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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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후 3주가 지나고 오기와라는 무사히 퇴원했다.

오른쪽 무릎에 장비는 그대로 단 채였지만 지팡이 없이도 주차장까지 걸을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됐다.

하지만 한동안은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무릎의 유연성을 되찾기 위해, 방학 중에는 집중적으로 재활훈련을 한다고 했다. 미나토와의 과외는 그 틈틈이 오기와라의 집에서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게다가, 팔월 하순에는 교원 채용 2차 시험이 있다. 1차 시험에 무사히 합격한 미나토는 2차 시험 일정의 일주일 전부터 오기와라에게 숙제를 내는 형태로 과외를 쉬고, 모든 일이 끝난 22일, 약 일주일 만에 다시 오기와라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오기와라가 사는 곳은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세련된 대문이 잘 어울리는 멋진 양옥 풍의 건물이었는데, 앞에 설 때마다 저도 모르게 올려다볼 정도였다.

인터폰을 누르면서 미나토는 이마에 배어난 땀을 닦았다.

강한 햇볕과 높은 기온에, 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셔츠의 등 부분에는 땀이 잔뜩 났다.

“…어라?”

평소 오기와라는 시간 관념이 철저해서 미나토가 찾아올 때마다 바로 응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몇 초 기다려도 인터폰에서 응답이 없었다.

전화해볼까 하는 순간, 대문 맞은편에서 현관이 열렸다.

무테안경이 잘 어울리는 차분한 분위기의 남성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호소카와 선생님이시죠? 더운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오기와라의 형인 마사유키였다.

뜻밖의 사람과 만나 미나토는 어안이 벙벙했다. 미나토보다 나이가 많은 이 사람은 일 때문에 먼 곳에 산다고 들었다.

오기와라가 입원한 동안 병원에서 얼굴을 마주했을 때, 지금은 여름휴가로 집에 왔다고 말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여름휴가치고는 너무 길지 않나? 넌지시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에 낼 만큼 그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미나토는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저야말로. 어머니께 들었지만, 코우시는 여전히 제멋대로 구나 보네요. 남동생이 곤란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기와라는 성실해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어요.”

“잔머리는 기차게 잘 굴리죠. 자기 생각대로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는 게 본모습이라, 그렇다 쳐도 그리 큰 소리로 떠들만한 건 못 되는 일이지만요. 들어가시죠.”

온화하게 웃는 마사유키에게 이끌려 미나토는 현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노력을 아끼지 않는 점은, 오기와라―코우시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곁에서 보며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이시군요. 코우시를 그런 식으로 말해 주는 분은 처음입니다. 오기와라 선생님을 따르는 이유가 있었네요.”

싱긋 웃는 얼굴과 함께 돌아온 응대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리 곤란해 하는 미나토를 잠시 부드럽게 내려 보던 미사유키는 안경 너머의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니께 이미 들으셨을 듯합니다만, 동생이 감당하기 벅차면 주저 없이 말씀해주세요. 무엇보다 어른 탈을 쓰는 게 특기랄지, 해마다 뒤집어쓰는 탈이 교묘해져서 다루기가 쉽지 않아요. 일 년에 몇 번은 진심으로 옷방 구석에 집어넣고 싶다니까요.”

“―형, 미나토 선생님께 쓸데없는 소리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일순 귀에 닿아온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위로 시선을 주자, 슬쩍 보기에도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의 오기와라가 현관 홀 옆의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미나토와 눈이 마주치면 멋쩍은 표정이 되었지만, 약간 비켜 나 형인 마사유키에게 시선을 향했을 때는 몹시 짜증 난 얼굴로 바뀌었다.

“미나토 선생님은 나한테 볼일이 있어서 오신 거니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아 줄래?”

“귀여운 동생의 과외선생님이잖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도는 해도 괜찮을 텐데?”

“지금 하는 얘기 어디가 세상 돌아가는 얘기야?”

“전형적인 세상 얘기는 공통 화제라고. 그러면 귀여운 남동생 얘길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 귀엽다는 말, 형 입에서 들으니까 토할 거 같아.”

형제싸움 같은 대화를 하면서 계단을 내려온 오기와라의 발걸음은 야무지고 위태롭지 않았다.

자기 방을 2층에서 옮기지 않은 것은 재활을 겸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보고 있어도 불안한 느낌은 없었다.

“코우시가 이렇게까지 귀엽게 굴면 미나토 선생님께 옛날 얘기를 폭로하고 싶어지네. 분명히 대화 꽃이 화기애애하게 필 거 거 같은데.”

