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태주.”
“으….”
나직한 목소리에 태주는 신음만 흘렸다.
“일어나.”
커다란 손이 이마를 쓸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침대 맡에 앉은 계범호가 보였다.
“일어났어요….”
쉰 목소리가 나와 헛기침을 하니 그가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잠깐 목을 만지던 커다란 손은 뒤로 파고들어 목뒤를 당겼다. 강제로 일어나 앉게 된 태주에게 그가 말했다.
“씻고 나와.”
“네.”
계범호의 등을 보며 정태주는 눈을 비볐다. 묘한 감각이 느껴지는 뺨도 더듬어 본 다음 제 어깨를 주물렀다.
맞은 건 고작 뺨 한 대인데 왜 온몸이 아픈 것인지 모르겠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태주는 욕실로 갔다.
곧장 마주한 제 꼴은 처참했다. 얼굴의 반쪽이 완전히 부어올라 멍이 든 모습이, 뺨을 한 대 맞은 게 아니라 교통사고라도 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영 불쌍해 보이는 제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태주는 입고 있던 팬티를 끌어내렸다. 옷을 벗은 채 잠들어서 벗을 것은 그게 다였다.
태주는 맨몸으로 욕조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쏴아아. 물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자 어젯밤 피 묻은 얼굴을 씻을 때가 떠올랐다.
얼굴이 그렇게 피범벅이 된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멍하게 물을 끼얹고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 앞에 서 있던 계범호가 팔을 붙잡고 곧장 입을 맞췄었다. 자신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뺨과 함께 부은 입술을 빨고 혀를 밀어 넣는 행위에 자신은 남자의 옷자락을 쥐었다. 얼굴이 온통 욱신거려 고개가 무심코 뒤로 빠지자, 계범호는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고 손을 들길래, 눈을 질끈 감았었다. 반은 반사적인 행동이었고, 반은 이제 자신을 좀 험하게 다룰 수도 있겠단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런데 계범호는 뺨을 감싸고 입을 벌리게 했다. 그 안으로 밀어 넣은 그의 손가락이 욱신거리는 볼 안쪽을 더듬었다.
‘좀 찢어졌네.’
그가 옅은 핏기가 번진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입맞춤에서 비린 맛을 느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픈 곳.’
남자는 또 물었다.
‘…얼굴 다 아파요.’
조그만 목소리로 한 말에는 피식 웃었다. 그는 화끈거리는 뺨을 잠깐 만지다가 코밑을 손으로 쓸어본 뒤 손을 거뒀다.
그리고 제 손목을 잡고 방으로 갔다. 손목과 손을 뒤덮은 커다란 손을 보며 태주는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방패가 되어 주고, 저 대신 복수까지 해 주는 남자에게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지 않겠는가.
침대로 가자마자 옷을 벗고 팬티를 벗으려는데, 계범호가 물었다.
‘다 벗으려고?’
‘네? 섹스….’
주저하며 한 말에 그가 비스듬한 시선을 줬다.
‘태주야, 왜 팔려고 해.’
내 건데. 나직이 말한 남자는 자신을 뒤로 밀어 눕히고, 투박한 손길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계범호는 잔인했다.
그는 자신에게 일부러 불편한 진실을 알렸고, 틈을 주었고, 결국 도망치게 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바뀌지 않는 현실을 보게 만들려고. 그가 없으면 더욱 엉망이 될 삶을 보여주려고.
그러나 정태주는 계범호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매달린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전부 주기로 한 약속에도 후회가 없었다.
어제 그의 집을 벗어나며 느꼈던 불안감은 사라졌고,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었다는 편안함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
무서운 남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왜 편안함까지 느끼지?
태주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아서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남자의 옷을 꺼내어 입었다. 허리끈을 졸라매며 방 밖으로 나가자 희미한 음식 냄새가 났다.
냄새가 나는 곳은 주방이었다. 포장 용기가 놓인 테이블에 계범호가 앉아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태주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와서 먹어.”
“네.”
태주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뽀얀 국물의 국밥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며 숟가락으로 휘휘 젓는데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계범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식탁에 가려 시선이 닿지는 않지만 태주는 괜히 발목을 꼬았다.
“옷 없어서 입었어요.”
“그래.”
남자는 나직이 대답했다. 태주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국물을 떠먹었다.
“아!”
그런데 뜨거운 국물이 찢어진 볼 안쪽에 닿자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플라스틱 숟가락이라 소리가 크지는 않았으나 태주는 곧장 눈치를 살폈다. 남자의 미간이 살짝 패였다.
“죄송….”
태주는 얼버무리듯 말을 끝맺다가, 남자가 몇 번 지적했던 게 떠올라 “죄송합니다.” 하고 똑바로 말했다. 그러고 주섬주섬 숟가락을 쥐는데 계범호가 물끄러미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누가 봐도 감금당한 사람 꼴이네.”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와 부은 뺨, 한참 내려간 어깨선에 닿았다. 이내 서늘한 눈매가 가볍게 휘었다.
“잠은 잘 잤고?”
“네.”
잠깐 바라보던 계범호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내밀자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부은 뺨에 손을 얹고 귓바퀴를 짓궂게 손끝으로 튕기며 말했다.
“지금 몇 신 줄은 알아?”
“몇 신데요?”
태주가 남자의 눈짓에 시계를 돌아봤다. 두 시였다.
“어르신께 전화드리고 와.”
“아!”
태주는 눈을 크게 떴다.
할머니. 의자를 뒤로 끌며 벌떡 일어난 태주는 제 휴대폰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거실 탁자 위에서 휴대폰을 찾자마자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는 태주의 말대로 퇴원하지 않았고, 며칠 더 병원에 있기로 했다고 했다. 병원에서 공짜로 무슨 검사를 해 준다는데 그걸 받기로 했다고.
