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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24/28)

14장.

하진이를 좋아한다고 깨달은 건 4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때에는 갈 곳이 없었다. 도망치듯 하진에게서 나온 후라, 가진 것이라곤 이찬에게 맡겨 놓은 옷과 카드가 다였다. 그래서 3번째 휴가 때까지는 이찬의 집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민폐로 다가와 4번째 휴가 때는 피시방과 찜질방을 전전했다. 사실 모텔에 갈 수도 있었지만, 제대 후 독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돈을 최대한 아끼는 게 최선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미련하게 행동하고 답답하게 굴었었다. 휴가 나온 걸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서련은 이찬에게 휴가 나온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그날은 피시방에 있던 때였다. 새벽 내도록 게임을 하다가 너무 졸려 구석 자리에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을 때였나, 누군가의 손에 의자가 홱 돌려졌었다.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확 깰 정도로 놀라 올려다본 곳에는 하진이 있었다. 화가 잔뜩 난 눈동자를 본 순간, 한순간 숨이 턱 막혔었다. 당장이라도 물어버릴 것처럼 이를 드러내고 있으면서 잔뜩 상처받은 모습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묻지도 못했다.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울 것처럼 일그러지던 그 눈매가 그때는 왜 그렇게 가엾게 보였는지, 눈물이 왈칵 나올 정도였다. 알 수 없는 서러움과 미안함이 가득 떠올랐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덜덜 떨며 파고드는 그 손길에 묻어난 두려움이 무얼 떠올린 건지 모르겠지만, 왜인지 그땐 그냥 안아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없이 안아주었다. 아니, 안겼었다.

하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 튼 서련의 입술을 보며 혼자 아프고 괴로워했다. 적응이 힘들어 불면증으로 입술이 다 텄던 때였는데, 하필 시기가 안 좋았다. 그게 뭐라고 하진은 제가 더 아픈 것처럼 눈물을 터트렸었다.

늘 강하게만 보였던 그 얼굴에 맺히는 눈물을 본 순간. 그냥 그때 깨달았다. 그 모습이 눈물이 날 만큼 고마우면서 어디 갈까 무서워 저를 꽉 잡고 있는 그 손길에 깨닫고 말았다.

그제야 하진이 한 모든 행동이 단순한 호기심과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가 바라보면 매 순간 숨이 막힐 것 같던 것도, 허를 찔린 듯 꿈쩍도 할 수 없던 이유도,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서련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호적상의 형제. 탄탄대로인 그의 앞날. 치부가 될 수밖에 없는 과거. 걸림돌. 그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그 마음이 식기를 기다리고, 손을 뻗어도 데이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때 웃어주며 진짜 형제처럼 지내려고 했다.

같은 마음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서련에게 하진은 망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서련 형.”

서련의 고개가 일순 번쩍 들렸다. 놀라 바라본 곳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로운과 원호가 있었다. 서련의 시선이 아래로 힐끔 향했다. 손에는 포크가 쥐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접시에 담긴 먹다 만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서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안해… 어, 너무 맛있어서.”

“에이, 그렇게 맛있으면 말을 하지. 한판으로 사줄까요?”

“아니. 하진이가 어차피 못 먹게 해서….”

“와, 우리 서련 형 여전히 밥을 안 드시나 보다. 개하진이 웬만한 건 다 들어주는데 이렇게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안 먹는 건데요?”

“나 생각보다 많이 먹어. 정말이야.”

물론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나날이 퍼다 주는 밥양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 요새는 그것도 감당하기가 힘들어 푸딩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을 정도다.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노린 것도 같고.

“형, 한 조각 더 사줄게요. 개하진 없을 때 빨리 해치워요.”

“개하진 눈치 보며 사줘야 하는 우리는 대체 전생에 개하진한테 뭔 짓을 저지른 거냐.”

“내 말이.”

어서 먹으라는 듯 등 떠미는 로운과 원호의 태도에 서련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며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피시방에서 그 난리를 치고 나온 후, 밥 먹자고 부추기는 로운의 말에 서련이 동의하면서 함께 밥을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필 밥을 먹고 나온 그 길목에 크리스마스 이브 때 케이크를 먹었던 카페가 자리해 있었다.

멀어질 때까지 그 카페에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는 서련의 시선이 서글퍼질 정도까지 가자, 결국 하진이 욕을 내뱉으며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그걸 보는 로운과 원호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배를 잡고 낄낄거리기 바빴다.

그 결과 지금은 이렇게 다시 마주 앉아 디저트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하진은 아버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카페 창밖 너머로 보이는 하진의 뒷모습이 무정한 아들이라고 티를 내고 있었다. 늘 전화는 거는 건, 아버지 쪽이었다. 어쩐지 그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련 형,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요.”

“어?”

“하진이 저래 보여도 생각 깊은 놈이니까.”

서련의 시선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웃고 있는 로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꾸밈없는 미소. 그늘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미소였다.

“그건 나도 인정. 개하진 저게 생각 없이 행동하는 거 같아도... 안 그래요. 아, 형에 관련된 건 좀 예외고요. 그래도 저놈 놀랄 만큼 사리분별 잘 따지고 자기 유리한 쪽으로 결과 다 가져와요.”

타산적이라는 소린가. 칭찬인지 흉인지 모를 소리가 원호의 입에서 나왔다. 원호 역시 시원할 정도로 씩 웃고 있었다. 신뢰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실 저희는 별로 걱정 안 돼요. 어련히 잘 데리고 살 거라고 생각하고요.”

“근데, 형. 만약에요. 정말 만약에… 하진이가 이건 아니다, 싶은 행동 하게 되면… 그땐 저희한테 꼭 말해주세요. 그때는 저희가 진짜 반 죽여 놔서라도 사람 만들어 놓을 테니까.”

“강마까지 합세해서 아주 제대로 고쳐 놓을게요.”

서련의 치부를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서련은 그 말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련은 아직 하진에게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그런 서련에 비해 로운과 원호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많은 추억과 시간을 공유했다.

서련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서련 형. 하진이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아, 물론 앞으로도 더 많이 만나고 저희가 조금씩 알려드리긴 할 건데, 음… 저 새끼는 죽을 때까지 말 안 할 거 같으니까 우리라도 말 해줘야죠.”

로운이 하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들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스칠 때 즈음, 로운이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동자로 서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진이요. 저놈, 형 포기 못 해서 이제까지 이 갈고 살던 놈이에요. 몇 년째인지도 몰라요. 저희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 상태였으니까… 절대 한순간 판단으로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희도 있잖아요.”

알고 있었다. 매 순간 진심으로 다가오는 하진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호기심인줄 알았던 그 감정이 식기만은 기다렸는데, 식지 않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때 짐작했었다.

“너희는… 아무렇지도 않아? 친구잖아. 바른길로 가길 원하잖아.”

“사실 모르겠어요. 이게 맞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원래 뭐든 답은 없잖아요. 근데 형. 하진이 정말 많이 힘들어했어요. 몇 년을 그렇게 지켜보니까… 저는 그냥 저놈 행복한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들더라고요.”

“에이, 그리고 하진이 성격 알잖아요. 저 성격에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되는데, 저희가 말린다고 뭐 듣긴 하겠어요? 저희를 세뇌시키는 게 더 빠를걸요? 그냥 저희는 언제 봐도 웃으면서, 나중에 후회하더라고 그땐 그랬지, 하면서 평생 친구로 지내고 싶어요. 거기에 형도 있으면 더 좋을 거고요.”

“저희요, 형 진짜 많이 좋아해요. 하진이만큼은 안 되겠지만, 그다음으로? 하하, 저희가 이렇습니다.”

로운과 원호는 그 말과 함께 동시에 활짝 웃어 보였다. 개구진 표정 위로 떠오른 진심이 거짓 없이 전해졌다. 워낙 밝은 모습이라, 마음이 뜨거울 정도였다. 아니, 손끝을 타고 오르는 감각이 화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 막상 다 말하려니 생각이 안 나네. 뭐… 시간은 많으니까.”

