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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이 9월로 넘어가도 여전히 찌는 듯한 무더위가 이어졌다.
기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시동을 끈 차에서 내려 미나토는 운전석 쪽의 발치에 있던 연석에 앉았다. 낮 동안 최고기온은 한여름과 다름없다고는 하나, 그늘에서의 체감 온도는 꽤 서늘했다. 땀은 흘러도 그늘에 있는 한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거기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막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때우려고 가지고 다니던 졸업 논문 자료를 무릎에 펼쳐놓고 읽고 있는데 갑자기 가까이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 역시 미나토 선생님이네.”
반사적으로 몸이 굳은 미나토는 멈칫 한 뒤 안심했다.
자동차 그늘에서 몸을 내밀 듯이 이쪽을 쳐다 본 사람은 수습 때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여름 복장으로 바뀌자 전과는 약간 다르게 보여 미나토는 흐뭇하게 웃었다.
“부활동하고 지금 집에 가는 거야?”
“네. 어차피 부활동이라고 해봤자 떠들다 끝나지만요. 선생님은 오기와라 데리러 오셨어요? 그 녀석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던데 아직도 그런 거 필요해요? 그러고 보니 계단 오르내리는 건 좀 힘들어했나?”
응, 응, 추임새를 넣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태평한 얼굴을 보고 안심했다. 9월에 접어들어 오기와라의 외출을 돕고 나서 미나토를 향한 학생들의 감정은 명확하게 불신, 아니면 적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애들이 말 많던데 조심 좀 하세요. 오기와라가 다친 건 선생님 때문이라고 하는 녀석들도 있고, 다른 데서는 수상한 사람 취급하더라고요.”
“고마워. 그런데 괜찮아. 학교엔 오기와라의 외출을 돕는다고 말해놨고. 다친 건 아주 관계없지는 않으니까 할 수 없지, 뭐.”
“전철 자체가 흔들렸는데 무슨 수로 피해요. 오기와라 본인은 알고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아, 오기와라 아까 여자랑 같이 구교사 뒤쪽에 있던데. 불러올까요?”
생각난 듯이 말하기에 미나토는 “괜찮아.”라고 웃어 보였다.
“약속 시간은 아직 남았어. 오늘은 내가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거뿐이야. 그러니까 괜찮아.”
“그렇구나. 그럼 알겠어요.”
안심했다는 듯이 웃은 그는 미나토와 가볍게 잡담을 나누다 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미나토는 펜스 너머로 펼쳐진 운동장으로 시선이 향했다.
여름의 여운이 남은 듯 날씨가 맑았던 오늘은 이제 오후 다섯 시를 넘겨, 하늘에 어렴풋이 노을이 내려앉았다. 트랙을 달리는 육상부원과 야구부원들이 철수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곧 불이 켜질 모양이다.
겨우 석 달 전. 이 운동장으로 가로질러 도서관으로 향하던 도중, 미나토는 오기와라가 뛰는 장면을 보고 구름 같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오기와라는 이 광경을 어떤 마음으로 볼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꽉 죄인 것 마냥 답답해진다.
…9월이 되고 나서 미나토는 약속대로 매일 오기와라의 외출을 돕기 시작했다. 오고 가는 길 모두 자동차로 가는 편이 좋을까 했지만, 오기와라 본인이 그렇게는 재활훈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아침에는 걸어서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아침에는 전철의 같은 칸에 타기로 하고, 학교가 있는 역의 개찰구까지 함께 갔다.
집에 갈 때는 미나토의 아르바이트에 맞춰 자동차를 사용했고, 차는 단시간만 빌리기로 결정했다. 수업 후 엔 오기와라는 도서관 등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정각 전 미나토에게 항상 전화를 걸었다. 미나토가 늦으면 거기서 좀 더 기다리다 다시 연락을 하는 식이었다.
(그럼 미나토 선생님이 괜히 더 기다리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반론하며 미나토를 배려해준 오기와라를, 나는 자동차로 가니까, 라는 한마디로 딱 잘랐다. 오기와라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오기와라의 오른쪽 무릎은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본인 말로도 교내에서 딱히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객관적으로도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내심 안도했다.
작게 한숨을 쉬고 손에 들린 자료로 시선을 떨군 순간, 전자음이 울렸다. 그대로 자료 뭉치를 연석 위에 두고 미나토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마 오기와라일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를 확인하지 않은 채 별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호소카와? 코우모토인데 통화 괜찮아?’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 약속 9시였죠?”
‘응. 그런데 회사에서 약간 일이 생겨서 말이야. 9시에는 못 갈 것 같아.’
