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떡정이라는 게 생각보다 강력한 것인가.
잠깐 잊고 있었던 그 생각을 다시 꺼내게 된 건, 담뱃재 때문이었다.
계범호는 지독한 골초였고 관계 중에도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들은 얘기들처럼 태주도 떨어진 담뱃재에 얕은 화상을 입곤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금 달라졌다.
그의 밑에서 흔들리던 태주가 새빨간 담뱃불을 보고 질끈 눈을 감았을 때였을까. 그는 ‘쫄기는.’ 하고 낮게 중얼거렸고, 이내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더니 재떨이로 무심히 던졌다.
그다음부터 태주는 담뱃불이 보이면 버릇처럼 눈을 질끈 감았고, 그럼 남자는 조금 웃으며 담배를 껐다.
하긴. 인간적으로 담배 정도야 꺼 줄 수 있지. 태주는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걸린 담배를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오늘 계범호는 자기 부하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대충 듣기로는 하고 있던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거였다.
깡패들도 회식을 하네. 태주는 속으로 이죽였다.
사실 다른 깡패들은 전부 여자 직원을 옆에 앉히고 있는데, 저만 남자인 것이 불편하고 쪽팔려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눈은 제 앞에 놓인 술잔과 이따금 움직이는 남자의 손만을 좇았다. 조금만 시선을 멀리 하면, 제 동료들이 남자들에게 희롱당하는 모습이 곧장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소 정적인 분위기에서 소곤거리기만 하던 그들은 술기운이 오르자 점점 과감해지고 있었다. 계범호가 여자 직원들이 다 있는 곳에서 저에게 좆을 빨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태주는 흘긋 눈을 굴렸다.
그런데 하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태주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물끄러미 시선을 주던 계범호가 불쑥 손을 뻗었다.
“뭘 얼마나 마셨다고.”
거칠거칠한 엄지가 태주의 뺨 위를 문질렀다. 그 손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 아마 제 얼굴에 열이 났던 것 같았다.
“많이 마셨어요.”
“한 잔이.”
남자가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얼음이 녹아 투명해진 태주의 잔을 물끄러미 보다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단단한 턱 위로 뺨이 움푹 패었다 나왔다.
그는 이내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말했다.
“손.”
“예?”
빤히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태주는 주춤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계범호가 그 위로 담배를 가져왔다. 태주의 손바닥에 담배를 지져 끄려는 것처럼.
태주는 순간 놀라 손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대로 손을 편 채 두었다. 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담배가 바짝 힘이 들어간 손바닥과 점점 가까워졌다.
태주가 눈을 부릅뜨며 마음의 준비를 할 때였다.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태주는 흉터 위의 입술이 둥글게 휘어진 것을 발견했다.
계범호는 태주의 얼굴에 잠깐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
놀린 거였다.
태주는 뒤늦게 미간을 구겼으나 감히 그를 노려보진 않았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큰일이었다.
그때. 계범호가 느른한 투로 말했다.
“영상 회수 제대로 안 한 새끼 누구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에 소란스럽던 공간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싸늘한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도 않았다. 곧장 한 명이 벌떡 일어서 허리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태주는 눈을 굴렸다. 계범호는 다소 무심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다가 담배를 끼운 손을 앞으로 가볍게 내밀었다.
뭐 하는 거지, 하고 생각하던 때, 테이블이 이마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팔을 쭉 뻗어 손바닥을 폈다.
계범호는 그 위로 담배를 비벼 껐다.
“…….”
태주는 저도 모르게 제 두 손을 맞잡았다. 탄내가 나는 것 같아 속이 조금 메슥거렸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제 손을 태운 담배꽁초를 공손히 움켜쥔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계범호는 낮게 대답했고, 손바닥에 화상을 입은 남자는 다시 착석했다. 태주는 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태주를 잠깐 보다가 남자의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멈췄던 소음이 이내 공간을 채웠다. 하지만 이전처럼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태주는 제 손바닥이 뜨거운 것 같아 시커먼 재가 묻은 손을 흘긋거렸다. 그러던 중에 옆에 있던 커다란 인영이 몸을 일으키니 화들짝 놀란 것도 당연했다.
“오늘은 쟤한테 팔래?”
서서 내려다보는 계범호는 여느 때보다 위압적이었다. 금방 목덜미를 쥐고 저쪽으로 던지기라도 할 것 같아 태주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결백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태주를 잠깐 보던 남자가 태주의 발목을 툭, 쳤다. 태주는 저를 빼고 모두 일어서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길을 비켜주려 십수 명이 일어나 옆으로 이동했다. 태주는 그들을 따라 이동하다가 목덜미가 붙잡혔다. 계범호는 그대로 태주를 끌고 갔다.
“형님. 들어가십시오!”
등 뒤로 배웅이 들렸다.
태주는 남자에게 뒷덜미를 붙잡힌 채 비틀거리며 걸었다. 목뒤에 큰 손이 턱, 올려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어깨도 좁혀졌다.
어디 가냐고 입을 벙긋거리려는데, 복도에서 매니저가 불쑥 튀어나왔다.
“저희 직원이 뭔가 실수를 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매니저가 일어서면서는 흉흉하게 태주를 노려봤다. 태주가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니 매니저가 “꼴통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위에 준비해 놔.”
“예? 아, 네. 알겠습니다!”
태주는 고개를 돌렸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탓에 고개를 바짝 들어야 가까이 선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위에는 왜요?”
“왜긴.”
계범호는 태주를 내려다보았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좀 우스웠다. 그러다가 자신이 쥔 목덜미가 따뜻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볼에 남은 홍조처럼 이 또한 고작 몇 모금 마신 위스키 때문인 듯했다.
남자는 한 손에 가볍게 들어오는 목덜미를 잠깐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거뒀다.
태주는 자신이 소위 말하는 2차를 나가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에 호텔로 가서 계범호가 자신에게 뭘 하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호텔로 가는 이유가 궁금했다. 계범호는 룸 안에서도 자신에게 뭐든 할 수 있었다. 태주는 보폭이 넓은 남자를 따라가느라 걸음을 바쁘게 움직이며 물었다.
“왜 룸에서 안 하고 위로 올라가요?”
“좁아.”
계범호는 귀찮은 듯 대답하고는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태주는 눈치 좋게 버튼을 누르고 그의 옆에 섰다.
며칠 전 일이 생각났다. 소파에서 관계를 가지다 남자는 문득 욕설을 내뱉었었다. 아마 태주의 다리를 허공에서 넓게 벌리고 그 사이로 좆을 박아 넣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넓다고 한들 소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굳이 자리를 옮기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본 남자를 생각하면 좀 의외였다. 남자는 성가신 것을 싫어한다. 식사, 술, 섹스까지 한 공간에서 해결할 정도니 말 다 한 거다.
호텔로 올라가자 다른 직원이 그들을 안내했다. 태주는 연신 두리번거렸다. 고급 호텔이라 주장하는 매니저의 말처럼 내부는 깔끔하고 세련됐다. 물론 호텔을 가 본 적이 없어 비교 대상은 없었다.
그런데 호텔은 이렇게 조명이 어둡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주는 어두운 탓에 꼭 거대한 산처럼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 쪽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경호원이 보였다. 태주가 도망갈까 감시하는 듯했다.
지금 도망쳤다가 맞아 죽을 일 있나…. 태주는 아래로 늘어뜨린 계범호의 무시무시한 손을 보며 생각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물러나는 직원에게 잠깐 시선을 주는데, 팔을 붙잡혀 거칠게 끌려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태주는 어느새 룸 안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어딜 자꾸 두리번거려, 태주야.”
서늘한 음성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선 채로 태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처음 와 봐?”
“네….”
그 말에 계범호는 가만히 시선을 주다가 말했다.
“옷 벗어.”
명령조였으나 이상하게도 부드럽게 들렸다.
평소처럼 옷을 벗던 태주는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킷을 벗은 남자가 셔츠 단추까지 끌러 내리기 시작한 거다. 그가 옷을 벗는 것은 처음이었다.
옷을 벗다 말고 멀뚱히 멈춘 태주에게 계범호가 비딱한 시선을 줬다. 그는 이내 혀를 차고는 태주의 뺨을 내리쳤다.