“아! 보여줄 것도 많다, 참. 뭐부터 보여줘 볼까…. 아, 이거 한번 보실래요?”

대뜸 제 핸드폰을 내미는 원호의 태도에 서련의 시선이 앨범을 찾아들어가는 손끝에 고정되었다. 한참이나 무언가를 찾던 원호는 원하는 걸 찾았는지, 탄성을 터뜨리며 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이거 고1때 찍은 건데요. 이때가 하진이 생일이었거든요. 아침부터 등교해서 실실거리는 게 이상해서 자는 거 깨워서 찍은 건데, 완전 취중진담 수준이니까 잘 보세요.”

시끄러운 교실이었다.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리고,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동영상에 고스란히 담긴 추억의 영상이었다.

맨 처음 보인 건,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하진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비몽사몽한 채 인상을 팍 찡그린. 저 때도 체격이 참 좋았었네, 하고 새삼 감탄하는데 하진의 짜증 가득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 시발… 어쩌라고. 안 끄냐?>

<개하진씨, 오늘 뭐 처먹고 왔다고?>

<케이크 먹고 왔다고, 시발! 케이크 몰라? 니들은 생일날 케이크도 안 먹고 다니냐? 아, 니들은 모르겠네. 십억을 줘도 못… 시발, 안 끄냐고.>

<개하진씨, 그래서 우리 건?>

<인터뷰를 하고 지랄이야. 내가 왜 니들 걸 챙겨 와야 되는데. 나 먹기도 아까워서 뒤지… 하…. 좋은 말로 할 때 카메라 꺼라.>

<얘째럐걔~ 무슨 케이크으~?>

<생크림이다, 생크림. 됐냐? 아, 시발 새끼들아. 맞기 전에 빨리 카메라 꺼라? 왜 자는 사람 깨워가지고 지랄들이야.>

<와, 개하진씨 졸라 맛있었겠다. 혼자 처먹고 오니까 맛있었냐?>

<어. 아주… 예뻐 가지고…. 그놈의 계란말이는 왜 꿈에도 나오고 지랄이… 야이 씨, 저리 안 꺼지냐?>

<크큭… 겁나 웃기네. 야, 계란말이 졸라 맛있었다는데? 다음부터 개하진 인터뷰할 때 재운 후에 깨워서 해라. 순순히 대답하는 거 봐라.>

<케이크… 니들한테 안 줘, 좆까. 아, 졸려 죽겠네. 아니, 예쁜 게… 아침부터 사람을… 내가 그거 끄라고 했다.>

<개하진 미친거 같은데? 잠 아직 덜 깨신 듯? 혼자 나불나불, 취중진담이냐?>

지금보다 앳된 모습의 하진이었다. 그마저도 졸음기 가득한 모습으로 몇 번이나 하품을 쩍쩍해댔다. 고등학교 1학년의 하진과 친구들이었다.

신기했다. 그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좋아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도 그럴게, 당시 서련이 보기에 하진은 마지못해 꾸역꾸역 먹는 걸로 밖에 보이질 않아서 서련은 상당히 마음 졸여야 했다.

전혀 몰랐던 이야기. 그래서인지 그냥 기뻤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모습 속의 하진은 굉장히 어렸고, 마주 안아주고 싶을 만큼 어린 티가 묻어나고 있었다. 덩치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그런 어린 분위기가 놀랄 만큼 묻어나고 있었으니까.

“더 있는데 보여드려요? 아, 이거 서련 형이 알려나.”

“어! 야, 잠깐만! 이거 보여줘, 이거.”

자기들도 옛날 일을 봐서 좋았는지, 로운과 원호는 신이 난 모습으로 서련에게 이것저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서련은 볼 때마다 웃음을 터뜨려야 했다. 철없이 놀던 학창시절의 하진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수없이 넘어가던 사진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을 때, 처음으로 서련의 어깨가 움칫 굳어졌다.

“그리고 이게 개하진이 엄청 아끼는 건데, 술 처먹더니 갖고 나와서 자랑하더라고요. 편지도 있었는데 손도 못 댔어요. 이거 서련 형이 준 거 맞죠?”

“한 번 보여주고 다신 안 보여주긴 했는데. 근데 그럴 정도면 서련 형밖에 연관성이 없으니까 대충 저희는 아, 그런가 보다 했는데… 헐 아닌가…?”

흔들려서 흐릿하게 찍힌 사진 안에는 어떤 물건이 있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 그대로의 선물들이 큰 상자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련이 하진의 생일 때마다 줬던, 핸드폰 케이스와, 장갑. 넥타이였다.

편지는 군대에 있을 때, 선물 대신 보내준 생일 축하 편지였다. 답장이 없어 몰랐는데, 이렇게 잘 가지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준 거… 맞아.”

서련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 집에 가면 한 번 꼬치꼬치 캐물어 볼까. 말도 안 해줘서 답답했는데, 이렇게 알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할 지경이었다. 난감할 만큼 캐묻다 보면 뭔가 더 나오겠지.

“야, 야! 개하진 온다! 빨리 숨겨.”

“맞다, 형 케이크 주문했어야 됐는데!”

머리를 싸매고 절규하는 로운의 시선이 아직 먹다 만 서련의 디저트 접시로 향해 있었다. 서련이 괜찮다는 듯 웃어넘기는 사이 찬바람을 끌고 온 하진이 서련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실직고하라는 모습으로 로운과 원호를 노려보는데, 아무래도 밖에서 들어올 때 핸드폰을 감추는 원호의 모습을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짓거리 하기만 해라.”

“아니거든? 우리가 뭐 맨날 삽질만 하는 줄 아나.”

“야, 야. 개하진이라 그래. 사람인 우리가 참자. 어휴, 저런 놈도 친구라고.”

하진은 아주 잘들 논다,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혀를 차곤 서련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래서 언제 갈 건데.”

“이거 다 먹고.”

하진의 시선이 한입거리도 안 되는 남은 디저트로 옮겨졌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한참이나 보던 하진은 뒤늦게야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하진이 성큼 움직여 카운터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행적에 가장 놀란 건 서련이었다. 로운과 원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낄낄거렸다.

하진은 카운터 옆쪽에서 주문한 게 나오길 기다리다 직원이 상자를 건네주자 서련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만 가.”

“아니, 하진아. 나 이거 아직….”

“형, 내일 봬요.”

“조심히 들어가서 맛있게 드시고 내일 봐요, 형.”

손까지 흔들며 배웅하는 로운과 원호의 태도에 서련은 떠밀리듯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난 후에는 손이 잡히고 끌려가듯 카페에서 나와야 했다. 카페 문이 닫히기 전에 본 건,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로운과 원호의 모습이었다. 서련도 급한 대로 손을 뻗어 흔들어주었다.

“집에 가서 먹어. 오늘 빼고 하루에 한 조각 이상 안 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진짜…?”

“어. 요새 잘 먹어서.”

많이 먹으려고 노력한 보람이 있는 말이었다. 서련은 픽 웃으며 하진과 발맞춰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로 얽힌 하진의 손이 서련의 손등을 나른하게 쓸고 지나갔다.

집 가는 길이 이제는 지나치게 짧게 느껴졌다. 이렇게 손을 잡고 바람을 스치며 거리를 걷는 게 좋을 줄은 몰라서, 요즘은 하루하루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여행을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행이라. 혼자 여행지까지 정하고 떠나는 상상을 벌써 하는데, 언제 집까지 도착했는지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집안을 현관등 센서에 의지해 들어가 더듬더듬 형광등을 찾아 켰다.

불이 탁 켜진 순간, 순식간에 어깨가 잡혀 돌려지고 허리 뒤로 팔이 휘감겨 들었다. 고개를 들기 무섭게 닿아오는 숨이 예고도 없이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놀라 굳어진 것도 잠시, 서련은 달래듯 부드럽게 혀를 얽는 하진의 귓가로 손을 뻗었다. 예민한 짐승처럼 움칫한 하진의 미간이 꿈틀 찌푸려졌다.

