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시야는 온통 파랬다. 그 앞으로 크고 작은 물거품이 정신없이 흐트러졌다.
숨이 막혀 고개를 저어도 뒤통수를 누르는 억센 손길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외치듯 크게 벌린 입 속으로 차가운 물이 왈칵 넘어갔다. 기침을 쏟아내자 하얀 물거품이 피어올랐다.
더듬더듬 제 뒤통수를 누르는 굵직한 손목을 붙잡았다. 누르는 힘이 조금 약해졌을 때, 정태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허어억…!”
막혔던 숨통이 터지고 기침이 쉴 새 없이 나왔다. 눈을 비비며 헐떡이자 큰 손이 다가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태주는 시큰거리는 코 밑을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죽음의 문턱을 살짝 보여 준 사람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허억, 헉…. 저 방금 진심으로 죽을 뻔했어요.”
헉헉거리는 태주를 보며 계범호가 가볍게 말했다.
“또 덤벼 봐.”
“…….”
태주의 원통한 표정에 남자가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태주는 남자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쪽으로 파란 하늘과 낯선 도시의 풍경, 높이 솟은 빌딩이 보였다. 아주 높은 빌딩이라고 들었으나 이곳에서는 많이 높지 않아 보였다.
정태주는 지금 대만, 어느 호텔의 루프탑 수영장에 와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조금 실감이 안 났다.
제주도도 안 가봤는데 대만에 왔다. 처음으로 공항에 가 봤고, 비행기도 타봤으며, 이렇게 으리으리한 호텔도 처음 와 봤다.
체크인을 한 후 태주는 한참 호텔 방 안을 구경하다가 수영장으로 올라왔다. 그러고 한참 물놀이를 하는, 아니 물을 먹는 중이었다.
3월 말임에도 대만의 날씨는 따뜻했다. 하늘은 새파랬고, 수영장에서 놀아도 전혀 춥지 않았다.
“이제 나갈까.”
계범호가 태주의 코를 튕기며 말했다. 새빨개진 코가 퍽 우습다는 눈빛이었다.
“네. 저녁에 다시 오면 안 돼요? 야경이 예쁘대요.”
그래. 대답한 남자가 먼저 돌아섰다.
태주는 태평양 같은 등을 보며 반짝 눈을 빛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는 팔에 바짝 힘을 주고 계범호의 목덜미를 감아 뒤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물론 결과는,
“푸으으읍…!”
이전과 같았다.
계범호는 미동도 하지 않고 태주의 팔을 붙잡아 엎어치기를 했다. 촤르르 물이 퍼져 나가며 태주가 허우적거렸으나, 커다란 손은 도와주기는커녕 머리를 물속으로 꾹 눌렀다.
잠시 후 물 밖으로 나온 태주에게 남자가 여상히 물었다.
“더 놀래?”
“…아뇨.”
지친 대답에 피식 웃은 계범호가 먼저 수영장 밖으로 나갔다. 정태주는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를 뒤따랐다.
선베드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계범호를 보는 것이었다.
태주는 큼지막하게 굴곡이 진 등을 보며 자신이 입은 래시 가드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입게 된 것도 사연이 있었다.
계범호는 출장 일정을 어제 아침에 말해 줬다. 당연히 수영복은 생각도 못 했는데, 계범호를 보필하는 누군가가 그와 자신의 수영복까지 준비해 놓았다.
그래서 수영복 반바지만 걸치려고 했으나 남자는 태주의 가슴팍을 빤히 보다 이상한 말을 했다.
‘젖 다 보여 주려고?’
‘네?’
‘저거 입어.’
그가 턱짓한 곳에는 태주가 펼쳐 보고 다시 넣어 두었던 래시 가드가 놓여있었다. 이참에 계범호처럼 살을 좀 태워 볼 생각이었는데.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어 그에게도 입으라고 슬쩍 건넸다.
그러자 계범호는 별다른 말 없이 받아 입었다.
‘…그거 안 되겠네요.’
정정하자면, 입으려고 시도만 했다. 가장 큰 사이즈였는데도 작아서 들어가지조차 않았다. 계범호는 짜증스럽게 천 조각을 내팽개쳤고, 결국 태주만 래시 가드를 입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래시 가드를 입길 잘한 것 같았다. 자신이 말라서가 아니고, 계범호 옆에 서 있으면 누구든 볼품없어 보였을 것이다. 태주는 몸을 닦느라 굽힌 팔에 튀어나온 이두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계범호가 준 수건을 들고 멀뚱히 선 채였다.
“닦아 줘?”
남자가 물었을 때가 돼서야 움직였다. 아뇨, 대답하고는 푹 젖어 가라앉은 머리칼을 문질러 닦았다.
“내려가서 뭐 좀 먹자.”
“전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 안 고픈데요.”
“더 먹여 줄까.”
“…감자튀김 같은 거 먹을까요? 아니다, 대만 음식을 먹어야겠죠?”
