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4화 (5/11)

04

전날 요깃거리로 받은 주먹밥과 별다른 것이 없는 아침을 받고서도 연우와 제현은 군말 없이 그릇을 비웠다. 병색이 완연한 아이들의 어미는 객식구에게 상을 제대로 차려주지 못하여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으나 연우와 제현으로서는 몸도 성치 않은 이에게서 밥상을 받아 든 게 더욱 죄스럽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후 지푸라기를 뭉쳐서 우물가에서 길어온 물로 그릇을 부시는 여자아이의 옆에 쪼그려 앉아 연우도 그릇을 솜씨 좋게 닦아냈다. 연우가 여자아이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놀 때 제현은 제 곁을 맴도는 사내아이를 앉히고서 몇 가지를 물었다.

“아비는 어디에 가고 어린 그대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는가?”

“소인의 아버지는 도성에서 노역을 살고 있습니다. 가끔 돈을 부쳐주긴 하시지만… 먼저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어 생이별 신세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성안의 마을들을 잇는 역참(驛站)이 있다 들었는데. 집안에 급한 일이 있다면 파발이나 보발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은가?”

“그야…. 그는 있는 집이나 그럴 수 있습니다, 나리.”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희처럼 없는 집 식솔들은… 멀리 떨어진 가족과 닿을 방도가 없습니다. 소인도 아버지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아버지도 저희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한 지 벌써 삼 년째입니다.”

황성이 있는 수도와 가깝지 않은 곳은 아무래도 크게 부를 누리지 못하였다. 하여 나라의 변방에 사는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성안으로 모여드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곤 하였다. 그동안 연락이 닿지 않을 가족들에게 적어도 명절이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서신이라도 보낼 수 있게끔 하자며 나라에서 강구한 방책이 각 도마다 세운 역참이었다. 한데 그 역참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니. 제현은 턱을 쓸며 소년에게 재차 물었다.

“역참에 파발꾼들과 보발꾼들을 책임지는 관리들의 행실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게 말해주게. 내 폐하께 간언을 드릴 수도 있네.”

“……소인이 아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들에게 서신을 갖고 가는 이가 사내라면 금품을, 여인네라면 몸을 착취하고자 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알겠네. 가장으로서 고생이 많군그래.”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마을에 비도 내리고, 지금은 문을 닫은 서당도 다시 열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은 다만 때가 안 좋을 뿐이라고, 그리 믿고 있습니다.

어느새 제가 조금쯤 편해졌는지 옆에 앉아 연우와 어린 동생이 노는 양을 상기된 표정으로 바라보는 소년의 옆에서 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차차 바꿔 나갈 것이었다. 연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백성을 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다짐하며 제현은 실로 온화한 시간을 보냈다.

해가 넘어가기 전 제현과 연우는 말에 올라 작별을 고하였다. 소년의 동생은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 애를 썼다. 연우가 몇 번이나 안고서 얼러주며 나중에 또 보자, 간지럽게 말을 하니 더욱 울고 싶었으나 그래도 고개를 크게 주억이며 눈물을 삼켰다. 연우는 그런 아이가 가엾고 짠하여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였다. 하나 오늘도 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무슨 사달이 나도 날 터였다.

“신세를 졌네. 내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도록 하지.”

“아닙니다, 나리께서 물건을 사주지 않으셨다면 어제 장사도 말짱 도루묵이었을 것을요. 소인이 감사하지요.”

“은혜야, 내 언젠가 또 놀러 오면 그때는 네가 내 머리를 땋아 올려주렴. 알겠지?”

“응…! 잘 가, 오라버니!”

동그마한 아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사붓이 쓸고서 연우는 고삐를 쥐었다.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으나 촌장을 만나고 다시 궁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서 연우와 제현은 말을 몰기 시작하였다. 건조하게 일어나는 흙먼지에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부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부지런히 말을 몰아 촌장의 거처에 당도할 수 있었으나 둘은 고개만 갸웃거리며 내리는 것을 머뭇거렸다. 여기가 정말 한 마을의 장이 묵는 곳이란 말인가? 아까 소년의 집보다도 더욱더 추레한 공간이었다.

“형님, 내 받아 드릴 터이니 내리시지요.”

“응, 제제야.”

“읏차-”

“우리 제제는 힘도 좋지.”

품에 폭 안겨서 아양을 떠는 연우에 제현이 하루 중 가장 크게 미소 지었다. 이리 안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이 뿌듯이 차올랐다. 제현은 우리 제제, 하며 품 안에 곱게 갇혀 있는 연우를 바투 안으며 수차례 입을 맞추었다. 전날 밤 좁은 방에서 딱 붙어 잔 것을 되새기며 연우의 목덜미에 코를 박을 때였다.

“게 누구냐! 대낮부터 이 웬 풍기 문란인지!”

“초, 촌장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도성에서 온 관리들입니다. 마을에 오랫동안 기근이 들었다 하여 폐하께서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일찍도 왔군그래. 아주 마을이 다 망하고 오지 그랬나?”

“말씀이 지나치신……!”

“제제야.”

“…….”

“죄송합니다, 어르신. 댁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서 불콰한 얼굴로 성을 내려는 제현을 막아선 연우가 넉살 좋게 촌장에게 말을 걸었다. 촌장은 미색이 출중한 사내에게 혀를 한 번 차고선 집으로 들어섰다. 문은 열어 둔 채였다.

연우는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려 하는 제현에게 빙긋이 웃어 보이며 콧잔등을 톡톡 쳤다.

“성질 좀 죽이자꾸나, 제제야.”

“그러나 형님, 저런 태도는 너무도…….”

“촌장은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니 당연한 게 아니냐. 어서 들어가자꾸나.”

배우려는 자세는 언제나 조금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법이라는 말에 제현은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다 쓰러져 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촌장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황궁의 어르신들 외에는 단 한 번도 하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제현 역시 불쾌감이 짙은 얼굴을 하고선 입을 꾹 닫고 앉아만 있었다. 사이에서 곤란한 것은 연우였다. 둘의 기분이야 어떻든 간에 당장 급한 것은 가뭄이 든 마을에 식수를 조달하는 것과 수로를 끌어오는 시기 조정이었다.

연우는 냉랭한 눈을 한 태자의 무릎께를 톡톡 치고선 그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선 웃어 보였다. 잘 좀 해 보자고 온 것이니 따라주었으면 한다는 뜻임이 분명한 미소였다. 제현은 연우를 한 번, 촌장을 한 번 바라보다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고선 고개를 숙였다.

“촌장님, 이리 늦게 찾아와 면목이 없습니다.”

“…….”

“태영국의 많은 지역을 다 살펴보지 못하신 폐하께옵서 저희를 보냈으나, 더 속히 오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노하신 것이 당연하지요.”

“남의 집 앞에서 당장이라도 접문하려고 한 이들이 말은 청산유수구먼?”

“……송구합니다, 어르신.”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이란… 크흠!”

촌장은 손부채질하며 앞에 앉은 연우와 제현을 흘기고는 아직 부족하다는 듯 면박을 주었다.

“내 비역질을 하는 이들에 반감이 없으니 망정이지, 보통은 소금이나 한 됫박 맞고서 쫓겨났을걸?”

“…….”

“…….”

“그래, 그래서 할 말이 무언가? 폐하께옵서 마을에 전할 말은 따로 하달하신 겐가?”

얼굴이 발개진 채 손톱의 거스러미만 살피던 연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상소문을 읽으시고 저희를 보내어 마을의 상황을 살피고,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강구하라 하셨습니다. 마을에서 지낸 시간은 하루뿐이나 속히 수로를 끌어와야 한다 생각하였습니다.”

“민생을 살피러 온 게 아니라 그저 한때의 유흥을 즐기러 온 줄 알았더니만.”

“……촌장 어르신.”

“그런 것만은 아니군그래?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이란!”

칭찬인지, 불찰을 꾸짖음인지 알기 힘든 말을 하고서 노인은 종이를 한 장 툭 하니 내려놓았다. 이게 무엇인가 멀뚱히 보는 연우와 제현에게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말하였다.

“하루로는 뭐 가시적인 것이나 파악을 하지, 자잘한 것들은 모를 것이 아닌가?”

“어르신…….”

“이쯤, 이쯤 정도가 그나마 물길을 트기에 맞겠지. 늙은이가 뭘 알겠나 싶겠지만 그래도 내가 이 마을 토박이니 자네들보다는 잘 알고 있네.”

투박한 선들이 합을 이뤄 지도를 이룬 종이에는 여러 부연 설명이 깨알 같은 크기로 적혀 있었다. 황제가 보낸 이라 하여 특별한 환대도, 심지어 말을 할 때도 쉬이 하대하는 촌장에게 가벼운 인상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나이가 들면 이리 격이 없어지는가, 제현은 그리 느끼기도 하였다. 하나 마을에 누군가 와주기만을 기다렸단 듯 내밀어지는 종이 한 장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현은 머리를 조아리며 허투루 전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다. 촌장은 앞으로는 남의 집 앞에서 남세스러운 짓이나 하지 말라며 종국에는 허허 웃고 말았다.

“좋을 때지. 한데 수도에는 자네 같은 이들이 많은가? 내 비역질이 유행한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혼인도 한 것을요.”

“둘이?”

“예, 어르신. 세상이 많이 변했지요.”

종이를 접어 품에 넣으며 말갛게 갠 미소를 보이는 연우에게 노인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인이 알기로 태영국에서 사내끼리 비역질을 하는 경우는 왕왕 볼 수 있었으나 그게 혼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상대가 월앙인이었을 때만 가능하였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경우에 월앙인을 짝으로 맞는 태영국의 사내는 황실의 손이었다. 하면 둘은 황제가 보낸 어사들이 아니라 황족이란 말인가?

뒤늦게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촌장을 뒤로하고 제현과 연우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미 늦었으나 더 늦어지면 황실의 어른들에게 내일의 문안 인사도 올리지 못할 터였다.

“어르신,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을에는 곧 사람이 올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지요.”

“이만 가지, 제제.”

“예, 형님.”

무어라 말을 하려던 촌장은 무슨 말을 한다 하여도 고마움이나, 미처 예를 차리지 못한 죄스러움이 전해질 것 같지 않아 그저 문밖에서 공손히 인사를 하는 둘에게 손이나 흔들어 주었다.

“건강하시게.”

“예, 어르신. 어르신께서도 무탈히 지내십시오!”

“그래……. 둘이서 백년해로하게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꾸벅 인사를 하고선 자연스레 제 비를 안아 올려 말에 태우는 것을 보고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웃고 말았다. 남세스러운 짓을 삼가라 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저러나 싶었기에. 그러나 어린 것들 둘이서 귀엽게 노는 것이 보기 좋아 그저 손이나 흔들 뿐이었다.

부옇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둘의 뒤로 말 몇 필이 차례로 뒤따르는 것을 확인한 노인은 작게 혼잣말을 하였다.

“태자 저하께서 미남이란 말이 틀리지 않구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노인은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둘이 지나간 길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무엇이 달라져도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며.

