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지금쯤이면 되겠지.”
서련은 방안에 있는 시계를 힐끗 보고 방문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거실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걸 보아 하진이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밤 11시. 곧 자야 될 시각에 서련은 현재 푸딩을 노리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후식으로 먹긴 했지만, 모자랐던 탓이었다. 아니, 하진이 막아 2개밖에 먹질 못했다.
끼익-
평소엔 들리지도 않던 경첩 소리가 지금은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마음이 괜히 조마조마했다. 조용한 걸음으로 부엌으로 간 서련은 쪼그려 앉아 냉장고 문을 탁 열었다. 그리고 하진이 잘 감춰놓은 제 간식을 찾기 시작했다.
달그락-
얼마나 그렇게 열심히 찾았을까, 서련의 눈에 냉장고 야채칸에 들어가 있는 간식이 눈에 들어왔다. 냉큼 들어 꺼내는데, 순간 냉장고 안으로 그림자가 지는가 싶더니 손이 불쑥 튀어나와 서련의 손에 든 푸딩을 낚아채 갔다.
“너 내가 하루에 권장량 몇 개라고 했어.”
위를 힐끗 올려다보자, 그곳엔 눈을 스산하게 내리뜨고 있는 하진이 있었다. 서련은 쪼그린 몸을 펴고 일어나 하진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음… 세 개?”
“두 개거든. 어디서 지금 수작을 부리고 있어.”
“…하진아.”
“안 돼, 안 되니까 그딴 눈으로 보지 마.”
하진은 푸딩을 다시 야채칸에 넣고 냉장고 문을 홱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걸 황망히 보는 서련의 허리를 꽉 둘러안고 번쩍 든 채 제 방으로 향했다. 놀라 바르작거리는 팔다리가 급히 하진의 목을 단단히 휘감았다.
“하진아, 잠깐만…!”
“오늘은 여기서 자.”
서련이 내려진 곳은 하진의 방 침대 위였다. 하진은 서련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대로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편하게 자리 잡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몰래 빠져나가기만 해.”
하진은 이불을 서련의 턱 아래까지 덮어주곤 경고 아닌 경고를 남겼다. 서련은 넓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하진의 방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방금까지 노트북을 하고 있었는지, 넓은 책상 위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노트북이 환한 빛을 내며 활짝 열려 있었다.
눈이 부셔 손을 드는데, 귓가로 하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왜. 담배 냄새나?”
“아니.”
“그럼 자.”
써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넓은 방. 서련의 방과 달리 하진의 방에는 베란다가 딸려 있었다. 베란다에는 재떨이와 함께 탈취제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가만 보니 침대 옆이나 책상 위에도 종류별 탈취제가 가득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같이 있어도 담배 냄새가 안 난다 했더니, 이런 노력이 숨어 있을 줄은 또 몰랐다.
아니, 애초에 이런 노력이면 담배를… 못 끊나?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 배려받고 있다는 사실에 뭉클한 마음도 들었다. 하진은 늘 뭘 말하기보다 뒤에서 혼자 모든 걸 준비하고 해결하는 녀석이었다. 담배 냄새가 싫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어떻게 안 건지 어느 순간부터 냄새를 빼고 다녔다.
서련을 위해 많이 노력하는, 그런 녀석이었다.
“…하진아.”
“안 된다고 했어. 그런 거에 맛 들리니까 밥을 새 모이만큼 먹는 거 아냐.”
허리에 감긴 팔이 좀 더 조여들었다. 바짝 당겨 안고는 귀찮다는 듯 잔소리를 내뱉는데, 그 모습이 싫지가 않았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하진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 서련을 꽉 당겨 안을 뿐이었다. 예전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언제였더라. 고2 막바지 겨울 때였는지, 고3 올라가던 새해였는지 가물가물했지만, 그때만 해도 하진은 지금과 다른 대답을 했었다.
‘…내 형이니까.’
상처입고 우는 서련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서련은 어깨에 닿는 온기를 깨닫고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냥 이대로 있어달라는 어리광.
시야에 들어오는 건 커튼조차 없는 베란다의 풍경이었다. 그 전경을 눈에 담던 서련의 눈이 조금씩 내리감기기 시작했다.
간식을 못 먹어 아쉬운 것과는 별개로 졸음은 순식간에 쏟아졌다. 고른 숨소리가 방안을 채우자 서련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하진의 손이 조금 느슨하게 풀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진의 숨소리도 깊어졌다.
***
서련은 원래 새벽에 잘 깨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세상모르게 자는 편은 또 아니고, 크게 건들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아침까지는 안 깨고 잘 정도였다.
그래도 일단 불편함을 느끼면 일어나긴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래서…. 이게 뭔데.”
서련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불편함의 정체를 찾아 헤맸다. 제가 깰 정도면 어지간히 불편했다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뒤쪽에 평소와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꽤 부피가 되는 무언가가. 허리를 슬쩍 비틀자 닿는 부피가 더 커졌다. 아니 물컹, 하고 짓눌렸다.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큰 게….
하필 낮에 그런 일이 있어서 그런지 그쪽으로 생각이 쏠렸다. 서련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다. 나름 슬금슬금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손끝에 물컹한 게 닿자마자 그대로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귓가에 들리는 건 막 깬 듯한 낮고 깊은 목소리였다.
“…뭐하는데.”
“…어?”
“잠 안 자고 뭐 하냐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목이 홱 끌어올려졌다. 하진이 몸을 기울자 허리 아래쪽으로 다시 물컹한 게 닿았다. 서련은 눈을 꾹 감으며 기어들어가듯이 말했다.
“…뒤에…닿잖아….”
하진의 몸이 움칫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압박감은 금세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어깨 위로 긴 한숨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몸 좀 돌려 봐.”
이불을 살짝 들춰주며 하는 말에, 서련은 뜸을 들이다 별수 없는 심정으로 하진 쪽으로 돌아누웠다. 곧장 등 뒤로 긴 팔이 감겨들었다.
“이제 그만 자….”
졸음이 가득한 말과 함께 하진이 서련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 손짓은 얼마 안 가, 고른 숨과 함께 멈추었다.
그런 하진과는 달리 서련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다른 건 아니고, 괘씸해서였다.
지금 잠이 오지, 성하진.
곤한 얼굴로 자고 있는 하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서련은 결국 제풀에 지쳐 시선을 거둬야 했다. 아직까지도 허리 아래에 닿던 감각이 생생했다. 요즘 애들은 뭔가 좀 다른가 싶기도 하고. 그래 봤자 1살 차이밖에 안 났지만, 하여간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생각은 복잡했다.
‘잠이나 자자.’
눈을 꾹 감고 양까지 새어봤지만,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 새벽에 잠이 들긴 했었는지, 서련이 눈을 떴을 땐 방 안이 밝아져 있었다.
침대 아래로 드리워진 포근한 햇볕이 방안을 훈훈하게 했다. 배를 더듬자 새벽 내내 갑갑하게 저를 끌어안고 있던 단단한 팔뚝이 부재중인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역시나 옆자리는 깨끗이 비어 있었다.
서련의 시선이 베란다 쪽으로 옮겨졌다. 하진은 그곳에 있었다. 방을 등진 채 베란다 창에 기대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갑갑해서 나간 건지, 담배 냄새를 빼고 있는 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련이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한참이나 그렇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하진이 방으로 들어온 건, 아침 햇볕이 서련의 발치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문을 열자 순식간에 찬 공기가 들어왔다. 서련은 본능적으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뭐야, 언제 일어났어.”
“좀 전에.”
“배 안 고파?”
음, 푸딩은 좀 먹고 싶은데. 서련은 눈을 굴리며 어제 먹지 못한 간식을 떠올렸다. 그 생각을 또 귀신같이 읽은 건지, 하진의 표정이 금세 험악해졌다.
