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계범호의 아버지는 깡패였다. 보고 배운 게 그것이라 그도 일찍부터 깡패 짓을 시작했다.
첫 일터는 아버지가 몸담았던 도박장이었다. 여느 막내가 그렇듯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지들을 쫓아내는 일도 하게 됐다. 미성년자였지만 웬만한 성인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아 누군가를 위협할 정도의 외양은 되었던 것이다.
계범호는 실제로 나이를 속이기도 했다. 스물, 그것을 제 나이로 정했다.
아버지에게 누군가 제 나이를 물으면 그는 ‘열일곱인가… 열아홉인가.’ 하는 식으로 성의 없는 대답을 내놓았으므로 계범호의 나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란 작자는 워낙 무심한 사람이었다. 도박장이며 술집이며 쏘다니기 바빠 미성년인 아들을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가끔 집에 들어온 그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면 뒤통수를 한 대 치고는 지갑에서 돈뭉치를 꺼내 주는 게 다였다.
‘아버지 따라 일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했을 때, 자기가 일하는 도박장에 넣어 준 것이 가장 신경을 써 준 일이 아닐까 싶다. 위아래로 훑어보며 언제 이렇게 컸냐고 물은 것으로 보아 이제 한 사람 몫은 하겠다고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계범호가 스물이 되기 전에 죽었다. 배때기에 칼이 꽂혀 죽는, 깡패다운 말로였다.
텅 빈 장례식장은 계범호 홀로 지켰다. 가족도 없고, 생전에 아는 사람이야 술집 여자들, 도박꾼들이 전부라 찾아오는 사람도 몇 없었다.
거기다 그때 하필 조직 간부 하나가 같이 죽었다. 조직에서는 말단 조직원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조직원들도 전부 그쪽으로 가 3일 밤낮을 새웠다.
계범호는 그것이 퍽 비참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이왕에 깡패 짓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술, 도박, 여자에 빠져 살았으니 그 꼴이 난 것이다.
어린 날의 계범호는 다짐했다.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그렇게 죽지는 않겠다고.
이후의 삶은 그런대로 순조로웠다.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어린놈을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계범호는 차근차근 위로 올라갔다. 지난 일이라 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운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니, 그는 애초 목표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와 있었다.
‘네 뜻이 정 그러면 우선 전무 자리만 맡아봐라.’
번듯한 자리 하나도 맡았다. 양지의 명함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그를 따르는 녀석들이 많았다. 제 장례식에 참석할 그들에게는 섭섭지 않게 몫을 챙겨 주는 것이 도리였다.
기업 회장이며 정치인들이며 높으신 분들과 어울리면서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매화에 꾸준히 걸음 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천박한 분위기가 자신이 속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상기시켜 주니까. 제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던 것이다.
삶은 무미건조했다. 그다지 열정이라고 말할 것도, 정을 둘 것도 없었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에 정태주를 만났다.
***
정태주는 퍽 재밌는 놈이었다.
생각 없이 해맑아 보여 눈길이 갔으나 품은 독기는 누구보다 강했다. 얼굴 표정 하나 제대로 감추질 못하면서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는 것이 마음을 동하게 했다.
그래, 속궁합. 그것도 끝내주게 좋았다. 때마다 분출해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성욕을 무섭게 돋우고 어린애처럼 몰두하게 했다.
“바로 하실 거죠…?”
침대에 엎드린 채 자세를 잡아놓고, 정태주가 뒤를 힐끔거렸다. 하얀 얼굴은 긴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러면서 무슨 몸을 팔겠다고. 머리는 저 꼴을 하고, 애교도 없는 게. 그가 아니면 이건 누가 사 주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따라 얼었네.”
계범호는 정태주의 하얀 엉덩이를 주무르며 모르는 척 말했다. 녀석이 긴장한 이유야 알고 있었다. 일전에 이야기한 대로 뒤쪽에 젤만 밀어 넣고 왔기에 그런 것일 테다.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가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던 모양이지.
“아니에요….”
힘없이 대답한 정태주가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계범호는 웃음이 났다.
“내가 니 구멍 찢을까 봐.”
그러곤 젖은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정태주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 새끼는 동그란 것도 많네. 그런 감상을 내리며 그는 동그란 엉덩이 사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잔주름이 많은 구멍이 움찔거리며 제 손가락을 씹고 있었다. 묘한 갈증이 일었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그는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젤을 얼마나 넣은 것인지 엉덩이골 주변까지 온통 질척했으나 내벽은 그의 손가락을 버겁게 조였다. 그대로 손을 휘젓자 정태주가 힉, 소리를 내며 허리를 뒤틀었다.