“그러세요? 그럼 다른 날에.”
‘늦을지도 모르지만 기다려줄래? 30분은 안 넘을 거야.’
미나토가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것을 눈치챘는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네, 하고 대답한 미나토에게 곧 다정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처음으로 호소카와가 만나자고 해줬는데 취소할 순 없지. 혼도리의 리라라는 다이닝바니까 잘 찾아와야 해. 예약은 9시 반으로 변경한다고 가게에 말해 둘게.’
“혼도리의 리라에서 9시 반, 말이죠? 알겠습니다. 코우모토 씨도 일 열심히 하세요.”
혹시나 해서 마침 갖고 있던 펜으로 왼손의 손등에 짧게 시간과 ‘리라’의 이름을 메모했다. 날짜와 시간, 장소는 코우모토에게 맞췄지만 먼저 약속을 잡은 사람은 미나토였다.
절대로 늦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다잡고 미나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나토 선생님? 왜 이런 데 앉아 계세요?”
“…어라? 전화했어?”
“차가 보여서 와 봤어요.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하복을 입은 오기와라가 상체를 쑥 내밀고 이쪽을 들여다봤다.
“시간이 비어서 내가 일찍 온 거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마침 읽으려던 자료도 있고. …이제 갈까?”
“네. 잘 부탁합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오기와라는 딱 달라붙는 반팔 셔츠가 잘 어울렸다. 몇 번이고 보아온 그 모습에 넋을 잃으려 할 때 그의 뒤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기와라, 내일 봐.”
“어.”
가볍게 돌아본 오기와라에게 손을 흔드는 운동복 차림의 여학생은 본 적이 있었다. 병원에 몇 번 병문안을 왔던 육상부 학생이었다. 발걸음을 돌린 그녀와 한순간 눈이 마주하면, 오기와라에게는 사랑스러웠던 표정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것을 대번에 알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마음 한구석은 재차 기가 꺾일 수밖에 없다.
그녀가 사라지고 오기와라와 각자 차에 올라탔다.
천천히 시동을 걸어 안전 운전을 하며 그는 언제나 다니는 길로 오기와라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땠어? 별일 없었어?”
“딱히 없었어요. 계단도 제법 익숙해졌고요. 대신 전보다 체력이 떨어졌어요. …미나토 선생님, 이 뒤에 학원 아르바이트 몇 시에 끝나요?”
“여덟 시 반쯤? 끝에 쪽지시험 있어서 제시간에 끝날 거야.”
약속이 아홉 시 반이면 어중간하게 시간이 남겠다 싶을 때, 문득 오기와라가 말했다.
“그럼 오늘 밤, 같이 저녁밥 먹을래요? 오늘 저희 집에 아무도 없거든요. 부모님은 친척 문상가고, 형은 회사에서 뒤늦게 환영회 한대요.”
흔치 않은 부탁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바로 약속을 떠올리고는 낙담했다.
“…안타깝지만 오늘 밤은 선약이 있어.”
“그거 미루면 안 돼요? 솔직히 말하면 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께 상담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조수석에서 들린 목소리가 오기와라로서는 보기 드물게 낙심한 듯했다. 어긋나버린 타이밍이 원망스럽고, 어쩐지 나쁜 짓을 하는 기분마저 들게 하였다.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생각을 하면 선약 따위 당장 거절해버리고 싶지만 오늘만은 정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진짜 아쉽지만 내가 잡은 약속이라 그럴 순 없어. 다른 날은 안 될까? 언제든지 시간 비울 테니까.”
“그럼 됐어요.”
짧게 말하고 입을 꾹 다문 오기와라는 자동차 앞유리로 시선을 내려놓았다. 그 옆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고집스럽게 보여서 미나토는 뒷말을 잃었다.
“…오늘은 집 앞까지 데려다줘도 괜찮아?”
“맘대로 하세요. 상관없어요.”
돌아온 대답은 사무적이고 감정이 전혀 없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반응에 차 안은 답답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멀찍이 오기와라의 집이 보였다. 입원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대문 옆에 차를 세우고, 오기와라는 안전벨트를 푸르고 이쪽을 쳐다봤다.
잡아먹을 듯이 날카롭게 쳐다보는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응. 조심해서 들어가. 그럼 다음 주에….”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더 할 말이 없나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난데없이 오기와라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차 안에서 내린 오기와라는 눈앞에서 문을 곧장 대문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한 번도 돌아보는 일 없이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고, 검은 문이 닫히고 나서도 미나토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약속 장소인 다이닝 바 ‘리라’에 코우모토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몇 분 뒤면 아홉 시 반이 될 무렵이었다.