“미나토 선생님은 형이랑 놀 만큼 한가하지 않거든. 그리고 선생님 이름 부르지 말라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

오기와라의 목소리는 점점 불쾌함으로 날카로워지는데, 마사유키는 태연자약하게 생글생글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형제의 대화를 가까이에서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이 오고 갈 때마다 데굴데굴 바뀌는 오기와라의 표정에 미나토는 무심코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근데 형, 오늘 나가는 거 아니었어?”

입씨름에 지쳤는지 귀찮아졌는지 지긋지긋하다는 듯 오기와라가 말했다. 그에 마사유키는 넋 놓을 만큼 환한 미소로 답했다.

“마음이 변했어. 외출은 내일로 미룰래.”

“아, 그래? 맞다, 형 미안한데 내 방에 있는 가방 좀 가져다줄래? 방문 열면 오른쪽에 있어.”

“직접 안 가면 재활 훈련이 아니잖아?”

“아까부터 무릎 상태가 이상해. 방금 내려왔는데 도로 올라가기는 좀 힘들어.”

말하면서 오기와라는 치노팬츠의 무릎 부분을 문질렀다. 안에 장비가 채워진 탓인지 왼쪽 무릎은 약간 형태가 달랐다.

그것을 언뜻 본 마사유키는 “그래.”라고 짧게 대답하고 곧바로 계단을 올랐다.

“선생님, 오늘도 전철로 오셨죠?”

“응. 그리고 이거 전에 말한 참고선데. 생각보다 훨씬 해설이 쉽게 풀이돼서.”

말하면서 신발을 벗으려는데 다가온 오기와라가 제지했다.

얼핏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서 얼굴을 향했더니 가방을 손에 든 마사유키와 눈이 마주쳤다.

“호소카와 선생님, 얼른 들어오세요. 코우시, 오늘 과외는 주방에서 해. 차가운 거 준비하고 있을 테니 넌 먼저 선생님을 안내해서….”

“됐어. 잠깐 나가는데, 저녁 시간까진 들어올게.”

가방을 받아든 오기와라가 재빨리 신발에 발을 집어넣었다. 아무렇게나 신발 뒤축을 밟고 신은 채 서둘러 미나토의 팔꿈치를 잡고 현관 밖으로 끌어냈다. 그 뒤에서 마사유키의 목소리가 쫓아왔다.

“나간다니 공부는 어쩌고? 애초에 너 무릎 상태 안 좋다며.”

“벌써 나았어. 집에서 하면 형이 방해할 거 같으니까 공부는 딴 데서 할래.”

“…코우시, 너 인마.”

문을 닫아 마사유키의 말을 자르고, 오기와라는 성큼성큼 대문으로 향했다. 팔꿈치를 잡혀 끌려가다시피 따라가던 미나토는 그 순간에야 자신이 마사유키에게 작별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나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오기와라. 손… 놔 주지 않을래?”

따가운 햇볕 아래, 익숙해진 길을 오기와라의 손에 이끌려 걷던 미나토가 조심스럽게 오기와라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자 뒤를 돌아본 오기와라는 계속 잡고 있었던 것을 이제 알아차린 양, 자신이 잡고 있던 팔을 응시한다.

한 번, 힘을 꽉 줬다가 놓아주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 같다.

“…미나토 선생님. 형이 뭐라고 했어요?”

“간단히 말하면 오기와라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려나? 형제간에 우애가 좋네.”

복잡한 표정을 짓는 오기와라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나토는 마음에 걸렸던 질문을 입 밖으로 냈다.

“형님이 집에 와 계셨네. 추석 연휴 말고도 휴가가 있나?”

“다음 달부터 근처 지사로 발령 났거든요. 다시 집에서 살게 돼서, 이사도 겸해 유급휴가를 쓰고 있어요. 저로서는 얼른 여자친구든 형수님이든 만나서 나가줬으면 좋겠지만요.”

“그렇구나, 집이 떠들썩한 게 좋겠네.”

미나토의 말에 오기와라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나와 버렸다.

“어디서 공부할래? 자습이라면 몰라도 가르치면서 하기엔 도서관은 힘들 테고, 그럼 패밀리레스토랑이나 패스트푸드점이나….”

“선생님 집에 가고 싶어요. 그냥 거기서 공부하면 안 될까요?”

그 말을 듣고 입원 중에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전에도 말했지만 3층에다, 에어컨이 오래돼서 불편할 텐데. 게다가 전철도 갈아타야 되는데, 그래도 괜찮아?”

“문제없어요. 곧 새 학긴데, 그 정도도 못하면 오히려 곤란하죠.”

“그래? 만약 힘들면 바로 말해줄래?”

