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12월 31일. 영영 안 올 것 같던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왔다. 주변이 요란해서인지 서련도 조금은 적적한 마음이 들긴 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홀가분한 마음이 드는가 하면, 어딘지 아쉬워지는 마음. 늘, 표현 못 할 복잡 미묘함이 엇갈리는 마음이 들게 하는 날이다.
“늦을 수도 있으니까 밥은 꼭 챙겨 먹고. 그놈의 푸딩만 없어져 있어봐.”
“하아, 알았다니까.”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넥타이를 매며 경고하는 하진의 말에 서련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다. 물론 먹을 거지만, 일단 지금은 고분고분 나가야 했다.
“하진아.”
“어.”
“가서 밥 좀 먹고, 늦게 와도 되니까…. 그냥 나오지 말고. 응?”
말끔히 차려입은 정장 때문인지, 평소의 모습보다 배는 더 깔끔하고 단정해 보였다.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날카롭게 떨어지는 옆모습이 손을 뻗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차가운 눈매가 슬쩍 아래로 향하다가 서련에게 닿았다.
“걱정되면 같이 가든가.”
“안 되는 거 알잖아.”
쓴웃음을 짓고 물러나는 서련의 모습에 하진의 눈썹이 금세 찡그려졌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하진의 친가 식구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하진과 한 식구였을 땐 서련도 참석했었지만, 남이 된 지금은 달랐다.
게다가 그 자리는 서련이 어울리기 힘든 자리이기도 했다. 버겁고, 무겁고, 숨쉬기 힘든, 그런 자리였다.
“뭐 할 건데?”
하진이 소매의 매무시를 정돈하며 슬쩍 물었다. 뭐 할 게 있냐고 해도, 사실 서련이 할 건 하나밖에 없었다.
“게임하고 있을 건데.”
“알았어.”
곧이어 하진이 팔을 벌려 서련의 허리를 꼭 안아왔다. 가기 싫다는 투정이었다. 등을 팔을 둘러주자 아예 한숨까지 내쉬며 파고들어 왔다.
“하진아, 밑에 김실장님 기다리고 계신다며.”
“그게 뭐.”
“어른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랬다.”
그 말에 하진은 마지못한 모습으로 팔을 풀고 몸을 바로 했다. 어지간히 가기 싫은지 미간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서련이 핸드폰을 집어 건네자 다시 한숨을 푹 내쉬고는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집에 있는데 무슨 일까지야….”
“연락.”
“알겠으니까 빨리 나가.”
“다녀올게, 형.”
형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하진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형.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자기 딴에는 예쁜 짓이라고 생각해서 불러준 모양이다. 결과가 나쁘진 않았다. 서련이 피식 웃었으니까.
덕분에 서련은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빈집을 쭉 훑어보다가 냉장고에서 푸딩을 하나 꺼내 들고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리 켜둔 컴퓨터 앞에 앉아 에르덴에 접속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데도 할 짓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 에르덴은 생각보다 더 북적거렸다. 에르덴에서 이번에 감사 이벤트로 지급하는 주문서 자동도핑 펫을 받기 위해 접속률이 오른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서련의 예상대로 길드에는 길드 붙박이장인 두 절미가 들어와 있었다. 서련의 접속 소식에 베르르와 순한양은 잔뜩 신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길드/순한양: 여윽시!ㅎㅎㅎㅎㅎㅎ 우리 메기형ㅎㅎㅎㅎㅎㅎㅎ]
[길드/베르르: 우리 키키형 출석은 진짜ㅋㅋㅋㅋㅋㅋ 나머지 형들 오늘 안 들어오나 봐요?ㅋㅋㅋㅋ 하여간 요지경이지ㅋㅋㅋㅋㅋ]
[길드/키키아: 베르랑 양이 안녕. 마지막 날인데 어디 안 가?]
[길드/베르르: 가긴 어딜 가여. 잠옷 맞춰서 돈도 없는데]
[길드/순한양: 저희 용돈 다 털었어여...]
맞춘다, 맞춘다 아주 선전포고를 그렇게 하더니 진짜 맞춤제작을 넣은 모양이었다. 서련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냥 이 기회에 같은 것으로 주문해달라고 말해볼까, 하는 욕구가 파릇파릇 피어났다.
[길드/키키아: 절미들 형도 그거 사면 안 될까...? 킬레아랑 다른 형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응?]
[길드/베르르: 뭐요? 잠옷?]
[길드/키키아: 응]
[길드/순한양: 하등 걱정할 것 없음요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형 것도 넣어 놨어욬ㅋㅋㅋㅋㅋㅋㅋ 흠흠 다음 현모 나오면 내가 준다]
[길드/순한양: 우리 그지 됐는데 나올 거져?!]
현모…. 서련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폭 새어 나왔다. 어쩔까 고민해봤지만, 덜컥 대답하기에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서련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길드/키키아: 그때 가서 시간나면 얘기할게]
[길드/베르르: 꼭이죠?ㅋㅋㅋㅋ 알았어요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우리 이쁜걸로 맞췄으니까 걱정마세옄ㅋㅋㅋㅋㅋ 형은 핑크ㅋㅋㅋㅋㅋ난 보라ㅋㅋㅋㅋ 베르는 노랑ㅋ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디자인도 우리가 다 짰슴욬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기대해도 좋아욬ㅋㅋㅋㅋㅋ 형 저 미대 지망생이라고옄ㅋㅋㅋㅋㅋㅋㅋ]
예쁘겠네. 빈말이 아니라 정성이 들어갔으니 뭐든 예뻐 보일 것이다. 서련은 절미들이 그림이 아니라 옷에 점만 찍어 와도 칭찬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도롱뇽알 같은 건 좀 그렇고.
다들 송년회를 갔는지 건블리아와 휴리사, 야생닭은 들어오지 않았다. 로운과 원호도 일이 있는지 지금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절미들이야 돈이 없어 어딜 못 나간다는데, 상황은 달라도 신세는 서련과 같았다.
[길드/키키아: 절미들 오늘 뭐하고 놀거 있어?]
[길드/베르르: 형이 놀아주려고요!? 진짜?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형형 그럼 우리]
-‘묵요’님이 접속하였습니다.
-‘호백조’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순한양: 헐]
[길드/베르르: 헐]
[길드/묵요: 절미들 그거 인사야?^^]
[길드/호백조: 쩔미들 형들하고 같이 저기 좀 갔다 올까?]
[길드/베르르: 아오 이 광견들 오늘 왜 들어왔대여! 아오 짜증나]
로운과 원호가 들어올 줄은 서련 역시 짐작도 못 한 상황이었다. 놀라 굳어있던 서련은 뒤늦게야 자박자박 타자를 두드렸다.
[길드/키키아: 둘다 들어왔네? 잘 왔어.]
[길드/묵요: 형 있다고 해서요ㅎ 형 오늘 할 거 없죠?]
[길드/호백조: 다 들었어요ㅋㅋㅋㅋ 어때요, 영화 한편 콜?]
