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7. 구애】
마지막으로 시험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채훈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주말 동안에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상태가 별로였다.
토요일 밤에 잔뜩 경계하며 떠난 승건은 다음날까지 귀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요일 오전에 승건의 페로몬 문제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심정민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후에는 이수진도 같은 말을 했다.
승건의 결정에 채훈이 끼어들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이대로 이혼을 하게 되는 수순이었다. 어젯밤에도 잠을 못 자고 꽤나 뒤척였다. 억울하고 분해서 결국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도 했다. 얼음으로 부은 눈을 겨우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멍한 머리는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망한 시험은 더욱 망할 예정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영어 시험을 마지막으로 기말고사는 끝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뻗을 일만 남아있었다.
아니,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김경민을 만나야 했다. 김경민이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을 출력한 게 있다면서 잠시 만나자고 했다. 2학기 복학을 앞두고 있는 김경민이 학교에 올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친구들과 만날 일이 있다고 해서 잠깐 만나기로 했다. 채훈의 시험이 끝날 때에 맞춰서 엇갈리는 일 없이 교양관 남문 입구에서 보기로 했다.
채훈은 시험지를 제출하고는 휴대폰을 받아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혹시나 심정민에게서 연락이 온 게 있나 싶어 서둘러 전원을 켰다.
“강채훈.”
채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남자가 복도 창틀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굳어버렸다. 승건이었다.
“어…….”
너무 놀라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최승건이 왜 여기 있어?
언젠가 승건이 학교를 찾아올 수도 있다고는 예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기억을 잃었다. 왜냐는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승건의 모습은 많이 낯설었다. 늘 깔끔하게 빗어 넘기던 머리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각 잡힌 양복이 아니라 밝은색 셔츠와 면바지를 입었다. 학생의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위화감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승건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화보에서 튀어나올 법한 미남이 서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긴 했다.
채훈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지만 의구심을 지우지 못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심정민을 확인하고는 승건과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사고의 충격 때문에 페로몬 혼란을 겪고 있는 거라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좋았다.
“무슨 일이야?”
어쩔 수 없는 애정과 미련, 그리고 체념을 담아, 채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 *
승건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0시 35분. 채훈의 마지막 기말고사 시험은 교양 과목인 영문 독해로, 10시에 시작해서 10시 50분에 끝났다. 시험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학생들이 앞문으로 한 명씩 나오고 있었다.
승건은 채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강의실 앞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는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심정민이 시험 전에 채훈이 고민하지 않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다. 오후에 연락해서 저녁 약속을 잡겠다고 했지만, 승건은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지난 토요일에 자신이 한 행동을 보자면 채훈이 순순히 만나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약속도 잡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무작정 채훈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시선이 한 번씩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승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시선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보다도 승건은 심정민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대학에 직접 찾아갈 거라고 하자 가볍고 캐주얼한 차림을 하라고 조언을 한 것은 그였다.
지난 3년 사이에 승건이 몇 번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외모와 집안 배경이 이슈가 되어 실검에도 한 번 이름이 올라갔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채훈이 일반인이라서 불필요한 이목을 끄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정민의 조언은 적절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흥미 위주였고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승건이 다시 한번 더 손목시계를 확인할 때였다. 마침 채훈이 강의실 앞문에서 걸어 나왔다.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는 채훈을 보며 승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겨우 이틀 사이였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강채훈.”
이름을 부르자 채훈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놀란 표정을 금방 갈무리하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선 채훈의 태도는 분명 경계였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이래?”
승건은 채훈의 상태부터 물었다.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뺨의 붓기는 가라앉았고 멍은 밴드를 붙여서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크 서클이 짙은 눈매는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뭘?”
채훈이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것처럼 되물었다.
“잠을 못 잔 거야? 아니면 감기라도 걸렸어?”
“잠을 설쳤어. 그것보다 너는 어떻게 온 건데?”
승건은 채훈이 화제를 전환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 굳이 캐묻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서.”
“뭔데?”
“여기 말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해.”
전교생이 다 모인다는 교양관 복도는 다음 시간에 강의실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이혼 서류는 오늘이나. 아니, 내일 중에 보내줄게. 합의서는 고칠 거 없이 그대로 할게. 자세한 건 심 실장님에게 전할 테니까. 그럼 됐지?”
어떤 오해를 했는지 채훈이 이혼 서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채훈의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승건이 할 말은 이혼이 아니었다.
“이혼 말고. 다른 거야.”
“다른 거?”
“그래. 장소를 옮겨서―”
“채훈이 형.”
갑자기 채훈을 부르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옆을 돌아보자 낯선 남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남문으로 가고 있었는데, 형이 보여서……요.”
기둥 때문에 뒤늦게 승건을 발견한 남자가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멈춰 섰다. 마치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에 승건은 의아해하다가 남자가 알파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같은 학교에 젊은 알파라면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김경민. 채훈이 우연찮게 재회했다는 알파였다. 승건은 굳이 김경민에 대해 알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니까 자연스럽게 경계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훨씬 젊고 잘생겼다. 체격도 크고 균형도 잘 잡혀서 인기가 많을 스타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김경민이 뻣뻣하게 인사를 했다. 승건은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승건이 말할 타이밍도 주지 않고 채훈이 끼어들었다.
“경민아.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겼어.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아, 괜찮아요. 오늘만 날인가요. 나중에 봐요.”
다시 어설프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김경민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승건은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쟤가 김경민?”
“맞아. 받을 게 있었는데, 오늘도 못 받았네.”
“너무 어리지 않아?”
“열 살 차이 나니까. 어리긴 어리지.”
채훈의 덤덤한 반응에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괜한 시비를 걸었는데 채훈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열 살이나 어린 알파로 갈아타냐고 빈정거린 자신의 유치함에 한심해질 지경이었다.
어린 게 무슨 문제가 있냐고 채훈이 눈빛으로 물었지만 승건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와 얽히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결코 이롭지 않다고, 멀리해야 한다고 머리 한쪽에서 경고가 울리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욕망이 더 앞섰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장소를 옮기자.”
“페로몬 문제는 괜찮아? 가까이 있는 거 안 좋을 텐데.”
“억제제 먹었어.”
“알았어. 따라와.”
별다른 반대 없이 채훈이 앞장서려고 했다. 그제야 승건은 채훈의 뒤에서 다가오는 어떤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는 언뜻 보아도 불안정해 보였다. 채훈의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는 남자의 시선에 불길함을 느낄 찰나, 바지 주머니에서 빠져나오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손에는 어느 순간 버터플라이 나이프가 들렸다.
“강채훈!”
“죽어!!!”
승건은 다급히 채훈을 불렀다. 몇 걸음 떨어져 있어서 팔을 잡아채지를 못했다. 그 사이 남자가 채훈을 향해 돌격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몸을 뒤튼 채훈이 아슬아슬하게 남자가 휘두른 칼날을 피했다. 그리고는 제힘에 휘청거리는 남자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버터플라이 나이프가 복도에 떨어지자 상황을 파악한 학생들 몇몇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채훈은 넘어진 남자의 팔을 꺾어 제압을 해버렸다.
“괜찮아?”
남자의 등을 짓누른 채훈이 승건을 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별것 아닌 일이라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라고 대꾸하지 못한 승건은 문득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
*
채훈을 습격한 남자는 윤상일이었다. 어설픈 습격 자체는 간단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수습은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교양관 복도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목격자였다. 그들의 신고로 경찰이 5분 만에 출동했다. 윤상일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흉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단순한 쌍방 폭행으로 끝날 수가 없었다.
