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태자, 요새 통 식사를 거른다 들어서 이 어미의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요. 걱정 마세요, 어마마마. 소자보다도 어마마마의 옥체가 상하지 않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현아.”
“기미 상궁이 맛을 보았으니 모두 안전한 것들이지요. 어서 드세요, 어마마마.”
희미하게 웃으며 수저를 드는 제현에 황후도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하나 제현은 수저와 젓가락을 번갈아들기만 할 뿐 좀체 밥 한술 넘기지를 못하였다.
열이 펄펄 끓는 이를 마차에 실어 그의 모국으로 보낸 지 꼬박 삼십 일이었다. 두 번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바라보며 태자는 숫기가 없어 황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그저 보름에 한 번씩만 그와 밤을 보내던 날들을 떠올렸다.
‘이, 이상한 생각을 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면 어찌 소첩을 찾으셔요, 저하……?’
어색하게 등을 토닥이는 제 품에 먼저 들어와 목에 팔을 두르던 온기가 여전히 몸에 남아 있었다. 귀한 사람이어서 귀하게 대해주려 하였으나 그게 온전히 전해졌을까. 최근 태자는 홀로 태자비의 처소에 가 밤을 지새우며 스스로의 서툶과 멋없음을 탓하였다. 조금 더 살갑게 굴 것을. 첫날밤에 그리 멋대로 굴지 말 것을. 이 정도면 다 뉘우쳤다고 할 만한데도 태자는 끊임없이 자책하고, 또 자책하였다.
“몸이 상합니다, 태자.”
“예, 어마마마.”
“태자비가 곁에 없어 그러는 것을 다 압니다.”
“…….”
“하나 재회하였을 때 강건한 모습이 아니라면 태자비는 또 얼마나 스스로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드세요. 나를 위해서도, 태자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태자비를 위해.”
“……예, 어마마마.”
어렵사리 밥과 국을 떠 입으로 가져가며 제현은 겨우 울음을 삼킬 수 있었다. 알고 있었다. 제 마음이 아픈 것처럼 태자비 또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을. 마음씨가 고운 이이니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책하며 울고 있을 게 빤하였다. 제현은 금세 다시 만날 것이니 황후의 말마따나 그날까지 건강을 챙기자고 마음을 먹었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품이라고 잠든 그에게 말하였으니 약조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울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황후와 찬찬히 식사하며 가벼운 나랏일과 곧 만날 황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마마, 저하!”
“무엄하도다, 예를 차리거라!”
서신과 상소문을 관리하는 자가 허둥지둥 달려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말하였다.
“서신이, 은월국 왕실에서 서신이 도착하였습니다!!”
***
주변에 사람을 물리고서 혼자 적적히 있고자 하는 연우에 라연은 이틀째 입을 댓 발 내밀고, 미간을 접고서 제가 적잖이 화가 났다는 걸 보였으나 연우는 그의 동생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이제 내가 싫다 하시면 어쩌지…….”
잘 아물고 있는 배를 문지르며 연우는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누가 볼까 저어되어 얼른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으나 서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를 갖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어의는 그리 전하였으나 그렇다고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질 리가. 연우는 소맷부리에 얼굴을 숨기고서 눈물을 닦아냈다. 좀처럼 멎지 않는 눈물이었으나 어서 정신을 차리고 태자에게 서신을 보낼 생각이었다. 이미 충분히 늦었다는 생각에 연우는 서둘러 붓을 들었다. 하나 도무지 아무것도 써 내려갈 수 없었다.
서주의 가문은 대대로 황제의 곁을 지키는 충신 가문이라 들었다. 태자 역시 서주를 제 곁을 지킬 사람이라 여겼던 것 같았고. 저 역시도 서주를 믿었다. 강직하고 굳건한 이이니 태자와 제 곁에서 좋은 신하가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매달아 놓고 활시위를 당겨도 부족한, 되먹지 못한 놈.”
일순 눈이 사나워진 연우가 험한 말을 뱉자 곁의 시종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은월국 왕실의 누구보다도 유순한 왕자로 이름을 떨친 연우였으나 그렇다고 할 말도 못 하는 이는 아니었다.
연우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몇 마디 욕을 더 내뱉었다. 후레자식, 감히 태영국의 황후가 될 몸을 탐하려 해? 이는 나뿐만 아니라 저하까지, 더 나아가 태영국 황실을 욕보인 것이다. 붓을 쥔 손을 떨며 화를 내던 연우는 불현듯 서주와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은 투기심이 인다며 어깨를 살살 흔들던 태자가 떠올라 금세 풀이 죽었다.
제가 잘못한 것은 없었으나 차라리 그때 서주의 배를 찌르는 편이 나았으리라. 그랬다면 적어도 몸을 상하게 하여 태자를 슬프게 만들지는 않았을 터이니.
“마음이 급하여 그랬던 것이라고 적어 보낸다면… 용서해 주실까.”
“오라버니! 용서는 오라버니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주마마, 왕자 저하께서 놀라신다 말씀을 드렸는데!”
“이거 놔 봐! 아니, 오라버니 얼치기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대체 어디에 용서를 빈단 말씀이십니까? 나 참! 혼인을 하더니 완전히 이상한 생각만 하고 계시는군!”
라연은 붓만 쥐고서 며칠째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있는 연우가 답답하여 가슴을 내리쳤다. 어휴, 어휴! 연우는 떨어져 있는 동안에 더욱 괴팍해진 라연의 성미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그마한 제 동생을 겨우겨우 타일렀다.
“라, 라연아, 오라비가 미안해. 그러니…….”
“나한테 미안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미안한 일이 아니라면 사과하지 마십시오!”
“어, 음… 라연이와 어울려 주지 못하여 미안. 내 몸이 아직 성치 않아 우리 라연이를 간만에 보고도 제대로 반겨주질 못하였잖아.”
“흥! 그것은 내 용서해 주지요! 한데 왜 자꾸만 우는 것입니까? 자꾸 울면 오라버니의 정인도 슬퍼할진대.”
“…….”
“뚝! 그만 우세요, 오라버니!”
자꾸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 연우는 울지 말라며 저를 쥐 잡듯이 잡는 라연에게 어설피 안겨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저하가 보고 싶어, 저하께서 나를 다시 찾지 않으면 어쩌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섧게 우는 연우를 보며 라연은 몰래 혀를 끌끌 찼다. 제 서신을 받아 보았다면 분명 태자가 오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리 따끔하게 말을 해 두었으니.
라연은 걱정 말라고, 오라버니를 데려가 놓고 다시 은월국에 툭 두고 간다면 제가 용서치 않을 것이라 이르며 연우의 등을 멋없이 두들겨 주었다. 제가 서신을 보낸 것은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뭐, 곧 둘이 만나 회포를 풀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니.
***
서신이 왔다는 말에 태자와 황후는 상이 덜컹거리는 것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신에는 은월국 왕실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틀림없이 연우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어마마마께서 봐주십시오, 저는, 소자는 도저히…….”
“아, 알았다. 내 먼저 보지요. 이리 줘 보거라.”
“예, 마마.”
황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으려 하는 태자 대신에 서신을 받아 들었다. 설마 건강이 되레 좋지 않아졌다며 보낸 것은 아니겠지. 일말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긍정적인 마음으로 서신을 펼쳐 보았다.
“…음……?”
그리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갈 때마다 황후의 얼굴이 점차 요상하게 구겨졌다. 황후는 눈을 깜빡이며 제가 보고 있는 것이 정녕 은월국에서 온 서신이 맞는지를 확인하였다.
「겨울날 추위에
가련한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어찌 님이 오지 않나
그리워하고 있네-」
여기까지는 그저 연우가 제현이 그리워 시조를 지었구나, 하였다. 하나 그다음부터가 가관이었다.
「우리 오라버니야 이렇게 에둘러 말하였겠지요? 하나 소인은 아닙니다! 오라버니는 이십 일이 넘도록 앓다가 이제야 일어났습니다. 내 태영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연우 오라버니가 무슨 잘못을 했을 리 없습니다. 잘못을 했다 하여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하나 부인의 흠결 하나 감싸주지 못하는 사내를 진정한 사내라 할 수 있답니까?」
황후는 인중을 늘리며 웃음을 참았다. 은월국에 말괄량이 하나가 태어났다는 말을 아주 예전에 듣기는 하였는데 아마 그 아이이지 싶었다.
「우리 오라버니가 은월국에서 미남자로 소문이 난 것을 태자 저하께서는 모르시지요? 그것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박을 맞았다고 내 소문을 내면,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 소박맞은 사내라도 얻겠다며 여인네들이 난리가 날 테지요.」
이게 결투장이지 무슨……. 황후는 기어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종이에 고개를 박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에 적힌 말을 보니 도무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던 탓이었다.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는 거의 흐느껴 울다시피 일그러진 얼굴로 태자에게 서신을 건네었다. 건네면서도 이런 서신은 난생처음 받아 보는지라 도무지 감정을 추스를 수 없어 손부채질하며. 황후는 근래 이리 웃어 본 것은 처음이라며 숨을 골랐다.
태자는 제 어미의 표정을 보고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저리 웃지도, 울지도 못하시는 건가 의아했으나 서신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하였다. 하나 그의 낯은 마지막 문장을 보고 새파래졌다.
「자, 그럼 이제 진정 소박을 맞게 된 것은 누구입니까?」
“어마마마, 소자 폐하와 알현하여 허락을 받는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은월국에 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크흡, 소박을 맞지 않으려면 그래야지요.”
황후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살살 훔치며 아들의 등을 안아주었다. 소박을 맞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반드시 태자비를 궁으로 모시고 오라 종용하며. 제현은 눈을 질끈 감고서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지 말라 하여도 데리고 올 것이었다. 연우가 없는 삶은 이제 상상할 수조차 없으니.
***
라연이 울지 말라고 몇 번을 달래도 보고, 다그쳐도 보았으나 그 또한 낮의 이야기였다. 밤이 되면 연우는 눈물이 멎지 않아 눈 밑에 오래도록 무명천을 대고 있어야 했다.
“흐끙, 흑…….”
어의는 월앙인의 기를 보하고 희락기의 열을 다스리는 잎과 꽃, 나무뿌리를 달여주었다. 연우는 그것을 군소리 않고 먹었으나, 그날 밤에는 외로움에 사무쳐 어의가 하지 말라는 음주를 하였다. 과실주 몇 잔은 괜찮다고 하였지, 처음에는 그리 생각하였으나 마시다 보니 한 잔이 두 잔, 두 잔이 한 병이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왕자가 그러는 것을 처음 본 은월국 왕실의 궁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주변을 맴돌기만 하였다. 그가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할 때마다 얼른 가서 몸을 바로 하여 주는 정도밖에 해줄 수 없었다. 주먹을 쥐고 눈가를 훔치며 태영국의 황태자만 찾는데 궁인들로서는 그를 위로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왕자 저하, 그만 드셔요. 옥체 상하십니다.”
“저하……. 흐으, 저하가 보고 싶다…….”
저를 안아 옮기는 내관의 목덜미에 코를 박던 연우는 기어이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이는 저하의 향이 아니다, 저하를 데리고 와. 내 잘못을 내가 빌 것이니 데리고 오란 말이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던 몸이 울며 파닥거리다가 이내 다시 훌쩍이며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궁인들 모두 새로운 연우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하였으나 대개 가엾다는 반응이었다. 월앙인이나 사내라 하여 끌려가듯 태영국으로 가시더니 소박을 맞고 돌아오셨구나, 흉흉한 소문이 궁을 돌았다.
언젠가 태자가 말했던 것처럼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든 연우를 안쓰러이 바라보던 궁녀가 그 대신 처소의 등불을 꺼주었다. 후, 하는 소리와 함께 연우가 잠든 곳에 푸른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나 은월국의 왕실을 비롯하여 궁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곳이 은월국이 맞는 게냐.”
“예, 태자 저하! 틀림없사옵니다.”
“미처 소식도 전하지 못하여 아마 은월국 왕실에서는 저하께서 당도하신 줄 모를 것이옵니다.”
“급히 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앞장서거라. 한시라도 빨리 부인을 보아야겠으니.”
태영국의 황태자가 생각보다 훨씬 더 연우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
서신을 받자마자 그 즉시 간소하게 짐을 꾸린 태자는 곧장 마차에 올랐다. 이틀 정도를 내리 달렸으나 아직도 온 만큼 더 가야 한다는 말에는 울컥 화가 치받았으나 꾹 참기도 하였다.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그리 되뇌며. 종래에는 마차에 가만히 앉아서 가기가 속이 터져 스스로 말을 몰기도 하였다. 가는 길을 몰라 안내하는 자들이 제현의 양옆에서 달려야 했다.
산 하나를 넘을 때마다 날은 급히 추워졌다. 얕은 강 하나를 넘은 것은 태영국 황궁에서 출발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고, 그 강을 건너자 챙겨 온 방한복을 입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추위가 덮쳤다.
이런 곳을 부인 홀로 가게 한 것인가? 제현은 다들 말려도 연우의 곁을 지켰어야 했다며 자책했다. 연우가 다시 제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하여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보지 않겠다고 하여도 태영국으로 다시 데려갈 작정이었지만.
