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녹음 파일을 들려주었던 날, 계범호는 파일을 자기에게 보낸 뒤 삭제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다음 날쯤엔,
‘어르신한테는 안 가 봐?’
하고 말하기도 했다. 태주가 고개를 젓자 왜, 하고 물었다.
‘그냥…. 조금 더 이따 갈래요. 그리고 얼굴도 다 안 나았고요.’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태주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 그래서 내가… 아. 내가 너무 붙잡아 뒀나?”
잠깐 다른 생각에 잠겼던 태주에게 가정부가 말했다. 식탁 의자에 팔을 댄 태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요? 그 아줌마가 뭐랬는데요?”
“글쎄 나더러…….”
그새 태주는 가정부와 조금 친해졌다. 그녀가 청소와 빨래만 하지 않고 요리도 해 주게 되어 마주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그런 거였다.
처음에는 어른이 집안일을 맡아 해 준다는 게 영 어색해 피했으나 좋아하는 음식이 있냐는 말에 답하다가 대화를 트게 되었다.
태주는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어렵지도 않았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것도 심심해 대화 상대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저녁에 들어오는 동거인은 대화를 오래 나누기엔 적절하지 못했다. 잠깐 주절거리다 보면 빤히 시선을 주어 결국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무료함을 해소하기에 좋았다.
아주머니가 갑자기 장을 봐 와서 음식을 해 주게 된 건 며칠 전이었다. 계범호의 지시라는데, 아마 그도 배달 음식이 좀 질렸던 게 아닌가 싶었다.
“어휴. 암튼 사람이 왜 그러나 몰라. 참, 태주 학생. 이건 이따가 뚜껑 열고 데워야 돼요. 넘치는지 잘 봐요.”
“네.”
태주는 아주머니가 손짓하는 냄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도 계범호도 요리엔 영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태주는 계범호보다는 나았다. 뭘 데워 먹는다거나 계란후라이, 토스트, 간단한 김치볶음밥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여기서도 한 번 만들어 먹은 적이 있었다. 사실 그건 태주가 한 요리라기보다는 제육볶음을 배달시켰다가,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어져서 같이 온 김치와 콩나물을 넣고 밥과 볶은 게 다였지만.
그때 계범호도 먹는다고 하길래 태주는 잔칫날에나 쓸 것 같은 커다란 냄비를 - 그는 그것을 처음 보는 눈치였다 - 꺼내 썼다.
그리고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냄비에 소복이 쌓인 밥을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비우고 숟가락을 놓자 커다란 냄비 속으로 숟가락이 쏙 빨려 들어가듯 떨어졌다. 계범호도 수저를 놓았고, 둘이서 정신없이 먹었던 것이 조금 민망해 태주는 말했었다.
‘이렇게 먹으니까 집밥 같아요.’
일주일에 몇 번 방문하는 아주머니가 요리를 해 주시게 된 것도 그다음부터였다.
태주는 그녀에게 남자가 아주 많이 먹는다는 얘기를 했다. 중국집에 갔더니 곱빼기로 두 그릇을 먹고… 그런데 달고 느끼한 음식은 안 좋아하고….
태주의 말에 음식의 종류와 양이 정해졌다. 밑반찬들도 모두 대용량으로 냉장고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그중 태주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달달한 장조림이었다. 그녀는 고용주의 입맛을 맞추면서도 태주의 입맛까지 놓치지 않았다.
“집이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아요.”
“네?”
“사장님이 집에 잘 안 들어오시는 것 같고, 워낙 또 깔끔한 분이셔서 내가 할 일이 없었거든. 월급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니까.”
태주는 조금 어색한 투로 맞장구를 쳤다.
집에 생활감이 없다는 것은 자신도 느꼈었다. 계범호는 저녁도 주로 밖에서 먹고 들어온 듯했고, 집은 잠을 자는 용도로만 사용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은 저녁 전에 꼬박꼬박 집에 들어온다.
“요거는 전자레인지에 2분만 돌려서 먹으면 돼요.”
“네.”
불고기를 산처럼 담은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는 것으로 그녀의 일이 끝났다.
“내가 오늘도 너무 떠들어댄 거 아닌가 몰라요.”
“아닌데요.”
태주가 손을 저으며 말하자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학생. 간식도 준비해 줄 수 있으니까.”
“예.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자신을 학생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학교 때문에 아는 형 집에 사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날이 선선해져서 방학도 아닌데. 그러나 정정하기도 애매해서 태주는 별달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퇴근 후, 집에는 정적이 흘렀다.
태주는 소파에 털썩 드러누워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연속극 재방송에 맞춰놓았다. 계범호가 뉴스를 틀어놓는 시간에 하는 드라마였다.
“와 씨…. 임신을?”
놀라운 전개에 벌떡 몸을 일으킨 태주가 주방으로 갔다. 찬장을 열자 자신이 사놓은 라면 몇 개와 과자가 보였다.
계범호의 집에는 태주가 산 것들이 좀 늘었다. 자꾸 남의 성기를 자기 것처럼 만지는 탓에 팬티도 한꺼번에 여러 개를 주문해 그의 드레스룸에 슬쩍 갖다 놓았는데, 그걸 보면서 계범호는 조금 웃었다.
태주는 라면 하나를 꺼내고 찬장을 닫았다. 부스럭부스럭 라면을 부수며 식탁을 지나쳤다가 다시 되돌아와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먹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소리가 들려 접시를 다시 덮어놓고 후다닥 소파로 갔다.
모르는 인물이 나오면 휴대폰으로 검색도 해보며 태주는 금방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몰두해서, 갑자기 커다란 형체가 옆에 섰을 때는 비명을 지르며 놀랐다.
“악! 깜짝이야.”
태주가 놀란 가슴팍을 붙잡으면서도 또 힐끔 TV에 시선을 주자, 남자가 태주의 정수리에 툭 손을 얹었다.
“그게 인사?”
낮게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태주는 비스듬한 눈빛을 발견했다.
“다녀오셨어요….”
뒤늦게 건넨 인사에 남자가 그래, 하고는 태주의 옆에 풀썩 앉았다. 그는 TV에 잠깐 시선을 주다가 태주가 손에 쥔 라면 봉지를 쳐다봤다.
“드실래요?”
살짝 봉지를 내밀자 그가 한 조각을 꺼내 먹었다. 그러곤 입에 맞는지 몇 조각 더 먹었는데, 커다란 손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니 라면 봉지가 좀 작아 보였다.
계범호는 소파에 앉은 채 TV로 시선을 줬다. 리모컨에 손을 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태주는 TV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라면 한 봉지를 더 가지고 왔다.
“와. 저러고 끝나네.”
한 편을 전부 보고 나서야 태주는 TV에서 시선을 뗐다. 그러고 흘긋 계범호를 봤는데 그는 자신과 달리 전혀 흥미롭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게 이전 화를 보면 더 재밌는 건데….”
정태주는 설명을 좀 이어 가려다 관뒀다. 무감한 낯의 남자는 자신의 턱에 묻은 라면 스프를 더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엄지로 정태주의 턱을 문지른 계범호가 몸을 일으켰다.
“저녁 먹자.”
“네.”
두 사람은 수저까지 전부 세팅이 된 식탁으로 갔다. 국을 데우고 밥을 뜨고, 불고기만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되었다.
태주가 전자레인지에 불고기 접시를 넣은 뒤, 아주머니의 당부대로 국을 데우며 빤히 쳐다보고 있을 동안 계범호는 밥을 떴다. 국을 덜어 뒤를 돌았을 때 보인 고봉밥에 잠깐 멈칫했으나, 아주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적게 담아도 한 공기 더 먹게 되어 있어서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군것질을 했음에도 입맛이 돌아 수저를 쥐는데, 계범호가 문득 말했다.
“태주야. 할 말 없어?”
“…잘 먹겠습니다.”
정태주의 말에 계범호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는 자기 눈썹을 문지르며 피식 웃고는 “그거 말고.” 했다.
“…….”
태주가 감을 잡지 못하자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 작은 표정 변화에도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눈을 굴리니 그가 힌트를 주듯 말했다.
“얼굴도 다 나았고, 다음 주면 추석인데.”
“…아.”
할머니와 통화는 몇 번 했었다. 할머니는 예전에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갔고, 소일거리로 시장에 나갔다.
“추석에 할머니한테 갔다 와도 돼요?”
“그래.”
조심히 물은 말에 계범호가 선선히 대답했다. 눈치를 살피다가 자고 와도 되는지를 묻자 남자는 잠깐 침묵하더니 하룻밤만, 하고 말했다. 태주는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런데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멍하게 눈을 깜박이는 정태주를 보며 계범호가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가 나직이 말했다.
