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8. 동행】 (26/26)

  【외전 08. 동행】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네가 직접 찾겠다며?”

“찾아도 안 나와.”

“겨우 보름 밖에 안 지났어.”

“나 성격 급해. 그래서 어디 있는 거야?”

화장실을 나와 복도 모퉁이를 돌던 유찬혁은 익숙한 목소리의 울림에 우뚝 멈춰 섰다. 반쯤 열린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승건과 채훈의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창밖을 보자 정말 두 사람이 정원 한쪽에서 다투고 있었다.

토요일 점심시간이었다. 여름휴가를 맞아 코타키나발루로 떠난다는 두 사람은 정우를 맡기러 이수진에게 찾아왔다.

두 사람은 점심을 같이 먹고 오후 비행기로 출발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곧 점심을 먹을 때인데 갑자기 싸우고 있었다.

유찬혁은 승건과 채훈이 싸우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잉꼬부부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다. 특히 승건이 채훈에게 빠져있는 게 눈에 보였다. 손등을 긁고 싶을 정도로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낮은 목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유찬혁은 재빨리 뒤를 돌아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열세 살이나 차이 나는 형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났고, 아버지도 달랐다. 같이 자라지도 않았다.

유찬혁은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집안은 유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났다. 그래도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한국에 외조부모님과 아버지가 다른 형이 있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승건을 처음 만난 것이 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치료차 미국에 왔다는 승건은 이미 스무 살의 어른이었다. 차분하고 말수가 없는 승건에게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6개월 남짓 같이 살았지만 딱히 친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승건이 독립을 하고 난 후로는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어 한국에 정착하고 난 이후로 그저 몇 마디 소식으로만 전해 들었다.

사실 유찬혁은 승건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니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가 쓰러지고는 상황이 달라졌다. 열여섯 살이 되어 다시 만난 스물아홉 살의 승건은 여전했다. 과묵하고 무심했으며, 잘 웃지 않았다. 그 역시 유찬혁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예의 차리는 형제 관계로 지냈다.

승건의 차가운 성격은 친척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결혼 따위는 필요 없다면서, 맞선은커녕 연애조차도 하지 않았다.

잘생긴 알파에, 태화 그룹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알려진 승건은 인기가 많았다. 유찬혁이 보기에도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유명한 집안의 아가씨도, 예쁘다고 소문난 연예인도 있었다. 그런데도 승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죽했으면 작은 외할머니 중에 한 분은 승건의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졌을 거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 승건이 요란하게 연애를 하더니 결혼까지 해버렸다. 도망친 애인을 잡겠다고 하와이까지 날아갔다는 소리를 뒤늦게 들었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이 계속 일어났다. 애인을 임신시키고는 꽁꽁 숨겨 놓고 있다가 결국 혼인신고를 하고는 유부남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에는 뒤늦게나마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써니는 짚신도 제짝이 있다며 한마디 했다. 자신의 배우자에게 등짝을 얻어맞는 승건을 보며 유찬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외할머니가 그를 보고 팔불출이라고 하던 것도 적극 동의했다.

그런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가면서 싸우는 것은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특히 휴가를 떠나기 직전이라서 더 그랬다.

“할머니. 형이랑 형부랑 싸워.”

동성끼리의 결혼이라 호칭 정리가 한 번 있었다. 이수진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유찬혁은 채훈을 형부로 부르기로 했다. 처음에는 편하게 ‘채훈이 형’이라고 하다가, 외할아버지에게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혼나고 난 다음에는 형부라고 꼬박꼬박 부르게 되었다.

다이닝 룸의 식탁 위에는 이미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채훈의 먹성이 좋아서 이수진이 요리사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이다. 막 가정부가 건네준 불고기를 옮기던 이수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싸워?”

“응. 형이 막 큰소리도 내.”

“형이 잘못했겠지.”

태연한 이수진의 대답에 유찬혁은 의아했다. 그가 아는 승건은 잘못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형이?”

“그래. 뭐든 간에 승건이가 잘못한 거야. 이제 밥 먹어야 하니까, 가서 두 사람 데려와.”

“부부 싸움에 끼어들라고?”

“네가 가면 싸우는 거 멈출 테니까.”

“오, 할머니 완전 지략가. 하지만 형이 눈총 줄 것 같은데?”

“얼른 가.”

이수진의 재촉에 유찬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부 싸움에 끼어들라는 미션은 너무 어려웠다.

현관으로 나간 유찬혁은 조심스럽게 승건과 채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아직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어?”

그러다가 갑자기 승건이 채훈을 끌어안았다. 느낌이 화해한 것 같았다. 타이밍이 좋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키스를 했다.

아이고.

유찬혁은 재빨리 몸을 돌려 벽 뒤로 숨었다. 두 사람이 화해한 건 다행이었지만 이런 건 보고 싶지 않았다.

“형. 형부. 할머니가 밥 먹으래.”

마치 키스 장면은 보지 않은 것처럼 몸은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만 크게 해서 두 사람을 불렀다.

“알았어. 곧 갈게.”

대답을 한 것은 승건이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채훈이 승건에게 뭐라 한마디 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유찬혁은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팔불출이야.”

언젠가 외할머니가 했던 말을 따라 하며 유찬혁은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형이 있어서, 형과 형부의 사이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찬혁의 가족사는 평범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양육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유찬혁을 조부모에게 맡기고는 사랑을 찾아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외할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기업의 회장님이었다. 그러나 외손자라고 특별히 대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살아 있었던 외숙부는 겉과 속이 다른 철면피였다. 아버지가 다른 형인 승건은 세상사에 무관심했다. 그나마 외할머니가 애정을 가지며 적극적으로 돌봐주었다.

외할머니 손에서 평범하게 자라던 유찬혁의 인생이 다시 한번 달라진 것은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외할아버지의 후계자로 태화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외숙부가 급성 심근 경색으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외숙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유찬혁의 어머니도, 형도 그룹 경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할아버지의 나이가 예순을 훌쩍 넘은 상태에서 결국 유찬혁이 다음 후계자로 부각되었다.

그때부터 유찬혁은 그냥 그저 그런 재벌 3세가 아니게 되었다. 어른들의 세계를 접하면서 또래들보다 조금 더 빨리 철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후계자 수업을 받고,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재벌이라고 불리는 집안의 이해관계가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졌기에 시기와 질투, 그리고 선망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어렸고, 낙천적인 성격 탓에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치기 어린 마음에도 태화 그룹이라는 거대한 권력이 언젠가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태화 그룹이 문제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결코 살가운 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믿고 의지하던 든든한 거목이 쓰러지자 무서웠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승건이었다. 그는 복잡하게 흘러가던 상황을 재빨리 수습했다. 유찬혁은 승건이 외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승건은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공언했다.