가게 앞의 전봇대에 기대 자료를 읽던 미나토가 고개를 들자, 뜻밖이라는 얼굴로 그는 뛰어오고 있었다.
“계속 여기 있었어? 예약했으니까 안에서 기다리면 좋았을 텐데.”
“아뇨, 저도 막 왔어요. 아까까지 저쪽 커피숍에서 자료를 읽었거든요.”
“그렇군. …그런 거 같네.”
대답을 듣고 키득키득 웃던 코우모토는 미나토의 등을 밀었다.
가게에 한 걸음 들어가자마자 다가온 점원에게 이름을 말하고, 안내받은 자리에 일단 미나토를 앉혔다.
건네받은 메뉴판도 먼저 미나토에게 펼쳐 보여주고, 요리나 추천 품목까지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이 가게에는 몇 번인가, 온 적 있다는 이야기도 그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교우관계의 차이가 이런 데서 나타나는 것인가, 하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밤에 가는 가게라면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패스트푸드점, 아니면 체인 술집이 단골인 미나토는 이렇게 세련된 가게와는 인연이 없었다.
둘러본 가게 안의 자리는 테이블마다 관엽식물로 장식되어 있고, 손님 대부분은 커플이나 사회인 그룹이 차지하고 있어서 솔직히 말해 분위기만으로 주눅이 들었다.
미나토의 반응으로 그것을 눈치챈 코우모토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화제를 바꾸어가면서 미나토를 웃게 해주고 긴장을 풀어주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며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단둘이서 만나는 건 이번 달만 해도 벌써 세 번째지만, 미나토에게 호의를 보이면서도 억지로 밀어붙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미나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이는 헤어질 때 본 오기와라의 옆모습이었다.
평소와 달리 날카롭고도 표정이 없던 그 시선은 그가 호흡할 때마다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오기와라가 종종 억지를 부리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그 전부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가능한 한 응해 주려 했지만 결국에는 대체안으로 넘어가 주는 일도 많았다.
평소 오기와라 같으면 대체안을 내면 토라진 얼굴을 보이며 넘어가 줄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 미나토를 쳐다보지도 않고 등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약 3개월 전 그 사고조차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고, 오히려 미나토를 위로해주었다. 그런 오기와라에게 용서받을 수 없을 만한 일을 저지른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호소카와? 무슨 일 있어? 무슨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미나토는 완전히 다른 데 정신 팔고 있던 자신을 깨달았다. 배려하는 듯한 코우모토의 표정을 보고 죄책감이 들었다.
“코우모토 씨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미나토는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사람을 쳐다봤다.
결국은 오기와라다. 미나토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도, 언제나 마음을 차지하는 것도, 곁에서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스스로 질릴 정도로 그 연하의 남자에게서 마음이 멀어지지 않았다.
포기하자고 마음을 정했는데도 마음이 쫓아가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불러 주시고 오늘도 이렇게 어울려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전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둘이서 만나는 건 이제.”
“그건 호소카와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띄엄띄엄 말을 잇던 미나토에게 한 대답을 듣고, 어째서 그것을 아는지 의아하여 순간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코우모토가 웃었다.
“이야기는 들었어. 포기하려고 하는데 좀처럼 잘 안 된다는 것까지 말이야. 모두 알고도 끝까지 버틸 마음으로 가득한데, 그래도 안 될까?”
“…안 되는 건 저예요. 좋아하는 상대가 있는데 다른 사람과 어떻게 해보려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무례한 짓이고, 애초에 코우모토 씨와 저하고는 어울리지 않아요. 아시다시피 수수하고 눈치도 없고 말주변도 없으니까 저와 있어도 지루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호소카와가 난 좋은데 말이야.”
코우모토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주저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특색 없이 지루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듣는 일도, 스스로 말하는 데도 익숙하지만 정면으로 긍정하는 데다 그 점이 좋다고 하는 말은 처음 들었다.
씨익 미소를 짓기에 미나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만났다고 해봤자 오늘까지 합쳐서 다섯 번뿐이잖아요? 그중에 두 번은 나가시마랑 요시하루도 있었고.”
“이 세상에 한눈에 반하는 일이 있는 한 만난 횟수는 문제가 안 돼. 게다가 나가시마와 요시하루와 함께 있는 걸 보고 더욱 좋다고 생각한 건 분명해. 요령 없고 외골수에 거짓말을 못 하는 점이랄까.”
“네에….”
