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레이드 사건이 있은 후로 3일 지났다. 베르르와 순한양의 징징거림도 줄어들어 이제는 들어가도 잘만 받아주는 정도까지 되었다. 물론 레이드 사건 때 개 패듯이 맞아서 그런지 하진이나 다른 두 형들에게는 대체로 덤비지 않았다. 나름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데, 그마저도 서련의 눈에는 귀여워 보였다.
잘 녹아든 느낌이랄까. 서련이 느끼기에 하진과 함께한 시간이 적은데도 오래전부터 길드에 들어와 함께 한 것 같은 친숙함을 느꼈다. 비단 서련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베르르나 순한양 역시 그 세 명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친밀감을 드러냈다. 물론 가끔씩 개기기는 하지만.
그리고 레이드 사건이 있던 그날 밤, 로운에게 연락이 왔다. 굉장히 단조로운 안부의 말이었다. 잘 들어갔냐는 연락. 그리고 잘 자라는 말. 그걸 보자마자 느낀 건, 배려였다.
로운은 굉장히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친구로서 하겠다는 연락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서련은 일단 깊게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로운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너도.]
로운은 대답 대신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서련도 보낼까 하다가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여러모로 그게 나았다.
서련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 이후에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특별한 일이 없고는 늘 피시방에서 만나는지라, 연락하는 상황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데면데면했다면 더 어색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드디어 왔냐? 형 밥은 먹여주고 나오는 거지?”
“이 새끼는 계절학기 듣는다더니 왜 매일 여기 와서 지랄이야.”
“거 존나 지랄해쌌네. 어차피 오전이라 상관없거든.”
“서련 형! 저희가 오늘 우유 공짜로 받아놨어요. 마음껏 드세요.”
“이럴 필요 없는데…. 고마워. 잘 마실게.”
추운 길을 뚫고 도착한 피시방에는 역시나 로운과 원호가 일찍부터 와서 에르덴을 하고 있었다. 필드 쟁을 하고 있었는지, 캐릭 주변에 죽어버린 신성족이 한가득이었다.
서련을 그걸 힐끗 보고는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유난히 추워서인지 손끝이 벌겋게 얼어 있었다. 살살 비비자 옆에서 하진이 혀를 쯧 차더니 제 손바닥 안에 꼭 넣고 만져 주었다.
“장갑 사줘?”
“됐어, 이런 데에 왜 돈을 써.”
“이런 데? 감기 들고 고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하진아, 형 생각보다 튼튼해.”
“그러시겠지.”
말 한번 곱게 해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손을 매만지는 손길은 까칠한 말투와 달리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그걸 가만히 보던 서련은 손끝이 화끈해졌을 때에야 하진의 손에서 손을 빼내었다.
“이제 괜찮아.”
“기다려 봐, 따뜻한 거 사올 테니까.”
서련이 됐다고 말하기도 전에 하진이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서련은 로운과 원호가 신경 쓰지 말라며 웃어줬을 때에야 시선을 거두고 에르덴에 접속했다. 쟤를 어쩌면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접속시간 PM. 02:34 / 남은 시간은 598시간입니다.
-신성의 축복을 그대에게! 에르덴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모든 던전의 입장 시간이 리셋되었습니다.
-일일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길드/건블리아: 왓냐 키키]
[길드/휴리사: 하이하이 키키]
[길드/야생닭: 왔니ㅎㅎ]
[길드/베르르: 왔습니까 우리 메기형!]
[길드/순한양: 너 그러다 또 맞는다;;]
[길드/베르르: 아직 눈설형님 없으심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묵요: 절미들이 이 형들은 눈에 안들어오는 모양인데ㅎ]
[길드/호백조: 어떻게 쩔미들 또 달려볼까?]
[길드/베르르: 노놉ㅋㅋㅋㅋㅋ 제가 저희 키키형을 사랑해서 그르졐ㅋㅋㅋㅋㅋ]
[길드/키키아: 안녕하세요, 안녕.]
오늘도 역시 첫 말은 메기로 시작했다. 며칠 잠잠하더니 길드네 형하고 누나들이 들어와 어깨가 산 모양이었다. 다들 오랜만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건블리아는 삼일 동안 깜깜무소식이기까지 했다.
[길드/건블리아: 뭔 소리냐? 웬 메기?]
[길드/베르르: 길마형 그거 몰라요? 영상?]
[길드/건블리아: 뭔 영상? 뭔일 있었냐?;;]
[길드/순한양: 아 왜 그걸 몰라요!!]
[길드/건블리아: 삼일만에 들어왔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이것들이 또 사고를 쳤나]
[길드/휴리사: 앜ㅋㅋㅋㅋㅋㅋㅋ 오빠 그게 아니랔ㅋㅋㅋㅋㅋ 이건 그러니깤ㅋㅋㅋㅋㅋ]
[길드/야생닭: 누님... 그렇게 웃지마여;;; 키키 울어요;;]
[길드/건블리아: 뭐야 키키 뭔일 있었어?! 그래?!]
[길드/베르르: 어휴 어르신 메인이나 보고 오셔여]
[길드/순한양: 며칠전에 키키형 얼굴 나오는거 떳었는뎋ㅎㅎㅎㅎㅎㅎ 그걸 못봤다닣ㅎㅎㅎㅎㅎ]
[길드/건블리아: 지금 그러니까... 키키 얼굴이 나왔는데... 그 뭐냐... 얼굴이 메기처럼 생겼다, 이말이잖아]
[길드/베르르: 전 암말도 안했음욬ㅋㅋㅋ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니들 똑바로 본거 맞지? 그치? 응?]
[길드/순한양: 저희보다 자세히 본 사람은 없을듯욯ㅎㅎㅎㅎㅎㅎ 눈 젤 크게 뜨고 봤어옇ㅎㅎ]
[길드/건블리아: 아닐걸;;;]
[길드/베르르: 진짜거덩여!]
[길드/건블리아: 아니 키키는;; 그러니까;; 그런 수준이 아니라;;]
[길드/키키아: 형]
[길드/건블리아: 나도 모르겠다. 어휴 니들 나중에 가서 후회해도 난 모른다]
[길드/베르르: 뭔데요. 왜 말을 하다 말아여ㅡㅡ]
[길드/건블리아: 몰라 이새꺄! 낸들 못 봤는데 알 턱이 있냐?!]
[길드/순한양: 아 왜여! 궁금하자너ㅠㅠ 아 뭔데요]
[길드/건블리아: 아 몰러! 니들이 메기처럼 봤다는데 그럼 메기처럼 생겼겠지!]
그 순간 서련이 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실실 웃는 눈앞에 무언가가 딱 놓였다. 힐끗 보니 유리병에 든 따뜻한 커피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건조한 말투와 함께 하진의 시선이 서련의 모니터 화면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대충 쓱 읽고는 콧등을 찡그리며 자신의 자리로 앉는데, 곧장 에르덴에 접속해 애들을 갈구기 시작했다.
-‘눈설’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베르르: 헉]
[길드/순한양: 저희 암말도 안 했음요]
[길드/눈설: 니들 **고 싶냐?]
“하진아, 인사부터 해.”
[길드/눈설: ㅎㅇ]
[길드/눈설: ** 내가 메기소리 짓거리면 뭐한다고 했어 샛끼들아]
그 와중에도 말은 또 순순히 듣고 잽싸게 인사를 건넨다. 물론 그다지 예의 있는 인사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싶어서, 서련은 긴 한숨을 내쉬며 관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길드/야생닭: 옳지 눈설이 잘한다! 짜란다!]