귓가를 어루만지던 손은 하진의 뺨을 어루만지고 입술로 옮겨졌다. 무언가를 찾듯 더듬더듬 거리던 서련은 원하는 걸 찾자마자 고개를 비틀고 이를 세웠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잘근 깨물었다. 꽤 아팠는지 하진이 하지 말라는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또 깨물지.”

나른하게 떠진 시야에 보이는 건 한층 붉어진 상처 자국이었다. 서련은 그 상처 부위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리고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하진아, 너 내가 준 선물 다 어쨌어.”

“왜, 그 새끼들이 그래?”

“계란말이 해준 게 그렇게 좋았어?”

“어.”

동문서답에도 하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답 후에는 다시 서련의 입술을 찾았다. 기분이 좋은지 등을 쓰는 손길부터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까지 전부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리고 두 손이 서련의 뺨과 목을 휘감듯 뒤덮었을 때, 거친 호흡 사이로 입술이 떨어졌다.

“…나도 보고 싶어.”

하진은 순순히 서련을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서련을 침대에 앉히고 붙박이장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원호의 핸드폰 사진에서 봤던 그 색상의 상자였다.

하진은 상자를 서련의 앞에 내려놓고 열어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 눈짓에 서련은 망설임 없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맨 처음 보인 건 서련이 며칠 전 선물해준 시계였다. 아니, 정확히는 케이스였다. 한쪽에는 편지가 잘 정돈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도 포장지를 다시 곱게 붙여놓은 듯한 상자가 몇 개 더 놓여 있었다.

안 한 게 아니라 모셔놓느라 못한 거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신줏단지 모시듯 가지고 있는지, 로운이나 원호가 아니었으면 내내 모르고 착각하며 살 뻔했다.

“너… 내가 이거 모셔놓으라고 준 줄 알지?”

“받은 사람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뭐.”

버린 것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구석에 짱박아 놓고 안 쓰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나중에 집 정리를 할 때나 물건 버릴 때 즈음 섞여서 버리게 되고. 그런 상황을 상상했었는데, 서련의 생각보다 하진의 집착이 한 수 더 위였던 모양이었다.

“시계는 왜 여기 들어 있는데.”

“아까워서.”

서련은 한숨 가득한 표정으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하고 다니라고 선물했더니, 하긴커녕 신줏단지만 늘려준 셈이었다. 가만 보니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까지 안 할 기세였다.

“그럼 의미가 없잖아.”

물론 서련도 매일 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나, 중요한 날은 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 자리에 하진이 있다면 더 좋고.

반지까지는 아니더라고, 같은 걸 하고 있다는 걸 마음으로나마 새기고 싶었다.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이게 서련이 드러낼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의 형태였다.

하진은 고민하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시계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시계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중요한 날만 해, 중요한 날만.”

강조하는 어투로 보아, 평소에 하고 나간다고 하면 아주 붙잡을 기세였다. 서련이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진의 굳은 얼굴도 느슨해졌다.

“하진아.”

“왜, 더는 안 돼.”

혹여 또 뭔가를 꺼내라고 할까, 하진은 시계만 빼놓고 재빨리 상자를 닫아 다시 붙박이장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경계 가득한 모습으로 서련을 바라보았다.

서련은 말 대신 하진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안아보자는 의미. 그 행동에 하진이 금세 다가와 서련의 허리를 끌어안고 파고들었다.

“하진아, 우리 같이 어디 좀 갈까?”

서련의 말에 하진은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서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허리가 꽉 감겨들고 하진의 체온이 옷 하나를 두고 잔잔하게 전해져왔다.

“음… 로운이랑 원호랑 같이… 절미들 한 번 보러 가자.”

서련의 말에 하진이 놀란 모습 그대로 서련을 올려다보았다. 커진 눈동자 속에 드러난 심란함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하진의 손을 잡아 올린 서련은 그 손에 제 뺨을 대며 웃었다.

“야생 형도, 리사 누나도 같이 보러 가자.”

“…현모에 가자고?”

“응.”

“왜, 뭐 때문에. 아니…. 이제 와서?”

하진이 묻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서련에게 현모는 일종의 상처였다.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생각나 기피하고 아파해야 했다. 멀게 돌아온 이 자리는 그 연장선이었다.

그런데도 가려는 건, 털어버리고 싶어서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거 아닌 일이었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고 털어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털어내고 싶어서. 그리고 하진아… 이젠 네가 있잖아.”

그 말에 하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번엔 서련의 몸이 꽉 안겼다. 강하게 끌어안고 하진은 한참이나 숨을 삭혔다. 많은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참 뒤, 하진이 서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억눌러 참는 목소리가 참 기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이번만.”

“그래.”

어차피 이젠 냉장고 앞만 아니면 하진의 고집을 제법 이길 자신이 있었다. 예전에는 냉장고 앞에서만 이길 수 있었는데 어느새 반대가 되었다.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거겠지.

“하진아.”

“또 왜.”

“…고맙다고.”

작게 으르렁거리던 하진의 몸이 돌연 흠칫 굳어졌다. 서련은 피식 웃으며 다시 천천히 말해주었다.

고마워.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허리를 감은 팔이 다시 꽉 조여들었다. 서련도 손을 뻗어 하진의 머리칼을 나른하게 쓸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하진이 힘을 풀고 편하게 기대와 눈을 감을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

못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 말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게 사랑한다고 속삭였을 때, 서련은 기세 좋게 덤벼드는 힘에 뒤로 밀려나야 했다.

***

서련이 말한 콜로세움의 토너먼트는 그 주의 주말에 개최되었다. 개최라고 하기 민망할 만큼 적은 인력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다들 로그인을 하자마자 콜로세움으로 모여들었다.

다들 1등에게 주어지는 ‘소원권’에 열광을 토해냈지만, 단 한 명. 하진만 심드렁히 앉아 커피를 들이켜고 있을 뿐이었다. 얼음까지 아그작 씹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눈앞에서 다들 난리를 치고 있으니, 속이 그리 편하진 않을 것이다.

[길드/베르르: 우리 키키형ㅋㅋㅋㅋ 만능 소원권이면 내 소원 다 들어주는 거져?ㅋㅋㅋㅋㅋㅋㅋ]

[길드/야생닭: 저러다 첫판에 개발리지]

[길드/순한양: 키키형ㅎㅎㅎㅎㅎㅎ 준비하셔요ㅎㅎㅎㅎㅎㅎㅎ 쩔미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 함 보여줄테니깧ㅎㅎㅎㅎㅎ]

[길드/호백조: 갈고 닦은거 좋아하네 어휴]

[길드/묵요: 절미들 아주 기고만장한 게 형들도 밟을 기세야?^^]

[길드/휴리사: 얘들아ㅋㅋㅋㅋ 오늘은 누나가 다 쓸어버릴게ㅋ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자자 다들 좀 제대로 좀 서봐라]

[길드/키키아: 토너먼트 모드로 할까요, 배틀로얄 모드로 할까요]

서련이 선호하는 전투 방식은 빠르게 결과를 볼 수 있고 적을 쉽게 죽을 수 있는 배틀로얄 모드 쪽이었다. 다 같이 전투를 시작하되 한 명만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시작하자마자 가장 만만한 상대에게 먼저 달려들 테니, 일단 서련의 입장상 마지막까지 살아남기에는 가장 좋았다. 더욱이 서련에겐 자랑스러운 킬리도 있고.

[길드/킬레아: 배틀모드 콜]

[길드/묵요: 저도 콜]

[길드/호백조: 내가 또 쩔미들 봐서 콜 해야지]

[길드/베르르: 이건 또 먼솔? 아낰ㅋㅋㅋㅋㅋㅋ 우리 먼저 쥑일라고 그러져?]

[길드/순한양: 난 노놉]

[길드/야생닭: 나는 저기 빠지면 안될까...?]

[길드/휴리사: 짜고치기 없기다? 그럼 나도 콜]

[길드/건블리아: 아직 일찍들 끝장 보실라고 환장 하셨고만]

[길드/건블리아: 그럼 배틀모드로 2승한 사람 나올 때까지 하는 건 어떠냐?]

