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대규모 업데이트 날짜가 드디어 사흘 뒤로 성큼 다가왔다. 유저들이 즐기는 콘텐츠를 정비하기 위한 업데이트로, 던전의 추가와 다양한 쟁 지역 등의 퀘스트 업로드, 맵의 개편 등이 업데이트의 주 내용이었다.
맵의 개편은 신성족과 신마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베히아’를 좀 더 실용적이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축소시키는 일이었다. 축소라고 해도, 더 다양한 쟁 퀘스트와 레이드, 공성전 등의 개편 소식이 전해졌기에 아직까진 우려보단 기대심리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서련 역시 업데이트에 꽤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유저 중 한 명이었다. 업데이트 목록 중 새로 오픈되는 던전과 PVP 퀘스트가 생각보다 흥미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직접 오픈되고 해봐야 알겠지만, 먼저 적용해 시행해본 테스트 서버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을 보자면, 충분히 기대할 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 몇 시에 들어오는데.”
서련의 시선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하진에게 닿았다. 하진의 눈동자가 서련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태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오늘 서련은 건블리아, 그러니까 강이찬과의 약속으로 잠시 집을 비워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건 하진도 마찬가지였다. 3바퀴 1주 소맥이라는 약속을 지켜야 하는 하진 역시 오늘부터 일주일간 밖을 전전해야 했다.
“너는 몇 시에 들어올 건데.”
“내가 먼저 물었어.”
준비를 마친 서련이 겉옷을 입고 핸드폰을 챙겨 들었다. 종전에 이찬으로부터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지금 나가야 얼추 시간이 맞았다. 문제는 비켜줄 생각이 없는 하진의 태도였다.
결국 서련은 한숨을 내쉬며 하진을 올려다보았다.
“안 비키지, 성하진.”
“언제 들어올 건지 먼저 말해.”
“12시 전까지는 들어올게. 됐지?”
“되긴 뭐가 돼. 10시 이전에 들어와.”
“...지금 8시야, 하진아.”
하진이 10시 이전을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웬만한 일이 없고서야 하진도 서련이 집에 있을 땐 10시 이전, 아니 9시까지는 대부분 집에 들어왔다. 어쩌다 한 번씩 엇나가 새벽에 들어오거나 나가기는 했지만.
“걱정되면 데리러 오든가. 10시는 안 돼. 이찬 형하고 오랜만에 본다는 거 알면서 왜 그래. 그리고 너도 약속 있잖아.”
데리러 오라는 말에 하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쯤이면 마지못해 비켜줄 만도 하건만, 며칠 전 카페에서 있던 일 때문에 더 그러는지, 경계심이 아주 하늘을 찔렀다.
“10시에 데리러 갈 테니까 도착하면 주소부터 찍어서 보내.”
“너 친구들은.”
“그것들은 웬수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며칠 전에 사 온 크림색 목도리를 서련의 목에 둘둘 둘러주며 하진이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을 내뱉었다. 서련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그 잔소리는 잦아들었다.
“그리고.”
신발을 신는 서련의 등 뒤로 하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돌아보자, 벽을 짚고 선 하진이 눈을 내려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건, 서련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었다.
“나 아직 강이찬 새끼 용서한 거 아니야, 형.”
형. 그가 이 호칭을 사용할 땐 무언가를 경고할 때였다. 서련은 쓰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진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한 후, 집을 나섰다. 후끈한 집안과 달리 밖은 어깨가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서련은 핸드폰을 꽉 쥐고 오피스텔 정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문 밖의 대로변에는 몇 년 동안 질리도록 봐왔던 승용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잠시 주차되어 있었다. 서련이 냉큼 다가가자,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30대 중반의 사내가 얼굴을 기울이며 인사해왔다.
“춥지, 어서 타라.”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형.”
“너 밖에 세워두면 야, 형 칼 맞을지도 모른다. 어휴, 춥다. 어서 타라.”
차에 냉큼 타자, 창문은 곧 닫혔다. 히터를 내내 틀고 있었는지, 차 안은 따뜻하다 못해 후덥지근할 정도였다. 시원한 인상의 사내는 서련의 손에 핫 팩을 쥐여 주며 씩 웃었다.
“형 밖에 없지?”
“네. 아, 밥은 드셨어요?”
“먹기는. 밥집 겸 술집이나 가자. 형이 좋은 데로 모시마.”
“됐어요. 그냥 아무 데나 가요.”
“야, 야. 형 승진했다니까? 이제 막 어? 돈이 썩어날… 정도는 아니지만, 너 하나 먹여 살릴 정도는 되거든?!”
“알았어요, 알았어. 앞이나 보고 운전해요.”
몇 달 만에 본 사람인데도, 마치 하루마다 본 것 같은 친근함이 들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르덴에서 늘 만나 손발을 맞추며 놀기 바빴으니.
강이찬. 그는 서련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자,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 서련을 가장 평범하게 대해준 사람이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고민을 나누고 조언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좋은 사람이었다.
“형.”
“오냐, 말만 해라.”
“하진이가 10시에 데리러 온다는데….”
“한두 번이냐. 괜찮으니까 오라고 해. 그놈도 이제 우리 길드원인데 형이 챙겨줘야지. 형, 막 차별하고 그런 사람 아니다? 형 걱정 말고, 이따 밥이나 팍팍 먹어. 술은… 되냐?”
서련은 끝에 가서야 소심한 본색을 드러내는 이찬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서련의 웃음소리에 이찬은 목에 꽉 끼는 넥타이를 잡아 풀며 머리를 긁적였다.
“많이만 안마시면 괜찮아요.”
“아니, 하진이 그게 좀 무서워야지. 눈 한 번 번쩍 뜨면 뒤에 독수리가 보인다니까.”
“형, 저번에는 사자라면서요.”
“…그랬지. 아니, 형이 걔 무서워서 너랑 짠 한 번 하겠냐? 안 되겠다. 그놈 데려와서 나랑 짠하자고 해. 그놈한테 사회인의 무서움을….”
“형, 하진이 소주 궤짝째로 마셔요.”
“…오지 말라고 해라.”
태세전환 빠른 말에 서련이 또 소리 내 웃었다. 그러나 이찬의 심각한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이찬의 긴장 가득한 표정이 풀린 건,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 도착했을 때였다. 서련이 소주나 맥주보다 와인을 선호한다는 걸 알고 준비한 센스있는 선택이었다.
와인바는 서련이 알던 어둡고 모던한 분위기가 아닌, 일반 레스토랑과 합쳐진 세련된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환했고, 좌식 테이블과 바 테이블로 파티션마다 구분이 되어 있었다.
“우리 예신이랑 한 번 와봤는데, 좋아서 다음에 너도 데려올까 싶었지.”
어깨를 세우는 이찬이 말하는 예신이 그의 약혼녀라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련은 안내원을 따라 예약된 자리로 이동했다. 안내된 곳은 편하게 앉아 마주 보며 얘기할 수 있는 좌식 테이블이었다. 그것도 다른 테이블과 상당히 떨어진.
“여기 레스토랑이라 밥도 되니까 마음껏 시켜라, 마음껏.”
“형, 이러면 제가….”
“형 승진했다.”
저 멘트는 언제까지 써먹을 요량인지, 들은 것만 해도 열 번은 넘은 듯했다. 서련은 결국 군말 없이 파스타와 샐러드, 간단한 빵을 주문하고 메뉴판을 이찬에게 넘겨버렸다. 이찬은 스테이크와 와인, 스프를 시키고는 씩 웃으며 ‘맛있게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점원에게 슬쩍 속삭였다.
“그래서 요새 별일은 없고? 어떻게 너는 형이 먼저 보자고 안 하면 볼 생각은 안 하냐, 어?”
“죄송해요. 방학 전에는 시험 때문에 바빠서 진짜 정신이 없었어요. 원래는 방학하면 바로 알바하려고 했었는데….”
“그놈한테 걸렸냐?”
“…네.”
때마침 침묵이 가라앉은 테이블 위로 주문한 와인 병이 와인 잔과 함께 놓였다. 이찬은 긴 한숨을 내쉬곤 와인을 잡아 잔에 따르고 서련에게 쓱 밀어주었다.
“그놈 그러는 거 한두 번 아닌 거 아는데, 너는 괜찮고? 참는 것도 병 될 수 있어, 이놈아.”
“아…. 저는 괜찮아요. 알잖아요, 형. 하진이 그러는 거 다….”
“너 위해서라고? 그것도 적당히 해야 위해 보이는 거야. 형이 보기엔 더 심해진 것 같은데, 아니야?”
서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하진의 간섭은 더 심해졌다. 서련이 로운과 술을 먹고 들어온 날 이후부터. 잠시 망설이던 서련은 와인으로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하진이 친구랑 술 먹고 들어온 적이 있어요. 어쩌다 만나서 그렇게 됐는데…. 제가 그날, 혼자 두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나 봐요. 아닌 줄 알았는데… 저, 외로웠나 봐요.”
“하아, 그걸 말이라고.”
“그날부터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서련의 탓이 컸다. 이찬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슬쩍 짚었다. 이찬은 잠시 서련을 아픈 손가락 보듯 바라보았다. 안에 들어와서도 서련은 저를 감추고 싶은 양 꽁꽁 싸맨 채였다.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시선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찬은 그게 제 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서련아, 추워? 안 추우면 괜찮으니까 목도리도 벗고, 겉옷도 좀 느슨하게 풀어봐.”
이찬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서련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목도리와 겉옷을 벗었다. 목도리만큼 흰 얼굴이 드디어 이찬의 시야에 올곧이 들어왔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서련은 참 어렸다. 그래서인지, 이찬은 서련을 보면 늘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어저께 박건우한테 연락 왔었다.”
“…….”
“카페에서 우연히 너 봤다더라.”
박건우. 그 이름을 듣자마자 서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서련이 3년 동안 모든 걸 바쳐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이찬의 친우이자, 서련의 옛 연인이었던 사람. 말만 연인 같은 사람이었다. 그 사랑이 일방적인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 20살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였다.
서련의 표정은 어느새 일그러져 있었다. 그 모습이 와인 잔 안에 뚜렷하게 비쳤다.