“알겠습니다. 선생님, 보기보다 과보호하시네요.”

웃음 섞인 목소리가 가깝다 했더니 어느새 오기와라가 눈앞에 있어서 의도치 않게 어깨를 움츠렸다.

“…넌 아직 환자니까. 무리는 안 하는 게 좋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게요.”

멀어져가는 기색에 안도하면서 딱 그만큼 다시 낙담한다. 그러나 그것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감정을 숨기며, 미나토는 오기와라와 함께 역으로 향했다.

몹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좁은 부엌에서 여과지를 접던 손이 멈추고, 미나토의 시선이 침실이기도 하고 거실이기도 한구석의 방으로 향했다.

미나토가 사는 아파트는 증축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 되는 탓에 학생에게 인기 있는 건물이었다.

방 배치는 흔히 말하는 1DK이긴 해도, 주방 부분은 현관에서 안쪽의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가까워서 싱크대 앞에 서면 방 안이 한눈에 보인다.

사진을 찍는 것은 좋아하지만 장식하는 취미는 없고, 물건을 많이 두는 것도 싫어해 친구들은 방안의 살풍경에 질려 했다. 그러나 그런 공간이라도 미나토에게는 3년 반을 산만큼 애착이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 그 방의 벽에 붙은 책상에서 오기와라가 수학 응용문제를 풀고 있었다. 책상 위로 떨군 진지한 얼굴은 공부하면서 이미 익숙해진 얼굴인데도 지금은 어딘가 굉장히 낯설다.

평소보다 단 둘뿐이란 사실을 크게 의식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한 자의식 과잉일 뿐이다.

오기와라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공부시간이고, 때마침 장소가 여기인 것에 불과했다.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커피를 내리려는데, 타이밍을 노린 것처럼, 전기 포트의 스위치가 바로 소리를 냈다. 습관적으로 손잡이를 잡으며 미나토는 재차 자신에게 되뇌었다.

오기와라가 이 방에 오고 싶어 한 것은 그가 졸업 후 먼 곳으로 갈 계획이기 때문이다. 자취방을 보고 참고하고 싶다는 마음과 약간의 호기심 때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선생님? 다했는데요.”

“아, 으악!?”

갑작스럽게 귓가에 울린 소리에 주전자를 쥐고 있던 손가락이 스르륵 풀어졌다.

간담이 서늘했던 순간 직후, 아슬아슬하게 손잡이에 걸렸던 손끝이 강한 힘으로 뒤덮였다. 기울어지던 주전자가 수평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야 마음을 놓았다.

“죄송해요! 놀랐어요?”

“아냐, 괜찮아. 고마워, 그보다 오기와라는 화상 안 입었어?”

김이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가능성은 있다.

재빨리 목소리가 난 오른쪽 뒤를 돌아보다 미나토는 그대로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전 괜찮아요. 선생님은 어디 안 데었어요? 죄송해요, 여러 번 말 걸었는데 반응이 없어서 그만.”

속삭이는 입술이 당장에라도 닿을 듯한 근거리에 있어 사고회로까지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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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의 그런 반응을 전혀 깨닫지 못했는지 오기와라는 선뜻 이어서 말했다.

“잡은 김에 커피, 내릴까요?”

“아니, 그.”

겨우 목소리가 나왔을 때는 이미 상대가 주전자 손잡이 채로 손을 고쳐 쥐어버렸다. 잡은 그대로 조리대 위에 얹힌 잔에 물을 붓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음에도 미나토의 모든 신경은 등 뒤에―양팔 안에 미나토를 둘러싸고 커피를 내리는 오기와라에게만 향해 있었다.

“제가 들고 갈게요. 선생님도 드세요.”

“그럼 먼저 가 있을래? 난 다과를 좀 내갈게.”

“그래요? 알겠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소리가 나나 싶더니, 스르르 멀어져가는 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머그잔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든 긴 팔을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그 팔과 몸에 자신이 둘러싸여 있었던 건가 생각하자 온몸이 뜨거워졌다.

“―선생님? 역시 데이셨어요?”

책상에 잔을 내려놓은 오기와라가 부엌에 우뚝 선 채로 있는 미나토를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괜찮아.”하고 손을 젓고는 찬장에서 꺼내려던 상자를 냈다. 약간 경계를 하며 책상 곁으로 돌아갔다.

“화과자네. 좋아하세요?”

“친구가 고향 갔다 오는 길에 사다 줬어. 과자를 낼 거였으면 차를 마시는 게 좋았을까? 다시 끓일까?”

