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25/28)

15장.

현모 날짜는 콜로세움을 했던 날을 기점으로 3주 뒤로 정해졌다. 길드쟁을 하고 대략 3주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모두가 시간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학생들보다는 사회생활을 하는 이찬과 휴리사, 야생닭의 스케줄 때문이었는데, 사실 뒤에 둘보다 이찬의 탓이 가장 컸다.

그렇게 자랑하던 승진 때문에 발목이 잡혀 야근과 특근 때문에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로는 사수가 하나 들어와 교육기간까지만 그렇다는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통화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냥 앞으로의 고생길이 훤해 보였다.

어쨌든 길드원들의 원성 속에 이찬은 하루가 다르게 핼쑥해지다가 일주일 전 현모 날짜를 통보했고, 그제야 피 말리는 원성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처음 현모 장소는 미성년자인 절미들을 고려해 고깃집으로 예약됐었다. 그걸 도중 하진이 독설을 쏟으며 레스토랑으로 바꾸겠다는 걸 말리고 말려, 결국 고깃집은 순위에서 열외되고 말았다.

그래서 잡게 된 게 ‘한음’이라는 한정식집이었다. 제법 유명한 곳이라는데, 하진은 이미 가봤는지 잘 아는 듯했다. 이찬의 피말리는 모습이 걱정이었지만, 서련도 조용한 곳을 원했기에 반발하진 않았다.

그리고 오늘.

“하진아, 준비는 다 했어?”

“어, 대충.”

외투까지 꼼꼼히 차려입고 방에서 나오자, 외투를 챙겨 입은 채 심드렁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TV를 돌려보고 있는 하진의 모습이 보였다.

리모컨을 누르는 하진의 손목에는 서련의 손목에 찬 것과 동일한 모델의 시계가 햇빛에 반짝이며 자리해 있었다. 가자는 말에 하진은 TV를 끄고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모두와 만난다.

“로운이하고 원호는?”

“그 새끼들….”

“하진아.”

“하아… 아래에.”

뭔가 말하려던 하진은 곧바로 쏘아지는 엄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 쉬듯 대답했다. 그 성질 잔뜩 죽인 모습에 서련은 목도리를 매다 말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하진의 뺨을 잡고 아랫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가자.”

입술에 있는 상처도 다 나았겠다, 얼굴도 멀끔한 게 참 잘생겼다 싶었다. 서련이 올려다보는 모습 그대로 웃자, 하진이 좀 전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어디 오늘, 갔다 와서 보자.”

하진은 짓씹듯이 그 말을 내뱉곤 먼저 신발을 신고 나갔다. 서련도 애써 웃음을 삼키며 곧 하진을 따라 신발을 신고 나갔다.

로운과 원호는 일찍부터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는지, 서련과 하진이 건물에서 나오자 코끝이 빨간 모습으로 활기차게 서련을 반겼다.

평소와 그대로인데, 잘 차려입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둘 다 멋있게 보였다. 시원하게 드러나는 미소가 참 잘 어울리는 모습들이었다. 덩치는 큰데 생기가 가득 느껴질 만큼 풋풋한 모습들이었다.

“서련 형, 이거 쥐고 계세요. 어제는 그래도 좀 따뜻하더니, 오늘은 완전 추워요.”

“어, 어! 택시 잡혔다. 3분 내로 온대.”

로운이 휴대용 손난로를 내밀며 어깨를 부르르 떨어댔다. 됐다고 말하려던 서련은 저보다 먼저 가로채 넘겨주는 하진의 태도에 거절도 못 하고 그냥 받아들어야 했다.

그렇게 작은 손난로를 든 채 대로변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정말 3분 만에 택시가 도착했다. 원호가 조수석에 타고 서련은 하진과 로운을 옆에 낀 채 뒷좌석에 올라탔다.

택시 안은 추위가 순식간에 가실만큼 따뜻한 공기가 가득했다. 마음이 나른하게 풀어질 정도였다.

“강마는 어떻게 온대?”

“강마는 거기서 집이 가깝거든요. 아마 걸어올걸요? 아, 우리보다 먼저 도착할 수도 있겠네.”

“그냥 개하진 차로 가면 되는데, 그놈 먼저 도착했다고 거들먹거릴 거 생각하면….”

“야야! 야!”

“아, 저 새끼가 진짜…!”

“…차가 있다고…?”

순식간이었다. 서련의 말에 택시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말실수를 한 원호는 안전벨트까지 꼭 쥔 채 문 쪽으로 몸을 붙이며 피신해 있었다. 옆을 보니 로운도 서련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결국 서련의 시선이 하진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골치아픈 듯 머리를 짚고 앉은 하진에게.

“하진아, 너 차 있어?”

“…산 지 얼마 안 됐어.”

“언제 샀는데?”

“6개월 전에.”

서련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6개월 전이면 서련이 학교에 복학했을 때다. 그런데도 서련은 하진이 차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가 싶다가도, 같은 학교가 아닌 데다 수업 시간도 제각각이니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게다가 오피스텔 주차장은 전부 지하에 있어 지상에서는 차들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진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서 학교에 다닐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설마 차까지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아니, 그냥 모든 걸 다 떠나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게 서련에게는 나름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게요, 형. 어차피 개하진이 매일 술 마셔서 잘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어요.”

“하하, 맞아요. 저희도 가끔씩 잊는다니까요.”