“공짜로? 아, 복지 뭐 그런 거래? 이름 물어보고 나중에 말해 줘. 응, 결과도.”
전화를 끊기 전 태주는 할머니에게 일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앞으로 서울에서 지낼 거라 당분간 얼굴 보기 어렵다는 말도 덤덤히 내뱉었다.
그런 다음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식사를 했다. 조금 식은 국은 아까보다 넘기기 훨씬 편했다. 계범호는 태주가 느릿한 속도로 먹는 것을 틈틈이 보다가, 얼굴이 아파 반만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았을 때는 혀를 찼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남자가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복수하러 가야지.”
정태주는 멍한 상태로 계범호를 따라나섰다.
그의 차에 올라서도 정신은 몽롱했다. 잠이 덜 깬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렇게나 하고 싶던 복수를, 남자가 꼭 어디 드라이브라도 하러 가자는 것처럼 태연히 말해서였다.
태주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혹시 이게 정말 드라이브는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데 차가 컨테이너 박스가 즐비한 곳에 멈춰 섰을 때부터는 그 생각이 사라졌다.
차에서 내리자 선선한 공기가 태주를 맞았다. 바다 근처라 그런 것 같았는데, 반팔에 긴 바지 차림에는 적당히 시원했다.
숨을 들이마시니 짠 냄새가 코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계범호는 자신에게 흘긋 시선을 주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불이 켜진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태주는 조금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를 뒤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얼굴에서 감정을 들어냈다.
정태주는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눈으로 훑었다. 작년 달력 하나만 벽에 걸려 있을 뿐 텅 빈 내부에는 사람들뿐이었다. 덩치 큰 사내들 몇 명과 계범호, 그리고 가장 안쪽에 무릎을 꿇은 중년의 사내 두 명.
“계, 계 전무. 왜 이래. 어?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박의성이 쉰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의 조덕현은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린 채 가쁜 숨만 내쉴 뿐이었다.
태주는 그 자리에 서서, 계범호의 커다란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박의성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옆에 선 사내들을 싸늘히 돌아보았다.
“아직 말을 하네.”
“죄송합니다, 형님.”
사내들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혀를 찬 계범호는 박의성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박의성이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폈다. 겁에 질린 시선은 이내 멀찍이 선 정태주에게 닿았다.
“설마 저 창놈 때문에 그래? 어제 우리 아무 짓도 안 했어! 계 전무 얼굴 봐서 얌전히 돌려보냈는데….”
“박 사장님.”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에 박 사장의 입이 멈췄다. 계범호는 표정 없이 그를 보며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하시진 않았습니다.”
“아…. 그거?”
박의성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가 곧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계 전무도 저놈 내 가게에서 건진 게 아닌… 어어, 잠깐만, 계 전무! 회장님도 자네 이러는 거 아셔?”
박 사장은 계범호가 장갑을 끼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망가고 싶은 듯했으나 등 뒤로 손이 묶인 채라 그것도 어려웠다. 계범호는 그 벌레 같은 모습을 보며 조금 웃다가,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이 나불거리던 입 위로 내리꽂혔다.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내며 계범호는 싸늘하게 눈을 빛냈다.
처음엔 피 끓는 비명을 지르던 박 사장은 금방 흰자위를 보이며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계범호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잘 살던 애를, 씨발.”
짓씹듯 중얼거린 남자의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
정태주는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계범호는 박의성이나 조덕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던 게 아니었나. 오히려 그들이 만든 자신의 상황을 반기고 이용하지 않았던가.
툭. 꼭 쓰레기라도 버리듯 내던진 손길에 박의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주는 그것에 시선을 주었다. 어제 자신을 보며 킬킬대던 얼굴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영장은.”
“내일 아침 나온답니다. 오후에 바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계범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손에 사내 하나가 한 뼘만 한 칼을 올려놓았다.
계범호는 익숙하게 칼을 쥐며 조덕현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죽은 듯 축 늘어져 있던 조덕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 저는 그냥 박 사장이 하자고 해서 그런 겁니다. 이제 이런 짓 그만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박 사장이 괜찮다고….”
덜덜 떨며 말하는 중년의 남자를 쳐다보던 계범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제 부하들에게 “일 제대로 안 해?” 하고 서늘히 질책했다.
조덕현은 말을 더 꺼내놓았다가 박의성처럼 맞게 될까 싶어 입을 꽉 다물었다. 계범호는 허리를 굽힌 사내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조덕현을 내려다보았다.
“사장님은 친구분이랑 치고받고 싸우신 겁니다.”
계범호가 공포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조덕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축 늘어진 몸이 그대로 딸려 올라갔다. 칼을 쥔 손이 아래쪽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형광등 불빛에 칼날이 시퍼렇게 빛났다.
정태주는 꿈이라도 꾸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푹- 고기를 써는 것 같은 소리나, 검붉은 입술에서 터져 나온 고통스러운 비명도 먹먹하게 들렸다.
“아악, 허으…. 헉….”
계범호가 옷깃을 놓자 조덕현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핏발선 눈을 부릅뜨고 도망치듯 발로 바닥을 밀어냈다. 손잡이만 남은 칼과 살갗의 틈새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계범호는 그것을 무심히 쳐다보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검은 장갑을 낀 커다란 손에는 번득이는 칼이 새롭게 자리했다.
“태주야.”
나직한 부름에 태주는 움찔 손가락을 떨었다. 배에 꽂힌 칼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남자가 새카만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리 와.”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박 사장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며 보인 감정은 어느새 갈무리되어 있었다.
익숙한 일을 하듯 태연한 그의 얼굴에 시선을 두고, 태주는 걸음을 옮겼다. 발목을 삐끗한 탓에 조금 절긴 해도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남자의 가까이에 섰다.