“조금 더 친구로 지내주면 안 될까? 싫다는데 억지로 어떻게 해 보려는 마음도 없고, 그냥 친구로 끝나도 괜찮아. 어쩌면 내가 먼저 다른 누군가를 찾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뜻밖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쭉 이쪽을 쳐다본 것 같은 코우모토와 시선이 부딪쳤다.
피하지 못한 채 마주하는 동안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니면 호소카와가 먼저, 그 사람 이상으로 좋아할 다른 누군가를 찾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것도 포함해서 모두 당연한 일이고, 둘 다 똑같으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 없지 않아?”
“….”
“호소카와는 기본적으로 성실한 사람이니까 여러 가지로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거 아닐까?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어쩌면 그런 관계가 될지도 모를 친구 정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렇게 말하면 나가시마에게 혼나겠지만, 나로서도 서둘러서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아.”
그도 그럴 터라고 쉽게 이해했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이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상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한 듯 못한 듯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식사를 마치고, 코우모토를 따라 가게를 나왔다.
시간은 이미 열한 시를 넘었고 그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인영은 뜸해졌다.
“늦었네. 역까지 데려다줄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혼자 가도 괜찮아요. 그보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제게는.”
“안 될까. …정말?”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끝을 올리는 상대에게 미나토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미나토에게 시선을 향한 채, 코우모토는 부드럽게 웃었다.
“호소카와는 지금까지 아무하고도 사귄 적 없지. 그렇다면 자기감정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무슨 뜻인가요?”
“자기감정이라고 해서 꼭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이야. 잠깐 이쪽으로 와봐.”
등을 떠밀려 따라간 것은 코우모토의 말에 반론할 표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기?”
길에서 뻗어 나온 골목으로 한걸음 들어서자 바로 주위의 명도가 떨어졌다. 가로등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수가 적었고 빛도 약했다.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등에 전해진 가벼운 충격으로 담장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안 직후, 눈앞에 그림자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차, 한 순간에는 이미 숨이 닿을 거리에 단정한 얼굴이 다가왔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가 소리를 내고는 멀어져갔다. 놀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코우모토가 다정하게 웃는 것을 보고 이렇게 가까운데도 잘생겼구나, 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싫었어? 그럼―.”
귓가에 내려앉은 속삭임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갑자기 옆에서 인정사정없이 어깨를 끌어당겼다. 난데없는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는 찰나, 이번엔 미나토의 허리 채 강한 팔이 그를 안는다.
“이런 길거리에서 무슨 짓입니까?”
바로 곁에서 울린 목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반사적으로 올려다보니 자신을 내려다보던 야성적인 얼굴―오기와라와 눈이 마주쳐 사고가 정지되었다. 셔츠에 치노팬츠 차림의 그는, 원래부터 어른스러운 탓인지 대학생을 넘어서 사회인으로 보였다.
“졸업 논문 준비 말고도 여러 일로 바쁘잖아요? 늦게까지 어슬렁거리면 어떡해요? ―집에 가죠.”
빠르게 말하더니 오기와라는 미나토의 어깨를 밀며 걷기 시작했다. 그것을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쫓아왔다.
“기다려. 호소카와는 내 일행이야.”
“…느닷없이 사람을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없어요.”
“변명거리도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런 말을 할 사람은 호소카와지 자네가 아니잖아. 누군지 모르겠지만 제삼자는 빠져주겠나.”
코우모토의 음성은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웠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하게 굴던 오기와라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저, 저기!”
몸을 비틀어 뒤돌아본 미나토는 모호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던 코우모토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오늘은 여기서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전에 그 사람은 누구지? 나로서는 이대로 널 보낼 마음은 안 드는데.”
“제자라고 해야 하나, 과외하는 학생이에요. 그러니까.”
오기와라 같은 우등생에게는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한껏 고개를 숙인 순간, 팔을 확 잡아당겼다.
어둠 속에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코우모토에게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면서 미나토는 그대로 오기와라에게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대로 큰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나서도 오기와라는 말이 없었다. 표정없는 옆얼굴은 오로지 앞만 바라봤고, 미나토는 건넬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팔꿈치를 잡힌 채였다는 사실을―지금 이곳에 오기와라가 있다는 것을 몰래 기쁘다고 생각했다.
택시비를 낸 오기와라는 옆에서 지갑을 열다 멈춘 미나토를 흘긋 쳐다보지도 않은 채 운전사에게 거스름돈을 받아들더니, 바로 미나토의 팔꿈치를 다시 잡았다. 아무 말도 없이 팔을 잡아당기기에 미나토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오기와라. 오늘은 너무 늦었고 가족분들께도 죄송하니까 난 이대로―.”
