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6. 끌림】 (24/26)

  【외전 06. 끌림】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네요.”

“네.”

“큰 사장님은, 아직 학교에 계실 겁니다. 보통 6시가 넘어서야 귀가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운전을 하고 있던 심정민이 말을 걸었지만 승건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고, 낯선 집에서 지낸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집주인이자 자신의 배우자라는 채훈의 요구는 딱 두 가지뿐이었다.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정우에게 인사를 하는 것. 그래서 승건은 일주일 내내 아침만 먹고 나간 다음에 밤이 늦어서야 귀가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해가 지기 전에 볼일이 끝나서 처음으로 일찍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어떻게 할까요?”

“주말이니까 쉬세요. 움직일 일이 있으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혼자 움직이지 마세요.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20여 년 동안 승건의 개인 비서로 일한 심정민은 책임감이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승건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금요일 오후였다. 승건은 일부러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열쇠로 직접 대문을 열었다. 여름의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이번에는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정서희]라는 이름이 떴다.

승건은 병실까지 찾아왔던 육촌을 떠올렸다. 육촌들 중에 가장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그녀와는 딱히 교류가 없었다. 써니가 미국 동부로 유학을 온 후로는 한 번씩 사교 모임 등에서 만났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래도 병문안을 직접 하고 휴대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을 정도라면 가까운 사이였다는 의미였다. 제자리에 선 승건은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받았어. 무슨 일이야?”

―내 번호 차단 안 시켰네. 본론부터 묻는 것은 여전하고.

휴대폰 너머로 써니의 맑은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승건은 살짝 인상을 썼다.

“그래서?”

―줄 게 있어. 오빠가 나한테 주문했던 건데, 오늘 도착했네. 오늘 저녁은 내가 안 되고. 내일 괜찮아? 8시? 어때?

“내가 주문한 게 뭔데.”

―중요한 거.

“말장난하지 말고.”

―진짜 중요한 거야. 오빠가 일부러 부탁까지 한 거지. 아주 특별한 거라, 오빠 기억을 돌아오게 만들지도 몰라.

“네가 알아서 해. 끊는다.”

써니에게 휘둘릴 생각이 없었던 승건은 통화를 끝냈다. 중요한 것이든 특별한 것이든 써니의 반응을 보자면 어울리지 않는 게 나았다.

잠시 숨을 돌리던 승건은 여름 정원 한쪽에서 위용을 뽐내는 작은 건물을 보았다. 스쿼시 코트가 있다는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2년을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잘 꾸며진 정원도, 붉은 벽돌집도, 스쿼시 코트 건물도 모두 낯설었다.

이혼을 하면 이곳을 채훈에게 줄 생각이었다. 과연 그가 스쿼시 코트를 제대로 사용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문득 코트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승건은 건물로 다가갔다. 입구 비밀번호는 심정민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입구 천정의 등이 자동으로 켜졌다. 승건은 입구와 가까운 벽에 붙어 있는 전등 스위치를 찾아 켰다. 그러자 곧 내부 전체가 환해졌다.

단식 경기용 규격에 맞춘 스쿼시 코트가 승건의 눈에 들어왔다. 뒷벽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나무로 된 바닥과 아이보리색의 벽, 그리고 높은 천정이 잘 보였다. 내부 자재는 훌륭했고 관리도 잘 되어 있었다.

승건은 코트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대기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 서랍, 그리고 몇 개의 작은 소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청소를 했는지 소독약 냄새도 희미하게 났다.

“취미 생활 한 번 제대로 했군.”

승건은 기억에 없는 자신을 향해 한마디 했다. 나이가 들고나서부터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왔지만, 그래도 경기 규격의 스쿼시 코트를 지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은 외할머니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와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던 것까지였다.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태화 그룹이 쪼개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한국에 정착할 생각은 없었다. 몇 년 동안만 지내다가 시간을 벌고 나면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3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결혼도 하고 애까지 생겨버렸다.

처음에 심정민에게서 설명을 들었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성격을 알면서도 질 나쁜 농담을 하는 것인가 하고 의심했을 정도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승건은 증거를 찾아다녔다. 주말에는 외조부모님을 만나고 그동안 자신이 한 업무들을 살펴보았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자산 담당자와 변호사를 만났다. 미국에서 자신을 돌봐 준 주치의와도 연락했다.

그러나 알아볼수록 자신이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정착해 살려고 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채훈에게는, 서울 모처의 빌딩을 넘기다 못해 서온 제약의 주식을 5%나 주었다. 서류에 남아 있는 자신의 도장과 사인을 확인했을 때는 기가 막혔다.

자신이 매달려서 결혼을 했다는 게 헛말이 아니었다. 채훈이 당당하게 굴던 이유가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외할머니에게 넌지시 물어봤더니, 네가 매달린 게 맞다고 확언했다.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는 것을 구해줬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강채훈.”

승건은 서류상으로 자신의 배우자인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제대로 불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어색했다.

강채훈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였고, 자신이 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았던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서로 읽었다. 미국에 살면서 그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을 몇몇 떠올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이 채훈을 필요로 했던 이유를 설명한 것은 미국에 있는 주치의였다. 상상 각인의 원인이 채훈이었고, 그와 함께하면 미각과 후각이 돌아왔다고 했다. 부작용을 치료할 목적으로 만났다가 코가 꿰였다는 것이 주치의의 설명이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사랑도 결혼도 불신했다. 스스로의 성격이 모난 것도 알고 있기에 죽을 때까지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증거와 증인이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의 삶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이라지만 너무 극적이어서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감정과 결혼의 연속성을 불신하다 못해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승건은 반사적으로 차가운 얼굴을 한 채훈을 떠올렸다. 그는 무표정할 때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다른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니, 진짜 인상적인 것은 페로몬이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향기의 페로몬은 그 어떤 위협보다도 강렬했다.

상상 각인의 부작용으로 인해 그가 느끼는 오메가의 페로몬 향기는 역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채훈의 것은 달랐다. 생애 처음 제대로 느끼는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그게 상상 각인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기억을 잃기 전에 그를 각인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썬룸에 가득했던 채훈의 페로몬에 승건은 자신이 알파라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눈을 빛내며 노려보는 채훈의 입술을 물어뜯는 상상을 했다.

“이런.”

다시금 그때의 생각을 떠올린 승건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감정은 자신답지 않았다. 이혼을 할 거라면 더더욱 그랬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은 변함없었다. 다만 계속 미묘하게 거슬렸다.

머리를 흔들며 채훈의 그림자를 털어낸 승건이 건물을 빠져나오려는데, 그 때 마침 써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사진 찍는다고 포장 풀었어. 뭔지 알고 싶으면 내일 만나러 와. 8시에 여기로 오면 돼.]

써니가 메시지와 함께 보낸 사진에는 검은색 가죽 상자가 찍혀 있었다. 어떻게 봐도 보석함이었다. 내용물이 궁금했지만 써니가 순순히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보석함이란 말이지.

어차피 궁한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법이었다. 한참 동안 인상을 쓰던 승건은 써니에게 답장을 보냈다.

*

*

승건이 현관에서 막 신발을 벗고 있는데, 우연찮게 정우를 안고 2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김혜진과 마주쳤다.