“네가 물어봐야 허락을 하지, 태주야.”
“…….”
남자는 아무 말이 없는 태주에게 잠깐 시선을 주다 수저를 들었다. 무심한 듯한 그의 얼굴을 멍하게 보느라 태주는 계범호가 식탁 아래로 발목을 건드렸을 때가 되어서야 수저를 움직였다.
이후로 정태주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의 술주정에 대한 것임은 곧장 알 수 있었다. 검정고시를 따고, 대학을 가려 했다는 그 얘기 말이다. 남들처럼 살아 보려 했다는 그 얘기.
지난 몇 달간은 많은 일과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예전의 삶으로는 다신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게다가 자신이 옆에 머물기로 한 남자는 또 어떤가.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분명 자신을 가두고 고립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에 대해 억울함은 없었다. 전엔 가졌던 것 같으나, 이번에 그와 주고받게 된 것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니까.
그래서 태주는 굳이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며 행동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집에만 머무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계범호는 말했다.
‘네가 물어봐야 허락을 하지.’
들어줄 생각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완전히 가둘 것처럼 굴어놓고…. 하지만 다정한 그의 행동과 말 몇 개가 떠오르자, 욕심이 생기게 됐다.
검정고시 정도는 딸 수 있지 않을까. 중졸보다는 고졸이면 좋을 것 같았다.
욕심과 더불어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니 오기도 생겼다. 제 인생을 망친 것은 다른 놈들인데, 망가진 인생이라고 저까지 손을 놓아서야 되겠는가.
이틀간의 고민은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계범호의 허락을 받는 것뿐이었다.
정태주는 슬쩍 눈을 굴렸다. 계범호는 맨몸 운동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운동을 하는 몸이었지만, 저녁엔 자신과 붙어 있기만 하길래 운동은 따로 안 하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은 늦게 일어나 몰랐지만 새벽에도 운동을 갔다가 출근하는 듯했다.
꿈틀거리는 큼직한 근육과 문신을 보자 괜스레 긴장이 됐다. 정태주는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그가 몸을 일으키고 빤히 쳐다볼 때가 돼서야 입을 열었다.
“물 드릴까요?”
“물 주려고 얼쩡거리지는 않은 것 같은데.”
땀으로 젖은 계범호의 얼굴이 모로 기울어졌다. 정태주는 눈을 굴리다가 슬금슬금 그의 옆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저 검정고시 따도 돼요?”
그 말에 남자는 태주를 빤히 내려다보다 “그래.” 하고 선선한 대답을 내놓았다. 정태주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학원은 안 다니고 집에서 공부할게요.”
“당연한 얘기를 하네.”
계범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을 덧붙였다.
“떨어지면 다음은 없어, 태주야.”
장난인 것 같지만 새카만 눈동자를 보면 그냥 하는 소리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태주는 개의치 않았다.
“아, 검정고시 누가 떨어져요. 내년 봄에 시험 있던데 대충 공부해도 붙어요.”
태주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주던 남자는 이내 피식 웃었다.
***
그다음 날, 집 앞으로 무거운 박스가 왔다. 어젯밤 태주가 주문한 문제집이었다.
박스를 들고 들어온 태주는 책을 꺼내어 차곡차곡 쌓은 뒤 박스를 정리해 베란다에 내놓았다. 그러고 나서 책들을 품에 안고 복도로 갔다.
계범호의 집에는 침실을 제외하고도 방이 세 개였는데, 하나는 그가 서재처럼 쓰는 듯 컴퓨터와 책상이 놓여 있었고 나머지 두 개는 창고나 다름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태주는 서재로 향했다. 책상에 책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자마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바퀴 달린 커다란 의자는 무척이나 편했다.
태주는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댄 채 이리저리 시선을 줬다. 벌써 한 달 가까이 머물렀지만 계범호의 집에는 늘 새로운 게 보였다. 서류 봉투가 꽂힌 책장, 컴퓨터, 새까만 색의 키보드…. 단출했지만 하나하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계범호는 집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으므로, 필요한 물품과 가구를 고르고 들인 것이 그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러보던 시선은 이내 책상 위의 문제집으로 향했다.
자세를 바로 한 정태주는 가장 위에 놓인 수학 문제집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예전엔 공부를 썩 좋아하던 편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공부를 하게 되니 조금 설레는 것 같았다. 즐겁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태주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팔랑거리며 페이지를 몇 장 넘기다가, 손은 점점 느려졌다.
“…아.”
괜히 앞장을 훑어보고 다시 뒤로 넘겨보며 한참 쳐다본 다음에는 인정했다.
검정고시 떨어지는 사람이 어쩌면 자신이 될 수도 있겠다.
***
“뭐라는 거야.”
정태주는 가로로 세워 둔 제 휴대폰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몇 시간째 서재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무작위로 샀던 문제집 몇 개에 인터넷 강의가 있길래 그걸 찾아 틀어놓고 남자의 책상에서 볼펜도 꺼내어 쥐었다.
그런데 강의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들 아는 듯 넘어가는 것도 자신은 몰랐다. 어릴 때부터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아무래도 중학교 과정부터 먼저 공부해야 될 것 같았다.
“…초등학교는 안 해도 되겠지?”
어제의 당당한 태도와 달리 태주는 부쩍 자신감이 줄었다. 그래도 보던 강의는 마저 보려고 눈을 부릅뜨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움찔 놀라 고개를 들자 계범호가 문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표정 없는 얼굴의 남자는 문 뒤의 공간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그 커다란 사람이 넓은 보폭으로 다가오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벌렁거렸다.
“오셨어요.”
태주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계범호는 대답 없이 곧장 허리를 굽혀 입을 맞췄다. 성급한 몸짓에 태주가 앉은 의자 바퀴가 뒤로 밀려나자 남자가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태주는 남자와 의자 사이에 가둬진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았잖아, 태주야.”
낮은 말에는 거친 호흡이 섞였다. 태주도 가쁜 숨을 내쉬다 말했다.
“아까 책 와서, 좀 보고 있었어요.”
그 말에 남자의 시선이 책상을 살폈다. 펼쳐놓은 책과 그 위로 놓인 볼펜, 강의가 나오고 있는 휴대폰.
“잘 돼?”
“존나 안 돼요.”
진심이라 비속어가 섞인 말이 나왔다. 계범호는 픽, 웃었으면서 태주의 이마를 제법 아프게 튕겼다. 이마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이는 태주의 뒤통수에 손을 올려놓은 채 남자가 말했다.
“컴퓨터 놔두고 왜 저걸로 봐.”
“일하는 데 쓰시는 것 같아서요.”
계범호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조그만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태주는 잠깐 눈을 굴리다 물었다.
“저 태블릿 PC 사도 돼요?”
그 말에 남자가 뭘 물어, 하고 바람 새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감사합니다.”
“팬티는 물어보지도 않고 사 입어 놓고.”
“…….”
자신의 팬티인데 왜 물어보고 사 입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예에, 대답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리자 큰 손이 귓불을 누르며 괴롭혔다.
“옷은.”
그가 태주가 입은 자기 옷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귓불을 만지던 손은 자연스럽게 내려와 헐렁한 목둘레를 들춰 봤다. 태주가 움찔 등을 구부리자 그가 말했다.
“거지꼴로 가지 말고 깔끔하게 하고 가.”
***
며칠 뒤 정태주는 몸에 딱 맞는 새 옷을 입고 할머니 집으로 갔다. 좀 자라서 삐죽삐죽한 머리로는 깔끔한 옷을 입어도 이상한 건지, 계범호는 오늘 아침 태주의 머리를 거칠게 문질렀었다.
“태주야. 손에 그게 뭐야?”
할머니는 얼룩 하나 없는 새 신발을 벗으며 들어온 태주를 반기다가 문득 시선을 내렸다. 태주도 자신이 든 커다란 상자 두 개를 보았다.
계범호가 주길래 받아왔는데, 황금색 보자기로 감싼 것이 무엇인지는 태주도 몰랐다.
정태주는 바닥에 선물을 내려놓으며 잠깐 입술을 달싹였다. 할머니에게는 서울에 아는 형네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말했었다.
“그… 형이, 주래.”
“뭘 이런 걸 다.”
도저히 입에 붙지 않는 호칭이었으나 할머니는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고맙다고 전해 주라고 말하며 부드러운 보자기를 풀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이 아니야, 이거.”
자연산 송이를 이렇게 많이…. 할머니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태주는 흙이 묻은 버섯을 흘금 보고는 몸에 좋은 건가 보다 하며 다른 상자의 보자기를 풀었다. 빛깔 좋은 한우였다. 그제야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 할머니. 우리 이거 구워 먹자.”
