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태주는 불 꺼진 숙소에 도착했다. 제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제 몸이 두세 개쯤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란 셔츠를 벗었다.
벗고 보니 등 쪽의 봉제선이 조금 뜯어져 있었다. 정태주는 그것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바닥으로 떨어뜨리고는 축축이 젖은 제 옷을 벗었다.
우선은 씻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곧장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맞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태주는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 인생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따라가기가 벅찼다.
버릇 같은 한숨을 흘려내고 몸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술을 온몸에 뒤집어쓸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봤다. 누군가 제 온몸을 물고 빨 거라는 상상도 마찬가지였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태주는 거울 속 제 모습을 살폈다. 김이 뿌옇게 어린 거울로도 얼룩덜룩한 몸이 잘 보였다. 맞아서 멍이 든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거 팔지 말고, 서빙만 하라고.’
씨발 지가 뭔데.
그 순간에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지금 태주는 팔 수 있는 건 뭐든 팔아야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안 들을 수도 없었다.
‘태주야. 푼돈 받겠다고 아무거나 입에 넣지 마.’
살기 어린 눈빛과 목덜미에 느껴지던 날카로운 고통이 선연했다. 살을 잘라내겠다는 그 말은 말뿐인 협박이 아니었다. 계범호는 정말로, 그런 짓까지 할 수 있는 새끼였다.
태주는 맞았을 때보다 더 처참한 것 같은 제 목덜미를 손으로 만졌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쓰라림이 동시에 느껴졌다.
삶은 조금 더 막막해졌다.
원래 자신의 수익이야 대부분 계범호에게서 나오긴 했지만, 또 그가 그때처럼 계속 오지 않으면…….
생각을 이어 가던 태주는 순간 명함 한 장을 떠올렸다. 하지만 전화를 걸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고 한들, 그 돈을 줄까. 고작 남창에게.
억울하고 화가 났다. 서러운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바로 그다음 날 옅어졌다.
출근하자마자 태주는 사장실로 불려갔다. 박의성은 태주가 오자마자 묘하게 쳐다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계 전무가 네 후장 값 주기로 했다.”
“…….”
태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새끼가 말을 왜 저따위로 해, 하고 속으로 욕하며 그 말을 곱씹어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너 2차 내보내지 말란다.”
“…계범호가 매달 상환해 준다고요? 그 돈을?”
존칭을 생략한 물음에 박의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새끼 계 전무한테 안 처맞나, 하고 훑어보아도 어디 절뚝거리는 부분도 없고 멀쩡했다.
“그래.”
“…….”
그 돈을? 왜? 태주의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찼다. 박의성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말했다.
“이게 그럴 가치가 있나.”
품평하듯 보는 시선에도 태주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게.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있나.
그가 자주 방문했을 때 받은 한 달 치의 팁이 그 정도의 금액이긴 했다. 그러나 자주 방문을 하지 않아도, 전처럼 한 달 동안 걸음 하지 않아도 돈을 주겠다는 거였다.
“진짜 그 빚을 다 갚는 거 아닌가 몰라.”
박의성의 중얼거림에 태주는 돌연 정신이 들었다. 어두컴컴했던 시야가 조금 밝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방문하겠다고 말했던 주말까지 태주는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다. 그 와중에 남자의 말대로 ‘서빙만’ 했다. 처음엔 그것이 쉽지 않아서 진땀을 빼는 일이 좀 있었는데, 나중엔 요령을 터득했다. 팁을 받으려고 어떻게든 룸에 오래 머물렀던 때와 반대로 하면 되는 거였다.
깍듯하고 재빠르게.
“좋은 시간 되십시오.”
서빙을 마친 태주는 손님이 잡을세라 빠르게 룸 밖으로 나갔다. 언제 몇 번은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 적이 있는데 무시했다. 이러다 진상을 만나면 시비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정말 이게 맞는 건가. 의문이 조금씩 생길 때쯤 주말이 왔고, 태주는 VVIP 룸으로 들어가게 됐다.
테이블은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태주가 화장실에서 준비를 하는 동안 다른 직원이 대신 한 거였다.
“빨리 안 와?”
테이블에 잠깐 시선을 두고 있었을 뿐인데, 계범호가 참을성 없이 재촉했다.
그가 온다는 소식은 대개 미리 전해졌다. 그러므로 남자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테이블 세팅이 시작되었을 거고 태주는 거기서 고작 10여 분 정도 늦었을 뿐이었다. 남자는 성미가 급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을의 입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사과가 습관이 되는.
담배를 입에 문 계범호는 정태주를 잠깐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태주가 눈치껏 다가가자 그가 태주의 팔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태주는 남자의 허벅지 위에 엉거주춤 올라탔다. 남자의 굵직한 허벅지를 다리 사이에 두고 앉으려니 가랑이가 아팠다.
“다른 거 팔다가 늦은 거 아니고?”
계범호가 한 손으로 태주의 엉덩이를 더듬으며 물었다. 태주는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저 서빙만 했어요. 화장실에서 준비하고 온다고요….”
“준비….”
바지 봉제선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하던 남자가 곧 고개를 들어 태주를 올려다보았다.
“딴 새끼들 들락거리는 곳에서 바지 내리고 구멍 쑤시다 왔다고?”
“…….”
맞는 말이긴 한데,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태주가 입술을 깨물자 남자는 혀를 찬 뒤 말했다.
“앞으론 그냥 와.”
“네.”
태주는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 같으면 남자가 풀어 주지도 않고 좆을 들이밀까 봐 겁을 냈겠으나 어쩐지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범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태주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금 홍조를 띤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혼자 쑤시면서 느꼈어?”
“…아닌데요.”
부정에도 계범호는 픽, 웃음을 흘렸다. 안 믿는 거였다. 태주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꾹 다물었고 계범호의 손은 턱선을 스치고 아래로 조금 떨어졌다.
커다란 손이 단추를 풀길래, 태주는 잠깐 등 뒤의 테이블을 생각했다. 평소와 달리 테이블 위에는 식사가 될 만한 음식 몇 가지가 있었다.
섹스를 하고 나면 다 식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남자의 손은 셔츠 단추를 두 개만 풀고 멈췄다. 그리고 셔츠 깃을 잡아당겨 목덜미가 드러나게끔 했다.
조그맣게 생겼던 딱지는 떨어졌으나 꼭 전염병에라도 걸린 듯 색이 변한 살갗을 보며 남자가가 입꼬리를 올렸다.
태주는 소름이 돋았다. 저번처럼 또 온몸을 짓씹어 놓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그런데 계범호는 손을 거두고 태주를 제 옆자리로 내려 줬다. 그러고 나서 말하는 것이다.
“먹어.”
“…예?”
삐쩍 말라서는. 계범호가 한심하다는 듯 시선을 주며 담배를 피웠다. 눈을 깜박이던 태주는 주저하며 말했다.
“사장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그래. 남자가 별것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깐 시선은 태주가 손도 대지 않은 수저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뭘 하면 돼요?”
계범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굳은 채 자신을 똑바로 보는 정태주를 보며 남자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뭘 하면 되냐…. 낮게 중얼거린 남자의 손이 태주의 목덜미에 닿았다. 한 손에 가볍게 들어오는 목을 주무르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말을 잘 들어야지.”
“…그것만요?”
맞기 싫어서 지금도 말은 잘 듣고 있었다. 태주의 물음에 남자가 픽,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줬다. 목덜미를 틀어 잡힌 태주가 어깨를 움츠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좀 전에 뭐라고 그랬어.”
“아으, 이거 좀….”
태주는 점점 더 억세게 죄는 손길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말했다.
“먹으라고요!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남자의 손에 힘이 풀렸다. 태주는 욱신거리는 목덜미를 만져 볼 생각도 못 하고 얼른 포크를 쥐었다. 파스타에 있는 새우를 콕 찍어 입에 넣고 슬쩍 눈치를 살피자 빤히 쳐다보고 있던 계범호와 눈이 마주쳤다.
“네 손님 이제 나 하난데, 잘해야지.”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손이 태주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맞기 전에 앞으로 잘하라는 경고 같았다.
“…예.”
제대로 씹기도 전에 새우가 꿀꺽 뒤로 넘어갔다. 먹으라면서 그런 얘기를 하면 퍽이나 잘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굼뜨게 행동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남자에게 뺨을 맞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는 반대 손에 끼우고만 있던 담배를 피우며 소파에 등을 기댔고, 태주는 식사를 했다. 음식은 아직 따뜻했다.
하지만 최근 별로 먹지 않아 위가 줄어든 데다가 매일 보는 메뉴들이라 딱히 식욕이 돌지는 않았다.
남자는 테이블 위의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담배를 피워 대며 자신을 쳐다보기만 했다. 지금 벌써 9시가 넘었으니 이미 식사를 했을지도 몰랐다.
태주는 조금 눈치를 살피다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불편하게 밀어 넣은 음식을 겨우겨우 내리고 있을 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다 먹었어?”
“네.”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자 계범호가 바로 앉으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이쪽으로 와.”
낮게 명령해놓고 남자는 태주가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태주의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겨 제 다리 위에 앉히고는 셔츠 깃을 좀 전처럼 당겼다. 그러곤 곧장 얼굴을 묻었다.
“으음….”
숨을 들이마신 계범호가 살갗을 입에 넣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은 태주의 바지에서 셔츠를 거칠게 빼내고 맨 살결을 더듬었다. 남자의 굵은 팔뚝이 들어간 셔츠가 뒤로 팽팽히 당겨졌다.
뜯어지기라도 할까 봐 태주는 얼른 제 셔츠 단추를 아래서부터 풀었다. 전부 풀어내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남자가 입을 맞춰왔다.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
태주는 오래 참았다는 듯 급하게 혀를 섞는 계범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평소처럼 곧장 옷을 벗기든가. 이상한 얘기를 하며 밥을 먹이고는….
잡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혀 내밀어.”
“으으…. 아은데….”
계범호는 태주가 주저하며 내민 혀를 고개를 비틀고 빨았다. 혀뿌리가 당겨 왈칵 침이 흘러나오자 그의 입술이 턱 아래를 훔치고 지나갔다.
태주는 또다시 낯선 기분을 느꼈다. 자신을 물고 빠는 계범호라니.
한 번 사정을 마친 뒤 연이어 태주의 다리를 벌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태주는 조금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계범호가 싸늘한 눈빛을 했다. 제 어깨를 밀어내는 손에 흘긋 시선을 주고는 입매를 비틀었다.
“어딜 밀어내.”
손을 들 것 같던 그는 문득 태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제 입을 틀어막은 태주가 겨우 말을 꺼냈다.
“우윽, 토할 것… 같아요.”
“…….”
토기를 참느라 태주가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을 남자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태주는 나름 필사적이었다. 뭘 먹지 않아도 헛구역질이 날 만큼 거대한 성기였다. 그런 것이 뱃속을 왕창 휘저으니 속이 안 좋은 게 당연했다.