슬쩍 비꼬던 정태주는 재빠르게 태도를 바꿨다. 수영장을 흘긋거리고는 그가 집어 던지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먼저 걸음을 옮기기까지 했다.
쫄딱 젖은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린 계범호는 성큼 걸어 정태주를 따라잡았다. 그는 동그란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들은 객실에 잠깐 들렀다가 라운지로 향했다. 간단한 음식을 테이블에 두고 먹으며 정태주는 이따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항에서부터 줄곧 그랬다.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하고, 반짝 뜬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딤섬에서 약간 이상한 맛 나요.”
콧등을 찌푸린 정태주가 접시에 남은 딤섬 몇 개를 줄지어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음식을 더 가져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라운지에 준비된 음식을 모조리 먹으려 드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계범호는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배를 채우고 난 뒤 정태주는 칵테일을 홀짝이며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고층에서 보는 도시의 전경이 멋졌다. 구름은 느리게 떠다녔고 파란 하늘은 색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높은 빌딩은 햇빛을 황금색으로 반사했다.
아주 이국적인 풍경은 아니었으나 태주의 시선은 창밖에 오래 머물렀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렸을 때, 남자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바쁘세요?”
태주는 계범호의 출장 일정이 내일부터라는 것을 떠올려내며 물었다.
“저녁에는 들어올 거야.”
“천천히 오세요.”
작년에 있었던 대만 출장에서 계범호는 한국에 빨리 돌아오기 위해 매우 바빴다. 자신 때문이었다. 이후에 얘기를 들어보니 식사 시간, 수면 시간도 아껴가며 빡빡하게 일정을 잡았었다고 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저 여기 있으니까.”
빤히 보는 시선에 태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계범호가 그렇지, 하고는 웃었다.
“출장지에 내가 너무 좋은 걸 가지고 왔네.”
테이블에 팔을 괸 남자가 태주를 바라보았다. 애정이 담긴 눈을 마주하기가 어색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두자, 큰 손이 다가와 뺨을 가볍게 문지르고 멀어졌다.
***
다음 날 새벽에 가까운 아침, 정태주는 벌떡 일어났다.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오던 계범호는 그대로 멈춘 채 태주를 돌아봤다.
“조식 시간 맞죠.”
휴대폰을 확인한 태주가 눈을 비비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그때 커다란 손에 뺨이 다소 거칠게 붙잡혔다.
“이 시간에 일어나지도 않는 게.”
새벽이라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남자는 태주의 뺨과 머리를 마구 문지르고는 침대 위로 밀듯이 놓아줬다. 폭, 침대에 눕게 된 정태주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암막 커튼을 쳐 주변은 어둑하고 침대는 폭신한데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계범호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정태주는 커튼을 걷었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 앞에 서서 태주는 바깥에 물끄러미 시선을 뒀다. 낯선 도시의 풍경에서 이국적인 부분을 찾아내듯 나무며, 건물이며 꼼꼼히 훑었다.
사실 바깥의 풍경보다 그들이 묵고 있는 이 스위트룸이 더 이국적이긴 했다. 다소 중후한 인테리어는 중화권 영화에서 볼 법한 분위기를 풍겼다.
태주는 어두운 자주색의 탁자에 놓인 생수를 마셨다. 어제 마시다 놓아둔 것이라 미지근했으나 목이 말라 전부 비웠다.
빈 생수병을 내려놓은 뒤 태주는 다른 쪽의 욕실로 갔다. 간단히 세수와 양치만 하고 나왔을 때 마침 계범호도 욕실에서 나왔다. 계범호는 출근 복장을 했고, 태주는 편안한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채 방을 나섰다.
조식은 아래층에서 먹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하얀 도자기가 전시된 복도를 지나며, 태주는 비행기를 타러 들어갈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조식을 제공하는 식당은 어제 갔던 라운지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자리를 안내받고 쭉 둘러보는 것에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양식, 중식, 한식 등 다양한 음식이 있었는데, 모두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새벽 같은 시간인데도 군침이 돌았다. 태주는 접시를 가득 채워 자리로 돌아왔다.
보이는 대로 음식은 전부 맛있었다. 하지만 입에 맞지 않는 것들이 더러 있어서 젓가락질이 점점 느려지게 됐다. 그래도 가져온 것이니 깨끗이 먹으려고 했는데, 맞은편에서 젓가락이 불쑥 들어와 향신료 냄새가 나는 볶음 고기를 가져갔다.
고개를 들자 계범호가 무심히 쳐다봤다.
“…….”
태주는 그다음 접시부터는 소시지와 파스타, 베이컨, 빵 등등 아는 음식을 위주로 담았다. 그래도 딤섬은 빼놓지 않았다.
“저녁은 나가서 먹어도 돼요?”
“응.”
“우육면이나 딤섬 맛집 찾아볼게요. 아, 그리고 야시장도 가 봐야 할 텐데. 망고 빙수도 먹어야 하고요.”
고민하는 듯한 정태주의 얼굴을 보며 계범호는 피식 웃었다.