“생각 같아선 내가 그 자식 반쯤 죽이고 어디 매장이라도 시키고 싶은데... 알잖아, 서련아. 그놈 이미 그 수준까지 목숨 위협 받았던 거.”
“…그냥… 그냥 우연히 부딪친 거예요, 형.”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근데 차단하고 번호까지 바꾼 내 연락처 꾸역꾸역 알아내서 나한테 연락한 거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어. 하진이한테 그 꼴 당하고 무서워서 숨어 살겠거니 했는데, 나한테 네 얘기 한 거 보면… 형 솔직히 겁난다, 서련아.”
일방적으로 버려졌던 건, 서련이었다. 그 3년 동안, 온갖 모진 일을 다 겪었다. 그래서인지 그 3년의 시간 속에서 서련은 아직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애증은 더더욱 아니었다.
“서련아, 너 아직도… 그 자식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아니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
“그래, 알지….”
“그 사람… 다시 볼 일 절대 없어요.”
“그거면 됐다. 에휴, 형도 이젠 늙었는지 걱정이 아주 산처럼 쌓인다. 그렇다고 형 아재는 아니다?”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내는 목소리에 서련이 곧장 미소를 드러냈다. 안다. 이찬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서련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또한,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고 싶어서 그런다는 걸.
쓸데없이 건배나 하자며, 이찬은 서련의 잔에 제 잔을 짠 부딪쳤다. 그러나 마시기도 전에 울리는 벨소리에 허겁지겁 전화기를 찾아 들어야 했다. 의외로 전화는 금세 끊어졌다. 대신 액정 화면 위로 살벌한 문구가 하나 떠올랐다. 그걸 본 이찬의 표정이 괴기스럽게 변했다. 약간 질려하는 것도 같았다.
“…아니, 얘는 내 번호를 도대체 어떻게 안 거냐…?”
시선이 슬쩍 서련에게 향했다. 서련은 와인 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슬쩍 저었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 장소를 누구보다 궁금해할 성하진.
아마도 서련이 자고 있을 때 핸드폰을 뒤져 알아냈을 확률이 높았지만, 서련은 그것까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형은 어떻게 알았는데요?”
“나야, 길드소개란에 떠 있는… 하! 그런 거고만.”
말을 슬쩍 흘리자 혼자 꿀떡 잘 받아먹는다. 결론을 끝낸 이찬은 웃는 낯으로 서련에게 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서련아. 이 똥개새끼가 당장 위치 찍어 보내란다.”
[추적하기 전에 위치 좀 보내지?]
그곳에는 반말로 성의 없이 써진 문자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만난 지 아직 한 시간도 안 됐건만, 하여간 보채기로는 원탑이었다.
“이 새끼, 이거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너 추적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당장 헤어져! 이 새끼 진짜 안 되겠네?”
“헤어지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요. 제가 얹혀사는 처지인데.”
“…서련아, 형 집으로 들어올 생각 없냐?”
서련은 핸드폰을 켜고 하진에게 이곳 주소를 검색해 보내주었다. 물론 이찬의 대답에 정성껏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이 하진이한테 말해주면요.”
“…아니다. 내가 괜히 내 명을 재촉하고 자빠졌지. 아니, 뭔 어린 놈의 기가 그렇게 세다냐?”
뒤에 진짜 독수리가 보인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입을 삐죽 내미는 이찬을 보니, 새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가 참 편견 없이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넣고 고개를 드는데 문득 거리감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시선을 약간 비틀자 대각선에 있는 바 테이블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련의 얼굴이 그늘이 졌다. 안 좋은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예감은 멀리서부터 걸어오던 직원이 음식이 아닌 와인이 담긴 잔을 서련의 앞에 내려놓은 것과 함께 적중했다.
“실례가 안 되신다면 저쪽 분께서….”
“아뇨, 거절하겠습니다.”
서련은 직원의 말을 끊고 와인 잔을 뒤로 물렸다. 어리둥절하게 보던 이찬의 눈에 분노가 스민 것도 그때였다.
“이봐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먼저 와서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이거 준 사람 누굽니까? 아니면 일행이 있는데도 매너 없이 다짜고짜 와인 잔 내미는 게 여기 방식입니까?”
이찬의 분노 어린 말에 와인 잔을 가져온 직원이 우물쭈물 주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에 맞춰 저 멀리서 다른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오기 시작했다. 가슴에 달린 뱃지를 보니 매니저였다. 그걸 본 순간 서련의 눈가에 피곤함이 몰렸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저희 직원이 실수를 한 듯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강이찬님 본인 되십니까?”
“본인이고 나발이고 와인 잔 준 사람 면상부터 봅시다. 만약 남자면 당신들은 오늘 사람 잘못 만난 줄 아시고.”
“형, 저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저희 직원이 착각한 듯한데, 제가 다시 전달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착각? 전달? 하,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아니고…. 하아… 그래요, 들어는 봅시다. 뭐 얼마나 대단한 변명이 나올지 궁금하네.”
이찬의 비아냥거림에도 매니저는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미소를 보이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에 누그러진 이찬이 한 수 접고 들어줄 정도로 말이다.
“예, 그 이전에 강이찬님 본인 되십니까?”
“네.”
“성하진 님이 메시지와 함께 와인을 준비해 주셨는데, 받으시겠습니까?”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도 그때였다. 덕분에 이찬은 물론 서련의 표정도 멍해졌다. 언제 온 건지, 매니저 뒤에는 와인 병이 담긴 바구니를 든 직원이 서 있었다. 와인 바구니 안에는 눈에 띄는 색상의 작은 편지가 꽂혀 있었다.
이찬은 그걸 보곤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구요?”
“성하진님께서 말씀하시면 알 거라고 하셨는데, 아니시라면 저희 측에서 다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찬의 묘한 시선이 매니저와 와인 병으로 번갈아 향했다. 그러나 곧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라고 합디까?”
“필터링 없이 전해드리기 곤란하여 편지로 작성하였으니,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매니저는 뒤에 서 있는 직원이 내미는 편지는 곧장 이찬의 앞으로 옮겨졌다. 이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아들고 작은 편지지를 열었다. 어째 읽을수록 표정이 굳어지는 게, 하진이 또 개하진 노릇을 한 모양이었다.
이찬은 편지를 다 읽자마자 그걸 구겨 쥐었다. 그리고는 웃는 낯으로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웃고 있는데도 어딘지 위화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그건 오픈해서 놓고 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쪽 직원분께는 실례했다고 전해주시고요. 그렇다고 다짜고짜 술을 내미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거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예, 불편을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음식은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깍듯한 모습이 되레 이쪽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매니저와 직원이 물러가자마자 서련은 이찬의 손에 구겨진 종이를 힐끗 발라보았다. 궁금했지만,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듯 이찬이 음울한 모습으로 서련에게 울적하게 말했다.
“서련아. 형이 싸구려 먹여서 미안하다….”
“무슨 말이 그래요. 아니에요, 형. 이것도 감지덕지한데.”
서련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이찬의 주눅 든 어깨는 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편지지에 쓰인 말이 어떤 내용인지 대충 추릴 수 있었다.
“일단 형이랑 자리 좀 바꿔 앉자. 그쪽 자리가 다른 테이블에서 보이나 보다.”
서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찬과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제야 사방이 막힌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찬은 편안한 마음으로 식전 빵을 먹는 서련의 빈 잔에 하진이 넣어준 와인을 따라 주었다. 또르륵 흘러나오는 와인이 색이 참 예뻤다.
“하진이 그놈 돗자리 펴라고 해야겠다. 타이밍이 아주 기가 막히네.”
“어디서 보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서련아, 무서운 소리 하지 말자. 어쨌든 이제 편하게 마시자, 편하게. 이것보다 비싼 술 절대 안 들어온다.”
그 이전에 이미 크게 한바탕했으니, 들어올 리도 없겠지만. 서련은 빵을 뜯어 먹다가 미안한 표정으로 이찬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웃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타박이 들어왔다.
“미안해요, 형. 저 때문에….”
“웃지 마, 이놈아. 나 너 웃으면 무서워. 그리고 이게 너 때문이겠냐? 생각 없이 사는 놈들이 제 분수 모르고 날뛰는 거지.”
여자라고 착각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남자인 걸 알고 그런 걸까. 생각이 복잡하게 돌아갔지만, 곧 음식이 나오면서 그 생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음식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맛있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참새 모이만큼 먹던 서련이 파스타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울 정도랄까. 하진이 봤으면 매일 데리고 오겠다고 다짐했을 정도였다.
“…하나 더 시켜주랴? 오늘따라 왜 이리 잘 먹냐, 형 불안하게.”
“형은 제가 뭐만 하면 불안하대요.”
“아니, 주먹만큼도 안 먹던 애가…. 너 취한 건 아니지?”
“설마요.”
조금 알딸딸하긴 했지만, 취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서련은 슬쩍 웃으며 이찬이 내미는 스프를 받아 떠먹기 시작했다. 곧 10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련은 스프를 먹다 말고 창밖을 응시했다. 어두운 밤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형.”
“오냐.”
“하진이랑 저요…. 이상한 거겠죠…?”
손끝에 만져지는 건 얼마 전 하진이 사줬던 흰색 패딩이었다. 이름 있는 메이커에 묻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비쌀 것 같은 옷. 하진은 서련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서련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건 아마 하진이 녀석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일 거다.”
“…형. 저는… 저희가 어떤 사이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너희가 정하기 나름이야. 형제라고 생각하면 그쯤. 아니라고 생각하면… 남 아니겠냐.”
남.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하진과 서련은 분명 형제였다. 비록 재혼가정이었다 하더라도. 근데 지금은 그런 게 없었다. 완벽히 남이 된 지금, 서로의 관계는 모호했다.
하진과 처음 만났던 날을 서련은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견례를 빌미 삼아 한자리에 모였던 그날은 꽃샘추위가 유달리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서련이 지독한 독감으로 고생하던 날이기도 했다.
그때의 서련은 막 17살이 된 참이었다. 하진은 16살이었다. 16살이 이래봤자 그 당시 하진은 서련보다 더 컸었고,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좀 더 작고 조금 앳된 모습이긴 했지만, 조금 더 독선적이었다.