“이젠 아주 밥 생각도 안 나지? 한 번만 더 어제 꼴 나기만….”
“하진아.”
“왜 뭐, 어쩌라고.”
“계란말이 해줄까.”
서련의 말에 하진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요리 만렙인 성하진이 못하는 단 하나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계란말이였기 때문이었다. 왜 못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때문에 서련이 해주는 계란말이를 꽤 좋아했다. 아니. 많이 좋아했다.
하진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흔들릴 일인가 싶다가도, 얼마나 먹고 싶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련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방을 나섰다.
“해줄게.”
푸딩 먼저 먹고. 이러면 서로 윈윈이니 나쁠 것도 없었다. 역시나 평소 같으면 금방 쫓아 나와 말렸을 하진이 지금은 방에서 나오질 않고 있었다.
서련은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활기차게 열었다. 그리고 달걀과 야채와 제 간식을 꺼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푸딩을 까서 퍼먹는 거였다. 퍼먹으며 중간중간 야채를 손질했다.
“당근이….”
계란말이에 넣을 당근을 찾는 서련의 옆으로 난데없이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기울어진 서련의 몸을 바로잡아 세우는데, 써늘한 목소리가 서련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옷 제대로 안 입지, 여서련.”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름 석 자까지 다 부르는지, 서련의 시선이 힐끗 제 옷으로 향했다. 바지도 입고 있고, 티도 제대로 입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건전하게.
“…제대로 입고 있잖아.”
“제대로? 옷이 다 늘어나서 지금 어깨까지 다 보이는데 제대로? 왜 이딴 걸 입고 있는데.”
“성하진, 이거 네 옷이야.”
뭐라 말하려던 하진의 시선이 서련의 옷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위아래로 한 번 쭉 훑는데, 뒤늦게야 무언가를 깨닫고 짓씹듯 욕을 내뱉었다.
“옷이 없으면 사달라고 하든가, 하…. 왜 큰 걸 그대로 입고 나다녀. 씨발, 귀찮아 죽겠네.”
귀찮다는 말과 달리 하진은 겉옷과 지갑을 챙겨들고 무서운 속도로 부엌을 지나쳐갔다. 그 기세가 어느 정도냐면, 상황파악을 못 한 서련이 제대로 말리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아니, 하진의 행동이 지나치게 빨랐다는 게 더 정확했다.
“계란말이 해놔. 무조건 통통하게.”
“아니, 잠깐만. 하진아, 이거 네가….”
쾅-
“…잠옷하라고… 준 거였잖아….”
혼자만 남은 공간에 서련의 목소리가 허망하게 울려 퍼졌다. 서련의 시선이 다시 제 옷으로 향했다. 딱히 오늘만 입고 있던 것도 아닌데, 왜 하필 오늘 이 난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심지어는 어깨가 다 보인다는 하진의 말과 달리 쇄골도 겨우 보일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마저도 티가 옆으로 쏠려 더 그래 보였다. 티를 제대로 당겨 정돈하자 다시 건전한 상태의 옷이 되었다.
이제 목티를 입고 자야 되나.
한숨을 쉬며 돌아서는 서련의 고민과는 별개로 하진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반이 지난 후였다. 그것도 양손에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을 가득 들고.
***
하진이 아침에 그 난리를 피운 덕분에 서련은 오래 입던 옷들을 반강제로 뜯기고 새 옷으로 교체해야 했다. 나중에는 아주 노린 건가 싶은 의심도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 서련은 현재 빈말인지 진심인지 모를 무안한 칭찬을 듣는 중이었다.
“어, 서련 형 패딩 샀어요? 흰색? 와… 형이 입으니까 이게 또 장난 아니구나…. 원래도 뽀얀데…. 그냥 얄짤 없네.”
“와, 씨…. 이건 그냥 모델이다. 형, 사진 찍어도 돼요?”
“씨발, 저리 안 가?”
“성똘끼 또 난리 나셨네.”
“비켜, 이 또라이 새꺄. 저건 찍어서 올려야 돼. 저 정도 피지컬이 그냥 나오는 줄 아냐?”
“좆까. 내 알 바야?”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피시방에 오자마자 마주한 로운과 원호의 칭찬에 하진이 으르렁거리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서련은 귀찮은 표정으로 셋을 지나쳐 어제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부팅을 하려고 앞을 보니 바나나 우유 2개가 다소곳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또 로운이나 원호가 사다 놓은 모양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옆을 보니 어지간히들 싸우고 있어 끼어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 여기 오면서 하진에게 눈사람이라느니, 찹쌀떡 같다느니 하는 말을 내내 듣고 와서인지, 로운과 원호의 칭찬이 칭찬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하긴 성하진 만큼 잘났으면 남 칭찬에 인색할 법도 했다.
그만큼 하진은 서련이 보기에도 전체적으로 훌륭한 피지컬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머리도 좋아서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임이나 하자.”
지치면 알아서들 들어오겠지. 서련은 애써 관심을 털어내며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그리고 우유를 쪽쪽 빨아 마시며 에르덴이 접속했다.
-접속시간 PM. 03:59 / 남은 시간은 231시간입니다.
-신성의 축복을 그대에게! 에르덴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모든 던전의 입장 시간이 리셋되었습니다.
-일일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길드/키키아: 안녕하세요]
[길드/베르르: 형이다! 형 우리밖에 없는 웬 존대에욬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역시 키키형ㅋㅋㅋㅋㅋ 어서오세옄ㅋㅋㅋㅋ]
음, 잊고 있었네. 종마 패거리가 나간 게 불과 어제였다. 버릇이 들어 인사를 높인 건데, 지금 보니 직장이 있는 건블 형과 휴리사 누나, 야생닭 형을 빼면 남은 건 고등학생인 베르르와 순한양 뿐이었다.
[길드/베르르: 형형 자게 봤어요?ㅋㅋㅋㅋㅋ 왘ㅋㅋㅋㅋㅋ 킬레아 진짴ㅋㅋㅋㅋㅋ]
[길드/키키아: 아직 안 봤는데. 무슨 일 있어?]
[길드/순한양: 그건 아니구여... 음... 고넘이 우리 길드 오고 싶은가 봐옄ㅋㅋㅋㅋㅋㅋ]
설마. 나는 걔랑 일면식도 없는데. 서련은 이 어린 양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이미 믿음이 단단한지 내뱉는 말들도 다 우쭐한 말들뿐이었다.
[길드/베르르: 진짜에욬ㅋㅋㅋㅋ 자게 등판까지 했다니까옄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형형 그러지 말고 우리 담에 킬레아 오면 받아줍시닼ㅋㅋㅋㅋ]
[길드/베르르: 그릏게 오고 싶다는딬ㅋㅋㅋㅋㅋ 이이상 건블길드 들어가는 넘 있음 지가 ㅈ발라 버린다고 했다니까옄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크으... 고놈정도면 우리가 선심 좀 써야죸ㅋㅋㅋㅋ 오고 싶다고 저렇게 피력을 하시는데ㅎㅎㅎㅎㅎㅎ]
“…피력이 아니고….”
우리 길드 망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 이상 길드원들 생기면 다 죽인다는 거잖아. 어딜 어떻게 들어봐도 길드 성장을 방해하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길드/베르르: 형형! 어때요 괜찮져?! 묵요에 킬레아까지 오면 개개길드 생킈들도 우리가 조질수 있고! 캬아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킬레아! 킬레아!]
[길드/키키아: 그래그래 알겠어. 건블형한테 먼저 말해보고]
“여기서 킬레아를 왜 찾아.”
“뭐야, 우리 셋으로는 부족하다는 거? 이놈들 안 되겠네.”
“킬레아 막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 아닌데요? 걔도 좀 개썅마이웨라 똘끼 장난 아니에요.”