“그전까지는 지하철 잘만 타고 다녔는데, 차 산 것도 사실은 형 데려다 주… 하하! 그냥 그렇다고요.”

앞좌석에서 고개를 빼고 잔뜩 변명하던 원호는 확 찌푸려지는 하진의 표정으로 보고는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런데도 서련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나 데려다 준 적 한 번도 없었잖아.”

“거절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냐고 물으려던 서련의 입이 벌어지다 말고 도로 다물어졌다. 예전에 한 번, 복학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하진이 수업이 없던 날인데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일어나 서련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긴 했다.

당연히 그때는 하진이 차를 구매했는지도 몰랐을뿐더러, 수업에 늦었던 터라 정신이 없던 때였었다. 당연히 됐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왔었는데, 그게 설마 그 뜻이었을 줄은 몰랐다.

“어… 미안해, 하진아. 그때는 몰랐기도 했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건데….”

“알아.”

하진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대답했다. 너무 덤덤해서 오히려 더 미안해질 정도였다.

“다음에 데려다줘. 너 수업 없을 때.”

하진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서련은 씩 웃으며 돌아서서 앉는 원호의 모습에서 그 대답을 읽을 수 있었다.

“아, 강시울 이 새끼! 벌써 도착했다고 존나 나대네.”

“내버려 둬. 심심해서 그러는 거 안 봐도 뻔하다.”

택시 안은 금세 다시 일상의 분위기를 찾았다. 먼저 도착했다고 톡과 전화를 해대는 강마 덕분에 가는 내내 시달려야 했지만, 그런대로 즐거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서련네도 고대하던 목적지 앞에 내리게 되었다.

한음. 단아한 느낌이 가득한 예쁜 정원이 딸린 한정식집이었다. 잘 정돈된 정원을 가로질러 가옥 같은 정문을 지나자, 모두의 앞에 개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직원이 나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며 예약상황을 물어왔다.

“강이찬씨 이름으로 예약했는데요.”

“네, 확인해드리겠습니다. 강이찬님이… 아, 12시 30분 예약 맞으시죠?”

“네.”

“네, 바로 모란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옥의 모든 방은 단아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꽃이름을 쓰고 있었다.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잊고 있던 긴장감이 다시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손을 꽉 오므린 서련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옆에서 하진이 말없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그 체온에 기대 괜찮다는 말을 세 번이나 내뱉고 겨우 마음을 다스렸을 때, 모두의 걸음이 멈췄다. 이윽고 좋은 시간 되십시오, 라는 말과 함께 직원분이 허리를 살짝 숙인 것과 동시에 모란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전면 창에서 쏘아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이었다.

“어, 뭐야. 우리가 삼타잖아?”

“이제 오냐, 굼벵이들아? 하여간, 느려 빠져서는.”

“다 필요 없고, 우리 키키 왔냐?!”

햇빛을 받고 몸을 벌떡 일으키는 사람은 서련도 잘 아는 이였다. 바로 강이찬. 강이찬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벌써부터 뭘 집어먹고 있는 강마였다. 서련의 시선과 두 사람의 시선이 먼 거리에서 마주쳤다.

이찬은 어쩐지 십년감수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미소를 띠고 웃으며 어서 들어오라고 호탕하게 소리쳤다. 모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온돌방의 따뜻한 온기가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키키 형, 제 옆에 앉으세요! 제 옆….”

“어느 집 개놈인지 개나대네. 지네 길드도 아닌 주제에.”

“뭐 이 좆밥 새끼들아.”

서로 투덕거리는 원호와 강마를 놔두고 서련은 목도리를 풀며 하진의 옆에 슬쩍 자리 잡았다. 이찬의 시선이 마치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보듯 찡한 게, 어지간히 감동받은 듯했다.

“그래, 서련… 키키야. 오는 데 안 추웠냐?”

“네, 택시타고 와서요. 근데 아직 저희밖에 안 왔네요?”

“아, 절미들은 곧 올 거고 야생이는 역에서 리사랑 같이 만나고 오는 중이래. 10분 안쪽으로 다 도착할 거야. 뭐 먼저 먹고 있을래? 뭐 시켜줄까?”

“다 오면요.”

서련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이찬의 표정이 다시 찡해졌다. 물론 그걸 바라보는 하진은 심기 불편해 죽으려고 했지만 말이다.

“아니야, 먼저 시키자. 어차피 음식 나오려면 좀 걸린다.”

이미 밑반찬은 상에 조촐히 차려져 있는 수준이었다. 호박죽이나 묵, 간단히 전이었다. 서련은 그 중 호박죽을 내밀어 제 앞에 놔주는 하진의 태도에 본능적으로 수저를 집어 들었다.

“그래, 먹어. 먹고 있어, 서련아. 형 것도 줄까?”

“호박죽 진짜 맛있으니까 드셔보세요. 아니, 다 드세요.”

“제 것도 줘요?”

“나도 이거 안 먹는데, 형 드실래요?”

“아….”

여기저기서 서련에게 호박죽을 내밀어왔다. 서련은 수저를 쥔 채 난감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다 치워라.”

다행히 이 난감한 상황은 하진의 살기 어린 음산한 말에 금세 수그러들었다. 다들 제 쪽으로 다시 호박죽을 가져가서는 얌전히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건 이찬도 다르지 않았다. 작은 목소리로 독수리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묻지 않아도 그게 하진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죽을 말끔히 비우고 음식을 먼저 시켜놓겠다고 이찬이 호출 벨을 누를 때까지도 길드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가 10분이 훌쩍 지났을 때인데도 누구 하나 나타날 낌새가 없어 보였다.