섹스하다가 토하면 계범호가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태주는 원망도 조금 했다. 그러니까 왜 먹으라고 해서는.
“허약한 새끼.”
짜증이 담긴 투로 말하고 계범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담배를 무는 모습을 보니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하긴 자기도 토를 맞기는 싫겠지.
그런 생각이 전부였는데….
그 다음번 방문에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태주는 호텔에서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가 들어오고, 옷을 벗고, 섹스를 하고, 몸에는 붉은 자국이 더 많이 생겼다. 조금 더 징그러워진 거다. 그런데 남자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 듯 하나하나 시선을 주며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옷 입어.”
엎드린 채 색색 숨을 내쉬는 태주의 머리칼에 손을 넣고 지분거리던 남자가 말했다. 태주는 남자가 일어서서 옷을 입는 것을 보고 혹여 늦는다고 맞기라도 할까 봐 곧장 옷을 주워 입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남자를 따라간 곳은 VVIP 룸이었다.
남자는 거기서, 또 태주에게 밥을 먹였다.
“…….”
태주는 우물거리며 남자를 흘긋 보았다. 그도 허기가 졌던 것인지 핏물이 뚝뚝 흐르는 고기를 크게 썰어 먹는 중이었다. 그러곤 씻어내듯 독한 술을 들이켜다가 태주의 시선을 알아차리곤 말했다.
“옷 안 벗길 테니까 제대로 처먹어.”
“엡.”
먹는 중이라 뭉개진 발음에 계범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별로 비워내지 못한 태주의 접시를 못마땅하게 보고는 담배를 물었다.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데, 태주의 시야는 여느 때보다 맑아졌다. 자신을 옥죄고 있던 어둠이 달아난 것처럼 밝고 깨끗한 공기가 폐를 채웠다.
계범호는 지금, 창놈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퇴근하고 좀 먹든가.”
수표 몇 장을 내려놓은 남자가 태주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을 때, 태주의 눈은 점차 생기를 찾았다. 조금 가쁜 듯한 숨이 흘러나왔다.
계범호는 이 시골에서 뭘 사 먹으라는 건지 돈을 저만큼이나 줬다. 테이블에 놓인 수표 몇 장 위로 조금 전 자신과 키스하던 남자의 얼굴이 그려졌다. 몰두해서 미간을 구기고, 가끔 한숨과 욕설을 내뱉는 그 얼굴 말이다.
“저 밖에 못 나가요.”
태주는 흥분을 숨기고 조용히 말했다. 포크는 전에도 먹은 파스타의 새우를 툭 건드렸다.
“사다 달라고 해.”
“처맞을걸요.”
태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계범호는 태주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태주의 이마를 제법 아프게 튕기고 말했다.
“웃돈 주면 되잖아.”
“아…?”
태주가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 꼴이 퍽 멍청해 보였는지 계범호가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곤 태주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태주는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는 묵직한 손 하나를 얹은 채였다. 계범호는 제 손바닥만 한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다 말했다.
“애새끼라 그런지, 손이 많이 가.”
태주는 남자의 목소리가 이따금 형체를 가지고 귓구멍으로 파고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낮은 음성은 몸에 소름을 돋게 하고 솜털을 바짝 긴장시켰다.
“또 언제 오세요?”
“왜.”
“그냥…. 기다리려고요.”
“…….”
태주의 말에 남자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 위를 누르고 있던 남자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뺨을 만졌다.
“기죽어서 빌빌거리더니. 정신 차렸나 보네.”
계범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제법 다정하게 물었다.
“네가 뭘 해야 할지 이제 알겠어?”
“네.”
고개를 끄덕인 태주의 눈이 반짝 빛났다.
***
그날로 태주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
이전에 그렇게 했다가 비참해진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계범호가 변했으니까. 그가 태주의 위치를 새롭게 정했으니까.
이제 자신은 그에게 ‘구멍’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정도는 된 것 같았다.
어쨌든 남창인 건 변함이 없겠지만, 그 큰돈을 박사장에게 매달 주면서도 섹스만 하지 않았다. 끼니를 챙기고, 밥을 사 먹으라며 또 수표를 쥐여 준다.
자신의 처우를 정한 듯했던 날에도 자신이 주저하며 꺼낸 말에 웃으며 또 몇백을 주지 않았는가.
계범호는 자신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박 사장과 했던 계약은 기본적으로 조덕현과 했던 계약의 틀은 가져왔다. 2년짜리 계약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1년하고도 몇 개월이 남은 상황이고, 계범호가 그동안 자신에게 질리지 않는다면 결국 빚을 갚고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런 남자의 태도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분간은 많은 것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였다.
정태주는 망가져 버렸던 이전의 다짐도 찾아 꺼내었다. 빚을 갚고,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그러려면 계범호의 마음에 들게끔 노력해야 했다.
번뜩이며 이어지던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침대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태주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계범호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모르겠다. 소위 말하는 속궁합이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섹스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 몰라.”
태주는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후장 팔다가 남자 마음 사로잡는 것까지 연구하게 생겼다. 문득 치솟은 자괴감에 태주는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그래도,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희망이 생기고 의욕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식욕도 되찾았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방 밖으로 나선 태주는 식탁에서 누군가 음식을 먹은 흔적을 발견했다.
햄버거 포장지가 뭉쳐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태주는 조금 멍하게 그것을 손에 들었다. 그때 욕실 문이 벌컥 열리고 다른 방을 쓰는 정수가 나왔다.
“놔둬. 내가 치울게.”
“아…. 근데 형. 이 햄버거 깡패들이 사다 준 거예요?”
영 조용하던 태주가 갑자기 말을 거는 것이 이상한지 정수가 경계의 눈초리를 했다. 또 도망갈까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어.”
“형도 웃돈 얹어 주고 부탁해요? 얼마나요?”
“아아. 너 뭐 살 거 있어서 그러냐?”
정수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는 식탁을 주섬주섬 치우며 말했다.
“거야 지들 마음이지. 어떨 때는 5만 원 받고도 해 주고, 어떨 때는 몇십도 받아 처먹고.”
“…….”
“한 놈 정해서 사달라고 해. 괜히 여기저기 발 걸쳐 봤자 돈만 더 쓴다.”
“…….”
태주는 유명 패스트푸드점 로고가 있는 종이 백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햄버거를 세트로 먹어도 5000원이 안 되는데, 배달비가 최소 5만 원이라니.
“근데 너 뭐 사게?”
바스락, 소리가 나는 포장지를 구기며 정수가 고개를 들었다.
“햄버거요.”
정태주의 얼굴은 진지했다. 이정수는 잠깐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너한테도 물어볼 걸 그랬다.”
“아니에요. 근데 형 무슨 버거 먹었어요?”
“미안하다. 다음엔 꼭 먼저 물어볼게.”
햄버거 되게 좋아하는구나. 중얼거린 정수는 식탁을 마저 치웠다. 치킨 너겟 박스를 치울 때 ‘와….’ 하는 탄성이 들리고 나선 행동은 좀 더 재빨라졌다.
태주는 정수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난 뒤 쓰레기통을 물끄러미 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곧장 욕실로 들어가 씻은 그는 조금 이른 출근을 했다. 주방에서 저녁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햄버거 하나 먹자고 5만 원을 쓸 수는 없었다. 태주는 계범호가 따로 주는 돈은 알뜰히 모을 생각이었다.
빚 그거 씨발, 왜 못 갚아. 내가 갚나 못 갚나 어디 한번 봐라. 정태주는 험악한 얼굴 몇 개를 떠올리며 눈을 음산히 빛냈다.
태주는 전투적으로 밥을 먹었다. 주방에서 주는 밥은 대개 가게에서 쓰이는 재료로 만들어져 한정적이었다. 그 재료만 가지고도 다양한 요리가 가능은 하겠지만 주방장은 그 정도의 정성까지는 쏟지 않았다.
오늘은 계란밥이었다. 별다를 것도 없고 주방장이 가장 자주 주는 음식이지만, 맛있었다. 그릇을 말끔히 비운 태주는 고소하고 짭짤한 맛에 입맛을 다셨다.
***
의욕은 태주의 식욕을 무섭게 불러일으켰다. 태주는 출근 전 꼬박꼬박 주방에서 밥을 받아먹었다. 두 그릇씩도 먹었다. 이렇게 먹어도 일을 하다 보면 금방 배가 꺼졌기 때문에 살이 붙지는 않았다.
“맛있냐? 식충이가 따로 없네.”
뒤통수를 툭 미는 손길은 보나 마나 매니저였다. 태주는 돌아보지 않고 꿋꿋이 밥을 먹었다.
“어? 밥이 넘어가? 지 때문에 여러 사람 곤란해진 건 생각도 안 하고.”
태주가 무시해도 매니저는 계속 빈정거렸다.
“어제도 그 싸가지 없는 새끼 뭐냐고 지랄을 지랄을…. 야. 너 때문에 딴 애들이 손님 화 풀어준다고 존나 굴렀잖아.”
어제도 자신은 같이 놀자는 손님의 말에도 꿋꿋이 서빙만 했고, 그 탓에 자신이 나간 뒤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다른 직원들이 꽤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컴플레인까진 아니어도 매니저에게 태주에 대해 묻는 손님은 그전에도 몇 있었다.
자신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곤란해진 건 맞다.
그런데 뭐 씨발. 안 그랬다가는 자신이 아주 곤란해진다.
탁. 태주는 수저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재수 없는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럼 매니저님이 얘기하든가요.”
“싸가지 없는 새끼가….”
매니저가 태주의 머리채를 꽉 움켜쥐었다. 고개가 뒤쪽으로 당겨진 태주는 이를 악물었다.
“융통성 있게 굴라고. 계 전무 없을 때 잠깐 옆에 앉는 게 어렵냐? 아오, 돈도 안 물어오는 새끼 그냥 장기나 팔면 좋겠네.”
태주는 눈을 부릅뜨고 매니저를 노려봤다.
“계 전무한테 돈 많이 받잖아요.”
VVIP 룸은 이용료도 훨씬 비쌀 게 분명했고, 호텔도 그 수준의 평범한 호텔보다 훨씬 비쌌다. 매춘값이 포함된 거였다.
주워들은 얘기로 태주는 매니저가 2차를 나가라고 괴롭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즉, 지금 자신이 2차를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가게 측에서 손해 볼 일도 없는 거였다.
“하. 계 전무 있다고 뭐라고 된 것 같냐? 또 좆 빠지게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허공에 올렸던 매니저의 손이 멈췄다. 이어폰을 건드리는 것으로 보아 전화가 온 듯했다. 매니저는 태주의 머리를 거칠게 놓으며 두고 보라고 경고를 했다.
태주에겐 온갖 욕설을 퍼부었으면서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앞에 있지도 않은데 굽신거리는 꼴도 보기 싫었다. 언젠가 자신도 매니저를 좆 빠지게 때리는 날이 오면 좋겠다.