한편 궁으로 말을 몰기 시작한 후로 제현은 눈을 빛내며 연우를 흘깃거리다가 우물가를 발견하고 잠시 내린 후에는 아예 그에게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응, 저하.”

“제, 제제라고 하시지 않고.”

“이제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아직 궁에 당도하지 않았으니 제제지요.”

“음……. 저하, 소첩에게도 아명이 있었습니다.”

“아명?”

“예. 연이라 하였지요.”

“연이, 연이…….”

무명천에 맑은 물을 적셔 그것으로 제 부인의 얼굴을 찬찬히 닦아주던 제현이 수줍게 웃어 보이며 조그맣게 속살거렸다.

“여, 연아-”

“…….”

“싫으십니까, 부인? 이, 이리 부르는 게 싫으시면…….”

“좋아서 그러지요……. 저하께옵서 그리 불러주시니 좋아서.”

연아-, 작게 부르니 금세 볼을 붉힌 연우는 괜히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뱉으며 태자의 품에 답삭 안겼다. 허리를 안고서 둥가둥가 몸을 흔드는 와중에도 저를 연이라 불러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궁에 가면 둘이 아명을 부르며 놉시다, 궁인 모두 나가게 하고서. 눈에 띄는 곳을 모두 찬찬히 닦아내고서 다정히 건네는 말에 연우는 살며시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오늘 황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과 황궁의 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글렀으니 하루 정도는 놀고 싶었다. 큰일을 해내지 않았는가. 상소문을 보고 발로 뛰어 나라를 위함을 보였으니 황제도 기특해할 것이리라. 연우는 답지 않게 합리화를 하며 제현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얼른 궁에 가 소첩을 안아주셔요, 저하. 열이 불쑥불쑥 치밀어 참기가 힘이 듭니다.”

“어흠…! 그, 그래야지요. 얼른 갑시다, 부인.”

여봐라! 궁에 당도하려면 얼마나 더 달려야 되는 것이냐?!

어린 짐승처럼 제 품에 안겨 몸을 비비는 태자비에 제현은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호위로 딸려온 이들은 마을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서로밖에 보지 않는 태자 내외가 자못 황당하였으나 서둘러 말에 올랐다.

“저하, 앞으로 한 시진을 꼬박 쉬지 않고 달리셔야 하옵니다.”

“…궁이 이리 멀었단 말이냐.”

“송구하옵나이다, 저하.”

“부인, 참을 수 있으시지요? 아쉬운 대로 내 입이라도 맞춰드리리다.”

한 시진이 걸린다는 말에 표정을 굳혔던 제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서 촉, 촉 소리가 나게 정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절로 마음이 뭉글뭉글해지는 듯하여 이미 품 안에 있는 사람을 더 세게 끌어안고서야 밤 나들이를 떠났던 일행은 다시금 궁으로 가는 길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태자비의 곁을 지키는 것은 나이니 그대들은 앞과 뒤에 진을 치고 달리거라.”

가자. 태자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담담히 말을 달리는 태자에 호위무사들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비가 못 참는 게 아니라 누가 봐도 태자가 더 안달이 나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호위무사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태자는 제 부인의 옆에 바투 붙어 말을 몰았다. 조금 이른 밤을 즐기고만 싶어 말이 내달리는 것을 막지 아니하고.

***

배움에 정진하면서 서로에게도 성실히 임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태자는 태자비의 앞에서 어린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태자비는 대외적인 순간에는 행동거지와 말씨를 항상 잔잔히 가다듬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의 주위에 흐르는 곧고 청아한, 그러나 동시에 강직한 분위기는 종종 고요히 시선을 끌곤 하였다.

“서주, 자네 혼인을 한다며?”

제현과 깍지를 끼고서 손을 잡고 가던 연우는 익숙한 뒷모습에 얽었던 손가락을 풀고서 앞에 보이는 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 남겨진 태자의 안색이 굳어진 것은 그의 주위 가까이에서 있던 궁인 몇몇만 볼 수 있었다.

“예, 마마.”

“참말 경사가 아닌가! 저하, 서주에게 무언가 선물이 될 만한 것을 주고 싶습니다. 무엇이 좋을까요?”

“글쎄……. 무엇을 원하는가? 그대의 부인이 될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을 주고 싶은데.”

“패용할… 머리 장식이라든가, 그 정도면…… 족합니다. 무엇을 주셔도 감사히 받을 것입니다.”

머리 장식이라. 태자는 턱을 매만지며 머지않아 제 곁을 지킬 가신이 될 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서 부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길이를 조금 다듬어 어깨에 미치지 못하는 머리칼을 고정하기 위하여 태자비는 최근 들어 머리장식을 하는 일이 잦았다. 조팝꽃이 몽글몽글 뭉친 모양이라든가,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 앉은 모양의 머리 장식.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매일 태자비의 궁에서 아침을 맞는 태자가 골라주는 것이 태반이었다.

“자개를 좋아한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유의 장식도 괜찮겠지? 내 그대의 아내가 될 사람을 모르니 쉬이 결정할 수 없군그래.”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 모호한 눈길을 태자비에게 건네는 서주에 제현은 그를 조금 더 바투 안았다. 혼인한다 하여 최근 안심하였는데 여전히 연모하는 눈을 하고 있으니 얌전하던 속이 뒤집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를 안아 오는 팔심에 휘청이며 태자에게 기대게 된 연우는 자연스레 그의 품에 자리를 잡고서 태자를 올려다보았다. 보는 눈이 많으니 무어라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무언가 불만이 있으면 저를 휘두르려 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조금 달래 가며 말을 할 요량이었다.

서주는 태자비를 팔로 감싸 끌어안는 태자와, 거기에 자연스레 기대는 태자비를 보며 일련의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에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태자 내외의 사이는 돈독하기로 유명하였고, 그것은 둘을 본 이라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포기하기로 하였는데 내 마음이 왜 이리 헛헛할까. 서주는 손을 한 번 쫙 폈다가 가벼이 쥐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마께서 직접 골라주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겠지요. 필시 귀히 여기며 요긴하게 쓸 것입니다.”

“그대가 그리 말하니 서둘러 물건을 보아야겠어. 함께 골라주시겠사옵니까, 저하?”

“…좋지요. 부인께서 고르신다면 무, 무엇인들 어여쁘지 않겠냐마는.”

“소첩이 패용하고 있는 것도 저하께서 골라주신 것이지 않습니까. 높으신 안목으로 유능한 생도의 반려가 될 이를 기쁘게 해주시어요, 네?”

안긴 채 이마를 태자의 어깨에 콩콩 찧으며 하는 말에 서주의 표정은 제현과 상반되게 굳어만 갔다. 괜찮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 애정 행각을 목도하는 것은 아직도 서주의 마음에 그저 스쳐 가는 풍경이 아니었다. 여전히 둘의 행복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 한편이 아리고,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제현은 서주의 반응에 동요하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연우의 허리를 감싼 팔은 자꾸만 힘을 더해 갔다. 태자비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우는 제 향은 각인한 상대에게만 느껴진다 하였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불안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 연우의 짝은 자신이었다. 앞에 있는 서주가 아니라.

“내 곧 그대와 그대의 부인이 될 이에게 혼인을 축하할 만한 것을 내리겠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저하.”

“이만 가지요, 부인.”

“예, 저하. 다음에 봄세, 서주.”

서주는 허리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았다. 다시는 주군의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한 것을 스스로 어기고 싶지 않았다. 제 아비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처럼 저 역시 태자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충신이 되고자 마음을 먹었으니 그를 잊지 않고자 함이었다.

“건방진…….”

하나 제현은 이제 서주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까짓 게 감히 나의 사람을 넘보느냐? 주제를 알거라. 마음 같아서는 그를 몰아세우고 화를 내고 싶었다. 연우의 마음이 저만을 향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서주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좀처럼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는 태자에 결국은 연우가 살그머니 품을 빠져나와 아까처럼 손을 얽었다. 연우는 저를 내려다보는 태자에 방긋 웃으며 말하였다.

“밤이 오면 더 세게 끌어안아 주셔요.”

“……부인은 모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소첩이 모르는 게 있다면 알려주셔요.”

“…….”

제현은 진정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있는 연우에 애가 타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밤이 되면 말해드리리다, 가타부타 더 말을 하지 않는 태자에 연우는 조용히 그의 등을 마주 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연우는 제 곁을 졸졸 쫓아다니는 태자를 모른 척하려 하였다. 수묵화 수업에 임할 때도 선 하나를 긋고 한숨, 예법을 배울 때도 걸음마다 한숨. 온종일 불퉁해 있기에 연우 역시 적잖이 속이 상한 터였다. 그러나 저보다 어린 이가 어린 티를 내느라 그런 것이 귀엽고, 그 뜻을 몰라주면 토라진 채 며칠을 서운해할 것 같아 결국 그의 팔을 붙잡고 왜 그러느냐 물었다.

“오늘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까요, 우리 저하께옵서?”

“…….”

“말씀을 해주지 않으시면 소첩이 계속 서운케 할까 두렵습니다.”

“……서주와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부인.”

“예?”

“바보 같은 소리이지요. 나도 압니다. 하지만, 그러나 그는…….”

제현은 멀거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저를 보는 태자비에게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였다. 연모하는 마음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태자의 그 말에 궁인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느끼며 잠자코 숨을 죽였다. 하나 연우는 궁인들과는 달리 태자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현은 양손으로 볼을 감싼 채 한동안 웃기만 하는 연우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 그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 어찌 웃으십니까? 내 말이 거짓 같으십니까? 아니, 절대 아닙니다. 그는, 서주가 당신을 어떻게 보는지 부인은……!”

“아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부인!”

“그래도 저하께서 투기심을 보이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부인…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정말…….”

제 마음을 알아 달라 팔까지 크게 벌려 가며 답답함을 토로하는 태자에 연우는 빙글빙글 웃다가 그 품으로 들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퍽 개구쟁이 같아 태자는 얼떨떨하여 그를 안게 되었고, 궁인들은 태자 내외의 즐거운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하여 문밖으로 향하였다. 사부작거리며 궁인들이 나가는 와중에도 연우는 그의 목에 매달려 아직 다 웃지 못했단 듯 헤실거리기 바빴다.

“음음, 소첩을 이리 좋아하시다니-”

고개를 갸웃갸웃, 눈은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콧노래를 부르는 태자비에게 제 감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제현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를 고쳐 안았다.

“부인, 잠시만 내 말을…….”

“아아, 더 들을 것도 없사옵니다. 또 투기를 부리려고 하시지요?”

“부인, 그도 그렇고, 향, 부인의 체향 말입니다……!”

“응, 오늘 밤에도 잔뜩 맡으셔요.”

부인의 체향을 다른 이들도 맡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 물어보려 하였으나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안아 제 목덜미로 이끄는 태자비에 제현은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부부 관계가 견고하고 돈독하려면 이런 사사로운 일로 오해를 일으켜선 안 되는 게 당연했다. 하나 연우는 그저 저보다 어린 신랑을 귀여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태자의 얼굴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추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연우에 태자는 하고자 하는 말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드러이 휘둘렸다.