“오늘은 일찍 귀가하셨네요.”

“아빠!!!”

김혜진은 조용히 인사했다. 그리고 정우는 승건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는 안아 달라고 팔을 뻗었다. 아이는 온몸으로 반가움을 뿜어냈다.

“정우야. 산책 가야지. 아빠는 쉬셔야 해요.”

“아빠. 아빠. 여기. 안아줘.”

정우는 막무가내였다. 김혜진이 달래도 떼를 쓰다가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아빠.”

마치 아빠가 죽기라도 한 듯 서러운 울음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닭똥 같은 눈물이 아이의 뺨에 죽죽 흘러내렸다.

승건은 매일 아침 만나는 정우에게 특별히 정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채훈의 요구대로 인사는 반듯하게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가 될 거라고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을 닮은 정우의 존재 자체가 혼란스러웠다. 또한 괜한 기대를 심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서럽게 우는 아이를 두고 뒤돌아 설 정도로 승건이 냉혹한 성격은 아니었다.

“정우야. 울지 마. 손 씻고 안아줄게.”

언젠가 채훈이 했던 것처럼 승건은 정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승건이 관심을 보이자 정우가 거짓말처럼 우는 걸 멈췄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승건은 정우에게 눈을 떼지 않고 김혜진에게 물었다.

“손부터 씻겠습니다. 밖에 나가시는 겁니까?”

“정우가 낮잠 자고 일어나면 산책하러 가거든요.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올 거예요. 같이 가시게요?”

“예. 같이 가겠습니다. 잠시만요.”

정우의 뜨거운 관심 속에 손을 씻은 승건은 산책에 동행했다. 신발을 신은 정우는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혼자서 걸었다.

이제 한 살이 지난 어린아이의 걸음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승건은 혹시나 넘어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며 뒤를 따랐다.

정우의 산책은 종잡을 수 없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혼자서 달리다가,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바닥을 짚다가, 풀을 잡아 뜯고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승건에게 안기는 것으로 짧지 않은 산책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고도 정우는 승건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품에서 떼어놓기만 하면 서럽게 우는 바람에 승건은 어쩔 수 없이 정우와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손을 씻기고, 간식까지 함께 먹게 되었다.

“아빠. 이거. 이거 먹어.”

아기 의자에 앉은 정우가 간식으로 받은 당근 쿠키 중에 하나를 손으로 집고는 승건에게 내밀었다. 제 입으로 먼저 넣지 않고 내미는 모습에 승건은 복잡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까부터 그랬지만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존재가 신기하고 이상했다.

“먹고 있어. 여기, 이거.”

승건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 굳이 간식을 먹고 싶지 않아서 마실 것만 부탁했더니 냉녹차가 나왔다.

녹차가 있다는 부드러운 거절은 정우에게 통하지 않았다. 승건을 향해 계속 손을 내밀었다.

“이거. 이거 맛있어. 아빠 먹어.”

“정우는 사장님이랑 큰 사장님에게 뭘 주는 걸 좋아해요. 그냥 받아주세요. 안 드셔도 되니까요.”

정우 옆에 앉아 있던 김혜진의 언질에 승건은 쿠키를 받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는 승건이 쿠키를 먹는지 아닌지 관심을 보이는 대신에 제 간식에 집중했다.

승건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정우만큼 어린아이와 가까이에서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쿠키를 내려놓는 대신에 한입에 삼켰다. 달지 않은 쿠키는 부드러워서 꽤 입맛에 맞았다.

맛과 향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이럴 때면 극명하게 깨달았다. 스쿼시 코트 건물의 소독약 냄새와 당근 쿠키의 달달한 맛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했다. 어쩌면 채훈과 사랑에 빠진 것은 단순히 페로몬 때문만이 아니라 미각과 후각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쿠키에 이어 냉녹차를 한 모금 마신 승건은 문득 떠오른 의문점을 김혜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가, 그러니까 강채훈이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큰 사장님이라고 하시던데요.”

“아, 그거……. 제가 원래 채훈 씨라고 불렀었는데, 사장님과 결혼하고 나서는 호칭을 바꿔야 하잖아요. 그런데 큰 사장님이 사모님도 사부님도 싫다고 해서. 그래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요. 강 사장님 말고 큰 사장님이 좋다고 한 건, 사장님이시고요.”

김혜진의 설명에 승건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심정민이 채훈을 큰 사장님이라고 호칭할 때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러다 김혜진이 사장님과 큰 사장님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의아함을 느꼈다.

작은 사장님도 아니고 큰 사장님이라고 정한 게 자신이란다.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사모님이 아니라 이 회장님이라고 부르게 한 것과 꼭 닮아 있었다. 자신이 외할아버지를 따라 하는 팔불출 남편이었다는 증언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승건은 도대체 자신이 채훈의 어디에 반했는지 궁금해졌다. 채훈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첫 만남에서는 무력한 모습으로, 두 번째는 가시를 날카롭게 드러냈던 그는 다음날부터 상냥하고 예의 바르게 굴었다.

미각이 돌아왔으니 조금씩 먹으라고 내민 반찬들은 모두 입맛에 맞았다. 승건이 자주 쓰던 물건들을 꼼꼼히 챙긴 것도 그였다.

사실 승건은 채훈이 좀 더 속물적으로 굴 줄 알았다. 이혼 따위는 못 한다고 버티거나, 혹은 이혼을 하려면 돈을 더 달라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채훈은 2주 동안 싸우지 말고 지내자고 한 것이 부탁의 전부였다. 아침만 먹고 밤늦게 돌아와도 따로 별말을 하지 않았다. 배려를 하는 것인지 무관심한 것인지 애매했다. 그저 집에서 머무는 손님처럼 대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던 승건은 혀를 찼다. 어느 순간에 또다시 채훈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 왔어요.”

갑작스러운 채훈의 목소리에 승건은 흠칫 놀랐다. 타이밍도 좋다 생각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 옆에 붙어 있는 다이닝 룸에서는 현관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승건이 앉아 있는 자리는 각도가 절묘했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채훈은 검은색 셔츠와 짙은 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올해 수능을 쳐서 정시로 한국대 약학과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른두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스타일이 젊었다.

승건의 눈길을 끈 것은 모델처럼 슬림한 몸매가 아니라 채훈의 얼굴이었다. 잘생긴 얼굴 왼쪽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입술 왼쪽도 찢어져 피딱지가 앉았다. 누군가에게 맞은 흔적이었다.

“아빠!!!”

채훈을 발견한 정우가 반가움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에 눈이 마주치자 채훈이 놀라더니 인상을 썼다.

“뭐야?”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승건은 채훈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훈이 뒤늦게 입가를 가렸다.

“얼굴이 왜 이래? 무슨 일이야?”

“그럴 일이 있어.”

“그럴 일이, 뭐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추궁을 하려던 승건은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차분히 물었다. 머리 한쪽에서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채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했다.

“별일 아니야.”

“그러니까, 별일 아니라면 말할 수 있겠네.”

채훈이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눈빛을 했다. 하지만 승건은 꿋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냥, 싸웠어.”

“누구랑?”

