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왕자의 궁으로 최소한의 궁녀, 내관, 호위를 제외한 이들의 접근을 금지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마저도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많은 이들은 그 무리에서 빼놓을 수밖에 없었다.
“으흐흥…….”
당장 다음 날이 태영국으로 떠나기로 정한 날짜였으나 농익은 시간을 보낸 황태자와 태자비는 좀처럼 침상을 떠나지 못하였다. 한데 그 둘의 기운을 감당할 자가 흔치 않으니 쉬이 궁 안으로 들어가 재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자는 얕은 숨을 뱉으며 자는 제 아내를 턱을 괴고서 바라보았다. 엎드려 푸- 숨을 뱉으며 자는 모양새가 여간 피곤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너무 심했나? 그는 그제야 어젯밤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희락기가 겹치니 가뜩이나 좋은 방사는 지나칠 정도로 좋기만 하여 정신을 잃은 부인을 엎치고 메치며 몇 번이나 더 싸지르기도 하였지. 빠끔히 열린 구멍으로 희멀건 액이 조금씩 흐르는 것을 몇 번이나 닦아준 것도 부끄러웠다.
입맛을 다셔 가며 달게도 자는 부인의 등을 토닥이며 태자는 필히 아기가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리했는데도 아이가 찾아오지 않으면 그 녀석은 불효자지. 암, 그렇고말고.”
아직 확정이 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는 홀로 중얼거리고, 찾아오지 않은 아이를 불효자로 만들고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부인이 깨면 태영국으로 훨훨 떠날 것이었다. 한 번 태영국의 땅에서 말을 타 보고 싶다 말한 라연은 한 해나 두 해쯤 지난 후 초대하면 될 것이고.
‘우리 오라비 괴롭히면 활이든 검이든 들고 쫓아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태영국의 황제가 될 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공주님?’
‘태자비마마에 해가 되는 이가 누구든 소인은 활시위를 겨눌 것이니 각오하십시오.’
혹여 소박을 맞는다면 그는 언제든 태자 저하가 되실 것이오니 그 또한 새겨 두시고요. 예의에서 한참 벗어난 말은 연우가 찻물을 우려낼 때 제 귀를 파고들었다. 석궁 연습장에서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과녁의 정중앙에 화살을 쏜 라연은 매서운 눈을 하고서 제 오라비를 두둔하였다. 나쁜 짓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이이고, 마음씨도 호되게 먹어 본 적 없는 사람입니다. 연우 오라버니는 성군 중의 성군이 되실 이였으나 둘째로 태어나 왕위에서는 멀어졌고, 월앙인으로 발현하며 모국에서도 멀어졌지요.
험한 일을 당한 걸 알고 있다는 말씨였다. 태자는 잠자코 라연의 말을 들으며 화살을 골랐다. 그는 부러 연습장의 과녁들과는 멀리 동떨어진 숲 쪽으로 활시위를 당겼고, 라연은 그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라버니가 기댈 수 있는 분이 저하여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꼿꼿이 있으려던 사람이 떼도 쓸 줄 알게 되고… 감읍하나이다, 저하.’
태자는 그 말에 모른 척 덧붙일 뿐이었다. 내기에서 내가 졌군요. 화살은 멀리로 날아갔으니 언제고 태영국을 찾아오세요. 공주에게 맞는 대접을 해 드릴 터이니. 헛헛하다면 헛헛하다고 할 수 있는 둘의 대작이 불과 이틀 전이었다.
“내 보기에, 은월국의 공주님께서는 장군이 되시면 딱 맞을 것 같은데.”
“그만해… 싫, 어…….”
“그대 생각은 어떠십니까?”
“으음…….”
“잠꾸러기. 이쁘다고 해주니 잠만 자고.”
다 미인을 부인으로 얻은 내 복이지. 제현은 행복해하며 연우를 한 품에 안고서 향을 맡았다. 하도 살을 문지르고 안을 비벼대 이제 이 향이 누구의 향인지조차 불분명한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
내리 다섯 시진을 잤다는 것을 알았으나 딱히 정신이 다 돌아온 것도 아닌지라 연우는 어의에게 팔만 내어주었다. 어의는 손가락 끝으로 닿는 맥이 여타 월앙인보다 조금 거세고 강하게 뛰는 것에 곁에 있던 태자의 맥도 짚어 보았다. 고동치는 맥이 비슷하였다. 빠르면 한 해 안으로 월영인으로 발돋움하겠거니, 어의는 티를 내지 않고 그의 소맷단을 풀어 내려주었다. 쉬이 입을 열어 그를 함부로 기대하게 만든 다음,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을 때의 상심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없사옵니다. 왕자님, 아니, 태자비마마께서 피로하지 않으시다면 예정대로 태영국으로 향하시는 데 문제 될 것이 없다 사료되옵나이다.”
“부인,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가마에 몸을 싣고 가는 것을요……. 제 궁으로 가고 싶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푹 잠긴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으며 하는 말에 태자의 입꼬리가 기꺼운 듯 길게 호선을 그렸다. 하나 태자는 이전처럼 제 부인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주물거리지 않고 제법 의연히 자리만을 지켰다.
호칭이야 나중 일이라지만 아랫것들 앞에서 그를 굳이 귀여워해 주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희락기가 가까워온 월앙인의 향과 기운을 어지간한 양인이 버티기 힘들다고는 하나, 제가 대외적으로나마 그의 위상을 조금 더 높여주었다면 배에 흉은 남기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그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앞으로는 태자비의 대우를 착실히 하겠다 다짐한 제현은 어의가 나갈 때까지 미소만 짓고 있다가 그가 나가자 냉큼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부인!”
“예, 저하.”
“나는 이제 부인과 거리를 둘 것입니다.”
연우를 서운케 하고 싶어 툭 뱉은 말이었으나 연우의 애교에 태자는 금세 무너졌다.
“으응, 왜? 서방님께서 좋아하는 이는 나 하나라 하지 않으셨나이까?”
“그랬지요- 당연히 나는 그대만 사랑합니다.”
“한데 어찌 그리 미운 말씀을 하실까요, 소첩이 눈물 바람을 하는 게 보고 싶으셔서?”
눈물 바람이라니? 아니 될 소리를 하는 연우에 제현은 얼른 고개를 홰홰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여타 아랫것들 앞에서만. 아무도 일국의 황후가 될 그대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이전까지도 제 체면을 많이 살려주었는데 그보다 더? 연우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말하려 하였으나 태자가 마음을 굳게 먹은 듯하여 따스하게 동조해 주었다.