이러저러한 생각들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쯤 왕실 문지기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무엄하도다! 주상 저하를 알현하기 위함이면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함을 알진대 어찌 이 야심한 시각에 궁을 찾았단 말인가?!”
손톱달이 아슬아슬하게 걸린 밤이었다. 제현은 마른세수를 하며 제 곁의 신하들을 제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피곤하고, 당장 연우의 곁에서 눈을 조금이라도 붙이고 싶었다.
“그대들의 말대로 야심한 시각에 예의가 아닌 것은 아네만.”
문지기들은 거구의 사내가 마차에서 내림에 바짝 긴장하여 들고 있던 창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삐딱하게 선 사내는 은월국의 사내들과는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랐다. 선이 굵은 사내는 은월국에도 없지 않았으나 눈앞의 사내처럼 덩치가 좋고, 눈빛에 위압감이 서린 자는 본 적이 전무하였다.
제현은 문지기들이 저를 두려움과 호기심이 버무려진 눈으로 살피는 것도 모른 채 짙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당장 내 연우 왕자님을 뵙지 못하면 더 버티는 것이 힘들 것 같은데.”
“예, 예?”
연우 왕자님이라니? 태영국에서 연우를 찾아 이 밤에 은월국을 왔단 말인가? 문지기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제는 묘한 선망을 담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현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태영국의 황태자이니 마땅한 호패가 없네. 하나 나를 보필하는 이들을 확인하면 될 것이 아닌가.”
태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위무사를 비롯하여 그를 모시고 온 시종들이 각자 제 호패를 내놓았다. 문지기들은 그제야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한 뒤 왕궁의 문을 열었다. 제현은 짧게 말을 덧붙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내하라. 나의 부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장지문이 열렸다. 꼬박 일곱 개의 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였고, 제현은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말하였다.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느 때고 좋으니 왕자의 처소로 들어오거라.”
자제하자고 마음을 먹고 왔으나 막상 그를 보면 함부로 굴게 될까 저어되어 남긴 전언이었다. 궁인들은 괴로워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대강 짐작한 뒤에 고개를 깊이 숙이며 알겠노라 표할 뿐이었다.
여섯 개의 문을 지난 뒤, 소박하나 단아한 궁이라 생각하며 제현은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역시 제가 나고 자란 황궁보다 낮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압감을 주지 않아 왕실 자체의 문턱이 낮다고 여겨졌다.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왔다던 태자비의 말이 떠올라 제현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언젠가 둘이 잠행을 떠났던 순간이 불현듯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가 이내 멀어졌다
걸음을 옮길수록 그는 궁인들의 안내 없이도 그의 정인을 향할 수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향이 폐부 깊숙이 차는 느낌이었다. 나의 향도 부인에게 가 닿을까. 하면 잠에서 깨실지도 모르지. 분명 먼 길을 거쳐 당도한 은월국이었으나 태자는 어쩐지 잠이 깨 버린 듯하여 괜히 주먹만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이곳이 연우 왕자님의 처소입니다, 태자 저하.”
“고맙네.”
“왕자님께서 태자 저하의 행차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하여 침전에 드셨다고 하옵니다.”
“그는 괜찮네. 신경 쓸 것 없어.”
자는 모습이나마 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저 건강한 모습만 본다면 그것으로 족하였다.
태자는 총총 사라지는 궁녀들과 궁인들에 손을 한 번 들어 보이며 연우가 잠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걸음마다 향이 따라붙었다. 으응- 하며 길게 앓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옴에 태자는 등골이 버쩍 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한 성감이었으나 그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참으로 부인을 닮은 궁이구나…….”
푸른 달빛이 내려앉은 궁 안은 그 주인과 함께 고요히 잠든 듯하였다. 궁녀들은 강인하게 생긴 미남이 걷는 길에서 물러났고, 제현은 조용히 부인이 잠든 공간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보았다. 달빛에 궁 안에 자리한 상아, 진주 따위의 장식들은 그 방의 주인을 꼭 닮아 있어 절로 마음이 따사로워졌다. 태영국에서는 무엇이든 색색이 화려한 장신구를 패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게 부와 영화를 상징한다 하여. 하나 하얗고 맑은 장식이 연우와 더 잘 어울릴 것도 같았다. 태자는 태영국으로 함께 돌아가면 그날로 새로운 보화를 잔뜩 안겨주리라 다짐하였다.
낮이 되면 햇빛이 온 방을 비출 정도로 커다란 창에 찰랑거리는 보석 발이 쳐져 있는 것을 공연히 건드려 보던 제현은 침상 밖으로 삐죽 나온 손에 푸스스 웃고 말았다.
“부인-”
가장 보고 싶던 보석이 예 있었구나.
새근새근, 보고 싶다 목 놓아 울며 찾던 이가 앞에 있는 줄도 모른 채 곤히 잠든 연우를 보며 제현은 아주 오래간만에 웃을 수 있었다.
***
미리 씻기를 잘하였다고, 그를 품에 안고 생각하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살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으응…….”
“남편도 없는 곳에서 이리 취해 있다니.”
혼이 나 봐야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하지요, 응? 묻는 말에 답은 없으나 곤히 잠든 얼굴이면 족하다.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
먼 길을 오며 고작 달이 세 번 차고 기운 시간이 지났을 뿐이니 변한 것은 없었으리라 여겼다. 내가 바란 것은 하나였다. 그대가 입은 상흔이 아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대 입으로 나를 어여뻐해 주기를 바랐다.
잠든 얼굴에 나비가 앉듯 입술을 기대어도 보고, 손등으로 보드라운 볼을 매만지기도 하였다. 아내를 보면 눈물부터 나올 줄 알았으나 막상 술에 절어 퉁퉁 부은 얼굴을 보니 그저 귀엽기만 하니 이를 어쩐다? 몸을 아끼지 않는다고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사랑한다, 은애한다 고백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나는 말을 아끼기로 결심한다.
“부인-”
“…….”
“연아-”
침상 한구석에 웅크리며 이불 안으로만 들어가기에 잠든 이를 공연히 내 품으로 끌어와 보듬어 안았다. 언제고 내 품이 가장 좋다며 해사하게 웃던 이이니 잠결에도 그게 더 낫지 싶어서. 한데 여기를 만져도 흥, 저기를 만져도 흥, 하기만 하니 조금 미안하던 차였다.
“하암…….”
“응, 일어나셨습니까?”
하품하는 모습마저 귀여울 일인가? 나는 이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찌 이리 사랑스러운 사람이 나의 안온한 세상에서 그리 험한 일을 당하였을까.
“…제… 현이.”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부인.”
“제현이…….”
반짝 뜬 눈이 살금살금 굴러가다가 다시 감기며 나를 부른다. 제현이라고. 이름자를 부르는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머릿속이며 마음이 온통 어질러진다. 돌이켜 보면 그대 눈을 본 순간부터 내 정신은 온전치 못했지. 품 안의 이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는다. 온갖 단 과일을 모아 놓고 뭉개 놓은 듯한 향을 맡으니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은월국인지, 아니면 무릉도원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제현, 제현이, 덧없이 내 이름만 되뇌며 아내는 이제 목에 팔을 감아온다.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굴러다닌다. 여직 아플 것이 분명한 이이니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한다. 괴롭히지 말자. 그저 안고만 자자.
하나 나의 아내는 언제나 제 뜻대로 나를 잘도 놀리고, 재미있게 갖고 논다.
“내가 보고 싶어, 나의 꿈에 왔구나- 제현아.”
“…….”
“너를 보고 싶은 마음이 깊어… 술잔을 타구 왔어…….”
나는 그대 앞에서 언제까지고 어리고 서툰 사내일 것이다. 그대는 꿈결 같고, 나는 그 결을 타고 나비며 새며, 모든 날개 달린 것이 되어 당신 안을 날아다닐 테다.
“부인, 나의 사랑, 보고 싶었습니다…….”
“……진짜루 제현이가 맞는가…?”
눈을 여러 번 깜박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벅벅 비비기까지 하는 아내를 말린다. 어찌 아프게 그러십니까, 묻는 말에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나는 침상이 아닌 곳에서 그가 우는 것을 보지 못하여서 도무지 어떻게 그를 달래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부인, 내 술잔을 타고서 이리 왔습니다.”
“…끄흥!”
“아까 그렇게 비비는 바람에 눈이 다 짓무르지 않았습니까? 서방님이 보고 싶어 우셨던 겝니까?”
“끄으…… 흐어어엉!!”
“왜, 왜 또 우시는 겁니까? 내가 좋아서? 내 걱정에? 하나 이, 이리 멀쩡하지 않습니까. 나는 건강히 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을 보러 이리 단박에 달려온 것인데 어찌 우실까.”
퉁퉁 부은 못난이 얼굴을 해서는 계속 울기만 한다. 누가 말리지 않으면 아주 숨이 넘어갈 때까지 울 것 같아 마음이 두렵다. 울지 마세요, 이렇게 좋은 날 왜 우십니까. 말소리는 떨리지 않았으나 아내를 안아서 품에 가두자 심장이 이리저리로 튀는 것이 몽땅 그에게로 옮아간다. 이래서야 지아비로서의 면이 서질 않는데. 그러나 간만에 본 아내가 태영국에서 마지막으로 본 순간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울지 말고, 뚝!”
“흐으…… 저하, 저하아-”
“이제 아프지 않으십니까?”
“끅, 흑…… 하나두 안 아픕니다.”
“어이구, 우리 부인 하나도 안 아프시구나. 그러면 되었지요. 이제 울지 마시고 신랑을 반겨주시지요, 응?”
하나 건강해 보인다 한들 몸은 너무도 가벼워 절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꽉 끌어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살살 등허리를 쓸어주자 그가 내 얼굴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쓸어 본다. 제게 익숙한 얼굴이 맞는가 싶어 찬찬히 확인하는 것처럼. 나는 그 간질거리는 손길에 눈을 감고서 가만히 얼굴을 대어준다.
눈과 눈썹 뼈를 지나 이마, 콧날을 쓸던 손가락이 입가에서 멈춘다. 촉, 하니 붙어 오는 것은 틀림없이 그의 입술이지.
“보고, 싶어서….”
“예, 부인. 나도 보고 싶어 길이 먼 줄도 모르고 달려왔습니다.”
“원래는, 응, 술도 안 마시는데에.”
꿍얼꿍얼, 입 속으로 숨는 말씨를 도로 빼내려 입을 맞추자 허겁지겁 혀부터 내미는 아내가 귀엽다. 이토록 귀여워지는 것을 알았다면 진즉에 같이 술잔을 기울일 것을. 태영국으로 돌아가면 당장에 술상부터 봐 오라고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보고 싶어서 마셨는데, 저하가 왔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아내는 살며시 안고 있던 내 보람을 모두 깔아뭉개듯이 으스러질듯 나를 안아 온다. 그렇게 안아 오니 나도 더 이상은 참기가 힘들어 서로의 가슴팍이 바짝 붙게끔 힘을 줘 그를 안았다.
“술이 깨도, 가시면 안 돼.”
“푸흐- 안 가지요. 갈 리가 있나.”
맹하니 어리광을 부리는 아내를 안고 둥가둥가 얼러준다. 내 사랑, 내가 그대를 두고 어디를 가오리까. 입 안과 몸속에 가득 찬 사랑에 도통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던 연우는 단단한 흉갑이 제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살짝 올려 보았다.
“…저하……?”
“으음… 조금만 더 잡시다, 부인…….”
“저, 저하…?!”
제 앞에 있는 이는 분명 태자였다. 태영국에 있어야 할 태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연우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두 손으로 입을 꼭 틀어막고서 제현의 품에 안겼다. 태자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안온한 품을 벗어나서 고민할 정도로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꿈은 아니겠지? 연우는 저를 안은 태자의 품에서 까막까막 눈을 감았다 떴다. 몇 번을 그리하여도 태자는 제 앞에 있었다. 조금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서.
“어제, 그게 꿈이 아니었나……?”
술에서 깨도 가지 말라 하기는 하였는데, 정말 가지 않으셨네.
연우는 어젯밤 저를 찾아온 태자가 꿈이 아니었다는 것에 온 가슴이 뭉클거림을 느꼈다. 하나 보자마자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술잔을 타고 왔다는 둥의 이야기를 한 것은 적이 부끄러웠다. 언제나 어른스러운 아내인 척 하였기에 더더욱.
저를 보러 예까지 온 것이 고맙기도 하고,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던 것에 퍽 감동받은 연우는 괜히 태자를 흔들며 깨우기 시작하였다. 일어나면 어제의 주사는 잊어 달라고 할 것이라 생각하며.
“저하, 태자 저하-”
“으응… 왜, 응?”
하나 막상 눈이 마주치자 할 말은 하나밖에 남지 않아 연우는 자그맣게 말하고선 다시 태자를 끌어안았다.
“보, 보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전하는 목소리가 덜덜 떨렸으나 떨림은 곧 잦아들었다. 잠결에도 그의 부인을 달래주고파 와 닿는 입술 덕분에. 연우는 입 안으로 살며시 들어온 태자의 입술을 오물거리며 눈을 감았다. 한숨 더 자고 일어나도 소첩 곁에 있어 주실 거지요?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맞추는 것이 좋아 차마 입술을 떼지 못하고.