가볍게 휘두른 것 같은데 손이 워낙 두껍고 크다 보니 얼굴 전체가 얼얼했다. 반사적으로 뺨에 손을 댄 태주의 귀로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오늘 왜 이렇게 굼뜨지.”
태주는 죄송합니다, 하고 다급하게 옷을 벗었다. 또 맞을까 봐 바지와 팬티는 한 번에 끌어내려 침대 밑으로 던졌다. 그러고 나서 눈을 굴렸을 때, 계범호는 상의를 탈의한 채였다.
태주는 말문을 잃었다. 어쩌면 남자에게 문신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므로 오른쪽 팔과 어깨에 넓게 걸친 문신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빼곡히 들어찬 큼직한 근육, 그 위를 가르는 몇 개의 오래된 상처.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을 주는 남자의 몸 그 자체 때문이었다.
옷을 전부 벗은 남자가 제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위압감은 배가 됐다. 그의 신장이 190cm쯤 되겠다고 추측했었으나 그 이상일 것도 같았다. 꼭 거대한 벽을 앞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태주는 숨을 나누어 쉬며 손가락을 움츠렸다. 하얀 시트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계범호는 얼어붙은 태주를 맞은 뺨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온도를 가늠하듯, 붉어진 뺨 위로 손바닥을 댔다. 태주가 목을 조금 움츠린 채 올려다보자 그가 태주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
계범호는 침대에서 하는 섹스가 마음에 든 듯했다.
그는 태주의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벌리며 평소보다도 오랜 섹스를 했다. 소파나 테이블에서 하는 것보다 몸은 편하지 않을까 했던 태주의 작은 기대가 산산조각난 것이다.
힘이 다 빠진 채 헐떡이는 태주와 달리 계범호는 나른한 얼굴을 하고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누웠다. 남자는 담배를 하나 빼 물며, 죽은 듯 누워 있는 태주를 흘긋 보았다.
“하나 줘?”
“끊었어요.”
계범호는 솜털이 보송한 태주의 뺨에 시선을 주곤 픽 웃었다.
“진짜 끊었는데. 전 인내심이 좀 좋거든요.”
태주가 몸을 조금 일으켜 베개를 벴다. 남자가 태주를 비스듬히 보며 물었다.
“난 안 좋고?”
“…….”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서늘한 목소리와 달리 태주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손은 때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참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손은 이내 아래로 이동해 찢어진 입가를 손끝으로 쓸었다. 남자의 좆을 빠느라 요즘엔 항상 그 꼴이었다.
혹시 미안하기라도 해서 만지나 했는데 계범호는 만족스럽게 입매를 흩뜨린 채였다. 개새끼. 태주는 속으로 욕을 했다.
조금 더 누워 있던 태주의 눈에 침대 아래에 뒹구는 분홍색 물체가 보였다. 몸속에 넣는 건데 저런 꼴인 게 좀 그래서 태주는 그걸 주워 탁상에 올려놓았다.
“소중한 건가 봐.”
놀리듯 하는 말이 열 받았으나,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데 남자는 그것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앞으로 저건 쓰지 마.”
“…네?”
태주가 당황해 묻자 계범호가 말했다.
“헐렁하더라.”
“…….”
개소리다. 좀 전에도 힘 빼라고 엉덩이를 찢을 것처럼 때렸으면서. 태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범호는 담배를 마저 피운 뒤 몸을 일으켰다. 두툼한 몸이 점점 가려지는 것을 흘금흘금 보며 태주는 남자의 재킷에 이따금 시선을 줬다. 재킷까지 입은 남자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는 슬쩍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태주에게 수표 몇 장을 준 남자가 정수리를 짓누르듯 쓰다듬었다.
“밤송이 같은 게.”
뾰족뾰족하게 솟은 머리칼을 몇 번 더 꾹꾹 누르던 손은 뺨을 스친 후에 멀어졌다.
***
계범호는 그 뒤로 호텔을 몇 번 더 이용했다. 가끔은 미리 연락을 받고 태주가 호텔에서 남자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어… 진짜 태주 빚 다 갚고 나가는 거 아니야? 좋겠다, 너.’
직장 동료들은 남자에게 안정적으로 구멍을 팔게 된 태주를 축하했다.
‘근데 그렇게 안 봤는데 태주 보통이 아니다.’
‘뭐 얼마나 잘하길래 그 손님이 계속 찾지? 비결 좀 알려 주라, 태주야.’
개중에는 질투를 하는 사람도 늘었다.
태주는 그때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으나 그들은 태주에 대한 남자의 태도가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다.
그래서 태주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남자가 특정 직원을 지목해서 옆에 앉힌 적은 없다는 것, 아무도 부르지 않고 술만 마시고 돌아가는 일도 흔했다는 것.
여자에 미쳐 이곳을 자주 찾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거기다 남자가 룸에서 관계를 가지지 않고 호텔을 이용한다는 점이 그들에게는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인 듯했다.
태주는 확신하는 동료들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가 호텔로 가는 이유가 자신의 다리를 넓게 벌리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남자는 이전엔 특별히 누군가의 다리를 넓게 벌리고 싶었던 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쯤 되니 태주도 남자가 자신과의 섹스에 꽤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떡정, 속궁합 뭐 그런 거겠지.
뭐든 태주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다른 손님들이 주는 팁과 월급을 합쳐도 남자가 주는 돈의 반도 안 됐다.
태주는 남자가 주는 돈을 모아 한 달 치 상환금을 더 만들어냈고, 오늘 그것을 송금했다. 이대로라면 1년도 지나지 않아 빚을 전부 갚고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전화 한 통을 받기 전까지는.
“야. 전화 받아라.”
가게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태주를 불렀다. 태주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게 말을 했음을 알고는 다가가 수화기를 넘겨 받았다.
태주가 수화기를 들자 근처의 시선 몇 개가 이쪽에 닿았다. 태주는 그 뾰족한 시선 속에서 수화기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어. 잘 지냈냐. 나 조덕현이다.
“아, 네. 저 오늘 돈 보냈는데요. 한 달 치 더 보냈으니까 제대로 계산해 주세요.”
-안다 새끼야.
태주는 안도하는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상환금을 맞추지 못한 것도 아닌데 조덕현이 왜 전화를 했을까. 태주는 경계하느라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이신데요.”
-하아. 이 새끼 건방진 거봐라. 선의로 말을 해 주려고 해도, 씨발.
“왜요. 뭔데요.”
-쯧.
조덕현은 태주의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찼다.
-노인네 며칠 시장 안 나온 것 같던데.
“우리 할머니 또 찾아갔어요?”
태주는 눈을 부릅뜬 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옆에서 태주를 감시하던 덩치가 시끄럽다는 듯 정강이를 걷어찼다. 제법 아팠지만 태주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수화기를 꽉 움켜쥐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이 새끼가 요점 파악을 못 하네. 성실한 너네 할머니, 며칠 동안 출근 안 했다고.
“……왜요?”
태주는 멍하게 물었다.
-난들 아냐. 너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노인네 뒤져도 돈은 갚아야 한다.
귓속으로 파고든 말이 반대쪽으로 무심히 흘러나갔다.
태주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할머니는 시장 문 닫는 날이 아니고서는 매일 시장에 나가 나물을 팔았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궂은 날씨에도 기어이 나가는 것이 싫어서 어릴 때는 일부러 못난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우산을 쓴 채 멀리서,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천막 안에 주저앉아 있는 굽은 등을 바라본 기억도 생생했다.
-일이 조까치 됐네.
조덕현은 할머니가 잘못된 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굴었다. 협박 거리가 사라지면 태주가 돈을 안 갚을까 봐 염려하는지 그가 말했다.
-쯧. 야. 매니저한테 얘기할 테니까 노인네한테 연락해 봐라. 쓸데없는 말 하면 뒤진다.
뚝. 전화가 끊겼다. 그러나 태주는 꼼짝 않고 서서 바닥만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분명 건강했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주름이 많고, 머리는 하얗게 센 사람을 건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런 사람에게 병이 간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태주는 다른 가능성도 떠올려냈다.
노인들은 넘어지기만 해도 자칫 크게 다친다던데, 할머니도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닐까. 쓰러진 채 혼자 며칠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건가.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그때 퍽, 뒤통수에 충격이 일었다.
“귀찮게 한다니까 진짜.”
“감사합니다.”