언제 또 싸우다 말고 몰려온 건지, 서련의 주위로 목소리가 하나씩 파고들었다. 각자 자리 잡고 말하는 폼들이 이미 서련의 채팅을 다 훑어본 모양이었다.
“킬레아 알아?”
“알긴 아는데…. 음,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니, 그놈은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요.”
“접속 시간도 불특정하고, 완전 지 꼴리는 대로만 노는 놈이라 답 없어요.”
“그래서 지금 그 킬레아 새끼가 필요하다고?”
“필요한 것보다… 우리 길드 망하라고 고사지내는 거 같아서.”
“아….”
“아….”
서련의 말에 로운과 원호가 원인 모를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하하 웃으며 자기들 자리로 되돌아가는데, 유일하게 하진만 서련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그래서 킬레아 새끼 어째 달라고.”
뭘 어째. 그 말에 서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도 불만을 표출할 게 분명한데 말한들 해결이 될까. 결국 서련은 시선을 돌려 제 모니터 화면으로 돌아왔다. 물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
“어쩌고 자시고, 서로 알지도 못하는데.”
말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유저를 상대로 이쪽만 열을 올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그리고 서련은 킬레아를 길드원으로 받아줄 생각도 없었다. 옆에 있는 이 비글 3마리로도 이미 충분했다. 아니, 이미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온다고 해도 나는 별로 받아줄 생각 없어.”
다른 길드원들은 모르겠지만. 딱 잘라 말하자, 하진은 그제야 만족한 듯한 대답을 얻은 듯 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에 맞춰 비글들의 접속 소식이 채팅창에 떠올랐다.
-‘묵요’님이 접속하였습니다.
-‘눈설’님이 접속하였습니다.
-‘호백조’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베르르: 엇 형님들 오셨습니까!]
[길드/순한양: 오서오시죠 형님들]
[길드/묵요: 절미들 안녕ㅎ]
[길드/호백조: 하이하이ㅋㅋㅋㅋㅋ 애들이 아주 열심히넼ㅋㅋㅋ 너무 열심히라 내가 막 어? 열정이 솟구쳨ㅋㅋㅋㅋㅋㅋ 어떻게 좀 우리 절미들 형들하고 잠깐 저~기 좀 갔다올텨?]
[길드/베르르: 절미라뇨ㄴㄴ 이왕이면 셰퍼트 or 도베르만]
[길드/눈설: ㅈㄹ견이겠지]
[길드/순한양: 어허 로트와일럿 정도면... 왜이러신?ㅎㅎㅎㅎ 저희 나름 견종있는 넘들입니닥]
[길드/눈설: 아 도른?]
[길드/묵요: 절미들 몇짤?^^]
[길드/베르르: ㅡㅡ]
[길드/순한양: ㅡㅡ]
[길드/베르르: 아나 키키형 저 광견들 좀 강퇴시켜봐여 안되겠네. 어디 길드선배한테]
[길드/순한양: ㅋㅋㅋㅋㅋㅋㅋ광견ㅋㅋㅋㅋㅋ 그름 우리 길마형 들어오면 물어보져. 누가 ㅈㄹ견인지]
[길드/호백조: 킬레아한테 물어보는 건 어떠니 쩔미들아. 어? 저~기 잠깐 가서 형들이랑 킬레아좀 보고 오자^^]
지랄견에 모자라 광견까지. 서련은 옆에서 무서운 표정으로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세 명의 악마들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광견….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특히나 성하진은.
[길드/베르르: 킬레아 있어요?ㅋㅋㅋㅋㅋ 어뎌?ㅋㅋㅋㅋㅋㅋ 형들 킬레아가 아니 글쎜ㅋㅋㅋㅋㅋ 저희 길드를 오고 싶다곸ㅋㅋㅋㅋ 아줔ㅋㅋㅋㅋㅋㅋ탈모까지와서맄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ㅋㅋㅋㅋㅋㅋ ㅈ발라 버린다곸ㅋㅋㅋㅋㅋ 그거 그거잖아옄ㅋㅋㅋㅋㅋ 나보다 먼저 들어가는 넘들 ㅈ될줄 아셈ㅋㅋㅋㅋㅋㅋㅋ캬ㅋㅋㅋㅋ 우리 길드가 이렇습니닼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에잌ㅋㅋㅋ 우리 길드 뭐 있다곸ㅋㅋㅋㅋ 킬레아가 그래와서 그르실까?ㅋㅋㅋㅋ]
[길드/호백조: 맛들이 좀 가셨네]
[길드/묵요: 우주의 기운을 모아봐라. 걔가 오나]
[길드/눈설: 그넘의 킬레아 드립은 ㅈㄴ쳐대네ㅅㅂ]
[길드/베르르: 배 아프시면 컨들좀 키우시져?ㅋㅋㅋㅋㅋㅋㅋ 아 묵요형님은 쪼~금만 더 키우면 되실듯?ㅋ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우리야 뭐ㅋㅋㅋㅋㅋ 원래 키키형 버프가 있었으니깤ㅋㅋㅋㅋ그쳐 키키형]
옆에 뿌드득 거리는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보지 않아도 하진이 그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련은 애써 모른 척 담담한 모습으로 지도를 켰다. 이 김에 몰래 빠져나가 포탈을 탈 생각이었다.
[길드/호백조: 알았어, 알았으니까. 쩔미님들? 우리 잠깐 킬레아 좀 보고 오자니깧ㅎㅎ]
[길드/베르르: 흠흠 셰퍼트라고 불러주면 뭐ㅎㅎ]
[길드/호백조: 알았으니까 우리 쎼뻑님들?]
[길드/순한양: ...욕같은데]
[길드/눈설: 거 말도 드럽게 많네]
[길드/호백조: 자자 그만하고 일단 가자]
[길드/베르르: 키키형 조금만 있어욬ㅋㅋㅋㅋ 저희 킬레아 델꼬 올게욕ㅋㅋㅋㅋㅋ]
[길드/키키아: 그래...]
서련은 그냥 알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가는 베르르와 순한양의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어쩌겠는가. 옆에 있는 놈들이 한수 위인걸.
쫄래쫄래 따라가는 베르와 양의 모습을 뒤로하고 채널 쪽을 쭉 훑자, 무슨 사건사고가 이렇게 많은지 글이 읽기도 전에 위로 쑥쑥 올라갔다. 서련은 화면을 크게 키워 하나하나 훑어 내려갔다.
‘개개길드’의 꼬장질에 대한 제보글이 대다수였다. 맞다이 뜨자며 도발하는 건 물론 몰려다니며 필드 내 스틸과 대결권 시비까지, 아주 이름 알리려고 기를 쓰는 모습들이 낱낱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련도 개개길드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있었다. 예전에 신성제국 쪽에 ‘악신’이라는 나름 유명한 길드가 있었는데, 진상짓을 하며 유저들에게 시비를 걸고 다녀서 유저들 사이에서 ‘개같은 인성의 개같은 집단’이라는 뜻으로 개개길드라고 불렸던 길드였다.
그러나 워낙 머릿수가 많고 통제도 불가해 분열이 상당했는데, 역시나 위명이 무색하게 얼마 가지 않아 악신길드는 해체되었다. 그다음으로 생긴 게 바로 신마족의 ‘개개길드’였다. 악신에 있던 유저들이 세탁해서 종족변경을 하고 설립했다는 설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하는 짓도 진상짓 딱 그대로였다.
“어….”
한데 가만 보니 어느 길드 하나를 저격하고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본 건가 했는데, 떠오르는 글을 몇 번 더 보고서야 그게 어느 길드인지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서련의 ‘건블길드’였다.
