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9/28)

5장.

서련이 피시방을 나왔을 때는 밤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며칠간 함께한 것도 정이라고, 서련은 밥이나 같이 먹자는 로운과 원호의 제안에 그 길로 다 함께 술자리 겸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고깃집을 찾았다.

물론 서련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못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진이 있어서인지 술이 들어가지 않았다. 애초 술은 마신다고 했어도 분명 하진이 말렸을 것이다.

“서련 형, 어때요? 같이 하니까 좀 재밌죠?”

하진과 원호와 소주잔을 부딪치던 로운이 씩 웃으며 물어왔다. 고기를 꼭꼭 씹던 서련은 다 삼킨 후에야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재밌었다. 혼자만 하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에, 많은 사건사고를 겪고 있어서인지 하루하루가 지루하지 않았다.

이렇게 재밌게 논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여간, 개기는 새끼들은 매가 약이라고, 후드려 패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다굴 맞고 주춤거렸던 새끼가 말은 잘하네. 컨이나 키워, 발컨 새꺄.”

“하, 지는. 죽을 뻔한 거 구해 줬더니, 다 지 덕인 줄 알지.”

“아 킬레아 새끼만 아니었음 내가 MVP인데, 하….”

“씹, 여기서 킬레아가 왜 나오는데.”

문제는 여기 와서도 서로 물고 뜯는 걸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매번 이런 식인지, 날카로운 말에도 서로는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잔을 짠 부딪치고 원샷.

“형 그래도 고기는 좀 드시네요? 밥 시켜줄까요?”

“괜찮아.”

다 익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씹으며 서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하진이 점원을 불러 냉큼 공깃밥과 반찬을 추가 주문했다.

“먹어. 저녁 안 먹어서 배고프잖아.”

“너희는 그럼 왜 안 먹어.”

“저 새끼들 신경은 왜 쓰는데. 지들이 먹고 싶음 먹겠지.”

하진은 익은 고기를 서련의 앞에 놓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실 배야 고프긴 했지만, 어째 혼자만 식사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운과 원호는 술잔을 흔들며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저희는 술이 밥이라서요, 하하.”

“아니면, 서련 형도 어떻게 한 잔 드려요?”

“안 닥치냐?”

원호에게 곧장 하진의 무서운 눈빛이 쏟아졌다. 원호는 개구진 표정으로 몸을 깔짝대며 하진의 약을 바짝 올렸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신호였다.

“저건 씨발, 목숨이 열두 개지.”

“어쩔. 야, 솔직히 서련 형이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 왜 네가 참견이야.”

“자자, 고기나 구우시죠? 서련 형 먹여 살리셔야죠, 개하진씨?”

“내가 구울게. 하진아, 그거 줘.”

“형, 형! 내버려둬요. 성하진 이럴 때 아니면 손도 까딱 안 해요. 형 있으니까 하는 거지, 평소엔 저희가 다 한다고요. 이럴 때라도 부려먹어야지, 버릇 나빠져요.”

하진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욕을 짓씹다가 서련이 집게와 가위를 가로채려고 하자, 냉큼 고기를 뒤집어 굽기 시작했다. 평소 안 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능숙한 솜씨였다. 그러나 그만큼 치사하게 나갔다. 자기가 구운 고기를 한 점도 빼놓지 않고 전부 서련의 앞 접시에 담고 로운과 원호에게 빈 접시를 내민 것이다.

“…저 새끼 어떻게 못 죽이냐?”

“이 개하진 새끼는 도덕성이라는 게 없는 듯?”

“좆까. 처먹고 싶으면 직접 굽든가.”

“하진아, 그만해.”

결국 보다 못한 서련이 하진의 손에서 가위를 빼앗았다. 그리고 제 앞에 수북이 쌓인 고기를 로운과 원호에게 내밀었다.

“괜찮아요, 형. 저희는 형 먹는 모습 보러 온 거예요. 고기야 뭐, 술자리 마다 먹는데요. 저흰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밥 나왔네. 형, 밥하고 드세요.”

원래라면 서련이 챙겨 주는 게 맞는데, 어째서인지 정반대가 되어 되레 동생들에게 챙김만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하진은 이 와중에도 꿋꿋이 서련의 앞으로 고기와 반찬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걸 본 서련은 결국 고기와 함께 밥을 퍼먹어야 했다.

“모자라면 더 얘기해.”

그렇게 말하면서 하진은 정작 고기 한 점 입에 안 대고 있었다. 서련은 제 앞에 있는 고기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통통한 걸 하나 집어 들고 하진을 불렀다.

“하진아.”

잔을 들어 입가에 대던 하진이 뭐냐는 듯 서련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서련은 곧이어 하진의 입가에 고기를 가져다 댔다. 하진의 뒷목이 뻣뻣이 굳었다. 그러나 곧 입을 열고 고기를 받아먹었다.

서련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통통한 고기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맞은편에 있는 로운과 원호에게 향했다. 그러나 앞으로 향하던 서련의 손목이 그대로 잡히고 고기는 다시 하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하진이 도중 낚아채 받아먹은 것이다.

“저 새끼들을 왜 줘. 줄 거면 내놔.”

“성하진, 너 이거 안 놓지.”

몇 번 더 시도해봤지만, 그때마다 하진이 족족 뺏어가 먹은 탓에 서련은 결국 포기하고 제 식사를 챙길 수밖에 없었다. 로운과 원호는 어딘지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화제를 바꿔 대화를 이끌어갔다.

“아, 맞다. 오늘 영상 찍은 거 서련 형도 나왔던데 어떡할까요? 원본 드릴까요?”

로운의 말에 서련의 어깨가 흠칫했다. 깜빡 잊고 있었다. 설마 그대로 올리는 건 아닌지, 서련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서련의 속을 읽은 건지 로운은 걱정 말라며 하하 웃었다.

“걱정 마세요. 영상 올릴 때, 그 사장님 있죠? 그 형한테 제대로 편집해달라고 했어요. 형 얼굴 안 나올 거예요. 확실히 당부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원본은 됐어.”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서련은 흐리듯이 뒷말을 이었다. 보고 싶긴 한데, 그건 로운이 운용한 컨을 보고 싶은 거지 제 모습이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퍽 잘난 얼굴도 아니었고.

서련이 수저를 내려놓자, 옆에서 고기를 열심히 굽던 하진의 미간이 씰룩 움직였다.

“더 먹어. 뭐, 얼마나 먹었다고 벌써 수저를 내려놔?”

“하진아.”

“왜 뭐. 이번엔 안통….”

“전화 오는데.”

하진의 시선이 곧장 테이블 한쪽에 놔둔 제 핸드폰으로 향했다. 화면에는 ‘아버지’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하진의 표정이 생생히 구겨졌다. 그러나 딱히 피하지 않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털고 일어났다.

“잠깐 전화 받고 올 테니까, 이거 먹고 있어. 다 먹어.”

이걸 어떻게 다 먹어. 하진은 고기를 떨떠름하게 보는 서련에게 한 번 더 당부를 한 뒤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서련은 고기를 로운과 원호에게 슬쩍 내밀었다.

“…좀 먹어 줄래…?”

부탁 어린 말에 로운과 원호는 시원하게 웃으며 고기를 냉큼 가져갔다. 마치 기다렸다는 모습이었다. 이상하게 하진이 없는데도 어색함이 없었다. 물론 대화를 이끄는 건 서련이 아니었다.

“저 개하진 놈이 못살게 굴면 얘기하세요, 형. 저희 집에 제가 초딩 때부터 모셔놓은 야구배트 하나 있거든요? 성능 개 좋아요.”

“야, 야. 성하진 맷집 존나 좋아. 저번에 내가 골프채로 맞다이 떠봤는데, 멍도 안 들어. 나는 씨발 그때 일주일 동안 허리를 못 펴고 살았는데.”

“하진이가 때린 건 아니지…?”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장난으로 골프채 가지고 서로 검도 좀 한 건데 무리해서 허리 좀 나간 거예요. 일방적으로 막 맞고 그런 게 아니라. 하진이가 막 나가는 거 같아도 보기와는 다르게 꽤 이성적인 놈이라, 이유 없이 남한테 피해 끼치고 그러지는 않아요.”

반대로 말하면, 이유가 되면 폐를 끼친다는 소리였다. 서련의 표정이 무거워진 걸 눈치챘는지, 로운과 원호는 손까지 동원해 하진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친구라고 변호하는 걸 보니, 그렇게 앙숙이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저놈은 지가 세상 최고라 남한테 관심도 없어서 안 건들면 얌전해요. 그래도 자기 사람들한테는 나름 잘하는 편이고.”

“성격이 좀 개 같긴 해도… 저희 중에서는 가장 노력파고. 근데 또 집념은 개 쩔어요.”

“야이 씨, 저건 집념이 아니라 집착이야. 뭐 하나 붙잡으면 끝장 봐야 되고. 아, 씨발 말하니 웃기네. 형, 하진이 새끼가요 신입생 때 엠티에서 복학한 선배랑 술배틀 뜬 적이 있거든요. 근데 저 새끼가 그거 지기 싫다고 궤짝으로 마셔가지고 삼일 동안 앓아누웠었어요.”

“근데 그때 기어 다니면서도 지 멀쩡하다고 아주 객기를 부리는데 결국 응급실 실려가고 장난 아니었어요. 그때 저희가 저놈 기절한 거 사진찍고 동영상까지 다 찍어서 동창들한테 싹 돌렸는데, 저희 죽인다고 일주일 동안 온 동네 쑤시고 다녀서 저희 한동안 첩보예능 찍었었다니까요.”

“결국 걸려서 죽빵 맞긴 했는데, 제 하드에 아직도 그 사진 있어요.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제 보물 1호입니다.”

그 당시를 떠올린 건지 로운과 원호는 중간중간 낄낄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기분 좋은 추억이 느껴지는 모습들이었다. 서련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상 속 얘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문득 부러워졌다. 하진과 그런 추억을 나눈 로운과 원호가.