“다 가.”
“진짜요?”
정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계범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너 호텔 방에 처박아 두려고 데려왔을까 봐.”
태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비스듬히 쳐다보고 나서야 “네. 설마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번뜩 생각이 나 물었다.
“어, 그럼 저 낮에 방 밖으로 나가도 돼요?”
“감금당하는 게 자연스럽네.”
부스스한 머리의 태주를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캐리어에 넣어 다니면 좋겠는데.”
…농담이겠지?
식사를 끝낸 후 객실로 올라가 멀쩡히 태주를 두고 떠난 것을 보면 농담이었던 듯했다. 정태주는 한쪽에 놓아둔 캐리어를 흘금 보고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쓱쓱 문질렀다.
할머니에게 조식 먹은 사진을 보내 준 뒤 태주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킹베드 한중간에 대자로 누워 발을 까딱이며 오늘 계획을 정리해 봤다.
저녁에 계범호가 돌아오기 전까지 수영을 실컷 해야겠다. 그리고 룸서비스도 시켜 먹을까. 계범호가 오면 갈 맛집도 미리 찾아봐야 하는데…….
“…좀, 자야겠다.”
눈꺼풀이 무거워 우선은 잠을 자기로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이 묘하게 어두웠다. 설마 저녁까지 잠을 잔 건가 해서 태주는 화들짝 놀라 휴대폰 홈 버튼을 눌렀다.
오후 12시 11분이었다.
정태주는 고개를 돌려 창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둑한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
기록적인 폭우였다.
그날 밤 계범호는 바짓단이 젖은 채 호텔 방으로 들어섰다. 날씨 때문에 일에도 차질이 생긴 듯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남자는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한 손을 뻗었다. 다가가니 그가 태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가 마저 통화를 하는 동안 태주는 그의 젖은 옷과 창밖을 번갈아 보았다.
‘뭐 좀 먹었어?’
태주가 룸서비스를 시켜 먹었다고 말하자 남자는 그래, 하고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밖에는 비 좀 약해지면 나가는 게 좋겠죠?’
‘그래. 도로가 엉망이야.’
바가지로 물을 끼얹기라도 하는 것 같은 창을 보며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나 비는 사흘째 잦아들지 않았다.
놀리듯 늦은 밤이나 새벽에 잠깐 그쳤다가 낮이 되면 폭우가 되었다. 우기도 아닌데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당연히 맛집도, 야시장도 못 가게 됐다. 지대가 낮은 곳에 있는 식당들은 문을 닫은 곳이 많아 비를 헤치고 나가는 것도 무의미했다.
줄곧 호텔에만 머무르며 혼자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교통 상황 때문에 계범호는 조금 더 일찍 나섰고, 같은 이유로 조금 늦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라운지에서 계범호를 기다렸다. 혼자 맥주를 마시며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멍하게 손을 움직였다. 짭조름한 햄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오물거리며 태주는 턱을 괬다. 비가 오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잡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 주말에는 검정고시 시험이 있다. 시험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 대만에 오게 됐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지난 몇 달간 태주는 제법 열심히 공부했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매일 인터넷 강의를 봤고, 문제집도 따로 사서 풀었다.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높은 점수는 아니지만 통과할 만한 점수를 받은 지도 꽤 됐다.
그래서 붙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챙겨 온 책을 한 번도 안 펼쳐봤는데, 지금이라도 방으로 올라가 공부를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오늘 공부한다고 무언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의 컨디션과 운이 문제일 것이다.
태주는 고졸이 되고 싶었다. 대학은 ‘가면 좋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해 본 것이지만 검정고시만큼은 꼭 따고 싶었다. 합격할 때까지 시험을 보고 싶은 게 지금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불합격할 때를 대비해 슬슬 밑밥을 깔아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는 모습을 어필하면…….
비웃겠지?
태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였다. 맞은편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린 정태주는 자리에 앉은 사람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빨리 오셨네요?”
“…….”
계범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턱을 매만졌다. 그는 태주 앞에 놓인 맥주와 햄 쪼가리 몇 개가 전부인 접시를 보고는 태주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수영장을 그리도 좋아하길래 피부가 좀 타겠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새하얗기만 했다. 그는 낮게 혀를 찼다.
“호텔 근처에 식당 몇 개 열었던데. 가 볼까.”
“…네?”
정태주는 반문하고는 창밖을 흘금 보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기세는 아니지만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커다란 장우산을 하나씩 쓴 채 호텔 밖으로 나왔다.
도착했던 날 차를 타고 온 것을 제외하면 태주는 호텔 밖으로 처음 나와 보는 것이었다. 한국의 봄, 초여름 기온과 비슷해 덥지는 않았으나 습도가 높아 꼭 물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텔 부지 밖으로 벗어났을 때는 실제로 물속을 걷긴 했다. 물웅덩이가 깊게 고인 곳이 많아 전부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샌들을 신은 발은 처음엔 조금 머뭇거리다가 한번 웅덩이에 빠진 후로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우산 위로 비가 잘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앞서가는 남자를 따라 걷다가, 정태주는 문득 그의 발에 시선을 줬다. 샌들을 신은 자신과 달리 남자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게다가 바지도 긴바지라 벌써 바짓단이 진하게 젖었다.