서주라니. 매번 날 선 눈으로 보던 것이 투기심에서 연유한 것이었나? 세상을 발아래 둘 것이 분명한 자가 제게 연연하는 것이 퍽 뿌듯하여, 연우는 드러내 놓고 질투를 하는 태자를 버겁게나마 안고서 얼러주었다.

“내 신랑, 소첩의 마음을 의심하지 못하게 많이 사랑해드리지요. 읏차!”

“부인, 잠시 내 말 좀…!”

“놀기도 바쁜데 말은 무슨 말이어요, 이리 오세요, 저하.”

기어이 태자를 침상에 밀어 넣고서 그 위로 쏟아지듯 쓰러진 연우는 희락기가 다가옴에 따끈해진 몸으로 그를 안고서 아이처럼 올려다보았다. 깜작깜작,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태자가 제게 가까워져 오는 게 마음에 차고 넘칠 정도였다.

“경각심이… 없으셔도, 너무 없으십니다, 부인…….”

눈가며 입꼬리에 찬찬히 입을 맞추는 태자가 그저 좋아 연우는 또 배시시 웃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소첩은 저하 앞에서만 약한 이지요. 저하 품에 숨으면 그만인 것을요.”

“그러면, 되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소첩과 저하가 서로의 짝임을 모르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괜한, 걱정이겠지요.”

제현은 대충 저를 안심시키고서 뿌듯함을 덕지덕지 묻힌 얼굴을 하고서 웃는 연우를 품 안에 숨겨 버렸다. 연우가 숨이 막힌다고 투정을 부렸으나 들은 체도 안 하고. 그날 밤도 연우와 정을 통하고, 밤이 새도록 사랑을 속삭였으나 제현은 서주에 대한 경계까지는 끝내 풀지 못하였다. 연우는 제현이 유난스레 저를 사랑한다고 짐짓 뻗대며 말을 하였으나 제현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연우의 말마따나 그를 은애하는 마음이 유난스럽기에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중명전(重明殿: 황실도서관)에 가야겠다. 태자비의 곁을 지키고 있거라.”

“예, 저하. 말씀 받잡겠사옵나이다.”

까무룩 잠이 든 연우의 머리칼을 곱게 정리해 주고서 제현은 동이 터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 신새벽에 중명전으로 향하였다. 연우도 모르는 듯한 월앙인이라는 존재를 바로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할 참이었다. 누구보다도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

***

침상에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정인의 얼굴에 연우는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손을 뒤로 짚고서 상체를 일으키자 기다렸단 듯이 품에 보듬어 안아줌에 연우는 자연스레 그의 몸에 제 몸을 기대었다.

“머리 장식을 골라주셔요.”

“…자개함을 갖고 오거라.”

“예, 태자 저하.”

함을 받아들기 이전에 밤새 엉킨 태자비의 머리를 빗겨 주려 제현은 다정히 손을 놀렸다. 긴 손가락이 짧은 머리칼 사이를 느긋하게 지나다니고 난 후에는 머리칼이 둥근 머리통의 모양대로 나긋이 가라앉아 보기가 좋았다. 제현은 참빗을 이용하여 빗질을 해주지 않고 그 정도 선에서 멈춘 뒤에 태자비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고, 종래에는 따스하게 안아 주었다.

오늘따라 다정하시군요. 연우는 적당한 온기에 몸에 힘을 풀고서 말하였다. 어느 때고 다정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오늘은 조금 더 각별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연우는 그리 생각하며 태자의 허리께에 제 팔을 두르고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손길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저를 귀찮게 만들어 마음에 난 창에 빛이 한가득 들어오는 듯하였다.

“오늘은 이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동백 말씀이시지요?”

“예, 부인.”

“하면 궁녀에게…….”

“내, 내가 머리단장을… 해드려도 괜찮겠지요?”

“저하께서요?”

“하, 한 번도 해드린 적이 없어서. 이상하면 궁녀에게 다시,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그날그날 입을 옷가지나, 혹은 차림새에 걸맞게 패용할 장신구를 골라주는 정도는 종종 해주던 태자였다. 하나 직접 머리단장을 해 주고 싶다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러시나-, 연우는 안 하던 짓을 하는 태자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싫지 않아 평상시와 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가 저를 어여삐 여겨준다는데 싫을 리가.

보모상궁의 지시를 받은 어린 궁녀 몇이 오늘 연우의 머리에 얹어질 머리 장식과 손을 씻을 물과 면포, 머리에 바를 동백유를 가지고 왔다. 제현은 궁녀들이 알려주는 대로 참빗에 동백유를 조금 묻혀 제 부인의 머리칼을 빛나게 만들고서 귀 뒤로 머리를 넘겨주었다. 연우는 제 앞에서 궁녀가 대 준 면경에 비친 모습을 보지 않았다. 다만 성의껏 제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을 느끼고, 그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할 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냐.”

“예, 저하. 이 정도면 마마께서 일상생활을 하실 때 무리가 없을 것이옵니다.”

“부, 부인. 괜찮습니까?”

“저하가 보기에 어여쁘기만 하다면 소첩은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야…… 나야 그대가 무얼 하여도, 그저… 좋지요.”

머릿기름을 바르지 않아 보송보송한 앞머리에 입술을 묻고서 제현은 그를 조금 더 힘주어 안았다. 연우 역시 군소리하지 않고 제현을 마주 안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연우에게는.

[월앙인에게서만 나는 특유의 체향은 각인된 이에게만 느껴진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이 모든 월앙인의 특징은 아니다. 100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특별한 월앙인은 각인된 상대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두에게도 감미로운 향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체향이 강하며, 희락기 또한 다른 월앙인들과는 달리 격통을 동반한다. 희락기에 겪는 고통과, 희락기의 기간이 여타 월앙인에 비해 배는 되지만 그를 약으로 다스리기보다는 각인한 상대와 그 기간을 보내는 것이 옳다.]

새벽녘 잠든 태자비를 침상에 홀로 남겨 두고 중명전에 다녀온 태자는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산득하니 불 정도로 날이 선선해졌고, 더불어 무과 생도들이 큰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을 기념하여 사냥을 나가기로 한 것이 불과 닷새 전이었다.

“이리 저하와 온종일 붙어만 있었으면 싶은 날이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리 마음이… 부인과 같지 않을 리 없지요.”

[희락기가 가까워져 오면 월앙인의 기분과 상태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여 그 기간에는 일체 바깥 활동을 안 하는 것이 가장 옳다. 병이 아니니 약으로 다스리기에는 부족하고, 월앙인 개개인의 몸에 맞지 않는 약을 쓸 경우 외려 건강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곁에 각인한 상대가 계속 머무르며 열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는 것만이 현재로썬 어떠한 약보다도 효능이 있다.]

따끈한 몸을 안고서 제현은 한층 진해진 그의 체향에 입만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혀 아래에서 맴돌고 맴돌다 이리저리 뒤섞여 차마 전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 삼켰을 뿐.

사냥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잉태할 수 있는 몸이라 하여 비웃고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삼 대를 멸하는 벌로 다스릴 것입니다. 나와 각인하고서 처음 맞는 희락기가 아닙니까. 나는 불안합니다, 그대를 무시하거나 괄시하여 그런 것이 아닌데.

“오늘 아침은 저하께서 머리를 만져주셔서 그런가, 어쩐지 날이 더 밝은 것 같사옵니다.”

제현은 입 안에서 뒤섞인 말을 말로써 뱉지 못하고 품 안의 사람만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영영 제 품 안에만 담길 사람이길 바라며.

제현의 걱정이 깊어 가는 와중에도 연우의 희락기는 점차 가까워졌다. 이제는 열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스치듯 보는 얼굴에도 드러날 정도였다. 제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제 곁에서 걷다가도 금세 지쳐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하는 연우에 피가 바짝 말라가는 듯하였지만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몸을 섞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제현의 체력이야 날이 갈수록 좋아지니 문제 될 것이 없었으나, 연우는 달랐다. 황궁의 식사에 부족함은 없었으나 연우는 잘 자지 못하였다. 태영국의 한 해 중 가장 날이 좋다는 시기였으나 연우의 몸은 쉬이 차가워지고 뜨거워지니, 제현을 비롯한 황실의 어른들마저 연우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깊이 고심하는 날이 매일이었다.

“몸이 안 좋으시면…….”

“괜찮습니다. 오늘은 함께 제왕학을 듣는 날이지 않습니까. 소첩도 같이 듣고 싶어요, 저하 곁에서.”

이전까지 해 온 모든 일들을 다 하기가 힘이 부친다면 조금 소홀히 하여도 될 것을 가려내자는 말에 연우는 처음으로 황실 어른들 앞에서 표정을 굳혔다. 제 건강을 고려하여 한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나 할 수 있었다. 겨우 이 정도로, 고작 희락기 때문에 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시기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아니면 은월국에 사람을 보내어 월앙인에게 쓸 만한 약재를 구한다면…….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으니 연우의 생각에 만약이라는 단어는 자꾸만 많아졌다.

수그렸던 허리를 곧추세우고서 다시 옆에 선 연우는 웃으며 말하였다. 이제 괜찮습니다. 저하를 놀리려고 괜히 그랬던 것이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그 말을 듣고 무어라 더 할 수 없어, 제현은 그저 그의 곁에 서서 최대한 천천히 걷는 것을 택하였다. 쓰러지면 잡아주면 되지. 괜히 조바심 내지 말자, 아직 무슨 일이 난 것도 아니니. 그리 생각하자 사냥을 나가는 것에 대한 걱정도 소폭이나마 줄어들었다.

제현은 놓았던 태자비의 손을 고쳐 쥐고서 웃어 보였다. 계속 함께 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으니 보폭을 반으로 줄인 채.

***

무과 생도들의 나이는 14세에서 19세로, 평균 17세였다. 그들 모두가 궁에서 훈련과 수업을 받을 정도가 되는 가문에서 나고 자랐기에 혼인은 17세가 되기 전에 하는 자가 많았다. 혼인한 이들 중에서는 벌써 한 아이의 아비가 된 자도 더러 있었다.

서주의 가문은 5대에 이어 황제의 최측근으로 일해 오면서 단 한 번도 잡음이 없었던 가문이었다. 태영국의 제일은 황가요, 그다음은 누가 뭐래도 서주의 가문이었다. 하나 권세를 쥐고 있음에도 대대로 맡은 바 소임만 다할 뿐, 황가에 반역을 꾀한 역사는 없었다. 단 한 번도.

여느 일반 백성들의 혼인도 집안이 안정되어 있으면 서두르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열아홉이 되도록 혼사가 오가지 않은 서주의 경우는 생도들 사이에서 의아하다 여겨졌었다.

“자네 드디어 혼인한다며?”

“서주 형님, 드디어 장가를 가시는 겁니까?!”

