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3/28)

2장.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왜 전화를 안 받아, 하….”

하진은 무서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탁자를 탁탁 두드리는 손끝에서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게, 밤늦게 들어온 집 안이 빛 한 점 없이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평소 밝아야 할 방도 지금은 누군가의 부재를 알리듯 깜깜하기만 했다.

어딜 나간다는 말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몇 시에 들어온다는 말이 있던 것도 아니다. 낮부터 연락이 없더니, 지금은 아예 깜깜무소식이었다.

“위치추적을 깔아 놓든가 해야지, 씨발 진짜….”

끝내 하진은 핸드폰을 거칠게 내팽개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불이 들어와 있는 핸드폰 화면에는 자정을 알리는 숫자가 떠 있었다. 온 동네를 쑤시고 다니다 포기하고 들어온 게 불과 20분 전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서련의 행방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하진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시 나가 찾아볼 생각이었다. 외투도 거추장스러워 벗어던졌다. 핸드폰만 덜렁 들고 나서려던 그때, 손안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로운…?”

재빨리 발신자를 살피자, 의외의 이름이 그곳에 떠 있었다. 하진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아직까지 끈질기게 연락하고 지내는 절친 겸 원수. 원호와 어울리며 삼똘끼 소리를 들었던 멤버 중 하나였다.

그 이름을 본 순간 하진의 눈매가 무서울 정도로 가늘어졌다. 그리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그것도 누구 하나 죽일 살벌한 목소리로.

“너였냐?”

<와, 역시 눈치 하나는 백단이야? 겁나 무서워.>

“장난할 기분 아니니까 장소부터 불러.”

<여기 지금… 모르겠고, 일단 택시타고 가고 있으니까 십분 뒤에 나와라.>

“여서련은.”

<형? 형 지금 내 옆에서 예쁘게, 잘,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는데? 걱정마라, 하진아. 내가 숙취해소제까지 손수 먹여드렸으니까.>

“이 새끼가 뒤질려고…!”

<말 좀 곱게 쓰세요, 개새끼님. 아니, 그러게 작작 좀 방해하지 그러셨어요. 세탁하면 모를 줄 알았냐? 허 참,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얼굴이 두꺼운겨. 어쨌든 십분 뒤에 나와라.>

뚝-

사람 속 뒤집는 웃음소리를 내며 로운은 그대로 제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진의 입에서 까드득 거리는 이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발장을 한 번 걷어찬 하진은 그대로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갔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괜찮더니, 지금은 하늘에 구름이 가득 낀 게 꼭 비라도 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늘을 힐끗 본 하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고 가라앉힐 겸 담배를 찾았다. 그러나 채 빼 들지 못하고 주저앉아 욕을 짓씹어야 했다.

서련이 담배향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이걸 그냥 죽여? 하진은 눈을 음침하게 뜨며 이로운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상상을 했다. 서련이 그놈을 어떻게 만났고, 어디서 만난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서련에 관한 세상 모든 잘못은 다 상대방에게 있다는 게 하진의 결론이었으니까.

“그래.”

나름대로의 결론은 마친 하진은 눈을 번뜩이며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때에 맞춰 오피스텔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택시가 보였다. 비상등이 켜진 택시 쪽으로 다가가자, 뒷좌석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이로운이었다.

“형, 괜찮겠어요? 힘들면 저 잡으세요.”

“응…. 어, 괜찮…아.”

잔뜩 늘어진 어눌한 말이 하진의 머리를 관통했다. 하진이 뒷좌석 문을 잡은 것과 서련이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린 건 거의 동시였다.

술기운이 올라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와 뺨이 하진의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차가운 바람에 움찔 감기는 나른한 눈매가 아슬아슬하게만 보였다. 서련의 파르르 떠는 속눈썹만큼 하진의 손도 파르르 떨렸다.

이걸… 저 새끼가 봤다는 거지?

하진의 시선이 무서운 속도로 이로운에게 향했다. 그러나 채 뭐라 말하기도 전에 움찔 굳어져야 했다.

“…하진아.”

하진의 손 위로 뜨거운 체온이 번졌다. 하진의 시선이 곧장 서련에게 향했다. 조금은 멍한 모습의 서련이 졸음이 가득한 시선으로 하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진은 고개를 치켜들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진의 턱과 목줄기 위로 핏줄이 툭 붉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조금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서련이 충분히 제 발로 설 수 있다는 점이랄까. 곤죽이 될 만큼 마시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으로 다가왔다.

옆에서 깐족거리는 새끼가 없었다면, 더 다행일 수도 있었겠지만.

“빡이 치셨쪄요? 턱에 힘 들어간 거 봐라. 한대 치겠어, 아주.”

시시덕거리는 로운을 한 번 노려본 하진은 비틀거리는 서련의 허리를 감아 단단히 부축했다. 그런데도 서련의 고개는 자꾸만 아래로 꺾이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 새끼야.”

“그게 좋은 말이냐? 성하진 이거 완전 똘끼 새끼네.”

로운은 웃는 낯으로 하진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하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러나 딱히 달려가 어쩌진 않았다. 누구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로운의 시선이 아주 잠깐 서련에게 향했다. 그리고 서련의 허리를 꽉 붙든 하진의 손으로 이동했다.

“야.”

로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뜸을 들였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곧 한숨과 함께 로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련 형 오늘 속상한 일 있었던 것 같더라. 위로까진 무리더라도 너무 막 뭐라고 하지는 마라. 술도 내가 먼저 권한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해, 씨발.”

로운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택시로 향했다. 물론 몸을 욱여넣기 전 날아든 공격에 십년감수를 했지만, 그런대로 택시 안으로 몸을 날려 피할 수는 있었다.

“손버릇 좀 고쳐, 이 개새꺄. 와, 씨…. 심장 존나 벌렁거리네. 서련형한테도 그러면 넌 씨발, 나한테 죽을 줄 알아.”

하진은 그 말에 잠시 으르렁거렸으나, 별말 없이 돌아섰다. 그만하라는 듯 웅얼거리는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여서련한테 연락하기만 해.”

“아, 예. 들어가기나 하시죠? 말도 더럽게 많네.”

로운은 웃는 낯으로 배웅하며 손까지 흔들었다. 그 모습을 흘겨보며 하진은 서련을 이끌었다. 로운이 택시기사한테 다음 목적지를 말한 건,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새끼, 저러다 미움받지.”

서련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로운의 시선이 느지막이 창가로 옮겨졌다. 어째서인지, 서련의 모습이 머릿속에 박힌 듯 지워지지 않았다.

***

“겉옷만 좀 벗어.”

“됐어… 놔….”

옷에 손만 대려고 하면 몸부림을 쳐대는지라, 하진은 결국 손도 못 대보고 그대로 마음을 접어야 했다. 잠들면 겉옷만이라도 벗기자는 생각을 곱씹으며 겉옷을 꽉 쥔 손을 애써 다독여 풀어냈다.

“안 할게. 그러니까 힘 좀 빼봐.”

안 한다는 말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손마디가 하얗던 손은 금세 붉어졌다. 그 손을 잡아 꽉 쥐며 하진이 서련의 눈을 지그시 마주했다.

“그래서…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그래. 말해봐.”

서련은 입을 꾹 다문 채 열지 알았다. 그 모습에 한참을 기다리던 하진이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나오는 건 깊은 한숨뿐이었다.

“앞으로 저 새끼가 말 걸어도 무시해. 씨발, 그냥 무시하고… 연락 좀 잘 받아.”

다그치듯 쏟아지는 말이 속상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서련의 뺨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쏟아지는 눈물에 하진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울지 마.”

좋게 말하면 좋으련만, 하진은 누군가를 달래는데 참 소질이 없었다. 그건 서련을 처음 안 때부터 변하지 않고 줄곧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련이 울 때, 하진은 참 난감했다.

“…울지마, 형.”

“왜….”

꾹 다물려 있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눈물을 닦아주는 하진의 손을 밀어내며 서련은 더운 숨을 내뱉었다.

“왜… 사사건건 간섭하는데…?”

“뭐?”

“내가 누구를 만나든 뭘 하든 다… 간섭하잖아. 내가… 아무것도 안 하길… 바라잖아….”

