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16/22)

8

세 명이 탄 택시에서 요시하루가 운전사에게 말한 행선지는 미나토의 아파트가 있는 역 근처의 비즈니스호텔이었다.

“요시하루? 여기, 호텔인데.”

“응, 오늘 밤은 여기서 잘 거야.”

요금을 내며 그렇게 말하는 요시하루에게 재촉당해 미나토는 목발과 가방을 손에 들고 정면 출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갔다.

부지가 좁아서 그런지 호텔 자체가 작게 지어진 듯했다. 그래도 프런트 앞에는 충분히 여유로운 로비가 있고, 편히 앉을 소파도 있었다.

“볼일이 있어서 오늘은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마음이 변해서 미나토 얼굴 보러 왔어. 오랜만이기도 하고, 덤으로 코우모토도 불러 봤어.”

“덤이라니, 너 인마.”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 역시 울컥했는지 몇 걸음 뒤에 있던 코우모토가 얼굴을 찡그렸다. “죄송해요.”라며 얼른 고개 숙인 미나토에겐 쓴웃음 지었다.

“나야말로 미안해. 설마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을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 다리,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무리는 하지 마.”

“네, 감사합니다.”

미나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코우모토는 요시하루를 봤다.

“그래서? 난 이제 이대로 집에 가도 될까?”

“응, 충분해.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잠깐 구석에서 전화 좀 하고 올 테니까 미나토는 코우모토 좀 배웅해줘.”

“…네.”

미나토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더니 요시하루는 정말로 프런트 건너편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버렸다.

이런, 이런, 이라 말하고 싶은 듯이 어깨를 움츠린 코우모토와 함께 미나토는 십수 미터 앞에 있는 정면 출입구로 향했다.

“저기, 잠깐 시간 있으시면 차나 식사라도 같이하면 어때요? 모처럼 오셨는데.”

“마음은 고맙지만 내일은 출장 때문에 다섯 시에는 일어나야 하거든.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남자 말인데, 옛날의 그 학생 맞지?”

출입구를 약간 앞에 두고서 말을 멈추고는 코우모토가 말했다.

얼버무려도 무의미해서 그렇다고 하니, “그렇군.”하고 한숨 같은 소리를 냈다.

“언제부터 만났어? 몇 년 전부터?”

“지난달에 다시 만났어요. 우연히 학원 학생과 아는 사이여서, 거기서.”

“그렇군. 그래서 저렇게 나오는 건가. ―있지, 호소카와.”

톤을 낮춘 목소리로 이름을 불려 미나토는 저도 모르게 등을 쭉 폈다.

코우모토는 흐뭇한 광경을 본 것처럼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실은 조금 더 상태를 보고 말할 작정이었는데. 나랑 사귈 마음 없어?”

“…네?”

입을 떡 벌리고 올려다본 미나토에게 코우모토는 굉장히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대답은 천천히 해도 좋아. 다만 난 진심이니까 그것만은 믿어줘. 그리고 거절당한다고 해서 친구 사이까지 끊을 생각은 없으니까.”

“저기.”

입안으로 우물거리는 미나토의 어깨를 툭 치고 코우모토는 밖으로 나갔다.

유리 너머로 멀어지는 코우모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예전에 오기와라와 관계를 끊었을 때 미나토는 코우모토에게 확실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후, 그는 요시하루를 통해서 지인으로 지냈고, 미나토가 취직한 뒤에는 문자친구가 되어 지금은 연상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 코우모토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친구로서다.

애초에 그는 상대가 부족한 사람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개인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나가시마나 요시하루에게 농담처럼 그의 연애담을 듣는 일도 많았다.

미나토가 연하인 데다 연애도 제대로 해본 적 없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말하지 않을 뿐이지, 지금은 사귀는 연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조금 전의 고백은 충격이 컸다.

“미나토, 여기. 방에서 얘기하자.”

요시하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미나토는 그가 기다리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서둘러 갔다.

요시하루가 데려간 객실은 엘리베이터에서 상당히 가까운 11층의 트윈룸이었다. 걸리적거리는 목발과 가방을 벽장 앞에 두고, 안쪽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곧장 호텔 방 안에 있는 주전자로 요시하루가 차를 끓였다.

두 사람 몫의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익숙한 요시하루의 예쁜 얼굴이 전과 어딘지 달라 보였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웃음을 머금고 요시하루가 차를 입에 가져가며 갑자기 말했다.

“코우모토에게 고백받고 어땠어?”

“어땠냐니, 그런 거.”

“코우모토, 저래 봬도 한결같이 미나토만 봤는데… 몰랐지?”

“하지만 코우모토 씨에겐 연인이 있다고 나가시마도 요시하루도 그랬잖아.”

“연인이 있던 건 3년 전 이야기. 2년 전에 이쪽으로 전근 와서 문자 친구와 재회하고 나서는 도로 반해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대.”