“사주단자나 전했는가 몰라.”

“에이- 제가 듣기로는 벌써 신부 되실 분을 만났다고…….”

다들 서주를 숙맥 취급하기에 신이 나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뱉어 대는 와중에 서주는 가만가만 고개만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해가 들지 않는 나무 둥치에 기대앉은 태자와 그의 다리에 가만히 고개를 누이고서 눈을 감은 태자비.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운 한때였다.

“아이, 형님! 말 좀 해 보십시오, 예? 안사람이 형님의 아내 될 분과 향낭을 나눠 가진 친우라 하던데.”

“…나도 잘은 몰라. 다만 좋은 분이신 것 같아.”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낙엽은 부슬부슬 태자와 태자비 위로 떨어졌고, 영영 감겨 있을 것만 같던 태자비의 눈이 뜨였다.

“아름답구나.”

서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뱉고서 고개를 숙였다. 누구를 향해 아름다움을 찬양하는지 모르는 생도들은 저들끼리 팔뚝이며 허벅지를 때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서주의 시선은 여전히 커다란 나무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란스러운 제 주위를 포근히 바라보는 태자비가 눈에 담겨 나가질 아니하였다.

하나 태자비의 시선은 금세 태자를 향하였다. 막 잠에서 깼는지 몸을 반 정도 일으키고서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려던 태자비를 가벼이 들어 올리는 팔이 있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태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게 된 태자비는 즐거워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온 얼굴을 뭉개며 아이처럼 웃는 모습에 태자는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칼마다 입을 맞추어 주었다. 대화 한마디 없었으나 서로에 대한 둘의 감정이 보는 이에게 올곧이 느껴질 정도였다.

혼인을 축하하네. 나중에 연회를 연다면 불러주십시오. 축하드립니다, 형님. 생도 여럿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던 서주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에 당황한 주위 생도들이 허둥지둥 왜 우느냐 물었으나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좋아서… 너무도 좋아서 그럽니다.”

살면서 태자비마마만큼 좋아할 사람이 또 생길까요.

서주는 물을 수도 없는 질문을, 묻지 못하여 답도 돌아올 수 없는 질문을 품고서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

태은궁의 뒤편에는 작은 화원이 딸려 있었다. 화원이 딸린 궁을 내린 것은 사시사철 눈이 나리는 은월국에서 온 태자비를 위한 황실의 작은 선물이었다. 올 듯 말 듯 좀처럼 오지 않는 희락기로 인하여 연우는 최근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월앙인이나 동시에 사내의 몸이기에 와야 할 시기도 제때 오지 않는 것일까. 이런 태에 황자가 찾아올 수는 있는 것일까. 곁을 지키는 최소한의 인원도 멀리 물린 뒤에 고요히 상념에 잠겨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황태후의 걱정도 커져만 갔다. 황제 내외는 늘그막에 들어선 복중 태아에 온 마음과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날도 황태후가 급작스레 찾아간 것이었으나 연우는 궁을 지키고 있었다. 사냥을 앞두고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태자의 말을 모른 척할 수 없어 근래에는 최소한의 수업에만 참여하는 중이었다.

“태자비의 낯빛이 좋지 않구나.”

“괜찮사옵니다, 태후마마. 소첩 심신 모두 강건하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렇게 말하여도…….”

“정말입니다. 태의도 문제없다 말하였고, 소첩 역시 거동에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니 걱정을 거두어 주십시오.”

더는 제 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태자비의 마음이 태후에게 곧게 닿아 왔다. 태후는 혈혈단신 태영국으로 온 연우에게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사내이면서 동시에 복중에 태가 깃들 수 있는 몸이었다. 게다가 어렸을 적에 월앙인으로 발현한 것도 아니니 그의 심란함이 태자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여 씻은 듯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태후는 그리 생각하며 그의 몸에 대한 말은 일절 하지 않고 가만가만 제 얘기를 하였다.

“태영국에서 대대로 월앙인을 황제의 짝으로 맞고 있지만 나는 그리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고는 할 수 없지.”

“…….”

“빈말로도 행복했다고 할 수 없어…….”

황태후는 은월국 왕의 정실이 아닌 후궁에게서 난 딸이었다. 옹주로 불리며 아무것도 아님을 끊임없이 되뇌며 살던 황태후는 태영국에서 선황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되뇌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될 수 없다. 하나 선황은 누구보다도 황태후를 사랑하였다.

낯선 곳에서 좀체 적응하지 못하여 겉돌던 어린 황태후에게 다섯 살이 많던 선황은 나긋이 말을 걸었다. 은월국보다 태영국이 조금 더 따뜻하지요? 그러니 떠나지 말고 내 곁에 있으세요, 황후. 태영국의 황제는 은월국의 월앙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에. 필연이며, 둘이 태어난 순간부터 이어진 운명이었으나 황태후는 제게 조심스레 은애한다 말하는 선황을 한 번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었다. 은애한다는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제 마음을 표현한 최대치였다.

주름이 진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던 태후는 말없이 제 곁을 따라 걷는 연우의 손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태영국의 사내들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조금 서툴러도 그 마음을 지키는 이들이니….”

“……마마.”

“새아가가 나같이 후회할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뿐이란다.”

나는 그가 멀리 떠난 후에야 그것을 알았으나 새아가는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몇 걸음을 더 옮기지 못하고 쉬이 지친 기색을 보인 황태후는 무어라 마땅히 대꾸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연우를 뒤로하고 작은 가마에 올라탔다. 들어가서 쉬라는 말에 연우는 알겠다고 하였으나 조금 더 화원을 거닐 수밖에 없었다.

제 몸은 제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온 세월이 스무 해였다. 머릿속으로는 언제든 황손을 품을 수 있는 몸이라고, 저는 이제 월앙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다만 생각일 뿐이었다. 마음 한편에는 자유로이 활을 쏘고 설산을 누비던 스스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가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을까. 언제 열이 몸을 타고 오를지 몰라 불안에 떨며 사는 것보다 그때가 더 행복했는데. 과거를 돌이켜 보며 추억하는 것은 괜찮았으나 최근 연우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온전히 사내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살며 다시 만날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제현의 생각이 뒤따랐기에 가슴에 무거운 추를 놓은 듯하였다.

“아이를 가지면… 나아질 터인데.”

습관처럼 중얼거렸으나 확신은 갖지 못하였다. 태자의 품에 안기면 온 세상이 저를 등지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한발 물러서서 보면 태자에게 저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으로만 여겨졌다. 당장 황자를 태내에 품지 못한다면. 적어도 뭇 사람들의 조소는 사고 싶지 않아 연우는 자꾸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굴게 되었다.

“부인!”

“…저하.”

“잠깐 들르려고, 내 저- 기, 나무에 무화과가 열린 것을 보고 그대 생각이 나서…….”

언뜻 보면 먹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짙은 푸른빛의 훈련복을 입은 태자가 멍하니 서 있는 태자비의 품 안 가득 무화과를 안겨주었다. 연우는 제 품으로 잔뜩 쏟아진 무화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찌 기뻐하지 않으실까, 태자는 어서 훈련에 다시 참여해야 했으나 조금 더 부인의 마음을 다사롭게 만들어 주고파 몇 마디를 보태었다. 듣기에 간질거리고, 약간은 부끄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사랑을.

“내 부인을 닮아 동글동글, 귀여운 것으로만 따 왔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주지 마시고 부인만 드셔야 합니다. 알겠지요?”

“……예, 저하.”

“하면 내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먹고 기운 차리시는 겁니다, 부인.”

고운 내 사람. 태자는 다시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기기 직전까지 연우의 볼이며 이마에 마구 입술을 찍어 댔다. 연우는 아무 말 없이 제현의 입맞춤을 받고, 그가 가고서 제 주위의 궁인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

왜 이리 기분이 오락가락할까 모르겠네, 연우는 자조하며 소맷부리에 눈물을 찍어냈다. 그리고 태자의 말을 따라 무화과를 모두 먹었다. 무화과를 한 알 먹고, 소매로 눈가를 툭툭 찍고, 계속 그를 반복하였다. 그가 안겨준 무화과가 너무도 많았기에 연우는 한동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

내일 드디어 사냥을 나가는군요.

태자는 전에 없이 침잠한 음성을 뱉어냈다. 헐벗은 두 몸뚱이는 한참 동안 서로를 사랑했으면서도 부족하다는 듯 엉겨들었다. 연우의 팔은 태자의 단단한 상체에, 제현의 팔은 점점 말랑해지는 태자비의 허벅지며 둔부를 어루만졌다.

“시간이 참 빠르다 느껴집니다, 요새는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가곤 하니 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부인은 잘하고 있는 것을요. 현부(賢婦)라며 궁인들이며, 황실 어른들께서도 부인을 칭찬하지 않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내 사랑.”

“더 잘하고 싶고… 가끔은 쉬고도 싶고…….”

“내일 사냥도,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부인. 몸이 힘들면 하루쯤 쉰다고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습니다. 감히 황태자비에게 누가!”

가끔 쉬고 싶다는 말에 태자의 말씨에 생기가 돌았다. 옳다구나, 힘들다면 쉬어야지. 암암, 굳이 몸을 혹사시킬 필요가 있는가. 그는 제 가슴팍에 뉘어진 자그마한 머리통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연우는 이내 고개를 저어 보였고, 태자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하나 갈 것입니다. 생도들과의 약속이기도 하니 그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

“아, 음……. 부인,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부인의 신체 강녕함이 먼저이니…….”

태자비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끔 돌려 돌려 말을 건넸으나 연우의 표정은 어김없이 굳어졌다. 이번엔 무엇을 잘못 말한 것이지? 태자는 조바심이 일어 괜스레 이미 안고 있는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는 그대 앞에서 언제까지나 어린 사람이니, 내가 그대보다 성숙해질 일은 없으니 내 잘못을 조금 못 본 척해주면 안 되는 것일까. 안 그래도 여러 서적에서 본 월앙인과 태영국 양인의 상성에 관한 것들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태자였다. 이 와중에 연우에게 미움까지 사고 싶지는 않아 그는 정작 해야 할 말들을 꺼내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던 연우는 일순 잘게 떨렸다가 진동이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태자를 보듬으며 말하였다. 너무도 자주 들어 이제는 질려 버린 말이었다.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부인…….”

“금세 나을 것입니다. 눈 깜짝할 새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어요.”

몸의 열도 금방 내릴 것이고, 황손도 금방 저희를 찾아올 것입니다. 하면 내 마음의 파고도 잦아들어 저하에게 이전처럼 다정하고 성숙한 태자비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에 어마마마께서도 몸에 열이 오르내리길 반복하다가 원자 생산 후 건강을 되찾았다 들었습니다. 이번 사냥을 나가지 않으면 소첩이 언제 또 생도들과, 또 저하와 산과 들을 누빌 수 있겠습니까?

“걱정하시는 것은 알지만 그리 큰일이 아니옵니다. 참말이어요, 저하.”

“……알겠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좋은 꿈을 취하십시오, 부인.”