“하면 밤마다 더 안온히 안아 주셔요. 소첩은 그것이면 족하옵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내 사랑, 우리 각시.”
쪽, 입술을 뺨에 뭉개고선 청년답게 웃는 태자에 연우도 같이 웃어주었다. 태영국으로 가는 것도, 수많은 양인들과 몸을 부대끼며 다시 훈련장에 있을 것도 하나 두렵지 않았다. 모든 삿된 것들을 가려줄 정인이 곁에 있으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채비를 마친 상태였기에 연우와 제현은 하룻밤을 왕자궁에서 보낸 뒤에 아침 일찍부터 방한복을 챙겨 입었다. 연우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궁녀들의 손을 타는 것도 질투를 하는 제현이 손수 그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목도리까지 꼭 여며주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바람이 들어올 구멍이 없다며 눈만 빼꼼 내민 연우의 말에 태자가 비싯거리며 웃을 때였다.
“오라버니…….”
의젓하게 저를 꾸짖던 공주가 잔뜩 풀이 죽어 왕자 궁을 찾아와 제현은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하나 라연의 심성이 본디 선한 것을 아는 연우는 오라비 가는 것이 서운하고 섭섭하여 온 것을 눈치채고 얼른 팔을 벌려 그를 반기었다.
“우리 라연이- 오라버니 가는 길을 보러 오셨습니까?”
“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울먹거리는 공주에 태자도 라연의 서운함을 알아채고는 두 남매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우는 그의 배려에 눈짓으로나마 감사를 표한 뒤 머리 하나만큼 작은 동생을 품에 안았다. 많이 컸다 하였으나 여전히 제 눈에는 어린아이여서 연우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맺혔다.
“라연이와 많이 놀아주고 싶었는데, 아파서 그리하지도 못하고.”
“태자 저하가 오신 뒤로는 난 완전히 뒷전이었으면서!”
“그거야…… 라연이도 짝이 생기면 내 마음을 알게 될 거란다.”
“치…. 됐습니다. 이거나 받으세요.”
“이게 무슨…… 손수건?”
은월국의 가장 중앙에 있는 호수, 월영호가 수놓아진 손수건에 연우는 조금 멍한 얼굴이 되어 라연을 바라보았다. 호수에는 원앙 한 쌍이 노닐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나보고 수도 못 놓는다고 놀리셨지요. 태영국으로 가시기 전에. 이래선 시집도 못 간다구.”
“…….”
“……이제 월앙인이 아니라 월영인이 아닙니까. 나는 오라버니가 더는 아픈 일 없고,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태자 저하랑 둘이서 매일 재미나게, 깨 볶으며 웃고만 지냈으면 해서…….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양팔로 얼굴을 가리고 마는 라연에 눈만 내밀고 있던 연우도 눈물을 흘리며 제 동생의 볼에 입술을 묻었다. 라연이 분내가 날 정도로 어렸을 적에는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천방지축으로 구는 동생을 졸졸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아이가 이제는 다 커서 제게 준다고 수를 놓기도 하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 오렴, 오라버니가 라연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어디 아프지나 마십시오, 아프다고 하면 쫓아가서 태자 저하를 묵사발 내놓을 테니!”
그러나 라연은 라연이었다. 울다가도 주먹을 흔들며 성을 내는 모습에 연우는 코끝을 발갛게 물들이고서 속없이 웃었다. 앞으로 울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데 월앙인이고, 양인이고 간에 더는 제게 중요치 않았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꼭 다시 보자꾸나.”
“반년에 한 번씩 갈 작정인데 무슨 소릴 하시는 것입니까?”
“자주도 온다 하는구나? 혹, 태영국에서 데릴사위를 구하려고?”
“안 그래도 이번에 온 호위무사들의 생김생김이 퍽 괜찮아 오라비에게 한 놈만 달라 청하려 하였는데. 멀찍이 커다란 사내가 여러모로 내 눈에 이쁘던걸요?”
“이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기가 말은!”
“아이! 나 수도 놓을 줄 알고 이제 애기 아니라고요, 오라버니!”
언제 울었냐는 듯 데리고 놀 사내 하나만 달라는 청에 연우는 동생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배시시 웃고 말았다. 라연은 제 오라비가 더는 울지 않을 것 같아 괜한 청을 몇 번 더 늘어놓으며 그를 귀찮게 하였다. 사내 하나만 주셔요, 내가 둘이나 셋을 달라 한 것도 아닌데 거 참!
***
사위이자 태영국의 태자인 제현이 가는 길을 배웅하러 나온 국왕 내외와 세자 내외는 나란히 손을 잡고서 왕자 궁을 나오는 라연과 연우가 귀여워 한 번씩 뺨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연우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았지만 라연은 애 취급하지 말라며 파드득 몸을 떨어대니, 그의 오라비인 세자는 낮게 앓으며 라연의 애교머리를 한 번 잡아당기며 장난을 쳤다.
손이 귀한 태영국의 유일한 아이였던 제현은 그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머지않아 태어날 동생에게 저도 좀 살갑게 대해줄 수 있어야 할 텐데. 라연의 손등을 꼭 쥐고서 몇 번이나 입을 맞춰주는 연우의 다정함을 보며 제현은 저도 좋은 오라비, 혹은 형님이 되어주고 싶다 생각하였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다시는 이런 불효를 저지르지 않겠나이다. 심신 모두 강건히 다져서 걱정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프지 마세요, 태자비마마.”
“예, 어마마마.”
꽁꽁 싸매어 두툼한 품을 하고서 아담한 어머니를 한 번 안은 연우는 맑은 낯으로 인사를 하였다. 떠나보내는 길이나 마지막은 아니기에 누구도 울지 않았다. 제현은 그것이 퍽 마음에 들어 환히 웃으며 넉살 좋게 말을 꺼냈다. 이전 같았으면 약소국의 왕족에게 가까이 다가갈 생각도 안 하였을 텐데.
“다음에 올 때는 귀여운 황손도 함께 오겠습니다. 장인어른, 장모님.”
“저하!”
“왜- 곧 생길 것 아닙니까, 응?”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을 하셔요!”
눈을 세모꼴로 뜨며 제현을 가벼이 다그친 연우는 이내 가마에 올랐다. 제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떤 반응을 하여야 할지 모르겠단 듯 얼어 있는 이들에게 말하였다.