하진은 소위 말하는 재벌가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것도 외동아들. 당시 서련의 어머니는 서련을 먹여 살리는 것도 빠듯할 정도로 가진 것 없는 삶을 살고 계셨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모른다. 서련은 그저 어느 날 덜컥 어머니로부터 재혼 사실을 들었을 뿐이었다.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 보이지만, 자기 사리에 밝은 사람이셨다. 지금은 다른 사랑을 찾아 재혼하신 후지만, 그 안에 서련의 존재는 없었다.
많이 힘들어하셨다. 없이 들어와 은근한 무시를 받으며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그 끝은 결국 이혼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현재 서련의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심지어 용돈까지도 모두 하진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서련의 존재를 눈감아주는 ‘아버지’의 존재가 있기에 가능한 얘기였다. 나쁘거나 싫은 분은 아니셨다. 다만, 남이 된 지금 손을 벌리는 게 서련으로서는 탐탁지 않을 뿐.
“그냥… 요새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때 지금만큼만 성숙했더라면 하진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건데… 이런 생각이요.”
이찬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서련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17살의 서련은 지나치게 어렸었다. 생각보다 더, 애 같을 정도로 철이 없었다. 20살의 졸업식이 올 때까지도 그랬고, 그 때문에 하진이 많이 고생했었다.
“…그게 어디 네 탓이겠냐. 따지고 보면 원인 제공자는 난데.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라, 서련아. 형 마음 아프다.”
“아니에요. 저는 형 같은 사람 만나서 정말 좋아요. 형 아니었으면 리사누나랑 야생형도 못 만났을 거고, 또 우리 절미들도 못 만났을 테니까.”
“어쭈?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은 잘해요? 우리 메기씨, 절미들이 아직도 메기메기 거리는데 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
“없는데.”
“그래, 너 메기다. 어디 메기뿐이냐? 너 불가사리도 닮았어.”
서련이 미소를 띠고 웃었다. 무거운 주제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찬과 만난다고 매번 무거운 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역시 속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이찬뿐이니, 분위기가 종종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더 시켜줘? 너 요번에 살 좀 찌워가지고 보내야겠다. 하진이 그놈이 제대로 먹여주긴 하냐? 애가 어떻게 된 게….”
“그쪽보다는 더 잘 먹이는데.”
“그래, 그쪽보다는 잘… 헉!”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말하던 이찬이 도중 숨을 헉 들이마셨다. 서련의 옆으로 나타난 덩치 큰 사내 덕분이었다. 그것도 살벌한 눈빛을 한 채 입만 겨우 웃고 있는, 뒤에 독수리가 비치는 사내 말이다.
“아, 왔어?”
놀라 몸을 사리며 물러난 이찬과 달리 서련은 태연한 반응이었다. 서련은 안쪽으로 몸을 물리고 하진에게 옆에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하진은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서련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그걸 본 서련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드러났다. 푸딩이었다. 서련이 잡아들고 뚜껑을 까자, 하진이 흘러내린 패딩을 서련의 어깨에 제대로 덮어주고 이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메기?”
하진의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이 이찬을 갈궜다. 노려보는 게 마치 이렇게 예쁜 메기 봤냐, 라는 눈빛이었다. 이찬을 침을 꿀꺽 삼키고 잔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외쳤다.
“건배!”
하진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내뱉다가, 서련의 와인 잔을 대충 들어 올렸다. 덕분에 서련의 와인은 직후 하진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아니 이놈은 어째 형한테 다짜고짜 반말이야. 야 인마, 내가 네 길마다.”
“어쩌라고.”
“…어쩔 순 없지.”
이찬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뒤에 독수리가 보인다는 둥 헛소리를 내뱉으며 말이다. 하진의 살벌한 시선은 서련이 간식을 깨끗이 해치우면서 거두어졌다.
“성하진,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그리고 너 친구들은.”
“알아서 기어들어 가겠지. 내 알 바야?”
“술은 얼마나 마셨어.”
“조금 마셨어, 조금.”
그 조금이라는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풍겨오는 술 냄새로 보아 적게 마신 건 아닌 듯했다.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기는 해도 뭐랄까, 분위기가 어딘지 아슬아슬했다.
“얼마나 마셨는데.”
“…기억 안 나.”
그러면서 하진은 서련의 와인을 들이켜 마셨다. 이러다 제가 업고 가는 건 아닌지, 오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고민을 마친 서련은 하진의 옷을 슬쩍 잡아당겼다.
“하진아, 그만 마셔.”
술이야 남으면 킵해두거나 들고 가면 된다. 기분이 알딸딸한 게 여기서 더 마셔봤자 폐만 끼칠 것 같고, 더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딱 여기까지. 서련의 말에 하진은 큰 고민 없이 잔을 뒤로 밀어냈다. 그 모습에 이찬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깐족거렸다.
“이놈이 그래도 우리 서련이 말은 또 잘 들으시네?”
“누가 우리 서련인데.”
“뭔 말을 못 해요. 에휴, 알겠다, 알겠어! 우리 평화롭게 좀 해결하자?”
“댁이나 좀 조용히 하지?”
서련은 하진 몰래 이찬에게 쓴웃음을 지어주며 미안한 마음을 비쳤다. 이찬은 괜찮다는 듯 웃었지만, 서련은 싸늘한 하진의 태도에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그만 좀 가지?”
얼마나 쓸데없는 얘기를 노닥거렸는지,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 참다참다 말한 듯 하진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서련의 시선이 제 앞으로 옮겨졌다. 깨끗이 비워진 빈 잔이 시야에 흐리게 들어왔다. 이찬 혼자 마신다는 걸 말리다가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주다 결국 둘이 그대로 와인 한 병을 비우게 되었다. 하진의 표정이 안 좋은 것도 이해가 갈 만 했다.
“그래, 그만 가는 게 좋겠다.”
“네…. 형 혼자 갈 수… 있겠어요?”
“형이야 대리 부르면 되고. 네 몸이나 잘 챙겨라, 이놈아.”
“저야… 네, 알겠어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서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목도리까지 둘둘 말자, 취기가 순식간에 올라왔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서련은 냉수를 들이켜고 먼저 일어나는 하진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집 가서 연락할 수 있으면 톡 하나 남기고. 알겠냐, 서련아?”
“네. 형도… 잘 들어가요. 저 괜찮아요.”
서련이 목도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찬 바람을 쐬자 시야가 조금 선명해졌다. 머리까지 맑아지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먼저 가라. 대리 오려면 조금 걸린다니까 형은 바람이나 쐬련다.”
“저도 기다려 줄….”
“뭘 기다려.”
순식간에 손이 잡히고 그대로 앞으로 당겨졌다. 서련은 하진에게 끌려가다시피 걸으면서 이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찬의 씩 웃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서로는 길을 달리했다.
추운 밤길이 술기운 때문인지 시원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유난히 따뜻한 손안의 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오래 걷지 않아, 하진은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좀 자고 있어.”
큰 손이 서련의 머리를 눌러 기대게 했다. 그럴까,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서련이 눈을 뜬 건 집에 도착해서였다. 정확히는 현관문의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하진의 단단한 어깨였다. 세상모르게 잤는지, 택시에서 내려 업혀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깨우지 그랬어.”
“잘 자는 사람을 왜 깨워.”
그래서 밤에 그렇게 살금살금 들어와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건가. 서련은 눈을 깜빡이며 시야가 선명해지길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거리감이 익숙해지자마자 하진의 등에서 내렸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향하는 길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겨우 하진의 부축을 받고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옷 좀 벗어 봐.”
“내가 할 테니까 하진아…. 좀 나가 봐….”
“알겠으니까, 겉옷만 좀 벗어봐.”
벗기려는 손길과 어떻게든 사수하려는 손길이 옥신각신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포기한 건 하진이었다. 하진은 살살 달랜 후 벗겨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형.”
“…응.”
“씻겨줘?”
서련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를 저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귀 끝이 새빨개져 있었다.
“내가… 내가 씻을게. 그러니까 하진아….”
“그럼 겉옷부터 벗어.”
나지막한 말에 서련은 잠시 고민하다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척비척 일어나 잠옷을 챙겨 들고 휘청거리며 방을 나섰다. 허물처럼 벗겨진 외투를 정리하는 건 하진의 몫이었다.
그래도 씻을 정신은 있었는지, 서련은 별문제 없이 씻고 잠옷까지 착실히 입은 상태로 욕실에서 나왔다. 혹시나 있을 일에 대비해 앞에서 서성거리던 하진은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련의 어깨를 잡고 방으로 인도했다.
“…하진아, 내가 갈 수 있어.”
서련의 졸음기 가득한 시선이 하진에게 닿았다. 술기운에 샤워를 해서 그런지, 눈가가 잔뜩 붉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까무룩 감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예쁜 짓 좀 하고 그런 말을 하든가.”
그 말에 서련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방 침대에 도착했을 때 다시 하진에게 향했다. 왜, 뭐,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하진에게 서련은 말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하진의 어깨가 흠칫 굳어진 것과 동시에 다정한 음성이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잘 자.”
뺨에 스치듯이 온기가 닿은 건 그 후였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온기는 곧 하진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한참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은가 싶더니, 이윽고 쌔액 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하진의 꽉 다물린 턱 끝이 하늘로 향했다. 하진은 피곤한 듯 제 눈가를 한 번 쓸어내리고 인내를 담아 서련을 조심히 침대에 눕혔다. 세상모르게 자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도 안 날 지경이었다.
“하, 이걸 진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 와중에 제 옷을 잡아 쥐고 있는 손은 또 왜 이렇게 가슴을 후려치는지 모르겠다. 풀면 금방 벗어날 수 있었지만, 하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서련이 쥐고 있는 외투를 허물처럼 조심히 벗어 놓고 뻐근한 목을 쓸며 욕실로 향했다.
“예쁜 짓 좀 하랬더니, 누굴 죽이려 들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하진의 손은 한참이나 심장 부근에 머물러 내려오지 않았다.
