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연우와 제현은 손을 맞잡고서 수업을 갔다. 연우는 이제 모든 수업에 같이 가자 청하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하였고, 제현은 그동안 태자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뉘우쳤다. 내 부인이 너무 좋아 그런 것을 아시지요? 억울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담아 말하자 전날 밤 연우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였다. 저하 곁에만 붙어 있을진대 무에 그리 불안하셔요, 하고.
“부인, 오늘은 수업을 마치고 저녁으로 무엇을 드시고 싶으십니까?”
“글쎄요, 지금 허기지지 않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사온데.”
“아무것도? 주전부리 같은 것도,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다지 먹고 싶은 게 없사옵니다.”
“많이 드시질 않고……. 하니 이리 마르셔서, 내 마음을 괴롭게 하지요.”
맞잡은 손의 툭툭 불거진 뼈를 문지르던 제현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자비에게 뭐라도 먹을 것을 종용하였다. 미간을 찌푸렸다가, 그래도 지금은 배가 안 고프다는 말에 입술도 내밀어 봤지만 연우는 미소만 지었다.
“안 먹지 않습니다. 원래 식사를 할 때는 먹기도 많이 먹는 것을요.”
“많이…? 부, 부인께서 언제 많이, 응? 전혀 많이 드시지 않으시면서!”
“저하보다 몸이 작으니 어쩔 수 없지요. 소첩 저하께서 드시는 만큼 먹으면 탈이 날 것이어요.”
“하나…….”
그래도 이건 너무 마른 게 아닌가 싶었다. 분명 처음 제게 시집을 왔을 때는 이 정도로 마르지 않았었는데. 제현은 불쑥 걱정이 되어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어디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주 건강하니 걱정 마셔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부인을 살찌울 수 있을까. 왜 계속 말라가는 것이지? 황궁은 생각보다도 훨씬 너른 곳이기에 제현과 연우는 생각보다 꽤 오래 걸어야 했고, 제현의 걱정은 걸음마다 커져서 이제는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둘의 뒤를 따르는 궁인들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커다란 덩치의 태자를 차라리 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일 따름이었다.
“부인. 내 생각에는 태의를 불러 간단히 진맥이라도…….”
“아이참, 아닙니다. 무탈한데 어찌 부러 약을 지어주려 하십니까?”
“부인 원래, 이렇게 마르지 않으셨단 말입니다……!”
“휴…….”
연우는 태자의 곁으로 붙어 조곤조곤 이야기하였다. 제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는 남편을 안심시켜 줘야지, 안 그러면 또 저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할까 하여서.
“원래는 저하와 살을 섞지 않았으니 지금보다야 체격이 좋았던 게 당연하지요.”
제현은 무슨 소리인가 하여 태자비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자 그제야 알아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내 이제 부인을 많이는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예, 저하.”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는 투로 건성건성 대답하는 연우의 허리를 안고서 태자는 조용히 말하였다.
“정말입니다. 내 약조하지요, 부인.”
“불허합니다.”
“어찌하여?”
눈치도 없지. 연우는 태자의 품에 안겨들며 속살거렸다.
“소첩의 즐거움을 빼앗지 마시어요, 저하.”
“아, 어, 어, 예, 부인!”
“늦겠습니다, 걸음을 조금 빨리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서로 한창일 나이인데 무얼 참는다는 건지. 연우는 눈을 접어 웃으며 다소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는 태자의 손을 끌었다. 힘없이 딸려 오다가 돌연 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서 ‘자꾸 이러시면 난 죽을지도 모릅니다!’ 외치는 태자를 보며 하여간 어린 남편을 두니 데리고 다니는 재미는 있다고, 연우는 제법 깜찍한 생각을 하였다.
***
하루 온종일 수업을 듣는 것이 때로는 고되다 느껴졌으나 부인과 함께하니 그저 즐거울 따름이었다. 제현은 저와 똑같은 차림에 의복의 빛깔과 허리끈, 패용한 장신구 등만 다른 태자비를 기꺼워 참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부인-”
“예, 저하.”
“내 수업이 이리 재미있던 날이 없습니다. 토론도 부인과 함께하니 분위기가 마냥 무겁지 않아 좋았고, 또 은월국의 정치를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소첩도 오늘 온종일 저하와 있어 많이 행복합니다.”
“아, 해, 행복……. 나도, 나도 너무도 행복하여, 말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제현은 주위를 휘 둘러보다가 궁인들 몇 말고는 아무도 보이질 않아 그대로 아내를 품에 끌어안았다. 꽃 같기도 하고, 다디단 음식 같기도 한 향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하여 절로 깊은숨을 들이마시게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얼른 태자를 뿌리쳤을 연우도 온종일 반려와 함께한 것이 퍽 마음에 들어 태자의 장단에 맞춰 허리를 끌어안고서 몸을 살살 흔들었다.
“저하, 앞으로 계속 소첩과 수업을 들을 것이지요?”
“그럼요, 당연하지요! 내 이제 부인이 하고 싶다는 것은, 다 줄 것인데요!”
그동안 궁에서만 심심했을 연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이 싫다 말하자 연우는 흐들흐들 풀어진 표정을 하고서 제현을 더 꼭 안아 왔다.
“아아, 어찌 이리 소첩을 떨리게 하십니까, 저하…….”
“부인…….”
“아무도 없으니…….”
아무도 없으니, 응, 무얼?
침을 꼴깍 삼키며 부인이 할 말을 기다리는 제현에게 태자비가 불쑥 다가가 말하였다.
“접문이나 한 번 할까요, 저하?”
“네, 네!”
“간지럽사옵니다, 저하….”
듣고 싶던 말을 들은 제현은 머뭇거리지 않고 입술을 마주 댔다. 겉이 살짝 마른 입술을 빨아당기자 비음을 흘리며 제품으로 쏟아지듯 안기는 태자비에게 혀까지 불쑥 넣어 휘젓기도 하며 접문하였다. 응, 응, 하며 버거워하는 숨을 흘리는 태자비를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태자비를 바투 안으며 서로의 숨을 나누기를 반복하였다. 슬쩍 눈을 떠 바라본 태자비는 살짝 찡그린 채 제 입술과 입 안을 빨기에 아주 열심이었다. 불현듯 아랫배가 뭉쳐 오는 것 같아 제현은 숨을 급히 몰아쉬었다.
“부인, 내 너무 힘들게 하지 않았나 싶어……”
“괜찮은데…….”
“아니, 안 괜찮은… 듯하여…….”
“괜찮다 하였지 않습니까, 응?”
딱 한 번만 더. 검지를 펴고서 제 입술을 지분거리는 부인을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제현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다시 얼른 태자비의 입술을 찾았다. 말캉한 살들이 입 안 가득 들어옴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한쪽 볼이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혀를 쓰자 그러지 말라며 팔을 아프지 않게 때리는 연우도 그저 사랑스러웠다. 태자비가 반려인 제게만 어리광을 부리는 걸 알아 더욱 좋았다.
하나 연우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은 이는 태자 하나일지 몰라도 그를 사랑스러워하는 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지는 입맞춤에 자연히 궁 안의 이들이 태자와 태자비를 보게 되었다. 서로 부둥켜안고서 꼼질거리는 것이 퍽 귀여웠으나 한창나이의 사내들에게는 묘하게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사이가 좋으셔도 너무…….”
“태자비마마께서 저럴 줄도 아는 분이셨나?”
“저하께서도 아주……. 어어!”
꽃나무 아래서 열심히 입을 맞추는 태자 내외를 훔쳐보던 생도들이 입을 모아 탄성을 터뜨렸다. 잡아먹을 듯한 입맞춤을 버겁게 따라가던 연우가 뒤로 넘어갈 뻔한 것이었다. 생도들 중에서도 서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랐으나, 갈 수는 없었다. 하기야, 그리로 간다 하여도 늦었을 것이고, 가지 않았어도 태자가 그를 안아주었으니 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 서주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어휴, 또 하시는데?”
“한데 태자비마마께서는 참…….”
“참…… 아름다우시지. 그러니 저하께서 꽉 메여 사시는 것 아냐.”
“…….”
생도들은 저런 어여쁜 이를 아내로 두어 좋겠다고 하면서도 태자비를 욕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셔야 할 하나의 주군이라 생각하는 이가 더욱 많았다. 특히 이전번 사냥에서 함께 군을 이루었던 이들은 태자비만큼만 활과 검을 다룰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냥에서 보였던 태자비의 모습 중 태자에게 보이는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손을 잡고서 찬찬히 입술을 내리다가도 돌연 머리를 끌어와 입을 맞추는 모습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인의 품 안을 비집고 들어가 곰살맞게 웃는 모습 또한 사냥터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연관 지어지지 않았다.
“웃는 모습이 햇살 같으시다, 참말.”
“저런 분께서 활만 쥐시면……”
“암만 봐도 저하께서 배로 좋아하신단 말이야.”
“너 같으면 저런 분을 안 좋아하고 배기겠어?”
“……가자, 스승께서 부르신다.”
깨금발을 들고서 태자의 입맞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받으려 애를 쓰는 태자비의 모습을 담고서 서주는 생도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자꾸 가늠해 보는 자신이 싫었으나 멈출 수 없었다. 태자비의 입술을 머금으면 어떠할지, 그 향이 맛으로까지 느껴질지…….
제가 입을 맞추어도 그리 살갑게 저를 맞아줄지, 그런 생각들이 떠나질 않아 서주의 마음은 검게 변해만 갔다.
***
태자와 태자비 내외가 온종일 모든 일과를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문과 생도들, 무과 생도들에게 연우가 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제현은 그들의 시선이 좋기도 하면서 동시에 모두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싶을 정도로 달갑지 않기도 하였다. 상반된 감정의 충돌은 그를 자못 날카롭게 만들었고, 연우는 태자의 날 선 모습에 문득 놀라기도 하였다. 비단 이런 때 특히.
“어디 감히 태자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느냐.”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저하!”
“향후 이런 일이 있다면 필히 벌을 내릴 것이다. 명심하거라.”
“예, 저하!”
잠시간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태자와 가볍게 손을 잡고 궁을 거니는 것이 좋아 언제나 가마나 말을 타지 아니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이들과 눈을 마주칠 일이 잦아졌던 것뿐이었다.
연우는 저를 본 궁인에게 화를 꾹 참아 가며 말하는 태자를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태자는 한동안 거친 숨을 내쉬다가 연우가 잡힌 손이 아프다고 하는 말에야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저하…….”
“……여인네들은, 그나마…… 그대를 바로 보지는 않습니다.”
“예, 저하.”
“하나, 사내들은 그대를… 나쁘게 봅니다. 나쁜 눈을 하고서 보는 걸…… 참아선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숨이 찼다. 가벼운 투기심에 궁인 하나를 다그친 것이 아니었다. 태자비는 제게 각인한 이에게만 제 향이 느껴진다 말하였지만, 기실 궁 안에 도는 소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제현은 그것이 적이 불안하였다. 갈수록 선이 고와지는 태자비를 누군가 마음에 품을 수는 있겠지. 하나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음 쓰지 마셔요, 저하. 소첩은 저하 못지않게 강합니다. 걱정 마셔요.”
태자비마마의 향이 온 궁 안을 가득 메우니, 그가 가는 길목마다 꽃이 피는 듯 환각이 이누나.
소문의 근원지를 찾으려 하였으나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음을 제현은 곧 깨달았다. 태자비 주위의 궁인들은 사내고 여인이고 할 거 없이 모두 그 향을 알았다. 그가 나타나면 모두 코끝을 움찍거리며 어떻게든 향을 더 취하려 애를 썼고, 제현은 그때마다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 폭력적인 생각을 하였다.
제현은 제 얼굴을 보듬는 태자비의 손안에서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만의 정인이지요, 부인께서는……?”
“저하…….”
“그대 앞에서 못난 사내가 되고 싶지 않은데…….”
이 불안감을 어찌 해소해야 할까. 속에 무언가 얹힌 듯한 불편함이 며칠째 계속되었다. 하나 이 와중에도 저를 위로하는 입맞춤은 한없이 달아 제현은 결국 웃고 말았다.
“그런 말 하지 마셔요, 저하. 소첩이 평생을 바치리라 다짐한 정인께서 어찌 그런 나쁜 말을 입에 올리십니까?”
“…….”
“소첩의 생에 정인은 오직 저하 하나뿐입니다.”
곧은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입을 맞추었다.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말자 생각하며, 그게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의 앞에서 나타내지는 말자 다짐하며.
***
연우는 무과 수업을 들을 때는 반드시 머리를 묶곤 하였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는 것이 활을 쏘거나 검을 다룰 때 시야를 가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현은 태자비가 머리를 멋없이 질끈 묶으면 드러나는 목선을 좋아하였으나, 근래 저 이외의 사람들이 태자비를 눈에 담는 것에 심히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하나 연우는 태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실 연우의 눈에 차는 사람은 제현밖에 없었을뿐더러, 그는 연모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는 재주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최근의 태영국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그는 무과 생도들과 대련을 하고 나서는 그대로 벌렁 드러누워 한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다 죽을지도 몰라…….”
말 그대로 매일매일 죽을 맛이었다. 실상 가르치는 교육관인 홍 장군마저 더워서 더 이상은 못 해 먹겠다고 하여 하루는 다 같이 멱을 감으러 가게 되었다. 연우는 태자에게 멱을 감는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하는 것은 처음 본다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눈과 달의 나라에서는 대개 얼어서 흐르지 않는 강만이 보일 뿐이었기에 연우는 이모저모를 태자에게 물어보았다.
“저하, 오늘 가는 곳의 물은 깊사옵니까?”
“별로 깊지 않습니다. 계곡이라 해 봐야 궁과 가까운 곳에 있어 깊지가 않아 어린아이들이 놀기에도 좋지요.”
“소첩은 한 번도 멱을 감아 본 적이 없어서…….”
해서 조금 무섭사옵니다. 부끄럽다는 듯이 귓가에 속살거리는 말에 태자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키득거렸다. 이제는 제 부인이 무슨 말을 하여도 그저 마음이 녹아내려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있지 않습니까. 부인 곁에 계속 있을 터인데 무에 걱정을, 그런 걱정 마십시오.”
“예, 저하. 소첩 저하 꽁무니만 따라다니겠습니다.”
무언가 도와준다고 하면 자기도 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하는 게 연우의 말버릇이었는데 물이 무섭기는 한 모양이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 짝이 될까 두려워 그런 것인가. 제현은 물가에서 저를 졸졸 쫓아다닐 태자비를 그려 보았다. 썩 괜찮은 기분이었다. 다른 무과 생도들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특히 서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태자비와 저의 돈독한 사이를. 제현은 어찌 태자비는 그의 눈빛을 의심하지 않는 것인가 속이 탔다. 서주의 눈은 제 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장 연우가 시선 밖에 있으면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는 것에 울화가 치민 것이 도대체 몇 번이었던가.
“서주! 자네도 헤엄을 칠 줄 아는가?”
“예, 마마. 여름이면 언제나 멱을 감곤 했지요.”
“하면 나도 가르쳐 주게. 내 열심히 배울 터이니.”