태주는 그것을 보느라 남자가 멈춰 서는 것도 몰랐다. 우산 두 개가 부딪히고 계범호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들어가자.”
정태주는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노란 바탕에 붉은 한자로 된 간판이 보였다. 조금 녹이 슬어 위쪽에 검은 얼룩이 있었고 한자 역시 조금 지워졌다.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이 곧장 시선을 줬다. 계범호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주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눈을 굴렸다.
테이블은 열 개가 되지 않았고, 벽에 걸린 오래된 메뉴판에는 메뉴가 빼곡했다. 취급하는 메뉴가 많은 것 같았으나 전부 한자라 태주가 읽을 수는 없었다. 테이블에 놓인 코팅된 메뉴판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나 있다던 한국어가 보이지 않아 조금 난감하던 찰나에 메뉴판을 훑어보던 계범호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정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범호가 중국어로 주문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잘 모르긴 하지만, 어투도 자연스러웠던 것 같았다.
태주는 입을 다문 채 눈만 굴리고 있다가 주인이 주방으로 가고 나서야 그에게 물었다.
“중국인이세요?”
“…….”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이 돌아왔다.
아, 일 때문에 하시겠구나. 정태주는 중얼거리다 말고 문득 킁킁거렸다. 식당 안에 향신료 냄새가 가득했다. 깊이 숨을 들이쉬자 열린 문으로 들어온 비 냄새가 함께 콧속으로 스몄다.
태주는 문 근처에 찍힌 검은 발자국들을 보며 무심코 발을 움직였다. 신발 밑창에 묻은 흙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다가 실수로 계범호의 발을 차게 되어 “죄송….” 하고는 다리를 끌어왔다. 흙탕물로 젖은 발이 찝찝했지만 어차피 돌아가는 길에도 젖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맥주가 먼저 나왔고, 맥주를 반병쯤 마셨을 때부터는 음식이 나왔다. 4인용 테이블은 이내 음식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태주는 자신의 입에 국물 요리가 안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향이 강한 데다 고수가 듬뿍 올라간 완탕면은 한 젓가락을 먹은 뒤 맥주를 여러 번 마셨다. 그래도 딤섬과 볶음밥, 땅콩 소스가 올라간 비빔면은 입에 맞아 자꾸 손이 갔다.
계범호는 태주가 먹어 볼 생각도 안 하는 야채볶음을 제 쪽으로 치우고 접시를 바꿔 줬다. 태주는 그가 앞에 놓아준 춘권 튀김을 한입 베어 물고 맥주병을 들었다. 무게가 가벼워 살짝 흔들어 보았을 때, 계범호가 손을 들었다.
금방 차가운 맥주가 테이블에 놓였다. 태주는 물방울이 맺힌 맥주병을 만지작거리다가 계범호의 젖은 바짓단을 생각했다.
“내일은 비가 그쳐야 할 텐데.”
남자는 바깥에 시선을 주며 말했고,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주에게 물끄러미 시선이 닿았다.
“괜히 데려왔다는 말은 못 하겠고.”
계범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출장지에 태주를 데려온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비가 와서 아쉽겠어.”
자잘한 빗소리에 얹어진 남자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되게 재밌는데요?”
남자가 눈썹을 올리는 모습을 보며 태주가 말을 이었다.
“수영장 못 쓰는 건 조금 아쉽긴 한데, 첫날에 실컷 했고요. 다른 것도 많잖아요. 밖에 안 나가도 재밌어요.”
“그래?”
“네.”
되물은 말에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말똥말똥한 얼굴을 보며 계범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태주를 너무 얕봤네.”
계범호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태주의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거친 손길 때문인지, 맥주 때문인지. 흰 뺨이 조금 붉어졌다. 계범호는 그것에 빤히 시선을 두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다 먹었지.”
“예에. 잘 먹었습니다.”
응. 남자가 곧장 일어섰다. 텅 빈 공간에 드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울리고, 흙 묻은 발걸음 소리 몇 개가 이어졌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이상하게도 조금 더 멀게 느껴졌다. 내리는 빗줄기는 가늘어졌고, 발은 이미 젖어 물웅덩이를 찰박거리며 밟는데도 말이다.
마침내 호텔 방에 도착했을 때, 계범호는 말했다.
“같이 씻어.”
“…….”
“욕실에서 안 할 거니까, 와.”
태주가 머뭇거리자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태주로서는 신뢰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전적이 몇 번 있지 않은가.
먼저 옷을 벗고 샤워 부스로 들어간 남자는 한참 만에 들어온 태주가 괘씸한 듯 얼굴에 물을 뿌렸다. 푸으…. 정태주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입 안에 들어온 물을 뱉어냈다. 수영장의 공포가 다시금 생각났다.