승건은 유찬혁에게 선택권 같은 것은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당장에는 후계자 수업을 열심히 받고 나이가 든 다음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라고 했다. 전문 경영인에게 그룹을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네가 물려받는 게 모두의 평화를 위한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전보다 훨씬 빡빡하게 후계자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욕심 많은 형제들끼리 유산을 두고 싸우는 일은 흔했다. 외국으로 쫓아내고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는 괴담이 아니었다. 승건과는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건 힘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승건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것도 좋았다. 애정 행각에 가끔은 닭살이 돋았지만 집안이 북적거리는 것도, 돌처럼 딱딱하며 재미없게 살던 승건이 행복한 것도 다 좋았다.

“할머니. 형이 곧 온대.”

“싸우던 건?”

“내가 가기 전에 화해한 것 같아.”

“다행이네. 다 됐다. 할아버지 모셔와. 정우도.”

“응.”

이수진의 명령을 받은 유찬혁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집 안쪽이었다. 정우가 태어나는 바람에 드디어 막내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심부름은 유찬혁의 몫이었다.

오랜만에 북적거리는 점심시간을 기대하며 유찬혁은 빙그레 웃었다.

* * *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은 꼭 푸른색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보였다. 느릿하게 배영을 하며 수영장을 가로지르던 채훈은 하늘을 가로막는 야자수 잎이 나타나자 수영을 멈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영장의 길이는 길지 않았지만 몇 번을 왕복했더니 힘이 빠졌다. 채훈은 수경과 수모를 벗으며 수영장을 빠져나가 수건을 대충 몸에 두르고는 썬베드에서 뒹굴었다.

“어구구구.”

다리를 쭉 뻗었더니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수영은 다 좋은데 의식할 새 없이 체온이 내려가는 게 문제였다.

몇 번을 더 뒹굴며 의욕적으로 물기를 털어낸 채훈은 따뜻한 공기에 몸을 녹였다. 파란 하늘에 코발트색 타일이 깔린 수영장, 썬베드, 그리고 야자나무와 이름 모를 열대 꽃까지. 모두가 완벽했다.

승건이 기억을 잃었을 때 심정민에게 휴가를 못 간다고 해야 하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심정민도 마찬가지였다. 두사람 모두가 까맣게 잊은 덕분에 예정대로 코타키나발루에 올 수 있었다.

여름휴가는 여행이나 레저를 즐기기보다는 휴식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해서는 가볍게 해변 산책을 한 번 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풀빌라와 호텔 안에서 보냈다.

따뜻하고 조용한 곳에서 허락된 게으름을 피우고 있자니 세상 근심이 모두 사라졌다. 또 다른 천국이 여기 있었다.

바로 보름 전까지 기억을 잃은 승건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도 꿈결 같았다.

기억이 되돌아온 승건은 제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맹세가 무색하게 한 번 크게 화를 냈다. 기억을 잃은 그와 섹스를 한 것보다는 너무 쉽게 이혼을 하려고 했다면서 말이다. 그것 때문에 대판 싸웠다. 이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게 누군데 그러냐고 자신이 따지면서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서로의 잘못을 인정했다.

물론 그러다 이혼 서류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고, 여행 오기 직전에 싸우기는 했다. 그것도 역시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았다.

2주일에서 하루 모자라는 기간 동안 벌어진 해프닝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 다음에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채훈은 승건의 기억이 그렇게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몇 번이나 생각했다. 아마도 사귀다가 이혼하거나, 혹은 그대로 같이 살았을 것이다.

승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마지막으로 도박을 하는 심정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남은 기간이고 뭐고 그냥 다 끝낼 각오를 했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최근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이번 기적을 위한 운을 적립해 두느라 생겼던 것 같았다.

“기적이지.”

운명의 신이 있다면 이런 장난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뺨을 북북 문지른 채훈은 크게 숨을 쉬고는 아까부터 진동을 거듭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안 읽은 메시지가 1000개나 훌쩍 넘어 있었다. 이럴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같은 학년 동기들이 모여 있는 단체 메시지창에 사고가 일어날 때였다. 그래서 알림을 꺼놨었는데, 다른 메시지창들도 난리였다.

“무슨 일이…….”

채훈은 당장에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사건이 터지기는 터졌다. 그것도 큰 사건이었다.

주수길 교수가 제약 회사와 병원에서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사실이 공중파 뉴스에 나올 모양이었다.

리베이트가 불법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암암리에 일어났다. 어지간하면 묻혔고, 인터넷 기사로 뜬다는 건 그 정도가 심하거나 어딘가에 밉보였다는 의미였다.

주 교수의 경우 조폭을 시켜 리베이트 관련 로비스트를 구타하는 장면이 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고 했다. 두들겨 맞은 로비스트가 연줄을 이용해 방송사에 제보를 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것이었다. 방송은 오늘 저녁이었고 그 정보가 미리 학교 측에 알려져서 지금 발칵 뒤집혔다면서 메시지창이 요란했다.

동기들은 물론이고 선배들까지 난리가 아니었다. 특히 2학기에 주 교수의 수업을 들어야 하는 본과 선배들은 축제였다. 누군가가 예전에 비슷한 일로 퇴직 당한 교수가 있다고 알려주는 바람에 다들 환호했다. 조폭까지 끼어 크게 논란이 되었으니 학교에 남아 있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채훈 역시 주 교수를 안 보는 게 좋았다. 축제 이후로 주 교수를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자신의 랩실에 조수로 신청을 안 해서 섭섭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주 교수에게 제대로 찍혔다는 사실에 얼마나 오싹했는지 몰랐다.

“진상이 사라지는구나.”

흥겨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내려놓는데, 그때 마침 승건이 건물에서 나왔다. 같이 수영을 하다가 전화를 할 곳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었다. 승건은 사업상의 통화를 대부분 오픈했지만 아닌 것도 있었다. 채훈은 굳이 그걸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승건의 멋진 몸매를 감상했다. 몸에 달라붙는 5부 수영복을 입은 승건의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가슴에 자신이 만든 잇자국이 여럿 보였다.

첫날은 거의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신혼 초 때처럼 서로에게 달려들어 섹스를 해댔다. 그러다 경쟁적으로 서로에게 치흔과 순흔을 만들어냈다. 특히 자신은 그 정도가 심해서 상체랑 허벅지가 얼룩덜룩해졌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챙겨 온 래시가드를 입어 몸을 가려야 했다.

수영복을 여럿 챙긴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데, 천천히 다가오는 승건의 얼굴이 꽤나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 있어?”

고민 정도는 들어줄 수 있어서 가볍게 물었는데 승건이 옆에 있는 썬베드에 각 잡고 앉았다. 분위기가 심각해서 채훈은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너 말이야.”

“응.”

“이혼 서류를 어디에 뒀어?”

“……?!!”

채훈은 승건이 갑자기 이혼 서류를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미 여행 오기 전에 그 일로 한 번 더 싸웠었다.