“가만히.”
엉덩이를 때리며 한 말에 움찔거리던 몸이 얌전해졌다. 자국이 잘 생기는 살결은 장난스러운 손 매에도 쉽게 붉어졌다. 이참에 엉덩이 양쪽을 새빨갛게 만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응….”
그때 정태주가 문득 비음을 흘렸다. 손끝이 자기가 느끼는 곳을 스치기라도 한 듯했다. 아프다고 징징거렸던 것이 아주 오래된 것도 아니면서 요즘은 조금만 만져 줘도 곧잘 느꼈다.
“제대로 쑤시지도 않았는데 느껴.”
혀를 차놓고 계범호는 자세까지 고쳐 앉으며 얄팍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안쪽의 도톰한 부분을 문지르자 정태주가 또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힘주어 쑤실 때마다 하얀 엉덩이가 움푹움푹 패었다.
“하으으…! 그만. 흐읏, 제발, 아, 좀….”
계범호는 성마르게 입술을 핥았다. 손가락 하나를 꽉 조여 문 입구에 다른 손가락을 대자 품 안의 몸이 난리를 쳤다.
“아악! 찌, 찢어져요. 아, 흐으….”
“좆도 받아먹는 게 찢어지긴.”
계범호는 제 팔에 체중을 싣는 몸을 단단히 붙잡은 채 기어이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허억, 소리를 내며 버거워하는 것 같던 녀석은 이내 적응했는지 열띤 숨을 내쉬었다. 계범호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살피며 거칠게 안쪽을 짓쑤셨다.
“아…!”
정태주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태주의 허리를 받친 그의 팔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발딱 선 정태주의 좆이 제 팔뚝을 문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남의 좆이 닿는 기분이 더러울 법도 한데 계범호는 그것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이것도 좆이라고 발딱발딱 세우는 게 귀여운 것도 같았다.
계범호는 빠듯하게 조여오는 내벽에서 손가락을 끝까지 빼내었다가 빠르게 찔러 넣으며, 쾌감에 몸부림치는 정태주를 구경했다.
바짝 힘이 들어간 허리는 움푹 패었고, 발가락은 벌어졌다가 오므라들길 반복했다. 이불에 한쪽 뺨을 대어 반만 보이는 얼굴은 온통 붉었다. 눈가, 코끝, 벌린 입술…. 긴 속눈썹은 습기를 머금은 채 나붓거렸다.
뻐근하게 부푼 아래 사정은 아직 해결되지도 않았으나 계범호는 만족감을 느꼈다. 시간이 늦어 집으로 가려다 발걸음을 돌린 것에 후회는 없었다.
“아, 으읏….”
“여기 봐야지.”
쾌감에 못 이겨 이불에 비비는 얼굴을 붙잡아두면서는 돌연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는 좆질할 생각으로 찾아온 곳에서 사내새끼의 후장 자위를 도와주고 있었다.
“…….”
계범호는 손가락을 빼내고 질척한 후장에 곧장 좆을 박아 넣었다. 따끈한 내벽이 좆을 끊어먹을 듯 조여오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그는 내리깐 눈으로 정태주를 보았다. 갑작스러운 삽입에 잠깐 버거워하며 녀석은 또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말 참 안 듣지. 짜증스럽게 혀를 찬 그가 엎드린 정태주의 몸을 돌려 눕혔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다리를 팔에 끼고 내벽을 쑤시자 정태주가 눈살을 구기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런 표정이어도 움직이다 보면 금방 흐느끼는 소리를 낼 것이다. 고작 남창 하나를 너무 많이 알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흰 얼굴에 둔 시선은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
계범호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는 정태주와의 섹스에 중독됐다.
바쁜 와중에도 종종 말간 얼굴이 떠올렸다. 담뱃불이 보이면 눈을 질끈 감는 보란 듯한 행동이나 와락 어깨에 매달리는 팔뚝의 살결, 언젠가 한번 제대로 고쳐 줘야겠다 생각했던 말투, 슬쩍 눈치를 살피는 표정.
남창과의 섹스를 즐기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계범호는 이따금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잠깐 여유가 생겨도 매화에 방문하지 않은 것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우 바쁜 일이 마무리되고, 술을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소는 당연하게도 매화였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노크 소리를 들었을 때 계범호는 문으로 빤히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들어온 것은 낯선 사내놈이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태주는.”