여기선 불가능하니 밖에서 퍽치기 같은 게 어떨까. 퇴근하는 길을 기다렸다가 어디 골목에서 뒤통수를 치면…….
“아! 뭐예요!”
통화를 마친 매니저가 밥그릇에 반찬을 모두 털어 넣는 것을 보고 태주가 기함을 했다.
“VVIP 오신단다. 호텔로 가.”
“근데 왜 밥을 뺏어요!”
“손님 기다리게 해서 되겠냐. 빨리 가야지.”
반도 안 먹은 태주의 밥그릇을 들고 매니저가 이죽였다.
태주는 이를 갈며 호텔로 올라갔다. 정작 계범호는 태주가 한참을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나서야 들어왔다.
“벌써 와 있었네.”
곧장 다가온 계범호가 태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태주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벌써? 흘긋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씨발 새끼가 시간 여유도 있는데 사람 먹는 밥을 뺏고 올려 보낸 거였다.
***
계범호는 또 저번처럼 태주를 가게로 데리고 가 밥을 먹였다.
지난번엔 눈치를 살피며 거의 억지로 먹었으나 이번엔 정말 열심히 먹었다. 첫 끼도 먹다 말았던 데다가 육체노동까지 하자 무척 허기가 졌던 탓이다.
태주는 마지막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눈을 굴렸다. 스테이크 접시는 채소만 둔 채 모두 비웠고, 파스타도 거의 비워냈다.
“가게에서 밥 안 줘?”
그런 태주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계범호가 물었다. 태주는 그제야 좀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닦았다. 남자를 어떻게든 잘 꾀어 봐야 하는데, 식충이처럼 먹는 꼴은 별로 도움이 안 되었을 것 같았다.
“주는데요.”
습관 같은 불퉁한 말투도 마찬가지였다. 태주는 제 혀를 잘근 깨물고는 슬쩍 말을 정정했다.
“줍니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손짓했다.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뱃불이 흔들렸다.
“빈 접시 핥지 말고 이리 와.”
“아직 안 핥았어요.”
아직. 계범호는 재밌다는 듯 그 말을 중얼거렸다. 태주가 테이블 모퉁이를 돌아 남자에게 가자 그가 자연스럽게 옆에 앉히고 어깨에 팔을 걸쳤다.
“밥을 주는데 하루 굶은 애처럼 먹어.”
남자는 핀잔을 주듯 하면서도 조금 부푼 태주의 배를 만질 때는 느슨하게 입매를 풀었다.
“아까 누가 방해해서 밥 먹다 말았거든요.”
“누구.”
“매니저요.”
태주는 좀 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열이 받아 미간을 구겼다.
계범호는 길게 자라서 눈썹을 가린 태주의 머리칼을 쳐다보다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매니저. 담배 연기와 함께 중얼거림이 흩어졌다.
***
계범호는 접시 핥지 말고 뭘 사 먹으라며 또 돈을 줬다. 그 이후 다른 손님들에겐 팁을 전혀 못 받았지만 주머니는 든든했다.
서빙과 청소를 도맡아 한 뒤 퇴근 시간이 되었을 때, 태주는 또 허기를 느꼈다. 배를 슥슥 만지며 태주는 중얼거렸다.
“햄버거 먹고 싶다….”
말하면 바로 사다 주나? 그렇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거면 좀 참고 돈을 아끼는 게 나았다.
그런데도 태주는 덩치들이 보일 때마다 멈칫멈칫 쳐다보게 됐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저 새낀 인상 더러워서 안 사다 줄 것 같아. 아, 저 새끼 인상이 더 더럽네. 와, 쟨 저렇게 생겨서 공공장소에 들어갈 수 있나?
깡패들의 인상이야 다 거기서 거기였고, 그나마 착한 인상을 찾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참기로 했다. 다른 손님들에겐 팁도 잘 못 받는데 5만 원을 햄버거 먹자고 쓸 수는 없다.
그런데.
그 뒤로도 계속 햄버거가 먹고 싶은 거다.
계범호를 어떻게 꼬셔야 할지, 제 어떤 부분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를 생각해도 모자란데 머릿속에는 햄버거뿐이었다. 자신이 전생에 햄버거를 못 먹고 죽었던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햄버거 외에도 먹고 싶은 건 많았다. 가게 음식이 아니면 다 맛있을 것 같았는데, 가장 먹고 싶은 것이 햄버거일 뿐이었다.
어쩌면 탈출의 욕구가 그쪽으로 이상하게 발현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몰라.”
이렇게 된 이상 5만 원짜리 햄버거를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출근 전 태주는 로비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깡패들이 곧장 날카로운 시선을 줬다.
“뭐.”
그중 한 깡패가 태주에게 위협적으로 걸어왔다. 마침 잘됐다. 그는 태주가 며칠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인상이 좋다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었으나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았다. 그래서 좀 더 빠르게 물건을 배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매화 오픈 전 근무하는 사람들은 잠시 후 퇴근한 뒤 아침에 다시 교대를 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엔 햄버거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크흠. 저… 햄버거 좀 사다 주실 수 있어요?”
태주는 주섬주섬 주머니에 5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깡패는 그것을 빤히 보고 있다가 하, 코웃음을 쳤다.
“이 쒸발 새끼가 누굴 좆밥으로 아나. 야. 햄버거? 이게 씨발.”
덩치가 좀 작다고 한들 손은 매서웠다. 퍽, 퍽 뒤통수를 내리치는 손길에 태주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럼 얼마 주면 사다 주실 거예요?”
태주도 얻어맞으면서까지 이런 걸 묻는 제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진짜 씨발. 그깟 햄버거가 뭐라고.
“정신 못 차리지 씨발놈이.”
“아악!”
깡패의 구둣발이 정강이 걷어차는 바람에 태주는 비명을 질렀다. 확 씨. 깡패는 때릴 것처럼 허공에 손을 치켜들었고, 태주는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서러웠다.
사람이 참 신기한 게, 며칠 그렇게나 식욕이 돌더니 별것 아닌 일로 또 금방 식욕이 사그라들었다.
자신이 좀 예민한 타입이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생각에서 끼니는 꼬박꼬박 챙겨 먹긴 했다. 다만 맛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계범호에게도 들키고 말았다.
“왜 또 깨작거려.”
“죄송합니다.”
태주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포크를 고쳐 쥐었다. 아무거나 대충 찍어 입에 넣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구운 당근이었다. 뱉을 수도 없어서 대충 씹고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묘한 시선을 주던 계범호가 태주의 발을 가볍게 구둣발로 건드렸다.
“묻는 말엔 대답을 해야지.”
“아.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정확한 대답을 했음에도 계범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태주는 어색하게 눈을 깜박이며 말을 덧붙였다.
“가게 음식은 자주 먹기도 하고…. 어… 아까 출근 전에 밥도 먹었고요.”
계범호는 정태주의 어설픈 얼굴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내뿜으며 그가 낮은 물음을 흘려냈다.
“뭐가 먹고 싶은데.”
“햄버거요.”
에둘러 말하던 것치고 먹고 싶은 게 정확히 나왔다.
계범호는 살짝 미간을 구기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태주는 그가 휴대폰을 꺼내는 모습을 멀뚱히 보다가, 그가 “애들 한 놈 시켜서 햄버거 좀 사 와라.” 했을 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태주에게 남자가 손을 뻗었다. 태주가 냉큼 달려가 그의 옆구리에 바짝 붙어 앉자,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계범호는 정태주의 등을 감싸고 고개를 기울였다. 조그만 얼굴에 눈은 반짝 빛났고 뺨은 둥글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미세하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까지 빤히 보던 남자는 이내 태주의 턱을 끌어당겼다.
좀 전까지 하도 물고 빨아 퉁퉁 부은 입술을 부드럽게 핥자 미약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계범호는 그 숨결마저 핥고 싶은 것처럼 혀를 깊이 밀어 넣고 입 안을 더듬었다.
“으응….”
앓는 소리를 내는 정태주에게 숨 쉴 틈을 주며 계범호는 다른 곳으로 입술을 내렸다. 묘하게 반짝거려 눈에 거슬리던 것.
“아!”
눈꺼풀 위에 입술이 닿자 정태주가 눈에 띄게 긴장했다. 남자는 그런 태주를 달래듯 대충 등을 토닥이고서 얇은 눈꺼풀을 입술 새로 빨아들였다.
“흐으, 으….”
겁먹은 태주가 다급하게 남자의 옷깃을 쥐었다. 예민한 눈두덩이를 자극당하자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다행히 계범호의 관심은 그쪽으로 옮겨갔다.
남자는 입술로 눈물길을 천천히 따라가다가 눈물이 고인 태주의 입꼬리를 핥았다. 태주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고 남자는 또 당연한 듯이 그 숨을 흘린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가 돼서야 계범호는 고개를 물렸다. 그러곤 색색거리며 숨을 내쉬는 태주의 얼굴을 잠깐 바라봤다. 꼭 벌레라도 물린 것처럼 빨갛게 자국이 남은 눈두덩이엔 조금 더 오래 시선을 줬다.
계범호는 슬쩍 웃으며 태주의 눈꺼풀을 손으로 문질렀다. 혹시나 눈이라도 찔릴까 질끈 눈을 감은 태주의 뺨을 툭 치고는 그가 바로 앉았다. 제 옆에 앉은 태주에게 상체가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와 소파 사이에 찌그러져 있던 태주도 몸을 일으켰을 때,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손에는 패스트푸드점 종이 백을 든 채였다.
“어…!”
햄버거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태주는 험악한 얼굴을 뒤늦게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며칠 전 태주가 햄버거를 사 달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누굴 좆밥으로 보냐며 태주의 뒤통수를 여러 대 때린.
“왜? 이상형?”
계범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물었다. 농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태주는 질색했다.
“아니요.”
와락 얼굴을 찌푸린 태주를 보며 피식 웃은 남자는 담배를 물었고, 태주는 저를 때린 남자가 와서 테이블에 종이 백을 내려놓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 계범호가 자신을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대답하라는 거였다. 태주는 뒤늦게 “아….” 하고 말문을 뗐다.
“그저께 제가 햄버거 사 달라고 부탁했던 분이라서요.”
“사흘에 한 번씩 먹을 정도로 좋아하나.”
흰 연기 사이로 계범호가 물었다.
“그때는 안 사 주셔서 못 먹었어요.”
태주는 종이 백만 빤히 보고 대답하다가 못 참고 엉덩이를 뗐다. 제게로 가까이 끌어와 열어 보고는 와 냄새, 하며 중얼거렸다.
계범호는 종이 백을 뒤지는 동그란 뒤통수를 물끄러미 보다가 테이블 근처에 부동자세로 선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름이 뭐지?”
“박조혁입니다, 형님!”
남자가 퍽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태주도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래, 조혁이.”
계범호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낮게 읊조리더니 말했다.