“…….”
할머니는 태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공장 일이 고생인지 살이 빠져 창백했던 얼굴이 생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살이 오른 태주의 뺨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 형은 어디서 만난 거야?”
“어?”
태주가 멍하게 되묻자 할머니가 송이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형이 너 엄청 좋아하나 보다.”
“…….”
그 말에 정태주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이가 좀 많댔나, 그 형이? 막냇동생 같나 보네.”
“…어. 맞아.”
할머니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의아하게 태주를 쳐다보았고, 태주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레 긴장한 거였다. 할머니는 남자끼리 그런 사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이?
그 말을 곱씹는데 할머니가 말했다.
“이런 걸 챙겨 줄 정도면 부자 같은데.”
“응, 부자야.”
“잘해 줘?”
“좀 무섭긴 한데…. 아, 아니.”
무심코 내뱉은 말이라 당황해서 정정하려는데 할머니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잘됐네.”
“어?”
“할머니가 오냐오냐 키워놔서. 우리 태주한테는 무서운 큰 형이 필요하지.”
“…할머니가 보면 진짜 깜짝 놀라. 완전 무섭게 생겼어.”
잠깐 말문이 막혔던 태주가 반박하듯 꺼낸 말에도 할머니는 웃기만 했다.
“아무리 부자라도, 자기 집 방 한 칸 내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좋은 사람인가 보다.”
태주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계범호를 설명하기에 ‘좋은 사람’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걱정이라도 할까 입을 열었다.
“나한테 잘해 줘.”
그 말은 제법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너한테 잘해 주면 좋은 사람이지.”
할머니는 보자기를 다시 곱게 묶으며 흘리듯 말했다. 그 말에 태주는 눈을 깜박였다.
“다음에 한번 데리고 와. 할머니가 밥이라도 해 먹여야지.”
“…바빠서 안 될걸.”
하고 말하며 태주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
할머니 집으로 갈 때도 양손이 무거웠는데,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큰길에서부터는 계범호가 보낸 차를 타긴 했지만 차에서 내려서는 제 몫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태주는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할머니가 전이며, 갈비찜이며, 나물이며, 송편이며… 한가득 싸 주어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할머니는 태주가 검정고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는 말을 무척 반겼다. 그러곤 태주의 돈을 다시 건넸다. 고시원에서 살며, 한 푼도 쓰지 않은 그 2000만 원.
정태주는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 할머니.’
그 말에 할머니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으나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나 공부 열심히 하려고. 대학은 머리가 나빠서 못 갈 수도 있는데, 검정고시는 꼭 딸게.’
‘니가 머리가 나쁘긴 왜 나빠. 안 해서 그렇지 공부만 하면 서울대도 가지, 우리 강아지.’
할머니가 조금 발끈하며 태주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
중학교 교과 과정도 헤매고 있는 정태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는 태주가 공부를 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좋은지, ‘공부’라는 단어를 계속 입에 달고 말했다.
‘공부할 때는 많이 먹어야 돼.’
‘보니까는 공부하려면 운동도 좀 해야 한다던데. 뒷산에 가끔 올라가고 그래.’
‘호두가 뇌에 좋대. 할머니가 호두 좀 싸 줄 테니까, 공부하면서 심심할 때마다 먹어.’
“하여튼.”
정태주는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나서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키패드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그 위에서 멈췄다.
…비밀번호를 몰랐다.
“…….”
눈을 깜박이던 정태주는 헛웃음을 짓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샤워하나. 문에 귀를 대 보았지만 무슨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잠깐 기다렸다가 다시 초인종을 눌렀는데도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그제야 계범호가 집에 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물어봤을 때, 어디도 가지 않는다길래 집에 있을 줄 알았다. 태주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명함을 보고 전화한 날 이후로 처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어색한 기분에 배회하던 엄지는 느리게 통화를 눌렀다.
전에도 들었던 단조로운 신호음이 들리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어디세요?”
-지금 가는 중이야.
“일하셨어요?”
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자 ‘응.’ 하고 낮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용건을 물어볼 법도 한데 계범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비밀번호를 몰라요.”
-…….
이내 낮은 웃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는 옅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언제쯤 도착하세요?”
-…30분 정도 걸려.
“네.”
태주는 대답했다. 그러곤 전화가 끊길 줄 알았는데, 통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잠깐 생각하다가 남자가 운전 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태주가 말했다.
“끊을게요.”
전화를 끊은 다음 곧장 비밀번호를 메모장에 저장했다. 그러고 나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탁 위에 들고 온 음식들을 내려놓고 나서는 흘긋 시계를 보았다. 30분 정도…. 왜 추석인데도 일을 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태주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밥이 없어서 일단 밥부터 안친 다음, 프라이팬을 꺼내어 전을 다시 굽고, 갈비찜이나 잡채 같은 것은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할머니가 밑반찬도 여러 개를 싸 줬기 때문에 그것들도 조금씩 다 꺼내놓다 보니 식탁이 금방 풍성해졌다. 태주는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상다리가 부러질 듯 밥을 먹었다.
문득 김이 올라오는 밥솥에 시선이 갔다. 집에서 밥을 안 먹었나. 잠깐 생각하던 태주는 노릇하게 구운 전을 접시에 옮겨 담기 위해 돌아섰다. 후라이팬을 들어 전을 접시에 와르르 쏟아붓고 전이 좀 한쪽으로 쏠린 것 같아 접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돌아설 때였다.
주방 입구에 커다란 인영이 서 있었다. 익숙해졌다고 해도 태주는 남자가 갑자기 시야에 들어올 때면 가끔 놀랐다.
계범호는 식탁을 잠깐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두 손으로 접시를 든 태주를 가만히 보던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뭘 들인 건지.”
그러곤 피식 웃었다.
“할머니가 싸 줬어요.”
멀뚱히 서 있던 태주가 한 말에 계범호는 식탁 위의 음식을 보더니 맛있겠네, 했다. 그러고 나서 손을 씻고 와 곧장 식탁에 앉았다.
원래도 잘 먹는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했다. 식사를 마쳤을 때는 접시마다 남은 음식이 없었다. 갈비찜이나 잡채 같은 것은 태주도 좋아해서 많이 먹었지만, 나머지는 거의 계범호가 다 먹은 거였다.
태주는 배가 불러 의자에 기대어 있다가 문득 남자를 보았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려다 말고 시선을 줬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묻고 나서 태주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던 냉동실에는 태주가 며칠 전 아이스크림을 잔뜩 채워놓았다.
명절 음식은 맛있지만 좀 느끼해서 상큼하고 시원한 게 먹고 싶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을 뒤적이다가 귤 맛 아이스크림 바 두 개를 꺼내어 냉장고 문을 닫았다.
돌아섰을 때, 계범호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안 드세요?”
태주가 어정쩡하게 선 채 묻자 그가 줘, 하고는 웃었다. 그는 손가락에 끼웠던 담배를 다시 담뱃갑으로 밀어 넣었고, 빈손에 태주가 준 아이스크림을 들게 되었다.
깨끗하게 비운 접시가 여러 개인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태주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
며칠 사이 집에는 변화가 생겼다.
빈방으로 두었던 방 중 하나를 태주의 공부방으로 쓰게 된 거였다. 남자가 일하는 서재에서 공부를 하기는 조금 불편해 식탁에서 공부를 했는데, 퇴근 후 남자는 그걸 물끄러미 보더니 “방이 필요하겠네.” 했다.
그러고 나서 책상과 의자, 책꽂이가 들어왔다.
태주로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자기 방이 생겼다는 것도 그랬고, 식탁은 아주머니가 없는 시간에만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주머니가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닌데, 검정고시 교재를 그녀에게 보이는 것에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분명 자신을 대학생으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하여간 요즘 태주의 일과는 이랬다. 오전에 일어나 대충 시리얼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 공부를 조금 하다가 아주머니가 오시면 점심을 먹고, 잠깐 수다를 떨다가 또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방에서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주의 방에도 계범호의 서재에 있는 것과 꼭 같은 의자가 놓였는데, 거기 등을 기대고 앉아 태블릿 PC를 가지고 놀았다. 게임도 하고, 동영상도 보고, 웹툰도 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똑똑똑.
오늘도 의자에 발을 올린 채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보던 것을 정지하고 내려놓자 아주머니가 쟁반을 들고 들어오셨다. 태주는 벌떡 일어나 쟁반을 받아 들었다. 오늘 간식은 고구마 맛탕과 오렌지 주스였다.
“저 이거 좋아하는데. 감사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아주머니가 조금 웃더니 말했다.
“근데… 대학생인가 봐요?”
“네?”