“정식으로 초청을 하겠습니다. 황위에 오르기 전에 뵙도록 하지요.”
“불러주신다면 언제든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저하.”
묵례하고서 제현 역시 말에 올랐다. 발을 치우고서 가마 안을 보니 미리 넣어 둔 담요로 다리를 감싼 연우가 뭉글뭉글 어여쁘기도 하였다. 말실수 한 번 하였다고 신랑을 보지도 않는 신부였지만 그래도 좋은 걸 어째? 제현은 배를 꼭 끌어안고서 입술을 삐죽 내민 연우를 보며 허허- 수더분하게 웃고선 고삐를 쥐었다.
“가자, 태영국으로.”
“예, 저하!”
새침해도 좋고, 사근사근하여도 좋고. 무엇을 어떻게 해도 좋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참말 꾸준한 애정이었다.
“이제 곧 태자 저하께서 태자비마마를 데리고 오신다던 전갈이 왔다던데.”
“쾌차하셨겠지?”
“월앙인이라고는 하나 마마께서도 적이 건강하셨으니 다시 강녕해지셨을걸? 아마 계속 아프시다면 저하께서 먼 길을 가게 두지도 않으셨겠지. 바람 불면 날아갈까, 톡 건드리면 쓰러질까 전전긍긍하시잖아.”
완연한 겨울이 된 태영국에 궁녀들도 털모자를 쓰고서 비질을 하였다. 눈이며 가을에 채 다 못 떨어진 낙엽이 군데군데 떨어진 바닥을 싹싹 소리 나게 쓸던 궁녀들은 날을 헤아려 보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오는 길에 별문제가 없었다면 오늘이나 다음 날 태자 일행이 올 터였다.
“오시면 태은궁이 다시 화사해질 것 같아. 어서 오셨으면 좋겠다.”
“수라간 나인들이 벌써부터 절편이랑 당과를 잔뜩 준비하였다고 하던데. 우리한테도 콩고물 좀 떨어지겠지.”
“얘는, 잿밥에만 관심이 많아선.”
“이런 거에라도 재미를 붙여야지! 태자 저하께서 어디 궁녀들에게 눈길이라도 주셔?”
“야아! 누가 들으시면 어찌하려구 그래!”
궁에 들어가 어찌어찌 잘 풀린다면 나라의 주인이 자주 찾는 애첩이 될지도 모른다 들었는데 그거야 영 틀려버렸으니. 두 해 전 궁으로 들어온 궁녀 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나는 태자비마마 품에 안기면 소원이 없겠는데…….”
“……우리끼리 하는 얘기니 말이지만, 태자 저하보다야 태자비마마가 더 좋은 것은 사실이지. 우리 말고 다른 애들도 그리 생각할걸?”
“태은궁에 저하가 오신다고 하면 너도나도 마마께 연지 발라준다며 설치는 것만 봐도…….”
차가운 겨울 바닥에 한숨만 폭폭 떨어뜨리던 궁녀들에게 태자 내외가 궁에 당도하였다고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환관의 간드러지는 소리에 쿡쿡거리며 가벼이 웃던 궁녀들은 서둘러 비질을 마친 뒤 신발까지 탈탈 털고서 궁 안으로 들어갔다. 곧 오실 궁의 주인을 맞이하려면 몸과 마음이 정돈되어야 하니 연지와 곤지 생각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서.
궁녀들의 마음일랑 살필 겨를도, 겨를이 있을지언정 딱히 관심도 없는 제현은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연우를 달랑 안아 들었다. 마차에 작게 난 창을 통해 태영국으로 오는 길을 눈으로나마 더듬던 연우는 구태여 제현을 타박하지 않고 순순히 안겨들며 그를 기쁘게 하였다.
“허기지지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저하께옵서는?”
“나는 부인 식사 들면 그때 같이 먹지요. 부인이랑 같이.”
며칠간 씻지 못하여 쿰쿰한 냄새가 날 만도 한데, 희락기를 즐겼던 밤처럼 여전히 향긋한 몸을 꼭 끌어안으며 제현은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당장 오늘은 너무 힘들고 고되니, 문안은 내일 드릴까요? 폐하와 황후마마, 태후마마께는 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연우는 때가 되면 올 터인데 잠시도 부인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은월국으로 달려온 태자를 따랐던 호위들의 낯을 살폈다. 황궁의 호위를 할 정도인 실력자들이니 피로함이 낯에 곧장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 저도 저지만 먼저 호위들부터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연우는 따사로운 시선에 소맷부리를 조금 쥐어 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곁에 있으면 저밖에 모르는 듯 구는 태자를 대신하여.
“걱정을 많이 하셨을 텐데 어찌 인사를 미룬단 말입니까, 소첩은 말을 직접 타고 온 것도 아니니 지치지 않았답니다. 당장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맞다 생각되어요.”
“응… 열, 나는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몸은 어느 때보다도 가뿐하고, 마음 또한 짐 하나 얹지 않은 듯 사박거리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다만 걱정되는 것은 저하를 따라 은월국까지 고된 길을 오간 무사들의 체력입니다.”
연우의 말에 호위무사들은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을 반기며 잠자코 태자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태자는 그제야 저를 따랐던 이들을 떠올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태은궁으로 갈 것이다. 태자비와 내가 태은궁에 당도하면 그대들은 여독을 풀도록.”
“예, 저하.”
“먼 곳까지 오가느라 수고가 많았네. 후에 약소하게나마 연회를 열 테니 모두 와주게나.”
“베푸는 은혜 감사히 받겠나이다, 태자비마마.”
“하면 이제 갈까요, 부인?”
안은 몸을 한 번 추어올리며 묻는 말에 연우는 가만히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집이었다. 다친 채 은월국에 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안온함이 이제야 몸속으로 깊이 스며듦에 연우는 설핏 웃어 보였다. 언제 정을 붙일 수 있으려나 걱정하던 밤들이 모두 무색해졌구나, 싶어서.
***
“어서 들렴, 아가. 살이 쪽 빠졌구나……. 이래서야 겨울을 날 수 있겠느냐, 어서 들렴, 어서.”
“은월국의 음식이 입에 안 맞았을 리는 없고, 많이 아파 살이 내린 것인고? 태자비의 얼굴이 홀쭉해져 짐의 마음이 좋지 않구나.”
“요양은 잘하고 온 것이지? 천천히 다 먹고 궁으로 돌아가세요, 태자비.”