“…간섭을 안 했으면 하는 거야?”

“응….”

발음은 어눌했지만 하진은 그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뒤늦게야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얘기해 봐. 그건 못 들어줘.”

그 말에 서련의 마른 어깨가 들썩였다. 흐느낌과 함께 서련의 뺨 위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서러워 죽겠다는 모습에 하진의 어금니도 꽉 다물렸다.

“그만 울어.”

하진은 웅크려 좁아진 서련의 어깨를 한 팔로 휘감고 끌어당기며 겨우 입을 떼 말했다. 그러나 제 어깨를 단단히 미는 손길에 채 안아보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다.

“상관…없잖아….”

다 풀어진 어눌한 목소리가 선을 그었다. 잔뜩 붉어진 눈가와 뺨, 입술이 아프게 눈을 찔렀다. 하진에게 서련은 우는 것도 위태로울 만큼 아픈 사람이었다. 마음이 다 닳은 여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그거 말곤 다… 들어 줄게. 갖고 싶은 거, 해달라는 다 해줄 테니까 한 번만 양보해. 그건… 내가 안 돼. 내가… 안 돼.”

서련의 뺨을 쓸어 만지며 하진이 부탁하듯 조곤조곤 얘기했다. 그런데도 서련은 한참을 울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토끼눈이 되도록 울었다. 하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줄 뿐이었다.

서련이 입을 연 건, 흐느낌이 잦아들 때 즈음이었다. 제 옷깃을 단단히 여며 쥔 채 서련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같이…. 같이 있어 주는 건…?”

하진의 손끝이 멈칫 굳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하진은 두 눈을 쓰게 감았다 뜬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 좀… 혼자 두지 마, 하진아….”

그 말의 뜻은 현재에 국한되지 않았다. 하진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외롭게 두었다는 것도. 눈물로 젖은 서련을 보던 하진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입안에서도 쓴맛이 나는 듯했다.

“근데 너 어차피 이거 내일 기억도 못 할 거잖아. 또 간섭한다고 할 거잖아.”

“안… 그럴게.”

“번복해도 안 들어줘. 생각 잘해.”

서련의 고개가 몇 번이나 끄덕였다. 점차 숙여지는 턱 아래로 마디가 굵은 손이 들어왔다. 턱 끝을 살짝 받쳐 들고, 하진은 고개를 기울여 속삭여 주었다.

“…알았어. 내일부터 같이 있어 줄게. 그러니까… 고개 들고 나 봐.”

서련의 고개가 점차 하진 쪽으로 올라갔다. 서련의 턱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달아오른 입술을 눌러 벌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하진은 그 모습을 한참이나 내리뜬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서련의 졸음 가득한 눈이 차츰 감기기 시작했다. 하진의 고개도 점차 숙여졌다.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뜨거운 숨결이 겹쳐진 건, 졸음을 참지 못한 서련이 눈을 감고 까무룩 잠들었을 때였다.

온몸이 뻐근한 느낌이었다. 비몽사몽한 채 옆으로 돌아눕던 서련은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눈살을 확 찌푸렸다. 눈을 슬쩍 뜨자 방이 한 바퀴 돌다 뒤늦게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련은 그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며 어제의 일을 상기했다.

“어제… 그러니까….”

로운과 함께 밥집 겸 술집에 가서 잔을 부딪치며 찌개를 먹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일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평소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예 못 먹지는 않아서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어느 순간 훅 갈 줄이야.

지끈 올라오는 두통에 서련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곧 눈을 번쩍 뜨고 제 몰골을 확인했다. 손으로 몸을 더듬자 옷의 촉감이 만져졌다.

어제 입고 나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대로는 아니었다. 외투는 물론 목티 위에 입고 있던 카디건도 벗겨져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서련의 손끝에서 핏기가 가셨다.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서련은 다짜고짜 이불을 걷어 일어나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서련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하진이 있었다. 방문 소리에 하진은 하던 것은 멈추고 서련을 돌아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그런데도 서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네가… 벗겼어?”

“뭘.”

“옷… 내 옷 말이야.”

하진은 손에 쥐고 있던 우유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삐딱한 모습으로 서련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더니 기가 찬다는 듯 ‘하’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뭔가 했더니…. 하아, 그럼 지금 네가 입고 있는 건 내가 벗겨놓고 다시 입혔다는 소리냐? 불편할까 봐 외투 좀 벗기고 재워놨더니, 이건 뭐 적반하장도 아니고….”

평소와 같은 표정과 말투에 쿵쿵 뛰던 심장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서련은 불만 많은 표정으로 눈을 흘기고 있는 하진에게 주춤주춤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소매를 끌어 잡고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해, 하진아. 기억이 안 나서….”

“자랑이다. 됐으니까 밥 먹을 준비나 해.”

그보다 먼저 씻고 싶었지만, 노려보며 말하는 하진의 기세가 무서워 얌전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서련의 앞으로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놓였다. 들고 홀짝이자 꿀을 탄 건지, 굉장히 달았다.

“머리 아프다고 징징거리기만 해.”

…귀신이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외면하며 우유를 홀짝이자 그다음으로 계란물에 절여 구운 토스트가 서련의 앞에 놓였다. 매스꺼움을 무시하고 한입 베어 물자, 하진이 서련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밥 먹고 씻고 나와.”

“왜?”

“같이 피시방 가게.”

그러니까… 왜? 서련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런 서련의 머릿속을 어떻게 안 건지, 하진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어제의 일을 알렸다.

“놀아달라며. 따로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얘기하고.”

“…내가 그랬다고?”

“이거 봐. 또 기억 못 하지. 그렇게 놀아달라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더니.”

서련의 표정이 이제는 묘하다 못해 기괴해졌다. 못 믿겠다는 듯 하진을 흘겨보는 시선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덕분에 하진의 표정은 다시 험악해졌다. 가만 보니 언뜻 억울함까지 비쳤다.

“그러게 술은 왜 마셔? 기억도 못 할 거 왜 마셔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냐고. 그래놓고 전화는 또 안 처받지? 다음에도 이딴 식으로 나와 봐. 죄다….”

“알겠어, 알겠어. 준비하면 되잖아.”

점점 깊어지는 잔소리에 서련이 결국 하진의 말을 자르고 냉큼 대답했다.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하진이 서련의 전화를 안 받은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는 전화기를 손에 쥐고 사는지, 신호음이 두 번을 넘은 적도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여기서 덤벼봤자 서련만 손해라는 것이다.

서련은 남은 토스트를 다 먹고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에서 여분의 옷을 가지고 욕실로 향했다. 내내 불만스럽게 찌푸려져 있던 하진의 표정도 그제야 말끔히 펴졌다.

‘근데 왜 피시방이야….’

물론 서련의 성격상 어딜 쏘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딜 가자고 해도 거절했겠지만, 그런 걸 다 고려했을 리는 없을 테니 그냥 저가 가고 싶은 곳을 고른 게 아닐까 싶었다. 마침 집에 있는 컴퓨터는 한 대고.

생각해보니, 하진과는 함께 피시방에 간 적은 없었다. 비단 피시방뿐만이 아니라, 하진과 함께 무언가를 함께한 기억은 없었다.

하진과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학년이 달랐기 때문에 서련이 학교에서 하진을 마주할 일은 어쩌다 한 번 정도였다. 그것도 이동수업 중 우연히 마주치는 정도랄까.

게다가 그 당시 서련은 하진과 그렇게 애틋하거나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하진은 특히나 더 맹수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곁에 있지만, 위험한 존재. 그런데도 서련에게는 조금이지만 그 곁을 허락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관심했던 건 오히려 서련쪽이었다. 서련의 학교생활은 평탄한 편은 아니었지만 조용했고, 서련도 그걸 원했으니까. 그렇다고 어울리던 사람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긴 관계를 잇지는 못했다. 전부 얕은 관계였을 뿐.

아니. 사실 그 당시 서련에겐 친구보다 사랑이 우선이었다. 정확히는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탁-

서련은 욕실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다짜고짜 옷 벗겼냐고 묻던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하진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물론 하진이 성격에 이걸 봤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서련은 그것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하아…. 얼마나 마신 거야.”