평소 같으면 매니저의 손버릇에 눈을 세모꼴로 떴을 텐데, 태주는 행여 그가 마음을 바꿀까 얼른 전화번호를 불렀다. 휴대폰을 빼앗아 경찰에 전화를 걸 생각은 조금도 안 했다.
매니저에게 휴대폰을 건네받고 귓가에서 신호음이 흘렀다. 태주의 심장은 영 이상한 박자로 뛰어댔다. 쿵, 쿵. 북소리 같은 제 심장박동이 휴대폰에 바짝 붙은 귀로 들렸다.
그리고 신호음이 멎었다.
-여보세요?
다소 힘이 없는 듯했으나 분명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할머니! 괜찮아? 어디 다쳤…….”
-아이고, 태주야!
태주가 다급하게 쏟아내던 질문을 감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가 끊었다. 들어 본 적 없는 큰 목소리에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할머니. 무슨 일 있어?”
-어디 경찰서에 있는지도 안 가르쳐 주고. 아참, 밥은. 밥은 잘 줘? 할머니가 돈 보냈으니까 금방 풀어 줄 거야.
“…….”
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경찰서에 있어. 나 지금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어. 공장인데, 기숙사 있는 곳.”
태주가 애써 침착하게 말하자 정신없는 듯하던 할머니의 말이 끊겼다. 침묵이 흐르고, 얼마 뒤 늙은 음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내가 미쳤는가 보다.
“뭔데, 할머니. 혹시….”
-아니 내가 확인도 해 봤는데. 전화 걸어 보라는 곳에도 해보고…. 114에 전화해서 물어봐도 그 번호가 맞았는데….
할머니의 음성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태주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피싱이야?”
태주의 말에 할머니는 내가 노망이 났나 보다,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가 그런 거 조심하라고 했잖아. 얼마 보냈는데.”
태주는 억눌린 목소리로 얘기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아니야, 태주야. 할머니가 알아서 해결할게.
“그걸 정확히 알아야 신고를 할 수 있어서 그래.”
태주가 타이르듯 하는 말에 할머니는 자신 없는 말투로 털어놓았다.
2000만 원, 이라고.
“할머니가 그 돈이 어딨어.”
-…할머니도 그 정도는 있지.
태주는 말의 여백을 놓치지 않았다. 화가 나고 손이 벌벌 떨리는 와중에도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할머니가 아는 사람 중에는 2000만 원을 빌려줄 만한 사람이 없다. 전세방 사는 할머니에게 은행이 그 돈을 빌려줄 것 같지도 않았고, 만약 은행에 갔더라면 피싱이란 걸 은행원이 알아챘을 것 같았다.
생각은 하나로 이어졌다.
“혹시 사채 썼어?”
태주는 참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때는 진짜 잠깐 머리가 회까닥했나 보다. 빨리 돈 안 보내면 너 검찰에 송치된다고 하고, 그러면 합의 못 한다고 재촉하니까…. 미안하다, 우리 손주.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지금이 몇 년돈데 경찰서에서 집에 연락도 못 하게 가둬놓고…… 씨발, 됐어. 내가 돈 보낼 테니까 일단 돈부터 바로 갚아. 그다음에 경찰에 신고하고.”
사채도 일반적인 사채일 리가 없었다. 정당한 사업체에선 할머니에게 2000만 원을 빌려주진 않을 거고, 그렇다면 이자율이 매우 높은 불법 사채일 거다.
-네가 돈이 어딨어!
“아, 할머니보단 많아. 전세 빼니 어쩌니 하지 말고 돈 바로 갚아. 안 그러면 나 확 죽어버릴 거니까.”
-태주야…! 태주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태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덕현과 사채 계약서를 쓸 때가 떠올랐다. 머리나 뺨에 자주 날아오던 손과 윽박지르는 목소리, 강압적인 시선.
그것이 할머니에게 향해진다고 생각하면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신은 젊으니 견딜 수 있지만 할머니는 정말로, 넘어지기만 해도 크게 다칠 수 있는 나이었다. 전엔 생각해 보지 않았으나 조금 전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 때 그것을 돌연 깨달았다.
불법 사채는 익히 들었던 것처럼 위험했고, 자신은 지금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그걸 견디는 사람은 한 사람이면 족하다.
“너희 할머니 사채 썼대?”
매니저가 태주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가며 물었다. 태주는 매니저를 휙, 돌아보았다.
“죄송한데 전화 한 통만 쓰면 안 될까요? 조 사장님한테요.”
“이게 진짜….”
매니저는 짜증을 내긴 했으나 조덕현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직원 걱정이 되는 건지, 원래 조덕현에게 다시 전화를 해 주기로 한 건지는 몰랐다.
전화를 건네받고 태주는 상황을 설명했다. 조덕현은 할머니가 아프지 않다는 부분에서는 다행이라고 말했고, 할머니가 보이스 피싱을 당해 사채까지 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어쩌냐, 너.” 하고 혀를 찼다.
“2000만 원만 더 빌려주시면 안 돼요? 금방 갚을 수 있어요.”
-널 뭘 믿고 돈을 더 빌려주냐.
딱 잘라 거절한 조덕현은 “수고해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태주는 다급하게 다시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뒤에 서 있던 덩치가 태주의 손을 거칠게 내쳤다. 조금 꺾인 팔이 욱신거렸지만 태주는 매니저를 애타게 쳐다보았다.
“매니저님 혹시 가불…….”
“안 된다고.”
태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좌절하는 태주를 고소하다는 듯 보던 매니저는 시계를 흘긋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사장님한테 여쭤보든가.”
“사장님이요? 지금 계세요?”
“그래.”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태주를 보며 매니저가 묘한 표정을 했다. 그는 태주가 고개를 들기 전에 등을 돌리고는 “빨리 얘기 끝내고 30분 안에 복귀해라.” 했다.
그 말에 태주는 거의 달리듯 사무실로 직행했다. 직원 공간에서 주방을 지나 좁은 복도 끝에 있는 곳이 사무실이었다.
똑똑. 다소 거칠게 노크한 태주가 벌컥 문을 열었다.
매화의 사장 박의성은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즐거운 얘기를 하는 듯 킬킬거리던 그는 태주를 발견하곤 직원이 와서 끊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어. 무슨 일이냐.”
박의성이 다리를 내리며 말했다. 태주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목소리는 잘게 떨렸으나 최대한 간략하게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그래서 2천을 가불로 받고 싶다고?”
“예.”
“제정신이냐.”
“…….”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태주의 얼굴을 보며 박의성이 혀를 찼다.
“빌려줄 수는 있지. 근데 이자가 센데.”
“괜찮아요. 빌려만 주세요.”
“음…….”
박의성은 고민하듯 턱을 긁적였고 태주는 괜찮다며 재차 말했다. 매니저가 얘기한 30분 중에 벌써 10분이 흘렀다. 태주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거렸다.
“오케이. 인심 쓴다. 이자는 안 받을 테니까 다음 달 말일까지 갚을 수 있겠냐?”
“2000을요?”
태주는 미간을 구겼다. 그러자 박의성은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싫으면 말고.”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다음 달까지 2000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주는 물었다.
“아아. 안심해. 나는 조덕현처럼 지저분하게 협박 같은 건 안 하거든. 못 갚아도 뭐… 우리 직원인데,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매정하게는 안 대하지.”
그냥 연체금이 붙는 정도? 박의성이 흘리듯 덧붙였다.
태주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어쨌든 급한 건 자신이고, 아직 한 달 반쯤이 남았으니까 2000 정도야…… 계범호의 좆을 몇 번 받아내면 벌 수 있는 돈이다.
사실 저번 달에도 천만 원 가까이 팁을 받았으니 약 한 달 반 동안 2000을 채우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며칠 연체가 될 것 같긴 한데…….
“야! 너 빨리 안 오냐. 30분이랬지, 씨발.”
복잡하게 흘러가던 생각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끊었다. 매니저가 문 앞에서 험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사장은 그쪽을 흘긋 보더니 혀를 찼다.
“애가 일은 잘하는데 성질머리가 참. 아무튼 너는 빌릴 거냐? 그럼 계약서 쓰고.”
매니저는 사장이 말하자 더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는지 문 앞에 비딱하게 선 채 태주를 노려봤다.