승건이 사람을 시켜 이혼 서류를 찾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심정민과 고용인들을 동원해서 집을 싹 뒤질 작정이라며, 그걸 허락하라는 승건의 강요 아닌 강요에 처음에는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승건이 보기 드물게 부탁한다고 애원을 하는 바람에 결국 설득당하고 말았다. 대신에 약간의 심술을 담아 이혼 서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하고도 4일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그런데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아직도 못 찾았다는 소리였다.

“설마 못 찾은 거야?”

“그래. 어디 있어?”

“사람 시켜 뒤진다며?”

“뒤졌는데 없다고 하잖아. 하아. 내가 잘못했어. 3년 전의 나는 아주 나쁜 놈이었어. 그러니까 어디 있는지 알려줘.”

이번에도 다시 애원이었다. 승건이 너무 진지하기 짝이 없어서 채훈은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근사한 얼굴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멋진 남자를 미워하기 힘들었다. 자신은 너무 그에게 약했다. 어차피 이혼 서류로 뭘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럼 우리 내일 패러세일링 하러 가자.”

“그거 위험하잖아.”

“별로 안 위험해. 그냥 가만히 있으면 하늘을 나는 건데.”

원래는 스노클링만 한 번 하기로 했다. 바로 어제 스노클링을 했었는데, 푸른 바다가 너무 좋아서 다시 한번 나가고 싶었다.

“요트를 빌려서 바다에 나가자. 패러세일링은 하지 말고.”

“음. 알았어. 바다 수영이나 하지 뭐. 아, 그리고 이제 팔찌 선물 자체를 하지 마. 앞으로 영원히.”

채훈은 자신의 트렁크에 곱게 들어가 있는 팔찌를 떠올리며 말했다. 여행 기념이라며 값비싼 팔찌를 코타키나발루까지 가져온 승건의 수완은 놀라웠다. 손등을 보석으로 덮는 팔찌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대로 승건을 내버려두었다가는 뭔가 더 큰 일을 저지를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문제였다.

집요한 성격의 남자는 돈도 많았다.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건 안 돼.”

“그럼 나도 말 안 해. 서류 잘 찾아 봐.”

승건이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채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은 지금 당장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러기야?”

“어. 그리고 시계도 안 됨.”

“야.”

“시계가 너무 많아. 이제 필요 없어.”

생일이라고, 크리스마스라고, 결혼식이라고, 어울릴 것 같다고 승건이 하나씩 사들고 온 시계가 커다란 서랍을 가득 채웠다. 이러다가 시계 부자가 될 판이었다.

승건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팔찌는 포기하고, 시계는 앞으로 자제할게.”

“자제라는 말만으론 안 돼. 자제하다가 폭주하면 끝이잖아. 환불할 수 없고.”

“신뢰가 없군.”

“당연하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채훈은 승건의 손을 찰싹 때렸다. 승건은 자기가 한 말은 거의 다 지키는 편이었다. 하지만 시계나 팔찌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냈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만 선물할게.”

이 제안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1년에 두 개면 그나마 괜찮았다.

“이혼 서류는 네 서재에 있어.

“……내, 내 서재에?”

승건이 정말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허를 찔린 게 역력해서 채훈은 웃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응. 책상 제일 아래 서랍에.”

“거기에 왜?”

“한창 시험 기간 중이라서, 다른 종이랑 섞일까 봐. 봉투에 넣어두긴 했지만 정신이 없으면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 프린트가 많아서 조심했지. 봉투 겉에 매직으로 커다랗게 이혼서류 재중이라고 써 놨어. 네 서재는 안 찾았나봐.”

“당연히 거기 있을 줄 몰랐지. 잠시만. 통화 좀 하고 올게.”

승건이 한숨을 삼키더니 휴대폰을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도장까지 다 찍어 놨어.”

“?!!!”

“그거 그대로 제출하면 진짜 서류 접수 된다?”

채훈은 반쯤 장난스럽게 말했다. 승건에게 이혼 서류를 받은 그날에 도장은 이미 찍어두었다. 그건 합의서도 마찬가지였다. 법원에 제출하면 접수가 가능했다.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 승건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휴대폰을 든 채 재빨리 건물 쪽으로 사라졌다.

채훈은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준비된 음료수를 마셨다. 달고 시원한 과일 음료가 기분을 더 좋게 만들어줬다. 원래는 이혼 서류를 꽤 오래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승건이 너무 간절하게 구는 바람에 그냥 항복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승건의 불안을 해소한다면 그걸로 좋았다.

어차피 진짜 이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서류 따위야 다시 작성하면 그만이었다. 그때가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번 사건으로 사람 일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서주명의 말대로 가끔은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다.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승건이 돌아왔다.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아까보다 확실히 밝아보였다.

“찾았어?”

“응.”

성큼성큼 다가온 승건이 허리를 숙이고는 입을 맞춰왔다. 채훈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승건의 혀가 들어왔다. 채훈은 승건을 밀어내는 대신에 혀를 빨았다. 입안을 샅샅이 훑는 키스는 달콤하기만 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채훈은 장난삼아 물었다.

“그렇게 좋아?”

“응.”

“나한테 잘해야 해.”

“물론이지.”

단언을 한 승건이 활짝 웃었다. 표정 변화가 적은 녀석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미소였다. 남국의 태양 아래 그늘 없는 미소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채훈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같이 웃었다. 행복이 전염이 되었다.

*

*

여행 책자에서는 코타키나발루의 별명이 ‘황홀한 석양의 섬’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멋진 설명대로 바다 너머로 석양이 지는 열대 바다의 하늘은 시시각각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갔다.

다채로운 주황빛과 붉은색, 파란색, 보라색이 뒤섞이다 종국에는 남색으로 점점 짙어져가는 낙조는 장관이었다. 하늘과 바다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작품이었다.

야외 레스토랑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감탄을 내뱉으며 사진을 찍다 감상하기를 반복했다.

채훈 역시 휴대폰을 계속 손에서 놓지 못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보내는 휴가 첫날과 둘째 날은 모두 침대에서 승건과 뒹구느라 석양을 구경할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어제는 빌라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조망이 썩 좋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호텔에서 석양이 제일 잘 보이는 레스토랑 테이블을 예약했다. 이혼 서류를 분쇄기로 갈아버린 덕분에 잔뜩 기분이 좋아진 승건이 달라붙으려고 했지만 단호하게 쳐냈다. 덕분에 휴가 나흘째 저녁에 멋진 석양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2년 전에 하와이에서 한 달을 넘게 지냈을 때도 바다 위로 펼쳐지는 멋진 낙조를 매일같이 봤었다.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은 그때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같이 온 알파는 어디 갔어?”

역시 여름휴가는 열대바다라고 납득하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돌아보자 승건이 앉아 있었던 맞은편에 낯선 남자가 보였다.

채훈은 그가 알파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차렸다.