***
대규모 업데이트가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에르덴은 오늘 자정을 시작으로 하루 간 로그인이 제한되었다. 정확히는 오후 6시까지가 안내된 패치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연장되거나 추가 패치가 있을 수 있었기에 서버가 안정될 때까지는 되도록 접속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 봤자 업데이트 설치 시간도 만만치 않아, 애초 접속하는 것도 몇 시간 후가 되겠지만.
피시방 업데이트까지 고려했을 땐 그냥 마음 편히 다음날 찾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때문에, 서련도 내일은 집에서 발 뻗고 다음날이 오길 오매불망 기다리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서련은 집을 나온 순간부터 피시방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오늘 할 계획을 알뜰하게 짜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계획을 수립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서련의 계획에 제동을 거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점이랄까. 그 첫 번째 존재는 아침 댓바람부터 서련에게 우편을 보낸 웬 유저들이었다. 그것도 종족불문하고 양종족 다.
“이 정도면 뭐….”
우편이라 쓰고 뇌물이라 읽는 수준이었다. 수신된 우편함에 첨부된 물품은 서련이 그렇게나 갖고 싶어 하던 킬리의 악세였다. 그것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대단한 옵션이 달린 주신등급 액세서리 말이다.
거기에 더해 제목들은 또 죄다 한결같았다.
[제목: 키키야 우리 땅은 오는 거 아니다ㅡㅡ]
[제목: 이거 줄 테니 제발 오지 좀 마라... 부탁이다ㅠㅠ]
[제목: 키키야. 하... 킬리좀 고만 만지면 안되겠냐?]
[제목: 이거 받고 킬리랑 얌전히 있자. 어허, 너는 형네 오면 디진다]
어제 아침에 이걸 받았다면 조금 혹했을 지도 모르지만, 하루가 지난 지금은 완전히 사정이 달라졌다. 그 이윤 즉, 어제 베르르와 순한양이 킬리의 악세 제작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하진이 죽어도 공짜로는 받을 수 없다고 부득불 우겨서 하진이 대신 값을 치르고 사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서련의 입장에서는 결국 공짜로 받은 것이지만. 덕분에 그 악세는 선물형식으로 서련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지금 우편에 있는 악세들은 서련에게 하등 필요 없는 것들이란 소리였다. 잠시 고민하던 서련은 악세를 그대로 반송하고 상냥한 말투로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겠네요ㅎ’라는 말까지 손수 써서 하나하나 우편을 보내주었다. 나 포탈 타니까 이따 보자, 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것이었다.
그 후에는 우편을 수신거부로 돌려놓고, 지도를 켜서 포탈의 시간과 위치를 확인했다.
[길드/키키아: 형은 오늘 포탈 탈게]
[길드/베르르: 아니 형?ㅋㅋ 이 무슨 메기같은 소리?ㅋㅋㅋㅋ 악세 해주니까 또 딴데로 새십니꺼?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우리랑 놀아준다는 약속은 어디?ㅎㅎㅎㅎㅎ 뼈 빠지게 만들어서 바친 절미들에게 이러기 있기 없기?ㅎㅎㅎㅎㅎㅎㅎ]
[길드/야생닭: 고만해라 이 철부지들아. 니들 할 일 많다며!]
[길드/베르르: 그럼 생닭형이 우리랑 같이 다니실?ㅋㅋㅋㅋㅋ]
[길드/야생닭: 형 오늘 제작 찍어야 되서 안된다 크흠]
[길드/순한양: 아오ㅡㅡ 우리 광견님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길드/킬레아: ㅈㄹ]
[길드/묵요: ^^ㅗ]
[길드/호백조: ㅈㄲ]
[길드/베르르: 크으, 우리 형님들 리스펙]
[길드/순한양: 킬레아 형님은 나가 디집시다ㅎㅎㅎ 아니 그렇게 속여 놓고 양심에 가책도 없으시나ㅎㅎㅎㅎ 우리가 오랄땐 온갖 욕을 다 던지더니 키키형이 오라니까 충견등극. 와...]
[길드/베르르: 그동안 그럼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칼춤까지 춘 거냐고욬ㅋㅋㅋㅋㅋㅋ 아니 진짜 미쳤나봨ㅋㅋㅋㅋㅋㅋ]
[길드/킬레아: 아니 ㅅㅂ 저것들이 도랐나]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처음 눈설이 킬레아라는 게 밝혀졌을 때 길드는 한 차례 큰 파란을 맞이했었다. 다들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 길드에는 한동안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렇게 밝고 유쾌하던 절미들조차 말 한마디 없었다.
가진 것 없던 눈설이 설마 대단하기로는 으뜸인 킬레아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었다. 하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했다. 서련만 해도, 같이 안 했으면 눈치챌 일은 없을 터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블리아가 로운과 원호에게 니들은 알고 있었냐며 물은 덕분에 화살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로운이 하하 웃으며 죄송하다고 한 말에 길드원들의 원성이 곧장 그와 원호에게 날아간 탓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사자인 하진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반하장격으로 으르렁거리며 욕부터 날려대니 뭐…. 다들 하진을 반쯤은 미친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크게 작용한 듯했다.
혹시 본캐를 감춘 행동에 대해 다른 뜻이 있나 싶어 눈설로 활동한 이유를 물어봤지만, 하진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예상한 대로의 답변이었다.
“뭐만 하면 간섭한다고 할 거잖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데, 서련은 진지하게 이걸 진짜 어째야 되나 깊은 상념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단전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올라올 정도였다. 편하게 유저들을 조질 수 있다는 대답이 그 뒤를 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는 걸 조건으로 길드로 끌어들인 건데, 고삐 없는 간섭이 무섭다는 걸 서련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아야 했다.
[길드/베르르: 에이 눈설형님 제 맘 알믄서ㅋㅋㅋ 아니 근데 키키형도 모를 정도면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거얔ㅋㅋㅋㅋㅋ 졷까라는 말 할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뎈ㅋㅋㅋ]
[길드/야생닭: 하하... 저러다 죽겠네...]
[길드/묵요: 에이 형, 저희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ㅎ]
[길드/호백조: 쩔미들 또 머리 들기 시작하네?^^]
[길드/베르르: ...형님들? 오늘 키키형이랑 같이 노는건 어떠신지여?]
[길드/순한양: 형님들 저한테 좋은 생각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저 개진지합니다]
[길드/호백조: 어휴 그래 들어나 보자 새1끼들아]
서련은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베르르와 순한양의 눈치를 보다가 몰래 마을을 빠져나왔다. 사실 오늘 서련이 구상한 원대한 계획은 포탈을 타고 토순이를 만나 킬리와 함께 쟁을 뜨고, 채집 겸 산책을 빌미삼아 토순이 주인과 신성제국을 돌며 신성족들을 털러 다니는 것이었다.
풀강을 끝낸 킬리가 아직 토순이와 일대일로 떠본 적이 없는 걸 고려한 계획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하진과 로운의 눈물겨운 조공으로 강화를 마친 공적셋 방어구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어느 정도 포함된 계획이었다.
적중이나 피통 빠지는 수치가 마을 근처의 몹만 잡아도 체감될 정돈데, 유저들을 상대로 쟁을 했을 땐 얼마만큼의 갭이 나오는지 벌써부터 기대 중이었다. 물론 근처에 대결 상대가 많긴 했지만, 하진과 로운, 원호는 대결만 걸었다 하면 무릎부터 꿇고 목을 내미는지라 성능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신성족 유저로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비교 불가했다. 절미들이야 너무 쉬웠고. 그래서인지 사실 서련은 지금 당장이라도 쟁을 뜨고 싶어 근질근질한 상태였다.
[길드/베르르: 헉 키키형 또 어디로 도망갔어여!]
[길드/순한양: 하여간 키키형 겁나 잽싸]
[길드/키키아: 오늘만 따라 놀자. 내일부터 같이 놀아줄게]
[길드/베르르: 형ㅋㅋㅋㅋㅋㅋㅋ 내일 업데이트 거든요?ㅋㅋㅋㅋ]
[길드/키키아: 그래 낼모레]
[길드/순한양: 형님들?ㅎㅎㅎ 빨리 정하죠?ㅎㅎㅎㅎㅎㅎ]
포탈이 열리기까지 앞으로 15분이 남았다. 지금 이동해야 복잡하지 않게 포탈을 타고 넘어갈 수 있었다. 서련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텔레포트를 타며 포탈이 열릴만한 곳으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그래서인지, 버림받은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는 비글들의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련 형, 정말 혼자 노실 거예요?”
“에이, 이왕 가는 거 저희랑 같이 가죠?”
“아냐. 형 혼자 놀게.”
서련은 혹여 누가 쫓아올까 로운과 원호의 말에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한데 그게 그들을 퍽 빈정 상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손바닥 뒤집듯 막내들과 손을 잡은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길드/묵요: 콜]
[길드/호백조: 절미들 준비하자]
[길드/킬레아: 찢어져]
[길드/베르르: 여윽싴ㅋㅋㅋㅋㅋㅋ 우리 형님들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먼저 가겠습니다]
[길드/묵요: 절미들 가다가 블러더 길드 만나면 같이 가라]
[길드/베르르: 얍! 옙!]
블러더? 그제야 서련의 시선이 옆으로 홱 돌아갔다. 무슨 꿍꿍인지 하진부터 시작해 셋 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로운과 원호는 그렇다 쳐도 하진은 또 왜 그 사이에 껴서 움직이는지 납득이 안 됐다.
일단 서련은 킬리를 소환하고 인벤토리를 열어 대결 거부권의 수량을 확인했다. 총 79장. 딱 79번에 한해 대결을 거절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엔 불가피한 대결이 걸려올 것이다.
