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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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절해 주십시오.”

다음 날, 점심시간에 학원장실을 찾아가 일전에 받았던 인적사항과 사진을 건네자, 선 자리에 동행했던 상사는 팔걸이의자에 앉은 채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로 미나토를 올려다봤다.

“아쉽네,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귀엽기는 하지만 저한텐 너무 어린 것 같습니다. 열 살 가까이 아래니까요.”

“그 정도 차이 나는 게 좋다고 그쪽에서 말했어. 옆에서 보기에는 좋아 보였는데… 거절하기 전에 다시 한 번만 만나 보면 어때?”

“안타깝게도 오늘 중으로 그쪽에서 역시 거절하는 대답이 올 텐데요? 그 여자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요.”

마음 써 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 이상의 참견은 명백하게 민폐였다. 지금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폭로하자, 미나토의 아버지뻘인 그는 입을 떡 벌렸다.

“그건 본인이?”

“네. 정중하게 사과했으니 저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알겠네, 거절한다고 분명해 전해두지. 그런데, 호소카와.”

“네?”

갑자기 돌변해서 선뜻 인적사항과 사진을 받아든 상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발을 멈추고 돌아보니 평소에는 까다롭게 굴던 상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끈질기게 들리겠지만, 정말 결혼할 마음 없는가? 거기 말고도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혼자 지내는 게 편합니다. 애초에 적성에도 안 맞고요.”

연애감정을 느낀 것은 과거 단 두 번뿐으로 그 두 번 모두 상대가 동성이었다.

그런 자신이 이제 와서 여자를 좋아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대 여성에게 미안한 일이다.

속마음의 절반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고 미나토는 학원장실을 나왔다.

이것으로 어깨의 짐을 한 가지 덜었다. 봄방학 중인 지금은 봄학기 수업에다가 복습 수업까지 떠맡고 있어서 꽤 바빴다.

미나토가 근무하는 곳은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지역 밀착형 학원이다.

보통 저녁부터 밤까지 고등학생 반을 담당하지만, 학교가 장기 방학에 들어가면 그 기간에는 오전부터 밤까지 여러 수업을 로테이션으로 맡는다.

그중에서도 매번 반드시 지명되는 것이, 몇 년 전에 직접 기획 제안한 중학생용 수업인 복습 수업이었다.

학원 내에서도 수학 성적이 일정 선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을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스스로 수강을 희망하는 학원생도 늘었다.

더군다나, 수업 마지막 날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은 남아서 질문하는 것에 열심인 학생이 많아지곤 했다.

그 모두에게 대답을 해주고 난 뒤, 실내를 간단히 점검한 다음 자물쇠를 채우고 복도로 나올 무렵에는 다른 강의실에도 거의 사람이 없었다.

그런 복도에서 벽에 기대선 그림자를 발견하고, 미나토는 이내 환히 웃었다. 고등학생 반에서 가르치는 학생이었다.

“이리노? 무슨 일이야, 질문?”

고등학교 2학년인 지금도 키가 작아서 귀여운 인상을 주는 그와는 3년 정도 전에 앞에 말한 복습 수업에서 만났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스스로 수학 알레르기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다른 학생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벅찬 상대였다.

그러나 애쓴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까, 현재 그가 제일 잘하는 과목은 수학이 됐다. 학원 내에서도 미나토를 잘 따르며 질문이 아니라도 자주 말을 걸었다.

“호소카와 선생님, 죄송해요.”

말과 동시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놀라서 쳐다보니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어제 선보게 된 계기, 아마 저 때문일 거예요. 어머니가 미나토 선생님을 마음에 들어 하신 거, 제가 집에서 자주 선생님 얘기해서 그런 거 같고. 그래서 학원장 선생님에게 억지로 부탁했나 봐요.”

“원장님께, 어떻게?”

“저희 아버지랑 학원장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거든요. 우리 누나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도 만날 뜬구름 같은 소리만 한다고 걱정하셔서, 어줍은 녀석에게 걸리기 전에 제대로 된 사람과 결혼시키자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일단 말을 자르고 눈만 들어 미나토를 쳐다봤다.