“…몰랐어.”

서련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웃음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웃어주는 게 나았는지, 그냥 맞장구를 쳐주는 게 나았는지 헷갈렸다. 하진은 서련에게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항상.

“하진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로운의 시선이 고깃집 밖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하진의 등으로 향했다. 로운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로운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련 형.”

서련의 시선이 로운에게 향했다. 화로의 열기 때문인지 서련의 모습이 어딘지 위태롭게 로운의 시야에 들어왔다. 로운은 쓴웃음을 한 번 짓고 서련의 눈을 보며 얘기했다.

“연락해도 돼요?”

“야, 이로운.”

“저, 형 핸드폰 번호 알고 있어요. 솔직히 그냥 연락할 수도 있는데… 허락 구하는 거예요. 친구로서…. 어때요?”

“야! 너 하진이가 알면…!”

“…해도 돼.”

로운과 원호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놀란 이유는 서로 같았다. 서련의 표정은 차분했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채였다. 일견 로운이 이런 말을 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련은 하진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해도 돼.”

딱 여기까지만. 그럼 되지 않을까. 이 관계를 끊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하진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모두와 어색하지 않게 함께하고 싶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하고 싶은 욕심. 그게 서련을 대답하게 했다. 그러니까 딱 이 정도.

“그것까지라면 괜찮아.”

“알았어요.”

로운은 빙긋 웃었다. 선이 그어진 말에도 그는 만족한 듯 웃었고,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하진이 통화를 끝내고 들어온 건 서련이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였다. 원호만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

오락가락하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인지, 적응되지 않은 추위가 찾아온 느낌이었다. 서련은 뺨에 닿는 차가운 바람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집에 가는 길이 아주 고역이었다. 그에 반해 하진은 술을 마셔서인지 끄떡도 없는 모습이었다.

“따뜻하게 입고 오든가, 혼자 바들바들 떨고 있어.”

어김없이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서련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뭐라 한 마디 해주려는데, 엇갈려 지나가는 사람과 그대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황해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잊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서련의 시선이 곧장 아래로 내려앉았다. 하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 그런지,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더 짙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면 마주치는 시선들. 그런 게 싫었다. 상대방 얼굴에 새겨지는 감정이 낱낱하고 선명해서. 때문에 서련의 시선은 늘 아래였다. 부자연스럽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며 걷는 게 일상이었다.

지금처럼.

그러나 이번만큼은 조금 달랐다. 말없이 걷던 서련의 머리 위로 불쑥 모자가 씌워졌다. 패딩 뒤에 달린 모자였다. 앞이 안 보일 만큼 푹 눌린 모자 위로 하진의 손길이 느껴졌다. 시야가 가려지자 시선들도 가려졌다.

“손.”

모자 아래로 겨우 보이는 시야에 손이 불쑥 들어왔다. 서련과는 여러모로 다른 손이었다. 천천히 뻗어 잡자, 깍지를 꽉 끼고는 제 외투 주머니로 서련의 손을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평소보다 느린 보폭으로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서련은 아무 말 없이 시야에 보이는 하진의 발을 쫓아 움직였다. 차가운 공기에 숨통이 트였다. 깍지 낀 손이 서련의 손을 간지럽게 훑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편안해진 느낌과는 별개로 서련은 무거운 마음을 전해야 했다. 어쩌면 하진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진아.”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도 서련은 다시 한번 하진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뒤늦게야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운이랑… 연락해도 돼…?”

깍지 낀 손 안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진이 자신의 친구를 서련과 차단한 건 이런 일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련도 알고 있었다. 호기심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서련에게 늘 호감 이상의 감정을 표했으니까.

서련은 그게 참 싫었다.

“그냥… 그 정도만.”

딱 그 정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포함해 그렇게 말했다.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진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길을 걸을 뿐이었다.

“…해.”

겨우 집 앞에 도착해서야 하진이 입을 열었다. 고민의 흔적이 많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괜찮으니까… 연락해.”

서련은 모자를 살짝 들추고 하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확인하기도 전에 어깨가 잡히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돌려졌다. 눈앞에 있는 건 오피스텔 입구였다. 등 뒤로 들어가라고 떠미는 손길이 느껴졌다.

“먼저 들어가. 나는 좀 더 나중에 들어갈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서련의 등을 떠밀던 손길은 떨어져 나갔다. 서련이 뒤를 급하게 돌아보았을 땐, 이미 어딘가로 성큼성큼 향하는 하진의 뒷모습만 시야에 떠올라 있었다.

서련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자리에서 발을 떼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하진은 오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거겠지.

늘 그랬다. 어떤 행동에 대한 대가는 후회처럼 따라왔다. 어떻게 해 볼 생각이 없다고 말했던 과거의 서련과 딱 이 정도라고 말한 오늘의 서련이 하진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다는 것도, 서련은 다 알고 있었다.

“하아….”

뭘 해도 똑같은 결과라는 것만 배웠다. 서련은 깊은 한숨과 함께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며칠 함께 들어오던 게 익숙해졌다고 어두컴컴한 곳을 혼자 밟으려니 춥게 느껴졌다.

서련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진이 부디 일찍 들어오길 바라며 말이다.

***

서련이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마주한 건, 역시나 갑갑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는 서련의 허리를 꽉 틀어 안고 있는 팔뚝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쩐 일로 이렇게 푹 자는지, 아직 꿈나라 계시는 하진의 모습이 보였다. 서련의 어깨에 얼굴을 박고 잘 자는 게 아주 야밤에 들어온 듯했다.

“술을 또 얼마나 퍼마시고 왔길래….”

허리를 빼보려 했지만, 역시나 빠지지 않았다. 아니, 몸을 비틀 때마다 더 조여드는 게 심상치 않아 결국엔 포기해야 했다.

서련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놔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홀딩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해봤지만, 깨끗했다. 그걸 보자 겨우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스치듯이 떠오른 감정은 안심이었다.

“하진아.”

“음….”

“하진아, 일어나봐.”

“아, 씹….”

“성하진.”

이젠 아예 욕까지 하며 잠꼬대를 부려대는데, 팔을 툭툭 치고 팔꿈치로 배를 찔러봐도 소용없었다. 서련은 결국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 물컹거리는 거.

조심히 손을 뒤로 뻗자 단단한 복근이 만져졌다. 게다가 웃통은 또 벗고 있기까지 했다.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서련은 눈을 질끈 감고 그 아래로 손을 더 비집어 넣었다. 제발, 제발 하는 심정으로 손을 내리는데 역시나 손끝에 물컹한 게 닿자마자 손목이 그대로 잡혔다.

그리고 그날과 똑같은 말까지.

“…뭐하는데.”

확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 뒤쪽에서 바로 들려왔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막 일어나 잔뜩 좁아진 눈매가 서련을 마주해왔다. 서련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하진은 서련을 다시 꽉 끌어안았다.

“좀 놔 봐, 하진아.”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평소엔 벌떡벌떡 잘 일어나기만 하더니, 오늘은 어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서련은 하진이 몇 시에 들어온 건지 궁금해졌다.

“너 몇 시에 들어왔어.”

“…알았어…. 다 해줄 테니까….”

말이 안 통했다. 서련은 한숨을 내쉬고 고민에 잠겼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10시를 넘기고 있는 시곗바늘이 보였다. 이대로 잡혀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자세가 상당히 불편한데다 하진이 언제 일어날지 지금은 짐작도 안 됐다.

결국 서련은 살살 달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하진아, 꿀물 타줄게.”

“…….”

“싫으면 뭐….”

처음엔 반응이 없더니, 안 해줄 것처럼 구니 허리를 감고 있던 힘을 탁 풀었다. 힘이 풀리자마자 서련은 냉큼 일어나 근처 의자에 걸어놓은 카디건을 입고 방을 나섰다. 밤에 온도를 낮추고 잤더니 상당히 추워져 있었다.

거실로 나와 창밖을 보자 그래도 하늘은 쾌청한 게, 햇볕만큼은 따뜻해 보였다. 서련은 일단 낮췄던 집안 온도를 올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끓였다. 그리고 물이 끓을 동안 우유를 꺼내 한 잔 마셨다.

서련이 꿀물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하진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세상모르게 자는 모습이 지나치게 곤해 보여서, 서련은 깨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꿀물은 책상 위에 방치되었다.

그렇게 속상했나 싶었다. 아침만 되면 눈을 번쩍 뜨던 애가 저렇게 될 때까지 마실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마셔댄 건지, 물어보기도 겁날 정도였다.

혼자 뭘 하기도 그래서, 서련은 조용히 컴퓨터를 부팅했다. 이 김에 에르덴 홈페이지에 들어가 밀린 게시판을 훑어볼 생각이었다.

워낙 사건사고가 많은 곳이라 에르덴 홈페이지의 메인은 늘 시끌벅적했다. 비단 메인만 그런 게 아니라, 게시판 자체가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역시나 오늘도 홈페이지에 접속하자마자 여러 재밌는 상황이 메인에 게시되어 있었다.

서련은 메인 게시글을 쭉 훑어보다 ‘묵요 영상’이라는 글이 있는 제목을 클릭해 들어갔다. 그러나 스크롤을 내릴수록 서련의 표정은 조금씩 기묘해졌다.

게시글에는 영상에 대한 얘기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당연히 묵요의 컨에 대한 얘기가 태반일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댓글란에 올라온 말이라곤 죄다 영상에 나온 ‘인물들’에 대한 언급뿐이었다.

서련의 시선이 쭉 내려가다 ‘몰렸다’라는 말에서 멈추었다. 서련의 눈이 차분히 깜빡거렸다.

“영상이 대체 어떻길래….”

멍한 표정으로 동영상을 찾아 들어가자, 그 아래에도 ‘ㅋㅋㅋㅋ’가 난무하고 있었다. 서련은 일단 영상을 클릭해 재생시켰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조용히 시청했다. 처음엔 별다를 게 없었다. 카메라가 너무 흔들려 어지러운 것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가만히 보다 보니 나중에는 모니터와 키보드 위를 안정적으로 오가며 유저들이 원하는 부분을 잘 비춰주었다.