낌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린 건, 서련이 하진의 몫으로 된 두 번째 호박죽을 비우기 시작했을 때였다. 두 술 떴을 때였나,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고 양손에 작은 쇼핑백을 가득 든 단발머리의 여성이 팔을 쫙 벌린 채 나타났다.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기치료까지 가능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 남둥이들 하이! 누나가 많이 늦었… 응?”

“왜요, 누나. 아직 다 안… 왔?”

뒤 따라 들어온 사람은 갈색 코트를 입은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사내였다. 약간 심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둘 다 방안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해졌다. 높게 치켜든 팔도 서서히 내려앉았다. 크게 떠졌던 눈은 나중에 가서는 껌뻑껌뻑 감기기 시작했다.

“그… 방을 잘못 찾았…나?”

“하하… 아닌 것 같은데요…. 저기 건블형 있어요, 누나….”

어떻게 속닥거린다고 말한 것 같기는 한데, 그 소리는 방에 앉아있던 모든 이의 귀를 타고 들어갔다. 그제야 건블이 튕기듯이 일어나서 새로 등장한 두 사람을 향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어서 와라, 어서. 리사랑 야생이 둘 다 오는데 수고 많았다. 여기 맞으니까 나가지 말고.”

“맞아요? 그럼 저쪽 앉아계신 잘생긴 남둥이들이… 이야…!”

“리, 리사 누나… 그러지 마요, 창피하잖아요….”

“저놈들 잘생긴 건 키키 빼고 모르겠고, 어서 앉기나 해라. 나도 아직 소개 못 받았다.”

건블리아의 말에 두 남녀가 이내 자리에 착석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소개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씩 웃으며 쇼핑백을 번쩍 든 리사가 그걸 건네며 통성명을 건넨 것이다.

“나는 다들 알기야 알겠지만, 휴리사입니다. 우리 남둥이들 주려고 내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역가서 이거 사 가지고 왔으니까, 자 받자.”

“아, 이럴 거면 우리도 뭐 준비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주는데 안 받을 순 없죠. 감사히 받겠습니다.”

“역시 리사 누님밖에 없네요. 어, 타르트네? 이야, 제가 타르트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그럼, 그럼. 그래서 여기서 누가 키키야?”

리사의 시선이 기대를 담고 반짝였다. 테이블에 팔을 대고 여기저기를 향하던 시선이 서련에게 잠시 멈췄다. 눈이 살짝 커지는 게 보였다. 서련은 뺨을 긁적거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저예요, 누나.”

리사는 아주 잠시 말이었다. 그러나 곧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모습으로 입을 슬쩍 막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 키키가 이렇게 예뻤구나. 와, 이건 메기가 아니잖아…! 그놈의 메기 소리는 대체 누가 먼저 내뱉었대!”

“누나… 그만해요. 키키 진짜 운다니까….”

“아차차…! 미안해, 키키야. 아이고, 우리 절미들 큰일 났네. 그렇게 메기메기 거리더니.”

“괜찮아요. 그리고 저보다는 리사 누나가 더 예뻐요. 진짜요.”

그 말에 리사는 고맙다는 듯 코끝을 한 번 찡긋거리며 웃었다. 게임에서도 밝고 호탕한 건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더 밝고 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 나는 야생닭인데, 애들이 너무… 잘생겼네. 형 쳐다보지 마, 얘들아…. 그래도 키키는 좀 많이 반갑고… 나와 줘서 고맙다, 키키야.”

“네, 저도 형 봐서 좋아요.”

“키키야, 그렇게 웃으면서 형 보지 마. 형 심약한 사람이야….”

눈을 꾹 감고 얼굴을 가리는 야생의 모습에 건블과 휴리사가 약속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딱 봐도 야생닭은 마음 자체가 참 여려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참 다정해 보이고, 배려가 가득한 태도와 행동을 보였다. 잔잔하게 웃는 모습도 서련과 같았다.

“자, 이제 다들 자기소개 좀 해주세요. 누가 누군지 정말 모르겠다.”

“아, 제가 묵요고, 이쪽이 호백조, 건블형 앞에 앉은 놈이 강마 새끼입니다. 아시죠? 블러더 강마요. 서련 형…이 아니고 키키형 옆에 앉은 저 인상 더러운 놈이 바로 그 유명하신 킬레아고요. 조심하세요, 물려요.”

“강마 새끼는 놔두고 저희만 기억하시면 돼요. 앞으로 뭐 계속할 거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아, 이 좆밥 새끼들이 은근슬쩍 후려치네?”

“아 저 친구가 강마야? 와, 강마야. 누나가 너 엄청 사랑하는 거 아니? 겁나 재밌어. 앞으로도 자주자주 놀러 와.”

“크으, 내가 이렇단다. 이 좆밥놈들아. 누님, 걱정 마세요. 키키형 있는 한은 제가 목숨 바쳐 놀러 갈 테니까.”

“어쩜, 얘들이 키키에 목숨 거는 이유가 있었네. 걱정 마, 얘들아. 내가 키키는 반드시 데리고 갈 테니까.”

“아니, 누나. 키키 허락도 좀 받고….”

