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12월 24일. 어느덧 크리스마스 이브가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날이었지만, 서련이나 하진에게는 그냥 일상 같은 평범한 하루였다. 그래서인지, 딱히 들뜬다는 느낌이나 특별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사이, 서련은 길드원들의 간섭과 세뇌 공격에 결국 단독행동을 포기해야 했다. 잠행도 물론이었다. 아직 매익화의 1회 소환권과 2회 교습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차마 밝힐 수 없어 비밀에 부쳐야 했다.
징징거리는 베르르와 순한양을 달랜다고 몇 번이나 로크아의 던전을 돌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길드 떼쟁이 있은 후로, 서련은 예상했던 대로 엄청난 후폭풍을 맞이해야 했다. 온갖 귓속말부터 시작해 찾아와 빌기까지, 온갖 세상사 관심을 다 받아야 했다.
하진과 로운, 원호가 나서서 쫓아다니며 보복한 이후로 관심은 많이 줄었지만, 다른 쪽으로 부작용이 생겨 버렸다. 그도 그럴 게, 그날 함께 하지 않은 강마가 서련네 길드로 찾아와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장장 3일 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강마: 아옼ㅋㅋㅋㅋㅋㅋ 니들 진짜 개 치사해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만 빼놓고 지들만 좋다곸ㅋㅋㅋㅋㅋㅋㅋ]
[강마: 아 나도 껴달라고 샛끼들아 거기에 매익화가 있었다는 게 말이나 됨?ㅋㅋㅋㅋㅋㅋ]
[강마: 내가 웃는 거 같지?ㅋㅋㅋㅋㅋㅋㅋ 메기형 제가 웃는 거 같아요?ㅋㅋㅋㅋㅋ]
[강마: 뭐 길드떼쟁?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길드에 왜 우리길드는 없는 거? 누가 설명 좀? 왓? 내가 안 왔다고? ㅈㄹ 누가 연락을 해줬어야 말이짘ㅋㅋㅋㅋㅋㅋㅋㅋ]
[베르르: 거 나이 처묵고 겁나 떽떽거리네]
[순한양: 똑같은 레파토리좀 그만하고 좀 새로운 것좀 연구해봐여 형]
[베르르: 저 말만 무슨 3일째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강마: 니들이 뭘 알겠냐 어른의 설움을 크윽]
[순한양: ㅡㅡ]
[베르르: 형님 몇짤?ㅎㅎㅎㅎㅎㅎ 여기서 ㅈㄹ하면 됨 안됨?ㅎㅎㅎㅎㅎㅎ]
[강마: 아 남이 ㅈㄹ을 하든 말든! 난 떼쟁도 못 끼고 던전도 못갔는데! 내가 ㅈㄹ을 하든말든! 아아아아아악]
[묵요: 아주 ㅈㄹ을 해대라]
[킬레아: 왜 와서 지럴염병이여 샛끼가]
[호백조: 어휴 이 샛끼야 너 지금 ㅈㄴ 쪽팔려]
[키키아: 강마야]
[강마: 우리 메기형은 세상의 중심이 킬리라면서요ㅎㅎ 아니 어떻게 절 두고 매익화 길드네랑 던전을 도셨을까?ㅎㅎ 내가 형 주려고 닭을 그렇게 빼앗고 다녔는데ㅎㅎ 대체 이건 무슨 경우?ㅎㅎ]
[키키아: 알겠어, 알겠어. 다음에 꼭 같이 가줄게.]
[강마: 진짜요?]
[베르르: 아 뭘 같이가요 또!]
바닥을 구르던 강마가 서련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마치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달려오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서련이 다시 확답을 주자 강마는 언제 개난리를 피웠냐는 듯 세상을 다 가진 모습으로 폴짝거리다가 하진 쪽으로 홱 돌아서며 불퉁한 말을 던졌다.
[강마: 니들은 ㅅㅂ 친구도 아니여]
[묵요: 와... 오늘 좀 불러줄까 했더니 마음을 막 바꾸게 만드시네?ㅎ]
[호백조: 양아치 샛꺄 넌 남의 길드와서 이러는 거 쪽팔리지도 않냐? 양심은 엇다 팔아넘겼냐고]
[강마: 와ㅋㅋㅋㅋ 얼척없넼ㅋㅋㅋㅋㅋ 니들이야 말로 양심 무엇? 뭐 날 불러?ㅋㅋㅋㅋㅋ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라 이 시뱀들아]
[베르르: 아니 근데 형님들. 우리야 그렇다 치지만 형님들은 오늘 할짓 없나 봐요?]
[순한양: 그래도 이븐데? 이븐데?! 어휴 이브에 겜방이라니ㅉㅉ 아 키키형은 빼고! 우리랑 놀아줘야 되니까]
[베르르: 우리 형들 가만 보니 겁나 불쌍해...]
[킬레아: 니들이나 잘해ㅅㅂ]
[묵요: 우리 절미들 형들도 걱정해주고 아주 좋은데 놓친 게 하나 있다^^]
[호백조: 키키형은 오늘 우리랑 논다는거]
[베르르: 아니 잠깐 이 무슨 광견같은 말?ㅋㅋㅋㅋㅋㅋㅋㅋ 왜 키키형이 님들이랑 놀아요? 왓? 우리 키키형이 뭐가 부족해서? 아 뭔데 우리도 부르라고!]
[순한양: 아놔 키키형 지금 어딨어여. 아 왜 우리랑은 안 놀아주는데!!]
빽 지르는 말에 서련은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애를 자극해서 뭐 하려고 그러는지, 로운과 원호의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강마: 하, 새끼들. 하여간 개기는 거 하난 잘해]
[호백조: 니들이 그래봤자다]
[묵요: 그러니까 절미들 오늘 길마형도 없고 누나도 없고 야생형도 없는데 둘이 자알 놀으렴ㅎ]
[호백조: 형들은 이브라 바빠서 그만 간다]
[강마: 시뱀들아 어디냐? 형도 가마ㅋㅋㅋㅋ]
[킬레아: 꺼져]
[강마: 내가 니들 있는 피시방도 모를 줄 아냐?ㅎㅎ 키키형 기다리세요ㅎㅎ 제가 케익 사드릴게요ㅎㅎ]
[베르르: 아 뭔데! 진짜 이러기?! 키키형 진짜 갈 거에요? 진짜? ㄹㅇ? 아 왜에! 가지마여ㅠㅠ 진짜 가지마ㅠㅠ]
[순한양: 키키혀엉... 그짓말이져?ㅠㅠ 혀엉ㅠㅠ 이런게 어딨어여ㅠㅠ]
[베르르: 난 형 진짜 메기래도 좋다구여ㅠㅠ 왜 광견들하고만 노는데ㅠㅠ]
[킬레아: ㅈㄹ들을 해쌌네. 신파찍나 샛끼들이]
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이건 서련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정이었다. 이브라곤 해도, 다들 솔로라 할 거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피시방에 온 건데, 내도록 말이 없다 이제 와 하는 소리가 나가 놀자니. 그것도 직접 들은 것도 아닌, 베르르와 순한양을 통해 들은 말이기까지 하다.
서련이 봤을 때, 이건 그냥 애들 좀 놀리자고 즉흥적으로 정한 일정임이 분명했다.
“진짜 나갈 거야?”
“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하진을 보니, 나가긴 할 듯했다. 술을 마실지, 아니면 다른 걸 할지는 잘 몰랐지만, 3바퀴 1주 소맥 파티가 끝났으니 아무래도 술을 마실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서련 형, 저희가 맛있는 거 사드릴 테니 나가시죠?”
“아! 대신 저희 주머니 사정에 맞춰서요.”
“뭘 니들한테 맞춰. 니들이 맞춰.”
서련은 기분 좋게 드러난 미소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베르르와 순한양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둘은 곧장 모니터 화면 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빽빽 울어댔지만, 그래도 나갈 때 쯤 되자 손을 흔들어주며 눈물의 배웅을 나서주었다.
게임을 로그아웃하고 자리 정리 후 피시방을 나오자, 하얀 입김이 나오는 추위가 서련을 반겼다. 크리스마스 이브. 이 말에 설레지 않게 된 지 꽤 됐음에도, 거리를 지날 때마다 간혹 장식된 트리를 보면 발길이 멈췄다. 참 이상하지만, 신기하게도 예쁜 느낌.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근처 가게에 예쁘게 장식된 트리를 보며 서련이 작게 물었다. 곧이어 서련의 어깨가 뒤에서 꽉 잡히고 반 바퀴 돌려세워졌다. 보이는 건, 확 트인 거리였다.
“카페 가요, 형. 저희가 케익 사드릴게요.”
“이브에는 역시 케이크지. 케익케익케익.”
금세 서련의 앞으로 로운과 원호가 튀어나갔다. 하진은 서련의 옆에 나란히 서서 손을 끌어 잡고 제 외투 안으로 끌어왔다.
“카페에서 좀 놀다가 방탈출이나…. 아! 드라이브도 괜찮겠다! 서련 형은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어… 술은?”
“앞으로도 늘 마실 텐데, 한 번쯤은 그냥 놀아야죠. 오늘은 그냥 맨정신으로!”
씩 웃는 모습이 날이 저무는 어스름함 사이에 있어서인지 더 밝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서련도 결국 피식 웃으며 하진과 발을 맞췄다. 맛있는 곳이 있다며 로운과 원호가 안내한 곳은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그것도 디저트로 유명한.
카페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로운이 패기롭게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원호가 로운의 등을 향해 ‘난 아아’라고 외치고 하진도 덩달아 ‘주문이나 받고 가든가!’라며 욕설을 해대었다.
로운은 모두의 외침을 뒤로하고 무언가를 잔뜩 주문하고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자리로 돌아왔다.
“이 형님의 주머니가 가벼워졌으니, 받아올 땐 둘이 가라. 알겠냐?”
“아, 예. 꺼지세요.”
“그놈의 주머니 드립은 시발, 허구한 날 쳐대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시켜서 저렇게 어깨가 살았는지, 서련도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건 잠시 후 호출벨이 울리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혼자 가리러 갔던 원호가 욕을 하며 하진을 불렀을 때.
못마땅한 표정으로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오는 하진은 그렇다 쳐도, 그 옆에서 양손에 든 걸 내려다보는 원호는 아연함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게, 원호의 손에 든 게 한 판짜리 케이크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큰사이즈의. 저걸 어떻게 다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 만큼 걱정되는 양이었다.
