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음 날 아침, 미나토는 요시하루가 예고한 대로 근무지인 학원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그래도 즐거웠어.”
“나야말로, 고마워.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여기저기 안내하고 밥도 살게.”
“좋다, 기대할게.”
서로 손을 흔들며 요시하루가 탄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이제는 거의 필요 없는 명목뿐인 목발을 짚고, 그는 학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발목의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갈아입을 옷과 함께 오늘 중으로 필요한 자료를 가지러 이른 아침을 먹고 서둘러 돌아간 미나토의 아파트에서 거의 문제 없이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다.
찾으려던 자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제법 편해졌다.
시간이 되면 얼른 목발을 반납하러 가자. 그러고 나서, 그때 오기와라는 어떡할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느긋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였다.
찾으려던 자료가 자리에도 없자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여기저기를 찾아 헤맸다. 수업 틈틈이 뒤져도 나오지 않고 끝끝내 찾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던 차에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직전, 문득 생각났다.
그저께 밤, 지금 지내는 아파트 리빙 다이닝에서 자료를 재검토하지 않았던가.
장소를 알면 가지러 가면 된다고 생각해 쉬는 시간이 되자 바로 택시를 불렀다.
조수석에서 바깥을 바라봤던 덕분에 표지판은 기억하고 있어서 주소를 몰라도 무사히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향하면 발목이 약간 아팠다.
당장은 목발도 짚지 않은 상태라, 최대한 체중이 실리지 않도록 걸음걸이를 바꾸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에게 질린 표정으로 문을 응시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자신은 이 방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매일 오기와라와 함께 드나들었기 때문에 전혀 깨닫지 못했다. 하릴없이 문고리를 쥐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런 미나토를 수상하게 여기는 듯한 목소리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세요? 저희 집에 볼일 있으세요?
퍼뜩 돌아본 곳에 선 젊은 여성을 보고 미나토는 무심코 숨을 들이 삼켰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정도인지 예쁘게 화장한 얼굴은 약간 동안으로, 밝은색 머리칼은 어깨 주위에서 발랄하게 말렸고, 깔끔한 바지 정장 차림이었다. 어째서 이곳에 미나토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며 빤히 쳐다봤다.
“저, 저기.”
문고리에서 슬쩍 손을 놓으며 이래서는 더욱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에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니라면 죄송하지만, 혹시 미나토 선생님…? 코우시가 대학교 때 과외 하셨다는?”
선수 치는 그녀의 물음에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고개가 먼저 끄덕여졌다. 익숙하게 오기와라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들떴던 마음이 축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응, 알겠습니다. 지금 여기 있다는 말은 빠트린 물건이 있는 건가요? 문 열어드릴 테니 들어오세요.”
싱긋 웃으며 그녀는 현관 잠금장치를 열고 먼저 미나토를 들여보냈다. 얼른 감사인사를 하고 조금 망설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자료를 찾아야겠다며 리빙 다이닝으로 가니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찾던 물건을 집어 들고 확인하는 동안 침실에 들어갔던 그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기에 미나토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었다.
“죄송해요, 인사가 늦어서. 호소카와 미나토입니다. 학원 강사입니다. 며칠 전부터 멋대로 방을 쓰고 있어요. 성가시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감사와 사죄는, 다음에 드릴게요.”
“나카모리 유키예요. 카메라맨 조수예요. 방에 대한 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감사와 사죄는 전부 코우시한테 받아낼 테니까. 그 녀석이 부탁하는 거 자체가 신기한 일이라 그것만으로 재밌었고요.”
무심하게 웃는 그녀의 지나치게 밝은 모습에 이끌려 무심코 웃음이 났다.
이 여성이 분명 오기와라의 연인이다. 미나토보다 사귄 기간도 길 것이고, 아마도 그의 깊은 면까지 알고 있을 게다.
“그보다 여기서 미나토 선생님을 만나다니 운이 좋았네요. 코우시가 보여주기 싫어해서 아마 얼굴은 못 볼 거라 생각했거든요.”
“…오기와라, 가요?”
“그렇다니까요. 미나토 선생님이 신경 쓸 테니까 이 근처에 얼씬도 말라고 하더라고요. ―아, 그렇게 된 거니까 여기서 저 만난 건 코우시에겐 비밀로 해 주실 거죠? 들키면 틀림없이 화낼 거예요.”
간청하듯 말하기에 미나토는 난처했다.