처음 만났다고 볼 수 없는 친근감이 벌써부터 느껴졌다. 다들 친화력이 장난 아니었다. 서련은 마저 먹으라고 죽 그릇을 떠미는 하진의 손길에 남은 호박죽을 퍼먹으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길드원들을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 안 하고 있는 데도 불편함이 없었다. 옆을 힐끗 보자 턱을 괸 채 흐뭇하게 웃고 있는 이찬의 모습이 보였다. 탈 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떠들었을까, 절미들보다 음식이 먼저 나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들 처음엔 노크 소리에 절미들인가 싶었는데, 철부지들이 그럴 리 없다는 걸 깨닫고는 다들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노크 뒤에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이마에 검은 두건을 두른 젊은 사내였다. 많게 봐야 30살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는 날카로운 인상과 정갈한 태도, 제법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딱딱하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리고 상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상이 다 차려질 때까지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그게 예의라는 듯 그렇게 했고, 태도는 주눅 듦 없이 진중했다.

참 대단하다 싶은 생각에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상 아래로 하진의 손끝이 닿았다. 닿자마자 얽혀드는 손이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련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마주 얽고 손등을 쓸어주었다.

다행히 절미들이 나타난 건, 직원이 마지막 음식을 상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사내 둘이 안을 염탐하고 있었다.

절미들의 등장을 알아챈 건, 음식을 내려놓고 나가는 직원의 뒷모습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이동했을 때였다. 그리고 때마침 문 앞을 기웃거리는 두 사내를 보게 됐는데, 이찬과 휴리사, 야생닭이 동시에 소리 지른 덕분에 모두는 그게 절미들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야, 이놈들아! 왜 이렇게 늦었어!”

“푸핫, 남둥이들 어색해하는 거 봐!”

“아니, 니들 거기서 뭐 하냐?!”

세 사람의 말에 문 앞을 기웃거리던 두 사람이 이내 주뼛주뼛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뒤로 탁 하고 문이 닫히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게임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저 위대하게 늦으신 분들이 누구냐 하면 말이다, 키키야. 바로 오른쪽이 순한양님이시고, 왼쪽이 베르르님이시다. 자, 다 같이 늦으신 우리 고딩님들께 박수.”

이찬의 말에 다들 영혼 없는 모습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건 그렇게 주뼛거리던 두 학생이 그 박수 소리에 씩 웃으며 좋아했다는 거였다.

“역시, 우리가 없으니까 분위기가 안 사나 봐요?”

“아니, 박수까지 필요 없는데. 역시 우리밖에 없죠? 크으, 쩔미들이란.”

“어휴, 좋단다.”

“됐으니까 와서 앉아라, 이 철딱서니 없는 것들아.”

절미들의 양손에는 휴리사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더 바리바리 했다. 인천에 산다고 들었는데 저걸 어떻게 다 들고 온 건지, 참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키키형! 우리 키키형 어디 있어요? 우리가 형 주려고 잠옷 가져왔는데.”

“보고 놀라지 마요, 형. 우리 합작이니까 평생 간직하고요!”

“저것들은 오자마자 키키부터 찾고 있지.”

이찬이 피곤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쇼핑백을 들고 뉴페이스를 바라보던 절미들은 순간 어깨를 움츠리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들 기세들이 한가닥했기 때문이었다. 한술 더 떠, 게임에서만 느껴졌던 물어뜯을 것 같은 말투.

“왜? 형들 와꾸가 좀 돼서 놀랐어, 절미들?”

로운의 말에 절미들의 얼굴이 동시에 와락 구겨졌다. 차마 반박은 못 하고 뭐 저런 미친놈들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보는데, 딱 봐도 짜증 나 죽겠다는 모습이었다.

“훠이훠이, 광견님들은 저리로 가시죠? 저흰 키키형하고만 놀 거거든요?”

“와, 와꾸는 무슨! 우리 키키형이 더 잘생겼다!”

“근데 왜 말을 더듬어? 니들 키키형이 누군지는 아냐?”

절미들의 시선이 힐끗힐끗 움직이다 어느 한 곳에서 딱 멈추었다. 바로 서련이었다. 시선이 고정되자마자 두 절미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다가 이내는 멍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붕어처럼 입까지 벌어졌다. 그걸 보자마자 이찬과 휴리사, 야생닭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휴리사는 상까지 내리치며 웃고 있었다.

“애들 표정 봐! 표정…! 푸핫! 아니, 길마 오빠 쟤들 좀 어떻게 해봐요, 아 눈물 나잖아.”

“그놈의 메기메기 거리면서 그렇게 놀리더니…! 아, 배 아파 죽겠네, 하하!”

웃는 소리에도 절미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두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뒤늦게야 침을 꼴깍 삼키고 저들끼리 꼭 붙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서련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사실 질문이라기엔 좀 애매한 말이었다.

“메, 메기 형…?”

“혀, 혀엉….”

무슨 귀신 보듯 했다. 결국 보다 못한 서련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련이 웃자 절미들의 표정도 더 심각해졌다. 이 겨울에 땀까지 나는지, 손등으로 이마까지 훑어 내렸다.

“형 맞아. 베르야, 양아.”

“진짜… 우리 메기형 맞아요…?”

“지, 진짜…?”

“응, 맞아.”