“서련 형, 치즈케이크 좋아하죠? 여기 치즈케이크가 제 인생 케이크인데, 한 번 드셔 보세요. 이 만큼은 서련 형 꺼.”
서련은 한판을 4등분하는 로운의 행동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가만 보니 서련 게 가장 컸다.
“어, 어… 로운아… 이거 너무 많은…데….”
“서련 형. 다 먹을 수 있어요, 화이팅.”
“화이팅 같은 소릴 처하고 자빠졌어! 이 새끼야, 이걸 어떻게 다 먹어!”
“그럼 니들은 처먹지 마, 새끼들아! 내가 집에 싸갈 거거든!”
“됐고, 하… 너 커피 이거 무슨 짓인데.”
“커피가 뭐 어쨌다고. 지극히 정상이고만.”
로운은 싱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서련의 앞으로 내밀어진 음료는 따뜻한 바닐라라떼였다. 그나마 가장 양호한, 아니. 정상적인 음료였다. 물론 가장 정상적인 건 로운 본인 거였지만 말이다.
하진과 원호의 앞에 놓인 건 생크림과 온갖 초콜릿이 수북이 쌓인 아주 사악해 보이는 프라푸치노 음료였다. 단 걸 싫어하는 하진에게는 독약이나 다름없는 음료였다.
“미쳤냐? 그래놓고 넌 왜 아메리카노냐? 시발, 케익 혼자 다 처먹으려고?”
“됐고, 뒤지고 전에 당장 바꿔와.”
“하하, 그냥 쳐드세요.”
아웅다웅 사이좋게 싸우는 비글들을 힐끗 보던 서련은 포크를 집어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콕 찍어 먹었다. 살짝 씹던 서련의 눈이 커졌다. 입에 넣자마자 진한 치즈 맛과 함께 부드럽게 녹는 게, 상당히 맛있었다.
“맛있네.”
푸딩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련의 말에 멱살을 잡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서련에게 향했다. 서련이 싱긋 웃으며 케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포크로 다시 콕 집어먹는데, 다 먹자마자 다시 웃었다.
“진짜 맛있어. 푸딩 같은 맛도 나.”
미소가 배어 나오는 맛이었다. 이 정도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곧 서련은 케이크를 부지런히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한풀 꺾인 하진도 결국 한숨을 쉬며 얌전히 물러나 턱을 괸 채 서련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먹어.”
“거봐요, 형. 제가 맛있다고 했죠?”
“케이크는 서련 형한테 싸줘야겠다.”
제 선택이 옳았다며 좋아하는 로운도 곧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퍼먹기 시작했다. 서련은 음료를 입에도 대지 않는 하진을 보다가 제 음료를 슬쩍 내밀었다.
“됐어, 너 마셔. 그것도 달아.”
“성하진.”
“어, 형.”
서련의 엄한 표정에 하진은 눈치 빠르게 바로 형이라고 정정해 내뱉었다. 그 말에 서련은 표정을 금세 누그러뜨리며 주려던 음료를 다시 끌어왔다.
술도 거의 깡소주로 마시는 하진이니, 시럽이 들어간 라떼가 달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래도 케이크는 좀 먹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서련은 케이크를 조금 떼어다 하진의 입가에 슬쩍 대어주었다. 못마땅한 듯 눈썹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입을 벌려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다.
“성하진 표정 봐. 아, 이건 찍었어야 되는데…!”
잽싸게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가 기회를 놓친 원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쳤다. 그러고 보니, 로운과 달리 원호도 단 건 질색인지 입도 대지 않고 있었다. 로운은 거의 뭐 한주먹씩 퍼먹고 있었고.
“강시울 거의 왔다는데? 아, 숨어 있어야 되나….”
“됐어. 그 새끼 레이더 있어. 귀신같이 찾아다니는 거 잊었냐?”
“금방 올 것처럼 굴더니 겁나 늦었네.”
누굴 얘기하나 했더니, 에르덴에서 종전까지 함께 어울렸던 강마였다. 같이 좀 놀아달라며 그렇게 난리를 피우더니 기어이 여기까지 찾아올 모양이었다.
서련은 심드렁하게 턱을 괸 하진에게 다시 케이크를 떠 먹여주며 이 카페의 위치를 기억했다. 다른 건 아니고, 정말 맛있어서였다.
“로운아, 이거 조각도 팔아?”
“넵, 팝니다. 서련 형 엄청 맛있나 보네요? 근데 조각보다 한판 사는 게 더 이득이에요. 판으로 사면 할인해 주거든요.”
서련은 테이블 위에 있는 케이크의 양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매일 먹는다고 해도 일주일은 먹을 양이었다. 입이 길어 그런 건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푸딩도 못마땅해 하는 하진이 과연 케이크는 허락해 주냐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하진이 서련을 쏘아보았다.
“밥을 좀 이렇게 먹어봐. 그러면 사다 줄 테니까.”
“밥은… 음, 알겠어.”
“이건 나도 찬성. 서련 형, 밥 좀 먹어요. 아니, 어떻게 비둘기보다 안 먹지?”
아니야…. 걔들도 사실은 조금 먹어. 서련은 다시 케이크를 한입 찍어 먹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셋 다 쳐다보는 시선이 똑같아서 입도 뻥긋 못했다.
죽이 잘 맞는 것도 문제인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서련은 하진의 뒤쪽으로 솟은 듯이 우뚝 나타난 사내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어딘지 꽁꽁 싸매고 나타난 사내는 서련을 보자마자 목도리를 내리며 씩 웃었는데, 하진을 비롯해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케이크 상자를 들며 쾌활하게 외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씨발, 닭 되겠네.”
“저리가, 새끼야….”
“아나… 저 새끼를 진짜….”
다들 강마의 말에 다들 귀 끝이 빨개져서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주변 시선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련은 강마의 인사를 유일하게 받아주며 옆 테이블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강마야, 의자 저거 갖고 와서 앉아.”
“형, 형! 이거 받으세요. 꼭 집에 가서 형만 드시고요!”
보면 볼수록 참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드는 발랄함이었다. 서련은 곤란한 듯 웃다가 뒤늦게야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브에 이렇게 케이크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특별할 것 없던 날이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아주 의미 있게 느껴졌다.
“강마야, 케이크 먹어봐. 이거 맛있어.”
“넵, 그럼 사양 않고 많이 먹겠습니다. 비켜봐라, 이놈들아.”
목에 돌돌 만 목도리를 푸른 강마가 이내 원호의 포크를 빼앗고 케이크를 전투적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하진과 원호가 질린다는 듯 바라보았다. 거기에 더해 강마는 원호가 손도 안 댄 음료를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쭉쭉 들이마셨다.
“야, 야! 너 먹으라고 산 거 아니거든! 백조 새꺄, 왜 뺏기고 그래!”
“아, 예. 둘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서련은 다시 아웅다웅 싸우는 애들을 보다가, 강마가 준 케이크 상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케이크 하나도 서련에게는 사치스러운 음식이라서 생일 때나 겨우 바랄 수 있던 그런 소원 같은 거였다.
못 먹어 봤다면 거짓말이지만, 거금을 들여 살 만큼 마음껏 먹을 수 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지금이야 하진에게 말만 하면 사다 주겠지만, 어렸을 때 케이크를 보며 상상했던 그런 드라마틱한 환상은 없어진 후였다.
그래도-
“…맛있어 보이네.”
맛있겠지. 서련이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로운이도 그렇고, 강마도 그렇고 다 치즈케이크를 준비했다. 하진이 일러주었는가 싶다가도, 할 말 많아 보이는 하진의 표정을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서련은 비글들이 싸울 동안 제 몫의 치즈케이크를 전부 해치우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카페에서 나온 건, 어스름하던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었을 때였다. 그래봤자 시간은 고작 6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남은 케이크는 고스란히 서련의 몫이 되었다. 그래봤자 하진의 몫으로 분배된 양뿐이었지만, 예쁘게 포장해 손에 쥐여주는 로운의 모습이 너무 해사해서 서련은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 지금쯤 한강공원 쪽 야경 대박일 텐데.”
“술 사들고 콜?”
“야, 오늘 술 안 마신다고 했거든.”
“맥주 정도면 뭐… 음료수 아니냐?”
“서련 형, 한강공원 야경 보러 가실래요?”
난데없이 서련에게 질문이 날아들었다. 서련은 못마땅한 표정의 하진을 보다 케이크를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민했다. 그래도 결정은 생각보다 빨리 떨어졌다.
“가자. 선물도 받았는데 그냥 가면 그렇잖아.”
“크으, 역시 우리 서련 형! 어이, 옆에 계신 개하진 씨. 턱에 힘 좀 풀어. 너 지금 존나 사각턱이야.”
“푸핫…! 사각턱! 와, 실화네! 야, 야! 빨리 찍어봐!”
“안 꺼져?! 시발, 뭐만 하면 찍는다고 지랄들이야.”
“오~ 이번엔 헐크.”
음, 그래도 하진이가 사각턱은 아닌데. 선이 굵긴 해도 갸름한 편이다. 서련은 하진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쳐서야 패딩 모자를 눌러쓰며 시선을 내렸다.
“야, 이럴 때가 아니다. 택시나 잡자.”
“술은? 술 이 근처에서 사가야 돼. 거기 오늘 미어터진다.”
“편의점부터 가자. 서련 형, 맥주 한 잔씩은 음료수니까 괜찮죠?!”
“어… 그렇긴 한데, 많이는 말고.”
“그럼요, 건전하게!”
어쩜 저렇게 에너지가 넘치는지, 저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 같았다. 후딱 근처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비글들을 따라 서련도 곧 하진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없는 하진을 보니, 이 상황이 상당히 언짢은 모양이었다.
서련의 손끝이 하진의 손등을 살짝 스쳤다. 이내 몇 번 닿던 손이 휘감기듯 잡혔다.
“그래도 너 요새 나 때문에 친구들이랑 못 어울렸잖아.”
“애초 피시방에서 내내 보는데, 뭘 더 어울려 줘. 그 정도로 앓는 소리 할 놈들도 아니고.”
진짜 싫었으면 서련이 뭐라 하든, 하진은 서련을 끌고 집에 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못마땅하긴 하지만 싫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건 서련의 영향이 클 터다.
서련은 하진의 팔을 당기듯이 끌고 편의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먼저 들어간 이들이 타박과 함께 빨리 마실 걸 고르라며 성화를 부려댔다. 결국 서련과 하진도 캔맥주 하나씩을 들고 계산대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마실 걸 바리바리 사 들고 택시를 탄 모두는 그 길로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로운과 원호의 예상대로 한강공원은 추운 날씨임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이 야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을 피해 다리가 잘 보이는 계단 쪽에 자리 잡은 모두는 서련을 중간에 앉히고 안주와 술을 까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에 캔을 하나씩 들고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야경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게 짱이지.”