문제는 서련이 화면에 등장하면서였다. 카메라가 정면으로 비춘 곳에는 눈코입이 주먹 크기로 몰린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을 동안에도 하진은 깨지 않았다.

“이거…. 하하… 뭐야….”

배가 아플 지경이 되어서야 다시 화면을 보는데, 그때 서련의 시선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카메라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운의 뒤를 비추면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는 장면이 잡힌 것이다.

벌떡 일어난 사람은 천천히 앉았다가 조금 뒤에 다시 벌떡 일어나 로운이 있는 곳을 한 번 보고 다시 천천히 앉았다. 세 번 정도 그렇게 반복하자 카메라는 다시 로운의 모니터 화면을 비췄다.

문제는….

“…쟤 같은데.”

아무리 봐도 성하진 같달까. 서련의 시선이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하진의 얼굴로 옮겨졌다. 아무리 봐도 하진과 비슷했다. 어제 무슨 옷을 입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추측은 어려웠지만, 저 단단한 실루엣이나 체격이 딱 성하진이었다.

서련은 다시 처음 들어갔던 게시글을 찾아 댓글을 쓱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킬레아’가 나온 부분에서 잠시 멈추었다.

“음….”

서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옆에 놓아둔 컵을 들어 홀짝 들이켰는데, 뒤늦게야 그게 하진의 꿀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혀끝에 퍼지는 달달함이 조금 강했다. 하진이가 달다고 투덜거릴 맛이었다. 서련은 생각 없이 다시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추워서인지, 꿀물은 그사이 미지근해져 있었다.

이러다 제가 다 먹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어서, 서련은 하진이 일어났을 때 바로 마실 수 있도록 침대 옆에 있는 탁상 쪽으로 옮겨놓기로 했다.

물론 따뜻하게 다시 타다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깨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컵을 들고 일어난 건데, 설마 거기서 발끝이 꺾일 줄이야.

고작 몇 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하필 발끝이 둔덕에 걸린 것처럼 땅을 스쳐 꺾이는 바람에 서련의 몸도 앞으로 휘청 넘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어떻게 컵만은 안 놓치겠다고 꽉 잡고 있었는데, 그 안에 든 내용물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로 촤륵-

“…….”

잘 자고 있는 하진의 얼굴 위로 정통으로 엎어버렸다. 아니, 뿌려버렸다.

하진의 몸이 움찔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물벼락은 너무했는지, 웃음소리에도 깨지 않았던 하진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하진은 꿀물로 흥건한 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 시선을 돌려 바닥에 넘어진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는 서련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상황파악을 마친 하진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자는 하늘에 물벼락이었다.

***

“…괜찮아?”

“안 괜찮으면. 앞이나 똑바로 보고 걷지?”

아침에 사고를 단단히 친 덕분에, 서련은 아침부터 이불 빨래를 해야 했다. 물론 하진도 끈적한 꿀물을 씻는다고 씻은 지 두 시간 만에 다시 욕실로 직행해야 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으로 나와 추리닝 바지만 대충 입고 밥을 하는데도 벌려놓은 게 있어, 서련은 뭐라 말도 못 했다. 그 와중에도 깔끔하게 차려진 아침에서는 정성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피시방에 간다고 집을 나와 함께 걷는 중이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넘어지니까 제대로 걸어.”

도통 앞을 볼 생각이 없는 서련의 작태에 결국 보다 못한 하진이 서련의 손을 낚아챘다. 냉큼 잡아 깍지까지 끼고 다시 제 외투 주머니 안으로 끌어넣는데, 덕분에 뭐라 말도 못 하고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다친 데는.”

서련은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서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진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혹시 꿀물을 엎을 때 넘어진 걸 물어보는 건가 싶어서, 서련은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하진의 손안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없는데.”

“그럼 됐어. 귀찮으니까 더 이상 그 얘기 꺼내지 마.”

잡힌 손을 슬쩍 빼보려 했지만, 역시나 빠지지 않았다. 서련은 바닥을 보고 걸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꿀물이 식어 미지근했다는 점이랄까. 덕분에 하진은 해장도 제대로 못 하고 집을 나와야 했다. 울렁거리는지 밥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꿀물은 짜증 났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집에 들어와 잔 게 불과 두 시간 전이라는 건, 집을 나서면서 듣게 되었다. 그런데도 겉보기엔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게, 이게 다 유전자의 우월함인가 했다. 서련이었다면 지금쯤 초죽음 상태였을 테니.

“잠깐 카페 좀 들러.”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하진이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는 대로변에 있는 카페였다. 들어가자마자 하진은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핫초코 한 잔을 주문했다. 한낮이었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뜸한 시간대였다.

서련의 시선은 여전히 조금 아래였다. 혹시나 사람들이 보기라도 할까, 하진에게 잡힌 손을 빼려 해봤지만 날카로운 말투에 도로 얌전해져야 했다.

“뭘 잘했다고 난리야.”

난리까지야…. 그냥 손 한번 빼려 했던 건데, 으르렁거리는 폼이 손을 빼면 아주 잡아먹을 기세였다. 결국 서련은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어야 했다. 힐끗힐끗 보는 종업원 시선은 덤이고.

피시방에 가서 마실 생각인 듯, 하진은 음료가 나오자 캐리어에 담아 들었다. 그리고 서련의 손을 슬쩍 당기며 몸을 돌려 성큼 나서는데, 주문을 하러 다가오던 손님과 동선이 겹쳐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제법 세게 부딪친 듯, 상대측에서 곧바로 고양된 목소리를 쏟아냈다.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 씨발.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련의 온몸이 뻣뻣이 굳어졌다. 동공이 급격히 팽창하고, 머릿속과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울려댔다. 숨이 턱 막히고 손끝이 잘게 떨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곧이어 수백 번, 수천 번 반복 재생되었다. 거짓말 같은 상황.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서련은 시선을 끌어올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올리자 하진의 어깨 너머로 빛바랜 듯 색이 옅은 한 남성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눈을 깜빡인 순간 사내의 색깔은 더없이 진해졌고, 선명해졌다. 서련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내는 어깨를 부딪친 게 불쾌한지, 제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무서운 기세로 하진을 쏘아보는데, 뭐 때문인지 되레 퍼뜩 놀라 뒤로 성큼 물러났다.

“너, 너…!”

서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내는 어딘지 공포에 물든 모습이었다. 여기저기를 오가던 시선이 어쩌지 못하고 하진의 뒤에 서 있는 서련에게 향했을 때, 서련의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그리고 완력에 이끌려 카페 입구로 끌려갔다. 손은 아직도 하진의 손안에 꽉 잡힌 채였다.

얼핏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사내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들은 말 때문이었다.

“…여서련…?”

멍한 듯한 말끝에 묻어난 게 그리움이었는지, 원망이었는지 혹은 단순한 놀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서련은 단지 목에 힘을 주고 실수로라도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을 뿐이다. 그리고 태연함을 가장하고 걸었다.

그런데도 손 안의 떨림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하진은 카페를 나와서도 한동안 끌어당기는 힘을 풀지 않았다. 성큼성큼 향하는 곳은 피시방의 반대 방향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서련이 하진의 팔을 끌어 잡았다.

“하진아.”

그제야 하진이 우뚝 멈춰 섰다. 움찔거린 것도 같았다. 하진의 시선이 천천히 뒤로 향했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서련이 시선을 내린 채 서 있었다.

“…시선 올려. 네가 왜 시선을 내리고 다녀야 되는데. 왜 네가 그러냐고. 네가 뭘 잘못했는데.”

낮았지만, 분노가 잠긴 목소리로 하진이 짓씹듯이 읊조렸다. 그 말에 서련의 시선이 올라갔다. 차분한 시선은 곧장 하진에게 향했다.

“나 아무렇지도 않아.”

서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진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하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서울 정도로 똑바로 서련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련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이번엔 미소가 없었다.

“추워서 그래. 가서… 따뜻한 거 마시면서 놀면… 괜찮아질 거야.”

떠들썩한 분위기로 이 기분을 지우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우울한 기분을 티 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거기에 한몫했다. 하진의 손을 살살 쓸자, 힘이 잔뜩 들어가 핏줄이 툭 불거진 게 만져졌다.

“…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서련은 앞장서서 걸었다. 꽉 쥔 손을 이끌자, 뿌리박힌 것 같던 하진의 발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이끌자 하진의 발걸음이 온전히 떨어졌다.

서련은 한숨으로 기분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지내고 싶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뺨을 훑는 바람처럼 스쳤다. 그런데도 제 손을 놓지 않고 꽉 잡은 하진의 손 때문인지, 제법 견딜 수 있었다.

추운 길을 뚫고 피시방에 도착했을 때, 서련은 이곳에 온 제 선택이 옳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로운과 원호를 보자 무거웠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게, 표현하기 힘든 안도감을 느꼈다.

“서련 형, 밖에 존… 겁나 춥지 않아요? 와, 바람이 무슨 칼바람인 줄.”

“개하진님, 서련 형 목도리 좀 사주세요. 넌, 씨발 덩치가 있어서 칼바람도 막겠지만, 형은 민들레거든? 아니면, 형 저 집에 목도리 많은데 좀 줄까요? 아니다. 제가 그냥 하나 사줄게요, 흰색으로다가.”

“아니. 음… 나도 있어. 있을 거야….”

“꺼져, 씨발. 아침부터 왜 찝쩍거리고 지랄들이야.”

“아예, 좆까쇼. 형 빨리 들어와요. 절미들이 형 안 온다고 난리 났습니다. 이것들을 확 그냥 다 죽일까 하다가 형 생각해서 참았어요. 이 대인배 같은 심성, 크으.”

“그래도 절미들 전투력이 한가닥해서 내가 살려둔다. 애들이 참 참신해서 좋아. 길 가다 시비도 걸고 말이야.”