“앞으로 태주가 부탁하면 들어줘라.”
“예, 형님!”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범호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는 먹으라는 듯 태연히 턱짓했다.
“아…. 잘 먹겠습니다.”
태주는 자리에 앉았다. 햄버거 포장지를 까기 전에 종이 가방을 다시 살피는데, 안에는 햄버거 두 개만 있을 뿐 감자튀김이 없었다.
“저기, 감자튀김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가 박조혁의 험악한 눈빛과 마주하고는 깔끔히 포기했다.
햄버거 사 오랬다고 진짜 햄버거만 여러 개 사 오는 사람은 처음 봤다. 깡패들은 햄버거를 세트로는 안 먹는 모양이지.
그래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치즈버거가 있어서 좋았다. 태주가 바쁜 손놀림으로 포장을 벗기는데,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 와.”
“…예, 알겠습니다.”
태주는 입을 조금 벌린 채 계범호와 박조혁을 번갈아 보았다. 계범호는 무심한 낯이었고, 박조혁은 깍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태주에겐 눈을 부라리며 돌아섰다.
불현듯 며칠 전에 억울하게 맞았던 일이 떠올랐다.
“저기, 너겟도요.”
우뚝 멈춰 선 깡패가 돌아보는 모습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제 옆에 앉은 계범호가 재밌다는 듯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므로 태주는 겁먹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소스는 3가지 다요.”
“…….”
픽. 계범호가 바람 새는 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피웠다. 허공에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보니 말을 더 얹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박조혁은 무섭게 태주를 노려보다가 나갔다. 태주는 며칠 전의 울분이 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먹은 햄버거는 정말로, 꿀맛이었다. 며칠 동안 상상했던 맛이니 실망할 법도 한데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태주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와구와구 햄버거를 먹었다. 볼은 빵빵해져서 입가엔 소스를 묻히고 먹는 모습을 보며 계범호는 “애새끼.” 하고 한마디를 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투박한 손길도 함께였다.
태주가 두 번째 햄버거를 반쯤 먹었을 때, 깡패가 돌아왔다. 감자튀김과 너겟, 소스 세 개까지 완벽했다. 콜라도 큰 사이즈로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너겟을 입에 쏙 넣으며 한 말에 흉흉한 시선이 돌아왔다. 아, 너겟도 꿀맛이네. 태주는 실실거리며 박조혁을 봤고, 계범호는 그런 태주의 뒤통수에 툭 무거운 손을 얹고는 말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제 형님에게는 깍듯한 깡패가 밖으로 나갔다.
이런 통쾌한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태주는 신이 나서 콜라를 마셨다. 얼음이 녹아서 약간 밍밍한 맛이긴 했지만 가게에서 먹는 콜라보다 맛있었다.
계범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
통쾌한 기분에 대한 뒷감당은 다음 날 새벽부터 했다.
박조혁이라는 깡패 놈이 볼 때마다 갈구기 시작한 거였다. 처음엔 태주도 잘못 걸렸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계속 반복되다 보니 또 열이 받기 시작했다.
“야. 좆밥!”
박조혁에게 갈굼을 당하고 있던 태주는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를 부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애 괴롭힐 시간에 니 할 일이나 좀 해라, 씨바 새끼야.”
“죄송합니다!”
곧장 달려가는 박조혁을 멍하게 보던 태주는 차츰 미간을 구겼다.
알고 보니 박조혁은 깡패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끄트머리였다.
그리고, 통칭 ‘좆밥’으로 불렸다. 박조혁의 박조를 뒤집어 조박. 그것과 비슷한 어감의 좆밥이 별명이 된 유치하고 질 낮은 사연이었다.
그러니까. 지가 좆밥이면서 처음부터 괜히 태주를 갈군 거였다.
먼저 시작한 건 저 새끼고, 태주는 응당 복수를 해 줘야 했다.
어떤 게 좋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힌트는 의외로 박조혁에게서 받았다.
“씨발 좆 달린 새끼가 그렇게 살면 좋냐?”
씨발, 좋겠냐? 태주는 속으로만 대꾸하며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박조혁이 태주의 머리를 후려쳤다.
“형님 관심 떨어지면 죽을 줄 알아 씨발아. 후장 다 찢어놓는다.”
“…….”
태주는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이 듣는 욕에는 후장이 자주 포함됐다. 그런 욕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한참 아래로 깔아 봤는데, 계범호가 자신을 다르게 대우한다고 그들의 태도가 썩 달라지지 않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가벼운 애정을 받는 남창, 그게 태주의 위치라서.
“야. 또 형님한테 아양 떨어 봐. 어? 해봐, 새끼야.”
“…….”
툭툭 머리를 미는 손길을 견디고 있던 정태주는 불현듯 눈을 빛냈다.
그래 씨발. 남창이 아양이나 떨어야지.
“뒤지기 싫으면 입 닥치고 살아라.”
“예에, 죄송함다.”
태주는 대충 발음하고는 재빨리 박조혁의 손을 피해 도망쳤다. 박조혁은 허공에 욕설을 내뱉었으나 쫓아오지는 않았다.
깡패들은 매화 사장의 허락 없이는 직원들을 제대로 때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상품에 흠집이 나면 안 되는 거였다. 손찌검을 가끔 하더라도 항상 뒤통수나 정강이를 까는 정도에 그쳤다.
그걸 몰랐을 때는 깡패들이 손을 들면 전에 죽도록 맞았던 일이 떠올라 덜컥 겁이 났으나, 이젠 태주도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그래 봤자 계범호가 훨씬 더 무섭다.
그 무서운 남자랑 살도 맞대는데 저딴 조무래기들이 뭐가 무서울까. 태주는 콧방귀를 뀌면서도 슬쩍 뒤를 돌아봤다. 박조혁이 제 자리에 선 것을 확인한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아무도 안 보는데 괜히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었다.
마침 그날 계범호가 매화를 방문했다.
요즘의 일과는 거의 비슷했다. 호텔에서 섹스를 한 후, 가게로 내려오는 것.
섹스 후 남자가 담배를 태우는 동안 태주가 먼저 씻었고, 남자도 그 뒤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 탓에 남자의 머리는 평소처럼 뒤로 넘기지 않고 앞으로 내려온 채였다.
큰 효과는 아니지만 인상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 보였다. 제 몸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와 같은 냄새가 나는 것도 그랬고, 나른하게 풀린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태주는 계범호를 흘금거리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엉덩이를 움직여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가자 계범호가 시선을 줬다.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가며 긴장이 됐으나, 태주는 저질렀다.
“…….”
계범호는 제 허벅지에 올라앉은 정태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태주는 슬며시 눈을 굴리며 허공에 시선을 뒀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눈치를 살피던 태주가 매우 어색한 태도로 다시 내려오려 할 때, 남자의 굵직한 팔이 태주의 허리를 감았다.
계범호는 태주의 몸을 가뿐히 돌려 옆으로 앉히고 안정적으로 등을 받쳤다. 한 손에 들어오는 태주의 허벅지를 주무르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 태주가, 용돈이 필요한가….”
입꼬리는 옅게 휘어져 있었다.
치대는 것을 싫어한다고 들었지만 자신이 겪어 본 바로는 아닌 것 같아 저질러 본 것인데 반응이 괜찮았다. 바닥으로 내팽개쳐질 각오까지 했는데 다행이었다. 태주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살피고선 말했다.
“저 치킨 먹고 싶어요.”
생뚱맞은 말에 눈썹을 올리던 계범호는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태주는 휴대폰을 귀에 대는 남자를 보며 입술에 힘을 줬다.
아마 전화를 걸어 시키면 서열 끄트머리인 박조혁이 갔다 올 확률이 높았다. 그걸 바라고 한 일인데 계범호는 “조혁이한테 치킨 사 오라 해라.” 했다.
태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눈이 마주친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미소가 남자의 것치고는 무섭지 않았다.
태주가 괜히 딴청을 부리자 허벅지를 꽈악 움켜쥐긴 했으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계범호가 시킨 대로 박조혁은 치킨 심부름을 했다. 태주가 “치즈볼은요…?” 하고 아쉬운 듯 물었을 때, 남자는 별말 없이 박조혁에게 수표 두 장을 건네줬다.
아양 떠는 남창답게 여전히 계범호의 무릎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태주는 액수를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치킨 심부름에 20만 원이나 주다니. 솔직히 이러면 자신이 박조혁을 엿 먹이는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지갑을 보는 시선을 뭐라고 느낀 건지 계범호가 물었다.
“너도 줘?”
“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냉큼 대답하는 태주를 빤히 보던 계범호가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대충 빼내어 손에 쥐여 주고는 태주의 뺨을 깨물었다.
“아!”
뺨에 잇자국이 남았을 것 같아 좀 짜증이 났는데, 수표를 세어 보고 나서는 그런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
그렇게 계범호의 방관 속에서 태주는 박조혁을 두 번쯤 더 놀렸다.
그럼 또 계범호가 없을 때 박조혁이 자신을 갈구고, 계범호가 오면 자신은 박조혁을 부려먹고. 솔직히 영양가 없는 반복이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포기하지 않는 이상 태주도 물러나기가 싫었다. 요즘 많이 다친 자존심을 박조혁 저 새끼한테 세워 보기로 한 거였다.
그런데 뭐든 적당한 선이 좋았을까.
그날도 어김없이 박조혁에게 주문을 하고 있었다. 아니, 만두를 사 왔는데 간장을 따로 안 챙겨 왔길래 “간장은요?” 하고 물을 때였다.
뒷감당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태주는 최대한 공손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박조혁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이를 악물고 참는 듯한 박조혁의 얼굴을 보니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거다. 힘을 줘 봤으나 휘어지는 입술을 다잡을 수는 없었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내 그의 시선은 정태주가 눈을 반짝 빛내며 쳐다보는 곳으로 느릿하게 옮겨갔다. 눈을 부릅뜬 채 정태주를 노려보는 박조혁.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은 두 사람을 보며, 계범호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인 뒤 그가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주는 대로 먹어.”
“네? 간장 없이 만두를 어떻게….”
무심코 대답하며 돌아본 태주는 말끝을 흐렸다. 남자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고 나서 태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정부라도 되는 줄 알겠어.”
“…….”
그 말이 태주의 가슴에 푹 박혔다. 잊고 있던 수치심에 뺨이 화끈거렸다.
“어딜 기어올라, 정태주.”
태주는 안색을 굳힌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에게 잠깐 시선을 주다가 박조혁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수표 몇 장을 꺼내 건넸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계속 방관하리라 생각했던 계범호가 갑자기 선을 그었다. 밖으로 나가는 박조혁과 잠깐 눈이 마주쳤을 때, 박조혁은 잔인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테이블을 응시하던 태주는 눈앞에 일렁이는 하얀 연기에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계범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창 주제에 자기 부하를 놀린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돈 주는 사람은 이쪽인데, 서비스는 딴 놈한테 하면 쓰나.”