“누구시죠?”

남자가 한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채훈 역시 한국어로 대꾸했다. 혹시나 안면이 있는 사람인가 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알파가 돌아오지 않네. 싸웠어?”

채훈은 단 한 번의 대화로 눈앞의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페로몬을 슬쩍 흘려대는 알파가 진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킹에 열을 올리는 승건 덕분에 지금 자신의 몸에는 알파의 향이 배어 있었다.

물론 블라인드도 마킹도 두 발자국 거리가 되어야 향기를 맡을 수 있긴 했다. 그래도 언뜻 스쳐 지나가면서 페로몬 조절을 하지 못하는 알파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의 알파라면 마킹 당한 오메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알파는 알파의 페로몬 향기를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채훈은 가끔 오해한 오메가의 관심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승건의 말로는 마킹 당한 오메가에게 덤비는 이상한 알파 새끼들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세상에 별난 취향을 가진 인간이 다 있다고 웃어 넘겼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느끼하게 생긴 남자가 딱 그것인 모양이었다.

“거기, 내 배우자 자리인데. 비키죠?”

채훈은 정중하게 경고했다. 하와이에서 비슷한 일이 꽤 있었다. 휴양지에 혼자 앉아 있으면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하곤 했다. 대부분은 단호한 거절의 말에 두말 하지 않고 자리를 비켰다. 하지만 남자는 대부분이 아닌 부류였다.

“집착 강한 알파는 귀찮지 않아? 아름다운 휴양지에 왔으면 화끈하게 즐겨봐야지. 안 그래?”

은밀하게 페로몬을 흘려대는 남자의 뻔뻔함에 채훈은 기가 막혔다. 배우자가 있다고, 꺼지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것은 진상 그 이상이었다.

해는 거의 다 졌지만 테이블을 밝히는 램프 불빛에 남자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남자는 그럭저럭 생겼다. 몸매도 괜찮으니 나름 자신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채훈은 남자에게 승건의 얼굴은 제대로 봤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승건과 비교하자면 남자는 오징어도 아니고 해삼보다 못했다.

거기다 남자의 페로몬 향기도 최악이었다. 형질자들의 페로몬 향기는 향수와 비교되곤 했다. 하지만 남자의 것은 식초에 강한 장미 향수가 섞인 것 같은 냄새였다. 세상에 이런 페로몬 향이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마킹을 당한 오메가는 다른 알파의 향기를 둔하게 느끼기는 했다. 채훈의 경우 알파의 페로몬 향기가 왜곡되었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지만 좀 심한 편이었다. 평소라면 술에 물을 탄 듯이 희미하게 느껴질 텐데, 남자는 식초향이 강했다.

“당신한테서 이상한 식초 냄새가 나는데…….”

“뭐?”

“못 참겠으니까 꺼지라고.”

채훈은 정중한 태도를 버리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면 냄새 때문에 코를 막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너.”

“저기 내 알파가 오는데. 여기서 싸워볼까?”

턱짓으로 남자의 뒤쪽을 가리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승건이 걸어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 승건을 확인한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저 남자 뭐야?”

“화끈하게 즐겨보자고 하더라.”

거의 교대하듯 나타난 승건에게 채훈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승건이 남자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았다.

“이상한 놈 따라가지 마.”

“내가 애도 아니고. 뭘 따라가. 꺼지라고 했는데도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더라. 그런 놈이 제일 위험하지.”

사람을 조심하라고 승건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주의를 들었다. 채훈이 승건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 표적이 될 수 있으니까 모르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너무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 남자처럼 접근한다면 없던 의심도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인 것 같던데?”

“응. 한국인이더라. 걱정 마. 내가 눈이 한없이 높아져서 저렇게 느끼하게 생긴 오징어는 눈에도 안 들어와.”

“오징어?”

“오징어도 아니다. 해삼이야. 해삼.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내 관심을 끌려면 너보다 잘생긴 인간 데려와야 한다고.”

채훈은 진실만을 전했다. 느끼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기는커녕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페로몬 향기조차 끔찍했다.

농담이 재미있었는지 승건이 눈으로 웃었다.

석양의 마법은 사라졌지만 밤의 어둠이 주는 음영이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한겨울 하굣길에서, 고기 냄새가 풍기는 골목에서 승건과 마주했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비쩍 마른 얼굴을 하고 공항에 서 있던 모습이 선연했다.

승건과 함께한 추억들이 모두 다 좋지만은 않았다. 그런데도 어떤 순간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 오늘도 그럴 것이다. 이혼 서류를 조각조각 분쇄해 버렸다고 활짝 웃는 모습은 너무나 특별해서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승건아.”

“왜?”

“내가 네 얼굴만 좋아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얼굴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다른 것도 좋아해.”

채훈은 혹시나 모를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말을 꺼냈다. 그 때 막 물을 마시던 승건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아마도 놀란 모양이었다.

“얼굴 말고, 내 어디가 좋은데?”

이번에는 승건이 반격했지만 채훈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디가 좋냐고 물으면 할 말이 많았다.

“좀 많은데. 음. 젓가락질 깔끔하게 하는 거랑, 부지런하고 유능한 거. 팔다리가 길고 늘씬해서 멋지고. 신 거 먹으면 잠깐 영혼이 가출한 것처럼 멍해지는 건 귀엽고, 기분 좋을 때 손가락 만지작거리는 것도 귀엽고. 지금 당황한 것도 귀엽고.”

이것저것 길게 나열하자 승건이 어리둥절해하다가 귀를 붉혔다. 채훈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좋아하기 때문인지 어떨 때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까지도 귀여워 보였다. 그리고 그걸 고백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 해?”

“더 안 해도 돼.”

승건이 짧게 항복을 선언했다. 채훈은 승건에게 자신의 어디가 좋으냐고 똑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낮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전했다.

“아, 다다음주 토요일에 시간 있어? 같이 결혼식 가자.”

“결혼식? 누구?”

“경민이가 결혼한대.”

“김경민?”

“응. 네 살 연상의 아가씨라고 하는데, 경민이가 각인했대. 같이 가 줄 거지? 축의금만 전달하고 오려고.”

오늘 낮에 확인했던 1000개가 넘어가버린 메시지의 홍수 속에는 김경민의 온라인 청첩장도 끼어 있었다. 김경민에게서는 이미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다음이었다. 청첩장 인쇄에 문제가 생겨서 온라인 청첩장부터 보낸다는 녀석은 사정을 아니까 축하만 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채훈은 단순히 축하만 할 게 아니라 승건과 함께 갈 생각이었다. 과는 달라도 같은 대학에서 오가다 보면 우연이라도 한 번씩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승건이 민감하게 굴면 서로 피곤해지는 법이었다. 김경민을 경계하는 녀석에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축의금은 내가 준비하지.”