[길드/휴리사: 애들 아주 잡혀사는거 봐랔ㅋㅋㅋㅋㅋ 이런 애들이 아닌데 아주 기를 못펴고 사넼ㅋㅋㅋ]
[길드/베르르: ㅎㅎㅎㅎㅎㅎ 누나 지금 웃음이 나오져?ㅎㅎㅎㅎㅎㅎㅎ]
[길드/순한양: 아니 형님들이 자꾸 라떼는 말이야... 이거 시전하잖아여]
[길드/건블리아: ㅋㅋㅋㅋㅋㅋㅋㅋ거 참 이상하넼ㅋㅋㅋㅋ 그건 우리 세댄대ㅋㅋㅋㅋㅋㅋ]
[길드/묵요: 에이 세대랄게 있겠습니까 길마형ㅎㅎ 아직 한창이시면서ㅎ]
[길드/건블리아: 크으 묵요가 뭘 좀 아네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아니 저기 어르신?;; 여기서 넘어가시면 어쩔?;]
[길드/호백조: 쩔미들 형들이랑 시찰이나 나갈까?ㅋㅋ 조기 조 옆으로]
[길드/순한양: 키키형ㅎㅎㅎㅎㅎㅎ 저희 같이 얼음호수 갈래여?ㅎㅎㅎㅎㅎㅎ]
결국 두 절미는 최후의 수단으로 서련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커피를 조용히 마시며 구경하던 서련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곧장 키보드를 두드렸다. 역시 귀엽기는 이만한 애들이 없었다.
[길드/키키아: 알겠어, 가자]
[길드/베르르: 역시 키키형밖에 없다구요ㅠㅠ]
[길드/순한양: 누나랑 다른 형들도 가시져?ㅎㅎㅎㅎㅎㅎ]
[길드/눈설: 거긴 왜 가는데]
[길드/순한양: 아 왜여! 메기라고 한거 미안해서 키키형한테 제작템좀 해주려고 하는고만!]
[길드/묵요: 그럼 니네끼리 가지 왜 형을 끌어들여]
[길드/베르르: 거기 닭들 천지라 저희끼리 가면 개발리거든요. 허참 우린 뭐 키키형이랑 가지도 못하나ㅋㅋㅋㅋㅋ 참나 허참]
[길드/호백조: 알았다 알았어. 형들도 가줄게 됐냐?]
[길드/순한양: 키키형 공적 모자라서 아직 셋트 못 맞쳤져? 저 제작 주신 등급으로 각성했으니까 장비 하나 만들어 드릴게요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아니면 킬리 악세는 어때요 형ㅎㅎㅎㅎ 형이니까 특별히 흠흠 저희 이쁘져?]
주신 등급이면, 현재 입장던전에서 나오는 최고등급 아이템이랑 같은 등급이었다. 게다가 제작이면 이것저것 고려해 옵션도 더 넣을 수 있고. 운 좋아서 크리까지 뜨면 옵션 등급과 마석소켓은 배로 나왔다. 물론 그 정도면 애들이 서련을 줄 게 아니라, 큰돈 받고 팔겠지만.
“아직도 공적 모자라?”
“음… 조금? 조금만 더 하면 셋트 할 수 있는데, 자꾸 죽어서 그런가.”
“얼마나 모자란데.”
“훈장 있는 유저들로 30명만 죽이면 될 거 같은데.”
“강화석 여유는 얼마나 있어.”
“그것도 조금. 무기 합성 강화할 때 다 써서.”
서련의 말에 하진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제 인벤토리와 장비창을 확인하다가 길을 잘못 찾은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짚고 도로 껐다.
“공적작 도와줄 테니까 저 새끼들 거 받지 마.”
“킬리 악세는 좀 받을만 한데.”
안 그래도 킬리가 쓰던 악세등급이 낮아 좋은 걸로 사주려던 참이었는데, 준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런 서련의 생각을 읽었는지, 곧이어 하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뭐라고 하고 싶은 표정인데, 사역마가 낄 수 있는 유일한 악세가 오직 제작으로만 나온다는 걸 알아 정작 뭐라 하진 못하는 게 보였다.
얼핏 봐도 하진이 키우는 ‘눈설’은 준비된 게 하나도 없는 깡통 캐릭이었다. 흔한 채집 스킬은 물론 물약제조 스킬도 없었고, 방어구나 무기도 빈말로도 좋다고 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레이드 신청을 하면 면접에서 까일 정도랄까. 하진이 대놓고 까불 수 있는 이유는 다 제 컨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컨이 좋은 게 어디랴.
[길드/키키아: 일단 가자.]
서련은 일단 지도를 켜 베레온 얼음호수의 위치를 검색했다. 현재 있는 맵보다 한 단계 높은 맵에 퀘스트몹 출몰 장소로 표시된 장소가 하나 검색되었다. 신성족 유저들이 좋다고 활개 치는 곳 중 하나기도 했다.
대결권이 성행했을 땐, 아주 피 터지던 곳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틀 전, 대결권에 대한 버그와 중복사용이 수정패치가 되었고, 그로 인해 떼쟁이나 1:100 시스템, 중복대결도 이제는 불가해졌다.
대결권 사용 여부는 풀렸지만, 이게 또 있다가 없어지니 짜증났는지 일부 유저들이 깃발까지 흔들며 민원을 넣었지만, 르덴 측에서 재패치는 없을 예정이라는 공지를 띄우며 선을 그은 덕분에 대결권은 그렇게 나름의 희비 속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처음만큼 성행하거나, 각광받는 일은 없어졌다. 여러모로 현재 상황이 딱 밸런스도 맞고 좋지만.
[길드/베르르: 먼저 도착한 사람 1빠 내기ㄱㄱ]
[길드/호백조: 쩔미들 뭐 걸건지 들어나 보자]
[길드/순한양: 한달간 부리기 어떰?]
[길드/묵요: 콜]
[길드/눈설: 콜]
[길드/휴리사: 나도 콜!]
이럴 때 보면 죽이 척척 맞는다. 서련은 픽 웃으며 뒤처질세라 재빨리 공간이동 포탈쪽으로 달려갔다. 힐끗 옆을 보니 이미 하진부터 시작해 로운과 원호까지 눈에 불을 켜고 캐릭을 조작하고 있었다. 다들 승부욕 하나는 인정해줄 만 했다.
서련이 베레온 얼음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내기 승부가 정해진 후였다. 바닥에 굴러 울고 있는 베르르와 순한양의 꼴을 봐서는 일단 이 둘이 1등은 아닌 듯했다.
화면을 올려 그 앞을 내다보자, 호수의 얼음암석 앞에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묵요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껄렁하게 앉은 눈설과 호백조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로운이가 1등이요, 하진이가 2등 원호가 3등을 차지한 듯했다. 심지어는 4등조차 휴리사였다.
[길드/묵요: 앞으로 적당히 덤벼라 절미들아^^]
[길드/눈설: 엎어져 울고 ㅈㄹ들이야]
[길드/베르르: ㅡㅡ 아 사기쳤져? 다시해요. 아 다시해! 다시 하자고! 뭥미 이게]
[길드/호백조: 뭥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어휴 됐고 빨리 재료나 구해 뱅신들아]
[길드/야생닭: ㅎㅎㅎㅎ이겨줘서 참 고맙다 묵요야ㅎㅎㅎㅎㅎ]
[길드/건블리아: 아 요즘애들이 참 빠르네. 아니 언제 왔대?]
[길드/묵요: 저기 오두막집 언덕에서 활강타고 내려오면 빠릅니다ㅎ]
왜인지 모르겠지만, 꼴찌는 서련에게 돌아왔다. 나름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주문서를 쓰지 않고 와서인지 어쨌든 대망의 꼴찌는 서련 몫이 되어버렸다. 물론 꼴찌에 대한 패널티는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길드/묵요: 자자 빨리들 캐고 가자?]
[길드/순한양: 저는 이미 캐고 있습니다 걱정마시졓ㅎㅎㅎㅎ]
[길드/키키아: 양아, 킬리 악세 만드는데 뭐뭐 필요해?]