“이제 컨만 좀 키우면 되겠네. 스파르타 지옥 버전으로 좀 가르쳐볼까.”

킥킥거리며 떠드는 로운과 원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련은 이제는 지정석 느낌이 된 자리에 앉았다. 하진과 얽혀있던 손가락도 그제야 스르륵 풀렸다. 컴퓨터 책상 위에는 역시나 바나나 우유가 놓여 있었다.

하진은 그걸 옆으로 쓱 밀어 넣고 사온 핫초코를 서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천천히 들이켜자 미적지근한 온도의 핫초코가 달짝지근하게 입안을 감돌았다. 오늘 길에 식었는지, 음료는 살짝 따뜻한 정도였다. 그래도 마시니 추위가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왜, 안 따듯해?”

“아니, 따뜻해.”

서련은 잔을 꾸준히 기울이며 에르덴을 찾아 들어갔다. 애초 서련은 따뜻한 것보다 단 걸 더 좋아해서 온도에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맛만 있으면 된단 소리였다.

핫초코를 손에서 놓지 않는 서련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든 건지, 하진도 얼음이 동동 띄워진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를 부팅했다.

-접속시간 PM. 12:15 / 남은 시간은 689시간입니다.

-신성의 축복을 그대에게! 에르덴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모든 던전의 입장 시간이 리셋되었습니다.

-일일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눈설’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베르르: 키키형이다! 키키혀엉 형 영영 접는줄 알고ㅠㅠㅠㅠㅠ]

[길드/순한양: 형형! 형 그딴 건 신경쓰지 마여! 아니 그리고 누가 우리 몰래 저 미친 형들이랑 놀으라고 했어여ㅡㅡ]

[길드/묵요: 절미들 그렇게 막 형들 까대고 그러면 쓰나ㅎ]

[길드/호백조: 쩔미들 키키형 왔다고 형들 까는 거야?^^ 혼나볼까?]

[길드/순한양: 광견이 글쎄 그렇게 천재견이래요. 개모나 세상에]

[길드/베르르: 크으, 광견하면 그 얕볼수 없는 지랄견 스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형님덜? 그 아무도 못건드는 멋찜 리스펙 크으...]

[길드/눈설: ㅈㄹ들을 해라 아주]

[길드/키키아: 베르랑 양이 안녕. 근데 형이 왜 접어]

[길드/베르르: 형 저흰 다 알아요]

[길드/순한양: 그 영상 조작이져 형? 너무 티 나잖아요. 아니 사람 얼굴이 어떻게 주먹만큼 쏠렸어!]

[길드/베르르: 설령 그렇다 해도 외모가 세상 전부는 아니에요! 근데 우린 저게 형이라고 믿지 않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아무래도 베르르나 순한양 둘 다 메인에 뜬 ‘묵요 영상’을 본 듯했다. 거기다 메기니 뭐니 하는 댓글까지.

상심해서 접진 않을까 조마조마했나 본데, 생각보다 서련은 그 댓글들에 타격을 입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재밌기까지 했다.

“이 새끼들이 아까부터 영상, 영상 하는데 무슨 영상을 봤다고 자꾸… 아, 시발…. 아재형이 영상 올렸나 보다.”

의외의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아직 영상을 보지 못했는지, 로운의 말에 원호와 하진의 시선이 곧장 로운에게 몰려들었다.

“아, 나한테 허락받고 올리라니까….”

“야, 빨리 메인 가봐. 아까 보고 들어왔었어야 했는데 하, 씨….”

“내가 분명 편집해서 올리라고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몰려드는 사내들 뒤로 서련도 고개를 빼며 다가갔다. 로운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인 모두의 시선은 메인에 버젓이 뜬 ‘묵요 영상’으로 향해 있었다. 로운이 게시글을 클릭하고 영상을 재생하자, 주변은 곧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나 1분 20초 즈음, 서련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해졌다.

“씨발, 당장 안 내려?!”

“야, 야!”

“하….”

욕설을 내뱉는 하진부터 로운의 어깨를 때리며 난리를 치는 원호와 분노의 한숨을 내쉬는 로운까지. 영상은 서련의 몰린 얼굴이 정면으로 나온 상태에서 멈춰 있었다. 로운이 화면을 정지한 것이다.

아니, 뒤에… 뒤에 하진이 같은 애도 나오는데. 서련은 말할까 하다가, 하진의 귀신같은 표정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나름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위로 차 말을 툭 내뱉었는데, 그게 애들 입장에서는 또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나 보다.

“왜, 웃기잖아.”

곧이어 비글들의 황당한 시선이 서련에게 몰려들었다. 서련을 보며 죄다 콧등을 일그러뜨리는데, 딱 봐도 ‘너는 지금 이게 웃기냐?’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데 서련의 입장에서는 그게 또 나름 꽤 재밌는 볼거리라 안 웃을 수가 없었다. 물론 세 놈의 눈매가 일그러진 순간 멈춰야 했지만.

로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다가 카운터를 보고 있는 사장을 호출했다. 또 무슨 재밌는 일이 있을까 예상하며 훨훨 날아오던 사장은 저한테 꽂히는 매서운 눈길을 깨닫고는 몸을 슬쩍 물리며 불안하게 물었다.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보냐?”

“형. 다 필요 없고 이리 와 봐요.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봐요.”

로운은 살벌하게 웃는 낯으로 제 모니터 화면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사장은 슬쩍 다가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화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헉 하는 사장의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에는 누군가의 몰린 얼굴이 떠 있었다. 몰려도 아주 제대로 몰려 있었다. 그게 뭔지 깨달은 순간 사장은 답지 않게 하진과 로운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기 시작했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걸 보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아니, 이게 왜… 허, 참…. 아니, 로운아. 내가 소스 잘못 적용해서 그런 건 맞는데 바로 삭제하고 모자이크 처리된 걸로 올렸거든…? 아니, 근데 이게 왜 여기 올라가 있대? 진짜 형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눈에 힘 좀 풀어라. 형 심장 약해, 이놈들아.”

“아, 형! 내가 올릴 때 나한테 검수 받으라고 했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미안하다, 미안해! 형이 진짜 진심으로 미안하다. 아니, 내가 어쩌자고 저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놨대…. 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아, 저는 괜찮….”

“당장 삭제해요, 당장. 그리고 그냥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요.”

“형이 뭐… 해줄 건 없고?”

“하루에 2개씩, 바나나 우유 일주일치.”

“이거 순 양아… 알겠다, 알겠어. 아주 사람 죽이겠네, 이것들이. 아주 다 갖다 마셔라!”

일단 바나나 우유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서련은 몰래 픽 웃으며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뭐,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길드창에는 그 사이 베르르와 순한양의 위로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일단 그 모습이 서련이라고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길드/키키아: 음]

[길드/키키아: 진짠데. 형 저렇게 생겼어]

[길드/베르르: 아예. 전 그래봤자 안믿어여 형. 이미 조작인거 다른넘들도 다 암ㅇㅇ]

[길드/순한양: 형 저는 사실 저것보다 더 몰렸어여ㅎㅎㅎㅎ 신경쓰지 마세요ㅎㅎㅎㅎ]

[길드/키키아: 왜 메기 같아?]

[길드/베르르: 아니 누가 메기래요! 델꼬 와봐요. 아주 상놈의 색끼들이 눈깔이 삐었나 어떻게 저게 메기야. 사람이지 ㅅㅂ]

[길드/순한양: 형 저 닮은 심해어 있는데 보여드릴까여?ㅎㅎㅎㅎㅎㅎㅎ 세상의 온갖 희망을 다 얻게 될걸요?ㅎㅎㅎㅎㅎㅎㅎㅎ]

[길드/묵요: 자, 우리 절미들은 앞으로 키키형한테 메기라고 하는 색히들 있음 다 조져버린다. ㅇㅋ?]

[길드/베르르: 예압. 맡겨주시져]

[길드/호백조: 다 필요없고 니들이 최고다]

[길드/베르르: 그걸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알면ㅋㅋㅋㅋㅋㅋ어떡함?ㅋ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키키형ㅋㅋㅋㅋㅋㅋ 봤죠?ㅋㅋㅋㅋㅋㅋ 저희가 이렇습니닼?ㅋㅋㅋㅋㅋ]

그사이 나름 협상을 끝냈는지, 옆을 보자 자리에 착실히 앉아 채팅 중인 세 마리의 비글들이 보였다. 그러나 옆모습은 죄다 ‘한 명만 걸려라.’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서련은 음료를 마시는 척 웃음을 참았다.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베르르와 순한양한테 사실대로 조작이라고 할까 하다가, 서련은 그냥 관두었다. 어차피 현모도 안 해서 얼굴도 모를 테니.

[길드/베르르: 아, 형님들. 그거 들으셨어요? 개개넘들이 저희들한테 개발리고 르덴에 그~렇~게 민원을 넣고 있댑니닼ㅋ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하여간ㅋㅋㅋㅋ 조옷또 안되는 넘들이 딸리니까 징징징 도배때리고 민원넣고ㅋㅋㅋㅋㅋㅋ 하이고 좀 있음 광화문가서 시위라도 할 듯요?ㅋㅋㅋㅋㅋㅋ]

[길드/묵요: 아 그래서 대결권 지금 사용불가로 뜬건가보네]

[길드/호백조: 곧 패치하겠네]

로운의 말에 서련은 재빨리 인벤토리를 열어 대결권 사용 여부를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현재 대결권은 사용 불가 멘트와 함께 엑스 표시가 되어 있었다. 차후 업데이트 알림으로 알린다고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수정 패치를 고려 중인 듯했다.

그 전부터 민원이 들어와 고려 중이었던 건지, 개개길드가 분 단위로 찾아가 민원을 넣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버그 사항에 대해 조정 중이라면 대개 유저들에게는 희소식일 경우가 높았다. 실제로도 서련 역시 중복사용에 따른 1:100 시스템은 조정되길 바랐으니까.

