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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시간은 어느 정도예요?”
“30분 정도? 난 나가지만 시간 전에는 올 테니까 열심히 해.”
“알겠습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인 오기와라가 필기도구를 준비하는 것을 기다리며 미나토는 손목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짧게 신호를 하고 오기와라가 테이블 위의 종이를 뒤집는 것을 곁눈으로 보며 창가로 다가갔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블라인드의 각도를 조절했다.
6층에 있는 병실 창에서는 병원 정면을 달리는 간선도로와 그 건너편의 거리가 잘 보였다. 기온이 40도가 넘는 한여름인 오늘은 이미 오후 늦은 시간이건만 여전히 덥게 느껴졌다.
병실 내의 기온이 쾌적하게 유지되는 만큼 집에 가는 길은 더위에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슬쩍 돌아본 곳에는 다리를 내린 자세로 침대에 앉은 오기와라가 예리한 얼굴을 한 채 사이드 테이블 위의 간이 테스트를 풀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주의하며 병실을 나온 미나토는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1층까지 내려가 가는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고, 갈라지는 모퉁이를 몇 개나 돌아서 걸어간 복도 끝, 그곳에 위치한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 시점에서 건물을 세 개 정도 거쳤다고 알려준 사람이 다름 아닌 오기와라였다. 수술 후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원내를 돌아다녔을 때, 그 엘리베이터로 올라간 꼭대기 층의 매점에서, 전부터 좋아하던 음료수를 팔던 것을 봤다고 했다.
(매입처가 다른지 다른 매점에서는 안 팔아요.)
인근에서도 최대 규모인 이 종합병원은 건물 내에 매점 여섯 곳, 식당 세 개, 우체국과 은행 ATM에다가, 작은 꽃집과 미용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증축과 개축을 거듭한 결과인지 여러 건물이 복잡하게 연결되어서 익숙하지 않은 환자나 문안객 중에는 길을 잃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종합 접수처 근처에는 입원환자의 이름을 말하면 길을 알려주는 전용 종합안내소까지 존재했다.
방학을 하자마자 이곳에 입원한 오기와라는 사전검사를 거쳐 일주일 전에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오른쪽 무릎에 전용 장비를 심고 재활훈련에 힘쓰고 있다. 어제는 목발을 받아, 본격적으로 보행훈련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방학 전날까지 오기와라의 외출 담당 겸 과외를 해온 미나토는 그가 입원한 날을 경계로 일단 과외를 쉬었다.
하지만 수술 날 이후에는 가능한 한 병문안을 오면서 채용 1차 시험을 준비했고, 바로 어제 시험을 마치고 사흘 만에 병원을 찾은 것이다. 더구나 내일부턴 여름 보충수업 대신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에, 상담 겸 간이 테스트를 가져온 참이었다.
“아. 호소카와 선생님 찾았다!”
종합 접수처 근처의 엘리베이터로 돌아왔을 때 아는 얼굴이 말을 걸어와, 미나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피했다.
“안녕. 오기와라 문병 왔니?”
“그렇긴 한데 말 걸자마자, 시험 치는 중이니까 방해하지 말라면서 쫓겨났어요! 지금 과외 중이죠? 앞으로 얼마나 걸려요?”
느긋한 투로 말하는 그는 체구가 작고 동안인 탓인지 얼핏 보면 중고등학생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오기와라와 동급생인 육상부원이었다. 과는 달라도 친하게 지내는 모양인지 오기와라가 입원한 당일부터 혼자서 종종 병문안을 왔다.
오늘은 여러 명을 데리고 왔는데 면면을 보니, 다들 육상부원 동료들인 모양이다.
“앞으로 10분이나 15분 정도면 끝나려나. 기다릴 시간 되니?”
“기다릴게요! 이 근처에 있을 테니 선생님 집에 가실 때 말해 주실래요?”
곧바로 확답한 미나토에게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따라 하듯 같은 움직임을 보인 여러 명의 그림자 속에서, 미동조차 않는 학생이 매서운 눈으로 미나토를 응시했다.
그것을 못 본 체하며 미나토는 그들과 헤어져 엘리베이터에 탔다. 오기와라의 병실에 돌아갔을 때는 예정 시간까지 십 초 정도 남아 있었다.
초침이 정각을 가리킴과 동시에 커튼을 걷고, “자, 그만.”하고 말했다. 테이블 위에 샤프가 작게 굴렀고 오기와라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수고했어. 좀 쉴까?”