“저하의 품 안에 있으면 언제고 꿈결 같은 것을요.”

그대가 내 꿈이고 모든 것이지요. 다디단 말을 끝으로 연우는 까무룩 잠에 들었다. 제현은 말이 없어진 연우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

“주무십니까, 부인?”

누가 업어 가면 어쩌려고 이리 급히 깊은 잠에 드시는지. 말은 그리하면서도 그가 사랑스러워 눈을 떼지 못하던 제현은 비단 금침을 맨몸에 곱게 덮어주었다. 풀썩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심히.

“내일 내 곁에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부인이 내 곁에 없어도….”

“…….”

“내가 부인을 따라다니면 되지요.”

내일 있을 사냥에서 나는 필히 부인에게 질 것입니다. 사냥감이 아닌 그대만 졸졸 쫓아다닐 것이니.

곤히 잠든 연우를 바라보던 제현도 서서히 눈을 감았다. 제현 역시 연우의 곁이면 어디든 꿈결 같았기에 잠이 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아니하였다.

***

닭도 울지 않은 신새벽에 눈을 뜬 연우는 허리를 이리저리 돌려 보고, 팔도 등 뒤로 뻗어 쭉 늘여 보았다. 확실히 몸 상태가 좋았다. 이상하게 가뿐하여 기분도 평소보다 쉬이 들뜨게 되었다. 어쩌면 희락기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연우는 그리 생각하며 여즉 감겨 있는 태자의 눈두덩에 촉, 촉 입을 맞추었다. 태자는 잠결에도 자연스레 옆자리의 정인을 제 품에 당겨 안고서는 느른히 그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바보. 연우는 자그맣게 중얼거리고선 색색 숨만 들이마셨다 내쉬는 태자의 얼굴 이곳저곳을 매만졌다. 반듯하다기보다는 번듯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이마 한 번, 사납고 곧게 뻗은 눈썹 뼈도 한 번. 검고 숱이 많은 눈썹은 연우가 태자의 생김새 중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었기에 연우는 날렵한 턱을 문지르다가 괜히 눈썹과 관자놀이 부근에 입술을 묻고 중얼거렸다. 여기도 잘생기고, 저기도 잘생겼지만 바보. 자는 이에게 바보라고 말하는 것도 별거 아니지만 퍽 재미가 좋았다.

“바보야.”

“으음…….”

“귀여워라.”

이리 잘난 사내가 나밖에 모르다니. 희락기며 사냥이며, 제 속을 상하게 하는 생각을 접고서 연우는 태자를 마음껏 주물럭거리며 혼자 재미를 보았다. 무엇을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근래 들어 제게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색을 끊임없이 비치는 태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왜 없겠는가.

연우는 그의 입가에 고요히 입을 맞추며 고백하였다. 태자가 일어나 있었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소리로.

“소첩이 미우실 수 있으나… 그래도 다 저하가 너무도 좋아 그러는 것을 알아주셔요. 저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내가 되고 싶어 그런 것임을.”

오늘 사냥이 끝나면 재미나게 놀아드릴 터이니 기대하십시오, 내 사랑. 연우는 부끄러운 말을 끝으로 얼굴을 붉히며 다시 태자의 품으로 쏙 들어가 눈을 감았다. 나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제게 오지 않을 것 같은 품이었다.

날이 밝자 태자와 태자비는 궁녀들이 해야 할 일을 서로에게 해 주었다. 태은궁을 지키는 궁녀와 내관을 비롯하여 호위무사들까지도 이제는 그들의 애정행각에 익숙해진 터였다. 태자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이 마주치자 다정히 웃는 낯을 보였으나, 태자는 평소와 달리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는 걸 말해야 할까. 태자는 고민하며 연우에게 사냥에 나가기 위해 색을 맞추어 지은 옷을 입혀주고, 그에 맞는 허리띠를 매주었다. 하나 그의 목덜미에 가까이 갈수록 향이 짙어졌고, 결국 태자는 허리띠를 매어주는 척하며 연우의 가는 허리를 덥석 안고는 끙끙 앓으며 말하였다.

“부인, 오늘 사냥을 나가도 괜찮은 것입니까?”

“그러믄요. 요 며칠에 비하여 몸도 아주 가뿐히 움직일 수 있답니다. 오늘의 사냥도 저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 긴장하셔요, 저하.”

연우는 태자의 걱정을 묵살하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은 정말이지 전에 없이 상태가 좋았다. 새벽에 잠시 일어나 움직이는 것도 월앙인이 되기 전의 몸 상태와 비등하여 얼마나 기뻤던가. 연우는 역시 월앙인의 몸으로 사는 것보다는 이전의 몸으로 사는 편이 제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하였다가 금세 지워 버렸다. 지금의 제 삶에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저는 태영국의 황후가 될 사람이니.

반면 연우가 방글방글 웃으며 제게 다정히 굴어줌에도 태자의 불안은 좀체 가시지를 않았다. 향이 너무 짙은데, 정을 통할 때가 아닌 이상 이렇게 후각을 자극하는 향을 내지 않았는데.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이 좋지 않았다. 오늘 사냥에 나가면 큰 변을 당하게 될 것만 같았다. 제현은 다부지게 주먹을 쥐고서 걱정 말라며 저를 안심시키는 태자비에게 좀체 밝은 웃음을 보이지 못하였다.

“소첩도 사내인데 언제나 그를 잊으시지요?”

“아, 아직 희락기도 오지 않았습니다. 분명 이 즈음에 희락기가 오고, 그리하여야 몸의 열이 내릴 것인데……!”

“오늘은 열도 나지 않는데 걱정이 과하십니다, 저하. 정 걱정이 되신다면 태의를 불러 맥이라도 짚게 할까요?”

답답하단 듯이 허리춤에 찬 검집을 쥐었다 놓았다만 반복하는 태자를 보는 것 또한 적잖이 답답한 일이었다. 하여 연우는 종래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한 발짝 떨어지며 말하였다.

“저하께옵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소첩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월앙인이라 하나 여타 사내들과 다른 바는 회임할 수 있다는 것뿐인데.”

“부인…….”

“소첩은 저하에게 그만큼의 믿음도 주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까?”

아차, 하였다. 그런 말까지는 하는 게 아니었다고, 말을 뱉자마자 후회하였으나 이미 태자의 입은 굳게 닫혀 버린 후였다. 어떤 말을 해야 그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 지나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잠겨 버릴 것만 같다 느낄 때였다.

“부인이야말로, 내 마음을 모르시면서.”

“…….”

등 뒤로 익숙한 온기가 저를 감싸 옴에 연우는 눈을 내리뜨며 그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주었다. 항상 어른스러운 것은 저이고, 아이처럼 앙살맞게 구는 것은 그의 일이라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그도 아닌 듯싶었다. 연우는 그의 손가락 마디를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심했습니다, 소첩의 부덕함을 용서해 주셔요.”

“부인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 저하.”

“그저, 나는, 내가 부인을 아끼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에. 그래서 부인의 속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여.”

그러니 자책하지 마시고 내 탓을 하십시오. 마음을 먼저 헤아리지 못한 것은 내가 아닙니까.

절대 당신의 탓이라 하지 않는 태자에 연우는 조금쯤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고개만 끄덕였다. 하나 자신 있었다. 조그마한 상처 하나도 얻지 않고 사냥을 다녀올 자신이. 연우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안도감을 믿으며 태자의 손을 쓸어내렸다. 제 마음이 태자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러나 연우는 정녕 태자의 마음은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서주, 내가 준 선물은 받아 보았는가?”

“아직 받아 보지 못했사옵니다, 마마.”

“태영국에서 제일가는 세공사에게 맡겨 그런가 보아. 그렇지요, 저하?”

“…조만간 그대에게 하사할 걸세.”

어찌 사냥터에 도착하자마자 서주에게 달려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인가. 그가 당신을 보는 눈이 나와 같으니 불안하다는 마음을 분명 전하였는데.

제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간신히 풀며 웃어 보였다. 서주보다 조금 작은 신장의 태자비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며 어서 선물을 전해주고 싶다 말하였다. 그의 밝은 모습은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고 그저 귀여워해 주고 싶은 것이었으나, 굳이 서주 앞에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서주를 좋은 신하라 생각하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보는 서주의 눈은 단순히 좋은 신하의 입장으로 그를 보는 것이 아니었음에 불안감은 가중되었다.

하나 오늘은 어쩐지 서주의 눈빛이 잠잠하였고, 태자비에게 필요 이상의 접촉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였다. 태자는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풀고서 뛸 때마다 달랑거리는 태자비의 꽁지머리를 톡톡 치며 웃어 보였다.

“아이참, 저하! 생도들이 보는데 소첩을 부끄럽게 만드시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런 것입니다. 부러 그런 것은 참말 아닙니다.”

“큼큼! 자, 오늘 사냥은 태자 저하와 태자비마마를 선두로 하여 다들 그 뒤를 따르는 식으로 할 것이다! 모두 저하와 마마의 뒤로 정렬하게!”

말 위에 올라타고서도 아옹다옹하던 제현과 연우는 무과 생도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장군의 말에 정자세를 취하였다. 연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얼른 서주를 제 뒤에 오게 하였으나, 생도들 모두 연우와 서주가 각별히 친교를 맺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알아서들 뒤로 물러서 줄 따름이었다.

“자네는 이번에도 나와 군을 짜는 것일세.”

“예, 마마.”

“나를 잘 보필하지 못하면 저하께서 심하게 다그칠 것이니 알아 두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태자비를 보던 서주는 옆에서 등을 한 번 툭 치는 태자에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없이 긍정하였다. 태자는 연우를 보기 전과 같은 태도에 안심하며 비로소 진실로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부인, 무슨 일이 있으면 이 호각을 부십시오. 하면 내 언제든 부인에게 달려갈 터이니.”

“알겠습니다, 저하. 이따 뵈어요!”

가자, 연우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호각을 쥐며 짧게 끊어 말한 뒤에 말을 몰고 먼저 사냥터로 향하였다. 그를 뒤따르는 수십 명의 생도들을 보며 태자도 말을 몰기 시작하였고 이내 부연 흙먼지가 일었다. 하나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로 인하여 흙먼지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호기롭게 사냥터로 향한 연우는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개의치 않고 주저 없이 사냥감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작은 날씨의 변화에도 활의 향방은 갈렸으나 은월국에서 제일가는 명궁에게는 그조차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래, 이 느낌이었지.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설산에서 사냥하던 기억을 떠올린 연우는 입꼬리만 위로 끌어당겨 미소 지었다. 장성한 사내 몇과 사냥 대회를 하여도 승자는 언제나 자신이었던 기억을 떠올리자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고조되었다.

마구잡이로 사냥감을 쏘아 대며 환호성을 내지르는 연우를 쫓던 태자는 자연스레 그에게서 멀어지고 말았다. 제가 아무리 태자비를 사랑한다고 해도 태자라는 신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수십의 생도들을 다 살피기는 어려우나 그래도 생도들의 우두머리라 칭할 수 있는 자들 정도는 제 곁에 두고 지시를 하여야 했으니,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뒤로하고 내달리며 사냥에 열중하는 제 부인을 따르기에는 아무래도 벅찼다.