***
뭐? 간밤에 태영국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연우 왕자님의 방에 커다란 사내가 와서 그에 연우가 엉엉 울었다는 소문이 날개를 달고 온 왕궁을 흔들었다. 왕과 왕비는 그 소식을 듣고 적이 걱정하였으나 찾아온 것은 태영국의 태자요, 운 이유는 아들의 주사 때문임을 알고서 얼굴을 붉히었다. 하나 어린 라연은 제 서신을 받고 왔으면서도 저를 알은체하지 않고 둘만의 세상에 빠진 태자 내외에게 삐친 것을 숨기지 못하였다.
“아니, 웃기지 않아? 내가 아니었다면 둘이 언제 만났을지 모를 일이라구요, 오라버니!!”
“그만 성을 내거라, 라연아. 아마 밤이 너무 늦어 네게 오지 못하신 것일 게지. 그리고 그간 얼마나 연우가 보고 싶었겠느냐? 네가 참거라. 오늘은 이 오라비가 놀아 주마.”
“내가 놀아줄 사람이 없어 이리 성을 내는 줄 아십니까?! 나 그리 쩨쩨한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라연은 성을 내며 온 왕궁을 쏘다니며 이럴 수는 없다고 외쳤다. 궁인들은 성난 망아지처럼 치맛자락이 들썩일 정도로 거칠게 뛰는 라연의 뒤를 쫓으며 제발 고정하시라고 그녀를 말리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태자 내외는 애틋한 재회 뒤 몸의 대화를 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부인- 얼굴 좀 보여주세요, 내 사랑, 응?”
“오신다고 언질이라도 주시지… 하면 소첩이 분칠이라도 하고, 옷이라도 어여쁘게 입고 반겨드렸을 터입니다. 하나 지금은…….”
“아, 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고! 우리 태자비를 누가, 응? 누가 밉다고 했습니까? 내 그치를 잡아다 묻겠습니다.”
무엇을 묻는단 말이냐 되묻자 태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하였다.
“따, 땅에 묻겠단 말입니다, 부인.”
아, 그리 묻겠단 말이었군. 태자비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말뜻을 이해한 뒤 얼굴을 붉혔다. 은월국의 궁인들은 그가 이리 애처가에 공처가인 것을 몰랐다. 연우는 일어난 지는 한참 되었으나 도통 침상에서 벗어날 생각을 않으며 여직 맨몸인 것도 부끄러운 참이었다. 하나 한편으로는 간만에 저를 안아주는 품이 너무도 좋아 그저 그대로 머물고만 싶기도 하였다.
“부끄럽습니다, 저하. 이러지 마셔요…….”
“궁인들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하, 하면 이 안으로 더 들어오시면 되지요. 내 안아드리리다, 그대와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부인.”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지러운 말만 해 대는 태영국의 황태자에 궁인들은 자못 당황하여 헛기침하였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왕자의 태도였다. 왕자는 조금 덜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오산이었다.
연우는 태자의 말에 온몸을 발갛게 물들이고선 엉덩이를 살짝 들어 그의 몸통을 바투 끌어안으며 단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어여쁘게 들어 올리는 모습이 퍽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 궁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서 소첩을 숨겨주셔요, 부끄럽사옵니다….”
“어, 엇흠, 큼! 다들 고개를 돌리거라! 태자비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가 있다면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예, 황태자 저하-”
“이제 됐지요? 하면 어디, 어디를……!”
어디를 먼저 맛보아야 제대로 그대를 취하였다 소문이 날까? 태자는 느물거리며 이불 속에서 웅크린 태자비를 덮쳤다. 궁인들은 얼른 자리를 피하며 문을 닫았다. 회포를 풀기까지 도무지 며칠이나 더 걸릴지, 그들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연우와 제현은 온종일 서로 매만지며 놀았다. 말 그대로 놀기만 하였다. 궁인들은 기다리고 있으면 그들이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으나 정말이지 둘은 서로에게 아양만 떨었다.
이것은 누구의 것? 연우가 제현의 얼굴 이모저모를 콕콕 누르며 물어보면 제현은 허허실실 웃으며 부인의 것, 연의 것, 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하면 연우가 제현의 손을 끌어 제 몸을 빠짐없이 매만지게 하고서 이 몸은 그대의 것이라며 유혹하였다.
“참말 내 것이지요?”
“으응, 당연하지요, 소첩의 지아비가 아니십니까.”
얼싸안고 몸을 겹치길 여러 번이었다. 수차례 몸을 섞었으나 그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틈만 나면 붙어먹기에 정신이 없었다. 태영국 황실의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광경이었으나 은월국 왕실의 이들은 이런 경우가 난생처음이어서 얼굴만 홧홧하게 붉혔다.
“못 본 새 살이 이렇게 빠지시고…….”
“머리를 매만져 주세요, 부인.”
“응, 예뻐라. 귀도 어여쁘고, 목덜미도 아름다운 내 사람.”
입을 헤벌리고서 연우의 손길을 받는 태자는 한 마리 강아지 같았다. 분명 방금까지 왕자님의 둔부를 내려치며 험한 말을 하던 이가 맞는가? 은월국의 왕족들은 대개 은은하고도 잔잔한 애정 표현만을 하여 궁인들은 제현과 연우의 애정행각에 영 적응이 힘들었다.
하나 일견 과격하다 보일 수 있는 그 표현들로 인하여 궁인들은 연우가 소박을 맞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고 생각을 고쳤다. 왕자는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하고서 제게 엉겨 붙는 사내를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어린 남편이 이것저것 해 달라고 하면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가 해 달라는 것을 모두 해주었다. 표정만 보면 절벽에 피어난 꽃 한 송이라도 당장에 따다 바칠 기세였다.
아닌 게 아니라 연우는 닷새를 꼬박 달려 저를 찾아온 태자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원래도 좋기는 하였으나 이렇게까지 감정이 고조된 적은 없었는데. 그날의 사냥을 언급하며 앞으로 조심하겠다는 말 정도는 하려 하였으나 막상 얼굴을 보니 사랑을 고백하기에도 바빠 그 말을 할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아니하였다.
“오는 길에 춥지는 않으셨습니까? 태영국에서 예까지 오시며 눈은 내리지 않았지요? 산세가 험하였을 터인데.”
“부인 생각만 하느라 날씨까지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으응- 소첩을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아름답습니다, 부인. 그대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정말이지 이제 내게 그대가 없으면 살 이유 따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마십시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그대 없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었으니.
허리를 끌어안은 채 어깨에 고개를 묻는 처연함이라니. 태자가 제게 목을 매는 것을 보며 연우는 저 역시 그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신이한 일이었다. 이리 매일을 사랑하여도 더 사랑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
살이 내려 선이 뚜렷해진 얼굴 빼곡히 입을 맞추며 연우는 조곤조곤 말하였다.
“다시 떠날 일은 없사옵니다. 소첩 언제까지나 저하의 곁을 지키며 더는 슬피 우는 일 없게 할 것이어요.”
다정하고도 분명한 말씨에 태자는 연우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불안함 같은 것이 언제 저를 괴롭게 하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깨끗이 잊힐 정도로.
***
꼬박 하루를 연우의 궁에서 머문 제현은 다음 날 아침 은월국 왕실의 주인에게 인사를 할 채비를 하였다.
“부인-”
“예, 저하.”
“내 복식이 괜찮은지요. 처음 뵙는 것이니만큼 잘 차려입고 가고 싶습니다.”
부인께서 내게 청색이 잘 어울린다 하여 그리 입어 보았는데. 칭찬을 받고 싶어 아내의 눈높이에 맞추어 무릎을 굽힌 제현의 머리 위로 쫑긋 귀가 선 듯한 착각에 연우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안 어울리는 옷이 있겠습니까. 소첩의 눈에는 무엇을 입어도 멋지기만 하니 조언을 드릴 수 없사옵니다.”
“그래도… 하면 부, 부인의 옷을 내가 골라 드리리다. 나와 비슷하게 입고 가면 더 어여쁘겠지요.”
잠시라도 어딘가 떨어지면 죽기라도 하는 듯 제현은 연우를 꼭 안아주고서 참나무로 만든 보석함을 열었다. 궁녀들이 하얀 비단에 하나씩 장신구들을 올려 가며 보일 때마다 제현은 태자비의 낯을 살피었다.
태영국에서 연우는 태자비였으나, 은월국에서는 여전히 왕자의 신분이 더 익숙하였다. 게다가 은월국으로 오게 된 것은 부상을 입어 급작스레 온 것이기에 태자비의 신분에 맞는 의복과 장신구들이 마땅히 없었다. 하여 궁녀들이 보여주는 것들은 전부 수수하고 사내다운 맛이 살아 있는 것들뿐이었다.
“소첩은 이것. 저하와 같은 의복이나 빛깔이 조금 더 옅어 마음에 듭니다. 저하께서는 보시기에 어떠십니까?”
“은월국에서 있을 때의 복식이라면 나는 어느 것이라도 좋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의복을 입은 그대를 보고 싶으니.”
“소첩도 저하께옵서 은월국의 복식이 퍽 잘 어울리시니 자주 입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랍니다.”
백옥으로 된 팔찌를 하나씩 나누어 차며 연우는 해사하게 웃었다.
“햇빛이나 달빛을 받으면 더욱 어여쁘답니다.”
“지, 지금도 어여쁩니다. 충분히.”
“아이참.”
평소에는 무슨 말이든 잘 알아들으시면서 답답하게 구시는군. 속엣말을 밖으로 뱉지 아니하고 연우는 그가 듣기에 좋은 말을 속살거려 주었다. 온 마음이 사랑으로 넘실거려 주체할 수 없었다.
“달빛을 받으며 놀자는 소리였습니다, 저하. 오늘 밤 소첩과 같이.”
“아, 그, 그런…! 당연하지요! 얼마든지 놀 수 있습니다!”
내 체력이 좋은 것은 부인도 아시지 않습니까?! 허리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제현 역시 연우와 마찬가지로 눈을 곱게 접어 가며 웃었다. 궁인들은 마주 보고 웃는 태자 내외의 얼굴이 사뭇 닮았다고 생각하며 살그머니 궁 밖으로 물러나 주었다. 주상저하께 인사를 드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하고자.
환복을 마친 후에 왕과 왕비가 있는 법궁으로 향하려 하였으나 국왕 내외는 그리하지 않았다. 속국은 아니었으나, 은월국은 태영국보다 규모가 현저히 작은 나라였다. 태영국의 오십 개 부락 중 다섯 개 정도를 합한 크기의 나라였으니 제현이 사위여도 왕이 쉬이 하대할 수 입장은 아니었다.
하여 생각해낸 묘안이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눈이 나린 풍광을 지척에서 느낄 수 있는 보율궁이었다. 주로 공주와 왕자가 아명을 쓸 정도로 어릴 때 그 궁에서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낼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였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은월국의 한가운데 있는 보율궁은 유난히 반짝이는 공간이었다.
“가까이 오세요, 부인.”
“보는 눈이 많사옵니다. 저하께 더 바투 붙으면 안 좋은 말이 돌까 두렵사옵니다.”
“하면 손이라도…….”
보율궁으로 가는 내내 태자는 손을 잡아 달라, 허리를 안아 달라, 심지어는 입을 맞춰 달라며 칭얼거렸다. 익숙하고 다정한 손길을 한 번 맛보니 감정을 막고 있던 둑이 터진 듯 흘러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모저모 염려되는 것이 적지 않았으나, 제게 살그머니 뻗어 오는 손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연우는 태자의 검지와 중지를 꼭 쥐고서 걸었다. 잡아주니 좋은지 빙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흔들하는 것이 사람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어린것은 귀엽고, 태자가 아무리 나이를 먹는다 한들 언제나 나보다는 세 해 덜 먹은 채이니 평생을 이리 귀여워 보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연우도 나긋이 손을 마주 흔들었다. 겨울바람이 맞잡은 손 사이로 들어오지 않아 온기는 가시지 않았다.
한편 보율궁에는 국왕 내외를 비롯하여 공주인 라연과 연우의 형인 세자 정우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정우만 참석하여 나랏일까지 조금 이야기를 나누려 하였으나 라연이 분기탱천하여 그럴 수 없었다. 정우의 부인인 세자비가 라연을 살살 달래도 보았으나 라연은 성난 들소처럼 보율궁에 들어섰다.
“예가 어디라고 끼긴 끼느냐? 정신머리가 없어도 한참 없지.”
고명딸이 귀하여 싫은 소리라곤 하지 않는 국왕 내외를 대신하여 오빠인 정우가 한소리를 하자 라연은 고개만 갸웃거리며 약을 올렸다.
“제가 아니었으면 형부가 먼 은월국까지 오셨겠습니까? 다 소자의 깊은 뜻이 이리 결실을 맺은 거지요. 아무렴!”
“……그놈의 소자 소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붙일 모양이지?”
“소자도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의 자식이니 당연하지요.”
사과와 배를 절여 만든 청을 푼 차를 홀짝이며 라연은 곰살맞게 웃어 보였다.
“맛있어! 어마마마, 드셔 보셔요. 참말 달고 맛나답니다!”