사 온 플라스틱 컵을 시험용지를 치우며 그 자리에 얹자, 오기와라가 질렸다는 듯이 올려다봤다.
“그런 데까지 일부러 사러 가셨어요?”
“산책하기에 딱 적당한 거리였어. …음,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모든 문제에 답이 적힌 답안용지를 클리어 파일에 넣어 가져온 가방에 넣자, 컵을 손에 든 오기와라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올려다봤다.
“벌써 가시게요? 학원의 여름 특강 아르바이트는 내일부터 아니었어요?”
“오늘은 상태만 보고, 본격적인 공부는 내일부터 할 거야. 그리고 아까부터 친구들이 문병 와 있어. 아마 육상부 애들 같은데.”
“―이시즈카는 쫓아냈는데요. 어디서 만났어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오기와라가 말했다. 기다린다던 상대가 그런 이름이었다는 걸 그때 기억해냈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라고 답해준 미나토를 향해, 일부러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쉰다.
“내버려 두면 돼요. 만날 드나들어도 귀찮고, 할 얘기도 없고, 솔직히 귀찮다고요. 부활동은 옛날에 관뒀는데 뭐하러 1학년까지 끌고 오는지.”
그렇게 말하는 오기와라는 찌푸린 얼굴로 빨대를 씹었다.
‘미나토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난 뒤부터 그가 나이에 맞는 노골적인 표정들을 자신에게 보여줄 때마다, 미나토는 매번 즐거웠다. 지금도 제법 귀엽다는 생각으로 상냥하게 응시했다.
“오기와라가 신경 쓰이겠지. 1학년도 두 달은 함께였고.”
“함께이고 뭐고, 주위에서 시끄럽게 굴 뿐이에요. 말은 병문안이라면서 그냥 구경꾼이라고요.”
불쾌한 듯 뱉어내는 오기와라의 이런 표정을 아는 것은, 아마도 극히 일부뿐이다. 1층 로비에서 기다리는 육상부원도, 강의실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교수들도 모를 것이다.
그것을 기쁘다고 느끼는 자신을 다잡으면서도 뺨이 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의외로 얘기해보면 기분전환이 될지도 모르고.”
“―미나토 선생님이 있어 주면 그래도 괜찮은데.”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오기와라가 시선만 들어 올려 미나토를 가만히 응시했다.
“수술하고 나서 저랑 제대로 얘기할 시간 없었잖아요. 오늘만 손꼽아 기다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아직 가면 안 돼요.”
진지하게 말하는 오기와라와 몇 초간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 그것이 떼를 쓰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하는 뺨을 억지로 당기며 미나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오늘은 이 뒤에 누구랑 만날 약속이 있어. 두 달 가까이 못 만난 사람이라서 취소할 수도 없거든. ―내일이라도 괜찮으면 과외 끝나고 나서 소등 시간까지 같이 있을게. 그럼 안 될까?”
부루퉁한 오기와라가는 다른 수를 짜내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고개를 들고 침대 난간에 올려 둔 미나토의 손목을 잡았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퇴원하고 나면 미나토 선생님 집에 데려가 주시겠어요?”
“상관은 없는데, 우리 집은 흔해 빠진 아파트야. 전에도 말했다시피 엘리베이터도 없는 3층짜리… 계단 괜찮겠어?”
그러고 보니 입원하기 전에 외출을 도와줄 무렵에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때는 수술 전에 무리하면 좋지 않다고 미나토가 설득했다.
“괜찮을 거예요. 어차피 퇴원할 때는 목발도 짚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정리 좀 되면 초대할게.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기대하지 말기.”
“약속했어요.”
애교스럽게 웃는 오기와라가 미나토의 손목을 놓았다.
여태껏 아무렇지 않게 닿던 체온을 의식하며 미나토는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1층 외래진료 접수처는 끝난 모양이지만, 대기실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남아 있었다.
자 그럼 어디 있나,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호소카와 선생님, 벌써 끝났어요?”하고 목소리가 들렸다.
“응. 오기와라가 기다려.”
“감사합니다! 얼른 가자.”
활기차게 대답하는 그를 따라 저마다 인사를 전하고, 줄줄이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미나토의 귀에 살짝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뻔뻔한 얼굴로 과외라니. 보통은 못 그러지.”
“후안무치, 라고 하나?”