기억이 안 날 정도면, 상당히 마셨다는 건데 제가 실수나 안 했을지 걱정되었다. 한참이나 어제의 일에 대해 걱정하던 서련은 자포자기할 때에 이르러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말라 볼품없는 몸이 거울에 비쳤다. 자신의 몸을 힐끗 보던 서련은 곧 고개를 돌리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매끄럽고 굴곡 있게 떨어지는 허벅지 안쪽. 다리를 벌리면 만연히 드러나는 상처들. 장골부터 내려와 허벅지를 휘감은 뱀 같은 형상.

그곳에는 흉하게 자리한 문신이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특히나 하진에게 절대 보여줘서 안 되는 서련의 마음의 상처였다.

***

“아, 새끼 더럽게 못하네. 어글이 튀잖… 씨발, 진짜…!”

서련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옆에 앉아 아까 전부터 욕을 쏟아내고 있는 하진을 쳐다보았다. 함께 피시방을 가겠다고 추운 길을 뚫고 집 근처 피시방에 온 건 좋은데, 설마 하진이 서련이 있는 라히브라 서버에 접속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그래놓고 저는 또 따로 파티를 맺고 놀고 있다. 이거야말로 방치 플레이였다. 하진의 모니터를 슬쩍 보자, 어그로 관리를 못 한 파티원들이 전멸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진이 몹들을 피해 파티원들을 살리고 있었지만, 워낙 몹들이 많아 일어나도 다시 픽픽 죽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지 말라고!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현재 파티에서 살아남은 자는 하진 혼자였다. 혼자 산 것도 대단한데, 직업은 더 대단했다.

힐러. 하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이름은 또 어찌나 감성적으로 지었는지 머리 위에는 <눈설>이라는 닉네임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서련과 같은 종족인 신마족.

“도와줘?”

“됐어.”

하진은 서련의 말을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쳤다. 뭐, 사실 서련도 딱히 도와줄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서련이 속한 파티도 전멸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파티원들이 못해서가 아니었다.

[파티/베르르: 이 ** 자꾸 ㅈㄴ 깔짝대네ㅡㅡ]

[파티/순한양: 아 저 쫌생이 샛끼 ㅅㅂ 꼬장질하는 스케일도 꼭 지같이 ㅈㄹ]

[파티/베르르: 텐션 못 뽑나 아나 진짜]

오랜만에 공성전 퀘스트 좀 하겠다고 필드에 나온 것까지는 좋은데, 하필이면 공성 요새 근처에 자리 잡은 초소 근처로 신성족이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신성족 유저 몇 명이 와서 있는 대로 꼬장을 부리는데, 덕분에 서련이 속한 파티가 해체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해체 이유는 복수전 때문이었다.

[파티/건블리아: 흩어지지 마! 이놈들아! 아니 어디가는데!]

[파티/베르르: 저 생키들이 자꾸 열뻗치게 하자나여ㅅㅂ 누군 컨이 후달려서 안 쥑이고 있는 줄 아나]

[파티/순한양: 길마 형. 진짜 딱 한번만 쎄리고 올게요. 진짜 딱! 한 번만]

[파티/야생닭: 야야 가지마! 가지 말라고! 니들이 가봤자 안된다고!! 아오 저 고딩샛끼들이!]

[파티/휴리사: 막내들 진짜 젊다 젊엌ㅋㅋㅋㅋ 치기가 아주ㅋㅋㅋㅋ]

사실 이제야 밝히지만, 서련네 길드원들은 컨이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겨우 한 파티를 꾸려야 뒤치기로 살아남는 정도랄까. 그것도 그 안에 서련이 있어야지만 마음껏 신성족 땅을 휘젓고 다닐 수 있었다.

이 말은 뭐냐.

-신마제국의 ‘베르르’가 사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순한양’이 사망하였습니다.

늘 버럭거리는 저 두 어린 양도 그렇게 실력이 좋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물론 상대가 훈장을 단 상대라 더 맥을 못 추린 것도 있지만, 어쨌든 실력보단 객기가 앞서는 애들이었다.

“와, 개 못하네.”

나란히 발려 드러누운 베르르와 순한양을 보고 있던 서련의 옆으로 대뜸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옆을 힐끗 보자, 하진이 순수한 감탄이 서린 눈동자로 베르르와 순한양을 나란히 훑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서련은 나름 옹호의 말을 해주었다. 그래도 같은 길드원이 아닌가.

“애들이 아직 어려서 그래. 그래도 귀여운 애들이야.”

“뭐 귀여워? 애들? 그게 컨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럼 90살 할배는 뭐 다 신컨이고, 픽픽 죽는 놈들은 다 코찔찔 애들이야?”

옹호 한 번 했다고 아주 죽일 기세네.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는 하진을 보고 있자니 십 년은 늙은 느낌이었다. 서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대로 하진을 밀어냈다.

“네 거나 잘하시지?”

“당연히 자알 하고 있지.”

저 말이 자뻑 섞인 농담이면 코웃음이라도 쳐 줄 텐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로 하진네 파티원들이 죄다 살아 현재 2차 보스전을 앞두고 탐을 하고 있었다. 몸까지 꼬며 별 수작을 다 부리더니, 어떻게 파티원들을 잘 살려낸 모양이었다.

그냥 아까 그 장면을 찍어놨어야 했는데.

“이거 깨고 도와주러 갈게. 그때까지만 버티고 있어 봐.”

하진의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씩 웃는 모습이 특히나 자신만만해서, 서련은 충분히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 하진이 오기 전에 전부 해치울 생각이었다.

[파티/키키아: 베르랑 양은 리사누나한테 가 있어. 형이 상대할게]

[파티/베르르: 형 저놈들 개 치사해여... 한번에 다굴넣고 딜 빼는데 아놔]

[파티/순한양: 걍 닥1쳐... 쪽팔려 생꺄]

[파티/건블리아: 어휴 그러게 이것들아 가지 말라니까 드럽게 말 안듣네]

[파티/야생닭: 막내님덜아? 제발 단독행동 하지좀 마시져? 늙은형들 죽일일 있나 이것들이]

[파티/베르르: 에이 우리 아재형님덜 편안히 모시려고 그런거져ㅋㅋㅋㅋㅋ]

[파티/순한양: 예압ㅋㅋㅋㅋㅋ]

[파티/야생닭: 어쭈 이것들을 그냥 확]

[파티/키키아: 다들 정화 악세 없어서 그래요. 지금 계속 피 빠지니까 일단 제가 먼저 상대할게요]

[파티/키키아: 건블형 저 아직 쿨 다 안돌아왔는데, 그때까지 딜 보조 좀 해주시고요]

[파티/건블리아: 오냐]

[파티/키키아: 앞으로 나오지 말고 거리 20미터 유지하면서 제 방향 따라오시고요]

[파티/키키아: 그리고 야생형 혹시 성력 쿨 되나요]

[파티/야생닭: 아직 15분 남아서 안될것 같다;;;]

[파티/키키아: 리사 누나는요?]

[파티/휴리사: 광역기 하나 남네. 가능?]

[파티/키키아: 네. 제가 건블형 빠지라고 신호주면 적중률 불려서 그거 한방 날려주세요ㅋ]

[파티/휴리사: 오키ㅋㅋㅋㅋ]

[파티/야생닭: 막느님들 이게 바로 리딩이랍디다. 알간?]

[파티/베르르: 모르간]

[파티/야생닭: ㅡㅡ]

[파티/순한양: ㅋㅋ야이 앀ㅋㅋㅋㅋㅋ 미쳤냐곸ㅋㅋㅋㅋㅋㅋㅋ]

저 나이 땐 낙엽 굴러다니는 것만 봐도 웃는다더니, 진짜였네. 서련은 막내 둘과 야생형을 뒤에 대기시키고, 간을 보며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훈장 단 신성족들을 훑었다. 인원은 총 네 명이었고, 훈장을 단 유저가 둘, 나머지 둘은 훈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공적 순위가 높은 유저들이었다.