태주는 사장이 에이포 용지 한 장을 꺼내는 것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정신이 없었다. 매니저는 자꾸 재촉하고 시간은 흐르고, 머릿속은 뒤엉켰다.
어쨌든 할머니 상황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란 생각이 들었다.
“네. 빌려주세요.”
“그래, 잘 생각했다. 노인네가 사채 빚을 어떻게 갚냐. 젊은 네가 갚아야지.”
박의성은 종이에 조항 몇 개를 휘갈겨 썼다. 태주는 심한 악필을 눈으로 좇았다.
그런데 마지막 조항에서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씨발, 연체금 하루 200이 말이 돼요?”
“이 새끼가 사장님한테 말하는 거 봐라.”
어느새 가까이 온 매니저가 버릇처럼 태주의 뒤통수를 때리곤 계약서를 흘긋 보았다. 그러더니 빈정거리며 말했다.
“왜. 계 전무님 있잖아. 200이 너한테 돈이야?”
박의성이 고개를 들고 흘긋 태주에게 시선을 줬다.
“아, 계 전무 요즘 후장 하나에 맛 들였다고 하더니. 그게 너야?”
“…….”
모욕감에 태주는 이를 악물었다.
“사인하면 되죠?”
“그래.”
태주는 사인을 했다.
***
제 인생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은 그날 새벽에 했다. 누군가 정해놓은 길대로, 누군가 떠미는 대로. 자신은 어버버 걸어가는 것 같다는 좆같은 기분도 느꼈다.
오늘 자신이 한 일이 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태주는 옳은 일이 무엇인지, 자신이 해야 마땅한 일이 무엇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냥. 주어지는 상황에서 발버둥 치는 것뿐이었다.
다만 후회가 들었다.
‘확 죽어버릴 거니까.’
할머니에게 그딴 말은 하지 말걸.
짜증 내지 말걸. 사기 친 놈들이 문제지 피해자인 할머니 잘못이 아닌데.
자신이 워낙 사고를 많이 치며 망나니처럼 살았으니 경찰서에 있다는 말도 믿은 거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하고,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자주 있던 일이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자신을 걱정했었나 보다. 그러니까 허술한 말에도 홀린 것이다.
“씨발….”
태주는 제 얼굴을 가렸다.
오랜만에 하는 전화였는데. 좀. 말 좀 잘하지.
자신에 대한 분노가 일어 얼굴을 벅벅 문지르다가 옆에서 자고 있는 경준에게 방해가 될까 봐 손을 거뒀다.
곧이어 찾아온 다른 후회는 돈 생겼다고 바로 상환금을 더 내지 말걸, 하는 거였다. 그거 안 냈으면 훨씬 더 여유가 있었을 텐데.
또 다른 후회도 몇 가지 하다가, 태주는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을 매듭지었다.
계범호만 자신을 계속 찾아 준다면 지금의 위기는 금방 지나갈 테니까.
***
문제가 생겼다.
일주일에 두 번도 오던 계범호가 2주째 방문하지 않는다.
이래서는 매화 사장에게 빌린 2000만 원은 물론이고, 다가오는 5일 조덕현에게 보내야 할 상환금도 맞출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상환일까지는 며칠이 남았다. 그사이엔 분명 올 테니까, 그럼 조덕현에겐 돈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2000만원은 계범호의 발가락을 핥든 어쩌든,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일단은 계범호가 와야만 했다.
***
4일이 되었다. 상환일까지는 하루가 남았고, 그사이 계범호는 매화에 오지 않았다.
“덕분에 재밌게 놀다 가.”
여자가 건네는 5만 원짜리 네 장을 받으며 태주는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기… 저랑 2차 가실래요?”
태주를 빤히 바라보던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얘 뭐라니.”
“돈 부족한가 봐.”
“누굴 호구로 보나.”
여자들은 신경질적으로 룸을 벗어났다. 바스락, 태주의 손에 든 지폐가 구겨졌다.
그간 다른 손님들에게서 팁을 받으려 노력해 보았으나 며칠 치를 모아도 계범호가 하루에 주는 팁만큼도 안 됐다. 2차를 가 보려는 노력도 모두 실패했다.
계범호만큼 자신을 비싸게 사 주는 사람은 없었다.
“씨발, 왜 안 와….”
태주는 초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새벽 4시가 다 되었다. 오늘 오후 6시까지 입금해야 하는데 돈은 모자랐고, 이번에 돈을 맞추지 못하면 조덕현은 바로 할머니를 찾아갈 것이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300을 더 빌려달라고?”
컴퓨터로 고스톱을 치고 있던 박의성이 흘긋 태주를 보았다.
“예. 금방 갚을게요.”
“너 같으면 빌린 돈 갚기도 전에 또 돈 빌리겠다는 놈 말을 믿을 수 있겠냐.”
“진짜예요. 300은 저 금방 갚을 수 있어요.”
“뭐, 계 전무 좆 받으면서?”
박의성이 킬킬거렸다. 정태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움켜쥐었으나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의성이 이것 봐라, 하는 눈을 하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박의성이 돈을 더 안 빌려준다면 시간 낭비 대신 나가는 아무 손님이나 붙잡고 2차를 나가자고 사정을 하든 어쩌든 해야 했다.
“쯧. 조덕현이 그게 완전 악질이거든. 상환일 넘기면 가족, 친구… 헤어진 애인까지 찾아서 행패를 부린다니까.”
“…….”
태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박의성은 그런 태주를 흘긋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조덕현이한테 빌린 돈 내가 갚아 줘?”
“네?”
“너 매번 돈 부치러 가고, 감시하고. 전화 걸어 주고. 애들도 귀찮다고 난리다.”
태주는 멍하게 박의성을 보았다.
“여기저기 벌려놓을 것 없이 그냥 깔끔하게 나한테 갚지 그래?”
“…이율은요.”
태주가 한 말에 박의성은 의외란 듯 태주를 보고서 어깨를 으쓱했다.
“야. 우리는 협박하고 뭐 그런 것도 없어. 조덕현이보다는 훨씬 안전해.”
정확한 대답 없이 박의성은 자기와 거래를 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식으로 굴었다.
“뭐. 일단 직원 복지 차원에서 돈 빌려준다. 300이라고?”
박의성은 계약서를 다시 쓰면서 “잘 생각해 봐라. 나쁜 제안 아니니까.” 했다.
씨발, 누굴 병신으로 아나. 정태주는 속으로 욕을 했다.
조덕현과 달리 박의성은 합법의 선이란 게 없었다. 돈을 선뜻 빌려준다고는 하나 훨씬 높은 이자를 요구할 것이고, 연체금도 많이 받을 테다.
더 나은 점은 할머니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뿐이었다.
썩 신뢰가 가진 않지만 실제로 박의성이 굳이 할머니를 두고 협박할 이유는 없었다. 태주는 어차피 이곳에 감금된 신세고, 태주가 말을 듣지 않으면 폭행이든, 장기 하나를 꺼내는 형식이든 그는 태주를 멋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
“…돈은 꼭 갚을게요.”
“그래, 말일까지 2300. 꼭 갚아라.”
박의성은 허공에서 손을 저었고 태주는 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날이 밝고 나서는 곧장 ATM으로 가 돈을 부쳤다.
급한 돈은 해결했다는 생각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럼 이제 한 달 동안 2300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계범호가 이번 달에 자주 매화를 찾게 되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다.
떡정이든 뭐든, 자신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니 솔직하게 말한다면 팁을 더 많이 줄 것도 같았다. 물론 그 대가로 뭘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번 달에 오지 않았던 걸 보면 바쁘거나 이곳에 흥미를 잃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바쁜 일을 해결했으니 좀 쉬지 않을까. 쉬면서 술도 마시고, 태주의 구멍도 좀 사 주고.
태주는 후자의 가능성은 아예 배제하며, 어서 계범호가 나타나길 간절히 기다렸다.
***
28일이다.
계범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
또 다음 달 3일이 되었다.
여전히 계범호는 나타나지 않았고, 연체금은 하루에 200만 원씩 붙고 있었다. 2300만 원은 어느새 3000만 원에 가까워졌다.
“씨발. 왜 안 오냐고….”
태주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밤에라도 계범호가 오면 5일에 조덕현에게 보낼 돈만큼은 어떻게든 받아낼 텐데.