“그걸 왜……, 선배랑 좀 부딪혔어. 좀 안 좋게 꼬여서. 그 선배가 성격이 급한 편이라, 먼저 한 대 맞아줬어. 그게 편해서. 이제 약 발라야겠어. 좀 비켜줘.”

선배라는 놈의 이름도, 어떤 상황에서 싸웠는지도 설명이 없었다. 두루뭉술한 설명 중에 승건을 기막히게 한 것은 먼저 맞아줬다는 것이었다.

“먼저 맞아줬다고?”

“그렇게 됐어.”

에둘러 말하는 채훈은 아무래도 입을 다물 모양새였다. 승건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구급함이 어디 있는데?”

“……왜?”

“약 발라야지. 도와줄게.”

이번에도 채훈은 이상한 놈이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사실 승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머리가 아니라 감정이 먼저 반응했다. 하지만 그냥 손 놓고 있으면 화가 나서 죽을 것 같다.

“아니면 병원 가자. 그게 낫겠다. 손도 다쳤네.”

“이걸로 무슨 병원을. 내가 알아서 할게.”

“아니면 심 실장님 부르고.”

“야.”

“구급함 어디에 있는데?”

“거실에 있어. 아니, 거실 말고 서재로 가자. 서재에도 구급함 있어. 아, 그 전에 정우 좀 보고.”

채훈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거실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부엌을 정리하던 입주 가정부와 파트타임 하우스 키퍼, 정우의 보모인 김혜진, 그리고 정우였다. 승건이 기억을 잃은 후에 집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눈치 볼 게 없는 정우만이 아빠를 외치고 있는 것을 김혜진이 달래는 중이었다.

승건은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채훈의 얼굴을 이렇게 만든 놈은 천천히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 * *

금요일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채훈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지난 화요일부터 본격적인 기말고사 기간이라, 공부하고 시험을 치고 다시 공부하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반쯤 정신이 없는 탓에 공부 효율이 엉망이었고 시험 결과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시험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낙제만은 면하자는 마음으로 버텨냈다.

채훈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쌌다. 이제 남은 시험은 다음 주 월요일에 치게 될 영어독해 하나뿐이었다. 6시까지 남을 것 없이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정우랑 같이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준익 선배랑 상일 선배가 싸운다.”

복도에서 누군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막 교실을 나가던 채훈은 발걸음을 멈췄다. 약학과 건물은 6층으로 된 신축 건물이었다. 학과 전공 수업을 듣는 교실은 대부분 2층과 3층의 서쪽에 몰려 있어서 쉬는 시간이면 복도에서 여러 학년이 뒤섞였다.

굳이 정준익과 윤상일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교실 바로 앞에 있는 복도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고, 그 가운데 정준익과 윤상일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윤상일이 정준익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해봐.”

윤상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지난 축제 이후에 학생회 내에서 윤상일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할머니가 아프다고 하고는 주점 일에서 빠졌는데, 알고 보니 그날 클럽에서 놀았다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윤상일과 정준익의 사이도 나빠졌다. 발표 수업의 조별 과제에 참여하지 않는 윤상일의 이름을 정준익이 빼버리면서 한바탕 싸움도 있었다.

채훈은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윤상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말릴 생각이었다. 정준익이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190cm에 육박하는 데다 덩치까지 큰 윤상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혈질인 성격의 윤상일이 주먹이라도 휘두르면 큰 사고가 날 게 뻔했다.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는지 같은 학년의 사람들이 먼저 윤상일을 말렸다. 하지만 윤상일은 그들의 손을 모두 뿌리치며 얼굴을 붉힌 채 씩씩거렸다.

“이 새끼야.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형님이 잘못했잖아요.”

“뭐, 내가 잘못했다고?”

윤상일이 정준익의 멱살까지 잡는 순간에 채훈이 끼어들었다.

“선배. 참으세요. 네?”

손과 팔을 붙들고 윤상일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윤상일이 정준익의 멱살을 놓으며 채훈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너 잘 만났다.”

“네?”

“너희 둘이 짰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채훈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예요? 선배.”

“무슨 소리기는. 둘이서 짰잖아. 씨발. 이 새끼가 주희랑 사귄다고.”

“그게 왜…….”

윤상일이 말하는 신주희는 올해 채훈과 같이 약학과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같이 수업을 듣기 때문에 채훈도 이름과 얼굴은 알고 있지만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윤상일이 그녀에게 거창하게 고백했다가 차인 건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준익이 신주희와 사귄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정준익과 신주희가 사귄다는 소리에 윤상일이 화를 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까지는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자신이 언급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을 갖고 놀아? 응? 네가?”

한 번 더 소리를 지른 윤상일이 손가락질까지 하며 채훈을 위협했다. 여전히 주위 동기들이 말리는데도 윤상일은 막무가내였다.

“화만 내지 말고, 알아듣게 말하세요.”

“씨바. 이 새끼 봐라? 뭘 모르는 척을 해?”

“선배.”

“끝까지 발뺌하네. 이 새끼가.”

윤상일이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채는 것을 채훈은 단호하게 쳐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이런 폭력을 행사하는 건 참아줄 수 없었다. 그런데 윤상일이 적반하장 식으로 화를 냈다.

“이 새끼가 사람을 쳐?”

“무슨―”

이번에는 주먹이 날아왔다. 채훈은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한 번 더 손으로 쳐내자 이번에는 윤상일이 작정하고 덤벼들었다. 무작정 돌격하는 윤상일을 정면에서 상대하지 않으려고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러다가 마침 채훈을 돕기 위해 움직이던 정준익과 동선이 겹쳤다. 이대로 피했다가는 정준익이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윤상일의 주먹이 채훈의 얼굴에 꽂혔다. 후려치는 힘에 튕겨 나가다시피 한 채훈은 계단의 방화문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 새끼. 죽었어.”

윤상일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아수라장이었다.

*

*

다섯 명의 사람이 윤상일을 붙잡고 말려서야 상황이 수습되었다. 폭력 사태를 일으키고도 윤상일은 반성이 없었다. 오히려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결국 빈 강의실에 모여 여러 학생들을 증인으로 윤상일과 정준익, 그리고 채훈의 삼자대면이 있었다. 또 다른 관계자인 신주희는 학과 사무실에서 대기했다.

결론은 윤상일의 오해였다. 신주희에게 차인 윤상일은, 그녀가 채훈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정준익이 신주희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채훈이 개입되었다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혼자서 오해하고 화를 낸 것도 기막힌 일이었다. 그런데 윤상일은 신주희를 스토커마냥 쫓아다니고 있었다. 증거를 내민 것은 정준익이었다.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신주희의 메시지에 대고 계속 뭐하냐는 글을 남겼다. 그것 말고도 밤늦게 전화를 건 기록도 잔뜩 있었다.

거기까지 이야기가 흘러가자 증인 겸 심판으로 같은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 저마다 혀를 찼다. 채훈 역시 멀쩡해 보이는 놈이 미쳤다고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럼에도 윤상일은 신주희와 서로 가까워지고 있었던 중이라고 주장했다. 채훈과 정준익이 한통속으로 신주희를 빼돌렸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두고 보자고 외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거기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들 채훈과 정준익에게 고생했다고 한마디씩 하며 해산했다.