[길드/베르르: 형님들 그리고 메인퀘 갱신 됐다는데 보셨씀요?]

[길드/호백조: 쩔미들 메인퀘는 다 깨고 얘기하는 거지?ㅋ]

[길드/순한양: 저흴 뭘로 보시고]

[길드/베르르: ㅋㅋㅋㅋㅋ 형님들은 뭐 아직이신가 봐여?ㅋㅋㅋㅋㅋ 하긴 뭐 누가 팟에 껴줘야 말이지ㅎㅎ 괜찮아여. 저희가 가드릴게여ㅋㅋㅋㅋ]

[길드/호백조: 얘네는 어떻게 된게 틈만나면 겨오르냐]

[길드/묵요: 어휴 옛적에 다 깼거든요 이 새1끼님들아]

[길드/베르르: 에이 걱정돼서 그르는거져 빅피쳐 몰라요? 그른것도 모르낰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이번에 나온 거 포스퀘던데 어떻게ㅎㅎㅎㅎㅎ 같이 가드려여?ㅎㅎㅎㅎ]

[길드/눈설: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이게ㅅㅂ]

[길드/묵요: 응그래 ^^ 우리도 니들 필요 없어 샊갸]

[길드/호백조: 키키형은 우리가 잘 모시고 갈 테니 니들은 잘난 니들끼리 잘 돌파하세요ㅋㅋ 키키형은 우리가 더 좋다는데 어쩌냐?ㅋ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허참ㅋㅋㅋㅋㅋ 키키형 저것들좀 빨리 강퇴시켜여 당장]

[길드/순한양: 형님들 저 심해어 같다고 그러는 거져?ㅎㅎㅎㅎㅎ 아놔 진짜 댁들이 온갖 희망을 다 얻으면 어쩌자는거?]

여기서 끼어들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 서련은 고개를 저으며 채널쪽 상황을 슬쩍 살폈다. 메인파티를 모집하는 글로 벌써부터 떠들썩해 있었다. 중간 패치라더니, 곧 대규모 패치에 앞서 테스트를 해보는 모양이었다.

‘포스퀘면… 쟁일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 팝업창을 닫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화면 하단의 메인 스토리북 이미지 위로 빨간색 따옴표가 떠 있는 게 보였다. 이 경우, 추가된 에피소드나 갱신된 에피소드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서련은 모든 메인퀘를 완료한 상태니, 아무래도 알림은 추가된 에피소드의 소식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스토리북을 클릭해 열어보자 메인 스토리 위로 ‘NEW’가 떠 있는 게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의뢰서와 함께 화면에 빼곡한 글이 떠올랐다. 그 아래에는 NPC 목록이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곧 비공정 전투가 이루어질 계획이니 NPC를 찾아가 출전 명령에 합류하라는 내용이었다. 찾아가라는 자의 신원은 ‘비파란’이라는 비공정 NPC 조종사 대원이었다.

서련은 일단 수락을 누르고 그 NPC의 위치를 지도상으로 확인했다. 신마제국의 수도 겸 모든 마을의 요충지인 ‘페디오스’의 비공정 갑판에 NPC의 출현소식이 떠올라 있었다. 출현 시각은 밤을 제외하고는 항상.

[길드/키키아: 일단 모두 퀘부터 받자]

왈왈 컹컹 신나게 서로 물어뜯고 싸우던 길드원들이 그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메인 퀘스트를 받고 비공정으로 향하자, 역시나 많은 유저들이 비공정 지대에 북적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여기저기 올라오는 외침을 보니, 전부 파티와 포스를 구한다는 말이었다.

서련은 일단 비공정 선착장 입구에 팔짱 끼고 서 있는 우락부락한 NPC에게 다가갔다. 머리 위에는 ‘비파란’이라는 이름과 함께 비공정 조종사 대원이라는 문구가 아래에 포괄되어 붙어 있었다.

황금빛 화살표가 뜬 걸 보니, 메인퀘의 중요 NPC가 맞았다. 재빨리 클릭하자, 화려한 영상과 함께 신성제국 쪽에서 비공정 전투를 준비한다는 중요 단서와 잠입을 나갔던 병사들의 모습이 일그러진 화면 속에 나타났다. 그 흑막에는 레비아탄들의 이간질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엇갈린 정황으로 신성제국과 신마제국의 오해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결국 그 오해가 전쟁의 서막으로 번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곧 전쟁 선포로 비공정이 띄워지게 될 거라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나버렸다.

그러나 그 뒤의 대화문에서 이번 퀘스트에 대한 본격적인 임무 내용이 밝혀졌다.

<이번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하네. 자네에겐 두 가지 임무 선택지가 주어질 것이네.

하나는 적의 비공정에 침투해 작전명령실에 있는 ‘비밀서류’를 빼돌려 오는 걸세. 하지만 조심하게나. 내 긴밀히 알아낸 사실인데, 우리 군에 스파이가 숨어있다고 하더군. 그들을 ‘색출’하는 것도 임무의 하나라네. 먼저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그리고 ‘비밀서류’를 획득하고 신호를 주면 소형 비공정을 하나 보내주겠네. 시간은 5분 정도 소요될 걸세. 그대까지 그 ‘비밀서류’를 반드시 사수하고 있게나.

또 다른 임무는 우리 비공정을 습격하는 일당들을 처리하며 우리의 ‘기밀서류’를 지키는 걸세. 이 경우 ‘기밀서류’를 획득 후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 임무완성이 완료될 걸세.

둘 다 쉽지는 않겠지. 스파이가 문제로군.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할 수만 있다면... 흠, 하여튼 무운을 빌겠네. 만약 실패한다면... 으음, 뒷일은 내 딱히 언급하진 않겠네. 그냥 목숨 부지하기 힘들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될 걸세.

힘든 싸움이 될 테니, 만만의 준비를 하고 모든 정비가 끝나면 나를 다시 찾아오게. 그곳으로 보내주지.

아, 자네가 팀을 직접 짜와도 되지만, 안되면 내가 현장에 있는 용병들을 추천해주지.>

말을 끝나자 화면 위로는 <들어가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서련은 일단 ‘아니오’를 클릭하고 뒤로 빠졌다.

[길드/베르르: 뭔 소리래]

[길드/순한양: 르넨넘들이 3줄요약을 모르시네]

[길드/묵요: 쟁 PVP야. 그리고 음 스파이 색출이 좀 애매하긴 한데, 이게 분명 조건이 나타날 테니 일단 들어가서 알아보고]

[길드/호백조: 문제는 인원인데]

[길드/순한양: 이거 랜덤되는데요? 걍 신청하면 랜덤으로 다른 팟이랑 짜집기 되는거 아님요?]

[길드/키키아: 상대 전력을 알 수가 없어서 그건 좀 감안하고 가야돼]

[길드/눈설: 일단 가. 가고 생각해]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니, 하진의 말대로 일단 가서 겪어보는 게 클리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설령 이번에 클리어를 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지형이나 유형 파악이 원활해 다음 수를 준비할 수도 있을 테고.

[길드/묵요: 그럼 일단 가는 걸로 하고]

-‘묵요’가 파티를 제안하였습니다. 수락 / 거부

서련은 수락을 누르고 파티에 들어갔다. 서련을 시작으로 다들 초대되어 곧 파티 정원이 꽉 찼다. 로운을 중심으로 한 6인 파티였다.

로운은 그 길로 바로 NPC 비파란에게 말을 걸어 입장 신청을 마쳤다. 곧이어 화면 위로 대기시간이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고작해야 1분. 1분 동안 팀을 탐색해 찾아주는 식으로 퀘스트가 진행되는 듯했다.

약 15초 정도 기다리자, 화면 위에 떠 있던 대기시간이 뚝 멈추고 입장 개시와 함께 선착장에 서 있던 파티원들이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캐릭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화면은 로딩화면으로 전환되었다.

그 짧은 시간을 틈타 서련은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 차갑게 식은 음료가 혀끝에 달달하게 퍼졌다. 음미하듯 혀를 굴리고 다시 꿀렁 마시자 음료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서련이 음료잔을 내려놓은 것과 화면이 밝게 전환된 건 거의 동시였다. 장소는 하늘을 날고 있는 비공정의 갑판 위였다. 바로 시작할 줄 알았는데, 앞에 책을 들고 서 있는 NPC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기시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역시 레이드네.”

누가 내뱉었는지 모를 말이 작게 맴돌았다. 모두의 예상대로 퀘스트는 레이드 타입이었다. 아마도 상대 종족과 싸워 이겨야 클리어되는 조건. 아니, 무언가를 먼저 차지하고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하는 조건이 붙은 하드타입 난이도로 말이다.

아마도 필드는 NPC 뒤에 투명하게 쳐진 쉴드 장막 너머일 가능성이 컸다. 희미하게 보이지만, 대기시간이 지나면 필시 선명해질 것이다.

서련은 화면을 쭉 돌려 포스로 역인 다른 파티쪽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잠시 동안은 동고동락해야 하는데, 직업이라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을 돌아본 순간 서련은 어깨를 흠칫 굳혀야 했다. 기민하게 알아차린 하진이 곧장 물어왔다.

“왜.”

“어… 아니.”

서련은 다시 화면을 돌리며 말했다.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던 하진은 곧 자기 모니터 쪽 화면을 돌아 상대 파티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오는 욕설.

“하, 걸려도 왜 이 새끼들이 걸려.”

“왜, 뭔데?”

“뭐 아는 놈들이라도… 아, 씨발.”

쏟아져 나오는 욕설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럴만했다. 포스로 묶인 유저들이 무려 서련네와 대대적으로 척을 진 그 ‘개개길드’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판 망했네. 서련은 한숨을 내쉬며 심드렁한 태도로 화면을 응시했다. 해볼 필요도 없었다. 저놈들이 그 기밀문서라는 것을 훔쳐도 문제고, 안 훔쳐도 문제였다.