[상마족님의 외침: ㅅㅂ ㅈ도 없는 샛끼들앜ㅋㅋㅋㅋㅋ 후달려서 대답도 안하는거 보솤ㅋㅋㅋㅋㅋㅋㅋ 건블은 대체 어디서 나온 길드임? 응그래, 니들 ㅅㅂ 좉도 없썽]
[싱싱싱님의 외침: 키키야 쫄리냐?ㅎㅎㅎㅎㅎ 건블길드 너아님 볼것도 없다몋ㅎㅎㅎㅎ 근데 형이 보기엔 너도 볼거 없던데 어디서 ㅈ드립을 남발하고 ㅈㄹ?ㅎㅎㅎㅎㅎ 키키야 얼굴좀 보자고]
[케케신발님의 외침: 그놈의 킬리킬리ㅋㅋ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ㅋㅋ 형이 발라줄게 이리온나. 킬레아 생키는 ㅅㅂ 탈모와서 요새 집밖에서 나오질 않는다더만ㅋㅋㅋㅋㅋ 건블 이 줫같은 넘들아 니네 이렇게 쫄려서 못 나올거면 대체 무슨 깡으로 다굴때린 거냐?ㅎㅎㅎㅎㅎㅎㅎ]
[종마님의 외침: 길드 따까리들 다 나오라고ㅅㅂ 머릿수로 다굴 오지던데 딸리니까 입에 풀칠을 하셨나 왜 나대질 못하셔?ㅋㅋㅋㅋㅋ 키키야 고맙닼ㅋㅋㅋㅋ 니 덕에 좋은길드 찾았는데 인사는 좀 해야지?]
어딜 갔나 했더니, 악명이 하늘을 찌르는 개개길드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글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서련은 뒷목을 쓸며 우유를 쭉 들이켰다. 그리고 우유 통이 비자마자 탁 내려놓고 타자를 두드렸다.
[키키아님의 외침: 좋은 길드요?ㅎ 아예, 웃고 갑니다]
그래도 대답은 해줘야 예의지. 서련의 말에 채팅창은 아주 난리가 났다. 온갖 욕이 가득한 글들을 쭉 보니, 다들 어지간히 열 받은 모양이었다. 음, 이것도 나름 재밌네. 서련은 픽 웃으며 저를 겨냥한 글들을 여유롭게 감상했다.
그렇게 얼마나 감상하고 있었을까, 지루해질 때 즈음에 저 멀리서 킬레아를 보고 온다던 녀석들이 돌아왔다. 처음과 다른 게 있다면, 베르르와 순한양이 지극히 얌전해졌다는 것이다.
[길드/호백조: 쩔미들, 잘하자?]
[길드/베르르: 그럼요ㅎㅎ]
[길드/순한양: 저희가 하면 또 개같이 잘합니다ㅎㅎ 걱정마셔욯ㅎㅎㅎ]
[길드/묵요: 절미들 말 잘듣네ㅋ]
[길드/눈설: 앞으로 까불면 ㅈ될줄 알아]
[길드/베르르: 박력보셔ㅎㅎㅎㅎ]
[길드/순한양: 크으...]
아니, 애들을 대체 얼마나 갈군거야. 생전 안 그러던 애들이 사근사근 웃기까지 하는데,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 놀라다 못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심지어 베르르와 순한양은 종마 패거리한테도 저렇게 순순하게 나왔던 적이 없던 애들이었다.
옆을 힐끗 보자 하진부터 시작해 로운과 원호까지 똑같은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서련은 다시 못 본 척 제 모니터 화면으로 돌아왔다.
[길드/베르르: 아니 근데 형님들! 저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길드/순한양: 옳소!]
[길드/호백조: 그럼 뭐해야 되는지 우리 쩔미들이 함 읊어볼까]
[길드/베르르: 키키형 도망가시는데옄ㅋㅋㅋㅋㅋㅋ]
[길드/묵요: 아]
[길드/순한양: 그리고 형님들]
[길드/순한양: 개개길드가 지금 키키형 저격질 쩔지 말입니다]
[길드/베르르: 왓?]
[길드/베르르: 아니 이 생강들이 시벌 디질라고. 키키형! 형! 어딨어요!]
길드창에서 저를 부르든 말든, 서련은 일단 포탈 인근 지역의 마을로 혼자 전력질주했다. 한동안 구석에 숨어 있다가 포탈이 뜨면 혼자라도 이동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몰래 가려던 계획이 바로 옆에 있는 놈들 때문에 그대로 까발려졌다는 것이다.
“어디냐, 하진아?”
“세그자그.”
평소라면 욕부터 날렸을 하진이 오늘은 웬일인지 서련의 위치를 고대로 발설해주었다. 덕분에 혼자 숨어 이동하려는 서련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길드/묵요: 절미들 세그자마을ㄱㄱ]
[길드/베르르: 이열ㅋㅋㅋㅋㅋ 키키형 딱걸리셨넼ㅋㅋㅋ]
[길드/순한양: 키키형 혼자 또 포탈타려고 했고만요]
[길드/순한양: 젊고 어린 우리 절미들이 참아야지 에효]
[길드/호백조: 이것들 사회생활 아주 제대로 하겠는데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세그자그 마을 모퉁이에 숨어 있던 서련은 죄다 모인다는 소식에 재빨리 마을 밖으로 튀어나왔다. 포탈의 위치는 랜덤으로 뜨지만, 추측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저번에 다른 곳에 생겼으니 이번에는 이 근처에 뜰 거라는 추측.
“인벨 숲.”
그러나 그걸 또 힐끗 본 하진이 고대로 옆으로 퍼 날랐다.
[길드/묵요: 인벨 숲ㄱㄱ]
“…그래, 같이 가자.”
포탈 좀 같이 타면 되지. 서련은 빠르게 포기하고 숲 한복판에 캐릭을 털썩 앉혔다. 그리고 이놈의 비글들과 절미들이 올 때까지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언제부턴가 포탈타기가 힘들어지는 게, 이러다 나중에는 아예 못 가는 거 아닌지 앞날이 이렇게 걱정스럽기는 또 처음이었다.
[길드/베르르: 키키형이 지금 개발리고 싶어가지곸ㅋㅋㅋㅋ 아줔ㅋㅋㅋㅋ 막 혼자 막ㅋㅋㅋ 응?ㅋㅋㅋㅋ]
[길드/키키아: 형은 킬리 있잖아]
[길드/순한양: 개개길드 대1가리 수가 몇인지 알아요 형?ㅎㅎㅎ 걔네 50이 넘습니닿ㅎㅎㅎ]
[길드/베르르: 헉! 진짜 킬리킬리 하네. 형 킬리킬리 거린다고 전섭에 소문 파다한딬]
세면 그만 아닌가. 턱을 슬쩍 괴고 바라보던 서련은 포탈의 존재를 깨닫고 다시 캐릭을 벌떡 일으켰다. 어째 다들 너무 바짝 붙는 듯했지만, 도망갔던 전적이 있어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한데 그게 설마 적을 견제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작전이었을 줄이야.
서련의 주위를 빙 둘러싼 채 철통방어 형식으로 따라오던 모두의 고생은 얼마 안 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걸 생각하고 그렇게 과보호를 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인파와 마주쳤는데, 그게 하필 서련에게 약이 바짝 오른 유저들이었다. 바로 저들 혼자 대단하다고 떠들고 다니는 ‘개개길드’.
서련의 앞에는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 개개길드가 떼거리로 무기를 든 채 왈패처럼 서 있었다.