그때 사냥을 나갔을 때 가장 믿는 이라 서주를 부인에게 딸려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제현은 서주가 보이자마자 큰 보폭으로 걸어가 먼저 알은체하는 태자비를 쫓아가며 생각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도 사냥을 함께 갔어야 했다고.
한편 서주는 차마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없는 처지이기에 연우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기껍고 벅찼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자 다짐하여도 머리를 하나로 묶고 웃는 태자비는 모른 체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서주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으며 태자비를 내려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사람. 주군과 잡고 있는 손을 가로채 오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 서주는 그러지 않기 위해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였고, 태자는 그가 당장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에 눈감아 줘야 할지를 고민했다.
저를 연모하는 사내 둘 사이에서 해사하게 웃던 연우는 불현듯 태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저하, 저쪽에서 부릅니다.”
“태자 저하! 이쪽으로 오시지요!”
“작게나마 수중 전투를 하려 하니 오시지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청춘들이 물가에 왔으니 또 군을 짜서 겨루자고 난리였다. 홍 장군 역시 호승심이 강하고 생도들이 노는 것을 퍽 즐겨 보는 이였다. 제현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연우에게 물었다.
“부인, 내 잠시 저쪽에 다녀올 터인데…….”
“예, 다녀오십시오.”
“…….”
“소첩은 아직 군을 짜서 간이 수중전에 참가하기엔 물과 친하지 않으니…. 서주와 있겠습니다.”
“……예, 저하. 마마는 소인이 보필하고 있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시지요.”
내 걱정이 그대 때문임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제현은 서주를 연우의 곁에 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찌 모르는 것인가. 그대가 마음에 가득 차 내가 곁에 없을 때만을 기다리는 눈을 어찌.
“하면,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를 부르십시오, 부인. 내 바로 달려올 것입니다.”
“아닙니다. 소첩 서주에게 멱 감는 법을 배워 저하께…….”
“아니, 그는 내가 가르쳐 줄 터이니 서두르지 마십시오.”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부정부터 하고 보는 태자는 처음이었다. 연우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고, 태자는 불편한 마음을 괜히 연우에게 푼 것에 적잖이 속이 상하였다.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한 제현은 연우의 볼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마음 같아서는 품 안 가득 안고서 저의 불안함을 토로하며 미안하다 하고 싶었으나 불안의 씨앗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합니다, 부인. 내가 나빴습니다.”
“…….”
“다, 다시는 내 그리하지 않을 텝니다. 약조 드립니다, 부인…….”
“……소첩을 서운하게 하지 마시어요, 저하…….”
하나 입을 삐죽거리며 토라진 부인은 참을 수 없이 귀여워 제현은 결국 그를 안고서 얼러줄 수밖에 없었다. 어여쁜 내 사랑, 내가 무어라고 그대를 서운케 만들었을까.
사붓이 안고서 토닥이는 손길은 연우의 마음을 금세 풀어주었다. 다만 그를 지켜보는 서주의 마음만이 끝 간 데를 모르고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어서 다녀오셔요. 이제 다 풀렸습니다.”
“저, 정말이지요?”
“하면 소첩이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다녀오셔요, 저하.”
“응! 내 금세 다녀오리다, 부인!”
제현은 굳은 표정의 서주에게 무어라 언질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서주는 태자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였다. 분명 무과 생도들 중에서는 태자와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었기에. 하나 그 섭섭함과 서운함도 곧 다른 감정에 덮여 사라지고 말았다.
“자, 우리는 수박이나 먹으며 담소를 나누지.”
“……감사합니다, 마마.”
은애하는 이를 앞에 두고 설레는 감정에 찰나의 섭섭함은 금세 잊혔다. 저를 보며 살포시 짓는 미소에 서주는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좋았다. 너무도 좋아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조차 없었다.
“내 앞으로는 귀찮더라도 머리를 땋든, 묶든 해야겠네.”
짤막하게 묶여 달랑달랑 흔들리는 꽁지머리에 시선을 두던 서주는 태자비의 말에 괜스레 찔려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에 한데 모였던 머리칼 몇 가닥이 부산스레 날리는 것 또한 눈길이 갔으나, 바로 보지 못할 만큼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수박 좀 더 먹게. 나긋이 다가오는 손에 숨은 멎었다가 다시 급히 터져 나왔다. 서주는 황급히 입을 뗐다. 누구의 앞에서 이리 서툴게 굴었던 적이 없었는데.
“태영국의 여름은 처음이시지요, 마마께선.”
“응. 원래 이리 더운 겐가? 그대는 덥지 않아? 매년 이리 더우면 병이 나고도 남을 것 같은데…….”
“그다지, 올해는 조금 더 더운 것 같기는 하지만 버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와…. 난 살면서 이런 더위는 처음일세. 어서 겨울이 왔으면 좋겠어.”
볼을 부풀리고서 이 더위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연우의 말에 서주는 가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이 그의 부인 곁에 있지 않아 좋다고 생각하면 아니 되는데. 서주는 합죽선을 펴 바람을 일으키다가 자네도 더워 보인다며 제 쪽으로 부채를 팔랑이는 손길에 또 웃었다. 연우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웃는지도 모르면서 따라 웃을 뿐이었다.
“웃으니 잘생긴 얼굴이 더 잘생겨지는군그래.”
“아…….”
“칭찬일세!”
“……감사합니다, 마마.”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는 연우는 혼인한 뒤로 처음으로 나온 바깥에 적잖이 들뜬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연우에게는 여름이란 계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희락기도 가까워 불시에 열이 올랐다가 내리길 반복하여 쉬이 지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여름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월앙인에게 살갗에 닿는 습한 기운과 온몸의 피톨을 날뛰게 하는 더위는 난생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하나 풀이 이토록 자라난 것도, 푸른 향이 지천에 나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생동감이 넘치는구나, 태양의 나라에 어울리는 계절이로다. 안 그래도 새로운 날씨에 마음이 벅차오를 대로 벅찬 상태인데 바깥나들이까지 나오니 연우는 그야말로 세상에 처음 나들이를 나온 아이처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리고 서주는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바삐 둘러보는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하였다.
“여기 물은 정말 깊지 않은가?”
“예, 마마. 아직 서당에 가지 않은 나이의 아이들도 놀 정도이니 얕은 편이지요.”
“하면 나도…. 나도 발 정도는 담그고 싶네.”
“그러시지요. 소인이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한참 수박만 베어 먹던 연우가 돌연 서주의 손등을 콕콕 누르며 말을 걸었다. 물가에서 놀고 싶기는 한데 혼자 가자니 영 무섭고, 궁인들이 간다 하여도 저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이들이 태반이라 의지가 되지 않았다. 서주가 싫다고 하면 어쩌나, 고민하며 조심스레 청하였으나 다행히 돌아오는 답은 간결하고 명확하여 연우는 또 한 번 웃었다. 서주는 여러모로 듬직한 사내였으니.
연우는 궁인들에게 잠시 평상에서 쉬고 있으라 한 뒤 서주와 나란히 걸어 물가로 향하였다. 크고 작은 돌멩이가 많은 땅을 걸으면서도 연우는 손에 든 수박을 놓지 않았다. 서주는 그것이 못내 귀여워 연신 헛기침만 하였다. 혹 입에 걸린 웃음이 들킬까 하여. 하나 맑은 물에 송사리 떼가 종종 헤엄치는 것을 보며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태자비를 마주하고는 거짓으로 기침을 할 수조차 없었다.
“와아- 물고기가 이리 많다니! 서주, 이것 좀 보게!”
“…….”
“내가 발을 담가도 도망치지 않을까? 혹 물지는 않으려나?”
“……그, 그러지 않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하면 여기 앉아서 신선놀음이나 즐겨 볼까. 아, 자네도 멱을 감고 싶다면 가서 놀게.”
비단신과 버선을 벗고서 물에 발을 담근 연우가 순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도 괜찮네. 생도들과 어울리고 싶을 것이 아닌가. 하나 서주는 물속에서 하얗게 어룽지는 그의 발가락만 맹하니 쳐다보았다. 조개껍데기 같은 발톱이 톡톡 박힌 발가락도 어여쁜 사람. 태자 저하께서는 저 발에도 입을 맞추려나. 그의 어디에라도 좋으니 한 번만 입술을 대 보면 원이 없을 터인데. 서주는 저리로 가도 괜찮다는 연우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물놀이야 여기서 해도 된다 답하였다.
“곁에 있어 드린다 하지 않았습니까, 마마.”
당신의 발을 만져보고 싶다는 것 대신에 한 말이었다.
와아아아-!
웃옷까지 벗어 던지고서 수중전에 목숨이라도 건 듯한 젊은 생도들의 함성 소리에 제현의 마음 역시 금세 달아올랐다. 하나 그렇다 하여 제 곁에 없는 이에게 간 마음까지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네 개의 군을 짜 말을 정해 그를 물로 떨어트리는 방식의 수중전은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다들 승부욕은 대단하였으나 아무리 그래도 태자를 물에 빠트리기는 곤란하였기에. 하나 제현은 속이 탔다. 빨리 물에 빠져야 부인이 있는 곳으로 갈 터인데. 하여 제현은 제가 봐주지 않는 편이 낫겠다 생각하여 가까이 있는 두 명의 말을 냅다 들어 물속에 던져 버렸다.
“으악! 저하!!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태자비께 가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다음!”
두텁고 탄탄한 근육으로 짜인 몸이 물에 젖어 반들거렸다. 이까짓 물놀이가 뭐라고 이리로 왔지, 그냥 부인 옆에 있을 것을. 제현은 뒤늦게 후회를 하였으나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하! 이기고 오셔서 소첩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응, 알겠습니다, 부인!!”
제 부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에도 그저 좋아 방방 뜨는 몸에 제현의 몸을 아래서 받치고 선 이들만 죽어났다. 저하, 적당히 하시지요!! 화를 참지 못하고 하는 생도들의 말에도 제현은 그저 부인이 있는 쪽으로 가려 할 따름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교육관이 나서고서야 경기는 재개되었다.
“…결판이나 내시지요, 저하.”
“거기, 남은 말 하나. 이리로 오도록.”
“……그냥 빠지겠습니다!”
손가락을 까딱이며 오라 하는 말에 마지막 남은 말 역할의 생도가 스스로 물 안에 안김으로써 경기는 끝이 났다. 태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교육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저의 승리로 끝이 났군요, 스승님. 하면 저는 짝의 곁으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음대로 하시지요, 저하.”
제현은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단 듯이 유유히 헤엄쳐 태자비에게로 향하였다. 그가 헤엄을 치며 나아간 뒤로 유려한 선이 이어졌고, 선은 얼마 가지 않아 끊어졌다.
“아이고…….”
젖은 몸 그대로 태자비를 안고서 입술부터 들이미는 제현에 홍 장군은 차라리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거야 원…….
“부인, 내 부인이 보고 싶어 이리 이기고 왔습니다…….”
“장하기도 하시지, 우리 저하.”
“하, 하면 입술….”
주인 만나 반가워 꼬리 치는 강아지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수중전을 마치자마자 연우에게 달려온 태자는 그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심심하지는 않았느냐 물었다. 서주는 그들과 간격을 두고 서서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끼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물론 최근 연우에 대한 마음이 연심임을 자각하고서는 태자를 마주하는 것이 괴롭긴 하였으나 이렇게 반감이 들지는 않았는데.
“서주가 소첩과 어울려 주느라 고생을 하였지요. 여기 자두 좀 먹게, 서주.”
“예, 마마. 감사합니다.”
“무엇을 하고 노셨는지요, 부인.”
아이에게 말을 걸듯 한마디를 건넬 때도 고운 말만 골라서 하려 노력하는 태자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나 그의 앞에서 어찌 거친 말을 하겠는가. 저리 고운 이에게 세상의 아름다운 말을 모두 주어도 부족할 테지. 서주는 연우가 건넨 자두 한 알을 손안에서 굴리며 이 감정을 하루빨리 접어야 한다 생각하였지만 자꾸만 뻗어 나가는 망상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연우는 웃옷을 벗고서 저를 꼭 끌어안는 태자에게 빙긋이 웃고선 마주 안으며 말하였다. 하나 말을 할 때의 시선은 서주를 향하고 있었다.
“서주가 물을 튀기면 저도 발로 물장구를 쳤습니다. 사실 서주에게 헤엄치는 법을 배우려 하였으나 저하께서 가르쳐 주신다 하여 기다렸지요.”
그제야 서주는 제 불쾌감이 깊은 이유를 알았다. 태자가 없었을 때 단둘이 있던 시간이 지나치게 달콤하였기에 그랬구나.
태자가 오기 전 저고리와 속적삼을 벗고서 물속으로 들어간 서주는 바위 위에 앉아 발만 담그고서 제 주위를 맴도는 송사리를 보는 연우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 물고기는 유독 자그마하네?’
‘새끼라 그런 모양입니다, 마마.’
‘세상 모든 어린 것들은 어찌 이리 앙증맞은가 모르겠어.’
당신은 어리지도 않은데 어찌 그리 사랑스럽단 말입니까. 서주는 물속에서 발을 휘휘 흔들어 물고기를 쫓는 연우를 핥듯이 바라보았다. 하나 서주의 그런 시선을 미처 보지 못하고, 이마로 흘러내리는 땀을 슥 닦아낸 연우는 저를 멍하니 바라보는 서주에게 물을 튀기며 활짝 웃었다.
‘더위라도 먹은 것인가? 어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물 안에 있는 소인이야 물 좀 맞는 것, 별것 아닙니다.’
‘응?’
우물거리며 수박을 볼 안 가득 밀어 넣던 연우에게 장난을 친답시고 물을 튀겼다. 연우는 제게 가벼이 물장구를 치는 서주를 눈만 깜박이며 보다가 이내 소리 내어 웃으며 연신 발을 굴렀다. 서주는 아주 간만에 그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웃을 수 있었다. 물에 젖은 연우는 생동감 그 자체였고, 그는 그의 모습에 또 한 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였다.
하나 태자가 오니 그 잠깐의 행복이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저는 연우와 가벼운 물장구를 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였는데 그는 자연스레 연우를 안고서 마음껏 그의 향을 맡고, 그를 어여뻐하고……. 이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내게 죄가 있다면 태영국의 황손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아니, 어쩌면 연우를 먼저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서주는 자꾸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출발 선상부터 달랐던 것인데 어찌 마음까지 접어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고 되뇌며 태자 내외를 바라보았다. 태자는 보란 듯 연우를 끌어안고서 말하였다.
“이제 나랑 노셔야 합니다. 그대는 나의 부인이니.”
“알겠습니다, 저하. 다른 생도들도 같이 놀면 되지요.”
“아아, 나는 둘이서만, 부인과 나만…… 놀고 싶습니다…….”
“…….”
연우를 한 품에 감싸 안고서는 꽉 옭아매며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태자가 부러웠다. 다른 이에게 애정 행각을 보임에 부끄러워하면서도 태자에게 다 져주는 연우를 보는 마음이란. 볼을 동그랗게 올려붙이며 웃는 얼굴이 사람 마음을 애끓게 하였다.