-1분 뒤 전투가 시작됩니다. 전투준비에 앞서 전투원 모두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포스원의 주사위 숫자에 따라 선제공격 기회가 주어집니다.

화면에 거대하게 뜬 문구가 사라지자 곧이어 주사위를 굴리는 팝업창이 떠올랐다. 딱히 손대지 않아도 시간이 초과되면 자동으로 주사위가 던져졌기에 서련은 손대지 않고 상황을 차분히 살폈다.

화면 위로 인사 같지 않은 인사가 올라온 것도 그때였다.

[포스/개솔: 아오 ㅅㅂㅋㅋㅋㅋㅋㅋ 걸려도 하필ㅋㅋㅋㅋㅋㅋ]

[포스/종마: 니들 ㅅㅂ 똑바로 해라]

[포스/짖지마라: 오만피해 안입히면 다행ㅋㅋㅋㅋㅋ 뒤로 짜져서 구경이나 해 색끼들앜ㅋㅋㅋㅋㅋ]

[포스/상마족: 형들 나서는데 막 방해하고 그르는 거 아니다 ㅅㅂ 개처맞고 싶음 각잡고 덤비든갘ㅋㅋㅋㅋㅋ]

[포스/베르르: 어휴 우리 그쪽에 하등 관심 없거등요? 아주 지들끼리 소설을 쓰시네]

[포스/순한양: 왓? 방해?ㅎㅎㅎㅎㅎㅎ 니들이나 주둥이 꼬매고 다녀 메기 색끼들아]

[포스/케케신발: ㅅㅂㅋㅋㅋㅋㅋㅋㅋ 메기는 니 뒤쪽에 있는 넘이곸ㅋㅋㅋㅋ]

[포스/싱싱싱: 앙키얔ㅋㅋㅋㅋㅋ 미안하닼ㅋㅋㅋㅋ 얼굴이 그렇게 몰린지 모르고 형들이 나댔넼ㅋㅋㅋㅋㅋ 앞으로 안 나댈게 메기야?]

[포스/베르르: 니들 닭장가고 싶니?ㅎㅎㅎㅎㅎㅎㅎㅎ 지금 누구한테 ㅅㅂ 메기라고 씨부렁거린거? 색히들이 사람 눈깔이 아닌가]

[포스/종마: 아 시끄럽고 일단 방해만 하지 말라고 색끼들아]

[포스/눈설: ㅅㅂ 조까]

[포스/묵요: 피차 상황 같은데 걍 각자 놀지? 뭘 하라 마라야ㅅㅂ]

[포스/종마: ㅅㅂ색히들 드럽게 말안통하네 와ㅋㅋㅋㅋㅋㅋ]

[포스/상마족: 메기야 텨나오지 말고 니들끼리 놀아라. 이번판 지면 내가 니들 쓸러 다닐 테니까]

저렇게 말하는 거 보니 그래도 할 생각은 있는 듯했다. 서련은 손가락을 뚝뚝 풀고 마우스를 잡아 쥐었다. 남은 시간은 약 10초. 그 이후엔 이제 임무유형 공개와 함께 스타트 문구가 뜰 것이다.

약 3초를 남겨두고 모두는 싸움을 멈춘 채 풀도핑에 들어갔다. 서련도 킬리를 소환하고 만만의 준비에 들어갔다. 다들 아주 이를 갈고 온 듯, 평소 잘 쓰지 않는 주문서는 물론 버프와 공적 아이템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전투 준비를 알렸다.

화려한 스킬 효과음이 그친 건, 쉴드 장막이 풀리고 화면 위로 먹물처럼 번지는 문구가 떠올랐을 때였다.

-전투를 개시합니다.

-선재공격 임무 유형이 선택되었습니다.

-적을 없애고 비공정을 샅샅이 뒤져 ‘비밀서류’를 사수하라.

아무래도 이쪽이 주사위 숫자가 더 높게 나온 듯했다. 임무 유형은 선재 공격이 포함된 ‘비밀서류’를 사수하는 쪽으로 주어졌다. 전투 개시 메시지가 뜨자마자 갑판에 있던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재빠르게 튀어 나갔다.

[포스/묵요: ㄱㄱ]

[포스/상마족: ㄱㄱ]

그리고 서련도 즉시 파티원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갑판을 지나 비공정의 중앙 갑판에 다다랐을 때 모두는 최악의 난이도를 맞닥뜨려야 했다. 그건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포스/키키아: 음 아무래도]

[포스/키키아: 이번 판은 못깰거 같네요]

순식간에 앞서 달려가던 이들이 쏜살같은 속도로 서련을 돌아보았다. 다들 영문을 모른 채 서 있는 걸 보니 여간 당황한 게 아닌 듯했다. 서련은 전투 개시 순간부터 왼쪽 하단에 붉게 떠 있던 글씨를 보며 모든 이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포스/키키아: 아. 저는 제외고요]

그와 동시에 킬리가 튀어 나가 광역기 공격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소리와 함께 주변에 서 있던 모든 포스원들이 넉백을 먹고 죄다 뒤로 넘어졌다.

-신마제국의 ‘키키아-킬리’가 주변 유저들에게 광역기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키키아’가 스파이 신분을 획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키키아’가 일시적으로 적대 세력에 편입됩니다.

순간 하진을 비롯해 로운과 원호의 시선이 서련에게 다다닥 꽂혔다. 셋 다 똑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였는데, 멍한 표정을 보아 완전 얼이 나간 듯했다. 서련은 그들을 마주 본 채 제법 악당 같은 말투를 담아 말했다. 미소는 덤으로.

“덤비고 싶으면 덤비고.”

“…….”

“…….”

“…….”

제일 먼저 포기한 건 하진이었다. 손을 탁 놓고 물러난 하진은 모든 걸 포기한 모습으로 턱을 괸 채 커피를 들이켰다. 이번엔 로운과 원호의 시선이 하진에게 향했다. 아니, 승률이라면 목숨까지 걸 정도로 환장하는 놈이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러는 걸 보니 새삼 먹이사슬의 상위권자가 누군지 깨닫게 된다.

심지어는 그는 저를 쳐다보는 로운과 원호의 시선이 고까운지 되레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뭐, 씨발.”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짐승새끼를 피해 로운과 원호는 다시 제 모니터 화면으로 돌아왔다. 급격히 초췌해지는 그들의 모습이 현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혀, 형부터… 하하, 살아야죠.”

“서, 서련 형이라면 뭐….”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로운과 원호는 키보드에 결코 손을 대지 않았다. 끔찍이도 싫은 표정이었다. 어쨌든 서련은 말 한 마디로 한 번에 세 명을 K.O 시켰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존재하긴 했다.

[포스/베르르: 키키형? 형?ㅋㅋㅋㅋㅋㅋ 이 무슨 메기같은 짓?ㅋㅋㅋㅋㅋ]

[포스/순한양: 형ㅎㅎㅎㅎ 좝난하세역?ㅎㅎㅎㅎㅎㅎ이얗ㅎㅎㅎ 메기가 울고갈 상황이야ㅎㅎㅎㅎ]

서련의 입에서 프흐하는 웃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수틀리니 메기거리는 거 봐라. 이 얼마나 무서운 소린지, 서련은 뒤로 슬쩍 물러났다. 물론 킬리는 달랐지만.

-신마제국의 ‘키키아-킬리’가 괴수투척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베르르’에게 3598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키키아-킬리’가 극화의 불꽃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순한양’에게 4198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음, 역시 킬리밖에 없네.

[포스/베르르: 킬리얔ㅋㅋㅋㅋㅋ 너도 머머리 되고 싶니?ㅋㅋㅋㅋㅋ]

[포스/순한양: 우리 킬리킬리 메기 되고 싶구나?ㅎㅎㅎㅎ 한대 처맞으면 정신을 차리려낳ㅎㅎㅎㅎ]

“그놈의 메기, 메기 아주 지랄들을 해쌌네. 씨발, 뒤지고 싶나.”

잘 참고 있더니, 하진이 결국 메기 소리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앉아 으르렁거리는 게 다였다.

물론 베르르와 순한양만 난리가 난 것은 또 아니었다. 서련의 사역마인 킬리의 공격에 넉백을 먹고 넘어진 개개길드도 메기니 뭐니 온갖 동물들을 다 끄집어내 서련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서련은 베르르와 순한양을 킬리에게 맡기고 유유자적 개개길드에게 향했다. 그리고 넉백이 풀리기 바로 전에 ‘망령의 저주’를 사용해 개개길드의 6명 전부를 상태이상 괴수로 만들어 버렸다.

-신마제국의 ‘키키아’가 연쇄 폭격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종마’에게 2981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한명을 잡아 열심히 바르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킬리에게 열심히 후려 맞고 있는 절미들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태평히 바닥에 앉아 구경하는 세 명의 비글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갑 오브 갑질이었다.

이 괴기스러운 장면은 얼마 안 가 갑판 반대쪽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상대 종족에게 그대로 발각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신성제국 쪽 유저들은 덫에 걸린 쥐처럼 일제히 한 자리에 끼익 멈춰 섰다. 수를 헤아려보니 정확히 12명 그대로였다.

‘스파이는 선공팀에만 생겨나나 보네….’

슬금슬금 간을 재듯 주변을 깔짝대는 신성제국 유저들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조금 괴롭혀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임은 원래 힘들게 구르고 고생해야 제맛이다. 아니, 그게 게임의 묘미지.

이내 결단을 마친 서련은 개개길드에게 두 번째 상태이상 디버프를 걸며 입을 열었다. 아주 즐거운 어조로 말이다.

“하진아, 심심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진의 입매가 씩 올라갔다. 태평하게 앉아 있던 힐러가 다짜고짜 튕기듯 튀어나간 것도 그때였다. 순식간에 튀어가는 뒤로 로운과 원호 역시 따라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란 신성제국 유저들이 펄쩍 뛰는 건 아랑곳 하지 않고 하진은 그대로 스태프를 망치로 스왑하고 크게 휘둘렀다.