[길드/베르르: ㅋㅋㅋㅋㅋㅋㅋㅋㅋ키키형 빨랑 탈퇴시켜여 미쳤나봐]
[길드/순한양: 아왜! 우리가 먼저란 말이에여!]
[길드/묵요: 절미들은 빠지고, 형 오늘 한가하다던데요ㅎ]
[길드/키키아: 누가?]
[길드/호백조: 누구겠어요ㅋㅋㅋㅋ 혼자 내빼신 개하진씨죠]
[길드/묵요: 영화 보러 가실래요?]
하진이가 말해줬다는 대목에서 서련은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슬쩍 터치해봤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렴 그래도 나다니는 것도 신경 쓰는 애가 미리 언질까지 해줬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의심이 들었다.
[길드/키키아: 형 오늘은 좀 그런데]
[길드/묵요: 개하진 때문에요?]
[길드/호백조: 기다려봐요 형]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옆에 얌전히 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딱 보니 하진이었다. 놀란 시선도 잠시 서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왜, 하진아.”
<싫어?>
다짜고짜 내뱉어진 말을 보니 돌아가는 상황이 얼추 파악이 됐다. 그러니까, 이건 굳이 말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근데 하진아, 그래봤자 이미 푸딩 먹었어.”
역시나 핸드폰 너머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머리를 짚으며 화를 삭이고 있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너 내가 분명…. 하아,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마음 바뀌기 전에 지금 말해.>
서련은 잠시 게임 화면 내 길드창을 바라보았다. 조잘조잘 떠드는 절미들과 그런 절미들을 받아주고 있는 로운과 원호.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갈 곳 없어서 게임만 내내 했는데, 며칠이나 됐다고 애들하고 놀던 게 떠올랐다.
사실 집에 있는 게 더 편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가고 싶었다. 적막한 집안. 혼자 있기엔 지나치게 조용해서, 사람이 그리워졌다.
“…왜?”
왜. 갑자기. 그런 의문을 싣고 물어보는데, 한숨에 이어 보내기 싫다는 듯한 말투로 하진이 짓씹듯이 얘기했다.
<…혼자 두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 말을 듣고 나서야 그날의 자신이 하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로운과 술을 마시고 취해 들어온 날. 아마도,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갈게.”
<늦지 마. 늦으면 울고불고해도 다음엔 없어.>
서련은 대답 대신 피식 웃는 소리를 전해주었다.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잔뜩 억누르는 말투가 아슬아슬했지만, 끝내 막지는 않았다. 얼마나 억누르고 참았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아까 형 소리를 내뱉으며 나갔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서련은 핸드폰을 옆에 살짝 내려두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길드/키키아: 갈게]
[길드/묵요: 아 그럼 저희가 데리러 갈까요?ㅎ]
[길드/호백조: 거리도 고만고만하니까 택시타고 갈게요. 말하면 내려오세요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쩔미들 버릴꼬야?]
[길드/순한양: 쩔미들은?ㅠㅠ]
[길드/키키아: 절미들은 음 다음에 보자. 그때 놀아줄게 응?]
[길드/베르르: 진짜ㅠㅠ 진짜 꼭?ㅠㅠ]
[길드/순한양: ㅠㅠ 재밌게 놀다와여ㅠㅠ 쩔미들 잊지 말고ㅠㅠ]
아직 현모에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나아지고 용기가 생긴다면 꼭 나가보고 싶었다. 아직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만 지내다 보면 나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물론 하진이가 좋아할지는 모를 일이다.
서련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게임을 종료하고 옷을 찾아 입었다. 모자를 쓸까 말까 고민하다, 영화관에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것 같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외투까지 껴입은 채 방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드르르륵-
얼마나 그렇게 앉아 기다렸을까, 진동과 함께 로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을 밀고 받자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내려오라는 말이 들려온다.
“응, 바로 내려갈게.”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서련은 카드와 함께 핸드폰을 챙겨 들고 적막한 거실을 지나 현관을 나섰다. 탁, 닫히는 문과 함께 서련이 조금 전까지 있던 곳은 빈집이 되었다.
“어, 형. 모자 쓰셨네요?”
“아…. 벗을까?”
“아뇨! 이것도 엄청 잘 어울려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벗으려는 서련을 말리며 로운이 씩 웃었다. 밖에서 기다릴 줄 알았건만, 로운은 굳이 오피스텔 안까지 들어와 엘레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원호가 타고 있던 택시에서 내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저씨, 말한 곳으로 가주세요.”
오랜만의 따뜻한 날이라 그런지 햇살이 마치 봄 같았다. 아직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챙 밑에 숨어 정신없이 세상을 바라보자 어느덧 차가 멈추고 영화관이 눈앞에 들어왔다.
“택시비는 내가….”
“형, 내립시다!”
카드를 내밀려던 서련은 떠미는 손길에 휩쓸리듯 차에서 내려야 했다. 택시비를 낸 건 보조석에 타고 있던 원호였다. 덕분에 서련은 손에 카드를 든 어색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그건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표를 끊고, 팝콘을 살 때까지도 서련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한 번 직원의 손에 넘어가긴 했었다. 문제는 서련의 뒤를 본 직원이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서련에게 도로 카드를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서련의 카드 다음으로 내밀어진 건 로운의 카드였다.
“…….”
얘들이 눈이라도 부릅떴나…. 결제를 하면서도 로운과 원호의 눈치를 보던 직원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그랬겠다 싶었다. 지금이야 실실 웃으면서 서련을 대하지만, 로원과 원호 역시 하진보단 못해도 맹수과였다. 물론 서련에게 하는 짓은 딱 레트리버였지만.
“영화 시간 좀 남았는데, 앉아 있을까요.”
“어! 저기 자리 있다. 김원호 달려!”
영화 입장 시간까지는 대략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로운의 말에 원호는 팝콘을 들고 부리나케 카페 테이블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탁 자리를 잡는데, 표정 자체가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형, 저희 영화 보고나서 밥 먹을까요?”
“그건 내가 살게, 로운아.”
“네, 뭐. 상관없습니다.”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역시나 밥도 못 살 것 같았다. 화장실 가는 척 결제하고 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차 원호가 서련에게 팝콘을 내밀었다. 그리고 불쌍한 시선으로 물어오는데, 시선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형, 저희 불편해요?”
“…그런 건 아니야.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모자의 챙에 가려져 사람들 시선이 닿진 않았지만, 사람 많은 곳은 서련에게 독이 퍼진 늪지대와 같았다. 움직이기 힘들고, 숨이 막히고, 시선이 닿으면 늪 아래로 빠질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도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오늘 저희랑 즐겁게 놀다 들어갑시다.”
“너희는… 영화 자주 봐?”
“없어서 못 볼 정도예요. 거의 주마다 보거든요.”
“하진이는 로맨스 싫어해서 장르 딱 정해놓고 봐서 항상 오진 않고…. 유명한 히어로물이나 액션 영화 나올 때만 와서 보고 가요. 그것도 저희랑 있으면 시끄럽다고 자리도 완전 따로 앉아요.”
로운이 시선을 마주한 채 씩 웃으며 말했다. 편안한 미소와 시선이었다. 서련은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앞에 있는 음료수를 빨아 마신 뒤 테이블 위에 놓인 팸플릿을 바라보았다.