제 오라비에게는 흥흥거리며 밉게 굴던 라연은 어미와 아비에겐 입 안의 사탕처럼 굴었다. 그를 보는 정우는 속이 터졌으나 금일은 날이 날인 만큼 참자고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사내이나 월앙인으로 발현하여 마음고생이 누구보다도 심하였던 연우였다.
다시 볼 일이 있을까요, 퉁퉁 부은 눈으로 말이 아닌 가마에 오르며 하던 말이 이따금 정우의 귓가에 맴돌기도 하였다.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제 부인의 말에도 그는 연우의 정인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혹 연우에게 조금이라도 소홀하다면 보내지 않을 심산이기도 했다. 월앙인이라고는 하나 여인네와 연을 맺고 사는 사내도 적지 않으니. 은월국에서는 재가(다시 혼인함)가 큰 흉이 아니었다. 태영국에서는 평생 하나의 짝만 보고 사는 것이 태반이라 하나 그는 태영국의 이야기였다.
“태영국에서 오신 태자 저하와 태자비마마께서 보율궁에 곧 도착한다 하옵나이다.”
연우가 은월국의 왕자로 남을지, 태영국의 태자비로 남을지는 한 번 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다 생각하던 정우였다.
“부, 부인!”
“…….”
하나 허둥대며 연우의 뒤만 졸졸 쫓는 모습에 정우는 슬며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태자가 찾아오기 전까지, 연우가 궁 밖을 나오지 않고 귀여운 제 사내를 보고 싶다며 운다고 듣기는 들었다. 그때만 하여도 귀엽다는 말은 그냥 하는 소리인 줄로만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자 저하 내외 납십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천세 천세 천천세!”
“부인, 같이 들어가자고 하였는데!”
건장한 사내는 이미 바투 붙어 걷고 있는 제 부인에게 손을 대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며 걸음을 옮겼다. 태자비를 보는 눈에 단물이 그득 담겨 있는 것이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하나 연우의 눈 또한 그와 같은 빛을 띠고 있어 정우는 그만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었다.
“은월국의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리고 인사가 늦어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서신까지 보내주셔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요? 소인이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하였지요, 태자 저하?”
“예, 공주마마 덕분에 이리 나의 비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아니 기쁠 리가.”
은월국에 당도한 지 사흘이 지났으나 왕실 식구들과 인사를 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제현은 말을 낮춰야 함에도 불구하고 깍듯이 아랫사람이 하듯 예를 지켰다. 나랏일에 대하여 논의를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부마의 역할을 하는 편이 조금 더 낫겠지 싶었던 것이고. 후에 황위에 오르게 되면 하기 싫어도 하대를 해야 했으니 제현은 당장 윗사람이 하듯 그의 장인 장모를 대하지 않았다.
특히 공주에게는 그저 오냐오냐하며 기분을 풀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소인이 검을 아주 잘 다룬답니다, 저하. 나중에 대련을 신청하면 받아주실 것입니까?”
당돌한 공주의 말에 국왕 내외와 정우는 사색이 되었으나 제현은 살랑살랑 미소 지으며 제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할 뿐이었다.
“나의 부인부터 이기고 오십시오. 은월국의 둘째 왕자님을 상대할 수 있다면, 그때 진검을 빼 들겠습니다.”
“저하-”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어, 어찌?”
연우는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태자와 반드시 무예로 우열을 가릴 것이라고 방방대는 공주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제 부모와 손위 형제는 저보다도 더 당황하여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하니 연우는 조금 난감한 기분에 빠졌다. 그래서일까. 열까지 오르는 느낌에 그는 담비 털로 만들어진 담요를 꼭 쥐고서 얼굴을 붉혔다.
그런 연우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제현이었다. 열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손등으로 목 뒤며 볼을 짚어 보니 막 눈을 떴을 때보다 체온이 조금 높았다.
“저하, 애써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오나 비의 몸이 좋지 않아 이만 자리를 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로 법궁으로 찾아가 뵈어도 괜찮겠습니까?”
“태자 저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하십시오. 비 마마께서는…….”
“태자비는 제가 데리고 궁에 가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다정히 묻는 음성은 여타 왕실의 식구들을 대할 때와 전혀 달랐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몸 상태가 심상찮아 태자에게 반쯤 안겨서 보율궁을 빠져나갔다.
“허 참! 내 무예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언제는 보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 철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느냐?”
어여쁘게 틀어 올린 라연의 머리를 콕 찍으며 놀리는 정우에 공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였다.
“그야 보기 전의 이야기지요. 세자 저하께옵서는 대인배가 되기는 그르셨군요? 일국의 공주인 소인보다도 유도리가 없으셔서야, 원.”
“…그래. 공주마마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옳사옵니다.”
제가 졌다며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리는 정우에 국왕 내외는 가벼이 웃으며 햇살을 만끽하였다. 모든 게 잘 될 것 같은 오후였다. 드물게 자식 걱정도 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편하였다. 사내가 월앙인으로 발현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부부는 같은 생각을 하며 조용히 아들 부부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
제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합궁이 어렵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처소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연우의 열은 점점 높아만 갔다. 연우 자신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희락기가 오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어떠했더라, 부지불식간에 열이 올라 쓰러져서 며칠을 앓았던 기억밖에 없는데. 하나 지금은 한 발짝 뗄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몸이 무거워지는 듯하였다. 그렇다고 부상을 입은 복부가 아픈 것도 아니어서 연우는 이를 다행이라 하여야 할지, 큰일이 났다 하여야 할지 애매하다 생각하였다.
다만 제현에게는 연우의 몸에 생긴 변화라면 뭐든 큰일이었기에 종래에는 연우의 발이 뜰 정도로 들려서 처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태자가 온갖 유난을 떠는 것이 연우의 눈엔 밉지 않았으나 궁의 법도에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연우의 상태는 좋지 아니하였다.
“덥습니다… 덥고, 오한이 일고…….”
“사, 상처는? 아프지 않습니까? 부인, 어찌 이리 몸이 쇠하였단 말입니까…….”
더운데 동시에 속이 싸늘해졌다가 절절 끓기를 반복하였다. 얼핏 희락기와 비슷하였으나 그 시기에 겪는 찌릿거리는 통증이 없었다. 다만 허리가 무지근하게 울리며 둔통이 연우를 눌러댔다.
본디 의술로 이름을 알린 은월국의 어의는 연우의 낯빛을 보자마자 대충 고열의 이유에 대해 알아차린 듯하였다. 하나 쉬이 진단할 수 없기에 맥도 짚어 보고, 이모저모를 묻기도 하였다. 진단은 같았다. 하나 연우의 곁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태자에게 이 말을 어찌한단 말인가. 처음 생각했던 것이 맞아 들어감에 어의는 영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태자 저하께는 외람된 말씀이오나, 연우 왕자님의 열은 양인과의 접촉이 잦아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무슨, 갑자기, 아니, 부인과 내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벌써 한 해가 다 되어 가네. 한데 돌연 양인과…….”
양인과 지내면 안 된다는 말인가? 월앙인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나를 위한 월앙인이기에 머나먼 태영국까지 와 태자비가 되었는데. 태자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싫었다. 제가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것인가. 한 달이었다. 달이 두 번 차고 기울 동안 정을 통하는 것은 고사하고 보지도 못하였는데 이제는 양인과 지낼 수 없다고?
허리를 안은 손이 떨려왔다. 본디 인간이 인간을 가질 수 있다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연우는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저는 연우의 것이었고, 연우는 제 것이라는 걸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부부의 연을 끊어내라는 말만 아니 나오면 된다, 그거면 된다.
두려움에 품에 있는 연우는 바로 보지 못하고 어의만 보고 있는 제현에게 그나마 다행인 말이 들려왔다.
“왕자님께서 사내이나 잉태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지 않았으니, 몸이 이전과 같을 수 없어 그런 것이옵니다. 크게 염려하실 일은 아니옵니다. 하나 월앙인 중에서도 극히 드문 식의 발현을 거쳐 월영인으로 거듭나는 자가 있다 전해지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런 일도 있단 말인가?”
“알고 있네.”
“응? 저하,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부인에 대한 것은 다, 다 알고 싶어 서고를 뒤졌습니다.”
달그림자로 불리는 월앙인이 아니라 달을 비추는 사람이라는 뜻을 안고 있는 게 월영인이었다. 월앙인 중에서도 열성과 우성을 나눌 수 있는데, 그중 우성인 사람들을 지칭하여 월영인이라 하였다. 월영인은 월앙인보다 면역력이나 신체 능력의 정도가 훨씬 웃도는 자들로 양인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자들이었다. 월앙인의 천에 하나가 월영인으로 재발현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연우는 제게 그런 복이 온 것에 얼떨떨하여 태자의 옆으로 조금 더 바투 앉았다.
“추워 그런 게지요? 내 안아 드리리다. 추우면 안 돼, 응, 안 됩니다.”
아플 것이 걱정되어 그런지, 그게 아니면 다시 밤을 홀로 보낼 것이 두려워 그런지 사정없이 말을 저는 태자에 연우는 몰래 미소 지었다. 월앙인으로 발현하였을 때 제 몸이 싫어 모든 것을 뒤로하고 태영국으로 떠났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연우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고, 저 자신이 혐오스럽기만 하였다. 한데 우리 서방님은 내 몸을 나보다도 더 잘 안다 이 말인가?
연우는 열이 올라 발긋해진 얼굴로 제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의만 없다면 기특하다고 안고서 놀고만 싶었다. 저는 여인네가 아니기에 치마를 착용하지는 않으나, 시쳇말로 치마폭에 들어오게 하여 제 몸에만 푹 빠져 살게 만들고 싶었다.
무름해진 입매와 눈매를 하고서 꼬물꼬물 제 서방의 품으로 들어가는 연우에 어의는 얼른 말을 이었다.
“이에 서서히 약재를 끊고,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월앙인이 월영인으로 발현한다는 것은 서책에서나 보았지 소인 또한 실제로 겪은 적이 없어 발현 시기와 그 증상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만 아옵니다.”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 풀어내듯 쏟아지는 말에 태자비는 입만 벌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태자가 제 건강에 저보다도 더 신경을 썼다는 말에 봄날 어미와 나들이를 나온 병아리의 기분이어서 어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얼른 그가 나가기만을 바랐지.
“약 기운을 빌어 왕자님께서는 태자 저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 약을 줄이게 된다면 지금처럼 매일같이 합궁하지는 못하십니다.”
하나 어의가 하는 말은 썩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태자와 태자비는 낯빛이 금세 거무죽죽하게 죽어 나이가 지긋한 어의에게 되물었다.
“하면 합궁은…….”
“보름 뒤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보름이라.”
조금 섭섭하긴 하였으나 연우의 몸이 우선이었다. 언제나 아이 생각에 몰래 속을 썩던 것을 모르지도 않아 제현은 그에게 저마저 부담을 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금세 쾌차하실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왕자님의 몸을 돌보겠나이다. 믿어주십시오, 태자 저하, 왕자님.”
“응, 내 못 믿는 것이 아니네. 나가 보게나.”
“예, 왕자님.”
월앙인만 30년을 봐 온 명의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연우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태자와 밤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저 역시 서운하고 섭섭하여 먼저 태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였다.
“예전에, 저하께옵서 발현열을 앓기 전의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소첩은 좋습니다.”
“…….”
“그때는 손만 잡아도 온몸의 피톨이 바짝 서서 그저 부끄럽기만 하였지요.”
신혼의 기분을 보름간 만끽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막 쪄낸 백설기처럼 하얗고 보슬보슬하게 웃는 연우를 어찌 이기겠는가. 제현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의 손을 꼭 쥐었다. 제가 암만 그와의 밤을 좋아할지언정 아픈 이에게까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부인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게 습관이 되었으나 이제는 제가 그의 어리광을 받아주고 싶었다.
“부인만 아프지 않으면, 더 바랄 것이 없지요.”
내 기분에 취해 그대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첫날밤의 일로 족하니.
어절 사이 간격을 두고 하는 말이 몸을 노곤하게 만들어 연우는 침상 위로 올라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저하도 이리 오셔요, 소첩과 낮잠이나 잡시다. 코끝까지 이불을 올리고서 손만 빼꼼 내밀어 흔드니 태자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꼬리를 치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잠만 청하는 것이 너, 너무도 오랜만입니다. 마치… 한 백 년 전쯤의 일로 느껴져서…….”
“이제 겨우 스무 해를 사셨으면서.”
“그래도… 내 마음이 그렇단 말입니다…….”
오늘은 서운한 날의 서막이니 조금 어리광을 부려도 되겠지. 제현은 그리 생각하며 연우의 팔을 베고 누웠다. 아내의 체향이 조금 더 짙어졌구나, 어렴풋이 코에 주름을 잡으며 그는 조용히 오수를 청하였다.