“오른쪽 무릎이 아파서 계단 오르기가 불안해요. 도와주세요. 부모님은 오늘 밤 집에 안 오시고, 형도 술 마실 때는 거의 자정이 넘어서야 들어오니까요.”
“아파? 그럼 이대로 병원에 가는 게.”
“필요 없어요. 소란 피울 정도로 심한 건 아니에요.”
무뚝뚝하게 말하며 자동차 밖으로 나온 오기와라는 다시금 강하게 팔을 끌어당겼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서 미나토는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슬슬 날짜가 바뀔 시간인 만큼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에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집들은 불이 꺼졌고 마을은 어둠에 잠겼다. 오기와라의 집도 캄캄했고, 방금 지나온 대문의 등도 불이 꺼졌다.
문득, 어째서 오기와라가 그곳에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기와라의 형은 회사 환영회를 한다고 했는데, 아직 학생인 동생을 밤중의 번화가로 부를 리는 없다.
오기와라 자신도 그런 곳에 가기 싫어할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 우연히 마주치는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이 아닐까.
팔이 당겨져 평소보다 빠르게 걸어가면서 미나토는 현관 앞에서 멈춰선 등으로 시선을 향했다. 자물쇠를 풀고, 열린 현관문 안으로 떠밀리듯이 한 걸음 들여놓으며, 오기와라의 오른쪽 무릎 상태가 무척 신경 쓰였다.
“…손 좀 빌려주시겠어요?”
현관의 환한 불빛 아래서 말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간 후, 오기와라는 계단을 두 계단 올라 단 차를 두었고, 미나토는 그것을 받쳐주었다.
이대로 2층으로 가죠, 라는 말을 듣고 난간 반대편에 서서 손을 내미니 잡아오는 손에 상당한 체중이 실렸다. 그 무게에 뼛속까지 사무칠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
수술 전 외출을 돕기 시작한 이후 몇 번 정도 오기와라에게 손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지금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무게가 실린다는 의미는 그만큼 상대가 아프다는 것이 된다.
“역시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 이런 상태로 무리하면 나중에.”
“됐으니까 올라오세요.”
말 붙일 구석도 없이 쌀쌀맞게 대답하는 소리에,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뒤로 쓰러질 때를 대비해서 미나토는 오기와라에게 손을 건넨 채 그의 뒤쪽으로 위치를 바꾸어 섰다. 2층 구석에 있는 방에 도착할 무렵에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병원에서 받은 진통제는? 뭐 필요한 거나 내가 할 거 있으면 말해줘.”
침대에 앉은 오기와라는 필사적으로 말을 잇는 미나토를 잠자코 쳐다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사람, 누구예요?”
“응?”
“길거리에서 꽤 대담한 짓을 하시더군요. 남자끼리 연애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까?”
오기와라의 목소리가 처음에는 그저 연결되어 나오는 소리로만 들렸다.
입을 떡 벌린 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다 서서히 의미가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줄곧 잊고 있었지만, 그 타이밍이라면 오기와라는 미나토가 코우모토에게 키스당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오기와라에게. 그런, 모습을.
“―읏.”
사고뿐 아니라 온몸이 얼어붙은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오기와라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선 채로 미나토는 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크게 울렸다.
눈앞에 있던 오기와라의 얼굴이 인형 같은 딱딱한 표정에서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며 웃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 조용한 변화에 등골이 서늘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던 미나토의 팔꿈치를 그대로 붙잡은 오기와라가 더 이상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 선생님과 그 사람은 남자끼리 그렇고 그런 관계란 말이죠? 언제부터예요?”
“아니…야.”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팔꿈치가 끌어당겨져 미나토는 도망칠 곳마저 잃었다. 팔꿈치로 무섭게 파고드는 손가락의 힘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힘이 강하구나, 하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냐! 코우모토 씨는 그저 아는 사람이고.”
“그냥 아는 사람하고 길거리에서 그런 키스를 하세요? 그리고 미나토 선생님, 전혀 안 피했죠? 얌전히 허리까지 안겨서 매달렸잖아요.”
그게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솔직히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벌써 안겼습니까?”
“무슨 말을….”
“좋아하면 당연하잖아요? 그렇다고 설마 선생님이 그 사람을 안을 리는 없고.”
담담하게 말을 잇는 오기와라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단정한 용모를 부각하려는 듯 아름답고 다정한 미소인데도 눈만은 섬뜩하게 빛났다.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건.”
멋대로 목구멍까지 차올라 새어 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켰다.
오기와라에게만큼은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말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것을 떠올렸다.
“어떻게 틀린대요? 좋아하는 건 누굽니까?”