하루에 200만 원씩 붙는 연체금도 어렵지 않게 낼 수 있을 것이다. 잘 구슬려 보기만 하면 매화 사장에게 빌린 돈도 금방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지. 그냥 매화 사장이 한 말대로 하는 것도 괜찮겠다. 조덕현과의 거래는 마무리해 버리고 매화 사장에게만 돈을 갚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자가 아무리 세다고 한들 계범호에게 받는 팁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계범호만 와 준다면 전부 해결될 일이다.
침대 밑에 쭈그려 앉은 태주는 제 발끝을 노려보며 계속 중얼거렸다. 계범호, 계범호…. 이따금 200, 800 같은 숫자도 되뇌었다.
그러던 중 창에서 들어온 햇빛이 방 안으로 길게 늘어졌다. 햇빛의 영역이 발끝을 집어삼켰을 때, 태주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창밖이 환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던가, 하고 살핀 시계는 아직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느지막이 해가 뜨는 겨울은 한참 전에 끝나 있었는데, 자신이 몰랐던 것뿐이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태주는 지난 시간을 더듬었다. 엘리베이터, 매화, 엘리베이터, 숙소…. 시끄러운 술자리, 스킨십, 묵직한 체온, 수표 몇 장, 쾌락, 술. 똑같은 매일.
끌려와 감금된 이곳에서 몇 달이 흘렀다. 생활은 나쁘지 않았고, 어마어마한 빚도 차근차근 갚아내고 있었다.
지금은 또 일이 꼬여서 위기가 왔지만 이것도 다 계범호가 오면…….
“…….”
태주는 무심코, 또 무척 자연스럽게 하던 생각을 문득 인지했다.
나 좀, 생각하는 게 이상해진 것 같은데…….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고 목에 수건을 걸친 경준이 머리를 털며 들어왔다.
“태주야, 씻어.”
경준의 말에 태주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몽롱해진 시야에 멀끔한 낯의 경준이 들어왔다.
“형.”
불러놓고 입술만 달싹이는 태주를 보며 경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하고 웃으며 재촉하는 경준을 물끄러미 보다가 태주는 마침내 물었다.
“형은 처음에, 빚이 얼마였어요?”
“…….”
경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차츰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
“하루에 백만 원 넘게 벌 수 있는데 몇 년씩이나 여기 있는 게 존나 이상하잖아.”
중얼중얼 말한 태주의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경준은 그런 태주를 잠깐 바라보다가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수건으로 제 머리를 털며 그가 가볍게 말했다.
“빚 갚고 나가는 사람 많아.”
씻고 빨리 자, 태주야. 너 되게 피곤해 보여. 다정한 말을 끝으로 경준이 침대로 가서 누웠다.
태주는 멍하게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꿈꾸듯이 걷다 거실 한중간에 멈춰 선 채 눈을 깜박였다.
반쯤 열린 창문이 보였다. 담배를 피우고 난 뒤 창문을 닫지 않아도 되는 계절이 온 것이다.
빚 갚고 나가는 사람 많아. 태주는 그 말을 곱씹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태주는 경제관념이 무너진 상태였다. 1억 6천이라는 빚을 지게 된 것부터가 그런데, 하루에 팁으로 몇백을 받게 되니 몇백, 몇천이 그저 숫자처럼 느껴졌다. 이전엔 몇백만 원도 제대로 모아 본 적 없는 제 통장에 천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니까.
그래서 20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덜컥 빌렸다. 하루 연체금 200만 원도 어렵지 않게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만 있으면 되니까.
그 남자에게 몸 파는 일을,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다.
“…….”
태주는 매화의 직원들을 처음 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의 자신은 외딴곳에 갇혀 몸을 팔면서도 즐겁게 웃는 그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이곳에 오래 있다 보면 변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은 불쌍히 여겼던 것 같다.
그들이 이곳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오만한 짐작과 연민을 가졌었는지도 모른다. 매춘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고 하니까.
그날 경준도 거기 있었던가. 분명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날인데, 아주 오래전 기억처럼 빛바래 누가 그곳에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검게 칠해진 그들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만 그려졌다.
***
그다음 날 오후였다.
경준은 쓰린 속을 붙잡고 눈을 떴다. 숙취야 익숙한 것이지만 어제… 아니, 일을 마친 오늘 새벽에 술을 또 마셔 정도가 좀 심했다.
보통 때라면 일 끝나고 술 마시는 자리에 절대 끼지 않겠으나 이번엔 좀 달랐다. 태주 때문이었다.
어제 새벽 우울해 보이던 녀석은 저녁이 되자 오히려 활발히 움직이며 팁을 모으고 다녔다. 마음을 제대로 잡은 듯해 보였고, 그런 녀석이 같이 술 마시자고 하는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경준도 겪어 본 자각과 절망이었고 다른 누군가 겪는 것도 많이 봐왔으니까.
어쨌든 같이 숙소를 쓰는 애들끼리의 술자리는 해가 환하게 뜰 때까지 이어졌다. 경준은 술 냄새가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옆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태주는 화장실에 있는 것 같았다. 경준과 마찬가지로 속이 좋지 않은지 양치를 하면서 우웩, 거리는 소리가 났다. 경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담배를 입에 문 채 거실 창으로 갔다.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경준은 창밖으로 머리를 빼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답답한 속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태주야, 괜찮…….”
“어우. 야 죽겠다, 씨발.”
고개를 돌린 경준은 화장실에서 나온 사람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는 경준과 동갑인 정수였다. 거실 화장실은 그와 경준, 태주만 쓴다. 나머지 두 사람은 안방의 화장실을 사용했다.
“태주는?”
경준은 물었다. 정수는 턱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훔치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하고 답했다.
“방에 없는데?”
“벌써 출근했나?”
해장국이라도 얻어먹으려 일찍 출근했을까. 그런 생각을 했으나 경준은 묘하게 불안한 마음에 빠르게 준비를 한 뒤 출근했다.
그러나 가게에도 태주는 없었다.
***
정태주가 사라졌다.
가게는 발칵 뒤집혔다. 도망치는 녀석들이야 여럿 있었으나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도망친 녀석은 없었다.
감시하는 눈도 워낙 많은 데다가 애초에 대부분의 직원들은 건물 내에서만 이동을 했다. 비상구는 막혀 있고, 엘리베이터 앞은 경호원들이 상시 지키고 있었다.
가게와 호텔에는 손님들이 워낙 민감하게 구는 탓에 CCTV를 설치하지 못했으나 직원 숙소가 있는 5층에는 분명 CCTV가 있었다.
그런데 정태주는 오늘 새벽 다른 직원들과 함께 제 숙소로 들어간 이후로 찍히지 않았다.
“숙소엔 진짜 없어?”
“예.”
“아, 씨발. 제대로 감시 안 하고 뭐 했냐.”
매니저가 제 머리를 벅벅 헝클이며 경준의 다리를 걷어찼다. 같은 숙소를 쓰는 직원들끼리는 서로 감시를 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창문으로 뛰어내렸나?”
“야. 거기서 뛰어내리면 죽지. 그 얘기 못 들었냐? 왜 연예인 지망생이었다던…….”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에 매니저는 미간을 찌푸렸다.
“창문 밖에 확인해 봤어?”
“무슨….”
“뭐, 죽어 있던가 하지 않았냐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실 전혀 흔적이 남지 않았으니 숙소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면 창문 밖으로 탈출했다는 게 가장 가능성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층고가 매우 높았다. 화려한 샹들리에를 매달아야 했으니까.
즉, 보통 아파트 5층 높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직원 숙소를 가장 고층으로 둔 것도 효과적으로 그들을 가두려는 의도였다. 죽으려고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 이상 창문으로 탈출하겠다는 녀석은 없었다.
매니저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때마침 연락이 왔다.
호텔 부지 바깥쪽에 세워 둔 차의 블랙박스에 정태주가 찍혀 있었다는 거였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정말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든 벽을 타고 내려오든 한 것 같았다.
“미친 새끼….”
매니저의 입에서 경악 섞인 욕설이 흘러나왔다.
***
태주는 절뚝이며 달렸다. 날은 어둑해지고 있었고, 산길은 험해 벌써 두 번이나 넘어졌다.