“전 이걸로 괜찮아요. 커피랑 화과자, 의외로 잘 맞지 않나요?”

붙임성 있는 미소를 보이기에 하마터면 수상한 짓을 할 뻔했다. 책상과 세트인 의자에 앉은 오기와라와 거리를 두듯이 떨어진 침대에 앉아, 미나토는 어떻게든 미소를 지어냈다.

휴식을 겸해 잡담하는 동안 조금씩 평상심이 돌아왔다.

오기와라가 의자를 우선 사용하는 것은 그의 오른쪽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수술 뒤에는 항상 자세를 조심해야 한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데다 장비를 떼어놓지 못하는 지금은 가능한 한 바닥에 앉지 않았다.

“미나토 선생님. 채용 시험 결과, 언제 나온다고 했죠?”

“10월. 떨어지면 바로 취업활동 시작해야 하니까 그전까지 졸업 논문 주제 정도는 잡아둬야지.”

“전 괜찮을 거 같은데요. 미나토 선생님, 엄청 잘 가르치잖아요.”

“그럼 좋을 텐데.”

교수라는 직업은 수업뿐 아니라 학생들을 장악하고 지도하는 수완도 필요하다. 수업 중에는 그렇다 치고, 그 외에서는 줄곧 관엽식물 취급을 받았던 자신에게 과연 그런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수습 이후 강해진 불안 탓에 애매한 대답이 나왔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어땠는지 빤히 미나토를 쳐다보던 오기와라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런데 미나토 선생님은 이과 교수가 되려고 생각한 이유가 뭐예요? 수학을 잘해서?”

“정반대. 수학을 죽을 만큼 싫어하고 성적도 바닥이었어.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다니기 시작한 학원에서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선생님이 포기할 정도였으니까.”

미나토의 말에 오기와라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보기 어려운 표정을 이끌어 내니 무심코 뺨이 풀어졌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 수학교사였는데, 학년 초에 실력테스트 결과가 나온 직후 호출했어. 평균 점수 절반도 못 따라갔으니까 각오하고 갔더니, 그 자리에서 일단 해답란을 채워보라며 간이 테스트를 내주셨지.”

어차피 해보는 거, 하며 모르는 그 나름대로 답란을 채워서 낸 며칠 뒤, 다시 호출당해서 클립으로 집은 즉석 문제집을 ‘기한은 일주일 안’이라는 말과 함께 건네받았다.

그리고 문제집의 각 해답란에는 힌트처럼 보이는 설명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기한 안에 하고 말 테다, 하고 해봤는데 포스트잇의 설명 덕분에 어떻게든 풀어냈어. 그 뒤에는 제출할 때마다 다음 문제집을 건네주셨고. 얼마 지나고 나서부턴 포스트잇이 없어졌었지. 그 시점엔 풀리지 않을 땐 어디를 모르겠는지 적어두라고 하셨었어.”

그 뒤로는 스스로 놀랄 만큼 이해가 빨랐다. 암호로만 보이던 수식과 공식의 의미를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고, 어느새 수학 수업을 즐겁게 생각하게 되었다.

담임은 여러 학생에게 그렇게 지도했다고 했다.

끝까지 따라온 사람은 미나토뿐이라고, 다음 해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동할 때 고별 선물처럼 알려주었다.

“교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직접적인 계기는 남동생 때문이려나. 나랑 똑같이 수학을 싫어하고, 숙제를 못 해서 울면서 왔지.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자신을 갖고 가르쳤는데, 마음처럼 잘 안 되더라고.”

몇 번을 설명해도 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동생을 보며 난감해하다, 나중엔 결국 왜 이런 것도 모를까 하고 귀찮게 여겼다.

그때 책장 틈으로 앞에서 말한 문제집이 다시 나온 것이다.

“어디를 어떻게 이해 못 하는 건지 모르니까 어려운 거라고 판단하고, 동생이 틀린 답을 잘 보면서 생각했어. 관심을 가지고 말투나 듣는 방식을 바꾸면서 반응을 살피는 동안, 쭉 부루퉁하던 동생이 조금씩 웃게 돼서… 그 무렵에는 가르치는 게 재밌어졌고. 저런 식으로 기뻐해 준다면 학교 선생님도 좋겠다 싶어….”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소리가 멈췄다.

의자 위에서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앉은 오기와라가, 진지한 눈빛으로 빤히 미나토를 쳐다봤다.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진 것이 창피했다.

고개를 숙였을 때 오기와라가 싱긋 웃었다.

“왠지 알 거 같아요. 미나토 선생님에 대해.”

“…무슨 뜻이야?”