서련의 확답에 베르르와 순한양은 잠시 망설이다 손에 든 쇼핑백을 서련에게 훅 내밀었다. 서련은 놀랄 것도 없이 그걸 받아들였다. 안을 열자 분홍색의 아기자기한 메기 그림이 들어간 수면 잠옷이 투명 봉투에 싸여 접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꺼내서 뜯어볼까 하다가, 어쩐지 아까운 느낌이 들어 서련은 그냥 품에 꼭 안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절미들에게 소리 없이 웃어주었다.

“직접 그렸다더니, 예쁘게 잘 그렸네. 잘 입을게.”

서련의 미소에 안심이 든 건지, 그제야 절미들 얼굴이 해사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다시 뻔뻔함을 되찾고 서련에게 몸을 기울이다시피 말을 걸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메기 형! 잘 그렸죠? 저 미대 지망생이라니까!”

“그 잠옷은 제가 디자인했어요. 우리 키키형 주려고 한 거니까, 광견님들 넘보지 마요.”

“절미들 이 형들은 눈에 안 들어오나 봐?”

“뭐야?! 누나는 잠옷 안 줘?!”

“쩔미들 안되겠네. 형들하고 이따 산책 좀 나갈까?”

“아, 됐거든요! 내가 왜 댁들이랑 산책까지 가는데! 난 우리 메기… 키키형 옆에 있을 거니까 저리들 가요.”

“새끼들이 뒤지고 싶나, 뒤로 안 가?”

“말하는 거 보니 이분이 그 유명하신 킬레견이시네.”

“이놈들아! 키키 굶어 죽겠다! 밥부터 먹고 놀자. 어?!”

시끌벅적한 식탁 위로 이찬이 젓가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 말에 뒤로 물러나던 모두가 이미 식사 중인 서련을 보고는 얌전히 수저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보단 덜 하지만, 그런대로 두런두런한 말들이 오가며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키키형, 이제 현모 때마다 나올 거죠?”

“쩔미들 버릴 꼬야?”

“야, 야! 누가 저놈들 좀 끌고 나가라. 키키 밥 좀 먹게 놔두라고. 쟤 안 그래도 살 안 쪄서 죽겠고만 왜 자꾸 말을 시키냐.”

“어휴, 어르신. 알겠으니까 배 좀 집어넣고 얘기해요.”

“묵요야… 절미들 좀 어떻게 못 하겠냐?”

“에이, 맡겨만 주세요. 절미들 밥 먹고 형들이랑 산책 가자. 와꾸 되는 형들이 한 번 놀아줘야지.”

“아오, 먹으면 되잖아요.”

“와꾸는 무슨… 씨이….”

말 걸고 싶어 죽겠는 것 같은 절미들의 모습에도 서련은 그냥 말없이 웃었다. 어울려 주고 싶긴 한데, 지금은 그보다 배가 더 고팠다. 옆에서 열심히 반찬을 나르는 하진에게 한 소리 듣기도 무섭고.

일단 배 좀 채우고 놀아주자 싶어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데 그걸 또 가만히 보고 있던 절미들이 눈을 반짝이며 대뜸 물어왔다.

“우리 키키형은 시계도 예뻐. 손목 얇은 것 봐. 그래서 그 시계 어디서 샀어요?”

“이거?”

서련은 제 왼쪽 손목에 있는 시계를 힐끗 보고는 시선을 굴렸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음… 형이 애인 사준 건데…. 커플로.”

반응은 다른 곳에서 뛰어나왔다. 그러니까 서련의 라인에 앉아 맛있게 밥을 먹고 있던 이찬에게서.

“푸웁…!”

“아, 형! 뭐 하는 거예요! 아악, 더러워!”

덕분에 그 앞에 앉아있던 강마만 아주 난리가 났다. 다행히 음식이 아닌 물이라… 그게 더 끔찍한가. 어쨌든 입에 든 걸 내뿜고 이찬은 혼자 켈룩켈룩거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후에는 죽다 살아난 모습으로 서련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경악을 가득 띄우고.

“아니, 뭐, 뭣? 뭐?!”

“왜 길마 형이 그래요?”

“내가 저 메기놈 아비다! 됐냐?!”

“우리 어르신 물 뿜더니, 뭐 잘못 드셨나 보네. 어휴, 그러게 천천히 좀 먹지.”

야생닭과 절미들의 타박에도 이찬은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한참이나 서련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하진에게 옮겨졌을 땐, 자식을 시집보낸 아버지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세상사 다 그렇지, 뭐. 오냐오냐 키운 내 잘못이지. 강마야, 잔이나 받아라.”

“역시 길마님! 그럼 이 강마가 블러더를 대표해서 받겠습니다.”

술은 또 언제 시켜놓은 건지, 상 아래에서 갑자기 소주가 한 병 튀어나왔다. 그걸 본 강마가 눈빛을 빛내며 또 상 아래에서 소주잔을 꺼내 들고 슥슥 닦더니 냉큼 내밀었다. 아주 신난 모습이었다.

“아, 치사하게 둘이서만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고딩들은 저리 꺼지자.”

“뭐예요. 오늘은 술 안 마신다면서요?”

“됐고, 니들은 밥이나 드세요.”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원성의 말에도 이찬은 가볍게 퉁겨내며 강마와 잔을 부딪쳤다. 나중에는 다들 따로 술까지 시키는 상황까지 가게 됐는데, 다행히 절미들은 로운과 원호의 감시하에 음료수를 들이켜며 잔을 부딪쳐야 했다.