“형은 무슨 장르 좋아해요?”
“음, 로맨스?”
“헐, 이거 취소해야 되나.”
“아니야. 가장 좋아하는 게 그거고 다른 것도 볼 수 있어.”
사실 영화관에 와서 영화를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지금까지 본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 그마저도 아침 일찍 혼자 보러 왔었다. 그때마다 본 게 로맨스였다. 처음엔 공감하기 위해 봤었는데, 자신의 연애와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많이 울어야 했다. 직원이 와서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혼자 자리에 앉아 아주 엉엉 울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서련의 사랑은 많이 잘못되었다는 걸.
서련의 겪은 사랑은 폭력이 따라다니던 사랑이었다.
“야, 그거 있잖아. 개하진 자는 영상.”
“아, 하진이 영화관에서 졸았던 거 보여드릴까요? 영화 끝났는데도 혼자 자고 있어서 저희가 깨우러 갔는데…. 아, 여기 있다.”
로운이 내민 건,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핸드폰이었다. 그 안에는 하진이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내려오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와중에 하진만 혼자 팔걸이에 팔을 얹고 머리를 괸 채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도 이렇게 완벽할까 싶을 정도로 잘나 보였는데, 로운과 원호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주 테이블까지 치며 웃는데, 덕분에 서련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겁나 웃기지 않아요? 완전 지 혼자 무게 다 잡고 자고 있어요. 저러고 나서 저희가 팔 휙 뺐는데, 사냥개처럼 짖으면서 쫓아왔다니까요?”
“이것도 있어요. 셋 다 술 마시고 오락실로 사격하러 갔는데, 지가 질 것 같으니까 완전 개진상같이 나오는데….”
이번엔 원호의 핸드폰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뒤에서 누가 찍어주는데, 하진과 원호, 로운이 나란히 총을 쏘다가 갑자기 옆에 선 원호를 하진이 발로 확 차서 밀어 넘어뜨리더니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가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원호가 로운을 차고, 로운은 하진을 차 밀어뜨렸다. 그렇게 발길질이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멀쩡히 자기 자리를 찾아가 다시 총을 쏘는데, 찍는 사람이 웃겨 죽는다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화면을 흔드는 영상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개하진 진짜 겁나 웃겨요. 내기하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개 얍삽하게 나오는데, 지기 싫어서 혼자 개난리를 핀다니까요.”
“아, 언제 확 꺾어놔야 되는데.”
재밌어 보였다. 재생되는 영상 하나하나에는 서련이 몰랐던 추억이 가득했고, 웃음과 생기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걸 보는 서련 조차 무심코 웃을 정도였다.
“그런고로, 서련 형.”
“응?”
“여기 봅시다. 어서요.”
대뜸 원호가 등을 돌리고 핸드폰을 위로 치켜올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든 순간,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오, 잘 나왔다. 와, 대충 찍었는데도 서련 형은 빨이 그냥 나오네.”
“야, 야! 이거 개하진한테 빨리 보내.”
상황 파악이 안 돼 어리둥절한 서련과 달리 로운과 원호는 하진에게 잽싸게 사진을 전송했다. 그제야 서련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형, 형한테도 사진 보내드렸어요.”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톡을 확인하자, 씩 웃고 있는 두 사내 사이에 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제 모습이 담긴 사진이 하나 달랑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보는 모습이 모자의 챙 아래에 겨우 드러났다.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프흐, 하고 작게 웃고 말았다. 무방비하게 찍힌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못생겼어.”
“네?”
“뭐라고요?”
“이거, 진짜 못나게 나왔어. 아니, 진짜 메기 같아. 눈 진짜 동그래, 하하…!”
“…거짓말이죠?”
“…형 시력 몇이에요? 아니, 물론 실물보단 못나긴 한…. 아니, 아무리 그래도 메기라뇨. 네?”
로운과 원호가 심각하게 묻거나 말거나 서련은 사진을 보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진을 언제 찍어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근데 오랜만에 찍은 것치고 정말 마음에 드는 게 나왔다.
그 사진을 앨범에 저장하자, 옆에서 다시 찍자는 말이 나왔다. 서련은 그 말에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게 마음에 드는데. 왜, 메기 같잖아.”
“형… 진짜 그러지 말고 다시 찍어요.”
“서련 형, 메기 진짜 좋아하네.”
그 말에 서련은 다시 웃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척해주었다. 어차피 챙 때문에 그늘져 있기도 했고, 나쁜 곳에 쓸 것 같지도 않았다.
“개하진 난리 났는데, 진정 사진 하나 투척해주고….”
“아, 시간 됐다. 저희도 그만 들어가요.”
“그래.”
미소 띤 그대로 서련은 음료수를 챙겨 들며 일어났다. 한쪽 손에 들린 핸드폰에는 여전히 셋이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그걸 힐끗 본 서련은 앞서 걷는 두 사내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진과 있을 때와는 다른 감정의 느낌이지만, 그 형태는 비슷했다. 문득, 나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영화를 보는 내내 잔열처럼 서련을 따라다녔다. 미미하지만 뚜렷이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이 조용히 다가왔고, 천천히 마음을 적셨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편안할 수 있었다. 음료수를 쥐다 손끝이 부딪쳤을 때 씩 웃는 미소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고, 도리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아주 조금, 아픈 곳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항상 춥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나온 한 걸음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깨달았을 땐 한참이나 멀리 나와 있었다.
싫지 않은 만남, 그리고 외출이었다.
“와, 개하진 아주 난리가 나셨어.”
“형, 조금만 더 드세요. 네? 아니, 한 숟가락만 더…!”
서련은 눈앞에 남은 밥은 곤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상당히 배가 불러 들어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애타게 바라보는 로운의 시선이 제법 애처로워서, 서련은 결국 한술 더 뜨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개하진이 형 빨리 보내란다. 아주 별 욕을 다 써서 보내시네. 확, 납치해버릴까 보다.”
“괜찮아, 한술 더 떴어. 이제 나가도 될 것 같다.”
“하진이야…? 어디래?”
“하진이요? 지금 집 가는 중이라는데, 거의 도착했대요.”
서련은 핸드폰을 들어 시각을 확인했다.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벌써 밤 8시가 되어 있었다. 하진이 난리가 날 만도 했다. 대충 옷을 걸치고 주머니를 뒤져 카드를 꺼내려는데, 로운과 원호가 싱글벙글 웃는 게 영 수상해 보였다. 서련은 되는대로 책상에 있는 영수증을 잽싸게 들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리고 역시나-
“어… 이미 계산된 테이블입니다.”
“아….”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서련을 끌고, 로운과 원호는 시원한 인사를 남기며 가게 문을 나섰다. 결국 서련은 카드를 도로 주머니 안으로 챙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로운아, 원호야. 마시고 싶은 거 말해봐.”
“넵, 없는데요.”
“에이, 배불러요.”