“선생님은 왜 저럴까 이런저런 생각해 본 적 있거든요. 지금 이야기 들으니 알겠네요.”

“생각했다니, 무슨?”

주저하며 물은 미나토에게 오기와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비밀입니다. 이건 학생의 특권이라고 하죠.”

말 그대로 그 뒤로는 아무리 물어도 오기와라는 이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예정대로 세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나자, 이미 밖은 저녁놀로 물들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

“그건 안 돼. 여기까지 데려온 건 나니까.”

여러 번 입씨름을 반복한 끝에 미나토는 아파트 현관문을 잠갔다.

열쇠고리를 치노팬츠 주머니에 넣으며 나란히 서서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오기와라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미나토 선생님, 역시 과보호쟁이시네요. 아마 저한테만.”

“나도 알아, 그렇지만 이것만은 양보 못 해. 몸에 무리가 가게 할 순 없으니까.”

여기서 역까지는 걸어서 오 분 정도지만 하필 지금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대였다.

“무리한 적 없는데요.”

오기와라와 나란히 아파트 밖으로 나가자, 시간 때문인지 벌써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해가 저물고 있다고는 해도 하늘은 아직 밝았고, 그 때문에 점점 밝아지는 빛이 어딘가 붕 떠 보였다.

이틀 뒤인 다음 과외 예정일을 확인하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낯익은 자동차가 미나토와 오기와라의 약간 앞의 갓길에 정차했다. 스르르 내려온 창문 너머, 운전석에서 보이는 얼굴은 다름 아닌 나가시마였다.

“역시 미나토네. 마침 잘됐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지금 요시하루 집에서 한잔하려는데, 너도 와.”

사근사근하게 구는 나가시마는 주의가 필요하다. 미나토 곁에 있는 오기와라가 눈에 안 들어올 리 없건만 흡사 그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오늘은 할 일 있어. 다음에 보자.”

“할 일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졸업 논문이잖아? 가끔은 쉬어줘야지, 안 그럼 전처럼 열나면서 쓰러진다?”

“그건 3년 전 얘기잖아. 툭하면 그러는 거처럼 하지 마.”

어처구니가 없다는 식으로 대답한 미나토에게 싱글싱글 웃으며, 나가시마는 핸들 위에 팔짱을 낀 채 얹은 팔에 턱을 얹었다.

“3년 전 한 번이라도 전과는 전과지. 다른 할 말도 있으니까 잠깐 보자니까. ―그쪽에 학생, 소문으로만 듣던 오기와라지? 지금 데려다주는 길이야?”

“네, 그런데요.”

알고 하는 짓이니 화를 낸 들 아무 소용없었다.

애매한 기분으로 하는 수 없이 긍정하는 미나토에게 나가시마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가는 길에 태워줄게. 오기와라를 집에 데려다준 뒤에, 미나토는 곧장 요시하루 집으로 연행되는 거지.”

“나가시마. 멋대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거, 입원하기 전에 저 태워다주시던 차죠? 미나토 선생님 게 아니었네요.”

미나토의 말을 덮어씌우듯 오기와라가 말했다. 시선을 향하자 그는 빤히 나가시마의 자동차를 쳐다봤다.

“난 차가 없어서 빌렸어.”

“그래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기와라라고 합니다. 편의를 봐 주신 거 같은데 감사합니다.”

“차를 빌려준 건 미나토니까, 너한테 인사 들을 이윤 없어.”

나가시마는 몸을 돌려 인사하는 오기와라에게 냉담한 투로 대답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나토 친구 나가시마야. 미나토가 여러모로 돌봐주는 거 같던데. 아마 오기와라도 알겠지만, 이 녀석을 보면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아서. 제멋대로 하게 놔두면 혼자서 쪽박 차러 간다니까.”

“어쩐지 알겠네요.”

나가시마의 말에 울컥 한 미나토였으나, 오기와라까지 긍정하는 통에 뭐라고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어땠는지, 나가시마는 입을 다물고 웃으며 오기와라를 향해 말을 꺼냈다.

“서서 얘기하기도 뭣하니까 가는 길에 타고 가. 지금 시간이면 전철 붐비잖아. 이렇게 말하기는 뭣하지만, 솔직히 넌 괜찮은데 미나토가 신경 쓰여.”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타고 갈게요.”

오기와라의 한 마디로 다 같이 나가시마의 차를 타게 되었다.

조수석 뒷자리, 미나토 옆에 앉은 오기와라는 긴 다리를 힘겹게 굽히고 나가시마에게 가는 길을 설명했다.

