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15/15)

외전 3.

-우리 강아지, 시험은 잘 봤어?

“…….”

정태주는 방금 고등 검정고시를 치고 나온 참이었다. 휴대폰 전원을 켜자마자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잘 봤지.”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아침 일찍부터 늦은 오후까지 시험을 치른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태주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눈을 굴렸다. 드문드문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 중에서 몇 명이 합격할까.

-점심 도시락 할머니가 싸 준다니까.

“아냐. 다음에 싸 줘.”

-응? 다음에?

되물은 할머니는 잠깐 침묵한 후 말했다.

-검정고시가 원래 어렵다고 그랬어.

운동장을 터덜터덜 걸으며 태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뭐 아주 떨어질 것 같지는 않은데. 마킹 실수한 것 같아서.”

-…무슨 킹? 아무튼 우리 손자는 잘했을 거야.

“일단 집에 가서 가채점해 봐야 돼.”

-그래, 그래. 고생했다, 태주야.

할머니의 음성을 들으며 태주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했다. 살면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워낙 기초도 없는 데다 혼자 공부하는 탓에 고득점은 기대도 안 했지만, 합격은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요원하게 됐다.

OMR 답안지를 작성하다가 실수를 해버려 급하게 답안지를 교체했고, 시간이 촉박해 제대로 마킹을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마지막 문제 두 개는 정말로 오답을 체크해 버렸다.

-내일 집에 와. 할머니가 갈비찜 하려고 고기 사놨어.

“내일?”

주말인데….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했는지 할머니는 빵이며 딸기며 태주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놨다고 했다.

-참, 형도 꼭 같이 데려와.

지난 설날, 할머니는 또 계범호에 대해 물었다. 태주는 그가 명절에 어디도 가지 않는다는 말을 했고, 그 뒤로 할머니는 계범호에게 밥을 먹이고 싶어 안달이었다.

“형한테 물어볼게.”

형이란 단어는 그런대로 입에 붙었다. 적어도 할머니와 아주머니 앞에서만큼은 뜸을 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 형한테 물어보고 이따 연락 줘.

태주는 전화를 끊었다. 눈앞에 무언가 팔랑이며 떨어져서 고개를 드니 벚꽃나무가 보였다. 운동장 근처의 벚꽃나무에는 벚꽃이 거의 다 떨어지고 초록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시험 날짜가 다가오며 벚꽃 구경도 제대로 못 했다. 물론 벚꽃 구경을 하고 봄 날씨를 즐겨 본 적도 딱히 없고, 벚꽃이 만개했을 때는 사실 대만에 있었지만.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정태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계범호는 아침에 일이 있어서 일찍부터 나갔는데, 오늘 저녁에 그가 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창피한 마음도 컸다. 계범호는 자신이 공부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많이 본 사람이 아닌가.

태주는 터덜터덜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계범호가 보낸 차를 발견하고는 곧장 뒷자리로 올랐다.

“안녕하… 으악!”

인사를 내뱉다 말고 정태주는 비명을 질렀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에 계범호가 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눈을 크게 뜬 태주를 계범호는 여상히 쳐다보았다.

“그래, 안녕.”

“오실 줄 몰랐어요. 저녁때나 들어오실 줄 알았는데.”

태주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차 문을 닫으며 말했다. 차가 출발하고, 예상보다 일찍 만난 남자에게 시험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지 고민을 막 시작해 볼 때였다. 계범호가 무심히 말했다.

“망쳤나 보네.”

그는 시험 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닌데요.”

계범호가 들은 척도 하지 않아 정태주는 괜히 발끈했다.

“진짜 아니에요.”

“아니야?”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정태주는 마주친 눈을 깜박이다가 주섬주섬 태블릿 PC를 꺼냈다. 조그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답 체크 좀 해볼게요.”

옆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태블릿 PC를 켜고 있는데, 큰 손이 미간을 문지르고 멀어졌다. 자신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다는 것은 그때 알았다.

태주는 차근차근 답을 맞춰 보았다. 전 과목을 전부 채점한 뒤에는 계산기로 평균 점수를 계산했다.

“씨발….”