[길드/베르르: 형은 킬리킬리가 세상에서 젤 좋져?ㅡㅡ]
부정은 못하겠다. 옆에서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서련은 일단 모른척했다. 여기서 긍정하면… 음, 어떻게 될 진 모르겠다.
[길드/키키아: 형도 도와주려고 그러지]
[길드/순한양: 그쳐?ㅎㅎㅎㅎㅎ 그 이유밖에 없져?ㅎㅎㅎㅎㅎ 그럼 저기 저 공룡같이 생긴 애좀 잡아주세여. 확률때문에 제작퀘로 돌린거라 저만 얻을 수 있어서 룻은 제가ㅇㅇ]
[길드/키키아: 그래]
내내 무언가를 타닥타닥 두드리고 있던 로운이 입을 뗀 것도 그때였다.
“강시울 온다는데?”
“오라 그래.”
“아, 복잡한데. 이 새끼 오면 애들 다 올 거 아니야.”
“공적작 좀 시키게 다 데려와.”
“아, 그럼 되겠네. 서련 형 공적작 좀 시켜야겠다.”
서련의 시선이 하진 쪽으로 옮겨졌다. 저들끼리 얘기하는 투가 어딘지 꼼수 가득했다. 누가 또 온다는 것 같은데, 언급된 ‘강시울’이라는 이름은 스치듯이나마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럼 일단 허락부터….”
[길드/묵요: 길마형 강마 기억하시죠?ㅎ 그때 같이 싸웠던 블러더 길드요]
[길드/건블리아: 아! 알지 그럼. 왜? 온다냐?]
[길드/묵요: 네 같이 놀자는데 괜찮나요? 야생형하고 리사누님도 괜찮으면 오라고 할게요ㅎ]
[길드/야생닭: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대결은 걸지 말아달라고 전해주라ㅠㅠ]
[길드/휴리사: 콜콜ㅋㅋㅋㅋㅋ 한판 뜨자 해ㅋㅋㅋㅋㅋㅋ그때보니 장난 아니더만ㅋㅋ]
[길드/건블리아: 아니 우리가 뫼셔도 모자랄 판인데ㅋ 괜찮으니까 놀다가라고 해라ㅎ]
[길드/묵요: 그럼 오라고 하겠습니다ㅎ]
강마라면 개개길드 사건 때 도와줬던 ‘블러더’라는 길드의 길마였다. 서련이 기억하기로 블러더는 묵요가 서버이전을 하기 전에 속해 있던 길드였다. 공적도가 높은 건 물론이고 고인물 길드라 길드원들이 전부 과금러 헤비유저라고 유명세를 탔던 길드였다.
도중 묶여있던 서버가 풀려 다 넘어왔다고는 얼핏 듣긴 했는데, 어째 로운이를 데려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니, 로운이가 갈 생각을 안 한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왜 그만한 길드를 내버려 두고 등급도 낮은 이 길드에 남아있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하진이나 원호가 있어 그런가 보다 하고 그러려니 하는 중이었다.
바로 연락을 한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호수 저편에서부터 무언가가 두다다다 달려오는 모습이 잡혔다. 화면을 확대해 자세히 보자 번쩍거리는 갑옷과 화려한 외형으로 치장을 한 블러더 길드가 떼 지어 오고 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가장 앞서 달려오고 있는 탱커, 강마였다. 음, 강시울이랬던가.
[강마: 저번에 뵙고 또 보네요ㅋㅋㅋㅋ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네요ㅋㅋㅋㅋ]
[건블리아: 그때 정말 감사했는데 이렇게 또 보네요ㅋㅋㅋㅋ저희야 뭐 잘들 지내죸ㅋㅋㅋ]
[베르르: 어휴 웬 어르신들 대화]
[순한양: 이야ㅎㅎㅎ 강마님도 호옥시?]
[야생닭: 하지마라 제발;; 제발 하지마 진짜;; 형 진짜 운다]
[묵요: 괜찮아요ㅎㅎㅎ 쟤들 전부 저희랑 동갑 or 미만입니다ㅎ]
[호백조: 우리의 구세주들 오셨구만ㅋㅋㅋ]
[강마: 근디 개하진은 어딨냐?]
[눈설: ㅅㅂ 누가 개하진이야]
[강마: ?]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고 강마가 하진 쪽으로 빠르게 뛰어왔다. 그러고는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데, 쏟아지는 욕설을 듣고서야 뒤로 물러났다. 물론 배를 잡고.
[강마: 개하진ㅅㄲ 요새 이거 키우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 힐러계열은 안맞아서 죽어도 못한다더닠ㅋㅋㅋㅋㅋㅋㅋ]
[강마: 왴ㅋㅋㅋㅋㅋㅋㅋㅋ 무슨 바람이 불었다냐?ㅋㅋㅋㅋ닉넴은 또 눈설이옄ㅋㅋㅋㅋㅋ]
[강마: 감수성 폭발했냐곸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
[강마: 아니 그분 때문이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왜 뭨ㅋㅋㅋ 조작은 가능하냐?ㅋㅋㅋㅋ]
[묵요: 야야 하지마 샛꺄]
[호백조: 어휴 저새끼 담에 어쩌려고 그르냐]
[강마: 헉]
[강마: 아ㅅㅂ 헛나왔네;;]
[강마: 난 암것도 모르오 묻지마오]
[눈설: 됐으니까 일로 와봐]
강마가 주춤주춤 하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뭘 시킬지 감도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이템 차이가 폐지 대 판금 수준인데 쫄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대결권으로 조지는 모습을 보니 또 생각이 달라졌다.
하진은 강마를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전투망치를 든 채 우왕좌왕 흩어지는 블러더 길드원들에게 향했다.
[눈설: 디지기 싫음 전부 빨리 와라]
[묵요: 걍 한줄로 서봐라. 딱딱]
[윙윙: 왜ㅅㅂ 너네 뭐 하려고;]
[온이형: 이 새1끼들 또 이상한거 하려는거 아냐?]
[묵요: 강마샛꺄^^ 너도 좀 와봐라]
[강마: 조까셈^^]
[눈설: 디지고 싶음 안 와도 되고]
[강마: 아 뭐하는지 말을 해야 애들이 들을거 아녀. 왜 뭐ㅅㅂ 뭔짓을 또 시킬라고 이 ㅈㄹ들?]
“서련 형, 잠깐 저희 쪽으로 와 봐요. 이쪽으로요, 그렇지.”
서련은 로운이 시키는 대로 한 줄로 서고 있는 블러더 길드원들 앞에 섰다. 앞줄에 선 유저들 머리 위에는 전부 번쩍거리는 훈장이 달려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하진이 뭘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하진아.”
“이 새끼들 죽어도 괜찮은 놈들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아니, 그래도….”
동의는 구해야 되는 거 아닌가. 서련은 영문을 모른 채 주뼛주뼛 서 있는 길드원들을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불쌍한 정도가 남달랐다.
[묵요: 여기 키키형이 공적이 쪼끔 모자란데 각잡고 2바퀴만 돌자?^^]
[강마: ...2바퀴?]
[눈설: 훈장순으로 서라]
[강마: 니들 이거 하려고 우리 불렀냐...?]
[호백조: ㅇㅇ 튀는 새1끼들 내가 낼 찾아간다]
[윙윙: ㅡㅡ ㅅㅂ 또 낚였네]
[묵요: 말은 바로 하자, 샛끼님덜아ㅎ 강마가 오고 싶다고 한거다]
[강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기 키키형? 키키형님? 얘들이 좀 미친거 같은데 어떻게 좀 안될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강마는 급기야 서련한테 구원의 손길을 뻗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련도 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옆에 있는 비글 3마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눈설: 3바퀴 1주 소맥 콜?]