서련의 시선이 약간이지만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 로운과 원호는 그 모습을 또 좋다고 웃으며 보고 있었다. 아주 영상까지 찍을 기세라, 서련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먼저 택시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유독 서련만 비껴가는 택시 덕에 나중에는 셋 다 손을 흔들며 택시를 잡아야 했다.
그렇게 잡은 택시는 서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서련의 집으로 향했다. 심지어 현관 앞까지 데려다준다는 걸 말리느라 애를 써야 했다. 결국 실랑이 끝에 택시는 오피스텔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집에 들어가라는 말에 서련은 걱정말라며 고개까지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택시가 가는 것까지 보고서야 서 있던 자리에서 발을 떼어냈다.
저벅-
바닥 위로 신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큰 소리. 그게 딱히 싫지 않아, 피식 웃는데 바닥을 바라보며 걷는 서련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진이겠거니, 단정 짓고 서련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와 있었….”
부드럽게 흘러나왔던 목소리가 꺼지고, 대신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놀라 커진 눈동자 안에 비친 건 하진이 아니었다. 그제야 서련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서련아.”
서련의 앞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에 긴 폴라티를 입은 사내의 눈매가 마치 연인을 만난 것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얼마나 이렇게 있었던 건지, 파랗게 번진 입술이 무서울 정도로 곡선을 타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손목이 틀어 잡혔다.
“악…!”
고통이 담긴 비명에 사내의 손아귀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꽉 잡은 손은 결코 풀리지 않았다.
“그러게 왜 도망을 가. 응? 형이랑 얘기 좀 하자, 서련아.”
“…놔요. 놓으라고…!”
“이러면 너만 곤란해, 서련아. 응? 오빠… 아니, 형이랑 얘기 좀 하자.”
그 말에 서련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콱 틀어진 손목을 빼내려고 몸부림쳐 봤지만, 반대쪽 손목까지 잡힌 채 벽으로 밀쳐져 그대로 붙들린 꼴이 되었다.
“서련아, 진정 좀 해 봐. 그냥 얘기 좀 하자고. 형 안 보고 싶었어?”
“놓으라고…! 놔! 난 할 말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 놓고…!”
“얘기만 하면 갈게. 여기서 이래봤자 사람들 시선 받는 건 너야, 여서련.”
그 말에 서련의 시선이 큰길가로 향했다. 모여드는 시선들. 그 안에 든 건 호기심, 불쾌감, 그리고 흥미였다. 이를 악문 채 서련은 팔에 힘을 풀었다.
“…가까운 곳… 아니면 안 가요.”
“그래, 근처 카페로 가자. 응? 춥지, 서련아.”
뺨을 만지는 손길을 차갑게 쳐내며 서련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사내는 웃는 낯으로 뒤쫓았다. 가는 내내 서련은 몇 번이나 떨리는 무릎을 주체하지 못하고 휘청거려야 했다. 두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틀어 잡혔던 손목을 힐끗 내려다보자 벌건 손자국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서련이 스무디 좋아했었지?”
비좁은 카페였다. 그 안에서 서련은 사내와 마주본 채 앉아 있었다. 아니, 시선은 한참 아래. 둥근 책상 위로 놓인 스무디로 향해 있었다. 그것도 시어 보이는. 서련의 시선이 음료에 잠시 머물렀다 테이블로 내려앉았다.
“기껏 주문한 건데, 마셔 봐. 응?”
“용건부터 말해요.”
서련의 말에 시종일관 웃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은 얼마든지 봐줄 수 있다는 양.
“서련이 안 본 새에 많이 차가워졌네. 예전에는 사근사근, 물렁물렁… 응? 그랬잖아, 서련아. 그래도 못 본새 더… 예뻐졌어. 우리 서련이. 정말 예쁘다, 정말.”
소름 돋을 만큼 오싹한 목소리였다. 서련의 입술 위로 일그러진 듯한 미소가 생겨났다. 저 말에 얼마나 시달리며 살아왔는지 그는 모른다.
박건우. 그가 바로 서련의 3년을 가져가 버린 사람이었다.
서련의 몸에 지울 수 없는 문신을 새긴 사람도 그였고, 스무 살 졸업식 날 물건 버리듯 이별을 통보한 것도 그였다. 이렇게 찾아와 얼굴을 마주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서로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제대했다는 얘기 듣긴 했는데, 이제야 보네. 거기서는 아무 일 없었어? 응? 아아, 알았어. 그건 안 물어볼게. 그럼 서련아, 형은? 형 안 보고 싶었어? 형은 많이 보고 싶었는데.”
“…용건만 말해요. 오래 앉아 얘기할 생각 없으니까.”
“서련이 화 아직 덜 풀렸구나? 알았어, 알았어. 형이 잘못했어. 다시는 한눈 안 팔게.”
“…한눈…이라고요.”
“그래. 그러니까 그만 화 풀고, 형 연락받아. 우리 아직 끝난 거 아니잖아, 응?”
목 안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애써 밀어 삼키고 서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차게 식어갔다. 입술을 꽉 물었다 놓자 지난 3년의 시간이 다시 되살아났다.
서련에게는 가장 아팠던 기억을 그는 아무렇지도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서련이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다닐 수밖에 없던 이유와 과정을 그는 일종의 ‘실수’로 포장해 매도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사람을 많이 좋아했었다. 따뜻한 손길이 뺨에 닿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 아무것도 필요치가 않았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많은 걸 포기하며 함께 했었다.
어렸었다. 또한 어리석고 무지했다. 그저 매달리는 게 최선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매달리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 예전의 따뜻했던 그 사람이 다시 올 줄 알았다.
언제부터가 폭력을 담기 시작했던 손길. 그 손길에 생긴 상처만 수도 없었다. 만남은 점점 일방적인 목적이 되었고, 그때마다 포기하길 결심했지만 가끔씩 마주하는 따뜻함이 기대를 놓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놓을 수가 없었다.
줄타기 같던 관계가 끝이 난 건, 마지막 교복을 입던 날이었다. 졸업식. 한파가 왔던 그 추운 날에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입술이 다 찢어지고 뺨에는 푸른 멍이 자리한 채로 끌려다니다가 그의 집 앞 도로가에서 들은 말이었다.
‘너 참 지겹더라.’
이명과 함께 들었던 말. 박건우는 담배를 피우던 손으로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단 한 번도 그만하자고 한 적 없던 박건우가 처음으로 이별을 말해왔다. 많이… 울었다. 그러나 차마 잡지 못했다. 다른 이의 향수 냄새를 가득 묻혀온 그의 의도가 지나치게 선명해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로 끝내자, 서련아. 그래도 마지막인데 뻣뻣하게 굴지 말고, 응? 이리와, 들어가자.’
일방적인 만남이 될 때마다 부정하려 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지던 순간. 그 날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비참하고 참담하고 끔찍했던 그 기분.
그대로 몸싸움을 벌이다 넘어져 손이 쓸려 상처가 났었다. 송골송골 맺히는 피를 보며 흐느끼는 흐릿한 시야에 흰 운동화가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익숙한 신발에 놀라 올려다보던 찰나, 흰 운동화는 그대로 서련을 지나쳐갔다. 서련이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허공에 들린 주먹이 박건우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울며불며 하진을 말린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끝끝내 주먹을 내지르는 손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박건우의 얼굴이 피떡이 될 동안, 주위 사람 누구도 하진을 말리지 않았다. 서련만이 비명과 소리를 지르며 하진에게 매달렸을 뿐이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며 허리를 붙들고 늘어져도, 돌아오는 건 뒤로 빠지라는 으르렁거림 뿐이었다.