가장 바쁘게 움직인 사람은 심정민이었다. 변호사를 부르고 경찰의 높으신 분을 백으로 쓰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출동한 경찰 앞에서 윤상일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당했다고 헛소리를 했다. 하지만 증거도 목격자도 확실했기 때문에 바로 지구대로 가게 되었다.
지구대에서도 억울하다고 진술을 한 윤상일은 그대로 유치장에 갇혔다. 심정민이 휴대폰으로 마법을 부린 덕분이기도 했지만, 윤상일에게 폭행과 상해 전과가 여럿 있었고 흉기까지 사용한 이유가 컸다.
채훈의 경우 진술만 마치고는 바로 지구대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할래? 이대로 돌아가? 아니면 이야기? 오다가 보니까, 가까이에 카페 있더라. 거기라도 갈까?”
지구대 정문에 선 채훈이 가볍게 물었다. 방금 전에 습격을 받았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채훈을 보며 승건은 속으로만 혀를 찼다.
“병원부터 가자.”
“병원?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얼마 전에 파상풍 주사도 맞았어. 약만 좀 바르면 나아.”
채훈이 들어서 보인 왼쪽 손등에는 길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심각하지는 않고 살가죽이 아주 얇게 긁힌 정도였다. 그래도 피가 꽤 많이 나서 처음에는 손등이 피로 뒤덮였었다. 지혈을 하자 피는 금방 멈추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만 바르고 말 건 아니었다.
“병원은 가야 해.”
“예. 맞습니다. 진단서도 필요하니까요. 가까운 곳에 제가 아는 병원이 있습니다. 거기 가시죠.”
심정민이 승건을 거들고 나섰다. 진단서 따위가 없어도 윤상일을 조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채훈에게는 먹혔다. 채훈은 진단서는 꼭 있어야 한다며 앞장섰다.
*
*
“그래서 조용히 할 이야기가 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크게 한 모금 마신 채훈이 핵심을 물었다. 돌려 말하지 않는 것은 승건의 취향이었다.
승건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에 채훈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양손에는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오른손은 금요일에, 그리고 왼손은 바로 직전에 윤상일에게 당한 것이었다. 채훈은 윤상일을 욕했지만 딱히 무섭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덜덜 떨고도 남을 일이었다.
결국 승건은 병원에서 진단서를 발급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동안 채훈에게 물었다. 무섭지 않느냐고 말이다.
채훈의 대답은 단순했다.
‘어……. 별로 안 놀라서?’
‘안 놀라? 칼에 찔릴 뻔했어.’
‘내가 태권도랑 합기도를 배웠거든. 어렸을 때는 전국 체전에도 나갔는데. 뭐 그것보다는 좀 위험한 일을 겪다 보니 작은 칼 들고 덤비는 거야 안 무서워. 얼마 다치지도 않았고.’
안 무섭다는 채훈의 말은 진짜여서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사건이 별 탈 없이 해결되면 다 괜찮다고 하는 부류 말이다. 승건은 채훈의 무던한 성격보다 그가 말한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납치당하는 걸 막아보기도 하고, 납치도 당해보고.’
‘납치를 당해? 어떻게?’
‘기억이 없으니 불편하긴 하네. 네 사촌인 최……, 최재수? 그 사람이랑 얽혔어.’
‘최진수.’
승건은 넷밖에 없는 사촌들 중 최진수의 이름을 정확하게 언급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 가장 먼저 조사한 것이 친가 사람들의 행적이었다. 승건의 납치에 가담된 숙부들이 모두 박살 난 후, 그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악질적인 것이 최진수였다. 음악을 한다고 하면서 뒤로 마약과 여자를 거래했다.
채훈이 최진수와 얽혀서 납치를 당했다면 분명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속이 쓰렸다.
‘맞아. 최진수. 그리고……, 그 사람 자살했어.’
‘어떻게 된 거야?’
‘많은 일이 있었다고 했잖아.’
말을 아낀 채훈이 애매하게 웃었다. 그제야 승건은 자신이 기억을 잃은 3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질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때 마침 채훈의 진단서를 챙긴 심정민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채훈은 지구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대로 돌아갈지 가까운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눌지 물었다. 카페를 선택한 승건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채훈에게 최진수와 얽힌 일을 물을 것인지, 아니면 그를 만나러 온 목적을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할 말 있다며?”
승건이 입을 다물고 있자 채훈이 재촉했다.
“너랑 자고 싶어.”
자신 앞에 놓인 생수병에는 손도 대지 않은 승건은 목적부터 말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날것의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막 커피를 들이켜던 채훈이 쿨럭거리며 입을 막았다. 토요일 밤에 비슷한 일을 경험했던 승건은 자신의 언행에 아주 조금 반성했다.
한참이나 기침을 하던 채훈은 벌게진 얼굴을 하고는 승건을 노려보았다. 화가 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순전히 기침 때문인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거, 쿨럭. 그거 허리 아래 문제지?”
“맞아.”
간단하게 긍정하자 채훈이 붉은 입술을 한 번 짓씹었다. 이번에는 분명 화가 난 행동이었다.
“갑자기 왜?”
“각인 때문에. 심 실장님이 말했을 텐데, 페로몬 조절에 문제가 생겼어.”
“그거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면 돼. 내가 빈 객실에 페로몬을 풀어 두고 사라진 다음에, 네가 객실에 들어가는 거야.”
“아니. 나는 섹스를 원해.”
승건은 직접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했다. 아직 한낮이었다.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섹스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성적인 매력을 느낀 상대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채훈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얽히는 것보다는 맺고 끊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았다.
인상을 쓴 채훈이 눈에 힘을 주었다.
“싫어.”
“싫다고?”
“그래.”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니까.”
단호한 대답에 승건을 헛숨을 삼켰다. 그들은 법적으로야 결혼을 한 사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모르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걸 강조한 것은 승건 본인이었다.
확실한 거절 의사에 승건은 입매를 굳혔다.
“맞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 이런 가정은 해 봤어? 섹스가 강렬한 충격이 되어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거 말이야.”
“……?!!”
“어때?”
승건은 자신이 지독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감정적인 교류보다는 거래가 되도록 하는 게 맞았다.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던 채훈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병실에서, 그리고 썬룸에서……. 너는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았어.”
“그저 가능성뿐이긴 하지.”
이번에도 채훈은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눈빛에 떨리는 뺨은 그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승건은 가만히 기다렸다. 입술을 한 번 짓씹은 채훈이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좋아. 대신에 조건이 있어.”
“뭐야?”
“기억이 안 돌아오면 이혼해. 앞으로 페로몬 접촉은 심 실장님이 있는 자리에서 간접적으로만 하고. 다시는 섹스 안 해.”
눈에 힘을 준 채훈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아주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이었다. 승건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몸이 달아 있었다. 이 열이 꺼지면 어떻게 할지는 다음의 문제였다.
“그렇게 해.”
“좋아. 일어나자. 네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가.”
“지금?”
“이런 건 빨리 해치워 버려야지. 안 그래?”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앞둔 학생처럼 채훈이 각오를 다졌다. 승건은 그게 신경에 거슬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서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채훈이 다시 재촉했다. 평온하기까지 한 채훈의 표정에서 승건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그게 안타까웠다.
*
*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은 승건은 낯선 감각에 인상을 썼다. 초조하다 못해 입이 말랐다. 그리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다 못해 열이 올랐다.