그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처음에 모두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미리 겪어볼 수 있고, 초반에 방심하게 하고 있다가 뒤에 가서 제 실력을 발휘해 뒤엎으면 그런대로 역전은 가능할 테니 꽤 좋은 방법이었다.

정말 다행인 게 있다면, 서련의 건블길드는 길드전이 이번에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쟁을 떠도 늘 포탈만 탔기에 길드원들의 역량은 어느 정도 알아도,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다. 겨뤄보지도 않아서 일단 서로 간에 스킬들 입질도 잘 모르고.

[길드/키키아: 그거 괜찮네요ㅋ]

[길드/킬레아: 콜]

[길드/묵요: 그 쯤이야 뭐]

[길드/야생닭: 난 그냥 젤 먼저 죽을게ㅠㅠ]

[길드/휴리사: 어허 야생이 필살기 쓰고 죽자?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아 먼가 좀 속는 느낌인데]

[길드/베르르: 아 몰랏! 일단 해요. 해보고 판단할 테니까]

[길드/건블리아: 그래 그럼 준비하자ㅋㅋㅋ]

[길드/건블리아: 전원 콜로세움 전장안으로 출격]

건블리아 역시 꿈에 부풀어 들뜨긴 마찬가지였다. 건블리아의 말에 서련을 포함한 모두가 콜로세움의 결투선 안으로 들어가 알맞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서련의 오른쪽에는 하진이 자리했고, 왼쪽으로는 로운과 원호가 여유를 두고 나란히 섰다.

다들 말도 안 했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가운데를 중심으로 원을 두르고 조금씩 간격을 벌린 채 콜로세움 안쪽에 자리했다. 의외로 길드쟁 체질인가 싶다가도, 조금씩 주춤주춤 캐릭을 움직이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긴장으로 어쩌지 못하고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을 모습들이 절로 떠올라 웃음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시작을 알리는 길마의 메시지가 화면에 큼지막하게 뜬 직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고, 시작되자마자 모든 길드원들이 서련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옆에 있는 하진도 서련에게 맹수처럼 달려드는 중이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헙 들이켠 서련은 재빨리 공격대상을 뺏어올 수 있는 ‘괴수도발’을 써서 킬리에게 모든 어글을 돌렸다.

쾅 소리와 함께 각종 직업들의 스킬이 킬리를 향해 꽂혔다. 킬리의 네임드 같던 피가 순식간에 훅 빠진 것과 동시에 길드원들이 눈치 빠르게 뒤로 휙 물러났다. 길드원들이 있던 장소에는 킬리의 대상 없는 광역기가 바닥을 향해 쿵 내리꽂혔다.

킬리의 피를 보자 고작 3분의 1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련은 일단 주문서를 쓰고 옆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로의 목표가 서련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다들 손을 잡고 덤벼오기 시작했다.

결론은 다리가 묶이고, 쉴드가 깨지고 야생닭의 필살기와 하진과 로운의 현란한 폭딜에 그냥 녹아 죽어야 했다. 흑백으로 변한 화면을 바라보는 서련의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멍했다.

첫 번째 사망자는 다름 아닌 서련 본인이었다.

“…….”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가장 만만하다는 거잖아. 그게 아니면… 다들 미리 짰나?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와중에도 서련의 눈은 사망 문구에서 당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서련의 눈이 서글프게 감겼다.

현모 한 번 하기 참 힘들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그런 서련을 흔들어 깨운 건, 옆에서 안 보이는 속도로 키보드를 누르고 있는 하진이었다.

“패턴 잘 보고 있어.”

툭 내뱉은 목소리에 서련의 귀가 쫑긋 섰다. 이내 서련은 즉시 흑백 화면을 돌려 길드원들의 스킬 패턴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함인지, 하진은 평소보다 설렁설렁 길드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깔짝깔짝 건드려준 덕분에 서련은 길드원들을 노련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상대하기 쉬운 첫 번째 상대는 베르르였다. 주변에 덫을 깔고 뒤로 빠지며 제법 머리를 쓰고는 있지만, 가만 보니 아처치고 회피기가 별로 없어 보였다. 스킬 트리를 공격 쪽이나 덫 계열로 맞춘 게 틀림없었다.

이 경우, 잡아다 몇 번 패면 딜이 훅훅 들어가 금방 죽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쉬운 상대는 미안하게도 마도사인 야생닭이었다. 필살기는 쓸 만하지만, 공격력이 치중한 까닭에 캐스팅 시간이 꽤 길었다.

즉시 발동 스킬도 있기야 하지만, 고작해야 한 개였다. 캐스팅할 때 타이밍 좋게 뒤로 빠지는 스킬로 시간을 벌고 있지만, 서련이야 킬리를 보내면 그만이니까.

그다음은 하진과 같은 거너를 키우고 있는 건블리아였다. 보조로써는 탑급이지만, 건블리아에게 현재 가장 부족한 건 템이었다. 공격력은 물론 방어력도 그냥 휴지 수준이라고 보면 됐다. 거너가 참 불리한 이유는 상당한 템이 아니고는 빛 보기 참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템이 후지면 거너는 볼 거 없는 장거리 콩알딜 직업이란 소리였다.

물론 거너만큼 장거리에 특화된 직업은 없어, 맞서려면 똑같은 장거리 극딜 직업이 아닌 이상은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서련은 장거리에 특화된 딜러다. 그것도 킬리까지 딸린. 고로, 수월하게 바를 수 있었다.

그다음은, 순한양과 휴리사였다. 둘다 방어력이 좋은 검사 계열인 덕분에 공격력이 들어가도 잘 죽지 않았다. 다만, 검사계열은 파괴력이 큰 만큼 모션도 크고, 빠른 속도의 공격이 불가했다. 어쌔신이 칼을 세 번 휘두를 때, 보통 한 번 정도 내리찍는 게 바로 검사였다.

대신, 검사는 광역기가 잘 발달된 직업이었다. 그러니까 광역기만 잘 피해 때리면 될 것 같은데, 일단 둘이 덤비면 답은 없었다.

그걸 아주 잘 아는지, 휴리사와 순한양 둘 다 현재 광역기로 버티고 있었다.

여기선 적어도 하진의 힘을 빌려야 했다. 파괴력이 여기서 가장 강한 하진이 둘을 상대해야 서련이 나머지 길드원들을 수월히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진아.”

“어, 검사?”

“응, 둘 다.”

역시 하진이다. 꽉 안아주고 싶은 걸 참으며 서련은 다음으로 로운과 원호를 살폈다. 그러나 잠시 후 포기하고 다시 다른 길드원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둘 다 정해진 패턴 없이 상황과 상대에 맞는 무빙을 구사하고 딜과 디버프를 넣는데, 저건 그냥 덤빈다고 될 게 아니었다. 원래 저런 놈들이 더 무서운 법이다. 괜히 나 한가닥하는 거 아니요, 하고 광고하는 저 모습을 보니 골치가 다 아파졌다.

도와주진 않겠지. 아까 보니 작정하고 덤비던데, 이쯤 되면 도와줄 생각이 없다고 봐야 했다. 하기야 소원권까지 걸렸는데, 도와줄 리가. 그냥 열일 해야겠다. 안되면 그냥 현모에 대해 말하고 도움 좀 받고.

서련이 그렇게 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첫 번째 길드전은 하진의 당연한 우승 속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옆에서 로운과 원호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진의 코웃음에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이를테면, 실력이나 키우고 오라는 뜻이었다.