“…네?”
뜻 모를 말에 태주가 되물었다. 담배만 뻑뻑 피우는 남자는 불쾌해 보이는 표정이었고, 어쨌든 자신의 태도는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 아윽!”
계범호가 고개를 숙이는 태주의 턱을 아프게 붙잡아 들어 올렸다. 곧장 서늘한 눈과 마주쳤다.
“좀 전까진 잘도 들고 있던 고개를 왜 숙여.”
“…….”
“이 얼굴, 보여줘야지.”
꽉 붙잡아 흔드는 손길에 태주는 얕은 신음을 흘렸다. 턱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태주는 눈을 질끈 감는 대신 계범호를 올려다보았다.
“흐으….”
고통에 일그러진 태주의 얼굴을 표정 없이 내려다보던 계범호가 이내 손을 거뒀다.
남자는 털썩 소파에 기댔고, 태주는 그를 흘긋거리며 눈치를 봤다. 신나서 포장을 풀었던 만두는 먹을 생각도 못 하고 양손만 모아 붙잡았다.
“이건 뭐 눈치 봐야 할 땐 안 보고. 구멍만 잘 팔지, 멍청한 새끼가.”
또 영문 모를 욕을 듣고, 남자가 짜증스럽게 “먹어.” 했을 때가 되어서야 다 식은 만두를 입에 넣었다.
***
그땐 당황스럽고 무서웠는데 이후에 계속 곱씹다 보니 태주도 짜증이 났다.
사실 계범호에게 느끼는 감정은 늘 이런 식이었다. 순간엔 겁먹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가, 그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반감이 빠르게 차오르는.
편들어 줄 거면 계속 들어 주든가, 그날 그렇게 선을 그어버리니 태주의 입장이 무척 곤란하게 되었다.
태주는 며칠간 최선을 다해 박조혁을 피해 다녔다. 잡혔다가는 진짜로 심하게 얻어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어제는 살인 예고 비슷한 것도 듣긴 했다.
‘박 사장도 너한텐 손 뗐다더라, 씨발아. 너 좀 제대로 맞자.’
팔을 걷어붙이며 오던 박조혁은 멀리서 ‘좆밥!’ 하고 부르는 소리에 태주를 한 번 노려보고는 돌아섰었다.
진짜 까불다가 좆 된 상황이었다.
“태주야. 그러니까 적당히 좀 하지….”
경준이 제 옆에 딱 붙은 태주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경준을 방패로 삼아 사방을 살피고 있던 태주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니. 그 새끼가 먼저 시작했다니까요.”
“그래도 깡패들 함부로 건드리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요. 어차피 1대 1로 붙으면 승산 있어.”
“…….”
없는데. 경준은 단호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허세 깔린 말을 해놓고 태주는 경준의 뒤에 숨은 채 대기실까지 갔다. 그 깡패놈은 오늘 야간에는 없을 예정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조금 마음을 놓았을 때였다. 대기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씨바, 여기 있었네.”
박조혁을 보며 태주는 얼어붙었다. 대기실까지 오다니. 한편으론 어이가 없으면서도, 위기감이 들었다. 그가 정말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태주는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경준은 이곳에 없었고, 다른 사람들은 흥미롭다는 시선만 던질 뿐 태주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뒷걸음질을 치는 태주를 향해 박조혁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계범호 말고는 다 조무래기라고 생각하던 태주도 순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와라.”
구석으로 태주를 몰아가는 듯하던 깡패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손을 까딱거렸다. 그가 무게를 잡는 순간을 태주는 놓치지 않았다.
정태주는 다리에 힘을 주고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여긴 자신이 맞더라도 흥미롭게 지켜볼 사람만 있으니 밖으로 나가는 게 좋았다. 저 새끼도 손님이 다니는 홀에서 지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쒸바 새끼가!”
뒤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와락 인상을 쓴 채 대기실 밖으로 나가 달렸다. 주방에 있던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빠르게 훑어봤으나 이곳에도 박조혁을 말릴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태주는 곧장 복도로 달려 나갔다.
그런데 박조혁은 손님들이 있는 공간에서도 앞뒤 분간 못하고 달려와 태주의 뒷덜미를 기어이 잡아챘다.
“좆만 한 게 진짜 뒤지고 싶냐?”
“할 일 없어요? 씨발, 좀 놔요!”
태주는 뒤로 질질 끌려가며 눈을 부릅떴다. 때마침 매니저가 보였다.
“어! 매니저님!”
깡패들과 매화 직원들의 일은 분리되어 있었다. 매니저 앞에서 태주를 때릴 수는 없었는지 박조혁이 거칠게 손을 놓았고 태주는 그대로 매니저에게 뛰어갔다.
“뭐 시키실 일 없으세요?”
숨을 헉헉거리며 태주가 묻는 말에 매니저는 잠깐 태주와 박조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비릿한 미소를 걸치고 말했다.
“없는데?”
“있잖아요. 왜 없어요.”
태주가 매니저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박조혁은 손을 까딱거리다 험상궂게 인상을 쓰며 다가오고 있었고, 매니저는 태주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초조하게 눈을 굴릴 때였다.
태주는 검고 커다란 실루엣을 발견했다. 계범호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태주가 아는 누구보다 거대한 남자가 어둑한 복도 한가운데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태주는 그에게 달려갔다.
머리칼이 허공에서 마구 춤을 출 정도로 전력 질주를 한 정태주는 꼭 당연한 것처럼 계범호를 붙잡았다. 뛰어오다가 체중을 실어 붙잡았음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남자의 옷자락을 쥐고 그의 뒤쪽으로 반쯤 몸을 숨겼다.
“…….”
계범호는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박조혁이 따라오지 않는지 흘긋거리던 정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허억, 헉, 아니…. 때린다고 그래서요….”
태주는 가쁜 숨을 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태주를 보던 계범호의 미간이 옅게 패었다.
“이게 진짜 애새끼 짓을 하네.”
낮은 중얼거림과 내려다보는 눈빛이 오싹했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도 계범호는 제 부하의 편을 들었다. 내팽개쳐질 것 같은 기분에 태주는 남자의 재킷을 조금 더 움켜쥐었다. 그 손에 잠깐 남자의 시선이 머물렀던 것 같다.
계범호가 팔을 들었을 때, 태주는 움찔 몸을 굳혔다. 그런데 남자는 태주를 밀어내는 대신 어깨를 감쌌다.
“누가.”
짧은 질문을 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 좆밥, 아니 박조혁요.”
“조혁이가 너보다 몇 살은 더 많을 텐데, 이름 부르면 안 되지.”
그 말에 태주가 죄송합니다, 했으나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계범호는 고개를 돌려 복도로 시선을 줬다.
매니저와 박조혁은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멈춰 있었다. 가벼운 눈짓에 박조혁이 재빠르게 달려와 앞에 섰다. 매니저도 뒤따라와서는 친절한 낯을 했다.
“오셨습니까. 어떤 거 먼저 준비해드릴까요?”
남자는 매니저는 완전히 무시하고 박조혁을 보며 말했다.
“조막만 한 애를 왜 때려.”
“아….”
박조혁은 말을 고르듯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러자 계범호가 박조혁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하고 벽돌에 맞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다시 고개를 바로 한 박조혁의 눈에는 벌겋게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해는 말로 풀어야지.”
“예. 죄송합니다.”
계범호는 여상한 투였고, 박조혁은 심하다 싶을 만큼 깍듯한 말투였다.
자신이 뺨을 맞을 때도 저런 소리가 났던가. 태주가 무심결에 남자의 옷자락을 움켜쥐자 묵직한 팔이 자신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좆같긴 하지만 태주는 계범호가 자신을 안고 있다는 것에 안정을 느꼈다.
“조혁아.”
“예, 형님.”
“눈치 없는 새끼는 오래 못 간다.”
그 말에 태주가 괜히 뜨끔했다. 지난번에 태주에게 눈치 없다고 한마디 하지 않았던가. 태주는 계범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하필 눈이 딱 마주쳤다. 계범호가 손을 뻗었고 태주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는데, 커다란 손은 뛰어다니느라 헝클어진 태주의 머리만 뒤로 쓸어 넘기고 멀어졌다.
“술.”
계범호는 병풍처럼 선 매니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에게 안겨 태주도 불편한 걸음을 옮겼다.
룸에 들어오고 나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일 무서운 남자의 방에서 안심한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남자는 제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태주를 재밌다는 듯이 보았다. 큰 손으로 쓱쓱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정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바짝 붙어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남자는 혀를 차고는 제 손으로 땀을 문질러 닦아냈다. 그 손길을 얌전히 받는 유순한 얼굴을 보며 그가 놀리듯이 말했다.
“매를 벌고 다니지.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손님 없으면요…….”
태주는 뜸을 들이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안 돼요.”
조그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태주는 눈을 감았다 뜨며 계범호를 올려다보았다.
“저 손님 없으면 안 돼요.”
“…….”
잠깐 말이 없던 계범호가 이내 한숨처럼 웃었다. 그는 자기 눈썹을 만지작거리며 잠깐 허공에 눈을 굴렸다가 다시 태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좀 더 애써야지.”
거친 손이 흰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마음에 들면, 하고 나직이 운을 뗀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애새끼 짓 다 받아 줄 테니까.”
“…….”
눈을 깜박이는 태주를 보며 계범호가 피식 웃었다. 그는 뺨에서 손을 거두고는 태주의 허리를 붙잡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가볍게 테이블에 앉게 된 태주는 남자가 다정히 웃는 것을 멍하게 보았다.
계범호는 좀 전에 자신이 어린애처럼 달려와서 숨은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귀찮은 것도, 누군가 치대는 것도 싫어한다는 남자가 자신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좋아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태주야.”
“네?”
태주가 올려다보자 계범호가 테이블에 앉은 태주의 양옆으로 손을 짚었다. 거대한 손은 이내 하얗고 곧은 손등을 가볍게 짓눌렀다.
“나 없으면 안 된다면서, 아무한테나 매달리면 되겠어?”
“…….”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눈빛이 서늘했다. 태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의 손 아래 깔린 제 손과 테이블 사이가 금방 땀으로 젖었다.
“응?”
“아!”
계범호가 태주의 손을 점점 움켜쥐었다. 압박감이 고통으로 변하고, 손에서 뼈마디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아악! 누구… 매니저요? 매달린 거 아니에요! 존나 싫어하는 새끼예요!”
태주의 손을 부술 듯하던 악력이 멈췄다.
“그냥… 그냥, 붙잡고 방패로 쓴 거예요.”
태주가 다급하게 내뱉은 말에 계범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내 그는 꼼지락거리며 빠져나가려는 하얀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말은 잘하는 정태주, 조만간 어디 잘리겠다.”
“아니요. 아니에요….”
새하얗게 질려 고개를 흔드는 태주를 보며 남자가 피식 웃었다. 손도 놓아주었다. 태주는 잽싸게 제 손을 모아 쥐었다. 그런 태주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주던 계범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밖에 없는 것처럼 굴어, 태주야.”
