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태영국의 황제는 황후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였다. 그러나 그만 특별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대로 태영국의 사내들은 한 사람의 정인만을 가졌다. 그것이 황제라 하여도 다를 것은 없었고.
‘폐하, 황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제현이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황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대들의 생각이고.’
하나만 낳아 잘 키워 나라의 대들보로 키우면 되는 것 아닌가? 나처럼.
가신들의 말에도 ‘나는 가타부타 말을 보탠다고 하여 황손을 낳을 수 있는 종마가 아니라네.’라고 일갈하는 황제에 태영국의 신하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라의 유일한 적통 황자인 제현의 이른 혼인은 당연한 것이었다.
열아홉이 되면 국혼을 올릴 예정이라는 것은 제현 역시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 알고 있는 바였다. 아닌 게 아니라, 태영국은 예로부터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나라가 있었다. 닷새를 꼬박 달려야 당도할 수 있는 나라 은월국. 두 나라의 사이는 실로 각별한 것이어서 제현도 그곳에서 부인이 될 자가 올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 어마마마와 할마마마 역시 은월국에서 온 분이셨으니.
하나 사내가 온다는 말에는 솔직히 놀라기도 하였다.
‘사내?’
‘그렇습니다, 저하.’
‘…사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단 말이냐?’
‘소인도 잘은 모르겠사오나…….’
은월국에서도 몇 없는 ‘월앙인(月英人)’이라는 존재는 사내도 잉태가 가능하다 하옵니다.
제현은 약간 께름칙했지만 딱히 정인도 없고, 비가 될 사람 말고도 다른 이를 후궁으로 취하면 된다 생각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었다.
“…저기…….”
“으응…….”
“주, 주무십시오, 아직 시간이 안 되었으니….”
하나 대충하자던 마음가짐은 어디로 가고, 제현은 자는 태자비의 옆모습만으로도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사실 혼인을 한다 하여 예물과 패물을 태영국으로 보내왔을 때는 심히 마음이 상하였다. 고작 비단 몇 필에 보석들, 그리고 서신.
「태영국의 사람이 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으나 노력하여,
백성들을 따사로운 마음으로 살필 수 있는 태자비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따뜻한 나라로 하루라도 더 빨리 가고 싶습니다.
조만간 발치의 눈 대신 꽃이 깔린 길로 가겠습니다.」
발치의 눈 대신 꽃이 깔린 길이라? 태자는 서신을 협탁 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서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국가 간의 혼인인데 너무 아기자기한 것들만 보낸 것이 아닌가 하여 약간 괘씸하기까지 했다. 태영국과 은월국은 크기 자체가 다른 나라였는데도 괜스레 제현은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황후와 황태후가 그런 제현에게 철 좀 들라며 다그쳤지만 제현은 불퉁히 입을 내밀고서 어디 얼마나 대단한 월앙인이 오나 보자고 혼자 이를 갈고 있었다. 그에게 절대 따스하게 대해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어젯밤 제가 너무 괴롭혀서 그렇지요…. 미안합니다.”
그리고 혼인날 그 다짐은 와르르 무너졌다. 태영국은 혼인을 할 때 신부와 신랑의 얼굴을 모두 가리는 풍습이 있었다. 평민들의 혼인식에서마저도 서로 얼굴을 다 알고 있으나 망건을 푹 뒤집어쓰고서 부축을 받아 혼례를 올리곤 하였다. 다 알아도 그게 더 가슴이 뛰지! 순전히 사사로운 낭만과 분위기를 위하여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혼례 풍습이었다. 하나 국혼은 달랐다. 비단 태영국뿐만이 아니라, 타국에서도 국혼은 서로의 생김새를 모르고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해서 첫날밤 얼굴을 보고 소박을 맞은 비도 적잖이 생기곤 하였고.
‘서로의 잔을 들어 합혼주로 채워주십시오.’
옆의 신하들에게 기대듯 팔을 얹고서 힘겹게 맞절을 하고, 하라는 대로 합혼주도 나누어 마시고, 대추 한 알씩을 서로의 입에 넣어줄 때만 하여도 제현은 계속 불퉁한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내와 결혼하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내가 부족한 게 무언데? 이자가 월앙인이면 월앙인이지 얼마나 잘났다고? 그래서 합궁 장소인 태은궁에도 한 시진이나 늦게 갔다. 비뚤어진 마음이었으나 제현은 누가 시킨다고 하여 곧이곧대로 무언가를 시행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러시면 아니 되신다며 저를 어렸을 때부터 봐 온 내시가 안절부절못할 때도 ‘자네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른다네.’라며 불퉁히 말할 뿐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아, 소첩이 너무 늦게…. 송구하옵나이다, 저하…….”
“괘, 괜찮, 괜찮으니 편히…!”
하나 애석하게도 신부는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망건을 걷어낼 수 없었다. 캄캄한 시야 안에서 연우의 마음은 불안함으로 너울거렸다. 첫날부터 소박을 맞았다 하면 속을 끓이며 가슴을 칠 어미 아비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도 오늘 안에는 오시겠지? 제발. 초야는 치르고 은월국으로, 아닌가. 그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소박을 맞는 것이 외려 나으려나.
제현은 그런 연우의 속도 모르고 느긋하게 태은궁으로 갔었다. 사내와 첫날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심란하여 자기 혼자 술 한잔을 걸치고서.
‘태자 저하 드십니다!’
‘하아…….’
연우는 태자가 온다는 외침에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소박은 아니구나. 안 오시면 어찌하나 걱정했는데. 그는 치마처럼 치렁치렁한 혼례복을 꾹 말아 쥐고서 안도하였다. 그리고 그런 연우에게 태자는 성의 없이 한마디만 하고서 신부의 낯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는 천으로 손을 옮겼다.
‘답답하셨지요. 일이 있어 늦었습니다.’
‘아니옵니다, 저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신랑에게서 은은히 나는 술 냄새가 연우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양인의 체향이 아닐까, 그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하였지만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인 소리였다. 일이라는 것이 술을 즐기고 오는 것이었나. 하나 태자가 자기보다 세 살이 어리다는 것을 아는 참이었다.
열아홉은 어린 나이이지, 연우는 그리 생각하며 태자가 천을 걷어내는 손길에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약간 붉고 주홍빛의 빛이 조심성 없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눈이 아파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태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저어되어 연우는 다시금 눈을 떴다. 살그머니 실눈을 뜨자, 눈앞에는 깜짝 놀란 표정의 태자가 보였다.
잘생겼다. 연우는 금은보화로 만든 장식을 잔뜩 올려 무거운 머리를 들어 올려 제 신랑을 보았다. 와, 잘생겼다. 연우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여 입까지 작게 벌리고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분명 새카만 눈동자인데 그 안에 별이라도 있는 듯 반짝이는 것이 퍽 보기가 간질거렸다.
그에 반에 태자는 연우를 처음으로 마주하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약간 얼이 빠진 듯한 표정 같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연우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소박을…… 맞는 줄 알고…….’
‘어, 아, 아니…….’
안 오시는 줄 알았는데, 오셔서, 오셔서…….
첫날밤부터 눈물 바람을 하면 싫어하실 터인데. 연우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은줄로 길게 엮은 보석이 귓가를 스치며 늘어졌으나 고개는 금세 다시 들려졌다. 어리둥절하여 제 턱을 감싼 손을 내려다보았다.
호남형의 태자가 제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붓이 반쯤 감긴 눈을 보며 연우는 허둥지둥 눈을 감았다. 입을 맞추려는 것일까? 잘은 모르겠으나 아무렴 초야이니 신부가 싫더라도 입술 정도는 맞추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술 냄새 사이로 번지는 숲속 같은 체향을 느낀 순간 연우도 새큼한 체향을 내보내고 말았다. 그 순간 입술이 맞닿았고, 연우는 눈을 조금 더 질끈 감고서 태자를 받아들였다.
“천천히, 부, 부, 부인, 편하신 대로 준비 다 하시면 같이… 아침 문안을 드리러…….”
“예, 저하. 소첩 얼른…. 아!”
“어디 안 좋으십니까? 태의, 태의를 부를까요?”
“아니, 아니옵니다. 소첩 무탈하오니 저하께서도 준비를….”
그게 어젯밤의 일이었다. 태자는 요령 없이 제게 입 맞추고, 옷을 황급히 벗기고, 앓는 소리를 끙끙하더니 그대로 제 안에 들어왔었다. 입맞춤은 어설펐고, 옷을 벗기는 손길 또한 거칠고 다급하여 온몸이 아팠다. 하나 그가 안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할 수 있는 고통은 아니었다.
연우는 교접이 이리 아픈 것인가 하면서 조금 울었다. 수줍어 잘 보지는 못하였으나 분명 곧은 양물이었는데, 제 안으로 들어온 것은 미끈하지 않고 울퉁불퉁 핏줄이 느껴질 정도로 거칠기만 하였다. 아파, 아파. 없는 정신에 아프다는 말을 보태었으나 태자는 저보다도 정신없이 허릿짓을 이어갔었지. 이러다 몸이 모두 못 쓰게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울기도 하였으나, 마지막에는 기묘하게 등줄기가 바짝 서서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어, 서, 서두를 것 없으니, 저는 먼저, 네.”
“예, 저하.”
연우는 사정없이 말을 절며 화드득 놀라 태은궁을 나가는 태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디가 불편하신가, 아니면 원래 말더듬이라 말을 아끼셨던 것인가? 혼인을 할 자가 말을 더듬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연우는 눈썹을 문지르며 옆의 궁인에게 물었다.
“저하께서 어디가 아픈가 보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궁인은 헐벗은 채 이불을 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우를 물끄러미 훔쳐보다가 치맛단을 꾹 쥐었다. 모시게 된 이가 제 눈에도 이리 귀엽고 어여쁜데, 태자의 눈에는 오죽하겠는가 싶어서였다.
***
혼인을 하였으니 한 주에 한 번은 꼭 황궁을 다 돌며 문안 인사를 드려야 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연우는 곱게 차려입고서 태은궁을 나섰다. 은월국은 머리 길이에 딱히 제한을 두지 않아 여자고 남자고, 평민이고 귀족이고를 따지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머리 모양을 만졌다.
왕자였던 연우는 어깨에 닿지 않는 갈색의 머리를 어렸을 때부터 고수하였다. 너무 긴 머리는 치렁치렁하여 좋아하지 않았고, 또 너무 짧은 머리는 취향이 아니었다. 월앙인으로 발현하기 전부터 적당한 길이의 단발에 익숙해져 있던 연우는 눈을 살짝 찔러오는 앞머리를 후, 불며 조만간 앞머리는 잘라야겠다 생각하였다.
그리고 태자는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혼인하기 싫다고, 월앙인이고 자시고 여인네와 혼인하고 싶다고 입을 삐죽이던 것은 이미 잊은 채였다.
“나오셨, 습니까?”