짐작은 했지만 이곳은 도심이 아니었다. 물론 손님들도 찾아오는 곳이니 서울 중심까지 생각보다는 가까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태주는 차도를 따라 걷는 대신 바로 앞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성공적인 탈출을 생각하면 잘 결정한 일인데, 지금 태주의 몸 상태가 영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태주는 오늘 새벽 일부러 룸메이트들과 술을 진탕 마셨다. 아니, 마시는 척을 한 뒤 그들을 깊게 재웠다. 손님들과 함께일 때는 술 버리는 것이 영 손에 익지 않더니 사람이 독기를 품으니 뭐든 할 수 있게 되었다.
10층 정도 높이의 건물 벽을 타고 내려온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의 다 내려왔을 때 힘이 빠져 바닥으로 떨어진 탓에 발목을 삐끗했다. 퉁퉁 부어서 걸을 때마다 욕이 절로 나오는 걸로 봐서는 부러진 것도 같았다.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태주는 눈두덩이 쪽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티셔츠 자락으로 대충 닦아냈다.
경준에게 빌려 잠옷으로 입고 지내던 옷은 땀에 젖고 흙이 묻어 온통 더러워졌다. 태주는 더러워진 티셔츠 밑단에 시선을 주다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씨발.”
삐걱거리는 제 인생은 아래로 향할 때만 착착 굴러갔다. 힘들이지 않고, 덜컹이는 소음도 없이, 빠르게.
그래서 몰랐다. 자신이 얼마만큼 깊숙한 곳까지 내려왔던 것인지.
문득 깨닫고 위를 보았을 땐, 언제든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거라 여겼던 탈출구가 너무 멀었다. 점처럼 까마득한 바깥세상에서 들어온 빛은 희미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참 자연스러워서, 몰랐다.
빚을 졌으나 계약서 자체는 합법적이었던 것이, 끌려온 곳이 생각보다는 무섭지 않았던 것이, 처음에 손님들에게서 쉽게 팁을 받은 것이, 계범호를 만나고 어마어마한 상환금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이.
‘그래도 상황이 아주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태주의 눈을 가렸다. 안주하게끔 하고, 삶이 나아질 거라 여기게 했다.
어쩌면 그 모든 일들도 잘 짜인 계획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어느 누군가의 계획이든,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리려는 제 운명의 계획이든. 잔인하게도 희망을 주며 태주를 절망으로 몰고 갔다.
매화에 계속 머물렀다면 언젠간 결국 매화 사장에게 더 큰 돈을 빌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합법에 걸쳐져 있던 계약은 사라지고, 불공정하고 악의적인 계약에 묶인 채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는 빚을 갚아 갔겠지.
그 전에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그러나 깊은 구덩이에서 올려다본 탈출구는 까마득하게 멀었고, 왔던 길은 너무 가팔랐다. 그러니까, 내려온 길로 다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빚을 갚고 매화를 벗어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정태주는 욱신거리는 발목에 힘을 주었다. 날이 따뜻해 산에서 밤을 보내도 얼어 죽지는 않겠지만, 산짐승 같은 것이라도 만나면 큰일이었다. 태주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흘금거리며 시큰거리는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날은 점점 어둑해지고, 차라리 안전하게 밤을 보낼 곳을 찾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저 멀리 빛이 보였다.
태주는 눈을 번쩍 뜨고 그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어둑해지니 오히려 사람 사는 곳이 보이는 거였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마침내 마을을 발견했을 때, 태주는 안도했다.
됐다. 사람을 찾아 경찰을 부르면 일이 해결될 것이다. 경찰에 우선 할머니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고, 자신은 이곳의 경찰과 경찰서로 가면 된다.
“하아….”
태주는 후들거리는 무릎에 힘을 줬다.
힘겹게 산길을 내려오자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밤에도 밝은 서울과는 달랐다. 강원도 쪽일까. 태주는 ‘낚시터’라고 쓰인 팻말을 게슴츠레 보며 멀리 시선을 두었다. 강인지 저수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물가에 몇 사람이 조명을 켠 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태주는 절뚝이며 걸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가게가 보였다. 오래된 낚시용품점인 듯했고, 녹이 슨 간판에는 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딸랑-.
안쪽에서 환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열자 탁한 종소리가 났다. 태주는 흠칫 걸음을 멈춘 채 눈을 굴렸다.
가게 안은 평범했다. 낚시찌나 떡밥 같은 것을 파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쉰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할아버지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가게와 이어진 방의 문턱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주름진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숙인 태주를 그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묘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려던 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편하게 보고 있어요. 통화만 끝내고 봐줄 테니까.”
노인은 전화를 붙잡고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드르륵, 낡은 미닫이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태주는 손을 뻗었다.
“할아버지, 저…….”
탁-!
그러나 태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문이 닫혔다.
방 안에서 통화를 계속 이어 가는지 낮고 쉰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것이 들렸다.
태주는 고개를 돌려 옆에 걸린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시골이라 그런지 완전 배짱 장사네. 손님이 왔는데도 방에서 통화나 하고…….
“…….”
정태주는 문득 미닫이문으로 시선을 줬다. 구부정한 실루엣이 반투명 유리창으로 보였다.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태주가 다시 가게를 훑어보았다.
낡은 공간은 고요했다.
이상하게도 싸한 기분이 들었다. 절뚝. 태주는 소리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출입문 쪽에 가까이 섰을 때였다. 계속 주시하고 있던 반투명 유리 속 실루엣이 커졌다.
그리고.
드르륵, 탁-!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가려고?”
“아…. 네.”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태주를 응시했다. 쿵, 쿵. 태주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우린 다 똑같은 것만 팔아. 옆 가게 가도 다른 거 없어.”
“…그냥, 낚시 안 하게요.”
노인에게 대답하며 태주는 목이 말랐다. 그는 고개를 숙인 뒤 돌아서서 출입문을 열었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낚시도 안 할 건데 이 동네엔 왜 왔나 몰라.”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태주는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둑한 주변에서는 몇 개의 낚시 가게와 낚시꾼들이 세워놓은 조명만 빛났다.
다른 가게로 가 볼까. 우선은 묘한 예감을 따라 몸을 숨기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정말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빨리 경찰에 연락하는 것이 먼저일까. 할머니를 보호하려면 어서 경찰에 먼저 연락을 해야 하는데.
정신없이 이동하던 시선이 평화로워 보이는 낚시꾼들에게 닿았을 때였다.
부우웅-
차 소리가 들렸다. 움찔 놀란 태주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환한 빛이 시야를 물들였다. 그리고 끼익, 검은 봉고가 태주와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급정거했다.
태주는 봉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도망쳤다. 그러나 절뚝거리는 다리로는 전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야, 지랄 말고 그냥 와라.”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작 몇 걸음 걷지 않았으나 태주는 턱 끝까지 숨이 찬 채로 입을 크게 벌렸다.
“살려…… 우웁!”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 손이 태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태주가 몸부림을 치자 그 손은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비틀거린 태주를 그들은 가볍게 들쳐메고 봉고에 밀어 넣었다.
계속 반항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목뒤를 한 대 맞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을 뿐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양팔이 그들에게 붙잡힌 채 끌려가는 중이었다.
“놔…! 씨발, 놓으라고. 살려 주세요!”
“조용히 해, 새끼야.”
퍽. 누군가 태주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때렸다. 순간 어지러워 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자신이 익숙한 곳에 와 있단 것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붉은 조명이 어둑한 곳.
오늘 새벽, 목숨을 걸고 겨우 탈출했던 곳.
너무나 쉽게 돌아와 버렸다는 생각에 태주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발끝에 힘을 줬다. 제 양팔을 붙잡은 남자들이 때마침 멈춰 서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팔을 비틀었다. 그러나 곧장 등이 거칠게 떠밀려 열린 문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문이 닫히고, 남자들은 그 문을 지키듯 앞에 섰다. 태주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들었다.
먼저 알아차린 것은 텁텁하고 매운 공기였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 눈을 깜박였으나 시야는 맑아지지 않았다.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공간이 온통 담배 연기로 가득하단 것을 알아차렸다.
흐린 공기 위로 새하얀 연기가 짙게 흩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두 눈동자가 서늘히 빛났다.
계범호였다.
남자가 거대한 몸을 일으켰을 때, 태주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려 했던 것도 잊을 만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남자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무겁게 가라앉은 남자의 시선이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얼어붙은 태주를 지나치며 계범호가 담배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칙, 담뱃불이 꺼지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의 시선이 입구 쪽에 닿자 그곳에 서 있던 덩치 두 명이 재빠르게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죄송합니다, 형님.”