이찬의 죄책감에 물든 얼굴도 그때 봐야 했다. 아무것도 몰랐었다는 듯 충격으로 굳어진 이찬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련을 잡아 말리던 원호의 그 시선과 감정을 서련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셋이 그날 무슨 접전으로 만났는지는 몰랐지만, 결국 그날의 일로 하진은 고소당해, 엄청난 합의금을 주고 해결해야했다.
최악의 이별. 그게 박건우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아 고생해야 했고, 지우지 못해 덮어놓고 있는 최악의 기억 중 하나였다.
“…이제 와서?”
서련이 조용히 이 자리까지 따라온 건 그때 못 해준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못나서 울기만 했던 그 날에 저 대신 해줄 말이 있기 때문에.
“형이 잘못했다니까, 응?”
박건우의 손이 테이블을 기어 서련에게 다가왔다. 팔을 잡아채는 손길을 피하며 서련은 몸을 뒤로 물렀다. 3년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있다. 연인관계였는데도, 단 한 번도, 비슷한 말조차 듣지 못했다.
“…저요, 형 말이면 전부 받아주던 철없던 그때의 여서련 아니에요. 무릎까지 꿇어가며 맞춰주던… 그때의 미련한 애 아니라고요. 나, 형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팠고, 지금도 아파요. 근데….”
왜 그렇게 울고 빌며 매달렸는지, 그때의 자신이 한심하고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 만나고 나서야 겨우 깨달은 게 있다. 혼자만 아파하고 힘들어 했다는 사실이 분하긴 했지만, 한없이 작아 보이는 이 사람이 이제는 그럴 가치조차 없어졌다는 거.
그걸 한참이나 아프고나서야 깨달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네…. 내가 왜…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아파했는지 모르겠어.”
썩은 곳을 도려내듯 서련은 냉담하게 얘기했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오늘을 겪고 보니 박건우라는 사람이 더 이상 미련 가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형, 다음에는 하진이까지 같이 껴서 어때요? 콜?’
‘야, 개하진 있으면 형한테 접근도 못 해. 아니, 그리고 그 날짐승 얌전한 척 쩌는 거 또 봐야 되겠냐?!’
‘형, 형! 아, 진짜 한 입만 더! 딱 한 입! 아니, 두 입!’
‘형 추워요? 제 외투 줄까요?’
‘아, 강시울 자기 안 불렀다고 또 개하진 빙의했네….’
주위에 이렇게나 서련을 챙겨 주는 이들이 생겼다.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모든 걸 털어내고 내일부터는 서련도 좀 더 스스로를 아껴볼 생각이었다.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힘내서 나와 볼 생각이었고, 하진이에게 좀 더 따뜻하게 다가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앞으로 찾아오지 마요. 적어도 형이 양심이 있다면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울지 않았다. 눈물을 꾸역꾸역 참으며 하진은 박건우의 눈을 똑바로 보며 얘기했다. 얼굴에 상처가 가득했던 그날의 서련은 더 이상 없었다. 맥없이 끌려다니던 어리고 멍청했던 어린애도 더 이상 아니었다.
“나… 이제 형이 막 다루고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도 아니고, 사랑 타령하자고 징징거려도 될 상대도 아니에요. 우리 사이 먼저 끝낸 거 형인데,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졌나 봐요? 그러니까 앞으로 찾아오지 마요. 알아? 그쪽… 진짜 지겨워요.”
서련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날의 말을 똑같이 건네주었다. 지난 3년이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었다.
박건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서련을 쏘아보다 언성을 높이며 손을 뻗었다. 박건우가 잡은 곳은 아까 전, 도망가는 서련을 잡기 위해 비틀어 쥐었던 바로 그 손목이었다.
“그렇게 잘나서 그때 그렇게 무릎 꿇고 울고불고 매달렸어? 씨발, 이거 다른 새끼 생겼고만? 그때 그 새끼야? 나 피떡 만든 그 새끼냐고, 씨발!”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말하기 무섭게 또 이런 식이다. 손목을 돌려 억지로 빼낸 서련은 벌겋게 물든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서련은 착잡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는 없었다.
“다시 찾아오면 나도….”
멈칫-
손목 위로 흠칫할 정도로 뜨거운 손끝이 닿은 것도 그때였다. 길고 단단한 손끝. 박건우는 아니었다. 아니, 박건우의 얼굴에 또렷이 드러나는 두려움이 상대방의 존재를 그대로 알려주고 있었다.
서련의 흔들리는 시선이 천천히 손끝을 타고 위로 향했다. 아침에 봤던 검은 정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더 올라가자, 무서울 정도로 냉랭한 표정의 하진이 서련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새겨졌다. 그의 시선은 서련의 손목으로 향해 있었다. 그것도 선명하게 붉은 자국 위로.
언제… 언제 들어온 거지.
하진이 움직인 건 순식간이었다. 살의가 가득한 시선이 박건우를 향해 옮겨진 것과 동시에 박건우의 옆구리로 구둣발이 무서운 기세를 담고 꽂혔다. 퍽, 하고 들어간 발길질에 박건우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꺽꺽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고통에 핏발선 눈을 바라보며 하진은 제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
시계는 테이블 위에 작은 흠집을 내고, 박건우의 앞으로 미끄러졌다.
“치료비 청구해. 그거 그쪽이 잘하는 거잖아. 아니면 그거 먹고 떨어지든가. 깽값하고도 차고 넘칠 돈 나올 테니까.”
하진은 그 말만 남긴 채 서련을 잡아끌고 카페를 벗어났다. 꽉 잡지도 않았다. 그저 서련의 옷을 꼭 구겨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화를 눌러 참고 앞서 걸어가는 하진의 뒷모습이 안타까워서,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서러워져서, 서련은 몇 번이나 눈가를 훔쳐야 했다.
집 가는 길이 이렇게나 멀었었는지, 몇 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서련은 신발도 채 벗지 못한 채 벽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하진의 손에 고개가 들리고 그대로 성급한 키스에 시달려야 했다.
불안함과 조급함이 느껴지는 입맞춤이었다.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던 그 날 밤과는 달랐다. 마치 매달리듯, 혹여 사라지기라도 할까 겁이 잔뜩 나서 붙잡는 그런 조급한 키스였다.
그래서인지 숨 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헐떡이며 숨을 헉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도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조급하게 덤벼들던 하진은 서련의 무릎이 꺾여 휘청거렸을 때에야 입술을 떼어내고 그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맞닿은 가슴 사이로 선연하게 느껴졌다.
“…하진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굴 위한 말인지.
그걸 깨닫자마자 입이 꾹 다물렸다.
“…나도 이제 못 참아.”