***
원래도 차에 관심이 많던 연우는 최근 활동량이 적어짐에 따라 정식으로 다도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다양한 다구에도 관심이 생겨 며칠 전에는 청자 다구와 백자 다구를 마련한 참이었다. 메마른 땅 위로 소복소복 쌓이는 눈과 연우의 다기는 퍽 잘 어울렸다. 향이 조금 날아가야 맛이 좋을 정도로 다디단 차가 좋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연우는 저를 모시고 있는 어린 궁녀들에게 먹고 나서 입 안이 온통 달콤해지는 차를 주었다. 여남은 살의 궁녀들은 그것을 곧잘 받아 마셨고, 저들끼리 속살거렸다. 서로 제가 다구를 닦겠다며.
최근 그는 밋밋한 배를 쓸며 혼잣말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월앙인에서 월영인으로 발현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일일까. 사실 이렇다 할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나 아이가 쉬이 들어설 수 있는 몸이 된다는 것과, 양인들과 다름없이 신체 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좋았다.
“입 안에 봄이 왔구나.”
바다 건너에서 온 자몽이라는 과일의 희고 얄포롬한 껍질을 벗겨내 주홍빛의 탱글탱글한 과육만을 써 만든 청을 잔뜩 잔에 담아내 향을 맡는 것은 아주아주 좋아하는 일이었다. 연우는 배시시 웃으며 둥글고 커다란 찻잔에 약초를 달여낸 물을 가득 따랐다. 청을 많이 넣어 하나도 쓰지 않아 연우는 그를 마시며 또 작게 웃었다.
약을 줄이자는 어의의 말에 그러마고 하고선 약재와 건과일을 함께 우려 차처럼 종종 마시곤 혼잣말을 할 때면 더없이 평화로운 기분에 빠졌다. 서책을 들춰 보고, 자세를 가다듬고서 차를 우려내고. 곁에 있지는 않으나 왕궁 어딘가에 있을 태자의 생각도 하면 차는 더욱 달아졌다.
오늘 찾아오시면 차를 한 잔 내어 드릴까? 제 입에 맛난 것은 꼭 같이 먹자고 하고 싶어 연우는 입맛을 다셨다. 저보다는 아니지만 태자 역시 단것을 즐겨 먹으니 과일 청이 아닌 편으로 썬 생과일을 띄우는 정도면 괜찮을 듯싶었다. 의자 위에 앉아 가벼이 발장난을 치던 연우는 차를 음미하며 나직이 웃었다. 실상 무엇을 준다 한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생글생글한 낯으로 먹을 것을 알기에.
한편 그러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본의 아니게 푹 쉬게 된 제현은 은월국의 국왕과 나랏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아졌다.
“태자비에게 저하께서 백성들을 다스리기를 아버지와 같이한다는 것을 종종 들었습니다.”
“태영국의 태자 저하께 과찬을 듣습니다. 제아무리 제가 성군이라 한들 이제 황위에 오르게 되실 태자 저하만 하오리까. 천하를 발아래 두실 분께 아들이 힘이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태자비야……. 태자비는 제게 아까운 사람이지요.”
날 때부터 성군인 자가 어디 있느냐며, 풀 죽어 있는 것을 용케 눈치채고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 게 태자비였다. 제현은 그를 은애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를 존경했다. 배우자로서, 그리고 함께 나라를 책임질 동반자로서. 제대로 전한 적은 없으나 알고 있을 테지. 제 사랑을 모를 수가 있나.
사실 태자는 호칭을 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호칭이 아닌 연우의 호칭만을.
연우가 뒤늦게 월앙인으로 발현하며 마음속 한구석에 결핍이라든가,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를까. 이전에야 그것이 연우만의 생각이라 치부하였으나 마지막 사냥에서 있었던 일로 태자 역시 덜컥 겁이 났다. 조금 더 확고한 장치가 필요하다 여겨 그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곰곰 생각해낸 것이 호칭의 문제였다.
“황위에 오르게 된다면 가장 먼저 황후에게 붙는 호칭을 달리하라 명할 것입니다.”
“호칭이라 한다면 어떤……?”
“황후마마가 아닌 황후폐하를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황제와 같은 직위라는 것을 못 박아 둔다면 아무도 그를 쉬이여기지 않겠지요. 그의 다정함이 누군가의 마음을 앓게 하여도 다가가지 못할 것이고.”
일종의 울타리이며 성지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동시에 그가 태영국 황실의 주인임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태자비로 남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 그의 다정함에 취해 감히 욕심을 내는 자가 없어야 했다.
“그의 마음이 따사로워 조금 더 볕에 가까이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제가 모를 리 없지요. 충분히 이해하지만.”
“…….”
“안 되는 것은 아니 된다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도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많이 쓰지 않을 수 있게.”
배에 난 자상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왕은 태자의 날 선 말씨에 그저 긍정을 표하였다.
“좋지요, 그저 감사하지요……. 부족한 아이에게 폐하의 칭호까지 내려주신다는 말씀만으로도 감읍하옵니다.”
“부족한 건 부인이 아닌, 아…….”
“저하?”
재활을 한다고 듣기는 들었는데. 두툼한 여우 털목도리와 담비 털 망토, 귀를 덮는 모자를 쓴 연우가 종종걸음을 걷다 제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을 보고 제현의 얼굴 근육이 보기 좋게 무너졌다. 아, 귀여워라. 바람이 차 코끝이며 볼이 빨긋하게 물든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같이 손을 흔들어 주자 까르르 웃느라 접힌 눈꼬리에 입술을 묻고만 싶었다. 달큰할 테지. 월영인이 되어 가는 나의 정인은.
입을 헤벌리고선 손을 흔드느라 정신이 없는 태자를 보던 연우의 아비는 빙긋이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곧 폐하 소리를 들을 것을 알까, 아들 생각을 하던 아비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금실만은 좋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저 차를 마셨다. 향이 달고 음미할수록 미소가 떠오를 정도로 훌륭한 차였다.
“곧 보름인데, 보름이 지난 후에 태영국으로 향하실 테지요?”
“예? 예, 저하. 더 늦어지면 태영국에도, 은월국에도 곤란히 여길 듯하여.”
“영영 계셔도 좋으나 대국을 이끌 분이신 것을요. 가실 때 염려하실 필요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들을 잘 부탁드린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지. 왕은 그리 생각하며 나직이 미소 지었다. 제현은 그 미소가 연우와 닮아 저도 연우를 대할 때와 비슷하게 미소를 지었다.
***
눈이 펄펄 나리나 따스한 궁 안에서 평화로운 고요함이 감돌았다. 어느 것도 평화를 깨뜨릴 수 없었다.
목화솜을 두툼히 누빈 겉옷을 입은 태자는 면경에 비치는 제 모습이 영 어색하였다. 흰색보다는 먹빛이 도는 것이 좋다 하자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온 듯 검은색의 옷은 은사로 수까지 정성스레 놓아 빛을 받을 때마다 별처럼 빛을 냈다. 그러나 겉옷이라고 하기에는 한 치의 틈도 없이 꼭 맞는 모습에 입은 사람도, 옷을 지은 사람들도 모두 미묘한 표정이었다.
“송구하옵나이다, 저하. 치수를 잰다고 쟀는데도…….”
“…아닐세. 바람이 들어올 틈 없으니 춥지 않아 좋군그래.”
“다시, 다시 지어 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으니 연우 왕자님께 안내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내게 딱 맞으니 부인 주면 넉넉히 잘 맞겠어. 제현은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첫날 외운 연우의 궁으로 가는 길은 아랫것들의 안내 없이도 능히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원래도 길눈이 밝은 제현에게 손바닥만 한 은월국 왕궁―태영국 황궁에 비해―의 지리는 익히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방한화를 신은 발이 눈을 쓸어낸 길을 따라 재게 걸음을 옮겼다. 얼굴만 보아야지, 제현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막상 연우를 보면 손부터 뻗게 될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의 몸을 생각하면 안 되는 일임은 알지만.
“태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저하.”
“벌써?”
아직 치장을 하나도 하지 못하였는데. 분주히 방을 돌아다니며 무어라도 찍어 발라야 하나 종종거리던 연우는 곧 단단한 상박에 갇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안녕, 부인.”
“저하…….”
가벼운 포옹은 괜찮지요? 그리 묻는 듯한 눈에 연우는 가벼이 그를 마주 안았다. 안녕, 잠시 떨어졌던 시간도 평안하였기를 바라는 인사를 속으로 되뇌며.
뒤에서 연우를 안고 뒤뚱거리며 걸음을 옮긴 태자는 태자비의 열을 재기 위해 자리한 나인을 보고서 옅게나마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뿐이었다. 아직 미열도 없으니 조금쯤 더 안고 있어도 괜찮다 판단한 태자는 그를 안은 채 침상에 앉았다. 무릎 위에 태자비를 앉히고선 납작한 배를 매만지자 바르작거리는 몸도 애틋하기만 하였다.
“이제 곧 태영국으로 가는데… 서,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부인?”
“그곳이 제집인 것을요. 어서 가고 싶습니다.”
“……나는, 돌아가면 그를 처분할 겁니다. 그 전에 부인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아…… 음, 어찌해야 할지…….”
‘그’라 함은 서주를 말하는 것이렷다. 연우는 등에 얼굴을 기댄 채 묻는 말소리에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입을 열었다.
“활을 사랑하였으나 소첩 손으로 제 몸을 해하였으니, 이제 활을 어찌 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활촉이 두렵고… 보태어 서주에 대한 분노도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찢어 죽이고 싶으나…….”
“응, 부인.”
“하나…… 마음을 곱게 써야 아이가 들어설 것 같기도 하고, 그도 희락기에 당도한 몸은 처음 봐 잠시…….”
“나는 그를 벌할 것입니다. 두 번 다시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하여 억지로 취하는 일이 궁 내에서 있어선 안 된다 생각하는데.”
이미 답을 정해 놓고서 무에 물어봤던 것인지. 날을 세우고서 하는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어 나인들과 내관들이 자리에 붙박인 듯 서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자, 연우는 그의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도로 판판히 만들었다.
“소첩이 언제 벌을 주지 말자 하였습니까? 소첩이 걱정하는 것은 그의 안위가 아니라 태영국 황실입니다.”
“그의 아비 된 자를 말하시는 게지요.”
“오래도록 황실에 충성을 다한 집안 아닙니까. 소첩도 그것을 믿어 서주에게 각별히 대했던 것이고……. 여전히 그날의 일은 용서할 수 없으나 저하와 태영국을 향한 그의 충심까지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첩의 눈에만 안 띄게 해주십시오. 머지않아 복중 태아가 찾아올 터인데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습니다.
몸을 둥글게 말고서 가슴팍에 폭하니 기대 오는 연우에 제현은 잠시 서주의 일은 잊고서 그를 안았다. 태자비의 앞에서 지나치게 무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알았으나 은애하는 이에게 혹독한 모습 따위 한 톨이라도 비치고 싶지 않은 것이 태자의 마음이었다.
벌써부터 황자의 걱정을 하는 연우가 기특해 태자는 무릎 위의 그를 둥개둥개 얼러주며 슬쩍 입술을 마주 대길 반복했다.
“버, 벌써부터 황자 걱정을?”
“응… 어서 저하를 닮아 귀여운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내, 내게 귀여운 아이는 우리 부인뿐인데.”
“저하도 참- 으응-”
아프고 나더니 어리광이 는 연우가 곁을 지키고 있는 나인도 잊고서 언제나의 밤과 같이 태자의 손을 끌어 제 하문으로 가져갔다. 이만큼 젖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원한다는 것을 원색적으로 보여주고, 그 또한 저를 원한다면 속히 방사를 하고 싶었다.
축축하게 젖은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대어주니 제현으로서도 거리낄 것이 없기에 습관처럼 음습하게 웃으며 그의 비문을 들쑤셨다. 손가락 하나를 넣었으나 앓는 소리는 즉각적이었고, 이에 자극에 약한 몸이라며 놀리듯 두 개째를 넣자 연우의 허벅다리가 벌벌 떨리기 시작하였다.
“읏아, 아응, 저하…….”
“다른 걸 넣어줘야 좋아하시는데… 그렇지요?”
내 얼른, 얼른 넣어 드리리다. 기세 좋게 두루마기를 벗어 던지고 침상에 연우를 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이 났다.
작고 하얀 손이 가만히 연우의 목으로 갔다. 나인은 이리저리 그를 만져 보고는 이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왕자 저하께 열이 나오니 금일은 합방이 곤란하다 여겨집니다.”
“…….”
“…….”
연우와 제현은 아무 말도 않고서 입만 삐죽 내밀었으나 나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되는 것을 기라고 한다면 무슨 큰일이 날지 모를 일이었다.
“한 번도 안 되는가.”
“아니 되옵니다.”
“……심하게 하지 않을 것인데도?”
“희락기가 가까운 몸이십니다. 열락에 젖어 흥에 취하신다면 소인이 막을 방도도 없습니다. 참아주십시오, 저하.”
“……알겠네.”
조용히 저를 올려다보는 연우의 곁으로 누운 제현이 그를 꾹 안고서 잠을 청했다. 빌어먹을 발현. 우성 발현이고 자시고 간에 연우와 정을 통할 수 없는 것이 사무치게 괴로웠다.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여 부루퉁해진 얼굴의 태자에게 다가간 연우는 그의 콧잔등을 앙 깨물고서 눈을 마주쳤다.
“나중에, 많이많이 하면 되지요. 소첩 얼른 건강해져서 저하와 밤의 기쁨을 나눌 것입니다.”