“네, 저하. 소첩이 너무 늦게 나온 것은 아니지요?”
“아닙,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연우는 살포시 웃고서 태자의 한 발짝 뒤쯤에 섰다. 나름의 예의를 차린 것이었다. 같은 사내라 하나 저는 부인이고, 그는 남편의 입장이 되었으니. 하나 제현은 가벼이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할 따름이었다.
날 보고 웃어줬는데 왜 뒤로 가지? 태자는 태자비의 머리에 앉은 나비 모양의 장신구를 보고서 말하였다.
“옆, 옆에….”
“예?”
“옆에서, 옆에 서서 같이 가시지요.”
“아아, 네, 저하.”
부부의 연을 맺기는 하였으나 차마 연우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제현은 옆에서 같이 가자고 해 놓고선 그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허청허청 걷기 시작하였다.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 그래도 덩치가 좋고 다리까지 길어 보폭이 크고 발걸음이 빠른데, 연우가 옆에 있다 생각하니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옆에 딸린 궁인들도 뛰듯이 걸었으나 그를 통 무시하고 걷던 제현은, 마찬가지로 연우가 거의 뛰듯이 걷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걸음이 빠르기도 하네. 연우는 긴 옷자락을 살짝 쥐고서 발을 재게 놀렸다. 하나 그것도 어느 정도지, 넓은 황궁을 계속 그리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자연스레 뒤처지게 되었다.
그에 태자는 옆에서 따라오던 온기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자마자 두리번거리며 옆의 호위무사, 내관, 궁인들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부인은 어딜 가고 너희만 있느냐?”
“…저하, 태자비마마와 같이 가시니만큼 보폭을 조금 느리게 하시는 것이.”
“…알겠다.”
걸음이 너무 빨랐나? 제현은 저만치서 뛰듯이 걸어오는 연우를 확인하고서 얼른 연우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제현을 모시는 궁인들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제현은 숨을 조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태자비를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았다. 옆에서 오라고 했으나 마음이 떨려서 발을 조급히 움직인 것이었는데, 그대를 힘들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닌데.
하나 제현이 괜찮으냐 물을 새도 없이 태자비가 먼저 해사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태자 저하의 곁에서 걸으려면, 소첩도 열심히 걸어야겠습니다.”
상기된 볼을 한 번 만져 봐도 될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제현에게 태자비의 말은 화살처럼 꽂혔다. 거기에 방글방글 웃는 낯까지. 설상가상으로 초야를 치르기 전 망건을 걷어내자 보였던 촉촉한 눈망울까지 떠올랐다. 결국, 제현은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내내 속도를 조절치 못하고 태자비를 힘들게 할 수밖에 없었다.
***
“어찌 태자비가 이리 힘들어하는고?”
“어젯밤 태자비를 너무 괴롭힌 것이 아닙니까, 태자?”
“한창때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
“왜, 왜 그런 말씀을……!”
태자비가 싫어하면 어쩌려고! 제현은 오자마자 농을 치는 황후와 황태후, 황제에 제발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사정하였으나 셋은 지치지도 않고 신혼부부를 놀렸다. 새 식구를 맞아 궁은 전반적으로 붕 뜬 분위기였다. 연우는 그 공기에 익숙해지려 노력하였으나 태자가 하도 정신 사납게 굴어 어쩔 수 없이 긴장하게 되었다. 펄쩍펄쩍 뛰려 하는데 이게 제가 좋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싫어 그런 것인지. 낯선 환경에서 연우는 팽팽 도는 머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은월국에서 온 귀한 왕자가 우리 식구가 되었는데 첫날부터 괴롭히면 쓰겠느냐, 응?”
“그래, 밤마다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적당히하거라, 제현아.”
“할마마마!!”
좌불안석이 되어 어떻게든 어른들이 하는 말을 멈추게 하고 싶어 노력하였지만, 제현이 노력할수록 황궁의 어른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놀리기에 바빴다. 연우는 그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따끈한 차를 들이켜면서도 어제 못 본 사내의 얼굴을 보는 것은 빼놓지 않는 연우였다.
연우는 그리 말하지 말라며, 내가 손주이지 태자비가 손주는 아니지 않으냐며 인상을 찌푸리는 태자를 몰래 지켜보았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정말로… 잘생기셨구나.
은월국의 사내들은 태영국의 사내들보다는 몸이 작았다. 아무리 크다고 해도 태자만큼 큰 사내는 본 적이 없었다. 연우는 은월국의 형제들을 떠올리며 제현을 보았다. 확실히 제현이 조금 더 선이 굵고 사내다운 맛이 있었다. 눈썹 부분의 뼈와 콧대가 도드라진 얼굴. 어제 제 위에서 사정하기 전 미간을 찌푸릴 때도 잘생겼었지. 그리 참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생각을 하며 어른들에게 그만 좀 놀리시라며 화를 내는 제현을 보는데, 이번에는 황후가 놀릴 건수 하나 잡았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보았다.
“우리 태자비는 그저 신랑의 얼굴을 보기 바쁘구나.”
“예? 아, 아니…….”
“태자가 괴롭히면 내게 말하세요, 철없는 아들을 신랑으로 삼은 태자비가 앞으로 고생이 많아 보이니.”
“어마마마!!”
그날 아침, 문안 인사에서 제현과 연우는 넝마가 되어 나와야 했다. 제현은 속이 탔다. 이렇게 괴롭히면 연우가 도망가고 싶어질지도 모르는데 어쩌자고 첫날부터. 제현은 고민하다가 태은궁으로 들어가려는 연우에게 말하였다.
“어르신들이 장난을 치신 것이니 너무…….”
“아니옵니다.”
하나 연우가 웃어주자 하려던 말을 모두 잊고 말았다.
“다정히 대해주시니 감사하지요.”
“아, 어, 어…….”
“피곤하실 테니 쉬셔요, 저하. 소첩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연우를 따라 저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한 제현은 연우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좀처럼 태은궁을 떠나지 못하였다.
“아…….”
제현의 뒤를 지키고 있던 궁인들은 불콰해진 낯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뭐, 언제 사내와 혼인하기 싫다 아집을 부리던 이란 말인가. 기실 궁인들의 생각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제현은 태자비의 뒷모습을 보며 그리 웃어주시면 한시도 쉴 수 없다 생각하였으니.
***
혼인을 하였으나 태자는 열아홉이었고, 태자비는 스물둘이었다. 둘의 나이가 혼인하기에 적기는 맞았으나, 태자는 진정한 양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태영국 황실의 손은 대대로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심한 열병을 앓고서 진정한 사내가 된다 하였다. 태영국의 사내 대부분이 ‘양인’으로 발현하는 데 반해, 황손은 ‘극양인’으로 발현한다는 점만이 달랐다. 양인들은 아이의 아비가 될 자들이었다. 양인으로 발현하기 전 필히 겪는 열병은 정인의 품에서만 내릴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는 곧 정을 통하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은월국에만 있는 ‘월앙인’이라는 존재는 양인으로 발현할 때처럼 괴롭게 앓지는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월앙인인 자가 많았기에 별다른 홍역을 앓지 않는 이가 많았지만, 후에 발현을 한다면 양인으로의 발현과 마찬가지로 열병을 앓은 뒤 잉태가 가능한 몸으로 거듭나는 이들이었다. 대개 여인들이 월앙인으로 발현하였으나, 드물게 사내들도 아이를 밸 수 있는 몸으로 태어나곤 하였다. 연우는 아주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사내에, 스물이 넘어 월앙인이 되었으니.
“황실의 손들은 해서 목숨을 많이 잃기도 하였습니다.”
“어찌…….”
“열을 가라앉히지 못하면 그대로 죽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그리 숨을 거둔 황손이 전에도 꽤 되었습니다.”
연우는 입을 가리며 크게 놀란 것을 감췄으나 커진 눈마저 가릴 수는 없었다. 제현은 앞에서 스승이 하는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연우의 얼굴을 살피느라 바빴다. 스승이라고는 하나 한 나라의 황제가 될 이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어 각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와 태자비의 사이가 영 어색하다 하여 같이 교육을 받는 방향으로 하자 결심하였는데, 이래서야 태자비만 지식을 쌓는 꼴이었다.
“저하, 방금 제가 무어라 하였습니까?”
“예? 황실의 손들은 열병이 나 죽는다고…….”
아니, 결론만 말하란 얘기가 아니었는데.
연우의 옆태만 구경하느라 넋을 놓고 있던 제현이 엉뚱한 답을 내놓자 연우의 눈이 더욱 커졌다. 혼인을 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었다. 제현이 스무 살이 되기까지는 단 석 달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연우는 태자의 손등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열병은 어찌하면 낫습니까? 네?”
“어, 어…….”
저 칠푼이를 어쩌면 좋을꼬. 황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관들 사이에서도 무섭다 소문이 난 제1교육관은 차마 태자를 혼내지 못하였다. 태자비가 손등을 찌른 것에도 부끄러워 귀며 목덜미를 새빨갛게 물들이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멀뚱히 먼 산만 바라보는 태자 대신 교육관이 입을 뗐다.
“제가 앞서 진정한 사내가 되는 과정 중에 열병을 앓는다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네, 스승님.”
“말 그대로입니다. 황손을 낳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앓고 지나가는 병이니,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정인과 밤을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아, 그러면 되는…. 네?”
“잘 알아 두십시오, 태자비마마.”
교육관이 웃으며 하는 말에 연우의 얼굴도 태자와 같이 빨개졌다. 연우는 비로소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일종의 발정기라는 말이구나. 월앙인에게도 가끔 찾아오는 그 시기. 월앙인이라 밝혀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우는 아직 그 시기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다만 예전에 그 몸의 열기를 풀지 못해 얼치기가 된 자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 연우는 곰곰 생각하였다. 태자를 그리 만들 수는 없으니 차차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연우가 깊이 고심하고 있는 와중에 제현은 인상을 찌푸리고서 제1교육관에게 말을 하였다.
“태자비에게 부담 주지 마십시오, 스승님.”
“…유일한 황손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제현은 연우에게 벌써부터 잠자리에 대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첫날밤에 아프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인데 무슨 열병 얘기를 한단 말인가. 하나 연우의 마음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절대 안 되지요! 소첩이 그날 방을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태자비마마께서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치신 것 같습니다, 저하.”
“…….”
소첩이 노력할 터이니 저하는 걱정 마십시오! 주먹을 불끈 쥐고서 말하는 모양새가 그저 귀여워 태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
아, 그는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홀로 태자궁에 있을 때면 제현은 이불을 끌어안고서 끙끙 앓기 바빴다. 어쩜 그리 생겼을까? 말씨는 또 왜 그렇게 단정하고? 그래서야 안 좋아할 수 없지 않은가! 이불을 팡팡 소리 나게 치다가 이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제현은 품 안에서 울며 절정에 다다랐던 연우를 떠올리며 수음을 하였다.