[길드/키키아: 갈게요]

서련은 곧장 모든 주문서를 도핑했다. 캐릭 주변에 떠오르는 효과를 본 신성족들도 스킬 도핑에 들어갔다. 캐릭 위에 떠 있는 버프를 보자, 마법 저항과 반사 등 딱 마법 계열을 상대하기 위한 효력이 대부분이었다.

서련은 스킬 트리를 즉각 ‘적중’ 쪽으로 바꾸고 무기와 방어구도 적중 세트로 스왑해 장착했다. 물론, 모든 세트 갑옷은 전부 똑같은 외형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상대방은 서련이 세트를 바꿔 장착한 줄 모를 것이다. 뭐, 평소 서련의 캐릭을 잘 캐고 다니는 녀석들은 알지도.

[신성제국/조동사: 어우 무섭다, 앙키야. 좀 봐줄 생각은 없냐?ㅋ]

[키키아: 없는데요]

[신성제국/루트: 키키야ㅋㅋㅋ 킬레아 생킈랑 묵요 놈은 어디다 버렸어ㅋㅋㅋ 너 좋다고 둘이 아주 피를 토하며 싸우던뎈ㅋㅋㅋㅋㅋㅋ]

[키키아: 눈이 좀 삐신듯한데]

[신성제국/겟맥볼: 앙키야 버로우 칠 나이는 지났잖냐ㅋㅋㅋ]

[키키아: 이거요? 이거 음]

[키키아: 도발인데]

말끝에 제스처를 붙여 웃는 시늉을 하자, 상대측의 깊은 빡침이 전해져왔다. 다들 말없이 무기를 들고 뛰어오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서련도 곧장 앞으로 달려나갔다. 손끝으로는 광역기를 더듬더듬 찾았다.

‘다 근접전이네.’

어쌔신 둘, 탱커 하나, 검사 하나. 여기서 장거리가 그나마 가능한 건 탱커였다. 탱커에게 ‘포획’이라는 끌어당기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저항이 높은 유저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마법계열 유저들보다 캐스팅 시전 거리가 상당히 짧았다.

쉽게 말해, 포획에 걸리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먼저’ 조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광역덤불을 사용해 주변 적들에게 890만큼의 데미지를 주고 이동속도를 감소시킵니다.

데미지는 상대방의 기준 저항치와 방어력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게 공식적인 룰이었다. 저번 일로 적중 세트를 하나 사놓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적중 세트가 아니었으면, 광역기에 이렇게 넷이 전부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파티/키키아: 형]

[파티/건블리아: 형이 언제]

[파티/건블리아: 실망시키는 거 봤냐]

그 뒤를 이어 서련의 뒤에 숨어 있던 건블리아가 나와 어쌔신 한 명을 타깃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건블리아는 양손총 대신 파괴력이 좋은 장총을 하나 꺼내들고 딜이 묵직한 스킬만 꽂아 넣었는데, 적중률이 좋아서인지 딜이 시원할 정도로 잘 들어갔다.

장총의 장점은 크리티컬이 들어갈 경우, 스턴이 발동된다는 것이었다. 공격속도가 양손총 보다는 느렸지만, 거리를 두고 보조하는 입장에서는 장총만 한 게 없었다.

“일단 한 명.”

덕분에 스턴기에 해롱해롱거리던 어쌔신은 물약 한 번 못 써보고 바로 골로 가야 했다.

[신성제국/조동사: ㅅㅂ 저 거너 **가]

그 사이 서련은 상태 이상 해제 물약을 먹고 달려오는 유저 세 명의 발을 묶고 있었다. 탱커에게는 풀강을 마친 사역수를 보내 도발을 넣고 강제로 타깃을 뺏게 했고, 나머지 어쌔신과 검사는 속된 말로 ‘굴려’ 버렸다.

소환사에게 ‘굴린다’의 의미는 ‘망령의 저주’라는 스킬을 써 괴수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일단 망령의 저주에 걸리면 물약은 물론, 스킬도 통하지 않아 그 저주가 풀릴 때까지 손 놓고 있어야 했다.

때문에 유저들은 이 망령의 저주에 안 걸리기 위해 저항이 붙은 악세사리와 온갖 좋은 템으로 도배하는 등 완고한 대비를 하고 다녔다. 특히나 쟁을 좋아하는 유저들은 더더욱.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템은 서련도 자신 있었다. 물론 그 템의 물주는 서련의 옆에서 따분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녀석이었지만.

서련은 망령의 저주에 걸린 유저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후려패기 시작했다.

[신성제국/루트: 앙키야 ㅅㅂ 너 너무 치사한거 아니냐?!]

[키키아: 뭐가요]

[신성제국/겟맥볼: 아오 어디서 지금 ㅅㅂ 네임드를 데려와서 염뻥질이여]

[키키아: 아 제 킬리요?]

[신성제국/조동사: 아 제 킬리요? ㅅㅂ 나가 디져라 샛꺄! 아오! 저걸 이기라고 만든 르덴이나 ㅅㅂ 저걸 강화한 샛끼나ㅡㅡ 얼척없네 와ㅋㅋㅋㅋ]

서련의 시선이 탱커를 열심히 후려패고 있는 제 사역마에게 향했다. 사역마의 머리 위에는 ‘킬리’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불이 물결치는 목도리를 두른 큰 뿔이 난 용같이 생긴 사역마는 초창기에 나왔던 사역마 캐쉬템 외형으로, 지금은 팔지 않는 아주 귀한 외형의 사역마였다.

사실 이 외형을 선물해준 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유저였다. 백방으로 알아보고 에르덴에 문의까지 넣어봤지만, 돌아온 말은 탈퇴한 유저라는 막연한 대답뿐이었다.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서련이 그에 대해 아는 건 딱 하나. 그 유저의 닉네임뿐이었다. ‘킬리’.

현재 서련의 사역마 이름이 바로 그 이름이었다.

[베르르: 아니 왜 우리 키키형한테 ㅈㄹ이야 닭ㅅㄲ들이]

[순한양: ㅅㅂ놈들아 니들 닭장가고 싶니?]

[길드/야생닭: 왜 하필 닭장이냐...? 형한테 하는 소리... 아니지? 그렇지?]

디버프 유지시간이 끝나가는 걸 본 서련은 다른 변신 디버프를 캐스팅했다. 그러나 망령의 저주 스킬과 달리 이건 변신 확률이 50:50이라 적중률을 아무리 높여도 운에 모든 걸 맡겨야 했다.

-쇄약의 저주 시전이 실패하였습니다! 시전 대기 시간 12초.

역시나 완벽한 운은 없다. 실패 문구를 보자마자 서련은 휴리사를 불렀다.

[파티/키키아: 리사누나 준비 되셨나요]

[파티/휴리사: 눈빠지게 기다렸어ㅋㅋㅋ]

[파티/키키아: 그럼 건블형 뒤로 빠져주세요]

사역마와 탱커를 상대하고 있던 건블은 그 말에 뒤로 잽싸게 빠지기 시작했다. 텀블링을 하며 빠진 자리를 가르고 곧장 휴리사가 튀어나왔다. 휴리사는 대검을 든 채 파란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 기운은 필살기라 불리는 성력 스킬에 필요한 성력이었다.

[파티/휴리사: 자 간다]

비장한 모습으로 달려오는 휴리사를 확인한 서련의 시선이 급히 상대측 디버프로 향했다. 디버프가 풀리기까지 남은 시간 2초였다. 서련은 마지막으로 즉시시전 딜마법을 날리고 캐릭을 뒤로 훌쩍 물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휴리사가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예감은 도중 난입한 한 유저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휴리사가 스킬을 쓰기 바로 직전, 누군가가 포획으로 사냥감을 낚아채 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 명도 아닌 두 명 전부를 말이다.

덕분에 휴리사의 스킬은 그대로 불발되고 말았다.

-신마제국의 ‘묵요’가 진혼식검을 사용해 주변 적들에게 1390만큼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아….”

아이러니하게도 스틸한 유저는 서련이 제법 아는 유저였다. 그것도 사적으로. 서련의 얼굴에 난감함이 차올랐다. 서련의 옆으로는 벙찐 모습 그대로 굳어진 휴리사가 있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니, 뭐… 별로.”