채훈을 제일 걱정해준 것은 당연히 정준익이었다. 강의실을 나가기 전에 정준익이 채훈을 붙잡았다.

“형님. 미안해요. 제가 잘 말했어야 했는데.”

“상일 선배가……. 선배라고 부르기도 싫다. 그 인간이 그렇게 미친놈일 줄은 몰랐지.”

“저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신영이가, 그러니까 제 동기인데. 주희랑 주희 친구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신영이한테 도와달라고 했나 봐요. 그래서 신영이가 저한테 얘기해서 그때 알았어요. 제가 상일 형님한테 주희가 무서워한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니. 어휴.”

“그 정도면 망상병이야. 내가 너희 둘을 소개시켜 줬다고 믿었잖아.”

정준익의 말에 따르면 신주희와는 윤상일의 스토킹 일로 서로 상담하다가 가까워지면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그들 사이에 채훈이 끼어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윤상일은 채훈과 정준익이 짰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도 다 밝혀졌으니까, 괜찮겠죠. 나중에 상일 선배 마주치면……. 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죠.”

“그러면 좋겠지만……. 혹시 아까 모여 있던 애들 중에 파란색 셔츠 입고 있던 남자애가 누군지 알아? 걔가 촬영한 것 같던데. 이름이 기억 안 나.”

“아, 경철이 같은데. 그거 지우라고 할게요.”

“아니. 지우라고 하지 말고 가능하면 영상 받아 놔. 나한테도 보내고. 함부로 퍼트리지 말라고도 말하고. 또, 촬영한 사람 더 있는지 알아봐. 그것도 영상 받아두고.”

“왜요?”

“상일 선배가 자기 삼촌이 경찰 간부로 있다고 말하고 다녔잖아. 얼마나 간부인지는 모르지만,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윤상일은 평소 자기 삼촌 중에 경찰 간부가 있고, 아버지 친구 중에는 국회의원이 있다며 떠벌리고 다니곤 했다. 만약을 위해서는 뭐든 대비하는 게 좋았다. 채훈의 의도를 알아들은 정준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형님, 얼굴이 많이 부었어요. 입도 찢어지고. 의무실부터 갔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가요.”

“의무실까지 갈 건 아니야. 집에 가서 치료하면 돼.”

“형님 부군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뭐라 한마디 하겠지. 괜찮아.”

채훈은 대충 얼버무렸다. 채훈이 승건에게 요구한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아침 식사를 같이하고 정우에게 인사를 잘하라는 것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승건은 요구 사항을 잘 지켰다. 다만 일찍 집을 나가서는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할 때만 승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심정민의 말에 의하면 승건은 낮 동안에 볼일을 본 후에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트레이닝 룸을 다니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승건이 일부러 늦게 귀가하는 것을 채훈도 모르지 않았다. 최소한으로 얼굴을 맞대며 2주를 보내고는 이혼을 하려는 계획이 분명했다.

기억이 없으니 애정도 없었다. 자신의 얼굴에 멍이 들어도 내일 아침 식탁 앞에서 한 번 힐끗 보고는 말 것이다. 씁쓸한 현실을 깨달으려니 속이 다 쓰렸다.

정준익에게 영상 꼭 찾아서 보내라고 한 번 더 당부한 채훈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화를 잔뜩 내는 승건과 마주했다.

*

*

소독약이 듬뿍 묻은 솜이 상처에 닿았다. 따끔한 고통에 채훈은 눈을 꾹 감았다. 턱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찢어진 입가를 소독하는 게 더 아팠다.

승건에게 얼굴을 내맡긴 채훈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맞고 돌아왔다고 버럭 화를 내는 승건의 모습은 기억을 잃기 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2주 후면 당장에 이혼을 할 거라고 벼르던 녀석이 왜 이러나 싶었다. 칠칠맞다고 혀를 차며 돌아서면 또 모르겠는데 약을 발라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결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기는 했다. 감기에 걸렸을 때 승건이 직접 찾아와 간호한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소독을 끝내자 다음은 연고였다. 면봉으로 부드럽게 연고를 펴 바르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다 됐어. 이거 대고 있어.”

눈을 뜬 채훈은 승건이 내민 얼음팩을 받아들었다. 부어오른 왼쪽 뺨에 얼음팩을 대자 이번에는 승건이 오른손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문에 부딪히면서 모서리에 제대로 찍힌 탓에 손가락이랑 손등이 까지고 찢어졌다. 역시나 소독약이 닿자 얼얼하게 아파서 인상을 써야 했다.

“다 해결됐다고?”

조용히 치료만 하던 승건이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손가락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라 고개는 들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대답하라고 압박을 보냈다.

“응. 다 끝났어. 괜찮아.”

“어떻게 끝났는데.”

“잘?”

채훈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승건이 기억을 잃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길게 말할 내용이 아니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승건이 고개를 들고는 노려보았다.

“장난하지 말고.”

“너야말로 왜 이러는데?”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채훈은 꾹 삼켰다. 승건의 반응이 이상하긴 한데 할 말과 안 할 말은 구분해야 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알아야겠어.”

진지하기 짝이 없는 승건의 모습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기억을 잃어도 사람은 안 변했다. 집요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이상한 선배가 하나 있는데. 이상한 오해를 해서.”

“무슨 오해인데?”

“그게 좀 복잡한데…….”

“제대로 설명해.”

설명을 요구하는 승건의 눈빛이 살벌했다. 이런 것도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채훈은 짧게 설명했다.

“선배가 고백했다가 차인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날 좋아한다고 했었나 봐.”

“뭐?”

“나는 모르는 일이야. 학기 초의 일이고. 여자애가 자기 친구들한테만 말한 거래. 여하튼 그랬는데, 여자애가 다른 선배랑, 그러니까 정 선배랑 사귀기 시작했거든. 그러자 차인 선배가 오해했어. 내가 중간에 개입해서 여자애를 빼돌렸다고……. 여하튼 그 선배가 여자애 스토킹도 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서로 가까워지는 중이라고 해서. 미친 새끼라는 거 다 밝혀졌어.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 아니야.”

단호한 승건의 말투에 채훈은 기시감과 그리움을 느꼈다. 괜찮다는 말을 쉽게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승건이 채훈의 손가락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였다. 그 때 서재 책상 위에 올려둔 채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김경민의 이름이 액정에 떴다. 한 손은 얼음팩을 잡고, 또 한 손은 승건에게 붙잡혀 있었던 채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난주에 우연찮게 김경민을 만난 후 채훈은 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박지훈과 김태용과도 단체 메시지 창으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기말고사 기간이라서 만날 시간을 조율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대강의 설명을 위해 수업 중인 김경민에게 시간 되면 연락하라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아마 그 연락인 것 같은데, 하지만 승건 앞에서 전화를 받기가 애매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승건이 김경민과 만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승건이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당당하게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왠지 눈치가 보였다.

계속 진동하는 휴대폰을 무시했더니 승건이 눈짓을 했다.

“전화 안 받아?”

“응. 손이 이래서.”

“누군데?”

기억이 없어도 승건의 눈치가 귀신같았다. 채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김경민이라고, 같은 학교 다니는……, 음. 아는 동생이야.”

“그래서?”

“뭘?”