“하아… 부인, 아, 윽…!”
금세 꼭대기를 치고 가는 쾌감에 정을 토해낸 제현은 손바닥에 희멀겋게 뿜어진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연우를 좋아하는 마음이 둥실둥실 온몸을 떠다녔지만 태자는 매달 10일, 25일이 아니면 태은궁을 찾지 않았다. 괜히 가서 또 이상한 짓을 할까 걱정이 되었기에. 그래서 연우의 마음이 제게 완전히 멀어질까 저어되었기에. 그도 사람이니 첫날밤에 제가 한 짓이 얼마나 되먹지 못한 짓인지는 알았다. 그러니 해사한 얼굴이 보고 싶어도 먼저 발걸음하지 못하였다. 하나 정해진 합궁일은 빼놓지 않고 갔다. 그날은 가는 이유가 충분하였으니.
10월 10일, 태자는 평소보다 배로 오래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서 태은궁으로 향하였다. 탕에 향나무 가지를 띄워라. 생전 안 하던 요구를 함에 궁녀들은 웃음을 꾹 참으며 나뭇가지를 똑똑 부러트려 넣었고, 태자는 샅이며 귀 뒤까지 꼼꼼히 닦아내고서야 탕에서 일어났다.
태은궁으로 가자. 신이 난 걸 숨기지 못한 말씨에 궁인들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웃음을 숨겼다. 태자가 가는 걸음걸음마다 설렘이 뚝뚝 떨어졌다. 궁인들은 아직 앳된 티가 나는 태자의 뒤를 따르며 몰래 시시덕거렸다. 월앙인이든 뭐든, 곧 죽어도 사내는 싫다더니 주인이 좋아 꼬리치는 강아지가 따로 없게 된 태자가 귀여웠다.
“태자 저하 납신다-!”
“어흠, 흠!”
“오셨습니까, 저하.”
“자, 하루 잘, 보내셨습니까, 부, 부인?”
“네, 저하 덕분에 잘 보냈답니다.”
제현은 연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또 이런저런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생각을 했었으나 이번 합궁일 역시 신나게 말이나 더듬었다. 특히 부인이라고 부를 때는 단 한 번도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날씬하니 어여쁜 이가 제 부인인가 싶어서. 하나 연우는 그런 제현에게 그저 곱게 웃어줄 뿐이었다.
저보다 한 뼘 정도가 더 큰 태자를 올려다보며 연우는 방긋 웃었다. 최근 태자가 듣는 수업을 몇 개 같이 들으며 종종 대화를 해서 그런지 처음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조심하여야지, 하는 마음도 이제는 많이 흐려져 외려 친구가 없는 궁에서 태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못하였지만.
“주안상을 차려 놓았습니다. 저하께서 오신다 하여…….”
“그, 그러실 필요 없는데…….”
우물우물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하던 제현과 연우의 눈이 마주쳤다. 제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부산스레 옷만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주안상이라니, 그런 수고로움을 내게? 나는 그대에게 엉망인 첫날밤을 주었는데?
자책하며 눈도 못 마주치는 제현을 모른 채 연우는 태자에게 한 발짝 멀어지며 말하였다.
“들어오셔요, 저하.”
저게 선녀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 선녀란 말인가. 태자는 그리 생각하며 홀린 듯이 걸음을 옮기었다. 오늘은 기필코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리라 다짐하며.
그러나 그것은 기실 다짐에 불과할 따름이었기에 주안상을 사이에 놓고 태자와 태자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묘하였다. 단둘이 있고 싶어 궁인들을 모두 물리기는 하였는데, 그러니 더더욱 무언가 어색하였다.
“저기,”
“저,”
“아, 태자비 먼저… 말씀하세요.”
“그냥…….”
애써 입을 열기는 하였는데 둘이 동시에 운을 떼자 더욱 부끄러웠다. 부부 사이는 원래 이리 어색한 것인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도 이런 시절을 거친 것일까? 둘은 같은 생각을 하며 어렵사리 대화를 이어갔다.
“그저, 오늘은 한 번도 뵙지 못하여…. 잘 지내셨는가 하고…….”
“저는 항상, 잘 지내지요. 부, 부인 생각… 생각도 하며…….”
제 생각을 한다는 말에 연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술기운이 이제야 몰려오는 듯했다. 이전에 제현이 제 생각을 한다든지 그런 간질거리는 말을 한 적이 없어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연우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 제현의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합궁일이 아니면 좀처럼 찾지 않아 걱정하였는데.
손가락 끝이 예쁘게 쭉 빠져 어여쁜 연우의 손을 바라보다가 제현은 슬그머니 시선을 연우의 얼굴로 옮겼다. 아무리 봐도 선녀가 틀림없었다. 온 감각이 연우만을 향하고 있어 그는 숨도 조용히 마시고 내쉬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술김에 그를 자빠뜨릴까 적이 걱정되었다.
“소첩이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아, 하면 다음 잔은, 제가.”
“감사합니다, 저하.”
술잔을 기울이자 머지않아 발갛게 달아오르는 귓불을 한 번 깨물어 보고 싶다 생각했지만 그럴 용기는 도무지 나지 않았다. 당장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데 물기는 무엇을. 하나 제현도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서 연우의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잘해줄 것이었다. 더 친해져서, 매일 손도 잡고 궁을 다니고, 또 입을 맞추고 싶다면 입을 맞출 것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잉꼬부부라는 원대한 꿈을 품었으나 연우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듯하였다. 반 뼘 다가가자마자 화들짝 놀라는 몸이라니. 저보다 가늘디가는 몸이 파뜩 떠는 게 느껴졌으나 이제 와 도로 몸을 물릴 수도 없었다. 그것은 너무 비참하였다.
뭘 어떻게 하면 연우가 저를 좀 좋아할까. 어서 친해져서 허하지 않아도 포옹 정도는 원 없이 하고 싶은데. 제현은 한참 생각하다가 무화과를 연우의 입으로 가져갔다. 예부터 먹을 거 주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다고 하였으니 연우가 저를 나쁜 사람으로는 생각하지 말았으면 하여.
“드, 드세요, 부, 부인.”
“감사, 합니다, 저하….”
잘 익은 무화과가 시야로 들어와 연우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살짝 입을 벌리고서 무화과를 받아먹는데 그게 그리 보기가 좋아 제현은 헤실거리며 웃었다. 아, 진짜 어여쁘다. 이리 어여쁜 사람은 이번 생에서는 다시 만날 수가 없을 것이다.
과실을 한입에 넣고서 우물거리던 연우는 제현이 웃는 것을 보며 무화과를 건네었다. 저하도 드셔 보셔요. 잘 익어 맛이 좋네요. 나긋이 건네는 말과 손에 제현은 심히 부끄러워하며 그것을 받아먹었다. 문제는 받아먹으며 연우의 두 번째 손가락도 살짝 물었다는 것 정도.
“아, 어, 이, 일부러 그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괘, 괜찮습니다, 저하….”
“더러우니 어서 닦으세요, 여기, 여기….”
“아닙니다, 더럽다니요.”
이전에 입도 맞추었는데……. 연우는 무심결에 말을 뱉어내고선 뒤늦게 손안에 얼굴을 숨겨 버렸다. 제현은 숨어 버린 얼굴을 보며 무슨 말인지 생각하다가 바로 이해하고서 역시 손안에 얼굴의 반을 감추었다.
이리 부끄러워서 진짜 합궁은 어찌한담?
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좀처럼 서로를 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썩 괜찮은 밤이었다. 입 안의 무화과 향이 영영 남아 있을 것 같은.
***
태자는 쏘는 화살마다 과녁의 정중앙을 맞추는 제 부인을 멍하니 쳐다봤다.
제현은 수업을 들을 때마다 교육관에게 다음번 수업에는 태자비를 데리고 와도 됩니까, 하고 묻는 것이 최근 생긴 버릇 중 하나였다. 달이 차는 10일과 25일에는 혼자 자지 않아 좋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연우와 어떻게든 같이 있고 싶었다. 저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잘 못 하니 뒤에서 살금살금 꾀를 내어 부인과 있을 궁리를 하는 수밖에.
발로 뛰어가며 나름대로 애를 쓴 덕에 제현은 수묵화 수업이나 작문, 제왕법 등 앉아서 듣는 수업에는 태자비를 옆에 꼭 끼고 다녔다. 사실 끼고 다닌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제현은 연우가 웃기만 하면 그저 부끄러워 바닥만 차 댔으니. 연우는 그런 제현을 헤아리지 못해 항상 방글방글 웃었다.
“잘 쏘지요?”
“네! 부인. 활을 쏘는 자세가 훌륭합니다! 그렇지요, 스승님?”
“예, 완벽합니다.”
은월국에서는 손에 꼽히는 명궁이었다는 연우의 말에 수련장에 데리고 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어깨에 닿지 않는 짧은 머리를 깡총하게 묶고서 활을 쏘는 연우는 제현의 마음을 마구 쥐고 흔들었다. 초겨울 바람에 팔락이는 옷자락을 맹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제현은 연우에게 다가가 최고라고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연우는 제현의 엄지를 제 검지로 콕 찌르며 말했다.
“하니 소첩이 저하를 지키겠습니다. 전쟁이 있다면 소첩도 나갈 것이어요.”
저를 지키겠다는 말까지는 듣기 좋았으나 전장에 서겠다니? 제현은 미소를 지우고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를 지키는 것은 좋으나, 전장에는 저만 나가야지요.”
“소첩도 싸울 수 있습니다.”
“싸울 수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하면 어찌 안 된다 하십니까?”
설마 월앙인이라 무시하는 것인가? 연우는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쳐드는 열등감에 집요하게 물었다. 왜 아니 된다 하십니까? 소첩이 못 미더워서? 하나 그런 생각일랑 할 겨를도 없는 제현은 동그란 눈망울이 저를 향하자 고개를 푹 숙이고서 또 말을 절고 말았다.
“다치면, 안 된, 안 된단 말입니다, 부인……!”
조금도 다치면 안 되는데 왜 자꾸만. 제현은 그리 말하고서, 아무런 답이 없는 연우를 살살 밀며 다음 수업으로 향하였다. 단풍이 든 듯 벌게진 낯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내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멋진 모습으로 있기를 바라는 제현이었다.
등을 미는 손에 연우는 못 이긴 척 화살집을 챙기며 걸음을 옮겼다. 괜한 의심을 하여 미안하기도 하고, 또 사내의 마음을 곱씹어 볼수록 뭉글거려 연우 역시 낯이 붉어졌기에. 그것을 가만히 보던 황실 근위병을 통솔하는 장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참, 소꿉을 살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덩치는 커다란 태자나, 호리호리한 태자비나 하는 짓이 영락없는 똥강아지여서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 둘 합방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겠지?
***
“이번에 제현이와 혼인을 한 은월국의 월앙인 말일세, 연우.”