태주는 조금 당황했다. 지금이라도 아주머니의 오해를 정정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대학생이 아닌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입을 여는데, 아주머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고등학생인 줄 알았더니.”
“…저 집에만 있는데요?”
“그러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
고등학생 같다는 말은 가끔 듣긴 했는데, 그래도 이제는 21살이 된 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태주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머리가 짧길래. 머리 때문에 그렇게 보였나 봐. 응, 그럼 퇴근할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는 조금 당황한 태도로 자리를 떴다.
태주는 책상으로 돌아가 쟁반을 내려놓고 태블릿 PC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그새 좀 자라서 삐죽삐죽 솟은 머리와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았지만 별로 어려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머리가 짧으면 인상이 강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날 밤 계범호에도 슬쩍 물었다.
“저 어려 보여요?”
“어리니까.”
성의 없이 대답한 계범호는 자신이 쥔 태주의 손가락에만 시선을 뒀다. 고작 며칠 연필 좀 잡았다고 중지에 굳은살이 생겼다. 손으로 그 부분을 문질러 보다가 입에 넣으려던 때였다.
“아니… 아주머니가 저 고등학생인 줄 알았대요.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넌지시 묻는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동의를 구하듯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정태주를 보며 그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고등학생으로 볼 수도 있지.”
얼굴이 앳된 편이긴 하지만, 정태주를 어리게 보는 것은 사실상 말투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정태주는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한다는 게 우스웠다.
“예?”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정태주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는 제 위에 벗은 몸으로 올라탄 남자를 올려다보다 문득 억울함이 치미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고등학생으로 보면서도 섹스해요?”
계범호는 눈을 치켜뜬 정태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자 정태주가 뒤늦게 눈을 피하며 남자의 손에서 제 손을 슬그머니 뺐다. 세게 깨물릴 것 같다는 예감에서 그런 거였다.
남자는 그런 태주를 비스듬히 보다가 낮은 웃음을 흘리고 말했다.
“내가 양심이 있으면 깡패짓을 안 했지.”
“…….”
그렇네. 멍하게 생각하는 정태주를 보며 남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이내 고개를 숙여 태주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태주가 움찔 떨며 그의 등을 껴안자, 커다란 손이 삐죽 솟은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
계범호는 종종 늦을 때가 있었다. 태주가 한 번 밥을 먹지 않고 그를 기다린 이후로는 미리 말을 해 주게 되었는데, 그 전날 말을 해 주거나 그날 전화로 얘기하는 식이었다.
주말에도 가끔 나갈 때가 있었으나 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와 함께하는 주말은 별것 없었다. 먹거나 섹스하거나.
느슨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계범호는 돌연 태주의 옷을 벗길 때가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집에서 커피 같은 것도 안 드세요?’
‘썩 좋아하진 않는데.’
‘저도요.’
평범한 대화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빤히 쳐다보다가 사나운 눈을 하고 태주를 끌어당겼다.
아침에 이미 한바탕 섹스를 한 터라 섹스 이후 태주는 무척 지쳤다. 두 번째 샤워를 하면서는 계범호와 조금 떨어져 있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저 공부할게요.”
“그래.”
소파에서 담배를 피우며 남자가 흘긋 시선을 줬다.
태주는 음료수와 과자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책을 펴긴 했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태블릿 PC로 게임을 했다.
그런데 문득 싸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자, 문가에서 계범호가 물끄러미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 잠깐 기분 전환인데요.”
“태주야.”
“네?”
조용한 부름에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보이는 데서 놀아.”
싸늘하지 않은 말투였으나 태주는 눈치껏 일어났다. 주섬주섬 음료수와 과자를 챙기고 태블릿 PC를 품에 안은 채 문가로 가자 남자가 손을 들었다. 큰 손은 태주가 불안하게 든 컵과 과자를 대신 들어 주었다.
“…….”
계범호는 무심한 얼굴을 한 채 그것들을 거실 탁자에 놓았다. 그러곤 TV로 눈을 돌렸고, 태주는 살짝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게임을 했다.
소파에 앉아 한참 게임에 열중하던 태주는 슬쩍 계범호를 보고는 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게임을 하며 수시로 과자를 입에 넣었다. 한 판이 끝난 뒤 계범호를 확인하느라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시끄러워요?”
“아니.”
대답하고 남자는 조금 웃었다.
의외로 평화로운 주말이었다.
***
동그라미, 선, 선, 선, 선….
태주는 채점을 전부 마치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볼펜을 내려놓았다.
“씨발.”
욕설을 중얼거렸지만 오답 확인까지 하고 나서야 태주는 몸을 일으켰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가 쓰러지듯 누웠다. 흘긋, 눈이 시계에 닿았다. 이제 3시간 남았다.
계범호는 대만으로 갑작스럽게 출장을 갔다. 그는 떠나기 바로 전날 그 얘기를 하며, 태주에게 이런 말도 했다.
‘여권 만들어놔.’
그는 자신을 대만에 데리고 가고 싶은 것 같았다. 출장이 영 달갑지 않은지 미간을 굳힌 그를 흘금거리다 태주는 물었다.
‘위조 여권은 못 만드세요?’
뒷세계 사람들은 그런 것도 다 하는 것 같길래 물은 말이었다. 그런데 계범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범죄자도 아닌데 그걸 왜 만들어.’
‘아….’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구청 가서 만드는 것이나 불법으로 만드는 것이나 어차피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정태주를 기가 막히다는 듯 보던 계범호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손이 소파 바닥에 앉아 있던 태주의 팔 아래로 불쑥 들어왔다. 그대로 끌어올려 허벅지에 앉히고, 그가 웃는 눈으로 태주를 올려다봤다.
‘아, 이걸 두고 내가.’
그는 한 손으로 태주의 뺨을 꽉 움켜쥐었다. 턱뼈가 부서질 것 같아서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붙잡자 겨우 힘이 느슨해졌다.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다정해서, 태주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얼마나 걸려요?’
‘일주일.’
그 말을 할 때 계범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으므로 태주는 그 출장이란 것에 어떤 일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감히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뒤 오늘이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가 출장을 간다고 했을 때는 사실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썼다. 안 그래도 계범호의 심기가 불편한데, 그 소식을 반기는 모습까지 보이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데 시선을 두며 거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일주일간 태주는 자유를 만끽했다. 긴장할 일도 없고 몸도 참 편했다.
다만 시간이 느리게 흘렀을 뿐이었다.
지루하고, 심심했다. 그사이 몇 번 방문하신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는 풀기 힘든 심심함이었다.
태주는 소파 아래로 팔을 축 늘어뜨렸다. 흘금, 눈이 또 시계를 살폈다. 고작 1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
낮잠을 잘까. 두 시간쯤 자고 일어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태주는 굼뜨게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도 잘 안 왔다. 조금 눈을 감고 있다가 휴대폰을 보길 반복하던 태주는 이내 낮잠 자는 것을 포기했다.
누운 채로 영화 볼 것이 없나 해서 한참을 찾았다. 뭐든 다 재미없어서 조금 보고 끄길 반복하다가 겨우 괜찮은 영화를 찾아 틀어놓았다.
그러고 나자 잠이 오는 것이다.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뜨이길 반복했다. 그러던 때 희미한 소음이 들렸다.
번쩍. 정태주는 눈을 떴다. 시계를 봤으나 아직 그가 올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주는 곧장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고 나서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닥을 빠르게 때리던 발바닥은 현관 앞에서 경사지게 멈췄다.
“…….”
계범호는 달려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정태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뾰족한 밤송이 같은 것이 어깨에서 간지럽게 움직이더니 살짝 멀어졌다.
“왜 벌써 왔어요?”
“반기는 거야, 아쉬운 거야.”
남자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정태주는 눈을 굴리다 물었다.
“이건 뭐예요?”
계범호의 손에 면세점 로고가 있는 종이 백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네 거, 하고는 태주에게 그걸 넘겨줬다. 받아서 입구를 열어 보곤 금방 알았다. 파인애플 과자였다.
“어, 이거 유명한 건데.”
응. 계범호는 목을 울려 대답하며 태주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붉은 기를 띠고 있는 것은 만지는 촉감이 좋았다.
“맞다. 저 내일 여권 만들러 가도 돼요? 머리 기르고 찍고 싶었는데 어차피 여권 사진은 다 이상한 거래요.”
과자 박스를 꺼내며 조잘거리던 정태주는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여권 만들라고 하신 거, 저 출장 갈 때 데려가려고 한 거 맞죠?”
“…….”
말없이 내려다보는 시선에 태주는 “아닌가….” 하고 멋쩍게 중얼거렸다.
“태주야.”
나직이 부른 계범호가 말했다.
“왜 같이 있고 싶은 것처럼 굴어.”