짓씹는 듯한 목소리가 서련의 귓가에 번졌다. 잔뜩 낮아서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그 말 직후 신발이 벗겨지고 끌려가듯 하진의 방으로 걸음이 옮겨졌다. 불도 켜지지 않은 집 안을 헤치고 어둑한 방안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숨 막히는 키스가 이어졌다.
지익-
숨소리 사이로 외투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덜덜 떨리는 손이 하진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외투가 반쯤 벗겨진 그대로 두 사람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거친 숨소리가 막아선 손을 사이에 두고 흘러나왔다.
“하진아… 하지 마….”
서련의 고개가 내저어졌다. 탁한 숨을 내뱉은 서련의 입술을 보던 하진의 시선이 제 가슴팍을 밀어내고 있는 손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서련은 다른 의미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옷만… 안 벗기면 되는 거잖아. 어떻게 할 생각 없으니까, 힘 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흔들리는 서련의 동공 안에 들어왔다. 서련의 눈매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옷 안을 파고든 손길이 서련의 허리를 휘감고 올라갔다.
“하진아… 잠깐, 하진아….”
“그 새끼 왜 만났는데.”
서련의 입술 위로 짧은 키스를 남기며 하진이 다그치는 어조로 물어왔다. 서련의 어깨가 움찔 좁아들었다. 탄성처럼 터져 나오는 뜨거운 숨소리에 하진은 이내 참지 못하고 서련을 향해 저돌적으로 덤벼들었다.
입술을 아릿하게 눌러 벌리고 그 안으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달달 떠는 혀를 거칠게 쓸고 얽자 신음이 번져 나왔다. 그 행위가 끊어진 듯 멈춘 건,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길이 툭 튀어나온 장골을 스쳤을 때였다.
하진의 눈동자가 놀라 커진 채 굳어졌다. 밑에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 서련이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하진은 손끝이 매끄럽지 않은 피부 결 위로 다시 맴돌았다. 무언가 움푹 팬 결이 느껴졌다. 마치 흉터 같은. 그제야 하진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이거 뭐야.”
하진이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조용했지만, 화가 억눌린 말이었다. 서련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하진의 눈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옷이 밀려 올라간 손끝이 닿은 곳에는 시야를 검게 가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장골을 휘감은 채 똬리를 튼 그것의 정체를 안 순간 하진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이거였어…? 그렇게 감추던 게… 이거였다고….”
어딘지 허탈한, 그러나 분노가 담긴 말이 서련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진의 가슴을 밀어내고 있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내린 것과 동시에 서련의 눈이 참담하게 감겼다.
서련을 내려다보는 눈이 점점 거뭇하게 가라앉았다. 메마르게 웃으며 하진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죽일 걸 그랬어…. 아니, 최소… 반병신이라도…. 아니면, 지금이라도 죽여줘…? 응? 그 새끼 찾는 거 일도 아닌데 찾아다 다리부터 부러뜨리고 제대로 밟아줘? 말해 봐…. 응? 말해보라고.”
다른 게 아니었다. 서련이 하진에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 이제껏 꾹 눌러 참고 혼자 버텼던 이유.
서련만큼 하진 역시 상처를 받기 때문이었다. 서련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쓸어 닦고 하진에게 손을 뻗었다. 하진의 뺨을 적시는 눈물이 서련의 시야에 들어왔다. 눈물을 닦아주자 짓씹는 욕설이 방안을 울렸다.
“네가 이럴까 봐… 말을 안 한 거야….”
다른 게 아니다. 서련은 하진이 아파하는 게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도.
손을 뻗어 하진을 꽉 끌어안은 서련은 저에게 기대오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울지 마…. 나 괜찮아, 하진아.”
서련도 처음엔 벅찼었다. 그래서 지우지 못해 자해를 했고,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문신 위로 흉터가 가득 생겨났다. 그 다음으로 느낀 건 두려움이었다. 이성이 들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하진이었다. 그 누구보다 슬퍼할 사람.
그래서 감췄다. 언젠가 밝혀질 때가 오겠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늦게 알기를 바랐다. 지은 죄가 많아 차마 말할 수가 없어 방치한 게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우습게도 서련이 하는 모든 게 하진에겐 전부 상처가 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서련은 그게 싫었다. 가능하면 하진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고, 아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하진은 늘 그렇듯 서련보다 더 아파했다. 이번 역시 다르지 않았다.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이 방안을 맴돌았다. 하진의 팔이 서련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눈물이 나는데도 그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련은 힘이 잔뜩 들어간 하진의 팔이 느슨하게 풀릴 때까지 하진의 귓가에 괜찮다는 말을 내내 속삭여주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났지만, 서로 오래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기억했다. 그것만으로도 서로 위안이 됐는지, 무겁기만 했던 공기가 잠이 들 즈음 편안하게 느껴졌다. 충분한 위로였다.
상처가 많았지만, 반대로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던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
늘 눈을 뜨면 옆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불안했던 건지 오늘만큼은 달랐다. 밤새 울다 잤다고 눈을 뜨는 게 버거웠지만, 한참이나 깜빡거리자 그런대로 시야가 회복되었다.
물론 서련이 일어난 기척을 내자마자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이 꽉 죄어들었다. 흠칫 놀란 것도 잠시, 서련이 팔을 다독이자 힘은 금세 다시 풀어졌다.
도망갈 줄 알았나.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자 순식간에 입술 위로 뜨거운 숨이 닿았다. 가볍게 닿은 입술은 여운만을 남긴 채 떨어져 나갔다. 서련의 시선이 하진의 나른하게 내리뜬 눈가로 향했다.
“어쩌라고. 못생긴 게 앞에서 내내 꼼지락거리는데.”
“…잠 못 잤어?”
하진은 대답 대신 서련의 손목을 끌어와 붉은 손자국이 남은 부분을 이로 살짝살짝 깨물었다. 살짝 충혈된 눈을 보니 아무래도 밤새 못 잔 모양이었다. 한참을 깨물 거리던 하진은 뒤늦게야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밥 먹고 얘기 좀 해.”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는 게 마치 각오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사실 무슨 말이 나올지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새해네.”
새로 시작하는 한 해의 첫날. 아릿한 입술 위로 번지던 뜨거운 숨이 문득 떠올랐다. 입술을 스쳐 만지는 서련의 시선이 까마득한 아래를 보듯 내려앉았다.
“말… 해야겠지.”
하진은 이미 서련이 자는 사이 문신의 형태를 다 확인했을 것이다.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끝내 꺼내지 못했던 고민. 하진은 그 말을 다 듣기 전까지는 납득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전부 말해야 하지 않을까.
서련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안 갔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웅크려 앉아 한참이나 사색이 잠겨 있던 서련은 뒤늦게야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데일 듯한 어젯밤의 그 감촉들이 자꾸만 잔열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잔소리로 끝났을 식사 자리가 오늘은 유독 조용하게 끝났다. 하진은 싱크대에 대충 그릇만 담가놓고 서련을 거실 소파로 이끌었다. 거실 창 너머에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인지 소파는 따뜻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구는지, 뱉지 못할 한숨이 올라왔다. 그리고 서련이 소파에 앉자마자 하진은 서련의 앞에 몸을 낮춰 앉고 눈을 마주해왔다. 올려다보기만 했던 하진의 모습이 아래 있어서인지, 왠지 모를 낯섦이 밀려왔다.