“불효를 저질렀는데도 이리 반겨주시니 감사하고, 또 송구한 마음뿐이옵니다. 건강에는 문제가 없사오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자 내외가 돌아오는 날에 맞춰 상다리가 부러져라 음식들을 준비한 수라간이었다. 태후와 황후는 핏기없이 은월국으로 실려 갔던 연우를 애련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 기를 보할 수 있는 음식, 회임이고 자시고는 중요치 않았다. 오로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피를 돌게 할 만한 보양식으로만 상을 차리게 하였다. 물론 그 음식들이야말로 가임기인 연우에게는 더없이 좋은 것들이었다.
연우는 제 앞에 놓인 기름진 음식 중 가장 살코기가 많은 부분을 덜어내어 입 안에 넣고 음미하였다. 한 입을 먹었을 뿐이나 포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고기 한 점에도 배가 부른데 연우의 앞에는 닭 한 마리, 돼지 뒷다리, 어린 송아지 다리가 그득그득 놓여 있었다. 다 먹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터이나 그래도 많이 먹는 모습을 보고 싶으실 텐데. 살짝 데쳐 푸른 기가 살아난 청경채와 조린 돼지고기를 오물거리던 연우는 제현이 슬쩍 밀어주는 음식도 입에 넣고서 열심히 씹어 넘겼다.
식사 시중을 드는 수라간의 어린 나인들은 다복다복, 차린 음식을 빼놓지 않고 한 번씩은 다 먹는 연우의 곁에서 따뜻한 찻물을 내어주었다. 연우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수십 가지 음식을 모두 맛본 후에야.
조심스레 수저와 젓가락을 놓는 연우에 황제 내외와 태후는 뿌듯해하며 미소 지었다. 당장이라도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매만지며 고생 많았다고, 이리 금세 다시 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나 며늘아기의 옆에 앉아서 시선이 한 번 마주칠 적마다 새삼스레 수줍어하고 행복해하는 태자를 보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이미 한 사람에게 받는 애정만도 차고 넘칠 지경인데 저들이 신혼인 태자 내외의 사랑에 낄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나 먹이는 것만은 포기할 수 없어 나인들을 시켜 다과를 내오게 하였다.
“살이 너무 빠지지 않았니. 우리 아가 고생을 하여 그런 것인가 싶어 마음이 좋지 않구나.”
“심려치 마셔요, 태후마마. 단것들을 많이 먹고 얼른 살을 찌우겠습니다.”
“이보게, 정과를 내오게. 며칠 전에 만들라 일러 두었던 것.”
“예, 마마.”
“이, 이미 충분하온데…….”
이렇게 먹는다고 해도 당장 살이 찌는 것이 아닌데……! 연우는 이미 잔뜩 배가 부른 상태였으나 제가 한 입 두 입 먹는 것을 기특하게 보는 마음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연근정과를 하나 쥐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제현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얹히면 아니 되니 이만큼만 드셔요, 부인.”
“…예, 저하.”
연근의 구멍 두 개만 남겨 놓은 제현은 푸스스 웃으며 아내의 팔꿈치 옴폭 들어간 곳을 매만졌다. 밤에 같이 놉시다, 하는 뜻을 모르지 않은 연우의 얼굴은 보기 좋게 발그레해졌다. 연우의 볼그족족해진 낯을 보던 황실 어른들은 ‘황손은 언제 와도 오겠구나’ 하며 차를 마셨다. 흐뭇하게 웃는 제현과 달리 연우는 부끄러워 어른들의 얼굴을 좀처럼 보지 못하였다.
두 시간여 정도 걸린 식사를 마치고 연우는 졸음이 쏟아지는 얼굴을 하고선 태자에게 조금 걷자 청하였다. 마차에만 있었기에 여독이 따로 없다 자신하였으나 그런 것만도 아니었기에 연우는 태자의 손을 꼭 쥐고서 걸음을 옮겼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잠이 불쑥 밀려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였다.
“오늘은 가만히 안고만 잘 것입니다.”
“응……. 좋습니다.”
“조는 눈도 귀여우니, 이를 어쩌면 좋을지….”
“둔해 보일 뿐이지요… 하암-”
사뿐사뿐 걸으며 태자가 잡은 호랑이 가죽으로 지은 옷을 입은 연우의 시선이 불현듯 훈련장으로 향하였다. 무심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합이 가득한 소리에 끌려서. 무언가를 보고자 함도 아니었으며, 딱히 보고 싶은 것 또한 없었다. 훈련장에는 어린 무인들과 이미 이룰 것을 거진 다 이룬 장군들이 도열하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이전 사냥터에서 그를 해하려 했던 이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태자비마마께서 오셨군그래! 언제 한 번 또 활로 내기를 걸어주시려나.”
“멀리서도 저하의 낯이 밝아진 게 보이는 것 같아.”
“얼마나 좋으시겠는가. 태자비마마를 그토록 기다리셨는데.”
“…….”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색이 된 채 자리를 뜨는 서주에 무과 생도들은 저게 왜 저러나, 하는 눈빛으로 잠시 볼 뿐 달리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현은 연우의 시선이 멀리로 가기 전,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딜 보십니까? 서방님이 곁에 있는데.”
“놀랐습니다, 저하. 갑자기 이리 가까이 오시면…….”
“잠시도, 내게 시선을 떼지 마세요. 사내의 투기심을 얕보지 말란 말입니다.”
“알겠으니 저하 잠시만, 아음, 음…….”
입을 맞추면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 연우를 알기에 제현은 서둘러 입술을 부딪치고 보았다. 떨어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금세 입술과 혀를 감아 오는 것이 애틋하였다. 이리 사랑스러운 이에게 굳이 불경을 저지른 이를 보일 필요가 있나. 제현은 노곤하게 제게 안겨 입술을 받는 연우를 살살 매만지며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게 하겠다 다짐하였다. 누군가는 과하다 할지 모르겠으나 그는 중요치 않았다.
“태은궁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예, 같이 가주셔요, 저하.”
품에 안고 세상만사 신경 써야 할 것들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제현은 속으로나마 다짐하며 연우의 어깨를 감쌌다. 돌아온 이에게 안온함만을 선사하고 싶었다.
***
품 안의 자식처럼 연우를 싸고돌던 제현은 최근 고민이 생겼다.
“다, 다 싫으십니까?”
“응… 입맛이 없습니다. 후에 먹지요.”