내가 자리를 떠주는 것이 신하 된 도리이겠지. 그게 맞는 것이겠지. 서주는 애틋한 태자 내외를 더 보기가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하면 소인은 이만 다른 생도들에게 가 보도록 하겠나이다.”
“응, 더울지도 모르니 이것을 갖고 가시게.”
“……감사합니다, 마마.”
짙은 쪽빛의 합죽선을 건네는 연우에 태자의 눈빛이 날카로이 변한 것을 느꼈으나 서주는 모른 척 그를 받아들었다. 이 정도는 받아도 괜찮겠지. 갈수록 깊어지는 마음에 갈 곳이 없는 외사랑은 이런 것이라도 소중한 법인데, 이 정도는 태자도 용서해 주겠지.
서주는 애써 미소 지으며 연우가 건네는 합죽선을 고이 받아 들었다. 태자의 시선이 제가 자리를 뜨는 내내 따라왔으나 그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합죽선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제 마음이 신경 쓰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제현은 서주에 대한 착잡한 마음과, 연우에 대한 서운함을 숨기지 못했다.
“미, 밉습니다.”
“응?”
“……나에게는 저런 것을 주지 않으시면서…….”
“저하, 장차 황위 계승을 앞두신 분께서 어찌 이리 속이 좁으십니까?”
“하나 그래도…… 그래도 나는, 나도 저런 것을 받으면 잘 쓸 수 있단 말입니다!”
태자는 밉다, 싫다, 서운하다 말을 하고서는 연우를 더 꼭 끌어안았다. 연우는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밉다고 하여 밀어내려나, 짐작하였더니 더 끌어안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연우는 태자의 표정을 살피려 고개를 모로 돌리려다가 입이 댓 발 나온 것을 보고서 삐진 것은 맞구나 판단하여 품을 조금 더 파고들었다. 저를 단단히 옥죄고 있는 팔뚝에 입술을 대고서 오물거렸으나 태자는 좀처럼 마음을 풀지 아니하였다.
“저하께서는 다른 것을 가지셨으면서 욕심도 많으십니다.”
“나는, 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습니다. 내게는 합죽선 같은 걸 주지 않았으면서…!”
“매일 밤 소첩을 안으시면서…….”
너는 합죽선 따위가 아니라 나를 가지지 않았느냐 돌려 말하는 태자비에 제현이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자 복숭아꽃처럼 빛을 달리하는 얼굴이 보였다. 제현은 혈색이 지나치게 좋아진 태자비에 금세 마음을 풀고서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헤실거렸다.
하나 다른 이도 아니고 서주에게만 특별히 친근하게 대하는 태자비는 역시 마음에 썩 들지 않아서 제현은 무어라 한마디 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저를 향한 말간 눈망울에 뻐끔거리기만 하다가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화도 못 내게…….”
“서운하게 하지 마셔요, 저하…….”
“내가, 내가 언제 그대를… 안 그러지요, 당연히.”
만질만질한 살갗에 몇 번 더 입술을 꼭꼭 누르며 마음을 벅차게 만들던 태자비가 종래에는 아예 온 마음을 풀어지게 할 만한 말을 하였다.
“소첩은 이미 저하의 것인데 어찌 그러십니까…….”
“그는 알지요, 나도 물론 그대의 것이고!”
“응, 그러니 화내지 마셔요.”
서로에게 서로뿐이지 않습니까.
그 말까지 하고선 이제 맨 가슴팍에 볼을 기대 오는 태자비에 제현은 아래가 불뚝 선 것이 느껴져 그를 안은 팔을 풀고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는 저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태자비도 일으키자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쏟아질 듯 커진 것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못 참겠다, 참말 못 참겠어.
“일어나십시오, 부인.”
“예, 저하…….”
“내 도저히, 열이 올라 참기 힘이 듭니다……!”
“예, 예?!”
“어서, 안 따라오시면 들쳐 메고서라도 갈 텝니다!”
아니, 저기, 잠깐, 연우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생각을 하다가 설마 싶어 그의 아랫도리를 보고선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웬 놈의 정력이 저리 좋단 말인가?
하나 태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를 끌고서 생도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향하였다. 급한 불만 끄면 되겠지, 그가 덥다고 하면 일을 치른 뒤 물에 함께 들어가자 하면 되지. 변명까지 생각하느라 마음은 더욱 급해져 걸음은 더욱더 빨라졌다.
“못 한 지가 벌써 며칠째란 말입니까, 더 이상은 나도 못 참습니다!”
“저하, 조, 조용히 말하셔요 제발!”
제현은 연우의 손을 꼭 쥐고서 달리듯 걷다가 궁인들이 저희를 쫓아옴에 결국 아내를 달랑 안아 들고서 뜀박질을 하였다. 연우는 그에게 이러지 말라, 남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 투닥이다가 활짝 웃는 태자의 얼굴을 보고는 저도 킥킥거리며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정말이지…….
“지금 못 하면 나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부인!”
“소첩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하.”
체력이 좋은 사내는 여러모로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연우는 화창한 날씨처럼 맑게 웃으며 그의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갈수록 저를 사랑하는 사내에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내를 안고서 내달리던 제현은 돌연 우뚝 자리에 서서 궁인 하나를 불렀다. 태은궁에서 연우를 모시는 어린 소년 하나였다.
“거기 너, 이리 와 보거라.”
“예, 태자 저하!”
“예 깔 만한 모포 하나를 갖고 오거라. 그리고 이 숲 근처로 누구도 오지 못하게 하라 전하거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 하게 해야 할 것이다.”
“말씀 받잡겠습니다, 저하!”
속사포 풀어내듯 이어지는 엄포에 소년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태자에게 전해야 할 모포와, 궁인들에게 전할 말을 되새겼다. 태자는 동글동글한 눈망울로 믿고 맡겨 달라는 듯이 저를 보는 소년에게 픽, 웃으며 말을 더하였다.
“내 너를 믿으마. 하나 내가 믿지 않는다 하여도, 너 역시 네가 뫼시는 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겠지.”
“걱정 마십시오, 저하! 소인 마마와 저하께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라 전하겠나이다!”
“그래. 가 보거라.”
“잘 부탁해, 소준아.”
“예, 마마!”
태자의 품에 달랑 안긴 채 소년의 이마를 쓱쓱 만져준 연우가 해사히 웃으며 태자의 목덜미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푸릇푸릇하게 어린 궁인은 연우의 손길에 더욱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못 오게 해야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해선 안 돼! 태자의 눈에도 그는 퍽 귀여웠기에 이번에는 질투도 나지 않았다. 다만 연우가 제게 더 꼭 안겨 오는 것이 마음에 들어 소년이 자리를 뜨자마자 앞섶을 꽉 쥐었더랬다.
간혹 바깥에서 색사를 즐기는 이들이 있단 소문은 들었으나 그는 언제까지나 남의 얘기일 거라 생각하였다. 하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숲속에서 정인과 다급히 몸을 섞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흐읏, 응, 저하-!”
“내 많이, 참은 것을 아시지요, 부인.”
“아우응……!”
“달아, 너무도 답니다…….”
안고 있다 내려놓고선 입 안 가득 음낭이며 기둥을 물고 쭉쭉 빨아 대는 태자에 연우는 하염없이 흐느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가 까맣게 꺼지기를 반복하는데, 이것을 별천지라 해야 할지 암흑이라 해야 할지. 다만 분명한 것은 아랫도리 사정은 너무도 황홀하다는 것이었다. 연우는 통통한 둔부를 우악스레 가르고 들어온 손가락에 한 번, 선단 끝을 뾰족이 세워 핥은 혀에 두 번 울었다.
그만하셔요, 부끄럽사옵니다. 우는 소리를 내며 허벅다리에 힘을 주고 선 태자비를 올려다본 태자는, 눈물만 똑똑 떨구는 모습에 외려 흥이 올라 그나마 살집이 있는 샅을 철썩 소리 나게 때리며 외설스러운 말을 하였다.
“이리 줄줄 흘리면서. 부인께서 이것을 원하는 걸 내 다 압니다.”
“저하, 아, 응!”
“도대체가, 여름을 죽일 수도 없어 내 얼마나 참은 것인지……!”
모포가 올 때까지는 참으려 하였는데 그도 못 하겠다, 싶어 제현은 아예 연우에게 제 허리를 다리로 감아 안으라 종용하며 바지와 속곳을 한 번에 내려 버렸다. 이미 태자의 입 안에서 파정을 한 연우는 그의 허리에 매달리는 것만도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하나 어린 남편은 이미 힘이 풀려 제 허리를 감았다가 풀어지길 반복하는 다리도 기술 좋게 잡아채고선 꺼떡거리는 것을 어찌 넣을까만 궁리하였다.
부인께선 여기를 좋아하지. 눈물이 흐른 볼을 핥으며 손가락으로 자지러지는 부분을 꾹 누르자 어여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살살 젓는 모습에 제현은 더욱 회가 동하였다. 하여 하나 넣었던 손가락을 두 개, 세 개로 연이어 늘리자 연우는 아래로 물을 쏟아내며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에 힘을 풀고 말았다. 너무도 간만인 색사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연우는 훌쩍이며 자꾸만 주저앉으려 하는 제 다리를 애써 세우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하나 태자는 그 모습을 안쓰러이 여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엉덩이와 사타구니를 쥐어짜듯 주무르며 제 것을 욱여넣었다.
“자꾸 우시니, 나는 좋아서 미칠 것만 같습니다. 부인, 부인…….”
“흐아! 제, 현아, 아, 아아!!”
“응, 나 여기 있습니다, 윽!”
“거, 거기, 저하, 흐윽…….”
태자에게 매달린 채 추삽질을 당하던 연우가 파드득 몸을 떨며 울기 시작하였다. 태자는 아직도 제게 더 박아 넣겠다며 종마처럼 내달리는데 저는 이미 절정에 다다른 상태였다. 더 하지 마셔요, 소첩 머리가 이상해질지도 모릅니다. 거의 사정하다시피 애원하였으나 태자는 그만하자고 하는 제 입술을 그의 입술로 막은 채 마구 허리를 흔들 뿐이었다.
“어, 어쩌지? 이를 어쩐다……!”
모포를 가지러 다녀온 소년은 이미 육욕으로 물든 태자 내외에게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으나, 이제 제현도 연우도 모포는 뒷전이었다. 다만 좀처럼 파정을 하지 않는 태자에 태자비의 교성이 더욱 높아져만 갔다.
퍽, 소리 나게 박아 대는 것을 숨이 넘어갈 듯 울며 받아내던 연우는 이제 사정감을 참지도 못하고 픽픽 정액을 쏘아 댔다. 태자는 허릿짓을 하는 동시에 젖꼭지를 입에 넣고 굴리고, 엉덩이를 받치지 않은 다른 손으로는 제 기둥을 유린하였다. 처음 관계를 가질 때 어디가 좋으시냐 낯빛을 붉히며 묻던 소년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으응!! 저하, 흣, 아아!!”
“좋아합니다, 연우, 연우야, 윽! 큿!”
“저하, 아, 히익-!!”
엉덩이 살을 있는 대로 벌리며 깊이 쑤셔 박고는 목덜미를 빨아들이는 것에 연우는 한순간 다리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다리에 어떻게 힘을 주고 저하를 안았더라? 당혹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힘도 들어가질 않았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쾌감 안에 있다가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 연우는 저를 단단히 안고 있는 팔만 매만졌다. 부피가 조금 줄어든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안을 가득 채운 것에 발개진 낯이 원래의 빛으로 돌아오질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고서 제 안에 꿀럭꿀럭 정액을 쏘아 대는 태자에 연우는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다리에… 힘이, 큼! 안, 들어갑니다, 저하…….”
“…….”
“옷가지도 모두 젖어 버렸어요…….”
궁인들에게, 옷가지를 가져다 달라고 해주셔요. 연우는 그리 말하고서 태자의 가슴팍을 소리 나게 때렸다. 지은 죄가 커 태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딱 한마디만 하였다.
“이게 다… 여름 탓입니다, 부인.”
“……내 여름을 죽여 버릴 텝니다.”
어느 날 밤 제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부인에 속없이 웃은 제현은 기어이 연우에게 한 대를 더 얻어맞고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만족스러운 색사였다 말하면 한 대를 더 맞겠지? 제현은 그 말은 아주 나중에 하자 생각하며 뒤늦게 받은 모포로 태자비를 둘둘 쌌다.
“귀여워…….”
“조용히 하십시오, 저하…….”
그래도 귀여운 것을 어떡하라고! 제 향을 잔뜩 묻힌 채 눈을 감은 이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대의 풀어진 모습은 나만 볼 수 있지요, 그대의 말처럼 나만이 그대를 가졌으니.
아까 무섭게 몰아치던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히 웃은 제현이 모포로 싼 태자비를 안고 정자로 향하매, 그를 뒤따르던 궁인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태자를 감당할 이는 아무리 보아도 태자비 말고는 없으니 천생연분이라 중얼거리며.
***
궁녀들은 태자 내외의 뒤를 따르다가 모포에 싸인 연우가 뒤척이며 하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만 좀 만지셔요, 간지러운데….”
“여기 꼭지가 통통하니 앙큼하여…….”
“으응!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예, 부인…….”
설마 꼭지가 그 꼭지 말하는 거야? 궁녀 하나가 옆에 있던 이에게 묻자 다른 궁녀가 물어 뭐하냐는 식으로 답을 하였다.
“앙큼한 꼭지가 달리 있겠어?”
“아휴! 남사스러워!”
“얘, 얘, 저하 표정 좀 보아.”
대개 나라마다 궁인들의, 특히 궁녀들의 혼인은 금하였으나 태영국은 황실 사람을 모시는 이들의 혼인을 금하지 않았다. 금할 이유가 없었다. 원래는 후궁을 둘 수 있는 존재인 황제가 취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였으나, 대대손손 황후만을 바라보니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리 웃을 줄도 아시는 분이었단 말야?”
“태자비마마께서 오신 후로는 항상 저 표정이시잖아. 새끼 강아지처럼…… 아이, 아무튼! 항상 웃으시니 좋지 무얼.”
성정에 날이 선 것이 그를 감당할 이가 없을 것 같다 걱정하였으나 하등 쓸데없는 기우였다. 제현은 그만 좀 만지라며 품 안에서 파닥대는 연우에게 입이 찢어져라 웃어 보이며 입술을 내리기 바빴다. 그에게 험하게 대할 때는 색사를 치를 때 말고는 없었다.
만지지 말라 하였더니 이제는 귓불을 쭉쭉 빨아 대는 태자에 궁인들은 어찌 그 무섭던 이가 저리 변하였냐고 수군댔지만, 흉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신기해할 따름이지.
하나 태자의 성질이 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태자비께서 오수를 취하시니 정자에 가까이 오는 이가 없도록 하라. 내 신경을 건드려 좋을 일이 없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을 테니… 딱히 걱정은 않는다만.”
커다란 손에 턱을 괴고서 느른한 말투로 하는 지시에 궁인들과 가까이 있던 생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태자를 건드려 좋을 일은 없었다. 보통 태자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무뚝뚝하여 궁인들이 어려워하곤 하였다. 그나마 아명을 쓸 때부터 함께였던 보모상궁 정도만이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할 뿐. 신경에 거슬리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이에게 그 누구도 언동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저하, 소첩 복숭아 하나만 주셔요.”