계범호가 칼등을 잡고 손잡이를 태주 쪽으로 내밀었다. 태주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단단해 보이는 손잡이에 손끝이 닿으려던 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정태주.”
태주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태주의 눈동자 속에서 서로가 뒤엉켰다. 이상한 시간의 흐름으로 찰나가 오래처럼 느껴졌다.
먼저 눈을 깜박인 것은 계범호였다. 시선을 거둔 그는 태주 쪽으로 내밀었던 칼을 가볍게 돌려 쥐고 무릎을 굽혔다. 곧장 날카로운 칼날이 박의성의 옆구리를 쑤셨다.
사람의 몸에 칼이 박히는 모습에서 태주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살갗을 꿰뚫는 소리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피의 색은 이전보다 선명했다.
“가자.”
몸을 일으킨 계범호가 태주의 어깨를 감쌌다.
정태주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옆구리에 칼 하나씩이 꽂힌 두 사람을 보는 얼굴은 덤덤했다.
***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 질 무렵이었다. 태주가 평생을 매달려도 어려울 일이 남자를 통하니 고작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태주의 말에 남자는 물끄러미 시선을 주더니 정수리 위로 큰 손을 내려놓았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고민하듯 태주를 쳐다봤다.
“잠깐 나갔다 올 건데…….”
“도망 안 가요.”
뜸을 들이는 말에 태주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계범호가 웃음을 흘렸다.
“누가 그걸 몰라.”
“아….”
“밥 천천히 먹고, 기다려.”
자기 전에 올게. 남자의 말에 태주는 네, 하고 얌전히 대답했다. 계범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깊이 입을 맞추고 나서야 걸음을 뗐다.
태주는 현관 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욕실로 갔다.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그런 곳에 갔다 왔으니 옷을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김에 샤워도 해야겠다. 커다란 티셔츠를 벗고 허리를 묶은 끈을 풀자 바지가 쑥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대로 바지를 벗다가, 태주는 움직임을 멈췄다. 바지 끝자락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신발을 신고도 발등을 덮을 정도로 길어 이렇게 묻었나 보다.
“…….”
정태주는 붉은 얼룩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남자의 옷이니 함부로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빨래통에 넣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쪽 욕실은 두 번째 쓰는 것인데, 처음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 집 자체가 그랬다. 며칠 지낸 셈인데도 오늘 처음 온 것처럼 새로워 보였다.
태주는 조금 어색한 움직임으로 몸을 씻고 나와, 이번에도 계범호의 옷을 빌려 입었다. 발등을 전부 덮는 긴 바지 대신 반바지를 입자 훨씬 편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태주는 움찔 놀랐다가 조심스럽게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웬 남자가 현관문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는 듯하더니 금방 돌아섰다.
“…배달인가.”
현관문을 열어도 될까. 조금 고민이 됐다.
그런데 뭘 좀 먹으려 냉장고를 열어 보고 나서는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냉장고에는 먹을 게 하나도 없었고, 계범호가 밥을 먹으라고 했으니 저게 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예상대로, 현관문 밖에 놓인 것은 저녁이 맞았다.
메뉴는 죽이었다. 태주는 차곡차곡 쌓인 용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언젠가 계범호가 죽을 보냈던 날이 떠올랐다.
오늘은 속이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죽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태주는 거실 소파 앞의 탁자에 죽을 꺼내 앉았다. 아직 따뜻한 죽을 휘휘 젓다가 무심코 왼쪽으로 씹고 나서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
그다음부터는 조심해서 씹었다. 턱을 움직일 때마다 뺨이 당기고 욱신거려서 왼뺨에 손바닥을 댄 채로 먹었다.
그래도 한 대만 맞은 게 다행이었다.
정태주는 피범벅이 되었던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박의성은 나중엔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맞았고, 둘 다 칼에 찔렸다.
“…….”
죽을 휘젓던 숟가락이 멈췄다.
태주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조금 창백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던 그는 느리게 눈을 굴렸다.
수많은 불빛이 있는 창밖의 야경에 잠깐 시선을 두다가 집 안을 훑었다. 집은 휑할 정도로 넓었다. 에어컨 바람이 조금 서늘한 것 같아 반바지 아래 맨다리를 문지르다가 시선이 벽 선반에 닿았다. 위스키 몇 병이 보였다.
***
“박의성이 정리했다며.”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자기로 된 매끈한 술병을 들며 말했다. 계범호는 제 잔에 맑은 액체가 담기는 것을 보며 예, 회장님 하고 대답했다.
계범호의 맞은편에 앉은 노인은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었다. 계범호와는 오랫동안 연이 닿은 사이이기도 했다. 드러내놓고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을 그가 여러 번 맡은 것이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 양아치 짓을 하지 않습니까.”
이번엔 계범호가 회장의 잔을 채웠다. 회장은 고개를 주억이며 곧장 술잔을 입에 댔다.
“그래. 잘했다. 요즘 세상에 CCTV며 휴대폰이며 눈이 얼마나 많아. 봐줄 때 적당히 했어야지.”
혀를 차던 그가 그런데, 하고 말꼬리를 늘이며 계범호를 빤히 응시했다.
“이유가 그게 아니란 소문이 돌던데.”
“그렇습니까.”
계범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스르르 입꼬리를 올렸다.
“박의성이도 잘못 걸렸네.”
계범호는 미소를 띤 채로 노인의 잔에 술을 채웠다. 몇 번 술을 주고받으며 느린 식사가 이어졌다.
회장은 계범호를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를 했다.
“제대로 자리 만들어 줄 테니 한번 맡아 봐라.”
“작년에 주신 자리도 과분합니다.”
“쯧. 고작 그런 곳에 전무 자리로.”