“후에, 언제 드실 텝니까? 어, 어제도 그리 말하셨지요. 부인, 나중에 먹겠다고. 그러나 한술도 뜨지 않은 채 물리지 않으셨습니까.”
“내일은 꼭 먹겠습니다. 소첩도 배가 고프니까요.”
“내일? 금일은 아무것도 안 드실, 그럴 참입니까?”
“어…….”
갸름해진 턱을 하고서 연우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위신을 살려주겠다며 태자궁과 태은궁 밖에서는 거리를 두기 시작한 태자는 둘을 모시는 궁인들만 있을 때는 전보다도 더 태자비에게 앙살맞게 굴었다.
싫어. 많이 드시란 말입니다! 상체를 사정없이 흔들며 떼를 쓰는 태자에 연우는 붉어진 낯으로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좋기도 했지만 커다란 덩치로 애교를 부리는 것이 가끔 유독 크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서방님이 주는데 한 입도 안 드실 것입니까? 그러다 몸이 다 상합니다. 못 씁니다, 부인.”
“그럼 한 입만, 아-”
성화에 못 이겨 입을 벌린 이에게 한입 가득 들어찰 정도로 찬이며 밥을 가득 넣어주었다. 제현은 입 안이 가득 차 잘 씹지도 못하는 연우의 등을 쓸어주며 조금씩 음식을 넘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우욱-!”
“부인!”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괜찮다, 괜찮습니다, 저하. 너무 많이 먹어 그런 모양이어요.”
“내가 너무, 과, 과하게 많이 주어서, 그래서…….”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연우는 영 짚이는 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으나 구태여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정말, 나는 그러려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부인, 걱정이 되어서…….”
제 걱정에 굳어진 얼굴을 가만 바라다보며 생각할 따름이었다.
“아, 앞으로는 조금만 떠먹여 줄 것입니다. 마음의 크기만큼 다 먹여 드리지 않고, 손톱만큼의 마음만 수저에 담아 드리리다.”
그대를 닮은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하고.
***
월앙인에서 월영인으로 발돋움한 연우는 기실 몸의 변화는 잘 느끼지 못하였다. 은월국 어의의 말로는 그저 일상생활을 하며 조심할 것이 많이 줄어든 것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하였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으니 묘하게 서운하기도 하였다. 외려 와닿는 변화라 하면 헛구역질과 잘 붓게 된 몸이었다.
처음에는 은월국에서 태영국으로 다시 오며 몸이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인가, 싶었다. 하여 태자와의 합궁도 자유로이 하고, 부러 더 몸을 자주 쓰는 일을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꿈을 꾸고 나서는 몸가짐을 조심히 하게 되었다.
‘복숭아… 랑 무화과?’
보송보송 털이 난 백도가 발치에 잔뜩이었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무화과는 또 어떻고? 꿈에서도 어리둥절하여 양손에 복숭아와 무화과를 들고서 고민하던 연우는 이내 무화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태자가 무화과만 보면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것이 떠올라서. 그 덕에 연우 역시 무화과를 좋아하게 되기도 하여서 선택에 고민은 없었더랬다.
‘음? 이게 뭐지……?’
무화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였다. 무언가 딱딱한 게 씹혀서 툭 뱉고 보니 진녹색의 영롱한 보석이 손안에 떨어진 채였다. 생전 처음 보는 보석에 정신이 팔려 요리조리 보던 연우는 꿈에서도 그것을 누구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품 안으로 숨기고서 남은 무화과를 먹었다. 무화과는 이전에 먹었던 어떤 과일보다도 과즙이 풍부하고 과육이 생생하였다.
맛있어, 진짜. 그는 혼잣말을 하며 입 안에 남은 무화과의 향긋함을 느끼면서도 연신 품 안의 반짝임을 들여다보았다. 예뻐라. 이 보석은 따로 세공하지 않고 내 곁에 두고 매일 보아야지. 매일 한 번씩 쓸어주고 닦아주며 빛나게 해야지.
입맛을 다시며 꿈에서 깨자 보이는 것은 태자의 단단한 턱이었다. 연우는 눈을 깜작거리다가 이내 빈손을 한 번 보고, 치열을 혀로 훑으며 덧없이 무화과의 향을 느껴 보려 하였다. 꿈이 지나치게 생생하여 이상하다 생각하기는 하였다. 혹시, 혹시.
한데 신기하게도 바로 다음 날부터 기름진 것은 일체 먹고 싶지가 않았다. 거기까지만 해도 그저 속이 안 좋은가, 하였을 텐데 그 기간이 끝나질 않았다. 무언가를 먹지 않으니 살은 자꾸 내렸으나 몸은 종종 퉁퉁 부었고, 기분도 널을 뛰었다.
‘어떠한가?’
‘경하드리옵니다, 태맥이 짚이는 것이 확실하옵나이다!’
‘마마,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서 저하께……!’
‘회임이라…….’
혹시나 싶어 몰래 태의를 불러 맥을 짚게 하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회임한 것이 맞았다. 연우는 제 일처럼 기뻐하는 궁녀들과 태의에게 잠시 우리들만의 비밀로 하자 하고선 태자에게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저하, 소첩 부탁드릴 것이 있나이다.”
“부탁?”
“꼭 들어주신다고 약조하여 주셔요.”
“나쁜 것을 부탁할 리 없으니……. 당연히 들어주지요.”
황손을 품은 지 꼬박 석 달째 되던 날이었다. 연우는 몸을 섞자고 은근히 제 허벅지를 쓸어 오는 태자의 손을 가로막고서 운을 뗐다.
“서주의 일을 소첩이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그와 독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서주? 태자의 표정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서주의 처분은 연우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한데 감히 태영국의 태자비를 겁간하려 한 자를 그대 혼자서 마무리하겠다고? 저도 없이?
“대답을 굳이 안 해도 답을 아시겠지요.”
“하면 소첩이 뜻을 굽히지 않을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현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했다. 어찌, 말도 안 되는, 그대를 걱정하는 나의 마음은? 내 마음은 하나도 생각해 주지 않는 것입니까? 처분은 직접 얼굴을 보지 않아도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 내릴 수 있는 것. 그러한데 일부러 자리까지 마련하여 처분을 내리겠다니. 말도 안 된다.