“그런데 누나는 짝사랑 중이라고 거절했다죠? 그렇게 무례한 짓 하지 말라고 화내긴 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다시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어제 만난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눈이나 입가 주위가 많이 닮았다. 좀 더 생각을 해보면 인적사항에 적힌 그녀의 성 역시 이리노였다.

과연 남매사이였군, 하고 깨닫자 웃음이 나왔다.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결혼 생각은 없었으니까 똑같아.”

“어? 약간은 기대했는데.”

아쉽다는 울림에 시선을 주니 이리노는 겸연쩍은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 상관없나. 그럼 저 집에 갈게요. 선생님, 담에 봬요.”

“조심해서 들어가. 딴 데로 새지 말고.”

네에, 하고 길게 늘어트리며 대답하는 그를 정면 출입구에서 지켜보았다. 강사 대기실로 발걸음을 향하며 어제에 이어 세상 참 좁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퇴근 준비를 끝내고 강사 대기실을 나왔을 때는, 사무실 접수처도 출입구도 모두 닫혀 있었다.

곧장 일반 출입구로 나오니 바깥은 완전히 캄캄해져서 초봄이라곤 해도 으슬으슬함에 약간 몸이 떨렸다.

직장에서 지금 사는 아파트까지는 전철과 도보로 20분 정도.

시간을 계산하며 걸쳐 입은 코트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그대로 역으로 발길을 향하자마자, 느닷없이 키 큰 그림자가 미나토의 눈앞을 스륵 스쳤다.

오기와라가 좁은 골목의 중앙에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의 절반은 그늘졌지만 길쭉한 눈이 미나토에게 고정된 것은 분명했다.

왜 여기에 있지, 하고 생각하다가 바로 이리노를 떠올렸다.

오기와라에게 여동생 취급을 받는 여성의 동생이라면, 친한 것도 당연하다. 아마도 아슬아슬하게 엇갈린 모양이었다.

즉각 이해하고는 가볍게 인사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옆을 지나가려 할 때 갑자기 팔꿈치를 붙잡혔다. 말없이 쳐다보는 시선에 당황하면서 미나토는 얼른 말했다.

“이리노를 마중 왔습니까? 공교롭게도 전 그의 주소를 몰라서.”

“…이리노가, 누구예요?”

입을 연 오기와라의 첫마디가 의외라 미나토는 난처했다.

“어제 만난 그녀의, 남동생입니다.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만.”

“아아, 동생이 있었나 보군.”

모르는 일처럼 말하기에 멍청히 서 있자 오기와라는 몸을 휙 구부리고 말했다.

“당신하고 할 말이 있어요. 시간 좀 내주실래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그의 팔꿈치를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그대로 오기와라도 입을 다물어버려 어중간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서서 말하기도 뭣한 데, 자리 좀 옮기지 않을래요? 저 차 가지고 왔거든요.”

아직도 높임말을 쓰나, 하고 상황에 문득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했다.

기분 탓인지, 마지막으로 덧붙인 한마디는 어딘가 간절하게 들려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질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아무래도 안 된다고 하시면 여기서 해도 상관없지만요.”

처음부터 줄곧 억지로 밀어붙였던 주제에 갑작스럽게 토라진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도 목소리도, 그 무렵 그대로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상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미나토의 팔꿈치를 끌어당기듯이 오기와라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미나토도 함께 걸어갔다.

근처 무인 주차장에 세워 뒀던 오기와라의 자동차는 높이가 있는 RV 차량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탓에 조수석에 올라타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이윽고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창문 밖 풍경에 눈길을 주면서 조용히 오기와라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옆에서 핸들을 잡은 그는 역을 지나치고 나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필요할 때는 빌리면 된다는 생각에 미나토는 자기 차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동할 때는 주로 전철이나 버스를 타기 때문에 꽤 오래 산 곳이라 해도 버스 노선을 벗어나면 자기가 있는 곳을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니 얼른 이야기를 정리하고 아무 역에나 자신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판단한 미나토는 운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이 뭡니까?”

무거운 침묵이 말투를 조심스럽게 했다.