[강마: 콜]
[윙윙: 콜]
[온이형: 콜]
[강마: 키키님ㅎㅎ 저부터 콱 주겨주시면 됩니다ㅎㅎ 어서 주겨주시죠ㅎㅎ 어서어서요ㅎㅎ]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콜 소리가 끝난 후 서련의 캐릭 앞으로 강마가 냉큼 달려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들 어처구니가 없는 건 같은지, 건블리아부터 시작해 채집담당인 두 절미까지 멍한 태도로 서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련도 물론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뭐해, 빨리 죽여.”
“…잠깐만, 하진아.”
무슨 거래인지 안 봐도 뻔했다. 한 주 동안 소맥을 달리겠다는 말 같은데, 그 모든 비용이 하진의 주머니에서 나갈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방어구를 맞출 필요가 있는가 하면, 서련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러나 서련이 뭔 말을 하기도 전에, 하진이 먼저 재빠르게 선수 쳤다.
“저 고딩 놈들이 해주는 건 괜찮고, 내가 해주는 건 안 괜찮다? 그건 무슨 논린데, 응? 형. 아니면, 뭐 내가 주는 건 죽어도 싫고 쟤들이 주는 건….”
“알았어, 알았어. 하면 되잖아.”
이쯤 되면 답이 없다고 봐야 했다. 더 듣고 있는 것도 고역이라 서련은 하진의 말을 냉큼 끊어내고 그 즉시 바로 강마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냉큼 승낙한 걸로 봐서는 대결이 걸려오길 눈 빠지게 기다린 듯했다.
-신마제국의 ‘강마’가 대결을 승낙하였습니다.
-곧 결투가 시작됩니다.
-결투시작 5초 전.
[강마: 아주 편~하신대로 공격하시면 됩니다ㅎㅎ 아 킬리로 공격하시면 더 좋고요 고객님]
[키키아: 네 죄송합니다]
[강마: 아뇨ㅎㅎ 죄송할 것까지야ㅎㅎ]
“뭐가 죄송해.”
“형, 죄송할 필요 없어요! 저것들 저희 뜯어먹을 생각으로 저러는 거라.”
“죄송하긴요. 죄송할 필요 없으니, 마음껏 죽이세요. 편한 대로 마음껏.”
죄송하다는 말을 하자마자 곧장 옆에서 따가운 말들이 날아왔다. 서련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곤 킬리를 소환했다. 그리고 속으로 염불을 외며 킬리와 동시에 강마를 공격했다. 강한 타격에도 강마의 피는 고작해야 10분의 1만 깎였을 뿐이었다. 탱커인데다, 템빨이 상당해 공격이 방어력에 흡수된 탓이었다.
이래서 탱커가 좀비소리를 듣는 거다. 그래도 무한대로 무작정 공격하니 공격이 쭉쭉 들어가긴 했다. 물론 상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으니 가능한 거겠지만. 문득 제대로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확인은 안 해봤지만, 적어도 로운만큼은 템빨이 좋을 테니 컨만 그 이하면 해볼 만할 것이다.
[키키아: 다음에 쟁 한 번 어떤가요 강마님]
[강마: 저야 영광이죠ㅋ 근데 봐주지는 않습니다ㅋ]
[키키아: 네ㅎ]
-신마제국의 ‘강마’가 사망하였습니다.
-대결에서 승리하였습니다.
-29834의 공적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서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미쳤다. 이 정도면 15번만 죽여도 원하는 공적치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서련의 시선이 저절로 강마의 머리 위로 향했다. 훈장인 건 알았지만, 지금 보니 백금에 깃이 붉은 훈장이었다. 이 경우, 상위 1% 공적 순위라는 소리다. 저 정도면 이곳 라히브라 섭에서는 신성족, 신마족 합해서 토탈 10위안에는 들 것이 분명했다.
[묵요: 다음]
[강마: 나는 먹고 죽을란다ㅎㅎㅎㅎ 나는 똘끼들 주머니 사정따위 모르오ㅎㅎㅎㅎ]
즉각 부활을 쓰고 살아난 강마는 후다닥 뛰어 블러더 길드의 맨 끝줄로 향했다. 뛰어가는 폼이 머리에 꽃밭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거부하는 것도 그래서, 서련은 동정심과 미안쩍은 마음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두 번째 유저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두 번째 유저는 서련과 같은 소환사였다. 물론 서련보다 배는 좋은 무기와 갑옷을 두르고 있었지만. 다른 외형을 덮어쓴 것 같기는 한데, 갑옷에서 보랏빛 빛이 새어 나오는 걸로 봐서는 풀강까지 마친 템이 확실했다. 싸우기에 앞서 서련은 상대에게 잠시 허락을 구하고 그의 장비를 살펴보기로 했다.
[키키아: 윙윙님 혹시 장비보기좀 볼 수 있을까요?]
[윙윙: 넵 괜찮습니다ㅋㅋ 개하진이 능력이 후달려서 우리형님 갑옷이 영 말이 아니네요. 흠, 어떻게 저희 길드로 넘어 오실래욬ㅋㅋㅋㅋㅋ 제가 한 레일 깔아드릴 수 있는데 흠흠]
[눈설: 누가 니네 형님인데 ㅅㅂ 그리고 어디서 **라고 수작질이야]
서련은 하진과 윙윙이 싸울 동안 윙윙의 캐릭을 클릭해 ‘장비보기’를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잠시 후 말없이 조심히 꺼야 했다. 눈이 아플 만큼 차지한 건, 서련이 그렇게나 갖고 싶던 최고등급 공적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풀세트로 최대 마석소켓이 적용된. 게다가 모든 장비에는 최대 강화가 다 되어 있었다.
…저 정도면 사기 아닌가.
서련은 며칠 전에 겨우 공적 무기를 얻고 합성과 강화를 마친 참이었다. 그 하나 얻는데도 어마어마한 공적치를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 저쪽은 심지어 날개 외형까지 공적템이다. 이 정도면… 그래, 벗겨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가슴에 남아있던 죄책감이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나마 위안인 건, 윙윙의 사역마는 아직 MAX까지밖에 강화를 못 한 상태라는 점이다. 맥스를 넘어 울티, 그다음 한계돌파까지 해야 킬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킬리가 최고란 소리다.
서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윙윙에게 한 쿨 폭딜 스킬을 꽂아 넣었다. 역시나 데미지는 예상한 것보다 더 적게 들어갔다. 서련이 공격하자, 이어 킬리도 화려한 불길을 휘날리며 주먹을 쾅쾅 날리기 시작했다.
[윙윙: 와 킬리 진짜 개쎄네옄ㅋㅋㅋㅋㅋ 와 앀ㅋㅋㅋㅋ 개하진 대체 뭐한거얔ㅋㅋㅋㅋㅋㅋ]
[눈설: 내가 키웠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키키아: 음, 킬리는 제가 키웠는데]
키운 건 서련이지만, 킬리에 들어간 모든 건 하진이 대주었다. 눈설을 보면 어떻게 물주 노릇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서련의 캐릭이나 킬리에 들어간 모든 돈이나 강화석은 하진에게서 나온 게 맞긴 했다.
[베르르: 어휴 형 또 킬리킬리 자랑들어갔어. 우린 가서 재료나 캐자]
[순한양: 자자 생닭형도 저희랑 함께 갑시다ㅎㅎ 저러다 불똥튈라ㅎㅎㅎㅎㅎ]
[야생닭: 형 채집스킬 안 올렸는데?;; 아니 안 올려다니까?;;]
[베르르: 알겠어옄ㅋㅋㅋㅋ 그럼 잠시 닭장들어가 있읍시다ㅇㅇ?]