반신반의하며 눈썹을 찌푸렸지만 방금 전 코우모토를 떠올리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난처해서 고개를 숙이자, 요시하루가 웃었다.

“본인 나름대로는 대시를 했다고 하던데, 미나토는 전혀 몰랐던 모양이라 꽤 기운 빠졌겠다.”

“….”

다시금 생각해 보아도 코우모토와의 접점은 한 달에 한두 번 밥을 먹거나 문자를 주고받고, 가끔 전화 통화하는 정도였다.

종종 놀러 가자고 권한 적은 있지만 미나토는 휴일이 불규칙적이고 코우모토는 주말과 공휴일에 쉬기 때문에 좀처럼 휴일이 맞지 않아 드라이브 삼아 한 번 나갔다 온 것이 전부였다.

“재촉하고 싶지 않아서 장기전으로 가려던 걸 눈앞에서 빼앗겼나. 자업자득이라고는 해도 힘들겠다.”

한숨을 섞어 말하며 요시하루는 미나토를 봤다.

강한 시선을 받으며 예전에 나가시마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른바, 요시하루의 눈빛이 변하면 그땐 이미 늦었다, 고 언급했던 것 말이다.

“아까 그 사람, 오기와라였나? 예전에 미나토가 과외했던 학생. 미나토를 미나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 걔뿐이었지?”

거기서 눈치챘나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부정한들 소용없기에 미나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외 관두고 졸업하면서 이사하고, 연은 끊었을 텐데. 언제 어디서 만났어? 혹시 저쪽에서 찾아왔어?”

“그냥 우연이야. 마주쳤을 때 나랑 같이 있던 사람이 오기와라랑 아는 사이였거든.”

“흐음? 그래서 출퇴근을 도와주는 이유가 그를 감싸다가 계단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였지?”

요시하루의 목소리도 말투도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도망칠 수 없다고 느꼈다.

“그 커피숍에서 미나토를 기다릴 때 그가 왔는데, 코우모토가 먼저 반응하더라. 오기와라도 금방 눈치챘는지 말은 안 해도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라서 왜 그러나 했더니, 학원에 다니는 아이가 오더라고. 오기와라에게, 호소카와 선생님 지금 수업 끝났으니까 곧 올 거라고 보고하던데? ―오기와라라는 이름을 듣고 확신했지. 미나토가 짝사랑하던 그 애구나.”

거침없는 지적에 항복하고 말았다.

어차피 나가시마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을 생각하면 원만하게 설명해두고 싶어서 미나토는 말을 골랐다.

“학원장 때문에 억지로 선 봤을 때, 그 호텔에서 마주쳤어. 그땐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오기와라가 만나러 왔어. …그 뒤로 가끔 만나게 됐고, 계단 어쩌고 하는 건 어쩌다 둘이서 나갔을 때 사고에 휘말렸을 뿐이야.”

“즉 친구처럼 지낸다는 말이야? 오기와라가 미나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걸로 보면, 예전 과외 선생과 학생이려나?”

“응. 친구보다 그쪽에 가깝겠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나토에게 요시하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미나토가 괜히 숨길 이유가 없지 않나? 특히 나는 걔랑 만난 적도 없는데?”

말문이 막히자 다그치듯이 말했다.

“실은 다른 거지? 처음 봤을 땐 사귀는 사인가 했는데 그런 것 치곤 공기가 무거웠어. 마음이 통하는 것 같으면서 안 통하는 것 같던데. 아마 예전의 그 일이 영향을 주는 거겠지?”

“…요시하루, 나가시마한테 무슨 말 들었어?”

“듣진 않았는데, 아까 보고 알았어. 미나토, 아직 걔 좋아하지?”

그렇게 말해버리면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옛날 일부터 이번에 일어난 일까지 모두 말하니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걸렸다.

말하다가 지쳐서 한 모금 마신 차는 완전히 식어버렸고, 그것을 알고 요시하루가 바로 다시 끓여왔다.

솟아오르는 수증기를 보면서 공연히 마음이 놓였다.

“그때와 다름없이 나 혼자 일방통행이야. …이번에 다치고 나서는 약간 다정해진 기분은 들지만.”

웃으며 말했는데 요시하루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진 알겠어. ―근데 미나토는 걜 용서할 수 있어?”

“…응?”

“오기와라의 형 말처럼, 당시에 그가 한 짓은 범죄야. 이번 일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협박이고.”

정색하는 요시하루에게 미나토는 웃으며 반론했다.

“범죄자는 오히려 나지. 이번에도 진심으로 싫었으면 도망칠 수 있었어. 내가, 오기와라 곁에 있겠다고 선택한 거야. 오기와라를 한 번 더 만난 것도, 지금 이렇게 된 것도 후회하지 않고.”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으면 오른쪽 무릎을 차라고 오기와라는 말했다. 그것은 위협인 동시에 그의 가장 큰 약점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고백할 마음은 없어?”