“예, 폐하.”
“참말 곱고 사내다워. 듣자 하니 그림도 잘 그리고, 시조도 그리 잘 짓는다고 하더군. 게다가 은월국에서 제왕학을 들었다고 하니 앞으로 나라도 잘 다스릴 거야. 어쩌면 태자보다 더 황제에 어울리는 아이일지도.”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폐하.”
“좋고말고! 그 아이와 제현이가 인사를 하러 올 때면 가슴이 뿌듯하다네.”
황제는 체면 불고하고 제 호위무사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연우는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쁘고. 자랑하는 모양새가 벌써부터 며느리에게 푹 빠진 시아버지여서 호위무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태영국의 황제들은 대대로 월앙인들과 혼인하였고, 혼인을 한 후에는 죽을 때까지 한 사람만 보고 살았다. 첩실을 들이지 말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이전의 황제들은 모두 한 사람만을 마음에 담았다. 그것은 제현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자랑 좀 그만 하세요, 이 사람도 지겹겠습니다, 폐하.”
“폐하라고 하지 말라고 해도…….”
“투정 부리지 마시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습니다, 황상.”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도 황후 앞에서는 매번 어린아이처럼 구는 황제는 이제 익숙했다. 무사는 허허, 웃으며 부부의 금실이 여전히 좋다고 생각했다.
황후는 서운하다며 투덜대는 황제의 손을 꽉 붙잡고서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정말 화낼 겁니다. 황제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댓 발 나온 입을 집어넣었다. 그제야 황후는 웃으며 호위무사에게 물었다.
“그래, 제현이와 연우에 대해 전할 말이 있다고 하였지?”
“예, 다름이 아니오라…… 두 분이 합궁하실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궁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습니다. 방사는 뒤로하고 서로 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황제와 황후는 호위무사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아무것도 안 해? 그게 말이 되는가? 한창 이것저것 궁금할 나이임이 분명한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둘이 여태 제대로 된 합방을 하지 않았다는 겐가?”
“그럴 리가! 분명 첫날밤을 치렀다 들었소, 부인.”
“하면 그런 괴이한 소문이 어찌…….”
“그것이……. 첫날밤 이후로는 한 번도…….”
호위무사의 깊은 한숨을 시작으로 황제 내외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저들은 그 나이 때 좋아서 밤새도록 하기도 했었는데 첫날밤 이후 한 번도 하질 않았다니. 황후는 찻잔을 매만지며 말하였다.
“제현이를 보니 싫은 눈치는 아니었는데…. 저번에 연우도 제현이에게서 눈을 못 떼는 걸 똑똑히 봤는데….”
“허어……. 나를 닮았으면 정해진 합궁일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태은궁에 가야 정상이거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막 혼인을 한 뒤 적어도 5년은 서로가 좋아서 안달이 났었는데 그 애들은 왜 그런담. 황제와 황후는 내일 문안 인사를 오면 둘에게 어찌 합방을 하지 않는 것인지 물어야겠다 생각하였다.
***
제현은 아침 일찍 태은궁으로 와 연우를 데리고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다. 이제 보폭을 맞춰 걸을 정도는 되었다. 잠이 덜 깼는지 연신 눈을 비비는 연우가 귀여워 제현은 몰래 웃었다. 연우는 태자가 제게 맞추어 걸음을 아주 느리게 걷는 줄도 모르고 평소보다 더 느리게 걸었다.
“피곤하시지요, 부, 부인.”
“아니옵니다….”
“오늘은 시조 수업이 있는 날인데 들을 수 있겠습니까?”
“네에, 걱정 마셔요, 저하.”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연우가 사랑스러워 제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알면 알수록 좋았다. 가늘디가는 몸도, 흠잡을 데 없는 얼굴도 좋았지만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존경할 수 있는 아내. 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은 부드러운 말씨와 미소였다. 연우는 언제나 제게 활짝 웃어주었다. 태자는 제게 건네지는 미소에 언젠간 제대로 화답하리라 다짐하였다.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러…….”
“둘이 합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더냐?”
“예, 예?”
분명 평화롭게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고 조찬을 먹은 뒤 같이 수업에 가려 했는데, 갑자기 웬 합궁? 제현과 연우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한데 황후와 황제는 계속 곤란한 질문만 해 댔다.
“제현이가 연우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이지? 응?”
“아, 아니옵니다, 마마……!”
황후가 하는 말에 연우가 손사래를 쳤다.
“내가 보기에 태자는 매일 가고 싶은 것을 참는 게 틀림없다니까요, 부인.”
“폐하, 그, 그런, 아바마마!!”
황제가 하는 말에는 제현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황제 내외는 둘이 서로 잘 다니는 걸 보며 뿌듯하였는데 합궁은 왜 안 하는 거냐며 진지하게 물었다. 하나 제현도, 연우도 그것에는 답을 하지 못하였다.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이고서 서로를 보지도 못하는 둘에게 황후는 혀를 끌끌 차며 말하였다.
“이제 한 달인 것은 알겠지?”
“…….”
“그때 갑자기 몸을 섞으려면 둘 다 괴로울 것이다. 해서 이리 말을 하는 게야.”
열병을 말씀하시는 거구나. 여전히 부끄러워 별다른 반응을 안 하는 제현 대신 연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사옵니다…….”
“서로가 싫은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래, 제현이 너는 말을 안 해도 알겠으니 진정하거라.”
합궁하라는 얘기에는 묵묵부답이더니, 제 부인 싫어하는 거냐는 말에는 길길이 날뛰는 아들을 보며 황후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 통에 머리칼이 물결치듯 등을 덮었고 그것을 본 황제는 허허 웃으며 말하였다.
“부인, 머리가 조금 자랐는데 제가 땋아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상.”
“허허, 아이들이 가면 말입니다, 가면.”
황후는 얼굴이 빨간 어린 부부와, 옆에서 제 머리칼을 만지며 다정히 웃는 남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심각한 건 어째 저뿐인 것 같았다.
태자와 태자비는 어색한 인사 뒤에 황후궁을 벗어났다. 하나 황태후 궁에서도 역시나 같은 소리를 들어 둘은 또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사이가 좋아 걱정을 안 했더니 우리 강아지들.”
“다 컸습니다, 할마마마.”
“한데 여태 합궁을 안 했다? 하면 우리 제현이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니냐, 한창일 나이인데……. 이를 어쩐다…….”
“하, 할마마마! 제발……!”
연우는 차마 태후를 말리지도 못하고 민망해 죽으려 하는 남편과 신나서 놀리는 시조부모 사이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란 것은 분명하였다. 첫날밤 제 몸에 턱,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그때 느낌이 어땠더라. 마냥 좋았다고 하기에는 괴로움이 조금 더 컸다. 연우는 아래가 빠듯하게 찼던 느낌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다시 하기는 조금 무서웠다.
“내 어서 증손주를 보고 싶기도 한데 우리 강아지들은 아직 어리니….”
“다 컸습니다, 하니 밤일마저 신경 쓰실 필요는…….”
“다 컸으면 밤일도 해야지!”
“할마마마, 정말!!”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태자의 얼굴과 언성이 동시에 폭발하였다. 황태후는 손주가 화를 내도 귀여운지 깔깔 웃었으나, 도리어 큰 소리에 연우가 놀라 어깨를 움칠 떨었다. 제현은 놀란 눈으로 저를 봤다가 어색하게 웃는 연우를 보며 자책하였다. 소리까지 내지를 필요는 없었는데. 안 그래도 부인보다 어린데 행동까지 어리게 하다니.
태자는 인상을 잔뜩 구겼다가 울상을 지었다. 도대체 연우에게 어떻게 마음을 표현하고, 또 어떻게 마음을 사야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탓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이라도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이건 뭐, 훼방이나 안 놓으면 다행일 정도로 도움이 안 되니. 하나 황태후는 황제 내외보다는 말이 통하는 분이었다.
“오늘부터 내 밑의 궁인을 우리 강아지들 합궁일마다 보낼 것이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늙은이가 크게 상심할 것 같으니 노력하거라, 알겠지?”
“…….”
제현은 좋아 죽겠는 걸 참느라 고개를 숙였다. 할마마마께서 궁녀를 붙인다면 그를 핑계로 아내와 조금이나마 닿을 수 있겠지? 사이가 좋아 보이려면 대화도 나누어야 하니까 이것저것 물어볼 수도 있겠고.
유독 연우와의 관계에 있어서 철이 없어지는 제현은 이모저모를 따져 보았을 때 실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한편 연우도 제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으나, 그는 순전히 부끄러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대답들을 하지 않고.”
“예, 태후마마.”
“예, 할마마마.”
“그래. 일이 바쁠 터이니 가 보련, 우리 강아지들.”
둘은 등을 토닥이며 기대한다고 말하는 황태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황태후 궁을 나섰다. 당장 이틀 뒤가 합궁 날짜였다. 제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연우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도저히 못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첫날밤처럼 아무렇게나 박고서 흔드는 일 같은 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데 그랬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연우가 몰랐다면 언제까지고 옆모습을 훔쳐볼 기세였던 제현이 연우와 눈이 마주쳐 하릴없이 얼굴을 붉혔다. 당장 합방이 문제가 아니라 눈을 오래 마주치는 것 자체가 불가했다.
“저하, 이따 수묵담채화 수업에서 뵈어요.”
“네, 네, 부인. 이따…….”
“그리고……. 합궁은 차차, 네…….”
“아, 어, 예! 네, 부, 부인!”
태자의 소매를 살짝 쥔 연우는 합궁은 차차 하자며 웃었다. 그리고 제현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부인이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연우 앞에서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연우는 화드득 달아오른 얼굴의 제현에게 목인사를 하고서 태은궁으로 향하였다. 이번 합궁은 조금 다를 것 같으니 예쁜 꽃이라도 화병에 좀 꽂아 놓아야겠다 생각하며.
***
태자는 제 뒤를 따르는 궁녀 둘에게 물었다.
“태후마마께서 뭐라 하시더냐?”
“태자 저하와 태자비마마께옵서 어떤 일을 하나 보라 하셨사옵나이다, 저하.”
“입이라도 맞추라는 것인가?”
“저희는 그저 합궁 시 저하와 마마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보고, 전해드릴 뿐이옵니다.”