“속이 뻥 뚫린다. 서련 형은 어때요, 좋죠?”
“좋네. 예쁘고….”
캔을 기울여 마신 서련이 탁 트인 야경을 보며 말했다. 추운 날 입김이 번지는 곳에서 보는 야경은 뭐랄까. 추위조차 잊게 만들 만큼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또 반대로 차분해지는 기분.
두런두런 앉아 여유 있게 바라보는 시선도 좋았고, 야경에 반사된 수면 위의 잔잔하게 퍼지는 포물선도 운치 있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자, 가족이나 커플, 서련네처럼 친구들과 함께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 새삼 친구의 부재가 크게 와 닿았다.
“서련 형, 뭐 드실래요? 저기 푸드트럭 엄청 많던데.”
“아니, 나는….”
“뭐라고요? 고기면 된다고요? 하하, 튼실한 걸로 사 올게요. 스테이크가 있나 모르겠네.”
“야, 같이 가.”
“아, 나도! 나도 갈래!”
서련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로운과 원호, 강마는 오징어를 입에 문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는 방향을 보니, 푸드트럭이 한 줄로 쫙 늘어선 쪽이었다. 덕분에 말 없는 하진과 둘만 남겨지게 되었다.
하진은 여전히 말없이 맥주만 기울이고 있었다. 옆에 빈 캔이 있는 걸 보니 벌써 두 캔 째였다. 말릴까 하다가, 서련은 그냥 두었다. 대신, 술을 빌어 마음을 조금 털어놓아 보기로 했다.
“…하진아.”
“어.”
기회는 많았지만, 제대로 묻지 못했던 그 날의 일을 다시 꺼내고 싶었지만 이 생활이 깨지는 게 무서웠었다. 그래서 그냥 두었던 건데, 술이 들어가서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 로운이랑 술 마시고 취해 들어온 날 있었잖아.”
하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안다, 하진이가 그날의 일을 꺼려한다는 걸. 그날은 전환점 같은 거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다. 손끝에 닿는 이 온기가 바로 그 증거였다.
손이 꽉 잡히고, 하진의 손끝이 서련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나 뭐라고 했었어…?”
뭐라고 했을까. 드문드문 기억나는 장면이 선명하지 않아서, 그날의 기억은 안개에 싸인 듯 흐릿했다. 뭐라고 했는지, 그리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투정을 부렸었나. 아니면, 매달렸을까.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떠올려 보려고 해봤는데… 기억이 안 나네.”
“이제 와 알 필요 없잖아.”
“그냥… 너, 나 잘 피해 다녔었잖아.”
그 말에 하진의 시선이 갈 곳을 못 찾고 내려앉았다.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했다. 그건 고의였으니까.
“근데 그날 이후… 지금까지 쭉 붙어 있으니까.”
“그래서… 싫어?”
싫은 게 아니다. 오히려 불안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서련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머릿결을 살랑이는 싸늘한 바람 사이로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시 그렇게 될까 봐.”
다시 돌아갈까 봐. 알면 무섭다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년에는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욕심일까. 사람 만나는 일이 싫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요즘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느낌. 서련이 줄곧 느껴온 모순이 그랬다. 사람과 마주하는 건 싫은데,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마음. 서련은 생각보다 더 외로움을 많이 탔다.
“나랑 같이 밥도 안 먹으려고 하고, 일찍 일어나 나가고, 늦게 들어오고, 한밤중에야 겨우 안겨들듯 들어와서 인사하고…. 너 그랬었잖아.”
그러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고, 참견하고. 그래놓고 정작 제대로 마주해주지 않는다. 밤에 겨우 기어들어 와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면서도 눈을 뜨면 옆자리는 늘 비어있었다. 하진은 그게 스스로를 억누르는 방법이라 말하겠지만, 서련의 입장에서는 그건 독선적인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손바닥 뒤집듯 돌변할까 봐.
“…앞으로 그럴 일 없어.”
하진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작은 말이었지만, 분명한 목소리. 그제야 서련도 하진의 손을 꽉 마주 잡을 수 있었다.
2년 전 정리했다고 생각했던 관계였다. 그땐 그랬다. 서련은 그때 많이 힘들었고, 연인의 배신에 대한 죽을 것 같은 자괴감과 두려움, 혼란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하진을 받아줄 만한 여력은 당연히 없었고, 거기에 한 가정이라는 배덕감. 무엇하나 마음에 담을 수 없었던 결과는 하진의 상처로 돌아왔다.
서로의 관계에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 그래, 그땐 분명 그랬다.
“어, 뭐야. 서련 형 추우세요?”
서련의 시선이 양손에 김이 나는 음식을 잔뜩 든 로운에게 향했다. 뒤따라오는 원호와 강마의 손에도 웬 먹을 게 가득 들려 있었다. 로운은 잘 갖고 온 큐브 스테이크를 서련의 무릎 위에 놓고는 서련의 옆에 냉큼 앉았다. 그리고는 서련의 비어있는 손을 살짝 잡고 끌어와 제 외투 주머니로 쏙 넣었다.
“손 차네.”
로운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하진이 아니다.
“빼라.”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이 낮게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로운은 못 들은 척 웃으며 서련에게 고기를 내밀었다. 앞에서는 이미 둘러앉은 원호와 강마가 구경꾼을 자처하며 음식을 찍어 먹고 있었다.
“빼라고, 씨발.”
“성하진, 너 성질 안 죽이지. 아… 로운아, 형 괜찮아. 형이 직접 먹을게.”
서련의 말에 하진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성질 죽이는 소리가 저 멀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와… 그래도 개하진이 서련 형 말은 듣는구나…. 와,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세삼 뭘… 헐, 몰랐냐?”
서련은 로운이 내미는 나무 포크를 받아 큐브 스테이크를 하나 콕 찍어 먹었다. 원래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로운의 손을 잡고 있기도 뭐해서 그냥 손을 빼는 김에 먹은 것이었다. 한데, 생각보다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맛있네.”
“원래 추운 날 먹는 게 더 맛있다고 하잖아요. 아니면, 뭐 저희랑 있어서?”
“로운아, 그러지 말자. 형님들 닭 되겠다.”
서련은 고기를 하나 찍어 다시 입에 넣었다. 푸드트럭의 음식이 이렇게 맛있구나, 라는 걸 또 하나 배웠다. 하나 찍어 하진의 입가에 대주자 기다렸다는 입을 벌려 잽싸게 받아먹는 게, 진짜 맹수 같았다. 고기 좋아하는 맹수.
“형, 저도 주세요!”
“음, 그럼 저도…?”
“어, 저도요.”
“주지 마. 안 줘도 돼.”
강마를 시작으로 로운과 원호까지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는 통에 서련은 바쁘게 손을 놀려야 했다. 그렇게 한 명씩 건네주자 괜한 뿌듯함이 몰려왔다.
신기하게 가슴을 스치는 추운 느낌이 사라져 있었다. 서련은 다시 고기 한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다. 따뜻한 느낌. 그래서인지 그냥, 집에 가는 게 아쉬울 만큼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날이었다.
그 감정은 짧은 헤어짐을 뒤로하고 집에 갈 때까지도 서련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어딘지 부드럽고 편안한 기분. 그래서인지 서련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하진과 함께 들어가는 오피스텔 정문 옆으로 짙은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서련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그림자도 함께 머물러 있었다는 걸 말이다.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움직인 건, 서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
크리스마스 날로부터 이틀이 흘렀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서련도 하진과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갔기에, 그날은 에르덴에 접속할 수가 없었다. 가벼운 식사 자리였지만, 늘 그렇듯 불편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살갑진 않지만, 그래도 서련에게 ‘아버지’는 굉장히 좋은 분이셨다. 이혼 후에도, 서련을 책임지겠다고 밥을 든든히 먹여 보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쨌든 그 때문에 서련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주말에 에르덴에 접속할 수 있었다. 물론 들어가자마자 절미들의 온갖 설움 돋친 징징거림을 다 들어야 했다.
이미 일찍 와 시달린 건블리아와 휴리사, 야생닭은 이미 초월했는지, 신선처럼 허허 웃을 뿐이었다. 결국 서련은 절미들을 달랜다고 한 시간이나 허비해야 했다.
[길드/베르르: 그러면 키키형 우리 오늘 같이 노는 거예요 알았져?]
[길드/순한양: 뀨ㅠㅠ]
[길드/휴리사: 허이구 우린 아주 잡아먹을 것처럼 굴더니 키키한텐 그저 낑낑낑. 이것들 진짜 어떻게 못 때리나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저 가식덩어리들을 대체 어쩌면 좋겠냐 어휴]
[길드/야생닭: 애들이 무서워서 인거 같은데요...]
[길드/호백조: 우리 쩔미들 그리 낑낑거리면 쓰나^^]
[길드/묵요: 절미들 이리오자ㅎ 형들이 놀아줄게ㅎ]
[길드/베르르: 됐거든요 누굴 또 죽이려고]
[길드/순한양: 우리 오늘 키키형이랑 놀거니까 형들은 끼지마여 훠훠]
[길드/키키아: 그래서 뭐하고 놀아줄까 응?]
[길드/킬레아: 놀긴 뭘 놀아줘ㅅㅂ 지들끼리 놀라그래]
[길드/베르르: 킬레아 형 반사! 오늘 비행 시합 열린다는데ㅋㅋㅋㅋㅋㅋ 거기 어때요 키키형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캬 비행비행ㅎㅎㅎㅎㅎㅎ 같이 나가요 형ㅎㅎㅎㅎㅎㅎㅎ]
고새 기분이 좋아진 건지, 베르르와 순한양이 서련의 캐릭 옆에 붙어 폴짝폴짝 뛰면서 얘기했다. 서련은 업데이트 된 콘텐츠 중 비행관련 공지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신성족/신마족 단체 비행 시합을.
[길드/키키아: 그거 오늘이야?]
[길드/건블리아: 아 그거! 토욜마다 열린다고 했던거 같다]
[길드/휴리사: 3시? 얼마 안 남았네ㅋㅋㅋㅋㅋㅋㅋ 다 같이 갈까?]
[길드/야생닭: 아 그거라면 나도 참가할 수 있겠네ㅋㅋㅋ]
[길드/묵요: 그거 피빕 뜨면서 골인하는 건데 괜찮겠어요 야생형?]