그러나 이번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감춘 채, 미나토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돌아보는 학생들에게 묵묵히 손을 흔들었다.
곧장 정면 현관에서 밖으로 나가자 저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강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모자를 가져와야 했나 생각하면서 미나토는 역을 향해 걸었다.
수습 마지막 날에 유모토가 한 충고는, 사고 이후 오기와라의 거동을 돕기 시작하면서 바로 증명되었다.
정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을 때나 오기와라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일부 학생들은 적의가 담긴 시선이나 말을 내던졌다. 그 대부분은 함께 부활동을 하며 땀을 흘려온 육상부원이나 오기와라를 동경하는 여학생이었다.
오기와라 본인이나 그 부모가 무엇이라 하든, 그가 다친 원인이 미나토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과외를 하며 곁에 있기에 오기와라가 받은 데미지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수술 후 이틀 동안 오기와라는 제대로 자지를 못한 듯, 평소처럼 행동해도 나쁜 안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상당히 고통스러운지 이를 꽉 물고 참아내는 재활훈련은 퇴원하고 나서도 당분간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도 오기와라의 오른쪽 무릎은 결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두 번 다시 경기에는 나갈 수 없다….
하나하나 확인할 때마다 자기혐오에 빠졌다.
사실 자신은 눈엣가시가 아닐까,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하면서 쓸데없는 짓을 할 뿐인 것은 아닐까.
몇 번을 그렇게 고민하고 다시 생각을 고친 결과, 결국 뭐든 오기와라가 원하는 대로 해주자고 마음먹었다. 그 외에 보상해줄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미나토가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늦지는 않겠지만 서두르자고 생각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나토, 늦었잖아.”
약속장소인 술집에 이미 친구인 나가시마 에이스케는 도착해 있었다. 테이블에는 몇 가지 요리가 차려졌고, 친구 손에 들린 잔 속의 내용물도 절반으로 준 상태였다.
“약속은 7시 반이잖아. 아직 7시 15분이야.”
“난 벌써 15분이나 기다렸다고.”
자기 말이 옳다며 정색하고 말하는 나가시마에게 쓴웃음 짓고 절반 이상 음식으로 가득 찬 테이블 곁에 앉았다. 곧장 전통 축제의 옷차림을 한 점원에게 음료를 주문하고, 쭉 늘어놓은 음식들을 쳐다보면서 작게 한숨을 흘렸다.
“닭튀김이랑 야채튀김, 돈가스밖에 없는데 또 뭐 시켰어?”
“내 연료는 기름이니까 이거면 됐어.”
“몸에 안 좋다고 항상 말했는데. 요시하루한테 이른다?”
“그 녀석 연료는 설탕. 불평할 자격 없으니까 괜찮아.”
요시하루라는 사람은 나가시마의 연인으로, 이름처럼 남자다.
대학교에서도 공공연히 동성이 연애대상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나가시마는 미나토와 같은 학번이지만 학부는 달랐다.
공통점이라곤 두 사람 다 사진부 부원이었다는 것인데, 입학 이후 성실하게 부활동을 했던 미나토와 대조적으로, 나가시마는 머릿수를 채우는 유령부원으로 자신이 내킬 때만 훌쩍 찾아올 뿐이었다.
서로 본 적 있는 얼굴이라는 수준의 관계였다.
그랬던 것이 이렇게 변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미나토의 실연이었다. 첫사랑을 자각한 직후 당한 실연이었다.
상대가 동성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지도 못한 채 그저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던 미나토에게, 어느 날 나가시마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저 선배, 여자 좋아하니까 남자는 안 돼. 그리고 아무리 봐도 호소카와에게는 안 어울리니까 관둬.)
처음으로 미나토에게 걸었던 말부터가 가차 없었다.
나가시마의 설명은 짧았으나 명확했다. 괜히 헛물켜지 말고 단념하라는 의미에서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미나토가 주문한 칵테일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건배했다.
학교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대화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그 때문인지 근황 보고만으로도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미나토, 채용 시험은 어떻게 됐어?”
“발표는 이번 주말이야. 붙으면 그다음에는 하순에 2차 시험 봐야 돼.”
“그럼, 합격하면 고향에서 학교 선생 하는 건가.”
전국 각 지역별로 실행되는 채용 시험을 치는 데 미나토는 여기서 신칸센을 타고도 편도 두 시간 이상은 걸리는 고향을 골랐다. 할 수만 있다면 은사님과 같은 학교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떨어지면 여기서 지금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취업? 전부터 정직원으로 오라고 했지?”