“그냥….”
“그냥, 뭐.”
“계속 기다리게 돼서요.”
계범호는 정태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주일 사이 말간 얼굴에 달라진 부분이라도 있을까 샅샅이 훑어내다 차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나를 뭘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렇게 말해놓고 그는 태주를 와락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태주는 그에게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커다란 손은 태주가 든 과자를 거추장스럽다는 듯 빼앗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는 티셔츠 아래로 들어가 맨살을 더듬었다. 급한 손길은 이내 태주의 옷을 찢어발기듯 벗겼다.
“아….”
그러면서도 입맞춤은 거두지 않아 깨물린 아랫입술이 쭉 늘어났다. 살갗이 당기는 기분에 태주는 콧등을 찌푸리며 계범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그가 하얗게 잇자국이 남은 태주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하고 태주를 안아 올렸다. 그때만 겨우 입술이 떨어졌을 뿐이었다.
태주가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목덜미를 감싼 채 매달리자 계범호의 입술은 다시 태주에게로 와 붙었다. 뺨을 핥고 깨물고, 붉은 귓불을 잘근거렸다.
그러면서 보폭이 큰 걸음을 멈추지 않는 탓에 날카로운 이가 살갗을 섬뜩하게 긁었다. 정태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목덜미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살이 정말 찢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미는 수밖에 없었다.
“으…. 찢어질 것 같아요.”
“어디. 여기? 아직 좆도 안 넣었는데 왜 찢어져.”
허벅지를 받치고 있던 손이 엉덩이 사이를 꾹 눌렀다. 바지를 뚫을 듯 눌러대는 강한 손길에 태주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손길을 피했다.
“아니. 귀요, 귀!”
계범호의 허리를 감은 다리에 힘을 주며 상체를 세우니 태주의 몸이 불쑥 올라갔다.
남자의 눈앞에는 하얀 얼굴 대신 하얀 목이 자리했다. 그 가운데에 불거진 목젖을 발견한 그는 곧장 혀를 댔다. 짓누르듯 세게 핥자 정태주가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아….”
태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목젖을 괴롭힘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입술 조금 찢어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개를 숙여 계범호에게 입을 맞춘 것은 그런 이유였다.
“…….”
계범호는 지척에서 눈을 감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태주는 자기가 늘 당하는 것처럼 남자의 입술을 핥고 혀를 밀어 넣었다. 혀끼리 비비고는 얕은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혀끝의 진동으로 그에게도 전해졌다.
남자는 미간을 구긴 채, 잠깐 멈췄던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침대였다. 태블릿 PC가 놓여 있고 흐트러진 이불이 놓인 그곳. 정태주의 흔적이 가득한 곳.
계범호는 정태주를 안은 채 침대 위로 쓰러지듯 엎어지며 깊이 입을 맞췄다. 정태주는 껴안고 있던 목덜미를 풀지 않고 손끝으로 남자의 머리칼 사이를 만졌다. 잠깐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가쁜 숨을 색색 내쉬며 말간 눈동자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이 참. 남자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너 내일 당장 여권 만들어.”
정태주는 눈을 크게 뜨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계범호는 버릇없이 고갯짓을 하는 얼굴로 쉼 없이 입술을 내렸다.
집에서 입는 헐렁한 바지와 그 안의 속옷을 완전히 벗겨내고, 자신도 거칠게 옷을 벗었다. 그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댄 정태주가 발딱 성기를 세운 것을 보고서는 아래가 아플 정도로 뻐근해졌다.
“오늘은 허락 맡고 싸.”
“하아…. 네.”
성기를 움켜쥐고 가볍게 문지르는 손길에 정태주의 배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움푹 드러난 근육의 굴곡 위로 혀를 미끄러뜨리며 계범호는 태주의 엉덩이 사이로 손을 댔다.
손가락 하나 받기 어려울 정도로 굳게 닫힌 주름 위를 더듬다가, 그가 태주의 몸을 휙 뒤집었다. 무릎을 대고 엎드리게 하고 허리를 아래로 꾹 눌렀다. 그러자 엉덩이 사이가 벌어져 촘촘한 구멍이 살짝 보였다.
계범호는 고개를 숙여 그것을 곧장 핥았다.
“아! 아, 싫어요, 이거.”
정태주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미간을 찌푸린 남자는 침대를 짚고 도망가려는 태주의 손을 뒤로 끌어왔다. 제 엉덩이 위에 얹게끔 하고 그가 낮게 명령했다.
“네가 잡고 벌려.”
“그냥 젤로 하면 안 돼요?”
정태주가 정말 싫은 듯 징징거렸다.
“술 안 취했을 때 빨아 달라며, 태주야.”
“저는 좆 빨아 달라고 한 건데요.”
억울한 듯 큰소리를 내는 정태주가 우스웠으나 그는 하얀 엉덩이를 매섭게 내리쳤다. 짝, 짝 소리가 몇 번 이어졌다.
“태주 오늘 엉덩이 불나겠네.”
혀를 차며 내뱉은 말에 정태주가 꿈지럭거리며 제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양옆으로 벌리는 움직임이 소극적이라 계범호는 그 손에 제 손을 덮고 바깥으로 강하게 당겼다.
“으으….”
구멍이 옆으로 쭉 늘어나는 기분에 태주가 이불에 고개를 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계범호는 제 손을 거두고 태주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시선은 벌어진 엉덩이 사이 뻐끔거리는 구멍에 집요히 달라붙었다.
메마른 속살이 축축하게 젖는 것은 금방이었다. 계범호는 게걸스럽게 태주의 뒤를 빨고 핥으며 손가락으로 쑤셨다.
“으응, 으…. 저… 싸도 돼요?”
이불에 얼굴을 묻어 불분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정태주가 물었다.
싫다며. 계범호는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고 말했다.
“얼굴 보고 물어야 들어줄 마음이 생기지.”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린 채 고개를 돌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술을 부리는 것이었다. 잠깐 꿈지럭거리던 정태주는 이불에 묻은 얼굴을 조금씩 움직여 고개를 돌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싸도 돼요?”
바짝 약이 올라 허락을 안 해 주면 안 될 얼굴이었다. 계범호는 입꼬리를 조금 올린 채 발딱 선 정태주의 좆을 쥐었다.
“읏….”
사정감을 참아내느라 정태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얼굴을 부드럽게 보며 남자가 싸, 하고 나직이 말했다. 앞을 흔들어 주며 뒤쪽에 찔러 넣은 손가락을 움직이자 성기는 금방 정액을 토해냈다.
“별로 진하진 않네. 자위했어?”
계범호는 제 손에 고인 정액을 보며 무심히 물었을 뿐인데, 정태주는 귀가 새빨개졌다. 그것을 보며 남자가 눈을 빛냈다.
“혼자 있을 때 여기도 쑤시고 그래?”
응? 태주야. 구멍으로 자위하냐고. 대답이 늦어 손끝으로 안쪽을 짓누르자 정태주가 허리를 튕기며 입을 열었다.
“아흣…! 안 해요!”
손 바로. 엉덩이를 쥔 손가락이 미끄러지자 서늘한 지적이 뒤따랐다.
사정 직후라 힘도 없었고 땀 때문에 제대로 붙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무심코 손톱을 세우려 하자, 남자가 혀를 차며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정태주는 얼른 손을 가져와 제 상체 아래로 숨기듯이 받쳤다. 그에 슬쩍 웃은 계범호가 손가락에 묻은 정액을 태주의 뒤에 묻혔다. 주변에 묻은 것까지 살뜰히 끌어모아 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남자는 입을 열었다.
“앞이든 뒤든 함부로 만지지 마, 태주야.”
“으읏….”
내 거잖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으나 계범호의 눈은 어둡게 빛났다. 그는 터질 것처럼 부푼 제 성기를 가볍게 문지르고는 태주의 엉덩이 사이에 걸쳐놓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자 타액과 자기 정액으로 젖은 태주의 구멍이 움찔거렸다. 그것을 빤히 보며 계범호는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었다.
공들여 풀어놓은 것과 달리 삽입은 거칠었다. 좆을 더 깊이, 더 많이 정태주에게 밀어 넣고 싶다는 욕망이 계범호를 채웠다. 그는 얄팍한 허리를 강하게 누르고 태주가 몸을 조금이라도 뒤틀면 엉덩이를 때렸다,
“아흑, 윽, 윽….”
억눌린 신음을 내던 정태주가 뒤로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제 골반을 쥔 남자의 손을 겨우 붙잡고 매달리듯 움켜쥐었다. 계범호는 그 손을 잠깐 보다가 태주의 배 아래로 팔을 넣어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으로 서서 허리를 굽힌 자세로 몇 번 추삽질을 했다. 그러나 태주가 자꾸 휘청거리는 바람에 좆이 빠져나와 엉덩이로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자세 제대로 안 잡아?”