[길드/야생닭: 아니... 난 그냥 구경하는 걸로...]
[길드/호백조: 가시죠? 한 시간 남았는데]
[길드/베르르: 이번이 1회 개최라 사람 개많을 건뎈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오옣ㅎㅎㅎㅎ 키키형 우리 꼭 이겨옇ㅎㅎㅎㅎㅎㅎ]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절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말이 그럴싸해 비행 시합이지, 그냥 PVP나 다름없었다. 정해진 코스를 돌고 링을 통화해 종점에 다다르는 건 맞았지만, 닥히 어떤 규칙이나 제제도 없을뿐더러 무슨 짓을 해도 일단 경기장 안에만 있으면 탈락도 되지 않는다.
참가는 한 길드 당 최대 다섯 명까지만 할 수 있으며, 신성족 신마족 양 종족 전부 지원 가능했기 때문에 참가 수는 최대 오백 명까지가 한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같은 종족은 공격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봤자 비행 대결 경쟁자인 건 변함이 없었지만.
입상은 3등까지지만, 첫 개최전이라 양 종족이 눈 뒤집고 달려들기 딱 좋은 화제였다.
[길드/건블리아: 나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라]
[길드/건블리아: 키키, 묵요, 킬레아, 호백조는 자동참여고]
[길드/베르르: 아 그런게 어딨어요! 우리가 나가자고 했는데!]
[길드/순한양: 이 무슨 얍삽한 경우?ㅎㅎㅎㅎㅎ 5명밖에 못 나가는데 저 4명이 나가면 저흰 뭐 응원가 부르라는거져?ㅎㅎㅎㅎ]
[길드/휴리사: 뭐야 그거 인원수 있어?]
[길드/묵요: 아 그거 5명이 한계입니다ㅎ]
[길드/호백조: 여윽시 우리 길마형님. 크으, 인재를 알아보신다니까요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고럼ㅋㅋㅋㅋㅋ 니들 우리길드 정예 아니냐ㅋㅋㅋㅋㅋㅋ]
[길드/키키아: 음 그럼 형 빠질테니까 베르랑 양이가 나갈래?]
[길드/킬레아: 그럼 나도 안나가]
[길드/묵요: 아 저도요]
[길드/호백조: 절미들 화이팅]
[길드/베르르: 아오!! 뭔 화이팅임?! 아 그른게 어딨어여ㅠㅠ 아 진짜 이 광견들 빨랑 강퇴시켜여]
[길드/휴리사: 그럼 내가 참가할까?ㅋㅋ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콜! 그럼 참여는 키키 묵요 킬레아 호백조 휴리사 이렇게 가는 걸로]
[길드/베르르: 씨이... 우리편은 아무도 없쪄ㅠㅠ]
[길드/순한양: 쩔미들 버릴꼬야?]
[길드/야생닭: 자자 절미들은 형이랑 닭장 들어가 있자ㅎㅎ]
[길드/키키아: 다음주 토요일은 진짜 같이 돌아줄게. 응?]
[길드/베르르: 키키형 그러면... 형 꼭 이겨야 돼요?]
[길드/순한양: 키키형ㅎㅎ 담주도 이러면 우리 진짜 형네 쳐들어갑니닿ㅎㅎㅎㅎ]
[길드/건블리아: 어휴 저것들이 독수리한테 쪼여봐야 정신을 차리지]
[길드/베르르: 독수리 쯤이얔ㅋㅋㅋㅋㅋ 흠ㅋㅋㅋㅋㅋㅋㅋ 저희 잠옷들고 가도 돼죠?ㅋㅋㅋㅋㅋㅋ 저희 어저께 메기잠옷 마췄는뎈ㅋㅋㅋㅋㅋ]
“당장 이 새끼들 전화번호 내놔.”
콧등을 잔뜩 찡그린 맹수처럼 하진이 서련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알기야 알지만, 줘봤자 핍박만 할 게 뻔한데 ‘여기요’ 하고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서련은 제 핸드폰으로 손을 뻗는 하진의 팔을 겨우 밀어내며 핸드폰을 반대쪽 주머니에 냉큼 넣었다.
그리고 혹여 새우등이라도 터질까, 재빨리 비행 시합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련의 발 빠른 행동에 시시덕거리던 길드원들도 본능처럼 서련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이가는 소리가 간혹 들려오긴 했지만, 비행 시합이 열리는 비행장에 도착하자 그런대로 잠잠해졌다.
역시나 비행장에는 셀 수도 없는 유저들이 비행장을 바글바글 채우고 있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페스트핑에 최적화를 하고 들어온 최신식 피시방 컴퓨터조차 그래픽이 못 따라가 캐릭이 버벅거릴 정도였다. 결국 모두는 잠시 그래픽을 낮춘 상태로 게임에 임해야 했다.
[길드/휴리사: 와ㅋㅋㅋㅋ 엄청 바글바글하네ㅋ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그럼 내로라하는 길드들 죄다 몰렸는데]
[길드/묵요: 걱정마세요ㅎ 저희가 이깁니다]
[길드/베르르: 거 너무 자신만만하지 맙시다!]
[길드/킬레아: 니들은 좀 ***좀 닥치고 있어]
[길드/순한양: 힝]
[길드/야생닭: 더해라 더ㅋㅋㅋㅋㅋㅋㅋ 요것들 아주 기 좀 팍 죽여라ㅋㅋㅋㅋㅋ]
[길드/키키아: 일단 등록먼저 할게요. 로운이]
[길드/키키아: 아니 묵요는 리사누나 팟주고]
서련은 주변을 둘러보다 비행장 한 편에 천막과 함께 마련된 접수창구로 향했다. 접수창구 앞에는 신관복을 입은 안경 낀 NPC가 접수장을 든 채 서 있었다. 비행 시합 등록을 도와주는 NPC였다.
한 시간 뒤에 열릴 비행 시합에 길드 대표로 지원하자, 지원 선착순으로 길드명단이 팝업화면에 떠올랐다. 쭉 훑어보자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인원 마감으로 참가하지 못했을 정도로 이미 많은 길드가 참가한 상태였다.
서련은 신마족을 쭉 훑다가, 신성족 쪽 명단으로 넘어갔다. 쭉 훑다 두 번 정도 시선을 멈추었다. 첫 번째는 ‘블랙블 길드’라는 곳이었고, 두 번째는 ‘R개개 길드E’라는 곳이었다. 시선이 더 많이 머문 곳은 ‘R개개 길드E’였다.
마치 시비 거는 것 같은 길드명. 신마족에 이미 개개길드가 있는 걸 감안해도 저 길드는 아마 진상 유저들만 모여 있을 게 틀림없었다. 어쩐지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비단 서련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근처에 와서 길드 명단을 쭉 보고 있던 절미들이 헉, 소리를 내며 길드에 이 사실을 알렸다.
[길드/베르르: 멍미 이건?]
[길드/건블리아: 왜 뭐 있냐?]
[길드/순한양: 아니 잠깐. 너 나랑 같은거 본거?ㅎㅎㅎㅎ]
[길드/베르르: ㅋㅋㅋㅋㅋㅋㅋ R개개 길드E 랍디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우리쪽 개개길드 따라한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길드/야생닭: 헉 그거 종마 넘들이 간 진상길드 아냐?]
[길드/키키아: 맞아요. 음 신성족에도 생겼나봐요]
[길드/묵요: 하하 그래도 우리가 이겨요ㅎ 하등 걱정할거 없습니다ㅎ]
[길드/호백조: 아 왠지 삘이 딱 오는데]
[길드/킬레아: 하 귀찮게]
[길드/베르르: RE는 뭥ㅋㅋㅋㅋㅋ 아냐아냐 이 생키들 분명 키키형 노리고 있다에 내 콧구멍건다]
음, 신성족이면 적어도 시합 때 마주칠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대로 마주칠 확률은 좀 적다. 오백 명이나 참가하는 자리에 설마 바로 옆자리일 리는 없고.
[길드/키키아: 근데 블랙블도 참가해요]
[길드/휴리사: 누나한테 맡겨랔ㅋㅋㅋㅋㅋㅋ]
[길드/호백조: 에이ㅋㅋㅋㅋ 저희가 알아서 다 하죠ㅋㅋㅋㅋ]
[길드/키키아: 그럼 일단 포지션부터 정할게요. 여기서 비행스텟 저보다 높으신 분? 저 공적템이라 세트효과 붙어서 비속, 주시, 비벞 전부 120% 상승 효과 있어요. 여기서 주문서 쓰고 트리 바꾸면 140%까진 오릅니다]
비속은 비행 속도, 주시는 주행 시간, 비벞은 비행버프로, 보통 갑옷이나 날개에 붙은 옵션을 말했다. 서련의 말에 자신의 장비를 살펴보는지 다들 말이 없었다.
[길드/휴리사: 난 패스ㅋㅋㅋㅋㅋㅋ 포기는 빠른 게 좋지 암ㅋㅋㅋ]
[길드/묵요: 저도 그 정도는 나오는데 피빕 뜰 땐 상대 직업마다 무기 스왑해야되서 효율 떨어질 것 같아요. 그냥 키키형이 달리는 게 어때요?]
[길드/호백조: 전 좀 딸려요ㅋㅋ 게다가 힐러는 트리가 별로 없어서 보조는 괜찮은데 쟁 뜨려면 캐스팅 시간 때문에 비행은 아예 포기해야 돼서요]
[길드/킬레아: 나도 패스]
“하진아, 너 비행 스텟 좀 나오잖아.”
“어, 그러니까 안 한다고.”
하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서련의 뒷머리를 살살 매만졌다. 간지러운 손길은 목덜미에 닿기 무섭게 떨어져 나갔다. 등을 훑는 오싹한 느낌에 서련의 시선이 하진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러나 관심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길드/키키아: 그럼 일단 제가 주력으로 갈게요. 나머지 보조 부탁하고... 리사누나는 제가 신호할 때만 광역기 써주세요. 일단 시작하면 되도록 늦게 출발하되, 가장 낮은 고도 높이로 내려갈게요]
어차피 시작하는 순간 전쟁이다. 이때는 가만히 피해 있다가 나중에 투입해 싸우는 게 나았다. 높은 고도는 보통 장거리 극딜격수들의 놀이터이니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고, 중간고도는 출발시점 고도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을 게 뻔했다. 그러니 사실상 가장 낮은 고도가 안전했다. 물론 노려지기도 쉬우니 화면은 되도록 위로 향한 채.