평소 같은 오기와라와 대조적으로, 나가시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장난스러웠다. 일상적인 화제로 이야기꽃이 피는 모습에 잘 맞는구나, 하고 안도한 미나토였으나, 오기와라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 생각은 틀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폐를 끼쳤네요.”

“전혀 아냐. 모쪼록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나가시마의 말투에 담긴 노골적인 도발에 그 장소의 공기가 굳었다. 오기와라의 시선은 앞을 향한 채였다. 아마 백미러 너머로 나가시마와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스산한 침묵을 곤란해 하던 미나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여기서 내릴게. 일부러 데려다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미나토는 이대로 같이 가면 되잖아. 설마 오기와라를 현관 앞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할 셈이야?”

“나가시마! 무슨 소리….”

“그런 말 안 합니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 들어 거의 볼 일이 없어진 무표정한 얼굴로 오기와라가 말했다. 바로 나가시마의 실실 웃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얼른 내리지 않을래? 너도 불러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사회인끼리 마시는 자리에 데려갈 순 없잖아.”

“나가시마. 적당히 좀 해, 너야말로 학생 상대로 꼴사나운 짓 하지 마.”

평소에는 유들유들하고 요령 좋게 행동하지만 이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철저하게 공격적인 것이 나가시마다.

알고는 있어도 이번만큼은 내버려 둘 마음이 들지 않아, 미나토는 운전석의 시트를 움켜쥐고 몸을 내밀었다. 그러나 무어라 한소리를 해줄 틈도 없이 곧바로 제지당했다.

“죄송하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미나토 선생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전반의 말을 나가시마에게, 후반을 미나토를 향해 조용히 말한 오기와라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차에서 내려 가버렸다.

무의식적으로 퍼뜩 차에서 내린 미나토가 오기와라를 쫓았다. 서둘러 뛰어갔더니 막 대문을 열려고 하는 참에 그를 잡았다.

“저기, 미안해! 뜬금없이 불쾌한 일을 겪게 해서.”

뒤돌아본 오기와라의 표정. 그것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당연했던 무표정이었다. 어쩐지 그에게 내쳐진 기분이 들었다.

“저, …나가시마가 이상하게 집적거린 이유는 아마 나일 거야. 그러니까 괜히 불똥 튀긴 건 정말 미안. 본인한테는 확실하게 주의해둘 테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기와라는 아무 말 없이 미나토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갑자기 입가를 느슨하게 풀고 말했다.

“…신경 안 써요. 저야말로, 분위기 파악 못 해서 죄송해요.”

“아냐, 그런 거.”

“아뇨, 정말로. 그보다 깜빡하고 말 못한 게 있어요.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가볍게 얼굴을 갖다 대듯 말하는 오기와라는 이미 제법 익숙해진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가시마의 차를 신경 쓰는 기색에 미나토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기다리다 지쳐서 집에 가면 감사할 정도니까. …그런데, 무슨 말?”

“새 학기 말인데요, 가능하면 한동안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요전에 진찰받았을 때 수술하기 한 달 전후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해서요. …저기, 자동차 말고 전철을 타고 걸어서 가도 충분하니까요.”

마지막 한마디는 미리 거절하는 듯 말하기에 미나토는 웃었다.

“좋아. 어차피 다음 달 내내 방학이니까 괜찮아. 내 사정에 맞춰서 렌터카로 다니려고 하는데, 그건 허락해줄래?”

“아뇨, 그렇게까지.”

“시간 단위로 빌리면 그리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 원래 7월에도 그러려고 했었고. 다만, 아르바이트 같은 거 때문에 오기와라가 원하는 시간에는 어려울 수도 있는데.”

“전 괜찮아요. 도서관 같은 데서 공부하고 있을 테니 시간은 선생님의 사정을 우선으로 맞춰주세요. 죄송해요, 부담되실 텐데.”

괜찮다고 확실하게 말해 준 뒤 미나토는 오기와라와 헤어졌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로 되돌아가 뒷자리에 올라탔다.

“왜 거기 앉아? 앞에 오면 될 텐데.”

“거절할게. 싫으면 내릴까?”

의도적으로 무뚝뚝하게 말하자 운전석에서는 한숨이 들려왔다.

그리고 차는 이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대가 신경 쓰여 넌지시 뒤돌아보면, 뒷창문 너머로 보이는 오기와라 집의 대문 앞에 선 그림자가 배웅하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황혼으로 저무는 풍경 속에서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들킨 거 같진 않은데… 나가시마, 무슨 짓 저질렀어?”

억지로 끌려간 아파트의 현관에서 나가시마의 연인 요시하루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러나 나가시마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외면하는 미나토를 보며 이상함을 느꼈는지 말을 덧붙였다.