물론 서련은 그때까지도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밥 한 공기를 겨우겨우 비우고 나서야 하진의 젓가락질도 멈췄다. 슬쩍 하진의 앞을 보자, 아직 손도 대지 않은 공깃밥이 처음 모습 그대로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밥 먹어, 하진아.”

“어, 새끼들이 말 걸면 무시해.”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조용한 말이었다. 서련이 픽 웃자, 그걸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하진이 그제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 간혹 앞에서 누군가 술을 따라주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곧장 마시기까지 했다.

“잠깐 담배 피우고 올 테니까, 놀고들 있어라.”

이찬이 품을 뒤지며 일어난 것도 그때였다. 이찬은 서련에게 작게 눈짓하고는 시끌벅적한 공간을 가르며 방을 나섰다. 서련도 곧장 외투를 챙겨 입고 일어났다.

“하진아, 잠깐 형하고 얘기하고 올 테니까 너 밥 다 먹고 있어.”

서련의 말에 일어나려던 하진의 몸이 멈칫 굳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바라보는 시선에 서련은 작게 ‘이번만.’이라고 속삭이며 일어났다. 한숨이 들려오긴 했지만, 하진은 딱히 서련을 잡지 않았다.

서련이 밖으로 나왔을 때, 이찬은 등을 구부린 채 화단 한쪽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있었다. 외투도 입지 않아 벌벌 떨면서도 뭐가 그렇게 상념이 많은지,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서련이 나온 걸 보자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앉아라. 감기 걸릴까 봐 안 보내줄 줄 알았는데, 웬일이냐.”

“요새는 이해해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냐.”

이찬의 옆에 자릴 잡고 앉자, 찬바람에 섞인 술 냄새가 맡아졌다. 독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게 저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런 서련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이찬이 별안간 실없이 웃었다.

“너 때문인 건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표정 풀어라.”

“…네.”

서련은 그냥 미소를 띠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찬이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그가 고뇌하는 게 어떤 문제인지 잘 알기에 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었다. 아주 예전에는, 이찬에게 등을 호되게 맞았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서련은 잘 알고 있었다.

“좋냐?”

주어 없이 튀어나온 목소리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서련은 대답했다. 네, 하고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이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련아, 나는… 형은 말이야. 네가 누굴 좋아하든 어떤 성향이든, 어떤 선택을 하든, 다 괜찮아. 정말… 다 괜찮아. 근데 딱 한 가지…. 형은 네가 자신을 좀 챙겼으면 좋겠다. 형은 그거면 돼. 다른 거 모르겠고, 앞으로도 모를 거고… 그냥 너 행복한 거, 그거 하나면 돼. 그거면 안 되겠냐…?”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사실 기억나진 않았다. 다만, 그건 박건우를 알게 된 후 생겨난 건 확실했다.

예쁘다는 말. 그 말에 현혹되었고, 상처 입고 나서는 그 말만큼 싫은 게 없어졌다. 원망도 많이 했는데, 사실상 모든 원망은 돌고 돌아 스스로에게 돌아왔다. 하진과 함께할 꿈을 꾸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던 것도 스스로에 대한 나약함이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저요, 형…. 형한테 감사해요. 감사하고… 많이 존경해요. 제가 형이었다면… 저는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이렇게 못 했을 거예요. 근데 형은… 저 쉼 없이 잡아 줬잖아요. 잡아 주고 지탱해 주고… 위로해 줬잖아요. 제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는 거…. 그 누구보다 형 힘이 커요.”

스스로가 이겨낸 게 아니다. 서련은 생각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고, 사랑을 받고 있었다.

“많이… 정말 많이 생각했어요. 멀어지려고도 많이 노력해봤고… 억누르려고도 많이 애썼는데… 안 되더라고요. 한 번 쏟아지니까 계속 쏟아져요.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도… 그렇더라고요.”

4번째 휴가를 나왔던 날. 피시방에서 하진이 저를 끌어안고 울었던 그 날부터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아직 박건우를 마음에 담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하진을 그냥 둘 정도로 거리를 두기도 했다.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로운과 원호. 그리고 강마.

“그냥 혼자 있고 싶지 않았던 건데. 외로워서 그랬던 건데… 아무 대가 없이 호의를 줘요, 애들이. 내 속이 문드러져서 그런지 처음엔 호의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저랑 달리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까 그냥… 그냥 좋더라고요. 전부… 예쁘더라고요.”

시원한 웃음이 매 순간 따라다녀서인지, 스스로도 밝아진 느낌이었다. 투덕거리다가도 마음 맞아서 의기투합할 땐 또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웃는 날이 많아져서인지, 마음의 안개도 걷히는 느낌이었다. 예쁘다는 말. 그게 뭔지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진이는… 음, 알잖아요.”

“알다마다. 네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잘 알다마다. 내가 너 군대 갔을 때 그놈한테 엄청나게 시달렸어. 지금이야 독수리지, 어? 그때는 호랑이에 곰에 표범까지 튀어나왔어, 인마.”

“그건… 어… 몰랐어요. 죄송해요, 형.”

“네가 죄송해야 되겠냐? 됐다. 내가 그때 그놈 한 대 때리려다가 지도 얼마나 답답하고 속상했으면 그랬겠나 싶어서 그냥 두었다. 나중에 사과나 제대로 하라고 독수리한테 전해줘라.”