[길드/휴리사: 알겠엌ㅋㅋㅋ 누나는 우리 키키만 믿을게ㅋㅋㅋㅋㅋ]
[길드/키키아: 장담은 못하겠지만, 이겨볼게요]
[길드/호백조: 제 캐릭 따라가기 지정해 놓을게요. 위쪽 시야 확인할 테니 따라가기 풀면 기습 온 걸로 알고 계세요]
다들 어느 정도 요령을 알고 있는 터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칠 필요도 없었다. 서련은 길드원들과 함께 비행 시작 장소로 이동했다.
출발지는 비공정 갑판 같은 넓은 원형존이었다. 원형존 앞에는 두 개의 거대한 동상이 손을 뻗은 채 근엄한 모습으로 각 맞춰 서 있었다. 그 너머가 바로 비행 시합 구간이었다.
사실 그 너머라고 해도 현재는 안개에 싸여 희미하게밖에 보이질 않았다. 투명한 푸른 막이 있다는 것과 링이 존재한다는 것. 서련이 홈페이지에서 본 설명과 장면이었다.
시합은 정해진 코스를 날아 링을 통과할 때마다 점수가 부여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개당 1천 점으로, 링의 개수는 전부 40개였다.
여기서 요점은 최대한 많은 링을 통과해 1등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3등에 한해서 합산 점수로 다시 재평가가 들어가기 때문에 첫 번째로 들어왔다고 꼭 1등이 되는 건 아니었다.
1등으로 들어온 자는 가산점 5천 점을, 2등은 3천 점을, 3등은 2천 점을 더 부여받았기에, 실상은 링을 최대한 많이 통과해 3등 안에 들어오는 게 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링을 많이 통과해 1등으로 들어오면 더 좋고.
어쨌든 계산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과 이 무대가 PVP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 쉽지만은 않은 시합이었다.
[길드/휴리사: 소모품 좀 사올게]
[길드/키키아: 네 다녀오세요]
[길드/건블리아: 힘내라! 힘! 우리가 목청 터져라 응원할 테니까!ㅋ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아주 지기만 해봐여 광견님덜]
[길드/순한양: 지면 앞으로 키키형 우리꺼]
[길드/킬레아: 개같은 말 나불거리지 말고 닥치라고 했다]
[길드/베르르: 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쫄리냐 봐여?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면 지금이라도 나오든갘ㅋㅋㅋㅋㅋㅋㅋ]
[길드/킬레아: 니들이 지면 탈퇴ㄱ?]
[길드/베르르: 가만있으면 되자나여... 이씨... 맨날 우리만 미워해...ㅠㅠ]
[길드/순한양: 쩔미들 죽일꼬야?]
[길드/호백조: 그래그래ㅋ 형들이 꼭 이겨줄게 쩔미들아]
서련은 제 옆으로 와 징징거리는 절미들을 다독이며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출발지에는 더 많은 유저들이 바글거렸다. 그나마 신마족만 있어서 이 정도지, 신성족까지 있었으면 캐릭까지 파묻힐 판이었다.
신성족 출발지는 투명한 막을 옆에 두고 따로 존재했다. 캐릭을 점프하면 얼추 보였는데, 힐끗 봐도 수가 어마어마했다. 이제 비행 시작과 함께 앞에 있는 안개가 걷히면서 아마 시합존이 합쳐질 것이다.
시합 신청 후부터 화면 상단에 떠 있던 붉은 시간표가 이제 3분 남짓 남았다. 여기저기서 손목을 푼다고 다들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서련도 트리를 바꾸고 정비에 들어갔다.
[길드/휴리사: 잘 부탁한다 얘들아ㅋㅋㅋㅋ]
[길드/키키아: 신호주면 출발하세요. 그때까진 대기요]
[길드/야생닭: 다들 조심조심]
길드원들의 응원이 한창일 그때, 드디어 화면에 비행 시합 소식 메시지가 거대하게 올라왔다. 여기저기서 도핑과 버프를 돌린 유저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한차례 태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서련은 잠시 기다리다 유저들이 3분의 1 정도 남았을 때, 도핑을 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인원도 곧장 도핑에 들어갔다. 서련이 날아오른 건, 파티원 전원이 도핑과 버프를 끝냈을 때였다.
-비행전투시합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화면에 작게 뜬 글씨를 보자마자 서련은 바로 고도를 낮춰 아래로 빠졌다. 처음보단 아니지만, 주변에는 아직도 유저들이 꽤 있었다. 신성족 쪽도 뒤늦게 출발하는 파티가 있는지 끊임없이 유저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이 시합은 운이 가장 크게 차지해야 살 수 있었다. 가장 유리한 건 물론 탱커다. 많이 맞아도 죽지 않는 직업이 아무래도 가장 유리할 테니.
[길드/묵요: 위]
로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호의 캐릭이 갑자기 위로 확 날아올랐다. 서련은 즉각 쉴드를 치고 화면을 위로 돌렸다. 대놓고 서련을 향해 하강을 하고 있는 신성족 무리가 바로 눈에 띄었다. 서련은 그들 중 하나를 잡고, 즉딜 스킬을 시전 했다.
그리고 스킬이 펑 하고 터져나간 것과 동시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원호는 최대한 서련을 보조하며 디버프 위주로 적을 상대했고, 근접전인 로운과 휴리사는 빠른 속도로 붙어 상대를 베고 찔렀다. 하진은 뭐, 가장 유리한 장거리 딜러니 걱정할 것 하등 없을 정도고.
“새끼들이 나대고 있어.”
“나이스! 형, 저희 잘하죠?!”
“야, 이 정도는…. 아, 서련 형! 비속 늘리는 주문서 있는데 드릴까요?”
“아니야, 형도 있어. 잠깐 간 재본 거야.”
그런대로 괜찮은 파티플이었다. 손발도 잘 맞는 편이고, 일단 애들이 눈치가 신들린 듯이 빨라서 지시내릴 일도 없었다.
말 안 해도 도트힐(초단위로 차는 힐)이나 즉시 시전할 수 있는 힐 위주로 넣어주는 원호나 서련의 스킬 패턴을 파악해 광역기와 단일딜을 넣어 우선순위 다굴을 넣는 하진이나, 포획으로 잡고 적당히 패다가 휴리사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로운이나, 그냥 손발이 맞다 못해 업혀가는 수준이었다.
음, 그냥 업혀 갈까.
일단 서련은 비행 속도 증가 주문서를 쓰고 슬슬 속도를 올렸다. 첫 번째 링을 돌파하자, 곧이어 반짝이는 실과 이어진 두 번째 링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째 링은 고의인 게 확실해 보일 만큼 상당히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었다. 반짝이는 실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위치였다.
[길드/키키아: 다들 비행시간 감안하면서 물약마셔요. 리사누나는 지금 마셔야 할 거 같아요]
[길드/휴리사: 안 그래도 종전에 마셨어ㅋㅋ]
서련이 말한 물약은 비행 시간을 늘려주는 물약이었다. 대부분 3분 초반대의 비행시간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약 쿨타임은 한 번 쓰면 적어도 30초를 기다려야 했다. 운이 나빠 대결이 붙어 생명력 회복 물약을 쓰게 됐을 땐 쿨타임이 겹쳐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여유가 될 때 무조건 물약으로 비행시간을 넉넉히 채워놔야 했다. 시합이긴 하나 비행시간이 모자라면 장외탈락으로 추락해 죽게 되었다. 물론 코스를 돌파하는 곳곳마다 쉴 수 있는 공중암석이 떠 있었지만, 쉬면서 노닥거릴 만큼 서련의 파티는 여유가 없었다.
후발주자의 서러움이라 할 수 있겠다.
[신마제국/베르르: 형형! 형!]
[신마제국/순한양: 형! 너무 느려여!]
“어…?”
서련의 시선이 모니터 여기저기로 향했다. 길드창이 아닌 일반창. 그것도 대화창에 뜨는 걸로 봐선 근처에 있다는 소리였다. 한참 뒤에야 서련은 저 뒤편에서 열심히 날아 쫓아오고 있는 수많은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다들 시작 후 10분 뒤에나 입장할 수 있는 관전자들이었다. 물론 경기에 영향도 못 끼치는 건 기본이요, 경기장 밖의 터널로만 이동이 가능해서 말만 딱 전할 수 있었다.
[길드/건블리아: 미안허다 얘들아;; 이넘들이 꼭 보고 싶다고 난리를 쳐서]
[길드/키키아: 괜찮아요. 그냥 구경만 하고 계세요ㅎ]
[신마제국/베르르: 아 길마형! 저쪽에 방해되니까 일반으로 돌려요!]
[길드/키키아: 아니야 괜찮아. 신경쓰지 않아도 돼]
“형, 다섯 번째 링 아래쪽에 있어요.”
“응, 고마워.”
서련이 늦게 출발했는데도 여유 있던 이유. 그건 바로, 링 통과 시 5번에 한 번씩 고속 비행이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순번에 정해진 링을 통과해야 가능했기에 띄엄띄엄 링을 통화한 자는 버프 효과를 받지 못했다.
-고속 비행이 적용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6초.
놀랄 만큼 빠른 속도와 함께 서련의 파티원들 주변으로 빛이 휘몰아쳤다. 빠르게 지나쳐가는 전경을 보아 평소 나는 비행 속도의 5배는 넘는 속도 같았다. 정확히 6초 후 비행 속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앞서간 유저들을 따라잡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괜히 알은 척을 하는 유저들도 있었다.
[신성제국/따블르: 키키넼ㅋㅋㅋㅋㅋㅋㅋㅋ]
[신성제국/따블르: 키키얔ㅋㅋㅋㅋㅋㅋ 킬리 좀 빌려주면 안되겠냨ㅋㅋㅋㅋㅋ]
[신성제국/타울리티: 메기야?ㅎㅎ 니 덕에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강화매물이 안나온다ㅎㅎ]
[신성제국/비타신: 강화석 삽니다~ 강화석 삽니다~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강화석 삽니다~]
[신성제국/타울리티: 보이니 메기야?ㅋㅋㅋㅋㅋ 양심은 있니?ㅋㅋㅋㅋㅋㅋㅋㅋ사탄도 울고갈 빌런앜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키키아: 음]
[신마제국/키키아: 제 킬리한테 물어봤는데요]
[신마제국/키키아: 개소리좀 그만하라네요]
[신마제국/키키아: 우리 킬리, 참 말도 잘해]
[길드/키키아: ㄱ]
서련의 지시와 함께 유유히 날며 깐족거리던 신성족들에게 공격이 쏟아졌다. 느닷없는 공격에도 어느 정도 예상을 했는지, 막아내고 반격하는 게 상당히 물 흐르듯이 유연했다.