“뭐든.”

사람 추궁하는 방법까지도 닮아 있어서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무서울 건 하나도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 승건에게 미리 말하고는 합의를 봤으니까.

“2년 전에 소식이 끊겼다가, 최근에 우연찮게 만났어. 같이 어울렸던 애들이랑 한 번 모여서 밥 먹기로 했는데……. 네가 별로 안 좋아했어.”

“왜?”

“내가……, 내가 각인을 안 했으니까. 김경민이 알파거든. 넌 내가 알파 만나는 거를 많이 싫어했어. 뭐, 지금 너도 이렇고 해서 나중에 보자고 미뤄 놨어. 전화는 나중에 내가 하면 돼.”

채훈은 단숨에 설명을 마쳤다. 얼버무리지 않고 사실만 차분하게 전달했다. 그런데 승건의 반응이 이상했다. 잠시 인상을 쓰더니 온찜질팩을 건네주었다.

“만나.”

“응?”

“만나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한 승건은 그대로 서재를 나가버렸다. 얼음팩과 온찜질팩을 양손에 쥔 채훈은 멍한 기분으로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며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왜 화를 내?

승건이 앞에 있었어도 물어보지 못할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 * *

다음 날,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채훈은 얼굴이 부었다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반사적으로 손을 턱에 가져다 대었다가 욱신거리는 아픔에 앓는 소리까지 내고 말았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거울을 봤을 때는 심하게 붓지는 않았었다. 푸르게 멍이 들기는 했지만 곧 옅어질 것 같았다.

채훈은 당장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오랜만에 서주명과 만날 약속이 있었다. 평소대로 고기를 굽고 술을 한잔 마시기로 했다. 써니 역시 와인 바에서 매상을 올려줘야 할 일이 생겼다며 만나자고 성화였다. 선약이 있다고 했더니 친구들을 다 데리고 와도 좋다면서 꼭 오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결국 그녀와도 약속을 잡았다.

타박상은 물론이고 모든 상처에 술은 백해무익했다. 하지만 얼굴에 멍 좀 들었다고 친구랑 술을 못 마실 이유는 없었다. 사실 서주명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승건이 기억을 잃었고 이혼을 원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에구구.”

채훈은 한 번 더 침대 위를 구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커다란 침대의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승건은 출장 때문에 외박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를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의 승건이라면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아니, 미련은 있나.

어제 승건의 반응이 이상했다. 겨우 한 대 얻어맞은 것뿐인데 과민반응을 보였다. 거기다가 김경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질투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기억이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는 복잡했고 기분은 오락가락했다. 채훈은 현실적으로 이혼에 더 무게를 두었다. 밤잠을 설치면서도 이혼 후의 생활을 상상했다.

집은 너무 넓었고 유지비도 많이 들었다. 아파트로 이사할까 고민도 했다. 그러다 며칠 전에 만난 이수진에게 생활비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승건이 기억을 되찾으면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집을 지키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승건의 기억이 돌아올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반면에 채훈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이 순간을 버티며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인상을 쓰고 뒤돌아 나간 승건은 다시 외출을 하고는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최악의 가정을 했다.

“모르겠다.”

인생이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채훈은 얼른 세수를 했다. 얼굴은 확실히 어제보다 부어 있었고 파란 멍도 심해졌다.

약은 나중에 바르기로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정우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아침을 먹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공교롭게도 딱 계단 끝에서 승건과 마주쳤다.

“어……. 잘 잤어?”

인사를 하자 승건의 시선이 왼쪽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잠시 불쾌한 기운을 내보이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이닝 룸으로 걸어가 버렸다.

기억을 잃은 후의 승건은 먼저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예의 바르게 받아주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대놓고 무시해버렸다.

기대는 무슨.

채훈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진짜 파국밖에 없었다.

*

*

서주명과 늘 가던 고깃집이 찜닭 가게로 바뀌었다. 덕분에 석 달 만에 만나는 서주명과의 저녁 메뉴는 매운 찜닭이 되고 말았다. 소주잔이 오가고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면서 채훈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서주명은 채훈의 친구들 중에 승건과의 계약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엉망진창이었던 결혼 과정도, 그리고 가족들과의 불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승건이 기억을 잃었다고 제일 처음 알릴 수 있는 상대도 서주명뿐이었다.

다음 주가 지나면 이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한숨 섞인 채훈의 하소연에 서주명이 한마디 했다.

“너는 왜 매번 영화를 찍냐?”

“나도 몰라.”

“이혼할 거야? 진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해야겠지.”

“요즘 이혼 많이 하니까, 위자료나 잔뜩 받아. 아, 정우는? 그 집안은 손이 귀하지 않아? 누가 키워? 친권은?”

“내가 키울 거야. 걔는 정우 기억도 못 했어.”

서주명이 너무 시원하게 이혼을 하라고 하는 바람에 무거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혼은 해야 했다. 그래도 혹시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승건이가 이상해.”

“뭐가?”

“기억이 없는데, 마치 기억이 있는 것처럼 굴어.”

“어떻게?”

“그게……. 음, 어제 학교에서 일이 좀 있었거든.”

채훈은 어제 있었던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윤상일과 정준익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복잡했지만 설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미친놈에게 한 대 맞은 거야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승건이 이상했다. 다쳐 왔다고 버럭 화를 내고, 치료를 한다고 나서더니, 김경민을 만나라고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러다가 만나라고 하고는 그냥 나가버리더라고.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기억이라도 있으면 이해를 하겠는데. 설마, 기억이 돌아오려고 그러는 건가?”

소주를 몇 잔 마시면서 설명을 이어가던 채훈은 자신의 가설을 말했다. 방법은 이혼밖에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자신의 희망적인 착각이 아니라, 좋은 징조라고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서주명은 동의해주지 않았다.

“이제야 깨달은 건데. 너, 진짜 눈치 없다.”

“왜? 나는 평균이야.”

“평균인데, 한쪽이 죽었어. 좀 많이.”

“어디가?”

“그러고 보니, 너 지금까지 계속 고백받아서 사귀었지? 네가 고백한 적은 없고?”

“어. 그런데 그게 왜?”

서주명의 말대로 지금까지 먼저 고백받은 다음에 사귄 게 맞았다. 그러나 그게 지금 이 일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남의 연애에 끼어드는 거 아닌 법인데.”

“연애는 무슨 연애.”

“결혼을 한 기억이 없으면 연애지.”

“야.”

“내가 보기에는 승건이가 질투하는 것 같거든?”

“응?”

뜻밖의 단어에 채훈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좋아하나 봐.”

소주잔을 쥔 서주명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채훈은 잠시 생각해야 했다. 질투란다. 기억이 돌아오려는 징조인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 기억 상실인데?”

“기억이 없어도 좋아할 수 있잖아. 한눈에 반했다든가. 알파나 오메가는 그런 거 많다며? 게다가 승건이는 각인까지 했고. 어? 기억을 잃었으니까 각인이 풀리나?”

“아……. 아직 풀리지는 않았을걸? 천천히 풀린다고 하더라.”

“그러면 더 가능성 있지. 생각해 봐. 너랑 승건이랑 어떻게 결혼했는지. 걔가 너 잡으러 하와이까지 쫓아가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그때도 제대로 사귄 거 아니었다며.”