계범호는 제 입에서 나온 남창의 이름이 퍽 친근하다는 것과 자연스럽게 그 녀석을 찾은 것이 문득 묘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더한 것은,
“그게…. 도망쳤습니다.”
몸 파는 새끼 하나 없어진 게 무슨 대수라고.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린 것처럼 불쾌해졌다는 것이다.
정태주를 찾으면 제게 데려오라고 말을 한 뒤, 그는 담배를 물었다. 부드러운 살결을 움켜쥐리라 생각했던 손은 담배만 줄지어 들었다. 재떨이에 꽁초가 쌓이고 공기는 텁텁해졌다.
이해할 수 없이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것을 헤아려 보려 계범호는 무감하게 생각했다.
정태주에게는 빚이 있을 것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지게 된 빚의 연유가 무엇이든, 매화에 온 이상 갚기는 텄다.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맞다. 벽을 타고 탈출했다는 그 대범함도 칭찬해 줄 만하다.
남창 하나가 도망을 치든 죽든, 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구멍이야 널려 있었고 사내놈과의 섹스는 분명 성가시지 않은가. 뒤를 풀어 주려 공을 들여야 하고, 급하게 성기를 들이밀면 버둥거리며 목을 끌어안기나 하고, 만질 것이 많은 것도 아니고.
생각을 이어 갈수록 담배만 당겼다.
“지금 잡았답니다.”
정태주는 아쉽게도 붙잡혔고, 잠시 후 그의 눈앞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땀으로 푹 젖은 얼굴에는 두려움이 완연했다.
계범호는 그 얼굴을 빤히 보며 허공에 쓴 연기를 뱉어냈다. 되찾았다는 안도감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
정태주가 얻어맞으리란 것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더한 폭행도 그에겐 익숙했고, 얼굴을 많이 건드린 것도 아니라 정태주는 뺨과 눈가에 겨우 멍이 좀 들었을 뿐이었다.
“애를, 개 패듯이 패놨네.”
그러나 거슬렸다. 몸을 웅크린 채 앉은 자세나 겁에 질린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옷을 제대로 입을 힘이 없는 건지 정태주는 단추도 끝까지 채우지 못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멍 자국들도 눈알에 까끌거렸다.
며칠 전부터 그는 전혀 그럴 이유도 명분도 없는 일에 불쾌해하고 있었다.
“안 왔잖아요. 손님이 안 왔잖아요.”
그때 정태주가 불쑥 고개를 쳐들고 그를 노려봤다.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그런데 그리도 쉽게 찾아오던 불쾌감이 조막만 한 새끼가 지껄이는 말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그니까, 제가 흐윽, 제가 먼저 기다렸다고요….”
징징거리는 말은 듣기에 달갑기까지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중독된 것은 섹스가 아니라 정태주였다.
***
몸 파는 새끼를 제 것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허연 몸뚱어리는 고작 몇십에 누구든 만질 수 있다. 제 손을 좀 탔다고 남의 손을 안 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인데…….
***
정태주를 가져야겠다.
***
정태주는 왜 빚이 2억도 되지 않을까. 한 10억쯤 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매화에서 오랫동안 벗어날 수 없을 텐데. 그럼 그는 그동안 내내 매화로 걸음 할 것이다.
“…….”
계범호는 그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색색거리는 정태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대만 출장으로 3주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손을 대지 않고는 못 배겨 그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칼을 올올히 느끼려는 것처럼 손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잠든 얼굴을 눈에 담았다.
자리를 뜨지 않고 함께 누워 잠을 잔 것은 처음이었다. 정태주가 자면서 숨소리를 크게 내는 것도, 새끼 강아지처럼 옆구리로 파고드는 것도 처음 알았다.
잠시 후 잠이 깬 녀석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몇 시예요? 하고 물었다. 자연스레 대답해 준 뒤에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인이나 부부가 할 법한 대화가 아닌가. 어울리지도 않고 썩 바라지도 않는 관계이나, 상황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욕심이 치솟아 말간 뺨만 괜스레 꼬집었다.
***
‘저 여기서 꺼내 주시면 안 돼요?’
그도 정태주도 뻔히 아는 미래였다.
그것을 짚어 주었을 뿐인데, 정태주는 몹시도 서러운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목구멍과 명치 어디쯤 걸린 듯하여 계범호는 며칠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그럭저럭 잘 견뎌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태주는 갑작스럽게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괴로워했다.
2년이라는 기간은 정태주를 위해 만들어 둔 선이었다. 배려였고, 그나마의 노력이었다. 놓아줄 자신은 없었으나 애써 볼 마음은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그것을 도와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이제 정태주에게 자유란 없다. 집에 데려다 놓고, 매일 매 순간 그의 시야에 두어야겠다.
