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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희락기 말고 히트사이클 (9/11)

외전 2. 희락기 말고 히트사이클

제현은 제게 음식을 덜어주는 연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많이 먹어, 제현 학생.”

“…네, 형.”

아, 어색한데 좋아. 제현은 부모님과 조모가 뿌듯이 연우를 바라보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순하고, 공부도 잘해서 대학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데에 다니고, 거기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누가 싫어해.

제현은 몰래 연우를 바라보다가 연우가 제게 갈비를 덜어줘서 다시 고개를 밥그릇에 처박았다. 좋긴 한데, 첫날밤에 그렇게 함부로 한 것을 아직도 사과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하는데 웃는 얼굴을 보면 입이 잘 떨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종소리만 머릿속에 뎅뎅 울려서. 제현은 처음으로 상상 속에서도 선명히 소리가 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 연우 때문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제현 학생, 넥타이가 잘못 매졌어.”

“아, 어, 네, 형.”

“내가 매줄게.”

꽃향기. 꽃향기다.

제현은 저도 모르게 킁킁 대며 연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움츠러드는 어깨와 목에 제가 더 놀라 파드득 떨어졌다. 놀라게 하려던 것도 아니고 겁을 주려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그런 거였다. 향도 좋고, 형도 좋아서.

“죄, 죄송해요, 형. 그냥, 죄송…….”

“…아냐,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

어려서 그런 게 아니고, 형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

연우는 열아홉의 신랑을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한마디로 일갈했다.

“엄- 청 잘생겼어.”

친구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보자고 했지만, 연우로서는 얼굴을 보여주기도 아까울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고등학생을 보고 욕구가 이는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하였으니 더더욱. 사실 한마디로 축약하기에는 이모저모 매력이 많은 아이였다. 잘생긴 건 당연하고, 키도 크고, 무뚝뚝한데 잠자리에 들 때는 이불을 덮어주기도 하는 다정함도 있었다. 연우는 곰곰 생각하다가 말 좀 더 해 보란 말에 몇 마디를 더 보탰다.

“약간 양아치처럼 생겼는데, 잘생겼어. 근데 양아치는 아냐. 되게 착해.”

“어떻게 착한데?”

“음……. 그냥 착해. 아, 그리고 홍조가 좀 있어.”

“응, 대충 알겠다.”

연우의 친구들은 사람 홀려 놓고 또 저 혼자만 모르는 연우에 혀를 끌끌 찼다. 어린 친구가 맘고생 좀 하겠네, 하며.

***

양가 어른들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제현의 침실에 연우를 밀어 넣고선 히트사이클과 러트가 올 시에 외롭지 않을 것이란 말만 했다. 자상하지도, 섬세하지도 않은 설명에 제현은 연우의 눈치를 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오메가이니 마음이 좀 불편하지 않을까. 자기야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지만 형은 아닐 것 같은데.

첫날밤 이후 한 번도 몸을 섞지 않은 제현과 연우였다. 제현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책장을 넘기는 연우의 옆으로 슥 다가갔다. 연우는 응, 왜? 물어보며 제현의 볼을 톡톡 쳤다.

“형, 이, 있잖아요.”

“응, 제현 학생.”

“형은 히, 히트사이클 주기… 가 어떻게 돼요?”

“?”

“아니, 나, 나쁜 생각하는 게 아니라요, 저, 저도…….”

저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여쭤보는 거예요.

연우의 앞에서는 말을 저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려서 제현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씨발, 쪽팔려. 차라리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바보짓 하는 게 낫지, 하필이면 형 앞에서. 그러나 연우는 말을 더듬는 것보다도 말의 내용이 설레서 볼을 붉혔다.

“같이 있어 주게?”

“다, 당연하죠.”

“?”

“…겨, 결혼했고…….”

“응, 결혼했고?”

“아, 형, 왜, 왜 그러세요…!”

형은 어른이니까 얼추 제 마음 알면서. 제현은 거기까진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덩치는 커다래서 하는 짓은 영락없는 소년인 게 연우를 부끄럽게 했다. 고등학생이라고, 조금만 참자고 생각은 하지만 아주아주 노력해야 참아지는 마음은 분명 나중에 참을 수 없이 커지겠지. 연우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제현의 이마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벌써부터 호르몬이 강한 아이이니 나중엔 걷잡을 수 없이 성숙한 향이 그를 감쌀 것이다. 연우는 그때 어쩌면 버려질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지금은 감정에 미숙하니까 억지로 시킨 결혼에도 수줍어하는 거라고.

하지만 제현은 자기감정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마에 닿는 온기에 회가 동한 것은 당연했고, 제현 학생, 하는 소리에 참을성은 한 번에 터져 없어졌다.

“형, 히트사이클 오면, 저, 저랑 같이 있어요.”

“아, 알겠어, 제현 학생.”

“꼭이요. 저랑 같이 있어야 돼요.”

“알겠다니까…….”