“태주.”
나직이 부른 계범호가 가까이에서 시선을 줬다. 정태주는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샤워기에서 느리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빗소리를 닮았다.
“재밌다면서 한숨은 왜 쉬었어?”
“제가요?”
태주가 기억해내지 못하자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이내 그는 혀를 차고 태주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살이 맞닿자 짙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아래를 살피며 남자의 얼굴에 차츰 웃음기가 어렸다.
“같이 씻자니까 벌레 씹은 표정을 짓더니.”
“…그렇게까지는,”
“이건 뭐 언제부터 세워놓은 거야.”
커다란 손이 태주의 성기를 덥석 쥐고 주물렀다. 태주가 움찔 허리를 굽히며 손목을 밀어냈으나 그는 좋을 대로 주무르고 난 다음에야 손을 거뒀다. 태주의 아래쪽에 더욱 피가 몰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범호는 그런 정태주를 비웃고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몸을 씻었다. 자기 것도 마찬가지로 세운 채였다.
태주도 남자를 비웃어 주고 싶었으나 아래 사정이 곤란했다. 크고 흉한 생김새의 성기를 보면 위협을 느낄 만도 한데 제 것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 것이다.
자연스레 몸을 씻는 손길은 바빠졌다. 태주는 머리에 샴푸를 문질러 대충 헹구고는 몸도 후다닥 닦았다.
“저 먼저 나갈게요.”
그러고 돌아서는데 굵직한 팔이 어깨를 휘감았다. 고개를 돌리자 계범호가 목뒤를 훔치고 손을 보여 줬다. 흰 거품이 묻어 있었다.
태주는 멋쩍게 웃으며 남자의 손가락을 붙잡아 거품을 닦아냈다. 계범호는 피식 웃고는 태주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쪽 가볍게 부딪던 입맞춤은 스치듯 입술이 닿자 금방 농밀해졌다.
태주도 남자도, 기다렸다는 듯 서로의 입술을 빨고 핥았다. 혀끝끼리 비비고 맛보다가 잠깐 멀어질 때도 입술 끝을 머금었다.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풀고 나갈까.”
계범호가 물기로 젖은 엉덩이를 부드럽게 쥐며 말했다. 가쁘게 호흡하고 있던 정태주는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에 물방울이 고인 것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남자는 그 위로 입술을 댔다. 그대로 뺨, 광대뼈 관자놀이, 귓가. 가볍게 입을 맞추며 음? 하고 대답을 보챘다.
“넣지는 말고요.”
“응.”
“막 너무 심하게 하지 말고 그냥 풀어 주기만요.”
응. 목을 울려 대답하며 남자는 습한 곳을 더듬었다. 촘촘한 주름을 세듯 손톱 끝으로 만지다가 다른 손을 선반으로 뻗었다. 샴푼지 바디 워신지, 손에 집히는 대로 잡아 엉덩이골 사이로 들이붓고 넓게 발랐다.
그러고 천천히 중지를 밀어 넣자 정태주가 몸을 바짝 붙여왔다. 가볍게 휘저으니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남자는 신중을 기했다. 안 그럴 때가 있겠느냐만은 오늘은 흥분감이 컸고, 이후에 과격하게 움직여도 무리가 되지 않게끔 잘 풀어두는 것이 좋았다.
거칠게 관계를 한 뒤면 정태주는 종종 열이 나곤 했다. 조금 피곤해하고 멍하게 구는 게 전부이지만, 여기선 그런 상황도 피하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든 탓이다.
정태주는 여권을 만들고 난 뒤 그에게 몇 번 물었다. ‘대만 출장 안 가세요?’ ‘출장 계획은 없어요?’ 하고.
출장이 놀러 가는 건 줄 아는 건지. 안 그런 척 은근슬쩍 묻는 것이 우스워, 그는 출장을 가게 된다면 취미에도 없는 관광을 해보려 했다.
그렇게 출장을 기대하던 녀석이라, 갑작스러운 폭우는 내내 계범호의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으응….”
정태주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한숨 같은 소리를 냈다.
“마음에 들어?”
동그란 뒤통수가 작게 끄덕이는 것을 보자 웃음이 입술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계범호는 고개를 돌려 젖은 옆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얼굴을 묻은 채라 뺨이 보이지 않는 게 아쉬웠다. 발갛게 달아올라 딱 먹음직스러워 보일 텐데.
그러나 그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욕실에서는 간간이 귓바퀴를 핥는 것으로 참다가, 침대로 간 뒤에야 뺨을 덥석 깨물었다.
정태주의 살갗에서는 단맛이 난다. 흰 살결을 물고 빨아 붉게 만드는 것도 좋지만, 이미 붉게 달아오른 살결은 따뜻하고 말랑해 씹는 질감이 좋았다.
“자국 남으면 어떡해요. 사람들이 다 쳐다볼 텐데….”
“같이 사는 새끼한테 물렸다고 그래.”