회장은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계범호를 신임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양지의 권력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러니 회장은 회사 지분을 제외하고는 계범호에게 선물을 아끼지 않았다. 정작 계범호가 썩 관심 없어 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 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일어나야겠다. 내일 오전에 미팅이 있어.”
술잔을 털어 마신 회장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입맛을 다셨다. 주당인 자신과 같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은 계범호 하나라 고작 목만 축인 정도로 술을 마신 게 아쉬운 거였다.
“들어가십시오.”
계범호는 회장을 배웅한 뒤 손목시계를 흘긋 보았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술자리가 끝나 시간이 비었다. 며칠 전이였다면 매화로 걸음을 했을 텐데, 그는 집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어젯밤 정태주는 자면서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마를 만져 보고, 발목과 몸의 다른 곳도 살펴본 후에야 악몽을 꾸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둠 속의 찡그린 얼굴을 그는 한참 바라보았었다.
그런데 오늘 낮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계범호는 이동하는 내내 그 무표정한 얼굴을 곱씹었다. 제집 현관문 앞에 서고 나서야 상념에서 벗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태주가 있을 것이니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계범호는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현관을 지나자마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
소파 앞에 정태주가 구부정히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위스키 한 병과 찌그러진 음료수 캔 몇 개, 과자 몇 개가 너저분히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정태주가 휘청이며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그는 그래, 하고 대답하며 태주의 뺨에 손을 댔다. 불그스름한 뺨은 온도가 뜨거웠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요.”
정태주가 풀린 눈을 깜박이며 그를 빤히 보았다.
“저 나갔다 온 거 아니에요. 이거 배달이에요, 배달.”
모르시겠지만, 요즘엔 배달이 다 돼요. 카드랑 휴대폰만 있으면 집에서도 못 하는 게 없거든요. 모르실 것 같아서요.
주절주절 말을 내뱉는 정태주는 술을 마셔 그런지 간덩이가 좀 부은 것 같았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에게 비스듬히 시선을 주다가 물었다.
“저녁은 먹고 마시는 거야?”
“네.”
정태주가 당당하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밤톨 같은 게. 낮은 웃음을 흘린 그가 따끈한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까 입은 바지에 피 묻었어요.”
태주는 음료수를 탄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또 불쑥 말을 내놓았다.
“버려야겠네.”
“네….”
정태주가 술잔을 쥐는 것을 보며 계범호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한 잔 마실까 해서 걸음을 떼려는데, 문득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
돌아보자 정태주가 울고 있었다. 어제오늘 메말라 있던 눈가와 속눈썹을 빠르게 적시며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진짜, 잘해 보고 싶었는데…. 올해는 검정고시도… 흐윽, 따고 대학도, 가려고 했는데.”
나는 존나, 잘해 보려고 한 건데…, 하고 몹시 서러운 얼굴을 했다.
계범호는 멍든 뺨이 젖는 모습을 보며 담배만 입에 대던 때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눈물을 훔쳐냈다. 미지근하고 축축한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우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도망가고 싶어?”
무심한 투로 묻자 정태주가 질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계범호는 정태주의 옆에 앉아 탁자에 팔꿈치를 괬다.
“그럼. 어르신 병원에 데려다줘?”
“…….”
그 말에 정태주는 눈을 크게 뜨며 반색하는 듯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덕현이랑 박의성, 어떻게 됐어요?”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것을 유심히 보느라 남자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 다 끝났어.”
제법 부드럽게, 위로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정태주는 오히려 얼굴을 구기고 입술을 한참 달싹이다 말했다.
“병원 안 가도 돼요.”
“왜?”
계범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어라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려놓고 정태주는 떨리는 숨만 내뱉었다.
“할머니 얼굴은, 못 볼 것 같아요. 사람 죽여놓고….”
겨우 억눌린 목소리를 낸 정태주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 내어 우느라 입을 벌리고, 눈은 질끈 감았다.
태주의 뺨에 닿은 남자의 손이 축축이 젖어갔다. 제 손을 흘긋 본 계범호는 붉고 동그랗고 축축한 얼굴에 빤히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우리 태주가 나 몰래 사람을 죽였나.”
“…죽여 달라고 했으니까, 제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
“근데 그 새끼들 사람 아니고 쓰레기잖아요.”
정태주가 감은 눈을 번쩍 뜨고 계범호를 바라보았다. 동의를 구하며 크게 뜬 눈 위로 젖은 속눈썹이 무겁게 늘어졌다.
찌르라고 했으면 골치 아파질 뻔했네. 중얼거린 계범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태주의 뺨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
“안 죽었어.”
“…네?”
“둘 다 지금 병원이고, 회복하고는 조사받겠지.”
“아….”
정태주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안도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계범호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태주를 바라보다 팔을 붙잡고 제 옆으로 바짝 끌고 왔다. 그러자 눈을 감고 울던 녀석이 무의식처럼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손뿐만 아니라 이제는 남자의 옷까지 축축하게 적셨다.
그러다 돌연 고개를 번쩍 들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두려워하며 말했다.
“나중에 저한테 질리면, 둘 다 죽여 주세요.”
“…….”
“꼭이요.”
남자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태주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핥았다.
정말 사람을 죽이게 되면 죄책감을 가질 거면서,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두 번째 듣는 부탁임에도 계범호는 피가 끓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뭘 못 해 줄까.”
낮은 음성을 흘린 계범호가 고개를 비틀었다. 짠맛이 나는 입술을 핥고 빨며 혀를 밀어 넣었다. 움찔거리는 정태주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헐렁한 바지 사이로 손을 넣었다. 말랑한 성기를 쥐고 문지르자 맞닿은 입술에서 신음이 울렸다. 계범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지 태주야. 그런 날, 안 올 것 같은데.”
정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마주친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젖은 입술을 열었다.