“뭔데.”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옆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하진이 곧장 물어왔다. 서련이 아무 말 않자, 하진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서련의 모니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다음, 짓씹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하진의 시선이 가 있는 곳에는 묵요가 건넨 살가운 인사말이 떠 있었으니까.

[묵요: 키키형 여기 있으셨네요. 엄청 찾았는데. 아, 어떻게 해장은 잘했어요?]

[휴리사: 그래... 해장 좋지. 그런데 야 이 샛꺄]

[휴리사: 너 죽고 싶니? 얻다 대고 지금 스틸질이야. 그래놓고 어떻게 된 게 사과 한마디도 없어. 님 도르신?]

[묵요: 아 그랬어요? 그냥 보이길래 죽인 건데... 음 죄송요. 형만 보여서요 하하]

[휴리사: 응그래. 진심을 담아 다시해 이 새1꺄]

그 말에 묵요는 잠시 고민하다 휴리사에게 엎드려 사과했다. 그래도 나름 도리는 아는 것 같은데, 하진의 눈에는 그마저도 고깝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 혼자 아주 지랄을! 저 새끼 연락 받기만 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하진과 더불어 파티창에는 두 어린 양들의 열 뻗친 글이 장난 아니게 올라오고 있었다. 급격히 피로해지는 느낌이었다.

[파티/베르르: 아니 저 **가 누구보고 형이래]

[파티/순한양: 형? 혀엉?! 시밬ㅋㅋㅋㅋㅋㅋ 간만에 개빡치넼ㅋㅋㅋㅋㅋㅋ]

[묵요: 형, 공성퀘 하고 있었어요? 저도 도와줄게요ㅎ]

[묵요: 아 근데 오늘은 그놈이 안 보이네?]

“…여기 고대로 있어. 알겠어? 대답도 하지 마. 대답할 필요도 없어.”

뭐에 빡이 친 건지, 하진은 부글부글한 표정 그대로 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빨리 진행하자며 제 파티원들을 무섭도록 닦달하는데, 아주 탈퇴라도 할 기세였다. 이 반응으로 보아 묵요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원호와 로운, 하진은 평소에도 꽤 자주 만났으니까.

“너 묵요가 로운인 거 알고 있었지.”

“그게 뭐.”

역시. 당당하게 나오는 하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번의 태도가 어쩐지 납득이 갔다. 그래서 그렇게 묵요만 보면 이를 갈았었나 보다.

가만 보면, 뭐가 그리 걱정스러운지 하진은 제 친구들과의 관계를 상당히 견제했다. 문득 그게 다른 쪽으로 견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뺨을 슬쩍 긁적이던 서련은 머뭇거리며 하진을 불렀다.

“하진아.”

“곧 끝나니까 좀 기다려.”

이젠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서련은 날카롭게 떨어지는 하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제법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뭘.”

“나 네 친구들이랑 어떻게 해볼 생각 없으니까.”

하진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서련 쪽으로 고개가 홱 돌려졌다. 놀람과 당혹감, 그리고 낭패가 서린 시선이 그대로 서련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하진의 얼굴이 확 찡그려졌다.

“너…!”

“여기 있었네, 이 새끼. 오늘은 왜 안쪽에 앉았냐? 존나 찾았잖아. 아! 이로운은 오늘도 그냥 집에서 한다더라.”

하진이 입을 뗀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친근한 목소리가 하진의 등 뒤로 꽂혔다. 서련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진의 어깨너머로 옮겨졌다. 그곳엔 막 자리에 앉으려는 김원호가 있었다. 하진이 술에 잔뜩 취했을 때 데려다준, 하진의 절친 중 한 명이었다.

하진을 쳐다보던 원호와 서련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깨가 흠칫 튀는 게, 상당히 놀란 듯했다.

“어… 어? 서, 서련 형…? 형이…. 그러니까… 어, 하진이랑 같이 오셨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때 보고 처음이네. 음… 잘 지냈어?”

“그럼요! 아, 죄송해요. 인사가 늦었죠. 하진이랑 같이 있을 줄 몰라서요, 하하…. 와, 근데 서련형은 역시 오늘도 예….”

하하 웃으며 안부 인사를 건네던 원호의 시야에 서슬 퍼런 시선이 잡혔다. 힐끗 아래를 보자 하진이 무서운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원호는 즉각 말을 변경했다.

“예술적인 컨이네요.”

서련은 그 말에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원호야, 너도 라히섭이야?”

“저요? 저는 전섭에 캐릭 다 있어요. 주 활동지가 라히랑 베라섭이긴 한데, 로운이 이전하고서는 라히섭에서만 놀고 있어요. 형도 라히섭이죠?”

저 미소를 보고 있자니, 어째 속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지들 셋은 다 알고 지내고 있었다는 말인데, 서로 그 난리를 쳤다는 게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형 닉네임이 뭐예요?”

“그게 왜 궁금한데.”

“궁금할 수도 있지, 새끼가 겁나 예민하게 구네.”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묵요도 서련이 ‘키키아’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하진은 당연히 알고 있으니, 하진이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 감출게 있을까 싶어서, 서련은 지나가는 투로 뚝 내뱉어 주었다. 물론 상대방은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키키아야.”

“아, 키키아였… 키키아라고요? 그 키키아? 앙키라고 불리는?”

“…아마 그럴걸.”

“…와…. 성하진 이 새끼 빅피쳐 오지네.”

“좆까.”

이쯤 되니 포기했는지, 하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보스전에 임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 아까와 달리 스킬키도 설렁설렁 두드리는 걸 보아 어지간히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서련은 그즈음 이야기를 접고 게임 화면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된 건지, 죄다 서련의 주위에 몰려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채팅목록을 차지한 건 묵요와 베르르, 순한양이었다.

[묵요: 형 무슨 일 있어요? 더 기다릴까요?]

[묵요: 초소에 가 있어요. 여기 닭들 많아서 좀 위험한데]

[베르르: 너나가 **야]

[묵요: 하하 님들 몇짤? 막 그렇게 욕하면서 반말까면 쓰나]

[순한양: 응그래 백짤이다 샛꺄]

[야생닭: ㅎㅎㅎㅎㅎ 죄송합니다ㅎㅎㅎㅎ 애들이 철이 들 들어서ㅎㅎㅎㅎㅎㅎ 니들은 좀 그만 좀 해라 응?ㅎㅎㅎㅎㅎㅎㅎ]

[묵요: 괜찮아요. 백짤정도면 그럴 수도 있죠 뭐]

[베르르: 아 환장하겠네 진짜]

[키키아: 미안 잠깐 뭐 좀 하느라고]

[묵요: 아 형 왔어요? 일단 소초로 가실래요?]

서련은 묵요의 말대로 텔레포트 포인트가 있는 소초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련이 움직이자 묵요를 비롯해 파티원들이 쫄쫄 따라붙어 달려왔다. 다행히 그사이 인원이 많아져 소초에는 상당수의 신마족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행히 기습 걱정은 없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공성 요새 근처로 붉은 점이 바글바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성전에 참가하는 신성족들이었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참가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묵요: 형도 공성전 참가해요?]

[키키아: 참가는 아닌데 공성전 때만 완료할 수 있는 퀘스트라]

[묵요: 아 그거구나. 레팔의 유품]

레팔의 유품 퀘스트는 성공보상으로 현재 나온 등급 중 가장 높다고 칭해지는 ‘주신’ 등급 악세사리가 지급되었다. 총 3번을 반복할 수 있었는데, 목걸이와 귀걸이, 반지, 이렇게 세트 악세를 받을 수 있어 대부분의 유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하는 퀘스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서련은 이번에 마지막 3번째 완료를 앞두고 있었다.

“뭐야, 이거 아직도 못 깼어?”

“공성전이 매일 열리는 건 아니니까.”

“적중 옵션 때문이면 그냥 공적템으로 갈아타지? 그게 더 나을 텐데.”

“공적 모자라.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먼저 맞추고 다니려고.”

“기다려 봐, 다 끝났어.”

“형 저도 갈게요. 어디 요새예요?”

“오지 마, 새끼야.”