[길드/키키아: 다들 음 죽고싶나봐요]

[길드/건블리아: 원래 이런거 아니겠냨ㅋㅋㅋㅋㅋㅋ 메기얔ㅋㅋㅋㅋ 많이 아팠니?ㅋㅋㅋㅋㅋ]

[길드/야생닭: 아니 형은;; 설마 너를 죽이겠어 하는 심정으로 그러니까... 형은 죽고 싶어서 그랬건 던데ㅠㅠ]

[길드/휴리사: 야생앜ㅋㅋㅋㅋ 그런것치고 너무 열심히던뎈ㅋㅋ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크으ㅋㅋㅋㅋㅋ다들 역시 키키형 노렸군ㅋㅋㅋㅋㅋ 굿굿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형먼저 죽여야 광견들이 안 도와주니깤ㅋㅋㅋㅋㅋ 근데 광경님덜?ㅋㅋㅋㅋ 님든 왓? 왜 키키형을?ㅋㅋㅋㅋㅋㅋㅋ]

[길드/묵요: 다 키키형 먼저 노릴 거 같았어요ㅋ 그리고 원래 첫판은 염탐전이라]

[길드/호백조: 다음판부터 기대하셔도 됩니다ㅋㅋㅋㅋ]

[길드/킬레아: 됐으니까 다음 페이즈 가]

[길드/건블리아: 자자 너무 키키한테만 그러지 말자 응?ㅋㅋㅋㅋㅋㅋ 다시 각자 자리로]

형이 제일 무섭게 달려왔거든요. 서련은 심드렁하게 턱을 괸 채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 마셨다. 그리고는 버프와 도핑을 돌리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킬리를 힐끗 보자 그새 회복이 완료되어 만피가 되어 있는 게 보였다. 공격형 모드로 돌린 후 서련은 화면에 길드 쟁 시작 메시지가 떠오르길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길드원들이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자 화면 위로는 2페이즈 길드쟁 출격 소식이 떠올랐다. 그 문구가 떠오른 것과 동시에 서련은 근처 타깃을 아무나 잡고 바로 킬리에게 광역기를 지시했다.

또 당할 순 없다.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제게 달려드는 길드원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기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래도 이번엔 길드원들보다 킬리의 공격이 더 빨랐다.

바닥을 쾅 내리찍는 킬리의 주먹 주위로 생겨난 충격파가 바람을 휩쓸듯 주위로 퍼져 나가자, 서련에게 달려들던 길드원들은 넉백을 먹고 뒤로 나자빠졌다.

넘어지지 않은 건 미리 회피기를 걸고 있던 하진과 로운뿐이었다. 원호도 회피기를 쓴 것 같긴 한데, 안타깝게도 힐러의 회피기는 격수들만큼 뛰어나진 않았다. 격수들에게 100% 회피기가 있다면 힐러는 50%확률 회피기가 있는 정도다.

대신 힐러는 즉힐이나 다른 도트힐이 많아 생존력은 쟁에서 탱커보다도 앞서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컨이 좋을 때 얘기지만.

[길드/베르르: 킬리야 너 미쳤니]

[길드/건블리아: 메기야 너 너무한거 아니냐]

[길드/키키아: 다굴보다 너무하겠어요]

서련은 그렇게 말해주곤 재빨리 길드원들과 거리를 벌렸다. 건블리아에게 킬리를 보내고, 서련은 멀리 떨어지면서 폭딜을 캐스팅했다. 타깃은 베르르였다. 여기저기 덫을 깔기 전에 죽이는 게 나았다. 폭딜을 시작으로 연계 스킬을 한 번 돌리자 베르르는 넉백이 풀리기 전에 사망했다.

-신마제국의 ‘베르르’가 사망하였습니다.

서련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킬리가 줘패고 있는 건블리아에게도 도트 데미지와 짧은 캐스팅이 장점인 소량 딜을 연속으로 꽂아 넣었다. 그렇게 3번 정도 딜을 돌리고 딜이 가장 강한 스킬을 꽂아 넣자, 화면에는 만족스러운 글이 다시 떠올랐다.

-신마제국의 ‘건블리아’가 사망하였습니다.

주변을 보자 하진이 넉백이 풀린 순한양과 휴리사를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는 게 보였다. 남은 건 로운과 원호인데, 로운은 오지 말라고 난리인 야생닭을 쫓고 있었고, 원호는 구석에 떨어져 피를 회복하고 있었다.

서련은 일단 로운과 원호를 견제하며 킬리를 하진에게 보내 순한양과 휴리사의 공격에 가담시켰다. 그리고 재빨리 원호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길드/건블리아: 니들 짰지? 응?]

[길드/베르르: ㅡㅡ 아오 내 이럴줄 알았어]

[길드/키키아: 설마요]

그리고 만피가 된 원호의 다리를 묶고 바로 망령의 저주를 걸었다. 다리가 묶이자마자 눈치챘는지, 원호는 망령이 걸리기 직전 바로 데미지 반사와 저항력을 대폭 올려주는 버프를 시전 했다.

결론적으론 망령의 저주는 저항력에 튕겨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서련의 올무 스킬도 정화로 없앤 원호는 그대로 서련을 향해 돌진해왔다.

힐러는 사실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까다로운 직업이었다. 온갖 회복 스킬에 상태이상 치유 스킬에, 힐도사(힐러+마도사)라고 불리는 마법공격까지.

정말 다행인 게 있다면, 아직은 서련의 템이 원호보다는 좀 더 우세하다는 거였다. 서련은 그 템빨을 믿어보기로 했다.

일단은 침묵부터. 무조건 침묵부터 건 다음에 망령의 저주를 걸어야 했다. 물론 침묵 스킬은 서련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전직업 공통 디버프가 바로 침묵이었다.

힐도사의 수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데미지가 큰 딜이 서련을 향해 쏘아졌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는 쉴드에 막혀 닿지 않았지만, 그 한 방으로 서련의 쉴드는 그대로 깨져버렸다.

킬리는 다리가 묶여 이동이 막혔고, 서련은 쉴드가 깨져 몸을 보호할 방법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일단 서련도 마주 덤볐다. 매초마다 생명력이 회복되는 도트 물약을 먹고 그대로 폭딜을 캐스팅하며 맞고 때렸다.

서련이 원호에게 침묵을 건 시점은, 쉴드의 스킬 쿨이 되돌아왔을 때였다. 쉴드를 치고 순간 적중을 높여 침묵을 걸자 원호의 공격이 뚝 끊겼다.

그래봤자 금방 상태 회복 물약을 먹고 풀 테니 스킬이 걸린 직후가 적기였다. 그 짧은 시간 서련은 아까 실패한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바로 망령의 저주.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괴수가 되어 돌아다니는 원호를 보는 서련의 눈매가 만족스레 휘어졌다. 킬리에게 원호를 맡기고 서련은 뒤를 돌았다. 타이밍 좋게 화면에는 휴리사와 순한양의 사망 소식이 떠올랐다.

-신마제국의 ‘휴리사’가 사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순한양’이 사망하였습니다.

[길드/순한양: 아오!!]

[길드/휴리사: 와... 어쩜... 저리 잘할까ㅋㅋㅋㅋ]

[길드/베르르: 묵요형 이겨라!]

아무래도 하진이 이기는 건 죽어도 싫은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서 하진이 이기면 바로 게임이 끝나버린다. 2승을 얻은 유저가 나오면 길드쟁은 거기서 끝이었다. 다들 이렇게 즐거워할 줄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도 길드쟁 좀 하면서 놀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정기적인 길드쟁 주최를 건의해보기로 하며, 서련은 로운에게 달려가는 하진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야생닭은 달리고 달리다 결국 로운의 포획에 잡혀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래도 나름 발악을 한 모양인지 로운의 피가 절반 정도 깎여 있었다.

[길드/묵요: 아 2:1 너무하네]

[길드/순한양: 옳소!]

[길드/야생닭: 하하... 너는 반대로 2:1이었잖아...]

[길드/휴리사: 크윽... 야생아 말하지말자... 윽]

[길드/키키아: 다굴보다야 뭐]

서련의 뼈 있는 말에 길드창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서련이 피식 웃음을 흘렀다. 이 상황이 재밌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공격은 하진이 먼저 했다. 장총을 꺼내 들고 묵직한 딜을 탕탕 쏘고 바로 양손총으로 무기를 스왑해 옆으로 빠졌다. 서련은 하진의 반대쪽으로 빠지며 로운의 발을 묶었다. 지금으로서는 포획이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로운이 탱커이기는 하나, 서련과 하진 둘다 원거리 딜러니 로운보다는 확실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로운과 서련 둘이 합쳐도 딜량은 하진을 따라가지 못했다.