이게 모두 긴장 증상이라는 사실이 승건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송이도 아니고 섹스 상대를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승건은 탁자 위에 놓인 위스키병을 보고 뚜껑을 열었다. 호텔에 도착한 채훈이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독한 술이 필요하다고 주문해놓은 것이었다. 독한 술이 주는 효과 중의 하나가 긴장 완화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마셔야 했다.
하지만 위스키 냄새가 독했기 때문에 승건은 그대로 포기했다. 예전에는 물처럼 마셨지만 후각이 돌아오니 냄새도 맡기 싫어졌다.
“쯧.”
가볍게 혀를 차는데 욕실 문이 열리고는 샤워가운만 입은 채훈이 나타났다. 패드가 떨어진 얼굴에는 멍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손등 위에 붙여 놓았던 밴드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승건은 인상을 썼다. 멍든 얼굴이 애처로운 것과 별개로 젖은 머리와 상기된 뺨이 시선을 빼앗았다.
“술이 왔네.”
“그런데 술은 왜?”
“내가 술을 마시면 과감해지거든.”
거침없이 다가온 채훈이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위스키의 독한 향이 승건을 괴롭혔다. 제대로 맛과 향을 느낀 술이라고는 써니가 권한 와인이 전부였다. 와인은 향기가 나쁘지 않았지만 위스키는 달랐다.
승건이 인상을 쓰거나 말거나 맞은편 의자에 앉은 채훈이 본격적으로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말도 없이 물처럼 위스키를 들이켜는 채훈은 거침없었다. 조금씩 부어 마시던 양이 어느새 한 잔을 꽉 채워갈 정도가 되자 승건이 나섰다.
“그거 독해.”
“알아.”
“그렇게 마시면 급성으로 알코올 쇼크가 올 수도 있어.”
“크흡흐흐흐.”
다시 잔에 입술을 대려던 채훈이 고개를 돌리고는 웃음을 흘렸다. 어깨까지 들썩이는 모양새가 진짜 웃긴 모양이었다.
“왜?”
“처음에도 비슷한 말을 했어. 그때는 알코올 홀릭이 아니냐고 물었지. 그래도 이번에는 날 좀 걱정해주는 것 같아서 신기한데?”
“……?”
승건은 기억에도 없는 자신의 과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미간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화내지 마. 긴장 풀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너와, 그때의 너는 정말 많이 닮았어. 그렇지. 시기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사람이긴 해.”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채훈이 빈 잔을 다시 채웠다. 그러나 마시지 않고 한참을 들고 노려보기만 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승건은 술에 젖은 채훈의 붉은 입술을,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을, 상기된 뺨을, 그리고 잔을 쥔 손과 손목에 시선을 한 번씩 두었다. 긴 눈꼬리 끝이 살짝 올라갔는데도 처연한 인상을 주었다.
“더 마시면 진짜 쇼크가 오긴 오겠다.”
혼잣말을 한 채훈이 잔을 내려놓고는 승건을 바라보았다.
“술 냄새가 날 거야.”
“지금도 나.”
“진짜 해?”
한 번 더 확인하는 채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거절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승건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래.”
“그렇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채훈이 다가와 의자 손잡이를 짚고 허리를 숙였다. 물러날 새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위스키 냄새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 그리고 잔 떨림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승건은 받아들인 정보를 음미할 새도 없이 혀를 밀어 넣었다. 키스는 뜨거웠다. 겨우 혀를 섞은 것뿐인데도 미친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사막을 헤매다가 물을 마시는 기분으로 타액과 숨결을 삼켜댔다.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나려는 채훈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도망가지 마.”
승건은 입술을 떼고 으르렁거렸다. 채훈이 눈빛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흔들렸다.
자신이 미친 것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상상 각인의 부작용으로 오메가의 페로몬을 역하게 느꼈다고 해서 섹스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즐길 때는 즐겼다. 하지만 이건 아예 달랐다.
키스만으로 이미 다리 사이가 뿌듯하게 당겨왔다. 채훈의 숨결이 뺨에 닿는 것만으로도 뒷목이 오싹하게 굳어버렸다. 진짜 애송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승건아?”
채훈의 부름에 머리로 깨달은 것과 별개로 본능이 움직였다. 어느 순간에 페로몬이 침실을 가득 채웠다.
승건은 다른 알파들과 대립 할 때가 아니라면 일부러 페로몬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러트 때조차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제멋대로 튀어나온 페로몬이 채훈의 몸을 뜨겁게 녹아내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단숨에 이해해 버렸다.
승건은 자신의 페로몬 향기가 나무와 물의 냄새가 난다는 것을 열흘 전에야 알았다. 페로몬의 농도가 진해지자 채훈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상기된 뺨과 일렁이는 눈빛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승건은 다시 입술을 맞대며 혀를 빨았다. 이번에는 채훈의 페로몬 향이 승건을 감쌌다. 따스한 꽃향기는 열병을 앓는 듯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뜨겁고 다디단 키스를 하며 몸을 일으킨 승건은 채훈을 안아 들었다. 이 열을 가라앉히려면 그를 가져야 했다.
* * *
―정용수 국장이 빼돌리려는 것을 막았습니다. 정 국장이 윤상일의 아버지와 고향 친구에다가 초중고교 동창인데, 윤상일이 일으킨 폭행 사건을 정 국장이 대부분 막아준 것 같습니다.
심정민의 설명에 승건은 혀를 찼다. 칼을 들고 사람을 찌를 정도면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억울하다고 헛소리를 하며 당당하게 굴던 이유가 있었다. 경찰청 국장이면 아주 높은 직급이었다. 그래도 배후 싸움에서 자신이 질 일은 없었다.
승건이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채훈 앞에서 윤상일을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무조건 실형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말씀하시죠.”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던 승건은 뭐냐고 물었다. 심정민이 망설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7월 초에 두 분이서 코타키나발루로 휴가를 가실 예정이었습니다. 취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와 관련해서는 큰 사장님과 이야기하겠습니다.”
“휴가요?”
―예.
코타키나발루면 승건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동남아시아에 있는 휴양지로 일몰이 아름답다고 했다.
“취소하지 말고……, 아니다. 취소하는 게 낫겠네요.”
―도련님?
“저는 모르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심정민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자신도 굳이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휴가를 가야 한다면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정한 곳이 아니라 새로운 휴양지를 고르는 게 맞았다.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낸 채훈은 생수병을 챙겨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 위에는 채훈이 퀭한 눈을 하고 앉아 있었다. 단 하루 만에 채훈의 얼굴은 반쪽이 된 상태였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그랬다.
어제 오후, 섹스 도중에 페로몬에 취한 채훈에게 히트가 왔다. 격렬한 섹스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아침이 되어서야 기절하듯 쓰러진 채훈은 억제제를 먹고 수액을 맞은 다음에 12시간 가까이 죽은 듯이 잤다.
제정신을 차린 것은 조금 전이었다. 오후 8시가 넘은 시각을 확인한 채훈은 목이 마르다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물.”
“어……. 고마워.”
생수병을 받은 채훈은 뚜껑을 따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승건은 말없이 생수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는 돌려주었다.
지친 모습으로 물을 마시는 채훈의 모습에서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바람에 승건은 살짝 인상을 썼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인데도 무척이나 익숙하다 못해 애틋하기까지 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감정일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윤상일은 어떻게 됐어?”
채훈에게 저녁은 뭘 먹겠냐고 물어보려던 승건은 잠시 멈칫했다.
“갑자기 그건 왜?”
“심 실장님이랑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서. 방음이 별로였어.”
“어떻게 해줄까?”