무슨 꿍꿍인지는 몰랐지만, 만약을 대비해 서련은 거부권에 대한 사용여부를 자동에서 수동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킬리를 대동하고 다시 포탈을 향해 내달렸다. 이제 포탈이 열리기까지의 남은 시간은 약 12분 정도. 아슬아슬하긴 해도 일단 건너가기만 하면 다시 끌고 올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서련의 시야에 웬 낯익은 닉네임이 난데없이 잡혔다. 새파란 글씨로 떠오른 건 귓속말이었다.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그쪽 길드원들이 지금 그쪽 회개시켜주겠다고 난리인데, 아는가 모르겠네^^}
회개란 말이지. 서련은 귓속말 창을 최대한 안 보이는 구석에 놓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귓속말/매익화님께: 그건 몰랐네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포탈타려고 발악한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리는데, 그냥 그대로 돌파?}
{귓속말/매익화님께: 도와줄거 아니면 빠지세요. 킬리 보내기 전에}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워, 블러더 동맹요청보다 무섭네. 그러지 말고 어때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귓속말/매익화님께: 왜요. 또 소환권 운운하시려고?}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그건 좀 그렇고, 요새 우리 길드가 소환사 한명 영입해서 키우고 있는데 일대일 지도해주면 도와주고요^^}
{귓속말/매익화님께: 어떻게 킬리 보낼까요, 제가 갈까요? 제가 가면 그냥은 안 끝나는데}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알겠어요, 알겠어. 딱 3번만 맨투맨 해주는 걸로. 콜?}
서련은 잠시 손익을 따져 매겼다. 3번이면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긴 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느냐가 문제였다. 수만 가지 생각을 플레이하던 서련은 이게 다 뭔가 싶은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매익화의 제안을 수락했다. 일단은 포탈 먼저.
{귓속말/매익화님께: 네}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깔끔해서 좋네}
어떤 방식으로 도와줄 건지 말해주면 좋으련만, 매익화는 그 말과 함께 귓속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불러봤지만, 역시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서련의 캐릭 주변으로 세 명의 유저가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들은 다짜고짜 서련의 주위를 둥글게 에워쌌다. 신성족이 둘, 신마족이 하나였다. 바로, 서련의 옆에서 무서운 기세로 게임을 하고 있는 비글 삼인방이었다.
신성족은 로운과 원호였고, 신마족은 하진이었다. 저 둘은 언제 또 신성족으로 로그인을 한 건지, 절로 고개가 내저어졌다. 어째 얘들하고 있으면 한눈을 못 팔겠다.
그래도 세 명이면 어느 정도 애교로 봐줄만 했다. 문제는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저 앞에서 수많은 유저들이 서련을 향해 두다다다 달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선두에는 신나 날뛰고 있는 베르르와 순한양이 있었다. 녀석들 뒤에 있는 유저들이 블러더 길드인 건 안 봐도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앞으로 훌쩍 튀어나오는 유저를 보니 머리 위에 강마라는 이름이 떡하니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붉은 깃이 달린 훈장은 덤이고.
[강마: 아이곸ㅋㅋㅋㅋㅋ 이게 대체 얼마만입니까 키키형님?ㅋㅋㅋㅋㅋㅋ]
이제 고작 이틀 됐을 뿐이다. 누가 들으면 근 몇 달간은 못 보고 지낸 줄 알겠다. 그래, 아무렴 좋았다.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키키아: 길 좀 비켜줄래]
[강마: 에이 키키형님 잡겠다고 애들이 지금 이를 갈았는데ㅋㅋㅋㅋㅋ 뭐 느끼는 거 없나요 키키형님? 예를 들어 그냥 포탈을 포기한다든가?ㅎㅎ]
[키키아: ㅎ]
[키키아: 전혀]
그 말과 함께 서련이 옆에 있는 로운의 캐릭에게 킬리를 보내고, 원호에게 딜스킬을 시전했다. 킬리의 주먹이 로운을 후려친 것과 원호의 캐릭 위로 얼음송곳이 작열한 건 거의 동시였다.
쾅-!
[베르르: 캬ㅋㅋㅋㅋㅋ 역시 우리 키키형ㅋㅋㅋㅋㅋㅋ]
[순한양: 짝짝! 쩐다ㅎㅎ]
[강마: 얘들아? 니들이 지금 구경할 때냐? 뭐 빠지게 안 가지? 이것들을 그냥 확!]
[키키아: 우리 애들한테 그러면 쓰나]
하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물론 서련이 본 건 아니었다. 다만, 무서운 시선이 날아드는 건 피부로 느껴졌다. 서련이 애써 모른 척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자, 시선은 얼마되지 않아 다시 거두어졌다.
예상한 대로 원호는 곧바로 뒤로 빠져 거리를 벌렸다. 서련을 공격할 생각은 아직 없는 듯했다. 대결만 걸었다 하면 무릎부터 꿇는 애들인데, 공격 한 번 했다고 반격할 리가.
서련은 다리묶기 스킬을 써서 원호의 발목을 묶고 로운 쪽에는 상태이상이 실린 킬리의 주먹을 선사했다. 역시 악세를 최고급으로 바꿔서인지, 아니면 서련의 방어구 적중 셋이 좋아서인지, 킬리의 펀치에 로운은 해롱거리며 스턴에 빠졌다.
신성족 둘의 발목이 묶이자마자 서련은 이동속도 증가 주문서를 써서 재빨리 앞으로 튀어나갔다. 달려오던 강마와 두 절미들이 좋다고 히히덕거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화면에는 곧 두 개의 팝업창이 생겨났다. 하나는 베르르의 일반 대결 신청 팝업창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거부권이 있어야 거부가 가능한 강마의 유료 대결권 팝업창이었다.
서련은 선택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재빨리 둘 다 거부했다. 거부 선택 시간은 길어야 15초였다. 그 안에 거부를 누르지 않으면 자동으로 대결로 넘어갔다.
서련이 대결을 거부한 때부터 화면에는 두 개의 팝업창이 쉴 새 없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활성화 배틀을 하기 시작했다. 무한대로 취소하고 넣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또 어디서 알아낸 건지, 안 좋은 건 또 귀신같이 알아내 배운다.
팝업 위치도 달라서 대결 거부 위치와 유료 대결권 수락 위치가 겹쳐졌다. 그게 자꾸 앞뒤로 생겼다 내려갔다 하는데, 자칫 잘못 클릭하면 그대로 수락을 눌러버리는 꼴이 되었다.
서련은 일단 앞으로 달려가면서 안 겹치는 쪽 대결을 수락했다. 운이 좋게도 수락한 쪽 대결 상대는 베르르였다. 베르르 쯤은 킬리로도 충분했다. 뒤에서 ‘왁!’하는 글이 떠올랐지만, 알 바 아니었다.
[키키아: 베르야 킬리가 놀아달라는데]
[베르르: 됐거든요! 악 됐다고요!]
[베르르: 아악 저리가!]
[베르르: 킬리야 내가 너]
[베르르: 악세 해준 사르ᅟᅡᆷ이]
오타가 나는 걸 보니 킬리가 제대로 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화면에는 강마의 대결권 팝업창이 계속 뜨고 있었다. 족족 거부해도 계속 들어오는 걸 보니 잡아다 묶어 놓을 생각인 것 같은데, 여기서 포인트는 서련은 현재 풀강을 마친 방어구를 세트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로, 템을 바꾼 지금은 그 무엇도 무섭지 않았다.
[강마: 이열ㅋㅋㅋㅋ 키키형님 템보니 억소리 나오네요?ㅋㅋㅋㅋ]
[키키아: 음 그쪽 친구들 덕?]
[강마: 그러니까 지금 한판 어때여?ㅋㅋㅋ 제가 잘 모실 수 있는데ㅋㅋㅋㅋ]
[키키아: 질거 같은데 괜찮겠어?]
[강마: 형이요? 아님 제가요?ㅎ]
[키키아: 네가]
탱커라 해도 킬리와 둘이 덤비면 발목이야 잡아둘 수 있었다. 시간적 여유까지 되면 당연히 죽일 수도 있고. 문제는 강마 뒤로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그의 길드원과 뒤쪽에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로운과 원호였다. 하진은 뭐 때문인지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중이었고.
그래도 다행히 코앞에 포탈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도를 켜보자 생성된 지 이제 막 3분이 지난 참이었다. 지금쯤이면 건너가도 앞에 신성족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였다.
[강마: 그럼 한판 붙어보죠 형]
진지하게 나오는 강마를 보니 승부에 불붙은 모양이었다. 마침 상태창 위로 베르르의 죽음 소식이 떠올라 상대도 줄었고 해서, 서련은 화면에 뜬 대결을 거부하지 않고 수락했다. 그리고 재빨리 킬리를 다시 불러들여 전투 패턴을 방어로 전향했다.
킬리를 방어로 돌리기 무섭게 강마의 방패가 킬리랑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서련은 그 옆을 재빨리 지나쳐 쉴드를 두르고 온갖 방어관련 주문서를 도핑했다.
뒤에서 로운이 포획을 시전 하는 게 상태창에 잡혔지만, 1회성 무효화 스킬을 사용해 냉큼 쳐냈다. 그 다음에는 원호의 침묵화살이 날아들었다. 피하진 못했지만, 포탈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불과 3미터였다.
침묵쯤이야 포탈 타고 풀어도 괜찮다. 블러더 길드원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는 게 조금 수상했지만, 신성족도 아닌 데다 현재 강마를 상대하고 있으니 끽해야 대결밖에 못 거는 상황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스스로 되도 않는 납득을 하며 애써 모른 척했다. 그게 고의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그게 고의성 짙은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서련이 쾌재의 미소를 띠며 포탈을 타고 신성제국으로 넘어갔을 때였다.
그러니까, 뒤따라 포탈을 타고 넘어온 원호가 냅다 뒤에서 덫을 날렸을 때.
다리가 묶이긴 했지만 마침 침묵도 걸렸겠다, 한꺼번에 풀 겸 상태이상 회복 물약을 먹고 디버프를 지워 없앴다. 그리고 괴수도발을 사용해 원호의 어글을 킬리에게 돌리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활강을 하며 뛰어내렸다. 아니, 뛰어내리려고 했다.
뒤이어 나타난 로운이 포획으로 끌어당겨 묶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제야 서련은 하진과 로운, 원호의 수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덫은 물약을 낭비하게 하기 위한 눈속임이었고, 실제는 잡아두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 생각은 뒤이어 나타나는 강마를 보곤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직 대결이 결정 나지 않아 강마의 이름은 붉은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 경우, 로운의 포획을 풀어도 같은 탱커인 강마가 다시 포획으로 옭아맬 게 분명했다.