“……아니 됩니다. 내가 부인을, 단둘이 그자와 만나게 가만둘 것 같으십니까? 나는 그대의 위신을 높여주겠다 한 것이지 그대를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두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울 지경이 되어 싫다고 하는 태자를 보는 연우의 마음 역시 좋을 리 없었다. 격해지려는 감정을 어떻게든 누르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것을 보니 같이 울고만 싶어졌다. 하나 사건의 당사자인 제가 마냥 피하는 것이야말로 아니 될 말이었다. 제 위신을 살려주겠다 한 제현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안 됩니다. 적어도 나와 같이……!”
“소첩은… 떳떳합니다. 그 일에 있어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을뿐더러, 잘못한 것 또한 없습니다.”
“…….”
“소첩을 언제까지고 마냥 소중히만 대해 주실 것입니까.”
기어이 제현을 울리고 만 연우가 그의 얼굴을 끌어안고서 동그마한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나는… 부인이 아니라 그자가 불안하여서,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응, 응. 우리 서방님 마음을 소첩이 모르면 누가 알아줄까요. 다 압니다. 하나 소첩이 구태여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일국의 황태자비인데.”
“그건… 맞습니다, 부인이 잘못한 것은 없지요.”
이러저러한 마음을 서로가 너무도 잘 알았다. 하여 제현도 종래에는 그의 뜻을 막지 않고 지그시 웃어 보였다. 연우는 눈물에 절어 살포시 부은 눈으로 자상하게 웃는 제현을 보며 이래서야 회임하였단 말은 어떻게 알리나 하고 걱정을 할 뿐이었다.
“눈물이나 닦고 말하셔요. 코흘리개 아기처럼 싫은 소리 한 번 했다고 눈물을 보이시다니.”
“…모른 척해주십시오, 부인 앞에서만 이런 것인데…….”
“실은 우는 모습도 아름다워 가슴이 저렸답니다. 얼굴이 잘나서 그런가?”
서주의 일이 해결되면 말씀을 드려야지. 연우는 그리 다짐하며 볼을 발갛게 물들인 태자를 열심히 귀여워해 주었다. 뺨이 꼭 꿈속에서 본 무화과 같네. 우리 아이는 그대를 닮았으면 좋을 텐데, 생각하며.
***
연우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들어주려 태자는 직접 서주에게 다가갔다. 잘도 우울한 낯짝을 하고 있구나. 제현은 어느 여름날 연우가 주었던 합죽선을 품에서 꺼내어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 서주를 비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아주 간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무과 생도들 사이에서도 최근 서주는 있는 듯 없는 듯 귀신처럼 훈련에만 참여하였다. 지은 죄가 있어 그런 것이었으나 생도들은 그러한 이유를 모르니 서주의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뒤에서 걱정만 할 뿐이었다.
하나 제현은 서주의 낯이 어두운 이유를 알고도 남았다. 그는 찌푸린 인상을 딱히 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무 아래에 앉아 멍하니 합죽선만 폈다 접었다를 반복하는 서주의 위로 그림자를 지게 만들었다.
“태자비를 뵈어야 하니 잠깐 시간을 내게.”
“소인을, 말입니까?”
“……나도 왜 보자는지 모르겠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자네를 말이야.”
사형에 처해도 모자란 판국에 말이지.
혀를 끌끌 차며 싫은 티를 감추지 못하는 태자를 바로 보지도 못하던 서주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에 태자는 말을 보태었다.
“네가 이조판서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그는 네 아비의 직위지 너의 자리가 아니다.”
“……송구하옵나이다, 태자 저하.”
“건방 떨지 말거라. 내 태자비가 아니라면 당장에 네 목을 베어도 속이 시원치 않으니.”
“…….”
“당장 금일 훈련이 끝난 뒤 훈련장의 뒤편에 딸린 누각으로 오거라. 길게 시간을 끌 것도 없다. 네 잘못이 명명백백하니 가타부타 덧붙일 말도 없겠지? 허튼소리를 했다간 길지 않은 명을 재촉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서주를 내려다보던 태자는 검집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충신이 되리라 믿었던 내게도 잘못이 있지.”
“저하, 소인은…….”
“가장 가까운 친우이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짓만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내 과오도 없지 않아.”
되었다,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니라.
제현은 그리 말하며 길게 늘어뜨린 장포를 한 번 추어올린 후 자리를 떴다. 서주는 제현이 간 길을 눈으로나마 더듬으며 품 안에 숨겼던 합죽선을 다시금 펼쳐 보았다. 달리 할 말이 있을 리가. 태자비를 본다 한들 죽여 달라는 말밖에는 청할 것이 없었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석궁으로 나를 쏘아 황천길로 보내실 수도. 서주는 그리 생각하며 손안의 부채만 만지작거렸다. 태자비마마를 다시 뵐 날이 오다니. 서주는 침울한 와중에도 저를 향하던 미소를 떠올리며 일말의 기대를 안았다. 어쩌면 다시 웃어주실 수도 있겠지, 그리 생각하자 가벼워져선 안 될 마음이 깃털처럼 가뿐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만의 생각이었다. 연우는 심기가 불편한 티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태자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서주의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드시겠지요. 소첩도 무리한 부탁인 것을 압니다. 알고말고요.”
촉. 깨금발을 들어가며 제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연신 가벼이 입을 맞추는 연우에 제현은 부러 더 화를 냈다. 그를 모르는 연우는 난감해하며 그의 허리를 안고 쇄골께에 볼을 비벼 왔다. 그에 태자의 마음은 더욱 기꺼워지는 것을 모르고.
“태자비로서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소첩이 직접 그에게 벌을 내리고 싶어 그렇습니다. 저하께서 훈련장에 계시고, 또한 소첩의 주위로 호위도 잔뜩 붙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안전한 장소가 어디 있겠나이까?”
“…나도 부인이 그에게 직접 벌을 내리는 것은…… 그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그의 기분이 조금 풀린 듯하여 금세 안심이 된 연우는 목에 팔을 감고서 활짝 웃었다.
“소첩이 그와 독대를 하고 난 후에 저하께 드릴 말씀도 있답니다.”
“무, 무슨? 혹 오늘 밤 하, 합궁……?”
“그런 것은 아니옵고…….”
누각을 둘러싸고 있던 궁녀들 중, 한 달 전 태의가 진맥을 할 때 함께 자리에 있던 궁녀들은 고개만 푹 숙였다. 그놈의 방사, 방사! 마마께서 얼마나 기쁜 소식을 전할지 꿈에도 모르시는군.
궁녀들의 생각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연우의 생각과 똑같았다. 연우는 이제 태자에게 회임하였단 것을 알릴 참이었다. 황후도 회임을 한 마당에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아 우선 태자에게만 넌지시. 아시면 필히 좋아하시겠지. 연우는 좋아할 제현을 생각하며 아양을 떨었다.