승건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램프 불빛에 드러난 잘생긴 얼굴은 어딘가 악당을 닮아 있었다. 채훈은 축의금을 얼마나 할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김경민에게 제대로 언질을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때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에 채훈은 바닷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밤이 내려앉은 해변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우리 산책 갈까?”

“그래.”

채훈의 제안에 승건이 흔쾌히 응했다. 남국의 여름밤을 둘이서 함께 즐길 방법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 * *

올해 서른두 살이 된 승건은 누구나 인정하는 미남이었다. 키는 컸고 몸매는 훌륭했다.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는 외모였지만 그것조차 존재감을 뽐내고 있어서 누구든 뒤돌아 볼 정도였다.

채훈은 종종 승건의 얼굴을 뜯어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잘생긴 배우자 덕분에 심미안이 생겨서 다른 남자들이 오징어로 보일 정도였다. 어떨 때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화가 누그러졌고 피로가 풀렸다.

그런 그가 오늘은 거짓말하지 않고 반짝반짝 빛났다. 특히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인체가 아무리 신비롭다고 해도 실제 그럴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지만, 채훈은 진심으로 승건이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승건의 패션 스타일은 고지식한 편이었다. 사적인 자리라도 캐주얼한 양복을 입었고, 주말에 집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취향은 명확했지만 그렇다고 스타일링 자체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평소 승건의 출근 복장은 각 잡힌 양복에 머리를 빗어 넘기는 것으로 끝냈다. 중요한 손님을 응대하며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장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장난이 아니었다.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남색 여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는 행커치프까지 꽂았다. 머리도 과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넘긴 것이 꽤나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정확히는 패션이 문제가 아니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라는 게 범상치 않았다.

거실에서 정우와 놀아주던 채훈은 2층에서 내려온 승건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세상 둘도 없이 잘생긴 남자의 의도가 너무 투명했다.

“너, 오늘 완전 힘 줬는데?”

정우를 김혜진에게 넘긴 채훈은 승건에게 다가가며 칭찬을 했다. 하지만 승건이 부정했다.

“뭘 힘 줘?”

“아니야? 원래 행커치프 같은 거 안 했잖아.”

“네가 잘 어울린다고 했던 거야. 양복이랑 같이.”

“그건 그랬지.”

몸에 살짝 달라붙으며 몸매를 부각시키는 양복은 승건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승건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채훈이 부러 주문을 했던 거였다. 거기에 분명 행커치프도 몇 개 딸려 왔었다.

작년 여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것을 하필이면 김경민의 결혼식 날에 개시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눈여겨보니 넥타이핀이랑 커프스 버튼도 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것이었다.

김경민의 결혼식에 참석하다고 밝힌 승건은 그 이후로 날짜와 시간을 몇 번 확인했을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시간 맞춰 준비를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힘주고 꾸민 것을 보면 엄청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른스러웠던 승건은 지금도 여전했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고 차분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자기 절제는 더 강해졌다. 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귀여운 행동을 하기도 했다. 본인은 의식하고 있지 않겠지만 마치 수컷 공작새가 아름다운 꼬리 깃털을 활짝 펼쳐 뽐내는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것조차 귀엽다니까.

채훈은 자신의 눈에 두꺼운 콩깍지가 껴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했다.

“너 귀여운 거 알지?”

“……?”

승건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시선을 주었다. 채훈은 대답 없이 웃었다. 그가 귀엽다는 것은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된다.

“가자.”

채훈은 정우에게 인사를 하고는 승건과 함께 집을 나섰다.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

*

*

결혼식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신부였다. 하지만 신랑의 하객인 채훈은 김경민에게 축하의 인사만 건넸다. 새신랑이 될 김경민은 승건을 보고는 흠칫 굳었다가 금방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환영해주었다. 예식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기 때문에 축의금을 남기고는 식장을 빠져나왔다.

오늘 일정은 결혼식 말고 써니의 초대도 있었다. 써니의 화가 친구가 이번에 개인 전시회를 여는데 자리를 빛내 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승건이 두말하지 않고 참석한다고 해서 채훈도 동행하게 되었다.

소규모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는 첫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채훈은 김경민의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써니에게 얼굴 도장만 찍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전시회 그림이 채훈의 취향이었다.

“마음에 들어?”

“응.”

채훈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자체는 작은 편이었다. 16절지 도화지 크기인데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비가 내리는 도시의 밤이 거친 붓 터치로 그려졌다. 건물도 사람도 흐릿한 음영으로 표현되었지만 저곳이 고가 다리 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길 건너편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주황색 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옆의 그림은 고층 창문 너머로 비가 내리는 회색 도시를 내려다보는 구도였다.

반대편 방은 낮의 정원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점으로 표현된 다채로운 색깔의 초록색이 캔버스에 가득했다. 너무나 밝고 화사한 햇살이 느껴졌다. 상반된 이미지의 그림인데도 같은 화가가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고가 다리 밑의 그림은 보자마자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기도 작으니까 서재에 걸어둘 공간이 충분했다.

“이거 멋지죠? 근데 다들 낮 그림을 좋아한다니까. 어때요? 마음에 들면 내가 선물로 줄게요.”

한창 감상하는 중에 써니가 끼어들었다. 발이 넓은 써니에게는 온갖 곳에 친구가 있었다. 예술가의 경우는 후원자에 가까웠다. 그녀는 돈을 벌어서 재능 있는 친구들을 키우는 게 좋다고 했다. 특히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을 향한 기대와 칭찬이 하늘을 찔러댔다.

그림을 선물하겠다고 나선 써니를 막은 것은 승건이었다.

“네가 왜 선물을 해?”

“내 친구 그림이라서? 내가 여기 있는 그림 반은 팔아주기로 했어.”

“사도 내가 사.”

“오빠는 따로 하나 사 줘야지. 채훈 씨가 좋아하잖아.”

승건과 써니가 다시 티격태격했다. 이럴 때 보면 둘은 진짜 남매 같아 보였다. 물론 두 사람에게 그 말을 했다가는 각자 화를 내겠지만 말이다.

“이거 제가 살 거예요.”

꾸준히 모아온 용돈으로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라서 과감하게 질렀다. 써니가 그 자리에서 바이어를 데려와 바로 구매가 결정되었다. 전시회 동안에는 갤러리에 걸려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 바이어가 구매 확정 스티커를 그림 제목 옆에 붙였다.

“두 분은 이제 어디에 갈 거예요? 내가 저녁 한턱 쏘고 싶은데.”

“점심 먹으러 가요.”

김경민의 결혼식은 11시였고 결혼식장과 갤러리는 멀지 않았다. 그래서 갤러리까지 둘러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아직 1시도 되지 않아서 아주 늦지는 않았다.

“아, 아직 점심시간이지. 뭐 먹으러 갈 건데요?”

“파인애플 피자요.”