덕분이랄까, 서련은 얼마 가지 않아 포탈을 타고 넘어온 하진과 절미들, 그리고 블러더 길드원들을 무릎 꿇은 자세로 마주해야 했다.
[신마제국/순한양: 어휴 우리 키키형. 그러게 적당히 포탈좀 타지]
[신마제국/베르르: 아니 그래서 연.약.한. 절미들 죽이고 가니까 좋았쪄여? 됐고 킬리킬리도 빨랑 무릎 굻려여]
[신마제국/키키아: 음 베르야]
[신마제국/베르르: 음같은 소리 하고 있네. 됐거든요ㅎㅎㅎㅎ 반사. 형말 이제 안 믿어여]
[신마제국/순한양: 킬리야 무릎 꿇자]
아무래도 원래 목적이 포탈을 못 넘게 하는 게 아니라, 넘고 나서 붙잡아 두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신마제국/강마: 자, 키키형님?ㅎㅎ 이제 어디로 뫼실까요?ㅎㅎ]
강마가 손까지 비벼대며 장사치처럼 묻고 있었다. 서련은 그 말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그리고 가련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서련의 애타는 말에 로운과 원호는 뭐가 문제냐는 듯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목마르냐며 상냥하게 묻기까지 했다. 하진은 아예 웃지도 않았다. 그저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뻔뻔한 얼굴로 서련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이 정도는 시작도 아니라는 듯이.
“왜. 마음대로 하라며.”
길드로 끌어올 때 한 말이 이제야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서련은 뭐라 말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고 화면으로 돌아왔다. 지금 봐선 아예 구제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포탈 넘어오기 전에 한 행동이 전부 밑밥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렇게 설렁설렁 나왔나.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막았을 텐데, 어쩐지 구색만 맞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었다. 그래, 솔직히 알았다면 안 넘어왔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울티마울: 키키야 뭐하닠ㅋㅋㅋㅋ 우리땅와서 한다는게 인질놀이냐?ㅋㅋㅋㅋㅋㅋ]
[포세이돈: 나도 좀 껴줘랔ㅋㅋㅋㅋㅋ ㅅㅂ끌려가는 폼 봨ㅋㅋㅋㅋ]
[신마제국/키키아: 신경 끄시죠?ㅎ]
[상마이웨이: 우리 키키 자게 가즈아!]
[신마제국/키키아: 메기가 그렇죠 뭐ㅎ]
[상마이웨이: ㅅㅂ;; 웬 생사람? 내가 언제 메기랬?;;]
[신마제국/키키아: 귓속말 들어와 있던데]
이렇게 말하면 하진이 가서 깐족거리는 신성족을 도륙해주긴 했지만, 여전히 구경거리 신세는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쯤 되면 매익화가 나타날 때가 됐긴 했다. 서련은 현재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신마제국/키키아: 어디 가는지 말은 좀 해줘]
[신마제국/강마: 형 좋다는 토순이 보러 갑니다ㅋㅋㅋ]
[신마제국/베르르: 형님들 이 인원이면 마을 잡고 꼬장 부려도 될거 같은데ㅋㅋㅋㅋㅋ 어떠신가옄ㅋㅋㅋㅋ]
[신마제국/순한양: 건블하면 꼬장 아닙니까ㅎㅎㅎㅎㅎ]
[호백: 절미들 아주 신들 나셨어?]
[신마제국/베르르: 저도 공적 먹고 싶어서... 또르륵 우리가 그렇지 머ㅠㅠ]
[신마제국/순한양: 아니 왜 우리 애한테 그래여!]
[신마제국/킬레아: 좋은말로 할때 ㄷㅊ라]
[신마제국/순한양: 토순아 어딨니]
서련은 바로 꼬리를 내리는 절미들을 보며 가만히 턱을 괴었다. 덕분이랄까,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서련은 질질 끌려가는 제 캐릭을 힐끗 보다가 화면을 돌려 주변 위치와 구조, 조형물을 차근차근 살피며 머릿속에 넣었다.
저기로 올라가면 딱일 것 같은데. 마침 옆에는 몸을 숨기기 적합한, 큰 버섯이 가득 있는 절벽이 있었다. 산이야 타는 건 어렵지 않으니, 지금 타이밍에 신성족 유저들이나 매익화가 달려와 시비 한 번 걸어주면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지금이어야 한다는 점이랄까.
서련의 그런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듯, 곧이어 화면에 짧지만 큰 희소식이 떠올랐다. 그렇게 기다리던 매익화의 귓속말이었다.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지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련의 주변에 서 있던 길드원들 위로 화살비가 파바박 하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옆을 보니 버섯절벽에서 신성족들이 무더기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서련은 즉각 저를 잡고 있는 로운에게 킬리의 주먹을 때려 넣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서련의 캐릭을 휘감고 있던 포획이 탁 풀렸다. 그와 동시에 서련은 소란스러운 틈을 헤치며 버섯절벽 쪽으로 내달렸다. 뒤에서 로운과 원호가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서련이 누군가. 등산의 신이라 불리는 몸이다.
절벽 쪽에 훌쩍 붙어 벽을 비비며 오르자 절벽에서 뛰어내린 매익화 길드가 서련의 뒤를 엄호하듯 앞을 쫙 가로막았다. 그 사이 서련은 훌쩍훌쩍 올라 거대한 버섯모자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누가 따라올까 무섭게 활강을 하고 다른 버섯모자 위로 착지했다.
그렇게 옆으로 활강을 반복하며 오르자 어느새 절벽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밑을 보니 다들 올라올 엄두를 못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제야 서련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힐끗 보자 셋 다 똑같은 모습으로 이를 갈며 모니터를 쏘아보는 게, 아주 그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신마제국/강마: 아오 이 매샛끼야 너는 ㅅㅂ 청개구리냐?!]
[매익화: 어쩔 그럼 좀 놀아주든가^^]
[신마제국/강마: 어디서 처웃고 ㅈㄹ이야 ㅅㅂ 일루와 ㅅㄲ]
[신마제국/베르르: 아니 좝난하나ㅅㅂ 님들 도랏?]
[백요: 양아치 샛끼님들아. 동맹은 엇따 팔아 처먹었냐?ㅎ]
[매익화: 내가 약속 지킬 의리는 없는거 같은데]
어지간히 열 받는 말만 해대고 있었다. 서련은 머리채 뜯을 각오로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두 종족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도를 켜서 주변 마을을 빠르게 훑었다. 마침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던전을 낀 마을하나가 있었다.
‘에릭셀 마을’. 던전 근처라 많은 유저들이 텔레포트 경유지로 이용하는 곳 중 하나였다. 이 경우, 대개 유저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포탈이 생겼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하면, 더 몰려들 게 분명했다.
생각을 마친 서련은 재빨리 캐릭을 움직였다. 옆에서 서련의 행적을 보고 있던 하진이 목적지를 고대로 발설했다.
[신마제국/킬레아: 에릭셀]
그 말에 모두는 매익화 길드를 뒤로하고 죄다 서련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도착하는 건 서련이 더 빠르겠지만.
일단 서련이 있는 곳이 절벽 위이기도 하거니와, 지리적으로 활강을 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서련은 절벽에서 마을 안쪽으로 활강을 했다. 남의 땅에 남의 마을이란 개념은 아예 없었다.
지도가 전부 붉은색으로 물들고, 개미가 움직이는 것 같은 바글바글함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서련은 마을을 대충 훑다가 유저들이 못 올라올 만한 높은 조형물 위로 아슬아슬하게 안착했다. 이 정도면 한끝만 잘못 디뎌도 바로 추락이었다. 그만큼 디디고 선 부분이 무척이나 얇았다.
마을에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대부분의 신성족 유저들은 서련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놀려줄까 하다가 서련은 고개를 젓고 주문서를 하나 클릭해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서련의 캐릭 주변으로 빛이 확 오르면서 밑에 있던 신성족 유저들이 일제히 서련을 향해 돌아섰다. 마치 모두 머리 위로 느낌표를 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나 효과는 기가 막혔다.
시스템 창에 제 3자의 전투현황 메시지가 뜬 것이었다. 곧이어 서련의 밑으로 신성족들이 바글바글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굶주린 사자들이 먹잇감 하나를 가지고 차지하겠다고 모여드는 모습 같았다.
[낙낙: 아니 ㅅㅂ 메기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원포올투: 너 거기서 뭐하냨ㅋㅋㅋㅋㅋㅋㅋ]
[용미두: 와 저건 대체 어떻게 들어온겨]
[비눈비: 실화냐?ㅋㅋㅋㅋㅋ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왘ㅋㅋㅋㅋㅋㅋ]
[베이아: 저 넘의 메기새낀 ㅅㅂ 가리는 곳이 없엌ㅋㅋㅋㅋㅋ 메기야 좀 내려와봐랔ㅋㅋㅋㅋㅋㅋ]
[블렛: 뭔데 저리 웃기냨ㅋㅋㅋㅋㅋㅋㅋ 서 있는 꼴 보솤ㅋㅋㅋㅋㅋㅋ]
[락셀: 키키야 형들 심심한데 좀 내려와봐라ㅎ 형이 기빨차게 놀아줄테니까ㅎ]
서련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글을 잠시 방관했다. 그리고 조용해질 때쯤에야 여기 온 목적을 모두에게 투척했다.
[신마제국/키키아: 밖에 지금 저희 길드랑 블러더 길드 오고 있는데 죽여 주실분?]
[제시아: 우리 메기가 또 헛소리를 하시네]
[광딜러: 키키야 너 버림받았냨ㅋㅋㅋㅋㅋㅋ]
[블렛: 시밬ㅋㅋㅋㅋㅋ 너 지금 우리 싸움붙이는 거지 샛꺜ㅋㅋㅋ]
[락셀: 알았으니까 키키야 일단 내려온나ㅎ]
[신마제국/키키아: 음 다들 실력이 ㅈ같아 무린가]
서련의 말에 여기저기서 쌍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기를 꺼내 드는 유저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올라오려고 조형물을 기어오르는데, 족족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그 모습을 서련은 아주 흥미로운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용미두: 메기야 너 미쳤낰ㅋㅋㅋㅋㅋㅋㅋ]
[시르르: 드립력보소ㅋㅋㅋㅋㅋ ㅅㅂ 알겠으니까 어그로 그만 끌고 내려와라. 일단 너부터 디지자]
[비눈비: 샛꺜ㅋㅋㅋㅋ 이거 종족전쟁 일으킬 기세넼ㅋㅋㅋㅋ 니가 아직 내 실력을 못봤나 본데 형 한 번 하면 눈 돌아간다?]