눈앞에서 치워 버리기로 결정하긴 했지만 방법은 정하지 않았다. 채훈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승건은 마치 제 능력을 뽐내며 과시하는 수컷 새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어제부터 애송이처럼 굴고 있는 게 살짝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학교에서만 안 만나면 돼. 그 인간이랑 같이 학교 다닐 수는 없잖아. 칼을 휘둘렀으니까, 합의를 안 하면 제적당하지 않을까?”
“감옥에 갈 거야. 전과가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채훈이 다시 물을 마시면서 잠시 말이 끊겼다. 승건이 침대 끝에 걸터앉자 눈이 마주쳤다. 채훈이 물을 마시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할 말 있어?”
“기억은 안 돌아왔어.”
“어……. 알아. 이혼 서류는 돌아가는 대로 보내줄게.”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혼을 하자는 채훈은 미련이 없어 보였다. 지친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정말 마음이 떠난 것인지, 아니면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인지 승건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이혼 말고.”
“응?”
“나랑 사귈래?”
“……?!!”
채훈이 생수병을 쥔 채 눈을 크게 떴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여서 승건은 설핏 웃었다.
“사귀자고.”
“갑자기 왜?”
“네가 마음에 들어서.”
“……흡흐흐흐흐흐.”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훈이 고개를 돌려 소리 죽여 웃는 바람에 승건은 잠시 당황하다가 곧 평정을 찾았다. 저 반응은 이미 한 번 보았다. 아마도 기억을 잃기 전에 자신이 비슷한 말을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너를 몰라. 결혼한 기억도 없고. 그래도 네가 내 취향인 건 알겠어.”
“그래서? 섹스하자고?”
“아니. 사귀자고. 결혼을 전제로 말이야.”
“……?!!!!”
승건은 다시 굳어버린 채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몸만 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사실 그게 더 이성적인 판단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고 한 것은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채훈과의 섹스는 자신이 알던 그것과 달랐다. 미칠 것처럼 안달이 나면서 숨이 막혔다. 열에 취하다 못해 자신이 아닌 기분이 드는 것도, 꽉 찬 충족감에 벅찬 것도 처음이었다. 낯설고도 황홀한 느낌이었다.
각인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페로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충동적이고도 간지러운, 컨트롤 되지 않는 감정 때문에 질 나쁜 덫에 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엉망이 된 채훈의 얼굴을 보고 분노하고, 써니의 도발에 넘어간 것은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끌리는 것을 애써 부인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기억을 잃기 전에 자신이 채훈과 무슨 사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각인을 한 것이 채훈을 멀리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저 지금 자신이 그를 원할 뿐이었다.
“사귀다가……, 사귀다가 틀어지면 이혼하는 거야?”
한참을 얼어 있다가 정신을 차린 채훈이 또다시 이혼을 언급했다. 승건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이혼하고 싶어?”
“최악을 가정하는 게 마음 편해서. 사실, 우리 처음에는 잘 안 맞았거든.”
“결혼은 어떻게 했는데.”
“음……, 많은 일이 있었고. 서로 맞추려고 노력했어.”
승건은 채훈의 입에서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시간을 같이 보내면 추억이 쌓이는 법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기본은 같은 사람이니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거야 자신도 할 수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과 경쟁해야 하는 게 웃겼지만, 그래도 질 생각은 없었다.
“사귀다가 맞지 않으면 헤어져야겠지. 맞출 수 있는 데까지 맞춰보고. 그러면 되는 거지?”
승건이 동의를 구하자 채훈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잘게 떨리는 채훈의 어깨가 심상치 않았다. 우는 건가 싶은데 채훈이 스스로 자신의 양 뺨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세게 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 사귀자. 사귀다가 안 되면 헤어지고.”
환하게 웃고 있는 채훈에게서 승건은 슬픔을 읽었다. 어째서인지 심장에 바늘이 꽂히는 것 같았다. 승건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채훈의 뺨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가 뗐다.
“어……, 나 지금 못 해.”
둥그렇게 눈을 뜬 채훈이 산통 깨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승건은 한숨을 삼켰다. 못 할 수밖에 없긴 했다. 채훈은 12시간을 자기 전에 12시간을 넘게 자신과 뒹굴었다. 자신도 지금은 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매너 없는 인간은 아니야.”
“어, 음. 그래.”
떨떠름한 대답과 오묘한 눈빛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승건은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을 욕했다.
*
*
승건은 채훈의 저녁을 챙겨 먹이면서 서로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승건은 집을 나오기로 했다. 서로 천천히 알아가는 게 좋다는 판단에 채훈도 긍정했다.
저녁을 먹고 기운을 차린 채훈은 집으로 돌아갔다. 승건이 직접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밀폐된 곳에서 단둘이 있지 않겠다고 채훈이 적극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데이트할래?”
호텔 리무진에 타기 전에 채훈이 말했다.
“데이트?”
“응. 데이트.”
승건은 ‘데이트’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생각해내지 못했다. 데이트란 교제를 위해 만나는 것을 말했다.
“그래. 하자.”
“어디에 갈지는 내가 정할게. 메시지 확인해. 나 이제 간다. 나중에.”
가볍게 손을 흔든 채훈은 그대로 리무진을 타고 사라졌다. 승건은 리무진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확인하고는 객실로 돌아왔다.
승건은 거실 한 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H호텔의 방갈로 객실은 단독 주택과 비슷했고 소음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그런지 방갈로가 텅 빈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반짝거리던 공기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사람이 한 명 사라진 것뿐인데도 불구하고 적막감이 감돌았다.
어제까지는 혼자라도 아무렇지 않았다. 미국으로 가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혼자 살기 시작할 때부터 쭉 그랬다.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사람이 차근차근 미쳐 가는 게 이런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게 또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으니 웃겼다.
“어쩌나.”
데이트란다. 승건은 자신이 데이트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인생 헛살았나 싶다고 웃어넘겼다. 이제부터 채훈과 하는 것은 모두 다 처음이 될 것이다.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승건은 식탁 위에 두었던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무리를 하고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써니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문득 그녀가 가지고 있는 팔찌가 떠올랐다.
토요일에 그렇게 와인 바를 나오면서 팔찌를 챙기지 못했었다. 일요일에 써니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는 신경을 끊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승건은 써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나. 오빠가 전화를 다 하다니? 오빠. 토요일에 시간 있어? 내가 참석하는 모임이 하나 있는데, 오빠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거기 저어엉말 중요한 사람들이 오거든. 오빠도 좋아할 거야.
“팔찌 가지고 있지?”
―가지고야 있지. 그런데 왜? 마음대로 하라며?
휴대폰 너머에서 울리는 유쾌한 목소리에 승건은 입매를 당겼다. 써니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때는 길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리했다.
“돌려줘.”
―줬다 뺏기야?
“내 거야.”
―그럼 채훈 씨한테 줄 거야? 집 나왔다며? 헤어지는 거 아니었어?
승건은 써니의 정보력에 혀를 내두르는 것과 별개로 출처가 궁금해졌다. 내부 사정이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디서 들었어?”
―당연히 채훈 씨지. 우리 친구거든.
범인을 알아낸 승건은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우는 모습을 보겠다는 주제에 친구란다.
“심 실장님 편으로 보내도록 해.”
―그럼 토요일에 나랑 같이 움직이는 거다? 콜?
“욕심부리지 마. 선을 지켜.”
―에이, 좋다 말았네. 그래서 팔찌는 어떻게 할 건데?
승건은 대답 없이 통화를 끝냈다. 해괴하게 생긴 팔찌는 채훈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반, 써니에게 악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반이었다.