그래봤자, 이기는 건 서련 쪽이다. 이쪽은 무려 신컨이 셋이었다. 서련의 예상대로 잘 버티던 게 무색하게 신성족들은 막판에 힐이 딸려 전멸하고 말았다.
[신마제국/휴리사: 너네 퇴장ㅋㅋㅋㅋㅋㅋ 잘가라 어중이들아ㅋㅋㅋㅋ]
휴리사의 말을 끝으로 신성족들은 바로 비행존 밖으로 퇴장되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재부활이 금지되어 완전 실격 처리가 되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소리다.
[신마제국/순한양: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짝짝!]
옆에서는 응원의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고, 반대쪽에선 ‘메기야, 너무한 거 아니냐?’하는 악담이 쏟아지고 있었다.
딱 봐도 청기 백기 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시합 자체가 운동회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좀 재밌네.
서련이 눈을 굴리다 뒤늦게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미소는 잠시 후 감쪽같이 지워졌다. 눈치채기도 전에 서련의 길드원들 위로 까만 그늘이 졌기 때문이었다. 한 무더기의 신성족이 서련의 위를 천막처럼 에워싼 채 간격을 좁혀왔다. 공격할 간을 재며 신성족들을 매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서련은 정겹게 쏟아지는 인사에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다.
[신성제국/매익화: 이거 누구신지 반가워 죽겠네^^]
[신성제국/소환신: 키키님ㅠㅠ 보고 싶었어요ㅠㅠ 안녕하세요! 아! 제 라쿠니 좀 보세요! 만이 컸죠?ㅎㅎ]
[신성제국/성냔개비: 이얔ㅋㅋㅋㅋ 어떻게 여기서 다 만나네요?ㅋㅋ]
[신성제국/댕청이: 키키님 저희 또 만날 일 있지 않습니까?ㅋㅋㅋㅋㅋㅋ]
…일단 길마만이라도 죽일까. 저 웃는 눈 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언제 날 잡아 포탈이라도 타야 되나. 골똘한 생각에 잠긴 채 매익화를 게슴츠레 바라보던 서련은 뒤늦게야 평소라면 먼저 덤비고 봤을 비글들이 얌전한 걸 깨닫고 옆을 돌아보았다.
다들 뚱한 표정이긴 했지만,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니,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쾅 하는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터져 나왔다. 놀라 바라본 곳에는 무언가에 공격을 받은 듯, 서련의 옆으로 비틀거리며 하강하고 있는 매익화가 있었다.
“그렇지! 타이밍 죽이네.”
“아, 새끼. 좀 죽이지, 그걸 또 못 죽이냐.”
로운과 원호의 말에 맞춰 떠오른 건, 해맑다 못해 발랄함이 넘치는 강마의 인사말이었다.
[신마제국/강마: 키키형!ㅋㅋㅋㅋㅋ 안녕하십니깤ㅋㅋㅋㅋㅋㅋ 저 넘 저한테 맡겨주시면 뼛속까지 발라드리겠습니다ㅎㅎㅎㅎㅎㅎ]
[신성제국/매익화: 아 치사하게 뒤치기질이야?]
[신마제국/강마: 그려 그럼 이번엔 앞통수로다가 때려줄게 이 매닭생꺄]
[신마제국/키키아: 안녕 강마야. 그리고 매익화 길드분들도 안녕하세요]
[신성제국/매익화: 키키님 저희 볼일 있는 거 잘 기억하고 계시고요]
[신마제국/강마: 하핫ㅋㅋㅋㅋㅋㅋㅋ생끼 디지고 싶어가지곸ㅋㅋㅋㅋㅋ 키키형 어서 가시졐ㅋㅋㅋㅋㅋ 여긴 제가 딱 맡아놓고 유저들 못가고 온 몸을 불살라보겠습니다ㅎㅎ]
[신마제국/키키아: 그래 부탁할게 강마야]
[신마제국/강마: 넵]
[신마제국/강마: 형 우리 또 놀러가요. 고기고기고기 형이 주던 고기 맛있었는데ㅋㅋ 왜 그 맛이 안 나지?]
[신마제국/베르르: 아오 메기혀엉!!!! 형 강마형도 만났어여?! 우린 대체 뭔 처량한 인생? 누가 설명좀?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처량할 수가?ㅋㅋㅋㅋㅋㅋㅋㅋ 전생에 내가 대체 뭔 짓을 저질렀지? 왓?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순한양: 쩔미들 꼬기 안줄꺼야? 힝ㅠㅠ]
[신성제국/매익화: 흠 우리길드도 먹을 수 있는데]
[신마제국/킬레아: 니네 지금 뭐라고 했냐? 고기? ㅅㅂ 이것들이 왜 남의 형한테 다 ㅈㄹ들인지 모르겠네]
[신마제국/강마: 조까셈^^]
[신성제국/매익화: 조까셈^^]
[신마제국/키키아: 강마야 형 그만 갈게. 부탁해]
[신마제국/강마: 넵ㅋㅋㅋ 언넝가셔요ㅋㅋㅋㅋ]
그냥 빨리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아 서련은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안 그래도 옆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오는데, 이러다 시합이고 뭐고 깽판 치다 엎어질 판이었다.
결국 서련은 좋게, 좋게 매익화를 강마의 블러더 길드에 대충 맡겨놓고 링을 찾아 나섰다. 뒤로 매익화 길드가 서련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게 보였다.
1등 하면 음, 복비라도 돌려야 되나.
[길드/키키아: 10번 링 좀]
[길드/호백조: 오른쪽 사선 위쪽요]
드디어 10번 링에 도달했다. 그놈의 1등이 뭔지 서련은 전에 없이 진지하게 시합에 임했다. 그리고 10번 링을 통과하자마자 다시 고속 비행이 시작되고 이번엔 10초 정도 지속되었다.
11번 링 진입부에는 비행시간이 떨어진 유저들이 여기저기 떠 있는 부유섬에 앉아 휴식하는 장면이 많이 잡혔다. 물론 개중엔 쉬는 부유섬을 차지한다고 작은 돌섬 위에서 쟁을 뜨는 자들도 있었다.
[길드/키키아: 일단은 그냥 돌파할게요. 물약 제대로 먹고요]
[길드/휴리사: 옙ㅋㅋ]
[길드/묵요: 넵]
[길드/킬레아: 왼쪽 사선에 링]
이쯤 되면 레이더 수준이었다. 서련이 찾기도 전에 착착 찾아 알려주는 수준이 잽싸다 못해 게눈 감듯 빨랐다. 즉시 비행시간 증가 물약을 먹고 돌파하듯 통과하자 뒤따라 쫓아오는 신성족의 행적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싸울 수도 있었지만, 서련은 일단 그냥 가기로 했다. 시합 시작한 지 이제 15분이나 되었다. 슬슬 앞질러 간 상대를 추월해야 안정적으로 순위권 안에 들 수 있었다.
서련이 그냥 앞서 날자, 다들 눈치 빠르게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연이어 링을 타고 30번째 링을 지나 고속비행으로 31번째 링 앞으로 이동했을 때였다.
31번째 링을 통과하려는 서련의 상태창 위로 적대종족의 스킬 상황이 떠올랐다. 서련의 거의 본능적으로 쉴드를 사용했다. 쉴드가 생긴 것과 동시에 서련의 캐릭 위로 운석처럼 날아든 화살이 퍼버벅 박혔다. 대량의 화살은 쉴드에 박혀 부러지거나 튕겨져 나갔다.
서련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화살 하면 딱 한 명, 떠오르는 자가 있다. 여기까지 온 실력자에, 그에 맞는 상위 길드에 속한 회피만 만렙인 외나무다리 앙숙.
[신성제국/비연: 덤벼라 샛꺄. 오늘 결판 내자]
비연이었다. 화면을 틀어 올려다보자 저 멀리서 날개를 펄럭인 채 활시위를 잡고 있는 비연에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블랙블 길드원들이 부유섬에 앉아 구경하듯 서련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련의 눈매가 즐겁다는 듯 가늘어졌다.
[신마제국/키키아: 저 너무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근데 저 회피높은 사람 싫어해요]
[신마제국/키키아: 그러니까 좀 꺼1져요]
“아, 형!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회피 다 맞췄는데…!”
“뭐라고요? 저 갑옷 벗을까요?”
“뒤지기 싫으면 둘 다 입 다물어라.”
서련의 말에 난리가 난 건, 옆에 있는 비글들이었다. 심지어는 그새 따라온 절미들마저 찬동에 나섰다.
[신마제국/베르르: 나 종잇장인데에!!]
[신미제국/순한양: 혀엉ㅋㅋㅋㅋㅋㅋ 저 희대의 망사템인데 모르세여?ㅋㅋㅋㅋㅋㅋ앗 망사. 앗 따거]
[길드/휴리사: 애들 아까부터 미쳤나봨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야생닭: 저기, 얘들아... 그건 방어력이고. 키키가 말한건 회피란다...]
[길드/건블리아: 제발 길챗으로 하면 안되겠냐;; 와나 내가 진짜 쪽팔려서 죽갔네;;]
이러다 진짜 다들 방어구를 벗을 태세라 서련은 재빨리 정정했다. 이왕이면 잘 좀 제거해달라는 의미를 담아.
[길드/키키아: 형 사실 공적 좋아해]
특히 훈장들 공적이면 더더욱. 서련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로운과 원호는 그 길로 블랙블 길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반대로 비연은 서련에게 날아들었다.
“저 새끼 내가 처리할 테니까, 가고 있어.”
“먼저 가요, 형. 곧 따라갈게요.”
“아, 저 새끼 포획 쓰잖아.”
하진이 양손총을 장총으로 스왑하고 즉시 비연에게 묵직한 공격을 날렸다. 타앙 터져나간 탄환이 비연에게 적중한 것과 동시에 서련이 미련 없이 31번째 링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사히 통과 후 뒤를 보자 부유섬 위에서 살벌한 쟁을 벌이고 있는 로운과 원호, 휴리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도 어쩐 일인지 그렇게 잘나신 어쌔신 길마와 토순이 주인이 오늘은 보이질 않는다. 저 정도면 얼추 해볼 만하지 않을까.