“오늘은 훈련 이후의 시간은 모두 소첩에게 할애하여 주셔요. 누구와도 저하를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아, 다, 당연히! 이후의 일정은 없습니다, 이, 있어도 없게 하겠습니다.”
부둥켜안은 태자 부부의 사이로 무언가 들어올 틈은 없었다. 바람 한숨 들어오지 못하도록 서로를 세게 끌어안고 있던 둘은 기마 훈련이 끝난 무과 생도들을 보고서야 떨어질 수 있었다. 연우는 걱정하지 말라고 태자를 다독이고서 누각으로 올랐다. 방석을 몇 겹이나 깔아 놓아 폭신한 자리에 앉은 연우는 가라고 말하지 않으면 하염없이 누각만 올려다보게 생긴 태자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따 뵈어요, 저하!”
“응, 응!”
걱정이라고는 티끌 하나 만큼도 없어 보이는 연우에 제현도 마음을 가볍게 먹자 다짐하고서 누각으로 오르는 서주를 지나쳐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자비마마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 하셨는지요.”
“나는 잘 지냈네.”
태자가 떠난 자리로 수척해진 서주가 올랐다. 연우는 그를 본체만체하며 말을 이었다. 딱히 살갑게 굴지도 않았으나 또 그다지 냉대를 하지도 않았다. 머뭇거리며 제게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서주를 보자 울컥하기도 하였다. 이전에 좋은 감정으로 그를 대했던 것이 여즉 생생하였기에. 하나 연우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후에 말문을 열었다.
“그대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자개로 함을 만들라 하였었네. 기억하는가.”
“……예, 기억합니다.”
“내 그 함을 주려 그대를 불렀네. 그러나…….”
“…….”
“부덕함을 저지른 이가 혼인이라니, 가당치 않은 소리가 아닌가 싶어.”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혼인하지 말라 일렀다. 너는 죄인인데 어찌 그 죄를 잊고 가정을 꾸리려 한단 말이냐, 연우가 서주에게 내리는 벌은 평생 짝이 없이 살란 것이었다.
“나는 각인을 한 월앙인의 향은 기운이 센 양인이라도 느끼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 하나 그렇다고 하여 겁간을 하려 한 그대의 잘못이 지워지는 것만도 아닐세.”
“……죽여주시옵소서, 마마…….”
“누구 좋으라고 그대를 죽인단 말인가. 내 한때의 기분을 풀기 위하여 목숨을 가벼이 여길 생각은 추호도 없네.”
“…….”
“평생 황실에 충성을 다하게. 내가 보인다 하여도 눈길 한 번 주지 말고, 언젠가 황위에 오르실 저하를 온 마음을 다해 보필해. 누구와도 짝을 이루지 말고, 홀로 죄를 뉘우치며 살게.”
“마마. 그는 너무…….”
그는 너무 가벼운 형벌이 아닙니까. 귀양이라도 보내셔야 속이 시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낱 미물보다도 못한 저를, 조금 더 모질게 벌하셔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리 묻고 싶었으나 서주는 제 발치로 떨어지는 연우의 목소리에 울음을 삼켜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 나 역시 믿고 좋아하였던 그대를 용서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으나…….”
“…….”
“평생 그대와 독대할 일은 만들지 않을 걸세. 증오하지도 않을 것이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야.”
“…….”
“이만 가 보게. 내가 줄 벌은 이게 다이니.”
“망극, 하옵나이다, 마마…….”
살려는 두마. 하나 네가 얼마나 지극한 충심을 보인다 한들 그에 웃음 한 번 보일 일은 없을 것이다.
며칠 밤을 고민하여 고안해낸 벌이었다. 듣고 있던 궁인들은 저게 벌이 되는 것인가, 너무 마음씨가 고운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으나 정작 벌을 받은 당사자는 누각을 떠나며 점점이 눈물길을 만들었다.
어떻게든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하던 밤들은 모두 헛된 것임을 서주 본인도 모르지 않았다. 하나 이제 먼발치에서나마 볼 기회도 박탈당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서러워졌다. 끝까지 미련 한 줌 남기게 하지 않으려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은 태자비의 마음을 알아서 더욱 서러웠다. 보필한다는 이유로 곁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면 평생 바라보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 서주의 뒤로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부인-! 아무 일도 없었지요? 여, 열도 안 나고? 이런 고생을 왜 그대가!”
“갑자기 열이 날 일이 무에 있단 말입니까……? 아침에는 식사도 거르지 않았으니 말짱합니다.”
“그래도! 나, 나는 곁에서 부인 힘들지 않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단 말입니다.”
“심려치 마셔요.”
저하의 사람이 아닙니까.
거기까지 들은 서주는 도망치듯 훈련장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죄악이었으나 자결할 수도 없었다. 사특한 감정을 숨기고서 평생을 황실에 충성하라는 것이 태자비가 내린 벌이었기에. 그러나 차마 살갑게 건네주었던 합죽선만은 버릴 수가 없어 그 후로 며칠간 서주는 유령처럼 매일을 보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차마 접어지지도 않는 마음을 죄스러워하며.
***
“도담도담이라는 말은 따사로워서 좋고, 토닥토닥이라는 말은 간질거려서 좋습니다.”
“부인이 하시는 말 중에 시, 싫은 것이 있을 리가요.”
“둘 중에 어느 말이 더 입에 잘 붙으셔요?”
“어, 음…….”
“아니면 저하께옵서 좋아하는 단어는 없으십니까? 응?”
낮에 서주와 독대를 한 후로 근래 가장 밝아 보이는 연우는 밤이 되자 궁 안의 정원을 돌자고 청하였다. 다른 이들 없이 둘이서만 밤 산책을 즐기자며 새끼손가락을 얽어오는 바람에 제현은 차오르는 음심을 누르느라 애를 써야 했다.
“나는……. 손톱.”
“손톱?”
“부인이 오신 밤에 손톱달이 떴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연우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못하고 멈춰 서서 태자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한 해도 전의 이야기였다. 그날 밤이 어떠하였더라. 엉망으로 첫날밤을 보내고서 표면적으로나마 태자비로서 살자고 다짐하였던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이 빠진 듯 멀거니 제 얼굴만 보고 있는 태자비에 제현은 머쓱해 하며 말을 이었다.