자신은 도저히 이기지 못할 힘으로 끌어당기나 싶더니 이번엔 양손으로 두 뺨을 쥐었다. 뺨에 날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예리하게 노려봤다. 미나토는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렇게 도망치는 건 비겁해요. 눈 뜨세요.”
“싫…엇.”
옆으로 얼굴을 돌리려 하자 턱을 들어 올리듯이 고쳐 잡나 싶더니 갑자기 호흡할 수 없게 되었다. 황급히 감았던 눈을 뜨면 시선 속에는 방금보다 훨씬 가까이…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이에서 그가 응시하고 있었다. 미끈한 온기가 입술 사이를 쓰다듬었다.
“―응, 읏?!”
영문을 몰라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순간, 그때를 노린 듯이 축축한 무언가가 치아 사이를 파고들어 안쪽을 점령해갔다. 스르륵 움직이는 것이 혀를 감아와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귓속에서 울리는 물소리가, 입속에서 요동치는 미끈한 것과 연동했다. 그 의미도 모른 채 호흡이 가빠 와 고개를 돌리려 하자, 가까이에 있던 오기와라가 입맛을 다시듯이 자신의 입술을 핥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하는 순간과 턱을 다시 잡힌 것은 거의 동시였다.
눈 깜짝할 새 다가와 미나토의 호흡을 막은 것은 오기와라의 입술로, 치아 사이를 파고들어 혀를 휘감은 것은 오기와라의 혀였다. 그 순간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왜, 라는 의문뿐이었다.
어느새 미나토는 허리 채로 오기와라에게 안기어 입술을 깊숙이 빨아들이는 키스에 희롱당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오기와라의 팔과 어깨에 버티고 있던 손에서 힘이 녹는 것처럼 빠져나갔다. 그것을 기회로 삼았는지 턱을 쥔 손바닥이 목 뒤를 감고, 그렇지 않아도 깊이 마주했던 입술을 아플 만큼 세게 빨았다.
“나 알아요. 미나토 선생님, 실은 날 좋아하죠?”
키스를 남기고 멀어지며 신음하듯 숨을 뱉는 입술이 그렇게 귓가에서 낮게 속삭였다.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숨을 멈추고 눈만 깜빡이는 미나토에게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오기와라는 은밀한 투로 계속 소곤거렸다.
“학교에 나올 때부터 날 그런 눈으로 봤죠? 그렇게 노골적이었으면서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어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저를 쓰다듬듯이 부드럽고, 어렴풋이 웃는 얼굴은 분명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미나토의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
“날 좋아하면서 다른 남자와 키스하다니 상당히 지조 없는 분이시네요. 남자끼리는 원래 그렇게 쉽게 해요? 아니면 그냥 미나토 선생님이 헤픈 거뿐?”
“…―.”
“뭐, 주위에 여자가 이렇게 많은 세상에 굳이 남자랑 연애하는 거 자체가 제대로 된 사람일 리 없죠. 어느 쪽이든 전 이해하기 어렵네요.”
쏟아지는 말 이상으로 그 미소가 가슴 아팠다.
절대로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숨겼던 마음을 손쉽게 들춰내고는 결국 산산조각 내버렸다.
소리를 잃고 덜덜 떠는 미나토에게 오기와라는 얼굴을 가까이 댔다. 도망치려 해도 붙잡힌 뒷목은 꿈쩍도 하지 않아 다시 깊은 호흡에 묶여버렸다.
치열 깊은 곳에서 움직이던 혀끝이 미나토의 혀를 얽고 빨아들였다. 움찔움찔 떨리는 어깨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입속을 한 바퀴 휘돌다 아쉽게 떨어졌다.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이라는 뜻인가요?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헤프다는 건 의외였지만 생각해보면 그게 더 좋네요.”
“…읏.”
비웃음 섞인 음성에 얼굴을 들려는 순간, 갑자기 허리가 들어 올려졌다.
온몸을 휘감은 충격 뒤에 여운처럼 등이 흔들렸다.
그 감각과 눈에 들어온 천장 불빛으로 침대 위로 넘어트려진 사실을 알았다. 순간, 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덮쳐온 그림자에 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에 아는 사람한테 들었는데 남자끼리도 꽤 좋다면서요?”
“무…슨?”
쥐어짜 낸 목소리까지 옴짝달싹 못 하게 하듯이 상대는 양쪽 손목을 붙잡아 한데 모았다.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시선과 미소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동안 셔츠의 옷깃이 끌어당겨 져 앞 단추가 튕겨 나갔다.