“그럼 좋고요.”
“…….”
코맹맹이 소리로 하는 말이 뭐라고. 정태주는 그저 보호가 필요한 것뿐일 텐데.
그러나 그 젖은 말이 계범호의 몸 안에서 넘실거리던 무언가를 부추겼다. 성욕인지, 다른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와락 얼굴을 구긴 그가 보이는 대로 살갗을 깨물고 핥게 된 것을 보면 식욕일지도 몰랐다.
“으, 아파요. 아!”
뺨을 붙잡은 손길이 아팠는지 정태주가 발버둥을 쳤다. 계범호는 아쉽게 고개를 뒤로 물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태주 때려 봤자 내 손해지.”
“네.”
냉큼 돌아온 대답에 남자는 웃음을 내뱉었다. 오래 기죽어 있을 정태주가 아니었다.
웃으며 무릎으로 선 계범호가 태주의 허리를 움켜쥐고 소파로 던졌다. 풀썩, 소파에 눕듯이 기댄 태주가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남자는 허공에 뜬 태주의 발목을 붙잡고 바지를 벗겨냈다.
속옷을 입지 않아 성기가 곧장 보였다. 평소였으면 키스만으로도 단단해졌을 것이 말랑한 상태 그대로였다. 술을 많이 마셔 그런 것일 테다.
남자는 태주의 성기를 장난스럽게 튕기다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충동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
정태주가 탄성을 내질렀다.
풋내 나는 성기를 입에 문 계범호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정태주는 손을 꿈지럭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둥을 느리게 핥아 올리자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기분 이상해요….”
“나만 할까.”
좀 빨아 줬다고 술기운도 잊고 부푸는 좆을 씹어 먹고 싶은 기분보다 이상할까. 남자는 태주의 고간에 얼굴을 묻은 채 웃었다.
“으응. 아, 진짜….”
정태주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계범호는 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쾌감에 젖는 것을 응시하며 고개를 움직였다. 동시에 동그란 주머니를 가볍게 만지자 정태주가 실눈을 떴다. 움켜쥐었던 전적이 있어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조였다. 선단을 입 안에서 굴리듯 핥고 프리컴을 뱉어내는 요도구에 혀를 쑤셨다. 묘한 맛에 침이 고여 그것을 몇 번 반복할 때였다.
입 안의 살덩이가 움찔거리더니 미끈거리는 액체를 쏘아냈다. 입 안에 엉겨 붙는 감각에 계범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흐응….”
정태주는 반쯤 눈을 뜨고 신음하고 있었다. 자기가 싼 줄도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을 보며 계범호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미끈거리는 액체를 모아 삼켜내고 귀두를 가볍게 빨자 정태주가 눈을 번쩍 뜨며 다리를 움찔 떨었다.
“아!”
소파 가죽에 달라붙어 있던 살결이 떨어지며 쩍, 하는 소리를 냈다.
계범호는 마저 나온 액체를 모아 삼키며 손끝을 안쪽으로 뻗었다. 도톰한 회음부를 살살 간질이자 정태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저, 싼 것 같은데….”
응. 계범호는 무심히 대답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잘 보이지 않아 태주의 오금을 잡고 밀어 올려 아래가 완전히 드러나게끔 했다. 엉덩이 사이, 촘촘히 주름진 구멍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며 그는 문득 입맛을 다셨다. 뻐근한 아래쪽 사정을 잊을 만큼 식욕이 돋았다.
“아! 뭐, 뭐 하는 거예요!”
곧장 고개를 숙여 엉덩이 사이에 넓게 혀를 대자, 정태주가 기함을 했다. 계범호는 도망치려는 정태주의 허벅지를 가볍게 때렸다.
“가만 안 있어?”
서늘히 말하고는 또다시 얼굴을 묻었다.
좆 빨아 줄 때는 끙끙거리며 좋아했으면서, 정태주는 남자의 혀끝이 주름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도망치려 했다. 그런 움직임이 성가셔 엉덩이를 몇 대 때려 주니 얌전해졌다.
계범호는 움켜쥔 엉덩이를 벌려 혀를 대며, 손가락으로 내벽을 더듬었다. 몰두해 더디게 깜박이는 눈이 뻐근해질 때쯤, 타액으로 적신 구멍은 그의 손가락 세 개도 무리 없이 받아먹었다.
“흐으, 으….”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정태주는 풀어진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붉어진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면 안 되지, 하고 낮게 말하자 정태주가 안 자는데요, 하고 눈에 바짝 힘을 줬다.
픽, 웃음을 흘리며 계범호는 제 옷을 벗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정태주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급한 마음이 들어 바지는 내팽개치듯 벗었다.
“으응….”
선홍빛의 구멍이 부드럽게 남자의 것을 받아들였다. 이후엔 느끼더라도 삽입할 때는 버거워하는 녀석이 지금은 나른한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그가 구멍을 충분히 핥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입맛을 다신 계범호는 정태주의 턱을 붙잡아 자신을 제대로 보게끔 고개를 바로잡아 올렸다. 그러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질수록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숨을 색색 내쉬는 태주의 얼굴을 집요히 보던 계범호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좆도 못 세우고. 쓸 데도 없는 거 왜 달고 다녀.”
쾌감은 확실히 느끼고 있으면서 정태주의 성기는 발기하지 않았다. 정태주는 고개를 내려 물끄러미 제 아래를 쳐다보고는 당황한 듯 더듬더듬 말했다.
“술 마셔서, 제가 지금. 그런 것 같아요.”
계범호는 피식 웃고는 좆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정태주가 비명을 질렀다. 허우적거리는 손이 제 무릎을 붙잡은 남자의 손등에 닿았다.
“…….”