어제 승건이 김경민의 결혼식 시간을 물어본 게 계기가 되어서 하와이에서 돌아다녔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파인애플 피자가 언급되었는데, 승건이 그게 뭔지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파인애플 피자였다.

점심 메뉴를 말하자 써니의 반응이 격렬했다.

“세상에. 채훈 씨. 그거 먹어요?”

“맛있잖아요.”

“채훈 씨가 괴식가였다니. 승건 오빠는 파인애플 피자 먹은 적 있어? 없는 거야? 진짜 찐사랑이야. 그거 먹으면 진짜 사랑이야. 사랑.”

써니가 호들갑을 떨며 파인애플 피자를 괴식이라고 평했다. 다행히 승건은 눈썹을 한 번 찡그렸지만 다른 걸 먹으러 가자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채훈은 다른 피자도 하나 더 시킬 거라고 승건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채훈은 갑작스러운 식초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에서 날 법한 냄새는 아니었다. 혹시나 창고에서 식초를 쏟았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 듯 다들 태연했다.

“매너가 없는 사람이 있네.”

“그러게요.”

먼저 말을 꺼낸 건 승건이었다. 그리고 그걸 써니가 받아주었다. 그제야 채훈은 그것이 페로몬 향기라는 것을 알아냈다.

채훈은 물론 승건과 써니는 모두 형질자였다. 공공장소에서, 특히 실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타인에게까지 페로몬 향기를 퍼트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페로몬 향기를 풍겨대는 것은 잠자리 상대를 구한다고 광고하는 것으로 통했다.

식초에 장미가 섞인 냄새가 나는 페로몬이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채훈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냄새의 근원지는 채훈이 서 있는 구역의 구석 끝이었다. 늘씬한 남자는 그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보았을 때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여전히 느끼한 오징어 해삼처럼 생겼지만, 짧아진 머리를 밝게 염색한데다가 안경까지 써서 페로몬 향기를 맡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채훈은 슬쩍 승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기, 오른쪽 끝에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 여자랑 나란히 서 있는 회색 양복 입은 남자 말이야. 보여? 머리는 밝은 갈색인데.”

“보이는데. 왜?”

“저 남자가 코타키나발루에서 봤던 그 남자야. 오징어라고 했던. 기억나?”

“……아.”

“겉모습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는데, 그 남자가 맞아. 페로몬 향기가 똑같아.”

승건이 남자를 유심히 보자 써니가 관심을 가졌다.

“무슨 일이에요?”

“매너 없는 사람이 누군지 찾아서요. 그래도 환기는 잘 되네요.”

채훈은 굳이 코타키나발루에서 저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기분은 꽤나 복잡했다. 남자는 영락없는 사기꾼처럼 보였다. 그래도 남자의 맞은편에 있는 여자와 어떤 사이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끼어들기도 애매했다.

그런데 승건이 나섰다. 남자 쪽을 직접 가리키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눈치챌지도 모르니까 돌아보지는 말고. 저기, 저쪽에 밝은 갈색 머리에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김지훈이야. 네가 전에 알려줬던 그 남자.”

“아니, 비슷하게 생긴 것 같지만. 좀 다르게 생겼는데?”

“사진이랑 달라 보이기는 한데, 맞을 거야. 귀 모양이 똑같아. 귀가 특이하게 생겼었거든.”

“알았어. 고마워.”

고맙다고 한 써니가 그대로 사라졌다. 채훈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승건에게 물어봐도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남자를 한참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함께 온 여자와 함께 갤러리를 한 번 둘러보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때쯤에 써니가 돌아왔다.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설명하기 너무 길다면서, 자세한 이야기는 승건에게 들으라고 했다. 나중에 꼭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결국 채훈은 승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야? 말 못하는 거야?”

“그건 아니고. 여기서는 듣는 귀가 있어서.”

갤러리는 작지 않았지만 사람이 많았다.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는 맞지 않았다.

“나도 그림을 사야겠어. 이거.”

승건이 가리킨 것은 담쟁이덩굴에 감싸인 오래된 담장이었다. 채훈이 한참동안 넋을 놓고 보던 것으로, 고가 다리 그림과 이것 중에 어떤 것을 살까 고민을 했었다. 한꺼번에 두 개를 지를까 말까 고민했었지만 꾹 참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 속을 읽어버린 승건을 보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나 귀엽고 깜찍한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사기꾼이라고?”

“응.”

“그러니까, 설마 그거?”

“그거.”

전시회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차 안이었다. 갤러리에서 파인애플 피자를 파는 가게까지는 차로 20분 정도 이동해야 했다. 시 외곽이지만 주말이라 차가 밀리는지 내비게이션은 28분이 걸린다고 알려왔다.

차에 타자마자 채훈은 승건에게 빨리 설명해 달라고 재촉했다. 이번에는 승건도 순순히 이야기를 풀어냈다.

남자의 이름은 김지훈이었다. 그는 팀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부유층에게 접근해 돈을 뜯어내는 악질 범죄자였다. 상대의 결혼 유무는 가리지 않았다. 외도의 증거물을 가지고 협박하거나, 혹은 결혼을 앞둔 자녀의 치부를 들이밀었다.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연예계 종사자들도 여럿 당했다. 진짜 거물은 건드리지 않는데다 감당할 수 있는 금액만 부르는 등 아주 교묘하게 치고 빠졌기 때문에 소리 소문 없이 당한 집이 여럿이라는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쉬쉬하는 분위기에 정체도 모르다가 최근에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승건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소문이야 승건의 귀에 들어갈 수 있는데, 소문 속의 사기꾼이 저 남자라는 것을 알아본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보고, 혹시나 하는 느낌에 뒷조사를 했어.”

“어떻게? 이름도 몰랐을 거 아니야? 얼굴도 제대로 못 봤잖아.”

“방법이 있어.”

“그게 뭔지 궁금하다고.”

채훈은 승건이 늘 말하는 ‘방법’이 궁금했다. 돈과 권력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었다.

“심 실장님이 고생하셨지.”

이번에도 승건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채훈은 심정민이 유능한 대마법사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김지훈을 역으로 추적하다가 사기꾼 조직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 자세한 정보는 써니에게서 받았고. 써니 친구 집안이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거든.”

채훈은 그제야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했다. 써니가 친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간다는 게 그거였던 모양이었다.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이 많긴 한데, 저쪽에서 쥐고 있는 것도 상당해서 경찰은 안 불렀을 거야.”

“진짜? 어떻게 해?”

“잘 될 거야.”

승건의 말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채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김지훈이 당당히 걸어 나가긴 했지만 그 이후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승건은 김지훈이 코타키나발루에는 모 병원장의 아내와 함께 왔다고 말해주었다. 채훈을 직접 노린 것은 아니고, 눈에 띄니까 접근하고 본 것 같다고 했다.

“네가 알아봐서 다행이야. 써니가 진짜 잡고 싶어 했거든.”