무성의하게 대답한 계범호는 돌연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다 쳐다보면 안 되지.”
남자가 조금 거친 손길로 태주의 아래턱을 붙잡았다. 젖은 머리칼이 달라붙은 고른 이마부터 눈썹, 옅게 쌍꺼풀이 진 눈, 붉어진 뺨, 통통하게 부은 입술까지 차례로 보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태주 내일은 침대에만 있을래?”
정태주가 네,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계범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 말을 왜 이렇게 잘 들어.”
“…그럼 안 들어요?”
태주는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꿋꿋이 태주 탓을 했다. 이러니까 내가 정신이 팔리지. 짓씹듯 중얼거리며 뺨을 아프게 깨물었다.
목을 움츠리면서도 정태주는 남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내면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무수한 경험으로 알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두툼한 목덜미를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착하네.”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태주의 뺨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흥분으로 눈빛이 번득인 것을 보면 이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입을 맞추며 계범호가 태주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침대 아래로 종아리가 내려간 채 등만 누워있었던 태주의 발바닥이 바닥에 닿았다.
태주가 완전히 일어서자 남자는 태주를 돌려세우고 침대에 손을 짚게끔 했다. 그리고 곧장 성기를 들이밀었다.
“엉덩이 들어.”
찰싹. 가볍게 엉덩이 아래쪽을 치는 손길에 태주는 자세를 고쳤다. 삽입에 대한 긴장과 기대로 조금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계범호는 한 손으로 태주의 허리를 누른 채 그가 공들여 풀어놓은 구멍으로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하아.”
태주의 등 뒤에서 나직한 한숨이 들렸다. 좁은 내벽이 벌어지는 뻐근함과 거대한 살덩이를 받아들이는 압박감까지 더해져 태주는 눈을 감았다.
툭, 성기가 가볍게 내벽을 찔렀다. 몸이 앞으로 밀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뺨에 부드러운 이불이 쓸렸다. 아래쪽에서 차오르는 성감과 달리 보송하고 폭신한 감촉이었다.
정태주는 입술을 핥으며 배 아래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잔뜩 부푼 성기를 쥐고 문지르니 아찔한 쾌감이 번졌다.
“하으….”
무심코 등을 구부리자 엉덩이에 따가운 통증이 일었다.
허리 들지 마. 낮게 주의를 준 그가 태주의 골반을 꽉 움켜쥐었다.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지며 안쪽에서 피어오른 쾌감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태주는 제 성기를 만질 여유도 없이 시트만 움켜쥐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큰 손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때리는데, 흥분으로 힘 조절을 못 하는 건지 매우 아팠기 때문에 자세를 잘 잡아야 했다.
“아흐윽!”
전립선을 그대로 내리찍는 성기에 비명을 닮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태주는 침대 위로 완전히 엎어졌다. 발끝이 남자의 단단한 정강이를 스치며 허공에 떴다. 뒤에서 낮은 욕설이 들려왔다.
계범호는 제 좆을 뱉어낸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가 골반을 붙잡고 그대로 밀어 올렸다. 정태주는 침대 끝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바깥으로 삐죽 나온 엉덩이는 사이가 벌어져 붉어진 구멍을 내보였다. 계범호는 엄지로 구멍 위를 문지르며 조급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침대에 한 손을 짚고 다시 좆을 쑤셔 넣었다. 높이가 맞지 않아 조금 더 멀리 손을 짚어 몸을 낮추고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침대만 짚고 있는 손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시트를 쥔 정태주의 손을 탐욕스럽게 낚아채 손바닥 아래에 두었다.
“허억, 하으읏, 으…. 아, 좆 만져 주세요.”
엎드린 채 들썩이던 정태주가 말했다.
정태주는 요즘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하는 일이 늘었다. 그럴 때마다 계범호는 혈관에 쇳조각이 흐르듯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만져 줘, 태주야.”
그는 태주의 등으로 가슴팍을 붙이며 다정히 속삭였다.
커다란 손이 태주의 배와 허벅지 사이로 버겁게 들어갔다. 이렇게? 통통한 성기를 강하게 압박하며 문지르자 내벽이 바짝 조여왔다.
“읏, 좋아요. 아… 씨발.”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달았다.
계범호는 침대 시트에 반쯤 파묻은 정태주의 얼굴에 입을 맞추기 위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혔다. 한 손으로 태주의 손과 침대를 겹쳐 짚고 다른 손은 태주의 배 아래에 둔 매우 불편한 자세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태주의 뺨이며 귓가며 쉴 새 없이 입술을 내렸다.
정태주가 둥글게 만 등을 움찔 굽히며 제 손에 사정했을 때는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했다는 듯 목뒤를 핥고 발갛게 부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
태주는 눈을 떴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시간은 벌써 열 시 반이었다.
“아, 내 조식….”
탄식하다 말고 태주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잔뜩 쉰 목소리가 나온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발을 디디고 일어서자 심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어제 침대에서 계속 체위를 바꾸다가 나중엔 거실까지 나갔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넓게 펼쳐진 야경을 보면서 태주는 어쩐지 더욱 흥분했었다. 계범호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누가 봐도 좋다 이거지.’ 했다.