“어떨지 흥미는 있었지만 남자가 상대라니 역겨워서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이것도 좀처럼 없는 기회고. 호기심 왕성한 나이니까, 상대해주실 거죠?”
“호기심…이라니?”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할 수 있으니, 좋아하는 저한테 안기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 이것도 과외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시고.”
“오기와라―.”
잇따라 귓가에 쏟아져 들어오는 문장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가슴께로 커다란 손바닥이 내려왔다.
셔츠 너머로가 아닌 피부 표면에 직접 대고 만지나 싶더니 멈춘 손끝이 한 점을 짓누르듯이 천천히 원을 그려갔다.
그러다 손톱 끝으로 꼬집듯이 튕겨, 아픔만이 아닌 기묘한 감각이 서서히 생겨났다.
흠칫하고 피부가 떨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곁에서 내려다보는 얼굴이 바로 흥미롭다는 듯 일그러졌다.
가까이 다가오는 기색에 고개를 돌리자 뺨에서 관자놀이 근처를 미지근하고 축축한 체온이 닿아왔다.
“이렇게 납작한 걸 만져서 뭐가 좋은 걸까요? 여자애들처럼 부드러운 게 훨씬 좋은데. 게다가 여기는 또 완전 다르잖아요.”
비웃는 목소리는 절반밖에 들리지 않았다. 치노팬츠 앞섶을 느닷없이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싫… 무슨, 짓.”
오기와라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자마자 끝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필사적으로 몸을 뒤트는 것을 곁눈질로 흘긋 쳐다보고는 익숙한 듯 손으로 다리를 매만지며 귓불에 이를 갖다 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 봬도 그럭저럭 경험은 있으니까. 남자랑 하는 건 처음이지만요.”
전해지는 자극에 서서히 열이 올랐다. 신체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만져대니 초조한 마음과는 반대로 그곳이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읏.”
침대 시트에 눌린 양손은 꼼짝도 할 수 없고, 몸을 뒤틀어 보아도 타인의 체중이 실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다리를 버둥거리자 위에서 목을 졸랐다.
“날뛰지 마세요. 또 제 무릎을 못 쓰게 만드실 작정입니까?”
“―…!”
거친 웃음소리와 함께 목 위로 꾹 무게가 실렸다. 가차 없이 귓불이 깨물려 날카로운 아픔으로 목구멍에서 소리가 났다.
그것을 들으며 미나토는 마침내 깨달았다.
오기와라는 화를 내는 것이다.
비웃음으로 미나토를 비난하며 속에 있는 분노를 표출했다.
움츠린 채로 움직이지 못하는 허리 주변을, 입은 옷 채로 잡아당기자 작은 소리를 내며 벨트가 뽑혔다.
더듬거리는 손이 치노팬츠 앞을 풀어헤치고 속옷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알았지만 더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또 제 무릎을 못 쓰게 만드실 작정입니까?
그 한마디로 미나토는 저항할 수단을 잃었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 엎드린 채 옆얼굴을 시트에 짓눌려진 상태로 미나토는 손끝에 닿은 천을 긁었다.
작디작은 그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건전지가 떨어진 듯,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뻗어 있는 미나토의 두 손마저 오기와라에게는 성가셨던 모양이다.
방금 빼낸 벨트로 양쪽 손목을 한데 모아 묶고는 머리 위로 올렸다.
너무 세게 묶었는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자세 때문인지 손은 이미 아픔이 아니라 마비를 호소했다.
어디라고도 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몸을 뒤틀 때마다 시트에 쓸려 아팠지만 지금은 그 감각조차 남의 일처럼 멀었다.
“…읏, 아.”
양쪽 무릎을 세운 형태로 높이 쳐든 허리 깊은 곳을, 제법 기다란 손가락으로 후벼 팠다.
처음에는 고통과 위화감, 끔찍스러운 압박감밖에 들지 않던 그 행위는 다리 사이의 예민한 부분을 괴롭히는 바람에 약간 풀어지면서 조금씩 고통 이외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익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인 행위에 움츠린 등과 허리를 묘하게 부드럽게 쓰다듬고, 몇 번이고 키스를 당하다 이제는 괴롭히는 것인지 달래는 것인지도 애매해졌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 시간 감각마저 모두 잃었다.
밝은 실내의 벽에는 책장과 짜서 넣은 벽장이 보였지만, 시선에 닿는 장소에 시계는 없었고 그것을 찾을 기력도 없었다.
―실상 찾아본들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으읏, ―아.”
뒤에서 들려오는 빠른 숨소리가 문득 한숨으로 바뀌었다.