“템도 후달리는 새끼가 말이 많네.”

하진과 원호는 투덕거리면서도 사이좋게 서련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러고 보니 원호도 하진과 같은 힐러였다. 하진과 다른 게 있다면, 묵요만큼 템이 사기적이라는 것이다.

[호백조: 야이 샛꺄 너 형이 키키라는 거 언제 알았어]

[묵요: 어디서 지금 백조샛끼가 나대]

[호백조: 후달려서 보충이나 듣는 색끼가ㅅㅂㅋㅋㅋㅋㅋㅋ]

[묵요: 그거 조별과제 때문이라고 형이 천 번은 말한거 같은데 귓구녕이 처 막혔어?ㅎ]

[눈설: ㄲㅈ 색끼들아]

얘네는 왜 이렇게 서로 디스전을 하는지 모르겠다. 원호의 닉네임은 ‘호백조’라는 외우기 쉬운 이름이었다. 셋은 서로를 보자마자 삼자대면 디스전을 해댔는데, 무슨 앙숙을 넘어 원수라도 만난 모습들이었다.

저러고도 잘 어울려 다닌다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니, 저러니까 잘 어울려 다니는 건가?

[파티/건블리아: 키키야 니가 좀 말려봐라;; 무슨 원수 만났냐]

[파티/키키아: 형 저기 있는 3명 포스로 연계할 거니까 들어오면 받아주세요]

[파티/건블리아: 알았어. 그러니까 좀 말려봐;;]

[파티/키키아: 음 해보긴 할게요]

[파티/휴리사: 왜 귀엽고만ㅋㅋㅋㅋㅋ]

[파티/순한양: 어후 내가 다 쪽팔리네;]

[파티/베르르: ㅋㅋㅋㅋㅋㅋ얘냐곸ㅋㅋㅋㅋㅋㅋㅋ]

[파티/야생닭: 이얔ㅋㅋㅋ 우리 까불이들이 사돈남말하고 있으시네?ㅋㅋㅋㅋㅋ]

“하진아.”

“왜.”

“목이 좀 말라서.”

분노의 타자치기를 하던 하진의 손끝이 움칫 굳어졌다. 그러나 곧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일어났다.

하진이 카운터로 자리를 뜨자마자 서련은 이번에 원호를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원호는 하하 웃으며 ‘안 할게요….’라는 말을 냉큼 내뱉었다. 이제 남은 건 묵요뿐인데.

[키키아: 묵요야]

[묵요: 네 형]

[키키아: 퀘스트 좀 도와줄래]

[묵요: 그럼요ㅋㅋㅋㅋㅋ 무슨 당연한 말씀을ㅎ]

이쯤 되면 최소 조련사였다. 소란이 일단락되자, 서련은 공성전 진입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이번 퀘스트는 신마족과 신성족이 요새를 차지하기 위해 싸울 때, 요새의 안쪽에 있는 ‘대제의 방’에 가서 전왕의 유품을 확보해 오는 일이었다. 확보해야 할 유품의 수는 총 5개였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나오지만, 운이 나쁠 경우 몇 번이나 와서 구해야 할 정도로 드롭 확률이 제멋대로인 퀘스트였다. 게다가 상대종족과 밥그릇 싸움까지 해야 해서, 빈손으로 왔다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서련이 얻어야 되는 수량은 이제 2개다. 그래도 올 때마다 최소 2개는 획득했으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 장담했다. 물론 그 생각은 초입부근 들어가자마자 바스러졌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파티원들끼리 같은 퀘스트를 공유하고 있으면, 한 명만 먹어도 파티원들에게 전부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키키아: 9시 방향 쪽에서 진입할게요]

“마셔.”

요새의 9시 방향으로 이동하는 서련의 앞으로 바나나 우유가 불쑥 들어왔다. 바로 마실 수 있게, 빨대까지 꽂혀 있었다. 서련은 머뭇머뭇 빨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한 모금 들이켜고 입을 떼어냈다.

하진은 서련의 마우스 근처에 우유를 내려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중재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하진도 그 이상 디스전을 계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처진 거리를 재빨리 날아 서련의 일행과 합류했다.

뭐 이 정도면 되겠거니 했다. 무려 전 서버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진 묵요도 있고, 묵요를 이긴 하진도 있었으니까.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이 공성 요새가 요새 중 가장 빡세고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는 점이랄까.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길은 전부 알고 있다. 그것만 알아도 선점할 수 있었다. 이 퀘스트의 보상이 좋은 이유는, 완료하는 과정에서 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물을 노리는 종족은 신마족만 국한되지 않았다. 신성족 신마족 공통 퀘스트인 셈이었다.

[키키아: 곧 열리니까 다들 준비하세요]

서련의 말에 파티원들과 나머지 인원들이 죄다 풀도핑에 들어갔다. 비단 서련네 뿐만이 아니라 근처 공성전에 준비하는 모든 유저들이 화려한 도핑과 버프를 돌리며 요란한 준비에 들어섰다.

건블리아가 건 포스요청을 받은 건지, 화면 옆으로 작은 파티창이 하나 더 생겨났다. 속해있는 유저는 하진과 원호, 묵요 셋뿐이었다.

포스는 파티간 연합할 수 있는 일종의 연합파티였다. 보통은 네 개의 파티가 하나의 포스지만, 두 개의 파티가 연합된 것도 일단은 포스로 취급되었다.

-요새 ‘레팔리아’의 공성전 전투가 시작됩니다. 제한시간 30분.

띠띠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공성전 시작 멘트가 떠올랐다. 제한 시간은 정확히 30분.

[포스/건블리아: 전부 부활포트 등록하고 가]

서련은 건블리아가 땅에 설치한 푸른 비석에 부활등록을 한 후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미 여기저기서 유저들이 요새 안으로 침입하는 게 보였다. 사람이 가장 없는 9시 방향 입구를 찾아 들어간 서련은 기억하고 있던 길을 헤치고 가장 지하층에 있는 ‘대제의 방’으로 향했다.

물론 도중 만난 신성족들은 극딜에 도륙되어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대제의 방’ 앞에 도착했다. 저도 제법 빨랐다고 생각했는데, 방 앞에는 먼저 도착해 싸우다 죽은 유저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이 신마족인 걸 보아, 신성족 쪽에 제법 잘하는 유저가 있는 듯했다.

[포스/묵요: 형 제가 먼저 갈게요]

[포스/키키아: 보조할게]

묵요는 여기서 유일한 탱커였다. 그나마 몸빵으로 버틸 수 있기에 먼저 들어가는 게 나았다. 서련은 제 사역마 ‘킬리’를 소환하고 묵요의 옆에 붙여주었다. 묵요가 앞서 나가자 그다음으로 몸빵이 가능한 하진과 원호가 뒤를 도맡았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킬리와 함께 들어가던 묵요가 멈춘 것과 동시에 주변 일대가 붉은 점으로 바글바글 차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앞뒤로 나타나 달려드는 신성족들을 본 후에야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잇감을 노리고 숨어 있던 포스 집단이었다. 그것도 대부분이 훈장을 단 유저들. 실력이 대게 좋다는 의미였다.

[포스/묵요: 두당 6명씩 어때요]

[포스/건블리아: 힘내라 애들아! 형은 땀이 앞을 가려서 못할 것 같다!]

[포스/휴리사: 3명은 맡겨ㅋㅋㅋㅋㅋ 9명 야생이갘ㅋㅋㅋ 아 재밌네 이거ㅋㅋㅋㅋ]

[포스/야생닭: 여기서 제가 제일 망사템 같은데여;;]

[포스/베르르: 두당 6명? 장난까심?ㅋㅋㅋㅋㅋ대체 누굴 위한 팟인지 몰겄넼ㅋㅋㅋㅋㅋ]

[포스/순한양: 내가 저** 형형거릴 때부터 알아봤어 아오]

[포스/묵요: 하핫 우리 백짤짜리 애샛끼들은 얌전히 짜져있읍시다ㅋ]

“두당 6명이면 쉽고만, 왜 난리야.”

“에이, 설마 그것도 못 할라고.”