“깎아 드리겠습니다. 아- 하세요, 아-”
하나 그 모든 상황과 순간에 예외가 생겼다.
검집에서 진검을 꺼낸 태자는 솜씨 좋게 껍질을 깐 뒤 작게 조각내어 아내의 입 안으로 과육을 밀어 넣었다. 홉, 하며 받아먹는 것에도 쉬이 마음이 벅차 볼을 매만지자 부러 입 안에 바람을 넣고서 장난을 치니 그의 마음 역시 한없이 부풀기만 하였다.
“나중에, 새해가 오면 연등을 같이 날리러 가요, 저하. 은월국에서는 연등 안에 소원을 적은 종이도 넣어 날려 보낸답니다.”
“응, 그리합시다. 다, 다 합시다, 부인.”
덥다며 모포를 벗어난 연우가 졸음에 눈을 깊이 감았다 뜨며 하는 말에 태자는 뭐든 싫겠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몰랐으나 그와 초야를 보낸 후 태자는 그를 모시는 궁인들에게 이리 일러놓았다.
“내게 안겨 주무십시오, 부인을 위한 자리이니…….”
이제 너희에게 우선순위는 내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너희 자신보다도 그를 소중히 보필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은 약간은 당혹스러움에 잠겨 있었기에 말을 전해 듣는 궁인들 역시 얼결에 바닥에 엎드려 알겠다 고해야 했다. 그들은 몰랐으나 태자는 초야를 엉망으로 치르고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랫것들에게 미리 일러 놓는 것이 낫다 생각하였고.
안아주는 팔에 기대 곤히 잠든 제 부인을 가만 들여다보던 제현은 눈을 꾹 감으며 말하였다.
“그만 보자, 또 괴롭히고 싶어지니.”
처음 본 순간부터 제현의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제현은 그의 얼굴에 햇빛이 쏟아지는 것에 얼른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주었다. 빛을 받은 얼굴은 잠시 인상을 썼다가 금세 편히 풀어지며 그의 마음을 빠듯이 차오르게 만들었다.
제현은 태자비가 자는 내내 차양을 만들어 주고, 궁녀가 부쳐주던 부채를 하나 뺏어 손수 부채질을 해주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었으나 모두 그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였다. 한참을 고요하고 또 부산스레 수선을 떨던 제현에 연우는 몇 번 뒤척이다가 깜작깜작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에 제현의 표정은 또 어김없이 풀어졌고.
“응, 다 자셨습니까, 부인?”
“예……”
“졸리면 더 주무세요, 응?”
“싫어…….”
“어, 흠, 더 자도 되는데…….”
몇 번 눈을 비비던 연우는 기지개를 켜며 태자의 품에 답삭 안겨들었다. 아주 잠시간이었으나 태자는 작은 포옹에도 마음이 들떠 환히 웃으며 그를 다리 위에 앉혔다. 이리 보아도 어여쁘고, 저리 보아도 어여쁘니 이를 어쩐다? 헤죽거리며 저를 보는 태자에 연우는 마주 웃어주며 볼을 붉힐 따름이었다.
서로의 얼굴만 보아도 재미있어 코와 입술 따위를 콕콕 눌러 가던 걸 멈추고 연우는 물가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헤엄, 가르쳐 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현은 태자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를 안아 들고서 냇가로 겅중겅중 걸음을 옮겼다. 잘 단련된 몸에 안긴 연우는 어린 남편 하는 짓이 퍽 마음에 들어 풋내 나는 웃음을 지었다.
“저, 저하, 놓으시면 아니 됩니다, 아셨지요?”
“걱정 마십시오, 부인. 내 다른 것 다 놓쳐도 부인은 놓치지 않습니다.”
정인을 안은 채로 물속에 들어간 태자는 하얗게 질린 연우의 볼에 연신 입을 맞추며 괜찮다, 무섭지 않다, 하며 토닥여 주었다.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물은 사실 태자에게는 우스운 것이었으나, 물에서 노는 것 자체가 처음인 연우에게는 무섭게만 느껴졌다.
제 목을 꽉 붙든 태자비에게 괜찮으니 힘을 풀고 가만히 있어 보라 말하였다. 제현의 말에 태자비는 두 눈을 꾹 감고서 그의 손만 가만히 잡았다. 무섭고, 두려웠으나 태자가 저를 두려운 상황에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더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방 배우실 수 있겠습니다, 부인.”
“……신기한, 기분이어요…….”
“물이 신기합니까? 아아, 귀여워라…….”
“와아…….”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지면에 발이 닿지 않았으나 몸은 둥실거리며 물에 떠올랐다. 연우는 물에 젖어 넘실거리는 옷자락을 한 번, 온몸이 벌게져서 헤실거리는 태자를 한 번 보고서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았다. 물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였다. 우선 땀이 나지 않는 것이 좋았다. 태자와 안고 계속 안고 있을 수 있으니.
제현은 느슨하게 제 목에 다시 팔을 감고서 다리를 몇 번 첨벙거리는 태자비의 둔부를 몇 번 주물럭거렸다. 태자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서툴게 헤엄을 치기에 바빴으나, 제현은 그가 무언가를 이리 신기해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타국에서 온 신부는 이런 것이 좋구나.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있고, 그가 내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있으니. 제현은 몇 번 물속에 고개를 박았다가 푸- 하며 다시 햇살을 맞는 태자비를 끌어안고서 속삭였다.
“덥지 않으니, 안고 있을 수 있어 좋습니다.”
“소첩도 좋아요, 저하.”
“물속이, 아니면 내가?”
“당연한 것을 물으시지요, 꼭.”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이 생기고선 하는 짓은 영락없는 강아지인 태자에 연우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젖은 머리를 넘겨주었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햇살도 좋고, 물속도 안온하니 다시 나가고 싶지 않고. 연우는 주위 시선은 뒤로하고서 태자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다. 깊숙하고도 짙은 입맞춤이었다.
한편 서주는 그늘에 앉아 태자비가 하는 양을 모두 지켜보았다. 일랑일랑 퍼지는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속살의 몇 부분이 무엇에 물린 것처럼 빨갰다. 그걸 보는 서주의 눈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둘이 아까 무슨 짓을 하였길래. 얼마나 물고 빨았기에 저리되었단 말인가. 서주는 저도 그의 목덜미를, 가슴팍을 한번 물어 보고 싶어 애가 탔다.
“소첩은 저하가 너무도 좋습니다. 하니 그런 것을 묻지 마셔요, 말하기도 입이 아프니.”
“내 얼치기 같은 것을 물어 부인을 귀, 귀찮게 하였지요.”
“좋아하니 봐 드리겠습니다.”
멀리서도 태자에게 하는 말소리는 귀에 잘만 꽂혀들었다. 차라리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에 있다면 나을 터인데 좋아해선 안 되는 이가 지척에 있으니 도무지 포기할 수 없었다. 태자에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탐이 났다. 태자보다 제가 더 사랑해 줄 수 있는데, 태자에게 주는 사랑 중 한 틈만이라도 제게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 혼자서도 헤엄을 칠 수 있다며 자랑하듯 물속에서 유영하는 태자비를 보는 서주의 눈은 태자의 것과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다만 그를 향한 마음에 답을 얻을 수 없어 어둠이 더 짙을 뿐이었다.
한참 물 안에서 놀던 연우는 불안하여 저를 졸졸 쫓아다니던 태자에게 뒤를 돌아 안겨들었다. 잘 놀다가 어디가 불편하여 그러신가, 하여 태자는 얼른 등부터 토닥이고 보았다. 연우가 어리광을 부릴 때 많이 즐겨야 했다. 대개는 제가 어리광을 부리기 바쁘니.
“저하……”
“예, 부인.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소변이 마려워서…….”
“……하면 나랑 저기, 생도들 없는 곳에 가십시다. 궁인들도… 오지 말라 이르겠습니다, 부인.”
소곤거리는 말씨에 태자는 다시 한번 회가 동하였다. 우물쭈물 말하면서도 저와 같이 가줄 것을 안다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어딜 가도 저와 함께 가자는 게 이리 좋을 일인지. 연우에게는 얼른 다녀오자 말하면서 태자는 두둑이 부풀 준비를 하는 아랫도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속으로 세 번을 되뇐 이유는 더 괴롭혔다간 미움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얼른 가십시다, 부인. 내 망을 봐 드릴 터이니 걱정 마시고.”
고개를 끄덕이며 찰박찰박 물을 차며 앞서가는 태자비에 제현은 아이처럼 웃으며 뒤를 따랐다. 궁에서는 내도록 더위에 시달려 기운이 없어 보이더니만 물속에서는 생기가 넘치는 게 퍽 보기에 좋았다.
하나 숲속으로 향하는 것은 둘뿐만이 아니었다. 제현과 연우는 발을 재게 놀리느라 뒤를 따라오는 이를 미처 보지 못하였다.
“저하, 뒤에 계시지요?”
“그럼요, 부인!”
“소첩이 과일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럴 수 있지요. 날이 이리 더운데 과일쯤이야, 얼마든지 드셔야지요.”
아까 궁인들이 데리고 간 곳보다도 더 깊숙하고 외진 숲속으로 들어간 연우는 뒤에서 망을 봐준다고 하는 태자를 믿고 바지춤을 내렸다. 태자는 동그란 엉덩이 두 짝을 보고서 괜히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아까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마음가짐과는 달리 아랫도리는 슬금슬금 일어나 이미 색사를 즐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제현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 궁으로 돌아가면 다시 이렇게 붙을 수 없을 터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에 제현은 그에게 가까이 가 몸을 붙였다. 연우는 볼일을 보려다 말고 화들짝 놀랐으나, 놀란 얼굴마저 태자의 취향이었으니 이를 불행하다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미 볼 것은 다 본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줌을 누는 모습마저 보이기는 부끄러워 연우는 서둘러 바지춤을 추슬렀다. 정확히는 추스르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저, 저하, 어찌 이러셔요…….”
“흠, 흠……. 나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일 보십시오, 부인.”
“신경을 쓰지 말라니, 하면 저리 가셔요, 어서.”
“무에 부끄러워 어찌 나를 밀어내십니까?”
“손대지 마셔요, 그러려고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닌데. 나는 그리하려고 온 것인데. 그를 하러 온 것이지 달리 뜻이 있어 온 것이 아닌데.
태자는 볼일이 급하여 차마 강하게 나가지도 못하고 제게 달라붙는 손만 겨우겨우 밀치는 연우에 음흉하게 웃으며 반쯤 일어난 기둥을 잡아챘다. 헉, 하고 들이켜는 숨조차 아쉬웠으나 그야 나중에 다 먹어주면 될 일이고, 지금은 부인을 조금 괴롭히고 싶었다.
“읏, 저하, 하지, 하, 지 마아……!”
“싸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친히 부인의 것을, 이리 달래 가며…….”
“아응! 아, 싸, 쌀 것 같, 저하, 제발, 아!”
“싸도 됩니다. 우리 둘 말곤 아무도 없습니다, 부인.”
아무도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아무도 없는 곳이면 이리 허튼짓을 하는 그대와 둘뿐이라는 게 문제인데! 연우는 어서 싸라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귓불을 빨며 말하는 태자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태자는 아주 능숙하게 연우를 절정으로 데려갔다. 가뜩이나 요의에 괴로워하던 연우는 요도 끝을 손가락으로 비벼 대고 목덜미를 혀로 핥는 감각에 부르르 떨며 오줌을 누었다.
태자는 소변을 누며 연신 끙끙 앓는 연우에게 이리 방정치 못한 아랫도리는 혼이 나야 한다 꾸짖었다. 연우는 그러거나 말거나 줄줄 흐르는 것과, 싸고서도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는 요의에 제 것을 감싼 태자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고서 슬슬 허리를 움직였다. 못 볼 꼴을 보였으나 궁인들도 없으니 그리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고.
으응, 뒤를 지키고 선 제게 뒤통수를 비비며 갸릉갸릉 앓는 소리를 내는 연우의 몸을 휙 하니 돌리게 만든 태자가 느른히 웃으며 물었다.
“내 어찌 해드렸으면 하십니까, 부인……?”
“하고 싶은 대로 하셔요, 더 이상 쌀 것도 없지만…….”
“응, 없지만……?”
“한창때인 저하께선 제 안에 잔뜩 싸고 싶을 것이 아닙니까?”
소첩의 말이 틀립니까? 여전히 웃통을 벗은 채인 제현에 제 옷고름을 쥐여준 태자비는 이내 손을 아래로 뻗어 그의 아랫도리를 더듬거렸다. 역시 쓸 만한 물건이었다. 이를 누구에게 자랑이나 하였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제현은 가슴팍이 크게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만족스럽단 듯이 웃으며 태자비의 샅을 벌리고서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 말라 하면 조금만 괴롭힐 생각이었으나 이리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말이 다르지.
“아하, 하하, 응! 더, 저하, 더 만져, 주셔도 좋습니다… 응, 거, 기도, 좋고…….”
“아무도, 아무도 그대가 이리 색을 밝히는지 모르지요. 오직 나만… 나만 압니다, 그렇지요?”
“응, 아무도, 저하 말고는 그 누구도…….”
연우는 파르르 떨며 말을 보태었다. 태자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을.
“저하 말고, 누가 소첩을 이리 만족시켜 주겠습니까? 이리 큰 물건은, 흐으, 다시없을 터인데.”
도저히 한 나라의 황후가 될 자가 한 말이라고는 믿지 못할 말을 하고서 연우는 금세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흑, 아! 저, 하, 저하, 아아!!”
“왜, 좋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굵고 단단한 것이 제 아래를 쑤셔 옴에 연우는 환희로 가득 찬 교성을 내질렀다. 좋았다. 몸에 잔뜩 품고서 흔들리는 것도 좋고, 제가 좋아하는 쪽을 잘도 찔러주는 그에게 가슴을 물어뜯기는 것조차 분에 넘치게 좋았다.
“하아, 또 싸 대는 것 좀 보세요, 부인. 그대의 것이 또 이리, 응? 좋다고 이리 싸고, 저리 싸고.”
발아래에 흥건히 고일 정도로 정액을 싸 버린 연우가 고개만 꺾어 입을 벌렸다. 그만 떠들고 입이나 맞추라는 신호였으니 태자 또한 기꺼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무도 태자비가 이리 요란스레 허리를 돌리고 흔드는 것을 모른다 생각하니 더욱 흥분되었다. 제현은 발이 붕 뜬 채 제 것을 욕심껏 받아내는 태자비의 둔부를 꽉 쥐어 벌리고서 더욱 깊숙이 제 것을 쑤셔 박았다.
“아흑, 흐, 아아아-!!”
“좋아 죽겠습니까? 그저 좋다, 소리를 지르시니 이거 원…….”
찰싹 소리가 나게 엉덩이를 때리자 꽉 조여 오는 구멍에 태자는 킬킬거리며 가련한 이의 목덜미를 꽉 물고서 허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던 서주는 벌써 몇 번인지 모를 사정을 하였다.