궁인을 붙인다고 하신 것이 그냥 한 말은 아니었는지 어린 궁녀 둘이 태자의 뒤를 졸졸 쫓았다. 본디 제현을 모시던 궁인들은 수군대었다. 드디어 오늘 무언가를 하는 것인가! 태자와 태자비의 관계에 진전이 생기는 것인가! 보통은 모시는 이가 감시를 당하면 싫어해야 정상이겠으나, 태자를 보필하는 이들은 태후의 궁녀 둘을 매우 반기었다. 바보 같은 태자가 어서 제 아내에게 애정 표현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황태자가 머무는 궁의 궁녀들이나, 태은궁에 머무는 궁녀들이나 관심사는 오로지 둘의 애정 전선에 있었다. 사내지만 아리따운 연우와,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나 슬슬 태영국 사내 특유의 날카로움이 얼굴에 묻어나는 제현은 보기만 해도 흡족해지는 부부였다. 궁녀들은 모이기만 하면 둘의 사이를 논하느라 바빴다. 하는 불평은 주로 한 가지였다. 둘이 입도 맞추질 않으니 심심해 죽겠다는 것. 첫날밤은 그래도 방아를 찧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찌 혼인한 지 세 달이 지나도록 그 소리가 다시 안 들리는가? 궁녀들은 썩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으나 이렇다 할 발전이 없는 어린 부부의 합궁이 궁금하였다. 해서 태후가 보낸 궁녀들은 의도치 않게 기대를 받고 있었다.
“허 참, 할마마마께서 어찌…….”
“송구하옵나이다, 저하. 없는 이들이라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너네 뭐 보면 꼭 말해주어야 한다, 알겠지?
황태후 궁의 궁녀들은 궁을 돌아다닐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을 되새겼다. 그래, 뭐든 보면 다 알려줘야지. 심심한 궁 생활에 태자와 태자비의 합궁일은 유일한 재미였다.
“태자 저하 드십니다-!”
“아, 오셨구나.”
연우는 오늘따라 어여삐 꾸민 머리를 매만지며 태자를 맞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에도 봤는데 조금 떨렸다. 매일같이 보는 얼굴인데도 합궁일에는 떨리는 것이 신기하였다. 그를 보며 딱히 좋다는 감정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매번 얼굴만 멀뚱히 보다 멀찍이 떨어져 자는 것이 다인데도 왜.
“오셨습니까, 저하.”
“…어, 어여쁘십니다……. 부, 인.”
“오, 오늘 조금, 궁녀들이 어여삐 꾸며주었습니다. 합궁일이라고 하며…….”
선녀도 부인 앞에서는 당당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였다. 제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분홍빛으로 꾸민 연우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만 반복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제현은 연우와 실로 많은 것을 하고 싶었다. 손도 잡고 싶었고, 입도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로의 몸을 만지며 어여쁘다 말하고도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 보는 궁녀들이…….”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싶다 생각하는데 연우가 제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궁녀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태후마마께서 보내신 아이들입니다.”
“아아…. 하면 오늘 무엇을 해도, 해야겠군요……?”
“예? 어, 그, 그런…….”
“태후마마께 잘 말씀드려다오. 저하와 내 사이가 이리 좋으니.”
연우는 그리 말하고서 어버버거리는 태자의 곁으로 가 손을 살짝 쥐었다. 꽉 잡지 않아 얼기설기 풀어질 것처럼 엮인 손가락을 큰 눈으로 보던 제현이 자유로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잡은 건 손인데 어째서 온몸이 펄떡펄떡 뛰는지.
손을 먼저 잡기는 잡았으나 연우도 쑥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라 제현을 바로 보지 않고서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현은 삐걱삐걱 연우를 따랐고, 그걸 보던 태후의 궁녀들은 생각하였다.
‘궁녀들이 왜 그리 잘 보고 오라 하였는지 알겠군.’
태자는 먼저 침상에 앉고서 연우가 제 손을 잡은 채 옷자락을 정리하며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움직일 때마다 머리 장식들이 부산스레 떨렸다. 제현의 마음도 똑같았다. 연우가 조금 움직일 때마다 마음이 날고뛰기를 반복하였다.
잠시 어색하게 맞잡은 손을 보던 연우가 태후의 궁녀들에게 물었다.
“저하와 나는 정말 사이가 좋은데….”
“…….”
“태후마마께 잘 전해주면 안 될까…?”
“…….”
“정말이란다, 내가 저하를 싫어할 리가 없지 않니.”
연우는 제현과 잡은 손을 살짝 들고서 흔들어 보였다. 이리 손도 잘 잡는데 어찌 그러신다니. 너희가 잘 좀 말해 다오. 궁녀들은 선이 고운 미남이 웃으며 말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궁녀들 사이에서 태자보다는 태자비가 더 인기가 좋았다.
혼인을 하기 전까지 제현은 ‘학업에만 정진하는 성격 나쁜 황손’ 정도로만 궁녀들에게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자비는 그와는 달랐다. 힘들지는 않니, 살갑게 물어보며 궁녀들을 볼 때마다 은월국의 동생이 생각난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챙겨주는 미남이 싫을 리 없었다.
“부인, 그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예?”
그것을 가만히 보던 제현은 저것들이 연우가 좋아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눈치를 채고 표정을 굳혔다. 연우 앞에서 언제나 허허실실 웃기만 하는 제현이었으나 소유욕은 갈수록 커져 갔다. 아무도 연우를 보지 않았으면 했고, 연우가 빨리 황손을 품어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발을 묶어 두고도 싶었다. 다만 연우가 무서워할까 저어되어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부끄러워 그리할 깜냥이 아직 되지 못하기도 하였고.
갑자기 표정을 굳힌 저를 어리둥절하게 보는 태자비에게 다가갔다. 궁녀들은 모두 입을 틀어막았다. 태자가 그의 아내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첫날밤 이후 처음 보았기 때문에.
“태자, 저하…….”
“……이제 물러들 가거라. 태후 마마께 나중에 찾아뵙겠다 말씀드리고.”
“예, 저하. 소인들은 이만 가 보겠사옵나이다.”
살짝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연우는 태자를 보며 눈으로 물었다. 갑자기, 갑자기 왜…….
“…둘이 보내는, 시간인데…….”
궁녀들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둘이서 보내는 밤은 달에 딱 두 번뿐인데.
한숨을 내쉬듯이 말한 태자 때문에 연우는 얼굴을 붉혔다. 태자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벌게진 얼굴에 눈은 어디를 봐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었다. 연우는 어쩐지 속이 답답하여 가슴을 톡톡 쳤다. 무언가 크게 얹힌 기분이었다.
“어디가 불편하신… 겁니까, 부인……?”
“아, 아니, 소첩은…….”
“…하, 한 번 더…….”
한 번 더 입을 맞춰도 될까요, 부인.
동의를 얻기도 전에 부딪쳐 오는 입술에 연우는 깜박이던 눈꺼풀을 이내 닫아 버렸다. 잘게 떨리는 태자의 입술을, 눈동자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
그날 이후 태자는 밤마다 연우를 찾아갔다. 정해진 합궁일이 아닐 때 찾아가면 연우는 언제나 조금 풀어진 모습을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현은 그게 좋았다. 진짜 부부 같았다. 아바마마나, 어마마마께서 서로 편하게 지내듯이 연우와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저하, 갑자기 오셔서 따로 준비를…….”
“아니, 괘, 괜찮습니다, 부인.”
“청소도 못 하였는데…….”
하나 방문을 받는 처지에서는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며칠 전 합궁일에 예기치 않게 입맞춤을 당한 이후로는 제현을 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눈이 마주칠 때면 열이 올랐고, 열이 오른 후에는 숨이 찼다. 건강이 안 좋은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몸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도 제현만 보면 그랬다.
연우의 마음을 모르는 제현은 궁녀들이 제 청룡포를 벗기는 와중에도 눈으로 연우를 좇았다. 합궁일이 아닌 날 태자가 종종 오기는 하였어도 아무런 연통 없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우는 평소 입는 침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얇은 비취색 침의를 입은 연우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합궁일에 한껏 꾸민 모습만 보다가 풀어진 연우의 모습을 볼 때면 제현의 뱃속이 그 안에 뱀 한 마리가 앉은 것처럼 이리 말리고, 저리 말렸다.
분칠도 하지 않은 민얼굴의 연우는 제현뿐만 아니라 궁녀들의 눈길도 끌었다. 밤이 늦어 그런지 나른하게 처진 어깨나 천천히 깜박이는 눈꺼풀 같은 것들이 마음을 동하게 했다. 제현은 연우를 모시는 아랫것들이 그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이 싫었다. 사내를 아내로 두니 이런 건 별로였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그를 마음에 둘까 걱정을 해야 하니.
“다들 물러가거라.”
“예, 저하.”
말 한마디에 싫은 내색 없이 처소를 나가는 궁녀들을 흘겨보는 제현을 연우가 물끄러미 보았다. 약간 화가 나신 것도 같은데 왜 그러실까.
제현은 저를 살피는 연우의 눈을 딱 한 번 마주 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우는 너무 아름다웠고, 상냥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옷소매를 쥐어 오거나, 손등을 콕 찌르는데 그것 역시 좋았다. 간질거렸다. 그때마다 손을 붙잡고 그대로 품 안에 끌어안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지금도 그랬다. 굳이 옆에 있는 제 손가락을 하나 쥐고서 얼굴을 보게 만들 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저하, 이제 보름날 뒤지요?”
“무엇……. 아, 아…….”
“하여, 근래 소첩을 계속 찾으시는 것… 아닙니까?”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그저…….”
굳이 보름 뒤 연우와 보낼 밤이 기대되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도저히 참기가 힘들어 그런 것이었다. 낮에 보는 얼굴과 밤에 보는 얼굴이 달랐다. 낮에 보는 생기 넘치는 얼굴도 좋았지만, 밤에 보는 청초한 얼굴도 좋았다. 하나 가끔 처소 밖의 정원을 볼 때 무심한 얼굴을 할 때마다 연우를 제 곁에 어떻게든 붙잡고 싶다 생각이 들었고, 그 얼굴은 연우가 없을 때도 종종 떠올라 그를 괴롭게 했다. 해서 최근 밤마다 태은궁을 찾는 것이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아내를 봐야 잠이 와서.
“어디 가, 가실까… 봐서…….”
“…소첩이 말입니까……? 어디를…….”
“어디든……. 어디든 부, 부인이 갈까 봐서…….”
바보 같지요. 혼인도 했는데. 제현은 말을 하자마자 부끄러워져 벅벅 마른세수를 하였다. 분명 영특하단 소리를 꽤 많이 듣고 자랐는데 연우의 앞에서는 말 한마디 고르는 것이 힘들었다. 항상 말을 조심하자 생각하면서도 나오는 말들은 하찮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지금처럼. 아내에게 도망을 갈까 두렵다는 말을 하는 남편이라니. 제가 연우여도 저를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제현은 차마 연우를 보지 못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연우는 제현이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고 발가락을 오므렸다. 간질거렸다. 아무래도 태자는 저를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데 도망이라니. 저는 월앙인이었다. 사내가 월앙인일 경우 은월국에서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존재였다. 딱히 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반기지도 않는. 모를 리 없었다. 성안에서 태영국에 태자비로 팔려 간다는 말이 도는 것은 괴로웠다. 다만 모른 척할 뿐이었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서.
“입술을 그리 깨물면 아프지 않으십니까, 저하.”
“…….”