“한들 의미도 없고, 걔한테 내 맘 들키고 싶지 않아. 포기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 스스로 불쌍할 정도니까.”

“그럼 고백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안 그럼 언제까지고 끝낼 수 없어.”

찻잔을 손에 든 채 눈을 깜빡인 미나토에게 요시하루는 부드럽게 말했다.

“억지로 삼켜버린 마음은 끝까지 깊이 남아. 몇 년이 지나도 생각날 때마다 같은 기분을 맛보게 된다고. 제대로 고백하고 대답을 듣는 게 깔끔하게 끝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일 때문에 만나서 계속 부딪혀야 하는 상대라면 몰라도, 일방통행에다가 걔가 질리면 끝나는 거지? 그러면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잖아? 그런 상대에게 괜한 자존심 지켜봐야 의미 없잖아. 아예 전부 털어놓으면 마음도 깨끗하게 정리될 거야.”

“다 털어놓으면, 깔끔하게…?”

그때의 마음을 억지로 묻어둔 결과, 지금까지 질질 끌게 된 것은 확실하다.

고백은커녕 이별의 말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오기와라의 속마음도 확인하지 못한 채, 잊지도 포기하지도 못했다.

이대로 오기와라가 싫증 내서 끝나버린다면 또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는 걸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마무리도 짓지 못한 채로?

“사람 마음이란 게 복잡하니까. 최근에 다정해졌다면 그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을지도 몰라.”

“변화?”

“자기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해도, 어느 정도 호의가 없으면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서 깨닫는 것도 있을 테고.”

“하지만 오기와라와 난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 남자끼린데 호의 같은 거.”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고 보는데. 우리 같은 나이는, 보통이잖아.”

“요시하루.”

가만히 듣고만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렇다고 생각해버릴 것 같아서 나무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요시하루가 차를 대신할 것을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시간이 신경 쓰였다.

손목시계로 눈을 돌린 미나토는 “으악!”하고 소리 질렀다.

“왜 그래?”

“열두 시 넘었어. 날짜 바뀌어 버렸어.”

벗어서 의자에 걸어 둔 웃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니 오기와라에게 온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여러 개 들어와 있었다. 학원을 나오면서 무음 모드를 풀지 않은 탓에 몰랐다.

“시간도 이런 데 그냥 자고 가지? 여기, 두 사람 이름으로 예약했으니까.”

“아, …그랬구나?”

“느긋하게 얘기하고 싶었으니까. 걔한텐 문자라도 보내두면 되겠지.”

이 시간에 데리러 오라고 하기보단 나을 것 같아서 요시하루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오기와라에게 문자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얹으니 바로 전화가 왔다. 당황해서 받으니 “지금 어디세요? 바로 데리러 갈게요.”라고 했다.

“이대로 호텔에서 자고 갈 테니까 괜찮아. 아직 할 얘기도 남았고.”

‘이야기 끝나면 전화 주세요. 바로 데리러 갈게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니까. 오기와라도 내일 일 가잖아?”

‘차로 가니까 별로 힘들 것도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여전히 입씨름하고 있으니, 눈앞에서 키득키득 요시하루가 “바꿔줘.”라며 휴대전화를 빼앗아 갔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제가 책임지고 학원까지 데려가면 되겠습니까? 미나토 바꿔드릴게요.”

싱긋 웃으며 대답한 요시하루가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복잡하고 괴상한 것처럼 전화기를 쳐다보다가 주저하며 귀에 댔다. 말을 거니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억누르듯 말했다.

‘내일 밤, 평소대로 데리러 갈게요.’

“알았어. 고마워, 이래저래 미안해.”

자연스레 입에서 나온 자신의 목소리가 솔직하게 들렸다. 전화를 끊고 테이블 위에 두니 요시하루가 불쑥 말했다.

“미나토는 걔한테 무르구나. 걔도 미나토에게는 과보호가 심하지만. 단지 사정이 맞아서 사귀는 상대라면서 이런 시간에 일부러 데리러 온다고는 하지 않을 거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는데.”

조금은 기대해도 될까? 그런 마음이 가슴 속에서 생겨났다.

오기와라의 태도 변화를, 다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주 조금이라도 호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번갈아가며 샤워한 다음 각자 침대에 들어갔다. 세미 더블 침대 위에서 오늘 밤은 완전히 혼자겠구나, 생각하니 쓸쓸했다.

나흘 뒤 미나토는 병원에 목발을 반납한다. 오기와라의 태도가 이 부상 때문이라면 그때 또다시 무언가 변화할 것이다.

코끝까지 이불을 덮고 미나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각오하고 한 발 내딛듯 마음먹어 봤다. 반드시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끝날 각오가 되었다면 고백할 용기를 내어 봐도 좋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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