무심코 욕설이 흘러나왔다. 관심 없는 듯하던 계범호가 몸을 기울여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정태주는 고개를 번쩍 들고 계범호를 쳐다보았다.

“저 합격할 것 같아요.”

계범호는 흘긋 화면에 시선을 줬다. 계산기의 답은 82점이었다. 평균 60점만 넘어도 합격이므로 여유 있는 점수였다.

“이 정도면 마킹 좀 실수해도 괜찮아요. 제가 마킹 실수 두 개 했거든요? 근데 두 개 다 원래 틀렸고, 오히려 하나는 잘못 체크해서 맞았어요.”

정태주는 흥분에 찬 말을 쏟아냈다. 눈을 반짝거리면서 뺨은 발갛게 물들인 채였다.

“저 이런 점수는 처음 받아 봐요. 시험 체질인가? 아, 맞아. 제가 존나 실전에 강하거든요.”

“…….”

멀리서 걸어올 때는 완전히 낙담한 표정이었던 주제에. 계범호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정태주의 양 뺨을 감쌌다. 붉은 뺨은 보이는 대로 살갗의 온도가 따뜻했다.

눈을 빛내며 조잘거리는 얼굴을 빤히 보다가 뺨을 힘주어 눌렀다. 가끔 그는 정태주의 얼굴을 터뜨려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아! 아파요.”

계범호는 아프다고 소리치는 정태주의 뺨을 마구 주물렀다.

정태주는 콧등을 찌푸리면서도 웃을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남자는 결국 고개를 숙여 태주에게 입을 맞췄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은 마트에 들렀다. 두툼한 삼겹살을 사고, 집에 라면이 떨어져서 라면도 종류별로 샀다. 운전기사는 퇴근을 했기 때문에 집으로 갈 때 운전은 계범호가 했다.

정태주는 조수석에 앉아서 오늘 봤던 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영어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쉬웠다거나 한국사가 조금 헷갈렸다는 등 계범호로서는 전혀 관심이 없을 정보를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계범호는 대꾸하지 않았으나 정태주는 꿋꿋이 자기 얘기를 했다. 무관심하게 보여도 남자가 듣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태주도 알았다.

남자는 심지어 태주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것들까지 전부 기억했다. 만약 자신이 그 정도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면 만점도 무리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고 태주는 종종 생각했다.

“아무튼 합격은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은 사람도 없는데 줄줄 늘어놓은 시험 후기는 식탁에 오늘 장 본 것들을 올려놓을 때 끝이 났다.

태주는 라면을 꺼내 찬장에 올리며 물었다.

“저녁 조금 일찍 먹을까요?”

“그래.”

소매 단추를 풀어 팔을 걷는 계범호를 정태주는 문득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처음엔 주방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던 사람이 이제는 주방에 있는 것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남자는 멀뚱히 선 태주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태주도 뒤따라 손을 씻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허기가 몰려왔다.

아주머니가 오시지 않는 주말에는 보통 밑반찬들을 먹거나, 라면, 배달 음식 등을 주로 먹는데, 가끔 고기를 사서 구워 먹을 때도 있었다.

계범호가 사놓은 것은 아니지만 이 집에는 보통 가정집에 있을 법한 것들은 대부분 있었고, 그중에는 전기 불판도 있었다. 그래서 태주가 아주머니께 말씀드려 고기를 준비해 놓았었고 둘이서 무척 잘 먹었다. 그 이후로는 계범호도 가끔 고기를 사 오곤 했다.

태주가 산더미같이 쌓인 삼겹살 한 줄을 들어 불판에 올려놓았다. 넓은 불판 위로 고기를 빼곡히 올려놓은 다음에야 집게를 내려놓았다. 치익,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삼겹살을 가만히 보다가 태주는 말했다.

“불판을 하나 더 살까요?”

계범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주는 오늘 밤에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며 “드릴까요?” 하니 응,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맥주를 건네자 커다란 손이 제 손을 스치며 맥주캔을 가져갔다.

시원하게 맥주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또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멍하게 고기에 시선을 주던 태주는 번뜩 할머니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아…. 아까 할머니 전화 왔는데요.”

“음.”