서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으니, 모든 게 추억처럼 느껴졌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힘들 땐 이렇게 의지하면서, 앞으로 좀 더 웃으면서 살면. 그러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 새끼는… 또 안 찾아왔고…?”

“…네. 거절했으니까요.”

그 이후에 하진이 박건우를 잡겠다고 며칠간 이를 갈며 오피스텔 근처를 뒤졌는데도 못 본 걸 보면, 다시 찾아오진 않은 모양이다. 물론 확신할 순 없었다. 그래도 여지를 줄 만한 말을 하진 않았으니, 못 볼 꼴을 보일 게 아니라면 다시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하진이 그놈이 못 해주면 형한테 와라. 형 집에 남는 방 있어.”

“형 곧 결혼할 거잖아요.”

“한참 멀었거든! 내년에도 할까 말까다. 그리고 너 사람 알아 가는데 6개월이면 충분하거든? 그 새끼가 손만 들었다 하면 바로 뛰쳐나와! 한 끼라도 굶겨도 뛰쳐나와! 너 하나 재워줄 여력 되니까.”

6개월이 아닌 6년을 함께했다는 말은 생략하기로 했다. 서련은 그 어느 말도 확답을 해주지 않았다. 지금이야 하진이 그러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을 해 봐야 설득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서련은 이번에도 그냥 웃었다. 그 모습을 이찬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곧 얼어붙은 화단으로 향했다. 정확히 어딜 보는지 모르는 눈동자가 몇 번이나 깜빡였을 때, 이찬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형은… 서련아…. 형은 네가 이겨낼 줄 알았어.”

서련의 손끝이 멈칫 굳어졌다. 누구보다 서련을 걱정하고 격려했던 사람이었다. 박건우의 악연을 제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늘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짐의 일부를 덜어낸 모습으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오늘… 와 줘서 고맙다. 다시 일어나줘서 고맙다…. 형이 많이 미안하다, 서련아.”

서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서련은 눈물 대신 웃어주었다. 핀잔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 그 소리. 됐어요, 형. 왜 항상 형이 미안한데요. 철없던 제가 미안하죠.”

이제는 정말 괜찮아졌나 보다. 이찬의 붉어진 눈가를 보며 미소가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정말 괜찮아졌나 보다.

서련도 이찬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봄이나 여름이었으면, 예쁘게 폈을 꽃이 지금은 헐벗은 줄기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잘 정돈된 모습에서는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문득 본 적 없는데도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한동안 이찬은 말이 없었다. 간혹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서련은 모른 척 앉아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문득 서련의 옆으로 익숙한 신발이 들어왔다.

“뭐 얘기를 해? 왜, 아주 얼어 죽이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하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진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살벌한 표정으로 이찬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찬은 하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애써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옮겼다.

“형 먼저 들어갈 테니까, 천천히 들어와라.”

하진은 이찬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련이 하진의 소매를 잡아 쥔 건, 이찬의 모습이 한식당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을 때였다.

“좀 앉아있다 가자, 하진아.”

서련이 하진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서련의 뺨을 본 하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찬이 앉았었던 자리에 몸을 앉혔다. 차가워진 서련의 손이 금세 하진의 양 손에 파묻혔다.

“5분 뒤에 들어가. 그 이상 안 봐줘.”

“응….”

서련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툭 하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열기를 전하던 손이 떨어지고 서련의 언 뺨 위로 대신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서련은 꾸물거리듯 움직이며 그 손길에 뺨을 깊게 묻었다.

“…하진아.”

“왜, 뭘 잘했다고 난린데.”

“좋아한다고.”

하진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아주 찰나라, 한편으로는 멈칫한 게 맞는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나른한 고백에 머리 위로 한숨이 떨어졌다. 서련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저 뺨을 녹이는 체온만 쫓았다.

“왜 아주 잡아먹어 달라고 하지 그래.”

이를 갈듯 말하는 소리에 서련이 그제야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저를 내려다보는 깊고 까만 눈을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맞아.”

하진은 아무런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조용했고, 잔잔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서련에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냐고 무언으로 묻고 있었다.

서련의 언 뺨을 녹이는 손끝이 서련의 입술을 지그시 눌러 문질렀다. 체온이 도는 느낌. 그게 좋아서 서련은 웃었다. 그리고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맞다고.”

서련의 머리는 다시 하진의 어깨 위로 툭 숙여졌다. 입술을 누르던 손길이 이번엔 시리게 드러난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단지 그렇게 감싼 채 하진은 긴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탁한 목소리. 서련은 그냥 웃었다. 지금은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리자, 같은 시계를 찬 손이 서로 얽혀있는 게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시계 한 쌍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두 시계의 초침을 보던 서련은 추위에 어깨가 떨릴 때 즈음에야 하진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춥다, 들어가자.”

하진은 이때만을 기다린 것처럼 서련의 손목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어지간히 추웠던 모양인지, 한옥집 안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성큼성큼 빨랐다.

“먼저 들어가 있어. 딴 데로 새기만 해.”

“너는?”

“계산.”