캐스팅 시간이 긴 폭딜을 캐스팅하는데, 시스템창 위로 고대하던 소식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신마제국의 ‘호백조’가 사망하였습니다.

옆에서 ‘아, 졌네.’ 라는 소릴 내뱉으며 뒤로 물러나는 원호의 모습이 희미하게 시야 끝에 들어왔다. 원호가 죽자마자 킬리는 서련의 곁으로 복귀했다. 내 킬리.

이제 어떻게든 로운을 죽이는 일만 남았다. 로운이 먼저 노린 사람은 당연하게도 서련이었다. 서련은 거리를 벌리고 뒤로 훌쩍 물러나며 킬리를 보냈다.

그러나 번번이 포획으로 킬리를 잡아 뒤로 내치며 로운은 끈질기게 서련에게 돌진해왔다. 결국 보다 못한 서련도 맞대결로 가기로 했다.

물론 옆에서 자문해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광역, 회피 쓰고 뒤로. 어, 바로 킬리 보내고 폭딜 캐스팅. 그거 말고 4번. 그거 쓰고 옆으로 빠지면서 다리 묶고 도트딜. 킬리 방어로 바꾸고 도발 넣어. 뒤로 빠지고.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야, 이 사기꾼아! 대놓고 짜고 치냐?! 아, 이 개하진 새끼!”

“어, 좆까.”

옆에서 로운이 버럭거리든 말든 하진은 제 할 일만 할 뿐이었다. 서련은 입을 꾹 다물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로운의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안해, 로운아. 형이 좀 많이 급해.

[길드/건블리아: 키키야? 너 너무 승리에 눈이 먼거 아니냐?]

[길드/베르르: 왜 뭐요. 키키형 무슨 소원 빌고 싶은데 그래요]

[길드/순한양: 쩔미들이 1등 하묜 안돼?]

[길드/호백조: 짜져있자 쩔미들아ㅎㅎ]

[길드/휴리사: 와 근데 이거 재밌구나ㅋㅋㅋㅋ 우리 다음에도 또 하자ㅋㅋㅋ]

[길드/베르르: 울 리사누님 해맑은거 봐옄ㅋㅋㅋㅋㅋㅋㅋ]

이 와중에도 드러누워 있는 길드원들은 조잘대느라 바빴다. 다 읽어주고 싶었지만, 일단, 이기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진이 순식간에 스킬 트리를 상태이상 쪽으로 바꾸고 로운에게 뻗어나갔다. 이제부터는 쏘는 모든 스킬에 상태이상이 붙어 있다고 보면 됐다. 서련은 혹여 하진에게 피해가 갈까 거리를 벌리고 멀리서 연계 스킬이 있는 딜만 골라 보조형식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얼마 안 가 로운은 두르고 있던 패시브 방어가 연이어 뚫리면서 하진에게 그야말로 개발리게 되었다. 넉백이며 스턴이며 수면이며 온갖 상태이상이 다 들어가 무빙도 먹히지 않아 그냥 허수아비처럼 서서 후려 맞아야 했다.

그 끝은 시스템 위로 사망 소식이 올라오면서 중지되었다.

-신마제국의 ‘묵요’가 사망하였습니다.

[길드/묵요: 아 저 웬수]

그 말만 탁 치고 로운도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 뒤로 몸을 묻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 이후에는 서련이 설렁설렁 덤비는 하진을 눕히고 1위를 차지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원성이 하늘을 찔렀지만, 서련은 다시 다굴드립을 치며 그 원성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길드/건블리아: 얘들아 좀 머리좀 써보자. 아니 저 메기한테 우리가 디져야 겠냐?!]

[길드/베르르: 어휴 어르신. 그럼 어르신이 킬레아 형좀 죽여봐여]

[길드/순한양: ㅇㅇ 킬레견만 없음 될거 같은데]

[길드/건블리아: 걍 지자ㅋㅋㅋㅋㅋㅋㅋㅋ 내 봤을 때 이건 답없다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야생닭: 포기가 너무 빠르잖아요ㅋㅋㅋㅋ]

[길드/휴리사: 아냐ㅋㅋㅋ 난 템만 맞추면 얼추 비빌수 있을 것 같아ㅋㅋㅋㅋ]

[길드/묵요: ㅋㅋㅋㅋ 리사누나 템만 좀 맞추면 짱먹을거 같은데요ㅋㅋ]

[길드/호백조: 길쟁 좋아하면 끝입니다ㅋㅋㅋ]

[길드/키키아: 3라운드 준비할까요? 재밌네요]

[길드/건블리아: 메기가 아주 물 만났어. 안 그러냐?]

[길드/킬레아: 그놈의 메기 드립좀 그만 치지?]

[길드/건블리아: 내가 네 길마닷!]

“하진아, 너 그 말 치지 마.”

서련은 ‘좆’까지 친 하진을 보며 재빨리 소리쳤다. 그 말에 하진은 미간을 확 찡그리며 글자를 수정했다.

[길드/킬레아: 아 어쩌라고]

[길드/건블리아: 아니 우리 킬레견 이쁜소리 하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킬레견 소리에 서련이 작게 웃었다. 하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웃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렇게 실없이 웃고 있는데, 눈을 깜빡인 순간 대화창 위로 익숙한 캐릭의 이름이 떠올랐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

바로 강마였다.

[강마: 아니잇ㅎㅎㅎㅎㅎㅎㅎ 이게 대체 누구신가ㅎㅎㅎㅎㅎㅎㅎ 아니 어떻게 이 강마님을 빼놓고 여기 다 모여 있으실깧ㅎㅎㅎㅎㅎㅎ 누가 설명 좀?ㅎㅎㅎㅎㅎㅎ]

그 말을 시작으로 강마는 대화창이 제 것인 양 본격적으로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서련의 길드원들이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심지어 강마만 출두한 것도 아니었다. 뒤에는 블러더 길드원들이 왕의 뒤를 따르듯 콜로세움 안으로 주르륵 들어오고 있었다.

[강마: 아니고 우리 메기형ㅎㅎㅎㅎ탈피를 그렇게 했다더니 저를 우주에 놓고 오셨네여ㅎㅎㅎㅎ 어떻게 나를 잊을 수가ㅎㅎㅎㅎㅎㅎ]

[강마: 내가ㅎㅎㅎㅎ 내가 고기까지 받아먹던 사이였는뎋ㅎㅎㅎㅎㅎ 타협 갔을 때도 내가 잡았는뎋ㅎㅎㅎㅎㅎㅎ 이 블러더 강마가 그립지가 않다니ㅎㅎㅎㅎㅎㅎ]

[강마: 어떻게 이 블러더 강마를 잊었지?ㅎㅎㅎㅎㅎㅎ 이 무슨 메기가 멸종되는 소리?ㅎㅎㅎㅎㅎㅎㅎㅎ]

[강마: 이 블러더 강마가 또 길쟁은 개같이 잘 하는뎋ㅎㅎㅎㅎ 이 강마가 개처럼 놀아줄 수 있는데 어떻게 이 블러더 강마를 잊었을까ㅎㅎㅎㅎㅎㅎㅎ 누가 설명 좀?ㅎㅎㅎㅎㅎ]

강마의 말에 옆에서 3연속으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서련의 길드원들도 상황이 그다지 달라 보이진 않았다.

[건블리아: 와... 왜 저리 존경스럽냐]

[순한양: 난 나보다 더한 사람이 세상에 없는 줄 알았거든]

[베르르: 아니 세살배기 애냐고]

[야생닭: 너무 그러지 말자. 얼마나 오고 싶었으면 어휴]

[휴리사: 강마야ㅋㅋㅋㅋ 너는 키키 데려가기만 해ㅋㅋㅋㅋ 나한테 죽빵 혼난다ㅋㅋㅋ]

[호백조: 야이 ㅅㅂ샛꺄 왜 여기까지 쫓아와서 ㅈㄹㅈㄹ 개ㅈㄹ이야]

[묵요: 야 죽고 싶냐? 들먹거릴 걸 들먹여ㅅㅂ 길드전하는 거 안보이나]

[킬레아: 알겠으니까 좋은말로 할 때 꺼지자]

[강마: 댁들은 뉘신지?ㅎㅎㅎㅎ왜 첨보는 사람한테 태클을?ㅎㅎㅎㅎ 난 메기형 찾고 있는데?ㅎㅎㅎㅎㅎㅎ]

[키키아: 강마야 길드전 끝나면 놀아줄게]

[강마: 마음만은 건블길드인 저도 어떻게?]