“으아, 아, 저하, 나, 나아, 쌀 것, 어윽! 윽흐으-”
“또 싸면 되지요, 괜찮아, 연우야, 괜찮다 하지 않습니까, 응?”
장신에 잘 단련된 몸에 덮쳐진 이는 연신 벌벌 떨며 아랫도리를 적시기에 바빴다. 은애하는 이였다. 해사하게 웃는 것이 어여쁜.
“아앙! 안 돼, 저하, 흑! 모, 못 해, 저하, 아, 으응!!”
그를 덮친 이는 한계까지 몰고 가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는 듯이 우는 이를 부숴 버릴 듯이 허릿짓을 하며 웃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픽픽 고꾸라지려는 사람을 억지로 세우고선 앞섶을 거칠게 만지며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하였고, 그러면 그때마다 제가 은애하는 이는 엉엉 울며 사정하였다. 말로도 사정을 하고, 아래로도 사정을 하는 모습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나 그를 지켜보는 몸의 반응은 지극히 솔직하여 서주는 몇 번이나 토정을 하였다. 이미 제 손은 허옇게 말라붙은 것과, 그 위로 쏘아지는 허연 것에 끈적해진 상태였다.
그가 좋아하는 이는 주위에 정말 아무도 없다 믿는지 마음껏 소리 지르며, 그의 정인에게 매달려 졸랐다. 더, 더 주셔요, 더 할 수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태자의 얼굴이란. 사랑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는 얼굴이었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가엾단 듯이 바라보다가 짐승이 핥듯이 그의 얼굴을 핥아 올리는 것에 그를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저릿해질 정도였다.
“흑, 끅, 힘, 들어…….”
“못된 나와 어울려 주느라 고생입니다, 부인…….”
“못되었어도, 이것은 잘 쓰니, 소첩이 참습니다, 흑!”
제 안에서 나온 물건을 툭 치며 하는 말은 제가 은애하는 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으나, 태자에게는 원래 그런 말을 종종 한 모양이었다.
“아아, 어쩌면 좋아… 나는, 나는 정말이지 그대가 너무도, 좋습니다. 좋아한단 말로 어찌 다 표현이 가능하겠습니까?”
“말은, 잘하시지요.”
“내 살며 이리 무언가를 좋아한 적, 단언컨대 없습니다. 부인, 믿어주세요, 응?”
괴롭힘을 당하고 나서 부은 얼굴로 토라진 척을 하는 이의 앞에서 태자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굴렀다. 좋아해, 정말 좋아하는데 어찌 믿어주질 않아? 마음을 꺼내어 보여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가슴팍을 가르고서 심장을 보여줄 기세였다. 서주는 제 마음을 알아 달라 조르는 태자와, 그를 보며 겨우 웃음을 참아내는 연우를 보며 속에서 치받는 것을 누르느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단지 둘의 색사를 지켜본 비참함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그것은 아닌데.
뱉어낼 수도, 삼켜낼 수도 없는 홧홧한 먹먹함의 연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은애합니다, 나는 그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부인…….”
깜냥이 되지 못해 화가 난 것이었다. 저는 은애하는 이에게 은애한다 말을 할 수도 없는 미미한 존재였기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저는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기에, 그것이 슬펐던 것이다.
서주는 서로의 체액에 젖은 채 지치지도 않고 다시금 입을 맞추는 두 인영을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저하는 소첩의 것이고, 소첩은 저하의 것이지요……. 내 사랑.”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랑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서주는 부둥켜안고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입을 맞추는 둘의 뒤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도무지 포기가 안 되는 이와 이제 거리를 두겠다 다짐하자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그날 이후 서주는 꼬박 닷새를 앓았다. 그의 양친은 그가 앓는 이유를 알지 못해 도성의 용하다는 의원은 모두 찾아다니며 병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모두 소용이 없었다. 병의 원인이 몸이 아닌 마음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서주는 홀로 끙끙 앓으며 마음을 개켰다. 잘 개켜지지 않는 마음은 한데 뭉쳐졌다가도 뒤를 돌아보면 금세 헤벌어져 있어 도무지 어떻게 수습을 하여야 다시 꺼내 보지 않을까가 짐작되지 않았다. 괴로운 나날이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마음을 줘선 안 되는 이만 자꾸 아른거렸다.
하나 그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태자 내외의 사이는 하루가 다르게 돈독해져만 갔다.
“이리 오세요, 어서.”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번에 물가로 멱을 감으러 나갔을 때는 받아주지 않으셨습니까?”
궁인들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구음을 해주겠다고 쫓아다니는 태자나, 저리 쫓기면서도 절대 제 남근을 물리지 않겠다 뻗대는 태자비나 천생연분이라 생각하였다.
전번에 숲속에서 두 번이나 신나게 몸을 섞고 나니 제현은 더욱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자비는 냉담하기만 하였다. 저번에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는 말에 제현은 입을 삐죽이며 저번과 이번은 분명 다르다 하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태자비는 더위 속에서 몸을 섞는 게 싫었다. 더워서 입맛도 예전과는 다른데 자꾸만 하자고 달려드니 태자비로서는 제현에게 싫다는 말을 할 때가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아침이었다. 그것도 문안 인사를 드리기 전의 아침. 연우는 흐트러진 몸가짐을 하고서 황실 어른들을 뵐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하, 소첩과 아직 어른들께 문안 인사도 올리지 않은 걸 아시지요?”
“모릅니다.”
“얼치기도 아니시면서 어찌 모른다 하십니까?”
“모릅니다! 나, 나를 서운하게 하시고!”
“자꾸 모른다 하시면 소첩 혼자 문안 인사를 드리는 수밖에 없지요.”
폐하와 황후, 태후마마께서 저하의 안부를 물으시면 소첩이 부족하여 걸음을 하지 않았다 전하겠습니다.
강단 있게 밀고 나가는 말에 제현이 뜨끔하였으나 여전히 고개를 팩 돌린 채였다. 연우는 어찌 된 것이 날이 갈수록 애처럼 굴어 큰일이라 생각하면서 말을 보태었다.
“하면 어른들께서 그러시겠지요.”
“…….”
“‘태자비가 부덕하여 태자가 밖으로 도는구나.’ 그 소리를 들으면 소첩도 저하께 서운할 터이니 비긴 셈이 될 겝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저하.”
“…….”
“소첩 벌써부터 속이 상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오니 태은궁에 계시지 말고 태자궁으로 가시지요.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제현은 저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에 입술을 짓씹다가 돌아서서 처소를 빠져나가는 태자비의 손을 잡아챘다.
“같이, 같이 가십시다, 부인…….”
“문안 인사 같은 건 모른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와 놀아주지 않아…… 서운하여 그런, 그런 것이니… 내가 잘못했습니다. 어리게 굴어 미안합니다, 부인…….”
“……소첩의 것을 물고 달래주겠다는 것은 좋으나, 그는 해가 진 후에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첩을 대체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려 그러십니까?”
“…….”
“…서운케 만들어 소첩도 미안한 마음이니 이리 기대셔요.”
달래드리겠습니다.
연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품을 파고든 태자가 우는소리를 하였다.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것은 퍽 귀여워 연우는 어여쁜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미안하다고 어르고 달래 주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대체 뭐가 좋다고 자꾸 제 것을 물고 빨겠다 하는 것인지.
“문안 인사를 올리고, 오늘 밤에는 놀아 드릴 터이니 서운해 마셔요. 요즘은 해가 지면 선선하니 약조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
“……밉습니다.”
“소첩이 미우십니까?”
“……밉습니다. 부인이 밉습니다!”
나만 부인과 놀고 싶은 것입니까? 나는 이리 색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부인이 나를 이리 만들어 놓으시고 모른 체하시니 밉습니다!
밤까지 기다릴 것이 벌써부터 까마득하여 어깃장을 놓는 제현에 연우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밉다면서 안기기는 잘만 안기신다며 놀리자 귓바퀴를 빨갛게 물들이며 여전히 밉다 말하는 것 또한 앙살맞게만 느껴졌다.
“오늘은 길게 어울려 줄 터인데, 그래도 소첩이 미우십니까?”
“내가 어찌…… 그럴 수 없단 걸, 아시지 않습니까…….”
한데 정말 길게 어울려 주시는 거지요? 풀이 죽은 와중에도 부인의 체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몸을 잘게 떠는 태자에 연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네 원대로 놀아 주마, 하며.
실랑이를 하다가 밤에 놉시다, 하고 결정한 둘은 나란히 황실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제현은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꼭꼭 눌러가며 웃는 태자비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밤놀이야 태자비가 싫다면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 저만 좋아서 하는 밤놀이가 즐거울 리 없었다.
“부인-”
“예, 저하.”
“내 귀찮게 굴지 않을 텝니다. 약조 드립니다.”
“아닙니다. 소첩이 저하를 귀찮다 생각할 리가 있겠습니까.”
슬쩍 올려다본 태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연우는 가벼이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촉, 소리가 나자 태자는 몸을 떨며 눈가를 문질렀다. 어떤 말로도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없으리라. 솜털이 스치는 것도 같고, 아니면 몸에서 싹이 트는 것도 같은 기분을 대체 어찌 말로 푼단 말인가.
“어른들께서 기다리십니다, 저하. 어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응, 갑시다, 부인!”
내밀어지는 손을 잡고서 제현은 오늘 밤에는 무엇을 하며 놀까를 궁리하였다.
하나 그도 문안 인사 전의 이야기였다.
“동생이 생겼다는 말이, 무슨……?”
“말 그대로다. 황후께서 회임하셨다.”
“이리 기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이냐? 내 늘그막에 손주를 하나 더 볼 일이 생기다니.”
연우와 제현이 묵례하고서 착석하자마자 태후와 황제는 입이 근질근질한 것을 못 참고 냅다 말하였다. 황후가 회임을 하였다고.
제현은 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에 놀라면서도 기뻐 가만히 제 어미를 끌어안아 주었다. 다 늙어서 이게 웬 주책인지 모르겠다 하면서도 황후는 봄볕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마주 안았다. 하나 연우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우리 새아가는 아직 소식이 없누-?”
“아……. 소첩이 부덕하여…….”
“태후마마, 아이들이 아직 젊지 않습니까. 걱정 마시지요.”
“…….”
칠거지악 중 하나가 불임이었다. 연우는 아직 불러오지 않은 황후의 배를 훔쳐보고, 밋밋하기만 한 제 배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아이를 가지는 것은 아직 먼 얘기로만 느껴졌다. 태영국으로 온 지 한 해가 다 되어 가지만 태자와 몸을 섞게 된 것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을뿐더러, 본디 월앙인이라 하여도 사내인 몸인지라 쉬이 회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우는 좋은 분위기를 괜히 깨고 싶지 않아 어색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오늘은 차가 조금 많이 우려진 것인가. 왜 이리 쓰담. 문안 인사는 언제고 그리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으나 오늘처럼 불편하였던 적은 없었다. 아이, 아이가 생겨야 할 터인데.
미안해할 일은 아니나 어쩐지 죄를 지은 것만 같아 찻잔만 문지르며 고개를 숙인 태자비를 보던 제현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이를 비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자가 부족하여 그런 것이니 비에게는 무어라 하지 말아 주십시오.”
연우는 대강 예를 차리며 하는 말에 태자의 다리를 꾹 눌렀다. 그러지 말라는 뜻이었으나 태자는 연우보다도 더 속이 상하여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애가 뭐라고. 나한테는 지금 당장 앞에 있는 사람이 더 중한데.
하나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태자보다도 그가 한 말에 농을 걸고 싶어진 태후는 홀홀 웃으며 물었다.
“우리 제현이가 밤일을 잘 못 하나 보구나. 그러니 아이가 생기지 않음이야. 그렇지 않으냐?”
“마마, 그런 것은 아니온데……”
그리고 연우는 냅다 미끼를 물었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제 남편 밤일 못 한다는 소리에 발끈하여 찻잔을 내려놓는 새아가가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깜찍하였다. 황후와 황제는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태후는 저들이 태자와 태자비의 신분이었을 때도 이리저리 갖고 놀기를 잘하였고, 지켜보는 것은 퍽 재미가 있었다.
“하면 밤일을 잘한단 게지?”
“아, 그, 잘, 잘…….”
“태후마마, 그만 놀리셔요. 새아가 얼굴에 잔뜩 꽃이 피지 않았습니까.”
“아이고, 늙으니 채신머리도 없어지누나. 이해해 주련, 새아가.”
부끄러워 고개만 끄덕이는 연우의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바라보던 태자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 침을 삼켰다. 귀여워 안고 싶지만 하면 싫어하겠지. 아쉬운 대로 시선을 떼지 않는 정도로 만족하자 하였으나 손은 멋대로 비에게 향하였다.
“놀라셨습니까?”
“괜찮습니다, 저하.”
“태자 내외 사이가 적잖이 좋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태후마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찻잔을 쥐느라 상 밖으로 삐져나온 팔꿈치를 슬슬 문지르던 제현에 태자비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 떨림도 안타까워 제현은 잘못을 고하였고, 연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른들 앞에서는 그러지 말라 하여도 언제나 말짱 도루묵인 신랑을 어째야 할지.
얼렁뚱땅 문안 인사를 마치고 나온 연우는 자기 밤일 잘하냐며, 말해 달라 조르는 제현에게 웃어 보이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회임에 대한 부담을 지우지 못하였다.
“부인, 나는 아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인만 있으면…….”
“…생기겠지요.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응, 응. 내 부인보다 소중한 것 없으니, 아이 걱정은 그만, 알겠지요?”
“예, 저하.”
저만 있으면 된다며 어깨를 감싸 오는 태자에 연우는 잠시간 생각하였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 온 것은 아닌가, 하고.
“하면 오늘 밤 그대의 궁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마- 음대로 하시지요.”
부인에게 걱정거리가 는 것도 모르고 태자는 그저 오늘 밤일은 더 힘을 내겠다 말을 하여 궁인들은 혀를 끌끌 찰 뿐이었다.
***
더위가 한풀 꺾이며 황궁에는 다시 활기가 살아났다. 초목은 푸르렀고, 하늘은 점점 높아 갔다. 낮과는 달리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모두들 해가 지면 나들이를 즐기기에 바빴으나, 태자비만은 여전히 더위를 못 견뎌 하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태자비에 제현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인께서 어디가 안 좋으신 건가. 제현은 용하다는 황실의 태의들을 다 불러다가 진맥하게 하였으나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하, 송구하오나…….”
“그대까지 송구하다 하면 내 스물두 번째 송구함을 받게 되는 것인데.”
“…….”
“황실의 어의들이 열을 내리는 약 한 재 처방을 못 해주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한심한지고.”
“저하, 소첩은 괜찮은데…….”
노기를 꾹 누르며 말하던 제현은 따끈한 볼을 손바닥에 기대오는 태자비에 더욱 화가 났다. 태영국의 황실 태의들은 변방의 나라에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하여 이국의 왕실 자제가 병환에 차도를 보이지 않으면 외교적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태영국의 태의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데 그런 이들이 어찌 사람이 열이 나는 이유 하나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제현은 얼음물에 적셨다가 짠 면포를 궁녀에게 받아들고서 그의 목덜미와 이마, 팔을 찬찬히 닦아주었다. 괜찮습니다, 소첩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나 금세 제 온도를 잃고 미지근해진 면포에 제현의 시름은 깊어졌다. 태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조아렸으나 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태자 앞에서 말을 못 하는 것이었다.