[휴리사: 강마님! 저랑 한판 떠보실래요ㅋㅋㅋㅋ 캬 진짜 잘하시던데ㅋ]
[건블리아: ㅎㅎㅎㅎㅎ 저희 애들이 철이 없죠?ㅎㅎㅎㅎ 아이고 죄송합니다]
윙윙이 죽을 때 즈음, 길드원들은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휴리사는 블러더 길드원들을 잡고 한판 뜨고 있었고, 막내들은 야생닭을 데리고 채집하러 떠났다. 남겨진 건, 군기를 잡는지 블러더 옆에 팔짱을 끼고 있는 하진네와 블러더 길드한테 연신 허리를 숙이고 있는 건블리아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서련은 착실히 세 번째 블러더 길드원을 잡아 족치고 있었다.
그러나 잘 진행되는 듯했던 3바퀴 1주 소맥의 거래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잘 나가던 도중 제3자의 개입이 시스템 창을 도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
“하, 저 새끼도 넘어왔네?”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들려온 건, 원호의 귀찮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한편으로는 어이없어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하진과 로운을 통하면서 점차 달라졌다. 나중에 가서는 금덩이를 본 것처럼 좋아하는데, 대화를 듣던 서련은 왠지 모를 애도를 품어야 했다. 물론 상대방에게.
“잡자. 역시 공적하면 같은 편보다는 닭들이지.”
“가만있자… 저 새끼 공적이 백금 훈장에 노란 깃이니까… 씨발, 잡아. 저 정도면 강시울만큼 나오겠다.”
“강시울한테 귓 돌리고 흩어져 잡자고 해. 죽이지 말고 데려오라고 해라, 꼭.”
“우리가 공적 후달리는 건 어떻게 알고 손수 알아서 나타나 주셨네. 넌, 씨발 죽은 줄 알아라.”
무서운 기세로 손마디를 뚝뚝 꺾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쌓인 게 많은 듯했다. 서련은 생판 모르는 사람인 척 하진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뒤로 빠졌다. 이미 신성족 유저들이 나타난 시점부터 서련의 공적작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강마: 아 새1끼들 ㅈㄴ 끈질기네. 어떻게 된 게 여기까지 따라오냐ㅅㅂ 그것도 한 길드 전체가 잘들 넘어오셨네]
[묵요: 니들도 넘어왔는데 쟤들이라고 다르겠냐?]
[윙윙: 같은 넘들 취급하지 말자ㅋㅋㅋㅋ 우린 만년1등 쟤들은 만년2등 아니냐]
[호백조: 다들 준비는 됐냐?ㅋㅋㅋ 놓치는 새1끼들 알아서하고]
[눈설: 살려서 데려와. 살려서]
[묵요: 실수라도 공적 처먹는 샛끼 있음 디진다. 각잡고 하자^^]
[강마: 니들이나 잘하쇼ㅎㅎ 그리고 소맥약속 유효하니까 지켜라]
[온이형: 내기 어떠냨ㅋㅋㅋㅋ 젤많이 갖다바친 넘한테 개하진 하루 소환권]
[강마: 콜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백조: 야야 개하진 진상 끝장이야, 하지마. 그리고 제대로 안 하면 피토하게 만드는 수가 있다]
[강마: ㅋㅋㅋㅋㅋㅋㅋㅋ걱정마시죠 고갱님ㅋㅋㅋㅋㅋㅋ 저희가 누굽니까ㅋㅋㅋㅋㅋ]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모두는 얼음호수 뒤편을 둘러싼 얼음암석 쪽을 경계하며 나란히 섰다. 온통 새하얀 곳이라 그런지, 상대편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머리 위에 새빨간 이름을 달고 있는 상대 종족이라면 더더욱.
얼마 안 가 얼음암석 위로 수많은 신성족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도에 잡히는 붉은 점만 해도 족히 4포스 정도의 인원수였다. 약, 100명 정도. 길드가 다른 걸 보아 몇 개 길드와 연합한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서련쪽은 블러더를 합해도 수가 고작 30명 안팎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하진과 로운, 원호는 굉장히 의기양양했다. 뭐, 물론 과금러 헤비유저들인 블러더는 한술 더 떴고.
[강마: 야이 매닭샊꺄 넌 할짓도 없냐?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ㅈㄹ이냐?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놀아줄 넘들도 없나 샛끼 조온나 불쌍하네 진짜]
[신성제국/매익화: 불쌍하면 좀 놀아주든가 샛꺄]
[강마: 너 인마 마조지 샛꺄ㅋㅋㅋㅋㅋㅋ ㅈㄴ 발리면서 매번 개같이 찾아오는거 보니 맞네 ㅅㅂ 아오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뎈ㅋㅋㅋㅋ 형이 몰라뵈서 미안하다 매마조얔ㅋㅋ]
[신성제국/매익화: 아 시끄럽고 걍 덤벼 샛꺄 조져줄 테니까]
[묵요: 간다. 죽이지말고 데려와라]
[눈설: ㄱㄱ]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풀도핑을 돌린 유저들이 뛰쳐나간 건, 신성족 유저들이 날개를 펴고 얼음호수로 활강을 시작했을 때였다. 서로에게 달려드는 두 종족이 얽히는 것과 동시에 상태창 위로 빨간 글씨가 쉴 새 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심지어는 서련네 길드원들도 좋다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재료를 캐야 하는 베르르와 순한양까지도 말이다. 야생닭도 마지못해 뛰어가고는 있는데, 그게 마치 배잡이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 같았다.
내 킬리… 킬리 악세 해줘야 되는데.
서련의 시선이 뒷발로 목덜미를 긁고 있는 킬리에게 향했다. 목덜미를 긁고 나서는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리치는데, 몸이 쑤셔 죽겠다는 모습이었다. 킬리와 떼쟁의 현장을 번갈아 보던 서련은 한숨을 폭 내쉬며 광물이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베르르와 순한양이 캐던 광물과 채집물을 손수 캐기 시작했다. 재료를 캔 뒤에는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악어처럼 생긴 공룡을 잡아 죽였다. 한 세 마리 정도 잡아 죽였을까.
[강마: 아이고 우리 키키형님. 여기 진수성찬 좀 들고왔는데 좀 드셔보시져?ㅎㅎㅎㅎ]
[신성제국/매익화: 웬 메기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마가 매익화의 머리를 방패로 후려쳤다. 피가 확 깎이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매익화는 강마의 포획에 질질 끌려온 첫 번째 희생자였다. 그걸 서련에게 내밀며 강마는 비즈니스적인 미소가 담긴 말을 가득 던졌다.
[강마: 이 생키 말은 신경쓰지 마시고 어서 죽이시져ㅎㅎㅎㅎ 이래봬도 이 넘이 살이 통통해서 공적이 많습니닿ㅎㅎㅎㅎㅎ]
[신성제국/매익화: 하ㅅㅂ 그런거였고만]
[강마: 넌 좀 닥쳐봐 고기야. 사람 얘기하는데 껴드는 거 아니야]
안 하면 영영 시달릴 것 같아 서련은 일단 매익화한테 킬리를 보냈다. 피가 얼마 안 남아서인지, 매익화는 킬리의 주먹질 한 방에 명을 달리해야 했다. 그리고 매익화가 죽자 강마는 즉각 다시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또 잡아온다는 고객님 멘트를 날리며 말이다.
어쩐지 벌써부터 피곤해진 느낌이었다. 그런 서련과 달리 옆에 있는 세 마리 비글들은 서로 정보까지 주고받으며 서련 쪽으로 몹, 아니 유저들을 모는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묵요가 두 번째 희생자들을 데려왔다. 두 번째라 쓰고 다섯 명이라 읽을 만한 머릿수였다.