재수 없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기에 미나토는 정정했다.
“그 전에 사립학교 쪽으로 알아볼 거야.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도 싫진 않지만 가능하면 학교가 좋아.”
“뭐, 맞고 안 맞고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 오기와라, 몸은 어때?”
직접적인 물음에 미나토는 무의식적으로 등을 쭉 폈다.
미나토가 그 사고 현장에 있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학교를 포함해 관계자를 제외하면 나가시마뿐이었다.
마지막 날, 전화기 너머로 무언가를 감지한 나가시마가 캐물어 대는 통에 속여 넘기지 못하고 자백한 결과였다.
그때는 미나토 자신도 한계였다. 오기와라의 무릎에 대한 진상을 막 알았던 참이라 자기 혼자서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건 완전히 불가항력이잖아. 그렇지만 미나토 너보고 그렇게 이해하라는 건 어렵겠지.)
이야기를 다 듣고 그렇게 말한 나가시마는, 미나토가 오기와라의 외출을 돕기 위해 렌터카를 수배했다는 것을 알고 질린 얼굴을 했다.
(그거 오늘 중으로 취소해. 그리고 내 차 써.)
그 후, 정기적으로 오기와라의 용태를 물어오는 이 친구는 서툴지만 나름대로 미나토를 배려해주었다. 그것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절실하게 전해지곤 했다.
“지금은 목발 짚고 장비를 단 채 걸어 다녀. 무릎을 굽히는 재활훈련도 하는데, 상당히 아픈가 봐. 본인은 경과도, 재활훈련도 순조롭다는 말만 하지만.”
“딴말은 전혀 안 해? 지루하다든가 못 논다는 투의 불평도? 분명 어느 정도 얼굴엔 나타나겠지.”
“입 밖으로도 얼굴에도 안 나와. 오늘은 약간 토라졌지만, 그건 나랑 좀 더 얘기하고 싶어서였던 모양이고. …아마 그런 일이 있어도 나한테는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거 같아.”
입원하기 전, 한 달 동안도 그랬다. 움직이기 불편할 뿐 아니라 아프기도 할 텐데, 오기와라는 좀처럼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다음의 수면 부족이나 아픈 모습도, 미나토가 보면서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재활훈련을 견학하고 싶다고 해도 스리슬쩍 거절하기만 해서 결국 몰래 보러 갔었다.
“내가 죄책감을 느낄 만한 말은 안 하고, 보이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거 같아. 무리하지 말고 불평이든 불만이든 말해 주면 좋을 텐데.”
한동안 입을 다물고 이쪽을 쳐다보던 나가시마가 뜸을 들이고 작게 불쑥 내뱉었다.
“미나토, 너 반했지? 그 오기와라한테.”
“!”
그 자리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긍정의 다른 표현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연타를 먹이듯 나가시마의 담담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역시 그런 게 아닌가 하긴 싶었지만. 그래서, 오기와라 반응은 어때? 가능성 있어?”
“…그런 거, 있을 리 없잖아.”
헤어질 때 본 오기와라의 표정을 떠올렸다.
짐짓 토라진 것처럼 어딘가 불쾌해 보였던 얼굴.
과외를 하면서부터 가끔 보게 된 나이에 맞는 모습이었다.
분명 보는 것만으로 좋다고 마음을 정했을 텐데.
시선 끝에 머무를 때면 가슴이 괴로워진다.
종종 심장이 죄어들 듯 그리 아프다고 느낄 때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기와라의 가까이에 있고 싶다고.
그러니 이미 오래전에 미나토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의미를 자각하고 말았다.
“외모도 성적도 좋고, 다치기 전까지는 기록을 보유한 육상부원이었던 아이야. 다섯 살이나 많은 남자 따위 관심도 없는 게 당연하잖아.”
“이야기를 못 해서 토라질 정도면 꽤 따르는 거 아냐?”
“과외 선생님으로서는. 하지만 나한테 그 아르바이트 얘기를 꺼낸 건 내가 죄책감으로 꼼짝도 못 한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인 거 같아.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머리도 좋은 아이야.”
제멋대로 어리광부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 오기와라의 말과 행동은 이성적이다.