사냥감을 하나라도 더 잡겠다며 호기롭게 활시위를 당기던 어린 생도 하나가 낙마하려던 때였다. 제현은 눈으로나마 쫓던 태자비에게서 멀어진 채 생도의 목 부근을 잡고서 그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어린 생도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태자에게 차마 감사를 전하지도 못하였으나 제현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인, 태자비는 어디로 갔느냐?!”

“사냥터의 끝까지 가시겠다며 말을 몰고 사라지셨습니다.”

사냥터의 끝이라니. 이 넓은 황궁의 사냥터에 끝이란 게 있을 리가. 있다 하여도 황궁 소유의 터가 아닌 궁 밖의 산으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태자는 허둥대며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위 어느 곳에도 태자비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과도 같은 상태의 월앙인이었다. 침착하려 하였으나 쉬이 가빠진 숨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아니하고 그의 낯을 어둡게 만들었다. 하나 생도들에게 월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싸지는 존재가 되는 것을 저어하던 태자비였다. 태자는 사냥을 멈추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이내 다른 말을 뱉어냈다.

“특별한 명을 내리기 전까지는 계속 사냥을 하여도 괜찮다. 하나 사냥을 하다가 호각 소리가 들리면 다들 그곳을 최우선으로 살피거라.”

태자는 짐짓 무심하게 말을 뱉어냈으나 손에 땀이 흥건하여 자꾸만 고삐가 미끄러졌다. 불안할 것은 없는데도, 그의 곁에 누군가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제 주위로 몰려드는 생도들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태자는 다시금 말을 몰았다. 월앙인이라고 아무것도 못 하는 얼치기 취급을 하지 말아 달라는 태자비를 믿고서.

***

“다들 내가 잡은 것을 보… 응? 게 아무도 없는가?”

하늘을 날던 매를 쏘았을 때였다. 태자비는 어쩐지 지나치게 고요하다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 매뿐이었다. 연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닌가 뒤늦게 생각하였다. 하나 말 그대로 뒤늦은 생각이었다. 이미 주변은 제가 알지 못하는 풍경이었고, 그는 낯선 기분에 한순간 등골이 버쩍 섰다가 가라앉음을 느꼈다.

사냥에 열중하다 보면 충분히 이럴 수 있는 법이지. 연우는 너끈히 합리화를 하고서 유유히 산을 돌았다. 보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사냥에도 곧 흥미가 떨어졌다. 그는 주렁주렁 사냥감을 매달고서 말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목에서 달랑거리는 작은 호각을 보니 정인이 생각나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더 달려야 사냥터의 초입이 나오는 거지?”

하나 아무리 달려도 출발하였던 시작점이 보이질 아니하였다. 빗줄기는 거세졌고,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며 말을 조금 더 보챘지만 속력은 나지 않았다. 연우는 사냥감을 하나둘 떨구며 말의 짐을 덜어주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역시 제 뜻에 따라주지 않아 발만 동동 굴렀다.

비라도 그치면 조금 나을 텐데. 연우는 옴팡 젖은 몸을 떨며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려 애를 썼다. 이리될 줄 알았다면 눈에 띄는 곳에 지표라도 남기고 오는 것인데.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던 연우는 제 몸에 열이 오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잘못된 길만 뱅뱅 돌았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몸의 열이 비단 비로 인한 것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팔과 다리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중이었다. 이상하다, 아침만 해도 괜찮았는데. 연우는 통 말을 안 듣는 제 몸뚱어리에 결국 호각을 불었다. 결코 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였으나 당장 태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몸에 열이 오르면 언제나 태자가 곁에 있어 주었으니 그만 제 곁에 있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저하, 저하…….”

흡사 꿀이 녹듯 말의 위에 엎드려 간신히 중심을 잡던 연우는 거친 산세에 지나가던 나그네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작은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축축한 바닥과 공기가 유난히 차게만 느껴졌다. 연우는 이마에 맺힌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을 연신 손바닥으로 훔쳐내며 다시 호각을 불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공명하였으나 빗소리에 가려 잘 들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안 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에 연우는 삑, 삑 열심히 호각을 불었다. 언제든 제 곁을 지키겠다며 수더분하게 웃던 태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딱 스무 번째 호각을 불었을 때였다.

“저하……?”

귓가로 따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급히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찼다. 연우는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움막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안겨들었다. 저하, 저하, 소첩이 잘못하였습니다. 다시는 멋대로 굴지 않을 것입니다. 더는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울먹이는 몸을 단단한 팔이 받쳐 안았다.

하나 유일한 생명줄인 마냥 목을 부둥켜안았을 때 돌아온 목소리는 호각을 쥐여 주던 이의 것이 아니었다.

“마마…….”

마마라니. 그가 나를 부를 때는 언제나 부인이라고 부르는데. 몸 안 깊숙이부터 끌어 오르는 열에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애써 바로잡자 보이는 얼굴에 연우는 버둥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났다.

“저하, 저하!!”

목덜미를 파고드는 이에게서 마땅히 느껴져야 할 체향이 느껴지질 아니하여 그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향이지? 어디에서 이리도 사람을 미혹시키는 향이 나는 것일까. 물이 가득 차 한 입 베어 물면 달큼함이 물씬 들어찰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풀잎 하나 없이 꽃잎만 무성히 깔린 들판에 누워 있는 듯하구나. 맛을 보면 어떨까. 향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하니 맛을 보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어.

“으윽, 흑…….”

“마마, 태자비마마…….”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하였으나 저도 모르게 태자비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질 못하였다. 이는 신하 된 도리이다, 그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러는 것이니 태자 저하께서도 용서해 주시리라. 서주는 그리 생각하며 사냥을 하는 내내 태자비를 쫓았다. 하여 가장 먼저 호각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있는 곳을 쉬이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향이 눈으로 보이는 듯한 착각에 휩싸여 들어간 움막에 그가 있었다.

딱 한 번만.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며 서주는 오들오들 떠는 태자비를 힘주어 안고서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하나 폐부로 스며드는 향은 도저히 한 번으로는 족할 수 없을 정도로 향긋한 것이었다. 월앙인의 향을 태자에게서 뺏고자 하는 마음은 감히 가질 수도 없었고, 이제는 서주 자신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막상 심신이 약해진 월앙인을 앞에 두니 정신을 바로 차리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이, 이러지 말게나, 내가 잘못했네, 이거 놔…!”

“한 번만, 마마,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태자 저하의 곁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하니 한 번만이라도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 무슨, 무슨 소리인가. 나를 저하께 데려다줘, 어서!”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닌 두 사람의 팔다리가 엉켰다. 한 사람은 거부하며 버둥거렸으며, 또 한 사람은 가져서는 안 될 욕심에 몸부림쳤다. 연우는 사뭇 절절한 눈빛을 하고서 제게 달려드는 사내를 보며 울음을 참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울 일도 아니었으며,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을 터였다. 태자의 사람 중에서도 행동거지와 사상이 맑고 바른 자였다. 제 열이 가라앉고, 더불어 향이 사라지고 나면 그도 후회하리라. 연우는 그리 믿으며 축축한 바닥에 떨어진 호각을 쥐려 팔을 뻗었다.

“안 돼!!”

“아무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주의 손이 호각에 먼저 닿았고, 그는 호각을 멀리 던져 버렸다. 연우는 분에 겨워 그에게 주먹질하였으나 흐린 시야로 보는 세상은 부옇고 흐렸다. 설상가상으로 몸에 힘은 자꾸만 빠져나가 제힘을 온전히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마, 한 번입니다. 마마를 해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서주의 목소리에 몸이 차게 식었다. 무릎걸음으로 움막 밖으로 나갔으나 금세 발목을 잡힌 채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간 연우는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서러웠다. 월앙인만 아니었다면 이리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사냥을 나오기 전 태의의 말을 듣고 탕약을 먹었을 것인데. 아니다, 그저 태자의 곁에서 얌전히 있었더라면…….

모든 후회의 순간들을 돌이켜보며 연우는 제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라며 자조하였다. 월앙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신하에게 범해지는 일 따위는 없었을 터이니. 하나 이미 태어난 것을 어찌 돌이킬 수 있겠는가.

이리 태어난 것이 죄라고 한다면 죄이겠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처연한 태자비로 남지는 않으리라. 속으로 뇌까린 연우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자위로 저를 덮치는 서주를 피하며 마지막으로 팔을 뻗었다.

“아아아악-!!”

“마마!!”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에 서주의 정신이 일순 향을 맡기 전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든 그는 눈앞에 보이는 참상에 입을 막고서 오열하였다.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마마!!”

태자비의 손에는 그가 자랑하던 은월국의 장인이 세공한 화살이 들려 있었고, 그 끝에는 검붉은 피가 낭자하였다. 거짓말, 이럴 수는 없어, 내가 바라던 건 이게 아냐……. 서주는 울컥울컥 피가 솟는 태자비를 안고서 말에 올랐다. 배에 꽂힌 활을 빼내면 피가 더 배어 나올 것 같아 서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말을 몰았다.

“마마, 일어나십시오, 제발… 일어나셔서 소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맡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던 향은 피비린내에 가려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서주는 제게 안긴 태자비에게 몇 번이고 죄를 고하였으나, 태자비는 하나도 듣지 못하고 간신히 숨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제 선택이 후에 어떤 일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고.

***

아아아악-!!

온 산에 단말마적인 비명이 울렸다. 산의 이리저리를 돌다가 닿은 소리에 태자는 귀가 아닌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와 검과 활을 모두 떨군 채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주인의 불안함이 옮겨간 것인지 말 역시 잘 뛰다가도 한 번씩 발작하듯 자리에서 헛발질하며 그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내가 미안하다, 어서 가자, 응?”

“저하, 진정하시고……!”

“내 곁에 있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태자비를 찾아!!”

“예, 예 저하!!”

별일 아닐 것이다. 그저 사냥감이 손에 잡히질 않아 신경질이 나 소리를 지른 것이겠지. 피는 사람을 쉬이 들뜨게 하고 거칠게 만드니 그럴 수 있어. 분명 큰일이 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곁에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을 것이니…….

거기까지 생각한 태자는 불현듯 그의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이 나았을지, 아니면 없는 것이 나았을지를 확신할 수 없어졌다. 뺨을 찢을 듯이 때리는 빗줄기는 시야만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고마저 뻣뻣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내리는 비로 인해 생긴 웅덩이에 말발굽이 빠져서 그를 태운 말이 달리지도 못하였다.

“가자, 응? 어서… 어서 가자, 제발……!!”

말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태자는 어르고 달래서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서 이내 안장에서 뛰어 내렸다. 하나 드넓은 산세를 발로 뛴다 한들 태자비에게 쉬이 닿을 리 만무하였다.

“저, 저하를 속히 마차에 타시게 하라!”