서련은 옆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대화에 처음으로 제 컨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서련 역시 6명하고 싸우라면,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온갖 치사한 방법을 써서 덤벼도 이길까 말까 하는 수준인데, 쉽다니. 적어도 4명. 현재 서련이 싸워 당당히 이길 수 있는 수는 전 직업 불문해서 4명까지였다.

[포스/눈설: 아 시끄럽고 일단 가]

[포스/호백조: 각잡고 밟는 걸로]

[포스/묵요: 여섯씩 갑니다. 일곱이면 더 좋고요ㅎ]

사실 이런 얘기를 나눌 짬조차 없었다. 서련의 길드원들 주위를 에워싼 바글바글한 유저들이 날고기를 발견한 좀비처럼 순식간에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두당 6명이라는 말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것이다.

[포스/키키아: 일단 해봐요]

[포스/야생닭: 악!]

야생닭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일대 다수의 불리한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을 장식한 건 서련의 사역마 킬리의 광역 공격이었다. 킬리가 바닥에 주먹을 쾅 내리꽂자, 거대한 굉음과 함께 일대가 지진이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그 광역기에 가까이 있던 유저들이 넉백을 먹고 뒤로 쓰러지자마자 서련을 포함한 길드원들이 의기투합해 합공을 이루었다.

작정한 듯 달려드는 모습에선 오기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오기가 실력까지 어떻게 해주진 못한 모양이었다.

[포스/묵요: 아니 잠깐만요]

[포스/묵요: 님들]

[포스/묵요: 아니 왜 다]

[포스/묵요: 디지고 그래요]

시작한 지 몇 초나 됐을까, 베르르와 순한양을 시작으로 야생닭과 휴리사, 건블리아가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줄지어 사망했다. 워낙 순식간에 죽어버려, 도와줄 겨를조차 없었다. 덕분에 그들에게 붙어 있던 신성족들이 키키아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에게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서련이 손을 탁 놓고 뒤로 물러날 정도랄까.

-사망하였습니다.

상태창에 뜬 문구를 보자마자 서련은 우유를 들고 쪽 빨아들였다. 서련의 옆으로는 죽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하진과 원호가 있었다. 처음과 달리 얼굴들이 조금씩 구겨지는 걸 보아, 순탄히 발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는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다.

-신마제국의 ‘묵요’가 사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눈설’이 사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호백조’가 사망하였습니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서련의 시선이 옆으로 슬쩍 이동했다. 하진과 원호가 똑같은 모습으로 머리를 싸맨 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하, 씨발….”

심지어는 욕도 중얼중얼 들려왔다. 서련은 그저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관망할 뿐이었다. 위로해봤자 저 성격에 기가 살 리도 없고.

“저 씹새끼가 죽고 싶나.”

내내 엎드려 있을 줄 알았던 하진은 의외로 빠른 회복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눈을 보니 디스전을 하기 위해 일어난 듯했다. 그렇게 하진과 묵요의 2차 디스전이 또다시 시작됐다.

[포스/눈설: 이 샛꺄 넌 전섭 1위라는 샛기가 죽고 ㅈㄹ야]

[포스/묵요: 지는. 그리고 전섭 1위도 죽긴 하거든요 이 관종샛꺄]

[포스/눈설: 관종은 ㅅㅂ 너겠지 이 트롤샛꺄]

[포스/묵요: 와ㅋㅋㅋㅋ 이 샛끼 이거 말이 안 통하네. 사람이 아니라 그른가]

[포스/눈설: ㅈ까 ㅅㅂ]

[포스/묵요: 너야말로 개 ㅈ슬 까세요]

창피함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서련의 몫이 되어 돌아왔다. 심지어는 옆에서 키보드를 부술 것처럼 두드리는 하진의 모습마저 창피했다. 결국 서련은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앞으로의 고생길이 훤해 보였다.

그래도 이번 디스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책상을 탕 내려치며 하진이 몸을 일으킨 까닭이었다. 그리고는 살벌한 시선으로 서련을 바라보며 경고했다.

“한대 피우고 올 테니까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

“어… 그래.”

“그리고 지금 누워 있는 새… 사람들 가만히 있으라고 해.”

서련에게 자리 비우지 말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더 하고 나서야 하진은 품을 뒤지며 사라졌다. 덕분에 서련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원호와 둘만 남겨졌다.

“하하, 하진이 녀석 냄새 빼고 온다고 좀 늦을 거예요.”

“그래.”

서련은 알려줘서 고맙다는 듯 피식 웃어주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포스/키키아: 일단 다들 자리 지키고 있어요. 다른 파티 올 수도 있으니까, 상황보고 그때 부활하는 걸로 할게요]

[포스/건블리아: 키키야... 형이 종잇장이라 미안허다]

[포스/키키아: 괜찮아요ㅋ 아직 시간 있으니까]

[포스/묵요: 어그로좀 끌어야 되나]

[포스/호백조: ㄴㄴ 일단 제보 함 때리고 유저들 몰려오면 그때 퀘스트 먼저 하는 걸로 갸]

[포스/베르르: 아나... 진짜 개쎄네]

[포스/휴리사: 아 그래도 셋은 주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서련은 일단 제보 먼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채널창 쪽을 주시했다. 다행히 서련의 길드보다 먼저 당했던 신마족들이 일찍이 제보를 때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남은 제한 시간은 앞으로 19분. 충분한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든든한 아군이 소식도 들려온 건 그 직후였다.

[포스/야생닭: 어 키키야. 킬레아 그놈 아니냐? 너 쫓아다니면서 묵요랑 뜨던]

[포스/묵요: 아 그 ** 왔어요?]

[포스/휴리사: 헐 오고 있다고 제보 떴네?]

[포스/베르르: 아닠ㅋㅋㅋㅋㅋ 왜 그 넘이 여길 오시는지?ㅋㅋㅋ 혹시 아시는 분?ㅋㅋㅋㅋㅋㅋ 아니 나만 얼척없음?ㅋㅋㅋㅋㅋㅋ]

[포스/순한양: 이쯤 되면 키키형 뭐 좀 있는 듯]

“…나 때문에 오는 거겠어.”

서련은 무심하게 턱을 괸 채 우유를 쪽 빨아마셨다. 언제 다 마신 건지, 몇 모금 빨자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서련은 빈 우유 통을 내려놓고 채널창을 계속 주시했다.

킬레아의 등장에 채널은 또다시 난리가 났다.

[솔로밍님의 외침: 등판하셨넼ㅋㅋㅋㅋㅋ 킬레야 묵요랑 레전드 한편 찍어야지?ㅋㅋㅋㅋㅋ]

[개톨건님의 외침: 야이 샛꺄! 너 어디냐?! 너 ㅅㅂ 저번에 내 뒤통수 아주 제대로 후려까고 지나가더라?ㅋㅋㅋㅋㅋㅋ 내가 ㅅㅂ 22바퀴를 굴렀어 생꺄! 이참에 형이랑 면담 좀 하자고 이 개가튼 넘아]

[블루백님의 외침: 킬레야... 형은 니가 지금 공성전에 오고 있으리라 믿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킬레야... 형은 지금 가장 지하에 있다.]

[호블구구님의 외침: 여기 정신 나가신분 많으시넼ㅋㅋㅋㅋㅋㅋ ㅅㅂ 컨도 ㅈ도 없으신 님덜아 킬레아 기다릴 시간에 일어나서 헤딩을 해]

[로빈후디님의 외침: 어휴 넌 대체 왜 사냐]

킬레아가 누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만큼 소문만 무성했고, 무성한 만큼 사건사고의 온상이라는 소문을 달고 살고 있었다.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놈이었다. 템도 사기적인데, 컨은 더 사기적인 놈. 성격도 뭐 같아서 심지어 같은 종족인 신마족들에게도 원한이란 원한은 다 사고 있는 중이었다.

[포스/묵요: 아 안되겠네요. 저도 캐릭 하나 더 끌고 올게요]

[포스/베르르: 먼솔?]

[포스/순한양: 넌 자게도 안보냐 새꺜ㅋㅋㅋㅋㅋㅋㅋ]

[포스/야생닭: 흑요? 그 흑요 말하는 건가? 영상으로 한 번 보긴 했는데;; 아니, 그게 진짜라고?]