“내, 내 생각은 마시고 부인의 안위만 신경 쓰세요. 나는 정말 괜찮으니…….”
“정말?”
“……아니…….”
아냐,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아.
우는소리를 하며 입매를 밉게 만드는 정인에 연우는 배시시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곧 당도할 희락기가 제 것인지, 태자의 것인지도 모르면서 웃는 낯은 맑고 깨끗하였다.
태자와 태자비는 방사를 못 하니 아쉬운 대로 손장난을 치기 바빴다. 낮 동안은 왕과 함께 앞으로의 외교나 국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기가 심한 라연과 어울리느라 바빴으나 밤은 둘만의 시간이었다.
바로 이틀 뒤면 태영국으로 돌아갈 날이었다. 갈 채비까지 모두 마치고서 둘은 서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저들만의 비밀을 만들기에 바빴다.
“소첩이 검지로 손바닥을 폭폭 누르면 무슨 뜻이라 하였지요?”
“나와 꽃잠 자고 싶다는 뜻.”
“저하의 엄지에 새끼손가락을 대는 것은?”
“새가 지나듯 입을 맞춰 달라는 뜻.”
“옳지.”
생글생글 웃는 낯은 여느 때보다도 환하였다. 아이를 갖게 되면 칼과 가위는 잠시 멀리하는 것이 좋다며 미리 단발을 한 덕에 연우의 턱 끝에서 고동빛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길러서 묶는 것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태자는 내심 기대하였으나 앞머리를 눈썹 끝에 맞춰 가벼이 내고 오른편만 귀 뒤로 머리를 꽂아 넘긴 연우의 모습도 깜찍하여 군소릴 하진 않았다.
태자와 손으로 둘만 아는 암호를 만드는 게 퍽 간질거려 연우는 연신 웃으며 저 혼자 손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태자의 손을 잡길 반복하였다. 이것도 알아맞히려나? 태자에게 가타부타 말없이 새끼손가락을 서로 얽자 태자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그를 살며시 안아 보였다.
“이, 이것이 맞습니까?”
“응… 맞습니다, 저하.”
묵직한 향에 절로 눈이 감겼다. 태자는 따사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말로는 처음에 나쁘게 굴었던 것이 미안하기에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도 부족하다고 했지만 그야 어려서 그랬던 것인데. 처음 보는 이와 혼인하는 것이 싫어 그런 것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연우는 그의 품을 조금 더 파고들며 손바닥을 꼭꼭 눌렀다. 꽃잠을 자고 싶다는 뜻임을 알아 태자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으나 금일도 어려울 터였다.
손장난만 치며 다른 엄한 짓은 하지 않음에 연우의 궁을 지키던 궁인들은 둘 사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하였다. 항상 눈만 마주쳤다 하면 몸을 섞기 바쁘던 이들이었으나 조곤조곤 말을 하는 것도 그림이 썩 괜찮았다.
“태영국으로 돌아가면, 부인.”
“예, 저하.”
“나쁜 것 하나도 안 보게끔, 내 열심히 그대를 보필할 텝니다.”
“지금도 잘하고 계시면서 괜히 그러십니다. 소첩에게 한 번도 소홀한 적 없으셨으면서.”
“그, 그래도.”
좋은 것만 보여주고, 좋은 것만 입혀주고, 뭐든 좋은 것만 해 드릴 텝니다. 누가 봐도 그대 사랑받고 있음이 태가 나도록.
귀한 것을 보듯 온기가 가득한 눈빛에 연우는 곱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벅차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였으나 매우 행복하였다. 월앙인이 된 후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했던 것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행복하였다. 태영국의 태자비로 책봉이 된 후에 좋고 쉬운 일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나 그의 곁이라 다 견딜 수 있었다.
“소첩도… 온 마음을 다하여 저하를 사랑합니다. 은애하는 이의 가는 길을 비출 수 있는 밝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느슨히 안겨 소곤소곤 건네는 말에 제현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충분히 눈부신데…….”
달큰한 내음이 나는 태자비를 한 품에 끌어안고서 제현은 우는소리를 하였다. 이리 좋을 수가 있나.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은애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가슴을 맞대고서 안는 것만으로도 깊은 곳까지 충족되는 느낌에 제현과 연우 둘 다 뿌듯이 미소를 지었다.
은애한다는 말을 요리조리 바꿔 가며 하던 태자가 태영국으로 가면 거하게 회포를 풀자는 말을 할 때는 연우의 허리께를 은근히 쓸어내렸다. 그에 연우의 낯이 탈 듯이 붉어졌으나 이내 웃는 것에 제현 역시 가벼이 입을 맞추며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어서 자고, 내일 또 만납시다, 내 사랑.”
“소첩이 팔베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누우셔요.”
“응!”
거절도 않고 답삭 연우의 팔뚝에 머리를 누인 태자는 헤헤 웃으며 연우의 가슴팍에 코를 박았다. 아, 좋은 향. 마음이 동하고, 몸이 동하는 향에 괜스레 발을 동동 구르던 태자를 토닥이며 연우가 먼저 잠에 들었다. 팔베개를 한 탓에 제 정강이 중간쯤에 발끝이 닿는 연우가 귀여워 태자는 조금 더 그를 귀여워하다, 이내 함께 잠이 들었다.
“더워…….”
얼마쯤 잤을까. 무더위에 복숭아며 사과 따위를 열심히 먹던 꿈을 꾼 태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잠에서 깼다. 꿈이 하도 생생하여 여즉 입 안에 단맛이 남아 있는 듯하여 태자는 괜히 입맛을 다셨다. 무언가 시원한 것을 먹고 싶었다. 그래야…….
“오늘따라 왜 이런담. 곧 길을 떠날 터인데.”
흉흉히 일어선 것이 가라앉을 것 같으니.
아닌 게 아니라 꿈에서 내내 과일만 먹었는데 일어나 보니 기둥이 벌떡 서고 선단이 부풀 정도로 크게 흥분한 남성이 보였다. 거 참 이상하네. 태자는 발기한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눈을 뜨자 보이는 연우의 얼굴에 마음이 동하여 아랫도리로 손을 가져갔다. 과일이고 뭐고 간에 한창때의 태자는 부인의 손만 봐도 음심이 불같아지곤 하였기에.
“음……. 부인…….”
혼자서 욕구를 해소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태자는 버겁게 잡히는 제 것을 슬슬 위아래로 문지르며 낮게 신음하였다. 열여덟이었나, 그쯤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눈은 곤히 잠든 태자비를 향하였다.
“아…….”
내려다본 얼굴이 말갛고 순하여 외려 가슴이 더욱 쿵덕거리기 시작했다. 첫날밤, 얄포롬한 면사포를 걷어냈을 때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올려다보며 오지 않을까 걱정했다던 연우가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의 부인은 아름다움이 좀 지나쳤지. 더듬더듬 기억을 뒤지다가 이내 또 하나가 생각이 났다. 발현열을 심하게 앓을 때 제 궁으로 달려온 연우를 서툴게 안았던 것이. 그때 그의 하문에 코를 박고서 질척이는 소리가 날 때까지 세 치 혀로 그를 탐하였던 것이 생생하였다. 부끄러워 허벅지를 애써 오므리던 모습이란.
입 안에 절로 침이 고일 만큼 속되고 삿된 상상만 하였으나 좀처럼 사정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빤하였다. 색사의 즐거움을 아는 몸이 고작 손 따위로 만족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양인의 기운을 다 받아낼 수 없을 게 분명한 연우를 깨울 수도 없는 일이고, 누군가를 불러 얼렁뚱땅 일을 치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아으… 조금만, 크흑…….”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기둥을 문지르고, 손바닥에 비비던 태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힘이 바짝 들어간 굵은 허벅지는 문득문득 떨리며 흥분이 고조됨을 알려주었다.
조금만 더 하면 열기를 풀 수 있겠다, 싶어 부인의 속에 들어가 추삽질을 하듯 허리를 슬슬 흔들 때였다.
“저… 하……?”
“아, 어, 부, 부인? 자, 자십시오, 주무세요.”
“응… 더워서…….”
한데 느슨히 앉은 자세를 한 제게 태자비가 고개를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닌가. 태자는 서둘러 이불로 아래를 가렸으나 연우는 칭얼거리며 그의 허벅지로 머리를 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열심히 흔들고 문대고 할 때는 영 반응이 없던 태자의 아랫도리가 픽, 하니 정액을 쏘아냈다.
“앗……?!”
“아, 윽! 아니, 이, 이게 왜 지금…!”
“무, 뭐지……?”
얼굴과 목, 가슴팍에 길게 튄 것에 연우는 깜짝 놀라 손으로 그것을 훔쳐내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끄무레하고 밤꽃 향이 짙은 것이…….
“어, 저, 저하…….”
“죄송, 죄송합니다, 부인!”
둥그렇게 눈을 뜨고서 이게 무어냐 묻는 듯한 얼굴에 한 번 더 정을 토하고서야 태자는 사정을 멈추었다. 하나 이미 연우의 얼굴은 온통 정액투성이가 되어 버린 후였다.
“아, 어떡, 부인, 잠시만, 응?”
“괜찮습니다…….”
당황하여 허둥지둥 손으로, 이불로 연우의 얼굴을 닦아주던 태자는 막 잠에서 깨어 얼떨떨한 채 손길을 받는 아내의 모습에 또 한 번 아래를 세웠으나 이는 도저히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밤일을 잘하는 것이 지아비의 덕목 중 하나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지나쳤다. 아픈 부인에게 욕정 하여 몇 번이나 세우다니!
“하, 하면 나는 잠시 목욕간에…….”
그러나 하얀 손이 엉거주춤 일어나 목욕간으로 향하려던 태자를 붙잡았다. 머리칼에 정액이 엉겨 붙은 채 깜박깜박 눈꺼풀을 내렸다 들어 올리며 연우가 입을 열었다.
“소첩, 안에 싸주셔요.”
“아…….”
“다 받아낼 수 있습니다.”
저하를 원합니다, 이리 오세요.
조곤조곤한 말씨에 태자는 가던 걸음을 돌려 다시 침상으로 향하였다. 혹 열이 나지 않나 달달 떨리는 손으로나마 연우의 이마를 짚어 보자 제 체온과 별다른 바가 없었다.
“괜찮겠습니까?”
“예, 들어오셔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태자는 아까보다도 불뚝 솟아오른 것을 넣기 전에 맛을 보겠다며 연우의 발목부터 차근차근 입 안에 넣었다.
“응, 흣…….”
연우의 열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제 희락기가 도래하여서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서 태자는 천천히 그의 비문을 입으로 열었다. 길게 앓는 소리가 침전을 가득 메웠다.
***
못 참겠으면 이불을 무세요.
단호한 말씨에 얼른 이불을 물었다. 하얀 침의를 아래서부터 걷어내고서 아래에 고개를 파묻은 그 때문에 내 밑은 그의 머리 모양대로 둥글게 부풀어 요상한 생김이 되었다.
“음, 응…….”
희락기가 처음 왔을 때 그가 어떠하였더라. 열이 올라 힘들어하면서도 내게 쉬이 손을 대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소년이 생생했다. 울상을 지으며 아프게 하기 싫다 하였던 말 또한. 하나 우리는 이제 몇 번이나 밤을 함께한 사이였고, 심지어는 하나의 밤을 여러 번으로 쪼개어 살을 섞어 대기까지 한 사이였다. 어엿한 성년이 된 그는 갈수록 유연해지는 내 몸을 마음껏 취하며 나를 향긋하게 만들었다. 월앙인이 되어 좋은 점은 그를 만났다는 것 하나였지만 그 하나가 내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하였다.
박자를 타듯 꿈틀대며 아래를 추접스레 빠는 소리에 눈물이 흘렀다. 순전히 좋아 그런 것이었다. 촘촘한 주름 새를 혀를 세워 가르고 가른 곳을 혓바닥으로 죽죽 훑는 느낌이 사람 머리를 텅 비게 만들었다.
“흑, 끅… 저하, 으, 앙!”
“쉬이- 부인, 조용히.”
하문을 사정없이 비벼 대는 혀는 겨우겨우 참을 수 있었으나 쪽쪽 빨고, 그도 모자라 음낭을 크게 베어 무는 것에는 두려워 이불을 뱉고 말았다. 아이처럼 떼를 쓰며 우는 것에도 그는 아직 아니라며 둔부를 토닥이기만 하였다. 아직도 아니면 대체 언제 넣어주신단 말인가. 조금 더 울면? 조금 더 얼마나? 그는 평소 내가 찢어질 듯 높은 교성을 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흉하게 일어난 것이 갈급할 때면 교태를 부려 그를 참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 얼른 넣고서 거칠게 허릿짓을 해주니.
하나 지금은 궁내 어린 나인들에게 들키지 않아야 했다. 태영국에서는 언제든 사람을 물리게 하고서 옷만 휘딱 까 놓고 아래를 접 붙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단정히 앉아 정무를 보다가도 내명부 일을 묻는 나를 엎어 놓고서 허리띠를 풀곤 하였다. 혈기왕성한 사내를 다 받아내는 것은 같은 사내인 내게도 힘든 일이라 여기긴 하였지만 이편이 더욱 괴로웠다. 나는 어서 그를 받고 싶었다.