[신마제국/키키아: 자신 없으면 어떻게 제 킬리킬리 좀 빌려드릴까요ㅎ]
[신마제국/키키아: 킬레아가 좀 쩔던데]
[블렛: 메기얗ㅎㅎㅎㅎ 형들 그렇게 후달리지 않는다?ㅎㅎㅎㅎㅎㅎㅎㅎ]
[제시아: ㅋㅋㅋㅋㅋㅋㅋㅋ너ㅅㅂ 기다려라. 형 킬레아 죽이고 인증 남길테니까]
[광딜러: 알았엌ㅋㅋㅋ 샛꺜ㅋㅋㅋㅋ 걍 죽여달라는 거 아녀ㅋㅋㅋㅋㅋㅋ]
[낙낙: 샛끼 용쓰네. 형들 다녀올테니 그때까지 내려와 있어라 메기야]
[용미두: 아오 형들이 오늘은 그냥 봐준다 샛꺄. 넘어갔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 때문에 가는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고]
[신마제국/키키아: 아예 저기 오네요. 아, 강마 훈장도 그렇게 쩔던데]
[베이아: 알겠다고 샛꺄 죽이면 될거 아녀ㅡㅡ 거 겁나 보채쌌네]
[구름비: 메기야 형들 다녀올테니 넌 좀 예쁘게 탈피나 하고 있어라]
[신마제국/키키아: 메기가 그렇죠 뭐]
[홀투맨: 알았다 알았엌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 내가 그 말때문에 가준닼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너 ㅈㄴ 예뻨ㅋㅋㅋㅋㅋㅋ]
어느새 다들 마을 광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서련은 그 모습을 만족스레 바라보며 화면을 돌려 입구 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손을 탁 놓는데, 옆에서 뻗어온 팔이 서련의 목을 휘감고 바짝 당겼다. 놀라 굳어진 귓가로 들려오는 건 불만 어린 하진의 목소리였다.
“누가 자꾸 메긴데.”
“…나?”
서련의 말에 하진의 미간이 단번에 찡그려졌다. 메기라는 말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서련이 웃자 곧이어 단단한 손이 턱을 위로 당겨 올렸다. 서련의 시야에 하진의 내리뜬 눈동자가 들어왔다.
“웃지?”
“하진아, 너 이럴 때 아니야.”
서련은 모니터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하진의 눈동자가 모니터 쪽으로 향했다. 슬쩍 펴지는가 싶던 미간이 다시 확 구겨졌다. 덕분에 목에 감긴 팔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여유가 되는지, 하진의 표정이 그렇게 급박해 보이진 않았다. 옆에서 외침이 쏟아지긴 전까지는 말이다.
“서련 형, 저희가 이기면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기 어때요?!”
“개같은 소리 하지 마라.”
“야, 야. 우리가 설마 이상한 거 말하겠냐? 형, 로운이라 저랑 둘이 합해서 하나만 빌게요! 형이 이기면 원 없이 포탈 타는 걸로. 어때요?”
고개를 기울여 옆을 보자, 씩 웃고 있는 로운과 원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로운과 원호의 신성족 캐릭이 안 보이는가 싶었는데, 그새 신마족으로 로그인을 한 모양이었다. 서련의 시선이 모니터 쪽으로 힐끗 향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신성족 유저들을 보니 내기할 만한 머릿수였다. 게다가 제보까지 더하면 이보다 더 많이 몰릴 테고. 일단은 하진쪽이 지는 걸로 내기를 기울였다.
“그럼 너희 다 안 죽는 걸로?”
“저희만 안 죽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희 셋만.”
“안 돼요. 개하진 이거 자살골 넣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일단 저희 둘 만요.”
“하지 말라고 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울리는 데도 로운과 원호의 미소는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련은 으르렁거리는 하진의 팔을 잡아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하자. 하진아, 너는 그만 좀 해.”
“그만이고 나발이고 하지 마, 안 해도 돼.”
“걱정 마세요, 형. 저희가 꼭 이겨드릴 테니까.”
“물리기 없깁니다? 아, 간만에 각잡고 해야겠네.”
서련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하진은 결국 분노의 마른세수로 화를 대신 다스렸다. 그 이후엔 제일 먼저 튀어나가 무서운 기세로 신성족들을 썰어내기 시작했다.
매익화 길드에 제 한 몸 팔아넘겼다고 말하면 어찌 나올지 조금 무서워지는 순간이었다. 서련은 일단 1회성 소환권을 머릿속에서 지워 없애고 화면으로 돌아와 채널창부터 살폈다.
쭉 훑어보자, 아니나 다를까 온갖 제보와 함께 서련이 있는 에릭셀 마을의 좌표가 무더기로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곧 신성족도 몰려들 테고, 이미 절미들의 사망 소식도 올라왔겠다, 이제 강마네와 함께 차례로 죽는 일만 남은 셈이다.
물론 로운이랑 원호가 오기 전에 하진이가 먼저 죽으면 더 좋겠지만.
이제 막 신마족으로 재접속을 한 참이라 로운과 원호는 아직 길드원들과 합류하지 못한 채였다. 그 사이 신나게 달려 나갔다가 뻗어서 돌아온 유저들이 서련의 발치에서 앓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월터: 키키야... 킬리킬리좀 빌려줘봐라... ㅅㅂ 뭔데 저리 개쎄냐]
[고구마만개: 메기야 너 너무한거 아니냐? 아니 형들 허리 휘게 싸우고 있는데 어디 퍼앉아서 구경질? 퍼뜩 내려온나 샛꺄]
[신마제국/키키아: 저 지금 탈피중이라ㅎ]
[브리즌: 시밬ㅋㅋㅋㅋ 저걸 진짜 줘팰수도 없곸ㅋㅋㅋㅋㅋㅋㅋ 지 좋을 때만 메기드립 오지네ㅋㅋㅋㅋㅋㅋㅋ]
[월터: 탈핔ㅋㅋㅋㅋ방심하다 개터졌넼ㅋㅋㅋ아옼ㅋㅋㅋㅋ]
앓는 소리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왜 밑으로 쪼르르 와서 아기 새처럼 짖어대는지, 먹이라도 던져줘야 조용할 판이었다. 서련은 어쩔까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그냥 몰래 빠져나가 토순이네 갈 것인가, 이왕 내기한 거 행패 좀 부리다 빠져나갈 것인가. 물론 후자 선택 시, 서련도 함께 목숨을 걸어야 했다.
문제는 하진이랑 강마가 이끄는 블러더들이 지나치게 잘한다는 것이었다. 열일도 이런 열일이 없었다. 서련은 자신이 그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했다.
결국 서련은 한숨과 함께 결단을 내렸다.
[신마제국/키키아: 저쪽이 너무 잘하네요]
[신마제국/키키아: 어떻게 저 탈피 끝냈는데 좀 도와드려요?]
[브리즌: 끝났냐?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뭐가 달라진 건지 좀 읊어봐랔ㅋㅋㅋㅋㅋㅋ]
[고구마만개: 메기 이뻐진거 보솤ㅋㅋㅋㅋㅋㅋㅋㅋ 어여 내려온낰ㅋㅋㅋㅋㅋㅋ]
[블렛: ㅅㅂ 눈부셔 죽겠네]
[락셀: 여기 다들 미쳤냐곸ㅋㅋㅋㅋㅋㅋ예뻐지긴 뭐가 예뻐졐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키키아: 제가 앞장설테니 가시죠?ㅎ]
신성족 유저들과 몇 마디 더 주고받은 서련은 조형물에서 훌쩍 내려왔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신났다고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눈 부릅뜨는 모습에 서련은 이때다 싶어 그대로 하진과 강마가 있는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서련 밑에서 밥 달라고 입을 벌리던 새 떼도 일제히 그 뒤를 따라나섰다.
이 광경을 제일 먼저 눈치챈 건, 열심히 길드원들을 챙기던 강마였다. 강마의 머리 위로 헉하는 소리와 함께 길드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신마제국/강마: 아니 형님? 키키형?]
[신마제국/강마: 왜 일루오셔요;;]
[신마제국/키키아: 강마야]
[신마제국/강마: 설마 아니죠]
[신마제국/키키아: 좀 참아볼래]
서련은 그대로 강마의 얼굴을 찍고 지나쳤다. 때릴 수 있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아직 대결권 승패가 나지 않아 대결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접 공격이라 피는 많이 닳지 않았지만, 서련을 뒤따라오는 신성족 유저들을 넘겨주는 것만으로도 계획이 반쯤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서련은 제 한 몸 건사하고자 그대로 킬리를 소환해제하고 블러더 길드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몸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서련에게 정통으로 맞은 강마는 정신을 후딱 차리고 다시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대상자는 일단 신성족 유저들이었다.
[신마제국/강마: 메기형님ㅎㅎㅎㅎㅎㅎ 이따 보시져ㅎㅎㅎㅎㅎㅎㅎ]
이쪽도 메기란다. 실제였다면 머리에 혹은 단 채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말했을 모습이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서련은 그다음으로 하진을 노렸다.
저걸 어떻게 구워삶아야 되나 고개까지 모로 기울이며 생각해 봤지만, 보면 볼수록 드는 생각은 할 말 없을 정도로 잘한다는 것이었다. 이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심지어는 하품까지 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서련은 블러더들을 방패 삼아 슬금슬금 하진의 캐릭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물론 도중 신성족 유저들한테 딱 걸려 주변을 두 바퀴 돌아야 했지만, 그래도 같은 편이라고 방패막이를 해준 하진과 강마 덕분에 목숨 하나는 건사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다시 절벽 중간쯤에 올라앉아 내려다보는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다. 아래에는 역시나 어미 새를 쫓아온 아기 새들이 먹이를 달라고 죄다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먹이가 서련 본인이라는 게 좀 문제였지만.