조급한 투로 질책하며 남자가 태주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나 막상 얼굴이 보이자 남자는 열중하던 허릿짓도 멈추고 입을 맞췄다.
“으응, 으….”
입가로 흘러내린 타액을 핥아 올리고 계범호는 가늘게 뜬 태주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는 온도가 뜨거워 연거푸 입술을 부딪었다.
“태주야.”
낮은 부름에 태주가 풀어진 눈으로 올려다보았으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맞추었다.
그런 부드러운 순간이 몇 있었으나, 계범호는 그날 집요하고 거칠게 굴었다. 태주의 사정을 통제하고 태주가 가장 느끼는 부분을 폭력적일 정도로 자극했다.
“하읏, 으…. 싸도 돼요? 읏, 네?”
남자와 함께 사정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정태주는 몸을 웅크리며 괴로워했다. 엎드린 채였더라면 참아, 하고 매정히 말했을 텐데 마주 보는 자세로 물으니 좀 달랐다. 계범호는 눈가가 발개진 채 저를 쳐다보는 얼굴을 보며 그래, 했다.
“흐읏….”
허락을 하자마자 곧게 선 성기에서 정액이 튀었다. 헐떡이는 태주를 보며 남자는 힘주어 턱을 다물었다.
태주의 발목을 어깨에 걸친 그가 위에서 아래로 성기를 내리찍었다. 퍽, 퍽 전립선을 쑤셔 박는 좆에 정태주가 발버둥을 쳤다.
“아악! 아! 아직, 지금 안 돼요. 흐으윽….”
붉은 눈가가 잔뜩 젖었다. 태주는 숫제 공포에 질린 듯한 얼굴로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냈으나 무거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벌을 주듯 더욱 무게를 실어 박으며 경련하는 몸을 완전히 깔아뭉갰다.
“하윽, 비, 비켜요, 흐으으. 씨발, 좀….”
태주는 자신이 욕을 하는 것도 몰랐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좀 전의 사정으로 예민해진 몸에 고통스러운 쾌감이 쏟아졌다. 더는 올라갈 수 없는데, 끊임없이 태주를 밀어냈다.
내벽이 마구 움찔거리며 좆을 끊어먹을 듯 물어와 계범호 역시 강한 쾌감을 느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좆질을 하던 때, 정태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태주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소리만 내뱉었다. 그리고 후드득, 꼿꼿이 선 성기에서 맑은 액체를 쏟아냈다.
“흐으.”
얕은 신음을 내뱉은 정태주의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계범호는 불가항력처럼 사정했다. 커다란 흉곽을 들썩이며 그가 거칠게 속삭였다.
“씨발, 태주야.”
“…….”
“뭘 싸는 거야 지금.”
맑은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는 정태주의 좆을 노려보며 계범호의 뺨에 힘이 들어갔다.
정태주는 멍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힘없는 시선이 투명한 액체로 젖은 제 몸과 계범호의 몸, 짙게 얼룩이 진 침대 시트에 차례로 닿았다.
이내 정태주는 눈을 크게 뜨고 계범호를 올려다봤다. 어찌할 줄을 모른 채 자신만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보며 계범호는 입 안이 말랐다. 그는 혀를 굴리고 난 다음에야 낮은 음성을 흘렸다.
“아주머니가 우리 붙어먹는 거 다 알겠네.”
눈을 크게 뜨며 경악하는 얼굴도 볼만했다. 계범호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축축이 젖은 정태주의 아랫배에 손바닥을 댔다.
태주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에 남자의 팔에 느슨히 걸쳐져 있던 다리가 침대로 툭 떨어졌다. 제 허벅지 뒤쪽에 닿는 이불이 축축해 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마주친 계범호의 얼굴이 사나웠으나 태주는 알았다. 그는 자신이 이상한 것을 침대에 싸서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치미는 성욕 때문이었다.
“오줌 싼 줄 아시겠죠….”
태주의 말에 남자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나운 기운을 웃음기로 덮은 채 그가 태주의 얼굴에 연신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태주의 성기를 살짝 건드렸다.
“아! 지금 안 돼요. 진짜…. 진짜 아파요.”
“아픈 게 아닌 것 같은데.”
기겁하는 정태주를 보며 계범호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조금만 문질러 줘도 또 그걸 쌀 것 같았는데. 아쉬웠다.
손을 거두었으나 정태주는 물기 젖은 눈동자로 계속 그를 경계했다. 계범호는 픽, 웃으며 “알았어. 안 건드려.” 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발기한 성기가 묵직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남자는 혀를 차며 속옷을 주워 입었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물병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태주의 손에 쥐여 주며 침대로 올라왔다.
목이 말랐던지 정태주는 입을 떼지 않고 단번에 물을 반쯤 비워냈다. 그때마다 움직이는 목젖에 이를 박아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땀과 눈물로 젖은 얼굴이 불쌍해 보여 그대로 두었다.
계범호는 태주가 마시고 남은 물을 모두 비우고는 침대 아래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힘없이 늘어진 정태주의 몸을 제게 올리고 베개에 기대어 앉았다.
잠깐 경계하는 듯하던 정태주는 그의 손이 등을 토닥이기만 하자 편한 자세를 찾아 뒤척이더니 이내 그의 어깨에 뺨을 대고 축 늘어졌다. 남자는 그런 태주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다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우리 태주는 이해하기가 좀 어렵네.”
예에? 정태주는 만사가 귀찮아 대강 말을 내뱉었다.
“출장 간다니까 좋아하더니, 왜 기다려.”
“큼, 좋아한 적은 없는데요.”
태주는 시치미를 뗐다. 그런데 등을 쓰다듬던 손길이 돌연 엉덩이를 꽉 움켜쥐는 바람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계범호는 그런 자신을 비웃는 듯하다가 물끄러미 시선을 줬다.
“서운하긴 왜 서운하고.”
남자의 손이 태주의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나는 그냥 돈 많이 주는 손님 아니었나.”
낮은 음성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질문한 계범호는 무심한 낯을 하고 있었으나 정태주는 차츰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태주에게 그다지 답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태주는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취해서 헛소리한 거예요. 기억도 잘 안 나요.”
“그래?”
“네.”
냉큼 대답하는 정태주를 보며 계범호의 눈이 슬쩍 휘어졌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 뻔했다.
“진짜 서운했나 보네.”
계범호가 놀리듯 말하니 정태주도 울컥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이 서운했다고 말하면 좀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태주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하니 남자의 고개가 따라왔다. 그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게 자꾸 삐져.”
“아닌데요.”
불퉁한 말을 남자는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땀에 젖은 태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네 편들어 주는 건 쉽지.”
이제 나는 손님도 아닌데. 그 말을 하는 남자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뿐일까. 좆도 빨아 주고, 구멍도 빨아 주고….”
“구멍은 안 빨아 주셔도 돼요.”
태주가 거절했으나 계범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아. 젖도 빨아 줘야겠네.” 하고 불쑥 고개를 숙였다.
“아!”
유두를 강하게 빨아들이는 그의 어깨를 다급히 붙잡자, 그가 고개를 비틀어 태주를 올려다봤다. 날카로워 보이는 이가 조그만 살점을 물어뜯을 것 같아 태주는 얌전히 손을 내렸다.
툭툭. 칭찬하듯 가볍게 엉덩이를 두드린 계범호가 정태주를 그대로 뒤로 눕혔다. 그리고 말했던 것을 모두 지켰다.
***
다음 날 태주는 여권을 만들러 나가지 못했다. 전날 했던 섹스가 무리가 되어 몸에 열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계범호는 원래 출장 후 쉴 계획이었는지는 몰라도 태주의 옆을 지켰다.
척. 남자가 욕실에서 적셔 온 질척한 물수건을 그대로 이마에 올려놓았다. 주르륵 흐르는 물기를 손으로 닦으며 태주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런 거 안 해도 돼요.”
“몸이 좀 약한가.”
그가 태주를 느릿하게 훑어보며 혀를 찼다.
누구 때문인데.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태주는 덤덤히 말했다.
“섹스 심하게 하면 가끔 이래요.”
그 말에 남자는 미간을 좁혔다. 뭘 얼마나 했다고. 뻔뻔히 중얼거린 남자가 큰 손으로 태주의 뺨과 목덜미를 만졌다. 그러곤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 주었다.
이불은 어제 계범호가 교체했기 때문에 보송했다. 태주도 당연히 그를 도우려 했었으나 세탁기에 젖은 이불을 넣어 돌리는 것까지가 한계였다. 그대로 주저앉은 태주를 계범호는 달랑 들어 욕조로 옮겨놓고 침대 정리를 마쳤다.