쭙, 빠는 소리에 아래에서 주머니가 터지듯 애액이 흘렀다. 수치스러워 몸을 뒤채니 이제는 퉁퉁 부은 아래에 손가락을 살금살금 집어넣으며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좋습니까, 이리 살살 해주니?”
맨들맨들한 손톱으로 슬슬 안을 간질이는 느낌은 언제 겪어도 생경하였다. 좋아하시는구나, 이런 저급한 것을 좋아하셔. 놀리듯 하는 말에 웃음이 배어 있었다. 나보다 어린 주제에, 그리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의 아래에서 더욱 어리게 구니 할 말이 없었다.
빳빳하게 일어난 기둥을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고서는 희롱하듯 튕기는 손장난마저 아쉬웠다. 약재를 열심히 달여 먹으면 무얼 하나. 그의 손짓 한 번에 흐물거리는 몸인데. 이미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빨아 드리리까?”
“네, 네에, 저하……!”
음탕하긴. 그리 말하면서 그는 한입에 내 것을 물고 죽죽 빨았다. 위아래로 정신없이 오르내리는 고갯짓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가 까맣게 꺼지길 반복하였다. 억, 억, 숨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아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앓으니 구멍과 음낭 사이 맨질맨질한 살을 엄지로 살살 매만지는 다정함에 나는 다시 울고 말았다. 너무도 좋았다.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리고서 끙끙 앓는 것밖에 못 하면서도 몸 안에 따뜻한 물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저하, 흐… 입술, 저하, 나 입술…….”
“입술을 찾지 않아 서운하셨지요? 내 마음이 급하여… 미안합니다, 부인.”
성애를 즐기는 것에 언제나 졸졸 따라오는 것이 입맞춤이었다. 그러니 이는 그가 잘못하였지. 내 서운함도 몰라주고 아래만 쪽쪽 빨아 대다니.
서운한 것을 숨기지 않고 팔로 얼굴을 가리고서 우는데 몸이 번쩍 들렸다. 그는 밤이면 힘자랑을 하기 바빴다. 내가 딱 벌어진 단단한 어깨와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가슴팍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부터는 아예 웃통을 까고 있기가 다반사였다.
광대뼈에 닿는 입술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의 입술에서 내 향이 물씬 났다. 그게 부끄러우면서도 부부 사이에 이런 재미가 한가득이니 내심 뿌듯하여 나도 얼른 그의 볼에 입술을 묻었다. 온몸이 간질거렸다. 여기가 왕자 궁이 아닌 태자궁이었다면 부러 크게 웃으며 그에게 아양을 떨었을 터인데.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는 죄스러우나 나는 이제 그의 사람이었다. 어서 태영국으로 가고 싶었다.
“열, 안 나는데.”
“맞아, 소첩 이제 열 안 납니다.”
“하면 둘이 놀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또박또박 묻는 말씨가 애틋했다.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나를 앉힌 허벅지를 퉁기며 응? 응? 하며 묻는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놀면 되지. 밤새워 놀고, 부족하면 해가 뜬 후에도 놀면 되지. 복숭아씨가 걸린 듯 툭 불거진 목젖을 앙 물고서 입 안에서 살살 굴려주었다. 귓바퀴를 만지는 손가락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고서 찬찬히 옷가지를 벗겨내었다. 가슴팍에 도드라지게 자리한 유두와 유륜을 손톱 끝으로 긁자 푸르르 떨리는 근육에 단침이 꿀떡 넘어갔다. 무구한 눈으로 올려다본 그의 표정은 야차와도 같았고, 그게 조금 무서워 도톰한 아랫입술을 검지로 꾹 누르자 얼른 내 손가락을 제 입 안으로 데리고 가는 움직임은 창공의 매 만큼이나 빨랐다.
“부인, 장난은 이만하면 되었지요.”
“네에, 저하…….”
“이쁜 짓을 많이 하면… 내 많이 이뻐해 주겠습니다.”
아이 다루듯 콧잔등을 슬며시 깨물었다가 멀어지려는 입술을 물었다. 그가 이쁜 짓을 바라니 최선을 다해 이쁘게 굴 작정이었다.
“아, 으응, 좋아…….”
“나도 좋습니다, 내 것으로 그대 안을 가득 채울 생각을 하니…….”
한데 그대 것이 아직 선 상태이니 이부터 풀어주지요. 입가를 찬찬히 빨아들이던 그가 다시금 내 하문으로 향하였다. 여린 입 안 점막이 내 것에 달라붙어 왔다. 눈이 절로 뒤집혔으나 벌벌 떨면서도 나 역시 그의 아래로 갔다.
“윽, 하-!”
“아움, 으음…….”
굵고 거친 음모가 무성히 난 곳에 고개를 처박았다. 입을 벌리자마자 꿈틀거리며 들어오는 남근에 기꺼운 마음은 숨겨지지가 않았다.
희락기에 당도한 양인의 향과 기운에 가만 놓여 있기만 해도 정신이 혼몽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내 입엔 양인의 남근이, 내 남근과 구멍은 양인의 입에 들어가 있으니 정도가 더하였다.
“으븝, 웁, 아흐읏……!”
사지가 벌벌 떨렸다. 그는 내 아래에서 남근을 끊어 먹을 듯이 게걸스레 빨고 물었다. 입에 남근을 담고 있을 때는 손으로 구멍을 쑤셨고, 손으로 남근을 쥐고 흔들며 못살게 굴면 혀가 구멍을 쩝쩝대며 빨았다. 때문에 아랫구멍에서도 물이 줄줄 새고 내 남근 역시 쉬지 못하고 정을 토해냈다. 나중에는 두 구멍이 아리고 더 뽑아낼 것도 없어 무릎을 세우며 벗어나려 하였으나 이미 힘이 빠진 몸을 억지로 주저앉히는 태자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저, 저하! 흐, 그만, 아, 그, 윽!”
“응, 조금만 더 합시다…….”
푹 쑤시고 들어오는 혓바닥에 앞으로 고꾸라지자 보이는 것은 그의 거근이었다. 굵고 탱탱한 것에 핏줄이 울끈불끈 서 있는 것이 가히 흉기에 가깝다 할 수 있었으나 무엇에 홀린 마냥 그것을 다시 입에 물었다. 너무 커서 입 안에 다 들어가지 않아 기둥을 두 손으로 붙잡고서 귀두부만 할짝이고 머금기를 반복하였다. 그는 목구멍을 활짝 열고서 내 것을 먹어 치우는데 나는 그렇게 해주지 못해 조금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디 양인과 월앙인의 남근 크기는 달랐다. 그의 남근은 양인 중에서도 월등하여 나뿐만 아니라 여타 사람들도 입 안에 다 담기는 무리였다.
열심히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여 가며 그의 것을 빨았지만 그는 허벅지에 가로선이 생길 정도로 세게 힘을 주며 사정을 미뤘다. 안에 얼마나 싸 대려고. 벌써부터 색사가 두렵고 무서워 다리를 때리며 어서 한 발을 빼라 종용했으나 그는 못 알아들은 척 내 아래만 헤집었다.
“아응! 으, 읍!”
“어허! 아직 아니라 하였는데!”
“흐아- 아, 앗!”
손가락을 고리처럼 만들어 안을 살살 긁어 대는 손길에 애써 오므리고 있던 구멍이 죄 풀어졌다. 아래에서 줄줄 물이 흘렀다. 내 향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이니 그에게 어느 정도이겠는가? 차라리 사라져 버리고 싶은 쾌감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가고, 그는 한 번도 가지 않았으나 그는 퍽 즐겁다는 듯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 양인의 손에 아래를 죽죽 빨리며 어쩌지 못하고 그의 얼굴 위에 둔부를 대고 앉아 있으니 높은 콧대며 뜨거운 숨이 닿아 왔다. 후- 하고 옴찔거리는 구멍에 맞춰 부러 숨을 뱉는 그가 얄미웠으나 아래는 채신머리없이 울기 바빴다.
“세 개나 넣어도, 이렇게나 잘 물고… 기특하기도 하지.”
“흐끙, 저, 앗아! 저하, 이제 그만, 그만…….”
그의 것을 입에 물 정신도 없어 울며 아래를 들썩이며 그를 보챘다. 손가락 말고 다른 것, 내가 방금까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넣어줘. 더 소리를 참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새어 나오는 소리를 참느라 입을 막은 두 손은 하얗게 질린 채였고,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하나 어여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색에 젖은 내 꼴이 곱지 않을 것은 자명하였다.
이제 더 나올 것도 없다고 한 게 무색할 정도로 줄줄 흐른 애액에 낯이 부끄러워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미웠다. 사정을 참지 못하는 월앙인이 불쌍하지도 않은 것인가? 당신 부인이 어서 넣어 달라고 꼭 말을 해야만 아는 것인가? 설운 맘에 히끅거리며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그의 손을 떨쳐냈다. 하나 침상 밑으로 내려가려는 나를 나무뿌리 같은 팔뚝이 안아 왔다.
“삐치셨습니까? 응? 왜-”
“흐으으… 밉습니다, 나한테 흑, 너무하세요…….”
“우는 것도 이리 어여쁘면 어찌합니까…….”
이제 정말 이뻐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뒤에서 끌어안은 채 목덜미와 어깨에 입술을 내리던 그가 살그머니 나를 눕히고서 위로 올라탔다. 나는 여즉 서러워 히끅거리는 잔울음을 뱉는데 그는 아기같이 우니 더 괴롭히지도 못하겠다는 거짓부렁을 뱉었다. 나보다 어리면서 누가 누굴 보고 애기 같다 하는 것인지. 그리고 계속 괴롭힐 거면서 무슨. 성을 내며 얼굴로 오는 손을 피해 고개를 홱 돌리자 이제는 입술이 찾아왔다. 얄미웠다. 내가 당신 입술 좋아하는 걸 알고서 좀 봐 달라고 이러는 게지.
“진짜, 더 괴롭히지 마셔요…… 응?”
“응, 그럼. 이제 우리 연이 안 괴롭힙니다. 나도 더는 못 참겠고.”
“미워.”
“아냐, 나는 부인의 예쁜 사람인데?”
이제는 밉다는 말에 전전긍긍하지도 않네. 심통이 났으나 훤칠한 인물이 배시시 웃으며 아양을 떠는 것은 퍽 좋아 나도 그냥 웃고 말았다. 그는 땀에 젖은 머리를 곱게 넘겨주고서 내 웃는 입에 제 웃는 입을 마주 대며 또 웃었다.
“아, 흣, 커, 저하, 응으…….”
“하아……. 오래 풀어주었는데도.”
혀를 차며 아래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에 온몸을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밤은 길었고, 그는 밤뿐만 아니라 언제고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양인이었기에.
“아, 아…… 응! 읍, 으….”
“귀여워라…….”
양인의 물건이 내게 들어왔다가 쑥 빠져나갔다. 조용히 하란 말 대신 그는 입맞춤을 주었다. 입은 열되 소리는 내지 않고 있으면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때 혀가 들어왔다. 빈말로라도 친절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혀끝이 달아서 몸이 달아올랐다.
가슴팍을 문지르는 손바닥에 무게가 실릴 때마다 손등을 물며 소리를 죽였다. 아프지 않게 이불을 물라고 했지만 그의 마음을 저리게 하고 싶어 부러 그랬다.
“아픈 게 좋아, 그래서 그러십니까?”
“아윽!”
“하면 내 그리 놀아 드리고 말고요.”
팔꿈치와 팔뚝 안의 여린 살을 훑으며 내려가던 손가락이 불현듯 젖꼭지를 꼬집었다. 아팠다. 아픈데도 남근 끄트머리에 방울방울 정액이 샜다. 소변을 지린 것을 들킨 어린애처럼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이전에는 나긋이 만져주는 것만 좋아하던 몸이 아픈 것에도 그저 좋다 질금질금 싸게 되다니. 당혹스럽고 부끄러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 준비를 하자 그는 샐샐 웃으며 이상한 곳에 고개를 파묻었다. 넣어 달란 것은 여전히 넣어주지 않은 채.
“저, 저하! 싫어, 아냐, 응! 싫어, 앗아!”
“부인도 좋아하시면서.”
“아흐읏!”
팔을 훌떡 들어 올리고서 움푹 파인 겨드랑이에 코를 박는 태자에 놀라 울음이 터졌다. 하지 마, 싫어, 이건 싫어, 이상해, 울며 발버둥을 쳤으나 허사였다. 묵직한 양인이 강압적으로 몸을 내리누르자 열에 오른 월앙인은 갈대처럼 아래서 나부끼며 그의 흥취를 돋워줄 뿐이었다.
게걸스레 살결을 빨고 훑는 소리 사이로 간간이 신이 난 듯 콧노래를 부르는 게 들렸다. 흥흥, 약 올리듯 간질이고 쯥쯥 소리 나게 빠는 혀를 당장 깨물고 싶었다. 나는 이런 변태적인 성행위에는 취미가 없었다. 어디에서도 이런 취미를 가졌단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었으며, 춘화집에서도 이런 체위를 다루는 것은 보지 않았다.