계범호가 집게로 고기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그도 배가 고픈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빤히 보는 시선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시험 끝났다고 내일 밥 먹으러 오래요.”

“그래, 갔다 와.”

선선한 대답에 태주는 조금 놀랐다.

보통 할머니 집에는 그가 없을 때 다녀온다. 주로 평일 낮이었다. 그래서 아까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오라고 했을 때 조금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범호는 언짢은 기색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미리 예상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태주는 불판에 시선을 주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편편한 미간과 내리깐 눈, 입술 근처의 흉터….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할머니가 같이 오래요.”

그 말에 계범호가 시선을 줬다.

“자꾸 밥 먹으러 오라고…. 근데 바쁘시니까.”

태주는 식탁 아래에서 발목을 꼬았다. 어색한 기분에 고기라도 뒤적이고 싶었으나 남자가 집게를 쥐고 있어 그것도 어렵게 됐다.

슬쩍 말을 꺼낸 적은 전에도 있었다. 그때 계범호는 ‘어르신 놀라신다.’ 하고 말했었다. 자기가 무섭게 생겼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이번에도 혼자 가게 되지 않을까. 계범호에게는 퍽 성가신 일이 아닌가.

그런데 계범호는 고민한 적 없던 것처럼 말했다.

“같이 가.”

“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남자는 나직이 말하고는 태연히 고기를 뒤적였다.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태주 앞으로 밀어놓고 다시 고기를 올리는 그를 보며 태주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

이상했다. 할머니와 계범호가 만난다니. 절대 만날 일 없는 평행 세계에 사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차를 타고 가면서도 태주는 계속 남자를 흘금거렸다. 운전을 하느라 정면을 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단단해 보였다. 태주는 주저하며 말을 건넸다.

“혹시… 불편하시면 같이 안 가셔도 돼요. 저 혼자만 갔다 와도 괜찮아요.”

계범호는 아무 말이 없다가 씹, 하고 낮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신호에 차가 멈추고, 그가 고개를 돌려 태주를 응시했다.

“뭘 그렇게 안절부절.”

“…….”

“내가 깽판이라도 칠까 봐.”

남자의 표정이 싸늘했다.

태주는 아, 하고 작게 입을 벌렸다. 자신은 단순히 할머니와 그가 만나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아 그랬던 것인데 그는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저는 그냥… 불편하실 것 같아서.”

“괜찮다고 했어, 태주야.”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목소리는 서늘했다. 태주는 남자가 다시 정면을 보는 것을 보며 휴대폰만 꾹 움켜쥐었다. 가슴께가 불편한 기분은 조금 전과 결이 달랐다.

침묵 속에서 차가 멈췄다. 할머니 집 대문이 보일 때까지도 대화는 없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할머니도 이상함을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망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 태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뚝. 계범호가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는 시선이 닿자마자 태주는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게 아니고요. 할머니랑… 처음 만나는 거고, 기분이 이상해서요.”

호칭을 생략하느라 말에 공백이 생겼다. 태주는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를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할머니는 이렇게 큰 사람 처음 볼걸요.

“…….”

계범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제 관자놀이를 문지르더니 낮은 말을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

걱정한 게 아닌데. 남자는 입술을 달싹이는 태주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다.

“손자 주셔서 고맙다고 들어가서 절이라도 할까.”

“네?”

충격으로 굳은 태주를 두고 그가 돌아섰다. 다급하게 쫓아가 올려다보니 웃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말은 농담인 듯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 나 왔어.”

태주는 인기척이 들리는 주방 쪽을 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꽃무늬 가리개를 젖히고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는 유난히 거대해 보였다.

“아이고, 세상에….”

인사 대신 감탄사를 먼저 흘린 것을 보면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작은 체구에 등이 굽은 할머니는 정수리가 계범호의 허리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 소인과 거인의 만남 같은 모습이었다.

“참. 내가 인사도 안 하고. 반가워요. 태주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안녕하십니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범호는 나직이 말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곤 자세를 바로 하지 않고 구부정하게 섰다.

“어휴, 내가 더 감사하죠. 근데 우리 태주도 키가 큰데, 이쪽은 천장에 머리가 닿겠어.”