[길드/키키아: 먼저 갈 테니 가능하면 따라오세요]
[길드/휴리사: ㅇㅋ]
사실 올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았지만, 서련은 그래도 힘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 물론 하진이 따라온다는 데에는 손모가지까지 걸 수 있었다. 양쪽 다 근거리 딜러라 결판이 쉽게 안 나겠지만, 적어도 하진이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34번째 링을 통과하였습니다.
짤막하게 뜨는 글자를 보며 뒤를 봤지만, 역시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키보드를 현란하게 두드리고 있는 걸로 보아,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결판이 쉽게 안 나는 듯했다. 적이 또 투입됐나.
서련은 물어볼까 하다가, 방해라도 될까 싶어 그냥 놔두었다. 일단은 내 코가 석 자이므로.
-고속비행이 적용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12초.
35번째 링을 통화하자마자 12초 반영 고속비행이 적용되었다. 앞으로 남은 링은 5개, 여기서 결판을 내야 했다. 앞에 몇 명이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골인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아무도 골을 통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속 비행이 끝나고 주변 전경이 다시 느려지자, 광활하게 펼쳐진 먼 곳에 골의 형태를 띠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비행시간이 16초 남았습니다.
띠띠 울리는 비행 경고음에 서련은 재빨리 비행 증가 물약을 마시고 최대한 높게 날아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련이 날아오른 중간 고도에 엉겨 붙어 싸우고 있는 유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같은 길드 이름을 가진 유저들끼리 아주 잘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개개길드’끼리.
한쪽은 R개개길드E였고, 한쪽은 그냥 개개길드였다. 보아하니 자기들을 따라 했네, 안 했네, 우리가 원조네, 아니네, 별말이 다 나오고 있었다. 악신까지 거론되는 걸 보아, 신성제국 쪽 R개개길드E가 바로 예전에 해체된 악신 멤버들인 모양이었다.
딱 봐도 새우 등 터질 각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가서 뒤통수라도 치겠지만, 오늘은 좀 평화롭게 전개하자는 게 서련의 마음가짐이었다. 게다가 지금 눈에 띄면 분명 완전 다굴감일 테고.
사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이 선두라는 점이었다. 이쯤 되니 블랙블은 승패보다 서련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더 일리 있었다. 개개길드 쪽에는 심지어 종마 패거리도 섞여 있었다. 그래도 거기 가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박수까지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 생각은 양옆에 나타난 관전자들 덕분에 1초도 안 되어 깨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신성제국/쓰미마셍: 키키!! 이 샛끼들아! 메기 있다고! 메기! 위에!]
[신성제국/고멘: 메기!! 위에 메기 있소이다!ㅋㅋㅋㅋ 메기나 잡으라고!!]
시합에 참견할 수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저 정도면 참가 아닌가. 서련은 저들끼리 싸우다 말고 저를 보는 개개길드를 보자마자 급하강을 했다. 반대로 개개길드는 곧바로 상승곡선을 탔다.
[신마제국/키키아: 막 이르고 그러면 쓰나]
[신성제국/쓰미마셍: 쓰미마셍ㅋㅋ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베르르: 야이 매국노 샛끼들아아아아악!!]
[신마제국/순한양: 아오 그걸 왜 일러바쳐어어어억!!]
[신성제국/쓰미마셍: ? 내가 왜 매국노여]
[신마제국/베르르: 니들은 ㅅㅂ 닉넴 자체가 매국노여]
[신마제국/순한양: 당장 닉넴 바꿔와! 샛끼들이 어디 우리 메기형을 팔아먹고 있어 디질라고]
곧장 옆에서 베르르와 순한양이 잡아먹을 것처럼 난리를 피워댔다. 그 말에 여기저기 동조되어 나중에는 아예 관전자들끼리 종족 말싸움을 일으키는데, 어째 모양새가 종족대결로 번지는 듯했다.
[신마제국/맴밥: 아옼ㅋㅋㅋㅋㅋㅋㅋㅋ 메기얔ㅋㅋㅋㅋ 아니 키키얔ㅋㅋㅋㅋㅋㅋ 저 놈들좀 죽여주면 안되겠냐? 왜 다 미친넘들 뿐이냐고ㅅㅂ]
[신마제국/도핑검사: 디지고 싶나 어디 닭들이 독수리한테 덤비고 있어 젓밥생키들이]
[신성제국/톳톳: 정신들 나간신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수리?ㅋㅋㅋㅋㅋㅋ 아예 ㅈㄹ도 풍련이닼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개울가: 풍년이거든ㅋㅋㅋㅋㅋㅋㅋ아옼ㅋㅋㅋㅋㅋㅋ 키키야?ㅋㅋㅋㅋㅋ 뭐하냨ㅋㅋㅋㅋㅋ]
[신성제국/톳톳: 거 오타하나 난걸로 겁나 ㅈㄹ해쌌네ㅡㅡ]
[신성제국/고멘: 개개길드 가즈아!! 메기 바르러!!]
[신마제국/순한양: 야이 매국노 샛꺄! 우리 키키형 니네한테 저얼대 안 지거덩?!]
[신마제국/베르르: 키키형! 키키형! 만세! 최고!]
물론 이 와중에도 서련은 신성족 R개개길드E를 상대하느라 아주 바빴다. 신마족 개개길드가 틈을 보다 도주 형식으로 링으로 달려가려 들긴 했지만, 또 관전자들이 고대로 일러바친 탓에 R개개길드E한테 뒷목 잡혀 개발려야 했다.
어느덧 주위를 둘러보니, 남아 있는 신마족이 달랑 서련 혼자뿐이었다. R개개길드E는 넷이나 남아 있었다. 상대 못 할 것도 없었지만, 슬슬 비행시간도 바닥을 치고 있고 다른 유저들도 치고 올라올 때가 되어 승부를 봐야 했다.
[신마제국/키키아: 다들 시간 많으시죠?]
“하진아, 얼마나 걸려.”
“가고 있어.”
“저희는 더 걸릴 것 같아요. 뒤에 오는 놈들도 죽이는 중이라서요. 아, 누나는 도중 낙사해서 퇴장했고요.”
마침 따끈따끈한 희소식이 들려왔다. 초반부터 휴리사가 조금 걱정이었는데, 역시나 비행 물약을 제때 챙겨 먹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낙사면, 음… 나가자마자 위로부터 해줘야겠다.
[신성제국/악악귀: 이얔ㅋㅋㅋ 우리 메기 혼잔데 어그로 쩔어?ㅋㅋㅋㅋ]
[신성제국/아블스: 시간 끌기?ㅋㅋㅋㅋㅋ]
[신성제국/독화살: 됐고 이번엔 형들한테 양보좀 하자 메기야]
[신마제국/키키아: 싫은데]
서련은 일부러 35번째 고속비행이 끝나는 쪽으로 R개개길드E를 유인했다. 장거리 둘에 근거리 둘인 멤버들이 곧장 거리를 좁히며 서련 뒤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서련은 원하는 위치에 오자마자 비행 물약을 마시고 곧장 방어력이 가장 약한 유저 하나를 잡고 마법 스킬을 난사했다.
-겁화의 불길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독화살’에게 284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신성제국의 ‘독화살’이 출혈에 걸렸습니다.
데미지가 들어간 걸 확인하자마자 서련의 ‘망령의 저주’를 준비했다. 싹 다 상태이상을 걸고 뒤는 하진에게 맡긴 채 빠질 생각이었다.
[신성제국/악악귀: 뒤로]
그러나 서련의 생각을 잽싸게 알아챈 유저 한 명이 눈치 빠르게 백타이밍을 외쳤다. 덕분에 망령의 저주 스킬은 거리가 닿지 않아 즉각 취소되었다.
그걸 양옆에서 보고 있던 관전자들은 희비가 갈린 모습으로 으르렁 컹컹 서련을 향해 짖어대기 시작했다.
[신마제국/비비빅: 야이씨 이 메기샛꺄! 넌 지면 나한테 ㅈ될줄 알아!]
[신마제국/산태산: 아오 거기서 그걸 쓰면 어쪄냐고! 너 킬리 어따 팔아 넘겼어!!]
[신마제국/아티: 아닛ㅋㅋㅋㅋㅋ 강화석 쓸어가신 느그 킬리님 어디 계심?ㅋㅋㅋㅋㅋㅋ 빨리 안 꺼내냐!!]
[신마제국/순한양: 왜 님들이 ㅈㄹ이심?ㅋㅋㅋㅋㅋㅋㅋㅋ 어처구니가 없구려?ㅋㅋㅋㅋㅋㅋㅋ 야이씨 니들 길드 다 어쨌어! 어쩌고 지금 남의 길드 형한테 ㅈㄹㅈㄹ 쌍ㅈㄹ이야!]
[신마제국/베르르: 아, 우리만 메기라고 할 수 있거든! ㅅㅂ메기잠옷도 없는 생키들이]
[신마제국/산태산: 걱정마라 형 오늘 키키 이기면 메기 이불 맞추러 갈테니까]
[신마제국/순한양: 응그래. 너님 인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꽃가마: 아오! 메기야! 비속 없냐고!! 비속!!]
[신마제국/킹삐: 뒤뒤! 뒤에 따라오잖아 킬레아 샛끼는 뭐허냐?!]
[신성제국/제갈공: 잘한다! 아냑!! 야야! 거기서 회피를 써야지 아오! 개개길드 니들은 4명이서 지금 1명을 못 이기냐고!]
[신성제국/소디아르: 메기야 너 인마 얍샵하게!]
[신성제국/폭팔군림: 개!개!길!드! 만세!]
[신마제국/아티: 됐고 우리 메기!!!!!!! 가즈아!!!!!!!!!!!!]
[신성제국/치느님: 집어쳐 샛끼들아! 그놈의 메기드립은 ㅅㅂ]
[신마제국/비비빅: 왜 아니꼽냐?ㅎㅎ 니들은 ㅅㅂ 정신승리나 하고 있어ㅅㅂ럼들앜ㅋㅋㅋ]
[신성제국/크로시아: 다 도랐나 시벌ㅋㅋㅋㅋ 어디서 ㅅㅂ 지금 아놬ㅋㅋㅋㅋㅋㅋ 내가 어이가 없어섴ㅋㅋㅋㅋㅋ]
[신마제국/킹삐: 키키야? 제발 키키야 니 손에 지금 우리 종족의 미래가 달려있다제발]
서련의 R개개길드E의 싸움은 어느덧 종족 자존심이 걸린 대결로 번져 있었다. 그것도 4:1.
너무한 거 아닌가.
어수선한 상황에 서련이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을 때였다.