앞을 보던 오기와라는 이쪽을 흘긋 쳐다봤지만 말없이 자동차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급커브로 흔들리는 것을 견디며 미나토는 다시 한 번 같은 물음을 입 밖에 냈다.

“…학교가 아니라 학원 선생님이 되셨네요. 채용 시험 떨어졌어요?”

몇 분 뒤 겨우 입을 연 오기와라의 첫마디에 미나토는 당혹스러웠다.

“시험에는 붙었는데 채용 범위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학원 강사가 맞지 않을까 싶어서요.

“은사였던 선생님처럼 되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목표는 그랬지만 도달할지 어떨지는 얘기가 다릅니다. 학교 선생이 되면 가르치기만 해서는 안 되니까요.”

벌써 몇 년도 전에 한 이야기를 기억하는구나, 하는 마음에 자그만 기쁨이 솟아났다. 당연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에 안도하며 지금 자신들은 그저 소원해진 지인 같다고 느꼈다.

그때 앞유리 저편으로 탁 트인 시야가 펼쳐졌다.

바다에 접한 길로 나온 것이다. 보름달 덕분인지 바다 위의 공기는 밝고 파도의 형태를 또렷하게 드러났다.

잠시 후 자동차는 그대로 바닷가 주차장으로 진입해 정면에 바다가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네요. 오랜만에 만난 제자를 두 번이나 모른 척하는 사람이 학교 선생님이라니 문제가 있죠.”

노골적으로 빈정대기에 조금 전 느슨해졌던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그것도 당연한 말인가, 생각하고 고개를 숙이니 오기와라가 갑자기 차 밖으로 나가는 기색이 느껴졌다.

바로 제 쪽으로 돌아와 옆 창문을 두드리더니 차 밖에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차에서 내리자, 불어오는 바람의 서늘함에 몸이 떨렸다.

초봄이라고는 하나 3월 말의 밤은 썰렁했다.

왔다 갔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파도 소리에 섞여, 이내 자동차를 잠그는 둔탁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부러 차 밖으로 나왔는지 미나토는 알 수 없는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죠. 저한테 할 말이 무엇입니까?”

“안에서 말하죠. 이쪽으로.”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코트 너머로 팔꿈치를 잡았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그를 끌고 걸어갔다.

불안한 채로 미나토가 조심스레 진행 방향으로 시선을 주니, 십수 미터 끝에 하얗고 세련된 건물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서서히 지붕 가까이 올라간 간판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의 호흡이 멈췄다.

시간과 요금이 표기된 그곳은 틀림없이 그런 호텔이었다.

“잠깐, 어딜 가려고?”

“조용한 데서 대화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 시간이라면 문 연 가게도 얼마 없고. 손쉽게 다른 사람 눈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는 이런 곳이 가장 적합하죠.”

“그런 거라면 차 안에서 해도 되잖아. 그러면 다른 사람이 들을 일도.”

“그건 제가 싫습니다. 답답하고 기온이 낮으면 오른쪽 무릎에 영향이 가거든요.”

마지막으로 덧붙인 한마디에 반론조차 할 수 없어졌다. 결국 끌려가면서 미나토는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럼 패스트푸드점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에.”

“패스트푸드는 맛없어서 싫습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질렸고, 밤중에도 사람이 제법 많아요. 저보다 선생님이 다른 사람에게 들리게 하고 싶지 않을 텐데요.”

발을 멈춘 오기와라가 일순 질렸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려다봤다. 흡사 단어를 집어 던지는 것처럼 냉정히 말한다.

“대단한 착각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도 상대를 고를 권리는 있거든요.”

비웃음 섞인 대답에 말을 잃었다.

입을 다문 미나토를 흘끗 쳐다보고는 오기와라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더는 무슨 말도 할 수 없어 미나토는 팔을 잡힌 채 그대로 끌려갔다.

익숙해 보인다고,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방 안쪽으로 향하는 등을 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실상 미나토는 이런 호텔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카운터 앞에서 이유도 없이 당혹스러워하는 미나토와는 대조적으로, 오기와라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숙박 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어리숙하게 굴 수 있었던 것도 딱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였다.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 공간은 얼핏 보기엔 시티호텔처럼 보이면서도 무언가 명백하게 달랐다.