한 마디로 같이 길드전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강마까지야 못 해줄 것도 없지만, 문제는 블러더 전원을 포함이면 좀 곤란했다. 다들 템도 수준급에다 저 인원이면 승패가 언제 날지도 모르고.

[키키아: 강마야 형 너 이길 자신 없는데]

[강마: ㅎㅎㅎㅎㅎㅎ 당연히 제가 져드려야졓ㅎㅎㅎㅎ핳ㅎㅎᅟᅡᇂㅎㅎ 어서 죽이세욯ㅎㅎㅎ]

[베르르: 아니 저 고자샛끼가]

[건블리아: 야 그럼 그게 대결이냐?!]

길드원의 말에 강마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날뛰기 시작했다. 빙빙 돌다가 서련이 있는 곳까지 와서 기어 다니는데, 보다 못한 건블리아가 결국 블러더 대표로 강마만 참여하는 걸 허락해 주었다.

[건블리아: 블러더들 고생이 눈에 훤하다 어휴]

[강마: 자자 어서 시작하시져?ㅋㅋㅋㅋㅋㅋ]

혼자 방방 뛰며 콜로세움 안에 자리한 강마가 길드원들을 재촉했다. 이미 포기했는지, 블러더 길드원들은 콜로세움 결투선 밖에 앉아 다들 태평하게 관람 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는 모습들이었다.

[건블리아: 다들 준비해라]

그 말에 다들 마지못한 태도로 결투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련도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래도 이번 싸움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두 번이면 몸풀기도 적당하고, 팀원들 패턴도 파악했으니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그 전에 일단 방해꾼부터.

서련의 생각이 다른 길드원들에게도 전해진 건지, 잠시 후 시작된 길드전에서 강마는 첫 다굴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물론 서련은 강마가 다굴당할 동안 길드원들을 지나쳐 잽싸게 도망갔다. 킬리를 보낼까도 했지만, 이미 2라운드 때 썼던 전략이라 먹힐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다들 도핑과 버프를 있는 대로 두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신마제국의 ‘강마’가 사망하였습니다.

[강마: ㅡㅡ]

[강마: 거 너무들 하시네]

강마는 딱 그 말만 썼을 뿐이었다. 그러게 강마야. 좀 더 일찍 나타나지 그랬어.

서련이 다굴당하는 걸 봤다면 적어도 저렇게 무방비로 맞지는 않았을 텐데, 조금 안쓰러운 감이 들긴 했다.

[베르르: 자 키키형 이제 이리 오시져?ㅋㅋㅋㅋㅋ]

[휴리사: 키키가 한대만 때리자 응?ㅋㅋㅋㅋㅋ]

그래도 이번엔 다들 무작정 다굴로 덤벼들지 않았다. 슬금슬금 다가오는데, 그게 오히려 역효과인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서련은 뒤는 보지도 않고 저에게 살금살금 다가오는 길드원들에게 괜히 킬리를 보냈다.

모두 식겁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그게 왜 이렇게 재밌는지 상황도 잊고 웃고 말았다. 그 사이 하진과 로운은 흩어진 길드원들을 잡아 족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실세들만 남긴 후 제대로 붙어볼 생각인 듯했다.

[강마: 키키형 이겨라!]

[강마: 형 뒤요]

[베르르: 고자야? 넌 좀 빠져]

서련은 2라운드 때처럼 베르르 먼저 노리지 않았다. 순서를 아주 조금 바꿔 건블리아부터 노리고 그를 먼저 없앤 후에 베르르를 찾았다. 하진은 승부욕 강한 휴리사를 상대하느라 바빴고, 로운이 순한양을, 원호는 뛰어다니는 야생닭을 잡느라 힘을 빼고 있었다.

[키키아: 절미들 형이 미안한 거 알고 있지?]

[베르르: 그럼옄ㅋㅋㅋㅋㅋ 우리 1티어 메기형ㅋㅋㅋㅋㅋ]

[순한양: 쩔미들 죽일꼬야?]

뭐가 이렇게 좋을까. 잘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좋아해주는 걸 보면 참 고맙기도 했다. 물론 그거랑 쟁은 별개의 문제지만.

서련은 베르르를 붙잡아다 폭딜 스킬을 한 쿨 돌리고는 마지막을 킬리로 장식해주었다.

-신마제국의 ‘베르르’가 사망하였습니다.

그 사이 어느 정도 결판이 난 건지, 남은 사람은 하진과 로운, 원호 이렇게 셋이었다. 2:2로 싸울까 고민하는데, 저 옆에서 로운이 씩 웃으며 도발하듯 말을 걸어왔다.

“형, 저희 제대로 한 번 싸워 봐요.”

“봐주기 없기 어때요?”

“그럼 좋지.”

서련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4명의 캐릭이 한꺼번에 얽혀들었다. 봐주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인 듯, 무서울 정도로 덤벼왔다. 모두 숨죽이고 지켜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포지션은 서련이 공격 중심으로, 하진이 보조로 가기로 했다. 서련의 공격이 빗나가거나, 상태이상에 걸렸을 때에만 하진과 위치가 바뀌었고, 그때마다 하진은 스턴기가 연계된 강력한 데미지를 폭딜로 퍼붓고 뒤로 빠졌다. 타타타탕 난사되는 마법 총탄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릴 정도였다.

그 사이 서련은 모든 상태이상을 회복하고 하진이 뒤로 빠질 때 즈음에 맞춰 스킬을 캐스팅하고 딜을 꽂아 넣었다. 망령의 저주는 일부러 쓰지 않았다.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까.

물론 로운과 원호도 쉽게 당하지는 않았다. 원호가 하이브리드의 대명사인 힐과 딜을 자유롭게 구사한 덕분에 좀비의 명성을 새삼 깨달으며 싸우는 중이었다. 로운도 방패를 버리고 양손검을 찬 덕분에 공격 속도는 느리지만, 순간적인 화력만큼은 하진의 공격력을 따라잡았다.

심지어 검을 휘두르는 타이밍과 스킬 연계하는 판단력도 완벽해서, 한 번 걸리면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역시, 하진만큼은 안 되었다. 뒤로 빠져있던 하진이 앞으로 나와 서련과 함께 가담하기 시작하자 서로 간의 역량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화려하게 킬리의 광역 주먹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진의 스턴딜에 걸려 해롱거리는 로운과 원호의 앞으로 킬리의 주먹이 쾅 꽂힌 순간, 옆에서 손을 놓고 물러나는 소리가 났다.

그 직후 화면에 뜬 건,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이었다.

-신마제국의 ‘호백조’가 사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묵요’가 사망하였습니다.

주위는 놀랄 정도로 고요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서련이 숨을 크게 내쉰 순간,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옆에서 환호하는 블러더의 모습부터 요란법석하게 날뛰는 강마와 절미들까지. 아직 시합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살아나 서련에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강마: 역시 우리 키키형ㅋㅋㅋㅋ뉘집 메긴지 엄청 잘하시넼ㅋㅋㅋㅋㅋㅋㅋ]

[베르르: 와앜ㅋㅋㅋㅋ 형 짱ㅋㅋㅋㅋ 저 광견들을 어떻게 저렇게 샥샥ㅋㅋㅋㅋㅋ 크으ㅋㅋㅋㅋ]

[순한양: ㅋㅋㅋㅋ 메기 잠옷 필요하신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강마: 나! 나!]