퍽, 하고 휘둘러진 전투망치를 시작으로 곧이어 3대 12의 막막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서련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뭐, 두당 여섯 명씩 맡으라는 말을 철썩같이 믿는 건 아니었고, 옆에서 신들린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를 실시간으로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포스/구렁이담: 키키야 키키야? 우리 같은편 아니냐?;;; 좀 도아줘봐라;;]

[포스/포도킹: 이건 또 뭔 아오ㅡㅡ]

[포스/거위알: 시벨넘들 짜고 치는 수작보소ㅡㅡ 아놔 저 앙키샛히를 ㅅㅂ]

[포스/키키아: 걱정마세요 음]

[포스/키키아: 어차피 제가 이겨드릴건데 좀 맞는거야 뭐]

[포스/담담이: 꺼져 샊꺄! 지가 처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ㅅㅂ 저게]

[포스/키키아: 어떻게 킬리 좀 보내드려요?]

[포스/구렁이담: 아냐... 앙키야 넌 그냥 고대로 있어... 형이 부탁하마... 나 너 무서워]

[포스/포도킹: ㅡㅡ 내가 ㅅㅂ 이번판 망했다 했지]

거 이겨준다니까. 앓는 소리를 내뱉는 신성제국 유저들의 신형이 하나둘 철퍼덕 엎어지기 시작했다. 서련의 시선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는 세 마리의 비글들에게 향했다. 눈밭에 풀어놔도 저렇게 좋아할까 싶을 정도로 신나게 베고 찌르고 때리는데, 양보해달라고 했을 때 얼마나 속이 쓰렸을지 아주 뼛속까지 와 닿을 정도였다.

[포스/종마: 이 **야 이제 니가 처맞아보자ㅅㅂ]

서련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세 번째로 쓰는 디버프 스킬이 저항으로 Miss가 떴기 때문이었다. 멍청히 주변을 굴러다니던 개개길드가 일제히 굽혀있던 몸을 세우고 좀비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남은 길드인원은 네 명.

서련은 이내 갑판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킬리를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제는 킬리를 따라 베르르와 순한양도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한 명씩 붙잡아 때리는 것도 네 명이면 어찌저찌 해보겠는데, 여섯 명이나 되니 도망 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이미 뒤통수를 쳐서 신성제국 쪽은 도와주지도 않을 것 같고,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는 베르르와 순한양을 봐서는 이미 눈이 돈 것 같으니, 아무래도 가장 최악의 상황이 된 듯했다. 혼자 싸워야 할 상황.

서련은 잠시 고민하다 신성제국 쪽 갑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서련에게 앙심을 품은 개개길드와 절미들이 일렬로 따라붙었다.

줄까지 맞춰 따라올 정도면… 아니, 대체 얼마나 억울했던 거야.

“도와줘?”

비공정의 중문을 지나 신성제국 쪽 스타트 위치인 갑판에 거의 도달했을 때였다. 옆에서 하진이 몸을 기울이며 물어왔다.

“어떻게?”

서련의 물음에도 하진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방법이 있긴 한지, 미소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고는 로운과 원호 쪽에 ‘준비해’라는 말을 돌리는데, 확실히 뭔가 있어 보이긴 했다.

그 의문은 신성제국 갑판에 도착하면서 풀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신성제국 쪽 갑판에 막 부활을 받고 일어나 쉬고 있던 신성제국 쪽에 서련이 킬리와 함께 난입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잘만 쉬고 있던 신성제국 쪽은 아주 난리가 났다.

[포스/구렁이담: 오지 마, ㅅㅂ 저리가라고!]

[포스/담담이: 앙키 이 메기색끼가 진짜!]

[포스/포도킹: 아오 ㅅㅂ색히들이 왜 여까지 쳐들어와서 ㅈㄹ이야]

[포스/거위알: 우리가 져줄게 애들아. 앙키야 앙키야? 얘들좀 데리고 가봐라 응?]

[포스/키키아: 음 그렇게 말해도]

[포스/키키아: 저도 쫓기는 몸이라ㅎ]

[포스/구렁이담: 웃지마 샛끼야! 어디서 처웃고 있어! 아 절로 가라고! 키키야? 형이 좀 부탁할게. 우리 좀 떨어지지 않을래? 응?]

뒤로 가서는 다들 공손하게 부탁하는데, 서련으로서도 별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때부터 싸움의 대상이 바뀌어버렸다. 뒤따라 들어오던 하진과 로운, 원호가 난데없이 우리팀, 그러니까 개개길드를 후려패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두들겨 맞고 있는 이들 안에는 베르르와 순한양도 포함되어 있었다.

순간 갑판 구석에 서련과 함께 짜져서 떨고 있던 신성제국 유저들이 죄다 멍한 상태가 되었다. 멍청하게 바라보는 표정이 보지 않아도 떠오를 정도였다.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그건 서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장 서련의 시선이 하진의 모니터 화면으로 향했다.

“…어떻게 한 거야?”

“버그.”

그러면서 하진은 인벤토리를 켜서 아까와 달리 활성화 되고 있는 ‘대결권’을 마우스로 가리켰다. 서련은 하진의 얼굴과 모니터를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음, 버그란 말이지.

다들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지, 후려 맞으면서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못 잡는 중이었다. 그러나 곧 겁도 없이 일어나 하진과 로운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몇 초도 되지 않아 바닥에 뻗기 시작했지만.

-신마제국의 ‘종마’가 사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눈설’이 대죄의 일격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싱싱싱’에게 3897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묵요’가 냉기의 칼날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베르르’에게 4219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동족상잔도 이런 동족상잔이 없었다. 적대종족은 내버려 두고 같은 편을 패고 있으니, 서련을 앞세우고 모서리 쪽에 몰려 떨고 있던 신성제국 쪽 유저들도 하나둘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불 구경과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더니, 슬쩍 나와 구경하는 유저들을 보니 틀린 말 하나 없어 보였다. 그러나 서련이 가만히 있을 위인은 또 아니라는 점.

서련은 즉시 대결권을 외부 스킬바에 배치하고 아직 같은 편으로 표시되고 있는 신성제국 유저들에게 대결권을 차례로 돌렸다. 버그는 버그인지, 거부권에 대한 멘트는 뜨지 않았다. 그 대신 화면에는 서련의 공적 지급기에 대한 전투개시 문구가 떠올랐다.

-신성제국의 ‘구렁이담’에게 대결권을 신청하였습니다.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개시로 전환됩니다. 전투 개시 5초 전.

-신성제국의 ‘담담이’에게 대결권을 신청하였습니다.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개시로 전환됩니다. 전투 개시 5초 전.

-신성제국의 ‘포도킹’에게 대결권을 신청하였습니다.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개시로 전환됩니다. 전투 개시 5초 전.

일단 3명. 안정적으로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 테니, 서련은 일단 가볍게 3명으로 가기로 했다. 전투개시 알람에 신성제국 유저들은 곧 다시 구석 쪽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포스/구렁이담: 키키야? 키키야! 키키야 너 뭐하냐 뭐하냐고]

[포스/담담이: 미쳤냐고 이**야 아니 단체로 왜 이 ㅈㄹ이야]

[포스/포도킹: 아니;; 메기야?;; 이건 좀 아니지 않냐 메기야?;;]

[포스/키키아: 알았어요, 알았어. 메기처럼 갈게요ㅎ]

서련은 즉시 주문서를 도핑하고 킬리를 불러 광역기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광역기에 헤롱거리는 유저에게 장거리 마법 공격을 난사했다. 킬리도 곧장 다른 상대를 하나 잡고 후려패기 시작했다.

그렇게 딱 두 명을 죽이고 뒤를 보자, 편하게 앉아 구경 중인 세 명의 유저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진과 로운, 원호였다. 나머지는 죄다 뻗어 누워있는 중이었다. 물론 주변은 온갖 욕설이 득실거렸지만.

음, 역시 내 새끼들.

서련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본 후, 킬리가 나머지 한 명을 죽이자마자 바로 뒤로 빠졌다. 나머지는 편안히 앉아 구경하는 비글들 몫이었다.

[포스/키키아: 그럼 뒤좀]

이제 슬슬 ‘비밀서류’를 찾을 때가 됐다. 서련은 신성제국 갑판을 빠져나와 비공정 선실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도에 딱히 표시되지 않은 걸 보아 발로 직접 뛰어 찾거나 열쇠지기를 찾아야 하는 유형일 확률이 높았다.

방을 하나하나 뒤지다 보니, 휴게선실 안에 <열쇠지기>라는 글이 머리에 붙은 인간형 몹을 한 명 발견할 수 있었다. 서련은 망설임 없이 몹을 죽이고 열쇠를 획득했다. 열쇠를 획득하고 나서야 지도에 파란빛으로 장소가 표시되었다.

문제는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는 붉은 점들이랄까. 재빨리 휴게선실을 빠져나가자 복도 멀리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고 있는 개개길드가 보였다. 서련은 그들 중 한 명을 타겟팅하고 킬리를 보냈다.

[포스/짖지마라: 이 ***맠ㅋㅋㅋㅋㅋ 너는 ㅅㅂ내가 오늘 반드시 주겨주마 이 메기새꺄]

이쪽도 메기네. 그래도 여섯 명은 무리니 서련은 일단 비밀서류부터 구하고 하진이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괜찮아, 킬리야. 하진이가 내 새낀데 엄청 세거든.

[포스/키키아: 제 킬리 주먹맛 아직 못 보셨죠?]