쑥 소리를 내며 허리 안쪽에 있던 것이 빠져나가고, 그대로 시트 위에 쓰러질 것처럼 되었다. 힘없이 기울어진 몸이 바로 상대의 손아귀에 잡혀, 이번엔 아무렇게나 끌어당겨 진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할 기력은 없고, 그럴 여유도 주지 않았다. 익숙한 손길로 지금까지 파고들던 부분을 문지른 직후, 곧장 강한 압박감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약간 옅어진 압박감에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도로 강한 힘으로 끌어당긴다 했더니, 곧 자신을 짓누르는 감각이 방금보다 더 강해졌다.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인정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무, 슨.”
자신의 목소리는 날숨 같았다. 이렇게 해서는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전해지지도 않는다고 생각한 것과 동시에 다리 사이를 더듬어 예민한 부분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되고서야 비로소 그 부분이 모양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무의식적으로 허리가 요동쳤다.
“―진짜, 익숙하지 않네요. 나이가 몇이에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풍선이 터지듯이 의식이 선명해졌다.
시야로 들어온 책장도, 거기 꽂힌 책들도 눈에 익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몇 번이고 드나들었던 과외 학생의 방이고―.
“요즘 젊은 남자가 이럴 수도 있나요? 말하자면 키스는 하는데 그 뒤는 안 했다?”
“오기와라…?”
자기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착각할 리 없고, 착각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
조금 전, 똑같이 이 목소리로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나 알아요. 미나토 선생님, 실은 날 좋아하죠?)
(날뛰지 마세요. 또 제 무릎을 못 쓰게 만드실 작정입니까?)
“싫어… 읏, 이런.”
“뭐가 싫어요? 선생님 꽤 즐기고 있잖아요?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조금은 저한테 협력해주세요.”
웃는 목소리와 함께 그가 허리 깊은 곳으로 꾹 밀어붙였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목소리는 무시되었고, 대수롭지 않은 듯 허리를 뒤흔들었다.
도망칠 곳이 없음을 깨닫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수밖에 없다.
몇 번이고 고개를 저어대자, 그때마다 시트 위에서 머리카락이 쓸려 소리를 냈다. 그 위로 서로의 피부가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이고 거듭되고 있다.
갑작스럽게 등을 뒤덮은 체온에 깜짝 놀라 온몸을 움츠리면, 어깨 위에 키스하며 가슴께의 뾰족한 부분을 괴롭혀댔다. 그 부분에서 배어 나오는 욱신거림에 울고 싶어졌다.
오기와라가, 좋다.
보는 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했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면 기쁘고, 잘 따른다고 느껴지면 우쭐거린다고 스스로 경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들떴다.
비록 연애감정이 아니더라도 좀처럼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않는 그가 자신에게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건 자신에게 각인시키듯 되뇌었을 뿐이고, 분명 마음 한편에서는 묘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쪽을 바라봐 주지 않을까, 하고.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까, 이 마음을 받아주면 좋을 텐데, 하면서.
“…―.”
매섭게 파고드는 리듬에 따라 온몸이 흔들리면 미나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거칠어진 호흡이 가득 차고, 답답함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우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 지금, 겨우 그 사실을 깨달았다.
수습 때부터 알았다고 오기와라는 말했다.
정상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다, 역겹다.
하지만 흥미는 있다, 호기심 때문이다, 라고.
오기와라는 미나토에게 호감을 느낀 것도, 잘 따르던 것도 아니었다. 미나토의 마음을 눈치채고 신기함과 흥미를 느끼고 접근했을 뿐이었다.
사고 이후 미나토에게 과외를 제안한 이유의 절반, 아니면 그 이상의 동기도 재밌으니 놀려 보았을 뿐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수수하고 눈에 띄지 않아서, 흥미로울 법한 강사라는 입장임에도 항상 관엽식물 취급을 받았다.
그런 미나토를 오기와라 같은 학생이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할 리 없고, 더군다나 신뢰할 리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깜빡 착각했을 뿐이었다.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는 오기와라가 말을 걸고, 특별 취급해주기에 우쭐거렸다. 멋대로 연애감정을 품고, 그 마음을 들켰다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된다며 우쭐거리다 결국은 이런 사태를 부르고 말았다.
“…읏, 아.”
거칠게 뒤흔들려 균형을 잃고 기우뚱하고 쓰러졌다.
질질 끌듯이 허리를 원래 형태로 되돌리고는 깊숙이 밀어붙이기에 숨이 막혔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미나토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풀릴 길 없는 열에 휩싸여 적어도 볼썽사나운 짓은 하지 말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