“별로. 미나토가 과외 하는 학생을 괴롭히고 들쑤시고 부추겼을 뿐이야.”

“…그렇군. 나가시마는 진짜, 쓸데없는 짓 벌리는 일에는 재빠르구나.”

감탄하듯 말하는 요시하루가 아무래도 겸연쩍은지 나가시마는 허둥지둥 신발을 벗고 자신의 집인 양 제멋대로 현관에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미나토도 들어와. 지금 전골 준비하고 있어. 좋아하지?”

“좋아는 하는데 한여름에 전골?”

“나가시마가 해달라고 해서. 계절하고 조금도 안 맞는 데다 자기 욕구에 충실한 면이 잘 보이지?”

생글생글 부드러운 미소로 말하기에 조금 전까지 예민했던 기분이 사르르 가라앉았다.

지금 당장 집에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것도 그렇게 하는 것도 쉽지만, 그렇게 했을 때 신경 쓰는 사람은 요시하루뿐이다. 그렇다면 굽힐 수밖에 없다고 포기했다.

“나도 도울게. 뭐 하면 돼?”

“음―준비는 거의 끝났으니까 그냥 앉아 있어도 돼. 가능하면 미나토는 손님 말 상대 좀 해줘.”

“손님?”

요시하루가 집에 부른 손님은 극히 제한되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쳐다보니 요시하루는 부드러운 얼굴이 어딘가 켕기는 표정을 띠었다.

“요시하루…?”

“먼저 사과할게. 내 맘대로 해서, 미안해.”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여서 미나토는 당황으로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등을 떠밀려 복도 끝으로 이끌렸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 거실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소파에서 손을 든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안녕. 잘 지냈어?”

코우모토였다.

7월 말, 나가시마와 한잔할 때 억지로 만났던 바로 그 상대. 도로 말문이 막혀 부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요시하루를 올려다봤다. 미안한 얼굴을 한 그가 입술만 움직여 “미안.”하고 사과를 건넸다.

즉, 처음부터 코우모토를 만나게 할 목적으로 미나토를 여기에 데려온 것이다.

“요전에 만났을 때, 미나토랑 코우모토 씨, 연락처 주고받고 친구하기로 했지? 친구라면 같이 저녁 먹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잖아?”

“요시하루, 여기 와봐! 느릿느릿하지 말고 도우라니까.”

횡설수설 변명하는 요시하루를, 부엌에 있던 나가시마가 불렀다. 노골적으로 마음을 놓는 요시하루는 짧게 사과하고는 재빨리 카운터 너머 부엌으로 가버렸다.

그렇기에 결국, 남겨진 미나토는 소파에서 자신에게 손짓하는 코우모토 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안녕하세요. 와 계셨네요.”

“나가시마가 갑작스럽지만 오겠냐고 하더라고. 호소카와도 부른다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왔지.”

싱글거리며 웃는 코우모토에게 어색한 웃음으로 답하며, 미나토는 그에게서 적당히 떨어진 채 소파에 앉았다.

친구가 되었다고 요시하루는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유도되었다, 는 말이 정확했다.

지난번 만남에서 미나토는 철저하게 듣는 사람 역할을 맡았고, 처음 만난 코우모토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또한 괜히 가까워지지 않도록 서먹하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코우모토의 됨됨이는 그때 나가시마와 요시하루의 대화를 들으며 대충 알 수 있었다. 상냥해 보이는 코우모토의 외모는, 단정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야성미가 강한 오기와라와는 정반대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미나토보다 세 살 많은 무역회사 직원으로, 현재는 혼자 산다고 한다.

말투는 항상 침착하고 온화하며, 가끔 터트리는 웃음소리는 쾌활하고 밝았다. 소극적인 미나토를 배려해 때때로 말을 걸어주었고, 이쪽이 머뭇거리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도와주기도 했다.

인간관계에 눈치가 빠른 사람으로 아마 일도 잘할 것이다.

듣다 보니 전의 연인과는 작년 말에 헤어졌고, 사귀는 사람은 현재 없다고 했지만, 분명 본인이 그럴 마음만 있으면 언제라도 상대를 찾을 수 있을 사람이었다.

헌데 그런 코우모토가 미나토에 대해선 꽤 호의적이었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종종 만나자는 문자나 전화를 할 만큼.

“…일부러 꾸민 거네. 난 그럴 마음 없다고 했는데.”

네 명이 함께 둘러싼 전골냄비의 바닥이 보일 무렵, 휴대전화에 착신이 들어와 코우모토는 자리를 떴다.