“화낼 것도 없는 게, 여긴 당신 집이잖아요?”
“그렇지만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해버렸거든요. 부탁할게요, 코우시에겐 말하지 말아 주세요!”
고개를 깊숙이 숙여오는 상대에게 거부할 도리도 없었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미나토는 얼른 학원으로 돌아갔다. 이곳에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모셔다드릴게요. 저 차 타고 왔거든요!”
“아뇨. 택시 대기시켜 놓고 왔으니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럼, 이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현관을 나왔다. 갈 때는 조심했던 발목이었지만 올 때는 약간 무리를 하고 말았다.
택시 안에서 발목이 시큰시큰 쑤셨다.
가벼워진 마음에 날카로운 쐐기가 박힌 것 같다.
그날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질문하러 온 학생들이 전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미나토는 방금 깨끗이 닦은 화이트보드에 시선을 주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새하얀 평면에 점심시간에 그 아파트에서 만난 나카모리 유키의 티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전부 코우시한테 받아낼 테니까.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해버렸거든요.
학원으로 되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지금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자신을 비웃을 수밖에 없는, 어떤 의미로 갑작스러운 사실이다.
그 아파트로 옮기고 나서 생긴 오기와라의 변화 중에서 가장 현저했던 것은 행위가 없어지고 스킨십이 격감했다는 것이다.
미나토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오기와라는 같은 침대에서 자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 방에서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톡 까놓고 말하자면 그녀의 침대를 그런 의미로 미나토와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미나토가 다친 데 대한 책임을 느껴 시중을 들고, 다정히 대해줄 뿐이라고 생각하면―그 때문에 연인의 방을 빌렸다고 한다면 전부 앞뒤가 맞는 것이 아닐까?
작게 한숨을 내쉬고 미나토는 실내 점검을 시작했다.
비뚤어진 책상을 바로 하고,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주웠다.
점심시간까지 가슴에 따뜻하게 남았던 고양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쭐했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라고 하는 편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오기와라는 처음부터 ‘여러모로 형편이 맞으니까’라고 분명히 말했다. 연인의 존재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기울어진들 보답 받을 날은 오지 않는다.
알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상 오기와라에게 끌리지 않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마음을 숨겨왔다.
그 때문에 그와의 사이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그랬는데.
“…늦어도 한참 늦었잖아.”
요시하루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나토가 본 사실일 뿐이고, 그렇기에 미나토에게 유리하게 편집되는 것이 당연하다.
웃기는 것은 그것을 자기 편할 대로 진실이라고 받아들인 데다, 다정하게 대해준다고 해서 묘한 기대까지 품어버린 미나토 자신이었다.
더는 무리다. 조용히 미나토는 생각했다.
이제 와서 깨달았다.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미나토는 오기와라에게 마음이 기울어버렸다. 이 이상 오기와라의 곁에 있다가는 틀림없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태를 부리게 될 것이다….
힘껏 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었다.
선명하게 다가올 그 아픔마저 지금은 멀게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힘겹게 쥐어짜 낸 용기는 틀림없이 햇볕 아래 놓아둔 생선회처럼 짧을지도 모른다.
쥐어짜 낸다고 여기는 시점에서부터 벌써 만만치 않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기회는 왔을 때 바로잡으라지만, 기회를 놓치면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만다.
미나토는 작게 한숨을 쉬고 일렁이는 인파로 시선을 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마중을 나온 오기와라가 드물게 들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돌아올 테니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가는 곳이 가전제품 판매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도 살 것이 있다고 고집부렸다.
오기와라가 조건을 붙이고 데려간 그곳에서 미나토는 살 물건을 산 뒤 가만히 대기용 벤치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기 지루해 한숨을 내쉬며 뇌리에 떠올린 것은 점심시간에 만난 오기와라 연인의 얼굴이었다.
어른스럽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오기와라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그녀의 말 이곳저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익숙한 친밀함이 넘쳤다.
나란히 서면 틀림없이 잘 어울릴 것이다.
그녀가 몇 살 더 많은 듯하지만 오기와라 같은 타입은 그편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
쓸데없이 냉정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젯밤부터 오늘까지의 자신의 멍청해 보일 만큼 우쭐했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오기와라의 마음이 미나토에게 향하지 않은 이상, 고백해도 소용없다. 지금 관계의 끝이 멀지 않아 보이는 지금, 굳이 자신이 비참해질 필요가 없다―라고 여기는 자신의 생각에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안 그럼 언제까지고 끝낼 수 없어.)