[묵요: 하하 키키형 이것들 좀 킬리한테 한 방에 죽이라고 하세요ㅎ]
넉백을 먹고 해롱거리는 신성족 유저 다섯 명을 포획으로 묶어 데려온 로운이 서련의 캐릭 앞으로 그것들을 홱 던졌다. 서련은 잠시 바라보다가 이번에도 킬리를 보내 광역 펀치를 선사해주었다.
-신성제국의 ‘비치떡’이 사망하였습니다.
-8923의 공적을 획득하였습니다.
-신성제국의 ‘레옹’이 사망하였습니다.
-7810의 공적을 획득하였습니다.
공적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그래, 그건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줄줄 들어오는 데 안 좋을 리가. 문제는 저 멀리서 좋다고 날뛰고 있는 절미들이었다.
서련은 킬리와 공룡, 그리고 두 절미를 번갈아 보다가 뒤늦게야 자박자박 타자를 두드렸다. 설마, 잊었으려고. 그럴 리가.
[키키아: 저기... 베르랑 양이는 형 킬리 악세 해줄거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없이 올라가는 전투 메시지에 섞여 못 읽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서련의 시선이 다시 근처에 기어 다니는 공룡으로 향했다.
“…….”
그냥 사야 되나. 이쯤 되면 그냥 사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도 손은 계속해서 채집을 하고 공룡을 때리고 있었다. 물론 탱커들이 잡아오는 인질들을 족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득 옆을 보자 왜인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한 모습의 하진이 보였다. 후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신성족을 패고 서련에게 던져주는데, 뭐랄까. 화면이 베르르랑 순한양한테 가 있는 걸 보니, 서련의 갑옷과 악세를 위한 재료수집이 중단된 게 그렇게나 뿌듯한 모양이었다.
킬리야, 괜찮아. 형이 돈 모아서 꼭 해줄게. 그리고 기회 되면 쟤 좀 때리자.
무기 맞춘다고 전 재산을 날린 터라 현재 가진 게 얼마 없어 당장에는 킬리 악세를 맞춰줄 여력이 안 됐다. 그래서 제작해준다는 베르르와 순한양의 말에 나름 기대했던 건데, 기어코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런 서련의 비통함이 통했는지, 잠시 후 상태창 위로 생각지도 못한 글이 하나 떠올랐다. 어깨가 절로 흠칫할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비단 서련만 그런 게 아닌지, 그 소식에 여기저기서 싸우고 있던 블러더 길드원들이 고개를 번쩍 들고 경악을 내질렀다.
-‘눈설’님이 사망하였습니다.
[강마: 왓?! 아니 개하진씨? 하신게 뭐 있다고 디지심?]
[윙윙: 뭐야ㅅㅂ 헐?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윙윙: 개하진이냐?ㅋㅋㅋㅋ 앜ㅋㅋㅋ 개하진한테 힐러 시킨사람 누규?ㅅㅂㅋㅋㅋㅋㅋㅋ]
[온이형: 뭐냐? 지금 개하진 디진거?! 와... ㅅㅂ... 저게 힐러 못한다 못한다 하더만 ㅈㄴ못하는구나ㅋㅋㅋㅋㅋㅋ]
“하, 씨발….”
옆을 보자 주먹을 꽉 쥔 채 머리를 짚고 있는 하진의 모습이 보였다. 주먹 위로 툭 불거진 핏줄을 보니, 여간 꽉 쥔 게 아닌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내새끼 모드가 발동되었다.
이 정도면, 잘하는 거 아닌가…. 달려드는 유저가 몇인데. 게다가 방어구도 좋은 것도 아니고.
서련은 고개를 들지 못 하는 하진 쪽으로 돌아선 채 나름 달랜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하진이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하진아, 신경….”
쾅-!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가만히 있어. 저 새끼들이 말 걸면 무시하고.”
외투를 벗어 던지는 손길이 무척이나 다급했다. 숨도 안 쉬고 뱉어낸 말에 서련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제 외투를 서련의 다리에 덮어준 하진은 알겠냐고 묻는 말 대신 서련의 눈을 가까이서 응시했다.
“…어. 천천히 와.”
어차피 천천히 오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서련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하진은 담뱃갑을 챙겨 들고 성큼 그곳을 벗어났다. 하진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하진의 캐릭은 로운이 차지했다. 서련을 보며 씩 웃고는 다시 제 입맛대로 스킬을 조정하는데, 대충 보니 하진이 갈 줄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형, 아직 저한테 안 반했죠?”
더욱이 이런 말을 하면서. 서련은 망설이다 로운에게 하진에 대해 슬쩍 물었다.
“하진이가 힐러계열은 잘 못해?”
“겁나 못해요. 원래 힐러가 전투랑 병행하면 어렵긴 한데, 쟤는 그냥 선천적으로 힐계열하고 안 맞아요. 왜 안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새끼 요리는 잘하는데 왜 계란말이는 못하잖아요? 왜 못하는지 모르겠는데, 겁나 못하잖아요? 그거랑 같다고 보시면 돼요. 그냥 힐러는 아닌 걸로.”
하진이가 계란말이 못한다는 건 어딜 가나 다 아는구나. 그래도 하진이 힐러를 못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듣고 보니 그 못한다는 기준이 다른 직업 특성 기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다른 전투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못한다는 게 아닐까.
“그래도 이 정도면 잘하는 건데.”
“힐러만 놓고 보면 그렇긴 한데, 다른 직업 놓고 상대적으로 평가하면 10프로 정도밖에 실력 발휘를 못하는 거예요. 개하… 아니, 성하진 쟤가 제일 잘하는 게 거너랑 아처처럼 장거리 즉딜 캐라서요. 왜 스킬 전환율 빠른 DPS 높은 직업들 있잖아요. 아, 어쌔신도 개 잘해요.”
“그럼 마도나 소환사는?”
“그건 한 70프로까지 실력 발휘하는 것 같긴 한데... 거너랑 아처 잡는 순간 그냥 게임 오버라고 보시면 돼요. 백전을 해도 절대 못 이겨요. 성하진이 평캔을 신들린 듯이 잘하거든요.”
“…그렇구나.”
“블러더 놈들 보이시죠? 쟤들 다 하진이한테 배운 거예요. 그래서 암말도 못 하는 거고요.”
서련의 시선이 조용히 모니터 안의 블러더 길드원들에게 옮겨졌다. 하진이 사라진 건 꿈에도 모르고, 저들끼리 신나 떠들면서 신성족들을 잡아 족치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신날 일인가 싶다가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안 그래도 확인할 게 있었는데, 오히려 잘 됐다. 서련은 애써 태연한 태도로 게임에 집중했다. 그리고 채널창을 유심히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원하던 소식이 곧이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련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바디랭귀님의 외침: 킬레야ㅋㅋㅋㅋㅋ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니?ㅋㅋㅋㅋㅋㅋ메기가 불렀냑?ㅋㅋㅋㅋㅋㅋ]
[램비님의 외침: 킬레아 위치 제보하는 넘들 형이 오늘 복수의 화신이 되주마]
[황토맨님의 외침: 그렇게 까던 부캐충들 어디?ㅋㅋㅋㅋㅋㅋ아놔 새1끼들 하여간 뒷심만 오지게 있어가지고. 형은 대포보러 출동한다. 같이 갈 넘들 헤지아 계곡으로 모여본나]
[용신마님의 외침: 개개길드얔ㅋㅋ 니들은 왜 또 가냐?ㅋㅋㅋㅋ 어휴 새1끼들 또 개발리러 가시나보네... 그럼 또 허벌나게 구경하러 가줘야 예의짘ㅋㅋㅋㅋ]
재미들 나셨다. 심지어 그렇게 개발렸던 개개길드까지 합세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북새통인데, 여기서 온갖 작당들 다 모이면 그야말로 개판이 따로 없지 싶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블러더 길드와 로운은 서련에게 공적을 물어다 나르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재미 들려 날뛰는 모습을 보니 됐다고 말리기도 뭐했다. 다 제쳐두고 그냥 평화롭게 포탈이나 타고 싶은 게 서련의 현 심정이었다.