기다렸다는 듯 치솟은 기대와 흥분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울리지 않게 들뜨는 것을 보면, 그가 만들어 놓았던 선은 너무도 희미해 언제든 지워질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언젠가부터 계범호는 정태주의 불행이 불쾌했다.
‘밖에 더워요?’
정태주는 더운 여름에도 피부가 창백했고,
‘차에만 있어도 좋아요. 저 진짜 도망 안 칠게요.’
고작 차에 앉아 돌아다니는 일을 절박하게 원했다.
‘…당분간은 못 갈 것 같아. 할머니.’
애새끼가 어울리지도 않게 덤덤히 말을 내뱉었고,
‘씨발, 다들 왜 내 후장을 찢는대. 왜 나는, 잘못하면 후장이 찢겨요?’
제 처지에 괴로워했다.
그것에 계범호는 화가 났다.
그런 불행을 거치지 않고는 정태주가 제게 왔을 리 없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자신도 정태주에게 썩 행운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계전무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씨발아.
-저렇게 나대는 새끼들은 가만두면 끝도 없이 사람 귀찮게 하는 거 모르냐. 장기 몇 개 팔고 치우는 게 낫지.
-노인네는 무슨 잘못이냐. 후장 파는 손자 때문에 말년에 인생 조까치 되겠네.
그런데 이 씨발 새끼들은, 죽여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계범호는 녹음 파일이 재생되는 화면을 표정 없이 응시했다. 그날 정태주는 이것을 들려주며 제 옆에 앉아 있었다. 덤덤한 표정을 하면서도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었다.
-입 다물고 갈 길 가라. 곱게 보내 줄 때.
발걸음 소리와 옷깃이 부딪치는 소리, 정태주가 악을 쓰는 소리가 멎었다. 이제는 숨넘어가는 호흡이 들릴 차례였다. 가슴팍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도 간간이 섞여 있겠지.
-…씨발.
그리고 욕설로 끝이 난다.
형편없이 떨려서 우는 것과 다름없는 목소리를 끝으로 계범호는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방문객이 왔다.
노크 후 들어온 남자는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곧장 입을 열었다. 박의성의 조사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코뼈와 광대뼈가 내려앉고 치아가 다수 부러진 박의성은 의식을 되찾고도 경찰 조사를 받을 수 없었다. 조덕현은 수술 직후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으나 경찰 쪽에서도 박의성은 손을 저었던 것이다.
“…해서, 무기징역으로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계범호는 모니터로 시선을 주었다. 종료된 녹음 파일 화면을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방 배정에도 신경 좀 써야겠다.”
“예, 전무님.”
“선 잘 지키는 애들로 찾아. 빵에서 뒤지면, 좆같잖아.”
날 선 웃음을 내뱉으며 그의 눈빛이 푸르게 탔다.
“예, 알겠습니다.”
“수고해라.”
고개를 끄덕이던 계범호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돌아서서 나가려던 부하가 멈춰 서자 그는 무감히 말했다.
“둘 다 발목 하나씩 손봐.”
며칠 전 정태주는 자다 말고 발목을 매만졌다. 왜, 하고 물으니 졸린 목소리로 ‘밖에 비 오나 봐요.’ 했다. 그러고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 웅크린 녀석을 내려다보는데, 뒤늦게 빗소리가 들렸었다.
***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형님?”
운전석에서 동우가 물었다.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도 차창 밖을 내내 살폈기 때문에 묻는 말인 듯했다.
“…….”
붕어빵은 배달이 안 된단다.
정태주가 붕어빵이 먹고 싶어서 죽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는 꽤 열성적으로 붕어빵 장사를 찾고 있었다.
“…씹.”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헛웃음을 흘리며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 입술 새로 잘근거리며 창문 밖을 살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갈 때, 계범호의 손에는 기름 먹은 종이봉투 세 개가 들려 있었다.
묵직한 봉투들을 한 손에 들고 그는 신발을 벗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이내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녀오셨어요. 어, 붕어빵이에요?”
정태주가 자연스럽게 그의 옆구리에 달라붙으며 기웃거렸다.
“이 주변엔 안 파는 것 같던데 어디서 사셨어요?”
“병원 앞에.”
거기 있었구나. 고개를 주억인 정태주가 그의 손에서 봉투를 가져갔다. 그러곤 봉투 속을 잠깐 보다가 말했다.