[포스/휴리사: 뭐야, 왜 지들만 알아. 뭔데 그래?]

[포스/묵요: 보면 알아요ㅎ 금방 데려올게요]

“아, 저 새끼 저거 또 나대네.”

한 건너 옆에서 키득거리는 원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련의 시선이 자연스레 빈 옆자리로 옮겨졌다. 그러고 보니 담배 한대 피우고 온다는 놈이 아직까지도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얘는 무슨 담배를 만들어서 피우고 오나….”

서련은 눈을 슬쩍 흘기며,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 중요한 건, 제보받고 오고 있는 유저들이 여길 쓸어줄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남은 시간은 이제 16분이 되었다. 이 이상 지체하면 이번 퀘스트는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흑요’님이 포스에 참가하였습니다.

[포스/묵요: 유저들 대거 이동하니까 쟁 시작되면 다들 바로 일어나서 안쪽방으로 달리세요]

[포스/호백조: 일어나면 바로 무적쓸 테니까 걱정말고 ㄱㄱ]

[포스/건블리아: 막내들 뒤로 뛰지 말고 앞으로 뛰어라 제발]

[포스/베르르: 옙]

[포스/순한양: 아 킬레아 보고 싶은데]

[포스/묵요: 하하 잘됐네요. 제일 먼저 도착할 거 같은데]

묵요의 말이 채팅창에 막 올라왔을 때였다. 타이밍 좋게 문 쪽에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들어와 신성족들을 향해 광역 마력총을 발포했다. 펑 터져나간 마력총탄이 주변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장총과 양손총을 입맛대로 스왑해가며 달려드는 신성족들에게 묵직한 한방을 탕, 탕 날렸다. 화려한 샷과 전투방식. 완벽한 무빙조작과 거리계산 감각을 다 갖춘 신컨 유저. 바로 온몸에 버프칠과 도핑칠을 한 킬레아였다.

그가 진짜 이곳으로 올 줄 몰랐던 터라 서련은 벙찐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그건 서련 뿐만이 아닌지 다들 부활할 생각은 않고 멍 때리며 그 상황을 가만히 관망 중이었다.

[포스/호백조: 지금 일어나요]

[포스/묵요: 빨리]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부활한 건, 킬레아 뒤로 흑요와 함께 수많은 신마족들이 들이닥쳤을 때였다. 자리에서 부활하자마자 서련은 재빨리 대제의 방 안쪽으로 달렸다. 지도에는 바글바글한 점들이 움찔움찔 움직이며 서로를 갉아먹고 있는 게 보였다.

[포스/키키아: 퀘부터 할게요]

서련은 대제의 방 안쪽의 개미굴을 이리저리 뒤지며 보물 상자를 찾아다녔다. 이미 신성족 쪽에서 선수를 쳤는지 입구 근방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좀 더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자 겨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이 열 수 있는 보물 상자는 최대 10개로, 파티원들이 최대 열 수 있는 보물상자는 총 60개였다. 문제는 유물이 나올 확률이 참 극악이라는 점과 밥그릇 싸움이라 보물상자가 넉넉하지 않다는 점이다. 60개는 고사하고, 한 사람당 3개나 발견하면 운이 좋다고 봐야했다.

그래도 그 고생을 한 게 액땜이라도 됐는지, 유물은 바로 나왔다.

-‘레팔의 유품’을 획득하였습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8분. 남은 유품은 앞으로 하나. 서련은 다시 이 굴 저 굴을 헤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5분이 남았을 때, 보물 상자를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 나오지 않으면 실패였다.

-빈 상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실패였다. 남은 시간은 고작 4분이었다. 이 근방은 이미 다 뒤져본 후라, 보물 상자는 방금 깐 게 마지막이었다. 나머지는 반대편에 있다는 건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는 걸 보아 저쪽도 이미 보물 상자가 다 털린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와야 되네….”

싫은데…. 이 고생을 했는데 실패라고 생각하니,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마지막 1분을 남겨놓고 희소식이 들려왔다.

-신마제국의 ‘건블리아’가 ‘레팔의 유품’을 획득하였습니다.

-‘레팔의 유품’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퀘스트 목록을 확인하여 주십시오.

그 소식에 곧장 채팅창은 난리가 났다. 다들 만세를 부르짖고 있는 모습이 상상될 정도였다.

[포스/베르르: 와아아아!!!!! 드디어!ㅠㅠ]

[포스/순한양: 와앀ㅋㅋㅋㅋ 안나오는줄 알고 심장이 아줔ㅋㅋㅋㅋㅋㅋ]

[포스/건블리아: 앞으로 형말 잘듣고 응? 알겠지 얘들아ㅋㅋㅋㅋㅋ]

[포스/야생닭: 와... 와... 십년감수했네]

[포스/휴리사: 앜ㅋㅋㅋㅋ 나 진짜 또 오는 줄ㅋㅋㅋㅋㅋㅋ]

[포스/묵요: 어! 완료했나 보네요ㅎ 여기도 슬슬 정리되어 갑니다]

[포스/호백조: ㅋㅋㅋㅋㅋㅋ 우리 닭들 집념보소ㅋㅋㅋㅋㅋ 다들 그냥 다 발라버리시넼ㅋㅋㅋㅋ]

[포스/순한양: 아오 킬레아 봐야 되는데]

[포스/묵요: 아 여기 아직 있는데요]

-요새 ‘레팔리아’의 공성전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포스/묵요: 헐 나갈 준비해요. 여기 신성제국 쪽 요새 됐어요]

[포스/키키아: 다들 빨리 나가요]

요새가 신성제국 부지로 귀속되자마자 신마족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요새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게 아니라, 다른 종족 요새 부지에 들어갈 경우 엄청난 디버프가 생성되기 때문이었다. 기본 2개부터 많게는 4개까지 생겨났는데, 쟁을 뜰 때 불리한 모든 조건이 거기 붙어 있다고 보면 됐다.

[포스/베르르: 아오 이속감소 디벞부터 생기고 ㅈㄹ]

그래도 떼로 몰려나가서 그런지 신성족도 굳이 쫓아오거나 막아서지 않았다. 덕분에 신마족들은 모든 디버프가 생성되기 전에 빠져나와 처음 부활포트를 박았던 자리로 모일 수 있었다. 문제는….

“…얘는 대체 언제 와.”

성하진이랄까. 빈 옆자리를 보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와중에도 묵요는 킬레아랑 저격질을 해가며 서로를 까대고 있었다.

[묵요: 아 간만이네요. 그래서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이새1끼야]

[킬레아: ㅈㄹ]

[묵요: 사람말을 모르시는 샛끼 같은데]

[킬레아: ㅈㄲ ㅅ1발]

어째 하는 짓이 하진이나 원호와 똑같았다. 서로 으르렁거리던 둘은 이내 무기를 뽑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박수까지 치며 부추기는데, 서련의 길드도 그사이에 껴서 휘파람까지 불며 응원중이었다.

[베르르: 잘한다! ㅅㅂ그렇지! 뒤뒤 거기 아니라고! 아오 옆에서 찔러야지!]

[순한양: 왘ㅋㅋㅋㅋ 반응속도 쩌시네들ㅋㅋㅋㅋㅋ 아니 잠깐 거기서 왜 디벞을 걸력! 바닥에 덫! 덫 있다고!]

[야생닭: 애들아... 그러지 마... 하지 말자고]

[휴리사: 얘네 뭐얔ㅋㅋㅋㅋ 겁나 잘싸웤ㅋㅋㅋㅋㅋ 움직임 찰진거 봨ㅋㅋㅋㅋㅋ]

[건블리아: 허... 발킬장총 데미지 보소... 저걸 또 어떻게 합성하셨네]

“새끼들, 유치하게들 노네.”

거기에 더해 낄낄거리는 원호까지. 서련은 우유를 찾다 빈 것을 보고 하진의 자리에 있는 음료를 가져와 마셨다. 탄산이라 끌리지는 않았지만, 어째 목이 타는 게 뭐라도 마셔야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하진이 나타난 건, 그 이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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