‘저 밖에서 어떻게 여기가 보여요. 높이가 안 맞, 윽…!’
남자는 태주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허리를 끌어당기며 좆을 처박았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나온 태주는 곧장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어제, 거실 바닥에 맑은 액체를 싸는 실수를 했었다. 그런데 젖은 곳이 없이 멀끔한 걸 보니 계범호가 닦은 것 같았다.
‘몇 살인데 오줌을 못 가려, 태주야.’
계범호는 바닥에 고인 액체를 보며 태주를 놀렸었다. 그래놓고 더 싸라는 듯 태주의 성기 주무르며 내벽을 짓눌렀다.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쳐도 물러나지 않다가 태주가 허리를 뒤틀며 액체를 마저 싸고 난 다음에야 물러났다.
기함할 만한 일은 그때 일어났다. 끄트머리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을 빤히 보던 그가 불쑥 허리를 굽힌 것이다. 그는 혀끝으로 그것을 핥고는 이내 선단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아댔다.
“…미친.”
정태주는 눈 위로 손바닥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계범호는 진짜 좀 이상하다. 자기 정액을 먹이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먹는 건 더 이상한 것 같았다. 피하려고 해도 커다란 손으로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 아랫배에 묻은 것까지 싹싹 핥았다.
미간을 찌푸린 태주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집어 테이블 위로 다시 올려놓았다. 어제 난리 통에 과일 바구니가 엎어졌던 것도 같았다.
태주는 다시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잠깐 그러고 있다가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베개 옆에서 찾은 휴대폰을 쥐고 태주는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 오늘 진짜 방에만 있어요?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메시지를 보내면 남자에게선 답장 대신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열 안 나면 나가.
낮은 목소리를 들으니, 새벽에 그가 제 이마를 짚어 보았던 것이 돌연 떠올랐다.
“열 안 나요.”
-그래. 언제 일어났어?
“방금요. 조식 놓쳤어요.”
아쉽다는 듯 말하자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밥 먹어.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와의 통화는 대체로 간결한 편이었다.
휴대폰을 머리 옆으로 툭 떨어뜨린 채 태주는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피곤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잠깐 잠을 잔 뒤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태주는 샤워를 하고 나와 창가로 다가갔다. 바깥은 지난 사흘과 달리 어둡지 않았다. 내리는 빗줄기도 가늘어져 자세히 보아야 보였다.
오후까지도 그런 날씨가 이어졌고, 계범호는 해가 지기 전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태주를 보자마자 말했다. 야시장 가자, 하고.
태주는 욱신거리던 근육통도 잊고 신이 나서 캐리어를 뒤졌다. 남자는 그런 태주의 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고는 샤워를 하고 나왔다.
반팔에 반바지, 샌들 차림인 태주와 달리 계범호는 셔츠에 긴바지, 구두까지 신었다. 야시장에 어울리는 차림은 아니었다.
“다음엔 꼭 편한 옷 챙겨 오세요. 그리고 신발도 샌들이 편해요. 귀찮으시면 제가 사이즈 맞춰서 주문할까요?”
남자는 피식 웃으며 그래, 했다. 그런 뒤 가만히 보는 눈빛이 의아해 태주는 물었다.
“왜요?”
“아니. 나가자.”
남자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야시장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호텔 바깥에 택시가 줄지어 서 있었으므로 붙잡아 타는 것까지는 쉬웠지만, 퇴근 시간이라 차가 조금 막혔다.
그래도 차 안에서 하는 길거리 구경도 재밌었다. 도로에 오토바이가 수많은 것도 신기했고, 가게들의 간판도 볼만했다.
야시장 입구에 내린 뒤, 태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끼긴 했으나 사이사이마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비 이제 안 올 것 같아요.”
“그러네.”
태주의 눈이 빛났다. 코끝에 벌써 맛있는 냄새가 스쳐 태주는 곧장 걸음을 뗐다.
야시장은 듣던 대로 맛있는 음식이 많았다. 계범호는 태주가 맛있겠다, 하고 중얼거리기만 해도 멈춰 서서 음식을 샀고, 태주와 남자의 손에는 음식이 끊이질 않았다. 닭튀김과 치즈스테이크, 만두, 오징어튀김…. 목이 마를 때쯤엔 버블티도 마셨다.
“이거 호텔에서 먹은 것보다 맛있어요.”
호텔에서 먹은 밀크티는 홍차 맛이 진해 입에 맞지 않았는데 이것은 달콤해 입에 딱 맞았다. 그러니 계범호에게는 좀 달았던지 그는 한 모금을 마시곤 더 입에 대지 않았고, 태주가 그의 것까지 전부 마셨다. 반대로 곱창국수는 태주의 입에는 맞지 않아서 계범호가 다 먹었다.