“운이 좋긴 했어. 얼굴만 보고는 못 알아볼 뻔했거든? 머리도 자르고, 염색도 하고 해서. 그런데 페로몬 향기가 특이해서 구분이 쉬웠어.”

“그래?”

“응. 독특했는데. 너는 못 느꼈어?”

“알파의 냄새는 싫지만, 독특하다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어.”

“마킹 때문인가? 그래도 페로몬에서 식초에 장미가 섞인 향기가 난다면 이상하잖아. 안 그래?”

채훈은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 페로몬이 코를 찌르는 식초 냄새라는 것은 잊을 수가 없었다.

“식초에 장미?”

“응. 식초에 장미. 어, 어? 어? 승건아?”

잘 운전하고 있던 승건이 갑자기 핸들을 꺾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4차선에서 달리던 중이라 별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돌발 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뭐야?”

“식초 냄새라고?”

“그렇다니까. 왜 그래?”

“하아.”

긴 한숨을 내쉰 승건이 핸들에 이마를 박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낯선 반응이라 채훈은 불길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야?”

“다른 알파들 냄새는 어땠어? 최근에 말이야.”

“최근에……. 잘 모르겠는걸. 그냥 결론부터 말해. 승건이 너, 요새 빙빙 돌려 말하는 버릇이 생기는 것 같아.”

“그게, 확실하지 않아서.”

승건이 보기 드물게 망설였다. 그래도 채훈은 그의 얼굴에서 기대와 흥분을 읽었다.

“뭔데?”

“각인 같아.”

“……응?”

“네가 각인한 것 같다고. 검사받아봐야 정확하겠지만, 아마 맞을 거야. 보통 각인하면 대립 형질자의 페로몬을 악취로 느끼니까.”

승건의 목소리에서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지만 채훈은 얼떨떨했다. 각인 증상은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각인을 하게 되면, 각인 상대가 아닌 대립 형질자의 페로몬을 배제한다. 오메가라면 알파의 페로몬을 악취로 느꼈다. 그리고 성적으로 반응하지도 않았다.

이게 각인이라고?

식초에 섞인 장미향을 떠올리던 채훈은 감을 잡지 못했다. 확실히 그건 악취라고 할 만했지만 믿겨지지가 않았다.

형질자에게 사랑의 척도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러나 모든 형질자 커플이 각인을 하는 건 아니었다. 결혼을 하더라도 한쪽만 각인하기도 했고, 혹은 양쪽 모두 죽을 때까지 하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채훈은 승건만 각인한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승건이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또한 그가 마킹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소유욕 때문만이 아니라 불안에 기인한 행동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채훈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승건을 사랑했지만 목숨을 걸 만큼은 아니었다. 그걸 승건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관둬버렸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조바심을 내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 와 각인이란다.

채훈은 당장에 기뻐하지 않았다. 마킹 증상인 것을 오해했다가 실망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승건이 실망하는 것은 막고 싶었다.

“혹시 마킹 때문이 아닐까? 마킹하면 향기가 왜곡되잖아.”

“악취로는 안 느껴질 텐데. 전에도 이런 적 있어?”

“아니. 보통은 술에 물 탄 것처럼 느껴지지.”

“그것 봐.”

마킹 후에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접촉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향수 냄새는 여전했지만 마치 술에 물을 잔뜩 섞은 듯 흐릿했다.

채훈은 만면에 미소를 짓는 승건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각인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뭔가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점심 먹고 병원에 가 보자. 검사 받으면 확실해질 거야.”

“어……. 응.”

승건은 그 자리에서 심정민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 예약을 부탁했다. 그리고는 각인이 맞을 거라고 확신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채훈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믿기지도 않고 이유도 짐작가지 않았다. 승건이 기억을 잃고 마음고생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각인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엄청 원망하고 욕했는데.

채훈은 승건을 슬쩍 보았다. 운전을 하고 있는 옆모습에서는 기분 좋은 기색이 뿜어져 나왔다. 눈꼬리는 올라가 있었고 눈은 웃고 있었다.

덕분에 채훈도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왜?”

“아니.”

계속 쳐다보자 승건이 힐끗 바라보았다. 짧게 눈이 마주치는 사이에도 승건이 활짝 웃는 바람에 채훈은 따라 웃었다.

가슴에 가득 차 있는 행복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슬플 정도였다.

각인의 이유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오후에  할 검사로 각인이 확실해져야 했다. 승건이 활짝 웃을 수 있게 말이다.

* * *

왼손에는 커다란 가방을, 그리고 오른손에는 우산을 든 채 오솔길을 걷던 승건은 비가 내리는 여름 숲을 바라보았다.

호수가 보이는 캠핑장은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특히 주말은 예약을 시작하면 5분이 지나지 않아 모두 매진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주말 내내 비가 내린 탓인지 캠핑장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한 채훈과 백수가 된 승건은 매일같이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산을 탔고, 바다에 갔고,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며, 낚시도 했다. 승건이 다시 일을 시작하면 언제 다시 이렇게 여유롭게 보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열정적이었다.

가장 열을 올린 것은 바로 캠핑이었다. 생존 다큐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는 채훈은 캠핑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돌아오자마자 캠핑을 가야겠다고 이것저것 사 모으더니 바로 예약한 캠핑장을 찾았다.

별다른 조리 기구 없이 샌드위치와 커피만 싸들고 가서 텐트를 쳤다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지만 채훈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그건 승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별장을 두고 뭣 하는 짓인가 싶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별장이 여럿이었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빌릴 수 있었다. 풍광 좋은 곳을 찾아 별장을 구매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캠핑은 캠핑이었다. 적당히 불편하고, 좁고, 아늑한 곳에서 조용히 있다가 돌아올 수 있는 게 매력이었다.

여름 동안 캠핑장을 찾은 것만 벌써 다섯 번째였다. 그 사이에 짐도 하나씩 늘면서 요리도 직접 하기 시작했다. 채훈은 겨울이 되면 캠핑용 미니 난로를 사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중년 사내가 인사를 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짐을 든 채로 좁은 오솔길을 오가야 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서로 배려하는 것이 중요했다.

승건 역시 인사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빠르게 텐트와 터프까지 치는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마른 수건을 가져오는 것을 깜빡하는 바람에 승건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캠핑장 테크에 도착하자 채훈이 의자에 앉아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텐트를 칠 때 비옷을 입기는 했는데, 귀찮다고 후드를 벗은 탓에 머리가 제대로 젖고 말았다.

“수건 여기 있어. 머리 닦아.”

승건이 가방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어, 고마워. 비가 오니까 손이 많이 간다. 그렇지?”

“감기 걸리겠어.”

“이정도야 괜찮아. 핫팩도 가져왔거든.”

채훈이 호주머니 안에서 1회용 핫팩을 꺼내보였다. 승건에게도 필요할 때 쓰라고 하나 쥐여주었다. 준비성 하나는 철저했다.