구체적인 시설 이전에 공기 자체가 독특한 색을 띠고, 침대가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귓가에서 짙은 날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착각이 몇 년 전 딱 한 번의 행위를 연상시켰다.

목소리도 체온도, 숨소리조차 평소와 다른 색을 띠었던―.

“뭐 하세요. 더 안으로 와서 코트 정도는 벗으시죠?”

말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미나토는 자신이 문을 등진 채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들어간 오기와라가 위에 걸쳤던 상의를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졌다. 그 동작만으로도 피부가 멋대로 긴장했다.

“괜찮습니다. 전 여기 있을게요. …죄송하지만 내일 업무 준비도 해야 해서 가능한 한 빨리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일이 없으면 나랑은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아, 그 전에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게 진심이겠지.”

돌아온 말은 단숨에 거칠게 변했다. 그 속에 섞인 모질고 지독한 울림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기와라의 말투만이 아니라 표정, 심지어 몸을 둘러싼 공기마저 완전히 변했다.

방금까지와 전혀 다른 퇴폐적이고 소름 끼치는 듯한―.

이것은 누굴까?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공포심이 머릿속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던 발꿈치가 뒤에 있던 문에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그 소리 때문인지 눈썹을 찌푸리며 눈앞에 섰다.

그대로 가볍게 몸을 숙이고 미나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미나토 선생님, 얌전하게 생겨서는 엄청 제멋대로네요. 그때는 멋대로 혼자 도망치고 생각지도 못하게 다시 만났나 했더니 하는 말이 그겁니까?”

가까운 거리에서 오기와라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그것은 위협적으로 뽑아 든 스산한 칼과 같았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얼어붙을 듯한 데, 아이러니하게도 닿으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운 열을 품고 있는―.

“선생님과 저 사이에 그건 아니잖아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휘둥그레 뜬 시야 속으로 그렇지 않아도 가깝던 오기와라의 얼굴이 휙 다가왔다. 입술을 스치는 날숨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읏!”

입술에서 뺨을 따라가는 체온이, 질척하게 귓불을 핥았다.

달아나려는 어깨를 붙잡아 누르고, 턱 아래를 세게 쥔 손바닥이 얼굴을 치켜들게 했다.

이번에야말로 도망칠 길이 없어 오롯이 숨을 막았다.

“응, 읏.”

제지하려는 입속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뜨거운 체온이 사납게 열기를 전했다. 다물려던 턱을 강한 힘으로 붙잡혀 위턱에서 치열 뒤쪽까지 집요하게 괴롭혔다. 충동적으로 피하려는 미나토의 혀끝을 쫓아와 이를 세웠다. 희미한 아픔으로 깜짝 놀라며 요동치던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아찔했다.

필사적으로 앞가슴을 막아서던 손목을, 그는 손쉽게 낚아챘다.

양손 한 곳에 그러모아, 벽으로 밀어붙여진 채로 미나토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움츠러들어 벌벌 떨던 그의 입술을 집어삼킬 듯 빨아들이자, 질척한 소리가 여과 없이 귓가에 닿아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곳저곳에서 생겨난 열은 그렇게 눈 깜짝할 새 포화상태가 되어 주위에 넘쳐흘렀고, 불길이 번지듯 순식간에 그의 사고를 녹였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 그는 오기와라에게 매달렸다.

마지막 마무리처럼 미나토의 치열을 가볍게 핥는 키스가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멍청히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뱉는 미나토의 입술 끝을 미끈미끈하게 쓰다듬었다.

“―선생님, 아직 날 좋아하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서울 만큼 달콤한데도 턱을 잡은 손의 힘은 꼼짝도 못 할 만큼 강했다.

그 차이에 미나토는 숨을 집어삼켰다.

“무슨 소리… 그런 건 다 지난 일이야.”

“옛날에 좋아했던 상대에게 키스당한 것만으로 이렇게 된다고요? 그렇다는 말은 어지간히 지조가 없던가, 아니면 호색한이라는 소린데. 그래서 선생님은 어느 쪽인데요?”