적당히 배가 차고 나니 달달한 것이 먹고 싶어졌다. 빙수를 먹으면 좋을 것 같아 태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해가 완전히 진 후라 야시장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조금 일찍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아니었더라면 음식을 살 때마다 오래 줄을 서야 했을 것이다.
“빙수는 그냥 나가서 사 먹을까요?”
태주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가 텅 빈 옆자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급하게 주변을 살피니 수많은 인파 위로 불쑥 솟은 뒤통수가 보였다.
태주는 그를 부르려 입을 벌렸다가 멈칫했다.
할머니에게는 그를 형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막상 그렇게 불러본 적은 없었고, 그 호칭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도 않았다. 그래서 태주는 여전히 호칭을 생략하는 중이었다.
계범호는 주어 없는 말을 퍽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손님’이라는 단어가 무심코 흘러나왔을 때는 가차 없이 엉덩이를 때렸었다.
처음엔 그가 자신을 발로 찬 것인 줄 알았다. 둔탁한 통증에 무릎까지 꺾였는데 손바닥이라곤 생각 못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호칭을 정하지 않은 것에 이런 식으로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태주는 남자를 쫓아 빠르게 걸었다. 고작 몇 걸음 앞섰을 뿐인데 인파를 헤치고 나가는 것이 어려워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정태주는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가 단전에 힘을 줬다. 금방 우렁찬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계범호!”
곧장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그사이에 태주는 바쁘게 걸음을 움직였고, 뒤를 돌아본 채 가만히 저를 쳐다보는 눈빛을 뒤늦게 발견했다.
“…….”
걸음을 멈춘 태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남자가 헛웃음을 짓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다가오는 넓은 보폭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아주 맞먹으려고 드네.”
계범호가 태주의 목덜미를 한 손에 쥐었다. 태주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린 채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계속 불렀는데 안 보시길래요…… 예. 죄송합니다.”
급조한 변명을 포기하자 남자가 목덜미를 꽈악 움켜쥐었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고 태주의 어깨에 무거운 팔을 걸치며 말했다.
“이제 내가 안 무섭지.”
존나 무서웠다.
질겁하며 고개를 젓는 태주에게 남자는 물끄러미 시선을 줬다. 아주 서늘하지는 않은 온도임에도 태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자 남자는 피식 웃더니 태주의 뺨을 세게 꼬집었다. 혼난다. 여상히 말하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자. 또 뭐 먹을까.”
커다란 손이 태주의 어깨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태주는 말없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매화에서 도망쳤었고, 금방 붙잡혔고,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공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태주는 제게 닿은 시선을 알아차렸다. 괜히 눈을 비비며 태주는 말했다.
“저 빙수 먹고 싶은데 여긴 사람도 많고. 그냥 나가서 사 먹을까요?”
“그래. 슬슬 저녁도 먹어야지.”
배가 불렀으나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를 잠깐 바라보다가 티셔츠를 가볍게 털어 주었다. 튀김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던 듯했다.
그런 뒤 혼잡한 인파를 제치며 걸었다.
이번엔 그와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제 어깨를 감싼 채 걸었기 때문이었다. 걷는 것도 훨씬 수월했다. 그는 사람들 틈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만 그에게 밀려 휘청거렸다. 밀려난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가 계범호를 보고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거두곤 했다.
계범호는 인파를 지나는 동안 비슷한 말을 반복했는데, 태주는 사실 그게 욕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례합니다. 미안합니다’ 같은 말이었다. 그는 그런 말도 무섭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제 좀 낫네.”
야시장을 완전히 빠져나온 뒤 그가 말했다. 태주 역시 동의했다.
“사람 이렇게 많은 거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 말에 계범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만 출장을 자주 다녔으면서 야시장은 처음 온다고 했다. 곱창국수도, 버블티도 처음 먹는단다.
그 말은 묘하게 태주를 들뜨게 했다. 여태껏 자신만 처음인 일이 많지 않았는가. 나이가 열 살 넘게 차이 나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억울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없으면 그가 경험할 일 없는 일들이 이상하게도 기분 좋았다.
“다음에는 출장 말고 여행으로 오자.”
망고빙수를 먹다가 남자는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금방 숟가락을 내려놓은 뒤, 태주만 열심히 먹고 있을 때였다.
“다른 나라도 좋고.”
“여행 좋아하세요?”
계범호는 의외라는 듯 묻는 정태주를 물끄러미 보다가 정태주가 자기 앞에 놓고 퍼먹고 있는 설탕 덩어리에 시선을 줬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안 해봤는데, 재밌네.”
“저도요.”
그 말에 남자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는 태주가 저도요, 하고 그와 저를 묶어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의 감정을 알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도 저에게도 처음인 경험. 처음 먹는 음식, 처음 오는 장소, 첫 여행….
“내일 저녁은 뭐 먹을래.”
“제가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돼요?”
“뭘 물어.”
계범호가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며 문득 생각해 보니, 처음이란 것이 새로울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와 자신은 애초부터 서로에게 처음이었다. 많은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