[상마족: 와 이게 누구야? 버로우의 황제 키키 아니신가?ㅋㅋㅋㅋㅋㅋ 여기서 다 만나네 키키야?ㅋㅋㅋㅋㅋ]
[짖지마라: 이 새1끼 ㅅㅂ 쫄리니까 바로 버로우 타고 튀는거 보솤ㅋㅋㅋㅋ ㅈㄴ없어 보여 샛끼야ㅋㅋㅋㅋ 머릿수 때문에 발렸다고 외창질을 해줘야 기가 살지ㅋㅋㅋㅋㅋ]
[종마: 우리 ㅈ크기 궁금하다던 샛끼 어디? 이야, 입을 싹 다물고 짜져 있는 거 보니 ㅈㄹ맞은 키키 맞넼ㅋㅋㅋㅋㅋㅋ]
[싱싱싱: 어이쿠 여기 묵요도 있었네? 가서 킬레아나 불러와 샛꺄. 전섭1위는 ㅅㅂ 나도 되겠닼ㅋㅋㅋㅋㅋ 볼 것도 없는 새1끼들이 나대는 법만 배워가지고 신컨같은 소리나 하고 말이야ㅋㅋㅋㅋ]
[케케신발: 니들이 신컨이면 우린 ㅅㅂ 신이다ㅋㅋㅋㅋㅋ 잘 봐둬라]
[베르르: 신ㅋㅋㅋㅋㅋㅋㅋㅋ 왓? 신? 왓더 신?ㅋㅋㅋㅋㅋㅋㅋㅋ ㅈㄹ옘1병ㅋㅋㅋㅋㅋㅋ]
[순한양: ㅋㅋㅋㅋㅋㅋ아예ㅋㅋㅋㅋㅋㅋ 잘들 노셔요그랰ㅋㅋㅋㅋㅋㅋ]
[베르르: 키키형 들었어요?ㅋㅋㅋㅋㅋ 지들이 신이래 신ㅋㅋㅋㅋㅋㅋㅋㅋ 도르셨?ㅋㅋㅋㅋㅋㅋㅋㅅㅂ 우리도 저런말 안 쓰는딬ㅋㅋㅋㅋㅋㅋㅋㅋ 어우 쪽팔렼ㅋㅋㅋㅋㅋ]
[순한양: 그리곸ㅋㅋㅋㅋㅋ 그 하체의 근자감은 대체 어디서 오시는 거임?ㅋㅋㅋㅋㅋ 뭔 계시라도 받으셨나?ㅋㅋㅋㅋㅋㅋ 키키형 니들한테 하등 관심없거덩ㅋㅋㅋㅋㅋㅋ **샛끼들이 ㅈ자감으로 우주도 재패할 기세넼ㅋㅋㅋㅋㅋㅋ]
[베르르: 아옼ㅋㅋㅋㅋ 누구 눈을 멀게 하려곸ㅋㅋㅋㅋㅋㅋ 아니 그거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오심?ㅋㅋㅋㅋㅋㅋ시벌ㅋㅋ 걍 다 한강이나 가랔ㅋㅋㅋㅋ]
[순한양: 시박ㅋㅋㅋㅋ그러면 좀 근자감이 사니? 살아?ㅋㅋㅋㅋㅋ]
[길드/호백조: 쩔미들 전투력 보솤ㅋㅋㅋㅋㅋㅋ]
[길드/묵요: 도와줄 필요도 없네ㅎㅎㅎ]
베르르와 순한양의 전투력에 대해서는 서련도 이미 알고 있던 바였다. 종마 패거리가 있을 때는 아예 이를 드러내고 싸웠을 정도니, 이 정도면 거의 놀아주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절미들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서련에게 있었다. 일종에 물들었달까.
[길드/묵요: 자자, 절미들 그만하고 튈 준비 하자]
[길드/베르르: 아니 왜 텨요]
[길드/순한양: 키키형도 있고 묵요형도 있고, 묵요형도 있는데?]
[길드/호백조: 왜 묵요 이름은 두번 나오고 우린 안 나오냐?]
[길드/베르르: 꼬우면 컨키우러ㄱㄱ 하시죠?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도와줄 수 있는뎈ㅋㅋㅋㅋ]
[길드/눈설: 개기는거 보니 살만한가 본데]
[길드/순한양: 크으... 눈설형님 박력이 아주 크으....]
[길드/베르르: 크으... 튈 준비는 벌써 하고 있었... 크으...]
원래도 베르르와 순한양은 죽이 잘 맞았지만, 하진과 친구들이 길드에 들어온 이후로는 어째 더 잘 맞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역시 키배(키보드 배틀)를 뒤로하고 뒤로 슬금슬금 빠질 타이밍을 재고 있는 모습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똑같았다.
[길드/묵요: 일단 달리면 올라갈 수 있는 지형 있는 곳으로 달려. 흩어지지 말고]
[길드/호백조: 지금]
원호의 말과 함께 타이밍을 재고 있던 모두가 개개길드를 등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르게 이를 알아챈 개개길드도 욕설과 함께 뒤쫓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같은 종족인 걸 빌미 삼아 배 째라는 식으로 키배를 떴을 텐데, 요즘은 ‘대결권의 폐해’라고 해서 그럴 수가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게, 뭐만 하면 죄다 대결권을 쏴대며 태클을 걸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부권이 많으면 상관이야 없겠지만, 고작 개개길드를 위해 그 비싼 거부권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게다가 50명이 넘는 개개길드의 대결권을 막기에는 서련의 거부권은 고작해야 100개가 다였다. 50명이 두 번씩만 걸고 거절해도 바닥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냥 튀는 게 더 나았다.
[길드/베르르: 근데요 형님들 형들]
[길드/베르르: 굳이]
[길드/순한양: 도망가야 되요?]
[길드/베르르: 대결권 하나 받고 그냥]
[길드/눈설: **들이 말들이 많아]
[길드/묵요: 그게 문제가 뭐냐면]
[길드/묵요: 이게 중복대결이 가능하단다 절미들아]
[길드/호백조: 그니까 1:100 가능ㅇㅋ?]
[길드/묵요: 중복일 땐 거부권도 안통하고 대결걸면 바로 쟁 가능인거 보면 버그일수도 있고]
[길드/베르르: ㅡㅡ 시벌진짜 르넨넘들]
[길드/순한양: 아오!!!]
[길드/순한양: 기다려봐여. 제가 민원 좀 넣고 오게]
절미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비단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결권의 폐해라고 불리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으니까.
현재 대결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중복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1:100의 다굴 기능이 탑재된 사기템이라 할 수 있었다. 에르덴이 이걸 노린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것 때문에 에르덴은 현재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대결권만으로도 같은 종족끼리 언제 어디서든 떼쟁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같은 종족이라 하더라도 이제 안전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길드/키키아: 저기로 올라가자]
서련은 근처 지형 중 고인돌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으로 모두를 이끌었다. 제법 높아 보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시도해볼 만은 했다.
[길드/키키아: 산 못타는 사람]
[길드/베르르: 혀엉ㅠㅠ]
[길드/키키아: 베르 밑에 숨어 있어]
서련은 고인돌 바위 주변을 재빠르게 훑고 가장 낮은 곳부터 차근차근 밟아 오르기 시작했다. 몇 번 미끄러지기는 했지만, 신성제국 땅에서 놀던 기지를 발휘해 단숨에 바위의 정상까지 올랐다. 그리고 재빨리 고인돌 구석에 숨어있는 베르르를 제 옆으로 소환했다.
[길드/베르르: 역시 키키형 크으...]
서련의 시선이 나머지 멤버들에게로 옮겨졌다. 바위 아래를 보자, 걱정이 무색하게 놀랄 정도로 잘 올라오고 있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하진이는 물론 로운과 원호까지 미끄러짐 없이 차근차근 잘 올라오고 있었다. 순한양이야 원래 산을 잘 타는 녀석이니, 말할 것도 없고.