입술에 입을 맞추려다가 아직 경험이 없는 걸 들키는 게 부끄러워 제현은 그냥 연우의 허리만 끌어안았다. 충분히 기뻤지만 동시에 조금 더 무언갈 하고 싶었다. 첫날밤에 좋았는데.

연우는 저를 끌어안고서 금방 클 거라고, 조금만 있으면 스무 살이라고 속삭이는 제현에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 나를 좋아해 주면 좋을 텐데. 사이좋은 부부 사이가 되고 싶어.

***

대학 탐방 같은 건 원래 별 관심이 없었으나 제현은 연우가 다니는 학교로 탐방을 가게 된다고 결정이 되자마자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연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대학 탐방을 가기 전날 밤 형이랑 같은 대학교에 다닌다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랬더니 연우가 뭐라고 했더라.

‘교양 수업 같이 들으면 좋겠다. 제현 학생 기다리고 있어야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귀여웠다. 제현은 교복 마이에 넥타이까지 꼼꼼히 매고서 연우의 학교로 향했다.

“대학 탐방은 사계절 내내 하나 봐.”

“우리 때도 그러지 않았어?”

“난 한 세 번? 정도 갔던 것 같은데.”

“야, 쟤 잘생겼다.”

“어디? 어? 어…?!”

“왜. 어? 근데 쟤 왜 이쪽으로 오지?”

아무런 말도 없었기에 연우는 어안이 벙벙해서 제게 웃으며 달려오는 제현을 멍하니 바라봤다. 연우의 친구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눈만 꿈뻑거리다가 강아지처럼 안겨 오는 고등학생에 그제야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아-! 얘가 혹시 걔인가?

“혀, 형!”

“제현 학생!”

“형 보고 싶어서, 왔어요.”

“와, 이 새끼 집에 일찍 들어가는 이유가 있었네.”

“연우 말대로 잘생겼다, 진짜.”

연우는 품에 벅차게 안겨드는 커다란 몸을 애써 토닥이다가 양손으로 귀를 막아줬다. 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고 타박했으나 이미 제현이 다 들은 참이었다.

“형, 저, 잘생겼다고 그러셨어요?”

“…잘생겼으니까.”

“형이 더… 더 잘생겼어요.”

제현은 꼬물거리며 연우에게 귓속말했다. 형 진짜 잘생겼어요. 저 형이랑 같은 대학 가서 꼭 같은 수업 들을 거예요. 기다려 주세요.

연우의 친구들은 사랑받고 싶어 안달이 난 제현에게 응, 응, 하는 대답만 해주는 연우를 못 말리겠다는 듯이 바라봤다. 아무래도 둘이 오래 살지 않을까, 싶었다.

***

형, 인기 많죠.

연우는 최근 제게 여러 가지를 소소하게나마 매일매일 물어 오는 제현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질문은 많았지만 궁금해하는 건 하나같았다.

“형은 외도 같은 건 안 하는 사람인데.”

“그, 그게…….”

“아냐, 궁금할 수도 있지. 제현 학생이 나랑 저녁 시간에만 같이 있으니까 불안할 수도 있고.”

“…형은 되게, 사, 상냥하세요.”

“그런가? 잘 모르겠어.”

“엄청, 엄청 사근사근하고, 분명히… 인기 많을 것 같아요.”

며칠 전에 산 보송보송한 잠옷을 입고서 제현은 연우의 어깨에 기댔다. 인기 많으면 좋지. 좋은데, 싫어. 사실 싫어! 제현은 연우를 붙잡아 두고 싶었다. 어서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매일 졸졸 쫓아다니면서 감시할 수 있을 텐데. 어리게 구는 걸 알았지만 마음이 치졸해지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제현은 최근 연우를 사랑한다고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연우 역시 저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형, 저 요즘 운동하는데, 몸 좀 조, 좋아졌죠?”

그러나 연우의 다정하고도 나긋한 말씨에는 힘이 풀렸다. 다리에, 팔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아랫도리만 자꾸 부풀었다.

“제현 학생 원래도 몸 좋았잖아. 저번에 샤워하고 나올 때 몸 되게 좋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 그,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제현 학생.”

연우는 어른스러워 보이려 노력하는 제현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 대신 가벼운 스킨십을 하곤 했다. 이마나 손등에 입술을 찍는 정도의 스킨십을. 그럴 때마다 제현은 커다란 곰 인형처럼 제게 안겨들었고, 그러면 못 이긴 척 안아주었다. 안아주는 건지 안기는 건지 경계가 모호했지만.

제현은 연우의 어깨에 기댄 이마를 좌우로 도리질 치며 비볐다. 연우가 간지럽다며 웃음을 터뜨리면 저도 따라 웃다가 조금 더 세게 끌어안기도 했다. 좋았다. 밤마다 사소한 것을 물어보면 그게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상세히 말해주는 연우가 좋았다.

“형, 그러면 형은, 이상형, 그런 건 없어요?”

“딱히. 잘생기면 좋고, 다정하면 좋고.”

“그, 그러면 저 좋아하겠, 그러겠네요?”

“얼굴 빨개졌는데, 제현 학생.”