“그래도 그때는 반년 가까이 만나기라도 했지만, 지금은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걸.”

“사람 반하는 거 한순간이야.”

서주명이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계속 그럴 리 없다고 반대하던 채훈도 그런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질투라고 하면 승건의 행동이 이해가 되긴 했다. 하지만 질투고 뭐고 하기에는 만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한눈에 반했다는 건 승건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뭐, 아닐 수도 있고. 너무 믿지 마.”

“왜 말을 바꿔?”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정정하는 거야.”

갑자기 서주명이 말을 바꾸는 바람에 채훈은 허탈해졌다. 어차피 최악을 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타격은 받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술과 고기가 떨어졌다. 2차를 어디로 갈까 하고 한마디씩 하는데 써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와인 마시러 오라는 재촉이었다. 친구랑 만나고 있어서 안 되겠다고 답장을 보냈더니 친구랑 같이 오라고 했다. 자신이 쏜다면서 비싼 거 시키라고도 덧붙였다.

마침 2차를 가려던 참이었고 거기다가 서주명은 와인을 좋아했다. 혹시나 싶어서 서주명에게 와인을 마시러 가겠냐고 물어보니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 좋지. 그런데 갑자기 와인은 왜? 너는 소주파잖아.”

“아는 사람이 좋은 곳을 소개해 준대. 믿어도 돼. 그분 할아버지가 애주가시거든. 주류 수입회사도 가지고 계셔.”

“오, 그거 믿음직스러운데?”

서주명의 격한 환영 속에 2차 장소가 결정되었다.

*

*

택시를 타고 써니가 알려준 주소로 도착하자 새카만 2층 건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일반 주택을 개조한 듯했는데, 외관이 멋졌다.

써니의 친구가 와인 바를 열었다고 했다. 매상을 올려줘야 한다고 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직접 보니 꽤나 값비싼 곳일 것 같았다.

“여기 비쌀 것 같은데?”

채훈의 생각을 서주명이 대신 말했다.

“괜찮아. 나 위자료 많이 받을 거야.”

“그거 위험한 농담인데.”

서주명과 실없는 농담을 한 채훈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내부도 잘 꾸며져 있었다. 주황색 간접 조명으로 적당히 밝았고 분위기도 있었다. 종업원에게 써니의 이름을 대자 2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여기예요.”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써니가 채훈을 불렀다. 하지만 채훈은 써니보다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승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제법 어둑어둑한 실내에서도 승건의 얼굴은 빛났다.

쟤가 왜 여기 있어?

승건 역시 당황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늘 낮에 입고 나간 차림 그대로였다.

“승건이잖아.”

“응.”

“쟤가 왜 여기 있어? 만나기로 한 거야?”

“아니.”

옆에 서 있던 서주명이 조금 늦게 승건을 알아보았다. 승건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왜 여기에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써니가 이 자리를 마련한 게 분명했다.

놀리려는 것인지, 도와주려는 것인지.

써니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채훈은 뒤돌아서는 대신에 써니와 승건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써니가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왔어요? 여기 좋죠?”

“써니 씨.”

“그렇게 부르면 무서운데.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안녕하세요. 써니라고 불러주세요. 채훈 오빠랑은채훈 씨랑은 사돈지간이고요. 나이는 어려요.”

“서주명입니다. 채훈이 친구입니다.”

써니와 서주명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사이에 채훈은 승건을 계속 확인했다. 그는 찌푸려진 미간을 펴지 않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서주명과 써니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승건아. 얘는 서주명이야. 우리 고등학교 동기. 기억은 안 나겠지만, 얼마 전까지 너도 가끔 만나고 그랬어.”

“……이름만 알고 있어.”

승건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찌푸려진 미간이 내내 펴지지 않아서 채훈이 의아해하는 사이에 써니가 친밀하게 팔짱을 껴왔다.

“따라와요. 내가 사장님 소개시켜 줄게요.”

전에 없는 행동에 채훈은 써니가 왜 이러나 싶었다. 한 번씩 과감하게 말을 하고 행동력도 재빨랐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접촉한 적은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떨쳐내려고 밀어내는데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까 승건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리를 짚고 서 있고, 바닥은 깨진 유리잔과 와인으로 엉망이었다.

승건에게서는 제어되지 않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한순간 어지러운 게 아니라 몸이 안 좋다는 의미였다.

“승건아?”

채훈은 써니를 뒤로 하고 한달음에 다가가 승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승건이 그 손을 단호하게 내쳤다. 어느새 그의 페로몬도 갈무리되었다.

“손대지 마.”

“어디 안 좋아?”

거절의 말은 날카로웠지만 걱정이 앞선 채훈은 개의치 않았다. 잠깐 닿은 것뿐인데도 승건의 몸이 뜨거운 것은 똑똑히 느껴졌다.

일주일 전에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녀석이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승건은 아무런 말 없이 걸어 나가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2층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승건을 보며 채훈은 멍해졌다.

욱하는 기분과 별개로 승건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채훈은 써니와 서주명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승건을 뒤따랐다.

승건은 멀리 가지 않고 가게 앞에서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막 통화를 끝낸 그에게 채훈이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아?”

“오지 마.”

“승건아.”

“오지 말라고.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차갑고도 사나운 거절에 채훈은 멈칫했다. 예전에 하와이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그때는 상황이 반대였다.

만약 승건이 그때의 자신과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맞았다.

“아파? 어디가 안 좋아? 병원에 갈까?”

“괜찮아.”

“최승건. 고집부리지 마. 얼굴이 창백해.”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누군가 그랬다. 혀로 만들어내는 언어는 칼과 독이 된다고 말이다. 그의 말이 아까부터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에 푹푹 꽂혔다.

그래도 채훈은 물러나지 않았다. 승건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차 불렀지? 타는 것까지만 지켜볼게.”

“너는…….”

차갑게 으르렁거리며 승건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채훈을 노려보았다. 그 때 마침 천천히 달려온 차가 승건 옆에 멈춰서더니 보조석에서 심정민이 내렸다.

“도련님.”

심정민의 부름에 승건은 더 이상 가타부타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그와 달리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한 심정민이 뒤따라 타자 차가 출발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채훈은 붉은 후미등이 우회전을 해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뜨거워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진짜 남이구나.

날카로운 깨달음에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 * *

맛과 향을 느끼지 못했을 때에는 물처럼 마셨던 와인이 입에 맞지 않았다. 과일과 꽃, 그리고 알코올 향기가 독했다. 어제부터 계속 이어지던 두통이 와인 때문에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레드 와인을 반 모금만 마시고는 유리잔을 내려놓은 승건은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정서희. 지난 몇 년 사이에 가까워졌다고 하지만 기억이 없으니 거리감은 여전했다. 그녀가 줄 게 있다며 만나고자 했을 때 어떤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단둘이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보석함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한 자신이 먼저 숙일 수밖에 없었다.

써니가 권한 와인은 별로였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승건은 본론부터 꺼냈다.

“준다는 게 뭐야?”

“성격은 여전히 급하네.”

“세 번째야. 정서희.”

