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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선생님! 잠깐 시간 되세요?”
수업을 마치고 폭풍처럼 이어진 질문에 답하고 교실을 나오는데, 바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 목소리에 미나토는 순간적으로 긴장하고 돌아보았다.
“괜찮은데, 무슨 일이야? 이제 곧 다음 수업 시작한다고?”
“응, 금방 갈 거예요. 있잖아요, 이거 유키 누나가 맡겼어요. 미나토 선생님께 전해주라면서.”
변함없이 태평한 얼굴로 이리노가 내민 것은 편지 같은 봉투였다. 받기를 망설이는 미나토의 손에 세게 쥐여주었다.
“요전에 선생님이 맡긴 거 유키 누나한테 줬잖아요? 그 감사장이래요.”
“…감사장?”
“네. 어른 세계의 일반상식이래요. 그럼 저 교실로 갈게요.”
고개를 쑥 내밀었을 때 교실 안에 시계가 눈에 들어왔나 보다.
이리노는 뛰듯이 교실로 들어갔다.
혼자 복도에 남겨진 미나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오늘의 마지막 수업을, 미나토는 맡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일 예정된 쪽지시험을 마무리해야 해서 집에 가려면 아직 멀었다.
어쨌든 일단 일을 해야 한다. 생각을 접고 봉투를 개인용 클리어 파일에 넣은 뒤 서둘러 강사 대기실로 향했다.
오기와라에게 결별을 고하고 난 지 곧 열흘이 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온 일상은 담담하고 평온했다.
아침은 시간을 신경 쓰면서 아파트를 나와, 인파에 휩쓸려 늘 타는 전철을 타고 출근한다.
밤까지 이어지는 업무를 마치고 나서 전철을 타고, 중간에 슈퍼에 들러 물건을 사고, 아파트로 돌아가서 집에 가져온 일을 마치면 일찍 잔다. 그것을 반복했다.
오기와라는 미나토의 방에 개인 물건을 놔두지 않았고, 미나토도 오기와라를 위한 물건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
다쳤을 때 지내던 아파트에서 집으로 보낸 짐을 정리해버렸더니, 오기와라와 보낸 날들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오기와라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이리노의 말로 안 것이지만, 오기와라는 여기서 일을 무사히 마치고 서둘러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오기와라 씨, 또 여기 안 오나? 아니, 그보다 호소카와 선생님이랑 같이 놀러 다니거나 하지 않아요?)
그렇게 물을 때마다 늘 말을 흐리던 미나토에게 짐작 가는 것이 있었는지 요즘 이리노는 오기와라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아마 그렇게 기억은 과거가 될 것이다.
대기실에서 쪽지시험 문제를 다 만든 다음 지정된 서식으로 옮기고 데이터를 저장했다.
내일 수업을 듣는 학생 수에 플러스알파의 매수로 인쇄하고 자물쇠가 달린 서랍에 넣었을 때는 일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퇴근 준비를 하기 전에 클리어 파일에서 봉투를 꺼냈다.
찬찬히 쳐다본 겉봉에는 예쁜 글씨로 ‘미나토 선생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열흘이나 방을 점령했으니 그 보답으로 나카모리 유키에게 준비했던 감사 선물을 이리노에게 맡겼던 것이다.
봉투 속에는 카드가 한 장 들었다. 벚꽃이 든 봄에 어울리는 그것에는 겉봉투와 같은 글씨로 한마디, ‘오늘 일이 끝날 무렵에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응?”
너무도 갑작스러운 내용에 카드를 다시 살펴봤다.
거짓말이겠지, 하고 생각해도 글자가 바뀔 리는 없고 미나토는 당황해서 시계를 봤다. ―이미 수업이 끝나는 시각을 15분 정도 지나 있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반사적으로 연인끼리는 닮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방법은 달라도 이쪽에서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는 의미에서는 오기와라와 같았다.
그만 봐줬으면 하는 것이 속마음이었지만 나카모리 유키는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시하기도 꺼려졌다. 긴장하는 한편, 포기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학원 출입구 근처의 건물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청바지에 셔츠, 그 위에 점퍼를 걸친 활동적인 복장이지만, 색이나 형태가 부드러운 탓인지 오히려 여성스러움을 의식하게 됐다.
웃는 얼굴로 “미나토 선생님.”하고 손을 흔들어 오기에 서둘러 뛰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약간 숨을 헐떡이며 다가가니 그녀는 태평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디 갈래요? 선생님, 배고프지 않으세요?”
“별로요. 저녁에 가볍게 먹었거든요…, 나카모리 씨는요?”
“저도 먹고 왔어요. 그럼 단 건 어떠세요? 선생님, 괜찮죠?”
자연스러우면서도 강하게 밀어붙이기에 거역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눈앞의 커피숍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다.
“바로 저기니까 걷지 않을래요?”라는 말에 따르자, 걸어서 몇 분 걸리는 작은 커피숍을 안내했다.
역과는 반대 방향에 있는 비교적 새 가게였다.
그녀는 처음 온 것이 아닌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망설임 없이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메뉴도 보지 않고 주문하는 것을 따라 미나토는 무난하게 커피를 시켰다.
아르바이트생 같은 점원이 멀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녀는 미나토를 쳐다봤다.