[강마: 뭐야 웬 킬레아? 아ㅅㅂ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옼ㅋㅋㅋㅋㅋㅋㅋ 이 새1끼 진짴ㅋㅋㅋㅋㅋ]
[윙윙: 아놬ㅋㅋㅋㅋㅋㅋ사람들 또 ㅈㄴ게 끌고 오겠네 시밬ㅋㅋㅋㅋㅋㅋㅋ]
[온이형: 다 끝났는데 뭘 오겠다고 ㅈㄹ인데]
[신성제국/매익화: 끝나긴 뭘 끝나. 지들만 즐기고 끝나나 샛끼들이]
[강마: 응그래 넌 좀 다시 키키형님한테 갔다오자^^ 시벌넘아]
[신성제국/매익화: 다른넘한테 공적주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강마: 그럼 꺽져 샛꺄]
[묵요: 내기ㄱ? 개개길드 발라주면 더이상 우리도 손 안대는 조건으로다가ㅎ]
[신성제국/매익화: 나한테 하는 소리지 지금?]
[호백조: 개개길드 바를 넘들이 댁밖에 더있나ㅋㅋㅋㅋ]
[묵요: 키키형 공적도 채웠겠다 뭐ㅎㅎ 모자라면 강마야 니가 한 바퀴 더 돌자]
[강마: 조까셈 돼지샛끼들아]
[신성제국/매익화: 콜 우리애들 공적보니 이제 채울때가 된 거 같아서]
[묵요: 킬레아 샛끼 때문에 다는 안되고... 흠 그쪽 길드만 안 건드는 조건으로 콜?]
[신성제국/매익화: 좋네 콜]
[강마: 인성보소ㅋㅋㅋㅋㅋ 걸리면 다른길드한테 밟힐 기세네ㅋㅋㅋㅋㅋㅋ]
[신성제국/매익화: 뭐 안 걸리면 되는거 아닌가. 아님 나좀 도와주든가^^]
[강마: 조까셈^^ㅗ]
그렇게 서로간 협상을 마친 양측은 곧장 찢어지기 시작했다. 서련은 일단 캐릭터 상태창을 켜고 공적치를 확인했다. 체감상 백 명은 죽인 것 같았는데, 역시나 얻어야 되는 공적치를 훨씬 넘긴 후였다. 이 정도면 날개 외형이나 다른 공적 외형템을 사고도 남을 공적치였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2차전을 준비하고 있는 모두의 머리 위로 후광이 비치는 듯해 쳐다보기도 힘들어졌다. 저렇게 좋을까, 하는 생각 이전에 사실 서련도 조금은 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초 포탈타는 것도 신성족들 뒤치기가 재미있어서이기도 했고.
음, 어쩐다.
안 그래도 개개길드가 온다고 하니, 뭐 고민할 게 있나 싶었다. 서련은 잠시 재료수집을 뒤로 미뤄두고 킬리를 옆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곧장 공격태세를 갖추고 자신의 길드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신성족 길드연합도 무턱대고 덤비지 않고, 부활 포탈 쪽에서 잠시 대기를 하고 정비를 가다듬었다. 아수라장이었던 얼음호수가 깔끔히 정리되고, 주변은 다시 전쟁 전으로 돌아갔다. 신성족들은 얼음암석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인원이 불어나길 잠시 기다렸다. 그 행동은 죽어있던 유저들이 부활포탈로 이동해 부활 패널티를 다 지울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신마족들 상황을 귀띔해준 모양이었다.
[강마: 처음부터 저렇게 나오지 하여간 새대가리 같은 넘들]
[묵요: 니들도 준비해라 킬레아 생킈 곧 온댄다]
[호백조: 나머지들 잡아서 키키형한테 갖다주는 거 잊지 말고]
[강마: 아옙ㅋㅋㅋㅋㅋ 소맥에 양주까지 어떠신가옄ㅋㅋㅋㅋㅋ]
[호백조: 개하진하고 쇼부쳐라. 형들은 소맥까지만 봐준다]
[강마: 개하진씨. 아니 성하진씨?ㅋㅋㅋㅋㅋㅋ 지금 어디?ㅋㅋㅋㅋㅋㅋㅋ]
[묵요: 새1낔ㅋㅋㅋㅋ 저러다 데낄라에 치이고 겨댕기지ㅋㅋㅋㅋㅋ]
여기에 하진이까지 껴 있으면 딱이건만. 서련은 두런두런 모여 떠들고 있는 로운과 친구들을 보며 모니터 화면의 가장자리를 힐끗 바라 보았다. 모니터의 반사체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어, 온다.”
로운의 말에 시선은 곧 다른 쪽으로 옮겨졌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역시나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휘날리는 와인색의 긴 겉옷이었다. 그리고 눈이 가려질 정도로 눌러쓴 카우보이형 모자.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신성족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들 킬레아의 등장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이제는 도핑을 돌리며 전투태세를 잡고 있었다.
화려한 도핑의 이펙트와 여러 버프 스킬이 눈앞에서 현란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건 활강을 시작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한 줄로 쭉 늘어선 신성족이 일제히 날개를 펴고 먹잇감을 노린 듯 아래로 활강해왔다.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목표물은 킬레아 단 한 명이었다. 꼭짓점을 향해 달려들듯 수많은 신성족들이 겹쳐지길 반복하다, 이윽고 날개를 접고 하나둘 땅을 밟기 시작했을 때 킬레아의 붉은 옷자락도 거칠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콰앙-
-신마제국의 ‘킬레아’가 혈전의 쇄속을 사용해 주변 적들에게 광역기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킬레아’가 라이플링 건샷을 사용해 신성제국의 ‘레오바’에게 4921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킬레아’의 크리티컬 수치가 향상되었습니다.
어림도 없는 숫자에 덤벼드는 킬레아는 뭐가 그렇게 원통한지 혼자 구르고 뛰며 난리를 피워댔다. 생존력은 또 얼마나 굉장한지, 도와줄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물론 그게 컨으로만 되는 게 아닌 템빨도 어느 정도 갖춰져 있어 가능한 얘기지만 말이다.
문득 서련의 시야에 도와줄 생각이 아예 없는 듯 텀블링을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한 무리가 들어왔다. 로운과 원호를 비롯한 블러더 길드들이었다. 서련의 토종 길드원들은 대체로 멀리 떨어져 사태를 구경 중이었다.
서련의 시선이 다시 킬레아에게 덤벼드는 신성족에게 향했다. 그들 중 가장 뒤로 빠져 덤비는 시늉만 하고 있는 매익화 길드에게. 어떻게 낚아야 되나, 고민이 많았는데 매익화를 보니 금세 좋은 수가 떠올랐다. 서련은 즉시 매익화에게 남몰래 귓속말을 보내기 시작했다.
{귓속말/매익화님께: 매님 혹시 킬레아 어글 가능하실까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몹이 아니라 어렵겠는데^^}
{귓속말/매익화님께: 실력 좋아보이시던데}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내가 털린 공적이 몇이었더라.}
{귓속말/매익화님께: 공적드리면 될까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그것보단 1회성 소환권 어때요^^}
이건 또 뭔 신박한 주문인가 했다. 분명 애먼 곳에 쓰일 게 뻔한 얘기였다. 뭐, 미끼라든가. 서련은 잠시 망설이다 한숨을 폭 내쉬고 허락했다.