[베르르: 어허! 저리 비켜여! 우린 의리가 개 쩔어서 다른 길드 넘들한테는 안 팜]

[건블리아: 어휴 저것들은 틈만 나면 장사질이지]

[휴리사: 아니 애들 왜 이렇게 찰지게 잘 싸우는 거얔ㅋㅋㅋ아니 젊어서 그런가ㅋㅋㅋ]

[야생닭: 와... 와... 아니 이게... 쟁이라는 거구나ㅋㅋㅋㅋ]

[건블리아: 뭐 어쨌든! 우리 키키가 2승 했으니 소원권은 우리 메기한테 가는 걸로]

[키키아: 음 아직 안 끝났는데]

[건블리아: 어허 형들 호구만들지 말고 소원이나 말해라 키키야]

[베르르: 맞소이닼ㅋㅋㅋㅋㅋ 뭔데요 키키형ㅋㅋㅋㅋㅋ]

[순한양: 우리랑 같이 사는 거]

[킬레아: 아오 안 닥치냐]

[묵요: 쩔미들 함 혼나 볼까?^^]

[베르르: 나는... 별로... 키키형하고 같이 살고 싶지는... 싶지는...]

서련은 아웅다웅하며 제 곁을 오가는 길드원들을 보다가 키보드를 자박자박 두드렸다. 사실 길드전은 명분을 만들고 싶어서 했던 거였다. 솔직히 말할 용기는 없고, 뭐든 좋으니 그에 기대 말하자는 그런 마음.

[키키아: 음 건블형]

[건블리아: 그랴 얼마든지 말해라]

[키키아: 장소는 서울이 좋을 거 같은데 어때요]

[건블리아: 어?]

[키키아: 제가 아직 좀... 멀리는 못 나갈 것 같고]

[키키아: 다음에... 다음에 할 땐 멀리 나가 볼게요. 음 그리고]

[키키아: 애들도 있으니까 술은 좀 그렇고]

[키키아: 낮에 만나는 걸로 해서]

거기까지 말했을 때, 주변은 다시 조용해져 있었다. 서련을 보고 있는 게 굳이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였다. 멍해진 듯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블리아에게 서련은 떨리는 손끝으로 점잖게 물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담아.

[키키아: 저희... 현모할까요?]

그런데도 길드원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안다,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서련은 결국 곤란한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운을 뗀 건, 건블리아였다. 그는 괜찮냐는 뜻을 담아 서련에게 물었다.

[건블리아: 진짜야?]

[키키아: 농담이라고 하면 저 죽일거잖아요]

[건블리아: 어 진짜 죽어. 이거 장난이라도 넌 진짜 오늘 형한테 죽어]

[키키아: 진짜예요]

[건블리아: 키키야. 진짜 정말 괜찮겠냐?]

[키키아: 그렇다니까요]

[건블리아: 알았다. 그래 알겠어]

그 말을 보며 서련이 옅게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따가울 정도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비글들 차례였다. 서련은 슬쩍 몸을 틀고 로운과 원호를 바라보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련은 어쩐지 제가 다 무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심드렁한 태도로 팔짱끼고 앉은 하진은 모든 게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서련은 잠시 뜸을 들이다 뺨을 슬쩍 긁적이며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어… 로운이하고 원호 둘 다… 가 줄 거지?”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표정도 처음과 똑같았다. 서련은 어쩔까 하다가, 시선을 살짝 비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좀 더 자신 없게.

“음… 가서 사진도 찍어줄게…. 예쁘게.”

자신은 없지만. 그 말에 로운과 원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러나 곧 코끝이 찡그려질 정도로 활짝 웃으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번쩍 들며 작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형, 약속 꼭 지켜야 돼요! 무르기 없기?”

“걱정 마세요, 형. 저희가 겁나 예쁘게 찍어서 톡에 올릴 테니까.”

“개하진 어쩌냐? 뭐, 어쩔. 표정 구겨도 별수 없거든? 서련 형이 허락했거든?”

“아이고, 개하진씨! 지금 속이 아주 타들어 가시겠어요! 우린 좋은데! 우리가 사진 주나 봐라.”

낄낄거리며 깐족거리는 로원과 원호의 태도에 하진의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아래로는 바득바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참다못한 하진이 벌떡 일어나 로운과 원호에게 발길질을 하고 나서야 그 둘은 옆으로 몸을 피하며 쭈그려 앉았다. 그러나 깐족거리는 말은 끝끝내 멎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서련의 캐릭 근처에서 땅을 치며 울고 있는 강마라든가.

[강마: 크흡흑흑으흑그 나는요 형 크흑흡흑]

[야생닭: 아니 저건 대체 뭔 울음소리야;;]

[휴리사: 와 아주 영혼까지 팔았구나]

[베르르: 고자형ㅋㅋㅋㅋ 왜 남의 길드에 껴서 그래옄ㅋㅋㅋ 부러워서 그르나ㅋㅋㅋㅋㅋㅋ]

[순한양: 오옠ㅋㅋ 현모닼ㅋㅋㅋㅋㅋ 빨랑 날 정해옄ㅋㅋㅋㅋㅋ]

[건블리아: 너는 왜 남의 길드 현모한다는데 그러고 있는겨;; 뭐 너도 껴줘?]

[강마: 콜ㅎㅎㅎㅎ 우리 블러더가 건블길드 동맹길드인거 알사람 다 아는데ㅎㅎㅎㅎㅎㅎ]

[순한양: 저건 또 뭔 소리래]

[강마: 당연히 바늘가는데 실이 가야져ㅎㅎㅎ 약속한 겁니닿ㅎㅎㅎㅎㅎ]

[휴리사: 우리 신입들도 다 와야 하는 거 알지?ㅋㅋㅋㅋㅋㅋ]

[호백조: 그럼요ㅋㅋㅋㅋㅋ 근데 강마는 빼고 가죠?ㅋㅋㅋㅋㅋ 누구 길드래?ㅋㅋㅋㅋ]

[묵요: 저건 양심도 없나]

[강마: 크흡흑커흑윽 키키형 크흡흑]

[키키아: 알겠어 알겠어. 그래도 길드원들한테 허락 맡고 오자. 알겠지?]

[강마: 그럼요ㅋㅋㅋㅋ 당연한 말씀을ㅋㅋㅋ]

[건블리아: 저건 남의 길드에 저렇게 끼고 싶을까]

[건블리아: 어쨌든 곧 현모날짜 발표할 테니까 다들 맞춰서 시간 비워 놔라. 알겠냐?]

[건블리아: 이번엔 다 같이 보자ㅋㅋㅋ 다 모이는 거다?ㅋㅋㅋㅋㅋ]

전부. 그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손끝이 작게 떨려왔다. 손을 꼭 쥐자 옆에서 큰 손이 다가와 부드럽지만 힘 있게 잡아 주었다. 서련은 굳이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하진의 손을 꽉 맞잡으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좋다고 들떠서 펄쩍펄쩍 뛰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용기를 얻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실실거리며 웃는 건블리아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그랬을지도 모른다.

떨림은 잠시 후 가라앉았다. 그런데도 서련은 하진의 손을 한참이나 꼭 잡아 쥐고 있었다. 예전과는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뭐랄까, 기대감 같은 거였다.

“다들 진짜 좋은가 봐.”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보듯 말하며, 서련이 웃음을 흘렸다. 그 말에 하진은 서련을 한 번 보고는 무심히 턱을 괸 채 모니터를 쏘아봤다. 무심한 척하지만, 견제하는 게 한눈에도 보였다.

서련은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 길드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추억같이 좋은 날이었다.

“형, 이따 밥 같이 드시러 가시죠?”

“오늘은 개하진이 쏘는 걸로요.”

“그래, 가자.”

씩 웃으며 말을 건네 오는 로운과 원호에게 부드럽게 웃어주며 말한 서련이 못마땅해 죽는 하진의 손등을 한 번 쓸어주었다. 움칫 튀던 손이 이내 깍지를 끼며 파고들어왔다.

그 체온이 좋아, 서련은 한참이나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이 아쉽게 떨어진 건, 서련을 찾는 길드원들의 말이 수없이 떠올랐을 때였다. 사소한 게 아쉽고 좋았던 날. 딱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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