하진은 한참이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햇빛에 빛이 바랜 머리카락이 눈을 아프게 찔러 왔을 때에야 긴 침묵을 깨고 하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거… 치료받자….”
서련의 입술 위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절이라고 생각했는지, 하진이 서련의 손을 잡아왔다. 따뜻한 온기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 봤어?”
하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손톱으로 잔뜩 할퀴어 놓은 상처도 다 봤을 것이다. 허벅지 안쪽으로 진득하게 휘감긴 문신의 야살스러운 모양도.
“…이거 고3 여름방학 때 새긴 거야.”
그때도 이미 박건우는 한창 손찌검을 하며 서련을 상처 입히던 시기였다. 감정 기복이 심했던 때였는데, 유난히 기분 좋다고 느꼈던 날, 그를 따라 간 곳이 바로 타투 가게였다. 거부조차 못 했었다. 유난히 기분 좋아 보이는 그 미소를 그때는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타투 가게 직원은 서련에게 진중하게 고려한 게 맞냐고 물었었다. 후회할 수도 있다고 한차례 말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 서련에겐 고려하고 생각할 시간 따위가 없었다. 결국 그렇게 그날, 몸에는 끔찍한 모양의 문신이 생겨나 버렸다.
타투를 지우러 간 건, 박건우에게 버려진 후 도피하기 위해 신검 날짜를 받았던 날이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처음 타투를 새겼던 그 가게로 찾아갔었다. 그때 그 직원은 단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내가 분명 지우러 올 거라고 말했죠?’
과거에 그는 서련을 말렸었다. 그 말을 듣지 않은 건 서련이었다. 대답도 듣지 않고 그곳을 박차고 나왔다. 그다음에 간 곳은 피부과였다.
제법 큰 돈을 내고 시술을 받았었다. 그러나 타투 부위를 보자마자 들려온 혀 차는 소리와 함께 꽂히는 시선이 시술의 고통과 함께 몸과 마음을 지졌다. 1차 시술 이후에는 가지 못했다. 벌겋게 튼 곳에 약보다 상처를 주었고, 염증이 생길 정도로 손톱으로 긁어 내렸다.
종래에는 테두리만 번진 듯이 흐릿해진 타투 위로 흉터만 생겨났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서련은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색안경을 끼고 보던 시선. 노골적이던 혀 차는 소리. 착각이었으면 했던 허벅지 안쪽으로 깊게 들어왔던 굵직한 손.
모든 게 싫었었다. 그래서 제대로 지우지 못했다.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곪아두었던 상처였다. 막상 말하려니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지우려고 했었는데… 무서워서 그러질 못했어. 만지는 느낌이… 싫었거든. 그래서 한 번밖에 가질 못 했고…. 그러다가 내가 너무 우습고 싫고 미련해서…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그랬어. 하진은 그 말에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단지 손을 꽉 잡고 서련을 우직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타투 가게 직원이 말렸었거든…. 근데 내가 그냥 한다고 해서… 새기게 됐는데, 이렇게 지우기 힘들 줄은 미처 몰랐어…. 그냥… 그때는 그 사람 잡고 싶었거든.”
왜 그렇게 잡고 싶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없던 때였다. 모든 잘못을 감당해야 하는 지금이 그래서 괴롭고 아팠다.
“…지워야지. 아니, 없앨 거야.”
“그 사람… 못 잊은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
그 말에 서련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다고 운 건 아니었다. 눈물을 눌러 참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손이 다시 꼭 잡혔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갑갑하고 답답해서, 다 털어놓고 싶은데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하진의 오해에 더 막막해졌다.
한참이나 하진을 보며 마음을 정리했다. 뒤늦게야 서련은 제 눈가를 쓸어주는 하진을 보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담담한 말들이 이어졌다.
“박건우 그 사람 말이야… 처음에 그렇지 않았어…. 잘 웃어주고, 잘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애정해주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거야. 처음 손찌검을 받았을 때… 미안하다고 나한테 빌고 그랬는데… 그게 두 번 세 번이 되니까 점점… 당연하게 생각하더라.”
괜찮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참았을까.
“나 때문에 변했다는 그 사람 말에 그냥 모든 게 다 내 탓 같아서… 내가 다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지금도 괜찮지 않아. 근데 하진아….”
무서워서 이제껏 건네지 못했던 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자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서련은 일그러진 시야 속의 하진을 보며 말했다.
“…나는 너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
그 말에 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란 듯한 시선에 담긴 건 당혹감이었다. 처음으로 하진의 눈이 쓰게 감겼다.
너 때문에. 그 말에 이제껏 시달리며 살아왔다. 하진도 그렇게 될까 봐. 또 그렇게 만들까 봐. 그럼 정말 제 탓 같아서, 그 말이 사실이 될까 봐 두려웠었다. 그래서 피했고, 그래서 밀어냈다.
“근데… 근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지쳤다. 용기가 없어서 벗어나지 못 했던 그 날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었다. 흉터를 볼 때마다 그 사람의 말을 되새기며 살고 싶지 않았다. 용기를 내고 싶었다.
하진만은 다를 거라는 기대를 하며 수십 번 다짐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망설였고, 그래서 무서웠다. 행복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 생각이 바뀐 건, 하진과 함께하게 되면서였다. 요 근래 하진과 지내면서 ‘어쩌면’이라는 기대에 기대 살게 되었다. 그런 자신이 싫었지만, 그래도 사랑받고 싶었다.
사람이, 그리고 사랑이 상처받은 만큼 그리웠다.
“어제 그 사람 만난 건…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던 거야. 조용히 끝내고 싶었어. 나 이제… 그 사람 없어도 잘 살 자신 있어. 하진아… 그 사람이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곁을 허락할 리가 없다. 기어들어오는 걸 알면서도 잠을 자고, 곁을 허락하고, 함께 지내고. 서련의 행동에는 애초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고 쉽게 곁을 내준 건 또 아니었다. 상처가 깊은 만큼 서련에겐 벽이 두꺼웠으니까.
그런 걸, 이제까지 허락해 준거다. 손을 잡고, 함께 잠자리에 들고, 피부를 스치며, 받아들인 거였다.
그냥이 아니었다. 애초 서련에게 의미 없는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눈치 좀 채 봐, 이 바보야.”
여태껏 눌러 담아온 감정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하진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커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작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서련의 시야에 선명히 들어왔다.
“…진짜…야?”
꽉 억눌린 듯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서련은 꽉 말린 하진의 손을 끌어와 그 손안에 뺨을 대었다. 잘게 떨리는 손끝이 서련의 뺨 위에서 간지럽게 움직였다. 그 손끝에 체온이 전해질 때마다 하진의 표정도 점차 일그러졌다.