‘희락기가 가까워 열이 나는 것일세.’
‘하면 소인이 열을 내리는 약을 올리겠나이다, 마마.’
‘약을 먹으면… 아이가 안 들어서는 것 아닌가?’
‘열만 내리는 것이니 너무 걱정 마소서.’
‘자네가 이전에 월앙인이 복용할 탕제를 만든 적이 있는가 모르겠네. 은월국에는 월앙인의 몸에 듣는 약재가 있는데, 태영국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불안하군.’
이렇게 생긴 풀과 꽃인데, 이는 설산에만 나는 것이라 태영국에는 없을 걸세.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구하지 못하겠지.
언젠가 진맥을 하기 전 태의를 따로 부른 연우는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다. 별다를 것 없는 잎사귀와 꽃망울이었다. 하나 잎맥이 푸르고, 잎의 색은 흰빛을 띤다는 것이 달랐다. 어의는 그 약초와 꽃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현(下弦)’이라 불리는 식물이었다. 사시사철 겨울인 은월국에서만 나는 약초로 월앙인들의 보신을 위한 탕약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를 구하지 못한다면 나는 약은 먹지 않을 걸세.’
‘마마, 이리 열이 오르는 것이 옥체를 상하게 하는 것을 아시지요?’
‘견딜 만하네. 그대가 어의들에게 잘 일러주길 바라는데….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게.’
태영의 태의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련한 사람이라 그런 것이니 맘 상해하지 말아주게나.
자상하고도 온건한 거절의 말에 그는 한 번 더 무어라 말을 보태었지만, 연우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였다. 하나 그 일련의 대화를 모르는 태자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본보기로 태의 몇의 목을 베어야 하나, 성군이라면 하지 못할 생각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태자는 괜찮다 말한 뒤 그를 물리고서 제게 기대 오는 나긋한 몸을 끌어안았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대의 열을 내가 다 갖고 올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그리할 터인데.
“아픈, 아픈 곳은 달리 없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소첩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하면 걱정을…!”
“…….”
“나를… 나를 걱정시키지 마셔야지요, 부인…….”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그의 쾌차가 아니면 해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현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려다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저보다 고작 삼 년을 더 산 태자비는 다 이해한다는 듯 저를 보듬어 주는데, 제 모습은 그의 앞에서 한없이 어리기만 하여 마음이 아팠다.
“춘풍 낙엽의 계절이 곧 오지요.”
“…….”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인의 마음을 오래 아프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조 드려요, 저하.”
“나는, 나는…….”
조금의 아픔도, 일말의 고통도 그대가 몰랐으면 하는데. 태자는 그리 말하며 연우를 끌어안았다. 밤이 깊어도 좀체 내릴 줄 모르는 열을 모두 앗아 가겠단 듯이 강하게. 연우는 저를 안아 오는 품에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이 죄스러웠으나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임을 바라는 마음이 깊어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 하면 그깟 황손은 필요 없다며 약을 먹일 태자를 아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대만 있으면 됩니다. 그대 고통을 내게 다 주십시오. 낙엽의 계절이 올 때까지… 그대 열을 내게 달란 말입니다, 부인…….”
겹쳐 오는 입술은 저 못지않게 뜨거웠으나 연우는 기꺼이 입을 벌려주었다. 아이만 생긴다면 마음도 몸도 괴롭지 않겠지요. 황손을 품어야 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잊히지 않아, 연우는 태자의 아래에서 양물을 받아내며 길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에 놀란 태자가 허리를 뒤로 뺐으나 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위로 올라탔다. 안에서 요동치는 것에 간신히 웃으며.
“가지 마십시오, 소첩 외로운 밤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연우는 그리 말하며 태자의 볼에 제 볼을 기대었다. 보낼 수 없었다. 긴긴밤 저 홀로 앓지 않게 열을 다스려 줄 세상에 하나뿐인 정인이었으니.
몸의 열을 내려준다는 핑계로 태자와 태자비는 꼬박꼬박, 아침과 밤마다 몸을 섞었다. 태자비는 밥때가 되면 칭얼대는 아이처럼 태자의 손을 끌어 제 비문에 가져다 대기도 하며 그를 혹하게 만들었다. 제현은…….
“앗, 응!”
“이리, 아파서, 어쩐다, 응?”
“흣, 저, 하, 아읏, 아!!”
제게 매달려 오는 태자비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갔다가 풀어주곤 하였다. 지나친 양기 속에 놓인 태자비가 몸을 파들거리며 떨면 이전에야 봐주었으나,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제 양물을 조금 더 쑤셔 박고서 씨물을 한 방울도 빠짐없이 넣느라 눈이 벌겋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연우는 제 안에서 부풀기까지 하는 것에 훌쩍이면서도 다리를 벌려 그를 더 깊이 받아들였다.
“응, 저하-”
“예, 부인.”
“안고 싶으니 조금만 숙여주셔요, 응?”
“그러지요. 내 얼마든지 부인, 어헉-!”
“흐아! 아, 저하, 응…!”
양물을 품은 채 정인을 안고 싶어 팔을 뻗었다가 연우는 끙끙 앓으며 내벽을 조였다. 아, 너무 깊은 것 아닌가? 이러다가 몸이 망가지면 어쩐담? 하나 놀란 것은 연우뿐만이 아니라 제현 역시 눈을 크게 뜨고서 연우를 바라보았다. 제 것을 놓지 않겠다는 듯 아물아물 달라붙어 오는 내벽에 눈앞이 희게 사라졌다 바로 돌아오길 반복하였다.
제현은 그래도 저를 안고 싶다며 울먹이는 연우를 안고서 제 위에 앉혔다. 더욱 깊이 삽입된 거근에 연우는 잘게 몸을 떨면서도 태자의 등을 안고서 토닥여 주었다.
“매일, 소첩과 어울려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하…….”
“무엇을 보아도 그대 생각뿐이니, 고마운 것은 나지요.”
제현은 한참 울어 푹 젖어 버린 연우와 눈을 맞추고 볼을 붉히며 말하였다.
“이것을 보아도 그대, 저것을 보아도 그대. 내 시선에 그대만 담기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말도 어여삐 하는 내 사랑-”
눈을 감아도 온통 나의 부인밖에 보이지 않으니 나는 행복한 사내입니다. 제현의 말에 연우는 낮게 웃으며 그의 목덜미에 볼을 살포시 기대었다. 어서 아이를 갖고 싶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지만 이렇게 자주 하니 곧 생기지 않을까. 연우는 서서히 크기를 줄이는 태자의 위에서 모른 척 허리를 흔들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하면 아이가 생길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며.
하나 연우와 제현이 마냥 접 붙으며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제현은 황위에 오르기 전 부인과의 유희에만 집중하고 싶었으나 몸에 열이 내리면 연우는 다시 정숙하고도 정결한 태자비가 되어 상소문을 보자고 하니 달리 수가 없었다.
제현은 상소문 더미를 가지고 오는 비서랑을 좋지 않은 표정으로 보았으나 제 옆에 앉은 연우는 무어가 그리 좋은지 활짝 웃기만 하였다. 제현은 인상을 찌푸렸다가도 해맑게 웃는 부인은 햇살 같아 따라 웃어 보였다.
“금일의 상소문은 기근이 든 마을의 백성들이 보내온 것입니다.”
“북쪽 변방의 마을을 말하는 게지?”
“예, 마마.”
살려주십시오. 연우는 상소문의 서두에 서툰 선으로 쓰여 있는 첫 문장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글자를 썼다기보다는 선을 그어 이어 붙인 것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살려 달라 청하기부터 하는 이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도 없어, 연우는 제 허리를 감은 팔을 떼어내고 상소문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살려주십시오.
기근이 들어 황폐한 마을에는 달리 먹을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앓아누우셨고, 아버지는 일을 나가지만 매일이 빈손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죽고 싶지 않습니다. 매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듭니다. 살려주십시오. 넓으신 아량으로 백성들을 살펴주십시오.
간절히 청하옵니다-
상소문이라기보다는 읍소에 가까웠다. 연우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태자에게 물었다.
“저하, 북쪽 마을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나는 궁에서 나가 본 적이 없지요.”
“아아…….”
아예 황궁 밖의 세상을 모르신단 말인가. 외교와 이국에 대해서는 박학다식한 태자였으나 실상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알지 못한단 소리렷다.
연우는 제가 왕자였을 때를 떠올렸다. 태영국의 한 지역만 한 작은 나라인 은월국은 왕궁의 벽이 낮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말인즉슨, 왕실의 자손들이 백성들의 삶과 매우 밀접하단 소리였고, 연우도 다르지 않았다. 연우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달마다 한 번씩은 꼭 나라를 순방하였다. 작은 나라이니 백성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나 태영국이 아무리 크고 넓다 한들 한 번도 궁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잠자코 상소문을 내려다보는 태자비에 제현 역시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되어 상소문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잠행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제현은 과거에 태만하게 굴었던 것이 몹시 후회되어 착잡한 얼굴로 태자비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하나 태자의 뜻을 모르는 연우가 아니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웃음기 한 줌조차 없는 낯에 무어라 꾸짖을 마음 따위도 들지 않았다. 이미 제 잘못을 알고 있는 이인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대신에 연우는 상소문을 둘둘 말고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하-”
“예- 부인.”
“소첩과 밤놀이를 즐기러 가십시다. 어떠셔요?”
“…밤놀이? 어디로?”
“북쪽의 마을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모르는 황제가 되실 것은 아니시지요?”
“그야…….”
나의 부족함을 들키지 않았을 리가 없지. 제현은 깊은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입으로는 언제나 성군, 성군, 염불을 외웠으나 저는 탁상공론에만 빠삭한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차마 눈은 웃지 못하고 입꼬리만 살짝 올려 긍정을 표하는 태자에 연우는 다시 한번 활짝 웃었다. 그가 서툴기는 하나 누구보다도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부족한 점은 함께 채워 가면 그만이었다.
“나의 정인이 어진 황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소첩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지요?”
“응, 응. 당연하지요.”
“하면 잠행을 나갈 옷을 맞출까요, 저하”
“나는 부인과… 부인과 같은 복식을 할 텝니다. 좋지요, 부인?”
“그러믄요. 저하께서 옷감을 골라주셔요.”
옮기는 걸음걸음마다 저하와 함께하는 기분이 들게끔.
소복이 볼을 올리며 웃는 얼굴에 제현은 저도 비슷하게 웃어 보이며 곱게 만 상소문을 따로 챙겼다. 실질적인 것은 잘 알지 못하여 적이 부끄러웠으나 이번 잠행으로 많이 배우면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미묘한 기대도 품었다.
바깥을 나가는 것도 난생처음인데 연우와 동행이라니. 제현은 바다 건너 이국에서 온 옷감을 고르면서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인! 쪽빛이 나는 천을 한 번 대보십시오.”
“예, 저하.”
“어여쁘십니다…. 하면, 복사꽃 같은 이것은?”
“잘 어울립니까?”
“다, 다 잘 어울리시는데…….”
“하면 쪽빛 두루마기에 복사꽃 빛깔의 허리끈이면 좋을 듯싶습니다, 저하.”
“응, 응! 여봐라, 해가 세 번 기울기 전에 의복을 지어 오거라.”
“말씀 받잡겠사옵니다, 태자 저하.”
궁녀들은 이 옷감, 저 옷감을 들어 제 부인의 얼굴 아래에 대어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두 잘 어울려 큰일이라 배부른 소리를 하는 태자에게 고개를 저었다. 태자비와 몸과 마음이 꼭 맞게 합일한 이후에는 언제나 저런 표정과 말씨였으나 도무지 적응이 안 될 따름이었다. 어디가 망가져도 단단히 망가진 듯 허허실실 웃기만 하는 태자는 궁인들을 대할 때는 이전과 별다른 바가 없어 더욱 학을 떼는 궁녀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행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지시하는 연우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는 태자의 낯은 여전히 웃는 상이었다. 장신구 같은 것은 하나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라는 말에는 잠깐 멈칫했으나 은월국에서 몇 번이고 궁 밖을 나간 경험이 있다는 연우를 온전히 믿고 그를 따랐다.
“장검을 차고 다닐 수는 없으니 단도를 챙겨야 한답니다.”
“부인께서도?”
“당연하지요. 소첩에게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을요.”
“내가 있으니 그는 걱정 마십시오. 내가 언제나 부인을 지켜줄 터이니!”
연우는 제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불현듯 자기만 믿으라며 외치는 태자에 빙긋이 웃었다. 기분을 맞춰주는 것도 괜찮겠지. 연우는 태자의 손을 끌어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서 중얼거렸다.
“믿고말고요. 소첩에게 믿을 곳은 저하 하나뿐입니다.”
이내 손바닥에 뺨을 갖다 대며 연약한 체를 하는 태자비에 제현은 더 기쁠 수가 없어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그를 품에 안았다. 내게도 지킬 것은, 지키고 싶은 것은 연우 하나라 곱씹으며.
***
나흘 후, 어둑어둑한 저녁께가 되자 제현과 연우는 바다 건너 유학을 가는 소년들처럼 봇짐을 챙겨 들었다. 황실 어른들께는 말을 하지 않고 가는 것이었기에 반드시 하룻밤 안에 돌아와야 했다. 하여 봇짐에 든 것은 속곳과 간식, 그리고 화폐 조금이 전부였다. 제현은 난생처음 떠나는 잠행에 들떠 태자비의 손을 잡고 연신 묻기에 바빴다.
“부인, 하면 부인과 내가 밖에서 둘이 자는 것입니까?”
“예, 하나 북방의 마을까지 말로 꼬박 세 시간을 달려야 도착한다 들었습니다.”
“하면 나와 둘이서 말을 타고 달리는, 그런 것이지요?”
그래도 황족인데 어찌 둘이서만 갈까. 변방의 마을 어귀에 호위무사들이 마을의 백성인 척 진을 치고 있을 것이었다. 하나 연우는 방방 떠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태자에게 모두 말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며 제1호위무사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지금 가는 잠행이 단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저 혼자로 족하니 태자에게는 나중에 언질을 주겠단 뜻이었다.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친우로 지내 왔던 무사는 알겠단 듯이 고개를 가벼이 숙일 뿐이었다.
“소첩과 같이 가는 것이 그리 좋으십니까?”
“좋고말고! 두말할 것이 어, 없지 않습니까!”
“태영의 백성들을 살피는 성군이 되셔야지, 이리 노는 것만 좋아하셔서야 원.”
“아, 아닌데……. 내 궁 밖으로 놀러 나가는 것이 아님을 알다마다요. 하나, 부인과의 첫 외출이 아닙니까. 그러니 절로 설레는 마음이 들 수밖에요.”
영 억울한지 입술을 새 부리처럼 삐죽 내밀고서 투정을 부리는 태자에 연우는 배시시 웃으며 콧방울을 한 번 톡 쳤다.