딱히 자신에게 손목 페티시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있다고 해도 그 팔찌는 아니었다.
[데이트 날짜는 목요일 어때?]
[점심 먹고 미술관 가자.]
[점심은 중식. 여기 맛있어.]
[미술관은 여기. 중식당에서 차로 40분 거리야. 내가 운전함.]
써니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채훈에게서 메시지가 쏟아졌다. 식당과 미술관의 지도까지 첨부되어 있는 메시지를 읽은 승건은 쓴웃음을 삼켰다.
미술관 관람은 스포츠를 제외한 자신의 몇 안 되는 취미 생활 중에 하나였다. 채훈이 바로 미술관을 지목한 것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기분이 묘해졌다. 거기다 마치 친한 친구인 듯한 말투가 글자로 보이는 게 아니라 소리로 들렸다.
[네가 좋아할 곳을 골랐어. 마음에 안 들면 딴 데 가도 돼.]
마지막 쐐기까지 완벽했다. 이래서야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말려든 기분으로 승건은 답장을 보냈다.
[이번 데이트는 네게 맡길게.]
[알았어.]
채훈의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지만 승건은 메시지창을 닫지 않았다. 창의 위쪽으로 채훈과 오간 수많은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은 승건은 메시지창의 글을 거슬러 천천히 읽어갔다. 정우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사진은 거의 다 정우의 것이었다.
그 외에는 도착한다, 도착했다, 출발했다. 어디냐 등의 상태와 위치를 묻고 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결혼한 부부다운 메시지도 있었다.
가족의 생활감과 서로의 애정이 묻어나는 메시지는 3개월 전의 어느 시점으로 더 이상 스크롤이 올라가지 않았다. 첫 메시지가 [휴대폰을 바꿨다]인 것을 보면 나머지는 다른 휴대폰에 있을 것 같았다.
메시지창을 닫은 승건은 욱신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3개월 동안의 기록을 모두 보았지만, 머리만 아플 뿐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기억은 공백 없이 쭈욱 이어졌다. 고교 3년 동안의 기억만이 없는 스물아홉 살의 남자였다.
하지만 진실은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두 살 사이에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고, 지금은 그 사실을 잊어버린 서른두 살의 유부남이었다.
많은 것을 잊어버렸는데도 그걸 찾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가진 적이 없으니 그것이 얼마나 좋고 원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 도착했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
채훈에게서 온 메시지에 승건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기억에도 없는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승건은 지금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려는데 손가락이 허공에서 헤맸다. 지금껏 누군가랑 사귀어 본 적도, 그래서 사귀는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도 없었다. 이만큼이나 살아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것도 또 오랜만이었다.
승건은 메시지창을 한참이나 노려봐야 했다.
* * *
목요일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주차장을 걸으며 승건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슴은 이상할 정도로 간지럽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회색빛 하늘조차 분위기 있어 보일 만큼 들떠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신기했다.
채훈과의 데이트 역시 그랬다. 점심으로 중식 코스를 먹으면서 승건은 자신이 짜장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식당과 메뉴를 선정한 채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일부러 노린 것은 분명했다.
미술관 관람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도 최대 규모라는 미술관은 여러모로 승건의 마음에 들었다. 그림도 조각도 모두 수준급이었다.
한 바퀴 둘러보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다 보니 휴대폰을 자동차에 두고 내렸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심정민이 채훈에게 전화해서 승건의 위치를 묻고 나서야 휴대폰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결국 채훈을 두고 직접 휴대폰을 찾으러 움직인 승건은 자신이 들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사귀는 것은 처음이었다. 데이트라고 명명된 만남이 이렇게 말랑말랑한 분위기일 줄은 몰랐다. 어쩌면 채훈이 자주 웃은 탓일 수도 있었다. 별것 아닌 일에도 채훈은 다양한 느낌으로 웃었고, 그러면 분위기는 더 말랑하고 부드러워졌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가슴이 간지러운데, 그게 또 기분이 좋았다.
“내가 미친 거지.”
승건은 스스로의 상태를 시니컬하게 진단했다. 그래도 여전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휴대폰을 챙겨 채훈을 찾았다.
채훈은 그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 수묵화 전시실 앞에 서 있었다. 평일에 비가 내려서 그런지 사람이 얼마 없었다. 넓은 공간에 채훈 혼자 서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아서 괜한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운동을 오래 했다는 채훈은 자세가 좋았다. 데이트 때문에 힘줘서 차려입었다고 자랑해도 좋을 정도로 몸매도 늘씬했다.
반사적으로 며칠 전에 있었던 섹스가 떠올랐다. 채훈의 복근은 단단했고 팔다리는 길었다. 헐벗은 상태로 자신 아래에서 헐떡이는 모습은 도착적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할 생각은 아니지.
승건은 멋대로 뻗어나가는 회상과 상상을 멈췄다.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면 미쳤다고 욕을 했을 것이다.
가볍게 숨을 들이쉰 승건은 천천히 채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채훈은 인기척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감상에 빠져있었다. 별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수묵화였다. 그러나 예술품에게서 받는 감동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었다.
일부러 기척을 내며 옆에 서자, 그제야 채훈이 승건을 알아보았다.
“왔어?”
“저 그림이 마음에 들어?”
“제일 좋아하는 거야.”
“소장할 생각은?”
승건은 그림이 아니라 채훈을 보았다. 슬쩍 이쪽을 올려다보는 채훈의 입가에는 애매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사귀자고 한 이후로 채훈은 더 이상 기억을 잃기 전의 승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데이트 코스로 중식을 먹고 미술관을 선택한 것은 승건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채훈이 굳이 언급하지 않았기에 승건도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이렇게 웃어버리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아. 미안. 그러려고 한 건 아니야. 예전 이야기 하면 싫어하는 것 같아서.”
“또 같은 소리를 했던 거야?”
“비슷해. 이제 됐어. 커피 마시러 가자.”
왠지 이 상황조차 기시감이 들었지만 승건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대신에 채훈에게 이끌려 미술관에 딸린 카페로 향했다.
*
*
쓴 커피가 취향이 아닌 승건은 탄산수를 주문했다. 천천히 목을 축인 다음에 시커먼 커피를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채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낮은 탁자 덕분에 편안한 의자에 앉은 채훈의 모습을 정면에서 살피기 좋았다. 흰 셔츠, 검은 바지, 깔끔한 구두는 모두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왼쪽 손목에 자리 잡은 손목시계에 눈이 자꾸 갔다.
다시금 써니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손목 페티시고 채훈에게 손목시계를 잔뜩 선물했다고 했다. 아마 지금 채훈의 손목에 있는 것도 그것일 터였다.
승건은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참았다. 채훈과 함께 산 것은 1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도 아침을 먹으면서 얼굴을 맞댄 게 전부였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억을 잃기 전에 자신이 준 것들이 승건을 채우고 있는 꼴을 보니 속이 쓰렸다. 저 시계를 당장에 내던져 버리고 지금의 자신이 직접 고른 것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열일곱 살의 기억을 가지고 눈을 떴던 스무 살 때는 이러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에게 공격성을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저 그림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왜 소장을 안 한 거야?”
승건은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면 소장해서 자주 보는 게 나았다. 작품의 가로 길이가 길어서 보관에 까다로움이 있기는 해도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승건은 저 그림을 채훈의 손에 쥐여줄 생각이었다. 그래서라도 과거의 자신을 이기고 싶어 하는 게 유치했지만, 뭐든 인상을 남겨야 했다.
“별로……, 가지고 싶지 않아서?”