“마차가 왔습니다, 저하!!”

“태자비마마는 아직도 찾지 못하였느냐?!”

“생도들과 호위무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수색 중입니다, 교육관 어르신!”

모든 소리가 곧이들리지 않고 웅웅 울리며 사라졌다. 소리의 끝은 또다시 비명이었다. 이제는 비명이 귀와 마음뿐만 아니라 눈에서도 이지러졌다. 연우의 우는 얼굴이 자꾸만 눈동자에 비쳤다 사라져 태자는 울음을 참았다. 그럴 리 없었다. 연우의 말마따나 제가 여즉 어리고, 그의 일이라면 사소한 것도 부풀려 생각하니 이리 불안한 것이다. 그렇고말고. 누가 태영국의 황후가 될 이에게 해를 입히겠는가? 그럴 리 없다. 내 그런 자가 있다면 단칼에 목을 베고 죽음으로도 갚지 못할 죄를 그의 대에 걸쳐 갚게 하리라. 하나 그럴 일은 없다. 그는 무사할 터이니.

사무치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마차로 오를 때였다. 부우우- 하고 울리는 뿔 나팔 소리에 태자는 다시금 질퍽한 지면에 발을 디뎠다. 비는 여전히 거세게 내려 말에 탄 이가 잘 보이질 아니하였다. 태자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진흙땅을 박차고 달렸다. 누구여도 괜찮으니 부인이 무사하다는 것을 내게 알려다오. 그의 웃는 낯을 보고 싶구나, 허리띠를 매어 주던 손을 잡고서 따스함을 확인할 수 있다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다행히 말에 탄 이는 연우인 듯하였다. 태자는 기껍게 웃으며 거추장스럽게 달라붙는 겉옷을 벗어 버렸다. 누가 흉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얼른 연우에게 가 번쩍 들어 올려 말에서 내려준 뒤에 품에 꼭 안고서 추위를 달래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그보다 더 중한 일은 없었다.

“부인!!”

태자는 손을 홰홰 흔들며 뛰었다. 한데 이상한 기운이 온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부인의 살결이 저렇게 파르라니 하얀 빛을 띠었던가? 가만 보니 팔과 다리도 안장에 제대로 앉았다면 할 수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운 몸은 금방이라도 말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연우의 목이 꺾이며 뒤에 있던 자의 얼굴이 보였다. 서주였다. 서주는 울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리에 우뚝 멈춰 선 태자는 눈만 꿈뻑이며 제가 보는 것이 현실이 맞는지를 가늠하였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저와 입을 맞췄던 이였다. 저리 축 늘어진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부인……?”

서주의 품에 달랑 안겨 제게 오는 태자비에 제현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태자는 그의 부인을 안아 들고서 볼을 맞대었다. 온기가 없었다. 마땅히 느껴져야 할 체온이 느껴지질 않았다.

“부인, 나, 나를 좀 보세요, 부인.”

당신이 나를 놀리는 데 재미를 붙인 것을 알지만 이는 너무합니다. 내가 얼마나 그대를 찾아 동분서주하였는지 안다면 이런 질 나쁜 장난을 계속해서는 안 돼.

태자는 중얼거리며 연신 연우의 볼을 쓸어내렸다. 빗물인지 제 눈물인지 모를 것이 연우의 파리한 얼굴 위로 쏟아졌다. 눈물이라니, 말도 안 되지. 울긴 왜 운단 말인가.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그리 생각하며 품 안의 이를 추어올릴 때였다.

“…….”

발치에 피가 떨어져 있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태자는 그를 안아 든 제 손을 확인하였다. 비인 줄 알았던 것은 미끈거리는 피였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태자비에게서 나온.

“아, 으, 잠깐, 부인……. 나, 내, 내 손을 잡아 보세요, 부인……?”

“…….”

“우으…… 윽, 흐…….”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던 태자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음에 결국 오열하였다. 산에는 그가 들었던 것과 꼭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고, 비는 그치질 아니하였다.

***

아무리 조심히 말을 몰아도 비가 내리는 산속을 내달리는 마차는 평상시보다 크게 요동을 쳤다. 하나 태자비는 태자의 품에 가만히 안겨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궁은 아직도 멀었단 말이냐?! 언제, 대체 얼마나 더 달려야 궁에 갈 수 있느냔 말이다!!”

“마부에게 더 빨리 말을 몰라 이르겠습니다!”

지긋이 나이를 먹은 장군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낯선 궁으로 와 곧잘 적응하는 모습이 기특하고도 동시에 안쓰럽다고, 성정이 제멋대로인 태자를 잡아줄 수 있는 아이라며 칭찬을 하던 황제 내외의 표정이 눈에 선하였다. 한데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막 발견했을 때보다도 더욱 새하얘진 얼굴에 그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그의 마음이 급해진 데는 태자의 고요함도 한몫을 하였다. 혼인하기 전 쉬이 욱하는 성질을 죽이지 못하는 태자에 황궁의 여론은 좋지 못하였다. 황위에 오르게 되면 폭군이 되는 것은 아니냐며 걱정하는 소리도 잦았다. 그러나 태자비를 만난 후로 많이 너그러워진 제현이었다. 누구를 위하는 법도, 주위를 살피며 챙기는 법도 모두 그에게 배웠기에.

“부인, 춥지요……. 내 안아드리리다. 조금만 더 가면 궁입니다. 얼른 태의를 불러 그대를 보일 수 있습니다. 금방 나을 수 있어요.”

피를 흘리는 것은 태자비뿐이었으나 태자 역시 그와 같은 고통을 느끼는 듯 괴로워하였다. 마부를 비롯하여 생도들, 교육관인 장군을 다그치지 못함은 품 안의 이를 살피는 데만도 모든 힘을 다 쏟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현은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그를 보듬어 안으며 연신 코 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미약하지만 숨이 붙어 있었다. 그거면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제현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태자비는 곧 눈을 뜰 것이고, 그거면 더 바랄 것은 없었다.

“저하, 성안에 당도하였습니다. 생도들이 이미 궁에 태자비마마의 상황을 말하여 태의가 준비 중이라 합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고맙네.”

기운이 하나도 없이 말하였으나 태자비를 안아 들고 마차에서 내린 태자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안고 있는 몸이 시시각각 차가워지니, 아무리 괜찮다고 생각해 보아도 조급증이 이는 데 도움이 되질 않았다.

“아가, 왜 이런 꼴이 되어 온 것이냐, 아가…….”

회임 중인 황후는 태내의 황자에 혹여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저어되어 태은궁에 오질 못하였고, 황제는 태영국과 형제의 연을 맺은 나라로 가 태자비의 상황조차 듣지 못하였다. 하여 태은궁에 자리한 것은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태황태후뿐이었다.

힘없이 침상으로 눕혀지는 몸에 태후는 차마 그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곧 사냥을 나가는데 저하가 심히 염려하셔서 옆에 꼭 붙어 다녀야 하지 싶습니다. 그리 말하며 부끄럽단 듯이 지면을 발끝으로 톡톡 차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태후는 배에 꽂힌 화살부터 제거하여야 한단 태의의 말을 듣고서 연우의 이마를 한 번 짚어 보고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떠한가, 괜찮은 게지?”

“화살은 그리 깊이 꽂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희락기가 겹친 듯하여 그것이 걱정입니다. 열이 이리 심한 이유는 월앙인의 경우 대개 희락기 탓이옵니다, 저하. 막힌 기와 혈을 풀기 위해서는 각인한 상대와 정을 통하여야 하는데 당장 그럴 수는 없으니…….”

황궁의 태의 중에서도 우두머리 격인 자가 복부의 살을 째고서 활을 뽑자 피가 한 번 울컥 터져 나왔고, 그는 바로 지혈할 수 있었다. 하나 태의의 말대로 태자비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축축할 정도로 흐르는 것은 이제 피가 아니라 식은땀이었다. 하나 그는 태자비를 종종 살피던 태의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태자비가 그동안 탕약을 복용치 않은 것은 알지 못하였다.

응급 처치는 모두 잘되었다고 하나 가쁜 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태자비를 보며, 태자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차마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몰래 뒤를 돌아 눈물을 찍어내는 태후도 챙길 새가 없었다. 다만 그의 손을 잡았다가, 밤이 되자 그의 옆으로 누워 가슴팍을 도닥여 주는 정도가 태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태후는 틈이 날 때마다 태은궁으로 와 태자비를 살폈다. 차도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태자비와 함께 식음을 전폐한 태자의 얼굴 또한 날로 상하는 게 보일 따름이었다. 태자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태자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태자비와 태영국의 사계절을 여즉 겪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으나 그를 애써 가다듬으며. 태영국에서는 황태자의 비를 맞이하고서 꼭 일 년째 되는 때 특별한 이름을 내리는 것이 전통이었다. 황후가 될 이에게 그 무게를 일찍부터 안겨줄 필요는 없다 여겨서.

태자는 화마에 휩싸인 듯 온몸이 뜨거운 태자비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눈을 뜨면 이름부터 줄 것입니다. 그대는 어질고 현명하니 현비라 부르는 게 괜찮겠지요. 이름을 받고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무언가 족쇄를 채우지 않는다면 이 불안이 영영 나를 따라다닐 것 같습니다, 이해하지요 부인?

말을 할 때마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애써 누르던 참이었다.

“늦은 밤 송구하옵나이다, 저하. 궁인들에게 미리 말을 하였는데…….”

“…그대는 태자비의 전담 태의가 아니었던가.”

“예, 저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마마께옵서 소인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려 왔사옵니다.”

“어서 말해 보라.”

태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언젠가 태자비가 아이가 들어서지 않을까 봐 약을 언제나 물렸다는 것을, 그리고 현재 태영국에서는 월앙인의 기를 다스리기에 꼭 맞는 약재는 구할 수 없음도 함께.

“마마께 몇 번이고 회임은 아주 나중 일이 될 수도 있으며 당장 급한 것이 아니라 말씀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나이다.”

“…….”

“소인이 조금 더 약을 권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 듯하여 그저 몸을 보신하는 탕약만 올려드린 것이 죄입니다. 크나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저하…….”

아아, 아이 말인가.

부담을 갖지 말라 하였으나 언제나 사내의 몸으로 쉬이 회임이 되지 않는 것에 불안해하던 이임을 모르지 않았는데. 한데 그 마음을 보듬어 주지 못하였다. 그저 몸을 섞으며 저와 더 어울려 달라 조르기에 급급하였지.

제현은 판판한 연우의 배에 손을 올리며 태의에게 물었다.

“태자비를… 그의 나라로, 잠시… 요양, 보내야 한다는 소리가 맞는가.”

“……송구하오나, 그 외에는 차도가 있을 방법을 강구하기 힘들다 사료되옵니다.”

“…알겠네. 나가 보게.”

“저하…….”

“그대의 탓을 하는 게 아냐. 그대는 웃전의 말을 들은 죄밖에 없지. 그간 홀로 비밀을 지키느라 애썼네. 내가 미리 알지 못하여 그대에게 짐을 지어주었군.”