조롱 섞인 목소리와 함께 바지 앞섶을 쥐어오기에 허리가 크게 튕겼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형태를 바꾸었다는 것을 알고 무언가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어느 쪽이든 간에, 여기까지 얌전히 따라온 시점에서 이미 기대한다는 거죠?”

“이, 야기를 하는 것뿐이라고… 상대, 를 고를 권리가 있다고 해서.”

“당신을 뺀다는 소릴 한 적은 없는데요?”

빈정거리며 천 위로 예민한 부분을 더듬었다. 목덜미부터 귓가까지 흡사 잡아먹힐 것 같은 키스 때문에 숨죽인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흘러나왔다.

“당신, 뜬소문 하나 없더군. 결혼할 마음도 없다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남자가 좋으니까 남자라면 상대가 누구든 좋다는 거지? 그럼 나도 상관없잖아? 무엇보다 당신의 첫 남자인 데다가 지금도 좋아하는 모양이니.”

얼토당토않은 말에 대답조차 못 한 채 미나토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양손의 자유를 되찾으려 발버둥 치자 상대는 보란 듯이 양쪽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으면 내 오른쪽 무릎을 차 보시든지. 수술까지 갔던 상탠데 간단히 도망칠 수 있을걸.”

가만히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에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나 힘없이 털썩 내려앉는 무릎이 바닥에 미처 닿기 전에 강제적인 힘이 허리 채로 일으켜 세웠다.

머리 위에서 웃는 기색이 난다고 어렴풋이 느끼는 사이, 어느새 코트 뒤쪽 옷깃을 강하게 끌려 강제로 어깨부터 흘러내렸다.

그렇게 간단히 타인에 의해 정장 윗도리까지 차례로 벗겨졌다.

“그렇게 얌전히 있으면 돼요. 키스도 서툰 걸 보니 제대로 상대해준 남자도 없었죠?”

귓불을 빨아들이며 웃는 목소리가, 턱의 부드러운 부분을 잘근거리며 입술 끝을 핥았다. 입술을 막고는 물고 늘어져 치열 깊은 곳을 훑었다.

지극히 사납고 공격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키스에 희롱당하며 미나토는 허리의 벨트가 풀려 빠져나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끌려가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

“어째…서.”

겨우 내뱉은 말은 위에서 내려오는 키스에 봉인 당했다.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손을 얼굴 옆으로 고정하나 싶더니 그것과는 다른 손바닥으로 턱을 잡혀 입술을 열었다.

깊어진 키스에 신음을 흘린 목을 그는 쓰다듬었다.

혀뿌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키스가 입술에서 멀어지며 뺨에서 목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왜… 이런 짓을.”

날숨에 가까운 그 목소리가 닿았는지 어정쩡하게 풀어진 넥타이 틈의 피부를 더듬던 키스가 돌연 멈추었다.

그러나 숨을 죽인 미나토를 무시하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에서 쇄골 라인으로 빨아들이는 것 같은 강렬한 키스가 오고 가자, 작은 아픔에 피부가 떨렸다.

그때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아직 흥미가 남았습니까? 모처럼의 기회니까…?”

오기와라가 키스를 멈추고 내려다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미나토는 고개를 돌렸다.

“…이미 알면서,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

사무적인 대답에 숨을 삼킨 미나토를 눈치챘는지 어땠는지, 웃음이 스민 목소리는 내던지듯 이어졌다.

“옛날에 했던 그게 예상 밖으로 좋았거든요. 임신할 걱정도 없고 좋잖아요.”

“그런….”

“내 오른쪽 무릎, 못 쓰게 만든 건 당신이야. 조금은 속죄해도 괜찮잖아요?”

“―!”

뇌쇄적인 목소리로 속삭이며, 스르륵 움직인 손바닥이 벨트가 없어진 바지 틈으로 들어와 더 깊숙이 미끄러졌다.

부추기듯 손끝으로 만질 때마다 피부 위를 달리는 아찔한 쾌락에 빠져든다. 그 행위에 속절없이 잠식당하는 스스로에게 미나토는 절망했다.