채훈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넋을 놓고 봤잖아.”
“둘 자리도 없고, 관리를 잘할 자신도 없고……, 그리고 여기서 보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넓은 벽이랑 잘 어울리기도 하고.”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것은 어떻게든 가지려고 하는 게 사람의 본능이었다. 세계적인 부자들이 값비싼 미술품을 사들이는 이유도 비슷했다. 승건 역시 아버지의 유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면서 소비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넋 놓고 바라볼 정도로 좋아하는 그림을 한적한 곳에서 한 번씩 보는 것이 더 좋다는 채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은 상설 전시관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미술관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교체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팔릴 가능성도 컸다.
태천 김산은 일제 강점기부터 반세기가 넘게 한국화를 그려온 미술계의 거장이었다. 오랜 세월 활동을 한 만큼 작품은 많았지만 유명세 탓에 인기도 많았다. 특히 완숙기에 접어든 1960년대에 그린 작품은 시장에 잘 나오지 않았다. <촌로산수>는 김산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공개 전시를 하고 있었다.
심정민의 설명을 듣고 승건은 당장에 현봉 미술관과 접촉했다. 창업주가 아꼈다는 그림은 돈으로는 살 수 없었다. 대신에 현재 미술관장이 탐을 내는 물건을 하나 넘기는 것으로 거래를 끝냈다.
그러나 승건은 당장에 그림을 채훈에게 들이밀지 않았다. 물욕이 적은 편인 채훈은 가끔씩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가끔씩 보는 게 훨씬 좋다고 했다. 그래서 그림은 현봉 미술관에 위탁 전시를 맡겼다. <촌로산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지만 이미 채훈의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은 두통과 함께 찾아왔다. 승건은 인상을 쓰며 머리를 짚었다.
기억은 예고도 없이 불현듯 찾아왔다. 악몽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회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기억을 되찾는 게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머리 아파?”
미간을 구기고 있었더니 채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얼굴은 취향이었다. 살짝 끝이 올라간 눈꼬리도, 그러면서 커다란 눈도 그랬다. 채훈은 차가운 얼굴의 미남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표정이 풍부해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은 자신은 정말 그에게 빠져있었다. 그림을 손에 넣기까지 들인 시간과 공이 엄청났다. 그럼에도 그저 채훈이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티를 내지 않았다.
한때 자신의 것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애정은 낯설었다. 납득이 가지 않으면서도 속이 간지러웠다.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미국에서 상상 각인의 부작용에 시달릴 때는 원인이라도 찾고 싶긴 했다. 지금은 채훈과 있었던 많은 일들이 궁금하긴 했지만 절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채훈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너는 내가 기억이 돌아오기를 바라?”
예기치 못한 직설적인 질문은 사람의 허를 찌르기 마련이었다. 채훈이 눈을 둥그렇게 뜨다가 얼굴을 굳혔다가, 마지막으로 픽하니 웃어버렸다.
“당연하지. 3년 동안 내 남자로 만들어 놨더니, 홀랑 다 까먹고. 성격도 그때로 돌아가 버렸고.”
채훈이 가볍게 말하는 바람에 승건 역시 그런 건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때? 기억이 돌아왔으면 해?”
“기억을 되찾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겠지만. 글쎄……, 꼭 아니어도 상관없어.”
되돌아온 질문에 승건은 숨김없이 진심을 말하며 채훈을 보았다. 다행히 그는 실망스러워하지 않았다.
“너는 기억이 돌아오면 화를 낼 거야.”
“뭐?”
“엄청나게 화를 낼 거라고.”
“무슨 소리야?”
“그렇다고.”
채훈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승건은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채훈의 이름을 불렀다.
“강채훈.”
“넌 화를 낼 거야. 확실해.”
“내가 왜?”
채훈이 대답 대신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이었다. 승건은 채훈이 삼킨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기억을 되찾았는데, 채훈에게 화를 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같이 자서? 어차피 같은 사람인데?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다가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기억을 잃기 전에 자신은 채훈에게 푹 빠져 있었다. 어쩌면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히 할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소유욕도 강했다. 만약에 지금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불같이 화를 내고도 남았다. 기억을 되찾으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만약에 말이야. 그러니까 만약에,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화내지 마. 필사적이었으니까.”
슬며시 앞으로 몸을 숙인 채훈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였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채훈의 얼굴이 조금 더 크고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웃음기가 묻어나는 눈빛도, 입꼬리가 올라간 윤기 나는 입술도, 하얗고 긴 목덜미도 모두 근사하기만 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속수무책으로 빠진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그 수순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또 싫지 않은 게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약속 못 해. 화날 수도 있을 것 같거든.”
“야. 그러기가 어디 있어? 너도 책임져야지. 적어도 반은. 그래. 반만 화를 낸다고 해. 그래야 마음 좀 놓지.”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채훈을 보며 승건은 진심으로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고 하던 채훈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매력적인 능력이었다.
사람의 미래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승건은 자신이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을 닮은 아들이 생길 거라는 것도, 그리고 두 번이나 기억을 잃을 거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좌절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특별했다.
“절반은 책임져.”
채훈이 강하게 책임지라고 종용했다.
“그래. 절반은 책임질게.”
“맹세해.”
“맹세해. 절반은 내 책임이야.”
승건은 채훈의 말을 따라 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채훈이 활짝 웃었다.
“비 그쳤다. 이제 갈까? 저녁 먹기 전에 서점 들렀다 가자.”
“살 게 있어?”
“내가 서점가는 걸 좋아해. 원래는 잘 안 갔는데, 수능 준비한다고 문제집 사러 다니다가 서점 구경이 취미가 되었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멋진 목소리로 설명하는데 재미없어도 재미있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승건은 채훈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몸을 기울이며 눈짓을 했다. 그러자 채훈이 순순히 몸을 숙였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승건은 채훈의 뺨에 입술을 댔다.
굳어버린 채훈의 얼굴에 곧 당혹과 부끄러움이 번졌다. 승건은 다시 한번 뺨에 입술을 댔는데, 채훈이 놀라며 뒤로 몸을 물렸다.
“뭐야?”
“왜? 싫어?”
“아니. 그러니까……. 공공장소에서 그러지 마.”
얼굴을 붉힌 채훈이 입술이 닿은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술을 마시면 과감해지는 녀석이 스킨십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는 법이었다.
“알았어. 공공장소에서는 피할게.”
말의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채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그러다 곧 샐쭉하니 웃었다.
“그럼 됐어. 이제 가자.”
채훈이 여전히 발그레한 뺨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건은 채훈을 따라 움직였다. 아직 데이트가 끝나지 않았다.
*
*
차가 쇼핑몰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하필이면 퇴근 시간과 겹쳐버렸다. 갑자기 늘어난 차량 때문에 도로는 순식간에 주차장처럼 변해버렸다.
“아슬아슬하겠어. 늦을 거라고 연락을 해야 하나.”
채훈의 목소리에 승건은 옆을 돌아보았다. 차가 막히는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채훈이 손끝으로 핸들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쇼핑몰에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차가 너무 밀리는 바람에 서점은 나중에 가기로 하고 레스토랑부터 가야 할 것 같다고 계획을 변경한 채훈이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약속이나 시간엄수에 약간의 강박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승건의 눈에 뭔가가 걸렸다. 채훈의 귀 뒤에 검은 보풀이 붙어 있었다.
그 때 마침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채훈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귀를 만져도 돼?”
가만히 두면 작은 보풀 정도야 날아갈 테지만 저도 모르게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런데 채훈의 반응이 격렬했다.