[베이아: 앙키야? 이리좀 내려온나. 니가 빠지면 어쩌냐. 저 갑오브갑 모습좀 보소]
[구름비: 아 샛끼 고새 또 올라가 자빠졌네. 키키야 형이 보낸 악세는 잘 받았냐? 응? 근데 왜 여기 와있어ㅎㅎ 응? 내가 다신 오지 말라고 보내준 건데ㅎㅎ]
[신마제국/키키아: 저 말고 저쪽가서 좀 말하시죠? 저 두번째 탈피 준비중이라 바쁜데ㅎ]
[브리즌: ㅅㅂ 대체 얼마나 예뻐지고 싶은건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악셀: 아닠ㅋㅋㅋㅋ 너 안해도 이쁘다곸ㅋㅋㅋㅋㅋㅋㅋㅋ]
버섯 위에 앉아 아래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서련의 시야에 별안간 멀리서부터 활강해 내려오고 있는 두 캐릭이 잡혔다.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앉은 자리에서 캐릭을 벌떡 일으켰다.
드디어 로운과 원호가 포탈을 타고 넘어와 길드원들과 합류하게 된 것이다.
[신마제국/키키아: 2차전 갈게요]
2차전은 좀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사이 신성족들은 1.5배 더 불어나 있었다. 서련은 로운과 원호가 있는 방향을 확인하고 날개를 펴고 아래로 훌쩍 활강했다. 쫙 펴지는 독수리 날개 뒤로 신성족 유저들이 좀비처럼 뒤따랐다.
서련은 우선 만만해 보이는 원호부터 노리기로 했다. 그래서 날개를 접자마자 그에게 쏜살같이 달려간 건데, 도중에 노린 듯이 튀어나온 강마의 포획에 잡혀 그대로 앞으로 확 넘어지고 말았다.
[신마제국/강마: 메기형님ㅎㅎㅎㅎㅎㅎㅎ 잠깐 저좀 봅시다ㅎㅎㅎㅎㅎ]
서련의 표정이 아주 잠깐 우울해졌다. 자기들끼리 무슨 밀담을 나눈 건지, 서련이 잡히자마자 블러더와 서련네 길드원 모두가 서련의 캐릭 주변을 둥글게 에워싸 신성족들의 접근을 차단한 것이다.
노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신마제국/강마: 자자 어그로 그만 끄시고 이제 좀 순탄히 좀 갑시다ㅎㅎ 토순이 만나셔야져?]
[신마제국/키키아: 강마야 형 놔주면 안될까?]
[신마제국/강마: 어허 탈피를 너무 하셨나, 애교가 느셨네]
서련은 즉시 상태이상 회복 물약 먹고 포획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강마가 바로 근거리 넉백 공격을 시전했다. 방패가 캐릭의 머리 위를 후리고 지나간 순간, 서련의 캐릭이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머리 위에 떠 있는 건 해롱거리는 삐약이 표시였다.
“…….”
방어구가 이렇게 좋은데 왜 넉백이 먹혔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런 서련과 달리 강마는 당연하다는 듯 다시 포획으로 서련을 묶고 하하 웃었다.
[신마제국/강마: 얌전히~ 우리 얌전히 있읍시다?ㅎㅎ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형 때리기 싫습니다?]
[신마제국/묵요: 나도 싫은데]
[신마제국/호백조: 아 나도]
[신마제국/킬레아: 다 꺼지지?]
[신마제국/강마: 들었죠 형?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순탄히 갑시다요ㅎ]
얘들은 왜 죽지를 않아. 서련은 주변에 바글바글한 신성족 유저들을 보며 머리를 슬쩍 짚었다. 어디 빠져나갈 구멍이라도 있나 살피는 시야에 뜻밖의 메시지가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자살골이 화려하시네^^}
그 말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느낌표가 번쩍 떠올랐다. 서련의 시선이 이내 화면 여기저기로 향했다. 잠시 후 서련은 우측에 바글바글한 유저들 너머로 여유롭게 팔짱 끼고 서 있는 신성족 유저 몇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귓속말/매익화님께: 아예. 아주 구경났네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도와주러 온 건데 섭하게}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보면서 말은 잘한다. 서련은 혹여 하진에게 들킬까 강마와 실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매익화의 말을 눈여겨봤다.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또 뜯어내면 양아치 소리 들을거 같으니까}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이번엔 그냥 협조좀 해드리죠}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그러니까 아파도 좀 참읍시다ㅎ}
뭔 말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화살이 날아와 서련의 캐릭 위로 탕탕 박히기 시작했다. 범인은 마을 조형물 위에 올라가 있는 매익화 길드의 일원이었다. 어찌나 작정하고 쏴대는지, 개인적인 원한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서련은 온갖 상태이상을 시작으로 포획에 묶인 그대로 혼자 바르작거리다 사망해야 했다.
-사망하였습니다.
주변 분위기는 서련의 죽음을 기점으로 찬물을 끼얹어진 것처럼 가라앉았다. 아마 다들 [신마제국의 ‘키키아’가 사망하였습니다.] 라는 문구를 봤을 게 틀림없었다. 서련은 고개를 돌려 하진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똑같은 표정 그대로 입을 벌린 세 명의 사내가 벙찐 시선으로 서련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련이 뺨을 슬쩍 긁적이자, 시선들은 순식간에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런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서련을 죽인 신성족은 이미 꽁지가 빠지게 내뺀 뒤였다. 그 자리에 유일하게 있는 자는 나름 수습하겠다고 당당히 남은 매익화였다.
[매익화: 메기가 그래도 때리는 맛이 좀 있네]
매익화의 깐족거림에 하진과 블러더 길드원들이 죄다 그쪽으로 무기를 겨누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죽은 뒤 드러누워 신나게 구경 중이던 베르르와 순한양도 벌떡 일어나 매익화 쪽으로 돌아섰다.
[신마제국/강마: 야이 매대가리 샛꺄. 넌 ㅅㅂ 동맹이 뭔줄 모르냐? 아까부터 자꾸 간사하게 뒤통수를 치고 자빠졌어ㅅㅂ 저거 진짜 또라이 샛끼네 와...]
[신마제국/베르르: 아닠ㅋㅋㅋㅋㅋ 내 참ㅋㅋㅋㅋㅋ 님 고자심? 야이 고자샛꺄 왜 갑자기 고자짓이여 ㅈㄴ 고자 같은게]
[신마제국/순한양: 이 무슨 메기 같은 짓?ㅎㅎㅎㅎ 너 ㅅㅂ 지금 우리 메기형 발랐냐?ㅎㅎㅎ ㅇㅇ 너 좀 오늘 나한테 디져보자 샛꺄]
[신마제국/베르르: 고자야. 우리 키키형이 머머리보다 더 싫어하는 게 뭔줄 아니?ㅋㅋㅋㅋㅋㅋㅋㅋ 고자여 이 샛꺄!]
[신마제국/킬레아: 아 ㅈ같네 ㅅㅂ]
[신마제국/묵요: 하 ** 샛끼가 ㅈㄴ 발작해쌌네]
[신마제국/호백조: ㅋㅋㅋㅋㅋㅋ 동맹? ㅅㅂ 개나 줘라]
아니, 그래 다 좋다. 서련네 길드원이야 같은 종족 겸 길드원이니 그렇다 치지만, 여기서 신성족들은 왜 갑자기 매익화를 바라보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것도 무기를 겨누어 든 채.
[월터: 아니ㅋㅋㅋㅋㅋㅋㅋ 메기 탈피하는데 건들면 됨? 안됨?]
[락셀: 내가 지금 저 메기놈을 못 죽여서 안 죽이고 있었을까, 일부러 그냥 두고 있었을까?ㅎㅎ 내가 우리 메기가 불쌍해서 탈피좀 시켜 준다는데 시박ㅎㅎㅎㅎ 그걸 고대로 죽이고 있네?]
이상한 데서 단합심이 발휘되었다. 서련은 구경하는 마음으로 턱까지 괸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매익화가 조금 고생 좀 하겠지만, 어글 끄는 수준 보니 멘탈이 그냥 갑 수준을 넘어섰다. 위로 없이도 자가 재생이 가능하리라, 그냥 그리 믿는 중이었다.
[매익화: 그럼 잡아 족쳐보든가]
곧이어 매익화의 주변으로 온갖 도핑 효과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효과음들이 사라지기도 전에 매익화는 날랜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서련의 주변에 있던 인파가 휩쓸듯이 빠져나갔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쫓아가는 걸 보니, 이미 저쪽으로 흥미가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분명 이를 갈고 쫓는 유저 반, 재미 목적으로 쫓는 유저가 반일 것이다. 어리둥절하게 휩쓸렸을 수도 있고.
“아오, 새끼 존나 잽싸네!”
“야, 야! 왼쪽으로 빠져. 난 산 탈 테니까.”
“발목부터 잡고 당기든가, 시발. 저 새끼 회피기 많아서 페이크 넣어야 된다고.”
옆에서는 세 마리의 비글들이 으르렁거리며 매익화를 열심히 쫓고 있었다. 서련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모니터를 돌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흑백 화면에 비친 곳은 그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련의 입술 위로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혹여나 누가 올까, 서련은 비싸게 주고 산 소생석을 사용해 재빨리 부활했다.
그리고 잽싸게 회복물약을 먹고 버섯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사망 패널티가 풀리지 않아 캐릭이 간헐적으로 헐떡거리며 멈춰 섰지만, 중간까지 오르니 패널티도 사라지고 속도도 박차가 가해져 절벽 위로 금방 오를 수 있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고로, 죽어도 살아서만 가면 된다는 것. 뒤늦게야 매익화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서련은 남들이 친구, 동료, 가족, 지인을 다 동원해 매익화를 쫓든 말든, 채널창을 살피며 토순이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토순이 주인의 행방이 뜬 걸 보자마자 날래게 절벽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소환 해제했던 킬리를 재소환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