요시하루의 안내로 장소를 옮기는 것을 확인한 다음, 미나토는 나가시마를 흘끗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가시마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토, 코우모토 씨가 만나자는 거 죄다 거절했지? 일단 친구로 만나기로 했으니까 한 번 정도는 만나 보면 어때?”

“만나 보면 어떠냐니, 난.”

“그럴 마음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거절한다. 뭐가 됐던 일단 세 번은 둘이서 따로 만나고 나서 말해. 나랑 요시하루랑 같이 한 번 마신 걸로 결론 내리지 말란 말야.”

“그렇게 말한들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지금은 졸업 논문이랑 알바로도 벅찬데.”

“졸업 논문 준비 때문이라니, 지금은 저녁 아르바이트는 없잖아. 가끔은 머리 식힐 겸 나가는 것도 좋아. 하루 종일이 안 되면 반나절, 그것도 안 되면 저녁에 두세 시간. 그 정도 시간도 못 내는 건 아니잖아? 실제로, 나나 요시하루가 부르면 나오잖아.”

옳은 말만 해대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어느새 돌아온 요시하루가 슬쩍 말했다.

“미나토는 코우모토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거절하는 거야? 제삼자가 하는 말이지만, 저 사람이면 미나토가 사귀기에 괜찮지 않나 싶어.”

“요시하루, …그래도.”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코우모토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아.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나이에 맞는 책임감과 분별력이 있어서 연애도 어느 정도 익숙해. 지금 솔로인 건 전에 사귀던 사람하고 밀고 당기면서 떠보는 거에 질렸기 때문이야. …그래서 미나토의 서툴고 솔직한 부분에 호감을 느낀 거 같아. 좀 밀어붙이는 타입이기는 해도 싫어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어중간한 사람하고 사귀는 것보다 훨씬 좋을 거야.”

“….”

나가시마처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반발할 수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상대를 배려하면서 조목조목 따지고 들면 반론할 수가 없다.

요시하루가 하는 말은 대체로 옳다. 코우모토의 인품에 대해서도 그가 보증한다면 걱정할 일은 없다. 코우모토가 미나토에게 호의를 나타내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토에게는 떨쳐낼 수 없는 위화감이 있었다.

코우모토 본인이 싫은 게 아니라, 그에게 마음이 향하는 데 있어 자기 안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마음이 존재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나토의 마음이 꿈쩍도 하질 않는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강한 자석에 달라붙은 쇳가루처럼, 오기와라에게서 떨어질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

스스로 벅차다고 여길 만큼 완고한 마음이었다.

“오기와라는 포기하는 게 좋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갑작스러운 말에 모든 것을 간파당했다는 기분이 들어 깜짝 놀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나가시마가 평소와 달리 진지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어차피 포기할 생각이면,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 봐도 괜찮잖아. 코우모토 씨 정도면 우량 매물이고, 무엇보다 널 마음에 두고 있어. 상대방도 친구부터 시작하자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잖아.”

“그렇지만.”

“사귀어 보고, 그러고 나서 안 되겠다고 생각되면 할 수 없어. 당연히 코우모토 씨도 선택할 권리는 있으니까 저쪽에서 거절할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그것도 안 사귀어 보면 몰라.”

그러고 나서 찾아온 침묵. 나가시마와 요시하루가 양쪽에서 쳐다보는 가운데 미나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그 타이밍을 계산한 듯이 코우모토가 돌아왔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읽었는지 어땠는지 쾌활하게 웃었다.

“식사는 이제 끝난 거야? 나가시마는 아직 더 마시고 싶은 얼굴인데.”

“아직 모자라죠. 코우모토 씨 어떡할래요?”

“안타깝게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오늘은 그만 마실래. 호소카와는 차 마실래?”

“네. 저기, 준비 같은 거 아무것도 안 해서 차는 제가.”

“됐어. 내가 할 테니까 미나토는 앉아 있어.”

엉덩이를 반쯤 들고 요시하루가 말했다. 그러자 냉큼 나가시마가 그의 어깨를 눌러 도로 앉히며 큰소리를 내뱉었다.

“차 준비는 미나토랑 코우모토 씨께 부탁할게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누군가 알겠죠.”

흠칫하며 눈이 휘둥그레진 미나토와 대조적으로 요시하루는 이내 이해했다는 얼굴로 느긋하게 앉아버렸다.

그 탓에 난처해서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고 있는데 쓴웃음 짓고 쳐다보던 코우모토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네.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 있을까?”

“…네.”

이 상황에서 거절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다.

속으로 곤혹스럽다고 여기면서도 미나토는 하는 수 없이 코우모토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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