덩치도 장사같이 좋고. 할머니는 바쁘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감탄했다. 계범호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태주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태도는 예상했던 대로였지만, 계범호는 조금 달랐다. 등을 구부린 채 선 남자를 보며 태주는 괜히 손끝만 괴롭혔다.

할머니는 손님을 현관에 너무 오래 세워 뒀다며 멋쩍어했다. 거실로 같이 들어가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할머니는 주방으로 향했다.

도울 일이 없냐며 계범호가 따라가려 했으나 할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계범호가 들어오기엔 주방이 좁다는 거였다. 게다가 그들의 도착 시간에 맞춰 밥상도 벌써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밥상은 계범호와 둘이서 들었다. 평소에도 태주가 오면 할머니가 이것저것 많이 차려 주시긴 하지만 오늘은 가짓수가 더 많았고, 양이 무시무시했다.

“할머니 나 일찍 부르지. 이걸 다 했어?”

“몇 개는 영주 할매가 준 거야.”

할머니는 많이 먹으라며 태주의 등을 두드리고는 계범호를 쳐다보았다.

“양이 많다고 들어서 밥 많이 펐는데, 모자라면 얘기해요.”

“예, 감사합니다.”

“얼큰한 국물 좋아한다길래 육개장 얼큰하게 끓여 봤어요. 맛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나물 반찬도 잘 먹는대서 몇 가지 했고.”

“…….”

계범호의 시선이 정태주에게 닿았다.

“왜요?”

“…아니. 잘 먹겠습니다, 어르신.”

고개를 저은 남자가 수저를 들었다.

할머니는 계범호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수북한 밥과 반찬을 다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태주는 손도 안 대는 반찬까지 잘 먹었기에 태주와 비교하며 아주 좋아했다.

“태주도 형처럼 잘 먹어야 몸이 좋아지지. 말라가지고는 힘도 못 써.”

“아, 나 별로 안 말랐어.”

계범호는 할머니와 태주의 대화를 들으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할머니의 시선이 계범호의 얼굴로 향했다.

태주는 조금 긴장했다. 계범호는 인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 않은가. 얼굴을 보고 그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할머니는 의외로 칭찬을 했다. 사내답게 아주 잘생겼다고,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많겠다고 그랬다. 그러면서 우리 태주 때문에 아가씨도 못 만나는 게 아니냐며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나서 계범호를 보니, 인상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옅게 웃는 얼굴은 할머니의 말대로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키도 크고, 몸도 좋으니까. 물론 키는 많이 크고, 몸은 너무 많이 좋지만.

“운동도 하는가?”

할머니가 계범호의 굵직한 팔뚝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며 물었다. 계범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할머니가 태주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 태주도 형 따라가서 운동하면 되겠네.”

“제가 데리고 다니겠습니다.”

“어이구, 그럼 고맙지.”

당사자의 의견은 전혀 물어보지 않는 그들을 보며 태주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형 진짜 일찍 일어난단 말이야. 난 그때 못 일어나, 할머니.”

할머니를 보며 말을 하는데 뺨에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계범호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하고 눈으로 묻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시선의 의미는 차츰 알게 되었다.

“계속 서울에서 지낼 거면 전세라도 알아봐야겠다.”

자신이 할머니에게 ‘형’이라고 그를 자연스럽게 칭할 때였다.

“나 형이랑 계속 같이 살 거야.”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조금 더 높은 밀도로 닿았다. 살짝 눈을 굴려 그를 보아도 이번엔 웃지도 않았다. 입을 다문 채 눈 깜박임도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형이 그렇게 좋아?”

“…….”

할머니의 말에 태주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쩐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계범호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얘가 괜히 민폐나 끼치고… 미안해서 어째요.”

“아닙니다. 저도 태주랑 지내는 거 좋아합니다.”

“혼자 살다가 남이랑 같이 살려면 영 불편할 텐데.”

“태주가 집안일을 도맡아 해줘서 오히려 편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주는 눈을 굴렸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은 아주머니이지 않은가. 계범호는 참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잘했다.

“참 미안해서….”

할머니가 난처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형이 정말 괜찮다고 했어. 신경 쓰지 마, 할머니.”