그것에 시선을 준 계범호가 태주의 손에 천천히 손바닥을 붙였다. 그러자 태주는 매달릴 곳을 찾았다는 듯 그 손을 꽉 붙잡았다. 남자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깍지를 꼈다.
***
정태주는 눈을 번쩍 떴다. 천장을 멍하게 보다가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굼뜨게 몸을 일으키며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마에 손을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는데 어제의 기억이 차츰 돌아왔다. 술을 퍼마시고 계범호의 앞에서 엉엉 울었던 것.
‘올해는 검정고시도… 흐윽, 따고 대학도, 가려고 했는데.’
태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씨발, 하고 작게 욕을 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서럽게 울 정도로 절실한 마음도 아니었다. 남들은 진작 하는 결심이고, 자신은 좀 늦었던 것이다.
정태주는 최초의 기억부터 할머니와 함께였다. 부모는 없었다. 그들에 대해 물으면 할머니는 그들이 아주 멀리 가서 나중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어릴 적엔 그 나중이란 시간이 얼마나 길지 가늠하며 기다렸던 것도 같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즈음에야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 연말,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웬 할아버지였는데 자신과 묘하게 닮은 것 같은 데다가 자꾸만 제 얼굴을 관찰했으므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아닐까 하고.
그는 대뜸 화를 냈다. 태주의 아빠 때문에 제 딸이 죽었다고. 아빠만 안 만났으면 멀쩡히 살아 있었을 거라고.
‘아, 예….’
태주는 시큰둥하게 그 말을 들었다. 엄마든, 아빠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동반 자살했다는 말에는 잠깐 말문을 잃었다.
노인은 아빠가 무리하게 사업을 해서 결국 이리저리 돈을 꾸고 다니다가 죽었다고,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자기 딸까지 데려가냐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저한테는 왜 오신 건데요?’
‘…잘 사는지도 궁금하고.’
화를 쏟아내던 노인은 그때서야 우물쭈물했다. 엄마랑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들으며 정태주는 그대로 뒤돌아 떠났다.
마음은 조금 이상했었다. 부모에 대한 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들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가슴 속에는 할머니에 대한 연민만 남았다. 그녀의 삶을 생각해 보니 그렇게 고될 수 없었다.
태주는 그때 처음으로, 학교를 그만둔 일을 후회했다.
“…….”
정태주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쨌든 그게 뭐 자랑이라고 질질 짜면서 주절거린 것이 창피했다. 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있는데, 이후의 기억도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아.”
제 좆을 빠는 계범호, 엉덩이 사이로 느껴지던 미끄러운 혀, 열중한 듯 찌푸린 남자의 미간, 어느 순간 붙잡고 있던 커다란 손.
술주정도 간간이 부렸던 것 같았다. 입을 맞추다가 얼굴이 아프다고 징징거렸던 것 같은데, 남자는 낮게 웃기만 했다.
침대로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물을 마시던 기억은 있으나 그 전이 모호했다.
그래도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엉망으로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범호가 술주정 부린다고 받아 주는 사람도 아니고….
“…….”
‘어디. 발목?’
붓지는 않았는데, 하고 발목을 만지던 손길이 떠올랐다. 두서없는 말에 그래, 그렇지, 하며 대답하던 낮은 음성도 떠올랐다.
“진짜 안 어울리게.”
작게 중얼거린 태주는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허공에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닫힌 방문을 흘금 봤다.
출근했나.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지 않아서 태주는 몸을 일으켰다. 블라인드를 걷자 쨍한 햇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움직이는 차들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태주는 대충 티셔츠와 바지를 주워 입고 나갔다. 어제 입었던 옷은 아마 거실에 내팽개쳐진 채 있을 거다.
그런데 거실에는 옷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제 너저분히 어질러놓았던 테이블도 깔끔했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으악, 깜짝이야!”
태주도 놀라 뒤를 돌아봤다. 주방과 거실의 경계에 웬 아주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태주는 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누, 누구세요? 여기서 뭐 하세요?”
“예? 청소 중이었는데…. 아! 다른 사람이 온 것 같더니, 그분이시구나.”
정태주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의 손에는 행주가 들려 있었다.
어쩐지. 생활감이 없긴 했지만 집이 전체적으로 너무 깨끗하다 했다. 정기적으로 오셔서 집을 관리해 주시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태주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아주머니가 호기심을 보였다.
“사장님 막냇동생이신가…?”
아주머니가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당연했다. 계범호와 자신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저는 그냥… 아는 동생이요.”
뜸들이다 내뱉은 말에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멍든 뺨에 잠깐 머물렀으나, 과도한 관심은 실례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저는 주방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어색한 투로 말하는 태주에게 웃어 보인 아주머니가 이내 돌아섰다. 태주는 괜히 제 뺨을 문질러 보고는 눈을 굴렸다. 제 휴대폰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금요일.
오전 11시 28분.
홈 버튼을 눌러본 태주는 주방을 흘금 보고는 TV장에서 충전기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거실에 있기는 민망했던 탓이다.
침대 옆에 충전기 꽂아 휴대폰을 연결해 두고 태주는 방 안의 욕실로 들어갔다. 혹시 아주머니가 들어오실 수 있으니 옷도 욕실 안에서 벗었다.
샤워를 하자 술이 좀 깨는 기분이었다. 옷을 다시 입고 슬쩍 복도로 나가 보니 집 안은 고요했다. 아주머니가 가신 듯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을 연거푸 마시자 좀 살 것 같았다. 태주는 입술에 맺힌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한숨을 쉬다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어젯밤 침대에 앉아 물을 마실 때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계범호가 건네는 컵을 받아 꿀꺽꿀꺽 전부 마시자, 큰 손이 다시 컵을 가져갔다. 자신은 시원하게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다음에는 저 안 취했을 때 좆 빨아 주세요. 아까 제대로 못 느낀 것 같아요.’