“저 붕어빵 이렇게 많이 사는 사람 처음 봐요.”
그 말을 흘려들으며 계범호는 손을 뻗었다.
정태주는 신년에 머리를 손질했다. 그가 본 정태주는 보통 까까머리이거나 거기서 제멋대로 기른 머리가 아니었던가. 멀끔한 것이 낯설어 자주 손이 갔다.
손가락 사이로 닿는 감촉이 부드러워 쓰다듬기를 몇 번 더 반복하다가 그는 말간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몇 달 잘 먹어 살이 오른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창백했던 피부는 이제 뽀얗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쓰다듬는 손길을 받으며 붕어빵을 꺼내 무는 모습도 참 태평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계범호는 돌연 고개를 숙여 태주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아!”
“먹어 보라는 말도 안 하고.”
와락 인상을 쓴 태주에게 범호가 태연히 말했다.
“아…. 드셔 보세요.”
“됐어.”
“…….”
씨발, 하는 얼굴이었다. 속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녀석의 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고 계범호는 걸음을 옮겼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 정태주는 거실에 있었다. 탁자에 우유와 붕어빵을 놓아두고 TV를 보는 것이었다. 계범호는 곧장 그 옆에 붙어 앉았다.
“우유 드실 거죠?”
정태주가 머그잔 두 개에 우유를 따랐다.
그 순간 계범호는 묘한 감상이 들었다. 노을빛이 들어오는 거실에, 대충 찢어 놓은 종이봉투 위의 붕어빵에, 하얀 손이 따르고 있는 것이 술이 아니라는 것에.
“왜요?”
웃음을 흘리자 정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계범호는 정태주의 입가에 묻은 우유를 대충 닦으며 말했다.
“이리 와.”
정태주는 경계하는 얼굴로 그의 무릎에 올라와서는 등을 살짝 띄워 앉았다. 그러나 계범호는 아랑곳 않고 허리를 끌어당겨 흰 목덜미에 곧장 이를 댔다. 깔끔하게 이발하니 물고 빨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아…!”
정태주는 어깨를 세우며 꿈지럭거리다 물었다.
“오늘 담배 안 피우셨어요?”
응. 계범호는 정태주의 귓불을 빨며 무성의한 대답을 내놓았다. 귓속으로 파고든 음성이 간지러웠는지 뺨에 솜털이 선 게 보였다. 남자는 또 그쪽으로 입술을 비볐다.
“…금연은 계속하시는 거죠?”
속 보이는 물음이었다. 자기를 자꾸 괴롭히니 성가시다는 거겠지. 뺨에 잇자국을 내 줄까 하다가,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이 기름 범벅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대로 깍지를 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은 작년 가을 정태주가 기침을 달고 살 때 꺼내 놓았었다. 새해도 됐고, 이제는 금연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남은 건 내일 아주머니랑 같이 먹어야겠어요.”
정태주가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오븐에 구우면 맛있지 않을까요. 조잘거리며 뒤통수를 그의 어깨에 붙였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헝클어지며 흩어졌다.
턱 아래가 간질거렸다. 그는 단정한 모양의 콧대와 우물거리는 뺨을 내려다보았다. 힘을 빼고 온전히 그에게 기댄 정태주는 이따금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곤 했다. 잡은 손이 오른쪽이라 무심코 움직였다가, 제자리를 찾듯 다시 깍지를 파고드는 것이었다.
계범호는 요즘의 제 삶을 생각해 보았다.
집은 답답할 정도로 따뜻했고, 자주 음식 냄새가 났으며, 쓸모없는 잡동사니가 늘었다.
시간이 남으면 하던 일들은 이제 하지 않는다. 남는 시간은 애써 만든 시간까지 더해 정태주와 보낸다.
예전처럼 사는 것은 어려워졌다. 안정을 추구하는 이들을 뒤늦게 이해하게 됐다. 손에 쥔 것이 값질수록, 많이 아낄수록 그런 것일 테다.
정태주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지만 계범호는 삶에 미련이 생겼다.
“근데… 담배 끊는 게 진짜 어렵거든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담배는 기호 식품이라 꼭 끊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태주야.”
조용히 부르자 정태주가 눈을 굴렸다. 은근슬쩍 할 말 다 하면서 눈치 보는 척이었다.
“담배가 몸에 안 좋다잖아.”
“…네? 저보다 오래 사실 것 같은데요.”
예사롭게 내뱉은 말에 정태주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남자는 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세밀히 옮기며 그리듯 하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잘됐네.”
사는 것도 재밌는데. 중얼거리며 계범호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