“나랑 하고?”
태주가 드문드문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그가 문득 물었다.
“…제가 누구랑 해요, 그럼.”
음. 계범호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열이 올라 얼굴이 붉은 정태주를 내려다보던 그는 물수건에서 관자놀이까지 흐른 물을 손바닥으로 대충 닦아내고, “쉬어.” 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태주는 눈을 깜박였다. 잠을 청해 보려 눈을 감았으나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마당에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태주가 눈을 뜬 것은 겨우 한 시간 전이었다.
빈 옆자리를 확인하고 방 밖으로 나가며 계범호는 출근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주방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마침 잘됐다는 듯 식탁으로 손짓했다.
‘죽 먹고, 먹어. 아주머니께서 사다 주고 가셨어.’
태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야채죽과 그 옆에 놓인 알약을 멍하게 보았다.
‘왜요?’
‘뭘 왜야.’
계범호는 웃는 듯하더니, 태주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의 손이 조금 차게 느껴져 태주는 자신이 열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제의 섹스가 워낙 격렬했으므로 몸이 고장 날 만하다는 생각도 뒤따랐다.
‘근데 죽 먹을 필요는 없는데요.’
‘해 주신 거니까 먹어 그냥.’
엡. 대답하느라 열었던 입으로 숟가락이 쏙 들어온 탓에 발음이 이상해졌다. 남자는 수저를 쥔 태주의 손을 놓고는 물을 떠다 주었다.
그는 죽을 전부 비운 태주가 약을 삼키는 것까지 물끄러미 지켜봤다. 물수건을 얹어 주는 것도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태주가 많이 아프다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태주는 고작 섹스 때문에 몸에 열이 좀 올랐을 뿐이었다.
이럴 때 죽과 해열제를 먹은 것은 처음이었다. 축축한 물수건을 이마에 얹는 것도 마찬가지다.
“…….”
태주는 또 주륵, 콧대로 흘러내린 물줄기를 훔치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방 안은 너무 어둡고 썰렁했다.
결국 정태주는 몸을 일으켰다. 툭. 침대로 무겁게 떨어진 물수건을 욕실에 넣어두고 밖으로 나갔는데, 계범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재에 있나. 태주는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그는 서재에 있었다.
“왜. 안 자?”
컴퓨터를 보고 있던 남자가 태주에게 시선을 줬다.
“저 일어난 지 한 시간도 안 됐어요.”
태주의 말에 그가 옅게 웃었다. 그러더니 문가에 멀뚱히 선 태주를 보며 물었다.
“놀아 줘?”
“…아뇨.”
콧등을 구긴 태주는 돌아서서 거실로 향했다.
태주는 소파 한쪽에 앉아 TV를 틀고는 흘긋, 복도로 시선을 줬다. 그런데 계범호가 마침 딱 거기 서 있는 것이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일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안 해도 돼.”
그가 곧장 걸어와 태주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좋지 않아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이상하게도 조금 좋아졌다.
남자에게 리모컨을 주고 나서 태주는 탁자로 손을 뻗었다. 어제 그가 사 왔던 파인애플 과자를 먹어 볼 생각이었다. 부스럭거리며 그걸 열고 있으니 계범호가 시선을 줬다.
“TV 안 봐?”
“아무거나 봐도 되는데요.”
그래? 무심히 대답한 계범호가 탁자로 리모컨을 올려놓았다. 그 역시 TV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저 이거 처음 먹어 봐요.”
“그래.”
알고 있다는 듯한 투였다. 태주는 자신이 어제 그런 말을 했던가, 하고 생각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마실 거 가지고 오려고요. 뭐 드실래요?”
“비실비실한 게 가만히 있지를 않네.”
“…저 별로 아픈 거 아니에요. 전에는 일도 하고 잘 돌아다녔고요.”
반박하듯 내뱉은 말인데 문득 태주는 가슴께에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심장이 묵직해지는 듯한, 묘한 기분.
싫은 기분 같아 태주는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정태주는 주방에서 쟁반과 컵 두 개, 2리터짜리 우유를 챙겼다. 과자도 몇 개 쟁반에 올려 거실로 가지고 갔다.
태주는 탁자에 쟁반을 올려놓고 바닥에 앉았다. 뒤쪽 소파에 앉은 남자는 바닥에 앉은 태주를 잠깐 보는가 싶더니 불쑥 몸을 일으켰다.
복도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이불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태주의 몸 위로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이불 뭉치에 파묻힌 태주가 주섬주섬 이불을 정리하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탁자는 넓은 편이었으나 남자는 태주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무릎이 반쯤 겹쳐졌지만 태주는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거 맛있네요.”
TV에서는 이름 모를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태주와 남자는 그것에 이따금 시선을 주며 외국 과자를 먹었다. 어느새 빈 과자 봉지가 수북이 쌓였다.
“매운 거 먹고 싶다….”
“뭐.”
계범호가 고개를 기울여 태주를 쳐다봤다. 태주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라면 부숴 먹을까요?”
그 말에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주의 뺨을 거칠게 문지르고는 넓은 보폭으로 주방에 다녀왔다.
라면 세 개를 손에 들고 온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조금 전과 달리 태주와 간격이 약간 떴다. 태주는 허전하게 느껴지는 허벅지를 살짝 문지르다가 슬금슬금 남자의 옆으로 붙었다.
열이 내리는 것인지 조금 더워져서 이불을 치우자 남자가 당연한 듯이 태주의 어깨를 감쌌다.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손날로 훔쳐냈다.
무관심 속에서 떠드는 TV 소리뿐, 대화는 없었다. 그러나 바라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언젠가는 의심했던 적도 있었으나 태주는 이제 확실히 알았다.
계범호는 자신을 아꼈다. 제게 잔인했던 순간에도 주었던 다정은 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가.
어제 새벽, 태주는 문득 빈자리를 느꼈다. 눈을 떠 보니 계범호는 없었다. 한참 비어 있던 듯 온기가 없는 자리를 만져 보다가 몸을 일으켰었다.
남자는 거실 소파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 그의 형체가 꼭 커다란 바위처럼 보였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그도 자신을 발견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물끄러미 쳐다보는가 싶던 그가 손을 뻗었다. 태주는 걸음을 옮겼다.
옆에 앉자 큰 손이 자연스럽게 이마를 짚었다. 목덜미까지 짚어본 뒤 그는 태주의 어깨에 팔을 내려놓았다.
새벽에 하는 통화면 어딘가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평범한 일 얘기였다. 굳이 이 시간에 통화를 하는 것을 보면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태주는 여권을 떠올렸다. 결심했다가 못 가게 되니 또 며칠이 어영부영 흘러버렸다. 내일은 여권을 만들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계범호의 통화가 끝났다.
‘통화 소리에 깼나.’
그리 섬세하지도 배려심이 깊지도 않은 남자가 침실 밖 복도도, 그 옆의 서재도 아닌 거실로 나와 통화를 한 것은 자신을 깨우지 않기 위함이었나 보다. 창밖의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이른 아침 일어나는 그가 가장 첫 번째로 하는 일이 블라인드를 내리는 일인 것처럼.
‘아뇨.’
그럼 왜 나왔냐는 듯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태주는 대답했다.
‘물 마시려고요.’
거짓말이었다.
태주 스스로도 잠깐 옆자리가 비었다고 남자를 찾아 밖으로 나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출장 갔을 때 그렇게나 허전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와 함께 있을 때 태주는 편하지 않았다. 몸과 정신 모두 그랬는데…. 그런 건데, 왜 자신은 필요 이상으로 그를 찾는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분명 계범호에게 반감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화가 났던 적도 있고, 모욕감을 느낀 적도 많았다.
그런데 왜.
“인상 펴시고요-. 자, 정면 보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태주는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커다란 카메라 뒤쪽에 선 사람이 카메라와 자신을 번갈아 보며 손짓했다.
“고개 살짝 왼쪽으로요.”
태주는 손짓에 따라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예, 찍겠습니다. 하나, 둘.”
섬광이 번쩍였다. 태주는 움찔 눈꺼풀을 떨었다. 사진을 확인하는 듯하던 남자가 다시 한번만 더 찍자고 말했다.
“하나, 둘.”
정태주는 이번엔 조금 더 눈에 힘을 주고 정면을 응시했다. 하얀 플래시가 터지고, “네.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는 말을 들었다.
“네.”
태주는 두꺼운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동그란 의자 몇 개가 곧장 놓여 있어 그곳에 앉아 허공을 멀뚱히 보았다.