{귓속말/매익화님께: 좋아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콜 어떻게 해드릴까요}
{귓속말/매익화님께: 제가 신호보내면 킬레아 어글먹고 제 쪽으로 유인해주세요. 죽이면 무효니까 그렇게 알고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거 깐깐하시네}
싫다고는 안 했으니 이 정도면 됐겠다 싶었다. 그리고 서련은 바로 건블리아와 휴리사에게 귓속말을 넣고, 킬레아의 보호를 부탁했다. 매익화야 알아서 잘 살아남을 거고. 탐탁지 않게 말하던 건블리아는 서련이 몇 번 더 말하자 결국 수락해주었다.
{귓속말/건블리아님으로부터: 아니 근데 킬레아는 우리가 굳이 보호 안해도 잘 살지 않냐;}
{귓속말/건블리아님께: 잠깐 일이 있어서 그래요. 진짜 잠깐이면 돼요. 킬레아한테 오는 신성족만 좀 부탁드릴게요}
{귓속말/건블리아님으로부터: 그래 일단 해보긴 하겠는데, 형 컨 알지? 기대는 말아라;}
{귓속말/건블리아님께: 감사해요 형}
{귓속말/건블리아님으로부터: 됐고,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오후에 시간이나 비워놔라. 알겠냐?ㅋ}
{귓속말/건블리아님께: 네ㅎ 알겠어요} 건블리아까지 포섭을 끝내자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 서련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매익화에게 신호를 보낼 타이밍을 말이다.
그리고 그 타이밍은 생각보다 더 큰 파장과 함께 찾아왔다. 킬레아의 뒤쪽 언덕을 가득 뒤덮는 바글바글한 개미 떼. 다들 볼거리를 찾아 뛰어온 신마족 유저들이었다. 그들은 신성족을 보자마자 무기를 뽑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뒤로 빠져 구경꾼을 자처하는 유저들도 상당수 있었다.
바글바글한 개미 떼에 킬레아에게 덤벼들고 있던 신성족 유저들이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단 수적으로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이내 똑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 갈증에 시달리다 오아시스를 본 하이에나 떼 같은 모습들이었다. 그 안에는 당연하지만, 서련의 길드원과 블러더 길드원들도 있었다.
서련이 매익화에게 신호를 보낸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귓속말/매익화님께: 지금요}
대답은 없었지만, 뒤쪽에 있던 매익화가 곧장 튀어나오는 걸 보니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사람들이 없는 얼음호수 구석 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저들끼리 신이나 날뛰는 덕분에 서련을 주시하는 유저들은 없었다.
{귓속말/건블리아: 형, 부탁드려요. 리사누나한테도 말해줘요}
이번에도 답장은 없었다. 그래도 다들 착실히 서련의 움직임에 맞춰 따라붙고 있었다. 게다가 무슨 수로 꼬셨는지, 킬레아가 매익화를 아주 잘 쫓아오고 있기까지 했다. 서련은 유저들이 잘 안 보이는 얼음암석 뒤편에 캐릭을 세워두고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일단은 뭐.”
사각지대인 데다가 암석으로 잘 가려져 있기까지 하니, 잠깐의 잠수는 어떻게든 될 것이다. 이제는 킬레아와 매익화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한 10초 정도 지났을까, 서련의 캐릭이 있는 쪽으로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킬레아의 어그로를 맡았던 매익화였다.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즉각 로운과 원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태연히 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화장실 좀 잠깐 갔다 올게.”
“형, 같이 가줄까요?”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게임이나 해.”
“괜찮아. 금방 올 거야.”
화장실까지 쫓아오겠다는 로운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일단 화장실을 가는 척 길목을 돌자 시선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서련은 다시 벽을 슬쩍 돌아 원래 앉아 있던 라인의 한 칸 뒤 라인으로 허리를 숙이고 슬금슬금 이동했다.
위치는 이미 모니터에 반사된 형체로 확인한 상태였다. 서련의 모습이 제법 이상했는지, 여기저기서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단지 그뿐. 말을 걸거나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서련이 원하는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온갖 욕설 소리가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평소보다 소리가 낮은 게 나름 자제한다고 한 것 같은데, 감추기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슬슬 일어날 때가 됐는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종전보다 큰 욕설과 함께 의자를 박차를 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이 새끼들이…!”
서련은 타이밍을 맞추고 있다가 사내가 벌떡 일어났을 때, 때맞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아니, 얼굴을 쑥 내밀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건 험상궂게 찌푸려진 눈매였다. 그러나 곧 큰 덩치의 어깨가 주뼛 굳어진 것과 동시에 사내의 두 눈이 본 적 없을 만큼 커졌다. 놀라 뒤로 나자빠질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넋이 다 나간 것처럼 멍한 모습으로 굳어져 버렸다. 꽤 심각하게 놀란 얼굴이긴 했지만.
서련은 단단히 굳어진 사내에게 좀 더 고개를 내밀었다. 눈동자의 흔들림까지 다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 눈을 뻔뻔히 보며, 서련은 놀라 굳어진 사내에게 눈꼬리가 접힐 만큼 활짝 웃어 주었다.
“킬레아씨. 거기서 그러지 말고, 그냥 제 옆에서 편하게 하시죠?”
그러게 그렇게 막 벌떡벌떡 일어나면 쓰나.
당연하겠지만, 하진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하진의 몸이 삐걱 움직이는가 싶더니 의자 위로 풀썩 나앉았다. 서련을 멍하니 응시한 채. 그래도 표정은 생각보다 빨리 수습되었다. 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걸로 대체되었지만.
“응?”
서련은 미소 띤 그대로 한 번 더 물었다. 여기저기를 보던 하진은 끝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알겠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갈 듯했다. 서련은 하진이 정리하길 기다렸다가 그와 함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하진을 맞은 건, 한심하다는 표정을 원 없이 드러내고 있는 로운과 원호였다.
그들은 혀까지 차며 노비처럼 끌려오는 하진을 성대하게 반겨 주었다.
“내가 뭐랬냐, 등신아. 금방 들킬 거라고 했지? 하여간 이 새끼는 하지 말란 짓은 꼭 해요.”
“새끼가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눈치 보는 거 봐라. 그래서 어떻게 담배는 자~알 피우고 오셨어요? 어휴, 내가 아주 딱 걸릴 줄 알았다.”
“…시발, 안 닥치….”
“성하진.”
서련의 엄한 말소리에 하진이 입을 바로 다물었다. 로운과 원호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낄낄거리기 바빴다. 하진은 분노의 마른세수를 하며 제 자리로 향했다. 저 분노로 가득한 머릿속이 어떨지 안 봐도 뻔했다. 핸드폰을 아주 밟아 으스러뜨리고 싶겠지.
그래도 지가 벌여놓은 일이 있으니, 어쩌진 못하고 씩씩 화만 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뭐 캔커피를 따서 분노의 원샷을 한다든가, 언제 그렇게 감췄냐는 양 킬레아로 접속해 분노의 키보드질을 하는 것까지는 별수 없었지만.
서련의 시선이 하진의 모니터 화면으로 향했다. 멀리서만 봤던 킬레아가 눈앞에 있는 느낌은, 뭐랄까. TV에서만 보던 사람이 옆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환호하거나 좋아할 만큼은 또 아닌.
아니, 옆에서도 이렇게 잘하면서 이제껏 왜 숨어서 그 난리를 쳤는지 아주 궁금하다 못해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보나 마나 제 마음대로 무언가를 할 구실이 필요해 그랬을 것이다. 그건 서련의 간섭에 관한 것일 테고.
서련은 열심히 게임에 임하는 하진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와 다그쳐봤자 뭐할까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유는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서련은 일단은 눈앞에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건블리아와 휴리사, 그리고 강마부터 먼저 수습하기로 했다.
서련이 자박자박 타자를 치는 순간에도 옆에서는 분노의 마우스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련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폭 새어 나왔다. 그래도 욕을 안 하겠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어디인가 싶었다. 그래, 참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저놈의 성하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