미소를 띤 채 서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게 웃는 그 미소가, 햇살 속에 피어오른 그 모습이 심장을 꽉 죌 만큼 아늑하게 느껴져서, 하진은 손끝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참지 못하고 서련에게 덤벼들었다. 여린 뺨을 잡고, 깊고 까만 눈을 시야에 새기며 희게 웃는 그 미소를 집어삼킬 것처럼 덤벼들었다.
서련은 제법 흉포하게 달려드는 하진을 순순히 받아주었다. 뻐근히 들린 고개가 바들바들 떨리도록 키스를 받아주었고, 진정될 때까지 제 뺨과 귀를 덮는 손을 쓸어 주었다.
그러나 결국엔 끝까지 이겨내지 못하고 헐떡이며 속삭였다.
“하아, 하진아… 살살… 응?”
하진의 손이 서련의 눈가를 쓸고 지나쳤다. 달아오른 눈매가 꾹 감기다 다시 떠졌다. 어딘지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게 했다. 나른하게 뜬 눈매 사이로 드러난 까만 눈동자가 벅찰 정도로 하진을 몰아세웠다. 버겁다는 듯 밀어내는 손 끝에 키스를 하며 하진은 서련의 얇은 손목을 약하게 깨물었다.
“네가 그렇게 부딪쳐오면… 힘들어….”
쓰게 웃는 미소가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눈물이 가득한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서련이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까… 나 좀 살살 다뤄줘….”
하진은 대답 대신 서련의 손목을 살살 어루만지며 다시 입을 맞췄다. 스치듯 간지럽게 닿던 입술이 기울어진 순간, 행위는 다시 깊어졌다. 이번엔 그래도 제법 다정한 편이었다. 뒷목을 노곤할 만큼 어루만지며 성급하지 않게 대했고, 서련이 숨이 차 가슴을 오르내릴 땐 목과 어깨를 지분거리며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배부른 맹수처럼 구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형.”
거친 숨결 사이로 하진이 서련을 낮게 불렀다. 정신없는 틈 사이로 겨우 눈을 마주하자, 하진의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진은 서련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사랑한다는 속삭임이었다.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못 들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지나치게 담백한 말투라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서련은 그 말에 하진의 어깨에 기대 울음을 터트렸다. 하염없이 울다 다시 고개가 들려 키스를 받아야 했고, 그러면서도 내내 울었다.
2년이나 방치됐던 마음이었다. 매몰차게 밀어내고 도망쳤던 그 날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긴 여정이었다. 어렵게 돌아온 길인만큼 이번만큼은 하진과 함께 그 끝을 걷고 싶었다. 이제는 그때처럼 하진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하진아….”
그 말에 하진은 대답 대신 씩 웃어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시원한 웃음. 그 웃음에 서련도 눈물을 삼키며 미소를 드러냈다.
따뜻한,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해의 첫 아침이었다.
***
하진과 처음 만난 건, 어머니의 가족 상견례 자리에서였다. 코트 깃을 코밑까지 끌어올린 채 약속장소로 향해야 했을 정도로 꽃샘추위가 닥친 날이었었다. 그리고 지독한 독감에 서련이 끙끙 앓고 있던 날이기도 했다.
고급 레스토랑의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상견례는 단출하게 진행되었다. 서련과 어머니, 아버지 될 분과 하진이. 이렇게 넷만 나온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자리였다.
싸구려 코트를 걸쳤던 서련과 달리, 하진은 제 몸에 잘 맞는 고급 정장을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입이 벌어질 정도로 잘생긴 외모와 훤칠함에 태도는 무척이나 정갈하고 단정했다.
그러나 눈빛에서는 날 것 그대로의 위험함이 스며 나왔다. 경계심도 상당해서 그 잠깐 사이에도 물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진의 첫인상은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기억나는 건, 저를 보던 이채가 가득했던 그 눈빛뿐이었다.
사실 서련에게 그 자리는 가시방석 같은 자리였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되실 분이 서로 웃으며 소개할 동안에도 서련은 몽롱한 정신을 다잡으며 책잡힐 짓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손에 땀이 흥건해질 정도로 아팠는데도 웃었고, 체할 것 같은 몸 상태에도 예의를 다해 식사를 했다. 현기증이 찾아올 땐 겨우 맹물을 마시며 버텼다. 그러다 버티기 힘들어졌을 때 즈음, 고개를 들다 처음으로 하진과 눈이 마주쳤다.
하진이 일어난 건 그 직후였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서며 눈짓을 하는 통에, 서련도 함께 일어나 양해를 구하고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리고 하진을 따라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서련은 속에 있는 음식을 전부 게워내야 했다. 속이 뒤집히고, 시야가 까맣게 죽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의 일을 서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등을 탁탁 두드려 주던 손길, 혀를 쯧 차던 소리, 그리고 나갈 수 있겠냐고 묻던 목소리.
사실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참은 건 밝게 웃던 어머니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상견례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괜찮다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서련을 보며 하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하진은 담담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 저희 나가서 따로 먹고 들어갈게요. 여기 음식, 입에 안 맞아요. 아, 어쩌라고. 그럼 애초 좋은 곳으로 고르든가.”
뒤로 가서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정말 짐승 같았다. 조금 덜 자란 짐승. 놀라 멍하니 바라보는 서련의 시선에 하진은 귀찮다는 듯 그대로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서련을 끌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몇 번이나 전화가 왔지만, 하진은 그때마다 바로 거부로 돌려 버렸다.
추위를 뚫고 도착한 곳은 근처에 있는 약국이었다. 약국 안에 마련된 의자에 서련을 앉힌 채 하진은 서련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눈동자에 비친 건 안색이 창백한 서련 본인이었다.
“아픈 곳 말해.”
“…독감… 콜록, 독감이라… 괜찮아. 그, 그냥 집에서….”
“병원은.”
“됐어. 이럴 필요 없어. 그냥… 집에 가서 쉬면 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지만, 도로 붙들려 심문 같은 집요한 질문을 받아야 했다. 입을 꾹 다물고 버텨봤지만, 하진은 저 혼자 결론을 마치고 약사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날, 서련은 품에 약과 죽이 가득 든 봉투를 들고 집에 귀가해야 했다. 고맙다는 말조차 못 했다.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나온 건, 제 민폐 어린 행동에 대한 사과의 말이었다. 그 말에 하진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섰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한숨만 떠오를 뿐.
그런데도 그날 밤, 서련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을 볼 수 있었다. 격양된 말로 유추할 수 있었던 건, 하진이 어머니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에 아버지 될 분 역시 크게 기뻐했다는 것도.
동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하진과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무엇하나 어울리지 않는 환경도 그랬고, 무엇보다 저를 보던 그 이채 어린 눈동자. 그 삼켜질 것 같은 눈동자가 참 어려웠다.
실제로 한 가정이 된 이후에도 하진과 접전은 없었다. 집이든 밖이든, 눈이 마주쳐도 하진은 잠시 바라보기만 할 뿐, 곧 낯선 사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서련의 아픔에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미열이 있을 때면 퉁명스럽긴 해도 약을 던져주었고, 필요한 게 있으면 먼저 찾아서 가져다주었다.
또한, 누구보다 서련을 말없이 옹호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처음으로 그 사람과 잤던 날. 그때에도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