‘…이게 아주.’
계범호는 기가 막히다는 웃더니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 자신을 뒤로 눕혔다.
‘알겠으니까, 자.’
‘오….’
감탄사를 내뱉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좆도 빨아 주네. 와, 그럴 거면서….’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자.’
그가 경고하듯 말을 했음에도 주절거리는 입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은 그를 가물거리는 눈으로 보며 물었다.
‘왜 제 편 안 들어 줬어요?’
‘…….’
‘존나 서운했어요.’
속삭임을 내뱉은 다음에야 잠이 들었다.
“다신 술 안 마신다.”
정태주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서운하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던 것이지.
어차피 지난 일이었다. 매화에서 그들에게 작업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계범호에게 꺼내 달라고 매달렸던 게 아주 오래전 일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흐릿한 기억으로 남았다.
분명 그랬는데 술 취해서 그런 말이나 하고.
한숨을 내쉰 태주는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털썩 누웠다. 이곳은 아주머니가 손을 대지 않아 자신이 잤던 흔적이 그대로였다. 태주는 이불이 반쯤 흘러내린 침대 위를 뒹굴거리다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부재중 전화
[할머니]
“…….”
태주는 곧장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장은 불안하게 뛰었다. 계범호가 있으니 그들이 할머니를 건드릴 리가 없지만, 최근 태주는 소식에 예민해지게 되었다. 그것이 나쁜 소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되는 것이다.
-응,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아, 그거? 니가 검사받고 말해 달라고 했잖니. 아무 이상 없대. 허리가 조금 안 좋긴 한데, 할머니 고질병이잖아, 그건.
“아. 응. 그럼 다른 곳은 다 괜찮대?”
태주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그럼, 그럼. 검사 때문에 병실도 2인실로 옮겨서 혼자 썼어. 요즘 참 세상 좋지? 나이 들었다고 검사도 공짜로 다 해 주고.
“…그러게.”
정태주는 눈을 깜박였다.
그때,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태주야. 집 말인데.
“응.”
태주는 가슴팍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쿵, 쿵 뛰는 심장 박동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다시 계약하기로 했어.
“진짜? 잘 생각했어, 할머니. 내가 준 돈으로….”
-아니. 집주인이 어제 전화가 와서는, 2000만 원 깎아 준다고 하잖아. 그래서 퇴원하고 바로 계약하기로 했지.
“어? 왜 깎아 줘?”
-우리 사정이 영 안 좋아 보였던 거지. 세상에 그런 좋은 사람이 어딨대.
“…진짜, 그러네.”
다들 몇백이든 몇천이든 집값을 올리는 때, 오히려 값을 내려 주다니. 그것도 2000만 원이나.
-어쨌든 우리 손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할머니가 생각해 보니까, 말도 안 하고 전세 뺀 거 잘못한 것 같아. 태주도 다 생각이 있었을 텐데.
“아니야, 할머니.”
태주는 목이 간질거려 침을 모아 삼켰다. 눈은 베개 끝에 고정해 두고 손끝은 이불자락을 괴롭혔다.
-추석에는 못 온다고 했나?
“모르겠어.”
-그래. 고생해, 우리 태주.
“응.”
신경 써 마른 목소리를 내고, 통화를 종료한 뒤에는 헛기침을 했다. 목 안쪽이 간질거리고 젖은 기분에 태주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멍하게 눈을 깜박이며 잠깐 있다가,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휴대폰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몇 달간 어떻게 휴대폰 없이 살았는지. 노을이 지는 창밖을 보며 혀를 차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태주는 부스스 일어나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거실로 나가자 계범호가 현관으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계범호는 부스스한 정태주를 느릿하게 훑어보았고, 정태주는 후줄근한 제 차림과 달리 갖추어 입은 계범호를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눈을 조금 굴리다, 태주는 입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남자는 그대로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태주는 그 자리에 선 채 잠깐 눈치를 살피다 슬금슬금 소파로 향했다. 옆자리에 앉기는 했으나 조금 간격은 띄웠다.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거나, 심지어는 허벅지 위에 앉는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닌데 말이다.
계범호는 그런 정태주를 잠깐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뉴스 채널로 돌리고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
태주는 눈을 깜박였다. 술도, 섹스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 운을 뗐다.
“손님.”
“누가 손님이야.”
서늘한 말이 곧장 돌아왔다.
이제 손님이 아닌 것은 맞지만, 저렇게 기분 나빠할 일인가. 태주는 남자의 미간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며 생각했다.
손님이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형님도 아니고, 전무님도 아닌 것 같고…. 고민하다가 우선은 호칭을 생략하기로 했다.
“아까 할머니랑 통화했는데요. 할머니가 병원에서 공짜로 검사를 해 줬다고 하셔서요. 아, 그리고 원래 할머니가 전세 뺐다고 했는데….”
설명을 이어 가려던 태주는 말을 멈췄다. 가만히 보는 계범호가 그 일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시 계약하기로 했대요. 혹시… 도와주신 거예요?”
손님이, 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태주가 뜸을 들이며 물었다. 남자는 살짝 눈썹을 올렸으나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래.”
내뱉은 대답은 간결했다. 시큰둥하게 들릴 정도로 대충 대답하곤 그가 태주의 턱을 쥐었다. 뺨을 살펴보는 듯한 계범호를 보며 태주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계범호가 눈을 맞췄다. 태주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자 그가 가볍게 키스했다.
“하루 종일 뭐 했어.”
굵은 팔이 태주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태주는 미끄러지듯 남자의 허벅지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넓은 소파에 굳이 딱 붙어 앉게 되었으나 조금 전보다 덜 어색한 기분이었다.
“늦게 일어나서 그냥 침대에 있었어요. 아 맞다, 아주머니랑도 인사했어요.”