키득키득, 문득 가까이서 웃는 소리가 났다.

진심으로 즐거운 듯 목을 울리는 웃음이 꽤 가깝다고 여기는 찰나, 곧 여유 있는 목소리를 오기와라는 귓속으로 직접 흘려보냈다.

“당신 몸은 입보다 훨씬 솔직하네. ―괜찮아, 그때보다 잘해줄 테니까. 모처럼 생긴 기횐데 즐기면 돼.”

다정한 목소리가 미나토의 귀에는 단죄처럼 떨어졌다.

헐떡이는 듯한 심호흡이 지독하게 얕은 것처럼 느꼈다.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실내는 용도와는 달리 차분한 시티호텔 느낌이었다. 그것이 지금 상황에 대해 위화감을 일으켰다.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 그에 반해 배겨내지 못하는 마음,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함께 미나토의 뇌리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런데 이젠 그 혼란마저 어딘가로 붕 떠버렸다.

귀에 달라붙은 들뜬 자신의 숨소리와 옷자락이 쓸리는 기척도, 피부에 실린 무게와 체온, 띄엄띄엄 이어지는 질척한 소리도, 심지어 그것과 연동해 생겨나는 쾌락마저 바로 곁에 있음에도 멀게만 느껴졌다.

“읏, 응―아.”

천장 윤곽이 흔들려 애매했다. 날숨에 섞인 목소리는 명백하게 천박한 색을 품어 참고 들어줄 수 없는 울림을 남겼다.

뒤로 젖힌 머리가 제멋대로 좌우로 흔들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꽤 오래전부터 눈을 꼭 감은 것은 눈동자에 비치는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앙다문 입술이 도로 느슨해지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날숨을 흘렸다. 힘을 다해 돌린 얼굴을 팔로 가리자마자 낮은 소리가 날아왔다.

“얼굴 숨기지 마요. 팔도 치워요.”

웃고 있는데도 가혹한 울림은 명령이다. 멍해진 머리로 어떻게든 이해해 팔을 내리자,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 돼요. 얌전하게 있으면 좋은 걸 줄 테니까.”

흡사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 같은 말투가 목소리 때문인지 으스스한 느낌을 줬다.

말한 사람이 정말로 오기와라였나, 하고 몇 번인가 생각했다.

오기와라는 익숙했다.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미나토의 옷을 벗기는 손길은 너무 익숙해서 저항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밑에 입은 바지는 속옷 채로 내렸고, 목에서 푼 넥타이는 어딘가로 내던졌다.

지금 미나토는 오른쪽 팔에 와이셔츠가 걸렸을 뿐, 훤히 드러나 무릎을 크게 벌려진 채 강한 손으로 고정되었다.

억지로 이끌어낸 쾌락은 고통과 닮았다.

벌려진 틈의 예민한 부분은 이미 한 번 한계를 맞이했는데도 오기와라는 여전히 긴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만지작거렸다.

그 깊은 곳에 꽤 오랫동안 손가락이 들어와 있었고, 지금은 물기 어린 감각과 체온으로 문질러대고 있었다.

끊임없이 더듬고 쓰다듬는 감촉은 무서울 만큼 선명했으며,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크게 울리는 소리는 청각을 자극했다.

붙잡힌 부분의 형태를 그리듯이 쓰다듬고, 세게 당길 때마다 점도 높은 쾌락이 피어났다. 왔다가 멀어지는 파도처럼 반복해서 흔들릴 때마다 한계에 가까운 곳으로 내몰았다.

“싫… 읏, 아.”

자기 목소리의 울림이 귀에 거슬려서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도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견딜 수 없어 손등에 이를 가져가자마자, 갑자기 손목이 입술에서 멀어졌다.

“…얼굴 숨기지 마. 소리도 삼키지 마. 몇 번 말해야 알겠어? 묶어주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는데?”

부드럽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킨 오기와라가 들여다봤다.

의미심장한 손놀림으로 입술을 쓰다듬고, 엄지로 치열 사이를 파고들어 오는 바람에, 어떻게든 작게 고개를 젓자 씩 하고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입, 열고 혀도 내밀어.”