“소첩도 조금은 즐거운 기분입니다. 잠행도 간만이고, 이번에는 저하도 함께하시니까요.”
“조금 긴 나들이를 가는 것도 같고……. 하나 부인에게 많이, 성군이 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약조한다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제현에 제 새끼손가락도 사이좋게 건 채로 연우는 발을 재게 놀렸다.
“하면 이제 가십시다, 저하. 나들이도 좋고, 성군도 좋으나 더 늦으면 내일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으니.”
쪽빛의 얇은 두루마기를 입어 속에 입은 고운 빛깔의 옷이 비치는 연우를 품에 안은 제현이 중얼거렸다. 알겠다고. 그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성군이 아닌 온전한 성군이, 한 나라의 자애로운 황제가 되겠다고. 연우는 조금 토라진 투로 말을 하는 제현의 고개를 잡아채 그대로 입을 마주하였고, 태자는 그제야 못 이긴 척 입술을 오물거리며 기분을 풀었다.
“내가 서툴러도, 아직 태자이니 조금만 봐주십시오, 부인….”
평생을 황궁에서 학업에 정진하였습니다. 나라고 너른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닌데.
입술 새로 흩어지는 말소리에 그의 정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태자는 귓바퀴를 조물거리며 어여뻐해 주는 손길에 푸르르 떨며 웃었다. 어찌되었든 제게는 연우가 있으니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저와는 달리 태자비는 부드럽게 백성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사람이기에.
***
북쪽 변방 마을로의 안내를 위해 앞서 향하던 호위무사들과 병사들은 소란스러움에 한 번씩 뒤를 힐끔거리게 되었다. 말을 타는데도 투닥거리는 신혼부부 탓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연우를 지키겠다더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현은 연우가 탄 말에 바투 붙어 말을 몰았다. 한참 떨어져 출발해 앞, 뒤로 멀리 떨어져 달리던 호위들은 대체 왜 저렇게 불편하게 가는 것인가 의아했으나 달리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나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제현은 네 번째 접근에 연우에게 손등을 한 대 맞고 말았으니.
“아! 왜, 왜, 부인…!”
“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한데 벌써부터 말을 화나게 하시면 어쩐단 말입니까?”
“…….”
“하마를 한 뒤에는 저하가 가라고 하여도 옆에 딱 붙어 갈 것이니 걱정하지 마소서.”
“…나쁩니다.”
나쁠 것도 많은 사람이라 송구합니다, 저하.
연우는 고삐를 꽉 쥐고서 나쁘다 소리를 지른 태자에게 간단히 대꾸하고서 다시 말을 몰았다. 너무 어리광을 많이 받아준 탓인지 갈수록 제게 치대는 경우가 늘었다. 일 년 전인 열아홉일 때는 지금보다 오히려 덜하였는데 어찌. 연우는 화가 난 것을 보이려 더욱 애처럼 굴며 저를 따라오는 제현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와중에도 귀엽기는 귀엽다 생각하는 자신도 큰일이라 생각하며.
한 시진을 꼬박 더 달려 도착한 곳은 마을의 초입이었다. 연우는 제 뒤를 따라온 태자를 굳이 안장 위에서 기다렸다. 태자는 제게 삐쳤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호위무사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신가. 연우는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진지하게 말을 해 보아야겠다 생각하며 먼저 말에서 내린 태자에게 팔을 뻗었다.
“저하, 소첩 내려주셔요.”
“…이리 오십시오.”
몸을 모로 돌리며 하는 말에 싫다 할 리가. 잇새로 웃음이 비어져 나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제현은 연우의 겨드랑이께에 손을 넣어 안아 올리면서도 ‘나는 지금 상당히 삐쳤다’는 티를 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안긴 채 붕 뜬 순간 아이처럼 웃으며 허공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부인에 제현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얄포롬한 옷자락이 그의 다리에 감겨 팔랑거리는 것도 마음이 빠듯이 차오를 정도로 좋았다. 제현은 연우를 땅에 내려주지 않고서 냅다 품에 안고 우는소리를 하였다.
“나빠…. 나쁜… 나의 부인…….”
“서운하셨지요, 소첩이 나빴습니다.”
“아니, 나쁘지 않습니다, 절대…….”
다만 그대가 좋아질수록 서운한 것도 늘어 속이 상할 뿐입니다.
제현은 호위무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괘념치 않고 말하였다. 연우를 만나기 전 제현은 어느 누구에게도 서운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사실 서운함이라는 감정 자체가 어색하였다. 단어로 알고는 있으나 심적으로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말. 하나 연우에게 마음이 기울수록 서운함은 깊어만 갔다. 분명 연우도 제게 잘해주고, 더 무엇을 바랄 수 없다 생각하는데도 그랬다. 닿기만 해도 설레는 것과 비례하여 그가 조금만 제게 거리를 둬도 눈물이 날 정도로 서러워졌다.
“단둘이 있을 때는 괜찮으나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도 그러시면 저하께 욕을 보일까 두렵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저하.”
눈물을 꾹 참으며 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말하는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제 마음은 좀처럼 넓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정의 깊이는 언제쯤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눈이 나리면 알게 되려나. 그도 아니면 다음 해에 꽃이 필 때쯤?
하루는 괜찮았다가도 그다음의 하루는 종잡을 수 없는 망아지처럼 내달리는 기분에 제현은 풀이 죽었다. 그를 어렸을 때부터 본 호위무사들은 다섯 살배기 시절보다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모습에 놀랐고, 제현은 그들의 시선을 살필 마음조차 없었다. 정확히는 연우 빼고 누군가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온 마음이 그였으므로.
부인은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지는 않으신 건가. 품 안에 태자비를 안고 있으면서도 서글픈 마음이 들어 큰 숨을 내쉬는 제현에 연우가 허리에 감긴 손을 토닥이며 말하였다.
“마을로 입성하면 둘뿐이랍니다. 무사들은 멀찍이서 저희를 호위하기로 하였어요.”
“하면, 단둘이…?”
“예, 저하. 그리고 이것은 잠행이니 호칭도 잠시 바꾸어야 하겠지요.”
호칭을 바꾼다? 이는 귀띔해 주지 않은 내용이 아닌가? 제현은 처음 듣는 말에 태자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을 반짝이며 저를 보는 태자에 연우는 대뜸 물어보았다.
“저하의 아명을 알려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나, 나의 아명 말입니까?”
“예, 저하.”
“제, 제제.”
“제제?”
“응, 제제(弟制).”
제현의 아우를 만들어 주겠다며 만든 아명이라고, 제현은 정말 그 이유냐며 웃음을 참는 연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릴 적 저 역시 매일같이 아우를 만들어 달라며 징징거렸던 것은 말하지 않고서.
연우는 눈가를 꾹 누르며 웃음을 참고선 제현에게 잠행에서 조심해야 할 점을 다시금 일러주었다. 대개 백성들은 황실에서처럼 극존칭을 쓰지 아니하니 그를 삼가야 하며, 그러니 당연히 태자비나 저하 같은 호칭은 쓸 수 없다고. 빈곤한 마을에서 살아온 사람의 입성은 아니나 어느 정도 백성들의 입말을 쓸 필요는 분명하니 말을 맞춰야 한다고도 말하였다.
“저하께서 소첩보다 세 살이 아래이시니…….”
“아래이니?”
“형님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혀, 형님? 연우 형님…?”
“그리고 소첩은 제제라 부르면 되겠지요. 이름자를 함부로 부르고 다닐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제현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서 눈만 둥그렇게 떴다. 형님이라니, 제제라니! 심장이 크게 부풀었다가 바람이 빠지듯 쪼그라드는 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제현은 한번 불러 보라며 맞잡은 손을 콕콕 찌르는 연우에게 조심스레 입을 떼어 말하였다.
“연우, 형님.”
“응, 제제야.”
“혀, 형님. 연우 형님…!”
“나 어디 가지 않는데.”
배시시 웃은 연우는 제현의 손을 살며시 제 쪽으로 끌며 말하였다. 여느 사내가 관심이 있는 여인에게 가벼이 농을 치듯이, 가야금을 연주하듯 손등의 도드라진 핏줄 하나하나를 더듬어 가며.
“내 이곳이 처음이라 잘 모르니 알려주겠나? 제제가 가르쳐 줬으면 좋겠는데.”
“부, 아, 아니, 형님…….”
“다른 사람은 싫어. 제제와 같이 가고 싶소만.”
꿀타래를 좋아하는가? 답례로 그것을 사주겠네. 아주 달고 맛있을 걸세.
모르긴 몰라도 꿀타래 따위보다 달게 웃는 연우에 제현은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정작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은 자신이라 생각하며. 길이든, 야시장이든, 사람을 홀리는 법이든.
손을 끌며 어서 구경을 하러 가자 말하는 연우에 제현은 마을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도 앞장서 걷기 시작하였다. 하나 마을은 걸어도 걸어도 반짝이며 사람 사는 기운이 돌지 않았다. 제현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같은 태영국이 맞나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연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점차 표정이 굳어 가는 태자를 잠자코 따랐다. 제현은 묘한 불쾌감과 당혹스러움을 피하고 싶었으나 이를 마주하지 않는다면 성군 또한 되지 못하리란 생각에 계속 걸음을 옮겼다.
성실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시장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가게라고 하기에도 소박하디소박한 노점 몇 개가 늘어진 거리에 당도하였다. 마을이 하도 황폐하여 호위무사들은 큰 몸을 어디에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고 한참을 멀리 떨어져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갈 수밖에 없었다. 하여 연우와 제현은 뜻밖에도 단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제제야, 우리 저기에 가 보자.”
심란한 와중에도 부인이 저를 아명으로 부르는 것은 썩 기분이 좋아 제현은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눌러야만 하였다. 황궁에서는 제가 간혹 말을 놓으라 할 때도 어찌 그럴 수 있겠냐며 끝내 거절하더니만. 이리 살갑게 불러줄 줄 알았다면 진작에 궁 밖으로 나올 것을 그랬다며 제현은 연우를 따라 종종걸음을 옮겼다.
연우는 작고 까만 사내아이가 등을 둥글게 말고 앉아 시무룩하게 있는 것을 보고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무언갈 먹고 싶은 생각도, 갖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으나 어린 것이 나와 벌써부터 돈을 벌겠다 애를 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질 않아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제게 걸음 하는 이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냅다 큰절하였다. 그 태도가 지나치게 공손하여 제현은 외려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앳되어 제현의 속은 홧홧해졌다가 이내 차가워지기를 반복하였다. 대체 무슨 사정이기에 이리 어린 것이 시장 바닥에 나와 있단 말인가.
“안녕하십니까, 나리들!”
“내 이 마을은 처음이라… 촌장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겠나?”
“촌장님께서는 저-어기 큰 나무가 있는 방향으로 가시면 뵐 수 있습니다! 하나 지금은 밤이 늦어서…….”
“아아, 지금이 벌써 자시(子時: 밤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의 동안)이니 시간이 너무 늦었지. 한데 자네는 이 늦은 시각까지 물건을 파는 겐가?”
“어,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소인이 장남이니 마땅히 이리해야지요, 나리.”
“기특한지고.”
제현은 처음 보는 사내아이에게 살갑게 굴며 이리저리 말을 걸고,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가는 연우가 마냥 신기하였다. 천성이 따스하고 곰살맞은 것은 알았으나 거리의 백성들과도 퍽 자연스레 섞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조금 묘하였다. 어쩐지 외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활달하게 말을 하는 것이 보기 좋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의 추레한 행색에 자꾸만 시선을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
“아, 어여뻐라! 이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여인네들의 허리춤이나, 사내들의 검집에 다는 장신구로 어머니께서 만든 것입니다.”
“아아, 어여쁘다….”
“……형님께 잘 어울립니다.”
“정말? 한데 자네는 내게 무엇이든 다 잘 어울린다고 하니 믿을 수가 있나?”
푸슬푸슬 흩어지듯 웃는 연우에 제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좋았다. 말을 놓으며 편하게 저를 대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제현은 낮게 있는 가판대의 물건들을 조금 더 가까이 보겠다며 쪼그려 앉는 연우의 뒤를 지키고 섰다. 연우는 이것저것을 들어 보이며 사내아이에게 가격을 묻고, 그럴 필요가 없으면서도 흥정을 했다. 제현은 태자비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며 어진 성군이란 저보다는 연우가 더 알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에이, 이것이 닷 냥이나 한단 말인가?”
“이걸 사시면 저것도 드리겠습니다.”
“참말?”
“예, 나리. 어머니께서 번듯한 객이 오시면 드리라 하였으니 드려도 되겠지요.”
“하하! 어린 사람이 벌써부터 장삿속이 훤하군그래.”
내 넘어가 주지. 눈가에 잎맥이 퍼지듯 주름이 가게 웃는 연우를 보며 아이도 함께 활짝 웃었다. 제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부인이 아무도 찾지 않는 가판대를 지키고 선 아이에게 돈보다도 말동무가 되어주고 싶었다는 것을. 아이는 처음에야 기가 죽어 굽실거렸지 나중에는 제현이 옆에 있는 것도 괘념치 않고 연우에게 먼저 너스레를 떨기도 하며 물건을 권하고, 이것저것을 대주기도 하였다.
저라면 그저 가여운 이에게 대충 돈이나 몇 푼 쥐여주고 말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제현의 얼굴은 금세 달아올랐다. 살며 이런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배움이 부족하다 생각지 않았다. 하면 이는 사람이 덜되었단 것이니 더욱 수치스러웠다.
“제제, 나 이것이랑 저것 갖고 싶은데.”
“…….”
“제제?”
“아, 어, 예,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가?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그저……. 여기, 값을 치르겠네. 많이 파시게.”
제현은 자그마한 노리개 두 개를 들고서 왜 저러나, 하는 눈으로 저를 보는 연우에게 이따 이야기하겠다며 황급히 엽전을 내려놓았다. 열 냥이 아닌 스무 냥이었으나 그를 헤아릴 정신 따위는 없었다. 당장 자리를 뜨고 싶었다. 엽전 스무 냥에 뛸 듯이 기뻐하며 하염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소년을 더 볼 자신이 없었다.
“잠깐만, 제제, 갑자기 어찌 이러는가?”
제현은 연우의 손을 잡고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좁은 시장 바닥의 추레한 차림새를 한 상인들이 체념한 표정으로 가판대를 지키고 있는 것을 더 보기 힘들었다.
나 까짓 게 성군이 될 자격이나 있단 말인가. 온갖 귀한 것만 누리고 살았으면서 진정 어려운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에게 자문할수록 제현은 작아져만 갔다. 언제나 황궁 안에서 누릴 것들은 모두 누리고 자랐기에 백성들의 실상은 실제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한참을 뛰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온 제현은 숨을 몰아쉬는 연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연우는 주위를 휘휘 둘러본 후 호위무사 몇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그를 찬찬히 다독였다.
“어찌 몸을 이리 떠실까요, 우리 저하께옵서.”
“…….”
“날이 추워 그러지는 않으실진대.”
“…내가 너무, 철없이 살았던 것 같아서. 내가 황제가 되면 모두… 바뀔 것이란 생각을 해서, 그래서…….”