태주도 말을 거들자 할머니는 더 말할 수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과일을 내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주는 멀뚱히 앉아 있다가, 계범호가 일어나자 눈치를 살피며 따라 일어났다. 그의 지시하에 상을 주방으로 옮기고 뒷정리도 도왔다.

계범호와의 수직적인 관계가 이상해 보일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할머니는 형이 무섭긴 한가 보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

태주는 말문이 막혔다. 항상 예쁘다, 예쁘다 했으면서 할머니가 쌓인 게 좀 있던가. 하긴…. 어렸을 때는 할머니 말을 좀 안 듣긴 했다.

“제가 설거지하겠습니다.”

집에서도 설거지 안 하면서. 정태주는 냉장고에 기대선 채 계범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아우, 이제 거실 가서 앉아 있어요. 주방 좁아서 복잡해.”

키가 훤칠해서 설거지하기도 여간 불편하지 않겠어. 할머니는 고개를 꺾어 계범호를 올려다보며 또다시 감탄했다.

계범호는 할머니의 성화에 결국 거실로 갔고, 태주는 그를 따라가려다가 돌아서서 할머니의 등에 붙었다. 최근에 집에 오면 먹고 놀기만 하고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은 게 뒤늦게 양심에 찔린 탓이다.

“할머니. 나 뭐 할까?”

“작은 상 펴서 과일이랑 마실 것 가져가.”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철제 밥상을 폈다. 그런데 펴고 나서 보니 계범호 혼자 써도 작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큰 상으로 바꿨다. 상다리를 펴고 접느라 끼익, 끼익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러고는 할머니가 씻어놓은 딸기를 올리고 빵과 과자도 쟁반에 담아 올렸다. 냉장고에서는 오렌지 주스와 우유를 꺼냈다.

“주스 드실래요, 우유 드실래요?”

태주는 냉장고 문을 연 채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응?” 하고 돌아보았다. 계범호에게 물은 것인데 호칭이 없으니 헷갈렸다.

“할머니는 주스지?”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정태주는 홀로 조금 초조해졌다.

매번 호칭을 생략하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는가. 태주는 괜히 컵만 만지작거리다가 거실로 갔다. 좁은 공간이라 두 걸음이면 되었고, 그러므로 계범호는 지금의 상황도 파악한 것 같았다. 마룻바닥에 앉아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을 보니 그랬다.

태주는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의 시선이 제 입술에 닿았다. 목이 마르는 것 같아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혀… 엉.”

한 음절짜리 단어가 몇 음절쯤은 되게끔 늘어났다. 남들이 들으면 알아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주스 드실래요?”

가만히 보는 시선에 정태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계범호는 그제야 형, 하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가볍게 흔드는 손짓에 주춤거리며 다가가자 그가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뺨을 아플 정도로 세게 문질렀다.

“뭐든. 시끄럽게 하지 말고 가져와.”

상을 접었다 펴느라 났던 소음을 그도 들었나 보다.

팔목을 쥐었던 커다란 손은 엄지로 손목 안쪽을 지그시 문지르고 난 뒤 멀어졌다.

***

할머니는 또 음식을 잔뜩 싸 줬다.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항상 양손이 무거웠었는데, 오늘은 비교적 가벼웠다. 계범호와 나누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태주는 남자를 흘금 보았다. 그는 형이라고 불렀던 것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종종 자신에게 예의가 없다고 하는데,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나 보다.

사실 손님이라고 부르거나, 계범호라고 부르는 것만 아니면 호칭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것도 같았다. 혼자 고민하고 어색해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오늘은 저녁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점심을 거하게 먹고 간식까지 양껏 먹었다. 반찬통을 식탁에 올리며 뒤를 돌아본 태주는 흠칫 놀랐다.

“…….”

남자의 바지가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킷을 벗으니 묵직한 고간이 그대로 보이는 거였다.

계범호는 얼어붙은 태주의 팔목을 낚아채듯 붙잡고 끌어당겼다. 침실로 성큼성큼 향하는 그를 뒤따르며 태주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 언제부터….”