오기와라의 목소리는 달콤한 독 같다. 그것도 바로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중독을 일으키는 독.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 좀먹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떨어트리는 것처럼.

입술을 깊숙이 파고들어 구석구석 빠짐없이 핥아댔다.

강요당한 행위에 솔직하게 응하고 마는 것은 틀림없이 그 독에 당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미나토는 오기와라의 독을 뒤집어썼고, 오늘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

입술에서 멀어진 키스가 뺨을 따라서 귓불로 내려왔다.

소리를 내며 핥아대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무릎이 잡힌 채 다리를 벌리고 허리 깊숙이 오기와라의 열을 받아들였다.

단 한 번의 경험은 기억 속에서도 멀어진 상태지만 막상 똑같은 상황에 닥치자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긴장했다. 그러나 오기와라는 피부 너머로 전해졌을 망설임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다음 순간에 압도적인 위화감이 덮쳐왔다.

목 안쪽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양손이 덮쳐오는 가슴을 밀어내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지독한 아픔에 숨은 끊어지고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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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웃….”

힘주고 버티는 채로 고정되었던 팔목을 그대로 잡혀, 얼굴 양쪽으로 짓눌렀다.

잔뜩 긴장한 미나토는 눈을 감고서 이번에야말로 팔을 묶이는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런데 그에게 내려온 것은 입술 위에 닿은 가벼운 키스였다.

꽉 깨문 이를 억지로 벌리려고도 하지 않고 맞닿은 부분을 핥더니 살짝 빨아 당겼다.

그것이 이상해 살그머니 눈을 뜨자, 무서우리만치 가까운 곳에서 오기와라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로 익숙하지 않네. …다른 남자는 없었어?”

대답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하자 맞닿은 피부로 상대가 웃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실 그가 아는 유일한 남자가 오기와라뿐이라고 한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질려 하든 이해하든, 어떤 식으로 반응해도 결국 미나토가 비참해지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보다, 하고 미나토는 작게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신경 쓰던 것을 입 밖에 냈다.

“…무릎은? 괜찮습니까?”

오기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끄러미 미나토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어쩐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 걱정이라니 꽤 여유 있네. 당신, 다른 사람 좋을 대로 휘둘리는 거 좋아해?”

“―읏.”

맹독을 품은 말을 듣고 호흡이 멎은 것과 동시에, 그때까지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것이 안쪽으로 꾹 밀려왔다.

압박감을 동반하는 고통 탓에 찌푸린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귓가를 핥았다. 그럼에도 숨을 쉬지 못하고 있으면 이번에는 방치되었던 다리 사이의 예민한 부분을 다시 쥐어왔다.

뒤에서는 밀어붙이고 앞에서 부추겨대자 미나토는 제각각 다른 괴로움에 번갈아가며 고통스러워했다.

천천히 형태를 따라 그리며 만지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 깊숙한 데서 술렁임이 일어, 순간 호흡을 멈추자마자 연달아서 드나들기에 피부 안쪽에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감각이 피어났다.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더욱 끈끈해지는 쾌락으로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본능처럼 도망치는 어깨를 오기와라는 짓누르며, 세게 껴안았다. 조금이라도 도망칠 기미를 보이면 바로 잡아당겨 더 깊이 사로잡았다.

―결국 반복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그 시절의 봄, 이제 끝내려고 마음먹고 그 땅을 떠났다.

포기하려고, 잊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있던 마음은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못한 채였으나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었다.

어째서,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있다.

지금 이 상황에조차 같은 생각을 했다. 왜, 어째서, 무슨 생각으로 오기와라는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

대답 따위 바로 조금 전에 이미 들었으면서.

그 대답에 품고 있던 마음을 짓밟혔는데―그러나 그럼에도 지금 이 상황을 기뻐하는 자신이 분명 존재했다.

드디어 만났다고.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마음 한편이 기뻐하고 있다….

젖혀 든 턱을 끌어당겨 호흡을 공유하는 키스를 그와 다시 나눴다. 깊은 곳까지 지배하는 듯한 그 열기에 빠져들면서 미나토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오기와라의 어깨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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