정태주는 지난 새벽 마음을 먹었던 대로 여권을 만들러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나왔다가 구청 근처에 있는 사진관에 ‘여권 사진’이라고 크게 글씨가 보여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려냈다. 그래서 그 사진관으로 들어와 사진을 찍은 참이었다.
계범호에게는 물론 허락을 받았다. 그것도 새벽의 일이었다.
자다가 깬 이후 시간이 좀 지나니 허기가 졌었다. 그래서 시리얼을 주섬주섬 꺼내는데, 주방 입구에 멈춰 선 계범호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물?’
그는 태주의 손에 들린 시리얼 박스를 보며 재밌다는 듯 물었다. 태주는 멋쩍게 ‘좀 배고픈 것 같아서요.’ 하고는 잠깐 눈을 굴리다 말했다.
‘저 내일 나갔다 와도 돼요?’
‘어디.’
‘여권 만들고 오게요.’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선한 태도였다. 그래서 그가 미행을 붙였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태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액자 몇 개가 걸린 사진관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줬다. 새카만 차가 길 건너에 보였다.
“역시….”
중얼거리는데 그 차가 곧장 출발했다. 신호에 걸렸던 것뿐인 듯했다. 조금 멋쩍어서 태주는 눈을 굴리며 사진관을 구경했다.
증명사진도 여러 개가 있었지만 가족사진도 그만큼 많았다. 태주는 그중에서 대가족이 담긴 액자에 물끄러미 시선을 줬다. 프레임 가득 사람이 있었다. 조부모와 부모, 형제일 낯선 사람들의 사진을 멍하게 보다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다 됐습니다.”
“네.”
태주는 계산을 하고 나와 얇은 봉투에 담긴 사진을 확인했다.
“…….”
플래시 때문에 눈에 힘을 바짝 줬더니 사진이 좀…. 눈은 부리부리하고, 머리는 삐죽삐죽 솟아 있는 게 약간 범죄자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계범호만 할까.
태주는 남자의 얼굴을 위안 삼으며 구청으로 향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면서는 슬쩍슬쩍 사람 구경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 혼자 있게 된 것이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용건 없이도 혼자 나가게 해 주려나.
무심코 생각할 때, 제 대기 번호가 떴다.
여권을 만드는 것은 별것 없었다. 며칠 뒤 찾으러 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묘하게 들떴을 뿐이다.
건물 밖으로 나와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는 옅은 주황빛이 섞여 있었다. 새벽에 깨서 움직이다가 아침에 잠든 바람에 늦잠을 잤고, 늦게 집에서 나선 뒤 생각지 못하게 사진까지 찍게 되어 벌써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
태주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왜.
“퇴근 중이세요?”
용건이 있는 물음 같았는지 계범호는 답하지 않았다. 정태주는 조금 쌀쌀한 공기에 잔기침을 내뱉고는 물었다.
“오늘 외식하면 안 돼요?”
그 말에 계범호는 거기 있어, 1시간 내로 갈게. 하고 말했다.
위치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온다는 것을 보면 역시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긴 했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정태주는 조금 들떴다. 뭐 먹자고 하지. 삼겹살 먹으러 가자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찬바람이 휭- 불었다. 얇은 재킷 하나만 입은 태주는 팔짱을 끼고 두리번거리다 근처에 있는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음료를 받고 나서는 가까운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어 게임을 했다. 조그만 화면에 한창 몰입했을 때였다.
“…태주?”
제 이름이 들렸다. 태주는 흘금거리며 뒤를 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사이 캐릭터가 죽는 소리가 났다.
“태주야!”
태주 못지않게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뜬 사람은, 경준이었다.
“어… 형.”
정태주는 조금 얼떨떨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김경준은 무척이나 반갑게 태주의 팔을 붙잡고 얼굴을 살피다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물었다.
“너 괜찮아? 호텔에서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날 네가 계속 안 보여서….”
“네? 언제요?”
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경준은 태주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잠깐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전에 나간 거구나.”
다행이다. 태주는 경준이 속삭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물었다.
“그날이 뭐예요?”
“갑자기 경찰 들이닥쳐서 난리였거든. 근데 깡패들은 싹 빠지고, 사장은 자리에 없고. 완전 엉망진창이었어.”
아…. 태주는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자신과 계범호가 관련된 일이었다. 경준은 모르는 듯했고, 다른 직원들 또한 사정을 모르는 것 같았다.
“형은 그럼 어떻게 지내요?”
“그냥, 다른 가게에서 일하고 있어.”
그가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 몰라도 그는 “매화보다는 훨씬 나은 곳이야.” 하고 덧붙였다. 그러더니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너는 잘 지내? 빚은 완전히 다 갚은 거 맞지?”
“네.”
“잘됐다.”
경준이 웃었다. 정말로 축하해 주는 듯 밝은 표정이었다. 그동안 때때로 자신의 걱정을 하며 소식을 궁금해했던 것처럼도 보였다.
“…….”
태주는 경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질투하고 시기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걱정했으니까.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할 수가 있는 것인지, 당시의 태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서러운 마음을 태주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제 편 하나 없이 쓸쓸하고 외로웠던 그 마음.
“어…. 태주야. 저기.”
돌연 경준이 창밖을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태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요즘 태주가 가장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항상 어두운 계통의 정장을 입는, 인상이 무섭고 거대한 남자.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흰 연기를 내뱉고 있던 계범호는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형. 저 가 볼게요.”
“응. 저기, 태주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경준이 망설이며 태주를 붙잡았다.
“내가… 전에는 나쁜 마음이 들어서 좀, 못나게 굴었어.”
“…….”
태주는 머쓱하게 웃는 경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진짜 고마웠어요, 형.”
경준이 눈을 크게 떴다. 태주는 잘 지내요, 하고 돌아섰다.
태주는 이제 경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에게 사람이 가지는 감정은 종종 정반대의 것들이 뒤섞이는 건지도 몰랐다. 가끔은 이성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가 통제 불능이 될 때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준도, 계범호도, 하물며 자신도 비슷했다.
계범호를 무서워하고 불편해하면서도, 그가 없는 시간이 싫었다.
주고받는 것을 명확히 정해놓았으면서 그것만 주지 않았다. 지금도,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계범호가 제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리도 화가 나고 서운했던 것이다.
바깥으로 나온 태주는 싸늘한 공기에 종종걸음을 걸었다. 계범호는 태주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주며 담뱃재를 털었다. 늘어뜨린 커다란 손에서부터 재가 흩날리듯 떨어졌다.
태주가 근처에 멈춰 서자 남자는 볼이 팰 만큼 깊이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인 다음 꽁초를 버렸다.
“친구?”
그리고 흰 연기와 함께 물었다.
“전에 거기 있을 때, 같이 방 쓰던 형이요.”
음. 계범호는 목을 울리며 유리창 안쪽으로 잠깐 시선을 줬다. 태주는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어 몸을 기울인 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왜요?”
“거짓말인가 해서.”
“예? 아니에요!”
정태주가 발끈하자 계범호는 픽, 웃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짓말 아닌 것도 거슬리고.”
“…….”
“우연히 만나서 반가웠어?”
“…반갑긴 했는데, 연락처 받고 뭐 그런 건 안 했어요.”
변명처럼 말을 내뱉었으나 남자의 눈빛은 어두웠다. 감시까지 붙여 놓았으면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난 것도 기분 나빠하는 거였다. 태주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쉬움을 담아 묻기만 했다.
“…집에 가요, 지금?”
그러자 빤히 시선을 주던 계범호가 아니, 하고 웃었다.
반색한 태주는 길가에 선 그의 차에 얼른 올라탔다. 뒤따라 차에 타면서 남자는 말했다.
“누구든 너무 반가워하지는 말고.”
조금도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으나 태주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욕은 조금 이따가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차차 해볼 생각이다.
“어흐, 추워.”
히터를 틀어놓은 것은 아니라서 차 안도 바깥 못지않게 서늘했다. 얇게 입은 태주의 잘못이긴 했다.
덜덜 떠는 태주를 보던 남자가 혀를 차며 팔을 벌렸다. 태주는 계범호의 옆으로 찰싹 달라붙어 두툼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의 팔이 등을 감쌌다.
태주는 단단한 가슴에 뺨을 댄 채 눈을 깜박였다.
경준을 만나니 매화에서 있었던 일과 감정 몇 가지가 생생히 떠올랐었다. 그래서 더 추위를 느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 몸을 감싸는 무거운 온기는 추운 몸을 금방 진정시켰다. 묘하게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감을 줬다.
태주는 인정했다.
필요 이상으로, 자신은 계범호가 필요했다.
어디서 비롯된 마음이냐 하면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막상 하나를 고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고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에게 전부 주기로 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