역시. 옆을 힐끗 돌아보자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는 하진의 모습이 보였다. 게임 하는 폼을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아니, 저 정도면 서련을 뛰어넘는 고인물이었다. 매일 약속이 있다더니, 이제 보니 그게 자기들끼리 모여 게임이나 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개솔: 키키야ㅎ 쫄려서 그리 아닥하고 튀면 형들이 뭐가 되냐ㅎ 어여 내려온나. 내가 다굴로 밟혀봐서 아는데 까이거 별거 아니더만ㅋㅋㅋㅋ 그니까 너도 다굴로 쳐맞자고 샛꺄]
[짖지마라: 너 형들 호구 만드냐?ㅋㅋㅋㅋㅋㅋㅋ어휴 그러게 ㅅㅂ 적당히 나댈 것이지 새1끼들이 도발 털고 온갖 ㅈㄹ발광 다 하더니 꼴좋넼ㅋㅋㅋㅋㅋㅋ]
[케케신발: 어휴ㅋㅋㅋㅋㅋㅋ 거기서 평생 내려오지 마라 이 쟛밥들앜ㅋㅋㅋㅋㅋ 억울하면 드루왘ㅋㅋ 형이 확 발라버릴라까니]
[종마: 하, 이 얍삽충 새킈들 여 올라가서 ㅈㄹ을 해쌌넼ㅋ 알았다 알았어. 살살 칠 테니 좀 내려와봐라. 근데 니들 템은 안녕들 하시냐?ㅋㅋㅋㅋㅋㅋ]
그새 쫓아온 건지, 서련의 일행들이 바위의 정상에 다 올랐을 즈음 밑에서 개굴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들이 올라오진 못하겠고, 반대로 내려오게는 해야 하니 말들이 죄다 신경을 살살 건드는 말이었다.
물론 여기 있는 애들이 가만히 있을 놈들은 더더욱 아니다.
[눈설: 조까 ㅅㅂ]
[묵요: 개 조슬 까세요ㅎ]
[호백조: ㅈㄲ셈]
[베르르: ㅈ자감들 뷩신짓 하네]
[순한양: 줫컨들아 니들이 드루와]
어떻게 저렇게 손이 척척 맞는지, 실은 예전부터 알던 사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로 잘 적응한 건 좋은데, 문제는 벌써부터 상당히 물든 티가 난다는 것이었다.
얘네를 어떡하면 좋지….
머리를 짚으며 고뇌하는 서련의 심중은 꿈에도 모른 채, 베르르와 순한양은 지들이 더 타올라 깔짝깔짝 상대의 심기를 건드려댔다. 애들 버려놨다고 나중에 길마형한테 혼나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현실은 생각보다 더 빨리 서련의 곁으로 다가왔다. 포탈이 열리고도 약 20분이 더 흘렀을 때. 개개길드와의 실랑이로 분위기가 살벌하다 못해 터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필이면 이 난국에 화면 위로 길드 대표 어르신들의 접속 소식이 떠올랐다.
-‘건블리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야생닭’님이 접속하였습니다.
-‘휴리사’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건블리아: 잘들 놀고 있었냐ㅋ]
[길드/베르르: 형 누나 형]
[길드/순한양: 길마 혀엉니임! 리사 누우니임! 생닭형!]
[길드/휴리사: 뭐야 얘네 왜이래]
[길드/야생닭: 니들 또 뭐 사고쳤어?!]
[길드/키키아: 아니에요. 다들 오셨어요]
[길드/묵요: 오셨네요ㅎ 안녕하세요]
[길드/호백조: 안녕하십니까ㅋㅋㅋㅋ]
[길드/눈설: ㅎㅇ]
[길드/베르르: 아니 지금욯ㅎㅎㅎㅎㅎㅎㅎ 개개길드 아시졓ㅎㅎㅎㅎㅎ]
[길드/키키아: 아니에요 형, 별거 아니고 그냥 노는 중이라]
[길드/휴리사: 그래 알겠어. 그니까 키키 넌 얼굴 좀 치워봐ㅎㅎㅎㅎ]
[길드/순한양: 여윽시 리사누님ㅋㅋㅋ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아니 그래서;;; 뭐 말좀 하고 떠들어라;]
[길드/베르르: 개개길드갛ㅎㅎㅎㅎㅎ 키키형 잡겠다고 아줗ㅎㅎㅎㅎㅎㅎ 지 길드 50마리를 데려와섷ㅎㅎㅎㅎㅎ 지금 밑에서 꾸댁거리고 있는데욯ㅎㅎㅎㅎ 이렇게 재밌을 수갛ㅎㅎㅎㅎ]
[길드/야생닭: 형들 오라는 거 아니지?ㅎㅎㅎㅎ 니들 이제 집갈 시간 아니냐?ㅎㅎㅎ]
[길드/휴리사: 그래섴ㅋㅋㅋ 지금 어디니 우리 머슴들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위치]
[길드/키키아: 아니 잠깐만요. 여기 오셔도 딱히 뭘 하는 게 아니라서요]
[길드/건블리아: 키키야ㅋㅋ 걱정마라. 형 다른 거 안 한다ㅋㅋㅋ 보조하러 가는 거다ㅋㅋㅋ 하등 걱정할 거 없다!]
[길드/묵요: 아 마침 저희 쪽도 다 접속 했는데 같이 오면 되겠네요ㅎ]
[길드/호백조: 이제 슬슬 조질 준비를 좀 해볼깤ㅋㅋㅋㅋ 길마형 ‘강마’라는 유저가 연락드릴 겁니닼ㅋㅋ 걍 받아주시고 같이 오시면 돼요ㅋㅋ]
[길드/휴리사: 걱정마라 얘들아 누나 믿지?ㅎㅎㅎㅎ]
[길드/야생닭: 아니 누님? 얘들아? 저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길드/베르르: 어휴 형. 형 잘하는 필살기 한방 날리고 닭장 갑시다. 됐져?]
[길드/야생닭: 됐어... 가면 될 거 아냐...ㅠㅠ]
[길드/순한양: 어허 는믈 닦고요!]
[길드/묵요: 천천히오세요ㅎ 저희 몸풀고 있겠습니다ㅎㅎ]
강마, 강마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닉네임이었다. 자게에서 봤는지, 지나가다 봤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에 남을 정도라면 분명 꽤 명성이 있는 유저일 것이다. 얘들이 무슨 모략을 꾸미는지는 몰랐지만, 서련은 일단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밑에서는 꾸준한 도발과 조롱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들 왜 이렇게 감흥이 없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꾹꾹 참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건 하진도 마찬가지인지,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곧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터져버렸다. 누군가 하진의 역린을 건드린 탓이었다.
[상마족: 키키야, 개가튼 길드보다 우리 길드가 낫지 않냐?ㅋㅋㅋㅋ 근데 뭐 웃다가?ㅋㅋㅋㅋㅋ 까놓고 ㅅㅂ 거기 너 없음 쟛밥인데 너무 인생걸지 마랔ㅋㅋㅋㅋㅋㅋ 보니 딱 통수맞을 각이더만ㅋㅋㅋㅋㅋ]
[싱싱싱: 길드 순위 300위도 순위냐?ㅋㅋㅋㅋㅋ 아참 니네길드지?ㅋㅋㅋㅋㅋㅋ 컨도 그지고 템은 뭐 망사시리즈고ㅋㅋㅋㅋㅋ 형들 좀 본받아. 형들 이번에 89위 찍었단다?ㅋㅋㅋ]
[종마: 인심썼다ㅅㅂ 넘어온나. 형들이 마음 넒게 써서 받아주맠ㅋㅋㅋㅋㅋㅋ]
[케케신발: 너 정도면 뭐ㅋㅋㅋㅋㅋㅋ 3줄 욕 좀 읊어봐랔ㅋㅋㅋㅋㅋ 들어오면 형들이 ㅈㄴ 예뻐해줄라니깤ㅋㅋㅋ]
[개솔: 키키야ㅋㅋㅋㅋ 파리어떠냐?ㅋㅋㅋ 발바닥 비비면서 고분고분 있음 형들이 아주 끼고 다녀줄건데ㅋㅋㅋㅋㅋㅋ아이고 예쁜놈앜ㅋㅋㅋㅋㅋㅋ]
순간 숨 막히는 공기가 어깨를 내리눌렀다. 로운과 원호의 시선이 천천히 하진에게 향했다. 직후 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친 하진이 턱을 악다물고 이글이글한 시선으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꽉 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웃.