으르렁거리듯 말한 하진이 서련의 말에 카운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어디 안내를 하러 갔는지, 직원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서련은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속 쓰려 하던 이찬을 떠올리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얌전히 걸음을 돌렸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한식당의 단체방은 가득 차 있었다. 걸음마다 사람들 희미한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조용한데, 혼자 있지 않은 느낌.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일자로 늘어진 복도를 걷던 와중 서련은 한쪽에 마련된 휴게 장소에 앉아 전화 중인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등을 기대고 앉아 불퉁한 태도로 통화중인 사람은 놀랍게도, 아까 서련네 방에 음식을 서빙했던 사내였다. 이마에 검은 두건을 둘렀던.

서련은 모른 척하며 지나치려 했다. 의도치 않게 통화 내용을 듣기 전까지는.

“아, 오늘 바빠서 못 들어간다고. 왜. 막깽이가 또 놀아 달래? 아님 뭐, 토순이 죽었다냐? 그놈의 토순이 대신 몸빵 하기만 하라고 해. 아, 안된다고 새끼들아. 거 자꾸 귀찮게 하네. 야이, 씨. 토순이 바꿔. 아니, 막깽이 바꿔. 바꾸라고, 이 돼지새끼들아.”

막깽이. 토순이. 그 단어를 듣자마자 서련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제야 예전에 얼핏 들었던 내용이 스치듯이 떠올랐다. 첫 번째 현모 때, 어느 한정식 집에서 현모를 한 적이 있다는 맴맴돌의 말을. 엄청 좋았던 한정식 집이었다는 것과 화단의 꽃이 예뻤다는 말. 그리고 이마에 두건을 두르며 서빙을 책임졌던 비연에 대한 말도.

서련의 눈이 커진 건, 사내가 서련의 존재를 깨닫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동시에 서련의 놀란 눈과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거기에 더해 타이밍 좋게 복도의 끝에 있던 방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 하나가 튀어나와 서련을 부르짖었다.

“키키형! 아니, 잠깐 나갔다 온다는 사람이 어디까지 갔다 오는 건데요! 아, 메기형!”

“킬레아 형이 찾으러 나갔는데?”

“아! 저기 있네. 키키형 거기서 뭐 해요!”

“이놈의 메기가 또 어딜 싸돌아 다니려고! 메기야! 빨리 안 들어오냐!?”

“길마 형, 그러지 마요. 키키 운다니까….”

“아니야. 내가 봤을 때, 키키는 소리 없이 강해. 야생아, 너만 강해지면 된다.”

서련의 고개가 다시 앞쪽으로 홱 돌아갔다. 저 멀리서 저한테 오라고 손짓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기…?”

아니, 그보다는 확인하는 투에 가까웠다. 힐끗 보자, 눈썹을 휘어 뜬 사내가 서련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뒤이어 하진이 나타나면서 짧은 만남은 거기서 끝이 나버렸다.

“안 가고 뭐 해.”

“어? 아… 지금 가려고 했어. 가자.”

서련은 자리를 뜨기 전, 검은 두건을 두른 사내에게 설핏 웃어주었다. 예의를 차린 건 아니고, 그냥 다음에 게임에서 만나자는 그런 의미의 인사였다.

서련이 사라지고 나서야 사내는 핸드폰을 툭 내려놓으며, 어이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잊고 있던 통화를 끝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향하는 곳은 한창 바쁜 주방 쪽이었다.

“하아, 뭐 이딴 경우가…. 엄마, 모란 방에 서비스 좀 넣어줘요.”

“왜? 아는 사람들이야?”

그 말에 사내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어. 아는 사람들이야.”

“알겠어, 엄마가 맛있는 걸로다가 많이 넣어줄게.”

“됐어. 엄마는 뭘 해도 맛있어. 그냥 적당히 해서 줘요.”

적당히라는 말이 무색하게 서련네 방에 들어온 건, 놀랄 만큼 푸짐한 서비스였다. 서비스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다들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뭔 일이냐고 수군거리는데, 전후 사정을 아는 서련만 냅다 젓가락을 들고 손을 뻗었다.

“키키 형, 오늘 엄청 잘 먹네요. 진짜 맛있나 보다.”

서련은 서빙을 마치고 나가는 검은 두건을 두른 사내를 힐끗 보며, 웃으며 대답했다.

“응, 맛있네. 특히 서비스로 들어온 거, 이거 진짜 맛있다.”

“니들 이거 오늘 다 먹고 가야 된다? 형 주머니 거덜 내는 거니까 다 먹자?”

이미 계산된 걸 모르는 이찬이 제발 좀 다 먹으라며 떠미는 탓에, 길드원들은 다시 젓가락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하진은 서련이 잘 먹는 게 좋은지, 배부른 사자처럼 앉아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 먹고 가야겠네.

평소보다 많이 들어가는 걸 보니, 몸도 그걸 아는 모양이었다. 늘 이러면 좋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배부른 소리라는 걸 깨닫고 웃고 말았다.

따뜻하고, 배부르고, 딱 좋았다. 거기에 발아래 있는 쇼핑백에 든 선물까지. 절미들 뒤에 아직 수북이 쌓인 쇼핑백을 봐서는 갈 때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줄 생각인 듯했다.

다음에도 만나자. 그다음에도. 그땐 제가 길드원들에게 선물을 해 줄 것이다.

무얼 해줄까 벌써부터 고민하며 서련은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맛있어서 그런지, 젓가락을 놓을 수가 없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유난히 따뜻했던 날, 그리고 모두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귀에 부드럽게 들어오던 날이었다.

첫 번째 현모. 서련이 그리워하던 그 현모였다.

<딜러의 활약기>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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