“응? 왜? 아니. 안 돼. 나 운전하고 있어.”
“네 귀에 가느다란 실이 붙어 있어서 그래. 떼고 싶은데, 갑자기 만지면 놀랄 것 같아서.”
“그럼 떼― 아냐. 내가 알아서 할게.”
승건이 손을 뻗기도 전에 채훈이 스스로 재빨리 귀를 털어냈다. 몇 번이나 털고 문지르기까지 하자 작은 보풀은 사라지고 없어졌다.
“됐지?”
채훈의 빨개진 귀를 보며 승건은 아니라고 하려다가 참았다. 그것보다는 다른 게 눈에 밟혔다.
“얼굴 빨개졌어. 목까지도.”
자신도 모르게 유치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귀는 물론이고, 얼굴과 목까지 붉어졌다. 채훈은 피부가 흰 편이었고 셔츠까지 밝은 색이라서 붉어진 게 티가 잘 났다.
“너 성격 나빠.”
채훈이 이쪽을 보지도 않고 부루퉁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승건은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보다는 채훈을 상대로 계속 유치하게 굴고 있는 게 큰일이었다.
거기다 얼굴을 붉힌 채 뚱한 표정을 짓는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는 것도 문제였다.
“그럼 뺨은 만져도 돼?”
“왜 자꾸 그래?”
“공공장소가 아니잖아.”
“공공장소가 아니기는. 도로 위거든요.”
“차 안이잖아. 썬팅도 진하고.”
반쯤 놀리는 것이긴 했지만, 한번 의식하자 정말 만지고 싶어졌다. 붉게 변한 귀 끝도, 부드럽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뺨도, 잘생긴 코도 건드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튀어나왔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진짜……. 참으라고. 그러다 사고 나. 내가 운전 경력이 6개월밖에 안 된다고 말했던가?”
“그럼 운전 끝나고?”
“정신 사납게 흐즈믈르고.”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린 채훈이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에는 신호를 받아 좌회전에 성공했다. 거기서부터 쇼핑몰까지는 막힘없었다.
승건은 운전 경력이 6개월이라는 채훈이 비장하게 주차를 끝내는 것을 노렸다가 뺨에 입맞춤을 했다. 결국 채훈에게 한 소리 듣고는 차에서 내려 나란히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서점을 들를 여유는 없었지만 레스토랑에는 늦지 않게 갈 시간이 있었다.
“아. 휴대폰.”
엘리베이터를 코앞에 두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휴대폰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두고 왔나 보다. 가지러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채훈이 먼저 훌쩍 움직였다. 승건은 주인에게 기다려 명령을 받은 개가 된 기분으로 제자리에 서서 채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서 대형 쇼핑몰 지하 주차장은 차량들의 끊임없는 진출입으로 혼란스러웠다. 승건은 차량 사이를 지나치는 채훈의 모습에 기시감을 느꼈다.
하와이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채훈을 뒤쫓았을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지하 주차장의 폐쇄적인 공간과 쾌쾌한 매연 냄새는 하와이와 전혀 달랐다. 그래도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승건은 채훈을 따라가려고 한 발 앞으로 움직였다.
그 때였다. 채훈의 반대편에서 뛰어오던 어린 남자아이가 앞으로 넘어졌다.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은 뒤쪽에서 유모차를 밀고 오고 있었다.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면 괜찮았겠지만, 넘어진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넘어진 자리가 차량이 다니는 통로였다.
지하 주차장이라 차량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차체의 높이 때문에 넘어진 아이가 안 보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때 마침 검은색 SUV 한 대가 꽤 빠른 속도로 통로를 내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헛숨을 쉬는 사이에 일어났다. 승건보다 채훈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우는 아이와 빠르게 다가오는 차량을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튀어 나갔다.
“미친…….”
승건이 욕설을 내뱉으며 뛰쳐나가는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SUV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아이 어머니의 비명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승건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각도 때문에 SUV에 가려 채훈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SUV는 분명히 아이가 넘어졌던 위치를 훌쩍 넘어 정차했다.
승건은 다급하게 달렸다. 녀석은 늘 그랬다.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선량함과 정의감을 기반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결과가 언제나 좋을 수는 없었다.
지난겨울에 갔던 레스토랑에서도 그랬다. 넘어지려는 할머니를 안고는 계단을 굴렀다. 그나마 계단이 서너 칸이었고 높이가 낮아서 손바닥이 살짝 까지는 것으로 끝났다. 별거 아니라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채훈을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곳은 데이트를 하다가 채훈에게 조기 진통이 왔던 장소였다. 예정일보다 2개월이나 빠른 출산 끝에 채훈은 일주일 넘게 의식을 잃었다. 이대로 계속 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린 채훈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의 감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은 두통을 동반했다. 끔찍한 아픔에도 승건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에 물을 쏟아붓듯 밀려든 기억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채훈이었다.
승건이 뛰어가는 동안에 SUV가 그대로 출발했다. 확 트인 시야에 아이를 껴안은 채훈이 바닥에서 주저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는 게 보였다. 아이의 부모가 그제야 다가와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채훈이 괜찮다고 하자 그들은 아이를 챙겨 얼른 자리를 떴다.
“강채훈.”
“아……. 좀 굴렀어. 아이는 무사해.”
이름을 부르자 채훈이 검댕이 묻은 셔츠를 툭툭 털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옷이 조금 지저분해진 것 말고는 채훈은 멀쩡해 보였다.
승건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으로 채훈을 보았다. 기억이 돌아왔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섹스 때문에 화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화가 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너…….”
“왜 그래? 괜찮다니까.”
“이럴 때는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다. 우선 차 키부터 줘.”
“응?”
“어서.”
“갑자기 차 키는 왜? 다친 데 없어.”
“알아. 병원 가자는 거 아니야. 키부터 줘. 레스토랑은 취소하고.”
“왜 그래? 어?”
승건은 다시 재촉하는 대신에 채훈을 와락 껴안았다. 그다음에 얼떨떨해하고 있는 채훈의 손에서 차 키를 빼냈다.
“승건아?”
승건은 자신을 부르는 채훈을 무시하고 차로 향했다. 채훈의 입학 축하 선물로 준 검은색 벤츠는 금방 알아보았다. 운전석 문을 열자 의자 위에 채훈의 휴대폰이 있었다.
“도대체 왜 이래?”
“이거 받아.”
승건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채훈에게 내밀었다. 휴대폰을 받아든 채훈이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냐니까?”
“이혼 서류는 어디 있어?”
“갑자기 이혼 서류는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인 채훈을 보며 승건은 침착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지난 월요일에 채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 서류를 준다고 했다. 퀭한 얼굴은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채훈은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리고 이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승건은 채훈의 성격도 연애 패턴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한동안 힘들어 하겠지만 언젠가 결국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자신을 두고.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냉정하게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너는, 너는 진짜 이혼하려고 한 거야?”
먼저 이혼을 하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도 매몰찼고 일방적이었다. 화를 내는 게 불합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저 갈 곳 없는 분노와 배신감에 속이 들끓었다.
“너……, 기억이 돌아온 거야?”
채훈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
“정말?”
“돌아왔어. 여기서 데이트하다가 진통이 왔던 것도 기억나. 그러니까 이혼 서류부터― 채훈아?”
승건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채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채훈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펑펑 우는 바람에 승건은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채훈이 이렇게 우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채훈의 형인 강수찬의 장례식에서도 그는 그냥 눈가를 붉혔을 뿐이었다. 섹스할 때가 아니고서야 채훈은 눈물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왜 우는 거야?”