(그런 상대에게 자존심 지켜봐야 의미 없잖아.)
“아… 그랬지.”
귓속에서 울린 요시하루의 목소리에 생각났다.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내기 위해서 고백해보면 어떻겠냐고 친구는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전부 털어놓아 버리면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것을 듣고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기분을 되풀이하지 않고 끝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이 충동이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알기에 미나토는 오기와라를 찾아 일어섰다. 카메라 제품 근처에 있을까 해서 진열대 사이를 걷다가 마침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안 해도 그 방은 곧 비울 겁니다. 계속 눌어붙을 생각도 없고 슬슬 때도 됐으니까요.”
오기와라라고 안 순간, 다리보다 귀가 먼저 반응했다.
눈을 비비고는 높은 선반 틈으로 보이는 장신이 미나토를 등지고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저도 정떨어지게 하는 건 피하고 싶으니까, 이제 마무리 지을 겁니다.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예요. 제 거, 니까요.”
오기와라가 입에 담은 마지막 말에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울림이 넘쳤다.
―저런 목소리로 연인을 부르는 것인가, 생각한 순간 가까스로 긁어모은 용기가 소리도 없이 산산이 흩어졌다.
어떻게 해도 미나토에게는 안 된다고, 그 목소리가 통고한 것 같아서 숨을 죽이고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으로 벅찼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원래 앉아 있던 벤치로 돌아와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을까. 낯익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드니 눈앞에 있던 오기와라와 눈이 마주쳤다.
“미나토 선생님? 무슨 일 있었어요?”
“…미안, 좀 멍하게 있었어. 벌써 다 샀어?”
“네. 돌아갈까요?”
그렇게 말한 오기와라는 미나토의 짐으로 손을 뻗었다.
고집을 부려도 듣지 않아서 결국 미나토는 양손에 짐을 든 오기와라를 따라 자동차까지 돌아가게 되었다.
“발목, 많이 좋아진 거 같네요. 오늘 온종일 목발 없이 다녀도 불편하지 않아요?”
“전혀. 이제 아프지도 않으니까 오늘쯤 아파트로 돌아가도 괜찮을 거 같은데.”
어제 점심시간에 목발 없이 돌아다닌 결과로 생긴 통증이 아침에는 깨끗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늘부터 바깥에서도 목발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몹시 걱정하던 오기와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했으리라 생각했지만.
“안 돼요. 만일을 위해 목발을 반납할 때까지는 조심하죠.”
“…알았어.”
평소라면 말대꾸 한마디도 할 법도 한데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미나토에게 위화감을 느낀 것인지 오기와라가 운전석에서 곁눈질로 시선을 보냈다.
“글피 아침, 일하러 가기 전에 목발 반납하는 거죠? 두 시간 전에 나오면 안 늦을 거 같으니까 그 정도에 차 꺼낼게요.”
“괜찮아. 오기와라도 일해야 하는데 그러잖아도 지금까지 쭉 데려다주느라 부담됐을 테고. 다리도 나았으니까 혼자서도 충분해.”
“목발이 꽤 커서 그거 들고 전철 타면 위험해요. 전에 선생님이 하신 거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강하게 말하기에 더는 받아칠 말이 없었다.
가볍게 고마움을 전하며 다정한 울림과는 정반대로 싫든 좋든 상관 않는 그 목소리를 최후통첩 같다고 생각했다.
(계속 눌어붙을 생각도 없고 슬슬 때도 됐으니까요.)
(저도 정떨어지게 하는 건 피하고 싶으니까, 이제 마무리 지을 겁니다.)
머릿속에서 방금 들은 말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울렸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흩어졌던 사실을 이어주었다.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오기와라가 변화한 이유를 마침내 알았다.
그의 안에서는 이미 모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것이 언제인지, 무엇을 계기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근 시일에 끝을 알릴 것이다.
귀여운 연인과 상황이 맞을 때만 갖고 노는 장난감은 저울질할 필요도 없다. 마침 좋은 때에 미나토의 부상도 완치되었으니, 소중한 그녀가 정떨어지기 전에―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마무리를 짓기로 결정했다.
쉽게 말해 그런 것이다.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예요. 제 거, 니까요.)
귓속에서 오기와라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울고 싶어질 만큼 다정한 그 울림에 희미하게 남았던 용기의 조각이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