낮은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지척에서 마주친 눈빛은 어둡고 다정했다. 저릿한 두 손을 모은 채 태주는 남자의 키스를 받았다.
그날 남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뺨을 거칠게 쓰다듬고 지갑에서 돈과 수표를 아무렇게나 꺼내어 내밀었다.
‘용돈.’
액수를 본 태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태주를 빤히 쳐다보던 계범호가 ‘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새끼는 씨발. 중얼거린 남자는 태주의 허리를 와락 끌어당겨 또 진탕 입 속을 휘저은 다음에야 몸을 일으켰다.
아마 시간을 내어 잠시 들른 듯했다.
룸에 홀로 남은 태주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뼈마디가 아직도 붉었다.
“아….”
그 자리를 문지르는데, 희미한 자국만 남은 목덜미에 통증을 느꼈다.
‘태주야. 너 좆 된 것 같아.’
어둡고 음산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주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전엔 립스틱이 묻어 있었다는 이유로 술을 뒤집어쓴 채 목덜미를 너덜너덜하게 씹혔고, 오늘은 다른 사람을 붙잡았다는 이유로 뼈가 부러질 뻔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마 전 박조혁의 앞에서 선을 그은 것도 자신이 주제넘게 행동해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거였더라면 오늘도 자신을 내팽개쳤어야 하니까.
계범호는 자신의 절박함을 좋아했다. 그에게 매달리고, 의지하는 일을 바랐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비단 몸뿐만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을 말이다.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아 태주는 가슴을 부풀렸다.
그리고 다음 날, 심하게 얻어맞아 얼굴이 흉측한 박조혁이 절뚝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통쾌함과 이상하게 든든한 기분과 그로 인한 자괴감, 두려움.
어쨌든 한 가지는 알았다.
남자가 바라는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면 몸이 성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
계범호는 그 뒤에도 종종 아무 연락 없이 가게로 왔다. 원래 운전해 주는 누군가가 가게에 연락을 넣는 것 같았는데, 요즘엔 직접 운전을 해서 와서 그런 건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말없이 태주를 찾아 지켜보는 시선을 보면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았다.
다른 직원과 룸의 청소를 마친 뒤 트레이를 끌고 나왔을 때, 정태주는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자마자 덩치 큰 사내들 가장 앞에 선 계범호를 발견했다.
보는 시선이 많아 발이 금방 떼어지지는 않았으나, 태주는 바닥을 힘주어 밀어내며 다가갔다. 남자는 한쪽 팔을 벌렸고 정태주는 그 사이로 쏙 들어가서 안겼다.
느슨하게 입매를 풀며 남자가 태주를 안은 채 걸었다. 같이 청소하던 직원은 마무리를 떠안게 되었다. 옆에서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으나 무시했다. 딴 데 본다고 눈알이라도 파려 들면 어쩌는가.
하지만 남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항상 껄끄럽고 불편했다.
룸에 들어가 남자의 옆에 꼭 붙어 앉은 태주는 고개를 푹 숙였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것은 모두 남자인데, 저는 남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여기서 니 바지를 벗긴 것도 아닌데.”
고개를 들자 비스듬한 시선을 주는 계범호가 보였다. 그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못마땅해했다.
“그대로. 고개 숙이지 마.”
“네….”
태주는 자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계범호는 태주를 서늘하게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간간이 입을 여는 남자의 얼굴을 눈에 담은 채 태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까이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려면 고개를 바짝 들어야 했는데, 그 자세는 잠깐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목이 뻐근하게 아팠다. 하필 계범호가 그 무거운 팔을 어깨에 올려놓은 채라 더 힘들었다. 못 참고 몸을 저절로 꿈지럭거려 봐도 계범호는 그만하라는 말이 없었다.
사이코패스 새끼.
태주는 속으로 욕을 하며 눈을 깜박였다. 여기서 더는 못하겠다고 하면 계범호가 어떻게 나올까.
박조혁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심하게 맞지는 않을 거다. 그 정도는 확신한다. 계범호는 자신에게 무르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수 있었다. 몸이든 정신이든.
계범호는 사람을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알았다. 그가 쓰는 폭력도 늘 그런 식이었다.
아, 씨발. 더는 못 하겠다.
목이 아파서 고개가 덜덜 떨렸다. 태주는 와락 얼굴을 찌푸린 채로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짧았고 태주는 거의 본능처럼 저질렀다.
툭. 태주는 이마를 계범호의 가슴팍에 떨구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온통 단단한 팔과 가슴 사이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다행히도 남자는 그쯤에서 태주를 봐줬다.
“머리 쓰기는.”
나무라듯 하지만 음성이 다정하다는 걸 알게 되자, 참았던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남자는 반대 손으로 태주의 목을 살짝 쓰다듬고는 태주를 완전히 감싸 안았다. 안심한 태주는 몸에 힘을 빼고 남자에게 체중을 실었다. 그럼에도 거대한 몸뚱이는 끄떡도 없었다.
잠깐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들 생각이었는데, 눈앞은 컴컴하고 닿은 체온은 따뜻하다 보니. 또 그 자세가 의외로 편안하다 보니 슬금슬금 잠이 오기 시작했다.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아무리 익숙한 몸이라도 자신이 그렇게 기대어 잘 사람은 아닌데.
아닌데…….
“……!”
태주는 흠칫 몸을 떨며 눈을 떴다.
뭐지. 내가 잤나. 눈을 깜박이며 태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등에 얹어져 있던 팔이 멀어지며 느낀 서늘함은 자신이 잔 것 같다는 생각에 힘을 더해 줬다.
그리고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방금 막 사람들이 나간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태주는 계범호를 올려다보았다. 상황 파악을 하느라 멍하게 눈을 깜박이는 태주를 보며 남자가 말했다.
“팔자 좋다, 태주.”
“죄송합니다….”
오래 잔 것처럼 목소리가 잠겨 있어서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목을 만지며 헛기침을 하는데 뺨에 남자의 주먹이 닿아 거칠게 문질러졌다.
살짝 욱신거리는 느낌에 아픈 척 손으로 문질러 보자 살결이 패인 게 느껴졌다. 남자의 옷 자국이 난 것 같았다.
“자려고 한 건 아닌데….”
웅얼웅얼한 말에 남자는 태주의 뺨에 남은 자국을 세게 문질렀다. 그러더니 뺨 전체를 움켜쥐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자국이 남은 뺨에도 잔 입맞춤을 쏟아부은 계범호는 살짝 헝클어진 태주의 머리를 정돈하듯 쓰다듬어 주었다.
별로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머리가 당겨 아, 하고 소리를 내자 남자가 짓궂게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침에 잠 안 자고 뭐 했어.”
“밝아서 잘 못 잤어요.”
혀를 찬 계범호가 태주의 머리칼을 놓아주었다. 머리칼이 사락, 소리를 내며 이마로 쏟아졌다. 남자는 그것을 다시 대충 뒤로 쓸어 넘기고는 태주의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투박한 엄지가 긴 속눈썹이 늘어진 눈 밑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꼭 태주의 안색을 살피는 것처럼.
***
솔직히 정태주는 계범호가 이러는 것이 영 적응되지 않았다.
남자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아닌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나, 자잘한 입맞춤, 너그러운 태도 같은 것.
제 것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행동일까.
계범호에게 자신은 아끼는 물건이거나, 조금 더 쳐 주자면 강아지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제법 신경을 쓰며 귀여워해 주는 거였다.
물론 물건이나 강아지에게도 이 정도로 집착하면 병이었다.
미친 새끼가 요즘은 자기 앞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도 성질을 냈다. 같이 있을 때면 심장이 조여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용돈이랍시고 몇백만 원씩 쥐여 주니 견딜 만했다.
태주는 남자에게 받은 용돈을 정리하다가 문득 제 월급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제게 거치지 않고 바로 사장에게 가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한 지가 좀 됐다.
마침 내일이 월급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태주는 출근하자마자 매니저를 찾았다.
“월급 명세서 주세요.”
“월급 뭐…? 돌았냐?”
매니저가 헛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태주는 물러나지 않았다.
“얼마 지급됐는지 그런 건 있을 거 아니에요. 좀 확인하자고요.”
“니가 아주 기세등등하지. 계 전무 없으면 빌빌 길 새끼가….”
매니저 말이 다 맞았다. 그래서 태주는 턱을 치켜들고 더욱 뻔뻔하게 말했다.
“어차피 손님이 제 빚 대신 갚아 주는 거 아니에요? 이제 저한테 월급 주세요.”
“야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손님 등쳐먹을 생각하지 말고 찾아 줄 때 열심히 해.”
검지로 태주의 이마를 밀며 하는 말에도 태주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매니저를 똑바로 보면서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손님이 그러라고 하셨는데요.”
그런 적 없다.
하지만 태주는 남자가 후에 알게 되어도 크게 개의치 않아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남자는 돈을 아끼지 않는 데다가, 무심한 구석이 있었다.
태주가 먼저 말을 꺼내면 오히려 재밌어할지도 몰랐다.
매니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딴 새끼가 뭐라고…. 태주를 아래위로 훑으며 중얼거리던 매니저가 이내 빈정거리며 말했다.
“몇 시간씩이나 자리 비우지, 컴플레인은 계속 들어오지…. 너 때문에 가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런데요?”
“너 월급 없어.”
태주는 제 귀를 의심했다.
솔직히 월급이 차감되었겠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룸에서 손님 대접을 안 하는 대신 청소며 궂은일은 도맡아 했다.
거기다 자신이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가게의 손해에 대한 부분은 계범호가 이미 책임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한 달에 가게, 호텔에 지불하는 돈만 해도 다른 손님 몇 배의 매상은 올려 줄 텐데.
“뭐라고요?”
“너한텐, 한 푼도, 안 준다고 새끼야.”
매니저가 태주의 이마를 검지로 밀며 말했다. 태주는 매니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야말로 계범호랑 얘기는 된 거예요?”
“뭐?”
“자기가 내 월급까지 주는 셈인 거, 알고는 있냐고요.”
태주의 말에 매니저의 입이 잠깐 다물렸다. 매니저는 계범호 앞에선 설설 기면서 뒤에선 그의 무심함을 이용했다. 만약 계범호가 알게 되더라도, 성가신 것을 싫어하는 그는 크게 화내는 일 없이 넘어갈 가능성이 높으니까.
정태주는 울컥 화가 나 중얼거렸다.
“씨발….”
“뭐? 씨발?”
매니저가 태주의 머리를 움켜쥐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 태주는 눈을 부릅뜬 채 잇새로 말했다.
“놔요.”
“뭐. 니가 어쩔 건데. 계 전무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게?”
일러 봐, 새끼야. 해봐. 매니저는 태주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뺨을 툭툭 쳤다.