승건은 경고의 의미로 써니의 본명을 불렀다. 써니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이곳에 왔을 때,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다. 써니는 그때마다 즉답을 피했는데, 그녀의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본명을 부르는 걸 보면 기분이 별로인가 보네. 오빠가 지난겨울에 부탁한 거야. 오더를 하려면 주문실적이 있어야 했거든. 이거. 가까스로 시간 맞췄어.”

써니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어제 보낸 사진과 같은 검은색 보석함이었다. 크기는 꽤나 컸다.

“이게 뭐야?”

“직접 확인해봐.”

승건은 의아한 기분으로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화려한 팔찌가 붉은 벨벳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금으로 된 체인과 색색의 보석으로 엮인 팔찌는 손등을 덮는 특이한 디자인이었다.

자신이 여성용 장신구를 주문할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던 승건은 인상을 썼다. 외할머니나 다른 어른들에게 드릴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디자인이 너무 파격적이었다. 그리고 배우자인 채훈은 남자였다.

설마 정부가 있어?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각인을 했다며?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는 각인까지 했다. 간도 쓸개도 빼줄 것처럼 굴었던 게 이런 이유였다면 자신은 정말 쓰레기였다. 역한 기분에 승건의 구겨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슬레이브 체인 링이라고 하는데, 오더대로 잘 나왔어.”

“이거 누구 거야?”

“당연히 채훈 씨 선물이지.”

써니가 자연스럽게 채훈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이 승건은 괜히 신경에 거슬렸다. 자신을 병문안 왔던 그 날도 써니는 채훈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과 써니는 육촌 사이라고 해도, 그녀가 채훈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려면 둘이 가까운 사이여야 했다. 승건은 두 사람의 관계를 고민하는 대신에 팔찌에 집중했다.

“이건 여성용이잖아.”

“응. 그래도 오빠가 선물하는 거야.”

“어떻게?”

“오빠 취향이 그래.”

“취향?”

“손목 페티시라고 할까나?”

“……?!!”

태연한 써니의 설명에 승건은 한순간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의심해야 했다.

손목 페티시?

정부가 존재한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손목 페티시라는 게 더 낫긴 했다. 그래도 어이없는 눈길을 보내자 써니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오빠가 채훈 씨에게 선물한 손목시계가 몇 개인 줄 알아? 작년에도 채훈 씨 생일에 팔찌를 선물했다고. 올해는 채훈 씨가 팔찌를 안 받는다고 했는데, 이건 생일 선물이 아니니까.”

승건은 써니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여성용 장신구를 왜 채훈에게 선물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몇 번 만난 게 전부였지만 채훈의 취향은 평범했다. 이런 걸 선물 받고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걸 착용해?”

“아마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확실한 거야?”

“팔찌만 채우고는 섹스했을걸?”

“큽.”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승건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조금 전에 마셨던 와인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난 3년 동안에 자신이 바뀌었다는 증거와 증언은 모두 다 믿기지 않았지만, 이번 것은 그중에 최고였다. 자신은 상상 각인의 부작용으로 오메가의 페로몬을 역하게 느꼈다. 러트도 1년에 한 번뿐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알파와 달리 섹스에 대한 집착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값비싼 취향을 즐기며 섹스를 한단다.

망연히 놀라는 것과 별개로 승건은 팔찌를 손목에 찬 채훈이 떠오르는 바람에 혀를 깨물 뻔했다. 반사적으로 채훈의 페로몬 향기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지금도 부드러운 햇살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 것 같았다. 살갗을 간질이는 느낌은 곧 짙은 갈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두통이 다시 심해졌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승건은 써니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하얀 매니큐어가 칠해진 써니의 손가락이 팔찌를 가리켰다.

“채훈 씨한테 줄 거야?”

“버려.”

“에이, 그러지 마. 이렇게 예쁜걸. 아니면 내가 채훈 씨한테 건네줄까?”

“네가?”

“응. 이거 받으면 왠지 채훈 씨가 울 것 같아서. 채훈 씨가 우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왜 노려봐? 걱정하지 마. 내가 상도덕은 없어도 순서는 알아. 오빠랑 채훈 씨랑 이혼하면 그때 줄 테니까.”

발랄하게 웃으면서 속을 긁어대는 써니의 의도를 승건은 모르지 않았다. 알파라는 족속은 본능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며 서열을 따졌다. 자신이 써니와 험악하게나마 퍽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또한 써니는 자극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는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채훈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자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써니가 그 꼴을 보게 두고 볼 수 없다는 분노와 채훈의 눈물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감정에 승건은 혀를 찼다. 채훈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 줄 거지?”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어……. 진짜 화났나 보네. 알았어. 난 손 뗄게.”

알파 간의 위협은 직접적이었다. 승건은 우성 알파였고 페로몬으로 우위를 확인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손을 들어 항복을 표시한 써니가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모습에 승건은 장난이라고 확신했다. 더 이상 놀아줄 이유가 없었던 승건은 상자를 자신 앞으로 끌어당겼다.

“대금은?”

“심 실장님이랑 이야기 다 끝냈어. 그거 어떻게 할 거야? 버리는 거 아니지?”

“간다.”

“왜? 벌써? 아, 채훈 씨다.”

“……?”

채훈의 이름에 승건은 써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2층 도로변 창가에 앉아 있었던 탓에 밖이 한눈에 보였다. 가로등과 간판 불빛으로 막 택시에서 내린 채훈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채훈의 옆에는 낯선 남자가 가까이 서 있었다.

“혼자가 아니네. 오빠. 채훈 씨 안 보고 갈 거야?”

승건은 도발하는 써니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에 채훈의 옆에 선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김경민이라는 녀석과 안 만난다고 하더니 결국은 같이 있었다. 그것도 단둘이. 남자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라면서 채훈보다 더 늙어 보였다.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승건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을 확인한 채훈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훈이 2층 계단 위로 나타났다.

“여기예요.”

써니가 손을 흔들며 부르자 채훈이 단번에 이쪽을 보았다. 밝은색 티셔츠와 여름 재킷을 걸친 그가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고 놀라는 채훈을 보며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채훈 역시 이 만남을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예상대로 써니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조작한 모양이었다.

“무슨 짓이야?”

“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써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승건은 그녀의 장난에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은 것은 채훈의 옆에 서 있는 낯선 남자 때문이었다.

멍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을 하고도 저 인간과 술을 마시러 왔다면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

*

차가 출발하는 것을 느끼며 승건은 채훈이 서 있는 쪽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제어되지 않은 감정이 들끓었다.

서주명과 함께 나타난 채훈을 봤을 때부터 그랬다. 낯선 남자가 고교 동창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하지만 써니가 그의 팔짱을 꼈을 때는 고의로 자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어지라고 소리칠 뻔했다.

그때부터 심해진 두통에 이성이 사라지려고 했다. 조금 전에도 심정민이 때맞춰 부르지 않았다면 채훈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몰랐다.

승건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기억이 돌아올 때면 참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미열과 가슴 압박, 그리고 가는 손 떨림은 신체 이상의 신호였다.

성적인 충동은 러트의 그것과 비슷했다. 채훈의 입술을 물어뜯고, 그의 페로몬 향기를 깊게 들이쉬고 싶다는 갈망이 머리 한가득 자리 잡았다.