부끄러워 몸이 떨립니다. 이제껏 성군이 되겠다는, 좋은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번도 백성들의 면면을 살펴보지 못한 게 부끄러워 견디기 힘듭니다.
제현은 웅얼거리고선 다시 연우의 어깨로 고개를 파묻었다.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다. 부인이 제게 실망할 것이라고 짐작은 하였으나 그에게 괜찮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 또한 철없이 자란 탓에 부리는 어리광이려나. 생각이 거기에까지 뻗어 나가자 혼란스러움은 가중되어 기댔던 품에서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괜찮습니다, 모르시면 소첩이 알려드리면 되지요. 모든 황제가 처음부터 의롭고 지혜로운 이로 태어났겠습니까?”
“부인…….”
“은월국에서는 종종 이리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보러 왔습니다. 하니 소첩은 잠행에 익숙한 것이 당연합니다. 소첩과 자신을 비교하여 괴로워하지 마소서, 저하.”
마음이 고운 이가 당연히 괴로워할 거라 생각하였다. 궁인들이 그를 어려워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본성은 나쁜 이가 아니란 것쯤이야 평생을 약조한 이로서 모를 리가. 끙끙 앓으며 괴로워하는 이가 짠하면서도 사랑스러워 연우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누르며 동그마한 머리와 이어지는 목선을 살살 매만졌다.
“아이참, 한 나라의 황제가 되실 분께서 이리 마음이 약하시면 어쩐단 말입니까?”
“…부인이 내게 알려주십시오. 형님이지 않습니까.”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낮게 뇌까리는 소리에 연우의 몸에서 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제게 실질적인 가르침을 달라는 태자의 진중함에 연우의 눈가는 무름해졌다. 가끔씩 이렇게 사내다운 모습을 보일 때면 몸 여기저기에 꽃이 피는 듯 간질거리지. 연우는 수줍음에 고개를 모로 꺾으며 말하였다.
“가르쳐 드리지요. 저하께서도 소첩께 많은 것을 알려주시고…….”
“응, 응.”
“우선은 몰래 하는 입맞춤의 재미를 알려주셔요.”
아무것도 먹지 못해 입이 심심합니다.
애교스럽게 들려 오는 말소리에 제현은 잠깐 얼이 빠졌으나, 이내 평소보다 더욱 수줍음을 타며 살그머니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아까 전 사내아이와 조잘거리는 것도 조금 질투가 났다 하면 아니 되겠지? 하나 괜찮다. 부인에게 입을 맞출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나뿐이니. 제현은 쪽 소리가 나게 입술과 혀뿌리를 빨아올리며 연우의 살내를 깊이 들이마셨다. 바깥에서 몰래 입을 맞추는 재미도 쏠쏠하구나, 하며.
성군이 되려면 부인의 말씨부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제현은 그리 말하고선 다시 입을 맞췄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면 그의 말투가 제게로 옮아올 것이 분명하다며. 연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태자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곱게 안겨들었다. 가을밤 산득산득한 바람이 부는 것이 궁에서보다도 마음을 설레게 하기는 하였다.
“아음, 응….”
“음, 부인…….”
“돌아가야 하는데… 제제, 응…….”
“천천히, 가도 괜찮습니다….”
한데 궁에서도 제제라 불러주시면 아니 됩니까? 침상에서 그리 불러주시면 내 원이 없을 것 같은데.
아랫입술을 떼지 않고서 하는 말에 연우는 생긋 웃으며 그리하겠다 말하였다. 아명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데 못 불러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제-, 연우는 몇 번이나 태자의 아명을 부르며 볼에 입술을 내렸다. 오늘따라 기특하고 사랑스러워 애정을 드러내고만 싶었다.
“에, 에구머니나!!”
“게 누구냐?!”
“나, 나리…….”
그렇게 볼에서 다시 입술로 가려던 차였다. 연우는 가까이서 들리는 탄성에 홱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를 확인하였다. 한데 아까 장신구를 팔던 사내아이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반짝이는 머리 장식을 건네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에 연우는 얼른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살폈다.
“응, 어찌 왔는가? 밤이 이리 늦었는데. 금일은 장사를 접는다 하였으면서.”
“스, 스무 냥이나 주셔서,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어…… 제가 파는 것 중 가장 값이 나가는 것입니다. 나리께 드리겠습니다.”
꼬질꼬질 때가 묻은 손이 하얀 손 위에 얹어졌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연우는 제가 본 머리 장식 중 가장 투박한 것을 애틋하게 보다가 이내 머리에 꽂고서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보였다.
“어때? 잘 어울리는가?”
“네, 잘 어울리십니다.”
“제제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괜찮은가?”
“무엇인들 형님께 안 어울리겠습니까.”
“고맙네. 내 낯선 곳에서 이리 귀한 선물을 다 받다니.”
“아,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나리.”
자그마한 머리통을 쓱 만져주고서 연우는 아이의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손가락 하나하나를 동글동글 매만지는 모습에서 가기가 아쉬운 것을 눈치챈 연우는 아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하룻밤만 묵을 수 있겠는가? 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줌세. 촌장님을 만나러 온 것인데 이리 늦게 와 어디에 갈 수가 없어 그러네.”
“하면 소인이야 영광이오나 매우 누추한데…….”
“응, 그것이야 걱정할 것 없네. 방랑객에게는 지붕과 이불 한 채만 있어도 감사할 따름이니. 그렇지, 제제?”
“예, 혀, 형님.”
아이는 제 양손을 쥐고서 사붓이 웃는 연우에 머뭇거리며 답을 하였다.
“하면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좁은 집이나 손님들께 내어 드릴 방 하나는 있습니다.”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맞잡은 손을 살갑게 토닥이며 웃는 얼굴에 소년도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다 큰 사내 둘이서 입을 맞춘 것이야 뭐, 못 본 셈 치자 생각하며.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 나리.”
“고맙네.”
“…….”
“이이는 긴 여정이 처음이라 적잖이 피곤한가 보아. 그렇지?”
“예? 예, 형님.”
소년은 앞장서 가는 내내 손님을 이리 모시는 것은 처음이라 영 부족한 점이 많을 터이니 너른 아량으로 이해해 달라 부탁하였다. 또한, 집이 생각보다도 더욱 협소하고 누추하니 단 하룻밤을 묵기에도 불편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제현은 처음에 누추해 보았자 얼마나 누추할꼬, 하는 생각을 하였으나 실제 그가 사는 집으로 오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연우와 제현의 멀끔한 차림새를 보고서 실망할까 몇 번이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연우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제현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웃었다.
“우리도 누구 초대를 받아 본 것은 처음이네. 제제랑 이리 있으니 좋아.”
“아, 어, 예, 혀, 형님…….”
“나리, 무어 드실 것이라도… 엇, 잠깐만!”
“오라버니!”
“은혜야, 어, 그것이, 밤늦게 객들을 모시게 되었단다. 어머니께선?”
게딱지만 한 집에 방을 구분 지을 것은 다 무너져 가는 문뿐이었다. 저 문이 달려 있다고 한들 제 기능을 온전히 할까? 제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아래로 하다가 웬 자그마한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아이는 혀를 쏙 빼물더니 소년의 뒤로 가 서서는 제가 아닌 연우에게로 똘망똘망한 눈을 가져갔다.
“안녕, 아가.”
“꺄-!”
“늦게 와서 미안. 잠을 깨웠구나?”
“아냐, 오라버니 손님? 머리두 이쁘다!”
“은혜야, 나리께 무슨 말버릇이야!”
“어어, 괜찮네. 내가 어디의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으니 그저 신세 지는 나그네 둘일세. 한데 아가 이름이 은혜구나. 꼭 다람쥐같이 귀엽네.”
잠행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나갔었지요. 익숙합니다.
연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제현은 쪼그려 앉아 여자아이와 서툴게 악수까지 하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소년은 기분이 좋은 것을 숨기지 못하였고, 은혜라 하는 여자아이는 제 오라비 등 뒤에서 나와 연우의 다리에 매달려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 공간에 온전히 처음 온 것은 저뿐인 것처럼 느껴졌으나 제현의 기분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머니께서 주무시니 내일 재미나게 놀자, 아가. 약속.”
“응! 약속!”
“은혜야, 이제 어머니 계신 방으로 들어가야지.”
“잘 자, 나리!”
“은혜도 잘 자렴.”
조막만 한 손으로 고동빛이 나는 머리칼을 꼭 쥐어 당기더니 아이는 머리칼에 두어 번 입을 맞추고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고리를 쥐고서도 몇 번이나 연우를 돌아보며 표정을 이상하게 만들며 장난을 거는 게 퍽 귀여웠다. 그리고 제현은 아이를 따라 눈가와 콧잔등을 구기며 웃는 연우를 당장이라도 안고 싶어 애가 탔다.
원래도 사랑스러운 것은 알았으나 굳이 이렇게 나와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는가? 제현은 제 부인에게 닿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짙은 눈매로 그를 훑기만 하였다. 눈치가 빠른 소년은 역시 아까 제가 본 입맞춤이 예삿일은 아니었다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제현과 연우가 잘 방을 안내해 주며 소년은 먹을 것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부끄럽고 창피하였으나 찬밥을 뭉친 주먹밥 두 덩어리 말고는 먹을 것이 달리 없었다.
“어, 나리들, 저희 집에 마땅히 먹을 것이 없어 주먹밥 두 덩어리가 다인데…….”
“신세를 지는 처지에서는 무엇이라도 고마운 법이지. 자네 덕에 배를 곯지 않고 자는 것만도 고마울 따름일세. 그런 말 하지 말게나.”
“요새 비가 통 내리질 않아 가뭄이 심하여… 도성은 괜찮습니까?”
“도성은…….”
추레한 나무판자에 주먹밥을 가지고 온 소년에게 제현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수도는 언제나 일정 수준의 풍요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제가 태어난 후로는 단 한 번도 식량이 부족하여 아낀 적이 없었다. 물론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드리는 등의 노력은 하였으나 한 번도 마음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비를 내려 달라며 몇 번이고 읍을 하는 황제의 뒤에 서서 저는 무슨 생각을 하였던가.
“도성에도 비는 내리지 않네. 하나 이 마을과 같이 가물지도 않았지.”
“아아……. 다행입니다. 태영국의 모두가 기근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라니 참말 다행입니다. 다 기우제 덕분이겠지요? 황제 폐하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곧 우리 마을에도 비구름이 찾아오겠지요!”
“…….”
“하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나리들.”
매년 기근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올리는 황제에게 이런 허례허식이 무어가 중요하냐며 묻던 제현이었다. 그는 매번 언제 이 지루한 제사가 끝나는지만 생각하였었다. 이것이 다 배움이라며 진중한 태도를 보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건성으로 예, 예, 대답하기만 하였고. 한데 변방의 이름 모를 소년에게는 그런 허례허식마저도 희망인 것을 이제야 알았다. 또다시 한없이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찬밥에 최소한의 간만 하여 뭉친 것도 야금야금 잘만 먹는 연우에게 기대어 제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제야,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주먹밥이 참말 맛있단다. 먹어 보렴.”
“…부끄러워 입맛이 없습니다.”
“하면 내가 다 먹을 텐데도?”
“다 드셔도 됩니다, 형님.”
“에이. 또 속이 상하여 그러는구나.”
손에 달라붙은 밥알까지 입 안에 털어 넣은 연우가 제 등에 뺨을 대고 있던 제현을 냉큼 눕히고서 팔베개를 해주었다. 장신의 사내 둘이 눕자 좁은 방은 몸을 뒤채기도 힘들 정도로 꽉 찼고, 연우는 그 와중에도 재주 좋게 남은 손으로 주먹밥을 조금씩 떼어 제현의 입에 넣어주었다.
“성군도 될 기력이 있어야 하지요, 제제야.”
“…….”
“없는 살림에 손님 대접을 하겠다며 이리 밥을 몽땅 준 아이의 정성을 봐서라도 먹어야지, 설마 지금 반찬 투정을 하는 것인가?”
“아, 아니! 그런 게 아님은 부, 형님이 더 잘…….”
“하면 아- 해. 형님이 먹여줄 터이니.”
다 먹으면 상으로 입을 맞춰줄게. 숨소리가 많이 섞인 음성이 귓가를 간질이기에 제현의 표정이 절로 풀어졌다. 제현은 연우가 조금씩 떼어주는 주먹밥을 모두 먹고서야 찬찬히 말을 하였다.
“나의 부족함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혀, 형님에 비하면 성군과는 거리가 멀고……. 하나 형님께서 같이, 나와 같이 계신다면 좋은 황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수룩하게 말을 하는 것도 사랑스러운 제제.”
“부, 형님, 그런 말을…….”
매서운 눈매를 하고선 눈썹은 축 늘어뜨린 채 저를 올려다보는 제현에 연우의 마음이 금세 동하여 머리를 받치고 있던 팔을 굽혀 그를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묵직한 덩치가 단박에 안겨 오는 것이 퍽 귀엽고, 무게감에 숨이 막혔지만 딱 그만큼 제 마음도 벅찼다.
“날이 밝으면 촌장님을 찾아가 마을에 대해 더 물어보고, 궁에 들어가면 내 은월국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태영국의 몇 개 마을을 합친 것만 한 작은 나라이나 웃지 않는 이가 없는 나라이니.”
“부인…….”
“아이참, 형님이라고 부르라 하였는데.”
아무도 못 듣게 입을 막아 버려야지, 원. 이마를 맞대며 킥킥 웃던 연우는 이내 태자의 위로 올라 입을 맞추었다. 성군이 될 자질은 충분하니 제가 옆에서 보조만 맞춰주면 되겠다 생각하였으나 뭐, 둘이 같이 성군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그편이 제현도 외롭지 않을 터이니.
***
“집안끼리 이리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어찌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느냐, 서주야.”
“예, 아버지.”
“부족한 여식이나마 잘 부탁드립니다, 대감.”
“그런 말씀은 넣어 두세요, 이제 한 가족이 될 게 아닙니까?”
제현과 연우가 북쪽 변방 마을의 남루한 집에서 늦은 조반을 들며 잠을 쫓을 때 서주는 혼담을 나누고 있었다. 열병이 가신 지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았으나 다 말라 허옇게 일어난 입술을 하고서 서주가 먼저 말한 것이었다. 혼인을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서주의 부모는 한 번도 가정을 이루는 것에 이렇다 할 자세를 취하지 않던 아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냄에 두말하지 않고 양갓집 규수들을 알아보았다.
“…….”
“…….”
별 의미 없이 찻잔을 기울이다 눈이 마주친 여인에게 서주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가타부타 말이 필요 없는 미남자였으나 여인네는 동요치 않고 마주 웃어줄 뿐이었다. 서주는 그 웃음을 보고서 저이도 따로 정인이 있는 것일까, 조심스레 짐작하다 이내 자조하였다. 정인이라니. 주제에 내가 또 태자비마마를 생각하는 것인가.
혼례일에 대해서는 추후 만남을 갖자며 미소 짓는 양가 어른들 사이에서 혼인 당사자들은 정작 다른 생각을 하며 자리만 지켰다. 서주와 여인은 표정 없이 자리를 지키며 찻물을 들이켰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차를.
〈달의 정원 1〉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