태자보다 열몇 살이 더 많은 태의는 끝까지 고개를 조아리며 태은궁을 빠져나갔다. 아랫사람을 위하는 말조차 태자비에게서 배운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여 태의의 마음 또한 좋지 못하였다. 태의는 조곤조곤, 태자 저하를 닮은 아이를 어서 보고 싶다 말하며 납작한 배를 못내 아쉬운 손길로 매만지던 태자비를 떠올리며 걸음을 빨리하였다.

“내게… 조금만 그대 속마음을 알려주었다면…….”

마음고생이 그리 깊은 것을 몰랐던 내가 미련했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다며 조르는 것이 그저 나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투정인 줄만 알았습니다.

“추운 나라라 하여 걱정이 되는데…….”

“…….”

“흐, 윽… 금세 나아서 오셔야 합니다, 부인…….”

언제든 뒤에는 내가 팔을 벌리고 있을 터이니 불안해 마시길, 내 사랑.

***

다음 날, 제현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태자비를 마차에 태워 은월국으로 보내었다.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마차가 시야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자리에 서서 지켜보던 제현은 많은 이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그날 정해진 일과를 빠짐없이 행하였다.

그 일과에는 무과 생도들과의 수업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저하.”

“…….”

“…….”

“죽여 달라 청을 하러 나를 찾았느냐?”

훈련은 여느 때보다도 고요하고 침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태자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였으나 제현은 그런 배려가 못 견디게 힘들었다. 저도, 연우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동정을 사야 하는가. 죄를 지은 것은 제 감정에 못 이겨 아내를 겁간하려 한 이에게 있는데.

제현은 하루가 모두 끝나고 하늘로 먹빛이 스며들 때 즈음 제 처소를 찾아온 서주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태자비를 볼 때마다 네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저하, 그는……!”

“진정 내가 몰랐다면 뒤에서 태자비에게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으라 말하지도 않았겠지.”

변명을 하려 하였으나 서주보다 제현이 먼저였다. 제현은 아무것도 귀담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실상 서주 역시 무어라 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 태자비를 처음 본 순간부터 흠모하게 되었다고 말한들 태자에게 용서를 받을 리 없었고, 그의 향에 이끌려 우를 범했다고 말한다면 태자비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서주는 태자의 앞으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여러 번 찧었다. 쿵, 쿵, 쿵.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궁인들의 어깨가 올라갔다가 내려가길 반복하였으나 서주는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를 때까지 그를 반복하였다.

그를 보다 못한 태자가 텅 빈 눈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더 보고 싶지 않구나.

“내가 누구보다도 너를 믿어, 아내에 대한 마음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더니만…….”

“저하.”

“그 감정을 배우라고 누가 말하였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궁인들의 비명이 터졌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검집에서 진검을 꺼낸 태자는 검의 끝으로 수그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주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은빛의 검으로 방울져 내렸으나 태자나 서주나 그에 개의치 않았다.

“내 당장 너를… 지옥의 아귀들에게 떨어뜨리고 싶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하여도 내게 무어라 할 사람은 없어.”

이를 악물고 하는 말에 서주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하고서.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싶은 마음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은애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게 영영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론 언젠가 한 번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를 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왜 없었을까. 밤마다 그를 그리며 울고 웃었던 것을 주군의 검으로 끝마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죽여… 주십시오 저하…….”

챙강.

검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털썩,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현은 온 얼굴을 손안에 묻고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이에게 말하였다.

“너를 죽이면… 그가 나를 미워할 수도 있지 않느냐…….”

“…….”

“그가 돌아오면 네 죄를 그에게 직접 다스리라 할 것이다. 지금은 너를 보고 싶지 않다. 가거라. 다시는 내게…….”

용서를 빌기 위해 찾아오지 마라.

그리 말한 뒤 제현은 무어라 더 덧붙이지 않고 서주를 내보냈다. 당장이라도 그를 발기발기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은 순전히 태자비가 생각나서였다.

“한낱 미물도 죽이면 안 된다고 하더니만, 그 자신을 해하면 어쩌자는 건가.”

홀로 남은 그는 여전히 손안에 얼굴을 숨긴 채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를 해하려 하는 자를 찔러야지 애먼 자신을, 대체 왜.

미친 것처럼 그날의 태자비를 탓하던 제현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밉지 않았다. 하나도 밉지가 않아 서글펐다. 저를 사랑한다면서 제 생각은 하나도 해주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을 끄고 모두 나가거라.”

“예, 어르신.”

태자를 오래도록 모셔 왔던 환관의 명에 따라 태자궁의 모든 불빛이 사라졌고, 어둠 속에서 태자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

***

“오라버니, 정신이 들어? 응? 오라버니, 내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저하.”

“연우야, 어미와 아비를 알아보겠느냐?”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누이동생인 공주와 제 어미 아비였다. 하여 연우는 울고 말았다. 가장 보고 싶은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는데. 연우는 더 이상 그를 영영 볼 수 없을까 두려워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몸을 웅크리고서 울기만 하였다. 그가 보고 싶었다. 말을 저는 주제에 품은 누구보다도 단단한 제현이.

보름 만에 드디어 눈을 떴구나, 우리 연우.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저를 바라보는 어미와 아비에게 연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보름이라니. 혼인하러 처음 태영국으로 향할 때 말로 꼬박 닷새를 달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 족히 이십 일은 태영국 황실로 제 안위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도 전하지 못했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연우는 황망히 제 몸을 감싼 비단과 이불을 살폈다. 틀림없는 은월국의 것이었다. 태영국에서는 조금 더 뚜렷한 색을 선호하니 이런 물빛, 하늘빛이 감도는 은은한 색은 제 모국의 것이 분명하였다.

‘부, 부인은 복숭앗빛이 감도는 옷감이 참 잘 어울립니다. 샛노란 옷감도… 병아리 같아 귀엽고.’

몸을 감싼 하얀 천에 절로 눈물이 흘렀다. 햇볕을 떠올리게 하는 노란빛이 좋다며 머리 장식도 화사한 것만 잘 골라주던 태자가 눈에 아른거렸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하며 안아주는 품이 정신이 들자마자 그리워 연우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연우의 동생인 공주 라연은 오래간만에 본 부모와 동생에게 기쁜 내색은 않고서 울기만 하는 연우를 꼭 안아주었다.

“오라버니, 이제 아픈 데는 없으십니까? 나 오라비 걱정이 되어 잠도 못 잤어.”

“응, 다 괜찮아. 정말.”

“한데 어찌 이리 울기만 하는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가 반갑지도 않아? 큰 오라버니와 막내 오라버니도 곧 오실 터인데 울기만 하구.”

“…….”

라연은 천성이 밝고 어두운 곳이라곤 없었다. 월앙인이나 그것에 좌절하는 기색 또한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라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저도 할 수 있다며 다리며 팔이 부러져도 무술을 배우던 아이였다.

“또 울고 그러네. 서방님이 보고 싶어 그런 것입니까? 오라버니 혼자 친정으로 보낸 정 없는 이가 뭐가 이쁘다구?”

“라연아. 말이 지나치구나.”

“틀린 말이 아니잖습니까, 아바마마! 없는 데선 나라님도 욕할 수 있답니다. 나는 태영국 태자가 밉습니다, 오라버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라버니를 신부로 맞아 놓고선 이리 푸대접을 하다니!”

“그는…….”

그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무른 사람이지.

연우는 그리 말하고서 일으켰던 몸을 다시 뉘였다. 뭐가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하였다. 누가 제 속을 꽉 쥐고서 비트는 것 같기도 하였다. 각인한 양인이 곁에 없어 그런 것일까. 연우는 태영국으로 서신을 무어라 보내야 할지 고민하며 잠에 들었다.

“…오라비가 이상해졌습니다. 가실 때는 분명 이러지 않으셨는데.”

“보기 좋은데 괜히 그러는구나, 우리 공주.”

“하나도 보기 안 좋습니다. 기운도 없구…….”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짝을 만난 듯하여 아비는 기분이 썩 좋은데.”

공주도 혼인하면 알 수 있을 게다. 오라버니가 왜 이리 눈물을 쏟으며 힘들어하였는지.

라연은 기운 하나 없이 부은 채로 잠든 연우를 내려다보며 그저 흐뭇하게 미소만 짓는 제 부모를 보다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제 궁으로 향하였다. 그녀는 새치름하니 눈을 뜨며 제가 무슨 말만 하면 벌벌 떠는 내관에게 손가락을 까딱하였다.

“예, 공주마마!”

“먹을 갈아 오거라. 내 서신을 보내야겠다.”

“예, 마마!”

내관은 종종걸음으로 곱게 먹을 갈아 공주에게 건네었다. 한없이 공손한 손길이었으나 공주는 부루퉁한 얼굴을 풀지 아니하고 신경질적으로 붓에 먹물을 묻혔다. 그 후에는 거칠 것 없이 붓이 종이를 타고 내려갔다. 그야말로 일필휘지였다. 보모상궁은 성정이 불같은 라연이 무슨 내용을 적나 심히 염려되었으나 공주를 말릴 수는 없었다.

흠, 이 정도면 되겠군. 공주는 궁녀 둘에게 제가 쓴 서신을 멀찍이 들게 하고서 다시금 내용을 살폈다. 이상한 점이 있어도 고칠 정도로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왕이 종종 그리하기에 보고 배운 것이었다.

“이것을 태영국 황실, 콕 집어 말하자면 태자에게 보내거라.”

“예?! 마마, 저, 연우 왕자님께 말씀은 하신…….”

“시끄럽다! 내가 형부 되는 이에게 일전에 한 번도 예를 표한 적이 없어 서신을 보내고자 하는 것인데 무에 토를 달아, 달기는!!”

성질 하고는……. 괄괄하게 소리치며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공주에 궁녀며 상궁이 모두 고개를 저었다. 내시는 이미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조아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였다.

결국 어린 시동 하나가 서신을 받아들고서 공주의 처소를 벗어났다. 라연은 제가 한 일에 흐뭇해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오라버니가 지금 정신이 없으니 나라도 따끔하게 일러주어야 맞는 법이지. 공주의 손과 발을 주무르던 궁녀들은 사색이 되어 상궁을 바라보았다. 예를 표한다고 하더니 따끔하게 일러주다니? 대체 무엇을?

“내 나이가 아직 어리나, 철이 없어 서신을 보낸 것이라 무시한다면 당장에 말을 타고 태영국으로 갈 것이니라. 열흘 후에 아무런 소식도 없다면 나의 검과 활을 준비해. 나는 우리 오라버니처럼 착하고 순하지 못해 행패라도 부려야겠으니!”

그렇다면 내 첫 출정이 형부와의 한 판이 되는 것인가?! 깔깔 웃으며 소리치는 라연에 궁인들은 이를 국왕과 왕후에게 말을 하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 공주에게 미운털이 박히느니 나중에 목숨을 바치는 편이 낫다고 결론을 내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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