정태주는 눈을 바쁘게 굴렸다. 매화의 깡패들이 계범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정신이 없어 확신하지는 못하겠으나 이곳의 경호원들은 계범호 쪽 사람일지도 몰랐다.
“내가 박 사장한테 면이 안 서잖아.”
조용한 투로 말한 계범호가 손을 올렸다. 그 손을 태주도, 다른 남자들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뒷짐을 진 채 미동이 없었고 오히려 바닥에 있는 태주만 뒤로 움찔 밀려났다.
“저 조그만 게, 대낮에 나갈 동안, 뭐 했어.”
계범호가 남자의 얼굴을 내리쳤다. 손바닥으로 내리쳤다기엔 몹시도 묵직한 소리가 울리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무표정한 얼굴에 왈칵 피가 번졌다.
부동자세로 서 있던 남자는 계범호의 손이 내려가고 나서야 움직였다. 그는 조용히 제 입 앞으로 손을 대더니, 피에 젖은 무언가를 뱉어냈다.
치아였다. 붉은 액체가 끈적하게 묻은 그것을 손에 쥔 남자가 다시 묵묵히 뒷짐을 지는 것을 보며, 태주는 무심코 욕설을 흘렸다.
“…씨발.”
계범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볼 줄 알았다면 혀를 깨물어서라도 참았을 것이다. 정태주는 자신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계범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구둣발은 돌아서서 제 앞에 멈췄다.
태주는 뻣뻣한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올려다보기에는 두려울 만큼 커다란 사람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위압감이 들었다. 그림자가 져 보이지 않는 얼굴 때문에 더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말버릇이 안 고쳐지네.”
낮게 중얼거린 계범호가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서 꺼낸 것은 섬뜩하게 빛나는 나이프였다.
사색이 된 태주가 땅에 손을 짚으며 뒤로 도망쳤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머리는 각성된 것처럼 깨어났다. 오히려 그래서 공포를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까이 와.”
계범호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허공에 휘저었다.
선명한 공포는 태주가 올바른 행동을 하게끔 도와줬다. 정태주는 도망치는 대신 남자가 손짓하는 대로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손이 칭찬하듯 앞머리를 묵직하게 누르고 멀어졌다. 그리고 이내 태주의 턱을 움켜쥐고 쳐들었다. 마주친 눈빛은 무감각했다.
“입을 찢어버릴 수도 없고.”
날카로운 칼끝이 자리를 가늠하듯 태주의 입술 위 허공에서 선을 그었다. 입을 열면 그 칼에 닿을까 봐 태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런 태주에게 남자가 여상히 말했다.
“아.”
“사, 살려 주…….”
턱뼈를 부술 것 같은 억센 손길에 태주는 억지로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 속을 들여다보며 계범호가 아, 하고 더 크게 벌리라는 듯 재촉했다. 태주는 덜덜 떨리는 턱에 힘을 줬다.
그리고 칼을 쥔 계범호의 손이 불쑥 가까워졌다. 땅을 짚고 있던 태주의 손이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튀었다.
“허으….”
“움직이지 마.”
계범호가 한 뼘만 한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그는 칼등으로 태주의 입술이 터진 부분을 건드리곤 벌린 입 속으로 그것을 들이밀었다.
“물어.”
“흐으, 으….”
태주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나이프를 쥔 남자의 거대한 손이 시야 가장 아래쪽에 보였다.
겁에 질린 태주는 위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어둡게 가려져 있었다.
정태주는 입술을 숨기고 천천히 턱을 닫았다. 딱딱한 쇠붙이를 이 사이로 깨물었을 때, 혀끝에 서늘한 것이 닿았다.
“흐으으….”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흐느끼자 계범호가 다친다, 하고 낮게 읊조렸다. 태주는 턱에 힘을 주고 단단히 칼을 물었다. 그런 채로 덜덜 떨며 애원하듯 올려다보았으나 남자는 무심히 손을 거두고 돌아섰다.
다시 보게 된 폭력의 현장은 조금 전보다 두려워졌다. 끔찍한 소리, 붉은 피, 태주에겐 그렇게 무섭던 덩치들이 꿈쩍도 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 더불어 자신이 이로 문 쇠붙이의 서늘함.
저 폭행이 끝나고 나면 자신에겐 어떤 일이 생길까. 감히 알 수 없는 상상을 하며 태주는 점점 더 공포에 빠졌다.
“할 일 제대로 하자.”
낮은 목소리를 끝으로 마침내 폭행이 멎었다. 깍듯하게 허리를 굽힌 덩치 큰 사내 둘은 턱 아래로 피를 뚝뚝 흘리며 자리를 떴다.
소름 끼치는 폭행의 소리가 사라진 공간에는 적막이 흘렀다.
계범호는 담뱃갑을 손에 들었다. 텅 빈 담뱃갑을 잠깐 내려다보던 그가 마지막 한 개비를 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테이블에 탁, 내려놓자 정태주가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테이블 위의 피 묻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무심히 보던 시선이 바닥의 정태주에게로 내려갔다.
계범호는 담배를 피우며 정태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못 보던 사이 머리가 많이 자랐다. 까만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채 달라붙어 그런지 피부는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흐으, 으으…….”
숨이 넘어갈 듯 호흡하는 태주의 입술 사이로 침이 흘러내렸다. 그 때문에 칼날이 미끄러질까 태주는 이가 부서져라 쇠붙이를 물었다.
계범호가 다리를 굽혀 앉자 정태주는 경련하듯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눈을 맞췄다. 공포로 물든 눈동자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말버릇 고칠 수 있겠어?”
“흐으…. 으으…!”
눈을 크게 뜬 태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계범호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가 곧장 나이프를 쥐었음에도 정태주는 쉽게 턱을 벌리지 못했다.
“이 상한다.”
남자가 어떤 의도로 한 말이었든 태주에게는 위협이었다.
태주는 힘주어 턱을 벌렸다. 턱관절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계속 숨기고 있던 입술의 감각도 이상했고, 칼등에라도 닿을까 목구멍으로 말아 넣고 있었던 혀도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후으, 허억, 헉….”
전력 질주라도 한 듯 가쁜 숨을 내쉬는 태주를 보며 계범호는 담배를 입에 댔다.
평소보다 반질거리는 눈동자 위로 연기를 뿜어내자, 눈이 매운지 정태주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눈가에 번진 물기에 시선을 두며 남자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몸 파는 게 천직인 줄 알았더니.”
“…….”
“도망칠 생각도 다 하고.”
계범호가 입꼬리를 휘었다.
태주는 숨을 죽였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선 채 무언의 경고를 하고 있었다. 기특하다는 듯한 말투와는 달리 남자의 눈빛이 푸르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남자는 반쯤 내리깐 눈으로 태주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알아보았을 때, 그가 담배를 입에 물며 태주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자, 잘못했어요. 흐으…. 다신 도망 안 칠게요.”
거친 손길에 정태주가 덜덜 떨며 말했다. 진작 빌었어야 했다. 룸에 들어오자마자 죄송하다고 빌걸.
“정말이에요. 진짜예요. 절대 도망 안 칠게요.”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말을 막은 것은 남자의 웃음소리였다. 태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입을 멈추고 올려다보자 계범호가 비스듬히 눈을 맞췄다.
“내가 포주야? 왜 나한테 빌어.”
“…….”
눈을 크게 뜨고 멍하게 바라보는 얼굴이 우습다는 듯 계범호는 낮은 웃음을 마저 흘려냈다.
그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태주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언제 옮겨 묻은 것인지 흰 살결에는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
“뭐 해, 옷 안 벗고.”
남자가 별다를 것 없다는 듯 태주의 등을 밀었다. 고장 난 것처럼 멈춰 있던 태주는 “네, 네….” 하고 떨리는 손으로 제 옷을 벗었다.
매화의 깡패들이 계범호의 사람인 것 같긴 하지만 그는 손님의 위치에 머무는 듯했다. 즉, 자신이 도망친 일은 그와는 상관없었다. 그는 다만 깡패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생각은 알몸이 되어 테이블 위로 엎드린 뒤 그가 엉덩이를 쥐었을 때 바뀌었다.