바투 앉아 맞닿은 어깨를 툭 치며 연우가 말을 거는데도 제현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였다. 연우는 태자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소첩은 저하께 시집을 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답니다.”
“…….”
“사실 소첩은 사내이고……. 아무도 취하고 싶지 않을, 터인데…. 태자께서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말을 하다 보니 목이 메어 와 울지 않으려 이불보를 꽉 쥐었다. 한데 태자는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닙니까, 월앙인은. 태영국의 사내들은 정해진 월앙인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을, 모르지 않으시겠지요.”
“하나 소첩은 사내인 것을요…….”
“저도 처음에 부인이 사내인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으나, 그, 그러나…….”
지금은 이리 매일 밤 오지 않습니까.
달달 떨며 말한 태자를 연우가 눈을 키우고서 바라보았다. 덩달아 눈이 커다래진 태자는 손사래를 치며 보태어 말하였다.
“그, 다, 다른 생각이 있어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그저……!”
목덜미며 얼굴이며 온통 시뻘게져 말을 더듬는 제현에 연우의 얼굴도 붉어졌다. 나를 싫어하지는 않으시는구나. 불콰해진 얼굴을 벅벅 문대며 저를 쳐다도 못 보는 제현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조금 친근감을 느낀 연우는 이제 이불보를 쥐지 않고 태자의 손등을 톡톡 치며 물었다.
“하면 어찌 매일 오십니까…? 아무것도 안 하실 거면…….”
“그, 그냥, 그냥…….”
“…소첩은 저하와 사이좋게, 잘…. 좋은 부부로 지내고 싶은데…….”
“저도!! 저도 같은 생각, 입니다, 부인.”
조금 전에는 그냥 오는 거라 하지 않았나? 잘 지내고 싶다 하니 냅다 같은 마음이라 소리치는 제현에 놀란 연우가 포르르 몸을 떨었다. 태자는 그 모습에 제가 더 놀라 연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등을 토닥이며 슬그머니 연우에게 다가간 태자는 무엇을 더 어쩌지 못하고 연우의 등에 손을 올려놓기만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확 끌어안고 싶었으나 연우가 싫어할 것 같았다. 저번에 입을 맞춘 후에도 표정이 굳어 있던 것이 떠올라 제현은 연우의 등에서 팔을 내렸다. 하나 연우가 품에 안겨 왔다. 등에 올린 팔을 다 내리기 전이었다.
“오늘도, 아, 아무것도…. 안 하고 가실 것입니까, 저하……?”
“부, 부인……!”
연우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아무것도 안 하고 보름 뒤에 색사를 치르기는 두려웠다. 연우는 태자의 허리춤을 조금만 안고서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오래 볼 새도 없이 태자가 품 안 가득 제 아내를 안아 왔다.
“부인, 부인….”
“저하…….”
부인은 너무 어여쁘단 말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이리 아름다운 이는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저는.
제현은 두서없이 말하며 저보다 작은 몸을 보듬었다. 얇은 침의 위로 지나가는 손길이 수줍어 연우의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첫날밤 술 냄새를 풍기며 아무렇게나 색사를 해치운 이와 같은 이인가, 할 정도로 태자는 많이 떨고 있었다. 맞닿은 가슴이 심장을 뱉을 정도로 쿵쾅대서 연우는 태자의 등을 마주 안고 토닥여 주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태영국에서 소첩에게 기댈 곳은 태자 저하뿐이지 않습니까.”
태자는 그 말을 듣고서 연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우는소리를 하였다.
“궁녀들이 다, 다 부인만 보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게 싫단… 말입니다…….”
“예? 소, 소첩은…….”
“싫습니다…….”
쇄골께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싫다고 하는 태자를 연우는 그 밤 내내 안고 얼러주었다. 슬퍼 말라고, 나는 진짜 그대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이니.
***
보름이 가까워질수록 태자와 태자비의 마음도 둥글게 차올랐다. 제현은 이제 먼저 연우의 팔을 끌어와 안을 정도의 배짱이 되었고, 연우는 제현보다 더하였다.
“부, 부인, 잠깐만, 아니, 어…!”
품에 안긴 채 태자의 볼에 입을 맞추는 정도는 이제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붉어지는 얼굴도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찌 되었든 연우는 태자가 한 걸음을 가면 두 걸음 앞서갈 정도였다. 태자는 불시에 입술 도장을 찍고 도망간 연우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자꾸 왜, 왜 그러십니까, 부인…….”
“그래도 입술에는 닿지 않았습니다, 저하.”
“이, 이, 입술에는! 아직……!”
푸흐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연우가 태자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첫날밤에는 못되게 구셨으면서…….”
연우는 네 마음대로 처넣고서 흔들고 뺀 게 다이지 않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저보다 신장이나 덩치가 큰 것은 맞으나 제현은 겪을수록 어린 티가 났다. 날카롭게 생겼으나 순한 눈빛도 그렇고, 입을 열 때마다 더듬거리며 나오는 말은 그를 더 어려 보이게 했다. 하나 저를 안아줄 때는 듬직하여 연우는 밤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저하, 내일은 신방처럼 태은궁을 꾸민다 합니다. 중요한 날이라고 하며.”
“아아….”
“그리고 궁인 둘 정도도 들어온다고…….”
“그것은 제가 물렀으니 거, 걱정 마십시오, 부인.”
“예? 어찌…….”
태자는 품에 안은 연우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둘만,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오지 말라 하였는데…….”
싫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대 아픈 일은 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둘이서만 있고 싶은데.
제현은 하지 못한 말을 넘기고서 연우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따스한 숨에 흠칫 놀라 떨면서도 태자비는 제 등과 뒷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다고, 저도 그러는 게 좋다 생각하였다고 말하며. 제현은 저를 다독이는 태자비를 더 꽉 끌어안았다. 포옹이 버거워 거의 침상에 눕듯이 한 연우를 보니 마음이 동하여 몸에 열이 올랐다.
그러나 연우는 태자가 저와 안고 있어 몸이 뜨거워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태자보다 나이가 많다고는 하나 연우 또한 경험은 전무하였기에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여 연우는 저를 안은 몸이 따끈해져 오는 것에 걱정이 되어 제현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어디 아프십니까, 저하…?”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열이 나시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연우를 보다가 제현은 희미하게 어떤 향을 맡았다. 몸은 노곤해지는데 중심부는 간질거려 오는 향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향이 나는 것인가 짐작하던 제현은 연우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저하, 아, 읏!”
“죄, 죄송합니다, 부인…!”
지레짐작한 것이 맞아 들었다. 제현은 본능적으로 혀를 내어 연우를 핥고, 하얀 목덜미를 얕게 빨아들였다. 놀란 연우가 버둥거리자 그도 같이 놀라 안은 팔을 놓았고, 제현은 태자의 신분도 잊고서 깊이 머리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왜 그런 짓을 하였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부인.
연우는 고개를 숙인 제현에게 살그머니 다가가 두 손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두려움을 담고 있는 눈이 물기를 머금고 빛났다. 연우는 괜찮다 말하려다 그만 가볍게 입을 마주 대고 말았다. 태자의 눈이 둥그렇게 커지는 것을 보았으나 입술은 몇 초간 더 태자의 위에 머물렀다 떨어졌다.
“소첩도, 도통 왜 이러는지…….”
“…….”
“모르겠사옵니다…. 저하.”
“……부인.”
제현은 모르겠다 말하며 볼을 붉히는 연우를 그대로 눕히고서 입술을 부딪쳤다. 입맞춤은 달았으나 서툴렀다. 실제로 연우는 자의가 아니라 급작스런 부딪힘으로 인한 고통에 입을 벌렸으니. 하나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악스레 제 입을 가르고 들어온 태자의 혀가 입천장과 치열을 훑을 때, 태자가 어떻게든 저를 더 바투 안으려 다리 사이를 파고들 때, 연우는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나 태자비의 몸에 열이 오른다 한들 제현보다는 못하였다. 제현은 입술과 혀를 섞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입맞춤이 버거워 색색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뜨는 태자비를 보니 아래가 완전히 기립하여 속곳을 적셨다. 부끄러웠다. 이래서야 합궁을 어찌한단 말인가. 태자비가 한 번 정을 토할 때 저는 서너 번을 토정할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눈앞에 흐트러진 연우를 보면 잊혀지는 가벼운 것이었다.
“저하, 으응…….”
“부인, 부인…. 가까이 오십시오, 응? 여기, 여, 여기로…….”
제현은 맘이 급한 제게 맞추느라 조금 지친 연우를 번쩍 들어 제 허벅다리 위에 앉혔다. 그러고선 느슨해진 앞섶을 슬쩍 파고들어 연우의 가슴에 입을 맞췄다. 아아, 깊이 들어갈수록 향긋한 것은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제현은 묘한 향을 맡으며 다시 한번 정을 토해냈다. 부드럽지 않은 곳이 없었고, 향은 코를 떠날 새가 없었다. 제현은 서툴게나마 연우에게 제 마음을 표현하려 그의 손을 제 가슴팍에 올려 두었다.
“부인, 제, 제가 미쳤나 봅니다, 정말 미쳤나 봅니다, 부인…….”
“저하….”
심장이 이리 뜁니다. 부인을 보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이리 몸부터 먼저 겹치니 죄송합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부인의 마음이 멀어지면 안 되는데.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는 태자를 보며 연우의 머리도 멍해졌다. 손바닥에 닿는 떨림이 진정 저를 볼 때마다 그런 것이라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래서는 일상생활도 힘들 것 같은데. 연우는 조심스레 태자의 볼을 쓰다듬었다. 태자는 죄를 고하듯이 연우를 올려다보았으나 연우는 작게 웃으며 말하였다.
“어찌 마음이…. 멀어지겠습니까, 저하.”
“…….”
“소첩은 저하뿐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수줍어 말끝을 흐리는 연우에 다시 입을 맞추며 제현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쩌면 좋을까, 사람을 이리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는데.
입술과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한 침상에 중간중간 태자의 앓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어여쁩니다, 곱습니다, 걸음을 따라 걷노라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정녕 하고 싶은 한마디는 하지 못하였으나 연우는 그런 말들도 좋아서 방긋 웃었다. 밤과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저하, 하면서.
***
밤새 서로를 끌어안고 보듬은 다음 날, 태자와 태자비는 일어나자마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제현의 발현일 때문이었다.
“자, 이것을 보십시오.”
“아니, 그렇게 노, 높이 들어 올리지 말게!”
“두 분께서 오늘 밤을 잘 보내시려면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내명부의 보모상궁 최 씨가 나무로 만든 모조 남근을 들고 흔들자 태자와 태자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특히 태자의 얼굴이 볼 만하였다.
“그, 그런 것을 왜 갖고 온 것인가?!”
“교육을 위함입니다, 저하.”
“부인이 놀라지 않았는가!”
“전혀요? 태자비마마께서는 멀쩡해 보이십니다.”