다소 우악스럽게 침대에 앉게 된 태주가 더듬더듬 물었다. 계범호는 태주의 티셔츠 밑단을 잡고 위로 벗겨내며 언제긴, 하고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는 태주의 바지와 속옷, 양말까지 전부 벗기고 나서 허리를 굽혔다. 눈을 맞춘 그가 태주의 뺨을 툭 쳤다.

“어르신 앞에서 추태 보일 뻔했잖아.”

그래놓고 지는 세우지도 않았네. 그가 아래를 흘긋거리며 중얼거렸다.

“태주야.”

“네?”

계범호는 눈을 깜박이는 얼굴에 시선을 둔 채 슬쩍 웃었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형이, 빨아 줄까.”

낮은 음성이 살갗을 간질였다. 입을 꾹 다물자 남자의 눈매가 깊이 휘었다.

곧 태주는 그와 침대 위에서 알몸으로 뒹굴게 되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남자의 위에 태주가 거꾸로 엎드려 서로의 성기를 빠는 자세가 됐다.

외설스러운 자세라 머뭇거렸으나 막상 그의 입에 좆이 들어가니 기분이 미치게 좋았다. 태주는 야릇한 숨을 내쉬며 남자의 허벅지에 이마를 댔다.

그러자 남자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 단단한 허벅지며 제 성기를 감싼 습하고 축축한 입 안도 함께 진동하는 바람에 발가락이 움찔 곱았다.

“태주야. 형 좆 터지겠다.”

낮은 음성이 귓속으로 느리게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자 뜨겁고 딱딱한 것이 귓가를 쿡, 찔렀다.

태주는 간질거리는 귀를 거칠게 문지르고는 남자의 좆을 입에 물었다. 동시에 자신의 성기도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쾌감이 안개처럼 번졌다.

남자는 태주가 제 입 속으로 좆을 깊이 찔러 넣어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엉덩이를 쥐어 터뜨릴 듯 움켜쥐며 더욱 끌어당겼다.

“하읍….”

“좋다고 끙끙거리면 단 줄 아나.”

제대로 안 해? 계범호는 태주의 애무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타박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태주와 비슷하게 사정했다.

그리고 태주가 사출한 정액을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싹싹 핥아먹었다. 그런 후에야 태주의 몸을 옆으로 내리며 바로 앉았다.

입 속으로 정액을 바로 받아 삼킨 계범호와 달리 정태주는 얼굴에 정액을 받은 채였다. 계범호는 야하게 풀어진 얼굴에 손을 뻗었다.

“삼켜야지.”

두 손가락으로 뺨에 묻은 정액을 긁어 태주의 입술 사이에 밀어 넣었다. 손가락에 닿는 촉감이 말랑했다. 할머니에게 조잘조잘 그의 얘기를 했을 입술이었다.

남자는 목울대를 움직이는 태주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온통 비린 맛이 났다. 지저분한 그 입맞춤을 조금 더 길게 이어 가려 그는 힘이 빠진 몸을 제 무릎에 앉히고 등을 끌어안았다.

정태주가 달큰한 신음을 흘리며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입맞춤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

그날 계범호는 다음에도 함께 오겠다고 할머니와 약속했다. 성가신데 그러겠다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으나 진심인 것 같았다.

자주 걸치고 있던 미소도 진심 같았다. 벽에 걸린 태주의 어릴 적 사진을 볼 때도 그랬다. 막 걷기 시작해 남자의 무릎에도 못 올 것 같은 사진 속 태주를 빤히 보며 그는 한껏 입꼬리를 휘었다.

‘이건 뭐, 들고 다닐 수도 있었겠네.’

중얼거리며 눈도 희번덕 빛냈다.

제 손주 예쁘고 잘생겼다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는 앨범까지 가져와 태주의 어릴 적 사진을 보여 줬다. 아역 배우 시키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는 말도 덧붙이며 사진 몇 장을 계범호에게 건넸다.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계범호와 함께 할머니 집에 갔던 기억은 어딘가 어색했다. 좁은 집이 꽉 찬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집이 가득 찬 것 같은 기분도 남자의 거대한 덩치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채워진 것이 집인지, 다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담뱃재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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