“아, 저 원래, 좀 그래요.”

마른세수를 벅벅 하고서 마치 얼굴을 문질러서 붉어진 것처럼 말을 한 제현에 연우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응, 나는 제현 학생 좋아하지.”

“…….”

“남편이잖아.”

“나, 남편…….”

남편이지, 맞아, 나 형 남편이야. 제현은 그제야 알았단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연우를 끌어안았다. 색만 다른 잠옷을 입어 보송보송한 연우가 평소와 같이 곱게 안겨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요즘 연우라면 사족을 못 쓰기도 하지만.

“스무 살 되면, 데이트… 자주, 해요, 우리.”

“……응, 제현 학생.”

모른 척 제 목덜미에 입술을 찍고서 자기가 더 놀라 후다닥 달아나는 제현을 보며 연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나를 좋아해 줄 거야? 대학교 가면 멋있고 예쁜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

혹시 모르니 너무 많이 좋아지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우는 다시 제현의 품에 안겼다. 어린 남편이 점점 더 좋아져서 큰일이었다.

***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꽃 주는 거야.”

“그래?”

“너 꽃 선물 한 번도 안 해줬어? 미친 거 아냐? 돈도 많은 놈이 성실하질 못하냐, 왜?”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구나.”

“존- 나 잘못했는데? 완전 미쳤어. 좋아하면서, 돈도 많으면서 꽃 한 송이를 안 줬대, 와-!”

제현은 반에서 가장 친한 해은에게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사실혼 관계를 이어 가고 있지 않냐며. 해은은 알파였고, 여자였다. 여자 친구도 있었다. 한 학년 아래의 귀엽게 생긴 여자애.

이 새끼 연애에 성실하질 못해, 너 그딴 식으로 하다간 곧 파혼당한다. 해은은 삿대질을 하며 저주했다. 자고로 알파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어야 한다고 믿는 해은이었다. 실제로 해은은 연하인 여자 친구에게 매우 잘해주고 있었으며, 둘은 졸업 후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해은의 연애 사업이 매해 깨를 볶으며 잘되어 가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현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해은이 불성실하다고, 파혼 얘기까지 들먹이지 제가 정말 몹쓸 놈이 된 기분이었다. 제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이 녀석은 파혼을 당하고도 싸!’라며 끝까지 저주하는 해은에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일갈했으나 불안감이 사라지진 않아서 집에 가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꽃 선물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네, 어떤 분께 드리는 건데요?”

“어…….”

연우가 자기를 보고 남편이라고 한 것이 떠올라 제현은 냉큼 말했다.

“남편이요. 남편한테 줄 건데요.”

꽃집 주인은 교복을 입은 제현이 하는 말을 그저 귀엽게 여기며 리시안셔스를 추천했다. 분홍빛 꽃송이가 풍성하게 벌어진 게 마음에 들어 제현은 고민하지 않고 꽃다발을 부탁했다. 여러 가지 꽃을 섞어서 다발을 만들어 달라 부탁할까 하다가 그냥 리시안셔스만으로 만들어진 꽃다발을 받았다. 꽃말이 그것만큼 마음에 드는 꽃이 없었다.

“새아가 주려고 산 거니?”

“네.”

“예쁘네, 이따 연우 오면 좋아하겠다.”

“날 닮아서 우리 제현이가 로맨티시스트야, 아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당신은 조용히 해요.”

“네, 여보.”

제현은 질리지도 않는지 매일 옥신각신하는 부모를 뒤로하고 방으로 향했다. 방에 가서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연우만 기다렸다. 화장실에 한 번 들어갔다가, 바닥 청소를 한 번 했다가, 안 되겠다 생각하며 교복이라도 갈아입으려는 찰나 연우가 방에 들어왔다. 제현이 막 바지 버클을 풀려는 순간에.

“아, 제현 학생 옷 갈아입는 줄 모르고, 미안.”

“아뇨, 저, 형, 저 선물…….”

“선물?”

“여, 여기요…….”

갑자기 들이닥친 연우에 제현은 옷을 다시 추슬러 입고서 침대에 올려놓았던 꽃다발을 공손히 건넸다. 선물하는 게 아니라 흡사 진상을 올리는 듯한 모습에 연우는 입 안 살을 꾹 씹으며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제현이 하는 말에 연우도 금세 부끄러워졌다.

“꼬, 꽃말이 마음에 들어서요.”

“꽃말도 알아 왔어?”

“네. 벼, 변치 않는… 사랑이요.”

“아…….”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까…….”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는 눈이 깊었다. 연우는 꽃다발을 가득 안고서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어떡하지, 분위기가 이상한데.

“형이랑, 같은 학교 갈 거예요.”

금방 자랄 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제현은 그렇게 말하고서 연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댔다. 사뿐히 내려앉은 입술에 연우는 눈을 꼭 감고서 애꿎은 꽃다발만 으스러져라 안았다. 어떡하지, 더 좋아하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생각은 점차 흐려졌고,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꽃향기만 짙어졌다.

〈달의 정원 2〉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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