“…….”
투박한 모양의 나무 조각을 보고 태자와 태자비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보모상궁의 말을 듣고는 이내 입을 합, 다물고서 얼굴만 붉혔더랬다. 태자는 묵묵히 흉기에 가까운 것을 보는 태자비 대신 상궁에게 계속 항의하였다.
“알아서 할 것일세! 그러니 그것을 그만…….”
“알아서 하실 예정이온데 황후마마와 태후마마께서 소인에게 이런 교육을 굳이 맡기셨지요?”
또 어머니와 할머니란 말인가. 태자는 연우를 볼 면목이 없었으나 굴하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지난밤에도 태자비와 함께 있었으니 걱정할 것 없네.”
“해서, 통하셨습니까?”
“…….”
통하지는 않았고 그냥 혼자 속곳만 적셨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태자는 곰곰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그래도 첫날밤은! 잘 보내지 않았는가?!”
“저하, 그만…….”
“딱 한 번 아닙니까? 두 번도 아니고 딱 한 번.”
“자네, 그리 안 봤는데……!”
어찌 부인 앞에서 내게 이리 창피를 준단 말인가……!
울상을 지은 제현을 안쓰럽게 보던 연우가 보모상궁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 하였고, 그녀는 잠시 후 다시 수업을 시작하겠다 하며 자리를 떴다. 연우는 보모상궁이 나가자마자 태자의 손을 잡고서 입을 맞추었다. 제현은 그런 연우의 품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부, 부인…….”
“속상하셨지요, 괜찮습니다, 저하.”
“부인, 저 자, 잘할 수 있단 말입니다, 정말…….”
“그, 그렇지요, 예….”
보모상궁이 말하는 것처럼 모지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인.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며 연우의 목덜미에 코를 박는 태자였다. 좋은 향이 어제보다 더 짙어졌다 말하였으나 연우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딱히 한 것이 없으니.
태영국의 황손은 열병이 오기 전까지는 월앙인 특유의 향을 느끼지 못하였다. 월앙인에게는 그만의 향이 있었고, 그는 짝지어진 정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해서 연우의 향은 태영국 내에 제현 말고는 아는 이가 없었다. 맡고 싶다 하여 맡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고. 태자와 태자비는 그에 관한 내용을 알기는 하였으나 생활에서 겪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 모든 것이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대놓고 킁킁거리며 연우를 바투 안는 태자에 궁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둘을 향하였다. 둘이서 있을 때는 상관이 없었으나 아직 누구에게 보여주기는 영 부끄러웠던 연우는 조심스레 태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한데 그거 조금 밀자마자 퍽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얼른 변명을 해야 했다.
“둘이 있을 때, 저하.”
“…알겠습니다, 부인.”
“오늘 밤에 계속…. 같이 있을 것이니…….”
조금만 참으라고 하며 눈웃음을 짓는 연우를 멍하니 보던 제현은 그를 와락 끌어안고서 다시 한번 말하였다.
“저, 정말 잘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부인….”
연우는 대체 무엇을 자꾸 잘하겠다는 거냐고 태자에게 물으려다 그냥 볼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제현은 그게 좋아 속없이 웃었고, 보모상궁은 저 정도면 오늘 밤 문제가 없겠다 생각하였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보모상궁의 생각조차 않고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밤이 찾아왔다.
두텁게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어 바르는 것은 연우가 그리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만큼 그는 연하게나마 화장을 하였다. 어린 궁녀들이 저를 인형 다루듯 꾸미며 해사하게 웃는 것이 귀엽기도 하였고. 연우는 서로 입술을 발라 주겠다 설치는 궁녀 둘에게 한 명은 볼에 분을, 한 명은 입술에 연지를 바르라 하며 웃었다. 황실의 궁녀들은 모두 연우를 오라비 따르듯 잘 따랐다. 연우 또한 그를 모르지 않았고, 태자도 잘 알았다.
“마마, 휘장이 어여쁘지요? 이거 단이랑 제가 고른 거여요!”
“응, 참말 어여쁘구나. 우리 단이랑 연이만큼은 아니지만.”
침상 주위로 길게 늘어진 휘장을 자랑하던 궁녀는 수줍게 웃으며 연우의 짧은 머리를 재주 좋게 땋았다. 결이 좋은 머리가 손가락을 스치고 갈 때면 부러 한 번씩 태자비의 얼굴이 비치는 면경을 들여다보았는데, 그때마다 연우는 혀를 쏙 빼물며 장난을 쳤다. 궁녀들은 다정한 연우가 좋았다. 가끔 은월국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좋았고, 태자와 배운 것을 가르쳐 주는 것 역시 가슴 벅찰 정도로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한데 저하께서 조금 늦으시는구나. 일찍 걸음 한다 하셨는데.”
“음…. 하면 소녀가 태자 저하께 다녀올까요, 마마?”
“마마, 태자비마마!”
“응?”
좀처럼 오지 않는 태자를 의아하게 생각하던 연우가 있던 태은궁으로 태자를 모시는 궁인 하나가 들이닥쳤다. 한눈에 보기에도 다급해 보이는 궁인에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궁녀들도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하나 태자궁에서 온 자는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듯 조급히 말하였다.
“지금, 지금 당장 태자궁으로, 마마, 어서!”
“저하께서 오시지 않고……?”
“저하께서는 이미……!”
이미 열 때문에 몸을 못 가누고 계십니다, 마마. 송구하오나 금일은 마마께서 가주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정말 송구하옵나이다, 마마.
열이라니, 당장 오늘 낮에 오찬을 들 때만 하여도 멀쩡하셨던 분이? 연우는 그럴 리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더 말을 잇지 않고서 태자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는 옷자락과 반짝이는 머리 장식이 엉망으로 흐트러졌으나 연우에게 더 이상 그것들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태자궁 앞에서 연우는 뒤늦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미 이리저리 부산스레 벌어진 옷을 애써 다시 묶어 보아도 궁녀들이 만져준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연우는 입을 삐죽이며 대충 나비 모양으로 끈을 잡아 묶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됐겠거니, 싶었을 때였다.
“……부인.”
“저, 저하!”
“부인, 제가 가지 못하여서….”
주위의 놀라는 소리가 순간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저를 부르는 태자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연우는 두 눈을 깜박이며 땀에 젖은 태자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하였다. 저를 앞에 두면 언제나 서툴게 굴던 태자는 이전에 본 적 없던 눈을 하고서 그를 끌어안았다. 몇 번의 포옹을 하였으나 지금처럼 숨이 안 쉬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저하, 연우는 제현을 짧게 부르고서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읏, 저, 저하-!”
“모두 물러가거라!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이 떨어질 때까지 이곳에 발을 들이는 자가 없게 하라!”
근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던 태자의 어수룩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제현은 언제나처럼 연우의 목덜미를 찾았으나 이번에는 고민하지 않고 살을 빨아들였다. 입 안에 넣고 쪽쪽 빠니 단 향과 맛이 올라왔다.
연우는 저를 더욱 바투 안고 문을 닫아 버린 태자의 허리를 붙잡고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나 모두 허사였다.
“으응, 저하…….”
“여기 있습니다, 부인.”
“향이…….”
평소와 달리 거친 숨을 내쉬던 연우가 먼저 태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대었다. 어찌 이리 좋은 향이 나는 것이냐 물으려던 연우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 자조하며 태자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황실의 모두가 바라 마지않던, 태자의 진정한 발현이었다.
***
패기 넘치게 부둥켜안고서 몸을 비비던 어린 부부는, 정작 서로의 맨살이 맞닿자 몸을 움칠 떨며 크게 놀랐다.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첫날밤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보다는 잘해야지’ 둘 다 그리 생각하던 참이었다.
“부인, 부인……!”
열이 올라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주제에 제현은 몇 번이나 연우를 끌어안았다 놓기만 반복하였다. 직접 겪기 전에야 발현열이라는 것이 아무리 독하다 하더라도 저는 이겨낼 자신이 있다 생각했는데, 막상 열기가 몸을 덮치니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만도 벅찼다. 어떻게 연우가 입은 옷가지를 대충 벗겨내어 얇은 속곳만 남기기는 하였는데 이다음은 어쩐다. 제현은 자꾸 맘처럼 안 따라주는 몸에 연우를 끌어안고서 헐떡였다.
“저하, 다리를 벌리시면 소첩이….”
“예…….”
“푸, 풀어야 할 것 아니옵니까…….”
열이 너무 많이 나 걱정이 됩니다,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연우는 숨을 집어먹기만 하며 좀처럼 뱉지는 못하는 태자의 품에서 훌쩍이며 말했다.
“소첩은… 태자 저하뿐이온데, 흐으…….”
“부인…….”
“하니 어서, 끕…. 소첩이 싫으시면 다른, 궁녀라도…….”
“무슨 소리입니까, 부인….”
제현은 엄지로 찬찬히 연우의 얼굴을 닦아주다가 그의 손을 끌어 제 아래로 갖고 갔다. 제현으로서는 최대한의 용기를 낸 것이었다. 태자비의 손에 이런 걸 쥐게 해도 될까 싶었지만 열을 풀지 못하면 당장 죽을 것 같았다. 저도 태자비의 아래며 위며 샅샅이 살피고 만지면 소원이 없겠으나 그것은 열이 오른 와중에도 부끄러워 할 수가 없었다.
보들한 손이 귀두를 감싸자 제현은 허리를 크게 움찔거리며 인상을 썼다. 양인 특유의 무겁고 깊은 체향이 궁 안을 가득 메워옴에 연우는 설풋 두려움까지 느꼈으나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어서 얼른 두 손으로 제현의 것을 감싸고서 흔들기 시작하였다.
양손으로 부드럽게 태자의 양물을 만져주던 연우는 힘을 받아 더 커진 것에 숨과 겁을 함께 집어 먹었다. 이걸 어떻게 품으면 되나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지만 허벅지를 잘게 떨어 가며 깊게 신음하는 태자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매만져 주지 않았으나 태자의 양물에선 진득한 정액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머리로 내려앉았으나 연우는 그의 얼굴을 봤다간 손짓을 멈추게 될 것 같아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흐으, 아…!”
“저하 잠시, 어…!”
불시에 힘을 줘 쥐어짜듯 손안에 양물을 움키자 쿰쿰한 정액이 축축이 제 목덜미며 손을 잔뜩 적시고 말았다. 평소 같았으면 미안하다며 더듬더듬 말했을 태자였으나, 지금은 그럴 틈이 없어 보였다.
