냐?!]

“좆까, 씨발.”

저러고들 있다. 서련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문을 발로 차고 있는 하진에게 다가갔다. 등에 손을 대자 욕을 내뱉던 하진이 몸을 움찔 떨었다. 시선은 곧 서련에게 향했다.

“하진아, 앞집에 민폐잖아. 문 열어줘. 왔는데 그러면 어떡해.”

“안 그래도 돼. 저 새끼들이 민폐짓 하는 걸 왜 이쪽에서 해결해.”

“춥다잖아.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얼어 뒈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어우 추워! 개하진이 우릴 죽이네!]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비켜봐.”

서련은 하진의 팔을 잡고 옆으로 밀었다. 몇 번 버티던 하진은 서련이 따갑게 올려다보았을 때에야 마지못해 비켜섰다. 얼굴에는 채 가리지 못한 분노가 역력했다.

덜컹-

“아, 새끼. 더럽게 버티고 앉았네.”

“어! 열렸다!”

“키키 형! 쩔미들 왔습니다!”

“인천에서 여기쯤이야 흠흠… 껌이지!”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하진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마주했다. 꽉 다문 턱도 인내를 대신할 순 없었다. 콧등을 대번에 찡그린 하진의 시선은 문밖에서 대기한 네 명의 사내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곳엔 추운 겨울을 뚫고 온 베르르와 순한양, 늘 보던 로운과 원호가 씩 웃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꽁꽁 싸맨 절미들의 모습이 하진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그 난리를 치며 핸드폰 감춘 게 무색하게 결국은 만나고 말았다.

“하-”

성하진 인생 최대 위기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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