빌어먹을.

승건은 속으로 욕을 했다. 자신의 몸과 욕망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것이 끔찍하게 불쾌했다. 원하는 것은 손에 넣었다. 하지만 얼마 후면 이혼을 할 상대에게 섹스를 하자고 할 정도로 멍청한 놈이고 싶지는 않았다.

“진통제가 필요하십니까?”

보조석에 앉아 있던 심정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승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증상을 나열했다.

“두통, 미열, 가슴 압박, 손 떨림, 목마름 증상이 있습니다. 뇌진탕은 가벼운 것이라고 했었죠?”

“예. 약간 부은 것 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러트 주기가 두 달이라고 하셨고…….”

“기억 때문에 주기는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각인 증상 같습니다.”

“각인이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승건은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채훈을 각인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페로몬 접촉을 한동안 못 하셨으니까요.”

“각인이 천천히 풀린다고 했죠.”

“예. 몸은 기억하고 있으니,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승건은 진심으로 혀를 찼다. 상상 각인의 부작용으로 미각과 후각을 잃었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은 악취처럼 느꼈다.

그래서 진짜 각인이 이런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은 호텔에서 지내시고, 내일 큰 사장님께 부탁드려보겠습니다.”

“2주 동안 집에서 지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각인한 알파가 오메가를 찾아 몽유병 환자처럼 떠도는 괴담을 이야기해 주신 분이 바로 도련님이십니다. 위험한 상황은 미리 차단하는 게 맞습니다.”

심정민의 설명에 승건은 동의했다. 조금 전에는 필사적으로 자제했지만, 같은 지붕 아래 채훈이 있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일주일 전에 채훈에게 했던 경고가 무색해졌다. 그때 채훈이 화를 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각인을 한 것은 자신이었다. 단 일주일 만에 허덕이는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워 보였을 것이다.

“그럼 그는요? 뭘 부탁하려는 겁니까?”

“간접적으로 페로몬 접촉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설명드렸지요.”

“아.”

승건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과 채훈이 제각각 각인과 부정 각인을 하면서 고생을 했었다고 전해들은 것이 며칠 전이었다. 채훈이 빈 객실에 페로몬을 풀고 사라진 후에, 자신이 간접적으로 페로몬에 접촉하는 방식을 썼다고 했다.

설명을 들었을 때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이해하며 넘어갔었는데, 직접 경험하게 되니 느낌이 달랐다. 각인한 형질자들이 미쳐 날뛰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견디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이대로 호텔에서 지낼 겁니다.”

“도련님?”

“할머니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각인이 풀릴 텐데, 그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페로몬 접촉이 있으면 각인이 더 강화될 테니, 멀리하는 게 낫습니다.”

2주라는 기간도 변수가 생기기 전에 한 약속이었다. 이대로 각인 때문에 페로몬에 휘둘리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 승건은 눈을 감았다. 호텔을 예약하는 심정민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생각을 멈추자 미열과 두근거림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어제 조사하라고 지시하신 사항을 알아봤습니다.”

“어제……. 누군지 알아냈습니까?”

승건은 어제 채훈의 얼굴을 후려친 놈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심정민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때도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 선배라는 새끼가 누군지 꼭 알아야 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윤상일이라고, 이번에 편입한 학생입니다. 본과 1학년이고 서른세 살. 예과 1학년 여학생을 짝사랑하다가 스토킹까지 한 모양인데, 그것 때문에 고소 접수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예과 1학년 여학생이 예과 2학년 남학생이랑 사귀기 시작하자 그걸 따진다고 금요일에 소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 사장님은 중간에 말리다가 다쳤다고 하고요. 좀 더 복잡한 내용이 있기는 한데, 윤상일이 오해한 거였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채훈이 설명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간에 말리다가 다쳤다고 하는데, 일부러 맞아줬다는 변명은 왜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윤상일에게 폭행과 상해 전과가 몇 개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 것은 기록이 삭제되어 있어서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대낮에 학교 건물에서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두를 정도면 보통 성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위 평판도 썩 좋지 못하고요. 윤상일의 부친이 대전에서 버스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는데, 지역 유지라고 합니다.”

뻔한 이야기에 승건은 웃지도 않았다. 아들 때문에 속 썩는 부모 이야기란 흔하고 흔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채훈을 다시 만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위협은 빨리 처리하는 게 현명했다. 그것이 단순한 선후배 간의 다툼이라고 해도 일이 커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얼굴에 멍이 들어도 괜찮다고 하는 채훈이 직접 손을 쓸 것 같지 않으니 자신이 해야 했다.

반사적으로 채훈을 떠올리던 승건은 인상을 썼다. 머릿속에서 채훈을 밀어내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았다.

* * *

하늘은 지독하게 파랬다. 그리고 화창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야자수 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을 채훈이 뛰어가고 있었다. 시간만 나면 런닝 머신 위에서 달리던 녀석의 발은 빨랐다. 사력을 다해 뒤쫓고 있어도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채훈의 옆에는 웬 커다란 놈이 나란히 질주 중이었다. 김경민.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솟구쳤다.

좋아한다고 하면서 헤어지고 한 것도, 모든 것을 두고 하와이로 도망간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한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답을 알 수 없어서 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 하나의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붙잡아야 했다.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에 족쇄를 채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가둬버릴 것이다.

승건은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헷갈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하와이가 아니라 한국이었다. 호텔 객실의 커다란 창 너머는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남아있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채훈이 하와이로 도망쳤다. 그리고 자신은 그를 절박하게 쫓아 달렸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일이 몇 번 있었다. 대부분 채훈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양호실에서 잠들어 있는 자신의 뺨에 채훈이 입맞춤을 하려다가 그만둔 것이나, 혹은 채훈이 축구공을 하늘 저 멀리 날려버린 다음에 시무룩해하는 모습 같은 거였다.

특별하고도 평범한 기억의 편린에도 그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앞뒤 맥락 없는 짧은 기억은 그저 정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억의 공백이 초조하고 목이 말랐다. 마치 채훈을 기억해 내라며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승건은 물을 찾아 마셨다. 그러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억제제를 먹은 덕분에 주말 내내 이상 증상은 없었다. 그러나 꿈 한 번에 다시 열이 올랐다. 동시에 해소되지 않는 목마름과 함께 채훈의 부드러운 페로몬 향기가 주위에서 떠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갈망은 깊어진다. 마치 하와이에서 채훈을 쫓던 그때처럼, 그를 잡아다 가둬두고 싶었다. 부드러운 육신을 끌어안고 페로몬을 들이마신다면 절박함이 가실 것이다.

“내가 미쳤군.”

승건은 열이 오른 목을 손으로 누르며 중얼거렸다. 마치 섹스에 미친 애송이가 된 것 같았다. 진짜 어린 애송이였을 때도 이러지 않았다. 첫 러트가 왔을 때조차 이런 답 없는 욕구는 느껴보지 못했다.

승건은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해 거실의 창을 열었다. 6월의 이른 새벽바람은 아직 서늘했다. 땀이 식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문제가 생겼다. 버티는 것도 해결 방법이긴 했지만 그건 미련한 짓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손에 넣으면 된다고, 승건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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