“니가 그러니까 후장이나 팔지. 좆 달린 새끼가 안 쪽팔리냐? 나 같으면 뒤졌다.”
“…….”
이어지는 폭언에 태주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주먹이 꽈악 쥐어졌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어? 어쩔 거냐고.”
매니저가 때린 뺨에서 짝, 소리가 났다.
마치 그것이 신호였던 것처럼, 태주는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고개가 뒤로 꺾인 매니저가 태주의 머리채를 놓쳤다.
“악! 미쳤냐?”
매니저가 눈을 부릅떴다.
“그래, 씨발아. 미쳤다.”
정태주는 더는 참지 않았다.
그 순간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매니저의 목 아래에 팔꿈치를 대고 밀어 넘어뜨린 뒤 그 위로 올라탔다.
“야! 너희 뭐 하냐!”
매니저가 옆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매화의 경호원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사이 정태주는 줄곧 때리고 싶던 얼굴 위로 여러 번 주먹을 휘둘렀다.
“계 전무한테 뭐하러 일러. 너 같은 새끼는 그럴 것도 없어, 씨발.”
“윽, 윽…. 개새끼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태주의 주먹을 피하던 매니저가 어느 순간 눈을 번뜩였다. 매니저의 주먹이 태주의 광대뼈를 강타했고, 태주는 눈앞이 아찔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곧장 위치가 뒤바뀌었다. 태주는 찬 바닥에 등을 깔고 누웠고 그 위로 매니저가 올라탔다.
개싸움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치고받고 싸우며 바닥을 굴러다니던 그들은 뒤늦게 말리는 덩치들에 의해 겨우 떨어졌다.
“놔요. 씨발, 지는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양팔이 붙잡힌 태주가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새빨갛게 붉었다.
“너 딱 각오해라. 사장님한테 니 장기 빼자고 할 테니까.”
매니저의 꼴도 비슷했으나 코피까지 줄줄 흘러서 좀 더 처참했다.
“해! 해 봐, 씨발놈아.”
“이 좆만 한 새끼가…. 씨발, 너흰 왜 그냥 보고 있냐? 돈값 안 해?”
매니저가 이번에는 덩치들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묵묵부답이었고, 열이 받아 눈앞이 벌겋던 태주도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원래라면 매니저에게 달려들자마자 저지했을 텐데. 그러고 나선 아마 죽을 만큼 때렸겠지.
잠깐 침묵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태주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계범호 때문일 것이다. 저딴 소리를 들어가며 후장을 파는 보람이 참.
울긋불긋한 얼굴에 건조하게 붙어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태주는 매니저가 처음 보는 서늘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월급 제대로 입금해. 계범호한테 말 넣기 전에.”
***
강하게 나가긴 했지만 정태주도 걱정은 했다. 자다가 끌려 나가 장기 적출 수술을 받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데 사장도 조용했고, 덩치들도 조용했다. 욕을 하거나 자신을 노려보긴 했지만 매니저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월급을 입금해 준 건 아니었다. 매니저는 계범호한테 일러 보라며 빈정거리기만 했다. 자신이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씨발, 못 하긴 왜 못 해.”
태주는 복도를 성큼성큼 지나 VVIP 룸 앞에 섰다. 노크하고 나서는 잠깐 생각했다.
계범호의 옆에 앉아 허리를 안고 말할지, 아니면 그의 허벅지에 앉아서 말할지.
“아….”
그런 제 모습을 상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태주는 멍든 얼굴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르고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남자 혼자 있으리라 생각했던 룸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매니저. 그 씨발 새끼 말이다.
문 근처에 우뚝 멈춰 선 태주에게 계범호가 시선을 줬다. 태주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걸음을 뗐다.
그런데 테이블 근처에 다가갔을 때, 남자는 말했다.
“무릎 꿇어.”
“네?”
멈춰 선 태주가 못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의 서늘한 눈빛이 제 얼굴에 닿고 나서야 주춤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매니저가 자신을 비웃는 것이 보였다. 겨우 꺼뜨려 놓았던 분노가 속에서 또 활활 타올랐다. 태주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계범호는 그런 태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극상을 하면 쓰나.”
낮은 음성이 내놓은 말에, 태주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속이 허한 것 같은 이 감정은 배신감과 닮았다. 그런데 그 배신감이란 것도 응당한 감정인가? 자신이, 계범호에게?
그때 계범호가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꿇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를 보고 있으니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하고 있던 생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엔 다른 생각들이 바쁘게 차올랐다.
매니저가 전부 얘기한 건가. 자신이 월급을 받기로 허락받았다고 한 것이나, 계범호를 믿고 기세등등하게 굴었던 것도 얘기했을까.
움켜쥔 주먹 안쪽에 흥건하게 땀이 났다.
그사이 구둣발은 제 무릎 앞에서 멈춰 섰다. 계범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반성하는 태도란 원래 고개를 숙이는 것이겠지만, 태주는 몇 번의 반복으로 그게 남자에겐 역효과라는 걸 알았다.
정태주는 고개를 들고, 짐승처럼 거대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손이 주머니에서 빠졌다. 커다란 덩치를 구부린 채, 그가 태주의 멍든 얼굴을 구경했다.
매니저는 그런 남자의 뒤쪽에서 자신을 비웃는 중이었다. 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앞으론 신경 쓰실 일 없게끔 철저히 교육하겠습니다.”
매니저가 공손히 말했다. 태주를 깔보듯 내려다보면서.
“아.”
낮은 음성을 뱉어낸 계범호가 허리를 폈다. 그러고 돌아섰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태주는 눈에 힘을 줬다. 눈이 이상하게도 좀 시큰거렸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 맞았다. 그런데 왜 혼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술만 잘근 깨물고 있던 순간, 정태주는 눈을 크게 떴다. 느릿하게 매니저의 앞에 선 계범호가 돌연 매니저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었다.
퍽, 소리와 함께 매니저가 튕겨나듯 나자빠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매니저는 어지러운 것인지 흰자위를 보이며 눈을 깜박였다. 겨우 제대로 눈을 뜨고 나서는 당황스러운 낯으로 계범호를 올려다봤다.
“멍들면 잘 안 낫는다는데.”
계범호는 갑작스럽게 폭력을 쓴 사람치곤 여상히 말했다.
“예?”
매니저가 멍하게 되물었다. 계범호는 그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손짓했다. 일어서라는 거였다.
당황스러움이 컸던 매니저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매니저가 주춤주춤 일어서면서 문가를 슬쩍 살피는데, 계범호가 또 손을 들었다.
쾅! 그가 휘두른 손에 얼굴을 맞은 매니저가 이번엔 테이블로 쓰러졌다.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심상찮은 소리가 나며 매니저의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계범호는 그런 매니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테이블로 여러 번 처박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은 쾅, 쾅. 공간을 울리는 소리에 먹혔다.
태주는 매니저의 얼굴과 테이블 사이로 스멀스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어디서 저렇게 많은 피가 나오는 것인지 몰랐다. 코피이거나, 이가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억… 사, 살려 주세요….”
쉰 소리를 내며 매니저가 더듬더듬 계범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계범호는 제 손목을 붙잡은 매니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움켜쥐고 뒤로 꺾는 데까진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별로 힘들이지 않은 것 같은 손길에도 손목은 이상한 모양으로 꺾였다. 우드득, 뼈가 틀어지는 소리가 나고 매니저가 비명을 지르며 펄떡거렸다.
“아아악!”
방음이 잘 되는 벽을 뚫고 나갈 것 같은 커다란 소리에, 멍하게 있던 태주도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시끄러워.”
혀를 찬 남자가 다시 매니저의 뒤통수를 쥐고 테이블 위로 얼굴을 쾅, 짓뭉갰다. 그런 뒤에는 뒤통수를 힘주어 눌렀다.
으드득, 으득. 이미 부러졌을 코뼈를 으스러뜨리며 계범호는 잔인하게 안광을 번뜩였다. 경련하듯 몸을 뒤트는 매니저를 제압하느라 팔뚝에 힘줄을 세운 채,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애 돈을 왜 안 줘. 간식 사 먹으라고 준 용돈도 꼬박꼬박 모으는 앤데.”
목소리에는 서늘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끄으으윽…!”
계범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매니저를 내려다보다가 돌연 미간을 구겼다.
“내가 씹, 학부모도 아니고.”
낮게 짓씹은 남자가 매니저의 머리를 테이블 모서리로 내팽개쳤다. 퍽,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매니저의 몸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에게서는 이제 아무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정신을 잃었거나 죽었을지도 몰랐다.
태주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살 떨리는 폭력의 현장에 심장이 작게 응축되어 피가 돌지 않는 기분이었다. 손발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처참한 매니저의 몰골을 보고 있는데, 계범호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냅킨 몇 장을 신경질적으로 뽑아 손을 닦고 버렸다. 그러곤 태주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항상 눈치 없는 새끼들이 문제라니까.”
커다란 등을 구부린 남자는 태주의 뺨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곤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또 입을 열었다.
“우리 태주도 눈치는 좀 없는데….”
“읏….”
남자의 손이 뺨에 든 멍을 꾹 눌렀다.
“편들어 줄 거 알고 까부는 것 보면, 또 아닌 것도 같고.”
태주는 목과 어깨를 딱딱하게 긴장시킨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물끄러미 닿는 눈빛에는 애정 비슷한 것이 담겨 있었다.
“왜. 전화해서 고자질해 보지.”
“바쁘실 것 같아서요.”
“생각은 해봤나 보네.”
곧장 흘러나온 대답에 계범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남자는 이내 태주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다리가 저릿해서 미간을 찌푸리니 매니저의 얼굴을 박살 낸 손이 미간을 가볍게 문지르고 멀어졌다. 태주가 올려다보자 계범호가 조금 장난기 어린 눈을 하고 말했다.
“여기서 놀지는 못 하겠다.”
계범호는 태주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를 따라 룸을 나서면서 태주는 뒤로 흘긋 시선을 줬다. 매니저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닌가 보다.
“제대로 걸어.”
뒤를 힐금거리던 태주는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움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단단한 허리를 매달리듯 끌어안자 큰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호텔로 올라가 옷을 벗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섹스를 하는 대신 태주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태주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다가 이와 비슷한 일이 전에도 있었음을 깨달았다. 도망쳤다가 죽도록 맞았을 때 말이다.
“몸에는 없는데….”
느린 시선이 태주의 광대뼈에 고였다. 제대로 맞은 곳이라 멍이 넓게 퍼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계범호가 점차 미간을 구겼다. 불똥은 태주에게 튀었다.
“삐쩍 말랐으니까 그딴 새끼한테도 처맞지.”
“아, 제가 더 많이 때렸어요.”
발끈한 태주가 대답했다. 억울하단 듯 눈을 부릅뜬 태주를 보며 남자가 날카로운 웃음을 내뱉었다. 이게. 중얼거림이 음산했다.
태주는 뒤늦게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동공을 잘게 떨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저 살 좀 쪘어요.”