“새끼들이 씨발, 이러쿵저러쿵 존나 씨부렁거리네.”
짓씹듯 내뱉어진 말에서는 살기가 묻어나왔다. 하진은 급히 외투를 벗어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한 대 태우고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얌전히.”
그리고는 서련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진의 어깨너머를 보자 어색하게 웃고 있던 로운과 원호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련은 마지못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끼들이 수작 걸면 무시하고. 일찍 올 테니까.”
“…늦게 와도 돼.”
어차피 늦게 올 것 같아 그렇게 말한 건데, 하진은 더워서 내린 외투의 지퍼를 끝까지 올려주며 금방 오겠다고 확실히 말했다. 서련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진이 가자마자 외투의 지퍼를 쑥 내렸다.
“좋았어! 나도 오랜만에 방송이나 해야지.”
로운이 들뜬 목소리로 하진의 자리를 침범한 건, 하진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로운은 신난 모습으로 하진의 자리에 앉아 스킬조작과 위치, 트리를 이것저것 확인한 후 키보드를 옆으로 바짝 붙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어 하진의 자리에 있는 키보드를 누르며 제 모니터에 비치는 하진의 캐릭의 방향과 동선을 확인했다.
“야, 나 못 찍으니까 형 불러.”
“네가 불러줘. 나 준비 좀 하게.”
“아, 새끼…. 귀찮게 구네.”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원호가 카운터에 있는 사장을 호출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뭐냐하면, 로운이 묵요와 눈설 캐릭을 양손으로 조작하며 적응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몇 번 조작을 하던 로운은 그새 적응을 마쳤는지 양손의 뼈를 우드득 풀며 제대로 할 준비에 나섰다. 눈빛부터가 이미 변해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멍청하게 쳐다보는 서련에게 빙긋 웃어주기까지 했다.
“이거 보면 형 저한테 아마 반할걸요?”
“…어, 그래?”
하진이 들었으면 까무러쳤을 얘기를 로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얼마가지 않아 카운터 쪽에서 호출을 받은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장의 손에는 작은 웹캠이 들려 있었는데, 그걸 보고서야 서련은 로운이 뭘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로운, 아니. 묵요가 유명해진 이유. 그건 바로 2인 조작 방송 덕분이었다. 물론 1인 조작 컨으로도 많이 발라먹으며 다니지만, 묵요가 대단한 이유는 바로 동시 2인 조작으로도 수준급 실력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걸 찍어줄 사람이 바로 이 옆에 있는 사장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야, 드디어 방송하냐? 걱정마라, 형이 잘 뽑아서 올려주마.”
“형, 저번에 얼굴 다 나오게 찍었던데 오늘은 좀 제대로 좀 찍어줘요. 손하고 모니터 위주로.”
“이놈이 여친 생기라고 형이 힘을 실어줬더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 잘생긴 얼굴 어디다 썩히려고 그러냐? 자자, 형이 이번에도 잘 찍어줄 테니까 걱정마라.”
“알겠어요, 알겠어. 그럼 하관만.”
“하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정 그러면 얼굴은 좀 피해서 찍어줄 테니까, 실력발휘 좀 해봐라. 잠깐 뭐야…? 하진이 녀석, 요새 힐러 키우냐? 아니 그놈 저기 가서….”
“형, 형! 형!! 빨리! 아, 좀 빨리 연결해서 찍어 봐요! 쟁 시작하잖아!”
“시끄러워, 이 자식들아. 지금 연결하잖아!”
하진이 얘기가 나오자 로운과 원호가 일제히 컹컹 짖기 시작했다. 서련은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보다가 웹캠이 연결되었을 때 즈음 제 모니터 화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옆에서 날고 기는 손동작을 보고는 홀린 듯 다시 돌아보았다.
“좋았어!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새끼들, 어디 뒤져봐라.”
“아, 형! 저까지 찍지 말고 로운이 새끼만 찍어요.”
“니들 얼굴 그따위로 쓸 거면 나 좀 줘라. 아니, 요즘 애들이 생긴 것답지 않게 왜 이리 숙맥인지 모르겠네. 이놈들아, 나 때는 말이야….”
“예, 예. 형 최고. 됐죠? 아, 그리고 형. 미리 말하는데, 올릴 때 무음으로 올려요.”
“이것들이 형 말하는데…! 아휴, 뒷골 땡겨! 이것들도 손님이라고 내가…!”
“아, 예.”
“갑니다. 잘 찍어주세요, 형.”
로운의 말에 서련의 시선이 다시 게임화면으로 향했다. 서련 빼고는 죄다 점프를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반응에 서련도 나름 준비를 하려는데, 로운의 말이 불쑥 길드창을 채웠다.
[길드/묵요: 키키형은 잠시 뒤로 빠져서 제 컨 좀 봅니다ㅎ]
[길드/묵요: 아 그리고 곧 도착이라네]
[길드/호백조: 자 그럼 절미들 가야지? 절미들 출격!]
서련은 그게 가서 싸우자, 라는 말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서련도 킬리를 소환하고 도핑을 돌린 건데, 난데없이 우렁찬 외침이 주변을 떠들썩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그 외침의 주체는 땅을 치며 오만 난리를 피우고 있는 베르르와 순한양이었다. 구르고 울고, 뛰며, 저들끼리 오두방정을 떨어댔다. 방정도 이런 방정이 없었다.
[베르르: 혀엉!!!! 키키혀엉!!!!]
[순한양: 혀엉!!!! 키키혀엉...!!]
[베르르: 혀어어엉!!! 혼자 왜 거길 내려가서!!!!! 혀엉!!!]
[길드/키키아: 저기, 얘들아]
[순한양: 아니 왜 갑자기 아래에!!! 아래에에에!!! 그래 거기!!!! 키키형이!!! 혀엉!!!]
[베르르: 아니 거기 말고 그 옆에!! 옆에!!! 아니 뒤에!! 뒤라고 이 멍청이들아!]
[순한양: 형! 혀엉어어어엉!!]
[베르르: 혀엉!! 키키혀엉!!! 거기서 뻗으면!! 뒤에 있다고 이 닭대갈들아!]
“…….”
서련의 눈이 의미 없이 깜빡였다. 이쯤 되면 사기 아닌가. 베르르와 순한양의 말을 철썩 같이 믿은 개개길드는 개미떼처럼 이리저리 움직여 간식 찾는 강아지처럼 여기저기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킬리가…안 보이나? 서련은 제 캐릭 뒤에 서 있는 거대한 킬리를 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큰데 안 보인다고? 그런 서련과 달리 로운이나 원호는 키득거리느라 바빴다.
교란인가. 그런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길 한참, 개개길드가 속은 걸 깨닫고 침을 튀기며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을 때 즈음 난데없이 포격이 날아들었다.
콰앙하고 터진 광역기가 주변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고 각종 상태이상을 넣어 유저들을 순식간에 그로기 상태로 만들었다.
처음엔 건블리아가 쏜 광역기인줄 알았는데, 기차게 빨리는 개개길드의 피를 보고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개개길드를 먼저 덮친 건 건블형이 아니었다. 휴리사도 아니었고, 야생닭도 아니었다.