뭐가 그리 좋은 겐지 더러운 곳을 깨물기까지 하는 그의 취향에 놀라 악 소리를 지르려던 때였다.
“아하하… 부인, 섰습니다.”
뭐라고?
기겁하며 상체를 들어 올려 내 것을 바라봤다. 정말 발갛게 달아올라 껍질을 벗고서 꿈지럭대는 귀두부가 보였다.
“아앗!”
“톡톡 터지는 것도 앙증맞기 그지없어.”
싸지만 않으면 되지! 따지려 하였으나 그보다 먼저 아랫도리가 푸들푸들 떨며 울고 말았다. 놀라서 이불을 끌어 아래를 숨기려 하였으나 내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챈 그 때문에 그도 수포로 돌아갔다.
안 된다고 버둥대는 몸을 귀엽다는 듯 눈웃음치며 보던 그는 옥으로 잘 만든 비녀 같은 손가락을 들었다. 이거로 무엇을 할까, 묻는 듯한 표정에 눈물이 고였다. 나쁜 놈. 희락기가 왔다고 안고 얼러 주기 바쁘던 제 부인을 희롱하고, 나쁜 놈! 씩씩대는 와중에도 궁녀들에게 들키면 거근을 제대로 받지도 못할 상황이 올 게 자명하니 차마 큰소리로 반항도 않았다. 희락기의 열을 풀고 싶었다. 나쁜 놈이라곤 하였지만… 나의 몸을 잘 아는 이와 진탕 놀고서 그의 품에 갇혀 체향에 취하고만 싶었다.
“아, 앙!”
기다란 검지로 바짝 약이 올라 있는 것을 한 번 톡 치니 방정맞게 힘이 풀렸다. 희멀건 정액이 그의 뺨까지 높게 튀어 올랐으나 그는 느물느물 웃으며 그마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정말 변태가 아닌가. 이전에 숲에서 소변을 보라고 종용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침상에서 내가 울 때마다 커지던 물건을 예사로 봐선 안 되었는데. 결박당한 채 정액만 쏘아 댄 것이 수치스러워 울음을 참지 못하자 결국 그가 나를 안아주었다. 서러웠다. 그대도 나와 같이 희락기를 맞았으면서 나만 우습게 만드니 속이 문드러졌다.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가만히 안고서 등을 토닥이는 이에게 따지듯 말했다.
“원래, 끕… 이러지 않았습니다, 흐끅!”
“맞아. 내가 다, 다- 잘못한 것입니다. 그대가 이상한 게 아냐.”
얼씨구, 달래는 요령도 가지가지군. 허벅지에 앉혀서 둥개둥개 얼러주면 내 넘어갈 줄 아나?
“어, 흑! 어쩌지, 흐으…….”
“어쩌긴! 나랑 부인만 아는 비밀이 하나쯤, 아니 열쯤 더 는다고 하여도 아무 문제없지요.”
외려 나는 이편이 더 좋은데? 희락기가 와도 무서워하지 않고, 새로운 재미도 알았으니 좋은 것 아닙니까.
코끝을 맞대며 살살 비비곤 참새가 쌀알을 먹듯 입술을 조금씩만 물어 빠는 이에게 투정을 부리듯 주먹질을 했다. 이리 잘 달래주면 연하의 서방님을 미워할 수가 있나. 두툼한 가슴팍에 닿는 손은 솜방망이나 다름없었다. 때리는 나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주먹이었다. 잉잉대며 나쁘다고 떼를 쓰자 그는 아주 다 죽어 가는 표정을 짓고서 나를 안고 얼렀다.
“서방님이 나빴지요, 우리 각시-”
“흐윽, 으… 이제, 하던 것을 마저 하고 싶은데…….”
이런 말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부끄러웠다. 하나 당장 그를 받고 싶었다.
우뚝 서서 한 번씩 움찔거리며 떠는 그의 남근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맛있겠네, 그런 생각을 한 낯이 정숙한 태자비답지 않을 게 빤하여 그런 것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내 뺨을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러면 얼른 넣어주어야지, 우리 각시 애타면 아니 되지!”
“아, 흐, 어흐읏!”
읏차, 흡사 무언가를 들어 올릴 때나 낼 법한 소리를 내며 나를 들어 올린 그는 그대로 구멍 안에 제 것을 처넣었다. 놀란 내 버둥거림에 발끝에서 밀리던 이불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까처럼 끄트머리만 슬쩍 담그는 수준이 아니었다. 둔기에 가까운 물건이 내 안에 들어와 열기를 뿜었다.
“아흐… 희락기라 그런가….”
“앗, 응! 거깃, 읏아-!”
“쩝쩝거리며 물기도 잘 물고, 기특해라.”
기특하다면서 망치질을 하듯 쑤셔 박는 힘이 극양인은 달리 극양인이 아니라 외치는 듯했다. 신음이 샐까 두려워 얼른 입을 막고 줄줄 우니 그는 그게 또 안쓰럽다며 볼을 핥아 올렸다. 하나 그마저도 또 다른 애무에 불과하여 나는 계속 울며 태자의 것을 받아냈다.
눈물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아편쟁이처럼 입에서 침이 줄줄 흐르고 사지가 퍼르르 발작적으로 떨렸다. 뒤 허벅지와 둔부 사이를 잡고서 들어 올렸다가 한 번씩 툭툭 놓아 버릴 때마다 아래로 흉기가 꽂혀드는 바람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렇게 하다간 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였으나 아래로 졸졸 물이 흘렀다. 온몸의 수분이 몽땅 아래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읍, 읏! 저, 저하, 으응, 앗흑! 아, 제발…….”
“허억, 큿!”
가볍지 않은 몸을 몇 번이고 위로 아래로 갖고 놀던 그는 아래에 뜨끈하게 정을 토했다. 길게 늘어지는 숨이 그의 씨물만큼이나 뜨거웠다. 더워. 목이 말라. 갈급하여 눈앞에 보이는 입술에 매달렸다. 조금 전까지 나를 몰아붙이던 이는 다정히 입술을 내리며 타액을 넘겨주었다. 질척이는 소리만이 이부자리를 사박사박 맴돌았다.
누구 좋으라고 이리 허리가 가늘어. 여전히 내 안에 제 것을 처넣고서 중얼거리는 소리는 야살스러웠다. 어디 기녀에게나 할 법한 농이었으나 온몸이 발갛게 물든 나로서는 그 말도 그저 좋아서 애꿎은 그의 유두만 갉작였다.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몽톡한 손톱으로 살살 매만지자 낮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음…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지만 모른 척 뾰족하게 솟아 가는 유두를 둥글렸다.
“좋으십니까, 저하?”
“으음……. 부인이 해주니 뭐든 좋지…….”
“아… 흐응, 또, 또?”
벌게질 정도로 젖꼭지를 꼬집고 문대자 안에 들어차 있던 것이 부피를 키우는 게 느껴졌다. 웬 놈의 정력이 이렇게 좋은 것인가. 빠듯하게 살이 밀리는 것은 언제 느껴도 망측하여 인상을 쓰자 살며시 입술이 볼로 와 닿는다. 매서운 눈매가 유순한 척 나를 보는 것에 아래의 생경함이 잠시간 잊혔다.
“부인도 희락기이고, 나도 희락기이고… 게다가 우리 부인, 아이를 갖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양인과 월앙인의 희락기가 겹을 이루는 날이 살며 얼마나 될까요…….”
“이미 파정하지 않으셨나요…? 아이처럼 떼를 쓴다고 다 받아주다간… 내 밑이 다 헐지도 몰라 두렵나이다.”
“…….”
납작하고 가느다래진 몸을 부둥켜안던 태자는 속이 상하였는지 말없이 나를 눕힌다. 와중에도 내 아래는 그의 것을 착실히 물고 놓아주질 않으니 내 싫다는 말은 모두 허구요, 인형극과 다름없지. 그도 모르지 않을 것이나 둘 다 열에 들떠 얼치기처럼 서로에게 매달려 떼를 쓴다. 안 돼, 할 수 있어. 할 수 없어, 돼.
정말 싫소, 부인? 그렇게 물으며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태자의 낯이 불콰해지더니만 움직이기 뻑뻑할 정도로 그의 것이 거대해졌다. 원래도 크기는 컸으나 이렇게 안에서 자꾸 부푸는 경우는 없었기에 겁이 났다. 이게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나? 안에 품고 있기 버거워 고개를 젓자 그도 나와 같이 고개를 저었다.
“아아- 못 참아, 부인, 나 더는 못 참습니다…!”
“아아아앙! 아! 히으, 아앗!!”
“커흑, 윽!”
방정맞은 소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차마 입을 가릴 정신도 없어 되는 대로 비명을 지르자 궁녀 몇이 들어왔다가 이내 기겁을 하며 문을 닫았다. 태자와 내가 붙어먹는 모양새보다도 극양인의 기운에 잠식할 것 같아 나간 것이리라. 이제 마음껏 교성을 내질러도 되겠다, 싶었다. 그를 당해낼 자가 이 궁 안에 있을 리 없었다. 그리 생각하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야차 같은 이가 좋아 죽는 것이 나란 사실이 뿌듯하였다. 목덜미를 크게 물고서 깊숙이 처박은 채 박아 대는 물건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였다. 아프다고 엉엉 울었으나 아프기만 하진 않았다.
“아…! 제, 현아, 어윽, 흐아-!”
“허억, 연우야, 연아……!”
“아아, 흡, 어, 어떡, 저하, 조, 흑! 조금만, 아아…!”
거근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덕분에 팽팽해진 결합부로 허옇게 거품이 일었다. 그가 못 배워 먹은 백정처럼 처박을 때마다 굽실거리고 빳빳한 그의 무성한 음모 주위로 거품이 묻어났다. 까실한 음모가 둔부에 닿을 때마다 따갑고 간지러워 나도 모르게 힘을 주게 되었다.
“어디서, 요망하게 구십니까?”
“아! 아파… 하지, 하지 마아……. 싫어, 우응, 시, 러……!”
“싫은데 이리 꽉꽉 물 리가 없지. 귀염을 떨면 나는 더 각박하게 그대 안을 찌르고 비빌 것입니다.”
조그마한 엉덩이가 좆이 들어갈 때마다 꼭 다물리며 도통 뱉질 않네. 장하기도 하지.
누가 들을까 겁이 날 만큼 천박한 나를 칭찬하는 소리에 또 한 번 애액이 봇물 터지듯 흘러넘쳤다. 그에 첩첩거리며 민망한 소리가 퍼졌으나 그나 나는 개의치 않고 짐승처럼 접 붙었다. 둘의 체향이 어지러이 섞였고, 그는 그게 좋은지 킬킬거리며 연거푸 숨을 들이마셨다. 흥분에 겨운 극양인은 제 향과 기운을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하여 나는 구멍을 옴찔거리며 그의 좆을 쥐어짰다.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라…….
“아앗… 또, 저하, 나, 나올 것 같아, 흐응, 앗…!”
“마음껏 내보내도 괜찮습니다. 구경을 나 혼자 다 하여야지.”
“아흣! 아아아아!!”
아니다. 나는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었다. 그의 정액을 모두 쥐어짜 욕심나는 만큼 그걸 모두 품고 싶었다.
나올 것 같다는 말에 추삽질을 하며 내 것을 구기듯 움켜쥔 그는 아래에 깔린 이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꼿꼿하게 섰던 것을 마구잡이로 흔들며 어서 싸라 종용하였고, 나는 등허리를 요상하게 꺾어 가며 참고 참다가 이내 무언가를 쌌다. 정액도 아니오, 소변도 아니오, 투명하고 냄새가 나지 않는 액체를 한 바가지나 싸 버렸다. 그것을 내보내는 동안 태자는 나를 반으로 접어 제 것을 처넣고는 조여드는 곳에 열심히 파정하였다.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정에 눈을 감고서 쾌감을 더듬었다. 환상과도 같은 쾌락이었다. 아래 입이 발름거리며 그의 것을 꼭꼭 짜주니 그 역시 기껍게 웃으며 물건을 빼지 않고 나를 꾹 끌어안았다.
“푸흐흐… 좋아. 너무도 좋아.”
“히응, 응… 계속, 넣고 있어…….”
“그럴까요, 부인? 정말?”
“응……. 뜨거워, 제제야…….”
“그야, 아직도 정을 토하고 있으니 그렇지요.”
몇 번이나 정을 토해 놓고 아직도? 내심 놀랐으나 사타구니를 타고 흐르는 느낌도 야릇하니 퍽 괜찮아 그의 가슴팍에 푹 기대어 눈을 감았다.
“부인-”
“으응…….”
“잠들어도, 또 괴롭혀도 됩니까?”
“싫어, 하지 마…….”
“응, 좋다고?”
싫다고, 이 나쁜 놈아!
“응응, 나도 좋습니다. 부인은 가만히 주무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더 말해 무엇하리. 고단한 몸이 다시 들렸으나 내 정신은 저 아래로 떨어져 다시 올라오질 않았다. 자근자근 어깨를 씹는 그에게 귀찮게 굴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으나 그는 모른 척 나를 계속 물고 빨았다. 마음대로 해라, 입술을 우물거리던 나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