그 증거로 그와 있으면서 미나토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오기와라의 오른쪽 무릎에 달린 장비나 목발, 걸음걸이를 눈으로 볼 때나 오늘처럼 문안객이 그 사고를 연상시킬 때뿐이었다.
턱을 괴고 듣던 나가시마가 미나토에게 슬쩍 시선을 향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거면 좀 더 다른 표현 방법이 어울릴 거 같은데. 그래서 미나토는 그 좋은 아이를 포기할 거야?”
“그 전에 기대하는 게 잘못이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이 닿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죄를 하는 것뿐이잖아. 내년 봄부터는 그것도 못하게 될 거고.”
“그건 그렇지. 고향에 취업한 미나토에게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사죄받는 건 좋은 아이에게 심적으로 부담될 거야.”
“―부담되지 않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어.”
불쑥 중얼거리는 미나토에게 나가시마는 노골적으로 질색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허무하다.”
대꾸하면서 내용물이 절반 남은 잔을 털어 넣더니 테이블 끝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한 잔 추가해달라고 말하더니 바로 본인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문자를 보내는 모양이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 나가시마가 말한 ‘허무하다’란 그 문장을 미나토는 조용히 입에 담아봤다. 확실히, 그 말 그대로라 스스로 웃음이 났다.
과거 선배에게 실연했을 때도 그렇고, 아무래도 미나토는 이루어지지 않는 상대만 마음에 두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추가 주문을 복창한 점원이 멀어졌을 때, 나가시마는 휴대전화를 닫았다. 그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화제가 졸업 논문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주문한 술과 음식이 나오고 얼마 뒤 나가시마에게 전화가 왔다. 그 자리에서 두세 마디 대화하는 것을 멍하니 듣고 있는데 “그럼 기다릴게.”라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요시하루 불렀어?”
미나토도 있는 이곳에 나가시마가 부를 사람은 아마 그의 연인일 것이다.
의미 없이 확인할 요량으로 물어본 미나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시마는 느닷없이 폭탄을 떨어트렸다.
“전에 말한 세 살 연상의 무역회사 직원도 올 거야. 평소처럼 자기소개만 부탁해.”
“…뭐?”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린 미나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시마는 여유롭게 닭튀김을 뜯었다.
“봄까지만 여기 있는 거면 오늘 밤 아니면 언제 만나겠어. 대학생활의 추억이 실연당한 선배와 짝사랑하는 학생만으로 끝나버린다니, 허무해서 허락할 수 없다.”
“딱히 너한테 허락받을 생각 없는데. 난 안 만난다고 했잖아?”
불쾌한 투로 말하는 미나토를 흘끗 쳐다보고 나가시마는 목을 움츠렸다.
“추석이나 그 직후에는 오기와라도 퇴원하고, 하순에는 2차 시험이잖아. 그 말은 또 바빠진다는 말이지. 그럼 지금 이럴 때 만나게 해둬야지.”
“만나게 해둬야지, 라니 나가시마.”
말을 하는 중간에 나가시마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미나토의 등 뒤로 시선을 주고는 손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
“요시하루, 여기!”
“네, 알겠습니다. 아, 미나토. 오랜만이야.”
퍼뜩 돌아보자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나가시마의 연인의 곱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이 단정한 용모는 너무 가지런한 탓인지 인형 같은 차가운 인상이 강해서, 정면에서 시선을 받으면 누구라도 심하게 주눅이 들곤 했다.
하지만 실상, 나가시마의 연인은 낯가림이 제법 심한 사람이었다. 인형같이 무뚝뚝하게 대하는 태도도 어디까지나 낯선 사람에게만 해당될 뿐, 일단 마음을 허락한 상대에게는 이렇게 꽃 같은 미소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사실 겉모습과는 정반대로 친절하고, 약간 오지랖이 넓은 면모까지 알 만큼 친해진 지금도 미나토는 그 격차가 주는 차이를 느낄 때가 많았다.
“요시하루,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럭저럭. 갑자기 미안한데 일행이 있어. 자리 좀 좁혀 앉아도 될까?”
요시하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미나토가 그 일행과 정면으로 시선을 부딪치자 피하지도 못한 채 곤혹스러워했다.
나가시마가 말한 세 살 연상의 무역회사 직원은 건장한 체구에 날카로운 외모의 남성이었다.
그런 온화한 미소를 띤 사람을 앞에 두고 마냥 곤란하다고만 느끼는 자신에게 조금 질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