“달려.”
옆에서 손가락을 푸는 소리와 함께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련은 언제 기운 빠진 듯이 있었냐는 양 그 길로 재빨리 36번째 링으로 날아올랐다. 설마 그대로 몸을 날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일순 R개개길드E가 멍하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 푸드덕거리며 서련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온갖 욕설과 함께 시스템창 위로 적대종족 스킬 소식이 좌르륵 올라왔다. 일단 쉴드와 주문서에 막혀 데미지가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것도 곧 깎여 금방 깨질 것이다. 적어도 두 번 정도의 공격.
소환사는 다 좋은데 다른 즉딜 격수들과 달리 회피기가 없었다. 대신 쉴드가 있었지만, 쿨타임도 긴 데다 쉴드 말고는 몸을 보호할 만한 스킬이 없어 맨몸이 되면 생존률이 확 낮아졌다. 물론 사역수를 몸빵으로 돌리고 보호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거야 몹한테나 잘 통하지 유저들 상대로는 꼼수로 다 뚫려 그다지 실용성은 없었다.
구구절절 얘기하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여기서 쉴드가 깨지면 불리한 건 서련이란 소리였다.
서련의 예상대로 쉴드는 두 번의 공격과 함께 챙하고 깨져버렸다. 안 죽을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공적 아이템으로 버텨볼까 하고 공적 아이템을 클릭하려는 그 순간, 시스템창 위로 타이밍 좋게 하진의 광역기 소식이 올라왔다.
-신마제국의 ‘킬레아’가 혈전의 쇄속을 사용해 주변 적들에게 광역기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킬레아’의 크리티컬 수치가 향상되었습니다.
-신마제국의 ‘킬레아’가 라이플링 건샷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악악귀’에게 4321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실시간으로 양쪽 경기 밖에서 욕과 환호성이 동시에 쏟아지고, 하진은 순식간에 신마족의 구세주로 등극 되었다. 물론, 잽싸게 링을 통과하는 서련을 쫓아오는 관전자들도 많았다.
-36번째 링을 통과하였습니다.
-비행 시간과 속도가 증가하였습니다. +5초
마지막 코스로 36번째 링 이후엔 막판이라고 또 비행 증가 버프까지 걸어주었다. 이제 유유히 나는 일만 남았구나, 하는 생각과 너무 간단한데, 하는 생각이 뒤섞이던 그때 베르르가 뭐라 열심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신마제국/베르르: 형형 뒤! 뒤! 따라온다!]
[신마제국/베르르: 아 진짜 킬레아형! 왜 놓치고 그래여!! 아악 무능력!]
[신마제국/킬레아: ㄷㅊ라]
베르르의 말대로 화면을 돌려 뒤를 힐끗 보자 근거리에 가장 특화된 아처 한 명이 쫓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걸 보니 스킬거리에 잡히는 모양이었다. 쿨이 돌아온 쉴드를 재빨리 치자 곧이어 화살이 무자비로 날아와 투명한 벽에 박혀 들었다.
음, 역시 이거지.
늘 그렇듯 원래 마지막이 가장 힘든 법이다. 우여곡절도 심하고, 무엇보다 스릴이 좀 있어야 시합하는 것 같지 않겠는가. 이쯤 서련은 특별히 아껴놓고 있던 스킬을 꺼내기로 했다. 다른 때는 무리지만, 지금 여기서 쓰기에는 딱 알맞은 스킬을.
[신성제국/독화살: 메기야ㅋ 형 2등으로 들어가도 이겨ㅋ 괜히 힘빼지 말자 응?]
[신마제국/키키아: 자뻑이 좀 있으신 것 같은데]
[신성제국/독화살: 까지말고ㅋㅋㅋㅋㅋ 이리온나 디지게 죽여줄 테니까]
서련은 무려 3등으로 들어가도 점수합산 1등할 자신이 있었지만, 일단 저쪽에서 저렇게 나오니 조금 눌러주기로 했다. 2등으로 들어와도 이긴다면, 뭐... 3등으로 들어오게 해야지.
[신마제국/키키아: 음 근데]
[신마제국/키키아: 그거 알려나]
[신성제국/독화살: 뭐 샛꺜ㅋㅋㅋㅋㅋ 시간끌지 말고 말해 디지기 전에]
[신마제국/키키아: 제 킬리가 글쎄 비행 가능이라네요]
친절한 말과 함께 서련은 아끼고 아끼며, 아끼고 있던 스킬 하나를 탁 눌렀다.
-‘신속소환’을 사용하였습니다. 15초 동안 모든 스킬 사용이 중지됩니다. 남은 시간 15초.
짧은 스킬 소식이 떠오른 직후, 서련의 뒤로 검붉은 불꽃이 타오르며 붉은 스카프를 두른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났다. 포효를 한 번 터뜨린 킬리는 독화살에게 날아들며 손톱을 휘둘렀다. 그걸 보자마자 독화살이 온갖 욕을 쏟아내며 뒤로 날기 시작했다.
우리 킬리가 무섭긴 하지.
허겁지겁 달아나는 독화살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지금 같은 상황이나, 도망갈 때가 아니면 ‘신속소환’은 사용하지 못하는 스킬이었다. 등가교환이랄까, 일종의 페널티가 붙는 스킬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킬리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약 3초 정도의 캐스팅이 필요한데, 신속소환은 캐스팅 없이 즉시 시전 가능한 스킬이었다. 단, 쓴 후에는 15초 동안 다른 스킬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도망용이었다.
-39번째 링을 통과하였습니다.
-비행 시간과 속도가 증가하였습니다. +5초
“하진아, 바로 와.”
“어.”
앞으로 하나. 드디어 눈앞에 서로 마주 본 채 칼을 교차하고 있던 거대한 동상이 들어왔다. 캐릭의 날개가 제비처럼 뒤로 젖혀지고, 날개 뒤로 바람길이 생겨나 꼬리처럼 늘어졌다. 이내 쏜살같이 나아가던 캐릭의 머리가 골인 지점에 닿는 순간, 화면 위로 팡파레 소식과 함께 거대한 양피지가 떠올랐다.
-1등으로 골인하였습니다! 합산 점수 4만 5천 점.
합산 점수는 만점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뿌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위로 박수와 함께 환호의 목소리가 쏟아진 것도 그때였다.
“크으, 역시 우리 서련 형! 전 형 1등 할 줄 알았어요.”
“와, 진짜 형 천재 아니에요?! 아니, 어떻게 저기서 저걸 쓸 생각을 했지? 와, 이건 찍었어야 됐는데!”
언제부터 와서 보고 있었던 건지, 뒤를 돌아보자 저보다 더 좋아하는 로운과 원호가 신나 방방 뛰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둘 다 손바닥을 내미는데, 안 해주기도 뭐해서 서련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개하진, 개하진! 2등! 2등으로 들어와라.”
“오케이! 2등!”
“이것도 우리가 다 발라 먹었다!”
2등은 하진의 자리가 되었다. 수고했다고 말해주려는 서련의 앞으로 그보다 먼저 손이 불쑥 들어왔다. 척 내밀어진 손을 보며 서련은 피식 웃어야 했다. 그리고 가벼운 하이파이브가 이어졌다.
화면을 보자 관전자들은 이미 희비를 달리고 있었다. 신성족은 초상집 분위기에, 신마족은 축제 분위기.
[신마제국/감감래: 여윽시 우리 메기ㅋㅋㅋㅋㅋㅋㅋㅋ 메기야ㅋㅋㅋㅋ 난 니가 해낼줄 알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카우이: 우린 절대 믿어 의심치 않았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마제국/산태산: 메기얔ㅋㅋㅋㅋㅋㅋ 넌 대체 왜이렇게 예쁘냨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킹삐: 됐다 넌 탈피도 필요없어ㅋㅋㅋㅋㅋㅋ 그냥 ㅈㄴ예뻨ㅋ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아티: 다 필요없고 메기야 앞으로 넌 킬리 만져도 내가 뭐라 안한다]
[신마제국/베르르: 자자 우리 메기잠옷 파니까 줄좀 서여. 어허 귓날리지 말고!]
[신마제국/순한양: 크으ㅎㅎㅎㅎㅎㅎ메기이불 짭시다ㅎㅎ 키키형은 특별히 내가 선물로 준닿ㅎㅎㅎㅎ그래서 집이 어디라고여?]
“그놈의 메기, 메기, 지랄들을 해대네, 시발.”
“어, 근데… 음, 나도 하나 갖고 싶긴 하다.”
“그, 음… 잠옷정도면 뭐….”
“뒈지고 싶냐?”
하진이 콧등을 찡그리며 로운과 원호를 노려보았다. 둘은 즉각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도 미련을 못 버린 듯 서련의 모니터에서 내내 시선을 떼지 못했다.
괜찮은 거 같은데….
말은 못 했지만, 이번엔 서련도 같은 생각이었다. 메기 잠옷 정도면 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서련은 혼자 있을 때 인터넷을 뒤져보기로 했다. 아니면, 베르르나 순한양한테 한번 물어보든가.
“허튼 생각하기만 해.”
“…….”
물론 그 생각은 하진의 눈치에 소리 없이 밀려나야 했다. 저렇게 싫은가 하는 생각이 미련과 함께 떠돌았지만, 어쨌든 시도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아 포기해야 했다.
여전히 게임에서는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고 있었고, 이놈의 메기 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나중에는 면역이 됐는지, 처음에 그렇게 이를 갈던 하진도 종래에는 시큰둥한 표정이 되어 지켜보는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3등의 주인공은 아주 운이 좋은 신성족의 어느 한 길드가 차지해갔다. 좋다고 펄쩍펄쩍 뛰는 신성족 유저가 귀여워 서련은 심지어 박수까지 쳐주며 축하해 주었다.
그렇게 나름 다사다난했던 첫 번째 비행 시합은 승전보 속에 마무리가 되었다.
보상으로 어마어마한 길드공적을 얻은 서련의 길드가 단숨에 중상위권으로 올라가 건블리아가 눈물을 흘린 것만 빼면 참 순탄한 하루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뿌듯함 때문인지 서련도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모두와 하이파이브를 했던 기분과 체온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던 하루였다.
하진 역시 그런 서련이 신기한지 연신 힐끔힐끔 쳐다보며 게임을 할 정도였다. 나중에 가서는 그만 좀 웃으라며 볼을 쓰다듬는데, 그런 하진도 정작 웃고 있어서인지 설득력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 날이었다. 가볍게 웃는 게 좋았던 날.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