“요전에는 일부러 챙겨주신 물건 감사했어요. 감사히 받아버렸는데 괜찮나요?”
“물론입니다. 저야말로 정말 감사했습니다.”
공손한 인사에 이쪽도 정중하게 대답하며 눈앞의 그녀를 관찰했다. 역시 오기와라와 잘 어울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안에, 아직도 미련이 가득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저야말로 인사가 늦어서 죄송해요. 마침 업무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바빠서요. 여러 가지가 일단락되어 겨우 이사가 정해진 참이에요.”
“…그 방 나가시는 겁니까?”
“나간다기보다 퇴거한다고 하는 게 맞지만요. 일찌감치 옮겼으면 좋았을 텐데 무서워서 그럴 수 없었거든요. 요 반년은 쭉 짐 창고가 되었죠.”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위화감을 느꼈는데, 아무래도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빌린 거니까 일단 퇴거하면 돌아올 수 없고, 가구 처분하는 데도 수고스럽고 돈도 들잖아요. 가구랑 가전제품은 전부 둘 테니 거기서 살면 어떻겠냐고 코우시에게 말했더니 그 녀석 진심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던데요?”
“나카모리 씨가 이사하는데, 말입니까?”
거듭해서 묻자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사 가는 게 아니라 시집가는 거예요. 경사스럽게 혼인신고하고 새댁이 되어서 보험으로 둔 방은 필요 없어졌거든요.”
“네? 나카모리 씨, 오기와라랑 동거하던 거… 저기, 오기와라랑 연인 사이죠?”
“그럴 리 없잖아요. 그 방이 짐 창고가 된 것도, 오기와라에게 빌려준 것도 제가 신랑 집에 눌러앉아서 그런 건데요. 무엇보다 코우시한텐 좋아하는 사람이 제대로 있고요.”
방금 나온 녹차 파르페에 숟가락을 꽂으며 나카모리가 웃었다.
그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연인은커녕 그 녀석 실연당했나 보던데요? 그것도 최근 들어서 첫사랑이라고 깨달은 바람에 대하는 것도 완전히 잘못했던 모양이고. 차이고 상태 나빠져서 엄청 사납게 굴어요.”
“사납게 군다고요. 첫사랑에, 실연, 이라니….”
그녀의 말을 멍하니 따라 하면서 미나토는 손에 든 컵을 끌어당겼다. 나카모리는 파르페 꼭대기의 아이스크림을 다 공략하고 나서 중간에 있는 커피 젤리에 착수한 참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먹성이었다.
“실은 꽤 오래전부터 좋아했는데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나 봐요. 바보 같죠, 오랫동안 못 잊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알 텐데. 적당한 상대랑 적당히 놀기만 하니까 모르는 거죠. 자업자득이죠, 뭐.”
“…자업자득.”
“그 녀석이 사진을 시작한 계기도 그 사람인가 보더라고요? 대학교 때 그 사람이 찍어서 준 사진을 지금까지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 구름 같다고 들은 말을 여태까지 기억하다가 거기서 사진에 흥미가 생겼다고. 그 정도로 그 사람만 생각했으면 몰랐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맞죠?”
이야기하면서도 먹는 속도는 변함없어서 자루가 긴 스푼이 그릇 바닥에 도달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양손을 마주하나 싶더니 미나토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저보고 방 빌려달라고 할 때도 그 사람이 발을 다쳐서 계단 오르내리기 힘드니까, 라면서 고개 숙여 부탁했어요. 그렇게까지 하는데 비상 열쇠를 내어주는 수밖에 없잖아요?”
“―….”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뒤늦게 미나토의 안으로 내려왔다. 의미는 알겠는데 도무지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까지 해 달라고는 부탁한 적 없는데요.”
그녀가 구석에 앉았기에 미나토는 가게 출입구를 등진 채로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등 너머에서 초조함이 섞인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카모리의 눈과 입꼬리가 올라가며, 도전적인 미소를 띠었다.
“쓸데없었어? 흐음. 쓸데없었구나?”
“아뇨,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토라진 듯 대답하는 목소리는 열흘 전까지 매일 듣던 것이다.
몇 년 만에 재회했을 때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하고 느끼게 하던, 그 낮고 기분 좋게 울리는 목소리.
“그럼 내 역할을 끝났으니까. 계산 부탁해. 맞다, 미나토 선생님껜 이거.”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 중앙에 적힌 명함으로, 직함 자리에는 사진 스튜디오라는 글자가 보였다.
“선생님을 속인 책임으로, 무슨 일 생기면 주저 없이 연락해주세요. 이 자식, 우리 신랑에게는 꼼짝도 못 하니까.”
“유키 씨, 이제 좀―.”
“네, 네, 미나토 선생님, 고마웠어요. 즐거웠고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그녀는 가게를 나갔다.
한숨 뒤에 발소리가 돌아서 다가왔다. 방금 나간 그녀의 자리에 손을 얹었지만, 앉지는 않고 미나토를 쳐다봤다.
“오늘 하루면 돼요. 잠깐만 얘기 좀 들어주시면 안 돼요?”
말하는 목소리는 이전처럼 건들거리거나 빈정거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정면에서 미나토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미나토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한 번만 더, 라는 말도 안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요.”
오기와라의 진지한 표정에 압도되어 미나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