-신마제국의 ‘킬레아’가 혈전의 쇄속을 사용해 주변 적들에게 광역기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신마제국의 ‘킬레아’가 ‘명전’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킬레아’가 ‘해골물’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바로 킬레아였다.
저 많은 사람들한테 언제 대결권을 다 넣었는지, 손 빠른 정도가 가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니, 저 신출귀몰함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장총을 쓸 때마다 화력에 펄럭이는 붉은 코트와 버건디 색의 카우보이 모자가 이제는 킬레아의 특성처럼 보였다. 서련이 알기로 저 장비나 외형은 부르는 게 값이라 할 정도로 부의 절정에 놓인 자들만 소유하고 있는 유니크 등급의 템이었다.
저 정도면, 돈을 쏟아부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길드/묵요: 아 또 선수를 치시네 새1끼가]
[베르르: 킬레아다! 킬레아ㅋㅋㅋㅋㅋㅋ 님 우리 길드 들어오실?ㅋㅋㅋㅋㅋㅋㅋㅋ]
[킬레아: ㅈㄲ]
[순한양: 들어오고 싶어서 탈모왔다는 분은 대체 어디사는 누구?]
[킬레아: 탈모는 ㅅㅂ 니들이고]
[베르르: 응그래 나도 너 필요 없거덩?ㅋㅋㅋㅋㅋㅋㅋ ㅅㅂ 뭐 탈모?ㅋㅋㅋㅋㅋㅋㅋ ㅅㅂ 너 머머리지 이 샛꺄ㅋㅋㅋㅋㅋ 키키형 머머리 조온나 싫어하거든 샛꺄! 오지마 ㅅㅂ]
[순한양: 저 시건방진 넘부터 밟아야겠넿ㅎㅎㅎ 응 썰려봐야 정신을 차리지ㅎㅎㅎ 넌 ㅅㅂ 오늘 키키형 못볼줄 알아라ㅎㅎㅎㅎㅎ]
[킬레아: 아주 ㅈㄹ을 해쌌네]
킬레아는 말하는 와중에도 옆으로 구르고 뛰며 화려한 쟁을 뜨고 있었다. 어째 아무도 도와줄 생각을 안 하는 게, 너 한 번 좆돼 봐라 하는 심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도 방치는 그리 길지 않았다. 좀이 쑤셨는지 로운이 곧이어 출격소식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로운의 말에 서련을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바위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서련이 뛰어내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죄다 서련을 말렸기 때문이었다.
[길드/묵요: 키키형은 그냥 계세요ㅎ]
[길드/베르르: 킬리야 형 잘 지키고 있어]
[길드/순한양: 형형 제가 킬레아 밟고 올 테니까 기다려요]
[길드/호백조: 그런고로, 형 이따 뵙겠습니다ㅋㅋ]
옆을 힐끗 보자, 현란한 손놀림이 눈에 들어왔다. 로운은 왼손으로는 묵요를, 오른손으로는 하진의 눈설을 컨트롤하며 엄청난 집중력으로 개개길드를 발랐다. 영상으로야 몇 번 보긴 했지만, 그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직접 보니 느낌이 달랐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옆에 웹캠이 있는 것도 잊고 입을 벌린 채 볼 정도랄까. 뒤늦게 웹캠의 존재를 깨달은 서련이 외투로 얼굴을 급히 가렸지만, 그런데도 시선을 떼지는 못했다. 마치 피아노를 치듯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이 쉴 새 없이 키보드 위를 오갔다.
“저 멋있죠, 형.”
거기에 더해 씩 웃으며 말을 거는 것까지. 그냥 얘들은 미친 것 같았다. 이런 애를 소환사로 이기는 하진이나, 6명은 식은 죽 먹기라는 원호나, 그냥 셋 다 고인물을 넘어 썩은물 수준이었다.
“…로운아, 조작감 다르지 않아?”
“조작감이요? 아, 동시반응속도 말하는 거죠? 음… 제 기준이긴 한데, 페스트핑 굴리고 조작시간 계산해서 움직이면 할 만해요. 약간 화면마다 움직임이 빗겨 가거나 느린 경향이 있긴 한데…. 조금만 만져보면 금방 익숙해져서요. 스킬이야… 금방 외우니까 그건 문제 될 거 없고. 애초 한 화면에서만 보니까 뭐…. 아, 나중에는 세 개도 해보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로운을 보는데, 순간 얘가 괜히 법학과를 간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근데 세 개면….
“어떻게?”
“발가락까지 동원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괜찮아요, 형. 저 잘 씻고 살아요.”
서련은 다시 한 번 그래, 하고 대답해 주었다. 말하는 와중에도 로운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화면 위로 오가고 있었다. 키보드 쪽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뇌가 양쪽에서 따로 돌아가는지, 각 캐릭의 회피기나 공격기, 방어기 등을 상황에 맞춰 사용하고 전환했다.
“어, 왔다.”
로운의 말에 서련의 시선이 모니터 끝에 닿았다. 숲 끄트머리에서부터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우두두두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작았던 형체는 금세 커졌다. 서련의 길드원들과, 처음 보는 헤비 유저 분위기를 뚝뚝 흘리는 수많은 유저들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과금러랄까.
서련의 시선이 제일 앞서 건블리아와 함께 발맞춰 달려오고 있는 화려한 갑옷의 유저에게 닿았다. 머리 위에는 ‘강마’라는 닉네임이 떠 있었다. 아까 로운이 말했던 유저였다.
“걱정 마세요. 쟤네 나쁜 애들 아니에요.”
이번에도 로운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미소가 신빙성을 실어준 건 아니었지만, 서련은 예의 바르게 건네지는 말을 보곤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강마: 킬레아 저 가축새1끼는 ㅅㅂ 여기 왜 와 있는겨. 아오 지 꼴리는대로 아주 마음껏 사시는고만? 에라이 *까라 샛꺄]
일단 킬레아를 싫어하는 사람 치고 나쁜 놈 없다는 게 서련의 정설이었다. 좀 불쌍하긴 했지만, 자업자득이라고 평소 행실이 안 좋으니 저러는 거 아니겠나 싶었다.
서련은 킬레아를 애도하며 방치된 자신의 캐릭으로 돌아왔다. 화면을 돌려 아래를 보자 이미 욕설이 난무하는 쟁이 활발하게도 진행되고 있었다. 거기에 서련의 길드와 이십이나 되는 강마의 ‘블러더’ 길드가 합세하자 주변은 온갖 천재지변이 다 몰려든 것 같은 풍경으로 변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온갖 속성별 스킬이 전부 모여 정말 그래 보였다.
그 한가운데에 서련의 캐릭과 킬리만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꼴이었다. 서련은 눈을 굴리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음…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는 안 했으니까. 주변을 쓱 훑어보자 아무도 이쪽에 관심을 주지 않고 있는 게 보였다. 마침 하진도 없겠다, 서련은 슬금슬금 뒤로 빠지다가 유저들이 없는 쪽으로 재빨리 활강했다. 그리고 착지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서련의 캐릭 뒤로는 투닥투닥 뛰며 달려오는 킬리가 있었다. 사나운 눈초리로 집중해서 달려오는 모습이 기특하고 예뻐서, 서련은 도중 가다 말고 킬리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 마, 킬리야. 오늘도 포탈은 꼭 타줄게. 우리 토순이 만나러 가자.
서련은 얼마 안 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서련이 포탈을 타고 넘어 토순이를 만날 동안까지 하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진이 나타난 건, 무서운 모습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로운과 원호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웹캠을 찍던 사장이 좋은 걸 건졌다며 흥얼흥얼 자리를 벗어났을 때였다.
“…일찍 좋아하네.”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야 나타난 하진을 보며 서련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이 와중에 얼굴은 또 왜 저렇게 후련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하진의 그 후련한 얼굴은 게임을 끝내고 피시방을 나올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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