제 손안에 정을 토해내고서 품에 쓰러지는 태자를 겨우 받아낸 연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침상으로 향하였다. 연우도 사내였기에 태자를 옮기는 정도야 너끈히 할 수 있었다. 하나 토정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힘을 받고 꺼떡이는 것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현은 자꾸만 벌떡거리며 일어서는 제 것이 부끄러워 연신 머리를 털며 정신을 차리려 하였으나, 눈을 뜨면 은애하는 태자비가 보여 질금질금 액을 싸 버렸다. 적잖이 외설스럽고, 동시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이게 왜 이런담? 제현은 절절 끓는 열에 못 이겨 자꾸만 태자비의 품으로 쏟아지듯 안겼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월앙인의 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라 그의 물건은 좀체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이제는 연우의 목덜미에 코를 박기만 해도 물큰한 액을 터트리는 태자의 물건에 연우는 헛기침을 하며 그의 얼굴을 살살 들어 올렸다.
“저하, 소첩과 밤일에 대하여 배우지 않았습니까? 합방 말이어요, 합방.”
“응, 네, 부인….”
“소첩도 어린아이가 아니고, 저하께옵서도 어엿한 사내가 되셨으니…….”
“……제가 위로 가는 편이 나으시겠지요, 부인?”
연우와 제현의 눈이 잠시간 마주쳤다가 이내 감겼다. 맞닿은 것은 눈빛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겁지겁 서로의 입술을 삼키며 속곳마저 벗겨냈다. 맨살이 닿자 향은 더 뿜어져 나오지 못할 만큼 극심해졌고, 둘은 낮에 보모상궁에게 배운 것은 떠올리지 못하고 내키는 대로 서로의 몸을 만지며 흐느꼈다.
“응, 흐아, 저하아-!”
“여기, 맛있는 냄새가, 잠시만….”
“아! 저하, 시, 싫어, 아아응!!”
연우의 살을 아무리 물고 쥐어도 성에 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입에 담그고 있으면 맛이 느껴질 것도 같은데. 제현은 애가 타 연우의 입꼬리며 턱에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며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왔다. 전부 벗어 따끈한 몸만 남은 태자비의 비문에서 좋은 향이 났다. 제현은 저도 모르게 그의 아래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 번이라고, 딱 한 번이라고 말을 하자 태자비는 팔짝 뛸 듯이 놀라며 울었다. 적이 수치스러울 그의 마음을 태자라고 어찌 모를까. 하나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쯥-, 꿀이라도 바른 듯합니다, 부인…!”
“흐, 으…….”
“넣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된다 하시면….”
그러면 안 되는데…….
방금까지 제 부인의 아랫도리에 코를 박고 있던 터라 애액을 얼굴에 잔뜩 묻히고서 제현은 울먹였다. 핏줄이 툭툭 불거진 기둥을 잡고서 제발 넣게 해 달라는 말은 상황에 맞지 않게 조금 애교스러웠고, 그 모습에 연우는 속으로 태자는 역시 아직 어리다 생각하였다. 하나 그것도 들어오기 전의 이야기였다.
“아…! 아아! 저하, 읏!”
“하아……. 부인, 안이….”
저랑 꼭 맞습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제 안에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슬슬 움직이는 태자는 어리다 할 수 없었다. 벌거벗은 채 제 양물을 꾹꾹 욱여넣는 제현을 차마 볼 수 없어, 연우는 제 양옆에 버티고 선 팔을 안고서 울먹였다.
“아직 다 안 들어갔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 응! 저하, 아윽!”
도저히 한 번으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관계를 이어갈수록 참이 되어 갔다. 연우와 제현은 합방을 이미 한 번 경험하였으니 발현열이든 뭐든 사실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속으로 ‘황실 어른들께서 괜히 겁을 주시네’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제현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연우에게 함부로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연우 역시 제현은 서툰 이니 제게 과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었다. 괜히 보모상궁까지 나서 한 시간가량 교육을 한 것이 아니었다.
“흐으, 저하, 아!”
“크흑…!”
정자세로 거세게 용두질을 하던 태자가 돌연 연우의 오른쪽 다리를 제 어깨에 올리고서 모로 기운 몸속에 제 것을 박아 넣었다. 내벽이 오물쪼물 달라붙는 느낌이 생경하였다. 이리 좋은 것을 그동안 왜 안 했을까, 제현은 여태 참았던 것을 모두 풀 기세로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우의 체력이 매우 좋은 편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월국과 태영국의 백성들은 체격 차이가 나는 만큼 체력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응, 저하, 으응……!”
태영국의 사내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모두 힘이 좋은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황실의 자손은 그 정점에 이른 자들이었다. 연우는 아래로 물을 왈칵 쏟아내며 도대체 태자는 언제 지치는 것인가 가만 생각해 보았다.
하나 제현은 놓아줄 생각 따위 없다는 듯 굴었다. 두 번의 파정을 하였지만 여전히 태자비를 취하고 싶었다. 납작하나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대고 불쌍한 척 올려다보면 연우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못내 좋았다. 제현은 열이 나 그런 것이라고 핑계를 대며 연우에게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다.
“부인, 열은 많이 내렸으나 한 번만… 더 하면 아니 되겠습니까? 힘드시면 말씀해 주시고….”
“예, 저하. 소첩도 사내이니 너무 걱정 마시어요.”
“아아, 부인…….”
제현은 허가의 말을 부드러이 뱉는 연우의 머리칼을 조금씩 집어 빗겨주고선 다시 그의 가랑이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벌써 들어갈 준비를 마치고 질금질금 액을 싸는 물건을 보니 아래에 있던 연우도 적잖이 흥분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제현은 연우가 첫 잠자리 상대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재주도 못 부리고 무작정 박아 대기 바빴다. 하나 원체 물건이 굵고 단단하여 어디로 찌르나 꽉 들어차니 연우로서는 그저 우는 수밖에 없었다.
“부인도 만져주는 것이 좋지요…?”
“으응, 저하, 어찌 그러셔요….”
“만지고 싶습니다, 부인의 기분도 저와 같아졌으면 해요. 그러니, 피하지 마시고…….”
“아음, 아니 되는데….”
대답은 태자의 입 속으로 스며들었다. 입술을 빨아들이며 손으로는 부지런히 연우의 몸을 탐하는 태자 아래에 누운 이는 허리를 들썩이며 따라주었다. 발현열로 따끈하게 달아오른 손이 제 몸을 스칠 때마다 이걸 어쩌나, 싶을 정도로 좋은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연우는 밀어내지 않고 태자의 손을 끌어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춰주었다.
“손이 어여쁩니다, 저하….”
“부인은 어디든, 어디든…….”
“열이 내려갈 때까지 저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니 급히 하지 마시고….”
볼을 사붓이 매만지며 하는 말에 제현은 얼른 토라진 채 고개를 저으며 연우에게 안겨들었다.
“저밖에, 저밖에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무슨….”
“열이 내려도 가지 마십시오, 부인…!”
그렇게 말하고선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들쑤시는 것에 태자비의 발가락이 쭉 펴졌다가 곱아들었다. 길게 뻗어지는 종아리를 잡아챈 제현은 닿는 곳마다 입을 맞추며 허릿짓을 하였다. 이미 많이도 싸 놓은 터라 무름해진 안이 다시금 저를 흥분으로 이끌었다.
“아… 부인…….”
“흑, 응, 응….”
좋아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바짝 긴장하여 단단해진 허벅다리를 슬슬 주무르며 태자가 허리를 조금 더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음낭과 뒤 허벅지가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접을 붙을 때면 태자비의 비문에서 물이 튀었다. 제현은 가만히 그것을 보다가 저만 좋은 게 아니라 다행이라 여기며 태자비의 것도 살그머니 쥐었다.
“응?! 저하, 아, 흐아-!”
“너, 윽. 너무 조이시면, 부인… 큿, 힘을 조금만…!”
“아, 저, 저하, 아으응!!”
이렇게 하다가 망가지는 것 아닐까? 연우는 제 성기를 쥐고서 힘 조절을 하지 못해 마구잡이로 흔드는 태자를 보며 울먹였다. 옴팡 젖은 아래는 이미 흐무러져 난리도 아니었다. 태자의 손에 민감한 곳을 잡혀 반사적으로 아래를 조이자 그는 누가 이기는지 한번 보자는 식으로 깊숙이 삽입한 뒤 잘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얼마간 지속되고 태자의 입맞춤도 끊이질 않았다. 연우는 성기로도, 태자의 것이 담긴 아래 구멍으로도 액을 쏟아내며 몸을 떨었다. 이미 몇 번이나 꼭대기에 올랐다가 처박히듯 떨어지는 쾌감에 혹사를 당한 터였다. 이제 더는 못 하겠다 생각하였을 때 태자는 돌연 제 비를 꽉 끌어안으며 길게 신음하였다.
“윽, 하아, 하…….”
“저하, 아, 흐아…….”
안을 빠듯이 채울 듯 부풀기 시작하는 양물에 태자와 태자비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드디어 이루어진 진정한 각인에 기뻐하며.
***
아침이 되자 태자궁 앞의 궁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이러저러한 것들을 정신없이 쏟아내었다.
“태자 저하와 태자비마마께서 드디어 합궁을 하셨어!!”
“또 손만 잡으신 거 아니구?”
“아냐, 이번에는 진짜라니까? 태자비마마께서 그만하라고 하시는데도 저하께서… 아, 부끄러워서 말 못 해!”
“아 씨! 그럴 줄 알았으면 어제 나도 태자궁 앞에 서 있는 것인데!!”
“이제 두 분 사이에 황손이 생기는 걸까?”
“야아-! 누가 들을라!”
저들끼리 킥킥거리며 신이 나 떠들던 궁녀들은, 안 그래도 태자비를 좋아하던 태자가 이제 태자비 없이는 못 살게 되셨을 거라며 꺅꺅거렸다. 새처럼 조잘거리는 궁녀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태자는 일어나자마자 잠든 제 부인의 얼굴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인, 피곤하십니까?”
“으응…. 저하…….”
“어어, 더 주무세요, 일어나지 마시고.”
“푸…….”
“엇…. 귀여우셔라.”
태자는 연우의 입술 새로 삐져나온 소리에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이리 귀여울 수가 있나! 태자는 누가 볼세라 연우를 품에 살살 가둬 안고서 넋이 나간 놈처럼 헤실거렸다. 드디어 부인과 진정한 합방을! 이제 합방일마다 부인에게 가야지! 태자는 소리 죽여 웃으며 연우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오늘도 가도 됩니까, 부인…?”
“…….”
“오늘은 손만… 은 아니고, 안고만 잘 것인데.”
“음…….”
“예? 알겠다고요? 좋다고 하셨지요?”
하 참, 부인께서 이리 저를 좋아하시니 가야지요. 태자는 자는 사람을 앞에 두고 연신 이리 저를 좋아하면 어쩌냐고 말하였다. 연우의 잠자리가 불편할까 봐 머리를 받친 팔을 빼지도 못하는 이가 하는 말은 아주 유려하였다.
“…코도 어여쁘고, 감은 눈도 아름답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 달님. 태자는 속없이 웃으며 연우의 어깨를 살짝 안았다. 앞으로 틈만 나면 연우에게 갈 것이라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