응. 목을 울려 대답한 계범호가 문득 시계를 보곤 말했다.
“저녁 먹으러 나갈까.”
“…집에서 먹으면 안 돼요?”
“왜.”
남자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매화에선 밖에 나가는 일만을 기다렸기에 그런 것 같았다.
“사람들이 제 얼굴 다 쳐다볼 것 같아요.”
아마 때린 사람이 계범호이겠다는 예리한 추측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계범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건 좆같지.”
“…….”
태주가 올려다보자 그가 비스듬히 웃었다. 툭, 뺨을 가볍게 건드린 계범호는 다시 TV로 시선을 줬다.
태주는 이 집 밖으로 영원히 나가지 못하는 제 모습을 잠깐 상상해 봤다. 살짝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태주는 이내 눈을 굴렸다.
어쨌든 제 선택이었고,
“…피자 시켜도 돼요?”
해장이나 해야겠다.
속이 좋지 않아 점심도 건너뛰었더니 갑자기 배가 무척 고팠다. 배를 쓱쓱 만지는데 계범호의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다른 거 먹을까요?”
물끄러미 보는 시선이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쳐다보는 건가 해서 물었다. 그런데 계범호는 말없이 지갑을 꺼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태주에게 그가 말했다.
“가지고 있어.”
“아….”
“요즘은 카드랑 휴대폰만 있으면 집에서도 못 하는 게 없다며.”
난 모르겠지만.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정태주는 계범호의 눈을 슬금슬금 피하며 엉덩이를 뗐다. 그리고 휴대폰 가지고 올게요. 하고는 방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태주는 남자에게 돈을 받아 쓰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피자를 세 판 시키고, 사이드 메뉴도 몇 개 주문했다. 양이 많은 계범호 때문에 그렇게 많이 주문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계범호는 빨리 손을 뗐다.
반면에 태주는 한쪽으로 씹느라 느리게 먹으면서도 꾸준히 손을 움직였다. 단맛이 많이 나는 치즈 스파게티를 완전히 비우고 불고기 피자 한 조각을 손에 들 때, 계범호가 말했다.
“맛있나 보네.”
아무래도 계범호는 한식파인 것 같았다. 그래서 태주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일은 밥 종류로 먹어요.”
“…….”
“어디 가세요, 내일?”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짓길래 태주가 물었다.
“…아니.”
대답한 계범호는 무엇이 재밌는지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그는 태주가 남은 피자를 냉동실에 넣어 둘 때, 태주가 하루 종일 뒹굴어 흐트러진 이불을 볼 때, 침대 옆에 꽂힌 충전기를 볼 때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
주말 아침이었다.
태주는 평소와는 달리 꽤 이른 시간 잠이 깼다.
침대에서 곧장 일어나기는 아쉬워 계범호에게서 등을 진 채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돌연 커다란 손이 얼굴 위를 뒤덮었다.
“눈 나빠진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 그가 태주의 몸을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이마를 댔다. 그는 그대로 숨을 깊이 들이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태주의 어깨는 딱딱하게 굳었다. 목덜미를 물어뜯긴 적이 워낙 많아 방심할 수 없는 거였다.
그런데 그때, 커다란 손이 불쑥 바지로 들어왔다. 바지 허리가 헐렁한 데다가 속옷도 입지 않아 쉽게 고간을 쥐고 주물렀다. 꼭 자기 것을 만지듯 거리낌 없는 손길이었다.
“아….”
뒤척이던 태주가 금방 성기를 세우자 뒤에서 피식 웃음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발기를 가라앉혀 보려고 나름의 노력을 해보았으나 그게 통할 리 없었다.
가벼운 페팅이었던 것은 결국 섹스로 이어졌다. 물론 태주도 즐겼지만 아침부터 받기엔 좀 과한 자극이었다. 남자는 아침이라고 부드럽게 한다거나, 태주의 몸을 덜 깨문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먼저 씻을게요.”
힘이 빠진 채 침대에 누워 있던 태주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옷을 벗은 채로 붙어 있다가는 섹스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그런 거였는데, 계범호는 그런 태주를 잠깐 보더니 자기도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태주는 순간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남자는 태주를 지나쳐 창문을 열었다. 창틀에 놓아둔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문 그가 태주를 보며 슬쩍 웃었다.
“…욕실 여기 쓸게요.”
조금 멋쩍게 말을 한 뒤 태주는 욕실로 쏙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남자는 방에 없었다. 바깥의 욕실에서 씻는 듯해서 태주는 침대로 가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고 잠깐 만지작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계범호는 젖은 머리를 한 채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오라는 듯 손짓했다.
태주는 어제보다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계속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밀었다.
“저…. 제가 녹음했는데요. 혹시 증거로 쓸 수 있나 해서요.”
태주가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시작은 제 숨소리였다.
손에 땀이 나서 휴대폰을 고쳐 쥐는데, 큰 손이 그것을 가져갔다. 고개를 들자 계범호가 화면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감한 얼굴은 녹음 파일에 인물들이 등장하고, 말소리가 이어지며 점점 변해갔다. 짙은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고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며 입술 아래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녹음 파일이 마침내 끝났을 때, 태주는 자신이 손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은 생각보다도 괴로운 일이었다.
“태주야.”
아래를 보고 있던 계범호가 갈라진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태주는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친 채, 남자는 답지 않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 씨발.”
계범호는 이내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등을 기댔다. 풀썩, 소음과 함께 소파가 들썩였다. 그는 자기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감정을 삭이는 듯하더니 내리깐 눈으로 태주를 보았다.
태주는 남자가 보는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다만 맞잡은 두 손을 풀지 못했는데, 남자는 그것에도 흘긋 시선을 주며 턱에 단단히 힘을 줬다.
정태주는 그런 계범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