“실은, 사내 월앙인이 온다고 하여… 내 부러 못되게 굴었습니다. 창피한 일이지요, 나도 알고 있습니다.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는 철부지에, 사납고, 곁에 누구도 두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태자라는 자리도…… 썩, 원하지 않았었고…….”
“…….”
“월앙인이 귀하다고는 하나 약소국에서 사내를 보낸다고 하니, 우습게 보는가 싶어서… 싫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오든, 내 매우 거칠게 다루고 그의 마음은 하나도 읽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한데 몇 시간을,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말에는 조금… 마음이 좀, 안 좋았습니다.”
“…이해합니다. 싫으셨을 수 있지요.”
둘의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분명 차디찬 겨울바람이었으나 연우의 마음에는 봄을 알리는 서풍이 불어오는 듯 따스한 기운이 가득 찼다. 하나 제현은 내동 고개를 숙이고서 고백하느라 몽글거리는 연우의 눈망울은 보지 못하였다.
“망건을 들쳐서 본 얼굴에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부인 체향도 폐부 깊숙이 들어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리 아름다운 이가… 올 줄은 몰랐기에.”
“…….”
“첫날밤은, 합궁에 대해 배우기는 하였으나 막상 하려니, 이상하여서… 아래서 부인이 우는 것을 보자 나도 울고만 싶어져서 힘든 일을 해치우듯이 해 버렸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미안하여 내 어떻게 부인께 사과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잊었사옵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잘해주시니…….”
목이 메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줄이는 연우를 눈치채지 못한 태자는 주절주절 첫날밤을 추억하였다.
“잠든 부인을 보다가 통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갔지요. 한데 손톱달이 떠 있는 게 아닙니까? 이전에는 달이 어떻게 뜨던 관심일랑 없었으나, 그날은 갸름한 달 모양새를 보고서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저 달이 둥글게 차는 것만 기다리고 있겠구나. 그래야 부인에게 갈 수 있으니.
태자는 그리 말하고서 답삭 연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하나 이제 달이 차기를 기다릴 필요 없어 좋습니다. 언제고 보고 싶으면 그대에게 달려갈 수 있으니까!”
눈물이 나오려다가 쏙 들어갈 정도로 발랄하게 말하는 태자에 연우는 눈을 접어 가며 환히 웃었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태자를 올려다보니 기다렸단 듯 눈두덩에 입술을 묻는 것에는 가슴이 떨려 왔다. 오늘 서방님 없이도 아랫사람을 벌하느라 고생하셨지요, 부인. 천천히 말하며 어깨를 매만지는 것에 걱정일랑 한 점도 묻어 있지 않았다. 혹 저를 못 믿으면 어쩌나 하였는데 역시나 기우였나.
연우는 산뜻해진 마음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제현에게서 알콩달콩한 마음을 받았으니 저도 얼른 희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그러면, 손톱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 슨……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부인.”
“입에 잘 붙는 말을 태명으로 하면 아이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태명? 제현은 제 손을 끌어다 두툼한 솜옷 안의 복부로 가져가는 연우에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
“아… 음, 어…….”
“그렇지요, 손톱이 아버지?”
“……아이……? 부인, 여기에?”
“예, 저하. 이제 석 달 정도 되었는데, 깜짝 놀라게 해 드리려 말씀이 늦었습니다.”
“아, 어, 아, 아버지라니, 어, 어떡, 나, 어, 부인, 내, 내게 바라는 것을 어서, 말씀하시면…!”
아이? 아이?! 제현은 그제야 최근 연우가 통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생하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밤마다 합궁은 나중에 하자며 미루었던 것도 회임을 하여서 그랬던 것이었구나.
너무 놀라면 눈물도 안 나온다는 말이 맞았다. 제현은 아무도 없는 주위를 정신 사납게 두리번거리고, 눈앞에 있는 제 부인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가, 또 마구 입술을 찍었다가, 나중에는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하였다.
“우와아아아아-!”
“저, 저하! 쉿,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내, 내일 더 기뻐하셔도……!”
“부인, 내, 내일 무엇부터 할까요? 어, 나는! 나는 손톱이 배냇저고리를 만들겠습니다!”
“저하께서 직접 말이십니까…?”
“당연하지요! 손바닥만 한 것도 못 만들어 주는 아비라니,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 부인께서 어찌 바, 바늘 같은 위험한 것을 쥐려 하십니까? 아니 될 소리지요, 암요!”
“저, 저하, 잠깐 진정하시고… 으앗!”
진정이고 자시고, 당장 연우를 안고 뛰지 않으면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았다. 제현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태자비를 안은 채 정원을 내달렸다. 땅을 박차며 뛰는 가벼운 움직임에 벅찬 마음이 죄 까발려졌다.
“저하, 그만, 읍!”
“으아아아-!! 내일부터 더욱 열심히 살 것입니다, 부인과, 우리, 손톱이! 손톱이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도록!”
그만하라는 말을 마칠 틈도 주지 않고서 입술을 부딪는 제현에 연우도 결국 웃고 말았다. 입덧도 제가 다 갖고 갈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는 사내의 품은 어느 곳보다도 안전하고 따스하여, 안긴 이는 영영 그 품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되뇌었다.
“당장 내일 바, 반짇고리부터 대령하라 하여야겠습니다. 그리고 어, 부인이 입으실 옷도 다, 다시 맞추고!”
“응, 다 좋습니다. 저하께서 좋으시면 소첩도 모두 좋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부인이니, 부인께서도 부인을 가장, 아, 아껴주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그리 말하고서 콧잔등을 앙, 깨물고 도망가는 잘생긴 얼굴에 연우는 더없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 미소가 빛으로 가득 찬 보름달 같기도 하고, 웃는 입 모양은 끝이 섬세한 초승달 같기도 하여 보는 이의 마음으로 하얀 달빛이 스며들었다.
제현은 웃는 입에 제 웃음도 불어넣어 주며 말하였다.
“이, 이제 입덧은 내가 모두 가져갔으니 내일부터는 다복다복 잘 먹기입니다. 꼭.”
“응!”
“응! 어이구, 대, 대답도 이리 잘하시고, 어구구-”
대답이 귀여워 못 참겠다며 제현은 다시 연우를 번쩍 안아 들고서 정원을 뛰기 시작하였다. 결국엔 까르르, 반짝이는 웃음이 터진 연우에 제현도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말리지 않으면 밤새 뛰어다닐 작정인 두 부부의 머리 위로 은은한 축복처럼 달빛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