“울고 싶어서, 큽. 울고 싶어서 운다. 왜?”
채훈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목메인 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승건은 뒷걸음질 치는 채훈을 얼른 끌어안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안아줘야 할 것 같았다. 온몸에서 더운 열을 내는 채훈이 울면서도 품을 벗어나려고 했다.
“너, 나쁜 놈이야.”
“응. 그래.”
“나쁜 새끼라고.”
“미안.”
나쁜 새끼라고 욕을 하는 채훈에게 승건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사과뿐이었다. 자신이 기억을 잃으면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은 채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만약 서로의 처지가 바뀌어 채훈이 기억을 잃고 남처럼 굴면서 이혼을 하자고 하면 자신은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한참을 울던 채훈이 겨우 진정되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많이 부어 버렸다.
“진짜, 진짜 기억 돌아온 거 맞지?”
채훈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럼……, 그럼 네가 처음 준 카드를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왜 꼭 그런 것만 물어봐. 부러뜨렸잖아.”
“맞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훈의 눈이 다시 젖어갔다. 그제야 승건은 채훈에게 손수건을 쥐여줄 여유가 생겼다.
“차에 타.”
“저녁은?”
“우선 집에 돌아가자.”
“어……. 응.”
채훈이 순순히 보조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승건은 출발 준비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멍해 있는 채훈의 안전벨트를 대신 채웠다.
“채훈아.”
“응.”
“너 진짜 이혼할 생각이었어? 내가 학교에 안 찾아갔으면?”
눈물을 닦던 채훈이 시선을 주었다. 왜 그걸 물어보냐는 눈빛이었다. 정확히는 기가 막혀서 어이가 없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이혼했을 거야.”
“강채훈.”
채훈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승건은 경고의 의미로 풀네임을 부르고 말았다. 평소에는 조심하려고 노력했지만 지금은 자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채훈이 부은 눈에 힘을 주고는 노려보았다.
“이혼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건 알아?”
“그러니까 더. 나 싫다는 티 팍팍 내는데, 어떻게 하라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야지.”
자신이라면 어떻게든 채훈을 붙잡았을 것이다. 채훈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려서? 그러면 더 싫어할 거 뻔히 아는데? 붙잡으면 돈을 노린 거라고 생각할 거 아니야. 아, 씨. 왜 또…….”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던 채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렸다. 승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도, 명분으로도 자신이 완벽하게 밀렸다. 돈을 제시하며 이혼을 하자고 도장이 찍힌 서류를 내민 것은 자신이었다.
승건은 답답함에 한숨을 삼켰다. 미술관에서 반만 화를 내기로 약속했지만, 이렇게 되면 그 반조차도 제대로 피력할 수 없었다.
“나는 너 없이는 안 돼.”
“각인 때문에 그렇잖아.”
마음을 진정시키던 승건은 순간 울컥해서 채훈을 노려보았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왜 그걸 각인 때문이라고 하는 건데.
저도 모르게 버럭 외칠 뻔했다. 하지만 살짝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가 눈물에 젖어서 축 처진 모습을 보니 화를 내는 게 힘들었다.
“아니야? 각인 때문에 자자고 했잖아.”
이어지는 채훈의 추궁에 승건은 자신이 오해한 것임을 알았다. 한 번 참기를 잘했다고 안도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 단지 그것 때문에 사귀자고 한 건 아니야.”
“그럼?”
“마음에 들었다고 했잖아. 넌 생긴 것부터 내 취향이야.”
기억을 잃고도 채훈에게 끌렸던 것은 각인의 영향이 컸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각인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속수무책으로 끌렸다.
각인을 풀기 위해서라도 멀리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결국 홀린 듯이 빠져드는 것은 2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채훈은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빨갛게 변한 코끝도, 붉어진 눈으로 커다랗게 뜬 눈도, 젖은 뺨도 모두 귀엽고 안타까웠다.
“내가 같은 사람에게만 세 번이나 반한 거 알아?”
“……뭐?”
“기억을 잃고도 너한테만 반했어. 두 번 다.”
승건은 덤덤히 고백을 했다. 어설픈 첫사랑을 기억하지 못하고도 채훈에게 빠졌다. 두 번째로 기억을 잃고 나서도 그랬다. 같은 사람을 세 번이나 다시 사랑하는 것은 운명 같은 일이었다. 뜻밖의 고백이었는지 이번에는 채훈의 뺨이 붉게 변했다.
“이혼 따위는 절대 안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너야말로 또 기억이나 잊어버리지 마. 아, 병원 안 가도 돼? 아까부터 계속 머리 아픈 거 아니었어?”
채훈이 화제를 전환했다. 승건은 할 말이 더 있었지만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성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다친 물리적인 상처는 다 나았어. 병원은 나중에 가도 돼. 우선은 예약부터 취소해. 집에 돌아갈 테니까.”
“응.”
안전벨트를 하고 시동을 건 승건은 채훈이 레스토랑 예약 취소 통화를 하는 것을 조용히 들었다. 열이 오른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아까처럼 성급하게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출발 안 해?”
통화를 끝낸 채훈이 물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뭘?”
“이혼 서류가 집에 있다고 했지?”
“그렇기는 한데. 아까부터 왜 자꾸 이혼 서류에 집착해?”
“내 도장이 찍혀 있으니까. 법적으로 효력이 있어.”
“……?!!”
채훈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혼 서류에는 승건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만약에라도 채훈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혼이 가능했다. 승건은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면 돌려줘.”
“싫은데.”
“뭐?”
막 엑셀을 밟으려던 승건은 멈칫하며 채훈을 보았다. 채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을 거야. 이혼 서류. 기념으로.”
“그러지 마.”
“액자에 넣어서 걸어두면 되겠다.”
“채훈아. 농담하는 거 아니야.”
“액자는 농담이지만, 기념으로 가지고 있겠다는 건 진짜야.”
가벼운 어투였지만 그래서 승건은 낭패를 느꼈다. 이럴 때면 채훈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승건은 당장에 집으로 들이닥쳐 이혼 서류를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이럴 때면 한발 물러난 다음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접근하는 게 나았다.
시선이 얽히자 채훈이 눈빛으로 두고 보자는 신호를 보냈다. 펑펑 울고 있는 것보다 눈에 힘을 주고는 노려보고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아니,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다.
승건은 사과를 하고 이혼 서류를 달라고 애원하는 대신에 몸을 기울여 채훈의 입술을 훔쳤다. 눈물에 젖어 짠맛이 나는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혀를 밀어 넣었다. 키스는 달고 뜨거웠다.
목구멍까지 깊게 핥자 채훈이 옅은 신음을 흘리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예민한 반응에 승건의 머리는 금방 열이 차올랐다. 여기가 주차장이 아니라면, 하다못해 차창에 썬팅이 조금 더 진했더라면 그대로 안아버렸을지도 몰랐다.
승건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떼어냈다.
“이혼 서류.”
“응?”
“내가 찾아도 돼?”
채훈의 뺨에 코를 댄 승건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작은 속삭임과 가벼운 터치에 약하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정확히는 애교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만한 것이었지만 승건은 개의치 않았다. 이혼 서류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서류는 집 안에 있다고 했다. 채훈이 허락만 하면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눈을 크게 뜬 승건이 피식 웃었다. 그건 마음이 풀렸다는 의미였다.
“그래. 찾아봐. 찾기 쉬운 곳에 있어.”
“알았어.”
승건은 채훈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다시 입술을 맞댔다. 달콤한 키스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혼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