“배고프다. 얼른 밥 먹자.”

대충 머리를 털어낸 채훈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자취를 오래한 데다 먹는 것에 진심인 채훈은 요리를 잘했다. 캠핑장에서도 그가 모든 것을 주도했고 승건은 그저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채훈이 소고기와 야채를 굽는 동안 승건은 짜장 라면을 끓일 준비를 해 놓았다. 쓰레기도 모두 치웠다.

소고기와 야채는 오래 걸리지 않아 다 구워졌다. 다음은 짜장 라면이었다. 면을 푹 삶아 물을 졸이면서 스프 외에도 올리브유와 소금, 후춧가루, 고춧가루를 추가로 넣었다. 완성된 라면은 기름기가 좌르르 흘렸다.

먹음직스럽게 끓인 라면은 따로 그릇에 옮겨 담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소고기와 야채를 올리는 것으로 완성했다.

요리로 어수선했던 테이블 위가 싹 치워졌다. 짜장 라면이 담긴 코펠과 보온병에 넣어온 달걀국, 그리고 김치가 차려졌다.

“먹자.”

수저를 쥔 채훈이 전투적으로 덤벼들었다. 딱 점심때였다. 바쁘게 움직인 다음이라 시장한 참이었다.

승건은 여전히 입이 짧았다. 미각과 후각은 돌아왔지만 먹는 것으로 즐거움을 찾지 않았다. 강한 향신료는 질색이었고 짜고 매운 음식은 멀리했다. 그래도 맛있는 걸 좋아하는 채훈과 어울리다보니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채훈이 어레인지 한 짜장 라면은 입에 맞았다. 자신이 짜장면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맛있었다. 소고기를 곁들이자 더할 나위 없었다.

“맛있다.”

“그래?”

“중식당에서 먹는 짜장면 맛이 나.”

승건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고 진짜 전문 요리사의 맛이 났다. 면의 생기가 조금 덜하긴 했지만 짜장 맛은 훌륭했다.

두 쌍의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라면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준비하는 것보다 더 빨리 먹어치운 두 사람은 뒷정리까지 잽싸게 끝내버렸다.

그 다음은 느긋한 휴식시간이었다. 한가롭게 캠핑용 의자에 기대어 앉아 따뜻한 커피 잔을 손에 든 채 비가 내리는 숲속의 호수를 바라보는 것은 특별했다.

비가 내리는 숲은 고즈넉함과 소란스러움이 공존했다. 인위적인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빗방울이 나무와 잎에, 돌에, 땅에, 텐트에, 터프에 부딪혀 멋진 화음을 만들어냈다.

“개강도 얼마 안 남았고……. 이 나이 먹고 방학이 끝나는 게 싫을 줄 몰랐어.”

채훈이 서글프게 중얼거리는 바람에 승건은 옆을 돌아보았다. 혼잣말인 듯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훈의 시선이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를 향했다.

단정한 옆모습에 승건은 문득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보충 수업의 마지막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다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는 저마다 열흘 남은 여름 방학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지 고민했다.

수영장, 노래방, PC방, 남태호네 집, 야구장. 고3인데도 놀 땐 놀아야 한다는 친구들은 무모한 계획을 짰다. 그 중에 승건이 함께 어울린 것은 그날 저녁에 간 PC방과 노래방뿐이었다.

그해 열흘 남은 여름방학 동안 승건은 스위스에 갔었다.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히라는 외숙부의 배려였지만, 실상은 한국을 뜨라는 협박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결정된 이후였는데도 외숙부는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이제 죽고 없는 외숙부에 대해서는 별 다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그가 자신을 내버려두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개학을 하고 스위스에서 돌아오자 친구들은 초콜릿을 내놓으라며 달라붙었다. 친구들은 커다란 상자에 들어 있는 초콜릿을 까먹으면서 야구장과 수영장에 갔었던 일을, 그리고 태호네 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오락을 하다가 크게 혼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조금 부러워졌다. 채훈과 함께 공유할 과거의 추억이 있었으면 더 즐거울 것 같았다.

수영은 이미 함께해 봤다. 남태호네 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오락을 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했다.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채훈아.”

“응?”

“우리 야구 보러 갈까?”

“야구? 갑자기 왜? 야구 안 봤잖아.”

“그냥 보고 싶어서?”

과거에 너랑 함께하지 못한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기에는 괜히 쑥스러웠다. 그래도 워낙 다양하게 데이트를 해서 채훈은 이유를 다시 묻지 않았다. 대신에 빠르게 데이트 플랜을 짰다.

“야구라면 유진인데……. 아니다. 유진이랑 혜미 씨랑 응원하는 팀이 달라서, 같이 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차라리 태호랑 같이 가는 게 낫지.”

“둘이서만 가는 게 좋아.”

“그래? 그럼 팀은 굳이 안 따져도 괜찮지? 날씨가 이러니까 돔에 가야겠다. 티켓 구매는 어플 깔아야 하나? 이제 와서 야구라니. 내가 야구 끊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래?”

승건이 기억하기로 채훈은 신유진에게 휩쓸려 야구를 보곤 했었다. 신유진이 열정적으로 응원을 했다면 채훈은 분석을 주로 했다.

“5연속 역전패 하는 거 보고……. 아, 지금 생각해도 열 받아. 야구에 빠지는 거 아니야. 너도 명심해.”

멀리하는 게 좋다고 주의를 주는 채훈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야구를 끊었다더니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꼭 야구가 아니라도 괜찮아.”

“아냐. 괜찮아. 한 번 보는 거니까.”

“방학 끝나기 전에 더 하고 싶은 거 없어?”

“흐음……. 지금은 딱히? 이제는 좀 쉴까? 너무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으니까. 아, 다음 주에 캠핑장 예약해 뒀으니까, 거긴 가고.”

채훈의 말대로 여름 내내 열심히 돌아다니기는 했다. 마치 연애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을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열심이었다.

다음은 무엇을 할까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는 것도 재미있었다. 자신도 채훈도 호불호를 크게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뭐든지 도전해 볼 수 있었다. 이것저것 계획을 잔뜩 세우고도 비가 내린다고 집에서만 뒹굴거리기도 했었다.

정우가 함께 움직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혼자 걷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정우가 넘어지는 바람에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가지고 간 이유식을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정우를 계속 굶길 수가 없어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던 하루가 어느 순간부터 다채로워졌다. 3년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범하고 특별한 추억들이 하나씩 쌓여갔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간질거리고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다음 주 토요일 괜찮지?”

채훈이 슬쩍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어플을 깔았는지 그의 휴대폰 액정에는 좌석 예매 화면이 떠 있었다. 승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채훈이 개학할 때까지는 아무 스케줄도 없었다.

“괜찮아.”

“좋아. 그럼 예매한다.”

“응.”

채훈과 함께한다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크로스 마크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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