계범호는 코웃음을 쳤다. 진짠데. 정태주는 중얼거리고는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요.”
제 허리에 가져다 대고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계범호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태주에게 붙잡힌 손목과 납작한 허리, 말갛게 쳐다보는 하얀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곧 남자의 짙은 눈썹 사이로 주름이 생겼다.
미간을 찌푸린 계범호는 마른 허리를 팔로 감아 끌어당기고, 휘청거리는 몸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여기는.”
“아!”
엉덩이를 강하게 주무르는 손길에 태주가 얼굴을 구겼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를 올려다보며 잠깐 웃다가 허리를 감쌌다. 뒤쪽의 오목한 부분을 엄지로 쓸어보고 손바닥을 댔다.
시선이 얽혔다. 구겨진 정태주의 미간은 점점 펴지고, 휘어졌던 계범호의 입매는 제자리를 찾았다.
계범호는 눈을 깜박이는 하얀 얼굴 위로 조금 전 보았던 얼굴을 덧씌워냈다. 무릎을 꿇으라고 하니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이었다.
“서운해 보이던데.”
“제가요?”
태주는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반응했다. 그러나 잠깐 허공에 시선을 두다가, 입술을 느리게 뗐다.
“매니저가 전부터 저 괴롭혔어요. 근데 손님이,”
말을 하다 말고 정태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저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도 찌푸렸다. 그런 다음에야 조그만 말을 흘렸다.
“…알면서 모른 척하니까.”
“내가 알았던가.”
무심히 말해놓고 계범호는 눈을 둥글게 휘었다.
“…….”
입술이 맞닿았다. 남자가 태주를 끌어당겼던 것인지, 태주가 먼저 고개를 내린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살이 맞닿는 순간의 시간은 몹시 이상하게 흐른다. 눈 깜박할 사이에 밤이 새벽이 되거나, 긴 시곗바늘이 한 바퀴쯤은 돌았을 것이라 예상했던 시간이 고작 한두 칸쯤 이동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아으…!”
멍든 뺨을 이로 잘근잘근 씹히는 지금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다. 괴로움에 몸을 비트는 태주를 굵은 팔이 단단히 옭아맸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왜 이런 걸 만들어 와.”
계범호는 정태주의 뺨에 든 멍을 제 흔적으로 덮으려는 듯 살갗을 깨물고 빨았다.
“흐으, 으….”
눈을 질끈 감은 태주의 속눈썹이 짙게 젖었다. 고통에 헐떡이는 태주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며 남자가 속삭였다. 참아야지.
“아, 아파요….”
응. 목을 울린 남자가 큰 손으로 태주의 이마를 짚어 주었다. 그러나 광대뼈 옆을 잇새로 잘근잘근 깨무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계범호는 기어이 태주의 멍든 얼굴을 더 흉하게 만들어놓고 나서야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만족스럽다는 듯 하나하나 시선을 줬다.
그런 다음 마른 몸을 끌어안고 팔에 돋은 소름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린 정태주가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았다. 불순한 그 눈빛에도 남자는 픽, 가볍게 웃고는 말았다.
“여기 멍들었던 것도 매니저 짓인가.”
“네?”
무릎 아래쪽을 쓰다듬는 손길에 태주는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손이 옆으로 완전히 빠져나간 다음에야 제 다리를 볼 수 있었다.
정강이 쪽에도 남자가 만들어놓은 흔적 몇 개가 있었다. 조금 오래된 것이라 자국은 희미했고, 멍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멍은 없는데요.”
그 말에 계범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태주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아, 예전에요? 하고는 말했다.
“매니저는 아닐걸요. 어디 부딪혔거나 다른 데서 맞았나 봐요.”
계범호는 맞았다는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하는 정태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옅은 쌍꺼풀이 진 눈매나 작은 콧방울, 하얀 피부, 가는 턱선. 폭력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였다.
남자는 숱 많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모양의 눈썹을 눈에 담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태주야.”
“네?”
“몸뚱이 간수 잘해. 비싼 건데.”
“…….”
태주는 마지못해 네, 하고 대답했다. 비싼 몸뚱이라면서 정작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건 계범호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자의 시선이 빤히 닿았다.
“아무 생각 안 했는데요. …안 했습니다.”
말투가 비딱했던 것 같아 슬쩍 고쳐 말하자 계범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태주를 세게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에 뺨이 구겨진 채 태주는 눈을 깜박였다. 온몸을 전부 감싼 남자의 품은 따뜻했다.
***
매니저는 며칠간 출근하지 않았다.
“죽은 거 아냐?”
“아냐. 뒷문으로 나가는 거 내가 봤어.”
“병원 가서 죽었을 수도 있지.”
쑥덕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태주는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달갑지 않게도 태주에게 관심이 왔다.
“야. 너 때문에 계 전무가 매니저 조졌다는 거 진짜냐?”
“…….”
침묵으로 일관해도 그들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근데 얘도 맞은 거 아냐? 얼굴 상태가 더 안 좋아졌는데.”
보랏빛으로 얼룩덜룩한 태주의 얼굴에 시선 몇 개가 닿았다. 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맞은 게 아니라 씹힌 건데.
“원래 멍은 시간 지날수록 심해져. 그리고 계 전무한테 맞았으면 겨우 저 정도겠냐?”
그건 그래. 누군가의 말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가 나간 것도 아닌 것 같고, 뼈가 부러진 곳도 없어 보였다.
“매니저랑 싸우는 거 보고 얘가 진짜 미친 건가 했는데.”
“여기 깡패들도 그날 얘 편들었잖아. 와, 진짜 손님 하나 잘 물었다, 너.”
“인생 폈다. 얼굴 반반하긴 해도 정태주 순 양아치였잖아. 초졸이라며?”
태주는 뚱한 표정으로 “중졸인데요.” 했다.
“계 전무가 좀 머리 빈 타입을 좋아하나 보지.”
“그럼 너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뒈지고 싶냐?”
그들은 낄낄거리며 웃다가 뒤늦게 태주의 눈치를 살폈다. 퍽 어색한 말투로 누군가 말했다.
“웃자고 한 소린데 혹시 계 전무한테 얘기하는 거 아니지?”
“…제가 얘기한 적 없어요.”
태주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짜 얘기 안 할 거냐고 재차 물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얼굴만 찌푸리고 있는데,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주 그럴 애 아니야.”
경준이었다.
“어, 형! 어디 갔다 왔어요?”
“응. 외출.”
못내 반가워 손을 흔들자 경준이 곧장 다가와 태주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곤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말조심들 해. 계 전무 무서운 사람이잖아.”
“…….”
반갑게 휘어지던 태주의 입꼬리가 멈췄다. 태주는 눈을 굴려 경준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경준이 다정히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네.”
“나갔다가 도넛 사왔는데. 다들 먹어.”
경준이 종이 백을 내려놓자 공간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박스 속 형형색색의 도넛을 집어가는 손들을 태주는 조금 멍하게 보고 있었다.
“이따 먹어도 돼, 태주야. 너 좋아할 것 같아서 숙소에도 한 박스 올려놓고 왔어.”
“아. 고마워요.”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시시 웃었다. 역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경준밖에 없는 것 같았다.
뒤늦게 도넛이 맛있어 보여서 초콜릿이 잔뜩 올려진 도넛을 손에 들었다. 오는 길에 녹았는지 손에 초콜릿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VVIP 오셨어요. 태주 씨 서빙 준비하세요.”
매니저 일을 대신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게에서 원래 일하던 사람은 아닌데, 갑자기 새로 와 임시 매니저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가 앞으로 계속 일하게 될 거란 소문이 돌았다.
임시 매니저는 사무적인 편이었다. 직원들 모두에게 존댓말을 썼고, 효율적으로 일을 배분했다. 태주의 월급도 지급해 줬다.
“네, 알겠습니다.”
태주는 콧등을 찌푸리고는 도넛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오, 맛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태주는 도넛을 전부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바깥으로 나갔다.
룸으로 들어가자 계범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뻗어 태주를 끌어당겼다. 자기 허벅지에 앉히고 입을 맞추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
평소 같으면 집요하게 입 안을 파고들었을 텐데, 남자는 문득 고개를 뒤로 물리고 인상을 썼다.
“달아.”
“…도넛 먹었어요.”
태주는 조금 멋쩍게 제 입술을 핥았다. 남자는 달달한 초콜릿 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으면서도 빼꼼 튀어나온 혓바닥이 다시 입술 사이로 들어가는 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참을성 없는 남자가 또 곧장 입술을 부딪었다. 이번엔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혀를 쪽쪽 빨고 입술 주름 사이사이도 핥아냈으면서 “이 썩는다.” 했다.
뭐래. 태주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남자가 돌연 소리 내어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가까이 닿은 두 얼굴 사이에서 진동했다.
남자는 이내 고개를 뒤로 물리고 태주의 뺨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흉하게 만들어놓은 살결을 스치듯 가볍게 문질렀다.
묘하게 부드러운 공기가 맴돌았다. 태주는 잠깐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매니저 며칠째 출근 안 해요.”
음. 남자가 무성의하게 목을 울렸다. 그는 태주의 귀 근처를 살살 간질여 솜털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혹시… 죽었어요?”
계범호는 그제야 태주와 눈을 맞췄다.
“죽여 줘?”
“예? 아뇨!”
태주가 질겁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었던 듯 남자는 여상히 말했다.
“그 얼굴로 서비스직은 못 하겠지.”
“…….”
꼭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태주가 갑자기 귀를 만지작거리자 계범호의 손도 그쪽으로 갔다. 동그란 귓바퀴를 슬쩍 만지다 꾹꾹 반으로 접어 눌렀다. 아픈 건 아니라서 멀뚱히 있으니 흥미를 잃은 듯 손을 거뒀다.
정태주는 계범호의 얼굴을 살폈다. 짙은 눈썹은 찌푸려지지 않았고, 새카만 눈동자는 태주의 머리칼과 목덜미를 훑고 있었다. 귀 대신 또 괴롭힐 곳을 찾는 것 같았다. 느른히 풀어진 입술까지 살핀 태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아무 말 안 해요?”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태주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를 어떻게 한다거나….”
“뭘 어떻게 해.”
계범호는 별것 없다는 듯 말을 툭 내뱉고 태주의 턱을 한 손으로 쥐었다. 양 뺨을 꾹꾹 누르며 그가 말했다.
“박 사장한테는 덤비지 마.”
태주가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계범호가 말을 덧붙였다.
“이기지도 못할 거.”
매서워 보이는 눈매가 옅게 휘어졌다. 태주는 그걸 조금 멍하게 보다가 뒤늦게 “50대 아저씨한테는 무조건 이겨요.” 했다. 그 말에 남자가 또 태주의 뺨을 괴롭혔다.
정태주는 알게 되었다. 이제 이곳에서 자신을 해칠 사람은 없었다.
계범호가 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