[포스/개솔: 껒져 샛꺄ㅅㅂ 어디서 간첩새1끼가 나대고 있어]

[포스/키키아: 전 메긴데요]

[포스/종마: ㅅㅂㅋㅋㅋㅋㅋㅋ 내갘ㅋㅋㅋㅋㅋ어이가 없어섴ㅋㅋㅋㅋㅋㅋ 알았어 이 메기새꺄ㅋㅋㅋㅋㅋㅋ]

[포스/싱싱싱: 저 샛끼 뭐냐곸ㅋㅋㅋㅋㅋ]

[포스/상마족: 도랐낰ㅋㅋㅋㅋㅋㅋ]

웃느라 정신없는 틈 사이로 킬리가 광역기를 냅다 내리꽂았다. 그걸 본 서련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지도에 표시된 장소로 재빨리 향했다. 뒤에서 킬리를 내버려 두고 쫓아오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일단 이동 속도는 현재 로운 빼고 여기서 서련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다 하진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정작 하진의 ‘눈설’ 캐릭은 장비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냥 중상도 아닌 중하 정도.

-신마제국 ‘키키아’(스파이)가 ‘비밀서류’를 입수하였습니다. 앞으로 5분 후 지원군이 투입됩니다.

신마제국 쪽이라고는 하나, 현재 스파이 신분으로 서련은 신성제국 쪽으로 투입된 처지였다. 고로, 비밀서류를 입수한 상황도 신성제국 쪽으로 분류되어, 승리의 기운도 그쪽으로 쏠렸다.

만약 여기서 서련이 비밀서류를 지키는 데 성공하면, 신성제국과 함께 서련 혼자만 퀘스트 완료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그건 깨보면 알겠지.’

일단 서련은 비밀서류를 입수하자마자 안전한 길로 빠져 하진에게 향했다. 신성제국 스타트 지점으로 등록된 갑판 위로 말이다.

킬리 어딨니, 킬리야.

사역수 복귀 스킬을 내도록 누르며 달리자, 저 끝에서부터 따라오고 있는 킬리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역시나 개개길드가 칼을 들고 무서운 기세로 서련을 쫓아오고 있었다.

“하진아.”

“어.”

서련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하진이 간단한 대답만 남긴 채 마우스와 키보드를 타닥 움직였다. 그에 맞춰 로운과 원호도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 서련은 비공정의 중문을 지나 신성제국의 스타트 지점으로 들어왔다. 전투자세를 취하고 있는 하진의 캐릭과 서련의 캐릭이 스치듯이 지나간 것과 동시에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포스/구렁이담: 키키야 키키야? 왜 여기와서 이러냐;; 니들 갑판가서 놀면 안 되겠냐?]

[포스/담담이: 아니 우리도 좀 살자고;; 왜 다 여기와서 이러는겨]

[포스/키키아: 왜요 아깐 메기라면서]

[포스/거위알: 아니 우리 메기가 뒤끝이 세상 쩌시네]

시간도 남겠다, 서련은 옆에 서 있는 킬리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며 신성제국 유저들과 제법 어울려 주었다.

[포스/포도킹: 고만 좀 쓰다듬어 이새꺄!! ㅈㄴ 거슬리네! 아오 키키야? 좀 가라. 제발 좀]

[포스/포토킹: 킬리킬리 데리고 좀 가라고! 아니, 메기야? 니가 메기라서 지금 사람말을 모르나 본데]

[포스/키키아: 아예]

-남은 시간 1분 2초.

어느덧 남은 시간이 5분에서 1분대로 줄어 있었다. 서련은 앞에서 제 대신 잘 싸워주고 있는 비글 3마리를 보며 바닥에 다소곳이 앉았다. 서련이 앉자, 킬리도 그 옆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렸다. 화려한 불길이 넘실거리는 킬리의 목덜미를 보고 있자니, 순간 어떤 기시감이 스쳐 지나갔다.

장총을 든 채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던 킬레아. 둘 다 붉은색이라서인지 이름마저 겹쳐 보였다. 아니, 확실히 비슷했다. 킬레아와 킬리. 순간 어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서련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지우듯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동시에 스피커의 배경음 사이로 삐이, 하는 음이 울렸다.

-전투 종료.

전투 종료 메시지와 함께 서련의 화면 위로 화려한 양피지 모양의 승리 선언서가 올라왔다. 그 밑으로 ‘신성제국’에 대한 승리의 문구가 떠 있었지만, 스파이에 대한 신분 영향인지, 키키아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양피지의 맨 아래의 MVP 이름에는 키키아의 이름이 크게 등재되어 있었다. 양피지는 곧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화면은 다시 로딩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서련 형, 어떻게 됐어요?! 깼어요?”

“설마 안 된 건 아니죠? 저희 뻘짓 한 거 아니라고 말해줘요, 형.”

“클리어 떴어. 도와줘서 고마워.”

“역시! 좋았어! 한 번 더 도전해요, 형.”

“야, 이번엔 잘 좀 뽑아봐라. 되도 하필 개개길드가 뭐냐?”

반은 거의 협박이었지만, 서련의 말에 로운과 원호는 크게 기뻐했다. 이 짓을 다시는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뭐 앞일이야 모르는 거니까.

물론 이 사태에 난리가 난 녀석들도 있었다. 거의 실성해 있는 두 절미들 말이다.

[길드/베르르: 키키형ㅎㅎㅎㅎㅎ 그렇게 막 메기짓하면 됨 안됨?ㅎㅎㅎㅎㅎㅎㅎㅎ]

[길드/순한양: 이얗ㅎㅎㅎㅎㅎ 이 아름다운 전우애좀 보솧ㅎㅎㅎㅎㅎㅎ 저들만 살겠다는 이 무한한 집념ㅎㅎㅎㅎㅎ 이길수가 없네그려ㅎㅎㅎㅎㅎㅎㅎ]

[길드/키키아: 알겠어, 알겠어. 다시 한번 가자, 형이 잘못했어]

[길드/눈설: 잘못하긴ㅅㅂ 지들이 못해놓고]

[길드/묵요: 절미들 그렇게 막 메기드립치면 형들이 뭐한다고 했지^^]

[길드/베르르: 됐어여ㅠㅠ 우리편은 아무도 없네 씨... 키키형 진짜]

[길드/키키아: 알겠어, 형이 잘못했어. 다시 가자, 응?]

[길드/순한양: 진짜여? 진짜 잘못했져? ㄹㅇ?]

[길드/키키아: 그래 형이 메기가 돼서 승률에 눈이 멀었네]

[길드/베르르: 메기는 무슨ㅋㅋㅋㅋㅋ 갑시닼ㅋㅋㅋㅋㅋㅋ 키키형이 그럼 이번 판은 순삭하는 걸로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에잏ㅎㅎㅎㅎ 키키형은 천사져ㅎㅎㅎㅎㅎ 누가 메기래ㅅㅂ 델꼬와요ㅎㅎㅎㅎ]

[길드/호백조: 니들이 방금까지 그랬거든 새1끼들아]

[길드/베르르: 에바에바 백조형 시력 며엇?]

“아오, 이 새끼들을 진짜 확!”

서련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원호의 분노어린 말을 살짝 흘려들으며, 다시 NPC 비파란에게 말을 걸어 레이드 퀘스트에 도전했다. 이미 클리어한 사람도 계속 할 수 있는 걸로 보아, 퀘스트는 그냥 입장퀘 정도 되고 실상은 레이드 파티인 듯했다. 인기가 좋으면 대규모 패치 때 좀 더 보완되어 고정 레이드가 될 확률도 높았다.

처음과 똑같은 방법으로 대기시간을 거친 후, 모두는 다시 퀘스트 지역인 비공정 갑판으로 이동되었다. 제일 먼저 서련은 같은 편이 된 다른 파티를 살폈다. 무기에 강화가 하나도 안 되어 있긴 했지만, 다행히 개개길드는 아니었다.

음, 할 만하려나. 길드원들을 힐끗 보자, 다들 이번 판만은 자신만만한지 벌써부터 도핑을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처음과 같은 패턴으로 화면에 선제공격 기회의 주사위 던지기가 나타났다. 서련도 이번만큼은 주사위를 클릭해 돌려주었다.

그 후에는 킬리를 소환하고 온갖 버프와 주문서를 도핑했다. 그리고 킬리의 도핑을 끝냈을 때, 1분 타이머가 꺼지고 화면에 전투 개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투를 개시합니다.

-선재공격 임무 유형이 선택되었습니다.

-적을 없애고 비공정을 샅샅이 뒤져 ‘비밀서류’를 사수하라.

이번에도 선제공격 기회가 먼저 주어졌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투개시가 되자마자 뛰쳐나가는 길드원들을 향해 서련은 다시 중대한 사항을 알렸다.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말이다.

[포스/키키아: 음]

[포스/키키아: 어떡하지]

[포스/키키아: 우리팀은 이번에도 못 깰 거 같은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세 쌍의 눈동자가 서련에게 모여들었다. 설마하는 표정으로 저를 보는 사내들에게 서련은 뺨을 긁적거리다 시선을 내리깔고 슬쩍 물었다.

“음, 덤빌래…?”

누가 덤벼, 씨발! 그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리고는 재빨리 전투모드로 돌입하는데, 대상자는 서련이 아닌 서련에게 달려오고 있는 두 절미들이었다.

-신마제국의 ‘눈설’이 회고의 기억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베르르’에게 2891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묵요’가 사용한 포획에 신마제국의 ‘순한양’이 구속상태가 되었습니다.

-신마제국의 ‘호백조’가 회계의 손길을 사용해 신마제국의 ‘베르르’에게 3812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아직 스파이로 전환도 안 됐는데, 앞에서는 이미 서로 동족상잔을 벌이고 있었다. 서련은 옆에 서 있는 킬리의 목덜미를 살살 쓰다듬으며 열심히 발리고 있는 베르르와 순한양을 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봐, 킬리야. 내 새끼들 엄청 세다니까.

결국 두 번째 전투에서도 두 절미들은 실성한 듯 바닥을 기어 다녀야 했다. 그날 두 절미들이 퀘스트를 온전히 완료할 수 있었던 건, 울며 구르다 간 3번째 판이 완승으로 끝났을 때였다. 더불어 옆에서는 악몽 같은 하루였다는 중얼거림마저 들려왔다. 물론 절미들의 징징거림은 그다음날까지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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