“어어… 자, 잠시…. 흐으, 잠시만요.”
큰 손이 한쪽 엉덩이를 당겨 벌렸고, 안쪽으로 곧장 두툼한 것이 닿았다. 젤을 흠뻑 넣고 홀로 준비를 하는 평소와 달리 구멍은 바짝 메마른 상태였다.
태주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밀어 넣을 생각인 듯 남자가 태주의 엉덩이를 쥔 손에 꽈악 힘을 줬다.
“아, 안 들어가요. 제가, 제가 준비할게요.”
등 뒤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두툼한 귀두가 틈 없이 다물린 구멍 위를 힘주어 짓눌렀다. 태주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뒤틀었다.
“아악! 아, 아파요, 아! 손님. 잠시만요.”
준비도 없이 그런 것이 들어갈 리 만무했다. 매서운 손길이 태주의 엉덩이를 여러 번 내리쳤다. 그러나 메마른 내벽은 선단의 반 정도만 버겁게 삼켰을 뿐이었다.
엉덩이를 틀어쥐었던 손이 멀어지고 짜증스러운 한숨이 들렸다. 남자는 잇새로 물고 있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다.
정태주는 움찔움찔 떨면서도 계속 빌었다. 남자가 다시 엉덩이를 만졌을 때는 몸을 파드득 떨며 다급하게 말했다.
“흐윽, 죄송해요. 안 오신 지 오래돼서….”
계범호는 “찢어져요….” 하고 우는 소리를 내는 정태주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흰 목덜미가 가려져 있었다.
“구멍 쑤셔 준 손님이 없었어?”
그는 목덜미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무심한 듯 물었다.
“네….”
“인기가 없나 보네, 태주는.”
미세한 톤의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살기 위한 본능과도 같았다. 정태주는 다급하게 말했다.
“네, 네. 없어요. 다른 손님이랑은 2차 안 갔어요….”
계범호는 바짝 힘이 들어가 움푹한 허리와 제 손자국이 남은 엉덩이, 그사이 벌겋게 변한 구멍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이내 그가 태주의 머리채를 붙잡고 일으켰다. 울듯이 일그러진 얼굴에 빤히 시선을 주자 눈치를 살피던 정태주가 무릎을 꿇고 허겁지겁 남자의 좆을 물었다. 등 뒤로 돌려 제 엉덩이 사이를 더듬는 손도 절박했다.
가여운 꼴이었다. 남자는 다급하게 좆을 적시는 정태주의 이마에 손을 댔다. 위로 쓸어 올리자 땀에 젖어 축축한 두피가 만져졌다.
“우웁…. 커헉, 컥, 흡.”
정태주는 스스로 좆을 목 끝까지 넣고 질척하게 적셨다. 남자가 손을 대지 않아도 찔걱이는 소리가 나게 머리를 흔들고, 목구멍을 자극해 일부러 침이 질질 흘러나오게끔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계범호가 태주의 이마를 밀어냈다.
“흐으….”
맛있는 걸 먹다가 빼앗긴 아이 같은 표정에도 남자는 웃지 않았다.
태주는 테이블 위로 엎드린 채 덜덜 떨었다. 뒤쪽엔 겨우 제 손가락 하나만 넣어서 잠깐 풀었을 뿐이다. 다가올 고통을 직감하며 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계범호가 주먹을 움켜쥔 태주의 양손을 붙잡았다. 그는 그대로 태주가 위로 팔을 펴게끔 하고 테이블 위에서 고정했다.
“손 내려오면 혼난다.”
낮은 음성이 말했다. 뺨에 소름이 돋은 채 태주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이후는 지옥이었다.
젤 반 통을 넣고 한참을 풀어도 받아들이기 힘든 성기였다. 그런데 고작 침으로 조금 적신 것이 억지로 내벽을 뚫었다. 생살이 뚫리는 것 같은 고통에 태주는 비명을 질렀다.
그마저도 남자는 허용하지 않았다.
“조용히.”
“흐으…. 흐윽, 윽….”
계범호는 조그맣게 헐떡이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대신 태주가 조금이라도 몸을 뒤틀면 엉덩이와 허벅지를 세게 후려쳤다.
“후으, 으, 아….”
생각해 보면 이미 겪어 본 적 있는 수준의 아픔이었다. 계범호에게 처음 후장을 팔았을 때 말이다. 게다가, 한 달 넘게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한들 후장 섹스가 미지의 것도 아니었으니 그때보다는 견딜 만해야 했다.
그런데도 두려웠다.
아마 그 떡정이라는 것을 자신도 가지고 있었던 듯했다.
남자가 딜도를 넣지 말라고 심술을 부린 그다음 방문 때, 태주는 무척 긴장했었다. 그의 방문 전에 제 손가락으로 조금 풀어놓긴 했지만 오래 공들일 시간 여유가 없었고, 딜도 없이는 그 무식하게 큰 성기를 받아내기 어려울 것이었다.
‘오늘따라 얼었네.’
엎드린 태주의 뒤에서 남자는 말했었다. 태주는 아니에요, 하고는 곧장 좆을 쑤실 남자를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내가 니 구멍 찢을까 봐.’
남자의 목소리는 옅은 웃음기를 담고 있었고, 뒤로 들어온 것은 예상보다 가늘고 단단했다. 마디가 울퉁불퉁한 손가락이었다. 처음엔 뒤에 손도 대지 않던 계범호가 직접 뒤를 풀어 주는 거였다.
물론 손길은 집요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어 내벽 안쪽을 거칠게 자극하고 태주가 새된 신음을 흘리게끔 만들었지만, 결국 자기 성기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시간을 들였다. 모아 붙인 손가락이 웬만한 성인 남성의 그것보다 굵었기 때문에 압박감은 있어도 통증은 없었다.
“아흐윽, 으.”
그러니까 이건 익숙함일지도 모르겠다.
살결을 문지르는 손길이나 유심히 보는 시선, 이따금 뺨과 머리를 쓰다듬는 것, 종종 ‘좋나 보네. 누가 몸을 파는 건지.’ 하고 웃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없다는 게 낯설어서 더욱 고통스럽고 두려운 건지도 몰랐다.
“윽, 으, 흐….”
테이블을 짚은 태주의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봐도 남자의 좆이 뒤에서 치받을 때마다 몸 전체가 점점 앞으로 쏠렸다. 바닥에 닿아 있던 발뒤꿈치도 허공에 떠올라 발끝으로 서자 다친 발목이 심하게 욱신거렸다.
태주는 발끝과 손끝에 힘을 준 채, 체중을 실어 박는 추삽질을 견뎠다. 두둑, 소리를 분명 들은 것 같다. 아무래도 뒤가 찢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고통은 더욱 커졌다.
쾌감 같은 것은 없었다. 아주 희미하게 아랫배에 일렁이는 감각은 통증이 전부 가렸다.
“흐윽, 흐으….”
태주는 차가운 테이블에 이마를 댄 채 울었다. 너무 아프고, 무서웠다.
퍽, 퍽.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빨라지고 어느새 남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금방 멀어지길 바랐는데, 남자는 허리를 굽혔다. 그의 가슴팍이 등에 가까워지자 성기가 몸속 이상한 곳을 찔렀다. 길이 아닌 곳을 뚫을 것 같아 태주는 발끝을 세운 채 버둥거렸다.
“아악!”
계범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움츠린 어깨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엄지로 살짝 목뒤의 핏자국을 문질렀다. 그런 뒤 그의 손은 천천히 태주의 팔을 타고 올라가, 손끝에 힘을 준 태주의 손등을 덮었다.
“태주야.”
“흐으…. 네, 네….”
정태주는 덜덜 떨며 대답했다. 낮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널 기다려서야 되겠어?”
“…….”
태주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자신이 이마를 댄 습한 테이블에 멍하게 시선을 두고 있는데,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안쪽을 버겁게 채웠던 것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바짝 힘이 들어간 태주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긁었다.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뒤돌아봤을 때, 남자는 없었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팔꿈치를 스친 감각에 태주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두고 간 수표 몇 장이 보였다.
“…….”
남자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깡패들이 아니라, 도망친 자신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깡패들은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게끔 얻어맞았고, 자신은 강간을 당했다.
창놈에게 어울리는 벌은 그런 거니까. 태주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수표를 노려보았다. 부릅뜬 눈이 시큰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